[박성호] Nunc Dimittis- 서툴지만 길게 예배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Nunc Dimittis- 서툴지만 길게 예배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누가복음 2:29-30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 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오 스 기니스의 ‘소명’이란 책을 보면 재즈 역사의 한 획을 그었던 색소폰 연주자 존 콜트레인(John Coltrane)에 관해 언급하는 부분이 있다. “유명한 색소폰 연주자였던 존 콜트레인도 이와 매우 비슷한 말을 했다. 1950년대 초 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과다한 약물 복용으로 거의 죽을 번 했다가 가까스로 건강을 회복한 후 마약과 술을 끊고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 그의 최고의 재즈 연주 중 몇 가지는 그 이후에 이루어 졌는데, 그 중 하나가 ‘지극히 탁월한 사랑'(A Love Supreme)으로서 32분간 정열을 쏟아 하나님의 축복에 감사하고 자신의 영혼을 그 분께 바친 연주였다. 한번은 콜트레인이 매우 뛰어난 솜씨로 ‘지극히 탁월한 사랑’을 연주한 다음 무대에서 내려와 색소폰을 내려놓고는 ‘눈크 디미티스'(Nunc Dimittis)란 말 한마디만 했다. 콜트레인은 그 곡을 그 때보다 더 완벽하게 연주할 수는 없으리라고 느꼈다. 그의 전 생애가 그 열정적인 32분간의 재즈 기도를 위해 살았다 하더라도 그만한 가치가 있었을 것이다. 이제 그는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다.”


Nunc Dimittis(Release me). 참으로 멋진 말이라 생각했다. 길지 않은 인생. 짧고 굵게, 그리고 구차하지 않게 주님 앞에 멋지게 한번 사용되고 나서는 장엄하게 마감하는 인생. 그런 인생이 되었으면 하고 바라던 젊은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비겁하게 하루하루 연장하는 시한부 환자의 마음으로 살아가기 보다는, 예정일을 앞두고 주소록을 정리하는 사람의 심정으로 나의 인생을 떳떳하게 드리고 싶었다. 이만하면 후회스럽지 않게 남들에게 내 인생을 보여줄 수 있는 그런 발자국 하나 남기고 싶었다. 곡을 쓰고 찬양을 하는 나로서는 그게 아마도 멋진 앨범 하나 정도가 아니었을까. 재니스 조플린이나 커트 코바인처럼 몸 안에 가진 정열을 어찌하지 못해 결국 자살하고 말았던 젊은이들이나 아니면 윤동주나 전태일처럼 불꽃같은 인생으로 사라진 젊은이들을 생각해 본다. 나는 내 인생의 불꽃이 될만한 불꽃 하나 가지고 있는지. 활활 한번 타오르고 나서도 후회스럽지 않은 인생이 되고 있는지 고개를 떨구곤 한다.


서른이 넘도록 무엇 하나 남기고 가는 것 없는 것 같아 아쉬워지곤 한다. 서태지가 나와 같은 동년배인 72년생이라는 사실이 그렇고, 칼빈은 스물여섯에 ‘기독교 강요’를 출판했다는 사실이 그렇고, 역사를 채워간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20대 초반에 인생을 헌신하여 19세기 대 선교의 시대를 열어갔다는 사실이 그랬다. CCM 쪽에서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데뷔하는 음악인들이 다 형들 누나들인 것만 같았는데 요즘에는 나보다 나이 든 사람이 오히려 눈에 띄는 것 같다. 왠만한 단체나 교회의 워십 리더들이면 요즘엔 어지간히 ‘라이브 워십 앨범’을 출반해서 자신의 프로필에 들어가는 모습이 괜스레 밉사리 보이는 것은 분명히 열등감일 게야. 오 주여, 콜트레인이 남겼던 그 한번의 연주처럼 내게도 “눈크 디미티스”하고 외치는 날은 과연 오겠습니까. 그런데 요즘엔 오히려 바로 그 말씀이 내게 위로가 되곤 한다.



눅 2:25-32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 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 이다 하니.”


시 므온. 한평생, 아마도 60-70년 동안 변변한 대접이나 화려한 주목 없이 평생을 그저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경건하게 살았을 한 늙은이. 떠오르는 스타 선지자들을 지켜보며 살았을 그의 삶이 때론 무료하고 지극히 평범함 속에 갇혀 버린 인생이었으리라. 그런데 바로 그런 늙은이에게 한 특권이 주어졌다. 바로 인류를 구원할 그리스도를 처음으로 대면할 수 있는 특권이다. 눈크 디미티스! Paid-off! 기나긴 빚쟁이 생활을 마치고 마지막 수표를 보내는 사람의 후련한 마음이 이에 비할 수 있을까. 50년 분단의 아픔 속에서 드디어는 반세기만에 기다렸던 아들을 상봉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이에 비할 수 있을까.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요 즘 가수의 인생이 6개월이라는 농담이 있다. 그래서 한 두 곡이라도 뜨는 날에는 열심히 방송도 출연하고 광고도 찍고 불러주는 곳에는 무조건 가서 인기가 식기 전에 본전이라도 건지자는 생각들이 팽배 하다고 한다. 태양이 지기 전에, 장이 파하기 전에 혼신의 힘을 다해서 남은 하나의 물건이라도 더 팔려 하는 보따리 장사처럼. 내 마음속에 혹시라도 이러한 보따리 장사의 마인드가 자리 잡지 않았었는지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된다. 이제 와서 조금씩 깨닫게 된다. 나의 인생은 One-Night-Stand가 아니라 Long-Run 해야 한다는 사실을. 뛰어난 음악성으로 주목 받는 찬양 사역자가 아닐지라도, 서툴지만 잠잠히 그저 매주 만나는 한 회 중들을 고요히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모시고 들어가는 예배 인도자가 되고 싶다. 늙은이 시므온에게 아마 반드시 있었음 직한 흰머리와 수염을 간직하며 롱런 하는 그런 사람이 되고프다.

[안상현] 캠퍼스속의 순결한 그리스도인

이달의 초점


[cKOSTA] 캠퍼스속의 순결한 그리스도인


작년(2002년) 미국 타임지의 마지막 호 커버 스토리는 올해의 인물 세 사람을 장식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세 사람의 이름은 신시아 쿠퍼(월드컴), 콜린 로우리(FBI), 그리고 쉐론 왓킨스(엔론)이었습니다. Whistle blower(내부 고발자)라고 부제가 붙은 이 세 사람은 잘 알다시피 자신들이 속해있던 회사와 조직의 비밀을 세상에 알림으로 결국은 회사와 조직을 파멸(?)로 몰고 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먼저 자신들이 속한 조직에 비교한다면 작은 존재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두번째로는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이었고(조직으로부터..), 결과적으로는 자신이 속한 조직내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배신자들이었습니다. 세번째로는 행동을 통해서 자기들의 신념을 표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전적인 자기희생을 드린 사람들이었습니다. 뉴욕 타임즈에서는 그들의 희생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계가 위협받을 수도 있다는 위협앞에서도 자신들의 신념을 행동으로 옮겼다.”이 세 사람은 소위 이야기하는 미국의 절대적 가치, 즉 자유, 용기, 그리고 정직을 위하여 자신들의 개인적인 삶을 희생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캠퍼스속의 순결한 그리스도인!” 바로 2003년 처음 갖는 미주 cKOSTA를 바라보면서 갖는 소망의 작은 단편을 바로 그들 가운데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자신들이 믿는 가치를 위해서 희생을 무릅썼다면 캠퍼스속의 기독 대학생들을 바라보면서 갖는 소망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 가운데 이루어 내기 위하여 자신을 드리는 순결한 젊은이들인 것입니다.


가장 먼저 바라는 것은 ‘캠퍼스속의 순결함’은 “작은 존재들”이 만들어 나간다는 것을 잊지 않는 기독 대학생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는 창조적인 소수(creative minority)가 만들어 나간다고 했습니다. 학생 선교 운동사에서 볼 수 있는 건초더미(Haystack) 기도모임이나 영국의 캠브리지의 7인, 미국의 존 모트에 의한 학생선교의 운동은 바로 캠퍼스의 순결함과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바로 작고 미미한 존재들이 만들어 나갔다는 사실입니다. 이제는 이 곳 미국에서 공부하고 삶을 살아가는 학부 유학생들과 한인 대학생들이 그런 영적인 창조적인 소수가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학생자원운동(SVM: Student Volunteer Movement)의 수혜자인 우리들이 이제는 우리가 공부하고 발을 딛고 살아가는 미국대학 캠퍼스의 순결함을 위해서 자신을 드릴 수 있는 작은 존재들이 cKOSTA를 통해서 많이 배출되기를 기대합니다.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찌라도 이것도 삼키운 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 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라.”(이사야 6:13) 바로 이렇게 작지만 거룩한 씨들이 캠퍼스속의 그루터기로 자라기를 소원합니다.


두번째로, ‘캠퍼스속의 순결함’은 “인정받기 힘들지만 값어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기독 대학생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과정은 끊임없는 인내와 희생을 요구하는 동시에 그 열매는 더디고 작습니다. 그러나 그런 외적인 부분에 치중하기 보다는 하나님 나라의 큰 그림을 보면서 자기 자신을 그 그림 가운데서 찾으면서 인내하는 기독 대학생들이 cKOSTA에서 헌신되기를 바랍니다. 짐 엘리엇과 그의 친구들이 에콰도르 원주민들에게 무참히 살해 되었을 때에 타임지는 그들의 죽음을 “커다란 소모 (What a Waste)”라고 비판했지만 우리는 짐 엘리엇이 선교를 떠나기 7년전 21살때 자기의 일기장에 썼던 글귀를 기억하면서 우리도 캠퍼스의 순결함을 위해서 발걸음을 내딛는 기독 대학생이 되었으면 합니다. “영원한 것을 얻고자 영원할 수 없는 것을 버리는 사람은 바보가 아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와 그 하나님의 나라가 캠퍼스속에서 나타나기를 위해 애쓰는 많은 바보들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캠퍼스속의 순결함을 이루기 위해 행동으로 신념을 표현하는 많은 기독대학생들이 cKOSTA를 통해 배출되었으면 합니다. 헬무트 틸리케라는 사람은 식품이나 음료광고에 나오는 유명한 사람들이 정말 그 제품을 사용할까 궁금할때가 많다고 했습니다. 어쩌면 그 질문이 ‘캠퍼스속의 순결함’을 이야기하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캠퍼스속의 순결함을 추구하는 것은 밭에 감추인 보화를 얻기 위하여 자신의 소유를 파는 일입니다. 바로 좋은 진주를 얻기 위하여 자기의 가진 것을 파는 장사가 되는 일입니다. 밭에 보화가 있다, 좋은 진주가 저기에 있다라고 얘기하는 것은 쉽지만 정작 필요한 것은 보화를 찾으러 나가는 일이고 진주를 사기 위해 걸음을 내딛는 일입니다. 행동으로 믿음과 신념을 드러내는 많은 젊은 기독 대학생들을 기대합니다.


지난 연말에 최대 흥행작 중의 하나인 영화 “반지의 제왕 (Lord of the Ring)” 2편을 보았습니다. 1편에서부터 느끼는 점이지만 주인공 프로도가 존경스러운 것은 자기의 사명과 꿈을 가지고 멀고 힘든 여정을 떠나기를 주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번 cKOSTA 2003을 통해서 각자의 삶가운데 허락하신 작지만 소중한 꿈들을 발견하는 기독대학생들이 많이 헌신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각자의 꿈을 안고 캠퍼스로 흩어지는 작은 영적인 프로도들이 자신들의 캠퍼스를 누비며 하나님의 순결함을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꿈과 소망에 힘을 실어주는 cKOSTA가 되기를 원합니다.

[조경호] 회복되는 하나님의 나라, 치유되는 자아. (두 개의 세계…어두움과 빛)

KOSTA 성경강해


회복되는 하나님의 나라, 치유되는 자아.


두 개의 세계…어두움과 빛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인 생의 삼분의 일을 억압상태에서 보낸 김대중 대통령은 북한송금사건으로 더 큰 고통의 여생을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 국민의 분노와 실망이 그를 외롭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 퍼주기’ ‘현대 봐주기’로 이어진 북한과의 평화유지비의 비밀 송금에 대해 대통령 국민담화가 발표되었지만 의혹은 풀리지 않았다.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은 지난 50여년 동안 갈라진 남과 북에 금강산으로 가는 비포장 도로와 대북 사업 교역의 물꼬를 텄지만, 월 스트리트 저널이 지적한 대로 ?김정일 돈 바치기?로 만들어진 남과 북의 평화였는지도 모른다. 그리스도인들도 보이지 않는 두 세계에서 사는 사람들이다. 옛사람과 새사람의 이중 자아와 어두움과 빛의 이중세계에서 우리는 하나님나라를 회복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이 세상에서 실천해야 할 거룩한 햇볕정책은 무엇일까?


1. 이중 세계의 속성.


에 베소는 로마 제국의 종교적 도시였다. 학문과 철학의 도시 아덴과 상업과 교역의 도시 고린도와 더불어 에게해 3대 도시 중 하나였다. 에베소의 ‘아데미 숭배’는 여사제들과의 혼음으로 도시 전체가 섹스의 쾌락에 빠져 있었다. 바울이 어두움의 속성으로 지적한 ‘음행, 더러움, 탐욕’은 모두 타락한 성적 욕망을 드러낸 부끄러운 단어들이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5:3)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5:5-6).




















어두움의 열매


 


빛의 열매


음행


참예하지 말라


착함


더러움


시험하여 보라


의로움


탐욕


 


진실함


세상은 성적 탐욕의 늪 속에 빠져있다. 한국은 여성부에서 최근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매년 섹스산업에 허비되는 돈이 24조원에 이른다고 발표했다. 섹스산업에 종사하는 여성이 50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하고 있으며, 청소년 원조교제, 보도방..같이 숨겨진 일들은 통계에 잡히지 않았다고 했다. 20-30대 여성 25명 중 1명이 쾌락산업에 빠져있다. 섹스의 쾌락의 끝은 에이즈의 증가로 이어진다. 매일 전세계에서 1만5천명이 새로 감염되고 있으며, 한국은 매일 1명이 감염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전세계 에이즈 감염자는 2001년 말 3610만명으로 보고되었으며, 청소년 감염자도 매년 300만명이 증가하고 있다. 피어트 유엔 에이즈국장은 ‘미국에서 매년 비만 치료와 예방에 쓰는 돈 520억 달러 중 30억 달러만 있어도 아프리카 에이즈 감염률을 낮출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전세계인구 2.7%가 에이즈로 숨지고 있으며 매년 그 숫자는 크게 증가하고 있다.


빛의 자녀들은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으로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도덕적 실천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사람이 살면서 인가다운 삶을 사는데 반드시 요구되는 도덕성과 윤리적 실천력을 소유한 새로운 하나님의 피조물들이어야 한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5:8-10).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트 러셀은 15살까지 교회를 출석했으나, 이후 교회를 떠나 무신론자가 되었다. 러셀은 기독교인을 이렇게 정의했다. “이웃을 사랑하고, 고난당하는 자를 동정하고, 잔인성과 가증한 악에서 자유를 원하는 사람들이다.” 그는 무신론자를 자처했지만, 그가 말한 기독교인의 세가지 정의는 그리스도인들이 잃어버린 자아상을 지적한 말일지도 모른다. 한국 사회는 도덕적 아노미anomie 상태에 빠졌다. 권력남용, 이권개입, 불법정치자금, 뇌물수수와 청탁, 분식회계와 주가조작, 부정과 사기.. 청와대에서 검찰, 언론까지 범국민적으로 확산되었다. 지난 30년간의 압축, 고속성장과정에서 한국사회는 너무 많은 것을 잃어야했다. 근면, 성실의 도덕적 가치관은 퇴색하고, 물질과 쾌락 추구가 새로운 삶의 목적으로 자리 잡았으며, 도덕적 나침반이 멈춰버렸다. 국제 경쟁력의 원천인 반부패와 투명성에서 한국은 하위그룹에 밑돌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 도덕성을 상실해버린 무기력한 교회가 있다. 교회는 한국사회의 도덕과 윤리 붕괴를 저항할 힘을 이미 잃어버렸다.


2. 빛의 자녀들의 의무.


“너 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5:11-14).” 4세기 중엽, 안디옥에서 출생한 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주교 크리소스톰은 그가 살던 도시가 사치와 쾌락의 극에 달하자, 그는 금욕적인 삶을 살면서 세상을 책망했다. 좋은음식을 찾지 않았고, 화려한 옷을 거부했다. 기도와 명상으로 살면서, 자신의 것을 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그가 가진 것은 몸에 걸친 옷이 전부였다. “깨어있으라. 욕심이 많은 사람들은 정신차려야 한다. 돈을 쥐려는 마음으로 하늘의 것을 움켜쥐어야 한다. 세상의 것은 나눠지면 적어지지만, 영적인 것은 나눌수록 늘어안다. 나누지않으면 가난해지고, 결국 주님께 큰 책망을 받을 것이다” 온 도시가 그의 말에 떨었으며, 황제도 그를 두려워했다. 오늘 세상은 더 이상 교회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세상이 교회를 비웃고 손가락질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대형교회 세습으로 한동안 곤혹을 치루었는데, 김동호 목사의 연봉 파문으로 또 다시 세상의 가십거리가 되고, CCC의 세습 움직임으로 또 다른 소용돌이가 일고 있다. 여중생 장갑차 희생사건으로 촛불시위가 연일 계속되는 가운데, 한기총이 시청 앞 광장에서 연 기도집회가 교회의 명예를 땅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책망하라. 참예하지 말라. 세상을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인의 사명과 책임은 책망하는 삶의 실천에 있다. 어둠을 몰아내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한가지는 빛이다. 빛이 비치면 어둠은 곧 사라진다. 더 이상 존재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빛의 열매를 실천해야 한다. 1998년 중국에 취임했던 주룽지 총리는 ‘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이렇게 말했었다. “내 것을 포함해 관 100개를 준비하라. 청렴한 정치 이뤄지지 않으면 경제강국의 꿈은 이뤄질 수 없다. 국가가 바로서기 어렵다.” 그는 취임직후 ‘밀수와의 전쟁’을 시작으로, 2000년 ‘부패관료와의 전쟁’을 계속 이어갔다.


세상은 빛을 찾고 있다. 기독교를 외면한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방식도 ‘빛’의 원리여야 한다. 스티브 쇼그린 목사는 섬김의 전도를 통해 복음이 닫혀버린 세상에 새로운 빛의 전도를 실천하여 사람들에게 복음을 듣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체험하게 하고 있다. 무료 세차, 상점 포장 도와주기, 상점 유리창 닦아주기…등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여 불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30대 한 남자가 주일 아침, 교회 앞을 서성거렸다. 손에 빈 콜라캔을 들고.. 안내위원이 “제가 버려드릴까요?” 미소를 지으며 묻자 그 청년은 “아닙니다. 이 콜라 캔을 저는 간직하고 싶습니다. 제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준 소중한 기념물이니까요” 그는 전날, 무료로 나눠주는 콜라 캔을 받아들고, 처음 자신에게 사랑과 친절을 보여준 전도팀에 대한 호기심으로, 교회까지 찾아오게 되었노라고 말했다.


세상에 보여주어야 할 빛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가난한 이웃에 대한 사랑이며, 도덕적 실천능력일 것이다. 단순히 술, 담배를 하지 않는 것이 기독교의 윤리 기준은 아니다. 술, 담배를 끊는 것이 기독교는 아니다. 세상에 교회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보여주어야 할 ‘빛의 열매’는 세상이 결코 흉내낼 수 없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다.


3. 빛의 자녀들의 삶.


“그 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5:15-21).

지혜-시간-주의뜻-성령충만 앙드레 모로아는 “인생을 영위하는 기술은 하나의 공격 목표를 정하고 거기에 힘을 집중하는 것이다. 역사의 인물들의 공통점이 여기에 있다. 그들은 자기 인생에 목표를 정하고 그 한가지 일에 전력을 다했다”고 인생의 바른 태도를 설명한다.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세상의 돈과 명예와 부를 좇는 ?죽은 자의 삶?에서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실현하는 바른 인생의 목표를 설정할 수 있는 지혜가 오늘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된다. 신학자 존 데이스빗은 “우선순위를 잘못 선택하면 삶의 목표에서 멀어진다.”고 경고하고 있다. 챨스 휴멜도 “우리들의 삶에서 만나는 온갖 딜레마는 시간과 물질의 부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일의 우선순위를 잘못 선택한데서 온다.”고 지적했다. 19세기 아프리카 선교사 리빙스턴은 의사로서 스코틀랜드에서 장래가 보장된 뛰어난 청년이었다. 그러나 그는 화려한 미래를 포기하고 아프리카로 가기로 결심하자, 그의 형이 이렇게 동생의 어리석음을 비웃었다. “너는 네가 원한대로 네 인생이 아프리카 정글의 미개인들과 매장되지만, 난 영국에서 가장 뛰어난 의사가 될 것이다.” 수세기가 지난 오늘, 리빙스턴의 유골은 영국으로 옮겨져, 정중하게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치죄었지만, 그의 형에 대해서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누가 더 어리석은 사람이었을까?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어리석다. 삶의 지혜가 없다.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도 찾을 수도 없다. 여리고의 삭개오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는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다. 창고 문은 열리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진 삭개오의 소유는 무엇이 인생의 참된 목적인가를 그림처럼 보여주고 있다. 어디서 그 인생의 목적을 찾았는지를 우리에게 암시해 주고 있다. 현대사회는 급하게 발전하고 있다. 자연과학 계열의 지식은 3개월 시차를 두고 변화하고 있다. 3개월전 논문은 이미 휴지조각이 되고 만다. 인문과학도 6개월을 넘기지 못한다. 인터넷이 학문의 속도를 더 빠르게 진행시키고 있다. 선진국의 학문이 당일에 인터넷을 통해 전세계인들이 함께 읽고 있다. 학문에서의 답보는 곧 퇴보다. 인생에서도 자기중심의 삶을 곧 퇴보다. 모험없는 인생은 어리석다. 하나님의 뜻을 찾으라. 무엇을 위해 살것인가를 결단해야 한다. 주님은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노라”고 고백하셨다.


성령충만을 유지하라. – 예배. 찬양. 감사. 복종. 황성주 박사는 그의 책에서 “나는 주님 때문에 팔자 고친 사람이다. 내가 올 수 있는 곳보다 훨씬 멀리 온 사람이다. 내가 가진 능력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성취했다. 내가 누릴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누린 사람이다. 오직 주님 때문에.. 주님으로 인해 변화받게 하시고, 최고의 행복을 경험하게 하셨다. 이젠 그 행복이 흘러 넘쳐 행복의 전달자로, 기쁨의 발산자로 살게하신다. 차고 넘치는 은혜, 사역의 확대, 비전의 확대, 인맥의 확대로 나타났다”고 자신의 인생을 설명한다. 2003년 2월.. 러시아 코스타에서 황박사는 만났을 때 그는 “호산나 네트워크를 인수하고, 크리스챤 여성 잡지 레베카를 인수했다”고 말하면서, 인도와 아프리카 등 사랑을 실천하는 사역을 설명하며 흥분에 넘쳐 있었다. 그는 이 시대의 ‘사랑의 전달자, 행복의 전달자, 복음의 전달자’이셨다. 바울은 “술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충만을 유지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은 인간의 능력과 도덕적 의지와 자기 훈련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들만이 살 수 있는 삶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성령충만을 유지하는 4가지 비밀을 가르치고 있다. “①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②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③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④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1) 예배에 힘쓰라.
매 주 드리는 예배를 통해 영혼과 몸의 안식을 계속 얻는 사람들이 매일의 삶에서 성령 충만한 사람으로 살 수 있다.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았다.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의 지시하는대로 따라갈 수 있었다. 죠지 물러가 하루 16시간 넘게 일하는 한 형제를 방문했다. 그 형제는 심한 피곤과 영적 메마름에 지쳐있었다.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을 상실하자, 모든 삶이 균형을 잃고 말았다. 뮬러는 그 형제에게 “일하는 시간을 조금 줄이고, 하나님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가운데 속사람이 힘을 얻게 하라”고 권면했으나 “이렇게 일해도 먹고 살기 힘든데..일하는 시간 줄이면..” 그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기쁨을 잃고 있었다.


(2) 찬송을 힘쓰라.
하 나님은 ‘이스라엘의 찬양 중에 거하시는 분’이시다. 성령충만과 찬양은 영성의 두 날개와 같다. 사울 임금이 악신으로 고통당할 때 다윗의 수금을 타는 찬양으로 평온함을 얻곤 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서 찬양하고 기도할 때 감옥터가 흔들리고 하나님께서 놀라운 구원을 베푸셨다.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구원받으면서 빌립보 간수와 그 가족도 구원을 받는 성령의 능력이 빌립보교회의 시작이 되었다.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 한 교수님이 갑자기 이상한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책상에 앉아있거나, 거리를 걷든지 혼자 중얼렸다. 궁금한 학생들이 질문하자 교수는 “며칠전 꿈을 꿨는데, 갑자기 베드로가 ‘찬송가 279장 불러봐’ 말하는데 우물쭈물거리자 ‘형편없는 신자구만, 찬송도 못부르면서 어떻게 천국 오려구해. 다음에 와..’ 놀라 깨서 찬송가부터 찾아봤지. 그날부터 매일 찬송가를 부르며 찬송이 충만해지도록 애쓰게 되었네” 웃으며 대답했다. 찬송으로 충만한 사람들이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이다.


(3) 감사를 힘쓰라.
감 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거룩한 제물이다. 감사는 중요한 경건의 훈련이다. 감사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믿음의 열매다. 자신의 삶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탁한 사람들은 모든 일에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사람이다. 작은 감사를 잘 실천하는 사람들이 주님을 닮았다. 글로벌화. 디지털화로 대변되는 21세기는 최고의 경쟁력을 가진 제품만이 생존하는 시대다. 세계일류기업의 뚜렷한 특징은 ‘연구개발, 제품개발, 생산, 마케팅’ 등 기업활동 4단계중 하나이상의 독특한 강점을 갖고 있다. 미국의 델 컴퓨터는 인터넷 마케팅으로 세계 컴퓨터시장을 잠식하고 있다. 노키아는 직원 32%가 R&D 연구원들이다. 그리스도인의 독특한 강점은 ‘감사하는 마음’이다. 감사는 성령의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영적 성품이기 때문이다.


(4) 복종하라.
바울은 복종의 인간관계를 가정과 사회를 중심으로 가르치고 있다. 다음 시간에 ?복종의 사회학?에 대해 함께 나누고자 한다. 성령충만한 삶을 잃어버리고, 무기력하고 피곤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이유는, 인간관계의 파괴에서 비롯된다.

[정진호] 선악과와 무감독 시험 – 그 원죄의 현장

치유와 회복의 신학


선악과와 무감독 시험 – 그 원죄의 현장


(1)


복음이 들어가기 전에 학생들의 마음 토양을 준비하기 위한 밭갈이 과목으로 <과학사>를 가르친다. 이 과목을 통해 서양 문명에 대해 상식이 부족한 중국 학생들을 일깨우고 더러는 충격을 준다. ‘아담에게 배꼽이 있었겠는가?’ 라는 첫 리포트에 아이들은 당황하기 시작한다. 도무지 아담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보는 학생들이 태반이다.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문화 비교, 로마제국의 흥망과 기독교의 전파, 중세 스콜라 철학,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 과학혁명 그리고 진화론에 이르기까지 가르쳐 나간다. 그러다 보면 학기 초에 굳게 닫혔던 학생들의 마음과 생각이 열리면서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하고 나중에는 심각한 혼란에 빠져들기까지 한다. 20여 년간 자신들이 지녀왔던 세계관이 허물어져 내리는 아픔 속에서 어떤 학생들은 리포트 빼곡히 자신의 하소연을 적어서 내기도 한다. 더러는 ‘요즘 잠을 이룰 수 없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진리입니까?’ 하는 절규가 담긴 글도 있다.


그러나 과학사 과목의 백미(白眉)는 역시 두 차례 치러지는 무감독 시험이다. 무감독 시험은 학생들에게 양심을 일깨우고 정직한 마음을 심어주기 위하여 실시하는 가장 좋은 훈련이다. 진화론과 유물론 교육에 철저히 물들어 있는 사회주의 학생들은 대체로 양심이 무뎌져 있어 죄의식에 둔감한 편이다. 더욱이 거세게 몰려드는 물질주의에 노출되어 있는 가난한 학생들이 장학금과 직결되어 있는 시험에서 자신의 양심을 지키는 것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들키지만 않으면 시험 부정행위를 하고도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예수를 믿는다는 학생들 중에도 그런 모습들이 종종 나타난다.


무감독 시험을 치르기 위해서는 철저한 사전 준비와 계획이 필요하다. 물론 세밀한 기도가 선행되어야 한다. 무감독 시험에 대한 경험과 이해가 전혀 없는 학생들에게 몇 주 전부터 정직성에 대한 교육을 실시한다. 감독이 있어도 어떻게든 치팅을 하려는 학생들에게 무감독 시험이라는 말은 너무나 생소한 느낌일 뿐이다. 학생들에게 정직의 중요성에 관한 예화를 들려주고 더러는 정직 서약까지 받은 후 시험을 치른다. 그러나 매년 끝까지 양심을 지켜내는 학생들은 삼분의 일에 불과하다. 다른 삼분의 일은 양심을 지키려고 싸우다가 마지막에 무너지는 학생들이고 나머지 삼분의 일은 물을 만난 듯이 처음부터 작심하고 베껴내는 학생들이다. 촘촘히 앉은 계단강의실에서 손만 뻗으면 잡히는 교과서와 강의 노트, 그리고 눈만 돌리면 보이는 옆 사람의 시험지를 외면하고, 더구나 다른 학생들의 부정행위 장면을 목격하면서 자신의 양심을 지켜내는 일은 한 바탕 전쟁을 치르는 일보다 어렵다. 바로 그들이 이제 나아가 싸워야할 세상 속에서의 영적 육적 전투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돌을 떡으로 바꾸라는 속삭임이 확성기처럼 시험 시간 내내 그들을 괴롭히는 것이다.


학생들이 제출한 시험지를 가지고 와서 채점을 하는 동안 그들의 병든 양심과 인격을 대면하며 사투를 벌인다. 보통 100여명의 수강생이 시험지 두 세 장에 가득 채워 제출한 논술형 답안지를 읽어보려면 일주일은 족히 걸리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 답안지는 그들이 살아온 병든 환경과 영적 상태뿐 아니라 앞으로 치유의 가능성까지 전부 담고 있는 병리 기록이기에 어느 한 장도 소홀히 다룰 수 없다. 특별히 무감독 시험의 성공 여부와 자신의 소감을 적으라는 마지막 문제의 답안에는 그들이 시험 시간에 겪었던 심각한 영적 전쟁의 상처들이 그대로 드러나게 된다. 특별히 감동과 충격을 주는 눈에 띠는 답안지들을 골라낸 후 그 다음 시간에 들고 들어가서 학생들에게 읽어준다. 내가 읽다가도 목이 매여서 읽기가 힘들만큼 적나라한 자기 고백과 회개의 글들이 튀어나온다. 일단 그 시간에 학생들은 심리적인 충격을 받고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한다. 그리고 옛날이야기 식으로 각색한 <두 아들 이야기> 즉, 돌아온 탕자 이야기를 해준다. 그러면 강퍅했던 아이들의 마음까지 대부분 허물어져 내린다. 양심을 지켰다고 자부하며 스스로 교만해져 있던 학생들조차 함께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시험지를 나누어주고 자신의 답안지를 스스로 양심 채점을 하여 점수를 정정토록 한다. 이 때가 되면 대다수의 학생들은 일시적이나마(?) 자신의 양심을 회복하게 된다. 물론 그들의 인생 속에서 또다시 실족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양심 회복에 대한 충격적인 이 체험은 영원히 잊지 못한다. 그리고 비로소 자기 안에 감추어져 있던 죄의 본질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죄에 대한 자각을 이끌어내는 것… 이것이 무감독 시험에서 얻게 되는 가장 큰 수확이다.


회개하고 돌아온 학생들에게는 양심을 되찾은 자유함으로 기쁨이 넘쳐흐른다. 그러나 그 가운데도 끝까지 양심을 속이며 자신의 불의한 이익을 챙기려는 학생들도 일부 남기 마련이다. 그들에 대해 화가 나고 안타까움이 끓어오르다가도 그냥 내버려둔다. 그들은 이미 자신이 선택한 길에서 심판과 벌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2)


어째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선악과의 시험을 주셨을까?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을 것을 다 알고 계셨을 텐데 왜 그런 시험을 통해 문제를 어렵게 만들었는가?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사람은 선과 악도 분별할 줄 모르는 무지한 상태에 있었는가?
선악과란 도대체 어떤 과일인가? 사과인가? 복숭아인가? 아니면 눈을 밝혀주는 신비한 묘약인가?


창세기 공부를 시작하자마자 넘어야 하는 첫 고개는 두말할 것도 없이 선악과의 준령이다. 말씀에 대해 반감을 지닌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어느 정도 신앙을 지닌 사람들조차도 선악과 문제만 나오면 쉽게 답변키 힘든 여러 가지 질문들을 퍼붓곤 한다.


무감독 시험을 치를 때마다 선악과는 하나님이 인간들을 향해 베푸신 일종의 무감독 시험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물론 선악과 시험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유익을 주기 위한 테스트(test)이지 아담과 하와를 걸려 넘어지게 하기 위해 일부러 처 놓은 덫으로서의 시험(temptation)이 아니다. 좋은 선생이라면 학생들을 위하는 마음으로 시험문제를 내는 것이 당연한 것과 마찬가지다.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표현된 가장 아름답고 완벽했던 환경… 그 에덴동산 중앙에 놓여졌던 한 그루의 나무 선악과… 금단의 열매, 그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6-7)”


문제의 그 현장으로 가 보자.


에덴동산을 지구상에 실존하였던 그 어떤 곳으로 보든지… 아니면 피안(彼岸)의 세계를 그리기 위한 또 하나의 가상공간으로 보든지… 아무튼 좋다. 역사의 시작이 그와 같이 아름다운 모습이었다고 가정해 보자. 에덴동산에는 온통 순금과 같은 보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것은 에덴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한 은유임에 분명하다. 그만큼 완벽하게 아름다운 곳이었다는 뜻이다. 그 속에서 완전한 모습으로 창조된 두 남녀에 의해 펼쳐지는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역사가 그렇게만 될 수 있었다면… 설사 에덴 이야기가 후세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간절한 바람일지라도 말이다. 아무튼 그 가상공간으로 한번 들어가 보자.


가장 사람이 살기 좋게 설계된 자연 환경 속에서 벌거벗고도 부끄러움을 몰랐던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가 있었다. 왜 그들은 벌거벗고도 부끄럽지 않았을까? 아니, 왜 인간은 벌거벗으면 부끄러워하는 것일까? 왜 인간만이 옷을 입고 살아가는 존재일까? 모두 비슷한 질문이다.


부끄러움은 존재의 불완전성을 나타내는 한 단면이다. 그러하기에 옷은 도덕적으로 격하된 존재의 열등의식을 가리고자하는 도덕적 표현이다. 반대로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의 벌거벗음은 두 사람의 완전한 관계성을 나타내고 있다. 그들에게는 가릴만한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서로를 투명하게 들여다보며 살아가는 존재였다. 결국 에덴동산에서의 아담과 하와는 도덕적으로 완전성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도덕적 완전성이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그들이 살고 있던 동산 중앙에는 특별한 한 그루의 나무가 있었다. 동산의 모든 실과는 마음대로 따먹을 수 있도록 되어있었지만, 유독 그 나무의 열매만은 금지되어 있었다. 이름하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the tree of knowledge of good and evil)… 선악과(善惡果)였다.


자… 선악과 이야기만큼, 성경을 믿는 자들에게나 혹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회자(膾炙)되며 제각기 해석되고 더러는 공격을 당해온 이야기도 드물 것이다. 많은 문학 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고,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에게 인간의 본질을 논하기 위한 학문적 주제로서 일련의 통찰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분명 선악과 이야기는 인간이 지닌 선과 악의 양면성을 설명하기 위한 중요한 은유임에 틀림없다.


인간이 지닌 선한 속성은 타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던지기에 이르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이 악해지기 시작하면 오히려 금수가 행하지 못하는 마귀적 행동이 나오기도 하는 것이다. 깡패 집단이 동료를 죽인 후, 토막을 내고 그의 내장을 파서 나누어 먹은 후 매장했다는 엽기적 뉴스를 접하고 인간의 악함에 새삼 놀라지 않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그 뿐인가? 지난 세기를 붉게 물들였던 수많은 전쟁과 수용소 군도에서 벌어졌던 그 참혹한 역사의 다큐멘터리들을 우리는 물증으로 가지고 있다. 마약과 매춘이 행해지는 사회의 어두운 뒷골목에서, 매일 밤 벌어지고 있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행위들은 어떠한가?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그렇지 않았단 말인가? 그들은 한 점 부끄러운 얼룩도 없이 완전한 존재로 남아있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도덕적 완전성… 그것의 기준은 무엇인가?


2차 대전 당시 나치 독일에 항거하여 비교적(?)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살다가 옥사(獄死)한 독일의 신학자 본훼퍼는 그의 중요한 저서 <윤리학(Ethics)>에서 완전한 도덕의 기준을 가장 간단명료하게 제시하고 있다.1) 불완전한 인간에 의해 제시되는 어떤 기준도 완전성에 이를 수 없기에, 도덕의 기준은 완전한 신에 의해서만 제시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즉, 완전한 신이 존재한다면, 바로 그 신이 원하는 것이 선이요, 그 신이 원치 않는 것이 악이라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신이 원하는 것을 행하는 것이 곧 선이요, 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행하는 것이 곧 악이라는 것이다.


선악과… 그것은 신의 뜻을 알리고 인간의 반응을 기다리는 시금석이었다. 선악과가 상큼한 사과이었는지 신 포도였는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특별한 성분을 지닌 과일이어서 먹는 순간 신기한 반응이 일어나서 선악에 대해 무지했던 아담과 하와의 눈을 일깨움으로 선과 악을 알게 한 것은 더욱 아니다.


완전한 신은 그의 형상(the image of God)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도덕적으로 완전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들이 신의 뜻대로 살아가는 존재가 되기를 원하여 선악과의 화두(話頭)를 던진 것이다. 피조물인 인간에게 창조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살아가는 것이 그들의 도덕적 완전성을 지키는 길임을 알려주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도덕적으로 완전한 존재로 지음 받은 인간… 여기에는 적어도 두 가지 함의(含意)가 들어 있다. 첫째, 그는 신과의 완전한 관계성을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둘째, 그 관계성을 유지하기 위한 선택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선택의 자유가 없는 존재는 도덕적으로 아무런 책임이 없다. 다시 말하면, 도덕적인 존재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책임(responsibility)이라는 단어 자체가 도덕적 요구에 어떻게 반응(response)하는가 하는 능력(ability)을 나타내는 말이다. 아담과 하와가 도덕적 존재였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신의 도덕적 요구조건을 지킬 수도 혹은 어길 수도 있는… 즉, 선악과를 따먹을 수도 혹은 따먹지 않을 수도 있는 완전한 자유가 주어진 존재였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신의 뜻은 그들이 선악과를 따먹지 않는 것이었다. 왜? 그들이 도덕적 완전성을 지니고 살아가기를 바랐기 때문에… 즉, 신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그들의 완전한 도덕을 유지하는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곧 인생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선택이었다.


선악과는 그 자체가 아담과 하와에게는 선과 악의 갈림길을 알려주는 이정표였다. 그 갈림길에서 그들은 불순종의 길을 택했다. 하나님이 원하는 길보다는 자신의 길, 인간의 길, 악마가 유혹하는 길…, 결국은 죽음의 길을 택했던 것이다.


(3)


(L학생) 무감독 시험_ 내 인생의 첫 양심 측정_ 감동과 뼈저림_ 교수님 뭐라 할까요? 느낌이 너무너무 복잡합니다. 내가 무감독 시험에서 양심을 지켜냈다는 뿌듯함과 그 성적에 대한 실망감… 사실은 시험을 치를 때는 많이 갈등을 했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무감독 시험… 너무 새로운 느낌을 저희에게 부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시험을 통하여 나는 만족한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자신에 대해 신심이 생겼습니다. 예전에는 단순한 학교생활을 하다가 복잡한 사회에 들어가면 내가 어떻게 적응을 하고 자신을 지켜갈 수 있을지 많이 근심을 했었는데… 지금은 아닙니다. 이번 시험을 통해서 내 자신에 대해 알게 되었고 신심이 생겼습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는 것… 확실히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는 그 마음속으로부터 나오는 뿌듯함… 이것이 내 평생의 재산이 될 것 같습니다. 이제 세상 어디를 가도 두렵지 않습니다. 떳떳이 난 정직한 사람이라고 외칠 수 있기에… 교수님, 너무너무 고맙습니다. 교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어서 너무 감사합니다.


(H학생) 전번 시험 때에는 여러 가지 고려가 많았습니다. 보고 쓰려니 마음이 내키지 않고 보고 쓰지 않으려니 밑지는 것 같고, 결국에는 내 양심을 버리고 커닝을 하였습니다. 훌륭한 21세기의 리더를 키우는 우리대학의 과학사 중간고사에 커닝을 하였습니다. 리더가 갖추어야할 양심과 정직성은 나의 손과 눈에 의하여 여지없이 짓밟혔습니다. 커닝을 하면서 전혀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머리 속은 끊임없는 내부 전쟁을 하였고, 시험지에 꽉 적어놓은 답안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전혀 기쁘지 않았습니다. 지난 일주일을 힘들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오늘 너무도 민망하여 교수님의 얼굴을 도무지 쳐다볼 수 없었습니다. 교수님께서 읽으신 동학들의 글은 채찍이 되어 나의 마음을 후려쳤습니다. 숨을 쉬고 있는 것마저도 나에게는 그렇게 큰 부담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량심적으로 다시 채점하라는 말에 나는 내 인생의 1949년이 온 것만 같았습니다. 해방된 기분이었습니다. 성실하게 채점해보니 49점이었습니다. 무려 23점이나 감점이 되었지만 나의 정직을 찾았다는 기쁨이 더 컸습니다. 동학들의 뉘우침과 성실한 고백을 듣고 그렇게 열심히 양심 채점을 하는 동학들을 보면서 이번 무감독 시험이 성공적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잃었던 양심을 되찾고 정직의 중요성을 너무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으니까요. YUST의 신입생으로서 기둥이 되어야할 내가 YUST의 취지_ 정직을 잃을 뻔한 가슴 아픈 교훈… 영원히 잊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는 나의 성적을 위하여 량심을 버리는 일은 전혀 없을 것입니다. 량심을 되찾도록 이끌어주신 교수님, 정말로 감사합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B학생) 시험을 치를 때, 좌우에서 많은 학생의 소곤대는 소리와 책장 넘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걸 아니꼽게 생각하고 아직 어려서 그렇겠지 하고 생각했다. 내가 앉은자리는 앞에서 두 번째 자리이고 그 앞자리는 시험지를 제출하는 자리였다. 어떤 학생이 먼저 답안지를 놓고 나가자 옆자리에 앉은 한 학생이 천천히 일어나 그 답안지를 가져다가 보려고 했다. 참 민망하고 불쾌하여 그 애를 지적하고 말렸다. 내가 마음 아팠던 것은 부정행위를 하는 그 친구들보다도 이미 제출한 시험지를 가져다 봐도 용납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주위환경 때문이었다. 어지러운 세상 환경을 보는 것 같았다. 다음 시간은 시험 문제를 다시 정리하는 시간이었다. 특별히 무감독 시험에 동의하는가 하는 문제를 놓고 교수님은 많은 학생들의 생각을 읽어주셨다. 반대하는, 찬성하는 여러 친구들의 시험지에 남겨진 마음들을 읽으면서 나에게 새로운 감동이 왔다. 다만 부정행위를 하는 애들이 틀렸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던 나에게 그들의 내면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안간힘을 쓰며 죄와 싸우려는 선한 마음들, 하지만 마지막에 대부분 넘어지는 모습들, 넘어지면서도 정직을 향해 외치는 모습…. 너무나 가슴이 뭉클했다. 내 마음과 눈에서 눈물이 나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들의 마음을 몰라주고 있었다. 그저 틀리다고 원망했지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들과 함께 부둥켜안고 울고 싶다. 아픈 마음을 찾아서 위로하고 어루만지고 선한 마음을 찾아서 같이 나서고 싶다. 교수님은 집 떠난 탕자와 남아있던 큰아들 이야기를 했다. 다시 돌아온 탕자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다. 나도 돌아온 탕자였다. 그러나 어느새 큰아들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이제 그 마음이 깨끗이 없어지기를 바란다. 항상 회개한 탕자의 마음으로 살고 싶다. 교수님께서 학생들의 마음을 읽어주시는 동안 나는 친구들의 선한 마음들과 만났다. 혹시 내 옆에, 내 뒤에 그런 친구가 있을까 하여 둘러보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그런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너무나 어두운 세상에 가려서 그저 무관심하고 삐지고 생각 없는 얼굴들이다. 그러나 그 속에 선한 마음들이 감추어져 있을 것이다. 이번 무감독 시험은 성공했다. 한 사람이라도 선한 양심으로 돌아왔다면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정직히 이 시험을 치러낸 친구들한테는 격려의 박수를 보내주고 싶다.

[최영기] 소수 민족 교회를 후원합시다

행복한 교회생활


소수 민족 교회를 후원합시다


우리 교회에서 히스패닉 미션을 시작한지 3년이 됩니다. 교회 건물을 무료로 사용케 하고 사역자에게 매달 1,000불씩 지불하고 있습니다.


미주 한인 교회가 미국 교회의 도움을 받아 성장했습니다. 이제는 한인 교회가 다른 소수 민족에게 복음의 빚을 갚아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저 는 캘리포니아 한 교회에서 평신도, 교육 전도사, 교육 목사로 12년을 섬겼습니다. 섬기던 교회는 미국 교회를 빌어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장년 주일 학교로 성장했다고 소문이 났었습니다. 많은 교실을 필요로 하였고 사용 빈도수도 높았습니다. 고맙게도 미국 교회는 쓰고싶은 만치 교실을 쓰도록 허락했습니다.


교 인 숫자가 증가하면서 더 큰 예배 처소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빌어 쓰는 별관 대신에 교회 본당을 쓰게 해달라고 요청했다가 보기 좋게 거절 당하고 말았습니다. 특별 집회를 위하여 본당을 몇 번 빌어 쓴 적이 있었는데 한국 사람들이 사용하고 난 후에는 김치 냄새가 난다고 불평하는 미국 교인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다 행히 다른 교회가 본당을 쓰도록 허락해 주어서 이사를 했습니다. 그 곳에서도 교회는 계속 성장했습니다. 처음에는 미국 교회 교인 숫자와 우리 교인 숫자가 비슷했는데 수 년 되자 우리 교인 수가 미국 교회 교인 숫자의 두 배가 되었습니다. 건물 사용 빈도수는 4배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곳에서도 불평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불 평의 주 원인은 어린이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얼마나 뛰고, 얼마나 심합니까? 불평 불만도 할만 했습니다. 그래서 파손된 기물이 발견되면 우리 애들, 그 교회 애들을 따지지 않고 즉시 수선해 주었습니다. 월세도 달라는 대로 지불했습니다. 냄새 풍길까 봐 친교실에서 김치는 절대 먹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나가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이상 더 빌려 주겠다는 교회가 없어서 건물 구입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교회 건물을 사서 이사하게 되었습니다. 전화 위복이 된 셈입니다.


미 국교회 건물을 빌려 쓰는 한인교회 교인들은 다 비슷한 경험을 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미국교회 성도들이 참 무던했다고 생각합니다. 입장이 바뀌어서 우리가 주인이고 그들이 손님이었다면 우리는 어땠을까? 그만치 나마 참아 주었을까?


우 리가 소수 민족 교회로서 쓰라린 경험을 했으니까 교회가 어느 정도 성장하면 다른 소수 민족 교회를 후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때에는 그들의 고유 음식 냄새가 역겹다고 흉보거나 하지말고 미국 교회가 한인 교회에 해준 것보다 더 잘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