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호] 회복되는 하나님의 나라, 치유되는 자아 – Lordship 구원 (엡 5:21-6:9)

eKOSTA 성경강해


회복되는 하나님의 나라, 치유되는 자아.


Lordship 구원 (엡 5:21-6:9)


한 유명한 기독교 계 지도자가 솔직한 고백을 남겼다. “지난 40여 년 간 나의 믿음은 진정 실패였다. 회심이후 사람들이 내 삶에서 분명한 변화를 볼 것이라고 기대했으나, 난 변화를 믿지 못하게 되었다.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은 끊임없이 실족하고, 넘어지고, 거짓으로 살아갈 뿐이었다. 복음의 진리가 손상되었다. 우리는 세상과 구별되지 못하고 있다.” 해마다 그리스도인의 숫자는 늘어나고, 회심 자들은 증가되지만 구원의 변화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그리스도인들은 많지 않다. 무엇이 문제일까? 존 맥스웰 목사는 ‘구원’에 대한 정의를 분명히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로드십구원”을 참된 구원으로 정의한다. “만일에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순종할 마음이 없다면, 그분께 대한 구원의 믿음을 가질 수 없다. 예수님을 ‘주님(Lord)’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용서받은 죄인 이상의 존재여야 한다.” 복음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것을 믿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성취한 구속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달라스 윌라드는 그의 저서 ‘하나님의 모략’에서 ‘바코드 그리스도인’들을 오늘의 그리스도인으로 비유했다. 바코드는 스캐너에게 물품의 정보를 줄뿐이다. 개 먹이 바코드를 과자에 붙여놓으면 계산대 스캐너는 과자를 ‘개 먹이’로 읽어버린다. 내용물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 바코드 정보만 읽을 뿐이다. “나는 구원받았습니다” 바코드만 붙였을 뿐 그 내용물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들어있지 않다. 바코드만 바꿔 붙여놓은 셈이다.
교회는 ‘구원’을 강조하지만 ‘구원의 본질’에 대해 가르치지 않는다. 구원이란 단순히 죄의 용서와 구원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개인의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성육신 단계를 이렇게 설명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 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5-11).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바울도 ‘로드십 구원’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죄로부터의 구원은 구원의 반쪽 교리다. 나머지 구원의 절반은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는 신앙과 삶의 연출에 있다.

아프리카 콩고 선교회에서는 선교사 훈련과정에 세(침)례 고백에 다음과 같은 글귀를 훈련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염소고기를 먹었음으로 세(침)례를 베푸노라” ‘염소 고기 먹기’ 풍습은 콩고 노예제도에서 비롯되었다. 어떤 노예가 자기가 섬기던 주인이 너무 잔인하고, 혹독하게 노예를 학대하면, 그는 도망쳐 다른 새 주인에게 간다. 구원을 요청 받은 새 주인이 그를 구해줄 의향이 있으면 염소고기를 함께 먹었다. 노예가 새 주인과 함께 염소고기를 함께 먹는 순간 과거의 옛 주인은 도망친 노예에 대하여 아무런 권한도 갖지 못한다. 노예는 새 주인을 따라 새 생활을 시작할 수 있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삶의 주인을 바꾸는 것이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롬6:17-18). 죄의 종이었다가 의의 종이 된 신분변화가 구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는 어떤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셨는지 새 피조물의 자각이 요구된다.


독재자들의 공통점은 동상 세우기를 좋아하는 점이다. 10여 년 전, 구 소련과 동유럽에서 사회주의가 붕괴되었을 때, 레닌과 스탈린 동상이 수난을 당했다. 미?영 연합군이 바드다드 시내로 진입하는 순간, 사담 후세인 거대한 동상이 무너지는 장면이 전세계에 생중계 되었다. 독재자의 동상을 철거하는 것은 한 시대의 종말과 새 시대의 시작을 의미하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북한에도 약 3만5천여 개의 김일성-김정일 동상이 세워져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통일 비용엔 동상철거 비용도 상당부분 차지할 것이라고 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영성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인정하는 것은 중요하다. ‘주’ ‘소유주’ ‘주권자’ 예수께서 우리 자신과 온 세계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주인이 되심을 뜻한다. 내 영혼의 주님, 사회의 주님, 가정의 주님, 역사의 시간의 주님, 한국교회의 주님, 온 세상의 주님…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골2:6).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예수를 주인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영접한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무엇인가? 그 안에서 행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사는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의 주되심은 모든 인간관계를 지배한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롬14:6-9).


모든 사람의 주인이 그리스도이시다. 바울은 로마교회가 날과 음식의 문제로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비판하고, 판단하고 업신여기자, 바울은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롬14:4).고 가르치고 있다. 주님은 온 우주 만물의 주인이실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의 주인이시다. 그러므로 바울은 에베소에서 모든 인간관계에 대한 사랑과 절대 순종을 요구하고 있다. 모든 인간관계의 머리가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스티븐 닐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의해 인간의 모든 관계는 변화된다”고 가르친 것은 그리스도의 주권이 모든 인간관계에 머물기 때문이다.


1. 부부관계(엡5:22-33).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엡5:22).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엡5:25).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엡5:32-33).
미국판 현모양처를 촉구하는 “항복하는 아내가 행복하다”는 책이 화제가 되었었다. 저자 도라 도일은 페미니스트로 바가지 긁는 전형적인 아내였다. 그러나 결과는 불행의 연속이었다. 파경으로 치닫는 결혼생활을 통해 도라 도일은 ‘항복하는 아내’의 결론을 얻었다. ‘바가지를 긁거나 논쟁하지 말고 남편이 원하는 일을 하라. 남편을 통제하거나 비판하지 말라. 남편이 동의하지 않으면 이의를 제기하지 말라. 여 전사와 같은 모습을 직장에 두고 집으로 와라..’ 그 말들은 불행을 통해 깨달은 아내의 아름다움과 사랑이었다고 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하나님의 권위의 질서는 남편을 아내의 머리로 세우셨다(고전11:3). 하나님의 권위가 인정될 때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리심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주님을 대하는 태도로 남편을 사랑하고 복종해야 한다. 아내의 역할과 위치가 지나치게 굴종 적인 과거 문화 유산이나, 낡은 보수주의적인 견해가 아니다. 서로의 위치와 역할이 분명하지 않은 ‘권위의 질서 실종’으로 인해 오늘 많은 가정이 이혼으로 치닫고 있다.


한국 여성들은 남성에 대해 두 가지 꿈을 갖고 있다고 한다. 신델렐라의 꿈과 평강공주 꿈이다. 신데렐라 꿈을 가진 여성은 백마 탄 왕자가 유리구두를 들고 자기를 찾아와 주기를 바라는 여성이며, 평강공주 꿈을 가진 여성은 현재의 남자가 바보온달 같아서 자신의 헌신으로 그를 훌륭하게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진 여성이다. 출세한 남자를 원하는가? 아니면 출세 가능성이 있는 남자를 원하는가? 남자를 통해 자기 욕구를 채우려는 두 성향에서 여성들의 남성관을 엿볼 수 있다. 남자들도 마찬가지다. 남자들의 두 가지 꿈은 미스 코리아 형과 복부인형에 있다고 한다. 미인이냐? 아니면 경제력이냐? 에 목표를 두고 있다. 진정한 결혼생활의 가치와 의미를 그리스도의 주권에서 찾아야 한다.


미국 코넬대학 인간행동연구소 신디아 하잔 교수 팀은 지난 2년간 남녀 5천명을 추적 조사했다. 그 결과, 가슴 뛰는 사랑은 18개월-30개월이면 사라지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사랑의 감정’은 뇌의 화학작용으로, 남녀가 만나 2년 정도 지나면 대뇌에 항체가 생겨 더 이상 화학물질이 생성되지 않는다고 한다. 화학물질을 상실한 뒤 독서와 생활에서 다듬어진 지성미와 교양미로 원숙한 아름다움을 가꿔나가는 것이 사랑을 오래 지속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그 아름다움이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하는 겸손과 믿음에 있지 않을까? 주님이 함께 하시는 부부의 관계는 언제나 아름다움을 잃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2. 부모와 자녀관계(6:1-4)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엡6:1).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엡6:4).


부모 순종엔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모든 것이 이미 약속되었다.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6:3). 인생의 성공과 건강은 모두가 추구하는 공통적인 소망이다. 부모의 권위를 인정하고 존경하는 자녀들에게 두 가지 약속이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졌다. 우리는 부모공경에서 자신의 삶을 실현하는 비밀을 배워야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부모를 통해 그분의 축복과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이다.
원자력 분야 세계적 석학 정근모 박사는 사람들 사이에 천재로 통한다. 서울대 차석 입학. 미국 미시간 주립대졸업. 24살에 플로리다대학 교수가 되고, 과기처장관을 두 번이나 역임했다. 정근모 박사는 “이 모든 것이 어머니의 기도와 신앙 안에서 생활한 결과일 뿐”이라고 짧게 대답한다. 그는 그의 저서 ?나는 위대한 과학자보다 신실한 크리스천이고 싶다?라는 책에서 공부 잘하는 7가지 방법을 말했다. 그가 첫 번째로 가르친 비밀이 ‘어머니의 기도와 잔잔한 미소가 힘이다’라고 고백한다. 어머니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하나님께서 정근모 박사의 인생을 만드시는 섭리의 통로가 되었다.


우리는 부모님을 주님의 권위로 인정하는 그리스도의 주권을 소유할 때 비로소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될 수 있다. “부모는 자식을 통해 두 번째 인생을 산다”고 했다. 부모와 자녀는 한 생명을 가진 운명공동체다. 부모의 삶이 자녀들에게 유전되고, 자녀들은 부모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부모의 존재가 자녀들의 인생의 한계가 되기 때문이다.
한 유대인 부부가 첫 아이에게 지어줄 이름으로 논쟁을 벌이다 랍비를 찾아갔다. 남편은 자기 아버지 이름을 따라 짓고 싶어하고, 아내도 자기 아버지 이름을 따라 이름을 짓고 싶어했다. 랍비가 물었다. “두 아버님 성함이 어떻게 되나요?” “두 분 다 요셉인데요” “그럼, 아무 문제가 없지 않나요?” 아내가 나서서 말했다. “아닙니다. 시아버님은 말 도둑이고, 저의 아버님은 정직하신 분입니다. 누구 아버지 이름 따서 지었는지 저희가 나중에 어떻게 알겠습니까?” 랍비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결론지었다. “그냥 요셉이라고 부르고, 나중에 이 아이가 커서 말 도둑이 될지, 아니면 정직한 사람이 될지 지켜봅시다. 그럼, 어떤 아버지 이름을 따른 것인지 자연히 알게 될 것 아니겠습니까?”


3. 사회생활 관계(6:5-9).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엡6:5-6).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니라”(엡6:9).

44개국에서 7만 명이 넘는 직장인들에게 강의한 탁월한 ‘인력 전문가’ 존 곤스틴박사는 “유럽기업들은 매년 매출액 1%를 기업 내 사람 사귀는 법에 투자한다”고 강조한다. 직장인이 직장을 떠나는 가장 큰 이유는, 회사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직장 상사나 동료를 떠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기업은 좋은 인재를 쉽게 잃고 만다. 무엇보다 중간 간부가 전략적으로 사고하지 못하면 조직의 안정이 어려워진다. 성공적인 직장생활을 성취하기 위해 주님의 주권이 직장, 사회생활에서도 지배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예배당을 벗어나지 못한다. 교회생활을 중심으로 그리스도를 섬기는 신 율법주의에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만유를 창조하신 분이시고, 만유를 유지하는 유지 주이시며, 만물의 소유주가 되신다(골1:15-17). 그러므로 주님의 주권은 제한된 예배당 뿐 아니라 인간의 모든 사회조직에서 역사하고 계심을 알아야 한다.
서울대생엔 ‘나 홀로 족’이 많다. 서울대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입사한 최모 씨(28)는 1년도 안돼 직장에 사표를 내고 말았다. 조직생활에 적응하기 힘들어 결국 직장을 포기하고, 사법고시를 준비중이다. 이기춘 서울대 총장은 “이제는 감성지수, 도덕지수가 높은 졸업생을 배출해야 한다. 대학에서 인성과 대인관계 증진을 위한 리더십개발 프로그램을 실시하여 인성교육을 강화하겠다”고 강조했다. 대인관계 능력 부족은 사회생활에서도, 주를 섬기는 제자의 삶에서도 결국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다. 모든 인간관계에서 오는 다양한 갈등과 개인적인 깊은 고민은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할 때 쉽게 해결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주권이 세상에 있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으로 파송하셨다. 그리스도인의 선교적 사명은 세상이다.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요일2:15-17)고 말씀하시고,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3;16) 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세상의 탐욕과 쾌락주의, 물질주의를 경계하고, 세속적 가치관을 버려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세상을 버려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세상에 보내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자기목숨을 버리시기까지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세상을 구원하고 변화시키기 위해 세상을 자기목숨을 버리기까지 사랑해야 한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요17:11) 대제사장의 기도에서 주님께서는 세상과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관계를 위해 깊이 기도하셨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선교사들이다. 우리들이 주님을 섬길 장소는 예배당 뿐 아니라 세상이어야 한다. 가정과 직장에서 주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제사장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들의 매일 매일의 삶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여야 하고, 우리들의 삶의 공간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성소여야 한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3;16-17). 우리 몸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며, 우리 몸이 가는 곳이 어디든지 하나님을 섬기는 성소가 되며, 우리는 그 장소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으로 주님을 섬겨야 한다. 하나님의 성전을 손상시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손상시킬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뉴욕 셔틀버스 운전사 모임에 고든 목사가 참석했다. 한참 교제하다가 운전사 한 분이 “우리는 겨우 말 못하는 버스를 끌고, 맨해튼 섬이나 왔다 갔다 할뿐인데 목사님은 여러 나라 다니면서 말씀을 전하시니 부럽습니다.” 자신들의 처지를 한심스러워하는 운전자들에게 고든 목사는 한가지 제안을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용하기를 원하신다. 버스를 운전하기 전에, 빈 버스를 향해 이렇게 말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앞으로 8시간 동안 이 버스를 성소로 선포하노라. 이 버스를 타는 사람들에게 나를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하게 될 것을 선포하노라.’ 그리고 버스 운전을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그 뒤 고든 목사는 셔틀버스 운전사들을 만날 때마다, “버스를 운전하십니까? 성소를 운전하십니까?” 하며 반갑게 항상 질문해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버스 운전사로부터 은혜로운 간증을 듣게 되었다. 한 남자가 정류장 아닌 곳에 내려달라며 우기고, 정중하게 양해를 구하는 자신에게 무례한 태도와 험악한 말을 하는데, 자신은 성소를 운전하고 있기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야하는 사명이 있기에 즐겁게 참았다고 했다. 다른 때 같으면 같이 반응했을 자신이었지만 그날은 다음 정류장에서 투덜거리며 내리는 그 신사에게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 제 버스를 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밝게 웃으며 인사를 하자, 운전사를 잘 아는 한 여자 승객이 “정말 많이 변화되셨군요” 하며 칭찬하더라는 말을 들려주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성소이며, 우리의 하루하루는 주님께 드리는 예배의 삶이어야 한다. 오직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와 주인으로 영접하고, 그리스도의 주권을 깨달은 사람들만이 평화의 인간관계를 이룩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하심을 드러낼 수 있다. 우리도 도마처럼 부활하신 그리스도 앞에 무릎꿇고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 이시니이다” (요20:28) 라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의 종들이 될 때 그리스도의 주권이 높임을 받는 진정한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질 수 있다. 에드먼드 버크는 “참된 종교의 본질은 하나님의 뜻에의 복종. 하나님말씀에 대한 믿음, 그리고 하나님을 닮아 가는 모방에 있다”고 정의했다.


우리는 날마다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하는 훈련을 해야한다. 무엇보다 인간관계가 그리스도의 주권에 따라 변화되어야 한다. 부부와 부모와 자녀, 직장생활의 인간관계에도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시고 주인이 되시기 때문이다.

[정진호] 지성, 그 깨지기 쉬운 유리알 유희

회복과 치유의 신학 – 내 아버지의 뜻


지성, 그 깨지기 쉬운 유리알 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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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 충돌과 붕괴의 時論 2001년 9월 11일 발생한 세계 무역 센터(WTC)의 붕괴 장면은 전 세계인을 경악하게 한 세기적 사건이었다. 정보화시대를 실감하며 생방송으로 엽기(?)적 상황을 지켜보는 동안 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바야흐로 다각화된 문화에 의한 문명 충돌의 시대로서 21세기를 예견했던 새뮤얼 헌팅턴과, 인류 역사 속에 나타난 문명의 한계 수익 체감에 의한 문명 붕괴의 필연성을 역설한 조지프 테인터의 노작(勞作)이 새삼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역사학자 토인비가, 2,000년 전 바울이 소아시아에서 지중해를 건너 유럽으로 건너갈 때 타고 간 배를 가리켜 유럽의 운명을 싣고 간 배였다고 말했듯이, 세계 역사는 끊임없는 서진(西進)을 계속하며 새로운 문명과 역사의 주역들을 탄생시켜왔다. 21세기의 개막과 더불어 발생한 WTC의 붕괴는 어쩌면 지난 20세기 세계 정치 경제 문화의 주역이었던 한 문명이 무너져 내리고 이제 또 다시 새로운 주역의 부상을 예고하는 역사의 한 서막으로 기억될지도 모른다. 지난 20세기는 인간의 합리적 이성을 앞세운 과학기술을 무기로 유토피아 사회 건설을 추구하며 시작되었다. 20세기가 평등과 자유의 이데올로기를 나누어 가진 체 동서 냉전의 양극화 구도로 치닫는 동안, 세계는 수많은 전쟁과 혁명 속에서 무고한 피 흘림과 비인간화의 값을 치렀다. 그러나 이제 21세기는 다원화된 문화 전쟁 속에서 새로운 형태의 피 흘림을 예고하고 있음이 아닌가?


인간의 본질에 대한 탐구는 철학과 과학의 가장 오랜 주제였다. 지난 18세기 계몽주의 시대 프랑스의 라메트리가「기계인간」의 개념을 제시함으로 출발한 소위 <생물학 결정론>은 모든 인간이 유전자에 의해 프로그램된 고도로 복잡한 기계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낳았다. 급기야 그것은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좋은 유전자를 지닌 사람만을 남겨놓아야 한다는 주장을 통해 열등한 인종을 도말(?)하는 히틀러 식의 급진 우익 사상까지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생물학 결정론에 반대하는 <문화 결정론>자들은 인간은 주변 환경과 교육 문화에 의해 언제든지 가변적으로 변화될 수 있는 존재라는 주장을 내세운다. 그러나 문화 결정론이 또 다른 극단으로 치우칠 때, 소위 행동주의 철학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인간을 환경적 자극에 의해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환경적 기계장치 또는 시스템으로 파악하게 된다.


결국 이 논쟁은, 인간이 안고 있는 피면 할 수 없는 두 가지 조건 <자연(Nature)>과 <문화(Culture)>에 대한 시각을 어떻게 갖느냐 하는 문제에서 비롯된다. 분명 인간은 자연적 요소를 지닌 존재이기도 하지만 또한 문화적 환경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되고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간을 파악하는 시각이 <자연>이냐 <문화>냐 하는 양자택일의 이원론에 빠질 때 결국 인간의 사물화(死物化)를 조장하는 이데올로기로 변하고 만다. 이데올로기화한 원리주의(原理主義)는 항상 위험요소를 안고 있다. 그래서 항상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균형 잡힌 생각을 유지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인간은 <자연>과 <문화> 사이에 존재한다. 그러나 그 중간 영역은 철학과 과학의 오랜 탐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완전히 파악될 수 없는 블랙박스(Black box)로 남아 있다. 내가 알 수 없는 어떤 영역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 그것이야말로 경직된 사고의 위험성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주는 균형 감각이며, 내 자신에 대한 무지로부터의 탈출을 위한 출발선이 될 것이다. 문명 충돌의 시대에 자신이 붕괴되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역사의 완충지대를 바로 읽는 지혜와 탄력성이다.


위 글은 2001년 10월 18일자 연변과학기술대학 신문의 <북산가 칼럼>에 실었던 글이다. 사회주의 국가의 대학 신문에 게재한 글이라 신앙적인 내용은 더 이상 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에 대한 그 해답을 논하기 위해서는 위에서 <블랙박스>로 처리 해버린 부분에 대한 신앙적 이해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인간에게 주어진 이성적 힘은 무궁무진해 보인다. 지난 20세기에 인류는 천체의 궤도를 예측하여 달과 화성에 로켓을 쏘아 올리고, 원자의 구조를 파헤쳐 신기한 반도체와 컴퓨터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그 이성의 힘으로 미사일의 탄도를 예측하고 원자 폭탄을 만들어 대량 살상을 일으킨다. 그것이 인간의 이성이 지닌 양면성이다. 어째서 이런 일들이 발생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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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제 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독일의 작가 헤르만 헤세는 그의 생애 최고의 대작이자 자신의 사상을 집대성한 작품 <유리알 유희>를 발표하여, 1946년 전후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는다. 그것은 나치스에 의해 갈기갈기 찢어진 독일 지성인의 자존심과 전쟁의 광란과 공포에 젖은 20세기 지성의 회복을 희구하는 헤세 문학 집념의 산물이기도 했다. 서기 2,400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미래소설이자 유토피아 소설인 <유리알 유희>는 인류가 20세기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나 지성의 회복을 통한 종교적 이상향을 건설하고 영재 교육을 통해 학문과 예술의 정신문명을 극대화하는 지적 유희를 벌이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인간이 만들어낸 학문과 예술의 최고의 경지를 헤세는 <유리알 유희>에서 마치 수학적 대위법으로 작곡된 바하의 파이프오르간 푸가(Fugue)를 연주하는 것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더 이상 정교하고 더 이상 웅장하며 더 이상 합리적이며 더 이상 경건할 수 없는 꽉 짜여진 위대한 음악… 그 음악의 명인들에 의해 펼쳐지는 유토피아라는 대곡은 마침내 연주될 수 있을 것인가? 과연 인간의 역사는 헤세가 지향하고 갈구했던 대로 이상향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가능한 일일까?


고대로부터 인간의 이성적 힘을 믿었던 소수의 사상가들은 탁월한 지도력을 지닌 소수 엘리트 혹은 철인(哲人)을 통해 다스려지는 이상국가(理想國家)를 만들고 싶어했으며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플라톤이 그랬고 공자가 그랬다. 그 시대와 환경, 그리고 방법론은 서로 달랐지만 퇴계와 율곡이 그러했고 크롬웰이 그러했으며 마르크스가 그러했다.


지금부터 꼭 100여 년 전. 19세기말에서 20세기로 인류 역사의 수레가 역동적으로 올라서던 시기에 서구 세계는 17세기 이후 자신들이 이룩해 낸 과학기술의 혁명적 진보와 그에 따른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과학 혁명에 의해 형성된 기계론적 세계관이 인간의 이성을 신봉하는 계몽주의자들에 의해 진보주의(progressivism)라는 일종의 이데올로기로 변하게 되었고, 마침내 서구 지성인들의 자만심으로 표출되었다. 19세기 중엽 찰스 다윈에 의해 조심스럽게 제기되었던 진화론은 그와 같은 시대사조를 등에 업고 채 20년이 지나기도 전에 전 유럽과 미국을 뒤덮는 사회학적인 혁명적 풍조가 되었고 진화 사상이 되어 나타났던 것이다. 서구 열강이 전 세계를 제국주의 식민지 영역으로 패권 쟁탈을 하며, 그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난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전 세계가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으로 첨예하게 나뉘는 과정 속에서도 양 진영 모두 과학 기술의 무한한 발전과 더불어 마침내 인류는 20세기의 유토피아를 건설하게 되리라는 신념만은 서로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보주의는 현대성의 상징이었고 20세기를 여는 화두였다.


그와 같은 신념 틀 속에서 교육을 받아오던 사람들이 점차 그 꿈속에서 깨어나기 시작한 것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그리고 마침내 인류가 이룩해 낸 과학기술의 열매가 핵 폭탄이라는 엄청난 살상 무기로 등장하면서 온 인류를 핵전쟁의 위협 속으로 몰아넣기 시작한 그 무렵이었다. 한국 전쟁과 월남전의 참상, 끝없이 이어지는 냉전 상황 속에서 서구의 지성은 자신들이 가졌던 진보 이데올로기가 어쩌면 신기루에 불과할 지 모른다는 것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하였다. 그와 함께 소위 탈 현대, 즉 포스트모던 논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지적 논쟁이 일반 대중들의 삶 속에까지 파급되기에는 상당한 시간이 요구되었다. 여전히 교육 현장에서는 진보 이념이 신앙 고백처럼 설파되고 있었고, 대다수의 대중들은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왔던 것이다. 탈 현대의 외침은 20세기 지성이 이룩해 내었던 거대하고 냉혹한 기계문명에 대한 반발과 자성 그리고 인간 이성에 대한 회의와 불안감의 표출이었다.


그 불확실성 속에서 전 세계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던 911테러로 21세기는 그 서막을 연다. 곧 이어 반격으로 가해진 아프간과 이라크 전쟁은 세계인들로 하여금 지난 20세기 세계의 학문과 예술을 이끌어 가며 정치와 경제의 종주국이요 지성 국가로 자처했던 미국에 대한 극심한 반발과 실망, 그리고 분노에 사로잡히게 했다. 이성과 이념으로 시작했던 20세기보다도 감성과 경제 논리만을 앞세우는 21세기는 역사를 더욱 극심한 지적 공황과 불안으로 몰고 갈 가능성이 높다. 과연 인류는 이제 지성을 포기해야만 하는 것인가?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3)


하나님의 형상(the image of God)으로 창조된 인간… 그 특별한 인간의 본질에 대하여 성경은 세 가지 구성 요소를 암시하고 있다. 창세기 1장에는 하나님의 개입이 없이는 불가능한 창조행위를 표현하는 바라(bara)라는 동사가 단계적으로 세 구절에 등장한다. 첫째가 절대 무의 상태에서 시공간과 물질을 창조하는 1절이요, 둘째가 의식적 존재로서의 생물을 창조하는 21절이며, 마지막 세 번째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하는 27절이다. 인간은 이 세 가지 단계를 통해 물질적 요소(body)와 의식적 요소(soul) 및 영적 요소(spirit)를 함께 갖춘 존재가 되었다. 물론 유기체로서의 인간에게 이 세 가지 요소가 삼분법(三分法)적으로 독립되어 있지는 않다. 육체적 결함과 상처가 더러는 의식과 영적인 함몰을 가져오기도 하며, 영적인 치유가 육체의 손상을 회복시키는 결과로 나타나기도 하기에 인간은 이 세 가지 요소를 지닌 하나의 통일체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인간이 지닌 한계성을 근원적으로 파악하기 위하여 세 가지 요소를 분리하여 생각하는 것이 필요할 때도 있다. D. G. Barnhouse는 인간을 하나님에 의해 아름답고 완전하게 지어졌던 3층집으로 묘사하고 있다. 제 1층인 몸(body)은 흙으로 지어진(formed) 물질적 요소요, 제 2층인 혼(soul)이 인격성(personality)을 나타내는 요소라면, 제 3층인 영(spirit)은 하나님과의 대화와 교제를 가능케 하는 영성(spirituality)적 요소이다. 문제는 그렇게 아름다웠던 인간이 불순종의 죄를 지어 타락(fall)하는 그 순간 마치 원자폭탄이 터진 것과 같은 엄청난 재앙이 발생하여 인간의 본질적 요소를 근원적으로 훼손해 버린 것이다. 폭탄이 투하된 순간 하나님과의 대화를 가능케 하던 제 3층은 완전히 날아가 버리고(파편만이 희미한 흔적으로 남음), 인간의 지성, 감성, 의지를 나타내던 제 2층은 파괴되어 절반이 남았으나 남은 절반도 심하게 손상되었으며, 제 1층 육체는 그 순간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지만 폭발진동에 의해 보이지 않는 미세 균열(micro-crack)이 가득 발생하여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결국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너희가 반드시 죽으리라고 약속했던 대로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인간의 지성을 과대 평가했던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인간 스스로가 자신의 존재를 규정하고 파악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이성의 힘으로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고 믿었다. 무신론과 유물론으로 무장된 그들은 하나님의 자리에 대신 과학을 올려놓음으로써 새로운 부르주아 지배계층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들이 인간을 결정론적으로 이해하고 분석해 가는 과정에서 서구 사회에 처음 등장한 것이 <기계적 결정론>이다. 즉 인간을 단지 유전자와 생체 화학반응에 의해 결정되는 물질적 산물로 보는 견해이다. 이는 나중에 유전자 구조의 이해와 분자 생물학의 시작과 더불어 <생물학 결정론>으로 발전하며 다윈이즘에 의한 적자생존의 원리와 결합하여 자본주의 보수,우익 사상의 철학적 기초를 놓게 된다. IQ, 가부장적, 성적(性的), 사회적, 인종적 나아가서는 정치,경제적 불평등의 기원을, 인간 내부에 선천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유전적 원인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심리학 결정론> 또는 <문화 결정론>은 인간은 오직 그가 자라온 환경과 교육에 의해 결정되는 역사적 산물로서 파악한다. 의식의 정신적 진화과정을 변증법적으로 기술한 헤겔에서 출발하여 인간 행동을 외부 자극에 의한 학습된 반응으로 파악한 스키너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인간의 정신 현상을 철저히 탈 신격화(脫神格化)한다. 이는 교육과 학습을 통한 사회변혁을 꿈꾸는 좌익 급진 사상에 영향을 주며 역시 다윈이즘의 자연도태의 원리와 결합하여 프롤레타리아 혁명 계급투쟁의 사회주의 철학으로 발전해간다.


인간은 비록 불완전하지만 자유 의지를 지닌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의 행동에 도덕적 책임을 담당해야 한다. 그러나 생물학 결정론이든 문화 결정론이든, 결정론적 세계관으로 바라본 인간에게는 도덕적 책임이 사라지고 만다. 그가 어떤 사회적 문제나 불평등이나 혹은 폭력을 야기하거나 당하더라도, 그것은 생물학적 원인 혹은 그가 처했던 환경적 원인에 의해 불가피하게 발생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상 위에 유토피아를 꿈꾸고 출발했던 결정론적 세계는 오히려 날이 갈수록 심각한 사회적 질병과 경제적 불평등 그리고 끔찍한 전쟁으로 지난 20세기를 점철시켰다. 보수 우익 사상이 빚어낸 우생학은 생명경시 현상으로 나타나 나치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 일본의 남경대학살과 713부대의 만행을 일으켰으며, 좌익 급진 사상이 일으킨 공산 혁명은 사회주의 국가마다 엄청난 피의 숙청을 불러왔다. 결정론주의자들은 타락한 인간의 이성이 얼마나 심하게 왜곡되어 있는지를 몰랐다. 그들의 이성은 너무나 불완전해서 인간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그 불완전한 이성으로 완전한 이상사회를 결코 이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동서 냉전으로 팽팽히 맞서던 20세기가 그 균형을 상실하고 사회주의의 몰락으로 내닫던 1980년대 후반부터 미국과 영국 사회를 중심으로 신 우익(New Right)이라고 부르는 정치권력이 새롭게 형성되기 시작했다. 레이건 과 대처를 거쳐 부시와 블레어로 이어지는 일련의 정권들의 배후에는 생물학 결정론의 사상으로 새롭게 무장하여 세계의 정치,경제 질서를 보수 우익의 패권 하에 재편하려는 움직임이 깔려있다. 그들은 기독교 근본주의와 결합하여 세계평화와 자유수호를 위한 신탁 국가로서 타민족을 징벌하는 정의의 칼을 휘두르며 새로운 십자군 운동과 우생학을 펼쳐가기 시작했다. 2000년 6월 26일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과 영국의 블레어 총리는 인간의 DNA 염기 서열의 위치를 판독하려는 인간게놈 프로젝트(Human Genome Project)의 초안을 발표했다. 그것은 생물학 결정론의 위대한 승전보였으며 신 우익 세력의 21세기를 향한 선전포고였다.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 하버드와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 옥스퍼드는 세계의 학문 정신을 이끌어 가는 최고 지성의 명문대학들이다. 그곳에 현대 진화론의 생물학 결정론을 주도하고 있는 두 선두 그룹들이 있다. 하버드 대학의 에드워드 윌슨과 옥스퍼드 대학의 리처드 도킨스가 그들이다. 강자의 생존을 위해 약자를 공격하는 것이 자연이 만들어낸 정당한 법칙이라는 그들의 논리가 이 두 기독교(?) 국가에 팽배해 있는 것이다. 마치 서구의 중세 시대가 표면적으로는 로만 카톨릭의 기독교 국가였지만 그들을 지배하던 철학과 과학 사상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헬레니즘 철학과 과학으로 무장되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중세 수도원 운동에서 출발한 옥스퍼드 대학, 청교도 정신으로 세워진 하버드 대학이 전 세계 인본주의의 산실로 탈바꿈한 사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하버드 대학의 설립 이념에는 모든 학문의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정신이 드러나게 하겠다는 선언문이 유리알처럼 빛나며 아직도 남아 있다.


유리알은 또 다시 깨어졌다.
그리고 윌슨과 도킨스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충격과 공포와 죽음의 현장…
깨어진 가정과 울부짖는 어린아이들의 울음소리…
포화의 연기 속에서 무너지고 스러져 가는 인간성들…배반과 약탈, 방화…
지난 세기 전쟁의 잔혹함을 경험했던 우리 민족에게 이 일은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저들의 통곡과 눈물의 상처들이 치유되기 위해,
이제 또다시 얼마나 많은 순교자의 십자가가 저 땅 위에 세워져야 할지…
사막의 모래 바람이 메마른 가슴을 스친다.

[최영기] 교회에 나와서 기도합시다

행복한 교회생활


교회에 나와서 기도합시다


한국 교회 자랑거리 중의 하나가 새벽 기도입니다. 성도들이 아침 일찍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하루를 시작하는 예가 세계 어느 곳에서도 보기 힘듭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새벽 기도에 문제가 노출되기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기도회라고 하지만 참석하신 분들이 기도에는 별로 시간을 드리지 않는 것을 봅니다. 기도 아닌 다른 순서가 시간을 많이 잡아먹기 때문입니다.


또한 참석 자체가 어려워졌습니다. 교통 수단의 발달로 근처에 있는 교회가 아닌 먼 곳 교회를 다니는 분들이 많아졌습니다. 이런 분들이 새벽마다 교회를 찾아 오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이 두 가지 문제를 감안하여서 저희 교회에서는 새벽 기도 시간을 갖되 예배를 드리지 않습니다. 시간도 제가 본당에 나와서 기도 드리는 시간인5시부터 8시 사이 아무때나 교회당에 나와서 기도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예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새벽에 교회당에 나와 기도하도록 하는 이유는 교회에 나와야 기도가 더 잘 되기 때문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집에서 기도하면 교회 오가는 시간을 절약하기 때문에 더 많은 시간을 기도에 바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를 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실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집에서 새벽에 일어나 정해진 시간에 기도한다는 것이 여느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시간을 정해서 교회당에 나와 기도할 때에 규칙적으로 기도를 할 수가 있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기도할 때에는 소리 내어 기도하는 것을 권장합니다. 웬만큼 기도훈련이 되어 있는 분이 아니면 소리내지 않고 속으로 장시간 기도한다는 것이 무척 어렵기 때문입니다. 졸든지 잡념과 싸우다 시간을 보내는 것이 보통입니다.


수요 저녁과 토요 새벽 기도회 시간에는 예배를 드립니다. 그 후에 중보 기도 시간과 개인 기도 시간을 갖는데 이때에는 큰 소리로 부르짖어 기도하도록 합니다. 부르짖어 기도하면 기도에 집중도 되고, 응답에 대한 확신도 생기고 영적으로 눌렸던 것이 풀어지기 때문입니다. 기도 내용을 옆 사람이 듣지 못하도록 배경 음악을 크게 틀어줍니다.


큰 소리로 기도하는 사람이 있으면 기도를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더 큰 소리로 기도해서 옆 사람 기도가 귀에 들어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기도는 한 가지 형태만을 고집해서는 안 됩니다. 묵상 기도, 대화식의 기도, 부르짖는 기도 등, 골고루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함철훈] 광야, 밤과 낮

eKOSTA gallery


광야, 밤과 낮






죽을 만큼 배가 고프면 빵으로도 보일만한 돌덩어리가 흩어져 있는 황무지입니다.


눈을 돌리니,






사람들이 애써 외면하고 있는 유대 광야에 길이 어지럽게 보입니다.


아무도 다니지 않은 마른 땅에 동물들과 해와 바람이 낸 길입니다.






밤새 바람이 식힌 땅을 낮엔 해가 덥히고






다시 달과 별이 유대 광야를 소리없이 채웁니다.






달도 없는 그믐 밤 멀리 이스라엘 성에서 타고 있는 세속의 빛이 하늘을 물들입니다.


*(새벽 1시 못내 이해가 안된다는 이스라엘 군인의 검문과 의심을 받으며 유대 광야에서 이스라엘 성을 바라보며 촬영한 사진입니다.)

[유영진] 하나님의 손을 보는 유학의 삶

유학생의 삶 (9)


하나님의 손을 보는 유학의 삶



이 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저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가로되,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너희중에 무릇 그 백성된 자는 다 올라갈지어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대하 36:21-23)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장 11장을 시작하면서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히11:3) 이라고 권면하고 있다. 이땅의 물리적인 세계에서도 눈에 보이는 것은 대부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는다. 눈에 보이는 날씨의 변화는 눈에 보이지 않는 대기권의 변화로 인함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히터와 전등도 결국은 눈에 보이지는 않는 전자력의 영향이다. 온 우주가 유지되는 것도 온갖 힘의 작용이다. 사회 현상도 마찬가지이다. 경제학이든, 사회학이든, 경영학이든, 눈에 보이는 사회현상은 결국 눈에 보이지 않는 변수들의 상호역학작용에 의한 것임을 우리는 배워서 알고 있다. 시장에서의 가격이라고 하는 눈에 보이는 변수는 결국 수요와 공급이라고 하는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서 결정이 된다고 배웠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지혜로운 자와 지혜롭지 못한 자들의 차이는 바로 이와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배후의 힘의 역학을 이해하는냐 하지 못하는 냐에 있다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와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의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결국은 모든 학문의 궁극적인 종착점이라고 하겠다.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도 결국은 개인의 삶, 한국가와 사회의 변화를 보면서, 그 역사의 변화를 일으키는 원동력을 바라보는 시각을 얻기 위함이다. 따라서 역사를 공부하고 이해한다는 것은 한 개인과 국가의 삶을 풍성하게 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한 시대를 풍미하는 리더들을 가까이서 만나면 남들에게서 만날 수 없는 묘한 매력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한 시대의 흐름을 꿰뚫어 보는 그 시각의 매력이다. 얼마전 일본에서 한 때 가장 빠르게 성장한 회사였던 DoCoMo의 회장으로부터 직접 그의 경영관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21세기의 지식경제 시대의 일본사회경제를 놀라운 역사적인 통찰력을 가지고 바라보는 그의 혜안에 큰 감동을 받았다. Cisco의 회장 John Chamber도 그와 같은 인물이다. 시대의 경제, 사회, 기술의 흐름을 꿰뚫고 있는데에서 나오는 탁월한 시각이 있다.


개인이건 국가이건, 역사의 맥을 보지 못하고 사는 삶은 그 quality가 역사의 맥을 보고 사는 삶에 비하여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와 같은 삶은 계속해서 반복되어지는 삶의 패턴을 보면서도 그것에 대한 거시적인 반응을 하지 못하는 삶이다. 그때 그때 삶에 사건이 터질 적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에 바쁜 삶이다. 이번주는 시험으로, 다음주는 가족일로, 그 다음주는 교수와 세미나준비로 정신없이 끌려가면서 사는 삶이 바로 그런 삶이다. 그런 삶은 자신의 삶의 주도권을 잃고 사는 삶이다. 그래서 그곳에 내가 왜 있는지, 뭘하면서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삶이다. 어제 동료교수가 집에 가다가, 자신의 수첩에 그다음날 아침 8:30분에 약속이 잡혀있는 것을 보면서 비서에게 “What am I doing here at 8:30 tomorrow morning?”이라고 말하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그에게, “That’s what happen, when you let others control your life”라고 웃으면서 말했다. 불행이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역사의 맥을 보지 못하고 삶을 영위해 간다. 많은 기도를 한다. 병이 나면, 병을 고쳐달라고, 돈이 떨어지면 돈을 채워달라고, 직장이 없어지면 직장을 구해달라고, 마음이 불안하면 평안을 달라고, 교회가 어지러우면 교회가 평안하게 해달라고, 많은 기도를 한다. 그러나, 그 인생의 나가는 방향은 마치 안개속을 달리는 자동차와 같다. 두렵고, 답답하다.


역사의 맥을 잡는 것이 중요한 만큼, 어떤 시각에 역사를 보는가 하는 그 이상으로 중요하다. 결론부터 말하면, 하나님의 시각에서 역사를 보아야 한다. 나는 유학생들이 역대상하서를 읽으면서 자신의 개인의 역사와 그 속해있는 국가의 역사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보는 훈련을 하라고 권하고 싶다.


열왕기서가 솔로몬왕 때부터 이스라엘과 유대왕조의 멸망의 시점까지를 기록한 책인데 반하여, 역대상과 역대하는 정통 유대왕조를 중심으로 창세기부터 시드기야왕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갈 때까지를 왕실에 있던 기록을 중심으로 적은 책이다. 열왕기가 왕들의 치적뿐만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 앞에 범죄한 사건들, 엘리야와 엘리사의 활동, 그 당시 백성들의 고통받은 장면이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 반면에, 역대기는 매우 담담한 어투로 유대 왕들의 치적을 중심으로 기록을 하고 있다. 역대상은 성경책을 창세기부터 다시 시작해서, 그 지루한 족보를 줄줄이 엮어가고 있다. 왜 하나님은 역대상과 역대하를 쓰게 하셨을까? 그리고 왜 구약성경 한 가운데 그 책들을 넣도록 하셨을까? 이미 다른 성경책에 모두 기록된 이야기인 이스라엘과 인류의 역사를 왜 두 권의 책에 다시금 기록하게 하셨을까?


일반적으로 역대기는 에스라에 의해서 포로귀환시기에 쓰여졌다고 믿어지고 있다. 에스라는 고레스왕의 칙명으로 인하여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예루살렘의 성전이 다시 건축되어지는 상황에서 이 책들을 쓴 것으로 알려진다. 그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은 참으로 참담한 지경이었다. 국가는 없어지고, 왕실은 산산이 분해되었으며, 그들이 믿던 하나님의 성전은 돌부리하나 남지 않고 부숴졌다. 찬란했던 솔로몬의 궁전은 시랑의 굴혈이 되고 잡초가 무성한 황무지로 변해버렸다. 영화를 누리던 그들의 왕은 눈알이 뽑혀서 적들의 손에 끌려가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고, 그들 백성은 포로로 끌려가 이름도 알지 못하는 이방 신들을 섬기며 다른 민족의 종노릇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에스라는 역대기를 통해서, 이제까지 놀랍게 자신들의 민족을 축복해 주셨던 하나님의 사랑을 일깨워 준다. 그들은 선택받은 다윗의 후손이며, 그들의 조상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하나님께서 놀랍게 축복하여주었던 것을 일깨워 준다. 그는 눈에 보이는 환경의 지배를 받으면 낙심하고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려준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오늘 바로 이와 같은 황무지의 돌무더기 가운에서도 우리에게 유효하며 우리 조상을 지켜주셨던 하나님은 바로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이 역대기의 주제이다. 우리에게는 다윗과 같이 용맹한 왕도, 솔로몬과 같이 지혜로운 왕도 없고, 오히려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지만, 다윗과 솔로몬에게 하셨던 그 약속의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도 유효하다는 것을 설파하고 있다. 그는 역대하 마지막에 고레스왕의 성전재건축 명령이 오히려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였다는 것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상기시키면서 하나님의 말씀은 신실하시고 단 하나의 실수나 오차도 없이 하나님의 시간표에 맞추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고 있다. 역대기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주도하신 하나님의 손길로 우리들의 눈을 돌려준다. 그리고 역대기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역사를 볼 것을 우리들에게 권면한다.


역대기를 읽고 나서 이후의 예언서를 읽으면 하나님의 이스라엘 사랑하는 마음을 생각하며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감동적인 이야기들이 줄을 잇는다. 오늘 역대기를 읽으면서 그리고 그 이후에 계속되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말씀을 읽으면서 오늘날을 살아가는 나의 삶, 조국 한국, 그리고 이 땅 썩어져가는 미국을 생각해 본다.


우리는 나에게 주어진 힘든 상황, 한계적인 상황 앞에서 좌절하고 낙심한다. 더 이상은 어떻게 손댈 수 없을 정도로 썩어 들어가는 환부를 보고 포기를 선언하며 환자의 상처부위를 덮어버리는 외과의사처럼, 우리는 스스로를, 그리고 이 사회를 포기하고나 있지는 않은가? 이제까지 나를 지키고, 축복하시고, 보호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그 손길을 잃어버리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그분과의 약속을 잃어버리고 일방적으로 파기하였는지 모르나, 그분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은 신다는 것을 잊고 있지는 않았는가? 당신의 유학의 삶은 당신의 것이 아니다. 그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라. 지금 성공하고 있는가? 이스라엘민족의 고난은 가장 영화스러웠던 솔로몬왕의 시대때 이미 시작되었음을 잃어버리지 말라. 아니면 지금 고통당하고 있는가? 예루살렘의 멸망도 결국은 하나님의 예정안에서 그분의 말씀대로 이루어졌음을 기억하자. 더 이상, 그때 그때 임시방편으로 살지 말자. 비롯 유학을 오는 결정은 기회가 있어서, 남들이 다와서, 직장이 지겨워져서, 아무 생각없이 왔다 할 지언정, 앞으로의 남은 유학의 삶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살아보도록 몸부림쳐보라. 이제까지 나를 위해서 살았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눈을 위해서 살았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마음을 채워드리기 위해서 한번 살아보자. 당신을 이곳을 끌고 오신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하자. 만일 당신이 당신의 삶을 놓고 역대기를 쓴다면 당신은 당신의 삶을 뭐라고 기록하겠는가?


한국의 사회와 교계의 모습을 보면서, 정치인과 경제인을 욕하기 전에, 반미 혹은 친미를 논하기 전에, 북한의 핵위협을 논하기 전에, 그 뒤에서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손을 바라보자. 전세계에 가장 큰 교회가 있는 나라, 가장 많은 나라에 선교사를 파송했다고 자랑하는 나라, 가장 뜨겁게 기도하는 전통이 있는 나라라고 자랑하기 전에, 썩어가는 한국의 교계와 정치와 문화를 바라보고 계실 하나님의 마음을 품어보자. 하나님의 손이 무엇을 어떻게 움직이시는 지를 주목하여 살펴보자.


미국을 생각할 때, 이락과의 전쟁이 옳고 그르고를 논하기 전에, 부시의 외교정책의 옳고 그름을 논하기 전에, 미국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바라보도록 하자. 역사상 유례없는 군사, 정치, 경제, 문화, 학문의 초강국이 된 미국, 신앙의 자유를 찾아온 청교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신앙과 자유를 바탕으로 한 정부를 세우기 위하여 6개월을 토론하며서 세운 나라 미국, 그 미국의 역사 뒤에서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인류를 향한 마음을 읽어보려고 노력하여 보자. 그 마음을 품으려고 몸부림쳐 보자. 인류역사상 유례없이 청교도의 신앙의 고백을 근거로 세워지고, 그들의 지폐에 “In God We Trust”라고 쓰는 나라인 미국. 그러나, 미국으로부터 무엇을 원하냐고 물어보는 뉴스위크 기자에게 한 이라크인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민주주의, 위스키, 섹스!” 전세계의 포르노 수출의 대부분이 미국에서 만들어지고, 타락과 향락의 상징이 되어버린 할리우드가 문화의 대명사가 되어버리고, 하루에 3000명이 넘는 unborn child가 낙태로 살인되어지는 이땅 미국을 하나님의 심장으로 한번 바라보기를 바란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라고 라오디게아 교회에 하신 말씀이 바로 오늘 미국에게 하고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90년대의 유례없는 경제 호황으로 엄청난 부를 쌓았으나, 하루아침에 그 부는 다시 천문학적인 숫자의 재정적자로 돌아섰고, 그 엄청난 부를 통해서 복음의 말씀의 도구로 사용하기 보다는,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하는 미국을 바라보면서, 가슴을 찟는 회개의 눈물이 있기를 바란다. 미국이 좋아서, 친미를 하기위해서가 아니라, 미국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해 보자. 만일 당신이 오늘 미국의 역사를 가지고 역대기를 기록한다면 무슨 말을 기록할 것인가?


이스라엘 민족의 역대기를 읽으면서, 내 자신의 역대기를 생각해본다. 한국과 미국 교회의 역대기를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