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호] 프롤로그 – 마흔 다섯의 헌신


is deck same as chapo?



여기 한 폭의 그림이 있다.



전쟁터에서 사랑하는 조카 롯을 구출한 후 승리감에 도취된 채 돌아오는 아브라함……
자신이 빼앗긴 부하와 재물을 되찾기 위한 계략을 품고 아브라함을 기다리는 사악한 소돔왕 베라…… 그들 사이를 가르고 떡과 포도주를 들고 갑자기 나타난 대제사장 멜기세댁……



이것이 바로 우리 크리스천들이 처해 있는 상황이다.
성경 전체의 내용을 압축적으로 담은 표지 그림이라고 할까?



크리스찬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분명 하나님의 힘으로 전쟁에서 승리한 사람들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임무는 죽음 가운데 놓인 우리들의 조카 롯을 구출하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전쟁의 전리품을 가득안고 기쁨에 가득 차서 승전가를 부르며 행진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현실은 결코 만만치 않다. 우리보다 훨씬 지혜롭고 계략이 뛰어난 사악한 소돔왕이 우리와 한판 승부를 걸고자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전쟁은 창과 칼의 전쟁은 아니다. 21세기는 경제 전쟁의 시대다. 오히려 떡을 사이에 둔 비즈니스의 전쟁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전쟁터 안에서 살아간다. 국제 사회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분쟁과 전쟁 상황도 그 이면에는 냉혹한 떡의 논리가 숨어 있다. 이라크 전쟁이 대표적인 예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순간 순간 선택해야할 수많은 떡들이 협상 테이블에 놓여있다. 소돔왕 베라는 음흉스런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맞이한다. 그리고 겉으로 멋들어지게 보이는 협상안을 제시한다. 내가 너에게 내 떡을 주마. 그리고 우리 사이좋게 지내자. 그리고 나에게 절만 하면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해결해 주마. 우리는 결코 그 유혹을 물리칠 만큼 강하지 않다. 항상 그 유혹에 넘어가고 먹어서는 안 될 떡을 취하고 소돔왕과 더불어 화친하고 마침내 그의 노예로 전락하고 만다.



떡의 문제는 불신자뿐 아니라 크리스천에게도 대단히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사람은 떡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떡의 문제를 도외시하고 초연하게 살아가려면 산 속으로 들어가서 수도승이 되어야한다. 그러나 가꾸고 변화시켜야할 이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한, 내 가정과 직장과 사회 속에서 떡의 문제는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히기 마련이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는커녕 세상으로부터 거꾸로 영향받아 도무지 구별되지 않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크리스천들이 얼마나 많은가? 대형 부정부패 사건마다 연루된 크리스천의 부끄러운 모습이 연일 보도되는 우리의 현실을 보라. 떡의 문제에는 목사든 선교사든 평신도든 어느 누구도 예외가 있을 수 없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떡이란 돈, 명예, 권력 등을 아우르는 포괄적 의미의 물질을 지칭한다.)



우리의 안팎에서 일어나고 있는 끝없는 전쟁…… 떡의 전쟁…… 그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떡의 본질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또한 전쟁의 발생 원인과 진행 상황을 바로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대처 전략을 세워야 한다. 그것을 위해 이제 포탄이 빗발치고 화염이 넘실거리는 그 전쟁터 안으로 직접 들어가고자 하는 것이다.



*



2003년 8월 9일, 나는 그토록 밟고 싶었던 북녘 땅 평양을 방문했다. 평양과기대 건립을 위한 협의를 위해 김진경 연변과기대 총장, 김동호 높은뜻 숭의 교회 목사를 앞세운 방문단이 평양 순안 공항에 발을 내딛었다. 개인적으로는 지난 수년 간 네 차례의 방북 시도 끝에 얻은 소중한 순간이었기에 더욱 감회가 넘쳤다. 많은 외국인들이 북경발 고려항공에 우리와 함께 동승하고 있었다. 이념과 대립으로 막혀있던 그 땅도 마침내 경제 전쟁의 소용돌이에 서서히 휩싸이며 문을 열고 있음을 느끼게 했다. 그들에게도 결국 떡의 문제가 가장 중요한 핵심 과제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의 젊은이들에게 생명의 떡을 주기 위해 시작하는 평양과기대 프로젝트…… 그러나 그것을 철저히 경제적 떡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우리를 맞이하는 북측의 당국자들…… 그것은 실로 생명의 떡과 육신의 떡이 맞부딪치는 첨예한 전쟁이 아닐 수 없다.



이번 평양 방문은 나에게 앞으로 남은 인생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에 대해 진지한 생각을 하도록 만든 특별한 계기가 되었다. 방북 전날, 갑상선에 종양이 발견되었다는 종합검진 결과를 전해 듣고 급히 조직검사를 받았다. 혹시 악성종양일수도 있으니 받고 떠나라는 의사의 충고 때문이었다. 비록 갑상선 암은 손쉬운 축에 속한다고는 하지만 병원 침상에 들어 누워 검사를 받는 순간부터 야릇한 감정에 휩싸이게 되었다.
생명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는 기회가 되었고, 지나온 시간들과 남기고 온 가족을 깊이 생각하며 평양에서의 첫날밤을 보냈다. 평양에 들어가기 직전에 이런 일을 통해 인생에 대하여 반성토록 만드시는 하나님의 감추어진 의도가 강하게 느껴지면서도 여섯 살 짜리 어린 데이빗을 생각하니 갑자기 가슴이 저려오기 시작했다. 공연한 상상이 발동되기 시작했다. 만일 정말 암이라면……?
그리고 내가 죽게 된다면? 지금 당장 죽는다 하여도 전혀 무섭지는 않았다. 그리고 아깝거나 후회되는 일도 없는 것 같았다. 지난 10여 년을 열심히, 그리고 치열하게 살았다는 그 추억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이 되었다. 그러나 두고 갈 가족에게 상처를 안길 것을 상상하니 그것이 가장 아팠다. 그것도 어린 아들 데이빗에게 어떻게……?
귀국 길에 인천 공항에 다시 도착하자마자 친구 의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양성으로 판정났으니 크게 걱정할 것 없다고……



홍성사 발행인인 이재철 목사께서 앞서 출간한 나의 책 <예수는 평신도였다>와 곧 출간케 될 <루카스 이야기>의 원고를 읽고 난 후, 칭찬과 격려의 메일을 보내주셨다. 평양 방문 후 잠시 서울에 머무는 동안 점심 식사 초청을 해 주셨다. 자장면 한 그릇씩 하자고…… 아마 내게 무슨 해주실 말씀이 있으셨던 것 같았다. 동네 중국집에서 자장면을 배달하여 집 마당에서 소박한 오찬을 나눈 후 목사님은 내게 근처의 양화진과 절두산 묘역을 산책하자고 제의했다. 개화기 서양 선교사들이 머나먼 동방의 작은 나라 조선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찾아왔다가 죽어 이국 땅에 묻혀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조선인을 조선인보다 더 사랑하여 조선인과 더불어 살다가 이 땅에 묻힌 사람들…… 한국 기독교와 카톨릭의 성지가 바로 한 동네에 100m 남짓 거리를 두고 이웃하고 있는 것이다.



양화진 묘역에는 교회에서 단체로 방문한 관람객들이 여기저기 눈에 띠였다. 10년 전 중국에 들어가기 직전에 처음 이곳을 찾았을 무렵 휑하니 쓸쓸한 빈 무덤 사이를 홀로 거닐던 때와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이 목사님은 언더우드, 베델, 홀 선교사 등 한 분 한 분의 묘소에 이를 때마다 그분들의 삶의 뒷이야기와 역사적 의미를 실감나게 설명해 주었다. 아무도 돌보지 않던 양화진 묘소가 최근 들어 한국 기독교의 성지로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갑자기 관심을 갖게 된 한국 교회들이 그곳에 불필요한 자기 이름을 남기려고 노력하는 헛된 흔적의 모습들도 지적해 주었다. 그리고 보니 그곳에 있을 필요가 없는 이름들이 여기저기 눈에 띠었다. 우리 신앙인들조차 빠지기 쉬운 허위적 모습들…… 어떻게든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자 하는 그 욕심들…… 절두산 묘역 안에 있던 수백 년 된 느티나무가 교황의 방문을 맞아 강대상과 단상을 만들기 위해 설치해 놓은 콘크리트에 갇혀 까맣게 타죽은 모습을 보았다. 인간들의 명예욕의 굴레에 휘감겨 훼손되는 역사 유적지의 안타까운 현실이었다.



그러나 그 날, 내 마음을 가장 흔들어놓은 것은 아펜셀러 목사 묘역 앞에서 그가 내게 던진 말이었다. 한창 무르익어 일하던 나이에 목포 앞 바다에서 배가 충돌하여 물에 빠진 한 소녀를 구하기 위해 몸을 던져 익사함으로 일생을 마친 아펜셀러의 인생을 이야기하면서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이 자리에 서면 그가 자신의 목숨을 버린 나이가 마흔 다섯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감동을 느낍니다. 20-30대의 젊은 혈기라면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혹은 인생을 정리할 수 있는 노년의 나이를 지닌 분이었다면 또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사십대는 한창 자신의 사역과 일에 바쁘고 욕심이 생길 나이입니다. 가정과 사회에서 책임과 역할이 가장 두드러지는 그 나이에 어떻게 한 생명을 위해 자신을 버릴 수 있었는지 그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마흔 다섯의 헌신…… 그것은 나에게 새로운 도전으로 다가온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올해가 마침 내가 마흔 다섯의 나이를 통과하는 시점이었던 것은 우연이었을까? 한창 일에 대한 욕심이 불타오르고 가정적으로는 자녀들을 교육하고 뒷바라지하느라 걱정과 염려가 절정에 이른 시절, 가장 경제적으로 쫓기고 흔들리기 쉬운 이 시기에 나를 다시 불러 재헌신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강한 의도와 음성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음성의 내용은 이것이었다.
“네 생명을 내놓아라.”




*



김동호와 이재철……
나는 이 두 분을 함께 존경한다.
두 분과 개인적으로 나누었던 따뜻한 교제 때문일 수도 있다.



최근 <깨끗한 부자>라는 책을 펴내어 크리스천 물질관에 대한 뜨거운 감자에 손을 댄 김동호 목사…… 그의 유명한 <고지론>과 함께 이 책 역시 자칫 나약해지기 쉬운 많은 기독 청년들에게 세상 속에서 적극적으로 살아가며 승리할 수 있는 영감과 동기부여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부유한 교회와 교인들에게 면죄부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과 함께, 타락한 인간에게는 깨끗한 부자가 되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보며, 새로운 기복론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냐는 부정적 견해도 만만치 않게 제기되고 있다.



정신여고 강당에서 깨끗하고 성공적인 목회의 표본을 보이며 <주님의 교회>를 크게 부흥시켰던 이재철 목사…… 10년 목회 후 사임하겠다는 처음의 약속을 한치의 빈틈도 없이 지켜 교회 안팎의 놀라움을 자아냈던 분이다. 그러나 그의 행동 역시 혹자에게는 자기 의의 표출로서 비추어질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내가 이 두 분을 존경하는 이유는 이들의 이론이나 행동이 완전하다고 생각하거나 내 생각과 모두 일치하기 때문이 아니다. 떡의 유혹 앞에 노출된 부족한 인간들, 죄악에 깊이 물든 세상 속에서 그 어두움의 권세, 떡의 권세를 꺽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행동으로 결단하는 그 모습 속에서 배워야할 점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를 물들이고 있는 총체적 부패와 부정직 속에서 교회를 개혁하고 크리스천의 바른 물질관을 세우기 위해 선전포고를 하며 과감히 앞서나가는 용기가 너무 귀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사람들이 아니라 부족함을 인정하기에 몸부림치며 한 걸음씩 나아가는 도상에 있는 사람들이다. 비판하는 분들의 말도 더러 일리가 있지만,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이 두 분 같은 크리스천만 되었어도 우리 사회가 얼마나 달라졌을까?” 우리에게는 이들처럼 떡의 문제 앞에서 심각하게 고민하는 크리스천 리더들의 영성과 지성이 절실히 필요하다.



소돔 왕은 결국에는 심판받아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그런 왕이다. 하지만 소돔 왕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아브라함은 그의 책략에 쉽사리 넘어갈 수밖에 없다. 그 때 아브라함 앞에 나타난 신비스런 인물…… 의의 왕이요 평강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대제사장이신 그분이 홀연히 나타난 것이다. 그가 들고 있는 떡과 포도주는 전장의 탈취물이 아니다. 모든 전쟁 상황을 끝내기 위해 거저 주어지는 은혜의 떡과 긍휼의 포도주인 것이다. 그것을 받아먹은 아브라함은 비로소 이 전쟁의 주재가 하나님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자신의 얻은 것의 십분의 일을 멜기세댁에게 드린다. 그리고 담대하게 소돔왕 앞에 나아가 담판을 벌이는 것이다. —–



크리스천 물질관에 대해 어떤 이론을 제시하고자 할 생각은 없다. 나는 그런 자격이 없다. 왜냐하면 나는 떡의 유혹에 초연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처럼 언제나 실수할 가능성이 있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내 앞에 당면한 이 본질적인 문제를 끌어안고 독자와 함께 고민하며 해결점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것이다. 전쟁터로 떠나는 비장한 마음으로…… 그러나 전쟁의 승리를 확신하는 믿음으로……



성경은 한 마디로 떡 이야기이다. 떡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치열한 전쟁 이야기가 성경 안에는 가득 차 있다. 이제 그 피흘림의 현장으로 들어가고자 한다. 우리를 유혹하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떡을 찾아서…… 말씀 안에서 열 두 덩이의 떡을 골라낼 생각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내 자신의 모습을 반추하고 우리를 살리는 생명의 떡, 평화의 떡을 또한 새롭게 발견할 것이다.



2003년 8월, 평양 북경 그리고 서울

[차문희] School Prayer: Do children need it?

오늘은 지난 반 년 동안 함께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했던 K라는 보조 교사 한 분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K는 나이도 많으시고 한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아이가 학교에 가 있는 동안 특수 교육 클래스 룸의 보조 교사로 8년 동안 일을 해 오고 있다. K는 매일 하루에 한 시간씩 제 클래스를 도와 주었는데, 어느 날 제가 잠깐 미팅을 갔다 돌아 와 보니 아이들과 무슨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지 그녀를 향해 아이들이 집중을 하고 경청하고 있었다. 방해되지 않으려고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가 뒷자리에 살며시 앉아 K와 아이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B어린이가 질문했다. “그럼, 우리 마음 속에 계신 예수님을 믿으면 외롭지 않나요? 어떻게 예수님을 믿나요? 안 보이는데…” 다른 E라는 남자 어린이가 손을 들고 질문했다. “누가 그러는데, 예수님은 마귀의 친구라던 데… 난 교회에 가 본 적이 없어요.” 그러자 교회에 잘 다니는 D라는 짓궂은 남자 어린이가 말했다. “You are so dumb. The church is a Lords house, and if you do not believe in Jesus, you will go to hell.” 결국 서로 으르렁거리는 아이들을 진정시키는 K는 예수님, 하나님, 그리고 교회에 대해 아이들이 이해하기 쉽게 그림을 그려 가면서, 그리고 자기가 갖고 다니는 작은 성경책을 보여 주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순간, 창유리 밖으로 교감 혹은 교장 선생님이 지나가다가 혹시 들어 오셔서 참관 수업이라도 할까 봐 마음이 조마조마해지기 시작했다. (참고로, 조지아에서는 교사의 경력에 따라 교사들이 일 년에 1-3번씩 불시에 교육 행정관들로부터 참관 수업을 받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K의 설교는 계속되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렇게 주위가 산만하고 가만히 앉아 있지 못 하는 아이들인데 K의 설교에는 경청을 하고 질문도 하기 시작했다. 물론 모두가 기독교 적인 질문들이었다. K는 아는 범위 내에서 열심히 대답을 해 주느라 정신이 없었고 아이들은 평상시에 궁금해 오던 것들을 물어 보는지 아니면 다른 사람의 집중을 사기 위해서 질문하는지는 몰라도 계속된 질의응답 때문에 다음 시간이 되어서야 그 이야기들을 마칠 수 있었다.



아이들이 다른 클래스로 가고 나서 난 K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I know you are very good Christian, but you know it is illegal to talk about religion at the public school. 그러자 K는 나를 보며 I know Ms. Cha. I know the school rule and the law. You know something? First, these children with special needs really need someone in their heart. They have been sexually abused and neglected at home. They have not been exposed to love. They don‘t know how to love others because their families have never loved them. They need to know that God loves them no matter what. Also, if I get fired because I talked about the religion at school, then, the Lord has better plan for me. Don’t you think?”



신앙적으로 보면 K의 말도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다. 사실, K는 다른 교사들 처럼 교육학을 공부해 본 적도 없고 교사 자격증은 당연히 갖고 있지 않았지만 그녀는 아이들을 향한 사랑으로 삐뚤어지고 상처받은 아이들의 마음을 녹이는데, 특별한 자질을 갖춘 사람이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이들에게 “Jesus loves you even though your mom and dad don‘t take care of you. Invite Jesus to come to your heart and pray, and he will live and take care of you.” 이야기를 해 주면서 기도도 같이 해 준다고 그녀는 말했다.



미국의 공립 학교가 갖고 있는 문제점의 출발은 기도가 폐지되고 하나님의 위대함과 존엄성과 성경 적인 가치관을 학생들에게 가르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세계관에 대해서도 함께 이야기 할 수 없도록 법으로 정해 놓았기 때문이라고 대부분의 교사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하나님의 위대함과 존엄성, 그리고 성경적 가치관 상실은 급격 하는 이혼율, 가정 폭력으로 인한 불화를 가져 왔고 가정 불화는 상처받은 아이들에게 마땅히 가정에서 배워야 할 교육들을 받을 수 없게 되었으며 그러다 보니 이들은 discipline problem으로 학교 교육에 까지 악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에게 ‘기도’라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상처와 아픔이 있는 아이들과 부모들로부터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학대를 당한 대부분의 아이들은 정서적 불안으로 주위가 산만하고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사기 위해서 (attention seeking) 나이에 걸맞지 않은 행동들을 하게 되는데, 이들과 이야기를 해 보면 한결 같이 하는 말이 있다. “I don‘t like anyone. I hate myself and don’t like anything at all.” 그들은 세상의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고 세상의 어느 누구도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있다고 말하면서 늘 걱정과 근심이 얼굴에 가득한 모습들을 종종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들 중에서도 왠지 모르게 교회에 다니는 아이들은 좀 다른 모습들을 발견하게 된다. 언젠가 B 라는 4학년 초등학생이 한 이야기를 소개 한 적이 있다. “You know, my mom is an alcoholic, and she has done verbal and physical abuse to me, but I am going to pray God for my safety at home.” 그녀는 하나님께 기도함으로써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고 했다.



기도는 아마 우리의 필요가 무엇인지 알고 계시는 하나님과 대화를 통해서 하나님을 신뢰 할 수 있고 어느 누군가를 신뢰하다 보니 자연히 그를 의지하게 되고 상처받은 아이들에게는 평안과 위로가 되는 것이다. 우리들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빌립보서 4장 6-7말씀에도 아무 것도 근심, 걱정하지 말고 오직 기도와 간구함으로 하나님께 구할 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신다고 한 것처럼 나는 상처받은 영혼들의 기도를 통해 그들의 마음과 생각 속에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고 믿는다. 그리고, 마음의 위로가 되는 기도는 아이들의 시선을 한 곳에 집중하게 만든다. 흔히 정서적으로 불안하거나 상처받은 이들은 낮은 자존감 (low self-esteem) 때문에 사회의 관심을 사기 위해 좋지 못 한 길로 탈선을 하게 되기 쉬우나 기도를 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께 시선을 집중하게 되니 탈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아이들에게 중요한 기도는 종교의 자유라는 미국 헌법 때문에 다양한 인종들이 모여 있는 공립 학교에서는 폐지되었다, 물론 다 문화권인 미국공립학교에서 너무 기독교 적인 사상으로 강요하고 억압하면 안 되겠지만 그래도 미국이라는 나라가 처음 탄생한 역사적 배경을 보면 종교의 자유를 찾아 온 청교도 정신인데, 정교 분리는 참다운 청교도 정신을 서서히 사라지게 만들었고 도덕적 가치관 상실을 비롯해서 사회적 문제들을 만들게 되었다. 이런 극심한 사회 문제는 서로를 신뢰하지 못 하게 되었고 서로를 섬기려는 마음보다는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위 풍토가 자리를 잡게 되었고 마음의 상처만을 만들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옛 청교도 정신으로 돌아가려면 어떻게 할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정교 분리를 없애고 누구나 자유롭게 기독교 적인 가치관을 나눌 수 있게 하고 기도도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어야 한다. 성탄절이 되면 교사들이 자유롭게 아기 예수 탄생에 대해 가르칠 수 있게 하고 부활절에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아이들의 생각들을 자유롭게 나눌 수 있도록 교육 과정 (curriculum)자체가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고창현] 한국교회가 왕따를 당하는 이유 – ①열린 마음으로 진지하게(attentive) 들어주는(listening) 자세가 필요합니다

왕따를 당할 수밖에 없는 한국교회


“한국교회가 지역사회나 이웃에 기여한 것이 무엇이 있냐? 오직 자신들의 배만을 채우는 것이 기독교인들이다.”
“성경과 예수의 가르침에 역행하는 것이 한국의 기독교다”
“한국사회에서 가장 권위적인 집단이 교회다”
“한국의 기독교는 역사의식이라고는 손끝만큼도 없다.”
<언론사 홈페이지의 독자 게시판에서 부분 발췌한 글들>



10여 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후, 제가 충격적으로 받아들이는 한국의 사회적 현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한국의 기독교인(여기서는 개신교인 만을 의미)들이 한국사회로부터 엄청난 왕따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솔직히 어느 정도 이미 예상했던 현실이었지만, 막상 한국 땅에서 직접 경험해 보는 한국사회의 시선은 차갑기 그지없습니다. 정말 왕따라는 단어처럼 한국교회의 현 위치를 명확하게 설명하는 것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왕따’란 알다시피 ‘왕 따돌림’의 준말입니다. 그리고 제가 볼 때, 한국교회는 한국사회로부터 왕 따돌림, 곧 무시를 당하고 있습니다.



물론 일본의 ‘이지메’로 시작된 청소년들 사이의 ‘왕따’처럼, 힘센 한국사회가 힘없는 한국의 기독교인들을 일방적으로 괴롭히고 따돌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한국교회는 한국사회가 그렇게 만만하게 보기에는 힘이 세져버린, 무시 못할 영향력을 행사하는 종교 단체가 되었습니다. 다르게 보자면 한국사회내의 불의와 잘못된 흐름을 향해 왕따를 선포하며(?) 이를 기독교적 관점에서 개혁할 수 있는, 그런 영향력을 가진 집단이기도 한 것입니다. 결국 왕따 당하기에는 만만치 않은 위치에 있음에도, 한국사회는 왕따 하기를 주저하지 않고 있습니다. 좀더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체념한 듯한 눈길로 한국교회를 향해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고 있는 듯 합니다.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제가 볼 때는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왕따 당할 행동을 너무나 골라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론매체를 통해 접하는 교회 관련 기사나 방송을 보면 한국사회의 이러한 시각을 단면적으로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좀 잊혀지겠다 싶으면 여지없이 교회나 기독교 선교단체?학원?재단과 관련된 도덕적, 정치적 문제들이 언론에 등장합니다. 목사, 장로, 집사, 신학생이라는 직위를 가진 사람들의 개인적인 치부 또한 심심지 않게 등장하여 비기독교인들 뿐만 아니라 우리 기독교인들의 낯짝을 붉게 만듭니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언론매체들이 한국의 대다수 기독교 언론들처럼 마냥 친 기독교적인 언어로, 은혜롭고 덕스럽게만 한국교회를 묘사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사나 방송이 나간 언론사 홈페이지의 독자의견란을 찾아가면 한국사회 전반에 골고루 퍼져 있는 왕따 문화의 실체를 파악하게 됩니다.


올려져 있는 글들을 보면 거의 대다수가 기독교를 성토하는 시민들의 체념 섞인 글들인데, 문제는 기사화 된 내용과는 별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기독교를 공격하는 글들을 자주 엿보게 된다는 점입니다. 마치 네티즌 개개인이 지난 수년간 한국 기독교로 인해 많은 상처와 실망을 경험한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단군상 철폐 논란이나 교회세습문제 때도, 작년 초 월드컵을 앞두고 한 보수적인 기독교 연합회에서 ‘붉은 악마’를 ‘하얀 천사’나 ‘붉은 호랑이’로 바꾸자며 개명운동을 벌이는 중에도, 올 1월과 3월 두 여중생의 죽음을 추도하는 촛불시위에 반대하는 반공 이데올로기적 집회를 연달아 가지는 가운데서도, 한국교회는 인터넷 상의 각종 게시판에서 엄청난 무시와 수모를 당해야 했습니다.



글들을 읽다보면 얼굴이 후끈후끈 달아오며 내가 믿고 따르는 종교가 이렇게도 한국사회 속에서 신망을 잃었는가 하는 절망감마저 듭니다. 도대체 어쩌다가 한국교회가 한국사회에서 이런 평판을 받는 신앙 공동체가 되었는지, 그동안 왜 우리는 이러한 세상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답답한 마음이 들뿐입니다.



물론 이들의 주장이 모두 타당하거나 올바르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개중에는 상당히 주관적인 잣대를 가지고 일방적으로 한국교회를 재단질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들의 비아냥거림이 틀렸다 라고 자신 있게 말할 용기는 솔직히 없습니다. 왜냐하면 분명 지난 20-30여 년 간 한국교회가 주변의 이웃들보다는 교회 공동체 안의 자신들에게만, 그리스도인의 내적 성숙보다는 오직 외적인 고속성장에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보다는 축복에만 집중해 왔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는 그동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속에서 “어떻게 구원받느냐?”(“How to be saved?”)에만 지나치게 관심을 두었지, 성경이 구원받은 자에게 변함 없이 강조하는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야 할 것이냐?”(“How to live as a Christian?”) 에는 너무나 무관심했습니다. 그리고 왕따는 결국 이러한 편식된 흐름의 결과물인 것입니다.


왕따를 당하는 또 다른 이유


“원래 기독교인들과 논쟁하면 싸움밖에 되지 않는 이유가 있죠. 논리 내 세우다 안 되면 결국 하는 말이, “넌 믿음이 없어서 그래”라고 말하죠. 즉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그 어떤 소리도 악마의 소리”
“왜 기독교인들이 말을 잘 하는 줄 아십니까? 기독교인들은 비 기독교인들과의 대화를 서로의 입장과 생각을 나누는 장으로 이해하기보다는 꼭 이겨야 되는 말싸움의 장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듣기보다는 으르렁거리며 결사적으로 덤벼들죠.”
<언론사 홈페이지의 독자 게시판에서 부분 발췌한 글들>



하지만 이러한 한국사회의 분위기를 단순히 세상(?) 언론을 통해 전해진, 일부 부조리한 기독교인들의 행실, 곧 ‘삶과 괴리된 신앙’의 탓으로만 돌린다면 그것은 현재의 왕따 문화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분명 한국교회는 ‘삶과 괴리된 신앙’으로부터 ‘삶과 함께 하는 신앙’으로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값싼 복음이 아닌 값진 복음으로 만들,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양성해야 하며, 이것이 이 왕따에서 자유해지는 근본적인 접근방법일 것입니다.



그러나 더불어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후기 현대주의적 사회의 특성을 올바르게 파악함으로서 그 특성에 맞게 지혜롭게 대처하는, 방법론적인 접근 또한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것 못지 않게 우리가 빛을 내고 맛을 내야될 이 세상을 바로 알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개혁해 나가는 동시에 우리가 속해 있는 사회의 특성과 변화를 깨달아, 이에 맞게 효과적으로 우리의 신앙을 비 기독교인들에게 전달하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왜이리 왕따를 하는지 한편으로는 마음이 상하면서도 문제의식을 가지고 게시판에 올려진 냉소적인 글들을 챙겨 읽고, 또 비 기독교인들과 지속적인 대화의 시간을 갖다 보면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외형적으로 그들을 실망시키는 것은 눈에 보이고 드러나는 한국교회의 부조리일지 몰라도, 내면적으로 비 기독교인들이 우리를 향해 참으로 답답해하는 것 중에 하나는 바로 우리의 일방적이고, 들으려고 하지 않는 자세(attitude) 라는 점입니다. 한마디로 기독교인들은 도대체 말이 안 통하는, 꽉 막힌 사람들이라는 생각에 혀를 차며 우리를 더욱 왕따 하는 것입니다.



비 기독교인들의 시각에 우리 기독교인들은 꽤나 고집 센 대화상대로 인식되어 있습니다. 자신들의 의견이나 주장은 철저하게 챙겨 밝히면서도 상대방이 이야기 할 차례가 되었을 때는 좀처럼 진지하게 들어주지 않는, 그런 매너 없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마치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철옹성과 같은 자세로 비 기독교인들과 대화합니다. 물론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살아가야 하는 우리로서는 비록 “적은 누룩”과도 같은 상대방의 의견이라 할지라도 이를 방치하면 엄청나게 부풀어올라 우리의 신앙을 뒤흔들 수 있기에, 될 수 있는 한 이런 이교도(?)들과는 상종하지(대화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깨어 경계하는(?) 자세로 대화하는 것이 옳다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많은 경우에 목회자님들이 우리를 그렇게 교육해 오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계의식 때문에 우리는 그들과 잘 대화하지도 않을 뿐더러, 혹 하더라도 마음의 문을 열고 진지하게 상대방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 주지 않습니다. 그러니 비 기독교인들과 접촉할 기회는 점점 줄어들고, 그러면 그럴수록 한국사회는 우리 기독교인들을 ‘그들만의 리그’속에 정신 없이 빠져 있는, 배타적인 존재들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한국사회 속에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드러낼 수 있는 우리의 영향력은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접촉점이 없는데 어떻게 그들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 계심과 역사 하심을, 지금 이 순간에도 이 세상의 영혼들이 구원받기 원하시는 그분의 마음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또 접촉점이 있어도 진지하게 비 기독교인의 입장을 알려고 하지는 않고 무턱대고 “내 말부터 들어 보라”고 하는데 어떻게 그들이 자신의 마음을 열겠습니까?



기독교에 대해 우호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과 부담 없는 대화를 나눌 때야 염려할 것이 없겠지만, 행여나 상대방이 한국교회 내의 뜨거운 이슈(단군상 철폐, 교회세습, 기복주의, 교회권력, 헌금 등)나 자신이 속한 교회나 선교단체의 문제점들에 대해 질문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순식간에 마음의 평정을 잃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상대방에게 틈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들어주기보다는 일방적으로 우리의 주장만을 내세울 때가 많습니다. 행여나 들어줘도 성실하게 들어주지 않습니다. 좀 들어주다가도 아직 믿음이 없어서 그렇다느니, 지금 영적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느니 하는, 비 기독교인들이 이해하기에는 힘든 기독교적 용어를 써 가며 상대방의 말을 자릅니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대화를 통해 서로가 유익을 얻기보다는, 이기기 위한 말싸움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더 많습니다. 상호교환 되는 대화가 아닌 일방통행 식의 대화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세는 궁극적으로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득보다는 더 많은 실을 안겨 주게됩니다. 짧게 보면 그 순간의 ‘억지승리’가 우리의 마음을 편하게 해 줄지 몰라도, 길게 보면 결국 기독교를 왕따 할 또 한 명의 적대자를 양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한국의 한 출판사에서는 아주 흥미로운 제목의 책이 한 권 나왔습니다. 제목이 “꼴통들과 뚜껑 안 열리고 토론하는 법”(뿌리와이파리, 2003)인데, 이 책의 저자인 독일인 철학자 슐라이허르트는 현 서구사회의 대표적인 꼴통들로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을 선택하고 이들과 대화하면서도 이성을 잃지 않고 토론하는 법을 책에 상세하게 기술했습니다. 한마디로 그의 눈에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도대체 대화가 안 통하는 ‘꼴통’들이고, 이들과 대화할 때는 감정 상할 일이 많다는 말입니다.


참된 기독교적 관용: ①열린 마음으로 진실하게 들어주는 것


“이러한 종류(성경말씀에 입각하여 이웃사랑을 실천하는)의 유니테리언주의와 화해할 수 없는 정통 신앙은 정통, 혹은 바른 교리라고 불릴 가치가 없다고 나는 믿는다. 내가 생각하는 참된 관용은, 자기 자신의 신앙에 대한 신념을 굽히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모든 정직한 신앙을 허용하고 참아 주는 것이다” (p, 186) (우찌무라 간조, “우찌무라 간조 회심기” 홍성사)


“4월 하순에 어떤 유물론에 조예가 깊은 친구의 예방을 얻어 연일 논의를 계속 하였다. 우리와 같이 태만하고 편협한 자에게 이처럼 동과 서가 멀고 적과 백이 다른 것처럼 전혀 다른 세계에 호흡하는 친구를 주어, 애씀이 적고 배움이 많은 기회를 주시는 섭리의 은총을 감사하면서 혹은 서로 ○○하며 혹은 서로 냉정에 돌아갔으나 대체로 그는 많이 말하는 편이요, 나는 대부분 듣는 편이었다” (김교신, 성서조선 1934년 6월)


“여러분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십시오. 주께서 가까이 계십니다.” (표준새번역 개정판, 빌립보서 4:5)



한국교회가 급속도로 성장했던 70, 80년대에는 근대주의 사회의 특징처럼 명제적으로 복음을 선포하고, 또 이원론적인 자세로 교회가 사회현상에 접근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었습니다. 교회가 애매모호한 모습을 보이기보다는 진리를 명확하게 선포하면서 이 진리를 믿으라고 사람들에게 외치는 것이,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타락한 세상의 모습을 분명하게 질타하며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 그 시대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 또한 명확하고 분명한 진리를 듣기 원했습니다. 하지만 해체주의(Deconstruction)와 다원주의(Pluralism)를 그 근간으로 하는 후기 현대주의에서는 개개인간의 인간관계 속에서 형성된 신뢰를 바탕으로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며,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상대방이 옳아도 내가 믿기 싫으면, 내가 상대방을 신뢰하지 못하면 받아들이지 않는, 그런 사회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후기 현대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진리의 내용(text)보다 이 진리를 다양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에게 소개(present)하는 소통(communication)의 지혜입니다. 종교 다원주의적 사회구조 속에서 우리는 어차피 여러 진리(종교)들을 접할 수밖에 없고, 이러한 진리들 중에서 내가 믿는 기독교적 진리가 참된 진리라는 것을 남들에게 납득시키려면, 진리의 내용 못지 않게 이 진리를 전달하는 방식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어차피 진리의 홍수 속에 있는 이상, 진리끼리의 대결구도를 통한 끝없는 대립과 갈등보다는 이 진리를 소개하는 방식에 사람들은 더 호감을 갖게 됩니다. 왜냐하면 후기 현대주의 사회에서 대결구도는 더 이상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정의하는 방법이 근대주의처럼 대결구도를 통한 명제적, 논리적 승리를 통해서가 아닌, 개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된 소식을 비 기독교인들에게 잘 전달하기 위해서는 먼저 들어주는(listening) ‘소통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것도 그냥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열린 마음으로 진지하게(attentive) 들어주는 자세 말입니다. 나중에 자신이 말할 기회를 얻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일단 들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 상대방과의 대화를 통해 그들이 무엇을 믿고, 왜 그것을 신봉하는지, 어떤 부분에 있어 우리 한국의 기독교에 대해 실망하고 있는지 배우고자 하는 마음으로 성실하게 들어줘야 합니다. 설혹 우리의 신앙 관으로는 도대체 말이 안 되는 억울한 비판이나 지적이라 할지라도 일단은 진지하게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자세로 나아갈 때, 상대방도 우리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기 시작할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 무엇인가 배울 수 있겠다는 마음 밭이 그들 안에 조성되는 것입니다. 결국 기독교인은 진지한 대화를 통해 이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우리가 어떻게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지 배울 수 있고, 반대로 비 기독교인은 진지하게 들어주는 우리의 자세를 통해 복음을 향해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소통의 지혜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관용’이라고 하는,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상당히 조심스러우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자세(manner)가 요구됩니다.



종교 다원주의적 사회 구조 속에서 그동안 한국교회는 세상을 향해 벽을 쌓으면서 대결만 하는, 비관용적인 자세로 일관해 왔습니다. 다른 비 기독교인들이 이해하든 이해하지 못하든 우리 식의 신앙적 잣대를 고수하며, 그 잣대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 잣대로 세상에 반응해 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상대방의 의견이나 관점을 존중해 주지 않게 되었고, 또 목소리를 내더라도 사회 분위기와는 동떨어진 주장만을 일삼으며 결국 왕따의 또 다른 원인을 제공했던 것입니다.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이 자신이 믿는 바를 확고히 하고 이에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소유해 나가는 것은 분명 중요하고도 필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신앙을 확고히 지켜 나간다는 것이 곧 비 기독교인의 의견이나 입장을 일체 들어주지 않는, 인정해야 할 것도 인정해 주지 않는, 그런 편파적이고 일방적인 신앙자세를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참된 기독교적 관용이란 “자기 자신의 신앙에 대한 신념을 굽히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입장과 관점을 허용해 주고 참아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용은 먼저 나와 다른 종교관?인생관을 가진 사람들의 의견을 열린 마음으로 진지하게(attentive) 들어주는(Listening)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다음 달 주제: 후기 현대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지혜
②자신의 신앙을 정중하게 소개해야 합니다

[반영운] 균형잡힌 유학 생활을 위하여

이코스타 2003년 9월호

글을 시작하며


해마다 이맘 때 즈음이면 많은 유학 새내기들이 저마다 가슴에 나름대로의 꿈을 품고 각 나라로 흩어져 간다. 대부분 각자의 전공을 좀 더 갈고 닦아서 각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이리라. 게다가 크리스천 학도들에게 있어서 유학은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유학을 통해 세상의 견문을 넓히고 영적으로 더욱 깨어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필자도 10여 년 전에 미국으로 유학의 길을 떠났던 경험이 있다. 유학생활 동안 많은 실패와 좌절을 겪으며 학문과 인생에 대해 조금씩 눈을 뜨게 되었다. 필자의 부족한 경험을 통해 유학 새내기들이 혹시라도 필자와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고 좀 더 나은 길을 걸을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글을 시작한다.


기독교인의 영적인 생활


당시 속칭 열성적인 (?) 크리스천으로서 필자에게는 어떻게 하면 유학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있었다. 이것은 다분히 교회생활과 전도를 염두에 둔 영적인 생활과 관계된 것이었다. 유학을 떠날 때 가졌던 신앙과 학문의 조화라는 화두가 내면에서 정리되기 전에 다시 한국에서 익숙해져 있었던 신앙생활의 습관과 함께 유학생활에 들어서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러한 생활이 어쩌면 필자에게 필연적인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영성에 대한 이해가 제대로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사람은 각자의 세계관이 허락하는 범주 내에서 사고하고 행동하며, 설령 세계관이 제대로 정립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 세계관이 제대로 소화되어 그에 걸맞은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은 또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특히 이국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영적인 생활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개신 교회 내에서 좀 열성 있는 그리스도인에게‘’’‘영적이다’ 는 말은 대부분 세상일에 신경을 덜 쓰고 교회 생활에 열심을 내며 전도하고 기도하고 명상하는 어떤 것이라고 이해되곤 한다. 세상을 이해할 때 다분히 부정적인 이미지를 품게 만들고 마치 벗어버려야 할 어떤 것으로 생각하게 한다. 기독교 신앙의 근거인 성경은 우리가 생활하고 있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려져 있는 세상에 대해 결코 부정적이지 않음을 이해해야 한다. 오히려 성경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다고 하시고 그 사랑하신 정도가 자신의 외아들을 주실 만큼이라고 한다 (요 3:16).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도 그의 공생애 전 삼십 여 년을 목수의 일을 하며 가족을 부양하고 사람들의 삶에 필요한 일을 하셨던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우리의 많은 신앙의 선배들도 세상에서 필요한 일을 열심히 성실히 했었던 것을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괴리가 생겨난 것일까? 그것은 다분히 성경 적이지 않은 이교 적인 사고가 우리의 사고에 침투해 들어왔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초대 교회 시절에 많은 문제를 일으켰던 영지주의를 비롯한 희랍철학 등의 이분법적인 세계관이 바로 그것이다. 육체적인 일들을 세상 적인 것이라고 하고 정신적인 것들을 영적인 것이라고 하는 사고에서 생겨난 이교 적인 것들이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하면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의 직업에도 선호가 분명하게 생겨났다. 학자, 성직자, 관리자 등 육체적인 일과 거리가 먼 직업을 더 영적인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더욱 큰 문제는 이러한 직업들에는 보다 많은 부와 명예가 따르도록 세상의 구조가 짜여져 버린 데 있다. 따라서 이분법적인 영성이해는 성서적이지도 못하고 오히려 교묘하게 인간의 욕심을 충족시켜 주는 이교 적인 것이며 우리가 만들어 낸 무서운 우상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이 부정하는 세상은 바로 죄 그 자체인 우리의 교만과 욕심에 기반을 두고 있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세상의 자랑 등에서 생겨나는 산물들이다. 성경에서는 세상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도록 요구하고 있으며 그 역할은 오직 예수님으로 인한 구원의 기쁨과 천국의 소망으로만 이루어 낼 수 있는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역으로 하나님이 지으시고 좋았더라고 하셨던 세상이 얼마나 중요하면 이러한 역할을 우리에게 주셨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흔히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영적이라고 하면 성경을 읽거나 기도를 하며 구제를 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성경을 열심히 읽고 기도를 열심히 하며 전도에 총력을 기울이는 행위 그 자체가 영적이거나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에서 경고하시는 대로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를 하고 구제를 하면 안 된다고 하셨다. 아마도 그것이 죄가 되거나 교만으로 연결되기 때문은 아닐까? 참으로 영적인 것은 성경을 읽고 그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세상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가야 할 길에 대한 뜻을 분명히 하여서 성경이 말하는 대로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이 하나님의 뜻대로 변해가도록 하는 과정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 앞에서 겸손을 배우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형성해 가며 날마다 회개의 걸음걸이를 연습하고 다시 한 번 순종을 각오해야만 한다. 흔히 우리가 훈련되어 온 틀에 박힌 전도의 행위를 통하기보다는 오히려 당신의 백성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자신을 감동시키시고 그러한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여서 세상 속에서 이기적인 삶을 버리고 하나님의 의를 찾아가는 적극적인 전도를 통해 잃어버린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거기에는 흔히 세상에서 말하는 실패도 성공도 없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극한 정성으로 다루시며 당신의 사랑을 경험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가 있을 뿐이다.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을 구분해 내려는 노력을 함에 앞서서 삶의 여정을 통한 하나님의 거룩을 경험해 보고 그 속에서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의 손길을 느끼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갈 때 치우치지 않는 걸음걸이가 중요하다.


학문, 영적인 예배


그렇다면 유학생에게 있어서 어떤 것이 영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유학생이라고 하여 일반 그리스도인보다 특별히 중요한 다른 삶이 있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유학생들에게는 좀 다른 무엇이 있다. 그것은 바로 유학을 통해 각자의 분야에서 실력 있는 전문가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자칫 위에서 지적한 치우친 세계관에 의해 성과 속에 대한 그릇된 구분으로 인해 섣불리 열정적인 종교생활에 휩싸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에게 있어서 종교에 열심을 내게 될 때 그 종교는 한 사람의 모든 생각과 행동을 통제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 종교가 바르고 치우치지 않는 가르침을 제공하면 좋으나 많은 종교가 의식에 빠지고 종교행위에 그치게 되는 경향이 있다.


성경을 통해 한 가지 분명해지는 영역이 있다면 그것은 예배라는 영역일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예배는 교회당에서 성직자에 의한 일정한 의식을 행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여지고 있다. 심지어는 더 이상은 피 흘리는 제사가 필요 없게 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인 현재에도 제사로서의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주소이기도 하다. 그러한 현상은 바로 목사를 성직자로 그리고 신약의 레위 족속으로 이해하고 있는 데서 근거를 찾아 볼 수 있다. 특히 목사를 레위 지파로 이해하는 것은 다분히 우리의 예배가 구약 적인 의미의 특정한 제사장을 중심으로만 드려지는 중요한 의식임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초대 교회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던 속칭 평신도 (성경 적인 용어가 아님)의 세례문제나 설교문제가 현대에 와서는 왜 그렇게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그리고 현대 교회의 예배가 의식 중심의 중세교회의 전통을 벗는 표시로서 설교중심으로 변모하면서 전문적인 설교가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형식적인 예배가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구원받은 백성에게 있어서 진정한 예배란 무엇일까? 로마서 12장 초반부와 성경전체가 말하는 참 예배란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살아가는 일상의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예배가 종교적인 의식의 집행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주 상식적인 일일 수밖에 없다. 즉 우리 개인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일들이 우리가 성심으로 드려야 할 예배가 아니라면 우리 주류 기독교는 어느 새 한쪽으로 치우친 이단종파의 하나가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우리 유학생들이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해외로 나가 공부하는 목적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유학을 통해서만 학문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절대 아님을 명시해 둔다). 요즘 우리가 하는 학문의 영역과 그 내용을 보면 우리 인간의 삶의 대부분을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래된 학문부터 신흥학문까지 모두 다 인간의 정신부터 실제적인 삶의 대부분을 다루고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학문은 단지 세상에서 일정한 삶의 수준을 유지하고 흔히 말하는 거룩한 일인 전도의 도구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우리 그리스도인이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해 내야 할 바로 그 현장이다. 죄에 빠져있는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당신이 친히 고난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예수님의 모델이 구약 적인 의미에서 최상의 예배였다면, 이제 예수께서 드리신 제사와 예배의 본을 따라 우리는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고난과 눈물의 예배를 드려야 한다. 그 중의 하나가 우리가 하고 있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학문을 함에 있어서 진정한 예배를 드리는 기준과 방법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이는 아주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학문은 일정한 가치관과 그 가치관에 근거한 가정과 그 가정을 입증하는 일련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학문의 시작은 기존에 가지고 있는 가치관에 입각한 질문에 기반을 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여기에 일반 그리스도인을 포함하여 학문을 하는 사람들이 성경을 심각하게 연구해야 할 필요가 있다. 성경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삶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통해 우리의 사고를 정리하고 우리 행위의 근거를 찾아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형성된 세계관으로 하는 일련의 학문행위를 통해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 세상 속에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를 드릴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모든 영역에서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자 정체성이 아닐까?


균형 있는 그리스도인 전문가 되기


필자는 아직도 스스로 질문해 볼 때 균형 있는 그리스도인 전문가가 된 것 같지 않아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난감함을 느끼곤 한다. 돌이켜 보건대 이렇게 된 데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음을 늦게나마 깨닫게 된다. 이러한 면에서 필자는 후배들에게 할 말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인간의 무력함과 하나님의 철저한 인도하심과 사랑을 경험하게 되었으니 많은 것을 얻었음이 분명하다. 필자의 경험을 통해 그리스도인 전문가가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할 몇 가지 중요한 요소들을 생각해 보고 싶다.


첫째는 개인 성경공부 이다. 그리스도인은 성경공부를 통해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우리 인간의 현주소와 책임을 분명히 알아낼 수 있다. 물론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연 만물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를 알 수도 있으나 성경은 우리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작은 나라의 성공과 실패의 역사를 아우르면서 전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시고, 하나님에게서 벗어난 백성들이 유일하게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인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분명히 보여주고, 구원받은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모습을 그려주고 있다.


각자의 영역에서 치우치지 않는 학문의 연구를 통해 각 분야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밝혀내려면 심도 깊은 개인 성경공부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성경은 우리가 우리의 노력이나 열심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구원을 얻은 존재들임을 분명하게 증명해 주며,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생각과 행동의 준거가 되는 유일한 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간혹 우리는 깊이 있는 성경공부를 하는 것에 대해 무언가 모를 벽을 느끼곤 한다. 예를 들어 성경공부를 제사 드리는 행위로 이해하여 특별히 교육받은 몇몇이 해야한다는 이해는 아주 무서운 생각이다. 즉 성직자들만이 해야할 것이라고 치부하거나 조금 양보해서 그들이 공부한 것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물론 성경을 많이 공부한 사람들에게 성경을 배우는 것이 전혀 잘못이 아니라고 인정하지만, 어쩐지 우리에게는 성경을 공부하고 가르치는 사람의 거의 대부분이 성직자 (목사, 신부 등)들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주위에 성경공부를 꽤나 하는 성도들이 있으면 목회자가 되거나 목회자가 되도록 부추기기도 한다. 이는 성경공부 자체를 신성시하며 일반 성도들에게서 멀어지게 하려는 교묘한 사탄의 전략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이는 성경의 여러 곳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만인제사장의 정신과도 많이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균형 잡힌 시간 관리이다. 필자는 일반적으로 비슷한 분야의 다른 사람들 보다 학위를 좀 늦게 마친 편이다. 물론 논문을 빨리 써서 졸업하는 것이 균형 있는 전문가가 되었다는 증명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여러 면을 고려해 볼 때, 필자에게 있어서 늦은 졸업은 전문가가 되기 위해 써야할 시간을 제대로 할애하지 못했다는 반증이 될 수 있다. 이렇데 된 데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하나 들라면 시간관리의 실패라고 할 수 있다. 즉 시간 사용의 우선순위 설정에서 실패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유학을 떠날 때 먹었던 마음과는 달리 유학초기부터 한국에서의 습관대로 교회생활에 대단한 열심을 내게 되었다. 한 문제가 생기면 다른 것은 돌아보지 않고 그 문제에 매달려서 어떻게든 해결하려는 성격과 맞물리면서, 그리고 열심 있는 젊은 형제를 신앙이 좋다고 칭찬하는 교회의 분위기에 휩싸이면서 균형을 잃었던 것 같다. 코스웍을 마치고 나서 조금은 자유로웠던 상당한 시간을 전공공부에 투자하기보다는 청년회를 포함한 교회봉사와 성경공부, 당시 생활비의 일부를 지원 받았던 한글학교와 아르바이트에 썼다. 그리고 논문을 시작할 즈음에 시작된 이성교제는 또 한 차례 필자의 연약함을 절실히 확인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긍휼을 베푸셔서 조금 늦게 졸업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그러나 졸업 후에 직장을 구해야 하는 실제적인 문제에 부딪치면서 균형 잡힌 전문가가 되지 못한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경험을 통해 한 가지 생각되는 것은 바로 시간의 우선순위를 성경 적으로 그리고 이성적으로 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필자처럼 일명 종교적인 영역에 지나치게 시간을 많이 들이는 것을 조절하여서 전공공부에 보다 많은 시간을 할애했으면 한다. 그러나 반대로 지나치게 전공 공부에만 시간을 투자하게 되면 방향성을 상실하게 되어 그리스도인으로서 건전한 양심이 무뎌져서 균형 잡힌 질문을 잃게되고 하나님의 원리와 반대되는 편에서 열심히 일을 하게 될 가능성이 생길 수 있다. 그리고 이론만을 연구하거나 실험실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은 사회의 실체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서 시간을 투자하면 좋을 것 같다. 시간 나는 대로 산과 들과 강과 바다에 나가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또 가족이나 생각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미국 일주 여행을 실행해 보는 것도 유학 생활 동안 누릴 수 있는 좋은 경험이 될 수 있다.


실제적으로 시간을 관리하는 연습을 해보기를 권하고 싶다. 즉 한달, 육 개월, 일년, 이년, 오 년, 십 년, 십 오 년, 이십 년 이상의 계획을 기도하면서 짜고 그에 맞는 시간표를 작성해 보았으면 한다. 혼자서도 좋고 신앙생활을 함께 하는 친구들과도 좋을 것 같다. 실제로 시간표를 짜다보면 시간이 많이 부족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한 번 짠 시간표에 연연해하지 말고 수시로 점검하여 현실에 맞게 시간표를 수정해 가도 좋을 것이다. 가능하다면 하루 시간을 계획할 때 15분 단위나 30분 단위로 시간을 끊어서 짧은 시간에 집중하는 훈련을 하면 더 없이 좋을 것이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기도와 함께 내일 시간표를 짜고 잠자리에 들면 다음 날 허둥대지 않고 차분히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의 우찌무라 간조는 그의 좌우명의 하나로 일일일생 (一日一生) 즉 하루를 일평생으로 여길 만큼 긴장감 있게 하루를 대했다고 한다.


셋째로 좋은 이웃 관계이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각 개인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그러나 그 신앙을 키워가고 가꾸어 가는 것은 이웃과 좋은 관계를 맺어갈 때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학문도 신앙 실천의 영역으로 생각할 때 개인적인 영역이라고만 하기에는 어색한 면이 많다. 자고로 좋은 생각은 여러 사람을 거치면서 생겨난다. 학문도 좋은 이웃이 많이 있을 때 질문이 건전해 지고 문제를 분석하는 면이나 해결하는 면에서 균형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언제나 많은 사람이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옳은 것만은 아니다. 따라서 좋은 이웃관계를 그리스도인 학자 그룹 안에서 만들어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물론 그리스도인인 아닌 학자나 전문가들과의 관계를 무시하자는 말은 결코 아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논의와 토론의 장을 넓혀서 생각해야한다. 그러한 토론의 장으로 인해 학문과 전공의 네트워크 (이웃관계)가 형성되고 장차 그 관계가 발전하여 사회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 그리스도인들이 각자의 전공분야에서 관심 있는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형성하면서 계속적인 토론을 하고 방향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유학생활을 하는 동안 주위의 몇몇 형제 자매들과 (결혼한 가정을 포함하여) 작은 공동체를 만들어서 참 교회의 모습을 체험해 보길 권한다. 유학생활은 많이 외롭고 지치고 힘든 과정이기에 서로 돕고 위로하고 권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렇게 서로 보듬고 끌어주다 보면 자연스럽게 진한 사랑이 생겨나게 된다. 필자의 작은 경험이긴 하지만 필라델피아에서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작은 밥상공동체는 필자가 어려운 과정을 이겨나가는 데에 큰 힘이 되었었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식구들에게도?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것은 학교에 있을 때 학문적인 친구를 많이 사귀지 못한 것이다. 지금 함께 하고 있는 사람들 (교회친구, 학교친구, 주위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좋은 이웃들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넷째로 건강한 경제생활이다. 필자의 유학 생활 중에 많은 부분을 차지한 것은 경제생활을 혼자 해결하는 것이었다. 처음 일년 여의 학비를 지원 받는 조건으로 택한 유학생활은 생활비와 학비를 해결하는 데에 많은 비중을 두게 되었다. 전공이 사회과학 분야이고 사양학문이라서 공부하는 중에 일자리를 구하기가 쉽지 않아서 학교 아르바이트와 기타 조교 및 강사 생활 등을 통해 경제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공부에 신경을 쓰기가 힘들 때도 있었다. 모두 시간관리가 잘못 되었던 때문이지만?학교에서 강사를 하기 전까지 약 4년 동안은 아주 힘든 기간이었다. 유학 초기부터 경제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무조건 선택한 유학으로 인해 빚어진 어려움이었다. 어려웠지만 경제생활에 있어서는 그래도 빚을 지지 않고 그런 대로 지낼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까마귀를 통해 엘리야를 먹이셨던 하나님의 은혜가 부족한 사람에게도 임했기 때문인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그리고 어려운 경제생활을 무난히 넘긴 이유를 필자 편에서 한 가지 찾자면 바로 가능한 생활비용을 줄이고 예산을 초과해서 생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카드 빚을 쓰지 않고 예산의 범위에서 생활규모를 정하는 것은 백 번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문화적으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힘든 유학생활에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하게 되면 모든 의욕을 상실하게 결국 유학을 포기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될 수 있기 때문에 백 번 명심해야 할 대목이다. 혹시 석사를 마치고 박사를 지원하게 되는 경우가 있을 경우, 이러한 경제적인 면을 잘 고려하여 학교를 선택하길 바라고 싶다.


글을 맺으며


지금까지 필자의 부족한 유학생활을 통해 균형 잡힌 그리스도인 전문가가 되기 위한 몇 가지 중요한 면을 살펴보았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중심으로 세계관을 정립하여 건강한 생활을 누려야 한다. 학문의 영역에서 참 예배를 드리기로 결심한 그리스도인 유학생들에게는 무엇보다 균형 잡힌 세계관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을 심도 깊게 연구해야 하며 성경을 통해 가치관이 정립되고 다른 학문적인 질문들이 성경 적인 세계관으로 소화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되려면 각자의 학문적인 영역도 전문적인 수준에 도달해야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하게 될 것이고, 성경에 정통하게 될 때 그에 대한 균형 잡힌 대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인문학 분야이거나 자연과학 분야이거나 사회과학 분야이거나 공학 분야이거나 예술 분야이거나 기타 실용학문이거나 할 것 없이 성경에 기반을 둘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질문과 대답의 준거를 얻게 될 것이다. 또한 만인제사장의 정신을 학문 세계에 구현하여서 하나님의 나라를 각 전공분야에 실현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될 수 있길 희망해 본다. 실제적으로 균형 잡힌 시간관리와 경제생활로 장차 직업의 현장에 들어 갈 때를 대비한 훈련은 물론, 유학생활 자체를 잘 마무리 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나라는 늘 하나님의 은혜를 갈급 해하는 부족한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확인하곤 한다. 힘든 유학생활을 통해 그 하나님의 은혜를 맘껏 경험하여서 평생을 통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면서 학문의 세계와 직업의 현장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담당해 가길 기도한다.

[이정희] 유학, 그 새로운 길을 시작하며

이코스타 2003년 9월호

                         새로운 길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윤동주, 새로운 길 중에서


유학을 위하여 타국에 발을 딛은 지 일 주년 되는 날이 며칠 지났는데, 나에게 유학 생활을 시작하는 감회를 적어달라는 주문이 들어오는 것을 보니, 유학 생활 1년차 라는 것은 아직 시작조차하지 못한 단계인가 보다. 하긴 뒤돌아보면 365일이라는 날들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잘 기억도 안 나고, 그 동안 내가 한국에서 기대했던 어떤 성장이 구체적으로 있었는지 가늠이 안 되는 것을 보면 유학생활의 본류는 이제부터 시작되는 것 같다.


또 다른 시간을 앞둔 지금, 지난 1년의 시간이 미국에 오기 1년 전과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불연속적인 시간은 아니었다.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가야 하는 새로운 길은 항상 새로우므로 매 순간이 다르지만 동시에 이어진 한 길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내딛은 발걸음은 항상 위기와 변화의 파고를 지닌 항해였지만, 궁극적인 구원을 향한 여정이듯이, 나의 짧은 삶의 여정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주어진 천로를 향한 여정임을 믿는다. 그들이 가끔 뒤돌아보며 지나온 길에서 배운 하늘의 교훈을 상기하듯이, 나에게도 지나온 과거는 창신(創新)을 위한 하늘의 보고이기도 하다. 숙제처럼 주어진 글 쓰기의 고역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즐거움으로 변한다.


유학 준비 과정


나는 솔직히 내가 왜 공부를 하는가에 대해 깊이 생각하면서 공부의 길에 들어서지는 않았다. 이 길이 바로 나의 길이라는 확신을 갖기보다는 배우는 기쁨을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크게 느끼고 한편 다른 일을 잘 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시야를 한 두 가지로 좁혀 갔다고 할까.

오히려 소명에 대한 확신은 유학 준비 단계를 거치면서 얻은 것 같다. 비행기표만 끊고, 가면 되는 유학은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것이고, 대학 입시에 버금가는 긴장의 연속인 유학준비과정에서 비록 실패의 불안감으로 바짝 긴장한 상태였지만, 천자문 외우듯이 단어 하나하나 외우고, 독해지문 읽어보면서 갖고 있던 지식의 양을 검토해볼 수 있었고, 추천장, 학업 계획서를 준비하면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돌아보고 학문적 비전을 확인하는 기회를 삼을 수 있었다.

‘이 상태로 어드미션 프로젝트(admission project)에서 성공할 수 있을까’, ‘내가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수시로 떠오르는 상황에서 이 길이 정말 소명의 길이라면 할 수 있고, 반드시 해내야 한다는 믿음으로 하나하나 추진해나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미 내 손을 떠난 것이라 결과가 나올 때까지 차분히 기다리면 될 텐데, 답장을 기다리며 메일 보내고, 편지 보낸 피 말린 긴장의 시간도 인내와 믿음을 단련한 시간이었다.


이 때 나에게 주어진 두 가지 이슈가 있었는데, 첫째가 Gre 집단 치팅(Cheating)이었고, 둘째가 학교 선정 문제였다. Gre 문제가 유출되어서 인터넷에 떠돌 때 나는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만약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나는 무지 어려운 윤리적 결단을 해야 했을 것 같다. 상대적으로 낮은 점수로 걱정하고 속상해 했었고 사실 불이익을 받았을지도 모르지만, 오히려 그것이 다행이라고 느낀다. 이 일 이후 한국, 중국, 대만, 홍콩에서는 컴퓨터 시험이 더 시행되지 않는다고 들었다.


두 번째는 서너 학교의 어드미션을 받은 후 입학할 학교를 정하는 일이었다. 더 낮은 재정지원의 더 나아 보이는 학교를 택할 것인가 하는 문제-더 나아 보인다는 것이 기껏해야 불명확 기준에 의한 소위 랭킹에서 더 높다는 것인데…-에서 숨어 있던 가치관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이었다. 이 결정에서 내가 잘 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다만 현재 상태에 여러 가지 이유로 만족하고 있긴 하다.


새내기 유학생의 경험


공부라는 것이 결국은 무엇을 모으는 것이 아닐까 싶다. 몇 가지 써 있는 종이쪽지를 모으고, 서지를 모으고, 자료를 모으고, 논문을 모으고… 한국에서도 그랬지만 처음 미국인들과의 수업에 참석하면서 무조건 모은다고 생각했다. 잔뜩 긴장해서 한 마디 한 마디까지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다 보니 수업이 끝나고 나면 물리적으로 머리가 아플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그 작업이 무의미하고 별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느꼈고, 서서히 미국에서 공부하고 온 교수님들이 한국 대학원을 경시하는 것이 부당한 태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영어를 제외한다면 공부 자체는 한국에서 해도 개인적 역량만 된다면 지식이라는 측면에서 얼마든지 경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적잖은 실망이 되기도 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할 수 있는 한 양질의 지식을 최대한 흡수하는 것이었다. 관점을 바꾸어 내가 이곳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지식이라는 측면보다 창조적인 연구를 진행하는 방법, 그러한 연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도록 지원하는 대학 교육 시스템, 연구자와 실무자와의 분업 체제 등을 배워야 함을 알게 되었다. 적절한 검증과 지원을 통해서 활동적인 연구활동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게 하는 시스템이 여기는 있고 한국에는 아직 미흡하다는 것이다.


영어는 처음에 맥도널드에서 햄버거 주문할 때부터 엄청난 스트레스였는데, 아직도 말실수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여자 교수님께 써(sir)라고 한다든지 조동사 뒤에 과거형을 쓰는 것 등은 귀여운 편에 속한다.


아직도 감이 안 잡히긴 하지만 잠정적인 결론은 영어를 새로운 세계를 해석하는 언어로, 이 사회를 유지하는 문화의 총체로서 배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 사회를 이해하는 도구로만이 아닌 우리를 되돌아볼 수 있는 거울로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다. 글을 충분히 읽고 다양한 생각을 하고 새로운 생각을 해내는 것이 더 가치 있다는 생각에 약간 위안이 된다.


첫 학기에 있었던 비교정치 세미나 시간에 말은 거의 못했지만 세 번에 걸친 리서치 페이퍼 발표에 열심히 노력해 의미 있는 가설을 제시하여 좋은 평가를 받은 일은 실망과 좌절감으로 처져있던 나에게 큰 격려가 되었다. 교수님들이 견지하는 창조적인 가설과 논증을 중요시하는 태도가 언어는 세계를 창조적으로 이해하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미국 학생들과의 교제도 새로운 즐거움의 하나였다. 영어도 잘 못하는 외국학생을 동료로 잘 받아주고 친절하게 대해줘서 지금도 감사한 마음이 있다. 통계 문제 몇 가지 가르쳐주니까 매우 좋아한다. 머리 싸매고 공부했던 덕을 좀 봤다.


배우고 확신한 일


유학을 준비하고 워밍업을 한 1년 반의 과정에서 배운 삶의 교훈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학생활이 특수한 상황인 것도 확실하지만 하나님과 가는 길이라는 점에서는 인생의 다른 시점과 차이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생을 살아갈 때 궁극적으로 좋은 결과가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유학생활에서 직접 적용할 수 있는 기독교인의 삶의 방식으로 ‘정직’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Gre같은 시험에서도 그렇지만 한국, 중국 학생들의 부정직한 태도는 미국 교수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것 같다. 다른 사람의 글을 자신이 생각해낸 듯이 복사해서 붙이다가 표절로 정학 내지 휴학 당한 학생들이 주변 학교에 매 학기마다 있는 것 같다. 생각을 정리하는데 드는 시간이 만만치 않고, 누가 볼까 하는 마음이 자주 들지만 바른 일을 바르게 해야겠다는 자신에 대한 기대를 잃지 않아야겠다.


유학생활의 친한 친구인 외로움은 나에게 그 동안 부족했던 침묵의 기도(prayerful silence)와 피정의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허락한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조용히 묵상할 수 있는 시간으로 삼고 싶다.


겸손과 온유가 외로운 기도의 시간에 자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의 시간이 될 것이라 기대한다.


새로운 길, 당신과 가는 길에 대한 기대


                              이 땅의 일로 가슴을 아파할 때
                             별빛으로 또렷이 내 위에 떠서 눈을 깜빡이는
                             당신과 가는 길은 얼마나 좋습니까
                                                                                                    -도종환, 당신과 가는 길 중에서


인생은 답사기와 같다고 누군가 말한다. 한 곳에서 하나를 배우고 또 다른 곳에서 또 하나를 배운다. 유학이라는 삶의 답사를 위해 이곳까지 온 나의 이 길이 당신과 가는 길이라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그리고 학문이 공부를 담은 삶이라면 그 삶도 길일 것이다. 나는 그 길 위에서 미지의 앞을 향하여 하늘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 싶은 것이다.


유학 생활의 본류에 들어선 지금 앞으로 또 많은 굴곡과 좌절이 있을 것 같다. 코스웍을 마치면 봐야 할 논문자격시험, 프로포잘에 논문 완성까지 고된 일상과 불안한 내면이 불 보듯 뻔하지만 그래도 가야할 길이라면 즐거이 가고 싶다.


유학이라는 나의 길이 하나님과의 사귐의 여정이라면 좋을 것 같다. 외로움과 침묵의 시간이 성숙의 방편이라면 더욱 좋겠다. 무지에 대한 좌절감이 겸손을 만들면 좋겠다. 수고하여 얻은 지식으로 정직이라는 윤리가 몸에 깊이 배이면 좋겠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더 커지길 바란다. ‘그분과 나’에서 ‘당신과 나’ 관계로 바뀌는 친밀한 사귐이 있었으면 좋겠다. 새로운 길에서 답사기에 무엇을 적을 것인가는 전적으로 나의 노력에 달린 것 같다. 감상적이지도 냉소적이지도 않게 묵묵히 가련다. 당신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