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형]캠퍼스 사역과 교회와의 협력

이코스타 2003년 12월호

그리스도의 몸은 2-3명의 지체들이 그분의 이름으로 모일 때 형성됩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의 그리스도의 몸이 표현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구조와 질서를 필요로 합니다. 바로 지역교회나 캠퍼스 미니스트리와 같은 조직들을 그분의 몸의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구조나 사역의 접근방법을 취하든 그리스도의 몸은 성장해야 하고 성장은 제자를 삼음으로 이루어집니다. 지역교회는 선교의 모든 분야와 모든 대상을 목적으로 지역적으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세상에 표현된 예수님의 몸 중 가장 기본적 단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캠퍼스 선교에서 사역하는 지체들이 대부분 지역 교회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역교회는 肩?특수 선교에서 사역하고 있는 사역자들을 포용하고 더 나아가 돌볼 수 있는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각 사역들이 가진 특성들이 오랜 시간 지속되다 보면 서로의 장점에서 배울 수 있는 부분들이 오히려 서로의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지역교회는 갓 태어난 어린아이부터 나이 많은 노인분들까지 돌보며 또 교육과 지역봉사 등등을 감당하며 사회 각계 각층이 모이는 하나의 공동체로 자라가려면 많은 인내와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특히 이민 교회의 경우 한인들간의 친교를 도모하려는 경우가 많아 전도와 제자 삼는 사명에 대한 의식이 희미해져 있습니다. 미국주류사회에 진출하지 못하고 소외된 한인들에게는 교회가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사회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런 분들이 중심이 되어 있는 교회는 행사위주이며 권위주의적 체제로 운영되기 쉽습니다.



반면에 캠퍼스에서 사역하는 자들은 특별한 사명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은 동참하지 않습니다. 또한 목적의식이 뚜렷하고 말씀에 붙들려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외로운 생활을 오래 해야하기 때문에 외곬수적인 성격을 가지게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전도의 대상도 젊은 사람들이고 지역교회에 비하면 훨씬 더 균일화되어 있어서 빠른 시일 내에 제자훈련도 가능합니다. 자신들의 시간을 쪼개가며 헌신하기 때문에 캠퍼스 사역 이외에 자신들과 같이 제자 삼는 일과 전도에 집중하지 않은 지역교회의 모습에서 회의를 많이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교회 행사들은 하나의 사치스러운 일들로 간주하기 쉽습니다.



이런 분위기 가운데서 지역교회는 캠퍼스 사역자들을 포용하고 돌보기보다는 하나의 얄미운 존재로 간주하기 쉽습니다. 지역교회 운영 자체에 많은 인력을 필요로 하는데 캠퍼스 사역자들은 이에 필요한 노동력을 제공하기보다는 오히려 있는 노동력마저 무기력하게 만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코스타 참석 후 복음의 참된 의미를 깨달은 교회내의 청년들이 그럴 때가 많습니다. 캠퍼스 사역자들에게는 지역교회에서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거의 모든 사역이 본질적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자신들이 하는 일을 포기하며 도저히 동참할 수 없는 입장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이 두 사역이 서로 협력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나갈 수 있는 것일까?



첫째, 목적의식의 공유이다. 만약 지역교회나 캠퍼스 사역의 목적이 전도와 제자 삼음에 있지 않으면 서로 협력할 필요가 없고 각각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담당하면 됩니다. 상호간의 협력은 목적 공유가 필수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중심으로 제자 삼는 일이 교회의 가장 핵심 된 목적이 되어야 하고 모두가 이에 동참해야 합니다.



둘째, 서로에 대한 이해이다.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는 한 서로의 접근방법과 대상이 다른 것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캠퍼스 사역자들은 교회가 단기선교나 특별 부흥집회등에 큰 가치를 부여하는 것에 대하여 그 나름대로의 유익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 주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교회는 캠퍼스 사역자들이 일주일 내내 자신의 자유시간 없이 선교지에서 수고하고 땀을 흘리는 것을 위로까지는 못해주어도 알아야 할 필요는 있습니다. 그럴 때 비로소 교회사역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마음이 없어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사역의 가장 핵심적인 사역을 이미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서로의 사역에 대한 존중이다. 제자가 삼아지는 한 서로의 사역에 대하여 협력하되 필요이상으로 간섭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오히려 상호간 장점을 배우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교회에서는 쎌 처치의 방법을 캠퍼스 사역에서 이미 오래 전부터 사용해 오던 소그룹중심의 사역의 경험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반면에 캠퍼스 사역자들은 교회 안에 있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의 신앙관과 생활도 용납하고 기다려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미 나이 드신 분들은 혹 잘못된 신앙관을 가지고 있다해도 이를 바꿀 수 없기 때문에 포용해주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서로의 사역에 대하여 존중하게 될 때 자신의 사역에 동참시키기 위해 다른 사역의 희생을 강요하지 않게 됩니다.



아쉽게도 현실적으로 셋째 단계에까지 이르는 경우는 드뭅니다. 그래서 지역교회와 캠퍼스 사역간에 많은 충돌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현재 미국에 있는 한인 기독인들의 현실입니다.



한가지 좋은 예



워싱턴 디씨에 있는 한 교회는 이런 갈등을 점진적으로 해결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 교회는 그 지역 캠퍼스 사역의 근거지 역할로 사용되며 갈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청년층을 포용하려고 노력합니다. 오늘 이런 발전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은 그 교회 담임 목사님과 캠퍼스 간사들의 헌신과 신념입니다. 그 교회에 소속되어 있는 캠퍼스 간사들은 수년동안 조용하게 캠퍼스에서 헌신하며 많은 열매를 맺게 되었고 그 담임목사님은 그들을 뒤에서 알게 모르게 도우시며 또 이런 그들의 열매를 보시며 그들이 교회에 들어올 수 있도록 포용하신 것입니다. 그 방법은 그들의 사역을 인정해주고 가끔씩 직접 캠퍼스에 오셔서 말씀도 전해 주시고 그들이 교회에 평안하게 예배드릴 수 있도록 반갑게 늘 맞이해 주신 것입니다.



가장 최근에는 교회에서 주일에 또 하나의 예배를 시작하시면서 그 예배의 모든 운영과 진행을 캠퍼스 간사들이 중심이 된 청년들에게 맡겼습니다. 그 담임 목사님의 신념은 청년들이 전도되어 제자로 자랄 수 있다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캠퍼스 사역이 교회의 청년사역과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기 시작하고 교회에 청년층이 자랄 수 있는 좋은 바탕을 형성하였습니다. 캠퍼스 간사들은 자신들이 캠퍼스에서 하던 제자 삼는 일을 이제는 교회 안에서도 쎌 처치의 형태로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교회에 오는 청년들은 (물론 캠퍼스 사역을 통하여 오는 경우가 대부분 이었지만) 캠퍼스에서든 교회 안의 쎌에서든지 훈련받을 수 있는 선택의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이 교회에는 오래 전부터 주일 저녁예배도 없애고 가능한 한 행사를 하지 않습니다. 가족끼리의 시간과 세상에서의 빛으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비 본질적인 것은 제거한 것입니다.


이런 결정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담임목사님으로서는 자신의 영향력을 스스로 제한시키는 것이며 불확실성에 사역의 일부를 내어놓는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내에 또 청년사역을 탐하는 많은 사역자들을 물리쳐야 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어른들을 설득시켜야 하는 일도 쉽지 않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에 대한 확신이 없거나 자신의 유익보다 그리스도의 유익이 앞서지 않으면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자신 (혹은 우리)만이 할 수 있다는 교만이 없어지기 전에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몸이 성장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캠퍼스 사역자들이나 캠퍼스에서 훈련받은 자들이 40-50대까지 캠퍼스에 머물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시간이 되면 그 누구보다도 더 잘 훈련된 교인의 한 명으로 그 교회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하나님의 일군들이기 때문입니다.



[장이규]다이내믹한 그룹 토의와 Spiritual Transformation

Q: 어떻게 다이내믹한 그룹토의를 인도할 수 있는지요? 그리고 그룹토의가 영적인 변화와 연관이 있는지요?


A: 물론입니다. 소그룹 모임에 있어서 다이내믹한 그룹토의는 영적 성숙과 삶의 변화를 일으키는 중요한 다리(bridge) 입니다. 그리고 다이내믹한 그룹토의 인도 방법은 토의 가운데 자신의 생각과 느낌, 그리고 자신의 삶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토의의 내용(content) 과 더불어 관계성(relationship)의 균형을 맞추는 것입니다.


얼마 전 어느 몇 교회의 초청으로 2박 3일간의 셀 그룹 리더를 대상으로 한 지도자 세미나를 인도하게 되었다. 세미나의 내용은 리더의 역할과 자세, 그룹내의 영적 전환 계획, 그리고 영적 은사를 통한 그룹 인도 운영과 선교 전략에 관한 내용 등, 주로 리더의 역할과 그 효과적인 그룹 운영에 관한 내용이었다. 세미나는 각각 1시간 30분씩으로 진행이 되었고 그 시간은 약 40분 강의, 30분 웍겼, 20분 강의 10분 질문과 토의 등으로 세미나 시간이 분배되었다. 웍걼 시간에 주어진 토의 내용은 주로 4가지 정도였고, 그룹은 5명 정도로 나누고 그 가운데 한 명을 임시 토의 리더로 세웠다. 동일한 방법으로 2박 3일 동안 웍걼 때마다 임시 그룹 토의 진행 리더를 바꾸면서 진행하였다. 이렇게 진행된 세미나 웍걼 시간에 나는 이 그룹 저 그룹을 방문하면서 토의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고, 그 가운데 리더들의 다양한 유형의 토의 진행 모습도 또한 지켜 볼 수가 있었다.


첫 번째 나타난 토론 진행 리더는 ‘핵심 책크 형’ 리더이었다.


마치 학력고사 준비 마무리 단계에서 각 질문에 맞는 핵심 답만을 꼭꼭 찾아서 집어주는 마지막 ‘총 정리’ ‘문제 와 그 해답’처럼 그 리더는 핵심을 꼭꼭 찌르면서 신속하게 토의 진행을 하였다. 얼마나 신속하게 그룹 토의의 답을 정리했는지 20분 토의 시간에 무려 발표하기까지 10분이나 남았다. 그리고는 너무 일찍 끝나 더 이상 그 그룹 원들끼리 할 말이 없어, 서로 서먹서먹하게 앉아 다른 그룹의 토론만 듣고 시간을 보내며 전체 시간을 기다리고만 있었다.


둘째 나타난 토론 진행 리더의 유형은 “릴리리야 릴릴리아 니나로” 하는 스타일이었다. 거의 ‘노세 노세 젊어 노세’ 수준이었다. 그 그룹은 너무 재미있어 웃음이 끊어지지 않았다. 일찌감치 모임을 즐기려는 자세로 주제와는 전혀 상관없이 첫 번째 토론 주제를 꺼내고는 다른 이야기들로 모임을 재미있게 이끌었다. 물론 주제에 관해 토론도 서론에서 끝나고 말았고, 옆 그룹은 소음 공해로 진행이 무척 산만한 모습이었다.


셋째 유형은 ‘소피스트’ 형으로 토의 자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안경을 만지며 세상의 모든 짐을 다 짊어진 것 같은 심각한 모습으로 경직되어 그룹토의를 인도하는 스타일이었다. 그 그룹은 리더가 제일 심각하고 철학적인 분위기의 어투를 가지고 자꾸 어려운 말로 토의 주제를 대화하려 했다.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전혀 심각하지 않았고, 그 리더의 심각성에 잘 동감하지도 않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대다수의 그룹 원 들은 슬금슬금 보이지 않게 옆 그룹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거나 할 이야기가 없이 리더의 이야기가 끝나기를 기다리고만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 보니 토의 분위기가 쳐져서 대다수가 충분하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네 번째 유형은 그룹 원 들의 생각이나 의견에 대해서 리더가 하나 하나에 자신이 “그것은 ” 하면서 답변(answer)을 해 주는 스타일이었다.


그 리더는 무슨 이야기를 들어도 그냥 넘어가지를 못했다. 꼭 무슨 대답을 해야만 하는 의무감이 있는 것처럼 상대방의 의견마다 해답을 주려고 하였다. 그러자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발표한 그 멤버는 리더의 단순한 개인적 답변이 합당하지 않아 또 다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하려고 주거니 받거니. 그러다가 장황한 상황 설명과 더불어 다른 이야기에로의 꼬리를 무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 그룹은 주로 리더와 한 두 명의 논쟁으로 토의 전체가 흘렀고, 결국 그룹원들 전체가 이야기를 다 해보지도 못하고 토의 시간이 끝나고 말았다.


다섯 번째 토론을 이끄는 리더의 유형은 그룹 원 들과 토의도 잘하고 이야기도 많이 했는데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와 상관없이 전체 발표 때에는 리더 자신의 결론으로 그룹 토의의 결과를 냈다. 그렇게 되자 토의 내용에 대해 발표하는 시간에는 리더의 발표와 상관없이 그 그룹에 있는 멤버들이 자신의 생각을 또다시 별도로 이야기하는 일이 생기게 되었다. 결국 토의의 결과가 리더를 통해 잘 전달되지 않고, 잘 표현되지 않은 경우였다.


여섯 번째 그룹 인도 유형은 리더 자신이 이야기를 하느라고 다른 그룹 원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할 여유를 주지 못하는 스타일이었다. 할 말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따발총 같았다. 쉴새없이 말이 술술 나왔다. 한사람 시키고는 그사이를 못 참아 또 자기 의견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세 명 정도하고 나머지는 이야기도 하지 못 하였다. 그러다 보니 한 마디도 참여하지 못한 그룹 원은 그저 관망하며 대화의 수동적인 자세를 취하고만 있었다.


일곱 번째 유형은 토론 시 혼자서 말을 많이 하는 멤버의 이야기를 적절하게 끊어주지를 못해 주어진 토론의 내용을 잘 진행 지키지 못하는 ‘관망형’스타일 이었다. 그러다 보니 적극적으로 그 토론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수동적으로 듣고 있었고, 리더의 상황적 대처만을 지켜보고 있었다.


2. ‘가장 다이내믹한 그룹 토론 진행 방법은 바로 이러한 모습이다’ 라고 이야기하면서 어떠한 특정한 모델을 취하기는 실제로 쉽지 않다. 모든 토론 진행의 스타일도 각기 나름대로 장점과 단점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설교도 그렇다. 어떠한 설교 방법이 ‘정석’이냐 이야기 하기는 쉽지 않다. 설교가 끝난 후 이야기를 하다보면 은혜를 받은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경우가 종종 있게 된다. 이때 들어보면 어떤 사람은 ‘재미있었던 예화’에서, 어떤 사람은 설교와 전혀 상관없이 ‘목사님의 제스처’에서, 어떤 사람은 ‘설교의 서론에서’, 어떤 사람은 설교에서 주어지는 ‘좋은 많은 정보’ 속에서, 어떤 사람은 설교에서 제기된 ‘도전’과 ‘복음’에서 등등 다양하게 은혜를 받고 있음을 보게된다. 그런 점에서 모든 평가에는 판단의 기준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면 어떠한 원리에서 토론 진행의 방법을 ‘다이내믹하다’ 혹은 ‘다이내믹하지 않다’ 평가할 수 있을 것인가?


많은 측면에서 이야기 할 수 있겠지만 분명한 한 가지 다이내믹한 그룹토의의 기준은 ‘영성'(spirituality) 이다. 신앙 공동체로 모인 그 토의 그룹이 지향하고 있는 분명한 목표는 ‘영적인 성숙'(spiritual mature) ‘영적인 도전'(spiritual challenge)을 통한 영적 변화 (spiritual transformation) 이기에 그 그룹 토의를 통하여서 영적인 진리를 발견하지 못한다거나, 혹은 영적인 도전을 받지 못하여 영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다이내믹한 그룹 토의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심하게 말하면 그러한 역할을 못하는 신앙 공동체 그룹은 그룹의 정체성(identity)을 상실했다고 까지도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그 모임에 온 이유 자체를 봐도 영적 진리에 대한 발견, 영적 성숙, 영적 도전, 그리고 영적 변화를 위해서 온 것이지 단순한 사귐과 재미를 위해서 온 경우는 사실상 지극히 작은 부분이기 때문이다. 물론 비록 처음에는 재미나 사귐의 단순한 목적으로 그 신앙 공동체에 참여하게 되었다 할 지라고 시간이 가면서 그 그룹에 대한 정체성 이해와 기대는 ‘영적 진리에 대한 발견’과 ‘영적 성숙’ ‘영적 도전’ 그리고 ‘영적 변화’에 있게 된다. 그런 면에서 그 그룹의 모임이 아무리 재미있다 할 지라고 이 ‘영성’이 빠지면 ‘앙꼬 없는 찐빵’ 과 같아 그 그룹의 맛을 잃게 된다. 단순한 사귐과 재미는 교회의 그룹이 사회의 그룹을 결코 따라갈 수 없다. 그럴 경우 사회 그룹에 더 재미가 있는 모임이 생기면 떠나고 만다. 하지만 사회보다 교회 그룹이 재미와 사귐에 있어서 떨어진다 할 지라도 사회의 재미있는 모임 시간에 신앙 공동체 그룹을 선택하는 이유는 바로 신앙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그 신비한 ‘영성’, 그 ‘맛'(taste) 때문인 것이다. 그 신비한 ‘영성’이 멤버들로 하여금 덜한 재미에도 불구하고 시간의 우선권(priority)을 신앙 공동체에 두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성’은 다이내믹한 토론의 핵심적인 평가 기준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다이내믹한 그룹토의의 평가 기준이 되는 ‘영성’은 어떻게 구축(build-up) 되어지는가? 그리고 토론을 인도하는 리더의 스타일에 따라서 어떠한 영향을 받게 되는가?


소그룹 내에서의 ‘영성’은 그룹 내에서 이루어지는 대화 ‘내용'(content) 과 그 토의 속에서 이루어지는 보이지 않는 신비한 인간적, 영적 ‘관계'(relationship)를 통하여 구축(build-up) 된다.


영성(spirituality) = 토의 ‘내용'(content) + 인간적 ‘관계성'(relationship)


소그룹 모임에 있어서 그룹토의는 이론적인 신앙의 이론이 우리 개인의 구체적인 삶으로 적용되게 만드는 변화(transformation)의 중요한 순간이라 할 수 있다. 단순한 지식이 우리의 삶에 내재화(internalize)되도록 하는 중요한 순간이 바로 그룹토의 시간이요, 이 순간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말씀(Konwing about God)이 육신(Knowing God)이 되는 결정적 순간을 창조하는 단계이다. 이전에 수동적으로 듣기만 했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객관적인 제 3자의 입장에서 주체적인 1인칭의 내 삶, 내 신앙, 나의 결단, 내 가치관으로 변화가 일어나는 시간이다.


왜 그룹 토의 가운데 그러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는가? 바로 그 토의 가운데 우리의 갈등, 아픔, 죄의 현실이 드러나고 우리의 신앙 고백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동안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체면, 가식과 같은 껍데기들이 말씀과의 만남 가운데서 벗겨지면서 그 동안 외부적으로 감추어져 있던 ‘나'(being)를 언어로, 감정으로, 혹은 외부적 표현으로 드러내게 된다. 실로 ‘나의 표현’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것처럼, 우리들의 언어에 하나님은 창조의 능력을 부여해 주셨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에게 ‘말’로 피조물들의 이름을 짓도록 하시고 그 표현 그대로 그렇게 되도록 하셨다. 반면에 잘못된 표현은 잘못된 결과를 일으키는 ‘불씨’가 되도록 하셨다 (사 30:27, 약3:5-8). 결국 표현은 변화를 일으키는 능력이 있도록 하나님이 부여해 주신 소중한 도구임을 성서는 우리들에게 분명히 증거하고 있다. 바로 고백도 그러한 변화를 일으키는 창조의 도구인 것이다. 그래서 바울도 로마서에서 고백이 우리로 구원을 받게 하는 능력임을 말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을 받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롬 10:9-10: 현대인의 성경/ cf. 마태 10:32; 요9:22; 요일 2:23, 4:2) 그러한 변화의 능력인 고백이 바로 소그룹의 토의 시간에 일어나게 된다.


그런 면에서 소그룹의 토론 시간은 그룹 멤버들로 하여금 객관적인 참여자에서 주관적이고, 능동적인 하나님 앞에서의 주체자로 변화를 일으키도록 만드는 다리(bridge)요, ‘자신을 표현'(고백) 하는 순간인 것이다. 이 시간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주어진 토의 내용에 대한 자신의 의견, 자신의 경험, 토의 주제와 관련된 상처와 의심, 감격 등 많은 요소들이 표현/고백되어 지고, 그 가운데 성령님이 치유하시고, 새롭게 하시고, 세우시는 역사가임하고 경험되어지게 된다.


더 나아가 그 고백과 더불어서 일어나게 되는 것은 영적인, 그리고 육적인 인간 관계(relationship)의 형성이다. 일반적으로 그룹 멤버들이 서로 친밀하게 하나가 되지 못하게 하는 경우는 그룹 성경 공부에 있어서 성경의 ‘지식,’ ‘사실'(fact) 혹은 질문에 대한 ‘정답'(right answer)을 이야기 할 때이다. 사실 정답을 말하고 나서는 아무런 다른 이야기를 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이렇게 정답을 찾은 후에는 또 다른 결과가 파생을 하는데 그 중 하나는 그 답을 모르는 사람이나 그 답을 잘 찾아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소외감(isolation)을 갖게 된다는 사실이다. 혹은 다른 사람의 정답 맞춤은 그 답을 못 맞춘 사람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보다 왜소하게 (smaller) 만드는 것 같아 그 그룹 안에서 부끄러움(shameful)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경향은 자존심이 강한 사람들에게 더 많이 일어난다. 결국 그들은 그러한 부끄러움을 피해 바쁘다는 핑계로 소그룹에 더 이상 참여하기를 원하지 않는 경우도 종종 생긴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그룹 토의 시간에 참여한 자신의 표현/고백은 자신이 그룹의 멤버임을 확신시켜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그룹에 대해서 자신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존재임을 확인하게 만든다. 더 나아가 자신의 고백은 다른 멤버들로 하여금 자신을 이해시키게 만들고 친밀하게 만든다. 이해 못하는 자신의 답답한 심정을, 아픈 상처를 가지고 있는 마음을, 혹은 날마다 주님께 더 가까이 가려는 사모하는 마음 등등을 그룹 멤버들이 알게 되면서 그들로부터 더욱 친밀함과 영적 육적 격려를 얻게 된다. 위로를 얻게된다. 함께 기도하게 된다. 자신과 같이 그러한 고민가운데 있는 형제 자매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고민 가운데 그들의 문제들이 어떻게 해결되어갔는지, 어떻게 주님이 그 문제들을 인도하셨는지 등 구체적인 해결책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깨닫게 된다. 그러한 가운데 이들이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나의 이웃이요, 내 옆에 있는 실질적인 도움 그 자체임을 알게 된다. 그러면서 더욱 인간적인 깊은 관계를 형성하게 되고 영적으로 더욱 성숙된 자리로 나아가게 된다.


이렇게 영성은 토의시간에 나누어지는 자신의 구체적인 표현/고백인 ‘내용’ 과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관계’에 의해서 구축(build-up)되어 진다.


3. 그렇다면 이제 앞에서 제시된 7가지 다른 유형의 그룹토의 진행 스타일을 영성 = 내용 + 관계라고 하는 기본 잣대를 가지고 평가해 보도록 하자.


 












































토론을 인도하는

리더의 유형


내용적 측면

에서(고백/경험)


관계적 측면

에서


영적 성장에 미치는 영향


유형 1.

핵심 첵크형


1. 정답만을 찾다 보니 개인의 고백이 빠지게 됨


2. 말씀에 대한 나의 삶의 적용이 없다.


1. 정답은 깊은 인간적 관계 형성을 못 시키고


여전히 외부적 체면의 껍질을 가지고 다른 사람과 관계 형성에 머무름


2. 정답을 찾지 못하거나 한 마디도 못한 다른 사람을 부끄럽게 함


1. 지식은 정리하나 (knowing about God) 나의 하나님(knowing God)으로 경험하기가 쉽지 않다


2. 공동체를 통한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기 어려움


유형 2

노세 노세 형


1. 그룹모임이 재미는 있으나 시간이 갈수록 공허해 진다


2. 개인적 고백 시간이 빠짐으로 인해 영적 변화 경험의 기회를 가지지 못함


사람과의 관계는 가까워지는 것 같이 보이나 실제로는 피상적인 외부적 차원에 머무는 경우가 많고 깊은 삶의 차원에서의 문제를 나누거나 삶을 나누지는 못해 늘 관계가 겉돈다.


1.영적인 성장이 오기 이전에 공동체의 정체성과 가치에 대한 회의가 온다.


2. 삶의 시간 배열에 있어서 신앙공동체가 늘 두 번째 자리, 즉 시간 날 때 참석하는 자리가 된다


유형 3

소피스트 형


1. 모임이 지루하게 됨


2. 너무 철학적. 구체적 현실과 잘 부딪히지 않음


3.이성의 차가움만을 일으키고 개인 고백을 통한 성령의 감동을 경험시키지 못함


1. 서로 가까워 질 기회를 갖기 어렵다


2. 주로 서로에 대해서 비관적인 대화와 비판적인 인상을 많이 심어 주게 된다


3. 피곤한 관계가 되기 쉽다.


1. 문제에 집착하다 보니 영적으로 비판주의나 회의주의에 빠지기 쉽다


2. 신앙 공동체의 역동적인 영적 경험에 다가가기 어렵다


유형4.

그것은 형


1.리더의 단답식 단순한 대답은 고백한 사람의 경험을 무시하게 만들어 마음을 오히려 닫게 만든다.


2. 이야기 한 멤버는 믿음의 고백을 하기보다는 자신을 이해 시키려고 논쟁에 빠지기 쉽다.


1. 논쟁으로 갈 위험성이 있다


2. 관계의 구축보다는 대화 가운데에 오히려 상처를 남기기 쉽다


3. 더 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1. 마음이 닫혀 영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2.오히려 이야기한 자신에 대해 자존심의 상처와 더불어 영적으로 침체된다.


유형 5

내가 결론인 형


개인적 의견이나 말씀의 적용이 잘 이루어진다.


1. 결론적으로 개인의 의견을 무시한 리더에 대해 감정이 상하게 된다.


2. 더 이상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는다.


시작된 영적인 변화에 마무리 단계에서 영적 단절을 가져온다


유형 6

리더 주도 형


1. 리더의 장황한 이야기에 다시 한번 설교를 듣는 것처럼 지루함을 느낀다.


2. 리더의 주도적인 의견 때문에 말씀이 나의 삶에 적용될 여지가 없다


1. 리더의 이야기에 집중되어 멤버 모두가 객관적 관망자가 된다


2.자신의 표현이 없음으로 멤버 사이에 직접적인 관계가 형성되지 않는다..


1. 리더의 영적 경험이 이루어 질 수 있을 지라고 직접적인 멤버 자신의 경험이 되지는 못한다(just knowing about God).


유형 7

관망 형


1. 다른 사람의 고백만 듣게 되다보니 주관적인 자신의 말씀 적용 기회를 잃는다.



1. 이야기하지 않는 사람은 소외감을 느끼게 된다.


2. 절절하게 인도 못하는 리더의 리더십에 대해 불신을 가지게 된다.


3. 말을 많이 하는 사람에 대해 경계하게 만든다


주어진 토론의 목적에 도달하지 못함으로 영적인 성장을 가져오지 못한다.

 


4. 그러면 어떻게 다이내믹한 그룹 토의를 통해 그룹의 멤버들에게 영적 성숙, 영적 도전을 통한 영적 변화를 보다 효과적으로 가져올 수 있도록 할 수 있을까?


리더는 그룹 토의 시간을 성령이 임재하시고, 그룹 멤버들이 은혜에 바다에 마음껏 헤엄칠 수 있도록 영적인 환경을 잘 만들어 주어야 한다. 역동적인 그룹 토의에서 그룹 리더의 역할은 다리(bridge)의 역할이요, 그 다리를 잘 건너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도우미(helper or facilitator) 이다. 리더는 섬김을 통하여 그룹 멤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받을 있는 길을 열어 주는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요, 리더는 그룹 멤버들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려 할 때 방해되는 장애물들을 치워주는 이들이다. 그리하여 토론 가운데 표현되어지는 개인적 느낌과 생각의 고백을 통해 각 개인에게 성령이 임재 하셔서 그들을 새롭게 빚으시고, 날마다 차고 넘치도록 새로운 능력을 공급하시는 성령의 은혜를 풍성히 받도록 하는 다리요 도우미가 바로 리더의 역할이다.


더 나아가 리더는 그룹 멤버들이 토론시간에 생기게 되는 관계성(relationship)을 통하여 영적 성숙과 도전 그리고 변화를 가져온다는 점에서 토론의 흐름이 원활하게 흘러가도록 지혜롭게 도와와 한다. 어느 누구도 이야기의 독점이 되지 않도록 하고, 어느 누구도 그 토론 가운데서 소외되지 않도록 잘 돌아보아야 한다. 그룹 토의 가운데서 관계(relationship)에 상처가 생긴다면 그 토론이 가져다주는 영적 성장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리더는 보다 성숙한 영적 성장을 이루는 토론 진행을 위해 효과적인 다리(bridge)를 구축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첫째 리더는 그룹 토의 시간 관리를 해야 한다. 나의 경우는 한 사람 당 이야기 할 때 3분 이상을 넘지 않도록 처음부터 토론진행 방법을 제시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한 후에 다시 할 수 있도록 시간을 분배한다.


둘째는 ‘핵심체크’ 토의 리더 스타일 경우는 그 토의 내용의 정답이 어떻게 내 삶에 도전하고 있고, 구체적으로 어느 부분에 변화를 요구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인지를 나누도록(share) 해야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지식에서 끝나지 않고 삶에 적용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더 나아가 정답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이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정답 없는 질문들을 토론의 내용과 연결해 던짐으로 토론에 참여시키도록 하는 것이 좋다.


셋째로 ‘노세 노세’ 토의 리더 스타일 경우는 재미와 더불어 그룹 토의 내용에 맞추어 각 멤버 자신의 삶 적용 부분이 구체적으로 나누어지도록 시간을 잘 배분하여야 한다. 아무리 재미가 있어도 그 그룹 멤버들의 근본적인 마음은 영적 갈증을 가지고 있고 영적 성숙을 갈망하고 있음을 리더는 보아야 한다.


넷째로 ‘소피스트’ 토의 리더 스타일 경우는 자신이 인도하는 토론이 가라앉거나 추상적, 혹은 비판적으로 끝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리더의 역할은 멤버들이 영적 성숙과 경험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 도우미 역할임을 기억해야 한다. 성격적으로 차분한 것과 비판적인 것과는 다르다. 성격적으로 사색형과 회의적인 것과는 분명히 다르다. 비록 리더의 성격이 소극적이라 할 지라도 그 나름대로의 장점이 있음을 기억하면서 자신이 가진 성격의 장점을 최대한 이용하여 그룹 멤버들로 하여금 성령의 역사에 긍정적으로 적극적으로 부딪힐 수 있는 다리의 역할을 잘 창조하라.


반면에 멤버 중 누군가가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대화로 이끌어 가는 경우가 있다. 이때 리더는 그 이야기를 하는 당사자의 이야기의 표면을 보지말고 그 마음을 돌아보아야 한다. 그런데 너무 한쪽으로 쏠려 있는 경우는 ” 그런 경우 누구 형제/ 자매님은 어떻게 해결 하셨어요?” 하며 그 문제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도록 돕는다. 하지만 그 당사자의 이야기가 보편적이거나 납득이 되는 경우는”저도 그러한 느낌을 가졌던 경험이 있어요”하며 공감을 나타내어 격려해주고, ” 그런 경우 누구 형제/자매님은 어떻게 해결 하셨어요?” 하며 역시 그 문제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도록 돕는다. 대화가 부정적이고 비판적으로 끝나지 않도록 하라. 성령의 하나님은 변화시키시고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다섯 번째로 ‘이것은 ‘ 토의 리더 스타일은 듣는(listening) 연습이 필요하다. 말을 더디 하라. 그리고 토론 시 리더의 역할은 표현하도록 돕는 역할이지 답(answer)을 주는 자는 아니다. 자신의 경험이나 생각을 이야기하는 개인의 경험을 잘 알지 못하면서 리더의 성급한 편견이나 판단으로 답을 주려하는 태도는 오히려 이야기하는 이의 마음을 답답하게 만들어 영적 성장에 장애물이 된다. 침착하게 듣기를 연습하라. 그리고 인정할 내용은 “정말 그러셨어요?” 하며 공감을 표현해 주라. 혹 Big question이 있을 경우는 small answer를 주지 마라. 예를 들어, 왜 이 땅에 악이 있나요? 왜 선한 사람이 고통을 받지요? 하나님이 정말로 존재하시나요 존재하신다면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요? 등등. 이러한 경우 중요한 것은 그 질문을 하는 사람의 의도를 생각해 보라. 그러한 경우는 주로 그 질문과 관련해 마음의 상처가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럴 경우 그의 상처를 이해하고 그것을 돌아보아 주는데 관심을 가지라.


여섯 번째 ‘내가 결론인 형’은 사람들의 의견을 잘 수용하고 전달해 주는 발표 연습을 하라. 특별히 이러한 스타일은 적극적이면서 자신의 의견이 강한 사람들에게서 많이 나타날 수 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표현과 그 전달은 그 그룹 멤버들로 하여금 마음이 열려, 보다 효과적인 영적 경험으로 인도할 수 있게 된다.


일곱 번째 ‘관망형’ 토론 인도형은 토론이 한 사람에 의해서 주도되지 않도록 적극 개입해야한다. 멤버들이 상대방의 이야기를 끊고 자신이 하기가 쉽지 않음을 기억하고 어느 누구도 소외되지 않게 대화가 골고루 나누어지도록 하라. 만일 너무 혼자서 많은 이야기/ 혹은 주장 을 하는 멤버가 있을 경우는 자연스럽게 ” 누구 자매/형제님의 생각은 어떠세요?” 하며 토론이 흘러가도록 지혜롭게 처리하다.


여덟 번째로, 그룹토의 마무리는 반드시 기도로 끝나도록 한다. 그리하여 토론가운데 임재하신 성령의 역사를 찬양하며 그 인도하심에 용기 있게 응답할 수 있는 우리들을 위해 기도함으로 마무리하라. 성령의 능력이 임하실 것이다.


우리들은 소그룹에서 어떠한 스타일의 토론 인도자인가?


다이내믹한 그룹토의는 강력한 영적 도전과 영적 진리에 대한 새로운 발견을 가져다 주어 영적 변화를 가져다 준다. 그리고 그 영적 변화(spiritual transformation)는 ‘자신의 생각, 느낌, 자신 삶의 드러냄’을 통한 구체적인 고백 내용(content)과 토의 가운데 신비하게 흐르고 있는 관계성(relationship)을 통해 이루어지게 된다.


따라서 리더는 토론 가운데 자신들의 삶을 드러내는 표현/고백이 멤버들 가운데 소외되는 사람 없이 잘 분배 될 수 있도록 환경을 잘 만들어 주어야 한다. 더 나아가 대화 가운데 흐르고 세워지는 신비한 성령과 개인의 관계, 개인과 개인들의 영적·육적 관계성에 민감하게 리더는 반응하면서 지혜롭게 대화의 흐름을 이끌어 다이내믹한 그룹토의 인도를 통해 멤버들로 하여금 영적 변화로 인도해야 한다.



[이시훈] 입 속의 검은 잎

이코스타 2003년 12월호

 

화려하고 무성했던 잎새들이 다 떠난 나무들을 보면서 시간의 흐름을 느낍니다.



갈색으로 변한 잎새들이 아직 떠나지 못한 채 나무 가지에 매달려 있는 모습은



계절의 바뀜을 무척 아쉽게 합니다.



한 때 푸르렀고 단풍 들었던 기억들을 접고 숙연하게 서 있는 나무들을 보며



삶의 한 자세를 깨닫기도 합니다.



 



옷을 다 벗어버린 나무는 겸허함과 삶에 대한 의지와 힘을 느끼게 하는



아름다움을 갖고 있습니다. 비어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담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일깨우고, 땅을 기름지게 하기 위해 잎새를 다 버리는 것은 내일의 풍성함을 약속하기



위한 헌신으로 보여집니다.



 



간신히 매달려 있는 잎새들을 보다가 한 시인의 시에 담겨 있는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저물어 가는 한 해를 돌이켜 보며 나의 혀는 어떤 모습의 나무를 그려내었는가



자문해 봅니다. 푸르고 싱싱한 잎새로 다른 이들을 축복하고 위안을 주었는지,



아름답고 진실한 잎새로 다른 이들에게 기쁨을 주었는지,



검게 시들은 잎새처럼 분노와 슬픔을 느끼게 했는지..



부끄러움과 자괴감이 들어서 혀를 감추고 싶어집니다.



 



얼마 전 모 전시회에서 본 작품들 중 관심을 끌던 조각이 있었습니다.



나무 기둥 위에 분홍색의 커다란 혀가 달려있는 작품이었습니다.



그분의 다른 작품을 많이 접하지는 못했지만 그곳에 있는 몇 점의 작품을 통해서



그 작가는 사람들 간의 관계에 깊은 관심과 통찰력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작품을 통해 모든 관계의 교량이 되는 언어 소통에 대한 반성과 문제를 스스로에게



제기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나무에 피어있는 아름다운 꽃처럼 보이는 혀의 모습이 한편으로는



그 나무를 쪼개는 칼처럼 보여지기도 했습니다.



우리 몸의 아주 작은 부분인 혀가 몸과 영혼을 쪼개거나 두터운 관계를



순식간에 파괴하는 칼로 작용할 때가 얼마나 많은 지요.



거대한 숲을 불사르는 불씨가 되기도 하고, 배의 방향을 정하는 작은 키의 역할을



하기도 하는(야고보서 3) 혀라는 출구를 통해 천국을 경험하기도



지옥을 경험하게 되기도 합니다.



 



우리 안에 내재하고 있는 미움과 시기, 그릇된 판단과 교만한 생각들이



험담과 자랑의 언어들을 통해 밖으로 나와 다툼과 분열을 일으키고



상처를 입히곤 합니다. 또한 그 칼은 그럴 수록 자신의 몸 깊이 박혀서



스스로를 상처 입히고 어둠의 세력을 불러옵니다.



내 입 속의 검은 잎이 두렵다는 시인의 고백처럼 내 몸의 작은 한 부분인 혀를



통제하지 못하는 자신에 화가 나고, 그 위력이 두렵기조차 할 때가 많습니다.



 



거짓과 위선, 그럴싸한 미사여구로 포장된 미혹의 영, 추악한 욕망,



비수와 같이 날카로운 공격들이 언어라는 매개체를 통해 밖으로 나올 때



나의 혀는 죽음과 절망의 검은 잎에 불과할 것입니다.



위로와 격려, 진실이 담긴 조언, 지혜와 평안을 주는 대화, 마음을 드러내는



소박하고 정직한 표현들이 나의 입술에서 나와 누군가에게 빛을 주고



기쁨을 줄 수 있다면 나의 혀는 아름다운 분홍빛의 꽃이 될 수도 있겠지요.



 



저희 이웃에 사는 한 미국인이 한국인 친구에게 배운 한국말을 자랑스럽게



저에게 들려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가 할 줄 아는 모든 한국말들은



저를 무척 당황하게 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욕설에 가까운 언어나 어리석은 농담의



표현들만이 그가 아는 한국어였으니까요. 저는 그에게 새로운 단어를 몇 개 가르쳐



주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름답습니다, 멋져요, 건강하세요



무엇보다 중요하게 몇 번이나 반복시킨 표현은 “사랑해요“ 이었습니다. 



 



그가 알지도 못하고 내뱉은 언어들이 그 자신을 얼마나 천박한 인격체로



보이게 하는지, 언어는 한 사람의 인격을 담는 그릇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한 어린 아이처럼 저도 새롭게 언어를 익히고 싶습니다.



영혼을 더럽히고 다른 이를 상처 입히는 말들은 제 언어 창고에서 버려내고 싶습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찬양과 살아가는 일에 대한 감사의 노래를 부르는 혀,



기도하는 혀, 사랑한다고 외치는 혀를 갖고 싶습니다.



 



새들이 찾아와 다투어 노래하고 그늘에 쉬기 위해 나그네가 찾아와 머무는



푸르고 싱싱한 잎새 무성한 나무가 될 수 있기 위해 검은 잎새의 혀를,



칼 같은 혀를 버리렵니다. 한 해가 저물기 전에

[최영기]설교 듣는 것이 예배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것도 아니고 안 믿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에 있었던 대학시절, 주일날 설교 직전에 예배당에 들어가서 축도 끝나기 전에 살짝 도망쳐 나오던 기억이 납니다. 이러면서도 별로 가책을 느끼지 않았던 것은 예배의 다른 순서들은 설교를 위한 장식 정도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가는 목적은 설교 들으러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설교만 놓치지 않으면 예배를 드렸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저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는 분들을 보면 옛날 제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쓴웃음이 나옵니다.


설교가 예배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된 것은 종교개혁의 결과입니다. 로마 카톨릭 예배에서는 예식과 성례가 예배의 전부가 되다시피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성도들이 말씀에 무지하게 되었습니다. 종교 개혁자들이 말씀에 관한 성도들의 무지를 깨려다보니 말씀 선포가 예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되고 말았습니다.


설교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설교와 더불어 기도, 찬송, 찬양, 헌금 등이 다 중요합니다. 설교만이 아니라 모든 순서가 다 예배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설교 외의 다른 순서들은 설교에서 은혜를 받기 위한 준비나 액세서리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예배드릴 때에는 예배 순서 하나 하나에 정성을 담아야합니다. 찬송할 때에는 진심으로 해야하고, 기도할 때에는 믿음으로 해야하며, 헌금할 때에는 감사와 기쁨으로 해야합니다.


저는 주일 새벽이면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광고를 포함한 예배 순서 하나 하나를 꼽아가며 기도합니다. 예배 순서마다 성령님의 도우심과 임재하심이 같이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교회에는 예배를 위하여 기도하는 약 50명의 기도 사역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예배 10-20분전에 본당에 나와서 예배 순서를 하나하나 꼽아가면서 기도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교회를 방문하시는 분들이 예배가 은혜롭다고 평가해 주십니다.


예배에서 은혜를 받기 원하면 교회당에 일찍 나와서 마음 준비를 하고 임해야합니다. 이때에 예배 순서를 꼽아가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기도가 예배를 은혜롭게 만들뿐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자신이 예배에 은혜를 받게 만들어줍니다.



[권오승] “반윤리적” 기독교

이코스타 2003년 12월호


해적선장 이야기


어느 해적선이 어느날 크게 약탈을 하는데 성공하였다. 수많은 보화와 진귀한 물건 뿐 아니라, 여러명의 아름다운 처녀들도 납치해 오는 큰 성과였다. 해적선상에서 이를 축하하는 잔치가 열렸다. 잔치가 한참 무르익었을 무렵, 선원 몇 명이 해적선장 앞에 아리따운 처녀 몇 명을 데리고 왔다. 재미있게 한탕 놀아보자는 것이었다. 그때 해적선장은 소리를 버럭 질렀다. “네 이놈들, 너희들은 내가 결혼을 소중하게 여기는 크리스천임을 몰랐단 말이냐! 나는 결코 이 여자들에 손대지 않을 것이다!” 그날 밤 해적선장은 잠자리에 들기 전, 무릎을 꿇고 자신이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이 이야기는 복음주의권에서 자주 회자되는 이야기이다. ‘개인적으로 신실한’ 신자들의 모습을, 해적선장이라는 비윤리적인 자리에 있으면서 개인적인 신앙생활의 신실함을 지켜내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비유한 내용이다. 과장이 되어 우스꽝스럽긴 하지만, 이 모습은 어쩌면 아주 전형적인(typical) 한국적 그리스도인의 슬픈 모습을 그려놓고 있는지도 모른다.


A군의 직장생활 이야기


신실한 그리스도인인 A군은 한국의 어느 국가출연 연구소에 연구원으로 일을 시작했다. 학생으로 있으면서 캠퍼스에서 성경공부를 인도하기도 했었고, 지역교회에서도 성실한 일꾼으로 인정받던 A군은, 직장에 가서도 신우회 활동등을 통해 ‘직장 복음화’를 이루겠다는 꿈에 부풀어 직장에 들어갔다. 그런데 직장에서 A군이 부딪혀야했던 ‘세상’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일주일에 한번꼴로 있는 회식에서 여러가지 이유로 술을 거부하는 것이 마음 늘 부담이 되었다. 한약을 먹는다, 개인적으로 술이 안받는다, 운전을 해야한다는 등의 핑계도 이전 거의 떨어져 가고 있다. 주일마다 나와서 일을 하라는 압력을 받는 것도 A군에게는 심각한 도전이다. 교회에서 여러가지 일로 섬기고 있는 터에 주일은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원칙으로 세우고 있는 A군은 이 원칙을 깨지 않으려 정말 힘들게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 A군을 또 힘들게 하는 것은 가끔 ‘전문가 초청’ 가짜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가끔 세미나를 부탁한 전문가가 세미나를 펑크내면, 그냥 그 세미나가 열린 것으로 보고서를 써 내고 거기서 나온 경비로 연구실 회식을 하는 것이었다. 거짓 보고서로 회식이 마련되면 A군은 또한 여러가지 핑계를 대고 회식에 빠지려 노력하였다. 부정에 동참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가끔 직장 상사에게 피치못할 거짓말을 하는 것도 늘 마음에 걸렸다. 어쩌다 일이 밀려 기한내에 끝내지 못하면, 일을 이미 다른 부서로 넘겼는데 그쪽에서 아직 넘어오지 않아서 그렇다고 몇번 둘러대곤 했는데 이런 사소한 거짓말에도 A군은 심하게 마음이 찔렸다. 매일의 삶에서 이렇게 끊임없이 다가오는 도전들에 정정당당하게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은 역시 기도 외에는 없다는 생각에 A군은 힘들지만 매일 새벽기도에 나갈 것을 결심한다. 거짓말하지 말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 지어다. 이런 성경구절들이 A군의 QT 노트에는 자주 적히게 된다.


이것은 가상의 어떤 ‘경건한’ 그리스도인 청년의 이야기이다.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고자 노력하는 아름다운 모습이 담겨져 있다. 하루하루의 삶에서 작은 것까지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 노력하며 분투하는 모습. 그러나, 이 모습을 위의 해적선장 이야기에 대비시켜보면서 뭔가 석연치 않은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반윤리적인 기독교


많은 사람들이 한국 기독교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여러 가지 비판의 소리가 있지만 그 가운데 가장 큰 비판의 소리 가운데 하나는, 한국 기독교가 ‘도덕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목회자의 개인적인 비리와 부정축재, 당회장의 권력을 투명하지 않은 절차를 통해 아들에게 물려주는 문제, 교회가 다른 ‘사업’을 벌이면서 터져나오는 각종 탈세 혹은 비리 의혹들. 그 외에도 사회적으로 크고 작은 문제들이 터질 때 마다 항상 단골로 등장하는 교회의 집사, 장로, 권사, 목사님들. 이런 우리의 자아상이 우리 스스로 부끄러워서 일까, 어떻게든 하나님의 교회를 바로 세워야한다는 사명감에서일까, 아니면 함께 싸잡아서 욕먹는 것이 못내 분해서일까, 우리 안에서도 이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쏟아내는 목소리들이 높다. 그리스도인들의 도덕성이 땅에 떨어졌노라고. 적어도 세상의 상식 수준의 도덕만이라도 우리안에서 회복하자고. 사실 우리는 얼마나 교회나 기타 기독교 관련 단체 혹은 집회 등에서 ‘종교적’ 혹은 ‘도덕적’이길 도전받는가. 주일성수, 금연, 금주, 십일조와 같은 ‘종교적 규율’들과 정직, 청렴, 사랑, 자비와 같은 ‘윤리적 규율’ 등을 나열하면서 이것들을 지키는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자고. 그리고 우리 복음이 가지고 있는 기독교적 윤리 기준은 세상의 타락한 가치기준보다 우월하다고. 그러나, 정말 그런가. 철저히 인본주의적인 기반에서 미국내의 불법 이민자들, 미혼모들을 돌보는 social worker들을 보았는가. 이들은 그들과 하나가 되기 위에 일부러 흑인 저소득층이 사는 지역에 가서 자기 자녀들을 교육시키며 박봉으로 그들의 어려움을 온 몸으로 섬기는 사람들이다. 이런 이들의 도덕기준보다 과연 기독교의 도덕기준이 얼마나 더 우월하단 말인가.


자크엘룰(Jacques Ellul)에 따르면,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반윤리적’인 종교다.


“하나님과의 만남에 방해물로 나타나는 모든 도덕을 초월하라는 것이다. 사랑은 어떤 도덕에도 굴복하지 않고 어떤 도덕도 만들지 않는다. 계시된 진리들(자유, 진리, 빛, 말씀, 거룩)은 어떤 것도 도덕과 관계하지 않으며, 또한 도덕을 탄생시킬 수 없다. 그 진리들이 일깨우는 것은 존재 양식과 삶의 모습이다. 그 삶의 모습은 지극히 자유로우며, 끊임없이 위험에 처하지만 항상 새롭게 되는 것이다. 도덕이란, 그것이 어떤 것이든간에, 하나의 금지이며 장애물이고 또한 그 안에 정죄를 내포한다. 정확히 예수께서 모든 도덕적 인물들에의해 어쩔 수 없이 정죄받은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기독교 역사상 가장 근본적인 비극들 가운데 하나는 이 자유한 말씀이 도덕으로 변형된 것이다.” (자크엘룰, 뒤틀려진 기독교, p120-121,대장간 1990)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과 비그리스도인의 차이는 윤리적이냐 그렇지 않느냐, 혹은 윤리적으로 누가 우월하고 열등하냐하는 것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을을 비그리스도인과 구분하는 가장 중요하고도 유일한 원리는 이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나는 하나님이 아니다.


즉, 전적타자(全的他者)로서의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도무지 채울 수 없는 간극(gap)이 있어서 우리는 어떠한 방법으로도 하나님같이 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절대적으로 인정할 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모든 것들은 절대적인 하나님에 대하여 모두 상대화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나는 하나님이다’ 라고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내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만들어진 윤리적 강령들 심지어는 도덕적 강령들이 절대화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이것은 복음의 근본을 흔드는 심각한 도전이다.


앞의 A군의 예를 다시 생각해 보자. 물론 A군이 성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노력하는 열정은 분명히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A군이 지키려 했던 주일성수, 금주와 같은 종교적 강령들이나 정직, 성실과 같은 윤리적 강령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을 때, A군의 노력은 매우 소모적인 것이 될수도 있다. 또한, 경건하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이 반복해서 종교적, 윤리적이되는 이유도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이 계속 점검되지 않기 때문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의 기독교, 특히 한국 기독교가 비윤리적, 비상식적인 모습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종교적 윤리적 강령들을 강조함으로써가 아니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강조함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고난 (박해 : Persecution)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으로부터 출발하지 않는 종교적 윤리적 강령들이 소모적인 것이라면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으로부터 출발하는 순종은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게 될까. 성경의 예도 그렇고 역사적으로도 그렇고 그 결과는 고난 혹은 박해(persecution)였다.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외치는 세상에 대하여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하나님이시다’라고 외치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심각한 갈등과 충돌을 필연적으로 갖게된다.


그런 의미에서 박해는 세계관의 충돌에서 비롯한다. ‘나를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내가 하나님이 아님’을 발견했을 때, ‘나를 하나님’이라고 여기며 쌓아왔던 모든 전제들은 더 이상 이 새로운 세계관의 사람들을 담아낼 수 없는 것이다. 로마시대의 세계관이 그리스도인들의 새로운 세계관을 도무지 담을 수 없어 그리스도인들이 사자밥이 된 것, 세속화된 중세교회에서 성경적인 메시지를 선포하려했던 초기 종교개혁자들이 받았던 박해도 이 세계관의 충돌로 이해할 수 있다. 한국 선교 초기에 선교사들과 초기 신도들이 받았던 박해 역시 구한말의 유교 봉건적 세계관이 그리스도인들의 세계관을 참아낼 수 없었던 것에 기인한다. 그 충돌이 일어나고 있는 시대의 시대정신이 복음적 세계관과 충돌할 때 일어나는 것이 박해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있어서 그러한 충돌은 어디에 있는가? 이 문제는 많은 연구와 고찰이 필요할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더 이상 그러한 박해는 없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해의 근본적인 뿌리가 세계관의 충돌임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기꺼이 받아야만하는 박해의 내용들을 조금 자세히 볼 수 있다. 매우 치열한 충돌과 갈등이 있어야 하는데도 별로 그렇지 못한 예를 몇 개만 들어보자.


(1) 경쟁 하덕규씨가 노래했듯이, 우리 시대는 ‘함께 사는 법을 배우기보다 혼자 살아남는 것을 배우는’ 시대이다. 이러한 시대정신에 정면으로 대항하여 살아간다면, 비록 그것이 정정당당한 경쟁이라 하더라도 다른 이들을 위해 스스로 패배자가 된다면, 아니 적어도 자신이 당연히 차지할 수 있는 것을 적극적으로 나누고 산다면, 그리고 그로 인해 고통을 받게 된다면 이 사람은 이 시대가 가지고 있는 시대정신, 혹은 세상의 가치관에 대해 자신의 가치관으로 정면으로 대항하는 ‘박해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경쟁에서 낙오한 사람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인것같이 공감하며 함께 고통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 그러다가 어쩌면 자신도 치열한 경쟁에서 도태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어쩌면 진정으로 시대에 대항하여 사는 사람들이 아닐까. 우리 주변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과연 이러한 삶을 선택해서 살고 있을까.


(2) 성공주의 모두가 성공을 하고자 바둥바둥 하면서 사는 세상이다. 서점의 기독교 섹션에 가보아도 ‘성공’에 대한 수많은 베스트셀러들이 진열되어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렇게 모두가 ‘성공’을 향해 매진해 갈 때, 아내 혹은 남편의 자아실현을 위해 자신의 ‘성공’을 양보하고 스스로 한 단계 내려 앉는 삶을 선택했다면, 그 후에 주변에 자신과 함께 ‘성공’을 향해 달려갔던 사람들이 모두 어떤 성취와 성공을 과시할 때 자신의 초라한 모습과 비교하며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성공’만을 향해 달려갈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그러한 삶의 모습을 지켜나간다면 이 사람 역시 성공주의라는 거대한 시대정신에 맨몸으로 맞서도 있는 사람일 것이다.


(3) 직업선택 어떤 직업이 가지는 수입에는 두가지 결정 요소가 있다. 하나는 그 직업이 창출하는 사회적 문화적 가치이다. 즉, 그 일의 사회적 기여의 정도에 따라 그 임금 수준이 결정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일시적 혹은 장기적 사회 구조적 모순으로 인해 그 직업이 가지는 사회적 기여와 무관하게 그 임금 수준이 결정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 직업이 창출하는 사회 문화적 가치에 대한 고려를 하지 않고 자신의 취향과 수입의 정도를 가지고 직업선택을 할 때, 임금 수준이 낮다 하더라도 더 의미있고 가치있는 일을 선택을 한다면, 혹은 자신의 임금 수준이 사회 구조적 모순으로 인해 그 가치보다 더 많이 정해져 있으므로 적극적으로 그 잉여 부분을 다른 이들과 나눈다면, 이런 선택 역시 이 시대가 갖고 있는 가치관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자세일 것이다.


여기에 제시되어 있는 예들이 세상의 가치관에 대항하여 사는 가장 좋은 예들을 선별한 것은 아니다. 반드시 따라야할 지침들은 물론 더더욱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 각 사람에 맞게 어떤 길로 부르시고 그 부르심은 때로 세상의 시스템에 깊숙히 들어가서 사는 것일 수 있다. 이런 경우 전략적으로 겉보기에 세상의 가치관에 순응해서 사는 형태로 살아갈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매 순간이 정말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살아내고자 하는 의지와 자세가 아닐까.


고난받는 공동체, 거룩한 공동체


거대한 세상의 힘에 맞서는 일은 분명 두려운 일이다. 그리고 실제로 세상과 맞서 싸우다 낙오하고 ‘박해받는’ 일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낙오하는 것은 과연 실패일까. 여기에 공동체의 중요성이 있다. 물론 세상에 맞서 비성경적 시대정신에 온몸으로 저항하다 낙오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개인적인 경건의 영역에 그치게 된다. 그러나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일단의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함께 비성경적 시대정신에 저항할 때, 이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가져올 것이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그러하였다. 그들은 아주 단순히 자신들의 신앙의 양심으로 할 수 없는 일은 로마의 권력이, 시대 정신이, 사회적 통념이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던지 간에 하지 않았고, 자신들이 해야만하는 일들은 반드시 하고야 말았다. 성경말씀 그대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다시 해적선장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물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전체가 해적선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가 정면으로 대항해서 싸워야 하는 가치기준들을 외면한채 개인적인 종교적 윤리적 경건만을 추구한다면 우리의 모습이 해적선장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수도 있다. 조금 극단적인 비교가 되겠으나, 성적순결을 지키는 해적선장과 난봉꾼이지만 자신의 일에 충실한 해안경비대장 가운데 누가 더 유익한 사람이겠는가.


복음은 원천적으로 모든 권력과 모든 권세를 뒤집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 권력이 돈이건, 정치 권력이건, 사회적 통념이건간에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을 때 그것을 뒤집는다.


그런데 우리는 이 시대에, 하나님 나라 백성의 공동체가 세상의 경쟁주의, 성공주의, 배금주의, 인본주의에 대해 정면으로 대항하여 그것을 뒤집는 예를 얼마나 볼 수 있는가. 모두가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에 대하여 태클을 걸며 유일한 하나님되신 그분의 뜻 이외에는 모든 것을 거부하는 당당함을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는가. 정치권력, 금전권력, 쾌락주의, 사회적 통념등과 끊임없이 타협하면서 만들어내는 구차한 변명들을 얼마나 우리 공동체 안에서 많이 접하는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당당하게 거부하고,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을 타협함없이 지키는 진성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낙오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에 맞서 나가는 모습을 우리 안에서 더 많이 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공동체가 함께 고난을 기꺼이 감당해 나가는 자세를 견지하며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선포하는 일들이 편만해 지길 소망한다. 그렇게 할 때 이땅의 우리 공동체들은 천박한 종교적 윤리적 강령들에 얽매여 하나님 나라 백성의 공동체를 세상에 벤치마킹하는 모습에서 벗어나, 거룩한 공동체가 될 수 있으리라.


사족


이 글은 아직 미숙한 한 유학생의 묵상 글입니다. 많은 분들의 조언, 충고, 첨언들을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