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형선]제자삼는 사역이 나를 제자로

이코스타 2004년 4월호

내 자신도 캠퍼스 안에서 소그룹을 섬기고 있기에 매달 나오는 eKOSTA의 유학생사역 섹션은 나의 좋은 길잡이가 되어 왔다. 그랬던 곳에 나의 생각을 글로 옮길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캠퍼스 사역에 자신의 눈물과 시간과 열정을 쏟으시는 선배님들의 노하우에 비하면 내가 깨달은 것은 정말 작고, 부족하지만 내가 소그룹을 시작하면서 적용했던 것들을 소개하려고 한다.



나의 경우는 학교를 옮기고 새로운 환경에서 시작한 소그룹이기에 새로운 곳에서의 유학생 사역, 특히 캠퍼스 사역을 하시려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동기



새로운 곳으로 오기 전, 계속해서 제자 삼으라는 말씀이 한 학기 동안이나 귓가에 맴돌기 시작했다.



‘주님 내 삶에 주인 되시고’라는 찬양을 부르게 되었는데, …주 뜻 이루려고 날 예정하셨네, 오직 주님만 내 일생과 내 영혼의 주되시네 주 말씀 전하라 날 선택하셨네



주의 능력으로 인도하사 크신 이름 이루소서 의지합니다….



이때 정말 주 말씀 전하려 날 선택하셨네라는 꿈을 꾸면서, 뭔지는 잘 모르지만 내가 받고 있던 하나님의 은혜를 말씀으로 전해야 겠다는 소망을 품게 되었다.








그 시점 정들었던 DC에서의 2년간 생활을 뒤로하고, 새로운 학교인 Univ. of North Carolina at Greensboro로 옮기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말하는 유학생으로의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1. 한 명을 잡아라



모임을 시작하려면 나 혼자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캠퍼스에 대해 같은 비전을 품을 수 있는 동역자를 만난다면 이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나 싶지만, 이런 귀한 동역자를 찾기는 커녕 스타팅 멤버들도 만나기 힘든 것이 현실인 것 같다.



그래서 첨에 동역자를 생각하면서도 모임을 시작하기 위한 구성원들은 아직 미국에 유학온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을 주된 대상으로 하게 되었다. 보통 유학온지 얼마 되지 않은 학생들은 아직도 그들만의 시간 테이블을 무엇으로 채우려고 구상하는 반면에, 비교적 유학생활에 익숙해져 있는 학생들의 경우는 흔히들 말하는 바쁜 유학생활과 그 지역에 있어서는 어느덧 익숙졌다는 생각때문에, 새로운 모임이나



잘 모르는 누군가를 잘 따르려고 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자기들이 도와주려고 하지 어떤 새로운 질서에 편입되길 꺼려 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런 약간의 어려움 점이 있기 때문에 기존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접근 하기 보다는 새로운 사람들 위주로 모임을 편성하기 휠씬 쉬운 것 같다.



나의 경우도 처음 와서 아직 유학생활에 자리잡지 않고 있는 사람들 대상으로 모임 구성을 했는데, 어떤 친구의 경우는 모임의 뜻은 좋지만, 유학생활에 자리부터 잡고 난 후에 성경공부를 하고 싶다는 애기를 했었다. 그래서 오히려 자리잡았을 때는 자기만의 시간 테이블을 다 채워져 난후라 뭔가를 집어 넣으려면 쉽지 않을꺼라는 전후 사정 애기를 했더니 자신도 그 부분을 이해하며 참여하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한 명씩 한 명씩 만나서 캠퍼스 성경공부 모임을 시작하게 된 인원이 5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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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팀웍을 형성해라 (같이하는 느낌)



시작하기로는 했지만, 이제부터는 누가 인도하느냐 어떻게 하느냐에 대한 문제가 이어졌다. 나의 경우는 전에 캠퍼스 소그룹 모임에서 양육을 받았기에, 그 성경공부의 모델을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그 모임에서 이렇게 했으니까 그 모임대로 거기서 했던 방식으로 해야 되다는 발언은 친구들에게 오히려 거부감이 들게 되지 않을까 싶었다. 이건 꼭 ‘내가 어디 캠퍼스 선교단체 출신인데, 우리도 그렇게 해야 돼’ 하는 식의 꼭 점령군 같은 느낌이 들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전에 있던 캠퍼스 소그룹에 대한 이야기는 입에도 꺼내지 않았다.



그러면서, 꼭 누가 인도하고 가르치고 전한다는 표현보다는 서로 섬기고 같이 준비하고 나눈다는 어법으로 서로의 이해를 구했다.



그리고, 찬양할 수 있는 친구가 찬양을 준비했고, 그런 과정에서 수요일에 한번 더 모여서 기도모임을 갖기로 하고 온라인 상의 카페도 관리해야 하는 일등이 생겨 각각 한 파트씩 다 맡아서 하게 되었다. 그렇게 서로가 같이 준비해서 나누고 같이 만들어 간다는 느낌이 계속 형성되니까, 그것이 자발성으로 이어졌고 캠퍼스의 다른 지체들도 함께하는 모임으로 발전해 나아갔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로마서 8:28>



3. 지체들에게 동기 심어주기와 인도자의 목적의식 갖기



모임 안에서 정확한 목적의식 갖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고 쉽지 않은 문제인 것 같다.



우리가 세운 첫번째 기치로는 유쾌한 성경공부가 되자는 것 이였다. 비록 짧은 내 신앙생활의 경험이지만, 성경공부 하면 일단 재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신앙생활 오래한 분들도 성경공부는 재미없는 것쯤으로 여기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성경공부에 대해서 지루하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서, 모임의 동기를 줄 수 있는 것은 그런 부분을 깨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유쾌한 성경공부가 되도록 유도했고, 때마다 이 동기를 계속 심어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너무 유쾌하다 보니 웃다가 끝난 적도 여러 차례 있어서 반성을 여러 번 했던 적도 많은 것 같다.



그럼 여기서 어떻게 유쾌하게 모임을 유도하냐라는 질문이 생길 것 같다.



누구나 잘 알겠지만, 그것은 우리들의 관심사를 많이 끄집어 내어 말씀으로 연결시키는 것 같다.



특히 많이 했던 것은 청년들의 빅 이슈인 이성문제의 소재를 이용해서 그것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연결 시켰던 부분 이였던 것 같다. 예를 들면 기도에 대한 주제가 나오면, 얼마나 해야 되며 등의 내용이 나오면 바로 이성 교제시 새로운 여자친구 사귀면 얼마나 전화통화 하냐라는 등등의 상황을 나누면서 결국 사랑하면 어떻게 되는가를 연결시키는 일들을 많이 했다.



사실 때로는 무리하게 연결시키다 보니 억지도 가끔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식으로 일단 모임을 편하게 만들기까지는 했지만,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인도자가 분명한 목적의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이 오천명에게 이적을 베푸시면서 우리들의 필요를 채우셨지만, 제자들에게 항상 포커스하셨던 제자 삼기 위한 우선순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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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4. 심는자냐? 물을 주는자냐?



 1.0″>내게 소중한 캠퍼스 간사님 2분이 계신다. 지금도 항상 멘토로 형, 누나로 도움을 많이 주시는 분들이 .



신앙생활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을 때 만난 첫 성경공부의 간사님을 생각하면 죄송하지만 무엇을 배웠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기억 나는 것이 있다면 사도행전 배울 때 자기 이름이 성경에 첨으로 나온다고 기뻐하며 했던 말밖에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내가 확실하게 느꼈던 것은 이 간사님이 내가 하나님을 알았으면 하는 간절함 마음을 심어주었다. 그리고 나뿐만 아니라 우리 모임의 지체들을 모두 사랑했다는 것이다. 어느날 이메일함을 정리하다가 이 간사님이 보낸 메일들이 우리 어머니가 보낸 메일가 비슷하다는 것을 보고 어머니 만큼의 사랑이 날 변화시켰구나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두 번째 만난 간사님은 어찌나 유머와 말을 잘 하든지 그 때 배운 디모데전후서의 내용은 하나도 잊어버리지 않고 있다. 작년에 고린도전서에서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뿐이니라.” (고린도전서 3:6-7) 라는 말에 나에게 심는 자로서 물을 주는 자로써 도움을 주었던 그 두 분을 생각하고 정말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자라게 하셨구나 느끼며 감사의 기도를 드렸던 적이 있다.



그래서 항상 심는 자로서의 역할이냐 아니면 내가 물을 주는 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하나에 대해서 생각하며 모임을 섬기려 하고 있다.



5. 중립성을 지켜라



 1.0″>캠퍼스안에 학생들을 여러 가지로 분석해 볼 때 크게 교회 다니지 않는 친구들의 이유를 살펴보면 여 러 가지의 해석이 나온다. 특히 내 불신자 였을때의 유용한 경험과 그 부류의 친구들을 볼 때, 교회나 기독교인에 대한 편견이 있거나, 아니면 예수님이라는 분이 어떤 분인지 제대로 접해 보지 못한 경우가 많은 것 같다.



편견이 있는 친구들의 경우는 성경 공부란 교회에 데리고 가기 위한 교회 2중대쯤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이때 그들이 불편해 할 수 있는 요소들(교회에 나가자, 독선적인 것, 강요)을 보여주지 않고,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려주는 것이다.



한번은 이런 식으로 전도하며 그런 편견을 가지고 있는 친구들에게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중요하지 교회가 뭐가 중요하냐, 그러다 교회 안가도 된다는 말까지 했었다. 사실 이것이 오해가 되어서 내 자신이 교회에 나가지 말라는 캠퍼스 사역자로 지역 교회 분들에게 뜨거운 오해를 샀던 적도 있었다.



그리고 모임 안에서도 밖에서도 성경공부만 나오고 교회에 나가지 않는 지체들보고 걱정과 우려를 하는 경향이 있는데, 내 생각에는 하나님도 모르는 친구들이 나와서 하나님 말씀을 입술로 읽고 배우고 있다는 자체가 기적이지 교회에 나가고 안 나가고는 그 이후에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캠퍼스 주변에 교회들이 여럿이기에 자칫, 섬기는 자가 이런 민감한 사안에서 중립성을 갖지 못한다면 잘못된 오해는 가지고 있는 지체들을 품기 어려울 수 있다.



그래서 세 번째 기치 중에 하나인 오직 하나님 편에만 서는 성경공부라는 것이 이래서 생겼다.



결국 세가지 기치 유쾌한 성경공부-동기부여, 참 제자되는 성경공부-우선순위 의식고취, 하나님 편에 서는 성경공부-본질을 통한 중립성확보로 이어지도록 하고 있다.



“주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잠언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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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온라인상의 활발함을 이용하여 모임의 활발함을 이끈다.



서로 팀이라는 느낌과 긴밀한 관계가 되지 못하면 그냥 형식적으로 모임에 나오고, 와서도 그냥 나누지 못하고 앉아 있다가 가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활용하고 있는 것이 온라인의 활발함을 유도해서 모임의 활발함으로 이끈다는 것이다. 누군가 글을 쓰면 꼭 긴 답장을 달아주기보다 짧게라도 덧글을 달아주고 QT나눔의 경우는 릴레이식으로 하도록 유도하며, 한 주의 활동들을 사진으로 찍어서 자주 올리면 지체들은 어떤 것이 올라왔나 궁금해서라도 들어오고 모임이 있기까지 함께 움직인다는 느낌을 만들어 주게 되는 것 같다. 예를 들면 100번째 200번째 글을 올리는 사람에게 상품(간사가 식사 한끼 대접등)을 주는 것이라든지, 그 주 했던 성경공부 모임 때의 사진을 찍어서 첫 화면에 올리는 것등이다. 



하지만 1/3 법칙이 있듯이 1/3은 활동하고 1/3은 들어와서 보기만 하고 1/3은 관심 없는 현상이 나타난다.



결과들



제자를 삼으려고 시작한 캠퍼스 사역이 결국 나를 제자로 만들었다.



여기에서 캠퍼스 모임을 통해서 말씀 전하고 예수님 따르기를 결단하는 몇몇 친구들을 나타났고, 그 친구들 중에 하나가 세워져서 지금은 이 모임을 섬기고 있으며 난 다른 캠퍼스에서도 새로운 모임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외형상의 결과 보다는 제자를 삼으려고 했던 것이, 언제가부터 이 캠퍼스에서의 사역을 통해 내가 제자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 이였다.



찬양할 때, 기도할 때에도 성령님의 살아계심을 느끼지만, 무엇보다도 내 입술에서 하나님 말씀이 나갈 때 내 안에 강하게 움직이시는 성령님의 느낄 수 있었고, 그렇게 한 주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며 산다는 것이, 제자 삼는다는 것과 제자 되는 것과 동일한 가치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성화란 끝이 없지만, 내가 직접 제자 삼으려 할 때 내 신앙의 자체도 제대로 살아날 수 있다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율법책을 입에서 떠나지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가운데 기록한대로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길이 평탄하게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여호수아 1:8>



 



새소망



캠퍼스 사역을 했던 것이 신앙생활 한지 2 년째 되는 때였다. 그냥 학교 다닐 때부터 서클 만들기 좋아하는 내가 예수님 만난 열정으로 성경공부 모임을 만들면서, 내가 제자 되어 갔던 놀라운 일들을 생각하면, 그 분을 알기에 두려운 마음이, 하지만 하나님께서 보여주셨던 일들 그리고 보여주실 일들에 대한 기대가 내 마음 속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 자신이 그분에게 정결하게 서고 싶다는 새 소망이 생겼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흠이 없고 순결해져서, 구부러지고 뒤틀린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없는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것입니다” <빌립보서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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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STAN이 본 ‘The Passion of the Christ’ – 2

이코스타 2004년 4월호

영화를 본 후 자꾸 생각이 났던 말씀들이 있어서 잠깐 나눕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보고 놀랄 것이다. 이것은 그의 모습이 너무 상하여 사람같지 않기 때문이다 (사 52:14, 현대인의 성경)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 (개역한글)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시22:6)


심해지는 채찍질과 십자가의 못 박히시는 장면들은 눈뜨고 보지 못했고 (그것을 눈뜨고 보지도 못하겠고 마음 깊숙이 받아들이기도 힘이 들어서 내 안에 싸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말씀 그대로 정말 사람의 모양을 찾아볼 수 없는 모습으로… 벌레의 모습으로… 도수장에 끌려가시는 잠잠한 어린양의 모습으로… 나를 놀라게 하셨습니다. 그 모습으로 예수님께서 나를 보고 계셨습니다.


(DC에서 K 자매)



저는 감정이 팍팍한 사람이라서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서 늘 회의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C.S. Lewis가 예로 든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이고 죽어서 부활할 것을 확실히 알고 있는 사람이 당하는 고난이 뭐 그리 대단하냐고 회의하는 마음이 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고서 예수님의 고난이 장난이 아니었구나 하는 것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리얼하게 느껴지던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고 나니 -아리러니컬하게도 – 오히려 안도의 한숨이 나왔습니다.


사실 십자가는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잔인한 고통을 주는 형벌이라는 식으로 십자가의 고통을 극대화 시키는 말들을 우리가 많이 들어 왔습니다. 저는 아직도 그 말에 찬성하지는 않지만, 이 영화를 보고서 굳이 십자가가 가장 지독한 형벌이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은 우리의 육체가 감당하기 불가능할 정도의 지독한 고통이 있었다는 (가장 지독하고 아니고는 관계없이) 것으로 인해 그 구체성과 상징성이 다 만족되는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십자가의 고통이 제게 크게 다가와서 저를 심각하게 만들었던 이유는, 예수님께서 그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려고 단호히 기도 하고 끝까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언덕으로 가시려고 하는 장면들이었습니다. 글쎄요, 며칠 갈 지 모르겠지만, 고난받으시려고 기도하고 결심하고 (맨 첫장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끝까지 그 길을 나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계속 생각납니다. 피할 수 있는 많은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고통을 정면에서 받으시니까 더욱 그분의 고난이 증폭되어 다가 왔었고, 이제 제 마음을 심각하게 돌아보게 만듭니다.


빌라도가 기회를 줄 때에, 차라리 대답을 잘 해서 그냥 풀려나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였는데, 베드로가 똑 같은 제안을 했다가 “사단”이라는 꾸중까지 듣는 것이나 영화 속의 사단의 생각이나 다 한가지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동정이 아니라 사실은 저 자신에 대한 동정이요 두려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마리아의 엄연한 태도가 부각됩니다. 그녀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그 사랑으로 인해 예수님이 받는 고통이 그대로 그녀에게 느껴지는 장면들, 그러면서도 예수님의 사명에 대한 인식의 확고함 (믿음)이 그려졌습니다.


(Seattle의 K형제)


작년 초에 멜깁슨이 예수님에 대한 영화를 만든다는 기사를 잡지에서 읽으면서 흥분했었습니다. 헐리우드에서 영향력있는 영화배우 중 하나인 멜깁슨이 크리스찬이라는 것도 놀랍고 기뻤고, 그가 자비를 들여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관한 영화를 만든다는 것도 참 고무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영화가 개봉되면 꼭 성경공부 지체들과 함께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예정일보다 조금 늦게 그러나 때 맞춰서 “The Passion of the Christ”가 개봉되었다는 광고를 보았습니다. “때 맞춰”라고 생각한 이유는 마침 성경공부에서 요한복음을 공부하고 있을 때였기 때문입니다. 바울 서신을 볼 때와는 달리 요한복음을 공부하면서는 지체들이 본문을 많이 어려워했고 특히 예수님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하는 걸 느끼고 있었기에 이 영화가 본문이해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관람에 대해 광고를 하고 함께 볼 날짜를 정한 후에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려져있는지 보지 않았기에, 지체 중에 혹 믿음이 약한 이들이 보다가 감당 못하고 시험에 들게 되진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고, 멜깁슨이 어느 정도로 자세하게 묘사했는지 모르기에 혹 왜곡된 장면이 있을까 염려가 되었습니다. 또한 함께 보는 지체들이 이 영화를 통해 예수님의 고난을 깊이 느껴보고, 지금 공부하고 있는 요한복음을 잘 이해하게 되었으면 하는 욕심도 생겼습니다. 


성경공부 지체들도 지대한 관심을 보이며 영화를 보기 전에 뭔가 준비를 하고 싶어했습니다. 어느 자매는 마태복음을 읽으며 제게 영화를 보기 전에 성경 어디를 봐야 도움이 되냐고 묻기도 했습니다. 지체들의 관심과 그 관심을 행동으로 옮기는 모습에 감동하며 성경공부 사상 처음으로 터프하게 숙제를 냈습니다. “영화보기 전에 요한 복음 읽어오기.”


영화를 보는 날 저녁 캠퍼스에 모여 출발하기 전에 기도를 했습니다. 여느 때 친구들과 영화보러 갈 때와는 사뭇 다른 마음과 자세로 가는 길 내내, 또 극장에 들어가면서도 지체들을 보며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극장에 들어가면서 한 자매가 “난 영화보러 극장에 가면 항상 자거든. 그래서 친구들이 나랑 영화보러 가는 거 싫어했어” 라고 하는 겁니다. 속으로 가슴이 철렁해서 그 자매가 졸지 않기를 또 기도했습니다^^


드디어 영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듣던데로 잔인하고 피흘리는 장면이 많이 나왔습니다. 개인적으로 잔인하고 무서운 장면을 볼 때는 눈을 질끈 감거나 소리가 안들리게 귀를 막으면서 보던 제가 그 날 만은 두 눈 똑똑히 뜨고, “잔인하다, 징그럽다”는 생각 한번 안하고 조용히 눈물만 흘리며 보았습니다. 그 분이 맞으시는 채찍, 바닥에 낭자하던 피, 지고 가시는 크고 무겁게 보이던 십자가, 그 분의 손과 발에 대고 무섭게 때리던 망치소리… 그 모두가 제게 외치고 있었디 때문입니다. “나는 너를 사랑하노라.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영화가 끝나고 나오는데 옆에서 보던 예의 그 잘 잔다던 자매의 눈이 퉁퉁 부어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자매 옆에 앉았던 지체들이 나오면서 하는 말이 그 자매가 영화 시작하면서 부터 끝날 때 까지 어찌나 엉엉 울며 통곡을 하던지 시끄러워서 영화를 못봤다고 했습니다.


영화의 무거움에 마음이 부담이 된다는 지체들에게 미안했지만 그래도 영화본 걸 나누러 캠퍼스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이대로 헤어지는 것 보단 나누면서 서로 느낀 것들을 정리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몸이 아파서 함께 영화보러 가지 못한 어느 자매가 사랑으로 준비해준 스파게티를 먹고나서 돌아가면서 느낀 것들을 나누었습니다. 저는 지체들이 어떻게 봤는지 너무 궁금했습니다.


부모님이 아직 안 믿으셔서 전도에 관심이 많은 한 자매는 “전도용으론 안 좋은 영화같아. 좀 더 구체적으로 예수님이 어떤 일들을 하셨는지 다루었으면 좋았을 텐데… 너무 고난에만 촛점을 둔 것 같아” 라고 했습니다. 다른 한 자매는 “영화보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어요. 예수님이 정말 저렇게 까지 잔인하게 고난당하신 줄 몰랐어요” 라면서 예수님의 사랑이 조금 느껴졌다고 했습니다.


또 한 형제는 “인간이 저렇게 까지 잔인할 수 있다는 걸 느꼈고,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생각했다고 했습니다. 지체들의 나눔을 들으며 감사했습니다.


“한 편의 영화가 얼마나 많이 얼마나 깊이 그리스도의 우리를 향한 사랑을 표현하고 느끼게 할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한 적도 있지만, 지체들의 나눔을 들으며 그 한 편의 영화를 통해 조금이나마 그 분의 사랑을 느끼게 되고, 그 분의 고난을 묵상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The Passion of the Christ”는 성공한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영화를 본 다음 주에 요한복음 19장을 공부하면서 지체들이 이제는 영화를 보고 나니까 장면이 상상이 되고 이해가 된다며 풍성히 나누는 걸 보면서 또 한 번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그 영화의 장면들이 지체들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아서 세상살이 하다 믿음이 약해지고 시험에 들려고 할 때, 그 장면들을 떠올리며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 때문에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되길 소원하며 기도해 보았습니다.


(NY에서 K 자매)


[이시훈] 암흑

이코스타 2004년 4월호

06년 6월 6일 밤에 세계 3차 대전이 일어났다. 전 세계는 핵폭탄에 의해 가루가 되었고 핵미사일이 태양의 중심을 타격했다. 지구는 완전한 어둠과 추위 속에 빠져버렸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이 모든 일은 까미유가 잠든 사이에 일어났다. 그가 깨어났을 때는 이미 세상은 암흑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 이제 그가 어둠 속을 헤치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은 오직 그의 손에 있는 검에 의지하는 것이다. 이상한 소리를 내거나 불쾌한 냄새를 풍기는 괴물들이 지구를 점령했기 때문에 까미유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검을 내리치며 거리를 다닐 수밖에 없다. 자신을 공격하려는 괴물들을 먼저 공격하는 법을 익혀가면서 그는 자신을 지켜갔다. 어느 날 아침 몇 명의 강도들이 그를 공격해서 난투를 벌였지만, 결국 그는 납치당하여 낯선 곳으로 끌려가게 된다.


그곳에서 에테르 냄새를 풍기는 한 사람이 그에게 말한다.


삼차 대전은 일어나지 않았고 태양도 지지 않았으며 다만 까미유가 시력을 잃었을 뿐임을.


그가 싸웠던 괴물들은 그가 차에 치거나 건물에 부딪치지 않도록 도우려는 손길들이었으며


그의 검은 양로원에서 준 지팡이였음을 설명해준다.


위의 내용은 프랑스의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암흑’이라는 짧은 소설을 요약한 것입니다. 짧은 내용 속에 함축된 의미에 동감을 하게 됩니다. 주인공 까미유는 아마도 늘 핵전쟁에 대해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두려움은 늘 그의 생각을 차지하고 있어서 언젠가 그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헛된 믿음을 갖게 했고, 그가 시력을 잃은 밤, 꿈속에서 전쟁을 경험하였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환상을 실제로 일어난 일로 믿은 그에게 세상은 암흑이 되어 버렸습니다. 살아가는 일에 대해 늘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걱정, 근심을 쉬지 않는 우리의 모습이 그에게서 보입니다. 때로 그 걱정, 근심은 구체적이지도 않고 어떤 확실한 근거도 없이 우리를 덮치고 스스로 만든 그물 속에 갇히게 만듭니다.


자신의 내면의 빛을 지워버린 것을 세상에 빛이 사라졌다고 공포에 떠는 모습.


어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만나는 괴물의 실체는 자신이 만들어 낸 공포와 죄의 형상일 것입니다. 얼마나 자주 우리는 내면의 등불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는지, 오해와 편견 때문에 사랑의 손길을 뿌리치며 살아가고 있는지 반성해봅니다. 세상의 어둠의 세력과 싸우기 위해 그가 휘두르는 검은 자신을 지키기 보다는 상처 입히는 도구가 되어버리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더 강한 검을 구하기 위해 고심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명예의 검, 권력의 검, 물질의 검을 구하여 휘두를 때마다 우리 안에 있는 빛은 점점 더 흐려져만 가고, 어느 날 갑자기 그 빛이 완전히 소멸되어 버려 우리는 빛의 존재 자체를 망각하곤 합니다. 내 안에 환한 불이 켜 있을 때 세상의 모든 것을 분명하게 바라 볼 수 있습니다. 불의와 정의로움, 선함과 그릇됨, 진실과 미혹의 분별도, 아름다움을 구하는 식견도 눈과 마음이 밝고 맑을 때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따스하고 밝은 불빛은 다른 사람들과 한 사회에 영향력을 미칩니다. 근심보다는 희망을, 불안보다는 평강을, 다툼보다는 이해와 화해를, 인내와 온유의 밝은 빛이 넓게 퍼져나가 다른 이들의 가슴에도 환한 등불 하나를 켜주는 시대를 꿈꾸어 봅니다. 어둠 속에 숨어있던 정결하지 못한 모든 것들이 밝은 햇살 앞에 그대로 드러나듯이, 우리 안의 부정한 것들도 빛의 씻김을 받으면 더욱 아름다운 존재가 될 것입니다.


자신이 투명한 사람만이 다른 사람도 투명하게 바라볼 수 있듯이, 자신의 안에 빛을 가진 자는 타인의 내부에서 빛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가 처음 지음 받은 모습의 본질에 더욱 가까이 갈수록, 우리를 지으신 분의 성품을 알아갈 수록 그 빛은 선명하고 강하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그 빛의 세계를 발견하는 것, 그 길을 향해 걸어가는 것은 고난의 훈련의 과정을 필요로 합니다. 어둠에 익숙한 눈이 처음 빛을 바라볼 때 느끼는 통증과 혼란의 과정을 통해서 눈은 서서히 빛에 더 친숙함을 느끼게 되며, 이제는 감출 수 없는 많은 것들에 대해서 단단히 자신을 지켜나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손에 물리적인 힘을 발휘하는 검이 아니라, 어둠을 물리치는 말씀의 검을 주셨습니다. 나와 세상의 어둠을, 불의함을, 거짓됨을 잘라내는 검을 꼭 잡고 이 거칠고 오염된 세상을 걸을 때, 우리에게 더 이상 적은 없고 오직 사랑해야 할 이웃만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서로 내민 손길이 서로에게 등불이 되고 지팡이가 되어주는 세상에서 빛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인표] 왜 나를 여기로 보내셨습니까

이코스타 2004년 4월호

1996년부터 2002년까지 블루밍턴에 있는 인디애나 주립대학교에서 학사와 석사과정을 밟고 2002년 5월에 가족이 있는 북버지니아로 왔습니다. 그해 7월부터 시작되는 직장생활에 많은 기대를 걸고 있었지만, 사회생활을 처음 하게 될 나를 보면서 긴장감도 없잖아 있었습니다. 직장생활을 시작할 때 제 마음은 감사함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감사함은 조만간 불평으로 바뀌었습니다. 출퇴근이 너무 오래 걸렸고, 일 하는 나의 노력에 비해서 월급은 너무 조금 나왔고, 특히 나의 동료들의 95%가 동성연애자라는 사실이 저에게는 가장 큰 부담으로, 불평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부담은 이어 심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평상시 2세 교포 친구들과 주고 받는 농담을 던졌더라면 크게 상처받을 제 동료를 생각하면서, 저는 말 하기를 꺼려 했습니다.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내 뱉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그런 부담감은 3개월이 지난 후에는 나의 일상 생활이 되어 버렸습니다. 제가 그 부담감에 잘 적응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새로운 부담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매년 9월에 저희 회사에서 주최하는 4000 명이 넘게 오는 컨퍼런스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애나하임에서 열려서 기대에 찬 마음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어떤 남자 직장 동료가 저에게 다가 와서는 제가 그의 직장동료가 아니었다면 저와 사귀자고 물어봤을 것이라며, 제가 어떤 방에서 묵고있는지, 그날 밤에 뭘 하는지 저에게 물어보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그날 저녁에 제 방으로 놀거리를 보내겠노라 하며 노골적으로 말을 했습니다. 저는 눈치가 그리 빠르지는 않지만, 제 동료는 절대 농담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수 있었습니다. 이런 일을 당해 본 적이 없는 저는 무서웠고, 두려웠고, 할 말을 잃었습니다. 그때 저에게 필요했던건 나의 심정을 들어 줄 수있는 친구였고, 감사하게도 애나하임 부근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를 그 날 저녁에 만났습니다. 나에게 일어났던 일을 나누고 기도 부탁을 하고, 또 위로를 얻을수 있어서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이런 일이 매달 일어나지는 않지만, 저에게는 너무나 큰 충격으로 다가왔고, 나를 위축시키고 나에게 두려움을 준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직장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서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께 물어 온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왜 나를 여기로 보내셨습니까’ 입니다. 회의적인 질문도, 반항적인 질문도 아닙니다. 단지 제가 하나님의 뜻을 잘 알지 못해서 내뱉는 나의 솔직한 질문입니다. 하나님은 저에게 아직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마, 시간이 지나면 저를 왜 이 직장으로 보내셨는지 이유가 명백해 질 것이 틀림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제게 주시는 마음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저로 하여금 내 이웃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품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미국에서 산 지가 벌써 13년째 되어 갑니다. 저는 한 인종을 또는 한 그룹을 더 선호하거나 혐오하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고백한다면, 이 직장에서 일하면서 느낀건, 제가 게이나 레스비언에 대한 편견이 – 심한 편견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사랑으로 손수 빚어 만드셨습니다. 사람들이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든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써 모든 영혼을 사랑해 줄 때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시리라 확신합니다. 나의 편견을 넘어, 하나님의 피조물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성경은 동성연애가 막중한 죄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죄로 인해 하나님의 피조물을 미워하고 편견의 안목으로 본다면, 하나님은 결코 기뻐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들을 향하신 마음이 우리의 마음이 되어야 할 것이고, 더 나아가 그들을 향한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삶을 통해 명백히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제가 지난 2년간 격어온 갈등, 부담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마음을 여러분과 나누었습니다. 저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분, 그리고 비슷한 경험을 체험한 분도 있으리라 믿습니다. 예수님은 억울하게 누명을 쓰시고 십자가에 박히셨습니다. 한 마디의 대꾸없이 하나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요 18). 순종하는 모습을, 죽임에까지도 순종하는 모습을 저희들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이제는 여러분께 조심스레 질문을 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첫째로 여호와를 사랑하고, 둘째로 이웃을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을 순종 하시겠습니까? 죽임을 당하면서 까지도 새계명을 순종 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 가려고 노력하는 저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큰 도전이 될 듯 싶어서 이 모든 것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삶에서 희생적인 사랑을 보여주기를 원하십니다.

[김한준] 바하의 “마태수난곡”과 더불어 묵상하는 예수님의 고난

이코스타 2004년 4월호

최근에 멜 깁슨이 감독한 “The Passion of the Christ” 영화가 개봉되어, 여러 논란이 있는 가운데서도 예수님께서 감당하신 고난의 무게에 관한 강렬한 영상으로 많은 이들에게 도전을 주고 있다. 이 영화로 인하여 믿는 자들의 신앙이 새로와지고 믿지 않는 자들이 주님을 영접하고 있다는 소식은 금년의 사순절과 고난주간에 특별한 의미를 더하여 주고 있는 듯하다.  지금으로부터 약 백 팔십 년 전 유럽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났었는데, 그 당시에는 영화가 아닌 요한 제바스티안 바하(Johann Sebastian Bach)의 음악들이 그 매개체가 되었고, 그 한 가운데에는 ‘마태수난곡’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바하의 모든 음악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작품”, “합창 음악의 최고봉”, 더 나아가서는 “인류 음악 예술의 최고 걸작” 등 찬사를 아끼지 않는 작품이건만, 당시에는 난이하고 복잡하게만 받아들여진 탓에 작곡된 무렵에 세 번 정도 연주된 이후로는 근 백 년간이나 사람들의 기억으로부터 잊혀지게 된다.  그러던 것을 당대의 작곡가 겸 지휘자였던 멘델스존이 발굴하여, 작곡된지 꼭 백 년이 되는 해에 다시금 연주되어 열렬한 반응을 얻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주님께서 당하신 고난에 대한 각성과 신앙적인 도전이 이루어짐은 물론, 당시 전 유럽을 휩쓸고 오늘날까지도 맥을 이어 내려오는 ‘바하 르네상스’ (“바하의 음악으로 돌아가자” 는 음악 무브먼트) 의 싹이 틔여지게 된다.1) 바하 음악이 지니는 완벽함과 순수함,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경건함으로 나타나는 그의 음악의 깊은 정신성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음악적인, 그리고 사회적인 반향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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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수난곡은 바하가 라이프치히의 토마스 학교와 교회에서 칸토르(음악감독)로 지냈던 그의 장년기 시절에 만든 작품으로, 마태복음에 나와있는 예수님의 수난 부분(26, 27장)을 기본 텍스트로 하여 작곡된, 연주 시간이 세 시간 반이나 걸리는 대곡이다. 비슷한 시기에 작곡되었고 백 년 후에는 이미 상당히 유명해져 있었던 헨델의 “메시아”가 3부로 구성된 전체의 한 부분(제 2부)을 예수님의 수난에 할애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바하의 수난곡들은 주님의 십자가 사건에만 촛점을 맞추고 있다.2), 3) 당시에는 네 개의 복음서를 바탕으로 한 각각의 수난곡들이 존재하였다고 알려지고 있으나, 마가수난곡은 분실되었고 누가수난곡은 후세의 위작으로 여겨지고 있는 까닭에 현재에는 마태수난곡과 이보다 몇 년 앞서 작곡된 요한수난곡만이 연주되고 있다. 음악적인 면을 살펴보면, 독창자들과 두 개의 합창단 및 두 개의 오케스트라가 솔로에서 이중 합창에 이르는 다양한 음악적 스펙트럼을 제공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다양한 음악적 기법들이 동원되어 예수님, 성경 나레이터, 베드로, 빌라도, 군중들 등 다양한 인물들의 심리 전개와 그에 따른 일련의 사건의 흐름들을 그림을 그리듯 묘사하고 있다.  개별곡들은 단순한 모음집의 차원을 넘어서 하나의 미적인 통일체로서 파악되는 전체적인 구조를 가지며, 이 안에는 회화적인 특성과 상징적인 표현들이 풍부하게 나타날 뿐만 아니라, 매우 사실적이면서도 극적인 묘사들, 정열과 냉정함, 드라마적인 요소와 정신적인 요소 등 다소 상반된 성격의 측면들이 조화 속의 대비를 이루는 가운데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음악 자체만으로도 비할 바 없이 뛰어난 이 모든 기법들이라 할지라도, 작곡자 자신의 신앙 고백으로 승화된 주님의 십자가 고난의 메세지를 음악을 듣는 이들에게 같은 감동과 도전으로 전달하기 원하는 작곡자의 의도를 놓치는 경우에는 이 음악 작품이 가지는 진정한 가치와 기능에 대한 온전한 자리매김을 이루기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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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하의 마태수난곡이 단지 음악적으로만 위대한 작품이 아니라, 작곡자 자신의 신앙이 음악을 통하여 표현되고 승화된 것이었다는 점에 관하여, 그의 부인 안나 막달레나 바하는 남편이 작고한 얼마 후에 그가 마태수난곡을 작곡하던 때를 회상하며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어느날 그의 방으로 불쑥 들어갔을 때, 마침 그는 마태수난곡의 알토 독창 “아, 골고다”를 작곡하고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평안하고 안색도 좋았던 그의 얼굴이 완전히 눈물로 범벅이 되어 어두워진 모습을 본 순간 나는 얼마나 감동했는지 모릅니다. 나는 조용히 밖으로 나와 그의 방문 옆 계단에 앉아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는 자신이 곡을 쓰면서 비통해하는 모습을 내가 보았다는 사실을 끝내 모른 채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지금도 나는 그 사실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하나님만이 볼 수 있는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이 곡을 쓰고 있었을 때, 그는 간절하게 구원받기를 원하는 영혼들의 모든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숭고하심과 그 비밀들에 관하여 깊이 느끼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이후 한 수난절에 토마스 교회에서 마침내 연주된 마태수난곡을 듣게 되었을 때 나는 영혼을 뒤흔드는 감동으로 벅차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곡에 주목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너무 난해하고 상당히 많은 연습을 하지 않으면 연주하기가 어려운 곡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마 언젠가는 그 음악을 천국에서 다시 들을 수 있겠지요…  (안나 막달레나 바흐 저, “내 남편 바흐”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음악의 아버지”로 추앙하고 있으며 수많은 연주자들과 음악학자들이 자신의 평생을 바칠 만한 “순수 서양 음악의 시작이요 완성”이라고 여기고 있는 바하.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이 생각한 음악이란, 루터 신학이 강조하는 바와 같이 “explicatio textus (interpreting texture)” 였으며, “praedicatio sonora (resounding proclamation)” 이었다. 즉, 그에게 있어서의 음악 철학이란, 하나님께 경배드리고 그분을 계시하는 ‘예배의 행위’요, 그러한 목적에 사용되도록 인간에게 허락하신 또 하나의 ‘언어’와 다름아니었던 것이다. 일찌기 바하 음악에 깊이 심취하였던 슈바이처 박사(Albert Schweitzer)는 이러한 바하의 음악의 본질적인 면모를 일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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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있어서 음악이란 예배의 행위이다. 따라서 모든 예술, 심지어는 세속적인 것들마저도 그에게는 신앙적인 표현의 대상이 된다. 그 결과로 그의 음악은 가장 깊은 기도와도 같이 하나님께 상달되는 그 무엇이 되고 있다



라고 평한 바 있다.  학교의 음악감독으로 있으면서 때로는 학생들에게 직접 성경을 가르치기도 했던 바하는, 루터가 독일어로 번역한 성경을 늘 깊이 묵상하였으며, 자신이 직접 묵상하고 연구한 점들은 본문 옆에 스스로 주석으로 달아놓곤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가 소장했던 성경책의 역대하 5장 부분을 보면, 솔로몬이 성전 봉헌 제사를 드렸을 때 찬양대와 기악대가 함께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기 시작하자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과 같이 임하였다는 대목이 나오는 13절 옆에다 바하는 자필로 다음과 같은 주석을 적어놓았다고 한다. 



경건한 음악에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함께하신다! 



어쩌면 이 말이야말로 작곡가로서의 바하의 일생을 지배한 그의 삶의 동기요 소명이자 간증을 가장 적절한 말로 표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본격적인 작곡 활동의 첫 소산이라고 할 수 있는 그의 첫 칸타타의 제목이 “하나님은 나의 왕”4) 이었으며, 숨을 거두기 바로 며칠 전 그의 생애 마지막으로 작곡한 오르간 코랄전주곡의 제목이 “주의 보좌 앞으로 이제 나아갑니다” 였다는 점은 이러한 측면에서 특별히 주목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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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그의 작품들 가운데에서 예수님의 수난을 기리거나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한 흔적들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백 여 개나 되는 칸타타와 수난곡 등 직접적인 찬양 가사가 달려있는 합창 음악들이나, 성경 말씀을 멜로디로 표현한 수백 개의 오르간 곡들은 우선 그 직접적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슈바이처 박사가 말한 “세속적인 것에 묻어있는 성스러움”이라는 측면은, 일반인들이 좋아하는 쾨텐 시절의 기악곡들 – 무반주 첼로곡, 평균율 피아노곡, 각종 기악 협주곡들 등 – 으로부터 ‘커피 칸타타’, 결혼 음악 등과 같은 세속 주제에 의한 곡들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영역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곡들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신성을 그 문맥에 실어 노래하고 있다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입증은 아마도 직접 들어보는 것으로써 가능할 것이다.5)  몇 년 전에는 한 연주가가 그러한 고백을 했던 것이 알려지기도 하였는데, 현존하는 가장 손꼽히는 피아니스트의 한 명인 머레이 퍼라이아(Murray Perahia)는, 연주자의 길을 거의 포기할 뻔한 위기를 넘긴 직후 “골드베르크 변주곡”6) 을 녹음하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남겼다.



“이 변주곡들은 각각 예수님의 다양한 사역을 표현하고 있으며, 특히 25번 변주곡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을 연상시킨다.” 



한편, 당대 최고의 오르간 연주가이자 바하 전문가이기도 했던 슈바이처 박사는, 바하의 음악에는 인간 정신의 깊이가 담겨있고 영성이 있으며 내적 평화가 깃들여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음악들에는 무의식 중에라도 사람들의 영혼을 일깨우는 힘이 있다고 확신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아프리카에서 사역하는 동안 원주민들의 정신과 영혼을 가꾸는 데 도움을 준다는 생각으로 매일 아침 교회의 문을 열어놓고 바하의 오르간 음악들을 연주해 들려주었다고 전해진다.7)  그리고, 그런 노력은 슈바이처 자신의 사랑 및 섬김의 삶과 더하여져 영혼들을 일깨우고 변화시키는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 



  이와 같이, 바하의 음악은 조금만 귀기울여 들으면 그 안에 주님의 흔적이 직간접으로 가득히 표현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그 안에는 참다운 의미에서 ‘영혼을 울리는’ 힘이 있음을 우리는 또한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다.  바하의 음악에 보편적으로 영성에 관련된 측면이 묻어있다는 점은, 마태수난곡이 지닌 면모가 그의 음악들 중 결코 이 한 곡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웅변하고 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다른 모든 곡들에서도 드러나고 있는 주님의 흔적이 가장 직접적으로 표현된 곳 그 정점에 마태수난곡이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이 곡이 지니는 의미에 대한 가장 훌륭한 찬사이기도 한 것이다. 







  자, 그러면 이제 마태수난곡의 개별 곡들을 일부 간략하게나마 살펴보도록 하자.



  제 1곡은 전 곡을 여는 도입 합창으로, 두 개의 합창단이 주고받으며 엮어내는 장엄함과 엄숙함은 주님의 고난의 메세지를 파도와 같은 감동으로 전달하고 있다.  이 음악을 듣는 동안 우리의 마음가짐은 주님께서 고난당하셨던 그 현장에 찾아온 듯 옷깃을 여미는 마음으로 준비된다. 음악적으로도 완벽한 대위법적 어법은, 이 곡을 능가하는 대위법적 합창곡이 있으리라는 생각을 도무지 갖지 못하게 할 정도로 합창 음악의 극치를 들려주고 있다.



  음악으로 그림을 그리는 듯한 표현법은 전 곡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 길게 늘여서 연주하는 현악 반주로 예수님을 둘러싼 빛을 표현한다든가, 마리아가 주님의 발에 향유를 붓는 대목에서 플룻이 스타카토로 떨어지는 음을 연주하므로써 예수님의 발 위에 떨어지는 눈물을 묘사하고 있는 점, 그리고 예수님이 감람산에 오르시는 모습을 베이스가 상승하는 음으로 표현하고 있는 점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예수님이 잡히신 장면을 묘사하는 제 33곡에서는, 주님을 따르는 여자들을 묘사하는 알토와 소프라노의 이중창이 “나의 예수님이 이제 잡히셨네” 하면서 느리고 구슬픈 노래를 부르는 동안, 군중을 나타내는 합창은 격정적이고 빠른 멜로디로 “놓아줘! 잠깐, 묶으면 안돼!” 하며 다급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한 곡 안에서 서로 전혀 다른 분위기와 템포의 멜로디들이 절묘하게 조화되는 이런 모습들은 마치 여러 영상이 시각적으로 오버랩되는 듯한 느낌을 연상시켜 주므로써 듣는 이로 하여금 감정이입이 일어나는 것을 돕는다.



  제 47번곡(버전에 따라서는 39곡)은 베드로가 주님을 배반한 직후에 부르는, 아마도 전곡에서 가장 유명한 알토 아리아인데, 바이올린의 애를 끊는 듯한 독주를 타고 베드로의 애절한 심경이 노래된다. “불쌍히 여기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이렇게 울고 있나이다. 마음도 눈도 아프게 울고 있는 나를 보소서…  때로는 나 또한 베드로와 같은 입장에서 이렇게 주님께 참회의 기도를 드려야 했었음을 돌이켜 생각할 때, 이 노래는 내 마음 안에 밀려들어 공명하는 ‘나의 노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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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어서, 숨가쁘게 진행되는 재판 과정,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의 애처로운 모습, 격앙된 군중의 반응, 주님의 십자가를 마음 아프게 바라보는 여인들의 애닲은 마음들, 돌아가시고 난 후 지진이 일어나며 성전의 휘장이 찢어지는 장면 등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성경의 이야기들이 한 편의 드라마로서 펼쳐지고 난 후에, 맨 마지막으로 찬송가 145장(“오 거룩하신 주님”)에 수록되기도 한 종결 합창8)으로 마무리되면서 주님의 수난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마지막으로, 바하의 마태수난곡과 같은 작품이 오늘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유익은 무엇이며,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고 주신 소명에 충실하기 원하는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를 주고 있는지에 관하여 잠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첫째로는, 우리에게 문화 유산이라는 형태로 이미 주어진 이러한 삶의 자원들이 우리의 일상적인 공간들을 더욱 주님으로 풍성한 곳이 되도록 만드는 데에 도움을 준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가장 직접적인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영적 문화 유산’들의 유익이 될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자신의 일을 통하여 끊임없이 하나님을 계시하고 경배하는 수고를 그치지 않았던 한 신앙의 선배를 통하여, 오늘 우리가 주님을 묵상하며 깊은 교제를 나누는 일에 또 하나의 본보기와 길잡이를 삼을 수 있다는 점을 들어야 할 것이다. 그들처럼 우리도 하나님께서 부르신 이 삶을 그분의 온전한 ‘작품’이 되도록 가꾸어 가야할 것인데, 그런 면에서 이러한 작품들이 뜻밖에도 우리에게 지속적인 격려와 도전을 주는 매개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고난을 조명한 한 영화가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에 대한 우리의 깊은 묵상을 도와주었듯이,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기 위하여 하늘이 낸 사람” 이라고 혹자는 일컫기도 하는 바하의 음악들과 가까이 하는 일 또한 보다 다른 각도에서 주님의 고난을 기념하고 묵상하는 일에 도움과 동기 부여를 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해본다. 그러한 가운데서, 그 어느 때보다 그분의 고난의 메세지에 가까이 다가서며, 주님 서신 그곳에 동참하라 부르시는 부르심에 순종하는 마음이 그 어느 때보다 내 안에 깊이 새겨지는 이번 사순절과 고난 주간이 되기를 소망해본다. 



“우리는 다 양과 같아서 각각 제 길로 갔으나 여호와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의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입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사야 54:1-2)








1)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바하 음악의 순수음악적인 측면과 기술적인 측면들만이 남고, 정작 그의 삶의 철학이요 근본적인 창작의 동기가 되었던 신앙적인 측면이 도외시되어 가는 것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깊은 아쉬움을 느낀다. 



2) 같은 해(1685년)에 독일의 이웃 동네에서 태어난 헨델과 바하는 동시대를 산 위대한 음악인들이었지만, 헨델이 영국 왕실의 지원 아래 부귀와 전유럽에 걸친 명성을 누렸던 것과 달리, 바하는 때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절을 보내기도 하였으며 그의 명성 또한 주로 독일 국내에 국한된 것이었다. 더우기, 바하의 음악은 그의 사후에 사람들의 기억으로부터 상당 부분 잊혀져 오고 있었다.



3) 헨델의 “메시아”가 이전에 나온 “Jesus of Nazareth” 등과 같은 주님의 일대기 영화와 같은 방식이라면 바하의 수난곡들은 멜 깁슨의 “The Passion”과 비슷한 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 



4) 결코 신동이 아니었던 그의 작곡가로서의 경력은 열 살 전에 이미 교향곡을 작곡한 모짜르트와는 달리 20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나, 주어진 시간 사용을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응답이라고 여겼던 그는 그 누구보다도 많은 작품을 남기고 갔다. 그에게는 작품 번호가 매겨져 있는 작품들이 1080 가지가 있으며, 세 시간 반이 걸리는 마태수난곡도 그 중 한 번호(BWV 244)를 부여받고 있다.



5) 바하의 음악이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평화가 어떤 것인지 우선적으로 느껴보기 원하는 분은 (Karl Richter 등이 지휘한) 칸타타 140번 “시온은 파숫꾼의 노랫소리를 듣는도다”, 147번 “예수, 나의 기쁨되시네” 나 (Helmut Walcha 등이 연주한) 오르간 코랄 전주곡 BWV 639, BWV 731 등을 들어보기를 권장한다.  가사가 없는 일반 기악곡들 또한 얼마나 정신적 순수함과 영적 경건함을 이끌어내어줄 수 있는지 경험해보기 원하는 분께는 (S. Richter 등이 연주한) 평균율 피아노곡집이나 (Fournier, Maisky 등이 연주한) 무반주 첼로 조곡을 추천한다.  바하의 음악이 어떠한 경건한 마음을 갖게 하는지, 그의 음악이 어떠한 평화를 가져다 주는지에 대해서는, 직접 느껴보지 않고서는 필설로는 설명이 어렵다고 생각된다. 



6) 주제곡인 아리아(aria)에 대한 30 가지의 다양한 변주가 덧붙여진 바하의 유일한 변주곡(BWV 988)으로, 그 완벽함과 즉흥성의 조화는 클래식 음악 애호가는 물론 재즈를 좋아하는 사람치고 이 곡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없게끔 만드는 그 어떤 매력이 있다.  여기의 주제곡은 바하의 음악들 중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다른 소품들과 더불어 “안나 막달레나 바하를 위한 곡집” 에도 삽입되어 있다.



7) 슈바이처 박사가 영혼을 매만지는 사랑을 담아 연주한 바하의 오르간 곡 연주들은, 그가 당대 최고의 오르가니스트였던 만큼 그 녹음이 현재에도 남아서 일부 (음반 석 장의 분량으로) 전해지고 있다 (1930 년대 후반; EMI Record).  위에서 추천한 BWV 731 (“사랑하는 예수님, 저희가 여기 있나이다”) 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한껏 묻어난 그의 바하 연주를 대표할 만한 곡이다.   



8) 원래 해슬러(Hassler)가 작곡한 이 곡은 바하가 특별히 애착하여 요한수난곡에서 도입 합창으로 사용하였을 뿐 아니라 마태수난곡에서도 다섯 번이나 반복되어 나온다.



현재 시중에는 마태수난곡 연주를 수록한 좋은 음반이 많이 나와 있다. 크게 정통적인 (authentic) 연주와 원전 악기 (periodic instrument)를 사용한 연주의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는데, 마태수난곡 연주의 모범적인 전형을 세운 칼 리히터 (Karl Richter)의 연주 (Archiv; 1958)는 전자의,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를 애절하고 감미로운 음악으로 승화시킨 가디너의 연주 (Archiv; 1988)는 후자의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최근의 연주로 호평받는 것으로는, 아르농쿠르 (Harnoncourt)의 신작 (Teldec; 2001), 헤레베헤 (Herreweghe)의 신작 (Harmonia Mundi; 1999), 그리고 일본인 스즈키 (Suzuki)의 연주 (Bis; 2000) 등이 통상적인 명연주들로 꼽히고 있다. 경제성과 쉽게 친숙해질 수 있다는 측면을 고려하면, 처음에는 주요 곡들로만 구성된 하이라이트 음반으로 시작해서 나중에 전곡 감상에 도전하는 방법도 권장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