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진]갈 수만 있다면 무조건 조장 자원합니다!

이코스타 2006년 2월호

jjKOSTA 한 게시판에 올라온 이 댓글이 참 마음에 와 닿았다. 2005년 jjKOSTA에 참석하셨던 한 조장님께서는 왜 조장으로 자원하게 되었냐는 질문에 조장으로 자원하면 코스타가 5박 6일에서 6박 7일로 늘어나기 때문에, 하루만큼 은혜를 더 주실 것 같아서 자원하게 되었다는 대답을 하신 기억이 난다. 3주간에 걸친 인터넷 조장 훈련을 받아야 하는 수고, 조원들의 리스트를 받고 기도하고 연락하며 준비해야 하는 부담, 하루 먼저 도착해 땅을 밟고 조원들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할 뿐만 아니라, 5박 6일의 수양회 기간 동안 조장(組長)이라기보다 조종(組從)(?)으로 섬겨야 하는 중차대한 사명을 각오하고도 그래도 jjKOSTA에 모여드는 조장님들. 한 두 해 조장으로 섬겨보니 정신없고 힘들어서 못하겠더라 하지 않고 갈 수만 있다면 무조건 조장으로 자원하겠다는 그 마음이 하나님께서 바로 jjKOSTA를 통해 심어주기 원하시는 아비의 마음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 있어 2005년 코스타는 초-초-초보로서 미주코스타를 처음 참석하고, 7지역 코디로 처음 섬기고, 조장으로도 처음 자원하는 어리둥절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어쩌다가(어쩌자고) jj 준비팀을 섬기게 퓸駭쩝?사실 그 계기도 잘 기억나지 않을 만큼 그렇게 어설픈 모습으로 하지만 실수가 아님을 믿으며 섬기는 분들과 한 배를 타게 되었다. 열심히 땀 흘리며 노를 저으시는 분들 곁에서 ‘근데 저, 실례지만… 지금 여기가 어디지요?’ 우물쭈물 하는 사이에 배는 이미 코스타라는 강 이 편에서 저 편으로 건너가 버린 듯 2005년 코스타가 막을 내렸다. 역시나 초보는 티가 난다. 다름 아닌 무엇보다 가장 열심히 준비되어야 하는 조장으로 섬기는 부분에서 조원들을 만나는 코스타 당일이 되어서야 ‘ 하나님 도와주세요.’ 라는 절실한 기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비단 코스타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공동체의 모임은 역시 그 해당 짧은 기간보다 모임을 계획하고 준비하며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씩 알아 가는데 더 큰 은혜가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하나님의 영이 임하지 않고는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될 수밖에 없다는 고백. 그래서 더 낮게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영혼들을 중보 하는 과정을 통해 그 분의 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 섬기는 자들에게 덤으로 주시는 은혜인 것 같다. 참석하는 조원들의 기도제목을 가지고 한 영혼을 위해 중보 하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던 나로서는 이제껏 이메일로만 인사를 나누던 조원들과 실제로 만나는 시간이 다가오자 설렘과 함께 부담과 걱정 또한 적지 않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조장 수련회를 마무리하며 jj로 jojang으로 jeja로 함께 서서 이제 ‘각자 해체 모여’를 준비하는 120여명의 조장님들과, 팀은 다르지만 같은 spirit으로 동역한다는 사실이 영광이 되고 기쁨이 되었음은 분명하다.


후문으로 듣게 된 멋있는 조장님들에 대한 에피소드들이 모든 조장님들을 뿌듯하게 그리고 한편 긴장하게 만든다. 날마다 늦은 시간까지 밤에 혼자 깨어서 조원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 날마다의 메모를 적어서 마지막 날 긴 편지로 모든 조원에게 전해주신 조장님, 대체 얼마나 맛있는 간식을 준비해 오셨기에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조원들로부터 ‘드림 조장님’이라는 자랑을 들으시는 조장님, 코스타가 끝난 후 에도 줄기차게 follow-up의 끈을 놓지 않으시고 교제를 이어가시는 조장님, 먼 거리를 마다않고 찾아가고 찾아오도록 그렇게 마음의 자리를 내어 놓으신 조장님. 5박 6일로 영혼을 품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분명히 코스타 전부터 한 영혼을 품는 수고를 아끼지 않으시고 조장 훈련을 받는 가운데, 그리고 중보의 기도 가운데 성실하게 조원들을 기억했던 마음의 열매라고 생각한다.


사실 조장으로 자원하신 많은 분들이 이미 미국 땅 전역에 흩어진 나그네로서 각자의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든 영혼을 섬기는 부르심 가운데 계신 분들일 것이다. 광야같이 메마른 땅에서 고독하고 외롭게 한 영혼을 섬기는 분도 계실 것이고, 넘치는 사역(일)과 방황하는 영혼들을 혼자 감당하기 벅차게 섬기시는 분도 계실 것이다. 코스타가 시작되기 하루 전, jjKOSTA에 모여든 한 분 한 분의 조장님들이 모두 그렇게 섬김을 습관으로, 섬김을 나의 기질과 태도로, 한 영혼을 값없이 마실 수 있는 생명수로 인도하는 그 섬김을 나의 사명으로 알아서 나를 내려놓기 원한다. 부르시는 곳에서 섬기시라는 영혼들에게 언제나 stand-by의 상태로 나를 내어주고 나를 기꺼이 허비할 수 있는 마음. 코스타에서 만난 조원들에게는 혹 단 일주일짜리 조장일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임명해주신 이상 일주일 24시간, 연중무휴 언제나 어느 곳에서나 jj – 조장으로 그리고 제자 – 로 산다.


아비의 마음으로 한 영혼을 섬기는 조장님들을 격려하기 위해 jjKOSTA가 있다. 서로 돌아보아 함께 세워지는 기쁨을 누리는 자리이다. 섬김은 언제나 서툴고 부족하기만 한데도, 나에게도 말씀을 주시고 영혼을 맡겨주신 것은 나의 처음을 아시면서도 나에게 기대와 소망을 품으시고 격려해주신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다. 갈 수만 있다면 조장으로 자원하겠다는 앞서 말한 한 조장님의 고백은 마치 부르시는 곳마다 스승이 아닌 아비가 되겠다는 고백으로 들린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고전 4:15-16)

[신선묵]영적 지도자의 충성됨 (Faithfulness)

미켈란젤로는 유모의 젖을 빨 때부터 조각가의 끌과 망치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할 정도로 천부적인 조각가로 태어났습니다. 조각가로 전성을 구가하던 그는 30대 초반에 로마 교황청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교황의 장엄한 무덤을 조각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막상 로마에 도착하자 일이 뒤엉켰습니다. 조각 대신 그림을 그려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바티칸의 작은 교회 천장에 열 두 명의 인물을 그려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처음에 그 제안을 거절하려고 했습니다. 물론 어렸을 적에 그림을 배웠지만 그의 정열은 온통 조각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학자들에 따르면 그의 경쟁자들이 그를 곤란하게 하기 위하여 그런 교묘한 함정을 준비했다고 합니다. 그 일을 거절한다면 그는 교황의 총애를 잃게 될 것이고 그 일을 한다고 해도 어설피 그림에 손을 대었다가 그의 명성에 먹칠을 할 것이 뻔했기 때문에 그런 음모를 꾸몄던 것입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가 그 제안을 일단 수락하자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그는 그 일에 자신의 온 정열을 다 쏟아 부었습니다. 처음에 열 두 명의 사도를 그리려고 했던 계획은 확장되고 확장되어 창세기에 나오는 사 백명 이상의 인물들과 아홉 개의 장면을 파노라마처럼 펼쳐 놓은 위대한 천장화가 탄생한 것입니다. 그가 그린 시스턴 성당의 벽화는 너무 생생하고 사실적이어서 이후 화풍의 주류를 바꾸는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그 일은 사 년이 걸렸습니다. 그는 꼬박 천장에 매달려 누운 채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시력과 건강을 많이 잃었습니다. 그 위대한 작업을 끝냈을 때에 미켈란젤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예례미아처럼 늙고 약해졌다. 37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내 친구들조차 내가 왜 그렇게 늙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내가 이 이야기 속에서 도전을 받은 것은 현재 맡겨진 일들 속에서 혹시 그것이 꼭 내가 원하는 일은 아니라 할지라도 최선을 다하여 감당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현재 놓여진 자리가 때로는 그 이유를 내가 다 알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꼭 필요하셔서 나를 이끌어주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하듯 최선을 다하여 최고의 작품을 만드는 열정으로 일하고 있는가의 질문인 것입니다.


영적 지도자에게 필요한 가장 중요하고도 기본적인 자질은 바로 작은 일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도 지혜로운 지도자들은 사람들에게 일을 맡길 때에 처음부터 큰일을 맡기지 않습니다. 작은 일을 시켜보고 그 일의 경중을 떠나서 충성을 할 때에 더욱 중요하고 큰 일을 맡기는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들에게 지혜를 허락하신 하나님은 더욱 그러하실 것입니다. 누가복음 16:10절을 보면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지도자들을 개발하실 때에 어느날 하루 아침에 복권에 당첨되는 것처럼 지도자들을 만들고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작은 일부터 성실하게 감당하는 사람들을 큰 일에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큰 일, 중요한 일에 욕심 내는 것보다는 일단 주어진 작은 일들에 충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풀러신학교의 클린톤 교수는 지도자들이 성숙해 가는 과정 속에서 일련의 유형들을 발견하였는데 그가 발견한 유형들 중에 사역의 기초 단계에서 잠재적인 지도자들이 경험하는 “긍정적인 시험 유형”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유형은 세 단계로 이루어지는데 첫째 단계에서 삶 속에서 주어진 사건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인격에 관한 시험을 제시하십니다. 둘째 단계에서 지도자가 그 사건을 하나님께서 자신을 특별히 다루시기를 위한 사건으로 이해하고 그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는 행동을 취하는 긍정적인 반응을 합니다. 셋째 단계에서 지도자의 긍정적인 반응에 대하여 지도자의 영향력을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작은 일에 충성 됨을 통하여 더욱 큰 일, 중요한 일들을 맡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유형이 한 지도자의 삶 속에서 반복됨을 통하여 지도자는 그 영향력에 있어서 점점 더 증대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런 유형에 반하여 반대의 경우가 있습니다. “부정적 시험의 유형”으로 삶의 경험 속에서 주어진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인격에 관한 시험을 주시는데 지도자가 그 사건을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으로 인식하지 못하거나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행동을 취하지 못함으로 하나님께서 지도자를 동일한 혹은 유사한 이슈를 가지고 지도자들을 다시 시험하시고 그 교훈을 얻을 때까지 혹은 그 지도자를 바로 잡기까지 그 지도자의 개발을 제한하십니다. 작은 일에 불충함으로써 영향력에서의 확대를 경험하지 못하고 반복 훈련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시험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반응하여 우리가 지도자로써 빠르게 성숙해 가는 일도 있는가 하면 때로는 우리가 바르게 반응하지 못하고 수정을 받는 훈련을 반복적으로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가 놓여있는 현실 속에서 우리가 작은 일들에 대하여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는 태도를 가짐으로써 긍정적인 반응 유형이 우리 삶 가운데 반복되도록 해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가 바르게 반응하지 못하였을 때에도 그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발견하시기를 원하시는 자질과 태도를 파악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시험을 주실 때에 바르게 반응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성경에 보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지도자가 있습니다. 느혜미아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자기 민족이 어려움에 처하여 있다는 소식을 듣고 깊은 실의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자기 백성을 어려움에서 구해야 하는데 그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외국 땅에서 왕의 잔을 나르는 사람으로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선한 부담과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마도 자신의 민족이 처한 상황도 슬펐지만 자신의 처지가 더욱 한탄스러웠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나를 이런 곳에서 이런 일을 하도록 하셨는가? 지금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백성들을 섬겨야 하는데…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은 이미 오래 전부터 정확하고 치밀하게 준비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느혜미아에서 선한 부담감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 일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가장 적절한 곳으로 느혜미아를 이끌고 계신 것입니다. 느혜미아가 자기 민족인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선한 부담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만일 그가 그냥 그 이스라엘에 남은 백성 가운데 하나였다면 그가 예루살렘을 회복할 수 있는 아무런 힘을 가지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래 전부터 계획을 가지고 준비하신 것입니다. 당시의 최강국인 페르시아의 왕궁에서 왕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는 잔을 나르는 사람으로 일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당시의 왕의 잔을 나르는 사람은 왕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왕의 음식에 독이 썩여 있는가를 검사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구하는 일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었지만 이 일을 성실하게 감당함을 통하여 왕의 신임을 얻었고 또한 필요할 때에 당시의 최고의 왕으로부터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할 수 있는 모든 자원과 권한을 받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느혜미아의 눈에는 그가 가진 선한 부담감을 이루기에는 가장 절망적인 상황으로 보였지만 사실상 하나님은 가장 적절하게 준비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느혜미아의 태도입니다. 비록 자기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과는 상관이 없고 멀리 떨어져있는 일이지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성실히 임함을 통하여 왕의 인정을 받게 되고 그 결과로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일도 감당할 수 있는 위치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주어진 일에 충성되게 섬김을 통하여 그가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자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지도자로써 다른 어떤 위대한 사명과 비젼을 말하기 이전에 느혜미아와 또 미켈란젤로와 같은 성실함을 가지고 있는가? 질문해 보게 됩니다.

[장이규]지도자의 자기 관리와 성장(1)

해마다 연말이 되면 각 교회의 목회자와 목회 위원회, 혹은 당회는 내년도 교회 사역을 위한 리더 세우기에 많은 시간과 정열의 에너지를 쏟는다. 그 이유는 세워지는 리더들이 내년도 교회의 사역이 얼마만큼 열매를 맺을 수 있는가를 결정할 수 있는 중요한 그루터기가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노력 가운데 특별히 눈에 띄게 일꾼을 찾아다니는 부서 중 하나는 교육부이다. 내년도 교회학교 교사들을 세우기 위해 많은 노력을 쏟지만 현실은 의외로 쉽지 않다. 교사로 자원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 뿐 아니라 기존의 선생님들이 지속적으로 교회학교를 섬기면 좋을 텐데 1-2년을 섬기다 보면 대다수가 지쳐 쉬고 싶어 한다. 교회학교 교사 지원자도 부족한데 기존 섬기던 선생님들까지 내년도 섬김에 대한 사양이 매년 교육부로 하여금 어려움과 큰 고민가운데에 빠지게 만든다. 이러한 어려운 현실은 소그룹 (속회/구역/ 셀/ 목장 등등) 리더 세우기에도 마찬가지이다. 소그룹 리더를 세우는 것이 어려운 것이 새로운 리더십의 발굴이 잘 되지 않은 것도 있지만 이제껏 섬겨오던 리더십들이 교회학교 교사들처럼 역시 지쳐서 소그룹 리더십 사역을 사양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교회의 거룩한 사역에 기존의 리더들이 지쳐 더 이상 이 귀한 사역에 동참하기를 주저하는가? 기본적으로 그 이유 3가지를 들어 본다면


첫째, 한 개인이 너무 많은 사역을 겸하고 있기 때문이다. 몇 해 전 코스타(KOSTA)에서 기드온 프로젝트(gpKOSTA)라 하여 학생/ 청년을 대상으로 기드온의 300용사와 같은 지도자를 양육하는 지도자 훈련 프로그램이 인디아나(IN)에서 열렸다. 이때 시카고, 미네소타, 인디아나, 미시간 등지에서 학생/청년 리더들이 약 96명 정도 참석하였고, 이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하였다. 그 설문지의 질문 중 한 가지가 교회에서 섬기는 개인의 사역에 관한 물음이었다. 그 질문의 응답은 놀랍게도 이들이 교회에서 섬기는 사역이 대다수 최소 3가지-4가지였고 많게는 5- 6가지 사역에 적지 않은 숫자가 참여하고 있었다. 혹시 목회자들이 참여한 것 아닌가 하는 물음까지 가질 정도였다. 제한된 시간의 테두리에서 사는 인간이기에 시간의 안배와 체력의 조절이 무너지면 건강의 소진과 함께 스트레스를 가지기 마련이다. 직장/ 학업 과 가정, 교회 생활의 그 어느 하나 균형을 잃게 되면 그 결과는 다른 쪽에도 균형을 잃게 한다. 균형의 상실은 육체적, 심리적, 영적 바이러스를 가져와 건강을 잃게 하고, 결국은 쓰러지게 만들기 마련이다. 너무 많은 교회의 사역이 리더들로 하여금 지치게 하는 주요인 중 하나이다.


둘째, 장기적인 섬김의 비전이 외부에서 공급이 되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새로이 사역에 헌신하기가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지만 장기적으로 사역에 헌신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새것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음식을 먹어도 금방 본능적으로 변화를 좆아 간다. 이것은 물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기존의 물건이 아무리 좋아도 어느 순간이 되면 이에 대해서도 변화를 가져보려 한다. 그래서 자리를 바꾸어 보기도 하고, 닦아 보기도 하고, 새로운 것을 붙여 보기도 한다. 새로운 기분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는 새로운, 다른 말로 표현하면 신선함을 분명 우리들에게 가져다주어 새로운 의욕(motivation) 을 공급하게 되고 다시 새로운 발걸음을 걷게 한다.


맞다. 이것이 바로 기존의 모든 것을 장기적으로 유지시키는 (sustaining) 원리의 기초인 것이다. 이러한 원리는 사역의 헌신자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그의 현재적 사역에 대해 새로운 비전들이 외부에서 공급되어지지 않으면 그 일은 익숙하게 된다. 일이 익숙해지면 타성에 젖고,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또 다른 하나는 사역의 새로움을 위한 도구들(training/equipping)이 외부에서 공급되어지지 않으면, 이는 마치 전쟁터에 있는 군인이 더 이상 총을 쏠 수 있는 탄알들이 없어 무력해지는 것과 마찬가지 상태가 된다. 결국 무능력에 대한 자책감속에 지쳐 쓰러지게 되는 것이다.


셋째, 리더의 자기 영적 관리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섬김에 있어서 리더 자신의 영적 관리는 대단히 중요하다. 아무리 외부적인 조건이 좋지 않아도 내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불편한 것뿐이지 불행하게 느끼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외부적인 조건이 아무리 좋아도 내적으로 건강하지 않는 사람은 늘 불평이 많고, 얼굴에 근심이 많으며, 자신의 삶을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과 같다. 앞에서 언급한 리더를 지치게 하는 두 이유 1) 많은 사 역 2) 외부적 공급의 결핍 가운데서도 리더 자신이 영적으로 건강하다면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 두 가지 문제를 어느 정도 다룰 수 있다. 목회자와 상의하여 시간을 조절하거나 사역을 조절하거나, 혹은 본인이 외부적 공급을 요청하거나, 자신이 제공하거나, 옆에 있는 다른 사역자들을 붙들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리더 자신의 영적 관리에 실패하는 경우는 영적 침체를 경험하게 되고, 섬김의 책임성 보다는 회의적인 신앙의 자리에 서게 되며, 사역의 거절 뿐 아니라 그 공동체를 떠나고 싶어 하게 된다. 심한 경우는 삶의 안정을 잃어 늘 불안하고 떠 있는 것과 같은 알맹이 없는 껍질의 모습으로 교회 존재자체의 무가치성까지도 느끼게도 된다.


물론 이러한 기본적 3가지 이유 외에도 리더의 가정, 직장, 혹은 리더의 인간 관계성 문제라든지, 리더십에 대한 그룹 원들의 문제 제기, 혹은 교회의 불안정한 여러 요소들 등등 다양한 요소들이 리더들로 하여금 사역의 지속성을 가져오지 못하게 하고 리더를 지치게 하여 사역을 멈추게 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리더가 지쳐 쓰러지는 이러한 다양한 이유들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위에서 제기한 3가지 기본 요인들과 어느 정도 밀접한 연관이 있고, 더 깊이 관찰해 보면 이 지침(burn-out)의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 리더의 자기 영적 관리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이 글은 리더가 영적으로 지쳐 더 이상의 거룩한 사역의 사양(reject)을 가져오게 된 세 번째 이유, 리더의 자기 영적 관리 실패에 그 초점을 두고 어떻게 이를 방지할 수 있는지, 더 적극적으로 나아가서 리더가 지친 상태에서 어떻게 회복(build-up)할 수 있는지 그 도구들(tools)을 제시하고자 한다. 특별히 내용을 소그룹 리더로 제한시키려 한다. 물론 내용 자체는 다른 리더십에서도 적용할 수 있겠지만 세밀하게 어느 한 초점이 있어야 다른 경우도 적용할 수 있기에 그 내용의 범위는 소그룹 리더의 경우로 초점을 둔다.

그리스도의 공동체, 우주적 교회

이코스타 2006년 2월호

시대정신이 더욱 절망적으로 되어 가는 이 때에,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편견, 편가름, 이기주의, 개인주의 등으로 특징지워지는 지금의 시대를 살아 갈 수록 참 소망과 화해에 대한 목마름은 더욱 간절해지는데, 우리가 이러한 수렁으로부터 빠져나갈 길을 과연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 시점에서 다시 한번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셨던 일에 주목하게 된다. 주님 스스로가 하나님께 드리는 화목제물이 되어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화목하게 하시고, 동시에 우리 안에 있는 막힌 담들을 헐어버리신 주님의 모습에서 가슴벅찬 소망을 발견한다.”

2006코스타 취지문의 일부이다. 이번호에서는 우리 안에 막힌 담을 허시고 전우주적인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그를 중심으로 한 우주적 교회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1. 그리스도의 사역
엡 4:5 주도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바울 사도는 모든 그리스도인들 – 특히,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하나의 하나님 안에서 통일될 것을 촉구한다. 그리스도의 사역이 죄로 인해 분열된 창조의 질서를 회복하신 것임을 강조하며 성도들은 우주적 교회 안에서 하나되어야 할 것을 권고한다. 하나님 안에서 공동체적으로 통일되어야 한다는 권고는 당시의 교회의 분열상을 간접적으로 반영하는 한편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보여준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의 사역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2. 죄로 인한 분열
분열은 죄인가?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 간섭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편하고 자연스러운 상태가 아닐까? 미국사회에서 가장 인종분리(Segregation)이 심한 곳은 교회라고 한다. 백인 교회, 흑인 교회가 따로 존재하며 이들간의 교류는 매우 적다. 그리고 교회는 문화적으로 아주 친밀한 가족과 같은 곳이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가하는 질문도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질문에 대해서 우리는 성서를 통하여 다른 대답을 들을 수 있으며, 분열과 소외가 죄의 결과임을 알 수 있다.
먼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아담과 하와의 첫번째 관계는 서로에 대한 비난으로 깨어졌고 둘 사이의 관계는 명령과 복종의 관계로 변질되었다. 좀더 나아가 바벨탑 사건은 공동체 안에서는 죄의 결과를 보여주는데 그것은 언어의 분열을 통한 의사소통의 깨어짐 그리고 그 결과로 인한 흩어짐이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의 상처와 분열, 공동체 간의 충돌, 나아가 민족, 국가 공동체 간의 전쟁 등은 자연스러운 결과가 아니며 인간의 죄와 그 결과로 구성된 구조적인 죄악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3.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받은 하나님 백성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은 하나님과 인간의 화목 뿐 아니라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로서 교회의 기반을 세운 사건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믿는 믿음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선언하셨으며 (마 16), 교회의 질서에 대해서 언급하신다. (마18)
한편, 신약교회의 기반이 된 사도행전의 성령강림 사건과 방언 사건은 바벨론의 죄로 발생한 언어적인 장벽이 성령 안에서 통합된 교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신약교회의 다양한 형태의 분열에 대하여 바울 사도는 한 하나님과 한 교회를 강조함으로써 문화와 언어적 차이를 넘어선 보편 교회의 통일성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7: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도다 하니


이러한 신약교회의 비젼은 계시록에서 종말론적 환상으로 절정에 다다르게 된다. 종말론적인 비젼은 마침내 구원받을 모든 백성들이 연합하여 한 하나님을 향해 찬양하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4. 문화적 분열과 교회
구속사적 관점에서 하나님 백성과 교회의 통일성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런 관점에서 세속 문화 속에 내포되어 있는 분열의 요소를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그리고 제도 교회 안에서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구별을 어떻게 대처해야할까.
먼저 이것이 인간의 본성에 내포된 자연스러운 결과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그 결과를 성경적 세계관을 갖고 교정해야할 부분을 발견하고 치유하는 노력을 경주해야하겠다. 세속 문화 속에 존재하고 있는 갈등과 충돌을 하나님 나라의 사랑과 평화로 변화시켜야 하며, 교회 내에 존재하는 분열상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다민족 사회에서 기독교 공동체는 각 민족어를 중심으로 모여있으나 그리스도인들은 의도적으로 타민족과의 교제와 배움의 장을 마련해야하고, 그들간에 존재하는 반목과 갈등을 적극적으로 해결하는 노력을 기울여야하겠다.
가난한 자, 소외된 자들에 대한 관심과 포용을 교회의 일차적 과제로 받아들이고 그 일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하겠다.
아래에서는 교회가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고 통일성을 향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인터뷰를 통해 알아본다.

좌담회 – “민족 간의 벽을 넘어” – 김재신, 최규진, 조혜진

이코스타 2006년 2월호

1. 자신의 소개를 간단히 해 주시겠습니까?


조혜진: 저는 현재 indianapolis에서 1년 반 정도 살고 있습니다. 제약회사에서 biostatistician으로 일하고 있고요. University of North Carolina에서 통계학을 전공하고 이 곳으로 이주했습니다. 아직 싱글이고요. 교회는 인디애나폴리스 한인 장로교회를 다니고 있습니다. North Carolina에서는 한마음교회라는 한인교회를 다녔었고요.


최규진: 제 이름은 최규진입니다. 작년에 NC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결혼과 동시에 버지니아로 옮겨왔습니다. 현재는 Korean Bible Studies 라는 단체에서 소그룹 성경공부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출석하고 있는 교회는 집에서 10분 정도 떨어져있고, 미국인보다는 저와 같은 (International)이 더 주를 이루고 있는 교회입니다. 코스타와의 인연은 2003년부터이고, 작년까지 jjKOSTA 6지역(NC, SC) 코디네이터로 섬겼습니다.


김재신: 저는 아내와 딸, 아들과 함께 시애틀에 살고 있고, University of Washington 에서 환경공학 박사과정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현재 Westgate chapel이라는 약 3 4천명 정도 규모의, 약간은 오순절 계열의 성향을 지닌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2. 자신의 삶 속에서 외국인들과 가깝게 접하면서 하시고 계신 활동이 있으시면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최규진: 우선 외국인의 정의를 어떻게 내리느냐가 문제인 것 같습니다. 만일 외국인을 한국사람을 제외한 다른 민족으로 정의한다면, 성경공부를 제외하고 나머지 생활은 모두 외국인을 접한다고 봐야 하겠지요. 특히 이곳에 이사 와서 나가고 있는 교회에서 점점 외국인을 접할 기회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김재신: 저도 학교와 교회, 모두에서 외국인을 많이 접하게 됩니다. 하지만, 제가 속한 연구실에는 중국인과 한국인이 주로 많기 때문에, 실제로 외국인은 교회에서 주로 접하게 됩니다. 교회에서 매주 성경공부를 참석하고, 그 중의 몇 명과는 개인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최근 두 학기는 못하기는 했지만, 그 전까지는 international student들을 위한 성경공부를 돕기도 했었습니다.


조혜진: 제가 다니는 회사는 제법 규모가 큼에도 불구하고, 저희 통계 부서에, 한국 사람은 저를 제외하면 한 명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회사가 통계에 관련하다 보니, 중국사람은 상당히 많은 편이고요. 제가 한국 사람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죠. (웃음) 정말 한국사람으로 본이 되어야만 해요.


3. 혹시 이런 활동 속에서, 주류 민족이 아니기 때문에 또는 문화적 차이로 인해 겪은 갈등이나 에피소드가 있으시면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조혜진: 두 가지가 있을 것 같아요. 이 곳이 미국이기 때문에, 미국인들이 우리를 이방인 취급당하는 경우가 있겠고요, 또 한가지는 제가 동양인이기 때문에, 저를 중국인으로 간주하고 대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아요. 저도 문제이겠지만, 중국사람으로 오해 받는 것이 그리 유쾌하지는 않거든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중국 사람들은 스스로에 대한 지나친 자부심으로 한국 사람들을 무시하는 듯한 인상을 받곤 해서요. 제가 가진 나쁜 편견이겠지만요. 그러다 보니, 어쩔 때는 ‘내 편이 되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 다시 말해 ‘마음 붙일 때가 없다’고 느끼게 되는 경우가 참 힘이 드는 것 같아요.


최규진: 저는 미국 생활이 이제 3년째 입니다. 체류 기간이 짧아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주류 민족이 아니기 때문에 겪었던 갈등은 특별히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간접적으로 경험한 적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있던 학교의 chairperson이 동양인이었는데, 학교 Faculty 선정에 있어서 불합리하게 면책을 당하는 경우를 보았습니다. 아마도, 민족주의를 가장한 집단 이기주의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김재신: 저 같은 경우도 학교에서나 교회를 통해 특별히 차별을 당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단지 언어의 차이로 인해, 마음 깊은 이야기를 하지 못한다는 점이 아쉽기는 하지요.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그건 언어 장벽만은 아닌 것도 같습니다. 교회에서 성경공부를 하다 보면, 함께 몇 개월씩 만나 교제를 하다가도, 얼마나 지나서 다시 만나면, 마치 처음 만나는 사람처럼 대하는 경우도 종종 있으니까요. 처음에는 무시를 당한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사실 이런 점은 미국의 개인주의를 우리가 잘 이해하지 못해서 생기는 갈등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다시 말해, 우리가 차별을 당한다고 여기는 많은 부분들이, 사실은 문화 차이로 인한 오해로 인한 것을 수도 있겠다는 거죠.


4. 일반적으로 볼 때, 소수민족으로서 미국 주류 교회에 다니게 될 경우 어떤 장점과 단점이 있을까요?


최규진: 일반적으로 볼 때, 미국교회를 다니면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장점은 기존의 익숙한 신앙환경에서 벗어남으로써 예배의 본질을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경험한 한 미국 교회에서는 Ash Wednesday에 재를 이용해서 이마에 십자가를 긋는 의식을 했었죠. 처음에는 그런 의식이 무척이나 어색했지만,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을 하게 해주는 역할을 했던 것 같습니다. 단점은, 아무래도 언어의 장벽인 것 같습니다.


김재신: 이민교회나 미국교회나 모두 성경을 이해 하려하고, 복음을 해석하려는 점에서는 공통적으로 열심인 것 같아요. 하지만, 이렇게 이해한 것을 실천하는데는, 방법론적인 면에서 자라난 문화적 배경에 영향을 받는 듯 싶고요. 미국교회는 목적을 향해 상당히 합리적으로 일을 진행시키기 때문에, 일의 진행이 각각 독립적으로 잘 되어가고, 상당히 깔끔해 보이죠. 하지만, 그 합리적인 분위기 때문인지, 서로 권면하고 도전하는 면이 많이 부족한 것 같아요. 반면 한국 교회는 일 진행이 덜 합리적이지만, 그런 가운데 서로 도전하고 격려하는 분위기는 좋은 것 같고요.


eKOSTA: 현재 섬기시는 교회에 다민족 사역이 잘 되어 있나요?


김재신: 주로 백인 중심이기 해요. 하지만 선교 지향적인 교회이기 때문에 타민족에 대한 차별은 거의 없는 것 같고요. 때로는 필요에 따라 각 민족별 사역이 이루어 지기는 하더라고요.


조혜진: 저는 미국에 와서 한인교회만 2곳을 다녔습니다. 왜 미국교회를 가지 않고 한인교회를 고집하냐고 묻는 질문에 답을 한다면, 그것이 제가 생각하고 있는 한인교회와 미국교회의 장단점이 될 수 있을 것 같네요. 제가 한인교회를 나가는 이유는, 우선 한국인으로 언어의 장벽이 없고, 같은 정서를 가진 한국 사람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또한 규모가 작은 교회를 섬김으로써, 내가 교회로부터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나 자신이 공동체에 작은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인 것 같아요. 다시 말해 공동체 자체에 깊이 관련될 수 있다는 거죠. 하지만 이민교회에 아쉬운 점은 젊은 사람을 키워내기 보다는 교회 봉사 쪽에 비중을 둔다는 점이고요. 음… 반면에, 미국교회에 한번 가 볼까 하는 생각 드는 점이 미국교회의 장점일 수 있겠는데요, 그것은 환경을 바꿈으로써 내 사고 안에 갇혀 있을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허상을 깰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아요. 다시 말해, 언어의 장벽에도 불구하고, 자기 안에 있는 벽을 꺨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 될 것 같습니다. 반면, 미국교회의 단점이라면, 공동체성의 결여랄까요, 멤버십의 결여랄까요… 특히 외국인으로써 그들 가운데 주인의식을 갖기는 쉽지 않을 듯해요.


김재신: 공감합니다. 미국 사람들은 성경적인 가족적인 공동체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아요.


eKOSTA: 지금까지의 이야기들을 들어보면, 미국교회는 공동체성이 약하다는 지적이 공통적으로 나오는 것 같습니다. 왜 미국교회에는 공동체성이 부족할까요?


김재신: 분명 미국교회에도 자신들만의 공동체성은 존재합니다. 물론 교파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겠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건 사실인 것 같고요. 하지만, 이런 개인주의적 성향을 반드시 나쁘다고 만은 할 수 없는 것이, 미국교회의 성숙한 크리스챤들의 경우에는, 여유시간을 이용해서 책 읽기나 기도 등에 사용함으로써 신앙의 깊이가 더욱 깊어지기도 하거든요. 반면, 한인교회에 속하면, 여러 가지 모임에 참석하고 봉사하기 위해 개인적인 시간을 내기는 쉽지 않을 테니까요. 또 한가지를 보자면, 한국사람들은 모여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는 반면, 미국사람들은 개인적인 기도가 깊어지는 장점도 있는 것 같고요.


eKOSTA: 그렇군요. 그런데, 한가지 궁금한 것은 미국교회는 자신의 교회에 참석하는 한국 사람들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을까요? 예를 들면, ‘저 사람들은 자기 민족의 교회가 있는데 왜 여기에 나올까?’라고 다소 이질적으로 여기나요, 아니면 ‘미국에 왔으면 당연히 미국교회를 나와야지, 왜 자기들끼리 모이려고 할까’라는 태도를 보이나요?


김재신: 미국교회의 개인주의 성향으로 볼 때, 별로 관심이 없을 것 같은데요.


조혜진: 이곳에 처음 이사 왔을 때 있었던 일이예요. 회사 사람들과의 대화 중에, 내가 교회를 찾는다고 하니까, 그들이 ‘이 지역에 한인 교회가 있냐’고 묻더라고요. 그런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미국인들도 예전의 경험 상으로 한국인은 한국교회를 나간다고 이미 알고 있는 듯 싶었어요.


최규진: 미국인들은 별 관심이 없을 것 같아요. 하지만 분명한 건, 우리가 미국교회를 나갈 때, 그들의 눈에 띠게 되는 건 사실이고요.


조혜진: 저희 회사에서는 다민족들의 차이점을 이해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어요. 서로의 문화 차이 때문에 발생할 수 있는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한 제도지요. 이처럼, 크리스챤들도 서로의 다른 점을 문화적인 차이로 이해할 수 있다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요.


5. 일반적으로 볼 때, 직장이나 학교 생활을 하는 가운데, 소수민족으로서 겪을 수 있는 어려움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또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조혜진: 아주 단순한 이야기부터 한다면, 이름 부르는 문제부터 있을 것 같아요. 저는 미국 이름이 없어서, 사람들이 제 이름이 잘 기억하지 못하더라고요. 그래서 때로는 만날 때마다, 제 이름을 묻는 경우도 생기더라고요. 다른 어려운 점이라면, 한국사람이 너무 없기 때문에, 제가 한국사람 전체를 대표하는 경우가 발생하는 경우가 있어요. 저의 작은 행동 하나를 가지고 ‘한국 사람은 저렇구나’라고 쉽게 판단해 버리는 걸 보면, 정말이지 적잖은 부담을 느끼게 되더라고요.


김재신: 사실 사람들은 우리가 소수민족으로 와 있지만, 우리에게 미국적 사고를 기대하곤 하죠.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중심적으로 사고를 하니까요. 개인주의의 또 다른 형태라고나 할까요. 그런 점은 우리 자신에게도 예외는 아니어서, 다른 사람의 행동을 우리의 기준으로 쉽게 평가하고 단정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최규진: 일반적으로 볼 때, 소수 민족이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점을 인정하기 못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즉, 그 동안 자기가 중심이 되어서 세상을 바라보았지만, 이제는 다른 사람의 주위를 맴돌면서 중심이 아닌 주변에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eKOSTA: 그렇다면, 우리가 타민족에게 가지고 있는 편견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조혜진: 문화적인 것 뿐 아니라, 역사적 환경에 기인할 것 같고요. 지극히 제한된 선경험을 바탕으로 다른 문화를 쉽게 평가하는 것도 큰 편견으로 작용하겠지요.


최규진: 우선 자기 자신의 부족함을 솔직히 인정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자기 중심적인 사고를 가능한 한 벗어나야 한다는 거죠. 결국, 자신의 IDENTITY를 이 땅 위에 있는 어떠한 기준에 둔다는 것이 얼마나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6. 교회나 직장 (학교)에서 생길 수 있는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지혜롭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한민족이 가진 장점이 도움이 되는 경우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최규진: 우선 자기 자신의 부족함을 솔직히 인정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자기 중심적인 사고를 가능한 한 벗어나야 한다는 거죠.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리의 identity가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다는 것을 계속 인식해야 하겠죠. 그렇게 하늘에 소속을 둔 자만이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 들일 수 있을테니까요.


김재신: 저도 공감입니다. 한국인으로써의 identity를 버리고, 모든 사람이 공유할 수 있는 크리스찬이라는 identity를 가져야만 민족 간의 벽을 허물 수 있습니다. 그런 크리스찬의 identity를 가지고 타민족들을 바라보면, 개인주의 속에서도 남모르는 외로움을 느끼고 있는 그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고요. 그렇게 할 때, 우리 한민족이 가지고 있는 따스한 정의 문화가 그들의 외로움에 다가가는 큰 도구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런 면에서 화해자로서의 삶을 사는 데는 동양인이라는 인식이 더 성경적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조혜진: 두 분의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한가지만 덧붙이고 싶어요. 모든 문제가 다 그렇겠지만, 문제는 일방적이라기 보다는 늘 쌍방향으로 일어나기 마련이잖아요. 상대방이 저희를 이해하지 못해서 생기는 문제도 많이 있겠죠. 하지만, 상대방에게 이해를 받기 보다는 먼저 이해하려고 애써야 할 것 같아요. 상대방에 대해 민족적인 벽을 만들고, 정죄하고 판단하기 보다는, 그 사람을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는 한 영혼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겠지요.


김재신: 맞아요. 물론 민족 간에 다른 점이 많지만, 같은 성정을 가진 부분이 생각보다 많으니까요. 그리고, 주류와 비주류라는 개념 자체를 버릴 필요가 있어요. 소수 민족이라고 먼저 위축될 필요도 없고요.


조혜진: 다른 민족의 크리스찬에겐 ‘복음’ 자체가 벽을 허무는 도구가 될 수 있어요. 한 사람을 다른 민족이 아닌,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한 인간으로 바라본다면 벽을 허물 수 있겠죠. 재신 형제님도 말씀하셨지만, 주류 비주류의 개념이 아닌, 한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다른 사람의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과장하지도 않고 축소하지도 않고 말이죠.


eKOSTA: 오랜 시간 좌담회에 임해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