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F-2 유학생 배우자와 가정 사역

이코스타 2006년 3월호

결혼을 하고 캠퍼스 사역(Korean Bible Study)을 우연히 알게 되면서 말씀을 통한 제자 됨과 제자 삼는 일에 눈을 뜨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싱글 때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지만 그런 기회가 내게 주어진 사실 만으로도 감사드리고 가장 적합한 하나님의 때였으리라 믿는다. 그리고 jjKOSTA코디로 섬기면서 미주 지역을 그리스도의 띠로 묶으시고 동일한 마음을 품은 동역자들을 만나게 하시며 하나님의 제자들을 일으키시는 일을 보고 경험케 하심 또한 감사드린다. 너무나 부족한 믿음과 보잘 것 없는 헌신에도 하나님께서는 사역으로 불러 경험케 하셨고 믿음의 경주를 위해 붙잡고 달려갈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하셨다.


그러던 중 2004년에 하나님의 선물인 자녀를 허락하셨고 이제 한 아이의 엄마로 살아가고 있다. 아이가 없을 때는 싱글과 함께 하는 신앙생활에서 이질감을 느끼는 정도였을 뿐, 나름대로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었지만 막상 자녀가 생기니 모든 것이 달라졌다. 예전부터 예상했었고 마음으로 준비했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리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산후 조리와 육아로부터 오는 육체적인 피곤과 불규칙적인 생활은 말씀과 기도로 나튼〈쨉?여유를 주지 못했다. 주일날 예배 시간에는 아기 방에서 아기와 씨름하느라 제대로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날이 허다했고 주일날 교회 가는 것이 전혀 즐겁지가 않았다. 그리고 말씀을 듣고 나눌 공동체와 사역이 없어지니 나의 신앙을 붙잡아 줄 버팀목을 잃어버리게 되어 영적인 좌절감과 무기력함 가운데 주저앉게 되었다. 자녀가 주는 기쁨과 축복으로 감사가 넘치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나 달라진 상황들로 인한 당황함과 무의식 가운데 있은 정신적인 충격, 엄마라는 새로운 자아 정체성이 아직 자리 잡지 못해 오는 혼란 또한 나를 힘들게 했다. 지금 돌아보면 자녀가 막 태어나고 얼마간은 자매에게 육적, 영적, 감정적으로 총체적 어려움을 겪기 쉬운 시기인 것 같다. 산후 우울증으로 힘들어 하는 산모들의 이야기를 흔히 주위에서 들을 수 있는 것도 나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에게 공통적으로 힘든 시기일 수 있음을 알게 한다. 더욱이 신앙인이라면 영적인 고갈이 더욱 삶을 건조하고 힘들게 할 것이다. 그 기간 중에 회복을 바라며 일대일 성경공부를 맡게 되었지만 나 자신에게 은혜가 부족하여 더 이상 끌고 갈 수 없어 멈추게 되었다. 그로 인해 죄책감과 더 큰 좌절감으로 회복이 불가능할 것만 같은 나 자신을 바라보게 되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주위의 동역자를 통해 도움의 손길을 내미셨다. 예전의 캠퍼스 사역을 하고 계신 간사님의 사모님께서 나의 상황을 안타깝게 여기셔서 큐티 모임을 제안하셨고 일주일에 한 번씩 모임을 가지면서 말씀을 나누고 기도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내 자신이 말씀 앞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사모님의 나눔이 메마른 땅에 생명수가 되어 영혼이 소생하고 호흡하는 은혜를 경험하게 하였다. 한 번 회복하시기로 시작하신 하나님의 일하심은 놀랍게 이루어졌다. 예배를 맘껏 드릴 수 있는 환경으로 인도하셔서 예배의 기쁨을 회복시키셨고 새벽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에 눈물로 반응 하게 하셨으며 동역자의 교제와 돌봄으로 지친 영혼과 마음에 따뜻한 사랑이 가득 차게 되었다.


회복과 함께 사역에 대한 갈급함과 헌신으로의 부르심에 응답하고자 하는 마음을 주셨는데 하나님께서는 내가 생각하고 있던 사역이 아닌 가정 사역이라는 다른 그림을 보여 주셨다. 처음에는 ‘자매’로 태어났기에 가정에 매이고 한계가 정해진다는 생각에 답답함과 불공평함에서 오는 반감이 생겼다. 하지만 그동안 말로만 가정 사역이라 여겼지 진지하게 사역으로 여기고 제대로 섬기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이제는 자녀를 통해 가정에서 평생 제자 삼는 일로 불러 주셨음에 더 큰 책임감을 느끼게 되었다. 얼마 전 참석한 가정 세미나에서 들은 말씀이 마음에 와 닿는다. 선교는 수평 선교와 수직 선교가 있는데 지금까지 세계를 향해 뻗어가는 수평 선교에만 열심을 내고 세대를 잇는 자녀를 향한 수직 선교에 소홀하여서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힘을 잃어가고 있다는 말씀이었다. 가정 사역은 다른 사역에 비해 겉으로 잘 드러나지도 않고 그래서 어쩌면 ‘사역’이라는 진지함이 결여된 채 헌신과 섬김에 소홀한 대상이 되기 쉽지 않나 생각 한다. 캠퍼스 사역에서 제자 삼는 것과 동일하게 자녀를 예수님의 제자로 삼기 위해서도 제자 삼는 자가 먼저 제자가 되고 말씀과 기도, 인내와 사랑, 하나님께 온전히 내어 드리는 헌신의 값 비싼 대가를 치러 야 가능한 일인데 말이다.


흔히 아줌마는 용감하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경험해 보니 자신감과 자존감이 오히려 싱글 때 보 다 낮아진 것을 경험하였다. 아내로, 엄마로, 며느리로, 딸로 그밖에 여러 역할들을 감당하면서 소속감에 혼돈이 오고, 내가 속한 가정과 가족 그리고 거기에 쏟는 나의 섬김의 가치를 낮게 인식하지는 않고 있나 되돌아본다. 다양한 역할들로 불러 주신 하나님의 필요와 사명에 대해 스스로 점검해 보고 하나님 안에서 나의 정체성을 새롭게 정립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할 때 남편의 조력자로서, 자녀들을 예수님의 제자 삼는 스승으로서 최선을 다할 수 있으며 가정 사역 가운데 쓰임 받는 나의 존재 가치를 하나님 안에서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매들은 돌봄(care)이라는 달란트를 선물 받아 하나님의 일을 위해 좋은 도구로 쓰이는 축복을 주셨다. 하지만 그런 자매도 주위의 섬세한 돌봄이 누구보다 필요한 대상이며 그런 돌봄으로 세워질 때 주어진 달란트를 쓸 수 있을 것이다. 주위에서 갓 자녀가 생긴 자매들을 비롯해 많은 유학생 배우자들이 관심과 돌봄의 대상에서 소외되거나 그들의 어려운 상황이 간과되는 것을 종종 보면서, 그리고 직접 경험하면서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가까운 남편부터 그들의 필요를 아는 동역자들 그리고 교회 안의 작은 공동체들이 일어나 자매들을 회복시키고 세우는 사역들이 활성화되길 바란다. 그리고 자매 본인은 신앙생활에서 주변인이 아니라 주체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아줌마 특유의 용감함과 담대함으로 하나님께서 맡기신 가정 사역에 충성함으로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데 쓰임 받길 기도드린다.

[신선묵]영적 지도자의 권위 (Authority)

월드미션대학교의 총장님이신 임동선 목사님께서는 매 학기 신입생들을 맞이하면서 주시는 격려에서 꼭 빼어놓지 않는 말씀이 있다. 좋은 영적 지도자가 되기 위하여 신학교를 다니면서 인격, 지식, 또 영력을 쌓아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열심히 공부하여서 지식을 쌓고 고난의 경험을 통하여 인격을 다듬고 하나님께 깊이 나아가는 기도 생활을 통하여 영력을 쌓으라고 말씀하신다. 사실상 지도자들은 여러 가지 종류의 능력을 갖추고 그 능력을 사람들을 섬기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할 줄 알아야 하지만 그 중에서도 영적 지도자가 갖추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능력은 영적인 능력과 권위이다. 일萱?효과적으로 사역을 감당했던 영적 지도자들을 살펴보면 그들이 주로 영적 권위의 기초 위에서 지도력을 발휘한 것을 살펴볼 수가 있다.


한국의 지도자들을 연구하면서 많은 지도자들의 삶과 사역 속에서 영적인 권위를 인식하고 소중히 하고 사역에서 영적 권위의 기반 위에서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그 중에서도 한경직 목사님은 그의 사역 가운데 영적 권위를 잘 인식하고 사용하신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그분은 목회자들을 위한 글에서 영적인 권위에 대하여 가르치셨다. 주님께서도 “가르치실 때에 서기관과 같지 아니하고 권세를 가지고 가르치셨다”라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영적 지도자에게 있어서의 바른 권위를 강조하셨다. 그러면서 설교자가 영적 권위로 가르치기 위한 다섯 가지의 중요한 원리를 강조하셨다.


첫째, 설교의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다른 어떤 지식을 통하여 권위를 가지려 하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할 때에 지도자들은 영적 권위를 가지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 자체에 권위가 있기 때문이다. 둘째, 지도자가 가르치는 내용에 대한 확신이 있을 때에 권위를 가지게 된다. 자신도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면서 그것을 지도자 스스로가 확신으로 받아들이고 전할 때에 권위가 있는 것이다. 셋째, 지도자는 그 생활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 때에 즉 도덕적인 면에서 타의 모범이 될 때에 영적인 권위가 있는 것이다. 자신도 그렇게 살지 않으면서 화려하게 말을 잘한다고 영적인 권위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넷째, 지도자가 인간의 영혼을 향한 깊은 애정과 구원하고자 하는 열정이 있을 때에 영적 권위가 있는 것이다. 단순한 지식의 전달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소유한 지도자에게 영적 권위가 있는 것이다. 다섯째, 지도자가 기도생활을 통하여 성령으로 충만할 때에 영적 권위가 나온다.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하여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고 순복할 때에 영적 권위가 있는 것이다. 한경직 목사님은 이상과 같은 원리 위에서 삶과 사역을 감당하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영적 권위를 인정하고 자발적으로 그분의 지도력을 따른 것이다.


풀러 선교대학원의 지도자학 교수인 클린톤 교수는 영적 권위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영적 권위란 “사람들이 그들의 지도자 안에 있는 영성을 인식하였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그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권리를 부여하는 것” 이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지도자의 삶과 사역 속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고 그 결과로 사람들이 지도자에게 지도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고 따르는 것이 영적 권위이다. 이런 영적 권위는 주로 지도자가 삶의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을 깊이 경험할 때 또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로 인한 성령의 열매가 그 삶 가운데 나타날 때, 또 사역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이 나타날 때 사람들은 지도자의 영적 권위를 인정해 준다. 또한 영적 권위가 있는 사람은 자기의 권위를 주장하기보다는 주로 설득과 모범 그리고 도덕적인 면에서의 탁월함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이끄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영적 권위를 가질 수가 있을까? 영적 권위란 욕심을 내어 소유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우리의 소유물이 아니라 하나님께 진실되게 나아가고 그 안에서 하나님과의 참다운 교제, 깊이 있는 만남을 가지는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결과요 열매이다. 영적 권위 자체가 목적인 것이 아니란 오직 하나님을 목적하고 하나님을 향한 깊은 열정이 있을 때에 주어지는 하나의 결과이다.


영적인 지도자는 여러 다양한 능력을 소유하고 상황과 대상에 맞게 적절하게 섬기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영적인 지도자가 궁극적으로 의지해야 하는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가 여러 다른 능력을 소유했는가 아닌가에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설사 우리가 다른 모든 면에서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할찌라도 그 능력 때문에 하나님 앞에 절대 겸손으로 나아가서 하나님을 목적하고 의지하는 자세를 갖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는 영적 권위가 주어지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 사역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고 또 지도자들의 영적 권위가 부족한 것이 우리 지도자들이 약하기 때문이 아니라 강하기 때문이 아닌가라고 말하면 너무 아이러니컬한 표현일까? 우리가 너무 강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우리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하고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지 않으시는 것은 아닐까 자문해 본다.


영적인 권위를 가지고 사역을 하신 대표적인 영국의 영적 지도자중에 한 분이신 존 스타트 목사님은 그의 “리더십의 진실”이라는 책에서 사도 바울의 영적 권위에 관한 중요한 역설적 진리를 지적하였다. 고린도후서 12:9-10을 보면,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몸에 있는 가시를 없애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세번 간절히 드린 후에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한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


영적인 권위는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고 그를 의지하여 살아갈 때에 주어지는 선물이요 결과이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우리의 능력이 있을 때에 그것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나아가지는 않는 경향이 있다. 도리어 우리가 약할 때에 우리는 나약함을 의식하고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고 그 결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영적 권위의 열쇠는 하나님께 나아가고 동행하는 것인데 우리의 나약함으로 인하여 우리가 더 하나님께 나아가게 됨으로써 우리의 나약함이 도리어 우리의 진정한 강함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신앙의 역설이다.


현대는 권위주위에 강하게 반발하는 시대이다. 그러나 그 이면을 보면 다른 어떤 세대보다도 참다운 권위에 대한 깊은 갈증을 가지고 있는 시대이다. 권위를 섬기기 위하여 사용하는 사람, 다양한 권위를 소유하고 상황과 사람들에 맞는 권위를 사용할 수 있는 지혜의 사람, 무엇보다도 우리가 의지해야 하는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임을 기억하는 사람, 우리의 약함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역설을 이해하는 사람, 이런 지도자들을 하나님은 찾고 계시고 사람들도 찾고 있다.

[장이규]지도자의 자기 관리와 성장 (2)

첫째, 리더는 자기관리 계획을 통해 성장하라.


21세기에 사회와 교회에 요청되는 리더십의 대표적인 유형은 섬기는 리더 (servant leadership) 이다. 아마도 근대 시대에 공동체와 리더, 권위 중심의 시대에서 근대 후기의 개인, 서비스 중심의 시대로 사회와 문화의 흐름이 변화된데 그 연유가 어느 정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리더십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2000년 예수님이 이미 말씀하시고 실로 본을 보여주신 성경적 리더의 모습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막 10:44) 가르치셨고, 예수님 자신이 이 땅에 오신 이유도 ”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막 10:45) 라고 말씀 하셨다. 더 나아가 예수님 자신도 삶 가운데 구체적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기까지 섬김의 본을 보여주신 삶을 사셨다 (요 13장):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본을 보였노라”( 요13:15)


예수님은 이미 이 시대를 향해 무엇이 참된 리더십이고, 무엇이 우리의 형제자매를 구원할 수 있는지를 2000년 전부터 가르쳐 주셨고, 예수님의 삶을 따라가는 그리스도인 역시 이미 2000년 전부터 리더십이 무엇인지를 삶으로 가르쳐 주어 왔다. 물론 기독교 리더십에 있어서 중세의 십자군 전쟁과 같은 부끄러운 부분의 굴곡의 역사가 있기도 하였지만 그런 가운데도 끊임없이 기독교 내에서의 리더십 갱신과 섬기는 종의 리더십 정신 회복의 노력은 이 역사를 주도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정치인이든, 단체장이든 누구든지 선거에 나갈 땐 이 예수님의 리더십 원리를 적용시키지 않으면 나올 수도 당선될 수도 없는 역사 이지 않은가!! 물론 당선 후 왜곡되기도 하였지만. 그러나 또 다시 선거에 나오려면 그 후보의 섬김의 리더십이 그 후보의 재출마에 있어 유권자 판단의 큰 잣대가 되는 이유를 보아도 이 역사의 리더십은 여전히 예수님의 섬김의 리더십에 의하여 인도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성서에 나타난 섬기는 리더의 모습이 어떤 모습인가? 성서에서 ‘섬기는 삶’을 뜻하는 단어는 ‘아바드(abad)’ 라는 히브리어 단어로 , 그 뜻은 “섬기다 (serve)” “복종하다 (obey God: 아람어에서 주로 사용)” “노동하다(do work for others)” “예배하다(worship)” 등등의 뜻이다. 이러한 다양한 측면의 역할과 모습가운데 공통되는 분명한 기초 두 가지는 첫째, 성서에 나타난 섬기는 리더의 모습은 ‘ 남을 높이고 세우기 위해 내가 도와주는 삶’ 이다.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중요한 초점 하나는 이 섬긴다는 성서의 단어 뜻 속에 ‘섬김을 통해 내 것을 챙긴다’ ‘보상 받는다’는 의미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섬기는 이의 자세는 내가 이것을 하면 저 사람이 이것을 주겠지 라는 보상 심리 (give and take)의 원리를 가져지는 것은 잘못된 섬김의 자세인 것이다. 이것은 뒤에서 이야기 하겠지만 리더를 지치게 만들고 오히려 영적 시험에 빠지게 하는 바이러스가 된다. 나를 통해 다른 형제자매가 살아나고 그의 필요가 채워지고 회복되는 것 자체를 위해 섬기는 리더의 모습이 성서에서 의미하는 섬기는 리더의 자세인 것이다. 둘째는, “남을 높이고 세우기 위해” 내가 가지고 있는 힘, 지혜, 의지, 능력, 재물 ― 등등의 것을 ‘ 나누는 삶’ 이다.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중요한 초점 하나는 섬기는 리더의 자세는 내가 가지고 있는 주님이 주신 은사(gift)들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내 것은 놓아두고 다른 사람의 것을 가지고 섬기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런 면에서 섬기는 리더의 모습은 주로 내 것을 재생산 해 내기 보다는 어떤 면에서는 상대방이 필요로 하는 것을 채워지도록 도와주고 내 것을 나누는 삶, ‘퍼 주는 삶’ 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자신에게 있는 것을 퍼 주다 보니 어느 순간 리더에게 더 이상 퍼 줄 것이 없어지면서 리더십에 감기 바이러스가 들어오게 된다. 그리고는 지치게 만들고, 섬기는 것을 힘들게 만든다. 리더가 섬김을 위해 더 이상 퍼 줄 수 없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 하나님은 인간을 성장하도록 만드셨다. 이것은 육체적인 면에서, 심리적인 면에서, 그리고 영적인 면에서 모두 똑같이 성장하도록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셨다. 따라서 인간이 시간이 가면서 이 세 가지 모두 성장하지 않으면 문제가 일어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만일 어린이가 더 이상 자라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의 육신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육체적 나이가 든다고 성장이 멈추었다고 할 수 있나? 그렇지 않다. 깊은 삶의 연륜이 자녀를 양육하고, 이 시대의 삶의 지혜를, 그리고 원숙한 미를 창조한다. 마찬가지로 심리적인 면에서도 육체가 자라면서 더욱 안정되고 성숙해지게 되어 있다. 자라는 것이다. 이것은 영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영적인 차원도 어린아이와 같은 미숙한 모습에서 장성한 어른의 모습으로 성장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바울과 같은 사도는 에베소에 있는 이미 예수님을 영접한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여러분들이 더욱 하나님의 부르신 소망이 무엇이고, 앞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허락될 하나님 나라의 유산이 얼마나 풍성한지,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 잘 알 수 있도록 마음의 눈이(the eyes of your heart) 열려 지기를 기도한다고 (빌 1: 15-19) 편지를 쓰고 있다. 오늘 우리들이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은혜를 받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을 알았다는 것이 무엇인가? 영적으로 눈을 뜨고, 성장(spiritual growth)하는 것이다. 결국 인간은 하나님이 육체적으로, 심리적으로, 영적으로 성장하도록 만드셨다. 이 성장이 늘 인간을 새롭게 하고 새 힘을 공급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소그룹 리더가 섬김을 위해 더 이상 퍼 줄 것이 없다는 것은 그의 삶에 무엇인가 재생산의 작업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라 진단할 수 있을 것이다.


재생산의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공급하는 사람이 재생산해 내지 못하면 공급할 수 없고 기업이 파업 되듯이 리더에게 있어서 이 세 가지 창조의 영역에 재생산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리더십에 이상 신호가 오고, 공급이 중단되며, 섬김이 지치고, 고역스러워지며, 결국에는 파산 신고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리더의 재생산을 위한 관리와 공급은 섬김의 필수적 요소요, 리더의 지침을 방지하는 충분조건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리더의 지침을 방지하고 지속적 섬김의 성장을 가져올 수 있도록 재생산 공급을 할 수 있을까? 기본적으로 리더의 자기 관리 계획을 통해 성장을 가져올 수 있다

[방선기] 관심과 간섭


어린아이들이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보면 사람들이 자기에게 관심을 가져주기를 원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기질에 따라 관심의 방향은 차이가 있지만 모두가 다 사람들의 관심을 원한다. 어린아이뿐 아니라 사람들은 누구나 다 자기에게 관심을 가져주기를 원한다. 그래서 자기에게 관심을 써주는 사람을 좋아하게 된다. 이렇듯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복잡한 생활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이웃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반면에 요즈음 사람들은 남의 간섭을 귀찮아한다. 특히 개인주의가 만연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사사로운 일에 끼어드는 것을 원치 않는다. 요즈음 아이들도 어른들의 간섭을 귀찮아한다. 아이들도 하나의 인격체로 인정할 때 자기의 삶을 지키려는 것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쓸데없는 간섭을 하지 않는 것도 이웃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데 사람들이 원하는 관심과 사람들이 귀찮아하는 간섭이 혼동될 때가 많다. 일상에서 경험하는 대인관계의 갈등은 이 두 가지를 혼동하거나 둘 사이의 균형을 찾지 못하는데서 생기는 것 같다. 그래서 이 두 가지를 잘 이해하고 적절하게 실천하는 것이 대인관계를 하는데 아주 중요하다.


우선 관심과 간섭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사막의 수도사에 관한 책을 읽다가 이 둘 사이를 아주 잘 구별해놓은 글을 보았다. “관심과 간섭은 다르다. 관심은 남의 연약함과 상처를 치료하려는 마음에서 생긴 배려이지만 간섭은 남에게 상처를 입히는 일이다. 배려에는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고 간섭에는 아픈 상처와 갈등이 남겨진다. 수도사들은 이웃에 대한 배려와 관심이 간섭이 되지 않도록 특별히 경계하였다.” 이 정의에 따르면 관심은 상대방에 대한 사랑에서 나오며 결과적으로 상대방에게 유익을 끼치는데 비해 간섭은 자기 욕심에서 나오며 결과적으로 상대방에게 해악을 끼치게 된다. 관심과 간섭은 겉으로 나타나는 행동은 비슷해 보이지만 동기나 결과가 정반대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일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될 때 항상 사랑으로 하는 것인지, 이것이 결과적으로 그에게 유익을 끼치게 될지에 대해서 생각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원치 않는 간섭을 하지 않고 사랑의 관심을 가질 수 있다.


그 리고 관심과 간섭의 균형을 갖추도록 해야 한다. 사랑의 관심을 가지면서 그것이 간섭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반대로 간섭하지 않는다고 사람들에게 무관심하게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아마도 크리스천의 이웃사랑은 이 둘 사이의 균형을 이루려는 노력으로 나타나지 않을까 생각된다.


부 부간에 서로에게 관심을 갖도록 하자. 그러나 아무리 부부라 할지라도 개인의 생활에 지나치게 간섭하지 않도록 하자. 자녀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도록 하자. 그러나 아무리 내 자식이라 할지라도 아이를 인격적으로 대해서 지나친 간섭을 하지 않도록 하자. 교회 성도들에게 관심을 갖도록 하자. 혹시 어려움을 겪고 있지 않나 돌아보는 사랑의 관심을 갖자. 그러나 쓸데없이 남의 일에 참견하지 않도록 조심하자. 사람을 향해서 내가 할 수 있는 한 관심의 폭을 넓혀서 그들을 돕고 위해서 기도하자. 그렇지만 남의 사생활에 호기심을 가지고 쓸데없는 간섭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자.

[박성호] 어이, 젊은이! 찬송가 좀 부르고 사소!

이코스타 2006년 3월


교역자들이 일주일에 한 번 거나하게 만나 진중한 이야기들을 나누는 화요일 아침 교역자회의 시간. 나에게는 일주일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시간이다. 함께 동역하는 나보다 나이가 조금 어린 2세 고등부 전도사님이 진지한 표정과 어투로 내게 질문해 온다.


‘요 즘, 주일 영어고등부 예배에 성가대 가운을 입은 성가대의 찬양시간이 뭔가 어색해서 예배에서 어떻게 순서를 배치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나의 조언을 구하는 눈치이다. 내심 충격적인 말이다. 예배에서 성가대의 위치가 위협을 받는 시대가 드디어 찾아온 것인가? 그것이 정말 필요한 것이냐고 물어보는 그의 진지한 질문 앞에서, 말은 안하고 표정을 애써서 잠재우고 있었지만 나의 뇌리에서는 쉴 새 없는 질문의 질문들이 꼬리를 물고 있었다. 예배담당 목사라고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다 갖고 있다고 생각하면 절대 착각인데… ‘음, 일단 성가대의 역할이 예배에서 얼마나 중요하다고 생각하는지?’ 나의 질문에 본인도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였는지 쉽게 답변하지 못하는 우리 전도사님… 성가대의 역할이 축소되고 찬송가가 사라진 예배에 이미 익숙해진 세대와 직접 대면하는 일은 무척이나 생경하다.


그 사이에 나의 생각은 잠시 타임머신을 타고 ‘샛별성가대’에서 자줏빛 가운을 입고 솔리스트로 어린이 예배에서 활약하던 나의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양떼들아 양떼들아 바람 타고 들려온다… 주는 나를 기르시는 목자요 나는 주님의 귀한 어린양… 어둔 밤 쉬 되리니 네 직분 지켜서… 내 주는 반석이시니…’ 목청껏 힘껏 부르며 친구들과 어울리며 교회당을 누비던 어린 시절. 어린이 찬송가는 우리들에게 학교 음악시간에 부르는 동요가 줄 수 없는 기쁨을 선사하는 또 하나의 장르였다. 동요보다 조금 더 세련된 듯 한 화성에 귀에 쏙쏙 들어오는 멜로디. 어린 시절 주일학교의 추억을 간직한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 런데 어린이 딱지를 떼고 중고등부로 올라가면 이야기는 달라지기 시작한다. 어린이 찬송가는 그야말로 ‘초딩’들이나 부르는 동요 수준의 찬송가이지 머리 큰 사람이 동요 찬송가를 부를 수 있나? 드디어 부모님이 끼고 다니시는 바로 그 찬송가가 우리 예배의 주요 찬양 목록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558곡의 통일찬송가를 살펴보면 그 많던 어린이 찬송가의 익숙한 멜로디는 다 사라지고 어린이 관련 찬송가는 달랑 4개. 청년에 관한 주제의 찬송가는 더해서 달랑 2개뿐이다. 그나마 청년 헌신예배 같은 때나 부를 수 있는 그런 찬송이다.


아 직은 경배와 찬양 운동이 활성화되기 전에 교회 중고등부 시절을 보냈던 내게 주일예배 시간의 이러한 찬송가들은 그야말로 어색함 그 자체였다. 이제 어른의 세계에 입문하는 듯 그런 마음으로 찬송가를 배우고 부르고 하던 시절이었다. 그나마 ‘복음성가’라는 타이틀을 가진 그런 찬양들로 주일예배 이외의 다른 예배모임에서 기타 들고 엄청나게 부르면서 위안을 삼던 그런 시절이었다. 최덕신이라는 이름이 세인에게 알려진 ‘주찬양 1집’ 테이프를 물리도록 들었던 기억이 아련하다.


그 래서인지 몰라도 이젠 중고등부를 비롯한 모든 젊은 세대의 예배에서 찬송가의 위치는 그야말로 옹색하기가 그지없다. 우후죽순처럼 밀려든 새로운 찬양들이 이젠 ‘복음성가’라는 이름이 아니라 어엿한 예배음악으로 자리를 잡은 지 이미 오래인지라 이 새로운 세대에게는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너무나 자연스럽고 호흡하기에 편안한 그런 새 찬양들이 이들의 예배를 가득 채우고 있다. 힐송, 호산나, 패션 등등의 외국의 찬양음악들이 나오기가 무섭게 우리말로 번역되어서 음반과 악보로 시장에 등장하고 곧바로 교회의 예배음악에도 진입해 오는 시대이다.


그 래서인가? ‘오 신실하신 주 내 아버지여… 나 같은 죄인 살리신…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오 놀라운 구세주 내 주 예수… 선한 목자 되신 우리 주여…’ 같은 찬송가들이 완전히 잊혀지는 일을 예감하는 것은 매우 두렵다. 우리 속담에 있는 말이던가? ‘목욕물을 버리려다가 아이까지 버리는’ 일이 나타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본인도 이미 기성세대에 진입하기 시작한다는 그런 징조로 여겨야 하는 것일까?


우 리가 잘 알다시피, 현재 한국교회에서 사용하는 558곡의 찬송가에는 수준이 좀 떨어지는 그런 찬송가들도 꽤 있다. 그래서인지 새롭게 준비되는 찬송가에는 대대적인 찬송가의 개편이 있을 거라는 소식이 들려온다. 그런데 ‘21세기 찬송가’를 찬송가편찬위원회에서 준비하기 시작한다는 이야기는 이미 오래된 이야기인데 20세기가 훌쩍 지나버린 지금에도 이 새로운 찬송가는 나올 줄을 모른다. 출판에 관한 독점권으로 인한 정치적인 입김이 세서라고는 하는데… 하여간 걱정이다. 어쨌거나 이 찬송가… 그 안에는 1800년대 말의 부흥집회에서 사용된 전형적인 미국식 찬송들도 많지만 교회사의 보석처럼 빛나는 간증과 역사를 가진 그런 고결한 찬양들도 수없이 존재한다. 초대교회의 교부들이 작사한 시적인 찬양의 가사들과 함께 아름다운 멜로디들로 끝없는 영성의 신선한 자극을 제공하는 그런 아름다운 찬양들이 있다. 이런 찬양들은 포기하면 안 될 것이다. 모든 새로운 것이 모두 탁월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Chris Tomlin이라는 걸출한 예배자가 후렴만 따로 만들어서 편곡한 The Wonderful Cross라는 찬양이 여전히 이 새로운 세대에게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은 큰 증거가 아닐까?


The Wonderful Cross (Chris Tomlin 편곡)


When I survey the wondrous cross


On which the Prince of Glory died


My richest gain I count but loss


And pour contempt on all my pride


See from his head, his hands, his feet


Sorrow and love flow mingled down


Did ever such love and sorrow meet


Or thorns compose so rich a crown


“O the wonderful cross, O the wonderful cross


Bids me come and die and find that I may truly live


O the wonderful cross, O the wonderful c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