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혜진]What Do You Want from Me, Lord?

이코스타 2006년 11월호

유학생으로 미국 땅을 밟고 지낸 7년, 그리고 직장인으로 2년 남짓 보낸 시간 동안 하나님께서는 나와 내 가정에게 참으로 많은 축복을 내려주셨다. 무엇보다 하나님 안에서 꿈꾸는 법을 가르쳐 주셨고, 또 그 비전을 붙잡고 기도하게 하셨다. 나의 내딛는 한발 한발을 주의 친절한 팔로 이끄신 곳은 이 곳, 테네시 주립 대학이다.


처음 교수라는 직분으로 이 곳에 왔을 때, 나는 온통 기쁨과 감사,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 쓰임받겠다는 열망으로 가득차 있었다. 코스타에서 뵈었던 교수님들의 모습, 캠퍼스에서 제자 삶기에 열심이셨던 그 분들의 모습이 떠올랐고, 나도 그렇게 되리라 기대하고 기도했었다. 그러나, 현실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다른 방법으로 또 나를 다지시길 원하셨다.


교수로서 일을 시작하며 가장 큰 문제는 내가 가르치는 학부 학생들, 주로 미국인 학생들과의 관계였다. 젊은 동양인 여교수가 수업을 가르칠 때 반응은 두가지였다. 호의 아니면 무시.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나 자신이었다. 서툰 영어라도 나올 때면 의례 주늑이 든 나 자신이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일 때가 더 많았다. 학생들 눈빛 하나 하나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고, 한 번씩 무례한 행동을 하는 학생에 대해서는 며칠을 끙끙 앓아대며 내심 ‘어떻게 혼내줄까’ 궁리를 하고 있었다. 교회 기도 모임에 가면 기도 제목은 늘 똑같았다. “실력있는 교수가 되어서 teaching 에 자신감을 갖게 해주세요.” 그러나, 수업과 학생들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하나님, 여기까지 보내셨을 때는 능력과 지혜도 함께 주셨어야죠.” 어느새 내 기도 속에 불만이 베어나오기 시작했다. 이번 학기, 여전히 실력과 지혜를 달라고 기도를 하는 중, 성령께서 문득 ‘이건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가 아니다’ 라는 생각을 주셨다. 그리고, 하나님께 물었다. 하나님이 주신 대답은 간단했다. “사랑하라.” 하나님께서는 내가 실력있는 교수가 되기 보다 먼저 학생들을 사랑하는 교수가 되길 원하셨다. 그 후로, 수업 시간에는 학생들의 반응이 아니라, 이 수업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수업인가에 촛점을 맞추었고, 행여나 아쉬운 소리를 해야하는 학생이 생기면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도록 기도했다. 나의 기도는 ‘실력과 지혜’가 아닌 학생들과의 relationship building 로 바뀌었다..


그렇게 얼마가 흐른 후, 하나님께서는 ‘통하는’ 길을 보여주셨다. 수업 중 학생들의 반응에 가슴 졸이는 것에서 해방되었고, 학생들이 내게 마음을 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떤 학생은 ‘당신이 얼마나 이 수업을 위해 애쓰는지 알고 있습니다. 힘내세요.’ 라는 이메일을 보내주었고, 수업에서 늘 불만을 얘기하던 한 인도 여학생은 인도 학생회에서 주최하는 행사에 초대해 주기도 하였다.


연말이 되면 꼭 학생들에게 주는 숙제가 있다. Vision Project. 그 과제를 통해 나는 학생들이 미래를 좀 더 체계적으로 준비하고 그리기를 원한다. 그러나, 또한 이 과제를 주며 나는 학생들에게 하나님에 대해 얘기하기를 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신 분이라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목적’을 가지고 우리를 만드셨다는 것, 그리고 그 목적을 찾아 이루어가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를 원한다. 실제로, 지난 해 이 과제를 제출한 학생들 중에는 그들의 인생 계획 중 ‘mission’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얼마나 반가웠던지… 나의 사역의 방향을 ‘한국인’에게 너무나 고정시켜 놓았었다면, 하나님께서는 내가 서 있는 이 미국 땅에서 외국인들에 대해 마음을 쏟게 하신다. 나의 하루 24시간 중 삼분의 일을 함께 하는 이 학생들에게는, 왜 내 마음이 그토록 강팍하였을까? 이제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과 relationship을 쌓고, 또 그들과 하나님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선생이 되기를 기도한다. 좋으신 선생님이었던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신선묵]영적 지도자의 가정(Family)

지난 주에 운전 중에 복음방송을 듣다가 많은 선교사들을 후원하는 사역을 하시는 분이 나오셔서 한 분의 선교사님과 나눈 대화의 내용을 들었다. 선교사님이 사역이 크게 성장하지 못하여 좌절감에 빠져 있는데 라디오에 나온 그 분이 그 선교사님과 대화를 나누던 중에 ‘선교사님은 선교 사역에 실패한 분이 아닙니다’라고 말하면서 ‘왜냐하면 선교사님이 사모님과 좋은 부부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고 말씀드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가장 어렵고 가장 중요한 사역인 가정 사역을 성공하였다는 것이다. 우리의 사역은 그리고 우리의 선교는 우리의 가정에서 시작한다. 그러므로 가정 사역이 중요하다.


영적인 지도자가 건강한 가정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풀러 신학교의 클린톤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지도자들이 잘 마치지 못하고 중도에 탈락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들을 살펴보면 많은 것이 지도자의 가정에 관련된 이슈라는 것이다. 치유되지 않고 용서되지 않는 상처, 가정의 경제 문제, 건강하지 않은 성관계, 부모의 권위주의, 자녀 문제 등의 이유로 인하여 많은 지도자들이 중도에 하차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적 지도자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역은 건강한 가정을 만드는 것이다.


건강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서 우리가 가정을 통하여서 채우고 살아갈 기본적인 필요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대체적으로 네 가지 필요들을 가지고 있는데 이런 것들이 가정 속에서 건강하게 채워지는 것이 중요하다. 첫째는 정서적인 필요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의 말을 들어주고 동감해주고 함께 희로애락을 가치할 동료가 필요하다. 힘들 때에 위로가 되어주고 자신의 느낌을 말하고 그것들이 정죄되지 않고 받아들여지는 필요를 가지고 있다. 주로 여성들이 많은 정서적인 필요를 가지고 있지만 남자의 경우도 나이가 많아짐에 따라 정서적인 요구가 많이 생기는 경향이 있다. 둘째는 경제적인 필요이다. 우리가 생활하기 위하여 기본적인 경제적 필요를 가지고 있다. 기본적인 의식주의 필요를 건강하게 채우고 사치는 아니더라도 휴가와 여행을 할 수 있는 여유와 취미생활 등을 하기 위한 경제적인 필요를 가지고 있다. 전통적으로는 남성들이 이 분야를 감당했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점점 더 경제적인 요구가 커감에 따라서 부부가 함께 경제적인 요구를 위하여 일하는 경향이 생기고 있다. 셋째는 육체적인 필요가 있다. 집안 청소, 빨래, 밥하기, 설거지 하기, 애들 돌보기 등등의 많은 일거리를 감당하는 것이다. 전통적으로는 여성의 일로 여겨졌으나 오늘날 경제적인 필요를 위하여 함께 일하면서 남성도 함께 이 일들을 나누어 하고 있는 경향이 많다. 육체적인 필요에는 이외에도 사랑스러운 접촉과 성적인 필요 등을 가지고 있다. 넷째로 전략적인 필요가 있다. 사람이 살면서 무엇인가 가치있는 일을 하고 싶은 욕구가 있고 하는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또 장기적인 자아 실현과 자아 발전을 위하여 관심을 갖는 것이다. 이 분야 역시 전통적으로는 남성들에게 해당되는 것이었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여성들도 자신의 삶에 전략적인 측면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건강한 가정을 만들어 가지 위해서는 서로에게 이런 필요들이 있음을 인정하고 그것들을 채워주기 위한 배려와 관심이 필요하다. 이 모든 것은 완벽하게 갖추고 살아가기는 힘들겠지만 자신의 필요들이 얼마나 채워지고 있는지 또 배우자의 필요가 어떤 부분에서 절실하며 또 얼마만큼 채워지고 있는지를 관찰하고 채워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물론 앞에서 말한 네 가지 필요들이 모든 필요를 완전하게 포함하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우리가 가지고있는 기본적인 필요를 이해하는 좋은 출발점이 될 것이다.


가정 사역을 위하여 가장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는 가정 사역에 우선 순위를 두고 이를 위하여 실제적으로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다. 나는 상담 전문가 쟈수아 박 교수님과 가끔씩 만나서 교제의 시간을 갖고 있다. 가끔 만나서 시간을 갖지만 만날 때마다 상담 전문가여서인지 마음이 편하게 느껴지고 그래서 많은 대화를 나눈다. 얼마 전에 만나서도 부부간의 대화의 중요성과 방법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부부간의 관계를 위하여 실제적인 도움이 되는 내용들도 많이 배웠다. 여러가지 좋은 대화를 많이 나누었지만 그 중에서 “부부간에 구별된 시간을 가져라. 하나님께 주일날 예배를 정해놓고 드리지 않냐? 학교에서도 정기적으로 회의를 하지않느냐? 부부간에도 친밀감을 위하여 정해진 시간을 드려라. 정기적으로 헌신된 시간을 통하여 대화를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 문제가 생겨서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문제가 생기기 전에 헌신된 시간을 통하여 대화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라는 말씀을 들었다. “결혼하기 전에는 서로의 기쁨을 위하여 데이트를 많이 하면서도 결혼하고 나서는 실제적으로 상대방과 함께 기쁨의 시간을 갖지 못하고 살아간다. 그러므로 부부도 데이트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 가정마다 다른 상황과 환경 속에 있기에 어떤 시간과 방식을 율법적으로 강요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서로를 위하여 헌신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 주위에 가정 사역을 위한 좋은 책들과 세미나들이 많이 있다. 남녀의 차이를 이해하고 개성의 차이를 이해하고 어떻게 우리의 가정을 이루어 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좋은 자료들이 많이 있다. 또한 가정을 건강하게 세우는데 헌신된 사역과 상담가들도 많이 있다.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시간과 노력을 들일 때에 가장 힘들지만 가장 중요한 사역의 출발인 가정 사역에 좋은 결실을 맺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가정을 건강하게 세우고 그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정을 통하여 우리 교회와 사회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역을 이루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 신앙과 지성, 그리고 학문하는 삶 1-장성준

이 글은 2006년 미주 코스타 장성준 교수의 ‘기독교 지성’ 세미나를 녹취한 것입니다.



장성준 교수: 미국 올바니 뉴욕주립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오하이오 주립대학교에서 가르쳤으며, 현재 루이지애나 주립대학교의 사회학과 부교수로 있다. 지금까지 25여편의 논문을 미국사회학, 범죄학, 사회복지학, 그리고 심리학 학술지에 발표하였으며, 현재 미국전역의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영성(spirituality)과 영적변화(spiritual transformation)에 관한 사회학적 연구를 하고 있다. 또한 미국 대학생선교회 (Campus Crusade for Christ)의 Christian Leadership Ministries로 부터 2002년도 Erick Nilson Achievement Award and Grant를 수상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과 doubt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을 하다보면 의심이 들 때가 있죠. 우리가 진실하게 믿고 있는 기독교 신앙의 문제와 지성적인 문제, 과학적인 문제와 갈등이 생기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그 두 개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가 한국 전쟁을 겪으셨기 때문에 공산주의에 대해서 치를 떠셨는데, 공산주의의 근원인 칼 막스의 말 중에서 전적으로 동의한 것이 있었는데 종교는 아편이다는 것이었어요. 니체 같은 허무주의 철학자는 기독교는 노예의 근성을 양육하는 종교다, 기독교에 대한 비관적인 이야기를 했어요. 그리고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생물시간에 배운 진화론에 관한 것, 그래서 전도할 때 내가 학교에서 과학시간에 배우니까 우리 인간의 근원이 싱글 셀 아메바이고 그것이 진화되어서 그렇고 과학적인 증거를 보여주는데,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만들었다는데 과학적인 증거가 있냐, 거기에 대해서 저에게 속시원하게 대답해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럴 때 제가 주로 듣는 대답은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위해서 특별한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요한 복음 3장 16절을 말합니다. 그러면 저는 속으로 미쳤군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제가 질문한 것에 대답하지 않고 전혀 다른 문제에 대해 대답하는 것이에요. 저는 원래 종교적인 분위기에서 자라지 않았고 기독교를 참 싫어했어요. 제가 기독교에 대해 갖는 첫번째 인상이 너무 반지성적이다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원래 불교 신자가 되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 순간에 전도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한참 전도의 실강이를 하다가 그분이 저에게 너 성경책 읽어본 적 있냐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기드온 성경책을 받았는데 읽어본 적이 없었어요. 그분의 지성적인 도전을 받으니까 한번도 읽어본 적도 없는 기독교에 대해서 비판하는 것은 너무 비지성적인 것이잖아요? 그래서 성경을 읽고 성경이 뭐 잘못되었나 알려줄까 했는데,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을 만났어요. 기독교에 대한 선입견, 반지성적이고 이성을 억제하고 맹목적인 믿음을 강조한다는 그런 인상과는 너무나 달리 성경을 읽어보니 성경 속에 있는 하나님이 너무나 지성적인 하나님이라는 것을 발견했어요. 성경이 너무나 논리적이다 라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궁극적으로 성령님이 도움을 주셔서 제가 예수님을 81년에 영접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여러 가지 측면을 얘기하는데, 하나님의 지성적인 측면에 대해서 얘기를 잘 못 들어요.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이 세상에서 가장 아이큐가 높았던 사람이 누구일 것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라고 생각합니다. 진로를 위해서, 재정적인 문제로, 가정 문제로 기도를 많이 하죠. 그런데 공부하는 과정에서 데이터 분석이 안 되서 막혔을 때 예수님에게 기도 하세요? 예수님이 땅 위에 계셨던 분 중에 가장 Intelligent한 분이에요. 우리가 그런 이미지를 안 갖고 있어요. 이것은 USC에 계시는 철학 교수인 달라스 윌라드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예수님에 대해서 생각을 안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과 지성을 직접적으로 연결시키지 않아요. 그것은 우리가 지성이 없는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강해를 할 때 속이 시원합니다. 왜냐면 우리가 갖고 있는 지성적인 필요를 만족시키는 모습으로 성경의 메시지가 와 닿기 때문에 아 그 참 이해가 된다, 왜 인간이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이 말이 된다, 이런 지성적인 필요가 채워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성이 전혀 없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닌 데 성경을 뛰어넘어서 지적인 문제를 고민할 때는 성경과 연결시키는 훈련이 전혀 안 되어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서 참 약합니다. 헌신과 열심에 대해서는 참 훈련이 잘 되어 있어요. 한국의 새벽기도 같은 것 얘기하면 다 놀라잖아요? 한국교회는 모이기에 힘쓰고 그런 노력이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지성적인 측면이 그만큼 강화되어야 합니다.


지성이란 무엇입니까? 그리고 기독교 신앙이란 무엇입니다. 개념을 정리해야겠습니다. 지성은 사물을 판단하고 논리를 사용해서 분석하고 비판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고 기독교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의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삶의 모든 영역에서 표현하며 사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삶의 모든 영역을 말합니다. 교회 사역뿐 말고도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 가족, 결혼, 진로, 성, 취미, 오락, 돈, 건강, 언어, 옷차림 기타 등등 모든 영역을 말합니다. 기독교라고 하는 신앙은 전인격적인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독교인이 된 다음에는 우리의 삶 어느 부분도 성경과 상관이 없는 영역이 없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어떤 오락을 하는가 하는 것도 성경적인 관점에서 다시 생각하셔야 해요.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 있고 봐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돈을 쓸 수 있는 데가 있고 돈을 써서는 안 되는 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을 우리의 삶에 모든 영역과 관련되어 있어요. 그것이 안 될 때 우리의 신앙이 분리, 분절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느 한 부분에 제한돼요. 예수를 안 믿는 사람 중, 예수 믿는 사람들 사는 것을 보니까 하나님이 없는 것 같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지요. 이 부분이 안되기 때문에 그래요. 교회에 열심히 봉사하기 위해서 자식들을 제대로 키우지 않아서 자식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을 거야 한다면 하나님께 영광이 안되죠. 그래서 이런 다양한 내용을 세미나에서 들어야 해요. 자녀교육의 원리가 무엇이고 행복한 부부관계의 원리가 무엇인가 배워야 합니다. 인격적인 관계는 무엇입니까? 인격체로서의 인간을 말할 때 세 가지 속성을 이야기합니다. 지, 정, 의입니다. 이것을 갖고 있는 인격체입니다. 지는 논리적인 합리적인 사고의 능력, 비판하고 분석하는 것. 정은 여러 가지 감정적인 측면, 기쁨, 슬픔, 분노, 좌절감, 연민. 의는 우리의 의지의 부분입니다. 뭔가를 결정하고 의지력을 갖고 본능적으로 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해 나가는 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동물들은 어때요? 동물들은 인격체가 아닙니다. 동물이 감정도 있는 것 같고 아이큐도 있는 것 같고 심지어 의지가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동물은 인격체는 아닙니다. 동물은 본능이라는 메커니즘에서 내부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메커니즘입니다. 이런 것을 응용해서 심리학에서 Stimulus-Response system 학습이론을 말했죠. Learning Theory를 어린이를 주면 사회화 과정을 통해서 과학자, 의학자, 교사 등을 만들 수 있다고 과감하게 말한 적도 있었죠. 인간을 기본적으로 동물로 보았습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동물과 인간을 혼동하면 안 됩니다. 동물의 권리를 강하게 말하는 사람들이 동물 연구를 하는 연구를 파괴하는 등의 접근을 하는데요, 그 사람들의 믿음은 인간과 동물은 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전제합니다. 인간은 좀더 진화한 것이지 진화해오는 동물들을 잘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지 동물을 실험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관점과는 다릅니다. 성경에서는 인간만을 인격체라고 얘기합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이 인간을 자기의 형상대로 만든 것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인간처럼 생겼다고 하는 것은 아니죠. 하나님이 인격적인 하나님이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감정의 하나님,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모든 환난에 동참하셨다. 하나님께서 distressed되셨다. 감정적으로 속상하셨다는 말이에요. 성령을 근심케 하는 것.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든지. 성령님이 feel grieved하는 경우. 의지의 하나님은 어때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죽도록 내버려두셨을 때 하나님의 마음이 어땠을 것 같애요. 하나님은 무지 괴로웠을 거에요.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를 어떻게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같은 정도의 괴로움이에요.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니까 세 분 모두 그것을 느꼈을 거에요. 끝까지 죽도록 내버려두셨어요. 쉽지 않은 의지적인 결정이에요. 여러분들 특히 자녀가 있는 분들은 상상도 못할 일이에요. 하나님이 의지를 갖고 하셨던 일입니다. 괴로웠지만 올바를 일을 위해서 우리 인간을 위해서 의지로 밀어붙이신 거에요. 우리 하나님은 의지의 하나님입니다. 지성의 하나님입니다. 잠언에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 믿음과 지식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지식이 없는 소원은, 열심이라는 의미 Zeal이라는 단어인데요, 선하지 않다고 합니다. 교회에서 종종 봅니다. 열심이 많은데 성경에 대해서 무식해서 교회 안에서 여러 사람을 상처 주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기 위해서 방언을 주셨는데, 방언 받은 후에 자신이 흡사 예수님인 것처럼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하나님에 대한 열심은 있는데, 그 열심과 파워를 인도하는 가이드 라인이 올바르게 정리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예배하려면 영과 진리 가운데서 해야 합니다. 열심만 갖고 하는 예배는 성경적인 예배가 아니에요. ‘신령과 진정으로’ 진리로 성경을 바탕으로 한 예배가 진정한 예배가 되는 겁니다. 내가 내키는 대로 하는 예배는 잘못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우리 인간은 하늘에 나는 새보다 훨씬 중요하다. 인간보다 중요하지 않은 새도 하나님께서 보살피신다. 새보다 훨씬 중요한 인간을 하나님께서는 보살피신다는 말입니다. 논리적이시죠. 예수님께서 신앙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는 논리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올바로 사물을 분변하고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라는 것입니다. 지성적인 하나님께서 우리가 지성적인 신앙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지성적인 신앙이라는 것은 신앙과 우리가 인격체로서 갖는 지성을 잘 조화시킨 그런 모습을 말합니다.


히브리서는 믿음으로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지어짐을 아나니, 믿음이 전제로서 나오고 어떤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의 비유인데 I believe that I may understand라는 말을 했습니다.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 믿음 위에 올바른 지식체계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성경적인 시각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궁극적인 최고의 현실이라고 믿는 믿음을 바탕으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하는 설명하려고 하는 그런 체계에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이 세상에 대한 믿음의 모든 바탕이 됩니다.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이 다 하나님과 관련이 됩니다. 그게 잘 안되면 교회는 나가는데 기독교인답지 않은 신앙생활 혹은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비기독교인들은 최고의 현실에 대해서 하나님 대신 다른 것으로 대체시키고 그것을 바탕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서 모더니즘에서는 ultimate reality는 자연세계의 물질이 궁극적인 것이 되요. 자연주의 세계관에 의하면 물질만이 진짜입니다. 그래서 physical world을 뛰어 넘는 형이상학은 자연주의 세계관에서 볼 때 사실 헛소리에요. 왜냐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인데 그것이 진짜인 것처럼 이야기하니까 헛소리죠. 자연주의에서는 물질만이 현실이고 나머지는 만들어낸 이야기에요. 프로이드는 종교를 정신병이라고 그랬죠. 자연주의 세계관 안에서는 너무나 맞는 얘기에요. 그에게는 물질세계만이 진짜고 이외의 것은 인간이 필요에 의해서 만든 거에요. 종교, 하나님이 그런거에요. 하나님은 material이 아니잖아요. Material이 아니면 다 illusion이에요. 물질이 아닌 하나님을 보고 그분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구원 하신다 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거에요. 그 사람들이 보기에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다 불쌍한 사람이에요. To see is to believe. 일반적으로는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 볼 수 있는 것만을 현실로 믿는다. 예수님을 전도할 때 자주 받는 도전이 뭡니까? 네가 하나님을 보여주면 내가 믿을께. 왜요? 여러분의 친구들이 자연주의적 성향에서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포스트 모던이즘은 어떻습니까? 극단의 주관주의입니다. 극단적 주관성이란 subjectivism, anti-realism이라고도 합니다. 뭐가 현실이고 뭐가 실제 존재하는가 하는 것을 부정하고 내가 무엇을 믿느냐 하는 것이 곧 현실이다라는 것이에요. Social construction of reality 많이 들어봤죠? social에는 culture 뿐 아니라 individual perception도 들어갑니다. 내가 믿고 내가 경험하고 진짜라고 믿으면 그게 진리가 되는 겁니다. 여기서 포인트는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 무엇이 궁극적인 현실로서 받아들여지고 그것을 기초로 이 세상을 설명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기독교를 이해할 때 세계관으로서의 기독교를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계에 대한 관점입니다. 세상을 보고 세상을 이해하고 세상을 분석하고 세상의 여러가지 문제에 대해서 해결책을 제시하는 모든 근거가 되는 것이 세계관입니다. 그래서 철학이죠. 일종의 가정입니다. Assumption, presupposition이라고도 합니다. Empirical fact가 아니고 이렇다고 믿는다고 시작하는 부분이 세계관의 부분입니다. 일종의 믿음이에요. 세 개의 중요한 세계관이 있습니다.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같은 유일신을 믿는 세계관이 있고, 자연주의 철학, 물질주의, 무신론 등이 있죠. Pantheism 다신주의가 있습니다. 우주의 궁극적인 현실이 영이다. 힌두교, 불교, 도교, 뉴에이지 이런 것들이죠. Theism, naturalism, pantheism이 다른 것은 무엇이 궁극적인 것이 다른 거에요. 기독교만이 믿음 체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세계관이 믿음인 만큼 비기독교 세계관도 믿음이에요. 믿음 대 믿음이란 말이죠. 세계관의 충돌, 세계관의 갈등이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다른 세계관으로부터 출발해서 세계를 이해하고 무엇이 문제인지 얘기하면 서로 다른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죠. 예수님은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고 좋은 열매가 나쁜 열매에서 맺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어요. 우리가 크리스챤이면 우리의 열매가 크리스챤 다운 열매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열매가 탐스럽지 않으면 우리의 뿌리가 근원이 연약하지 않다는 말이에요.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하고 하나님을 대언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계관의 충돌의 현실 속에서 매우 준비가 안 되어 있다는 것을 느껴요. 지성적인 이슈가 대두되었을 때 우리가 어떻게 대답을 하고 처리를 해야 하는지 우리가 마음에 불안한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변증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훈련 중에 하나인데, 일반적인 교회를 볼 때 이 부분이 훈련이 안되어 있어요. 우리가 기도훈련 많이 받고 성경 그 자체를 공부하는 훈련 많이 받는데, 그런 기본적인 훈련을 바탕으로 해서 어떻게 기독교의 진리를 변호하고 그것을 우리가 하는 삶의 모든 영역, 지성의 부분에 특히 어떻게 연결해야 하는지 교회에서 많이 못 배웁니다. 앞으로 한국교회가 그 부분에 대해서 적극성을 띄었으면 좋겠어요. 교회에서 주일학교에서 가르칠 때에도 왜 성경이 진리냐, 왜 기독교가 진리냐 하는 질문에 대해서 because Bible says so라고 말합니다. 우리끼리는 괜찮아요. 그러나 밖에 나가면 그게 안됩니다. 안 믿는 사람에게 그렇게 말하면 그것은 전혀 틀린 얘기에요. 우리가 그런 부분이 약해요. 우리의 신앙과 지성과의 관계를 정리할 기회가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세미나를 뜨거운 마음으로 준비한 거죠.


베드로 전서 3장 15절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라, answer, defense, apologia라는 말을 번역한 것인데요. apologetics라고 하는 것입니다. 변명이라는 말로 번역되기도 했습니다. 같은 의미입니다. 말로서 defend하는 것입니다. 변명이 아니고 변론, 변증인데요. 어떤 사실을 논리적으로 defend하는 것입니다. 논문 defense하죠. 교수님들이 이것은 이런 거고 저것은 저런 거고 하면서 하나씩 defend해야 도장을 찍어주잖아요. 우리 신앙에도 똑 같은 부분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고 사도 베드로가 얘기하고 있어요. 항상 예비하라고 합니다. 평소 실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준비를 해야 해요. Worldview missionary라는 말을 쉐퍼 박사는 말합니다. 기독교 세계관이 준비가 안되어 있기 때문에 복음증거에 실패를 경험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 그 자체를 공부 많이 했는데 성경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잘 안돼요.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변증을 할 때 온유와 두려움으로 해야 합니다. 상대방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아무리 속으로는 화가 나도 웃으면서 인내심을 갖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변증은 논쟁이 아닙니다. 전도하면서 논쟁이 되어서 마지막에 Go to hell이렇게 말하면 이것은 변증이 아니라 싸움이에요. 우리가 논리적으로 모든 것을 상대방을 설복해도 상대방이 하나님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완전히 논리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맞아도 예수님이 싫으면 싫은 거에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절대 논쟁을 해서 안됩니다. 그것은 복음전도도 아니고 체력낭비에요. 오히려 예수님으로부터 한 걸음 멀리하게 하는 노력입니다. 변증의 핵심은 관계입니다. 관계 위에 그 대화가 건설되지 않으면 아무런 영향력을 못줘요. 그래서 기독교 변증을 할 때에도 단순히 지식적이고 사실적인 내용을 갖고 상대방을 논리로 이기려고 하는 것이 변증이 아닙니다. 상대방이 알 수 있도록 최대한 얘기를 해서 지성적인 갈등이 생기도록 하면 그것은 끝나는 것입니다. 그 갈등 때문에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은 하나님에게 달려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변증의 원리로서 두 가지의 핵심적인 내용을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한 얘기인데요. 어떤 전제, 가정, 의견이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도 올바른 결론을 내리기 위해서 저쪽이나 이쪽이나 동의해야만 하는 공통부분 common denomination입니다. 전도가 싸움이 되는 이유가 우리가 공동으로 동의할 수 있는 원리바깥에서 이야기를 하니까 전도가 나중에 감정이 상하면 누구 목소리가 크냐가 되는 것이죠. 누가 마지막에 얘기를 하느냐 하는 문제가 되죠.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내 상대방도 동의해야 하기 때문에 그 원리를 바탕으로 해서 하나하나씩 풀어나가면 우리가 도전 받는 질문을 지성적으로 잘 대답할 수 있습니다. 첫번째 principle로 logic을 이야기 합니다. Law of noncontradiction입니다. 두 가지의 정반대의 생각이 동시에 진리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 사진에 기둥이 몇 개있어요? 두 개 혹은 세 개, 위를 보면 두 개 아래를 보면 세 개이고. 이것을 보면서 기둥이 두 개이기도 하고 세 개이기도 하다고 말할 수 있어요? 이것을 illusion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reality가 아니에요. 여러분들이 그림에서 본 것을 기초로 내일까지 실제로 만들어오면 제가 백만불 드릴께요. 미술 전람회에 포스트모던 sculpture이라고 해서 공중에 떠있는 기둥을 만들어서 세워 놓았더라구요. 자연의 만유인력의 법칙을 벗어나서 기둥이 공중에 떠있어요. 근데 위에 줄로 매달아 놓았더라고요. 포스트 모던의 주장이 현실적이라면 그 기둥이 줄없이 공중에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죠. Interesting thought 재미있는 발상이고 예술가로서 한번 장난해볼 수 있는 것인데, 현실은 아니라는 거에요. 이것을 보면서 어떤 하나의 물체가 두 개가 되고 세 개도 되지 않느냐 하는 것은 허상을 보면서 하는 얘기이고 우리가 관심 있는 것은 뭐가 현실이냐 뭐가 진리이냐하는 것이잖아요. 이것은 진실이 아니에요. Reality가 아니에요. 이 세상에는 진리라는 것은 없다. 다시 말해 절대 진리는 없다, 모든 진리는 상대적이다 이런 말을 많이 듣죠. 성경은 하나님의 절대 진리입니다. 이 세상에 절대 진리가 어디있냐? 진리는 다 상대적이고 개인적인 거야. 그게 너에게는 진리일지는 모르지만 나에게는 아닐 수 있어. 이렇게 말하죠. 그러면 어떻게 말합니까? 그러면 지옥에나 가라 하고 집으로 가요? 어떻게 해야 해요? 이 주장이 논리적인 주장이냐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해요. 진리에 대해서 우리가 얘기할 수 있는 ultimate statement가 있습니다. 모든 시각은 다 진리가 아니다. 이런 주장이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나요? 상대방에서 trying to have it in both way를 말할 때 이것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이 명제는 논리적으로 틀린 얘기에요. 모든 시각이 진리가 아니라면 지금 말하고 있는 이 문장은 진리입니까 진리가 아닙니까. 진리가 아니죠. Self-defeating statement 한국말로는 누워서 침뱉기가 되겠죠. 뭔가 심각하고 의미가 있는 얘기를 한 것같은데, 결국 그 얘기가 자기 자신을 defeat하는 얘기에요. 논리적으로 틀린 얘기에요. All views are true라는 명제는 어떻습니까? 어떤 것을 보고 상반되게 판단하는 시각이 동시에 진리일 수는 없죠. 이것은 어린 아이들도 알 수 있는 얘기입니다. 다음에 시각은 다르다. 이것은 일단 말이 됩니다. 그 다른 시각과 문화와 도덕들이 동등하게 다 진리이다 하고 합니다. 그럴 수가 없죠. 예를 들어보면 식인종의 식습관과 우리 다른 사람들의 식습관이 둘 다 진리입니까? 둘 다 동등하게 morally right입니까? 그럴 수 없죠. 문화가 다른 것은 분명해요. 그러나 다른 문화가 동등하게 진리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지적으로 무책임한 얘기입니다. 또는 굉장히 나태한 것입니다. 소위 관용주의라는 것입니다. 다음에 어떤 관점들은 다른 관점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관점이 다른 것보다 낫다는 것은 어떤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그 기준을 갖고 잣대를 갖고 길다 짧다라고 얘기할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이 논리적으로 맞는 얘기입니다. 무엇을 근거로 어떤 생각이 더 낫다는 것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이 논리라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실증적인 자료입니다. 그리고 실증적인 자료와 관련해서 과학에 관한 것입니다. causality라는 principle이고 다른 하나는 analogy principle이라는 것입니다. 유한한 존재는 존재하기 시작하는 시점이 있고 어느 시점부터 존재하기 시작하는 유한한 존재는 그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cause가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 인간이 유한한 존재에요. 왜냐면 우리는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어때요?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계시는 하나님, 알파요 오메가이신 하나님, 하나님의 영원성을 말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기 때문에, 존재하기 시작하신 시점이 없기 때문에 cause가 필요없어요. 하나님은 계신거에요. Analogy에 관한 것은 제가 예를 들어 설명하면 CSI를 많이 보시죠? CSI의 법의학을 보면 이런 원리입니다. 범죄 현장에 가서 여러 가지 상태를 조사하지 않습니까? 사진도 찍고 피가 있는 패턴도 보고 방향과 보고요. 구체적으로 어느 각도에서 어떻게 이 희생자를 때렸고 어떤 도구로 때렸고 하는 것들을 찾아내지 않습니까? 과거에 일시적으로 있었던 범죄의 현상을 시간이 지나서 데이터를 놓고서 다시 스토리를 만드는 거에요. 그 스토리를 만드는 거의 기본적인 원리가 principle of analogy에요. 과거에 일어날 수 있었던 현상들의 원리와 현재 일어날 수 있는 현상들의 원리와 일관성이 있다는 얘기에요. 만약에 어떤 물건을 위로 던져서 그것이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과거의 어떤 현상이었다면 그것이 오늘날도 똑 같은 현상으로 나올 때 그 결과가 비롯되어 지는 원리가 동일한 원리에서 과거나 현재나 그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에요.


과학의 가장 중요한 법칙이 열역학 제2법칙이라고 합니다. Second law of thermodynamics입니다. 열역학 제2법칙은 usable energy가 running out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부딪치는 우주와 생명의 근원에 관한 문제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자연주의 과학처럼 우주가 무한한 것인가. Natural world is from everlasting to everlasting이에요. 사람들이 그렇게 주장했는데, 그것이 과학적으로 사실이냐 하는 것이에요. 세 가지 중요한 과학적 자료가 그렇지 아니다라는 결론을 제시합니다. 첫번째 세계에 있는 usable한 에너지가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는 것이 제2열역학 법칙인데요, 그것이 과학의 법칙 중에서 최고의 법칙입니다. 이것을 위반하는 이론은 틀린 이론입니다. 그래서 열역학 제2법칙은 first principle에 가장 가까운 원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이 있거나 없거나 상관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법칙입니다. 무슨 얘기를 하더라도 열역학 제2법칙에 어긋나는 얘기를 하면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틀린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열역학 제2법칙에 의하면 usable energy가 계속해서 감소되고 그것과 반대로 entropy는 계속 증가합니다. 이 현상이 계속 진행되면 결과적으로 이 우주가 커다란 머신이 연료가 다 떨어져서 스탑하는 것처럼 정지하는 순간이 오게 됩니다. 만약에 우주가 자연주의 과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가는 것이면 열역학 제2법칙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에너지가 running down하면 안됩니다.


두번째는 천문학자들이 우주를 관찰하니까 우주가 fixed되어 있지 않고 팽창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의 원리에 의해서 그것이 과학적으로 검증된 관찰로서 확인이 되었습니다. 우주가 계속해서 사방으로, 모든 방향으로 팽창하고 있는 것은 시간을 거꾸로 되돌리면 어느 한 시점에는 우주가 존재하기 시작하는 순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causality원리에서 anything that has beginning point is finite라고 했죠. 영원한 존재는 출발점과 끝나는 점이 없지요. 천문학적인 관찰을 통해서 보니까 이 우주가 어느 한 시점에서 출발을 해서 계속 팽창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이 과학적인 발견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어요. 아인슈타인은 크리스챤은 아니었어요. 그분은 theist, 유신론자였어요.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들어놓고 세상이 나름대로 돌아갈 수 있도록 내버려둔 그런 신에 대한 관념을 갖고 있었어요. 자기 자신의 이론을 바탕으로 이 우주가, 이 자연세계가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있었다는 것을 뒤집는 과학적 이론을 제시하게 되니까 혼란스러운 것이죠. 관찰과 상대성 이론이 정확하게 들어맞으니까요.


또 한 가지는 인공위성이 우주 전체의 size에 해당하는 background radiation의 사진을 찍었어요. 이 발견을 갖고 20세기의 가장 큰 과학적 발견이다 라고 얘기할 정도로 굉장히 중요한 발견이었어요. 요새는 브라운관 티비 별로 없지요. 깜깜한 밤에서 보다가 끄면 화면이 환하게 잠깐 있다가 없어집니다. 그것이 radiation echo인데요, 어떤 파워가 있다가 그 파원의 잔상으로서 radiation echo가 생기는 것인데, 우주 전체의 사이즈와 동일한 규모의 radiation echo가 발견된 것입니다. 이런 여러 가지를 종합할 때 창세기 펴지 않고 과학적인 사실만 갖고 볼 때 이 우주가 무한한 존재가 아니라 어느 한 출발점이 있었던 그런 존재라는 것이 과학적으로 결론 내려집니다. 그런 존재는 유한한 존재이죠. 뭐든지 존재하기 시작하는 것은 무한한 존재는 아니에요. 무한한 존재라면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big bang아닙니까. Big bang이론에 대해서 처음에 교회에서 반대했습니까? Big bang이 창세기를 지지하는 과학적인 발견입니다. Big bang이 과학적으로 confirm된 사실이기 때문에 자연주의 과학자들이 우주는 원래부터 있었다고 얘기할 수 없어요. 어느 한 시점에 출발된 것입니다.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면 논리적으로 누가 만들었느냐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과학자들이 Big bang이 갖고 있는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 몹시 불편하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아실 것 같애요?


자연주의적 세계관을 갖고 있는 과학자들은 이것이 굉장히 불편한 과학적인 발견입니다. 이전에는 원래 우주는 있던 거야.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있던 것이라는 엄청난 대 전제가 무너지게 된 것입니다. 공립학교에서 big bang에 대해서 가르치더라도 그 implication에 관해서는 얘기를 하지 않습니다만. 우주는 유한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big bang의 의미를 잘 설명할 수 있어야 됩니다.


우주가 유한한 존재이면 누가 우주를 존재케 했느냐 하는 질문이 자연주의 세계관을 갖고 있는 과학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대답이 있다고 말합니다. 창세에 대한 설화는 많지만 잘 정리되고 established된 종교체계에서 창조를 말하고 있는 것은 theism밖에 없어요. 이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우리가 두번째 보려고 하는 것은 진화론에 대한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을 설명하는데 두 가지 이론이 있습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자연주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진화론,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말하는 창조론, 요즘은 design model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연주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다윈의 진화론을 말할 때 첫번째로 구별해야 하는 것은 미시적 진화와 거시적 진화입니다. 왜냐면 우리 믿는 사람들은 과학적으로 미시적 진화는 문제가 없습니다. 공립학교에서 자녀들이 배우고 있는 진화의 증거라고 하는 것은 대부분 미시적 진화의 증거입니다. 그것은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Adaptation, 변하는 환경에 대해서 생명 유기체가 적응하는 것은 과학적으로 잘 정립된 것입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거시적인 진화입니다. Macro-evolution은 adaptation이 아니고 한 종에서 다른 종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거시적 진화라고 합니다. 물고기가 양서류가 되고 양서류가 파충류가 되는 것이 macro-evolution입니다. 그것은 문제가 됩니다. 그것은 과학적인 증거가 약하다는 것입니다. 과학적인 증거가 있다고 하면서 미시적 진화를 증거로 내놓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다윈의 진화론에 의하면 그 진화가 아주 오랜 기간을 통해서 지극히 미미한 변화를 보이면서 한 종에서 다른 종으로 옮겨가는데요, 우리가 갖고 있는 화석의 증거는 어떻습니까? 어류의 화석, 파충류의 화석, 양서류의 화석이 있는데, 그 중간에 종을 연결하는 화석이 없습니다. 가끔 비슷한 것들이 발견되는데 한 종에서 다른 종으로 갈 때 그 변화가 매우 많은 과정을 통해서 오랜 기간을 통해서 가죠. 과학적인 증거로서 무수히 많은 변화, transitional fossil을 발견해야 되는데요, 실제로 발견하지 못합니다. 가끔 하나 둘을 발견하지만 무수히 많은, 조금씩 조금씩 변화된 것을 발견해야하는데 그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거시적 진화에서는 인간이 어떤 design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random generic mutation, natural selection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인데요. 다윈의 blackbox라는 말 들어보셨죠? 다윈이 진화론을 쓸 때는 오늘날 사용하는 정밀한 현미경 같은 것이 없기 때문에 생명체의 세포 안을 볼 수 없었어요. 세포가 일종의 blackbox였어요. 다윈은 그것을 보지 못하고 썼기 때문에 진화론이 나온 것이거든요. DNA가 발견되면서 이것이 design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가능하다는 support가 되고있어요. DNA의 정보를 쓰기 위해서 five million page에 달하는 종이가 필요해요. DNA의 발견이 믿지 않는 사람에 의해 되었고, DNA를 발견한 후에도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지만 성경적인 시각에서 종의 기원을 설명하는 과학적인 자료에요. 왜냐면 DNA라고 하는 것이 generic code를 갖고 있거든요. 네 개의 조합에 의해서 language를 만들고 있거든요. Computer가 2개의 조합으로 언어를 만들듯이 4개이 조합을 갖고 언어를 갖고 있어요. 눈에 해당하는 세포는 그것에 해당하는 작용을 하고 세포를 만들수 있는 것은 그 정보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인간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많다고 해요. 언어는 random한 것이 아니에요. A, C, G, T 네 가지를 randomly 섞어서 만들면 문학작품이 되는 것이 아니죠? 어떤 designer가 그것을 만들어야 소설이 되고 문학작품이 되죠. Specified complex라고 하는데요, 굉장히 복잡한 조합을 갖고 만드니까 가능한 것입니다.


자연도 복잡한 것들이 많아요. 자연도 complexity를 만들어내는데, 이런 것들은 random complexity입니다. 그랜드 캐년을 보면 계곡도 있고 멋있죠. 자연이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깎여서 자연이 random한 현상에 의해서 complicated한 것들이 만들어진 것이에요. 다른 사진을 보면 South Dakota에 가서 자연이 한 것이라고 하는 사람이 없겠죠. 대통령의 얼굴들이 조각되어 있는데요, 이런 것들은 specified complexity에요. Random complexity는 natural law에 의해서 만들어질 수 있지만 specified complexity는 어떤 intelligence를 요구합니다. 하늘의 구름이 떠있을 때 보면 구름이 어떤 모양처럼 보이는 것 같죠. 자연이 이런 모습을 만들어내요. Random한 현상에 의해서 만들어 진 것입니다. Random하고 repetitive합니다. Physical한 object가 반복됩니다. Specified complex는 고도의 복잡성입니다. Intelligent한 being이 아니면 무한한 시간을 준다고 해도 만들 수 없습니다. 단세포의 미세포에 들어있는 정보의 양이 얼마인 것 같습니까? Encyclopedia 30권에 담을 수 있는 정보입니다. 아메바는 어떨 것 같습니까? 아메바에 담긴 정보의 양은 1000권입니다.


칼 세이건은 DNA는 어떻게 해서 형성되었는가 quite by accident, 원래대로 조합되는 것에서 잘못 조합되어서 mutation이 됩니다. 그 mutation에 의해서 다른 종이 진화적으로 생긴다는 얘기입니다. 이 사람이 생기는 mutation은 우연히 생긴다고 하죠. 그 chance는 one of billion, 10억분의 일입니다. 그 mutation이 항상 good mutation이 아니에요. 대부분의 mutation은 harmful mutation입니다. 그러면 generic mutation이 한번 일어나는 것이 한 종에서 다른 종으로 옮겨가기 위해서 mutation의 probability가 얼마냐면 십의 사만 승의 일입니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atom 숫자의 500분의 일입니다. 그런데 거시적 진화가 일어날 수 있는 확률이 50명의 장님이 루빅 스큐브를 동시에 같은 색깔로 모아놓을 수 있는 확률이라고 합니다. 물리학에서 어떤 현상이 일어날 수 있는데 그 가능성보다 적으면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이 얼마냐면 십의 오십승 분의 일입니다. 물리학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 물리학적인 기준을 놓고 보았을 때 거시적 진화가 일어날 수 있는 확률은 그것보다 엄청나게 적습니다. 거시적 진화가 일어날 수 있는 수학적인 확률이 과학적으로 불가능할 정도로 작다는 것입니다.


과학적인 이론과 논리와 데이터를 바탕으로 진화론이 과학적으로 있을 수 있느냐의 문제를 말씀 드렸습니다. 진화론에 대한 믿음은 굉장한 것이에요. 믿음이 매우 좋은 진화론자라는 것입니다.


우리 지정의 하나님에 대해서 봤습니다. 성경에서 어느 서기관이 예수님께 가장 계명이 뭡니까 하니까 두 계명을 얘기하시죠. 첫번째는 하나님 사랑, 두번째는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사랑하는데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했어요. 그것은 전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우리가 뜨겁게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고 우리가 하고 싶지 않아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의지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고 우리의 지성을 통해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제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 우리 많은 크리스챤에게서 부족한 부분이 지성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이 마가복음의 말씀은 지성이 감성과 의지와 더불어 온전히 신앙을 위해 필수적인 부분이다. 지성을 소홀히 하는 신앙 생활은 온전한 신앙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너희 하나님이 온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Perfect라는 말이 원어 상으로 balanced라고 합니다. 온전한 신앙인이라는 것은 지성도, 감정도, 의지도 균형있게 자라나는 신앙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성있는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구원을 받으셔야 합니다. 먼저 우리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를 주로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그리고 거듭난 영혼이 되면 우리의 지성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지성이 transformed되어야 합니다.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려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너희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 우리가 의지를 갖고 우리의 생각을 훈련하고 세상의 사고방식 대로 나가지 말고 우리를 훈련시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기독교 세계관 공부를 통한 지적 제자 훈련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성경공부 대신에 하라는 얘기가 아니라 성경 공부와 아울러 이 공부를 해야 합니다.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은 여유가 있기 때문에 흥분할 이유가 없어요. 다만 준비를 해야 하는데 준비를 하지 않고 개인의 삶에 적용하지 않기 때문에 흥분하는 것이죠.


두번째 시간에는 적용하는 강의로 하겠습니다.

[김고운] “폭풍” 속의 “평안”

이코스타 2006년 11월호


2006년 8월 25일. 일기.


아침에 눈을 뜨며…
부지불식간에, 꿈 속에서도 찬양을 계속 흥얼거리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찬양.




  • 날마다 숨쉬는 순간마다 내앞에 어려운 일 보네
    주님앞에 이 몸을 맡길 때 슬픔없네 두려움없네
    주님의 자비하신 손길 항상 좋은 것 주시도다
    사랑스레 아픔과 기쁨을 수고와 평화와 안식을
  • 날마다 주님 내 곁에 계셔 자비로 날 감싸주시네
    주님앞에 이 몸을 맡길 때 힘 주시네 위로함주네
    어린 나를 품에 안으시사 항상 평안함 주시도다
    내가 살아 숨쉬는 동안 살피신다 약속하셨네
  • 인생의 어려운 순간마다 주의 약속 생각해보네
    내맘속에 믿음 잃지 않고 말씀 속에 위로를 얻네
    주님의 도우심 바라보며 모든 어려움 이기도다
    흘러가는 순간 순간마다 주님 약속 새겨봅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폭풍 가운데도… 제가 탄 배에 주님이 타고 계시니
내가 참 평안합니다.


이 평안이 너무 좋은걸요.


세상이 알 수 없는 평안… 주님 주신 평안에 참 감사드립니다.
감사드립니다.”




제게 있어서 2006년 8월은…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아니 기억하고 감사해야하는 한 달이 되었습니다. 박사자격시험(Qualifying Examination)에서 실패한 후, 하루에도 수도없이 마음이 부서졌다 모아졌다… 약해졌다 강해졌다를 반복했지만, 그래도 웃을 수 있고, 그래도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이유는,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변화무쌍한 상황과, 연약하여 흔들리기 쉬운 나자신을 본다면 결코 견딜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언제나 신실하신 하나님… 그 분을 신뢰함이 폭풍 가운데 평안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였습니다.


8월 3일, 구술고사를 보던 날 아침에 묵상했던 말씀은 누가복음 6장 37절 – 42절, 용서와 베품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 비판치 말라.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 정죄하지 말라.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 용서하라. 용서를 받을 것이요.
  • 주라. 줄 것이니.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안겨 주리라.)
  •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그 날 아침, 주님께서 나에게 왜 이런 말씀을 주시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 때에는 시험을 자연스레 패스할 것이라고 여겼기에, 이 말씀이 제 생활에 어떻게 살아나게 될 지, 어떤 예상도 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시험결과를 듣고 나서, 눈 앞이 깜깜했습니다.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눈물부터 왈칵 쏟아지는데, 그 순간 공교롭게도 제 마음 속에 떠오른 것은 아침에 묵상했던 말씀이었습니다. 이 결과에 대해 어떤 누구도 비판치 말고, 정죄하지 말고, 용서하고, 주고, 내 눈 속의 들보를 먼저 빼는 것이 그 때의 제가 해야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쉽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박사과정에 들어와서 치르게 된 첫 퀄리시험이니, 그렇다면 두번째 기회는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도 했는데… 엄격한 학과 룰은 “두번째 기회는 없다” 라는 것이었고, 지금까지 어느 학생에게도 예외없이 한번의 기회만 주었다는 통보를 받았을 때는 정말이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습니다.


유학 3년차.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하는지, 아니면 다른 학교로 옮겨 공부를 계속 해야하는지, 혹은 다른 길을 찾아보아야하는 것인지 예상치 못한 상황 앞에서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갈바를 알지 못했지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셨던 것처럼…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상황 가운데 믿음의 발걸음을 떼라고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무얼 어떻게 해야하는건지도 잘 몰랐지만, 그 와중에 제가 붙잡을 수 있었던 것은 딱 한 가지, “하나님”의 “신실하심” 이었고, 주님은 어떠한 순간에도 나를 집중력있게 붙들고 계신다는 믿음이 그 때의 저를 지탱할 수 있게 해주었던 것 같습니다.


어려운 마음 가운데도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은… 시험을 준비하면서 제가 하나님께 드렸던 “고백”들이 시험결과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것은 분명 아님을 발견했고, 어쩌면 그 상황 안에서 주님을 향한 나의 믿음을, 또 사랑을 좀 더 분명하게 보여드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힘을 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난하고 가난해진 마음으로 고백했습니다.


“그리 아니하셨지만 감사합니다.”


“주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합니다.”


“이 일을 통해 새 일을 행하실 하나님을 기대합니다.”


그 때, 그렇게 쉼 없이 쏟아낼 수 있었던 고백과 기도.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감사한지요….


그 날 후로 참 귀한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새벽마다 함께 기도무릎을 꿇어준 캠퍼스 동역자들과의 “말씀묵상과 기도” 시간은 날마다 간증의 연속! 함께 묵상했던 말씀이 매일의 삶으로 생생하게 나타나는 것을 목도하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도 익히 알던 말씀들이, 새벽마다 하나님께서 갓 써주셔서 내려주신 것처럼, 생생하게 마음판에 아로 새겨지고, 삶 가운데 살아나는데 어찌나 신기하고 감사하던지요.


말씀은 실로 살아 움직였습니다!


상황이 다급하기도 했지만, 우선은 제 마음이 주님의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되어있으니 어느 말씀하나 가벼히 듣지 않게 되었고, 중심을 계속 체크하며, 순간순간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었던 것이 말씀을 삶으로 경험하는 토대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더불어, 동역자들과 멘토님들이 해주시던 진심어린 기도와 다독임은 힘겹던 시간을 참 따뜻하게 견딜 수 있게해준 힘이 되었습니다.


폭풍 속에서 항해하는 것 같던 그 시간.


한 달여의 기간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크고 작은 소소한 사건들을 모두 다 나열할 순 없지만… 하나님께서 문을 하나, 둘, 셋… 다 닫으시는걸 보며, 처음에는 마음이 참 힘겹기도 했으나 점차 두번째, 세번째쯤 되어서는 순종의 속도가 빨라지고, 즉각 순종하게 되고, 나중에는 닫으시는 문 너머에 열어주실 문까지도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주님께 기도드렸습니다.


“때를 따라 돕는 하나님의 은혜” 를 경험하게 해 달라고. 그리고, 주님께서 뜻하신 바가 있으셔서 이렇게 상황을 몰아가시는 거라면, 제가 바라고 원하는 것이 있을 지라도, 주님 원하시는 곳에 제가 설 수 있도록… 문을 계속 닫아주시라고 기도했습니다.


주일 설교 때 목사님께서 주신 말씀을 또한 마음에 새겼습니다.



아무리 아픈 시간도 다 지나가기 마련이며
아무리 즐거운 시간도 다 지나가기 마련이다.
“이것도 지나가리라.”

8월이 끝나가던 마지막 주, 저는 한국행 비행기 티켓을 끊어놓고 서둘러 이사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감사히도, 그 때의 마음은 속상하거나 아쉬운 마음이기 보다는, 한 달여 하나님의 깊고도 큰 은혜를 체험하고 나서, 감사와 평안으로, 또 기대함으로 떠남을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국행을 일주일도 채 남겨놓지않은 8월 30일. 전 해에 어드미션을 받았던 학교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원한다면, 바로 다음주에 개강인 가을학기부터 트렌스퍼해서 공부하라고 말입니다.


그 순간, 전에 드렸던 기도가 생각났습니다. 주님이 뜻하신 바가 있어서 어떤 곳으로 인도하시는 것이라면 그 길을 즐거이 따라가겠다는 고백과 함께, 혹 주님께서 무얼하고 싶냐고 물어보시면… “제 소망이 주님 뜻안에 있는 것이라면, 공부하고 싶어요.” 하고 기도한 것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아, 어찌나 놀랐던지요….


폭풍 속에 있었다 할 지라도, “하나님이 나의 상급” 되심이… 모든 것을 충분히 보상하고도 남는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제 마음의 소망까지도 세세히 감찰하고 계셨으니 말입니다.


그 다음 날 아침, 새벽기도를 드리러 나갔는데 마침 말씀 본문은 욥기 마지막 장이었습니다. 욥의 고난이 끝난 후, 그가 할 수 있었던 고백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니다” 를 저도 고백하며, 또 회개하며, 관계가 어려웠던 지도교수님을 위해 중보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교수님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게 되시길 간절히 간구했습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강력한 인도하심을 따라 뉴저지에 와서 하고 싶었던 공부를 계속 하고 있습니다. 신기하게도, 전에는 하나님께서 문을 하나, 둘, 셋… 닫으시더니, 이 곳으로 옮겨오고는 문을 하나, 둘, 셋… 열기 시작하시는데, 지켜보던 주위 분들까지도 놀랄만큼 앞 길을 예비하시고 인도하셨다는 것이 보이고 있습니다.


폭풍 가운데도 평안할 수 있게 해주셨던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이해할 수 없을 때에도 믿고, 순종하고, 감사하는 법을 배울 수 있게 된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기억하라 하셨던 “은혜의 때” 를 마음 깊이 새기며, 항상 기도하며 깨어있어야 겠다고 다짐합니다.


한창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저를 위해 기도해주던 선배가 이런 말을 해주었습니다.


“고난 받을 때 낙망하지 말고,
축복 받을 때 교만해서는 안된다.”


참… 힘이 되는 말이었습니다.


부족한 저의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리며, 지금 어떤 상황 가운데 계시는 지는 알 수 없으나, 고난 가운데 계시다면 낙망하지 마시고, 축복 속에 계시다면 교만하지 마시기를 기도합니다. 저 또한 이 말을 마음 속에 계속 새기려 합니다. “고난 받을 때 낙망하지 말고, 축복 받을 때 교만해서는 안된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만 바라며….

[김철수] “복음과 그리스도인의 능력”


“복음과 그리스도인의 능력” (로마서를 중심으로 본 복음의 능력)


지 난 2006년 7월 시카고 휘튼 대학에서 모였던 코스타에서 우리는 히브리서 8, 9, 10장을 중심으로 복음을 공부하였습니다. 이제 약간 더 충분한 시간을 갖고 지면을 통하여 이 동일한 복음을 로마서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로 마서는 로마에 있는 성도들(거룩한 무리들, 혹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는 그의 복음 설명 및 적용 서신입니다. 본 지면에서는 로마서 본문의 모든 내용을 다 다루지는 못하지만, 로마서 전체의 흐름을 파악하고 또 복음 이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들을 공부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님의 제자로 사는 삶에 도움을 주는 것이 본 글의 가장 큰 목표가 됩니다. 저와 함께 로마서를 공부하기 위해서 독자들이 꼭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한글과 영어 성경 본문을 면밀하게 잘 읽는 것입니다.
  2. 먼 저 로마서 1장 1절에서 17절까지를 보겠습니다. 내용을 자세히 읽어보면 바울이 왜 이 서신을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들을 방문하고 싶었지만 길이 여러 번 가로막혔습니다. 그 동안 바울도 복음 안에서 성장하면서 처음 이해했던 복음보다는 훨씬 더 성숙한 이해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복음을 (또는 복음에 대한 더 깊은 깨달음을) 로마 제국 이방 사회에서 핍박 받고 있던 믿음의 형제자매들에게 나누어 주고 싶어서 로마로의 여행을 여러 번 시도했었습니다. (11절의 “신령한 은사”라고 번역된 말의 뜻은 “영적인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직역할 수 있는 바울의 언어입니다. 원문을 보아도 그렇게 번역해야 정확합니다. “신령한”과 “은사”라는 말들에 대한 오해들이 많아서 정확한 원의를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모든 길들이 막히자 그는 결국 서신을 보내기로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길이 막힌 것 역시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로써 오늘 우리도 동일한 하나님의 “신령한 은사”를 공급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3. 그 러므로 본 서신의 목적은 그가 경험한 “신령한 은사” 즉, 하나님의 “영적인 선물”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본 서신 전체의 문맥상 물론 이 하나님의 영적 선물은 “복음”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본 서신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바울이 “하나님의 복음”(1:1), “그의 아들의 복음” (1:9), 혹은 심지어 “내 복음” (2:16) 등으로 표현한 복음의 내용입니다. 이 복음은 성경을 통하여 역사 속에서 실현된 하나님의 객관적인 약속(고전 15:1-8)일 뿐만 아니라 믿는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체험할 수밖에 없는 실존적 사건이기도 합니다 (갈 2:20).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dunamis)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복음에 나타났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이 “능력”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바울의 의도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로마서 전체의 문맥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신구약 성경 전체 문맥(context)의 도움도 필요합니다. 꽤 많은 경우에 성경의 용어들이 독자의 선입견으로 부정확하게 해석되는 것을 봅니다. 여기서 “능력”이란 말도 그런 듯싶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외적인 표적 (sign 또는 performance) 혹은 은사에서 찾는 경향이 많은 사람들은 16절을 읽으면서 “복음”을 외적 은사나 통속적인 의미에서의 “능력”과 동일시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16절 문장의 문맥이 보여주듯이 여기서 능력은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그러한 종류의 능력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능력은 “구원”이라고 하는 내용에 비추어서 이해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이 왜 하나님의 능력이 될 수밖에 없는가를 바울은 말하고자 하겠지요. 그렇습니다. 로마서 1장 이하를 차근히 읽게 되면, 구원이야말로 하나님의 능력이 가장 잘 계시된 사건입니다. 그리고 이 구원은 “믿음”이라는 개념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이제 이 내용들을 1장 17절 이하에서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4. 그러면 로마서 본 서의 핵심 구절이라고 할 수 있는 1장 17절의 말씀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은 16절까지 인사 및 본 서 기록의 의도 등을 언급한 뒤, 17절에서 바로 복음의 핵심을 말해줍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본 절에서 우리는 세 가지 중요한 내용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는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말입니다. 둘째는 “믿음”의 뜻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의인”의 정의입니다. 이제 첫 번째 개념부터 다루어보도록 하겠습니다.


  5. 첫 번째 내용을 롬 3:21에 비추어 본다면, 복음 외에도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적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라는 말씀에 의할 때에 하나님의 의는 율법에도 나타났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구약과 신약의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의”가 분명합니다. 이제 우리가 바울이 말하는 복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울이 이해한 “의”의 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기독교에서 흔히 이해하고 있는 죄와 구원의 개념들도 이 의의 개념을 이해할 때에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6. 그 러면 롬 1:17에서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우선 먼저 간단히 결론적인 답부터 내리고 차후에 더욱 차근히 살펴보겠습니다.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하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의가 만족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의라는 헬라어 말은 dikaiosune인데 바울에게 있어서 이 말은 구약의 개념을 전하는 헬라어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구약의 히브리 말인 Tzedeq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의” 혹은 “공의” 등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시편 31:1에서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로 영원히 부끄럽게 마시고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 혹은 시편 35:24에서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공의대로 나를 판단하사 . . . “ 등에서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시 31:1은 Martin Luther로 하여금 자신의 구원이 자기의 의에 있는 것이 아님을 확신시켜 준, 즉, 그의 종교적 패러다임을 신앙의 패러다임으로 전환시켜 준 계기가 된 구절이기도 합니다. 루터가 깨달은 것은 자신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에 달려 있다는 진리였습니다. 이제 이 말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해보겠습니다.
  7. 하 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신학자들 간에는 이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의 자비/은혜(hesed)라는 말과 동의어인 것으로 보는 이들도 상당히 있습니다. 그 이유는 위의 시편 31:1에서 본 것처럼 하나님의 의는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직접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고린도전서 13:6에서 사랑이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고 한 데에서도 나타나 보입니다. 즉,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으로 말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곧 의로우심과 항상 함께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속성을 하나님의 자비/사랑이라고 하는 본질적 속성(요일 4:8, 16 참조)과 분리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비록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이 분리되어 나타나지는 않지만, 복음을 우리 수준에서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서, 우리는 하나님의 의의 속성을 먼저 구약의 빛에 비추어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후에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적 속성인 사랑이 어떻게 당신의 의로우심과 함께 나타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논의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바울이 사용한 법적인 용어로서의 “의”의 개념을 다루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