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희]What to do and What not to do?

이코스타 2004년 3월호

 

지난 6년간의 미국 생활을 돌아보니 많은 생각과 추억들이 지나간다. 그러나 가장 소중하게 남는 것은 익숙한 환경에서 떠나 보낸 시간이 신앙적으로 나를 좀더 정직하게 바라보고 점검할 수 있는 시간이었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더욱 진지해질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으며, 몇몇 소중한 신앙의 선배들과 친구들을 통해 신앙적으로 자라남을 배울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 6년의 시간동안 나는 유학생 사역에 헌신한 선배들의 돌봄을 받던 때도 있었고, 또 내가 후배들을 섬기는 것도 직접 해보게 되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아직도 계속해서 다른 분들의 돌봄을 받으며 성장하고 있고, 또 동시에 그 받은 돌봄을 나눠주는 것이 지속된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글을 쓰신 분들이 충분히 왜 청년 사역이 중요한가에 대해 이야기 하셨으므로, 나는 조금 더 실질적인 내용을 다뤄보려 한다. 사역의 방법이야 개인적인 성향마다 독특하게 다를 수 있으나, 내 개인적인 체험을 토대로 이야기를 풀어보려고 한다. 유학생 사역 – What To Do and What Not To Do.



1. What To do



(1)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가장 중시하자.



너무나도 기본적인 이야기인 것 같지만, 사역을 하다보면 자칫 무시되기 쉬운 것 같다. 자칫 캠퍼스나 교회에서 다른 영혼들을 섬기는 것에 치중하다보니 내가 하나님과 보내는 시간을 타협해야 할 때가 생길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과 내가 개인적으로 보내는 시간을 타협하는 것은 사역을 하는 사람에게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타협된 채 지속되는 사역은 자칫 뜻하지 않는 실수를 하게 되거나 다른 영혼들에게도 상처를 줄수도 있고 나를 곧 지치게 만들기도 한다. 한때 열성을 내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힘을 내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기 쉽다. 내가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매일 만나는 것이 없이 전g해지는 말씀은 내 개똥 철학이 된다. 또, 말씀을 전하면서도 내가 직접 말씀 묵상과 기도를 통해 직접 깨달은 내용과 내 삶에 적용되는 부분을 나누지 않고, 말씀을 정해진 틀 안에서 혹은 말씀이 의미하는 것이 이런것이겠지 하는 식으로 지식을 전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묵상하는 시간동안 함께 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이 없이 말씀을 전하는 것은 내 사고와 삶을 변화시키는 생명력있고 날센 검같은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이기만 하고 나의 삶과는 크게 상관없는 지식을 전하는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사역을 하면서 개인적인 지식과 경험이 도움이 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말씀 묵상과 기도생활을 통한 하나님과의 열린 관계를 절대로 타협해서는 안된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면서 하나님과 가까이 대면하여 대화했다는 것이 좋은 예가 될 것 같다. 유학생 사역을 하면서 날마다 하나님의 산으로 올라가는 것과, 하나님께서 직접 주시는 율법과 계명을 받는 것이 지속되어야 한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가 있는 산으로 올라와서, 여기에서 기다려 라. 그러면 내가 백성을 가르치려고 몸소 돌판에 기록한 율법과 계명을 너희에게 주겠다.’ 모세가 일어나서, 자기의 부관 여호수아와 함께 하나님의 산으로 올라갔 다. (출 24:12-13).


바쁜 유학생활 가운데 캠퍼스 모임이나 교회 청년부를 통해 다른 이들을 섬기기 위해서는 그만큼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씩 시간을 양보해도 당장 표가 나지 않는 하나님과 보내는 시간을 타협하기가 쉬워진다. 공부하는 시간을 조금만 양보하면 당장 리딩이 밀리고 페이퍼가 날짜를 넘기지만, 말씀 묵상하는 시간과 기도 시간은 조금씩 양보해도 당장은 크게 내가 사는데 지장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조금씩 타협하다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져 회복하는데 고생해본 사람이라면 내 말을 잘 이해할 것이다. 그래서, 바쁜 유학 생활일수록 시간관리를 잘 하고, 덜 중요한 것을 하지 않거나 미루기 위해 삶에 우선 순위를 메기고 가지치기를 수시로 하는 것이 필요하다. 어떤 모임에 나갈것인가, 점심 시간은 얼마나 쓸 것인가, 인턴쉽에서 시간을 넘겨 일을 하게 될 때 얼마나 일을 더 할 것인가 하는등에서 선을 그어야 할 시점을 분명히 해두고 지키려고 노력한다. 일에도 욕심을 내다보면 한도 끝도 없기 때문이다.



(2) 나의 문제나 어려움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라.



위에서 이야기한 하나님과의 관계에 속하는 내용이지만 중요한 내용이라서 따로 이야기한다. 누구에게나 내면의 문제 혹은 삶의 어려움이 있기 마련인 것 같다. 또 그 문제를 다 해결하고 나서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을 하려면 어쩌면 삶을 끝내고 하나님 앞으로 가기전까지 아마 아무에게고 말씀을 전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쓰신 사람들중에 내면적인 문제 혹은 생활의 어려움이 전혀 없던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고 보면 그리 많은 것 같지도 않다. 말씀은 우리에게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한다. 맞는 말씀이다. 그러나, 다른이들을 섬기는 사역에 헌신한다고 해서, 내 문제를 묻어두는것만이 다는 아닌 것 같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서도 자신의 어려움과 문제에 대해서도 정직하게 직면할 것을 권고한다.



사역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문제와 어려움에 관심을 갖다보면, 또 그들의 필요만을 생각하다보면, 나의 문제는 잊게 되는 경우가 있다. 아니, 사실은 잊는 것이 아니라 그냥 방치해버리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내 내면의 문제 혹은 삶의 어려움을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보고 먼저 가지고 나가는 것은 중요하다. 혼자 문제를 가지고 있을때는 그 문제가 나의 개인의 것이지만, 그 문제를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소위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때에는 나의 문제가 다른 사람에게도 어려움을 주거나 상처가 되어 결국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역에도 지장을 주게된다. 내 상처가 남에게도 상처가 되는 경우가 종종 생길수 있다. 똑같은 어려움과 문제가 있더라도 그 사람이 자신의 문제에 대해 정직하게 직면하고 있는 사람과, 어려움을 방치해두거나 자신의 문제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간에는 그 문제로 인한 부작용이 표현되는데 큰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쉽게 볼수 있는 예를 들어보자. 유학생 사역을 하다보면 학력, 성격, 가정 환경, 라이프 스타일등에서 매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때로는 내 열등감을 자극하는 사람을 섬겨야 할 때도 있고, 때로는 내 상처를 애써 바득바득 건드리는 사람을 만나게도 된다. 그런때 해결되지 않는 내 안의 상처나 열등감은 사역에 큰 장애물이 된다.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일로 나타나거나 내 열등감이나 상처 때문에 비롯된 나의 차가운 태도나 교만함이 뜻하지 않게 다른 이들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 실제로 캠퍼스나 교회에서 유학생을 섬긴다고 하는 사람들이 막상 자신의 내적인 문제로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를 종종 보아왔다. 또 내 문제가 굳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식으로 나타나지 않더라도, 내면의 문제를 없는 셈치고 방치할 경우 내 안에서 그것이 썩게 되고, 악취를 풍기게 된다.



결론적으로, 학생들을 돌보는 사역을 하는 사람으로서 내면이 건강한 사람이 되기 위해 정직하게 자신의 상태를 하나님 앞에서 점검하고 그분의 치유를 간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아는 한 사람은 하나님을 매우 사랑하는 신실한 사람이기도 하고, 또, 매우 지적이고 날카로워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가정 환경이 어렵다는 일종의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해 자신보다 편안한 환경에서 공부하는 다른 사람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혹은 적당히 어울려 지내더라도 늘 마음속에 벽을 쌓아두고 지내는 경우를 보았다. 이런 부분은 유학생 사역을 하는 사람으로서 특히 깨어 조심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또 한 사람은 계속해서 남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것을 극복하지 못해 어느새 사역이 다른 이들의 인정을 받아내는 통로가 되어가는 것을 본적도 있다. 이런 경우에도 본인은 모르는 사이에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두분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니 하나님께서 각자의 어려움을 만지실 것이다. 그런데도, 먼저, 그분들이 자기의 모습을 하나님앞에서 정직하게 볼수 있었다면 얼마나 더 본인의 영적 건강에나 사역에 도움이 되었을까 생각해 본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출애굽을 명령하였을 때 모세는 자신의 부족한 점을 하나님 앞으로 가지고 나왔고,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도움을 주신다는 약속을 받고 출애굽이라는 위대한 사역을 시작한다. 모세의 경우처럼 때론 우리의 약점이 당장 치유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어떤 대안을 주시든지, 해결을 주시든지, 나의 어떤 어려움이 더 이상 irrelevant한 것이 되도록 주실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하나하나 아뢰고 그분의 치유나 해결을 직접 구하는 것이다. 있는 문제를 없는척하고 묻어 두어서 썩히는 대신 말이다. 모세는 말주변이 없는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갔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내 안의 상처, 욕심, 열등감, 증오감등을 먼저 하나님 앞으로 가지고 나가는 것이 아닌가 한다. 특히 사역을 하기에 앞서 말이다.




모세가 주님께 아뢰었다. ‘주님, 죄송합니다. 저는 본래 말재주가 없는 사람입니다. 전에도 그랬고, 주님께서 이 종에게 말씀을 하고 계시는 지금도 그러합니다. 저는 입이 둔하고 혀가 무딘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누가 사람의 입 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하는 이를 만들며, 누가 앞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 거나 앞 못보는 사람이 되게 하느냐? 바로 나 주가 아니더냐? 그러니 가거라. 네가 말하는 것을 내가 돕겠다. 네가 할말을 할 수 있도록 내가 너에게 가르쳐주겠다.’ 모세가 머뭇거리며 ?주님, 죄송합니다. 제발 보낼만한 사람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하고 말씀드리니, 주님께서 모세에게 크게 노하시어 말씀하셨다. ‘레위 사람인 너의 형 아론이 있지 않느냐? … 네가 할말을 그에게 일러주어라. 네가 말을 할 때나 그 나 말을 할 때에, 내가 너희를 둘 다 돕겠다. 너희가 하여야 할 말을 가르쳐 주겠 다…’ (출 4:10-15)


(3) 목적 의식을 분명히 가지라.



나는 흔히 “A Type”이라고 하는 편에 속한다. 말하자면, 적극적이고 일에 열심이고 모든 일에 관심도 욕심도 많은 편이다. 일의 과정도 과정이지만 결과도 중시하는 편이고, 말하자면 어설픈 완벽주의자 같은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러다보니, 일을 하면 남들보다 빨리 하고 보통 이상은 하는 편이다. 그런 나의 성향이 사역에서도 드러난다. 일이 착착 진행되지 않거나, 느린 사람을 보면 이해가 안되고, 당연히 나의 그런 시선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 조금 다른 관점이지만, 아무리 상대방이 선배라고 해도, 그 사람의 인격적인 약점을 보게되면 은연중에 상대방에게 거리를 두게 되는 모습도 사실은 비슷한 이유, 즉, 내 기준에 다른 사람이 따라주지 못하는 것에 대한 좌절-때문이 아닐까 싶다. 내가 남을 좌절시키는 것은 생각하지 못하고, 남이 나를 절망시키는 것만 생각하다보니 그렇다. 그런데, 사역을 하면서 내가 왜 이 일을 하는가를 생각하지 않으면 때로는 여러 사람에게 상처를 주게 될수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여러분이 사랑속에 뿌리를 박고 터를 잡아서, 모든 성도와 함께 여러분이 그리스도 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를 깨달을 수 있게 되고,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빕니다. (엡 3: 18)



그분이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예언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도자로, 또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을 준비시켜서 봉사의 일 을 하게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하나 님의 아들을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다다르게 됩니다. (엡4: 11-14)



우리는 여러분을 경고하고 권면합니다마는, 그것은 여러분을 부르셔서 당신의 나라 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하게 살아가게 하려는 것입니다.


내 기대대로 사람들이 착착 따라주지 않을 때, 혹은,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을 때, 그래서 본의 아니게 절망할 때마다 사역의 목적을 생각하고 그에 맞게 나를 다스리는 것이 필요하다. 열심이고 능력있는 찬양 인도자가 찬양팀 멤버의 목소리나 악기 소리가 자기 기대에 조금 못 미칠 때 좌절할수 있다. 그러나, 찬양팀이 얼마나 훌륭한 악기 소리의 조화로 찬양을 드리는 것보다도 결국 이 모든 것의 목적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것, 함께 준비되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 하나님께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조금은 다른 태도를 가질수 있을 것이다. 



(4) 마땅히 해도 되는 일도 복음을 위해 두 번 생각하라.



비교적 덜 유교적이고 덜 가부장적인 환경에서 자라서인지, 내가 하고 싶은 것에 능력이 모자라는 경우가 아니고 다른 이유로는 내 활동이자 사고 영역에 큰 제한을 받아본 적이 없는 내게 이 부분이 가장 도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내가 사회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일이나 문제가 될만한 일을 벌이고 다니는 것은 아니지만 내게 어느 정도 자유 분방한 면이 있다는 것은 인정해야할 것 같다. 그런 내게 신앙적으로 진지해지면서, 특히 성경공부 인도하게 되면서 때로는 숨막히고 답답한 것으로 다가왔던 점들이 있었던 것 같다. 이런 것은 신앙의 공동체내에서 나타나기도 했지만, 직장 생활이나 학교생활 등 나의 다른 삶의 영역에서도 나타난 점 같다. 예를 들면, 단순히 누군가 연장자라고 해서 특별히 어려워하는 것이 없는 나의 태도가 대화중에 무례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에 대해 이전에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면 성경공부를 인도하게 되면서는 조금씩 그런것에도 신경을 쓰게 된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이 잘 모르고 나를 오해하게 되는 것이 내가 전하는 말씀에 권위를 잃어버리게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한마디로 ‘너나 잘해’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설령 그것이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더라도. 또 다른 한 예를 들자면, 관심을 끌만한 형제가 나타났을 때 예전같으면 조금씩 간접적으로라도 찔러보거나 나도 모르게 더 친절하게 대하는 등 관심을 표현했을텐데, 사역을 직접 하게 되면서는 훨씬 달라져서 형제들에게는 꼭 필요한 내용이 아니면 대화와 접촉을 줄이는 극단적인 경우로까지 치닫기도 했다. 같은 이유에서다. 내가 아는 신앙의 선배중에는 말씀을 전하기 때문에 형편으로 따지면 더 큰 차를 탈수 있는데도 절제하는 것을 본적이 있고, 한 후배의 경우에는 원래 매우 매너가 좋고 자매들에게 잘 대해주는 편인데 그것을 절제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본적도 있다. 이 후배의 경우에는 말씀을 위해 자기의 인기를 포기했다고 할 수 있다.



순수한 열정으로 사역을 할 때는 이런 것들이 별 희생같이 느껴지지 않는데, 조금씩 지나면서 열정이 식고, 머리는 커지면서 때로는 이런 것들이 가식으로 느껴지거나 답답한 굴레로 느껴진 때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말씀에 비춰볼 때, 우리 신앙의 선배님 사도 바울도 당연하게 할 수 있는 일도 복음이 공격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서뿐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도 흠잡히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우리가 맡아서 봉사하고 있는 이 많은 헌금을 두고, 아무도 우리를 비난하지 못하 게 하려고, 우리는 조심합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뿐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도 좋 은 일을 바르게 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 또 형제 한 사람을 보냈습니다. (고후 8: 20-22).



아무도 우리가 섬기는 이 일에 흠을 잡지 못하게 하려고, 우리는 무슨 일에서나 아 무에게도 거리낌거리를 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에서나 하나님의 일꾼답게 처신합니다. (고후 6: 3-4)



모든 것이 다 허용된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모든 것이 다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다 허용된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모든 것이 다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도 자기의 유익을 추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추구하십시오. (고전 10: 23)


(5) 섬김의 대상을 전적으로 존중하라.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자라게 하는 것은 전인격적인 관심과 돌봄을 의미한다.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하고 말씀안에서 자라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상대방의 학교 생활과 진로문제, 이성 교제 가족 관계에도 관심을 가지고 대화하다보면 상대방의 영적/정서적 필요를 파악할수 있게 된다. 이때 상대방의 속도에 나를 맞춰야 한다. 때론 사역자들이 상대방이 빨리 빨리 자라고 빨리 빨리 열매를 맺는 것을 보고 싶어서 서두르다가 실수를 하거나 상처를 남긴다. 대화하다보면 상대방이 나에게 어느 정도의 권위를 인정하는지, 또 어느 정도 내가 open up 해도 상처를 받지 않을지, 부담이 되지 않을지 알게 된다. 상대방이 받아들일수 있는 만큼씩 나를 열고 상대방이 나를 인정하는 만큼의 권위를 행사해야만 상대방이 상처를 받지 않는다. 분명한 잘못을 해서 상대방에게 상처가 되더라도 지적해야 할 때를 빼놓고는 대부분 상대방의 속도와 거리를 존중해주길 바란다. 나의 경우에는 상대방이 너무 큰 잘못을 해서 내가 반드시 당장 지적하고 넘어가야 하는 경우는 거의 경험하지 못했다. 물론 상대방이 나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고, 내가 그사람을 신뢰하고 있을때야 다른 이야기지만 말이다.



때론 사역을 하면서 사랑과 열정이 앞서서 상대방이 준비되지 않았는데도 상대방의 인생 전반에 관여해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경우가 있다. 아니, 그렇게 극단적이 경우가 아니더라도 자연스럽게 사역자가 시간과 에너지를 쏟는 만큼 상대방에게서 당연히 기대하는 사소한 것들이 있게 되는 것 같다. 예를 들면, 성경 공부 멤버가 당연히 내 전화에 리턴콜을 해야한다고 기대한다든지 하는 경우 말이다. 기대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 사람이 기대에 따라주지 못했을 때, 막무가내로 실망한 모습을 직접 표현하는 것도 어쩌면 자연스럽다. 그만큼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생각하다보니 더 실망될수 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 상대방을 인내로 기다리고 존중하라고 권고하고 싶다.



물론 사역자의 동기가 순수한 경우 받아들이는 사람은 조금 상처가 있더라고 대부분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이 반복되면 상대방은 사역자에게 신뢰를 잃거나 두려움을 갖게 되고 앞으로는 자신을 열어보이지 못하게 되고 만다. 유학생 사역을 하면서 한가지 꺠달은 것은 우리의 죄성 때문에 모든 사람이 상처를 매우 잘 받는다는 점이다. 성경공부 리더가 생각없이 한 한마디 때문에, 눈초리 때문에, 목소리 톤 때문에 영혼들은 상처를 받는다. 사역자 입장이란 영향력을 행사하는 입장이다. 우리가 섬기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그 섬김을 통해 영향력이 행사되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섬김의 도구는 오직 말씀이다. 나의 기대치나 나의 기준이 절대로 섬김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된다. 아이들이 장난으로 던진 돌멩이에 개구리는 맞아 죽는다고 리더가 별 생각없이 던진 한마디나 부정적인 말투가 영혼들에게는 큰 상처를 준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2. What Not To Do



(1) 소유하려 하지 말라.



유학생 사역, 즉 성경공부를 하고 영혼을 돌보는 것은 나와는 다른 한 영혼을 깊이 사랑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다 보면, 영적으로뿐 아니라 그 영혼의 생활면에서도 깊이 애착을 느끼게되고, 때론 그것이 지나쳐 소유하려는 성향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무엇인가를 소유하려고 해서 내가 섬기려고 하는 영혼을 마치 내 것으로 착각하고자 하는 경향 말이다. 하나님 것인데 내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 바로 죄가 아닌가 싶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내가 말하는 ‘소유하려는 성향’이란 ‘내가 이 영혼을 돌봐야 한다’고 생각하고, ‘다른 누구도 나보다는 이 사람을 잘 이해할수 없고 돌볼수 없다’고 은연중에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한 영혼이 진정 하나님의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사역을 하면서 ‘나’의 자리는 무색한 것이어야한다. 그럼에도 때로 누가 교회를 옮긴다거나, 성경 공부 모임을 바꾼다거나, 또는 내가 아닌 다른 리더를 더 존중하고 따른다거나 할 때 괜한 질투심이 생기거나 경쟁심을 느끼는 경우, 혹은 위기의식까지도 느끼는 경우를 본다. 세상에서 경쟁하고 앞다투고 실적을 올려 인정받아야 하는 문화에 이미 익숙한 우리들은 사역을 하면서도 그 문화 속에서 때론 벗어나지 못하는 경향이 있는 것을 보게된다.



물론 내가 한 영혼을 끝까지 돌보고 싶은 마음이 매우 귀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그 영혼이 나에게 느끼는 부담이 되거나, 함께 동역하는 다른 이들과의 관계에서 불편함을 초래한다면 아마도 다시 내 모습을 점검해 봐야 할 것이다. 사역의 포커스는 위에서 목적의식을 분명히 하자고 하면서 이야기했듯이, 한 영혼이 그리스도 사랑 안에서 건강하게 자라는 것이지, 한 영혼이 ‘내가’ 전하는 그리스도의 말씀안에서만 자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사역자가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또 내가 없이는 공동체가 지속될수 없다고 은연중에 생각하게 된다면, 이것은 바로 내가 한 공동체나 그곳의 영혼들을 소유하려 하고 있다는 신호일지 모른다. 그때쯤이면 이미 포커스는 예수 그리스도와 내가 섬기는 영혼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로 돌아간 것이다. 물론, 내가 성경공부를 인도하는 그룹에서 갑자기 한 자매가 다른 그룹으로 옮기겠다고 하거나 성경공부를 나오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때로는 참 고통스러운 경험이다. 나도 내가 열심히 공들여 일대일로 성경공부를 한 자매가 더 이상 성경 공부에 나오지 않고 다른 모임으로 나가겠다고 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마치 남자 친구가 헤어지자고 선언하는 것처럼 아프게 느껴졌었다.



그만큼 그것이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것은 그만큼 한 영혼을 깊이 사랑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 내가 힘들어하는 동기를 적나라하게 점검해보면서 다른 리더 혹은 모임에 대한 질투심이나 경쟁심, 거절을 두려워하는 우리들의 속성, 잘해서 인정받고 싶은 인간적인 욕심이 때로는 작용하기도 하는 것 같다. 우리가 섬기는 영혼들은 우리것이 아니라 하나님것임을 늘 기억하고 스스로에게 상기시켜야한다. 모세와 하나님과의 대화에서도 모세는 자기를 따라 출애굽에 나선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 백성이 아니였음을 분명히 알고 있었고, 하나님도 이스라엘 백성을 그의 백성으로 칭하고 있다는 사실을 엿볼수 있다. 우리가 섬기는 영혼은 우리것, 내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늘 기억하자.




모세가 주님께 …호소하였다. ‘주님, 어찌하여 주님께서는 이 백성에게 이렇게 괴로 움을 겪게 하십니까? 정말 왜 저를 이곳에 보내셨습니까? 제가 바로에게 가서 주 님의 이름으로 말한 뒤로는, 그가 이 백성을 더욱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주 님께서는 주님의 백성을 구하실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계십니다.’ (출 5:22-23).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바로가 너희말을 듣지 않을 때에, 나는 손을 들어 큰 재앙으로 이집트를 치고, 나의 군대요 나의 백성인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 땅 에서 인도하여 내겠다. (출 7:4-5)


(2) 사람에게서 영광을 구하지 말라.



위에서 잠시 이야기했지만, 우리는 칭찬받고 인정받는 것에 매우 익숙한 사람들이다. 사실, 신앙의 공동체에서 신앙의 선배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후배들로부터 존중을 받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또, 나를 신앙의 선후배들에게 열어놓고 공개해 그들의 충고와 격려를 받아들이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그런데 경계해야 할 일은, 때론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을 기대하기 보다는 주변 사람들에게서 인정받는 것에 더 신경을 쓰게 될 때가 있었다는 것을 고백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때로는 성경 말씀을 전하거나 소모임을 인도하는 사람은 ‘위험한 안전지대- dangerous safety zone’에 속하게 되는 것 같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어쩌면 내가 그런 위험한 안전지대에서 허덕여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일까? 신앙 생활을 막 시작하는 사람들에 비해 성경공부 모임까지 인도할 정도가 되면, 기본적으로 기도도 하고, 하나님도 두려워하고, 또 말씀을 보는 생활도 어느정도 익숙해 있을 것이다. 주변 사람들도 나를 어느정도 존중해주고, 인정해주고, 어느새 나는 내 영혼의 상태보다는 다른 영혼들과 그들의 신앙 생활에 더 관심을 갖게 되어 버린다.



내가 이런 상태를 ‘위험한 안전지대’라고 부르는 이유는, 어느정도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것이 때로는 우리들에게 위험한 독이 될수 있다는 것이다. 주변의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을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 대신 받아들이고, 어느순간부턴가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이 큰 관심이 없어질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에까지 갈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내가 어떤 최소 기준- 큐티, 말씀, 전도, 도덕적인 생활-을 만족시키고 있다는 생각이 하나님 앞에서 나를 교만하게 하는 위험한 사태로 이어질수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나는 내가 그런 위험한 안전지대에 놓여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계기가 있었는데, 그때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나의 죄된 모습은 작고 단단한 검은 차돌의 모습이었다. 누가 봐도 죄라고 알수 있는 커다란 바위도 아니었고 아주 자그마한 돌맹이였는데, 너무 작아서 깰수가 없는 그런 모습이었다.



어느정도는 내 “선의식
-  self righteousness”와 또 다른 사람을 의식하는 습관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새까맣게 되어버린, 너무 단단하고 크기도 작아서 오히려 레이저를 사용하지 않고는 깰수도 없는 그런 모습이었다
.



작년 언젠가 선물 받은 책중에 ‘영적인 가면을 벗어라- inside out’였는데, 어쩌면 우리는 의도하지 않게 가면을 쓰게 되는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봐주는 모습이 마치 하나님 앞에서 내 진짜 모습인양 착각하게 되는 것 말이다. 사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딱딱한 돌멩이일 뿐인데, 사역을 한다는 이유로 주변의 나에 대한 시선이 달라지고, 기대가 달라지고, 어느새 나도 모르게 그들의 시선이 진짜 내모습인 것처럼 오해하게 되는 것 말이다. 그래서, 사람을 의식하지 말고, 하나님께 오는 영광을 구하라는 것이, 위에서 내 모습을 하나님앞에서 정직하게 직면하라고 한 내용과도 연결될수 있을 것 같다. 순수하게 그리스도에 대한 열정으로 시작한 사역이 어느 순간 일이 되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동기가 내 안에 혹시나 있는지 점검하자.




우리는 하나님께 검정을 받아서 맡은 그래도 복음을 전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은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우리는 언제든지 아첨하는 말을 한일이 없고, 구실을 꾸며서 탐욕을 부린 일도 없습니다. 이일은 하나님께서 증언하여 주십니다. 우리는 또한, 여러분에게서든 다른 사람에게서든, 사람에게서는 영광을 구한일이 없 습니다. (살 2:5-6) 


(3) 율법(나의 기준, 다른 사람의 시선, 혹은 self- righteousness)에 대하여 죽으라.



사역이 지속되다 보면, 어느 정도 타성에 젖게 되거나 더 이상의 내 믿음의 성장이 없어 힘들어지는 시기가 종종 어떤 이들에게 찾아오는 것 같다. 나에게도 그런 때가 물론 있었다. 그 원인에는 개인차가 있을 수 있겠지만, 어떤 경우에는, 어느새 말씀을 전하는 것이 율법을 지키는 수준으로 전락해버린 것을 들 수 있다. 계속 말씀을 보고 전하는데도 이상하게도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더 이상 깊어지는 것 같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말씀만 전하게 되는 경우이다. 그러다보면, 죄책감에 시달리게도 되고, 나만 잘못 하고 있는 것 같아 하나님의 눈치를 보게 될 수도 있다. 어쩌면, 이제는 더욱 깊이 있는 묵상과 기도 생활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 고비를 넘지 못해 나타나는 것일수도 있을테고, 어쩌면 바쁜 유학 생활 가운데 허둥대면서 일주일에 한번씩 전해야하는 말씀을 준비하다 보니, 내가 먼저 하나님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되고 날마다 새로운 생명을 얻는 것에 둔해져 있기 때문일수도 있다. 그러다가 마치 모임에 나와야 할 사람이 나오지 않거나, 내가 말씀을 전하면서 좀 버벅대기라도 했다치면 스스로에게 드는 죄책감은 더욱 커진다. 게다가 옆에서 다른 사람은 열정적으로 지치는 것 없이 사역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나는 더욱 형편없는 사람이 되는 것 같고, 때로는 나는 이렇게 지쳐있는데 후배들이 열심을 내는 것을 보면 미안하기까지 하다.



바로 이런 것이 율법에 얽매이게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내가 사역을 하면서 반드시 해야할 리스트를 만들어 놓고 (e.g. 일주일에 한번씩 전화 돌리기, 일주일에 한번씩 이메일 돌리기, 일주일에 열시간 말씀묵상하기, 등등) 최선을 다해 사역을 하지만 깊은 하나님과의 교제와는 거리가 멀어지는 경우가 있을수 있다. 이런때, 나의 신앙 생활, 또 나의 사역의 모습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나의 경우에는, 어느 순간에 율법에 사로잡혀 있는 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스스로가 스스로의 삶에 대해 설정한 기대치 (말씀을 전하는 삶을 살겠다는 헌신), 주변의 다른 신앙의 선배들이나 혹은 후배들을 의식하게 되는 것, 또한 말씀을 전하면서 갖게 되는 나 스스로의 의(self-righteousness)등이 어느새 나에게 율법이 되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율법은 나를 죽이고 있었다. 율법에 얽매여 사역을 하다보니 내가 반드시 해야 한다고 설정한 리스트를 지켜가면서 생명을 얻지 못하고, 그 율법아래서 허덕이며, 내 영혼이 지쳐가던 것을 경험한 적이 있다. 물론, 그 리스트를 마음속에 두고 최선을 다해 사역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순수함과 열성으로 작성한 리스트가 어느새 나를 죽이는 율법이 되어버렸다면, 그 율법에 대하여 죽어야 할 것이다. 이런 율법에 대하여 죽고, 오직 그리스도에 대하여 살라고 권유하고 싶다. 이 길만이 우리가 사는 길이기 때문이다.




나는 율법과의 관계에서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어버렸습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 과의 관계에서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갈2:19)



나는 율법에서 생기는 나 스스로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 아 오는 의 곧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에게서 오는 의를 얻으려고 합니다. 내가 바 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 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 르고 싶습니다…그러므로 누구든지 성숙한 사람은 이와 같이 생각하십시오. 여러분 이 무엇인가를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께서는 그것도 여러분에게 드러내실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가 어느 단계에 도달했든지 그 단계에 맞추어 행합시다. (빌 3:9-16)


3. 결론



나는 늘 헌신된 사역자 (제자) 한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 열명보다 더 소중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실지… 잃은양 한 마리가 더 중요하니까, 그렇다면 나랑 하나님이랑 생각이 다른걸까? 어쨌든,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한 사람의 건강하고 (영적으로), 헌신된 제자가 잃은양 열마리를 살릴 수 있다는 산수적 계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보다는, 한명의 헌신된 제자는 그 자체만으로도 소중한 것 같다. 때로는 당장 양 한 마리도 못건지기도 하고, 양 살리러 갔다가 이리한테 얻어터지기도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헌신되어 사역하는 제자는 하나님을 향해 자라가는 과정에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그래서, 나는 나와 여러분에게 힘을 내자고 ‘화이팅’을 외친다.



[이일형]교회 청년부와 캠퍼스 사역의 조화 (2)

이코스타 2004년 2월호

제자양육에 대한 확신이 굳게 서 있다 할지라도 캠퍼스 선교와 교회 청년회 사역의 조화를 이루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물론 개인적 차원에서도 캠퍼스 사역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교인들의 시선과 비난을 견디기 힘듭니다. 그러나 모든 교인이 그 중요성을 이해한다 할지라도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제도를 구상하고 도입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혹시 참고가 될까하여 이런 제도를 도입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는 한 교회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 교회는 지난번에 잠시 소개 드린 것처럼 교회에서 청년사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제자양육을 위하여 지역 캠퍼스 선교단체와 함께 손을 잡고 일하고 있습니다. 이 교회의 많은 청년들이 캠퍼스 선교단체에 간사 혹은 다른 직책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또 캠퍼스 선교단체는 캠퍼스에서 새로 믿게되는 많은 청년들을 교회로 인도하여 예배에 참여하도록 돕고 있습니다.



이 교회가 얼마 전부터 강조하고 있는 것은 쎌그룹 중심으로 제자 삼는 일 입니다. 물론 아직 시작하는 단계이므로 많은 쎌목자들이 제자 삼는 것에 대한 개념이 부족한 상태입니다. 이런 부족한 가운데서도 그 교회 청년부는 작년에 쎌 그룹으로 조직을 개편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조직을 새로 개편하는데 직면했던 문제점은 과연 어떻게 캠퍼스 선교와 교회 내에서 쎌 그룹을 통하여 제자 삼는 일의 조화를 이룰 수 있느냐의 문제였습니다.



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원칙을 세웠습니다. 첫째, 청년들에게 선택권을 주어 교회 내에서 아니면 캠퍼스 선교단체를 통하여 제자양육을 받기 원하는지 자유롭게 선택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때 주의해야 할 것은 어느 곳을 택하던지 선택하지 않은 다른 곳에서 이질감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 인도자들에게도 선택권을 주어 한 곳을 선택하여 사역하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인도자의 수가 부족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여러 인도자들이 겸직하는 것을 감수해야 합니다. 이 때 캠퍼스 간사를 선택하는 자들에게 교회에서는 캠퍼스에 파송하는 선교사로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실질적으로 예배시간에 이들을 인정해 주는 순서와 기도해 주는 시간이 있습니다. 반면에 교회 내에서 쎌 목자로서 섬기는 인도자들은 캠퍼스에서와 같은 마음으로 교회 봉사보다는 양육에 초점을 맞추고 사역해야 합니다.



위 원칙에 의하여 교회내의 청년들의 쎌을 다음과 같이 4가지의 성격으로 나누어 모든 청년들에게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사역의 현장



훈련의 필요


캠퍼스가 지정된 선교지


교회 안에서 활동


 



말씀가운데서 서로 격려



(신앙의 기본 훈련을 받은 자)


1. 캠퍼스에서 말씀을 선포, 돌봄, 및 양육을 하는 자들의 모임. 그러므로 쎌모임에서는 말씀으로 서로 격려하며 사역지의 문제들 및 자신들의 삶을 함께 나눈다.


2. 교회 안에서 쎌을 통하여 서로 격려하는 자들의 모임. 여러 사역들을 감당하며 말씀으로 서로 격려하며 서로의 문제들 및 자신들의 삶을 함께 나눈다.


 



말씀으로 양육



(초 신자)



 


3. 말씀으로 캠퍼스에서 양육 받으며 선교에 동참하는 자들의 모임. 쎌에서는 서로 말씀으로 격려하고 사역지의 문제들 및 자신들의 삶을 함께 나눈다.


4. 쎌을 통하여 말씀으로 양육 받기 위한 사람들의 모임. 서로 돌봄으로 신앙의 훈련하며 자신들의 삶을 나눈다.


모든 청년들의 쎌은 교회의 다른 쎌모임과 같이 교회 내에서 돌아가며 감당해야 하는 기본 사역에 동참합니다 (: 주차사역, 주방사역등).



이런 조직의 개편이나 지속적인 유지를 위하여 몇 가지 필요한 요소들이 있습니다.



1. 제자 삼는 사역이 무엇보다 앞서야 한다. 만약 캠퍼스 선교단체나 교회청년회가 수적 부흥에 관심이 치우쳐 있거나 재미 위주의 모임을 도모하면 세상적 단체의 운영체제의 모습을 띄게 된다. 이럴 때 순수성을 상실하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떠나게 된다.



2. 담임목사님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담임목사님의 목회철학이 다르면 캠퍼스 선교단체는 지역교회와 동역하기가 불가능하며 계속 마찰만 생긴다. 이럴 때는 개별적으로 활동하는 것이 오히려 더 효율적이며 청년들은 자신들의 신앙의 확신에 따라 결정해야 한다.



3. 캠퍼스 선교단체 리더십과 교회 청년회 리더십이 한 마음을 품어야 한다. 그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다. 교회 안이던지 밖이던지 한 영혼이 참 제자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어야 한다. 그 이상의 마음은 이기적인 마음이다.



4. 지역교회의 중요성을 인정해야 하지만 제자양육보다 더 중요할 수 없다. 그렇기에 제자양육을 지역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생각을 포기해야 한다. 성령님의 활동 영역을 인간의 잘못된 인식으로 제한하는 죄를 범하면 안 된다.



5. 모든 결정을 할 때 사랑하는 마음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목적이 있다 할지라도 성령님의 음성을 듣기 힘들어 진다.



물론 이런 조건들이 다 만족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인내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확신가운데 기다리면 하나님의 때에 상황을 이끌어 가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말씀가운데서 모든 인간의 관례와 습관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화정]사랑하는 청년들에게

이코스타 2004년 1월호

매번 무엇인가를 해야할 때면 똑같이 스스로에게 자문하는 것은 내가 과연 이런 일을 할 준비나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입니다. 하지만 늘 들려오는 대답은 너는 아직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 필요하니 하거라. 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부터 나눌 내용이 필요했던 분들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고린도전서 3장 6 7절)


지난 여름에 졸업하기 직전까지 저는 박사과정 학생으로 있으면서 캠퍼스에서 소그룹 성경공부를 인도해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소그룹 성경공부 인도자로서 그리고 유학생으로서 배운 것들을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말씀 듣는 지체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우리를 통해 흘러가게 되므로, 하나님께 말씀을 받는 자로써 은혜를 받고 또한 그 받은 말씀을 전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더 잘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우선, 소그룹 성경공부를 인도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시는지 조금 더 알게되었습니다. 성경공부 인도자로서 가장 감사했던 경험은 성경공부 식구들이 마음을 열고 삶의 자세한 내용까지 믿고 나누어 준다는 것입니다. 많은 시간 그 일들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에 관심을 기울이고 의견을 나누며 시간을 함께 하면서, 때로는 뻔히 보이는 실수를 반복하는 식구들을 보면서 속상해하고 만류도 해보았지만 그들이 원하는 대로 갈 때, 나를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았습니다.


나는 응답할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아직도 내게 요청하지 않았다. 누구든지 나를 찾으면, 언제든지 만나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았다. 내 이름을 부르지도 않던 나라에게, 나는 ‘나 여기 있다. 나 여기 있다’ 하고 말하였다( 이사야65장1절)…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며, 그들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내가 들어주겠다(24절) 표준새번역


마음속에 아픔과 고통을 가진 식구들과 대화할 때, 때로는 그 마음에 제가 들어간 것과 같은 타 들어가는 아픔과 슬픔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그 마음에 힘든 것을 없애주고 싶은 마음을 경험하면서 또한 우리의 아픔과 고통보다 더 아파하시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요한계시록 21장 3 4절) 개역한글


영접하지 않는 형제/자매를 볼 때는 마음에 그리움을 또한 경험하게 하시므로 하나님께서 영접하지 않고 있는 그들을 얼마나 그리워하시는지를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 살게 하신 그 영을, 질투하실 정도로 그리워하신다 (야고보서 4장 5절)


언젠가 기도하면서 같은 기도내용을 계속 반복하는 저 자신을 발견한 적이 있습니다. 다음순간 하나님께서 혹시 들어주시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초조함이 그 내면에 있는 것을 발견하곤, 스스로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세상에서 나를 제일 사랑하는 분에게 같은 것을 부탁했다면, 그 분에게 능력이 있고 그 것이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이라면 나의 소망을 들어 주실까? 대답은 들어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을 통하여서 깨달은 것은 내 안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완전한 신뢰가 부족하다는 것이었고 그 날 이후에는 감히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고 우리의 고통을 아시며, 우리를 그리워하십니다. 말씀을 전하시며 귀한 영혼을 품고 기도하시면,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을 피부로 느끼실 수 있습니다.


둘째로, 맡겨주신 학업이나 일을 하면서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가라 시면 가고, 서라 시면 서서 잠잠히 기다리십시오. 하나님께서 가라 하실 때 부족함을 핑계로 주저하거나 고민하지 말고 하나님께 그 결과를 맡기고 벼랑끝으로 몸을 던지십시오. 그러면 그 벼랑끝에서 받아주시는 하나님의 따뜻한 품을 경험하실 수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주저하거나 고민하는 시간이 너무 많아 감당할 수 있는 일들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서라 하실 때, 마음이 아무리 급해도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때(카이로스)를 기다리십시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시편 37장 5절 7) 개역한글


부지런히 움직이는 자동차 바퀴가 멀리 가거나 아니면 땅을 깊이 파는 것과 마찬가지로, 때로는 하나님께서 가라고 명하셔서 우리 삶의 영역을 넓히시기를 원하지만, 때로는 잠잠히 기다리라고 명하셔서 우리 삶의 깊이를 더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두가 우리의 순종을 필요로 하며 우리의 순종은 하나님께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사무엘상 15장 22절) 개역한글


그러면 가라 하시는 것과 서라 하시는 것, 다시 말해 하나님의 뜻은 어떻게 알 수 있는지에 관한 질문이 생깁니다.


너무나 명백하게도 우선 말씀을 매일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언젠가 들었던 만나에 관한 말씀 중에, 하나님께서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루 먹을 분량의 만나 만을 허락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통한 은혜도 하루분량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은혜를 받으시기 위해서 매일 말씀을 읽으십시오 라는 말씀이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더불어 읽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날 주신 말씀을 묵상함으로 마음에 새기십시오. 그리고 말씀을 암송하십시오. 그래서 그 말씀이 필요할 때, 떠오를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 필요합니다. 또한 기도를 통하여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민감할 수 있도록 깨어있으셔야 합니다. 당연하게도 말씀묵상과 기도의 과정은 완성이라는 것이 없어서 늘 계속되어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는 우리가 세상의 framework과 하나님 나라의 framework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줌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뿐 아니라 우리가 시험을 시험으로 이해하고 극복해나가는 데에도 근본적인 역할을 합니다.


이런 모든 상황에서 더욱더 감사한 것은 우리가 살면서 어쩌다 순종에 실패하고 시험에 걸려 넘어질 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에 우리의 삶의 목표를 고정한다면,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승리로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힘들고 슬픔과 고난이 찾아왔어도 이미 승리하신 예수님 은혜로, 이 모든 고난이 곧 사라질 것입니다. 고난의 때에는 가까이에서 동행해주시는 하나님을 느끼므로 감사하고 기뻐하며, 고난이 없을 때에는 그 것을 또한 감사하고 기뻐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세상 속에서 복의 근원이 되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고후5:15)



[이일형]캠퍼스 사역과 교회와의 협력

이코스타 2003년 12월호

그리스도의 몸은 2-3명의 지체들이 그분의 이름으로 모일 때 형성됩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의 그리스도의 몸이 표현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구조와 질서를 필요로 합니다. 바로 지역교회나 캠퍼스 미니스트리와 같은 조직들을 그분의 몸의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구조나 사역의 접근방법을 취하든 그리스도의 몸은 성장해야 하고 성장은 제자를 삼음으로 이루어집니다. 지역교회는 선교의 모든 분야와 모든 대상을 목적으로 지역적으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세상에 표현된 예수님의 몸 중 가장 기본적 단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캠퍼스 선교에서 사역하는 지체들이 대부분 지역 교회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역교회는 肩?특수 선교에서 사역하고 있는 사역자들을 포용하고 더 나아가 돌볼 수 있는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각 사역들이 가진 특성들이 오랜 시간 지속되다 보면 서로의 장점에서 배울 수 있는 부분들이 오히려 서로의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지역교회는 갓 태어난 어린아이부터 나이 많은 노인분들까지 돌보며 또 교육과 지역봉사 등등을 감당하며 사회 각계 각층이 모이는 하나의 공동체로 자라가려면 많은 인내와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특히 이민 교회의 경우 한인들간의 친교를 도모하려는 경우가 많아 전도와 제자 삼는 사명에 대한 의식이 희미해져 있습니다. 미국주류사회에 진출하지 못하고 소외된 한인들에게는 교회가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사회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런 분들이 중심이 되어 있는 교회는 행사위주이며 권위주의적 체제로 운영되기 쉽습니다.



반면에 캠퍼스에서 사역하는 자들은 특별한 사명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은 동참하지 않습니다. 또한 목적의식이 뚜렷하고 말씀에 붙들려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외로운 생활을 오래 해야하기 때문에 외곬수적인 성격을 가지게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전도의 대상도 젊은 사람들이고 지역교회에 비하면 훨씬 더 균일화되어 있어서 빠른 시일 내에 제자훈련도 가능합니다. 자신들의 시간을 쪼개가며 헌신하기 때문에 캠퍼스 사역 이외에 자신들과 같이 제자 삼는 일과 전도에 집중하지 않은 지역교회의 모습에서 회의를 많이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교회 행사들은 하나의 사치스러운 일들로 간주하기 쉽습니다.



이런 분위기 가운데서 지역교회는 캠퍼스 사역자들을 포용하고 돌보기보다는 하나의 얄미운 존재로 간주하기 쉽습니다. 지역교회 운영 자체에 많은 인력을 필요로 하는데 캠퍼스 사역자들은 이에 필요한 노동력을 제공하기보다는 오히려 있는 노동력마저 무기력하게 만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코스타 참석 후 복음의 참된 의미를 깨달은 교회내의 청년들이 그럴 때가 많습니다. 캠퍼스 사역자들에게는 지역교회에서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거의 모든 사역이 본질적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자신들이 하는 일을 포기하며 도저히 동참할 수 없는 입장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이 두 사역이 서로 협력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나갈 수 있는 것일까?



첫째, 목적의식의 공유이다. 만약 지역교회나 캠퍼스 사역의 목적이 전도와 제자 삼음에 있지 않으면 서로 협력할 필요가 없고 각각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담당하면 됩니다. 상호간의 협력은 목적 공유가 필수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중심으로 제자 삼는 일이 교회의 가장 핵심 된 목적이 되어야 하고 모두가 이에 동참해야 합니다.



둘째, 서로에 대한 이해이다.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는 한 서로의 접근방법과 대상이 다른 것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캠퍼스 사역자들은 교회가 단기선교나 특별 부흥집회등에 큰 가치를 부여하는 것에 대하여 그 나름대로의 유익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 주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교회는 캠퍼스 사역자들이 일주일 내내 자신의 자유시간 없이 선교지에서 수고하고 땀을 흘리는 것을 위로까지는 못해주어도 알아야 할 필요는 있습니다. 그럴 때 비로소 교회사역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마음이 없어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사역의 가장 핵심적인 사역을 이미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서로의 사역에 대한 존중이다. 제자가 삼아지는 한 서로의 사역에 대하여 협력하되 필요이상으로 간섭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오히려 상호간 장점을 배우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교회에서는 쎌 처치의 방법을 캠퍼스 사역에서 이미 오래 전부터 사용해 오던 소그룹중심의 사역의 경험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반면에 캠퍼스 사역자들은 교회 안에 있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의 신앙관과 생활도 용납하고 기다려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미 나이 드신 분들은 혹 잘못된 신앙관을 가지고 있다해도 이를 바꿀 수 없기 때문에 포용해주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서로의 사역에 대하여 존중하게 될 때 자신의 사역에 동참시키기 위해 다른 사역의 희생을 강요하지 않게 됩니다.



아쉽게도 현실적으로 셋째 단계에까지 이르는 경우는 드뭅니다. 그래서 지역교회와 캠퍼스 사역간에 많은 충돌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현재 미국에 있는 한인 기독인들의 현실입니다.



한가지 좋은 예



워싱턴 디씨에 있는 한 교회는 이런 갈등을 점진적으로 해결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 교회는 그 지역 캠퍼스 사역의 근거지 역할로 사용되며 갈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청년층을 포용하려고 노력합니다. 오늘 이런 발전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은 그 교회 담임 목사님과 캠퍼스 간사들의 헌신과 신념입니다. 그 교회에 소속되어 있는 캠퍼스 간사들은 수년동안 조용하게 캠퍼스에서 헌신하며 많은 열매를 맺게 되었고 그 담임목사님은 그들을 뒤에서 알게 모르게 도우시며 또 이런 그들의 열매를 보시며 그들이 교회에 들어올 수 있도록 포용하신 것입니다. 그 방법은 그들의 사역을 인정해주고 가끔씩 직접 캠퍼스에 오셔서 말씀도 전해 주시고 그들이 교회에 평안하게 예배드릴 수 있도록 반갑게 늘 맞이해 주신 것입니다.



가장 최근에는 교회에서 주일에 또 하나의 예배를 시작하시면서 그 예배의 모든 운영과 진행을 캠퍼스 간사들이 중심이 된 청년들에게 맡겼습니다. 그 담임 목사님의 신념은 청년들이 전도되어 제자로 자랄 수 있다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캠퍼스 사역이 교회의 청년사역과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기 시작하고 교회에 청년층이 자랄 수 있는 좋은 바탕을 형성하였습니다. 캠퍼스 간사들은 자신들이 캠퍼스에서 하던 제자 삼는 일을 이제는 교회 안에서도 쎌 처치의 형태로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교회에 오는 청년들은 (물론 캠퍼스 사역을 통하여 오는 경우가 대부분 이었지만) 캠퍼스에서든 교회 안의 쎌에서든지 훈련받을 수 있는 선택의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이 교회에는 오래 전부터 주일 저녁예배도 없애고 가능한 한 행사를 하지 않습니다. 가족끼리의 시간과 세상에서의 빛으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비 본질적인 것은 제거한 것입니다.


이런 결정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담임목사님으로서는 자신의 영향력을 스스로 제한시키는 것이며 불확실성에 사역의 일부를 내어놓는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내에 또 청년사역을 탐하는 많은 사역자들을 물리쳐야 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어른들을 설득시켜야 하는 일도 쉽지 않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에 대한 확신이 없거나 자신의 유익보다 그리스도의 유익이 앞서지 않으면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자신 (혹은 우리)만이 할 수 있다는 교만이 없어지기 전에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몸이 성장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캠퍼스 사역자들이나 캠퍼스에서 훈련받은 자들이 40-50대까지 캠퍼스에 머물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시간이 되면 그 누구보다도 더 잘 훈련된 교인의 한 명으로 그 교회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하나님의 일군들이기 때문입니다.



[김보경]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이코스타 2003년 11월호

첫 학기



처음 미국에 유학 와서 짧은 여름방학동안 랭귀지 코스를 듣고 토플을 본뒤 가을학기에 파트타임으로 대학 강의를 듣게 되었습니다. 첫 학기 첫 수업… 나름대로 머리를 써서 영어를 많이 안써도 되는 물리와 수학을 신청했는데 물리 첫 수업을 듣고 나오면서 근심에 쌓였습니다. 교수의 강의가 거의 안 들렸기 때문입니다.  더운 여름동안 열심히 공부해서 어렵게 대학에 들어왔는데 첫 수업을 받고 나오면서 드는 생각이 “F 받게 생겼군… 첫 학기부터 쫒겨날 것 같은데… 만약 내가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한다면 정말 그건 하나님이 내게 기적을 베푸신 때문일거야” 였습니다.



그 때 저보다 유학 2년 먼저 온 선배와 우연히 같은 수업을 듣게 되었는데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저 선배는 2년 먼저 왔으니까 수업이 잘 들렸겠지… 저 선배랑 그룹스터디라도 해야지 안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수업이 끝나고 선배에게 찾아가 학생회관에서 만나 함께 공부하기로 약속했습니다.



저녁에 학생회관에 온 선배는 책가방을 열더니 교과서가 아닌 성경책을 꺼냈습니다. 그 때까지 성경은 교회에서만 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저에겐 책가방에서 나오는 성경책이 참 생소하게 느껴졌습니다.  ‘오늘 교회에서 예배가 있었나보지?’ 라고 생각하면서 “왠 성경책이에요?” 라고 묻는 제게 선배는 “같이 보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 라면서 갈라디아서 2장을 폈습니다. 18절 부터 20절까지 한 절씩 돌아가면서 읽자고 하는 선배의 말에 어색해 하면서 한절 한절 읽어 내려갔습니다. 



마지막 구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를 읽고 나서 선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지난 2년 동안 유학생활을 해보니까 참 힘들고 특히 주위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이 사는 사람들은 많이 방탕한 길로 빠지더라. 너는 이제 처음 유학생활을 시작하고 아직 순수한 신앙을 가지고 있으니까 이 말씀처럼 믿음 안에서 유학생활 잘 시작하라고 이 말씀을 주고 싶었어”



산 앞에서



그렇게 시작한 저의 유학생활은 선배의 말처럼 한 학기도 맘 편히 시작한 적이 없던 힘든 시간의 연속이었습니다. 매 학기 시작할 때마다 시편 121편을 떠올리며 “산처럼 느껴지는 이번 학기지만 또 그 산을 향해 눈을 듭니다, 주님 도와주세요” 라고 금식기도로 시작했던 기억이 납니다. 중간에 ‘포기하고 돌아갈까’ 라는 생각도 많이 했었습니다.



공부의 어려움도 그랬지만 한창 청년의 때에 한국 사람이 별로 없는 곳에서 유학생활을 하며 느끼는 외로움도 컸던 것 같습니다. 대학에 들어간 고등학교 동창들이 ‘미팅했다, 엠티갔다, 축제 기간이었다, 동아리 활동이 재밌다, 남자친구 생겼다, 남자친구 군대갔다, 남자친구랑 헤어졌다’ 는 평범한 한국 대학생의 삶을 전해올 때면 마음이 싱숭생숭해지곤 했습니다.



언어와 문화의 장벽은 말 그대로 벽처럼 느껴졌습니다. 한국에선 하고 싶은 말 다하고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살았는데 언어의 벽 앞에 처절히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구나” 느낀 적도 많았습니다. 김치 냄새가 나니까 주 중에는 김치 먹으면 안된다는 것도 처음엔 “왜 남의 나라 음식을 가지고 뭐라고 그러지” 라며 기분이 나빴지만 어느 날 부턴인가 수업을 받으러 갈 때 향수를 뿌리고 있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왜 내가 이 곳 남의 나라까지 와서 공부해야 하는가… 왜 단지 영어를 못한다는 이유로 이렇게 주눅들어야 하는가.” 어쩌다 제가 이 곳에서 이방인이라는 것이 피부로 느껴질 때면 수없이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입니다.



달고 오묘한 그 말씀



스스로에게 물어도 답이 안나오면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귀에 들리게 음성으로 말씀해 주시면 좋은데 아무리 때를 쓰고 졸라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다는 성경공부 선생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성경을 펴보았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보는 습관도 제대로 안되어 있어서 막상 말씀을 보고 싶어도 어디를 봐야할 지 몰라 대강 중간을 폈습니다. 그러면 늘 이사야나 시편이 나왔습니다. 처음엔 한 두 절 읽다가 전혀 이해가 되지 않고 하나님이 나에게 뭐라고 하시는지 느껴지지 않아 그냥 덮었습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제게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말씀인데도 그 말씀을 또 보고 싶고, 더 알고 싶은 갈급함을 주셨습니다. 얼마 후에는 아무렇게나 편 말씀이 별 감동이 없으면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 나올 때까지 계속 읽게 되었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시 42:5>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사야 41:10>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이사야 12:2>



그렇게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 생길 때 마다 손으로 직접 적고 싶은 마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영어단어를 외우는데 쓰려고 구입했던 3×5 인덱스 카드에 한절 한절 적어나갔습니다.  처음엔 한 두장 되던 것이 시간이 갈 수록 고무줄로 묶어야 할 정도로 많이 쌓여갔습니다. 말씀이 조금씩 달게 느껴졌고 나중엔 성경을 더 알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한절 또는 한 장씩만 보던 말씀이 성경 한권 한권 보게 되고 나중엔 성경 전체를 읽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보며 제가 왜 이 곳까지 와서 이 고생을 하며 공부를 해야 하는 지 조금씩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제가 원했던 “목소리”가 아니라 성경의 인물들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는 말씀들을 통해, 예수님이 문둥병자와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시는 말씀들을 통해, 바울이 교회들에게 쓴 편지들을 통해, 그리고 요한이 마지막 때에 일어날 일들을 쓴 것을 통해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람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믿음의 여정을 시작한 것처럼, 그래서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었던 것처럼 저도 본토 친척 아비의 집, 너무나 익숙하고 편해서 하나님 없이 살아도 별 불편을 모르던 곳을 떠나 이 먼 미국까지 와서야 이 세상은 믿음으로 사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미국 사람들 속에서 공부하고 생활하다 문득 문득 느끼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저는 나그네요, 이방인이었습니다. 언어와 문화의 장벽 앞에서 느낀 것처럼 제가 할 줄 알고 익숙하다고 여기던 것들이 모두 아무것도 아니었고 저는 아무에게 아무 것도 내놓을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말씀을 통해 발견한 저의 정체성은 은혜 없이는 못사는 죄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한 순간도 살 수 없는 연약한 자였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지명하여 부르시고 “너는 내 것이라” 인치신 자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였습니다.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였습니다. 왕 같은 제사장이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지 않으면 끊임없이 나를 짓누르는 외로움과 열등감과 무기력함을 다른 것으로 채우기 위해 공허만이 가득한 세상의 것을 향해 허덕이며 달려갈 수 밖에 없는 불쌍한 자였습니다.



빨리 돌아가고 싶어요



시간이 흘러 하나님의 은혜로 대학을 졸업하게 되었고 이제는 제가 선배가 되었습니다. 이제 막 유학생활을 시작한 교회 후배가 어느 날 전화를 했습니다. 평소에 별로 말이 없던 후배가 전화해서 얼마 전에 있었던 청년회 월례회에 못가서 죄송하다고 합니다. ‘내가 그렇게 무섭게 보였나?’ 싶어서 “뭐가 죄송하다는 거야? 괜찮아, 사정이 있으면 못 올 수도 있지” 라고 웃으며 말했습니다. 의외로 부드럽게 받아줘서 마음이 놓였는지 “언니, 고마워요” 라면서 조금 마음을 열고 고민을 얘기합니다.



“언니, 저는 사실요, 빨리 마치고 빨리 돌아가고 싶어요. 그래서 이번학기에 19학점 듣거든요. 3년 만에 마칠려고요. 저는 여기가 너무 싫어요. 교회봉사는 해도 청년회 활동 같은 것 하기 싫고요. 시간 낭비 같아서요.”



솔직하게 말을 해주니 고마웠지만 한편으론 안타까웠습니다. 인생의 중요한 기회를 그저 통과해야 할 관문, 필요악으로 여기는 것이… 빨리 해치우려는 그 3년이라는 시간은 한 사람의 영혼의 변화되고 훈련 받기에 충분한 시간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랬기 때문에…



후배에게 참 안타까운 마음으로 유학생활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것인지, 또한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복된 시간인지 얘기했습니다.



마치 첫 학기에 어떻게 하면 성적을 잘 받을까 생각하며 그룹스터디를 제안한 제게 성경책을 들고 나타나 “그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유학생활을 하라고 했던 그 선배의 그런 안타까운 마음으로 말입니다.



그 통화 이후 제 말 때문이 아니라 그 후배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으로 후배가 조금씩 마음을 열고 찬양하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며 감사했었습니다.



복 있는 자



복 있는 사람, 성경에서 말하는 복된 자는 출세가도를 달리는 자도 아니요, 외모가 출중한 자도 아니요, 재주가 뛰어난 자도 아니요, 머리가 좋은 자도 아니요, 부유한 자도 아니었습니다.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 송이 꿀보다 말씀이 더 달다고 고백할 수 있는 자,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며 혼자서는 세상을 살 수 없다고 부르짖는 자, 이 세상은 내 집이 아니라 나에게는 돌아갈 본향이 있다고 나그네의 삶을 고백하는 자, “나의 나 된 것은 오로지 주의 은혜라”며 내가 아무 것도 아님을 아는 자였습니다.



그러기에 유학생활은 내 삶의 성공을 위해, 남들도 다하니까,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치뤄야 할 관문이 아니라 그 과정 자체가 복되고 귀하다고 생각합니다.  영어가 안 되서 열등감에 쌓인다 해도, 견딜 수 없는 외로움으로 눈물이 난다 해도, 보이지 않는 미래로 인해 불안에 휩싸여 있다 해도, 물 위에 기름처럼 겉도는 이방인의 삶이 서럽게 느껴진다 해도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해 그 아들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습니다 (로마서 8:31-39). 우리는 그 분의 것이기 때문에…



조금 무시당하고, 아파하고, 좌절하고, 실패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나는 누구인지, 내가 무엇을 위해 또 왜 살아야 하는지 깨달을 수 있다면 내가 처한 고난의 자리는 사실 놀라운 복이 넘치는 감사의 자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학생활은 복된 것이고 힘들게 유학생활을 하며 하나님을 알아가는 나는 복된 자입니다.



젊음을 주께 바치라



힘들고 지치는 유학생활



언어도 생활방식도 다른 낯선 환경 속에 적응하는 것만도 벅찬데 학업이라는 무거운 짐과 외로움과 고독이라는 큰 벽이 우리 앞에서 우리를 짓누르며 힘들게 합니다



때로는 너무 힘들고 지쳐서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고, 삶의 목적조차 불투명해져 방향을 잃고 헤메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힘겨워 하며 아파할 때 우리 마음 한 켠에서 애타게 우릴 부르시는 분이 계십니다.



당신과 저를 사랑한다고 애타게 외치시는 예수님



이제 귀를 열어 그 분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이제 눈을 들어 그 분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그 분과의 만남을 통해 당신의 삶의 목적과 소망이 어디에 있는지 재 확인해 보십시오.



당신을 이 분과의 만남에 초대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대학 3학년 때 섬기는 교회에서 유학생을 위한 집회 “젊음을 주께 바치라”를 준비할 때 쓴 초대의 글입니다.)



[임성우]부자청년의 고민과 나의 결정

이코스타 2003년 10월호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 대 (마태복음 19장 16 27절)


과거에 마태복음의 부자청년의 이야기를 보면서 이 청년, 참 어리석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냥 순종하면 되지 뭘 그렇게 고민했을까 말이다. 그런데, 부자청년의 고민이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사건이 있었다. 그 사건 속에서 내가 바로 고민하는 부자청년이 되어 버렸다.


두 가지 사건
(1).1995년, 1996년
포기할 때 채워주시는 은혜. 그 감격을 누린 적이 있었다. 대학교 2학년 2학기. 경영학도인 나는 2학년이 끝나면 무슨 일이 있어도 군대에 가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것이 선배들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최고의 코스였다. 대학2년, 군대, 어학연수, 나머지 2년, 취직… 이렇듯 빈틈 없이 준비했다. 편하게 가고 싶어서 카투사 준비도 해서 시험도 보았고, 서클활동을 하며 배운 악기실력을 가지고 군악대 시험도 보았다. 두 가지가 다 안 되도 군대에 갈 수 있도록 입영 원도 일찌감치 내 놓았다. 누가 뭐라 해도 나는 군대를 가야 했고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이러한 철저한 계획에 틈새를 가게 한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교회 대학부 임원이었다. 우리 교회는 전통적으로 대학교 3학년의 나이가 되는 형제, 자매들을 대학부 임원으로 선출하였다. 당시 찬양 팀에서 섬기고 있던 나에게 형, 누나들은 찬양팀 장으로 섬기라고 섭외를 하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내 인생의 계획을 찬양팀 1년 섬기는 것 때문에 바꿀 수 없었다. 그러나, 95년 가을은 내가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그렇게 준비하고 믿었던 카투사와 군악대 시험에서 난 낙방을 하고 말았다. 큰 두개의 시험 사이로 3번 정도 보았던 운전면허 시험에서조차 난 떨어졌다. 뭐 대단한 실패는 아니었지만, 이제껏 낙방에 익숙하지 않던 나에게 짧은 시간동안 발생한 연속적인 실패의 충격은 컸다. 임원총회가 있는 11월 중순이 다가오면서 이전의 내가 상상하지도 못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군대 1년 미룰까?


내 계획에 없던 대학교 3학년은 쉽지 않았다. 돌아온 복학생들의 공부하는 모습에 나 스스로 메뚜기처럼 느껴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의 부족함 가운데 자연스럽게 기도할 수밖에 없었고, 주님은 이제 막 첫 포기를 한 나에게 기적과 같은 성적을 거두게 해 주셨다. 내가 포기한 작은 것에 넘치도록 채우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었다. 이 외에도 96년 한 해 가운데 하나님은 성적, 친구, 사역, 선교여행 등등 세상 누구도 부러워 할 것들로 가득 채워 주셨다.


(2). 2002년, 2003년
날이 갈수록 나빠지는 미국경기, 대학원 시작한 게 엊그제 같은데 금새 마지막 학기로 이어지고 있었다. 누구나 다 하게되는 진로문제. 나에게 있어서 가장 큰 결정은 한국에 가느냐 미국에 좀 더 있느냐에 있었다. 졸업을 하게 되면 반드시 사회에 나가서 직장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 오랫동안 내가 가지고 있던 신념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낭비는 무슨 일이 있어도 용서될 수 없었다. 그것은 숨가쁘게 진행되는 경쟁사회에서 낙오를 뜻하는 것이었다. 예전대로라면, 직장을 따라 어디로든 가야 했다. 하지만, 나의 발목을 잡은 것이 있었다. 대학원 2학년 들어오면서 시작한 Campus Bible Study 간사의 사역이었다. 내가 맡고 있던 그룹은 82년부터 84년 사이에 태어난 학부 1학년, 2학년 학생들이었다. 말씀을 준비하고 가르치는 가운데 하나님은 나를 변화시키셨고, 나를 위해 죽으시고 고통 당하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가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다가왔다. 그 은혜와 사랑이 감격스러워 “예수님 사랑합니다” 라는 고백을 진심으로 할 수 있었고, 요한복음 21장의 예수님의 말씀인 “나의 양을 치라”.는 나를 향한 개인적인 명령으로 다가왔다.


중대한 결정 앞에 한 영혼은 진정 크게 다가왔다. 영혼과 나의 확실한 미래를 사이에 두고 고민이 시작되었다. 결정을 앞두고 교포친구에게 물어보았다.“”Bible Study때문에 미국에 더 있는다는 것이 이해가 되니?“ 친구의 답은”It does not make sense.“ 였다. 그렇지만, 확실한 미래를 나는 어렵지 않게 포기할 수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예수님께서 주신 영혼을 섬길 수 있는 기회에 나의 마음이 이미 기울어져 있었다. 영혼에 대한 소중함과 더불어, 예전에 경험했던 포기에 대한 채워짐의 확신 또한 강하게 작용했던 것 같다.


하지만, 졸업후의 현실은 정말로 만만하지 않았다. 분명 신앙의 연륜은 깊어졌는데, 하나님과 더 가까워 진 것 같은데, 96년에 있었던 것과 같은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Bank account에 날마다 돈이 줄어들고, 어렵사리 하게 된 인터뷰를 통과하는 건 더 어려웠다. 눈에 보이는 기적 없이 3달이 지나가니 자연스럽게 불평이 나오기 시작했고, 나의 결정에 대한 후회마저 들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내 기도를 듣기는 하신 걸까? 포기는 분명히 했는데, 하나님은 왜 안 채워주시나?


축복과 형통에 대한 탐구 달리 생각해 보기로 했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지나온 3개월을 돌아보니 하나님은 어느 때보다 더 신실하게 내 삶 가운데 역사하고 계신걸 깨닫게 된다. 물질적인 채우심보다 더 크고 중요한 영적인 채우심을 진행하고 계셨다. 어려움 덕분에 기도의 시간과 말씀 보는 시간이 늘게 되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은 다시 한번 십자가의 사건을 더 분명히 깨닫게 하셨다. 이미 주신 그 사랑, 그 크신 사랑이 나를 채우니 나는 부자가 되었다. 간구하기가 어려웠다. 그 은혜와 사랑은 나의 낮아진 맘 가운데 더 강하게 더 깊게 부어졌고, 더 많은 사람을 이해하게 되고 더 품을 수 있게 되었다.


일련의 사건을 통해 나의 물질 관과 성공 관이 변화되고 있음을 확신하게 된다. 소유와 성공에서 자유하지 못하면 예수님 따라가는 삶이 얼마나 온전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 세상은 고통과 고난의 연속이며, 고통과 고난은 피할 수 없는 엄연한 현실이다. 고난과 고통에 대한 진정한 해답은 일일이 구체적인 해결안을 찾는 것이 아니라, 다시 올 천국에 대한 확실한 그리고 진실한 소망을 갖는 것이다. 영원한 것에 대한 소망, 그리고 세상을 품을 수 있는 넓은 마음. 하나님이 주신 너무도 놀라운 채움 앞에 신실하게 나를 사랑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