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성]유학생 사역과 찬양

이코스타 2004년 11월호

이 곳 워싱턴 디씨 지역에서 유학생 사역(Korean Bible Study(KBS))으로 섬긴지 약 2년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항상 동행하신 예수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저희 사역은 금요일에 모여 함께 말씀을 나누며, 모임에 참석하는 지체들을 말씀 위에 스스로 서서 참 제자로 살아가도록 돕는 것입니다. 물론 말씀을 깊게 연구하는 것이 사역의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찬양 사역 또한 여러 가지 측면에서 말씀 사역과 병행되고 있습니다. 작은 규모로는 금요일 성경 공부 모임에서, 크게는 매 년 두 차례 모이는 지역별, 전체 수양회에서 찬양팀을 통해, 또는 각 모임의 재량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유학생 사역 안에서 바라보는 찬양 사역에 대해 짧게 다루고자 합니다. 시중에 이미 나와 있는 전문적인 서적들과 비길 수는 없겠지만, 말씀 연구 위주의 사역 안에서 찬양 사역을 꿈꾸는 지체들에게 작은 보탬이 되길 기도합니다.


가끔씩 함께 지내는 지체들 속에서 쉽게 쓰는 말로 ‘feel’이 꽂힐 때만 찬양을 하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하나님께 찬양드릴 마음이 생겨야만 찬양하는 것입니다. 몸이 피곤하거나 나의 마음이 깊은 고통으로 인해 괴로워할 때, 찬양은 생각하기 힘든 옵션이 되고 맙니다. 그럴 때는 차라리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다른 일들을 하고 싶습니다. 모임 전에 기타에 맞춰 부를 찬양들이 마음에 불평을 불러일으킵니다(한 번쯤 소그룹에서 찬양을 인도해보신 분이라면, 저 뒤에 모자를 푹 눌러 쓰고 팔짱을 낀 채 시무룩하게 앉아있는 친구가 어렵지 않게 떠오를 것입니다). 마음이 너무 편해도 찬양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할 수 있는 다른 무엇인가를 찾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이런 사람은 언제 찬양을 하게 될까요? 뭔가 내 자신 안에 ‘쥐어짜는 듯한 마음’이 있어야만 진정한 찬양을 드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구할 것이 있거나, 마음으로 담아내기 힘든 어려움이 있을 때만 찬양다운 찬양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찬양은 ‘곡조가 담긴 기도’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런 분들에게 박수 치면서 부르는 찬양은 정말 곤욕일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뻐 뛰노는 모습은 경박스럽기만 합니다. 이런 모습들을 잠시 떠올리면서 찬양은 우리에게 하나의 선택으로 전락해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시편 기자는 우리와 조금 다른 시각으로 찬양을 본 듯 합니다. 그는 시편 33:1통해 말합니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의 마땅히 할 바로다.’ 찬양은 의인들의 마땅히 드려야 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신약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의인됨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케 됨을 의미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모든 사람들은 마땅히 찬양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땅히’라는 단어는 강제성을 내포하고 있는 듯 합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여기서 쓰인 ‘마땅히’라는 말은 ‘아름답다’는 뜻의 ‘나베’라는 히브리어가 쓰였습니다. New American Standard Bible에는 ‘becoming’이라는 단어가 쓰여있습니다. ‘어울린다’는 말입니다. 찬양하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것, 어울리는 것이라면, 찬양은 정말 선택적인 것입니까? 개역한글의 번역이 잘못된 것일까요? 저는 의미상으로 바른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찬양을 하지 않을 경우를 한 번 생각해봅시다. 마치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것과 같습니다. 아름다움의 반대인 ‘추함’을 입게 됩니다. 추함이라는 강한 단어를 쓰지 않더라도, 썩 좋아보이지 않는 모습이라면 어떨까요? 어떤 분들은 썩 좋아보이지 않아도 편하게 있으면 그만이지 않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충분히 동감할 수 있는 말입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정장에 넥타이까지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경우에 따라 저의 개인적 성향을 잠시 무시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언제일까요? 정장이 꼭 필요한 시간입니다.


마태복음에 왕의 잔치에 초대 되었던 한 사람을 기억하십니까(마태복음 22:11 13)? 왕의 혼인 잔치에 오려는 사람이 없자 사거리 길에서까지 사람들을 불러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여기 이 사람도 불려 왔습니다. 추리닝 바지에 티셔츠를 걸친 아주 편한 차림으로… 그런데 이게 왠 일입니까? 불러올 때는 언제고 이제는 내어 쫓김을 당합니다. 불러드릴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예복’을 입지 않았다고 잔칫상의 진수성찬을 뒤로 한 채 그대로 쫓겨났습니다. 이 사람은 쫓겨나서 아주 서럽게 울었다지요? 요즘은 그렇지 않지만, 왕이 있었던 시대에는 왕의 행차에 절하지 않는 사람은 극한 처벌을 받았습니다. 왕의 백성으로서 왕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는 것은 ‘죄’인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다시 한 번 말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시편 29:2)’ 왕 앞에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아가는 것은 마땅히 행해야 하는 행동입니다. 하나님 앞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what’s becoming) 옷을 입고 나아가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바입니다. 우리가 찬양으로 하나님 앞에 서있지 않다고 해서 그분께서 우리를 바로 죽음으로 내모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를 위해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가슴에 담고 살아가는 천국의 백성이라면, 그리고 구원에 대한 깊은 감사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왕 되신 주님 앞에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항상 서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로 찬양의 모습으로 말입니다. 그분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드리워지는 것이 보이십니까?


학생의 때는 감정이 가장 민감한 때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상황과 사건에 따라서 바뀌는 감정. 그리고 그 감정 속에서 흔들리는 신앙, 그 안에서 찬양은 언제나 합당한 것이라는 개념을 받아드리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찬양은 사람의 감성과 깊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상황에서 야기되는 감정을 뛰어넘는 찬양을 드리는 데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 속에서 더 아름답게 찬양한 사람이 있습니다.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이러므로 내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내 손을 들리이다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내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내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밤중에 주를 묵상할 때에 하오리니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거이 부르리이다
(시편 63:3-7)


시편은 다윗의 찬양하는 삶을 잘 보여줍니다. 특별히 시편 63편은 다윗의 넘치는 기쁨과 감사가 ‘충만하게’ 표현된 시 중에 하나입니다. 입술로 찬양하고, 손을 들고 찬양하며, 또한 기뻐합니다. 잠을 청할 때도 하나님을 기억하며 묵상하고 찬양합니다. 다윗은 정말 찬양으로 가득찬 사람이었습니다. 이 구절을 통해 우리가 주시해야 할 것은 이 시가 쓰여진 당시의 상황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아들이었던 압살롬의 반란으로 인해 광야로 도망치던 중에 이 시를 썼습니다. 왕으로서, 아버지로서의 체면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고백합니다. 주님의 인자하심… 골수와 기름진 음식… 그리고 하나님의 도움을 인해 그는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억지로 하는 찬양이 아닙니다. ‘즐거이 부른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가 그렇게 찬양했던 제목들이 그의 눈 앞에 있었습니까? 도망치는 자에게 어떤 인자하심과 도움이 있었겠습니까? 어떤 기름진 음식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겠습니까? 다윗 왕의 행렬에 욕을 하고 돌을 던졌던 사람의 이야기를 보아도, 다윗의 행렬이 얼마나 급하고 초라한 것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찬양합니다. 진실과 전심으로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다윗에게 ‘찬양은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 하나님의 인자하심, 하나님의 전능하심, 하나님의 선하심, 하나님이라는 분에 대한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비록 다윗의 앞에 모든 것이 초라했지만, 다윗은 그것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 뒤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진정으로 보았기에 그는 즐거이 부를 수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찬양은 이 실상을 고백으로 끌어내는 통로입니다. 우리는 우리 앞에 펼쳐있는 상황이 어떻든지 하나님께서는 선하시며, 모든 일에 주관자 되심을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이 우리 가운데 있을 때, 언제나 합당한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됩니다. 감정의 기복을 뛰어 넘는 찬양을 드리게 됩니다. 이러한 믿음이 담긴 찬양을 하나님은 흡족하게 받으실 것입니다(히브리서 12:6).


이제 이런 아름다운 믿음의 고백을 어떻게 소그룹 안으로 가져 올 수 있을지 잠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소그룹 안에서는 대개 한 명이 기타나 다른 악기를 가지고 찬양을 인도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적게는 한 명, 많게는 10명 정도의 지체들이 함께 할지 모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찬양을 인도하는 스타일이나 가창력, 또는 악기 연주 실력에는 그렇게 비중을 두지 않습니다. 부차적인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찬양의 내용이며, 찬양을 준비하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우선, 찬양은 그 날 나눌 말씀을 반영할 수 있는 곡을 생각하며 선정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찬양의 본질적인 목적은 앞에서 나눈 것과 같이 왕 되신 주님께 아름다운 모습으로 서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 공부 전에 드려지는 찬양은 다른 부차적인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함께 있는 지체들의 마음으로 말씀을 향해 열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찬양을 통해 그분께 가까이 나아가고, 이제 그 안에서 열린 마음으로 말씀을 대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부차적인 목적 때문에 하나님께 드려져야 할 찬양이 사람에게 맞춰져서는 안되겠습니다. 여기서 ‘맞춰진다’는 것은 찬양의 템포나 스타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찬양을 준비하는 인도자의 마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하나님께 드릴 찬양을 준비하되, 찬양의 드려짐을 통해 사람 안에 역사하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너무 그날의 말씀과 찬양을 끼워 맞추려는 노력은 피해야 할 것입니다. 찬양곡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부분은 여기서 다루지 않겠습니다. 찬양의 흐름에 따라 찬양곡을 선별하는 것은 인도자에게 중요한 일입니다.


인도자로 세움을 받으시는 분들은 찬양 가운데 생활하시기를 권면합니다. 가급적이면 항상 찬양을 들으시고, 마음으로 깊이 배우시기 바랍니다. 찬양의 가사들이 자신의 고백이 되어야 하고, 또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대부분 말씀을 통해 당신의 뜻을 알리시지만, 이제 찬양으로도 그렇게 하시도록 하기 위해 찬양 속에 깊이 들어가 있으시길 권면합니다. 몇몇 소그룹이나 수양회에서 찬양을 인도하는 분들이 어려움을 토로하는 것을 듣습니다. 그룹 멤버들이나 회중을 같은 열정으로 찬양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너무 어려운 일이라고 합니다. 사실입니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리고 소그룹이 큰 회중보다 어려울 것입니다. 소그룹 안에서 혼자 열심히 찬양하고 있는 그 어색함을 상상하고 계신가요? 궁극적으로 ‘찬양’이 여러분의 삶을 통해 지체들에게 드러나게 하십시오. 몇 번의 감성적 노래 부르기는 가능하지만, 진정한 찬양은 가시적인 요소만으로 드려질 수 없습니다. 인도자의 삶에 깊이 뿌리내린 찬양의 영성으로만 함께 찬양하는 이들을 권면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먼저 깊은 영성의 찬양으로 하나님 앞에 설 때, 성령님께서 여러분을 channel로 사용하셔서 잠들어 있는 지체들의 영혼을 깨우실 것입니다. 지체들이 변하는 시간이 오래 걸려서 인도자가 지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사람을 보지 말고, 찬양의 대상을 항상 바라보아야 합니다. 인도자로써 온전한 channel이 될 수 있도록… 그리고 함께 찬양하는 지체들을 항상 하나님께 기도로 올려드리십시오.


우리는 왕 되신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항상 그분께서 함께 있으리라 하셨기에 항상 왕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항상 찬양을 불러야 할까요? 네, 그렇습니다. 항상 불러야 합니다. 길을 걸을 때에도, 운전할 때에도, 잠이 들 때에도, 아침에 일어날 때에도 항상 부르십시오. 환란 가운데서도, 처절한 슬픔 가운데서도, 삶의 막다른 골목에서도 믿음으로 부르십시오. 그분의 선하심을 믿는 삶으로 부르십시오. 항상 아름답게 드려질 믿음으로 예배, 곧 예배의 삶으로 부르십시오. 삶의 모든 순간을 주님께 아름다운 제사로 드리십시오. 그것이 곧 찬양입니다. 그것이 영감 있는 찬양입니다. 하나님이 흡족히 여기시는 노래입니다.


교실 한 구석에서 모자를 눌러 쓰고 심통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형제 혹 자매가 보이십니까? 그 지체에게 아름다운 믿음의 예복을 입혀줍시다. 이제 예수님께서 곧 행차하신다고 합니다.

[이주옥]유학생 사역을 돌아보며

이코스타 2004년 10월호

저는 미국에서 9년 동안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두 달 전에 한국으로 귀국했습니다.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났던 곳도 미국이었고 또 거기서 제 짧은 인생의 가장 긴 시간을 살았기 때문에 애착이 많이 가는 곳이기도 합니다. 저는 거기서 유학생으로서 또 유학생들을 섬기며 경험했던 하나님의 은혜를 부족하지만 나누려고 합니다. 그런 부족함들은 그분이 채우시리라 믿으면서 말입니다.


우선 저는 고등학교 때는 동네 교회 출석으로 제 “크리스천 임무”를 다한다고 생각했었고 대학교 때는 영어로 하는 성경공부를 나갔습니다. 그때도 소그룹 리더이긴 했지만 적극적으로 섬겼다기 보다는 이미 모임을 잘 나오는 친구들을 끼고 있었다는 표현이 더 맞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대학교를 졸업하고 직장 때문에 워싱턴 디씨를 오게 되면서 KBS (Korean Bible Studies)라고 하는 한국인 성경공부를 나가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주어졌던 한국인 유학생 사역은 KBS란 채널을 통해서 이루어졌지만 이 글에서는 KBS란 성경공부보다는 제가 경험하고 느낀 유학생 사역에 대해서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글을 읽고 계신 많은 분들이 유학 경험이 있으시거나 유학생들이셔서 다들 잘 알고 계시겠지만 유학생 사역의 가장 핵심 부분을 꼽으라면 저는 관심과 사랑 그리고 그것을 통해 얻어지는 신뢰라고 생각합니다. 관심, 사랑, 신뢰는 떨어져서 하나하나씩 단계적으로 쌓아지거나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가지 모두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들이기에 함께 말씀 드리겠습니다.


가족들과 친구들 그리고 나에게 익숙한 모든 것들을 뒤로한 채 어떠한 목표를 갖고 미국이라는 땅덩어리에 오셨습니까? 언어, 문화, 음식, 사고방식이 다른 나라에서 그 목표만 바라보고 버틸 수 있을 것이라고 많이 들 생각하지만 제가 만났던 대부분의 유학생들은 극복하고 있다기 보다는 겨우 연명하고 있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멀쩡하고, 교우 관계도 좋고, 성적도 잘 나왔지만 미국에서 느끼는 이질감과 외로움을 표출할 수도 해소할 수도 없는 그런 공적인 상태에 있는 친구들을 많이 봤습니다.


이런 친구들을 온전히 채워주시는 분은 예수님이라고 성경은 저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골로새서 1장 9절)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히브리서 10장 4절)


가질 수 있는 건 다 갖은 것 같은데도 자꾸 허전하고 만족하지 못하는 저희들에게 완전함이 무엇이며 또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직접 보여주셨고, 가르치셨던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유학생 시기에 가장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이 드는 것도 이 혼란의 시기는 저희가 가장 vulnerable한 상태에 있는 바로 그때이기 때문입니다. 인정하던 그렇지 않던 성경에서 만난 예수님은 육적으로나 영적으로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셨습니다. 가장 가깝게 지내셨던 가난한 자, 병든 자, 창기들…이들은 사회적으로 위기에 처한 이들이었습니다. 유학생의 처지도 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시기에 저희의 구주이신 예수님을 접하게 하고 그 분을 개인적으로 만나게 도와주는 것이 아주 효과적이라는 결론도 내리게 되었습니다.


일단 유학생들은 관심을 갈망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들에게 잘 보이기 위하거나 좋은 인상을 심어주기 위한 관심이 아닌 한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품는 관심이어야 합니다. 위에 언급했듯이 관심과 사랑 그리고 신뢰가 연관되어있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호감을 사기 위한 관심은 몇 번의 연락과 만남, 단순히 인간적인 표면적인 만남으로 그칩니다. 인간적인 만남이 목표가 아니라 한 영혼이 예수님과 만날 수 있도록 사용되는 것이 저희의 목표인데 거기에 사랑이 결여된 것은 바로 실패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하면서 그 하나님을 알게 해주겠다고 접근하면서 사랑을 보여주고, 느끼게끔 도와주지 못한다면 아예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 낫다고 충고하고 싶습니다. 저희는 사랑도 하지 못했던 존재들이지만 하나님의 저희를 향하신 사랑을 알았고, 인정했고, 그분이 저희를 먼저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존재들 또 그 사랑을 받으면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들로 창조해주셨는데, 사랑을 먼저 깨달은 자들로서 사랑이 듬뿍 담긴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신뢰는 어떻게 쌓아지는 걸까요? 꾸준한 관심과 사랑으로 키운 영혼이 인간적으로 저희를 신뢰하게 되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목표는 예수님을 믿게 도와주는 것이지 저희를 좋아하고 따르게 하는 것이 아님을 확실히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인정 받기 위함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도구로 사용 되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나는 죄인이었고 예수님이 내 죄를 십자가에서 없애주셨고 내 목숨을 다시 살리셨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신 나의 구세주 이심을 믿는 것예수님을 신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너 믿어라”로 해결되는 문제는 절대로 아닙니다. 일단은 저희 삶에서 그 믿음이 반영되어야 합니다. 저 사람이 나에게 관심을 갖아주고 사랑을 보여주게끔 하는 원동력이 예수님이다라는 느낌은 반드시 전달되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시는 것은 성령님이시기에 저희가 할 수 있는 것은 저희 삶에서 예수님이 드러나시는지 점검하는 것 어찌 보면 이것 뿐이라고 할 수도 있겠죠.


제가 너무 두서 없이 달려온 것 같습니다. 앞에서 말한 관심과 사랑 그리고 신뢰는 제가 경험한 사역 가운데 중요하다고 느낀 몇 가지에 불과합니다. 그 세가지 요소만 있으면 성공적으로 영혼들이 낚인다는 말은 망언입니다. 저희를 쓰시는 것도 주님이시고 사람을 낚으시는 것도 주님이십니다. 저희는 단순히 도구일 뿐입니다. 도구로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바로 저희가 할 수 있는 최고입니다.

[유남호] 유학생 사역에서의 QT

이코스타 2004년 9월호

말씀을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는 신앙의 기본입니다. 우리의 육신이 매일의 음식을 섭취하여 살아가듯, 영혼도 날마다의 말씀을 묵상함으로 살아갑니다. 오늘도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된 자들에게 성경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을 듣고, 깨달아, 삶 속에서 순종할 때 살아 있는 신앙 생활이 가능합니다.


유학생 사역의 대상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 믿지만 살아있는 신앙 생활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포함됩니다. 말씀 안에서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교제가 있는 사람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에게 어떻게 주님의 은혜를 끼치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은 유학생 사역의 주된 이슈입니다. 어떻게 하면 말씀 안에서 살아계신 하나님과 의 교제가 있는 사람을 길러낼 수 있을까? 이를 위해 가장 많이 사용되는 예가 QT(Quiet Time) 입니다.


경험적으로 볼 때, QT 생활은 시작이 중요하지만, 시작만 하면 자연스럽게 발전하는 것은 아닙니다. QT 생활을 통한 지속적인 신앙 성장을 위해서는 말씀 자체와 QT 라는 방법론에 대한 바른 이해 뿐만 아니라, 이를 지탱해 주는 공동체적인 지원 및 관리가 필요합니다. 개인적인 QT 생활의 내용과 결과를 소그룹 공동체 안에서 나누고, 서로를 격려할 때 지속적인 자람과 회복이 있으며, 풍성한 삶의 교제를 알게 됩니다.


“QT를 한다는 것은?” 현실에서, 성경을 눈으로 읽는 것이지만, 말씀을 마음으로 듣고, 말씀에 나의 삶을 비추어 보고, 생각중에 그 말씀을 되새기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가장 기본적인 순종이 시작되는 곳입니다. “QT를 어떻게 하면 잘 할까?” 하는 질문에 자주 등장하는 답변은 그 원리를 잘 이해하고, 개인의 생활에 적합하도록 조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습관적인 삶의 패턴으로 굳어지도록 함으로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이해와 순종적인 삶의 깊이가 더해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도와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 QT 나눔과 관리입니다. 본 글을 통해서 유학생 사역 중에 알게된 QT 나눔과 관리에 관한 몇 가지 경험을 나누고자 합니다.


1) 믿음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정규적인 QT 세미나가 필요합니다.


첫째로, QT 생활을 시작하도록 동기를 부여해 주는 기본적인 세미나가 필요합니다. 기본 원리가 제시되고, 육하원칙에 의거 QT기본 방법을 설명해줌으로서 개인적으로 언제, 어디에서, 시작할지를 결정하도록 돕는 것이 중요합니다.


둘째로, QT를 시작하여 일정 기간이 지난 사람들을 대상으로한 다음 단계 세미나가 필요합니다. QT 생활에서 경험되어지는 여러 이슈와 질문 및 보다 구체적인 적용점들을 사례 중심으로 다루고 격려하는 것이 요구됩니다.


세째로, QT를 1년 정도 지속적으로 진행한 사람들을 상대로, 스스로의 QT 생활을 점검하는 세미나가 필요합니다. 이를 계기로 개인적인 QT 시간의 질적인 면을 평가할 수 있는 기회가 될뿐 아니라, 다른 영혼을 말씀으로 Care 하는 도전도 받는 것이 유익합니다. 이로써 깨달은 바, 말씀이 전달을 통해, 활발한 신진대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2) 소그룹 공동체 안에서의 규칙적인 나눔과 격려가 필요합니다.


첫째로, 매일 QT을 행한 여부와 그 내용을 매주 1회정도 만남을 통해 나누는 것이 필요합니다. 나눌 때는 QT 생활에 대한 솔직한 나눔과 새로운 각오가 설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참석하고 있는 유학생 사역 성경공부 모임에서는 매주 모임시에 본격적인 성경 공부에 들어가기 전 QT와 기도제목을 나누는 순서를 짧더라도 가지고 있습니다.


둘째로, 한 구성원의 개인적인 QT 생활이 삶의 습관으로 자리를 잡도록 하기 위해서 Peer Group의 자극과 이끄는 리더의 지칠 줄 모르는 권면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면, 몇 년 전 섬기던 캠퍼스 성경공부 모임에 참여하는 한 자매님이 함께 모임에 참여하는 한 형제님께 QT sheet 를 통해 계속 QT를 독려한 적이 있었습니다. 급기야는, 그 형제의 꿈에 그 자매가 QT sheet를 들고 나타나는 사태에까지 이르면서, 그 형제는 QT를 시작하게 되었고, 은혜로 말씀을 인도하는 단계까지 자라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세째로, QT 나눔은 공동체 속에서 다양한 유익을 가져다 주기 때문에 꼭 필요합니다. QT 생활의 나눔을 통해서, 각자에게 말씀을 통해 다르게 역사하고 계신 하나님을 발견하며 신앙 생활의 넓이를 이해하게 됩니다. 또한, 공동체 가운데서 공통적으로 깨달아지는 말씀과 적용을 통해 하나님의 인도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로써 서로에 대한 주님 안에서의 이해와 사랑이 깊어질 뿐 아니라, 안타까움 가운데 중보의 기회도 제공 받게 되고, 이끄는 분들에게는 사역의 방향도 잡을 수 있게 도움을 줍니다.


3) 수준과 필요를 고려한 커스토마이징 된 QT 관리가 필요합니다.


첫째로, QT 생활이 시작되고 잘 유지되기 위해서는 한 개인에게 적합한 QT 본문 및 교재 관리가 요긴할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QT를 막 시작하려는 분에게 QT 본문이 요한 계시록인 것 보다는 요한 복음인 것이 보다 효과적일 것입니다. 본문보다 더 긴 여러 개의 QT 관련 질문이 있는 것 보다는 간단하지만, 핵심 내용을 찾아 묵상할 수 있게 하는 질문이 더 긴요할 것입니다. 작은 야구공을 쳐서 맞추는 것에 번번히 실패하게 하는 것 보다는, 큰 비치공을 맞추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 더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가정 등 삶의 공통분모를 갖고 있는 공동체를 염두에 둔 QT 관리가 필요합니다. 미혼 그룹과 기혼 그룹을 나누어 소그룹을 편성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렇다면, 각 그룹이 공통점으로 갖고 있는 삶의 염려와 관심에 따라 QT를 관리하는 것도 고려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 예로써, 유학생 가장들에게 학업과 일로 인한 스트레스를 믿음으로 극복하고, 흔들리는 마음을 바로 잡아 가장으로의 방향성을 잡는데 QT 생활이 결정적입니다. 또한, 기혼 유학생 자매님께는 엄마로써의 지혜와 근심과 염려로부터 평안과 함께, 인내를 위한 능력의 원천으로써 QT 생활이 매우 필요합니다. 더불어서, 가정 예배 등과 연결해서 아이들과 함께 하는 QT도 생각해 볼수 있을 것입니다.


4) 생활 패턴을 고려한 QT 관리가 필요합니다.


첫째로, QT관리시에 주중의 대부분 보내는 시간과 장소를 고려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학부 유학생의 경우에 대부분 기숙사 혹은 학교와 인접한 아파트에서 생활하므로, 그에 맞추어 아침 혹은 저녁에 QT 생활이 효과적으로 이루어 질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입니다. 또한, 아이들과 거의 하루 종일을 보내는 유학생 F2 자매님들의 경우 QT 나눔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주중에 작은 규모로 집에서 이루어지는 모임은 서로를 더 깊이 주님 안에서 만나는 장를 만들어 줄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부담없이 믿음이 없는 자매님을 전도할 수 있는 통로 역할도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로, 보다 효과적인 QT관리를 위해 인터넷 활용을 고려해야 합니다. 많은 수의 유학생들은 집이나 학교에서 일찍 이메일을 확인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곤 합니다. 또한 거의 하루 종일을 컴퓨터 앞에 앉아서 생활하는 학생 및 직장인이 늘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생활 환경을 고려해서 QT를 보다 더 이러한 생활 패턴에 근접하게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면, 컴퓨터를 활용해서 성경을 쉽게 볼 수 있게 하는 것, 이메일을 통해서 매일 혹은 주중 QT를 업데이트 하는 것, 그룹이 함께 사용하는 인터넷 카페를 개설하고 리더가 충실히 모범을 보이며, 말씀 안에서의 온라인 교제를 유도하는 것 등은 퍽 유익한 QT 관리의 도구가 될 것입니다. 더욱이 점점 더 온라인 상에서의 만남과 의사소통의 기회가 다양한 형태로 늘어나고 있으므로, 더욱 중요해질 것입니다.


지금까지 유학생 사역을 위한, QT 나눔과 관리에 대한 이슈를 경험에 근거하며 몇가지 나누었습니다. 이 글을 접하시는 분들께 저의 작은 경험적 제안이 하나님의 은혜로 헌신하시는 사역에 참고가 되시길 바라며 기도드립니다.

[팽동국] 유학생 사역

이코스타 2004년 8월호

<글을 시작하며>


저는 개인적으로 1995년부터 8년 동안 미국에서 유학 생활하는 동안 어쩌다 보니 미국 교회나 선교단체를 중심으로 외국 학생들을 위한 모임과 한국 교회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며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경험하고 느끼고 생각한 점들을 적어볼 생각인데, 이러한 경험에서 나온 글들이 유학생 사역 코너의 글에 얼마만큼 부합되는지 고민하면서 문득 저 자신이 먼저 유학생 사역이라는 말을 (한국) 유학생 사역으로만 한정해서 생각하고 있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제한하지는 않았지만 저 스스로 제한해 놓은 저 자신의 사고의 경직성에 당황해 한 것을 부끄럽지만 고백하면서, 저의 개인적인 경험이 유학생 여러분들에게 조금이나마 유익한 글이 되고 하나님 마음에 합한 글이 되기를 바라면서 글을 시작합니다.


처음 미국에 도착해서 주일날 미국 교회에 참석해서 예배를 드리고 그 교회에서 주관하는 외국인을 위한 모임과 성경 공부에 참석을 하게 되었고, 차차 시간이 지나면서 새벽 기도나 특별집회 같은 때에 한국 교회를 부정기적으로 참석하다가 보니, 나중에는 아예 금요일마다 정기적으로 한국 교회 청년부에서 함께 교제하며 성경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3년이 지난 뒤에 새로운 학교로 가게 되었는데, 그 곳에서는 주일에는 한국 교회를 다녔지만 반대로 금요일 저녁에는 외국인을 위한 크리스찬 모임을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양다리를 걸치며 두 그룹 모두에서 어찌 보면 주변인으로 생활하면서 개인적으로 경험하고 느낀 점들을 나눠보고자 합니다. 때로는 주위에서 오해와 따가운 시선을 받기도 하고, 나조차도 그런 생활에 회의가 들기도 하였지만, 또한 여러 가지 좋은 점도 있었고 지나놓고 보니 나름대로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예비하심이 있는 것 같아 지금은 참 감사하고 있습니다.


<외국인 모임에 소극적인 한국 유학생 크리스찬들>


제가 외국인들을 위한 모임에 꾸준히 다니면서 느낀 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한국 유학생들이 교회를 다니는 수를 고려할 때 실제로 외국인 학생들 모임에 참석하는 한국인 크리스찬의 숫자는 적다고 느꼈습니다. 이 말은 한국 교회들이 학교 주위에 많이 있어서 외국인 모임에 참석할 필요를 못 느끼기 때문일 수 있기 때문에 어찌 보면 한국 교회들이 그만큼 한국 학생들을 잘 섬기고 있다는 말이기에 상당히 긍정적인 면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국 사회의 ‘우리 문화’ 혹은 ‘끼리 문화’ 때문일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문화와 정서가 다르고 더구나 언어 장벽이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지만 또 다른 시각으로 보면 대다수 한국 크리스찬들은 우리만의 문화와 정서 속에 갇혀 있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말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정말로 주님 안에서 한 형제 자매임이 확인되기만 한다면 우리말로 우리와 같은 정서로 찐하게(?) 교제할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그게 그리 큰 문제는 안 되는 것 같습니다. 때때로 말도 잘 안통하고 우리식대로 교제를 못해서 답답함도 느끼고 외로움도 느끼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표현방식만 다를 뿐이지 그리고 언어를 통한 후련한 소통은 못할지라도 어떨 때는 언어가 소통될 때보다도 더 큰 감동을 받을 수 있게 되기도 하고 다른 정서와 문화 차이를 뛰어넘는 교제와 감격이 생기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즉 한국 교회가 주위에 많아서 우리 한국 유학생들을 잘 섬겨주기 때문에 외국인 학생들 모임에 한국인들의 참여가 적다면 그래도 다행이지만 혹시 ‘우리끼리’ 문화 때문이라면,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될 문제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둘째는 한국 크리스찬 유학생들이 자기 교회에 대해서는 열심이고 열정적으로 헌신하는데 반해 외국인들 모임에는 관심도 별로 없고 참 소극적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첫번째 문제는 긍정적인 측면도 많기 때문에 문제랄 것도 없습니다. 많은 경우 한국 사람이 실제로 적기 보다는 소극적이거나 수동적이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이 꽤 있다고 할지라도 실제로 느끼기에는 한국 사람들이 없다고 느끼는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미국에 처음에 올 때는 언어를 배우기도 싶고 외국인 친구도 사귀고 싶고 청교도 나라의 신앙도 배우고 싶어서 외국인들을 위한 모임이거나 혹은 미국 백인들의 교회에 참석해 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분들이 한 반년이나 일 년 이상을 계속해서 참석을 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드물었습니다. 또한 외국인 사역을 위한 모임이나 외국인들을 위한 여행 등을 참가해보면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등의 사람들과는 달리 한국 사람들 중에는 교회를 다니며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대다수의 한국 기독교인들은 초반에 잠깐 이런 외국인 모임에 참여하며 도움을 받다가는 대부분 한국 교회로 돌아가 봉사하고 활동하느라 이런 외국인들을 위한 모임에서 섬기거나 돕는 자로서의 역할들을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어느 정도 도움과 훈련을 받은 후에, 도움을 주는 자로 또 리더로서의 역할들을 해 나가야 될 때가 되면 한국 사람들은 거의 없어지고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 그리고 유럽과 아프리카 등에서 온 사람들이 리더로서 섬기는 역할을 해 나가는 모습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여기에는 물론 개인적으로 적응을 잘 못하거나 언어의 한계를 극복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한국인들의 정에 이끌리는 정서나 문화 또 때로는 교회 목회자들의 배타적 태도나 한국 교회에서의 곱지 않은 시선과 은근한 압력도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전체적인 행사에는 한국 사람들이 꽤 많을지라도 실제로 느끼기에는 한국 사람들이 적어 보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제 주관적인 생각만은 아닙니다. 실제로 외국인 사역을 하는 미국 사람이 한국 크리스찬들에 대한 이러한 사실들을 알려 주며 그 이유에 대해서 의아해 하기도 하고 약간은 섭섭해 하기도 하며 얘기해 준 적이 있습니다.


<영어 문제는 단지 불편한 이차적인 문제>


이쯤 되면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영어 실력을 이유로 ‘마음은 있지만…’ 이라고 생각할 것 같습니다. 언어 문제는 물론 문화나 관습, 정서 문제와는 조금 다른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언어 문제도 핑계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 이유는 제가 영어를 상당히 못함에도 줄기차게 외국인 모임에 나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언어 문제는 불편함일 뿐이지 외국인과의 교제에 있어서 근본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도 처음에는 영어를 배우고 싶어서 나가기 시작했겠지만, 시간이 가면서 외국인들과의 교제도 좋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면 지쳐서 곧 외국인 모임에 참석하지 않게 되었을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부끄럽지만 용기를 얻을 사람들을 위해 제 얘기를 하자면 미국 있은 지 3년 반이 넘었을 때에도 어찌나 영어를 못했던지 박사자격 구두시험에서 교수들이 조건부로 합격을 시켜 주었는데, 외국 학생들을 위한 영어 수업 한 과목을 듣는 조건으로 합격이 되었을 정도입니다. 그러니 그전까지의 영어가 어떠했으며 그 이후의 영어 실력이 좋아져봤자 얼마나 좋아졌겠습니까? 언어를 잘하면 참 좋습니다. 의사소통상 아무 불편없이 어느 외국인과도 깊이 교제할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성경 공부를 인도하거나 전체 그룹을 인도하거나 핵심 멤버로 리더 역할까지도 수행할 수 있으려면 언어를 잘하는 것이 더할 나위 없이 좋습니다만, 혹시 영어를 잘 못해서 말도 잘 못 알아듣기도 하고 자기의 생각을 표현 한 마디 못할 때가 있어도 나름대로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무언가 역할을 해 나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냥 참석만 했었는데, 한 2년쯤 되니까 미국인 사역자가 참 고맙다고 얘기를 하더군요. 의아해 하는 저에게 해준 얘기가 바로 오랫동안 계속해서 모임에 나오는 한국인 크리스찬들이 많지 않은데 꾸준히 참석하니 고맙다는 거였습니다.


<외국 유학생 사역에 대한 비전>


이제는 기독교권 세계에서 한국의 위상은 상당히 높아졌고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 같습니다. 선교사 배출도 손꼽을 정도로 많고 그 선교사들과 선교 지망생과 후원자들을 위한 선교대회도 하고,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를 비롯해서 새벽 기도나 교회 모임 등에 대한 한국 크리스찬들의 열심과 열정을 어디서건 인정해 주는 것 같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물론이고 아프리카나 일본 등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도 한국의 특정 교회와 목사님 이름을 언급할 정도로 전 세계에서의 한국 교회의 위상은 많이 알려져 있는 것 같습니다. 한 대만 크리스찬은 한국의 기독교의 성장과 민주 사회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해 주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높아진 한국 교회의 위상에 따라 미국 학교에서의 외국 학생 사역에 한국 크리스찬들의 역할을 기대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한국 유학생들 중에는 비교적 크리스찬 비율이 높기 때문에 선교적 차원에서 거의 신앙이 없는 중국 학생들이나 동남아 아시아 학생들이나 중동 지역의 학생들을 섬기는 자로, 도움을 받는 자로서만이 아니라 도움을 주며 미국인들과 함께 외국인 학생들을 위한 섬기는 자로서의 역할을 기대할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제는 우리의 관심을 자국의 유학생들에게만 두는 것이 아니라 외국 유학생들에게까지 시선을 넓혀야 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처음에는 외국인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석을 하면서 도움과 양육과 훈련을 받고, 후에는 섬기는 자로서 미국 사람들을 돕거나 함께 동역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겠으나, 지금까지의 유학생 사역을 유학생 교회나 크리스찬의 수적 확대와 코스타 등의 대형 집회 등을 고려한다면 한국 교회의 유학생 사역은 어느 정도 성공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제는 이러한 성공적 경험을 바탕으로 유학생으로서 받은 도움과 은혜들을 자국 유학생들에게 뿐만 아니라 외국 유학생들에게도 나누고 섬겨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이제는 우리에게로만 제한된 시각을 바꾸어 세계 곳곳에서 복음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학생들이 미국 유학하는 동안 복음을 듣게 하는 일을 위해 기도하며 나아갈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미국 사람들이 잘 하고 있으니 미국 사람들에게 맡겨 놓자고 생각할 수도 있고 과연 돈도 없고 시간도 없는 외국인 유학생으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역할이 무엇일까 라고 회의할 수도 있겠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또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일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일단 이웃 나라인 중국과 일본 학생들은 거의 크리스찬이 없는데 생김새와 문화가 비슷해서 쉽게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동남 아시아와 중동 지역의 사람들과도 같은 아시아인들이라는 공감대와 또 같은 처지의 외국인이자 유학생이기 때문에 거부감 없이 언제라도 잘 어울릴 수 있어 친하게 될 수 있는 장점이 우리 한국인 유학생들에게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다니던 학교에는 10명 이내의 각 나라별 모임 외에 50명 이상 되는 모임으로 태국 학생들 모임과 베트남 학생들 모임, 중동 지역 학생들이 회교 사원을 중심으로 모이는 모임들이 있었는데 이 모임들에는 크리스찬이 거의 전무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 그들을 마음에 품고 섬기는 사람들도 제가 아는 한 거의 없었습니다. 그들이 미국에서 지내는 유학 기간조차도 복음을 제대로 들어볼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들이 참 안타까웠습니다. 각 나라의 지도자급이 될 사람들이 청교도 문화의 기독교 국가에서 4, 5년을 공부하는 동안에도 복음을 듣지 못한다면 그들이 언제 복음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반대로 그들이 유학하는 동안에 복음을 들어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면 얼마나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보면 가장 큰 선교지라고 할 수 있고 적은 비용으로 가장 큰 효과를 낼 수 있는 선교장일 수 있고 이러한 황금 선교 현장에서 우리는 유학 생활을 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거기다가 미국 사람들이나 미국 학생들에게는 없는 한국 유학생들만이 가지고 있는 동질감 같은 것이 있으니 얼마나 좋은 환경인지 모릅니다. 물론 외국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자국의 문화나 종교에 대한 향수를 더 많이 갖고 있기 때문에 그리 쉽지 않고 오히려 더 마음이 닫힌다는 반론도 있을 수 있지만, 아무래도 자국에서보다는 훨씬 열린 시각으로 미국 문화에 담겨있는 복음에 대해 느끼게 되고 그 복음을 전하기 좋은 환경을 부인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외국인 유학생 사역에 대한 조언>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한, 몇 가지 조언을 하며 글을 맺으려고 합니다.


첫째로 미국인들만의 모임이건 외국인들을 위한 모임이건 영어로 하는 성경 공부에 참여하기를 권합니다. 문화적 배경이 다른 사람들과의 성경 공부를 통해서 다양한 해석과 적용법을 배움으로 보다 풍요로운 성경 공부를 할 수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미국인들만을 위한 성경 공부에서 영어를 소화할 만한 실력이 안 되어서 그런지, 그런 모임보다는 외국인들을 위한 모임에서 풍성하게 더 다양한 사람들의 삶과 생각을 듣게 되어 좋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면 인도하는 미국 사람들을 포함한 외국인과의 깊은 교제로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5, 6년이 지난 뒤부터 2, 3명의 미국 사람들과 매주 모여서 삶을 나누고 서로 기도해 주며 외국인들을 위한 중보기도를 했었는데 그 당시에도 너무너무 좋았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서로 연락하며 소식을 전하기도 합니다. 또 하나, 어찌 보면 사소하지만 저에게는 아주 중요했던 영어에 대한 스트레스를 줄이고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이 영어 성경 공부 모임을 통해서였습니다. 비교적 영어 성경은 꾸준히 읽어왔기 때문에 그리고 거의 모든 내용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몇 마디만 들어도 유추해서 알아들을 수 있었고, 한 두 마디만 해도 문법이 틀리고 발음이 엉성해도 역시 미국 사람들도 감으로 잘 알아들었기 때문에 영어가 잘 되는 듯 한 느낌을 받았기에 영어 성경 공부 모임을 가게 되면 영어에 대한 열등감도 회복되고 자신감을 얻고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처음에 미국인들만의 성경 공부 모임이 힘이 든다면, 외국인을 위한 성경 공부 모임에 참여하면 아무래도 쉬운 영어를 하기 때문에 적응하기 좋은 것 같습니다. 이렇게 영어 성경 공부 모임에 꾸준히 참여하는 것은 외국인 유학생 사역의 기본이 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둘째로 주위의 학생들에게 영어 성경 공부에서 얻는 유익에 대해서 나누고 자랑하기를 권합니다. 학교를 옮기고 나서부터는 주위 외국인 학생들, 특별히 제 주위에는 중국 친구들이 많았는데 개인적으로 영어 성경 공부를 하면서 얻은 유익들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랑하고 다니며 함께 외국인들 모임에 초대도 하고 권유도 하고 그랬습니다. 특별히 처음 중국에서 와서 영어에 대한 스트레스를 받을 때 제일 효과적인 것 같습니다. 제가 만난 중국 친구들은 대부분 성경 공부 모임과 성경에 대한 얘기를 하면 성경을 읽어보고 싶고 배우고 싶다고 호의적이었습니다. 그냥 호기심만 있고 실제로는 성경 공부 모임에 정기적으로 참석할 만큼 진지하지 않은 경우도 있었지만, 그래도 꽤 많은 학생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게 되고는 아예 우리 건물에서 성경 공부 모임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일주일 중 하루, 날을 잡아서 점심 때 간단한 식사를 하며 성경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 뒤로 한 3, 4년 동안을 꾸준히 하면서 그 모임을 통해서 중국 친구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기도 하고 또 인간적으로도 깊은 관계로 발전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개인적으로 참 큰 축복이었습니다.


셋째로 기회가 되면 성경 공부를 모임을 시작하되 미국인들과 동역하는 것도 참 좋은 것 같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주위의 외국인 학생들에게 성경 공부 모임에 대해서 자랑을 하며 혹시 일주일 중 하루, 점심 시간을 이용한 성경 공부 모임이 있다면 참석하고 싶은지 물어본 후 그러한 친구들의 숫자가 3, 4명 되었을 때 영어 성경 공부 모임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성경공부 인도는 미국 사람들에게 부탁해서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특별히 중국이나 대만 등 비교적 영어를 잘 하지 못하는 나라에서 온 사람들은 대개 원어민이 성경공부를 하면서 영어도 가르쳐 준다는 것을 참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역할 분담을 해서 미국사람은 성경공부에만 집중하게 하고, 나머지 제반 사항, 즉 모이는 장소와 시간과 내용 등을 알려주는 이메일을 매주 발송하고 장소 등을 확인하는 업무는 제가 감당했습니다. 성경공부 모임에 참석하던 안하던 관심 있다고 한 친구들 모두에게 매주 이메일 보내는 것도 하나의 사역으로 생각하고 꾸준히 보내게 되었는데, 성경 공부에는 나오지 않는 한 대만 친구가 어떤 계기로 졸업 직전에 예수님 믿고 세례까지 받는 일도 있었습니다. 물론 제 이메일이 그러한 일들에 실제로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작은 일도 들어 쓰신 줄 믿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또한 필요한 경우 유학생 입장에서 어려운 영어 단어의 설명과 약간의 발음 교정 등도 부탁하거나 혹은 진도가 너무 빠르다거나 등의 피드백을 줄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좋은 점은 동역하면서 함께 기도도 하고 토론도 하면서 미국인 친구와 아주 깊은 관계로 발전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경 공부 이외의 좋은 점도 참 많았습니다. 실험실 분위기가 좋아져서 서로 토론하고 묻고 개인 사생활까지도 얘기할 정도로 친해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질문이 있거나 도움이 필요할 때 역시 쉽게 찾아가 도움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한 가지 부연하자면 아내의 도움으로 학기에 한 번 정도씩 집으로 초대해서 피자 같은 간단한 식사도 하며 성경 공부 모임에 대한 생각을 듣기도 하고 또 관심자들도 함께 초청해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는데 그것도 참 좋았던 것 같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아내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넷째로 중동지역이나 인도 태국 베트남 같은 지역에서 온 학생들과는 그룹으로 접근하기 보다는 개인 관계를 먼저 돈독히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사실 이쪽 친구들과는 많은 접촉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학위가 끝나갈 무렵에 알게 된 한 두 명의 중동 친구들과는 많은 얘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중동 지역에 대한 개인적인 무지와 편견도 많이 들어나기도 했지만 그러면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유학 초기부터 이들을 마음에 품으며 구체적으로 그 지역의 문화와 정서와 종교에 대한 정보도 수집해서 접근한다면 개인적인 친분 관계를 쌓을 때도 좋고 그러다 보면 좋은 기회도 올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싱글이라면 운동이나 취미 등을 함께 하면서 접근해도 좋을 듯 하고, 가족이 있다면 한 가족별로 초대해서 식사도 하면서 관심을 갖게 된다면 좋은 관계로 발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의 제한된 경험과 한계를 바탕으로 한국 유학생 크리스찬들의 사역과 시야가 자국을 넘어 극동 아시아와 중앙 아시아 지역 그리고 중동 지역에 까지 뻗쳐 나가기를 기도합니다.


<후기>


저는 작년에 한국으로 오게 되면서 이러한 외국인들과의 교제와 사역이 더 이상 없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막상 제주대학에 와 보니 약 50명 정도의 중국과 동남 아시아 지역의 유학생들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8년 동안 외국인들을 위한 모임에 참석하며 보고 배웠던 경험들을 잘 활용하여 쉽게 외국인 유학생들과 친하게 되었으며 지금 이곳에서도 외국 유학생들과 영어 성경 공부를 하고 있고 미국에서 도움을 받은 대로 개인적으로 혹은 교회에서 학생들을 초대해서 식사 대접을 하기도 하고 여행을 가기도 하면서 어떤 면에서는 미국에서보다 더 활발하고 적극적으로 외국인 학생들과 생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예비하심과 섭리하심이 어찌나 놀라운지요!

[손호준]뜻하신 그 곳에 나 있기 원합니다

이코스타 2004년 6월호

하나님의 자녀에게 낯선 땅에서의 유학생활은 그 분의 특별한 은혜의 시간인 거 같습니다. 매일의 치열한 삶의 터전에서 지치고 상한 나로 하여금 그 은혜에, 그리고 나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것을 온 몸으로 체험하는 시간이기 때문이겠지요. 지금까지도, 어쩌면 평생 계속될 지도 모르는 고민이 있다면 그것은 ‘부르심’ 이란 단어로 요약될 듯 합니다. 힘들고 바쁘다 보면 이 단어가 희미해 지기도 하는 것이 솔직한 고백이지만, 돌이켜보면 ‘나의 연약함과 불순종에 관계없이 항상 나를 향한 그 분의 신실하신 사랑과 부르심’ 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거 같아요. 나를 향한 부르심이 어떠한지 깨닫는 것과 어떻게 그 부르심에 반응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예수님을 닮기 원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 에게 한결같은 고민일 것입니다.


Texas에서 이 곳 Virginia로 옮겨오는 가운데 있었던 작년 여름의 코스타는 새로운 곳으로 보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곳곳에서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부르심이 바로 ‘제자의 삶’ 이라는 한 단어로 정리되도록 그 분께서는 코스타 기간 내내 역사하셨습니다. 제자의 삶은 곧 내가 어떤 환경에 누구와 함께 있던지, 그 말씀에 내가 지속적으로 순종하는 삶이고, 이는 예수님의 제자를 삼는 모습으로 표현됨을 그 분께서 다시 확인시키신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새롭게 보내신 캠퍼스의 현실이 차츰 눈에 들어오면서, 제가 처음 느꼈던 것은 당황스러움과 답답함 이었습니다. Texas의 제가 있던 곳은 전형적인 한국 대학원 유학생들이 넘쳐나는 곳이기에, 자연스레 저와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에게 익숙해져 있었는데, 새로운 캠퍼스에서의 한국 대학원생 유학생들은 정말 소수였고, 함께 제자 삼는 비전을 품을 동역자는 쉬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교회의 저를 향한 기대 (참 감사하지만..) 역시 ‘어, 이건 아닌데..’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지요. 주변 사람들 뿐만 아니라, 내 속에서부터 솟아나는 ‘부르심에 대한 회의’와 싸우는 영적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걸 두고 바로 맨땅에 헤딩한다고 하는구나’ 싶었습니다. 의지할 그 무엇이나 누구도 없는 상황 속에서 그 분은 제 마음을 겸손하게 낮추셨고, ‘하나님.. 한 명만 주세요..’라는 절박함이 기도가 되어 지난 여름을 보냈습니다.


이런 제 기도에 그 분은 당신의 귀한 자녀들을 저 혼자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많이 보내 주셔서 일단(?) 응답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또 다른 ‘고민’ 이 시작되고 있었지요. 저와 살아온 문화나 현재의 고민들까지도 비슷한, 그래서 제가 ‘익숙하게’ 느껴졌던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저와 ‘참 다르다’고 느낄 만한 지체들과 함께 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전부가 여기 학부생들이고 어릴 때 이민 왔거나 미국에 온 지 최소한 몇년씩 된 지체들이었으며, 나이 차도 적게는 5년 많게는 10년 가까이 나는, 대부분이 자매들인 지체들에게 다가가는 것은, 한국에서 대학시절까지 보내고 미국 온 지 불과 몇 년 밖에 안 된 대학원 유학생 형제인 저에게 결코 만만하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모임은 일단 은혜로 시작되었고 꾸준히 지속되는데, 저와 여러 면에서 다르게 느껴지는 이들을 이해하고 그들 속의 영적 갈증들을 파악하는 것은 참 어렵게 느껴졌습니다.


어떻게 친해질 수 있을까. 아무리 나와 다르더라도 날마다 은혜가 필요한 영혼이란 점은 나랑 똑같을 텐데. 그렇다면 이들 속에서의 영적 갈증은 무엇일까. 이런 기도제목들을 가지고 참 오랫동안 씨름 했었습니다. 여러 동역자들에게 조언도 구해보고, 여러 접근법들도 시도하면서 나름대로는 몸부림을 쳤지요. 그러는 가운데 제 속에서 또 계속되는 영적 전쟁은 ‘거봐. 넌 여기에 적합지 않다니깐! 어떻게 저 얘들을 이해하고 사랑하겠어?’하는 부르심에 대한 도전으로 계속되었습니다. 점점 증가하는 박사 공부의 부담들도 저를 압박했지요. 이렇게 한 학기 정도를 제 안과 밖에서 씨름하면서 보냈던 거 같습니다. 그 때 제게 성령께서 깨닫게 하신 몇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번째로 깨닫게 된 진리는 새삼스럽게도 ‘본질은 똑같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나나 이들 역시 똑같이 예수님 믿고 구원 받아야 할, 죄인’ 이라는, 너무나도 당연한 영적 본질이었습니다. 환경과 자라온 배경이 다르지만, 날마다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 안에 거해야 하는 죄인들이고, 그래서 내가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갈2:20)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본질’ 은 저나 이들이나 동일함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매주 요한복음을 한장씩 보면서 집중하려고 몸부림쳤던 영적 부담감은 요한이 그토록 전하고 싶었던 그 말씀 – 진리와 생명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었습니다.


모임이 계속되면서 ‘사람의 지혜’에 대한 유혹들도 참 집요(?) 했습니다. 그러나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고전2:5)’ 이 말씀은 ‘진짜’였습니다! 영적 본질에의 집중은 곧 영혼에 대한 담대함으로 이어졌고, 더 나아가 한명 한명의 마음 깊숙한 상처와 눈물과 갈증들을 서서히 보게끔 하였습니다. 또한 주님은 이들을 향한 당신의 타는 듯한 사랑이 어떠한지, 한명 한명이 그분에게 얼마나 존귀한 자들인지 조금씩 느끼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5:8).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와 이 한 명 한 명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 타는 듯한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한지 느껴질 때마다, 그런데 내 속에서부터 ‘하나님을 거부하는 마음과 행동’ 들로 표현되는 죄성을 여전히 보게 되고 이런 죄와 연약함 속에 있는 ‘그 때에’ 이미 그 사랑을 확증하셨고 값없이 누리도록 주셨음을 깨달을 때마다 그 사랑에 감격하며 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두번째 질문이었던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에 대한 응답 역시 지극히 본질적인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벧전4:8). ‘사랑하면 되는구나’하는 지극히 단순한 진리가 사실 그리 쉽지는 않은 거 같습니다. 이것은 곧 적어도 4가지 –시간, 물질, 관심, 그리고 기도- 에 대한 구체적 행동이자 포기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수님 처럼 사랑할 수 없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지만, 그러나 내게 있는 것 – 나에게 허락하신 시간과 물질과 관심과 기도로 사랑할 수는 있는 거 같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제가 섬긴다고 했던) 이들을 통해서 오히려 저를 위로하시고 사랑을 표현하시면서 만지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가 이 영혼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제가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라는 것을 알기 원하셨던 거 같습니다. 시험 기간에 지쳐서 힘들어 할 때, 저희 그룹 한 지체가 여기서 차로 2시간 가량 떨어진 Washington D.C. 에서 한국 음식을 사서 제가 있는 곳 까지 직접 운전해 와서 힘내라면서 내미는 모습 속에서 저를 위로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느끼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요일4:12)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더불어서 동역하는 귀한 지체들의 섬김과 기도가 정말 큰 감사제목입니다. 제가 속한 KBS 라는 공동체는 지리적으로 Washington D.C. 를 기반으로 합니다. 여기서 매번 D.C. 까지 오가며 교제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또한 없던 모임을 새로 시작하는 거라서 섬기는 저부터 쉽게 지치고 흔들릴 수 있는 상황이지요. 정말 ‘아무도 없다’ 는 느낌이 가장 힘든 시험 중에 하나인데, 늘 기도와 격려로 함께하는 많은 동역자들이 있음을 알게 하셨습니다. 매주 기도제목을 업데이트 해 주는 지체로부터, 얼굴도 모르는 저희 그룹 지체들 이름을 매주 불러가며 기도하시는 분들, 가끔씩 D.C.를 갈 때마다 저와 저희 그룹 지체들을 가족같이 반갑게 챙겨주고 섬기는 분들까지. 비록 떨어져 있지만 모두가 한 몸으로 세워져 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자의 삶임을 너무나 귀한 동역자들로부터 참 많이 도전받습니다.


주님께서는 저를 이 곳으로, 제가 사랑하고 사랑받을 사람들 속으로 부르셨습니다. 특별히 ‘제자의 삶’ 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이 제자의 삶은 제가 말씀을 전하고 성경공부를 하는 것만이 아님을 확신합니다. 오히려 그 분에게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주신 현장에서 주신 사람들 속에서 ‘제자의 삶’ 으로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것임을 믿습니다. 어떻게 제자 삼을 것인가? 이 질문은 곧 ‘어떻게 내가 순종할 것인가?’라는 말과 같은 뜻임을 이 곳에서 더 깊이 느낍니다. 매일 말씀 앞에 나를 죽이고 삶의 전 영역에서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제자됨임을. 그래서 이제는 내가 필요한 곳에 내가 필요한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고, 나를 보내시는 사람들 속에서 내가 날마다 죽는 삶이라는 것을.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 요일3:16 )


[윤형선]제자삼는 사역이 나를 제자로

이코스타 2004년 4월호

내 자신도 캠퍼스 안에서 소그룹을 섬기고 있기에 매달 나오는 eKOSTA의 유학생사역 섹션은 나의 좋은 길잡이가 되어 왔다. 그랬던 곳에 나의 생각을 글로 옮길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캠퍼스 사역에 자신의 눈물과 시간과 열정을 쏟으시는 선배님들의 노하우에 비하면 내가 깨달은 것은 정말 작고, 부족하지만 내가 소그룹을 시작하면서 적용했던 것들을 소개하려고 한다.



나의 경우는 학교를 옮기고 새로운 환경에서 시작한 소그룹이기에 새로운 곳에서의 유학생 사역, 특히 캠퍼스 사역을 하시려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동기



새로운 곳으로 오기 전, 계속해서 제자 삼으라는 말씀이 한 학기 동안이나 귓가에 맴돌기 시작했다.



‘주님 내 삶에 주인 되시고’라는 찬양을 부르게 되었는데, …주 뜻 이루려고 날 예정하셨네, 오직 주님만 내 일생과 내 영혼의 주되시네 주 말씀 전하라 날 선택하셨네



주의 능력으로 인도하사 크신 이름 이루소서 의지합니다….



이때 정말 주 말씀 전하려 날 선택하셨네라는 꿈을 꾸면서, 뭔지는 잘 모르지만 내가 받고 있던 하나님의 은혜를 말씀으로 전해야 겠다는 소망을 품게 되었다.








그 시점 정들었던 DC에서의 2년간 생활을 뒤로하고, 새로운 학교인 Univ. of North Carolina at Greensboro로 옮기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말하는 유학생으로의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1. 한 명을 잡아라



모임을 시작하려면 나 혼자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캠퍼스에 대해 같은 비전을 품을 수 있는 동역자를 만난다면 이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나 싶지만, 이런 귀한 동역자를 찾기는 커녕 스타팅 멤버들도 만나기 힘든 것이 현실인 것 같다.



그래서 첨에 동역자를 생각하면서도 모임을 시작하기 위한 구성원들은 아직 미국에 유학온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을 주된 대상으로 하게 되었다. 보통 유학온지 얼마 되지 않은 학생들은 아직도 그들만의 시간 테이블을 무엇으로 채우려고 구상하는 반면에, 비교적 유학생활에 익숙해져 있는 학생들의 경우는 흔히들 말하는 바쁜 유학생활과 그 지역에 있어서는 어느덧 익숙졌다는 생각때문에, 새로운 모임이나



잘 모르는 누군가를 잘 따르려고 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자기들이 도와주려고 하지 어떤 새로운 질서에 편입되길 꺼려 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런 약간의 어려움 점이 있기 때문에 기존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접근 하기 보다는 새로운 사람들 위주로 모임을 편성하기 휠씬 쉬운 것 같다.



나의 경우도 처음 와서 아직 유학생활에 자리잡지 않고 있는 사람들 대상으로 모임 구성을 했는데, 어떤 친구의 경우는 모임의 뜻은 좋지만, 유학생활에 자리부터 잡고 난 후에 성경공부를 하고 싶다는 애기를 했었다. 그래서 오히려 자리잡았을 때는 자기만의 시간 테이블을 다 채워져 난후라 뭔가를 집어 넣으려면 쉽지 않을꺼라는 전후 사정 애기를 했더니 자신도 그 부분을 이해하며 참여하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한 명씩 한 명씩 만나서 캠퍼스 성경공부 모임을 시작하게 된 인원이 5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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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팀웍을 형성해라 (같이하는 느낌)



시작하기로는 했지만, 이제부터는 누가 인도하느냐 어떻게 하느냐에 대한 문제가 이어졌다. 나의 경우는 전에 캠퍼스 소그룹 모임에서 양육을 받았기에, 그 성경공부의 모델을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그 모임에서 이렇게 했으니까 그 모임대로 거기서 했던 방식으로 해야 되다는 발언은 친구들에게 오히려 거부감이 들게 되지 않을까 싶었다. 이건 꼭 ‘내가 어디 캠퍼스 선교단체 출신인데, 우리도 그렇게 해야 돼’ 하는 식의 꼭 점령군 같은 느낌이 들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전에 있던 캠퍼스 소그룹에 대한 이야기는 입에도 꺼내지 않았다.



그러면서, 꼭 누가 인도하고 가르치고 전한다는 표현보다는 서로 섬기고 같이 준비하고 나눈다는 어법으로 서로의 이해를 구했다.



그리고, 찬양할 수 있는 친구가 찬양을 준비했고, 그런 과정에서 수요일에 한번 더 모여서 기도모임을 갖기로 하고 온라인 상의 카페도 관리해야 하는 일등이 생겨 각각 한 파트씩 다 맡아서 하게 되었다. 그렇게 서로가 같이 준비해서 나누고 같이 만들어 간다는 느낌이 계속 형성되니까, 그것이 자발성으로 이어졌고 캠퍼스의 다른 지체들도 함께하는 모임으로 발전해 나아갔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로마서 8:28>



3. 지체들에게 동기 심어주기와 인도자의 목적의식 갖기



모임 안에서 정확한 목적의식 갖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고 쉽지 않은 문제인 것 같다.



우리가 세운 첫번째 기치로는 유쾌한 성경공부가 되자는 것 이였다. 비록 짧은 내 신앙생활의 경험이지만, 성경공부 하면 일단 재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신앙생활 오래한 분들도 성경공부는 재미없는 것쯤으로 여기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성경공부에 대해서 지루하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서, 모임의 동기를 줄 수 있는 것은 그런 부분을 깨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유쾌한 성경공부가 되도록 유도했고, 때마다 이 동기를 계속 심어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너무 유쾌하다 보니 웃다가 끝난 적도 여러 차례 있어서 반성을 여러 번 했던 적도 많은 것 같다.



그럼 여기서 어떻게 유쾌하게 모임을 유도하냐라는 질문이 생길 것 같다.



누구나 잘 알겠지만, 그것은 우리들의 관심사를 많이 끄집어 내어 말씀으로 연결시키는 것 같다.



특히 많이 했던 것은 청년들의 빅 이슈인 이성문제의 소재를 이용해서 그것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연결 시켰던 부분 이였던 것 같다. 예를 들면 기도에 대한 주제가 나오면, 얼마나 해야 되며 등의 내용이 나오면 바로 이성 교제시 새로운 여자친구 사귀면 얼마나 전화통화 하냐라는 등등의 상황을 나누면서 결국 사랑하면 어떻게 되는가를 연결시키는 일들을 많이 했다.



사실 때로는 무리하게 연결시키다 보니 억지도 가끔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식으로 일단 모임을 편하게 만들기까지는 했지만,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인도자가 분명한 목적의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이 오천명에게 이적을 베푸시면서 우리들의 필요를 채우셨지만, 제자들에게 항상 포커스하셨던 제자 삼기 위한 우선순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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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4. 심는자냐? 물을 주는자냐?



 1.0″>내게 소중한 캠퍼스 간사님 2분이 계신다. 지금도 항상 멘토로 형, 누나로 도움을 많이 주시는 분들이 .



신앙생활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을 때 만난 첫 성경공부의 간사님을 생각하면 죄송하지만 무엇을 배웠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기억 나는 것이 있다면 사도행전 배울 때 자기 이름이 성경에 첨으로 나온다고 기뻐하며 했던 말밖에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내가 확실하게 느꼈던 것은 이 간사님이 내가 하나님을 알았으면 하는 간절함 마음을 심어주었다. 그리고 나뿐만 아니라 우리 모임의 지체들을 모두 사랑했다는 것이다. 어느날 이메일함을 정리하다가 이 간사님이 보낸 메일들이 우리 어머니가 보낸 메일가 비슷하다는 것을 보고 어머니 만큼의 사랑이 날 변화시켰구나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두 번째 만난 간사님은 어찌나 유머와 말을 잘 하든지 그 때 배운 디모데전후서의 내용은 하나도 잊어버리지 않고 있다. 작년에 고린도전서에서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뿐이니라.” (고린도전서 3:6-7) 라는 말에 나에게 심는 자로서 물을 주는 자로써 도움을 주었던 그 두 분을 생각하고 정말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자라게 하셨구나 느끼며 감사의 기도를 드렸던 적이 있다.



그래서 항상 심는 자로서의 역할이냐 아니면 내가 물을 주는 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하나에 대해서 생각하며 모임을 섬기려 하고 있다.



5. 중립성을 지켜라



 1.0″>캠퍼스안에 학생들을 여러 가지로 분석해 볼 때 크게 교회 다니지 않는 친구들의 이유를 살펴보면 여 러 가지의 해석이 나온다. 특히 내 불신자 였을때의 유용한 경험과 그 부류의 친구들을 볼 때, 교회나 기독교인에 대한 편견이 있거나, 아니면 예수님이라는 분이 어떤 분인지 제대로 접해 보지 못한 경우가 많은 것 같다.



편견이 있는 친구들의 경우는 성경 공부란 교회에 데리고 가기 위한 교회 2중대쯤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이때 그들이 불편해 할 수 있는 요소들(교회에 나가자, 독선적인 것, 강요)을 보여주지 않고,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려주는 것이다.



한번은 이런 식으로 전도하며 그런 편견을 가지고 있는 친구들에게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중요하지 교회가 뭐가 중요하냐, 그러다 교회 안가도 된다는 말까지 했었다. 사실 이것이 오해가 되어서 내 자신이 교회에 나가지 말라는 캠퍼스 사역자로 지역 교회 분들에게 뜨거운 오해를 샀던 적도 있었다.



그리고 모임 안에서도 밖에서도 성경공부만 나오고 교회에 나가지 않는 지체들보고 걱정과 우려를 하는 경향이 있는데, 내 생각에는 하나님도 모르는 친구들이 나와서 하나님 말씀을 입술로 읽고 배우고 있다는 자체가 기적이지 교회에 나가고 안 나가고는 그 이후에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캠퍼스 주변에 교회들이 여럿이기에 자칫, 섬기는 자가 이런 민감한 사안에서 중립성을 갖지 못한다면 잘못된 오해는 가지고 있는 지체들을 품기 어려울 수 있다.



그래서 세 번째 기치 중에 하나인 오직 하나님 편에만 서는 성경공부라는 것이 이래서 생겼다.



결국 세가지 기치 유쾌한 성경공부-동기부여, 참 제자되는 성경공부-우선순위 의식고취, 하나님 편에 서는 성경공부-본질을 통한 중립성확보로 이어지도록 하고 있다.



“주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잠언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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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온라인상의 활발함을 이용하여 모임의 활발함을 이끈다.



서로 팀이라는 느낌과 긴밀한 관계가 되지 못하면 그냥 형식적으로 모임에 나오고, 와서도 그냥 나누지 못하고 앉아 있다가 가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활용하고 있는 것이 온라인의 활발함을 유도해서 모임의 활발함으로 이끈다는 것이다. 누군가 글을 쓰면 꼭 긴 답장을 달아주기보다 짧게라도 덧글을 달아주고 QT나눔의 경우는 릴레이식으로 하도록 유도하며, 한 주의 활동들을 사진으로 찍어서 자주 올리면 지체들은 어떤 것이 올라왔나 궁금해서라도 들어오고 모임이 있기까지 함께 움직인다는 느낌을 만들어 주게 되는 것 같다. 예를 들면 100번째 200번째 글을 올리는 사람에게 상품(간사가 식사 한끼 대접등)을 주는 것이라든지, 그 주 했던 성경공부 모임 때의 사진을 찍어서 첫 화면에 올리는 것등이다. 



하지만 1/3 법칙이 있듯이 1/3은 활동하고 1/3은 들어와서 보기만 하고 1/3은 관심 없는 현상이 나타난다.



결과들



제자를 삼으려고 시작한 캠퍼스 사역이 결국 나를 제자로 만들었다.



여기에서 캠퍼스 모임을 통해서 말씀 전하고 예수님 따르기를 결단하는 몇몇 친구들을 나타났고, 그 친구들 중에 하나가 세워져서 지금은 이 모임을 섬기고 있으며 난 다른 캠퍼스에서도 새로운 모임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외형상의 결과 보다는 제자를 삼으려고 했던 것이, 언제가부터 이 캠퍼스에서의 사역을 통해 내가 제자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 이였다.



찬양할 때, 기도할 때에도 성령님의 살아계심을 느끼지만, 무엇보다도 내 입술에서 하나님 말씀이 나갈 때 내 안에 강하게 움직이시는 성령님의 느낄 수 있었고, 그렇게 한 주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며 산다는 것이, 제자 삼는다는 것과 제자 되는 것과 동일한 가치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성화란 끝이 없지만, 내가 직접 제자 삼으려 할 때 내 신앙의 자체도 제대로 살아날 수 있다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율법책을 입에서 떠나지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가운데 기록한대로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길이 평탄하게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여호수아 1:8>



 



새소망



캠퍼스 사역을 했던 것이 신앙생활 한지 2 년째 되는 때였다. 그냥 학교 다닐 때부터 서클 만들기 좋아하는 내가 예수님 만난 열정으로 성경공부 모임을 만들면서, 내가 제자 되어 갔던 놀라운 일들을 생각하면, 그 분을 알기에 두려운 마음이, 하지만 하나님께서 보여주셨던 일들 그리고 보여주실 일들에 대한 기대가 내 마음 속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 자신이 그분에게 정결하게 서고 싶다는 새 소망이 생겼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흠이 없고 순결해져서, 구부러지고 뒤틀린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없는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것입니다” <빌립보서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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