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영운] 가정에서 할 수 있는 환경보호 II: 줄이기 (Reduce)

이코스타 2003년 8월호

들어가는 말

‘환경보호’ 또는 ‘생태적인 삶 살기’를 위해 가정은 너무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각 개인은 가정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태어나고 교육되어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임을 분명히 해 주고, 인간을 포함한 모든 자연 만물이 그리스도의 속죄로 구원을 얻어서, 주어진 생명을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도록 가르쳐 주는 기독교를 가정의 주된 중심으로 삼고 있는 그리스도인 가정은 말 그대로 사회의 소금과 빛으로서 그 책임을 다해야만 한다고 할 수 있다. 그 책임 중에서 가장 중심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과 사람을 하나님의 뜻대로 섬기고 사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혹자는 그 섬김과 사랑이 전도, 즉 영혼구원이라고 말할 지 모르나 이는 좀 치우친 표현처럼 들린다. 왜냐하면 흔히 전도는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도록 하는 영혼구원을 말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구세주’라는 고백 속에 들어 있는 전 우주적인 내용을 간과한 채…

그리스도인 가정은 바로 구원의 전우주적인 보편성과 각 개인의 특수성이 복합적으로 내포되어 있는 유기적인 인격적 관계의 총화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즉 하나님께서 각 가정에 그리스도 예수로 인한 구원을 선물로 주시고 각 가정마다 구체적으로 구원받음에 합당한 모습을 요구하시고 계신다. 성경에 구체적으로 요구한 적은 없으나 성경의 정신에 비추어 본 상식적인 의미에서 자연을 (환경을) 돌보아야 할 이웃으로서, 우리의 생존을 위한 마지막 보루로서 인식하고 그에 적절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 제일 먼저 가정에서 식구들과 함께 성경을 읽으면서,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인간에게 관리를 부탁하신 하나뿐인 지구’라는 인식이 함께 생겨나길 바란다. 그리스도인 가정에 오만이 아닌 사랑과 섬김에서 출발한 ‘환경보호’에 대한 동기부여가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지난 호에서 제안한 대로 정기적인 가정예배에서는 판에 박힌 예배형태를 지양하고 내용이나 형식 면에서 변화를 주어 성경을 바탕으로 한 폭넓은 주제를 소화해 가는 것도 좋을 듯 하다. 가족회의에서는 다양한 주제를 놓고 토론도 하면서 구체적으로 환경문제에 대한 토론과 그에 대한 가족 단위의 해결책을 찾아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가족회의를 통하면 온 가족이 가족의 일원이라는 단합심도 키우면서 중요한 문제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여 해결책을 모색할 때도 온가족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할 수 있다. 부모들이 신앙을 빙자하여 자녀들에게 무분별한 순종을 요구하기 전에 모든 가족들이 하나가 될 수 있는 장을 마련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할 것 같다.

이번 호에서는 지난 호에서 살펴 본대로 가정에서 할 수 있는 환경보호의 대안 중에서 먼저 ‘줄이기 (Reduce)’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줄이기는 안 쓰기와는 좀 차이가 있다. 필요한 것을 사용하되 불필요한 것을 없애고 꼭 필요한 것을 필요한 양만큼 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줄이기는 쓰레기 양과 독성을 줄인다든지, 자원 절약 등을 포함한다.

쓰레기의 양과 독성 줄이기

쓰레기란 인간이 생활하고 활동하는 문명사회로부터 배출되는 폐물질(廢物質) 중에서 고체 형태로 버려지는 것으로서, 쓰레기를 적절하게 처리하지 않을 경우, 사람의 생활공간을 더럽히고 경관을 해칠 뿐만 아니라 환경을 오염시킴으로써 인간을 포함한 생태계의 보존을 위협할 수도 있다. 쓰레기는 생활폐기물과 각종 슬러지(sludge:汚泥)와·산업폐기물 등으로 분류한다. 이 중에서 가정과 연결된 폐기물은 생활폐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생활폐기물은 한국의 경우, 연탄재, 부엌찌꺼기, 일반쓰레기 등으로 구성되며, 도시의 규모와 계절에 따라서 다르다. 부엌 찌꺼기는 음식물의 준비과정에서 생기는 것과 식사 후 버려지는 것으로 플라스틱, 헝겊, 나무, 고무, 가죽, 유리, 금속 및 기타 물질들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도시 주변 등지에서는 쓰레기 종말처리 후 매립하여야 할 매립지의 확보 난에 직면하고 있다. 특히 서울의 경우 천연 매립지인 난지도가 1993년 2월 28일 폐쇄되고 김포 매립지로 이전하였지만, 매립지 확보가 새로운 도시문제로 등장하는가 하면 소각장 설치 및 운영 등, 쓰레기 처리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각 사회 이익집단 간에 심각해지고 있다. 이로인해 많은 시간과 비용을 낭비하게 되고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 경제적인 면에서나 환경보호와 공중보건의 면에서 상당한 부담을 지게 되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 가정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문제의 심각성을 공유한 후 각 가정마다 생활 쓰레기의 양을 줄일 수 있는 대안을 찾아야 한다.

첫째로 소비의 행태를 살펴보아야 한다. 쓰레기를 줄이려면 원천적인 의미에서 쓰레기를 적게 소비하고 적게 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쓰레기 양은 각 가정에서 소비한 물품의 양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각 가정에서는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의사를 결정하여 쓰레기의 양을 줄여갈 수 있다.

– 물건을 구매하는 행위는 가정에서 발생하는 쓰레기의 양을 결정하므로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물건을 구매하여 쓰레기 양을 줄인다. o 물건을 구매하기 전에 물건의 필요성에 대해 질문해 보고, 필요한 물건일 경우 그 양을 결정함에 있어 경제성을 고려하면서 현실적으로 가장 필요한 양을 구매한다. o 오래가고 견고한 물품을 산다. o 물건을 구매할 때 산 물건을 담아 올 바구니를 미리 준비한다. o 과도한 포장이 되어있는 제품의 구매를 삼간다. o 재활용한 물품을 이용한 제품을 구매한다. o 사용 후 버리도록 되어 있는 일회용 물품의 구매를 삼간다. o 음식물을 살 때 포장을 줄이기 위해 대량으로 구매한다. o 구매 후 같은 용기를 이용할 수 있는 곳에서 물건을 구매한다. o 원 자재를 덜 사용하는 제품을 구매하도록 한다. o 음식물을 살 때 편리하게 포장해서 집으로 가져오는 제품을 피하고 가능한 집에서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 o 음식물에 포장을 적게 사용하는 물품을 우선적으로 고려한다. o 가족이나 친구들을 위해 선물이나 카드를 사지 않고 스스로 만들어 본다. o 가능한 만큼 필요한 채소를 재배해서 먹도록 시도해 본다 (주말 농장 이용).

– 가정에서 나오는 음식 쓰레기를 줄이기 위한 실천방법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o 음식은 양보다는 질에 중점을 두고 반찬 가지 수를 줄인다. o 양도 꼭 먹을만큼만 만들어 먹고 버리는 일이 없도록 한다. o 냉동실, 냉장고만 믿고 식품을 방치하여 버리는 일이 없도록 한다.

– 쓰레기를 줄이기 위한 실천방법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o 쓰레기는 반드시 분리수거를 한다. 젖은 쓰레기와 마른 쓰레기, 재활용 가능한 쓰레기와 불가능한 쓰레기 등. o 주방 싱크대에서 걸러진 음식물쓰레기는 체 등에서 담아 1차로 물기를 제거한 후 꼭 짜서 버린다. 물기가 남아 있으면 헌 신문지에 짜서 물기가 흘러나오지 않도록 한다. 젖은 음식물 쓰레기를 베란다나 정원에 펴 말린 다음 배출하거나, 과일껍질 등은 실내에서 어느 정도 말린 후 배출한다. 태울 수 있는 것은 소각장에서 태운다. o 썩는 쓰레기는 구덩이를 파고 모아 퇴비로 만드는 것이 좋다. 음식물 쓰레기를 퇴비나 사료로 이용하는 것도 환경을 보호하는 한 방법이다. 가정에서 가정용 퇴비화 발효용기에 음식물쓰레기와 미생물 발효제를 넣어 퇴비원료를 만든다. 가정에서 퇴비화 발효용기를 사용하면 썩는 냄새가 나지 않으며, 음식물쓰레기를 매일 손쉽게 처리할 수 있다. 만들어진 퇴비는 주말농장이나 텃밭, 정원에 유용한 거름으로 사용 가능하다. 가정에서 배출된 퇴비원료는 공동 수거용기로 수집. 운반하여 퇴비로 이용할 수 있다. 음식물쓰레기에 수분 조절제 (톱밥 등)와 발효제를 투입하여 하루 정도 혼합 발효한 후 부숙시키면 퇴비가 생산된다. 발효된 음식물쓰레기를 밭갈이할 때 혼합하여 1주일간 썩히면 토양에 유용한 거름이 된다.

둘째로 집안의 독성을 줄여야 한다. 집안의 독성을 줄이려면 먼저 유해 제품의 사용을 줄여야 한다. 다음과 같은 제언을 따르면 독성이 적은 제품을 선택하고 가정에서 사용되는 유해한 물질을 줄일 수 있다.

– 물건을 구매할 때 가능하면 독성이 없는 포장과 물건을 사도록 해야 한다. 독성이 있는 포장에는 제조과정이나 분배과정에서 간혹 납, 카드뮴, 수은이나 6가 크로뮴 같은 독성물질 등이 포함되어 있어서 소비자의 건강을 해칠 수 있다. 따라서 가능한 한 포장지의 사용을 줄이거나 포장되어 있지 않은 제품을 구매할 필요가 있다. – 페인트를 사용할 때 유성페인트 보다는 수성페인트를 사용하여 페인트 세척제의 필요를 없앨 수 있다. – 수명이 다 된 수은 건전지는 반드시 따로 모아 두었다가 지정된 장소에 버린다. – 수질 오염을 막기 위해서 가정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은 다음과 같다.

o 쓰고 남은 기름류는 절대로 하수구로 흘려 보내지 말고 모아서 비누를 만들어 쓴다. o 음식 찌꺼기는 반드시 걸러서 내보낸다. o 정화조는 1년에 1회 이상 보수 점검하고 청소한다. o 합성세제의 사용량을 최대한 줄이고 천연세제를 사용한다. 가정용 화학 세척제 대신에 베이킹 소다 (baking soda)나 식초, 쌀뜨물, 비누 등을 이용하여 독성을 줄일 수 있다. 이를 통해 물의 오염도 원천적으로 낮출 수 있다. o 쌀 뜨물이나 국수 삶은 물 등은 정원수로 사용한다.

자원 (Resources) 절약

사전적으로 자원이란 인간 생활에 도움이 되는 자연계의 일부라고 정의되는데 기초자원과 천연자원을 가공한 것을 1차 자원, 이것을 가공한 것을 2차 또는 3차 자원이라고 할 수 있다. 기초 자원에는 지하자원, 토지자원, 수자원 등이 포함되며 천연자원에는 산림자원, 동물자원, 수산자원 등이 포함된다. 식량자원과 공업원료 자원과 에너지 자원은 관계되는 기초자원과 천연자원을 가공하여서 얻게 되는 1차 자원이라고 할 수 있다.

환경보호를 위해 가정에서 할 수 있는 자원 절약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에서 취사용 연료 및 전기, 수돗물, 종이, 금속 등의 에너지 자원의 절약이 단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한 실천적인 방법을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취사용 연료 절약 취사용 연료, 즉 전기와 도시가스를 절약하려면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온 가족이 함께 식사하는 것과 조리기의 불꽃을 적절히 조절하는 것과, 열 흡수가 잘되는 밑바닥이 넓은 조리기를 사용하거나 압력밥솥 (냄비)을 사용하는 경우로 할 경우로 나눌 수 있다. 위와 같이 함으로써 상당한 양의 전기와 도시가스를 절약할 수 있다. 가스용 압력솥은 전기용 압력솥보다 열 효율 면에서 훨씬 우수하므로 밥을 지을 때 고려해 보면 어떨까 한다.

– 수돗물 절약 집에서 음식을 만들고 씻고 청소를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물이 필요한데 수돗물을 아껴쓰면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물부족 현상을 다소간 줄일 수 있다.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은 사항을 주의하여 점검하고 실천하면 좋겠다.

o 물이 흐르고 있는 수도꼭지가 있는지 확인하고 반드시 잠그는 습관을 기른다. o 매번 욕조에 물을 받아 목욕을 하기보다는 가능한 짧은 시간 동안 샤워를 한다. o 한 번 쓴 물은 다시 이용하는 습관을 기른다. 쌀뜨물을 국을 끓일 때 이용한다든지 기름제거용으로 사용하는 것은 물론 한 번 세탁한 물이나 세수한 물 등은 바닥 청소용이나 화장실 변기 세척용 등의 다른 용도로 사용한다. o 물을 틀어놓은 채로 음식이나 그릇을 씻지 않도록 한다. o 세차는 호스로 하지 말고 물을 받아서 사용한다. o 화장실 물탱크에 벽돌을 넣는다. o 지붕에서 내려오는 빗물을 지하탱크나 기타 용기에 모아 두었다가 화장실 변기 세정 용수나 공조용 냉각수나 나무 물주기 용도로 사용할 수 있다. 아파트 같은 경우에는 관리 사무소에 이와 같은 방법을 사용하도록 건의할 수 있으며 개인 주택의 경우에도 큰 통을 몇 개 준비하면 시도해 볼 수 있다.

– 종이 절약 가정에서 사용하는 종이는 사무실에서 사용하는 것에 비하면 그 양이 많지 않지만 포장용지의 사용이나 가정으로 배달되는 불필요한 광고지 등을 고려하면 상당한 양이 된다.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가정에서의 종이 절약을 실천해 보면 좋겠다.

o 선물할 때나 물건을 구매할 때 가급적 포장용지를 사용하지 않는다. o 불필요한 광고지나 메일이 배달되지 않도록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가령 문 앞에 ‘광고지 사절’이라든지 인터넷이나 회사를 통해 물품을 구입할 때 불필요한 뉴스나 광고지의 배달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o 컴퓨터나 여타의 인쇄, 복사기를 이용할 때 반드시 필요한 것만 인쇄하거나 복사한다.

나오는 말

지금까지 가정에서 할 수 있는 환경보호 중에서 ‘줄이기’에 대해서 살펴 보았다. 그런데 위에서 제시된 것들은 어떤 면에서는 일반적인 환경보호 방법과 큰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선물로 허락하신 인간의 이성에 맞는 것들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연과 인간세계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이성을 활용하여 적합한 방법을 찾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과학이라든지 각종 학문을 하는 행위도 다 이러한 이성을 이용한 것임은 두말 할 나위도 없다.

환경보호를 위한 방법 중 ‘줄이기’는 성경에서 말하는 성령의 열매 중 절제와 예수께서 말씀하신 새 계명인 이웃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원천적으로 환경 파괴는 인간의 소비행위와 연결되기 때문에 인간의 소비를 줄이면 소비와 연결된 각종 환경문제가 줄어들게 된다. 자연의 정화능력 또는 지지력 (Carrying Capacity)를 고려한 소비 조절이 환경보호의 중요한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환경보호 노력은 곧 바로 이웃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이자 문화명령과 지상명령의 실천임을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단 하나뿐인 하나님의 걸작이고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과 자연은 서로 사랑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숙명적인 관계에 놓여 있다. 그 책임을 하나님은 인간에게 맡기셨기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아니 감사한 마음으로, 보다 창의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이 책임을 감당하길 소망해 본다. 나 한 사람부터, 그리고 가정에서부터…


[반영운] 성서적 입장에서 본 환경정의

이코스타 2003년 5월호

환경과 환경문제


일반적으로 환경은 우리를 둘러싼 인문적이고 자연적인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적인 의미에서 환경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인간을 포함한 모든 세상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환경이란 말은 어찌 보면 지나치게 인간 중심적인 사고 속에서 등장한 말인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환경을 사람을 둘러싼 모든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자는 사람도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에서 ‘환경’보다는 ‘생태’라는 말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주장은 인간의 위치가 생태계의 일부라는 면을 강조함으로 인간의 오만을 지적하고 결과적으로 조화로운 삶을 추구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환경이라는 말을 쓰든 생태라는 말을 쓰든 중요한 사실은 성경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마지막 여섯 째 날 만드셨고 인간에게 당신이 지으신 만물을 관리하고 돌보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환경에 대한 청지기로서의 책임을 부여 받았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의 환경은 인간에 의해 많이 파괴되었고 결국 인간의 생존마저 위협하고 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환경문제 란 산업화에 따라 자연이 파괴된 현상이라고 한다. 자본주의의 등장으로 인하여 자연 (환경)을 오로지 인간의 편의를 위해 이용하는 대상으로 생각하게 되면서 자연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주인과 객체의 관계로만 생각하고 지배하게 되었다. 즉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지배와 종속의 관계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환경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람의 존재 자체가 환경에 부담이 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성경적으로 환경문제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성경에서 말하는 환경문제 란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질서가 인간으로 인해 파괴되는 현상을 말한다. 즉 사람이 하나님처럼 되면서 더 이상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지 않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세워 두신 인간의 역할을 넘어서서 인간의 이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관계와 질서와는 정반대로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파괴되자 사람들은 서로 미워하고, 죽이고 착취하는 관계가 되었으며 (창세기 4장 이후의 인간의 역사) 사람과 자연과의 관계 또한 착취 및 지배의 관계로 변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사람이 섬김과 사랑이 아닌 이윤추구와 욕심에 기반을 두고 자연 및 과학기술을 오용한 것이 성경적인 관점에서 본 환경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환경정의 (Environmental Justice)


‘환경’과 ‘정의’를 붙여서 ‘환경정의’라는 말이 미국에서 생겨났다. 이는 원래 인간을 포함한 모든 자연만물이 오염되지 않은 환경에서 살 권리와, 어떤 오염원으로부터 오염되지 않을 권리가 공평하게 있음을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난 말이다. 즉 사람이 자연을 착취하면서 대책 없이 오염시키고, 사람들 사이에도 어떤 사람들은 보다 좋은 환경 (덜 오염된 환경)에서 사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열악한 환경 (오염된 환경)에서 살고 있는 문제를 원천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말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자원낭비와 환경오염을 수반하는 생산활동에서 이익은 자본가나 경영자에게 많이 돌아가는 반면 피해는 ‘생물적 약자’와 ‘사회적 약자’에게 많이 분배되는 현상이 생겼다. 여기서 생물적 약자란 태아를 포함한 아이들, 노인 등 환경오염에 쉽게 영향을 받는 사람들을 말하며, 사회적 약자란 저소득층, 노동자, 농민, 어민 등을 말한다. 생물적 약자의 범위에는 인간만이 아닌 자연 생태계가 포함되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을 어떻게 만드는 가에서부터 모든 의사결정에 노동자나 주민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고 경영자나 전문가 및 공무원에 의해 일방적으로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전자의 것을 분배의 부정의라고 하면 후자는 절차의 부정의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둘을 합하여 환경부정의라고 하고 이러한 부정의가 해결된 상태를 ‘환경정의’라고 한다.


미국에서의 환경정의


미국에서 환경정의에 대한 논란이 심화된 것은 1980년대 초의 일이다. 산업화가 본격화되면서 나오는 유해 폐기물의 처리를 둘러싸고 1960년대부터 문제가 되었다. 환경오염의 문제에 눈을 떴던 중산층의 백인들은 자신들의 주위에 폐기물 처리장이 들어 오지 못하도록 정치적인 힘을 발휘하였다. 따라서 유해 폐기물 처리장은 조용히 저소득 아프리카 흑인과 미국 원주민이 사는 지역에 위치하게 되었다. 1982년에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워런 카운티 (Warren County)에서 처음으로 유해 폐기물 매립에 대한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즉, PCB (Polychlorinated Biphenyl)를 담은 6천 톤의 흙을 매립하려고 했을 때, 스스로를 보호한다는 생각으로 시작하여 약 5 백 명의 사회 운동가들이 투옥되었다. 또한 1983년에는 Robert Bullard라는 흑인 학자가 미국 텍사스 휴스턴에서 고형폐기물 처리장의 위치가 저소득층이면서 흑인계층의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리고 1987년에는 그리스도 연합교회 (United Church of Christ, UCC)의 인종과 정의 위원회 (Commission for Race and Justice)에서 미국 최초로 전국을 대상으로 유해 폐기물 처리장이 어디에 위치하는지를 조사했는데 바로 Robert Bullard의 연구 결과를 보다 심층적으로 뒷받침 하게 되었다. 이 연구를 기화로 하여 미국에서는 환경정의에 대한 논의가 심화되었고 이후 약 10여 년간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다. 연구의 결과가 다소 엇갈리기는 하지만 실제조사를 곁들인 상당수의 연구가 환경부정의의 사례들을 지적하고 있다. 아울러 이 문제가 미국의 특수한 상황 중에 하나인 인종차별(Racial Discrimination) 문제와 맞물리면서 환경문제의 뜨거운 감자로서 부상하게 되었다.


일본에서의 환경정의


일본에서도 1960년대 이후 산업화와 함께 각종 공해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공해의 피해가 대부분 ‘생물적 약자’와 ‘사회적 약자’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음이 미야모또 겡이찌 (宮本憲一)에 의해 지적되었다. 예를 들어, 체르노빌 핵발전소 사고의 후유증으로 추정되는 사망자의 대부분이 아이들이었다. 일본의 공해문제의 심각성을 알렸던 미나마따 병의 가장 큰 피해자는 영세 어민들이었다. 식품공해 또한 그 중의 하나로서 어육 햄, 소시지, 두부 등의 살균제로 쓰여지고 있는 식품 첨가물 AF2가 간암의 원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러한 음식은 주로 저소득 층이 많이 먹고 있었다. 세계 공통적인 현상이긴 하나 무 농약, 무 첨가 식품의 값이 농약을 치거나 방부제 등의 식품첨가물을 넣은 것보다 좀 더 비싸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미나마따의 경우 생물적 약자의 범위에 인간만이 아닌 자연 생태계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미나마따에서 유기수은에 중독된 것은 사람이 먼저 가 아니라 어패류나 고양이였으며, PCB 중독증으로 알려진 카네미유증을 알린 것은 닭들의 집단 폐사였기 때문이다.


정책적인 면에서 환경정의 구현


환경오염으로부터 생물적 약자와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그들의 환경권을 보호하려면 법에 근거를 둔 실제적인 장치들이 필요하다. 그 장치들은 곧 각종 산업, 개발, 의료, 에너지, 환경관리 등의 분야에 환경정의의 개념을 반영한 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하도록 하는 정책 개발을 말한다.


따라서 미국에서는 환경정의에 대한 요구가 사회 각계 각층에서 일어나고 환경부정의의 사례가 인종차별과 궤를 같이 하면서 급기야 1994년에 클린턴 대통령이 “환경정의 특별 행정명령 (Executive 12898)”에 사인하게 되었다. 이로써 환경정의의 개념이 법제화되고 각종 국가 정책에 환경정의의 개념이 실현되게 되었다. 즉, 모든 정책을 수행할 때는 반드시 환경정의를 고려하여 절차적인 면에서 공평하고 투명하게, 그리고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환경오염의 분배의 면에서 형평성을 찾도록 정책 대안을 만들어 가야 한다. 그러나 클린턴의 행정명령 12898에는 생물적 약자로서 생태계를 고려하고 있지 않다 (아래 글 참조).

“To the greatest extent practicable and permitted by law, and consistent with the principles set forth in the report on the National Performance Review, each Federal agency shall make achieving environmental justice part of its mission by identifying and addressing, as appropriate, disproportionately high and adverse human health or environmental effects of its programs, policies, and activities on minority populations and low-income populations in the United States and its territories and possessions, the District of Columbia, the Commonwealth of Puerto Rico, and the Commonwealth of the Mariana Islands” (Executive Order 12898, Section 1 1-101 Agency Responsibilities).

그저 문제가 되고 있는 소수 인종과 저소득 층에게 분배면에서 공정하고, 절차적으로 환경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다. 이것만으로 라도 현재까지 문제가 되고 있는 환경부정의의 문제에 대한 정부 정책의 진일보한 면을 읽을 수 있으나 역시 인간 중심적인 시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아쉬움이 있다. 따라서 본질적인 환경정의를 실현하려면 말 그대로 ‘생물적 약자’와 ‘사회적 약자’가 불공평하게 취급되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해야 한다.


환경문제는 지역적이고 국부적인 경우도 있지만 나라를 넘어서 발생하는 경우가 빈발하고 있다. 이러한 성격에 비추어 볼 때 환경정의의 논의는 이제 한 나라만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국가 간, 세대 간, 내부 사회 간, 종간의 정의를 생각하여 국내법이나 국제법을 만들고 각 정책을 구체적으로 입안하고 실행하는 데 맞추어져야 한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는 환경 기본법에 환경정의의 개념을 넣으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이는 환경정의의 개념도 미국의 것보다 좀 더 포괄적으로 적용하려고 애쓰고 있다. 만일 환경기본법이 환경정의의 정신에 의해 개편되면, 많은 부분에서 각종 개발 정책이나 환경관리 정책, 기타 인간의 복지와 관계된 정책들의 입안 과정에서부터 실행계획까지 검토를 받도록 해야 한다. 첫째로 우리 국민과 다른 나라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국가 간에 필요한 조약을 체결하고 유해폐기물을 수출하거나 수입하지 않도록 하며 물이나 공기를 통해 타 국가에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규제해야 한다. 둘째로 다음 세대가 필요로 하는 자원이나 에너지를 고려해서 현세대의 계획을 세우고 집행해야 하며, 다음세대에게 현 세대의 오염이 계승되지 않도록 하는 지속 가능성을 확보해야만 한다. 셋째로 사회 내부적으로 어느 한 계층이나 집단이 편파적으로 특별한 이익이나 피해를 보거나 당하지 않도록 제도적으로 보장해야 한다. 넷째로 생태계의 조화를 고려하여 지나치게 인간 중심적인 계획을 하지 않고 자연 친화적인 방법으로 모든 정책과 계획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멸종위험이 있는 동물과 식물들을 적극적으로 보호하여 가능한 한 생태계의 균형을 이루도록 노력해야 한다.


성서적 입장에서의 환경정의 구현


이제까지 환경정의를 어떻게 정책적으로 이루어 갈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다분히 인간적인 지혜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인간이 이러한 원칙과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실천할 의지가 없으면 이러한 논의는 거의 필요 없게 된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우리 인간이 걸어온 발자취에서 너무나 명백하게 이기적이고 파괴적인 모습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 자신도 생각과 입으로 내뱉는 것과 실제 행동이 많이 다름을 볼 때 인간적인 시도의 절망을 느낀다.


그렇다면 어떻게 환경정의를 성경적으로 이뤄내는가 하는 질문이 생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성경적인 입장에서 환경정의를 이루기 위한 정책적인 대안 뿐 아니라 근본적인 삶의 방향을 찾아가야 한다. 성경에 환경정의 문제에 대한 세세한 대안이 있지는 않지만 어떠한 정신으로 환경정의와 같은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첫째로, 총체적인 구원의 정신이 필요하다. 구원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홀로 열어 놓으신 하나님과의 회복과 화평의 길에 동참하는 것이며, 믿는 순간에 이뤄지는 것만이 아닌 지금 이 순간부터 연결된 영원의 예수를 만나는 것이다. 로마서 8장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구원은 흔히 영적인 구원 뿐만 아니라 온 세상 만물과 우주가 함께 구원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이기적이거나 지나치게 인간 중심적인 구원 관은 하나님께서 주신 질서를 깨는 위험한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동물도 식물도 가난하고 약한 사람도 하늘도 땅도 모든 피조물이 다 함께 구원을 이뤄가도록 하는 중책을 우리 사람, 특히 하나님의 백성들에 주신 것이 아닐까? 이러한 정신이 우리에게 소화되고 생활화 될 때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환경 지킴이가 되고 서로를 참 이웃으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심지어 자연도 우리의 이웃으로 생각할 수는 없을까? 만일 우리의 십자가로 인한 구원 관이 그렇게 깊어진다면 우리는 감히 경제적인 불가피성을 이유로 하여 우리의 이웃에게 피해를 전가하지 못하게 될 것이고 오히려 이웃을 위해 우리가 대신 피해를 당하고 예수님처럼 죽음까지도 기쁘게 맞게 되지 않을까?


둘째로, 청지기적인 정신이 있어야 한다. 청지기는 주인의 뜻대로 집안을 관리하는 사람을 말한다. 창세기에 나타나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청지기적인 직분을 허락하고 있다. 구약에서 에덴동산을 관리하고 다스리는 직분이 그것이라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지금 우리가 관리하고 다스려야 하는 에덴은 어디일까? 바로 우리가 사는 주위와 사회, 국가, 더 나아가서는 세계 구석구석을 말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국적과 인종을 초월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따라서 자녀가 된 우리는 아버지이자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대로 세상을 다스리고 관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땅을 오염시키지 않도록 주께서 주신 지혜를 동원해야 하는 것이다. 환경적인 부담이 생겨날 경우에는 그 책임을 이웃에게 떠미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자신이 속해 있는 공동체가 함께 나누어지는 것은 정말 무리한 일일까? 점점 더 거세어 지고 있는 지역 이기주의 움직임에 교회공동체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 들도 대거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


셋째로 종말론적 정신이 있어야 한다. 예수께서 세상에 대한 심판자로서 또 어그러진 세상의 완성자로서 다시 오신다는 것을 믿는 정신이다. 그 사상이 있어야 세상 속에서 헛되이 키워오는 욕심의 굴레를 벗을 수 있고 자연과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 즉 나그네의 자세로 있어야만 참으로 옳은 것을 선택할 수 있다. 세상을 등지는 무관심으로서의 종말사상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스스로 욕심을 포기하고 참을 추구하는 정신이 너무나 필요하다. 궁극적으로 구원의 완성에 대한 목마름이라고 할 수 있다. 로마서 8장 19 – 23절에는 세상의 모든 피조물이 신음하며 구원을 고대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요한 계시록 21장 1-7절에는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에는 세상을 새롭게 하시면서 고난을 받아 온 사람들의 눈에서 눈물을 씻어 주시겠다는 약속이 있다. 주께서 오실 때에 임할 새 하늘과 새 땅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환경정의를 이루도록 부탁하시는 것은 아닐까?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결코 이루지 못하는 궁극적인 절망이 여기에 있다. 따라서 환경정의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이루어 가야 할 사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다.


넷째로, 환경정의를 이루려면 예수께서 보여주신 이웃사랑의 정신이 있어야 한다. 이웃사랑은 위에서 살펴 본 것처럼 사람뿐만 아니라 환경도 포함한다. 사회의 아픔과 사회의 불평등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손해를 볼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예수께서 그렇게 사셨듯이. 왜냐하면 그리스도인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삶을 산 제물로 바쳐야 할 제사장이라고 바울은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롬 12장 1-2절). 우리가 사회의 아픔을 어떻게 책임질 것이냐의 문제는 제사장의 입장이 아니면 해결되지 않는다. 일부 영웅적인 운동가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세상사람은 희생의 제사를 드릴 근거가 없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영웅이 되지 않더라도, 돈이 생기지 않아도 중요한 것을 소리 없이 할 수 있는 충분한 성경적인 근거와 존재적인 근거가 있다. 이웃을 위해 자기 목숨을 산 제물로 바쳐도 좋을 만큼 예수께서 이루신 구원이 우리에게 소중하기 때문이다. 즉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가 될 때 환경정의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란 인간이 자연 속에서 노동을 통해 삶의 양식을 얻고, 한 편 자연이 인간의 노동을 통한 섬김으로 풍요로워지도록 하는 조화로운 삶임을 우리는 타락하기 전 에덴에서의 아담을 통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예배당에서 드리는 형식적인 예배에 국한되지 않고 눈을 넓혀서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수하게 삶의 구체적인 영역에 대한 질문을 하고 이웃 사랑의 정신에 비추어서 대안을 만들고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글을 맺으며


환경문제가 점점 국가간 세대간의 문제가 되어가듯이 환경부정의의 문제도 우리 이웃만의 문제가 아닌 세계의 문제가 되어가고 있다. 이런 문제의 고리를 어떻게 끊을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우리 각자가 최소한의 소비를 실천해야 한다. 그리고 지혜를 다 해서 환경을 해치지 않는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환경문제에 대한 예민한 감시는 물론 현안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하다. 현재 환경분야에서 중요하게 대두되고 있는 문제 중의 하나가 공공참여 (Public Participation)이다. 이제까지의 환경정책이나 각종 개발정책에 공공의 의견을 듣지않고 전문가들이나 정치가들이 자신들에 맞게 의사결정을 해 옴으로 인해 많은 문제가 생겨난 것에 대한 반성이 일어났다. 따라서 계획의 시작부터 실행 및 관리에 이르기까지 공공이 참여함으로써 문제를 사전에 방지하고 좋은 대안을 찾아가는 계기가 만들어지고 있다. 그리스도인 들도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자연과 사람을 해치지 않고 환경적인 부담과 짐을 함께 나누어 가지면서 우리의 미래 세대들의 권한을 빼앗지 않는 대안 (지속 가능한 발전)을 마련하는 데에 자기 목소리를 내야 한다. 이 일은 환경 전문가들의 몫이 아닌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감당해야 할 사명이라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면서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중요한 구성원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은 사람 혼자서 살 수 없고 사람과 자연이 서로 사랑해야만 살 수 있게 되어 있다. 사람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며 살기 위한 근본적인 책임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에게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만이 총체적인 구원 관과 종말적인 정신에 입각하여 청지기적인 삶과 이웃사랑의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의 칭찬과 멸시에도 요동치 않고 그리스도로 인한 평화와 구원의 기쁨에 만족하면서 자발적인 가난과 십자가의 길을 걸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듯이 자신과 사람과 자연과 우주를 사랑하면서…

[반영운] 환경과 지대조세제

이코스타 2003년 4월호

땅과 환경문제


전 세계가 환경위기를 절감하면서 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들이 제시되고 시도되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많은 관심이 인간이 개발한 기술을 가지고 환경문제가 발생하고 난 후에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영역에 쏠려 있다. 그러나 정작 환경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어떻게 근본적으로 환경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억제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이제 눈을 뜨고 있는 단계에 있다. 그리고 그러한 계획적인 시각도 정치적인 싸움에 밀려서 단편적이고 지엽적으로 되어 문제의 근본을 다루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대부분의 환경문제는 경제와 직결되어 있고 모든 경제행위는 땅을 기초로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허공 위에서 시작할 수 있는 인간의 행위는 없기 때문이다. 땅 위에 건물을 짓고, 그 건물 속에서 자연의 에너지와 자원을 가지고 물건을 만들고, 만든 물건을 일정한 건물 안에서 팔고, 팔고 산 물건은 일정한 장소에서 사용되고 폐기되고 있다. 이러한 경제 행위의 과정에 땅은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다. 성경은 이미 이 문제에 대해 예견한 듯 땅과 그 위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에 대한 주권이 창조 주 하나님께 있고 인간은 단지 관리자에 해당한다는 근본적인 관계 설정을 하고 있다 (창 1: 26-27, 창 2:14-15). 성경의 전체적인 정신에 따르면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이 바로 하나님께서 지으신 땅과 만물의 정복자와 지배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돌볼 책임이 있다고 선언하고 있다. 성경을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허락하신 역사서가 아니라 전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경제문제와 환경문제에 대해서도성경에서 보다 분명한 가르침을 얻어야 하고 얻을 수 있다.


땅에 대한 하나님의 뜻


땅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나타낸 성경 구절은 레위기 25장 23-28절로서 다음과 같다.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 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너희 기업의 온 땅에서 그 토지 무르기를 허락할지니 만일 너희 형제가 가난하여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이 와서 동족의 판 것을 무를 것이요. 만일 그것을 무를 사람이 없고 자기가 부요 하게 되어 무를 힘이 있거든 그 판 해를 계수하여 그 남은 값을 산 자에게 주고 그 기업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그러나 자기가 무를 힘이 없으면 그 판 것이 희년이 이르기까지 산 자의 손에 있다가 희년에 미쳐 돌아올지니 그가 곧 그 기업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본 성경구절은 토지의 주권이 하나님 자신에게 있으므로 한 개인이 영원히 소유할 수 없고 인간은 땅을 일정 기간 동안 사용할 수 있다고 선언하고 있다. 땅과 관련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50년마다 지켜야 할 희년은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려놓는 것이며,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의 의미를 희년에 비교하고 있다. 모든 것의 참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은 종교적인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을 넘어서 삶의 근거인 땅의 주권을 하나님께 내어놓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삶의 근거인 땅의 주권을 하나님께 드리고 인정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가난과 기근과 환경파괴의 피해자이자 가해자로서 이 세계를 살아가면서 우리는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해 헨리 조지 (Henry George)가 성경을 토대로 제안한 지대 조세제도의 도입을 통한 문제 해결의 가능성을 살펴 보기로 한다.


지대 조세제


지대 조세제는 100여 년 전 헨리조지가 ‘진보와 빈곤 (Progress and Poverty)’이라는 책을 통해 제시한 것으로서 토지의 공공성을 토대로 사유화 된 토지의 이익이 사회로 환원되지 않아서 생겨나는 많은 정치 경제적인 문제를 세제를 통해 토지의 지대 (Rent)를 100퍼센트 환수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좀 더 개략적으로 지대조세제에 대해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건물에서 나오는 이익과 개인과 회사의 수입 등 인간의 노동의 결과에는 세금을 없애고 땅에만 매년 땅의 임대 가격에 세금을 부여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둘째, 주위의 땅을 기존의 상태에서 고려하면서 각 단위의 땅을 개선되지 않은 지가 (unimproved site value)로 평가한다.


셋째, 공지나 농지를 포함한 모든 땅에 세금이 부과되며 토지의 가치 모든 허가와 규제가 고려된 상태에서 가장 적절하게 사용되는 것을 전제로 하여 평가된다.


넷째, 실제로 지대조세제는 현재 운용되고 있는 세금제도와 흡사하나 다만 모든 땅에 세금을 부과하는 것과 빌딩과 다른 시설에는 세금을 적게 부과하는 것이 다르다.


다섯째, 만일 토지 임대 가의 100 퍼센트가 세금으로 부과된다면 토지는 더 이상 현금 가치가 없어지게 된다. 왜냐하면 토지의 매매 가는 임대 수입을 현금화할 때 생겨나기 때문이다.


헨리 조지는 토지를 인류에게 공동으로 허락하신 하나님의 선물로 보고 그 혜택이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토지의 공평성을 보장하기 위해 모든 사람이 똑같이 토지를 나누어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각 토지의 생산성과 위치에 따라 각 토지의 가치가 다를 뿐 아니라 토지에 대한 소유권이 이미 확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토지로부터 나오는 수익, 즉 지대를 공유함으로써 공평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지대란?


지대는 생산물 중 토지의 소유자에게 그 토지를 소유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귀속되는 부분을 말한다. 즉 조지에 의하면 지대는 토지를 이용한 생산의 결과 중 일부분을 얻을 수 힘을 말한다. 따라서 일정한 토지 위에 세워진 주택, 공장, 상가를 사용한 대가 중에서 토지 사용에 해당되는 대가만이 바로 지대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땅 위에 세워진 건물을 사용함으로써 지불하는 액수를 자본사용의 대가, 즉 자본 수익으로 본다. 그런데 헨리조지는 이 지대를 토지 소유자 개인이 독점하는 것을 공평하지 않다고 지적하고 있다. 왜냐하면 지대란 인적노력으로는 생산하거나 증가시킬 수 없는 자연요소 (특히 토지)를 개인의 소유로 할 때 생겨나는 독점가격이기 때문이다.


헨리조지의 이러한 사상은 위에서 말한 성경 구절이 주장하고 있는 ‘땅에 대한 하나님의 독점적 주권’에 근거하고 있다. 따라서 원칙적으로 어느 누구도 토지를 소유할 수 없다. 설령 현실적으로 누군가 토지를 소유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는 그 토지를 창조하는 데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으며 단지 먼저 점령했다는 이유만으로 지대수익을 독점한다는 것은 공평하지 않다고 한다.


지대 공유 이유


앞에서 살펴 본대로 지대는 한 사회가 가지고 있는 발전과 정비례의 관계가 있다. 즉 인구가 증가하고 기술이 발전하면 새로운 토지 수요를 일으켜서 지대소득은 더욱 커지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점점 생산성이 낮은 한계지를 이용하게 되면서 지대가 증가된다. 토지 소유자로 하여금 아무런 노력을 투입하지 않고도 높은 지대를 얻게 하는 힘이 인구증가와 기술발전 등의 사회적인 힘에 근거하는 한 사회적으로 창출된 지대가 토지 소유자 개인에게만 돌아가는 것은 공평하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느 한 지역에 도로가 뚫리고, 기차 역이 생기고, 공원과 학교와 관공서가 들어서면 자연히 그 지역의 지대는 상승한다. 이렇게 상승된 지대를 사회가 공유한다는 것은 정당하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지대 공유화의 주장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Fred Harrison을 들 수 있는데, 그는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지대의 공유화를 통해 완전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Harrison, 1983). 지대를 사회 (공공)로 모두 환수하게 될 경우 생겨나는 결과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첫째로 투기적인 목적으로 땅을 놀리지 못하고 땅을 최적의 용도에 사용하여서 그 땅에서 발생할 수 있는 지대에 해당하는 세금을 납부하게 한다. 둘째로 지대를 사회에 환수함으로써 토지의 이용률을 높이고 투기적 목적으로 보유하고 있던 땅이 토지 시장에 나오게 함으로써 토지 시장에 토지의 공급이 늘어나게 되며 그로 인해 지가의 하락을 유도할 수 있게 된다. 세째로 토지 실수요자들이 시장에 나온 값싼 토지를 최적의 용도로 사용하게 된다.


지대 공유개념은 토지의 사적 소유권 중 처분권과 이용권은 인정하되 수익권은 부정하고 있다. 즉 토지로부터 나오는 지대를 가질 수 있는 권리를 사회가 가질 것을 천명하고 있다. 지대 공유 개념이 기초하고 있는 재화의 소유권은 노동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즉 인간은 반드시 자신의 인격을 발현하기 위해 노동을 할 수 있어야 하며 그 노동을 통해 생산과 소비와 교환과 보유의 권리를 갖게 된다. 이처럼 인간의 소유는 반드시 노동을 통해서만 그 정당성을 부여 받게 된다는 면에서 토지는 인간 노동의 산물이 아니므로 어떤 특정인이 독점적으로 소유할 수 없다. 지대 공유의 개념은 바로 토지에 대한 공평하지 못한 소유에서 비롯되는 사회문제 즉, 토지투기, 빈부격차 심화, 경제위기, 환경파괴 등을 해결하는 열쇠를 제공할 수 있다.


지대 조세제를 통해 본 개발과 환경문제


제임스 쿤슬러 (James Howard Kunstler)는Geography of Nowhere에서 현재의 재산세제가 야기시키는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Our system of property taxes punishes anyone who puts up a decent building made of durable materials. It rewards those who let existing buildings go to hell. It favors speculators who sit on vacant or underutilized land in the hearts of our cities and towns. In doing so it creates an artificial scarcity of land on the free market, which drives up the price of land in general and encourages even more scattered development, i.e., suburban sprawl…”

현재의 재산세제는 실제로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세금을 부여하고 오히려 땅을 소유하고 땅을 놀리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많은 이익을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연유로 땅을 투기의 목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건재하게 되고 도회지의 많은 땅들이 사용되지 않고 땅값은 치솟게 된다. 따라서 실제 땅이 필요한 사람들은 값싸고 적당한 땅을 찾아서 교외로 교외로 나가게 된다. 결과적으로 불균형적인 개발이 이루어지고 자연이 파괴되며 교외화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이처럼 무분별한 개발을 동반한 환경파괴는 토지 소유제도와 아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만일 이러한 문제가 해결되면 사람들과 산업은 정상적인 속도로 적당한 준비 과정을 거치면서 조금씩 도심 밖으로 나가게 될 것이고 결과적으로 쓰레기 문제나 자연을 준비 없이 파괴하는 일이 없게 될 것이다. 지대조세제를 통하면 현재 교외화에서 빚어지고 있는 도시 인구과밀 또는 도시와의 단절과 같은 문제와는 달리 도시 사람들은 시내 가까운 곳에 있는 땅을 보다 싼 값에 얻게 되면서 도시 문화의 이점과 자연과의 친숙함을 동시에 누리게 될 수 있다.


브라질의 열대림이 파괴되어 가는 것의 원인 중의 하나가 바로 토지가 일부 계층에 의해 독점적으로 소유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문제는 바로 농업에 이용돼야 할 절대 농지를 개인이 소유하고 있음으로 인해서 도회지로 몰려 들었던 사람들이 농지를 찾아 열대림으로 들어가서 농지로 쓸 수 없는 열대림에 불을 놓고 땅을 개간하면서 생겨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대 조세제를 도입하면 쓸 수 있는 양질의 많은 땅이 시장에 나오게 되고 필요한 사람들이 싼 값에 이용할 수 있게 됨으로 인해 열대림의 파괴도 급속히 감소될 수 있을 것이다. 인도네시아나 아프리카에서도 토지의 독점으로 인해 비롯되는 동일한 문제를 발견할 수 있다.


종종 이러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각 나라에서는 개인의 자유를 구속하면서 많은 규제와 법을 만들고 있지만 모니터링의 어려움을 실상 환경문제의 근본을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임을 실감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규제를 실행하려면 지속적인 감시와 규제가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대 조세제를 통하게 되면 정부에 의해 만들어진 많은 규제 대신에 시장경제의 시스템에 의해 형성된 공동체 의식과 자발적인 규제 준수를 통해 양질의 환경기준을 설정할 수도 있고 설정된 기준을 지켜갈 수도 있을 것이다.


현대의 환경위기를 에너지 위기라고 할 만큼 에너지 문제가 심각하다. 즉 석유나 석탄 등의 탄화 에너지의 지나친 사용으로 인해 많은 환경 문제가 생겨나고 있다. 이러한 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과학자들은 대체 에너지 개발에 한창이다. 지대조세제는 이러한 움직임에도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현재의 세금 제도에서는 땅 (지하)에서 나오는 자원인 석탄과 석유를 에너지원으로 사용하는 것이 자본 집약적인 기술 개발에서 나오는 대체 에너지 산업인 태양열을 이용하는 것 보다 훨씬 더 경제적인 우위를 점하게 된다. 그러나 땅에서 나오는 에너지에 Ground Tax를 부여하고 자본과 노동 집약적인 에너지인 태양열, 조력, 풍력 등의 산업에는 세금을 면제해 주는 세금제도를 도입하면 좀 더 대체 에너지 산업의 입지를 견고하게 함으로써 환경 파괴적인 에너지 산업을 견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대체 에너지의 기술이 더 개발되고 경쟁력이 높아지게 되면 에너지로 인한 환경문제는 조금씩 개선되게 될 것이다.


지대조세제는 산지나 보존지역의 보존 효과를 높일 수 있다. 100퍼센트의 세율을 적용할 경우 지대를 통한 땅의 경제적인 가치를 잃기 때문에 세금 부담 없이 보존지역을 쉽게 구입할 수 있게 된다. 지금까지 많은 보존 단체들이 몇몇 보존지역을 구입하느라 수많은 돈을 모금해 왔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질 뿐만 아니라, 모금된 돈들로 전보다 더 넓은 지역을 보존하게 되거나 오염된 곳을 복구하거나 관리하는 데에 쓸 수 있게 될 것이다. 아울러 이러한 투자는 오염산업 보다는 오염복구산업이나 연구 및 관리를 활성화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지대조세제 하에서는 쓰지 않고 놀려 두는 땅이 낮은 가치로 평가를 받게 된다. 그러나 땅의 소유주는 정부와 관리계약을 통해 땅에 식재를 한다든지 하는 대체 이용을 하게 될 경우 경제적으로 우위를 점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지대조세제는 토지의 효과적인 이용을 장려하고 결과적으로 자연을 보호해 갈 수 있는 길을 제공할 수 있다.


글을 맺으면서


하나님이 주인인 땅을 개인이 독점적으로 소유하여 모든 이익을 독점하는 것은 하나님과 공동체에 대한 죄악의 행위이다. 중세 시대를 비롯하여 현대에 이르기까지 종교 공동체가 소유하고 누려온 많은 토지의 소유와 그로 인한 부의 축적이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 중심의 사상과 정면으로 배치되고 있다는 것은 심각한 회개의 제목이 될 만하다. 이러한 문제로 인해 우리 세대뿐만 아니라 우리의 후세들이 살아가야 할 세상이 병들게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현대의 교회는 어떠한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리새인들에게 퍼부으신 그 통렬한 꾸짖음의 죄목들이 고스란히 적용되고 있지 않은가? 회칠한 무덤같이 이제는 자신의 부패함 마저 어찌할 수 없는 막다른 상황에 다다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크리스챤이라고 하는 우리의 현재 모습은 어떠한가?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의 정책에 대해 깨어서 파수꾼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을 솔직하게 자신에게 던지면서 환경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의 하나로 지대조세제의 실현을 그려본다. 자신을 포함한 이웃과 나라의 현재와 미래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의가 우리 삶의 예배를 드리는 현장에 실현되는 꿈을…

[반영운] 깔리만딴의 불타는 열대림

이코스타 2002년 11월

지난 9월 초부터 한 달 동안 프로젝트 수행 차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를 방문했었다. 자카르타에서 머무는 동안 신문과 방송매체를 통해 깔리만딴의 열대림이 몇 주 동안 꺼지지 않고 불타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연기가 인근 말레이지아까지 덮여서 한 낮에도 햇빛이 비치지 않고 있으며 비가 오지 않으면 상당량의 열대림이 손실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다. 벌써 깔리만딴의 열대림은 60-70% 정도 유실되고 있다고 보고 되고 있다. 이 현상은 브라질의 아마존 열대림 유실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서 전 지구적인 환경문제라 아니 할 수 없다.


열대림 화재는 벌채와 함께 흔히 rainforest deforestation (열대림 유실)의 주요한 이유들로 알려져 있다. 열대림 화재는 자연적인 현상에 의한 것과 인위적인 행위에 의한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자연적인 현상은 거센 바람에 의해 나무들이 서로 부딪치거나 번개에 의해 발화되는 것을 말한다. 인위적인 현상은 사람들이 경제적인 목적을 위해 방화하여서 화전을 일으키거나 방목을 하는 것을 말한다. 벌채는 상업적인 목적에 의한 합법적인 벌채와 불법적인 벌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합법적인 벌채는 그 용량을 정하여 한계에 맞게 벌채를 하는 반 면 불법적인 벌채는 아무러한 대책도 없이 시간과 장소에 국한하지 않고 나무를 베어서 파는 것을 말한다.


인도네시아의 열대림 유실은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다. 깔리만딴에서 불타고 있는 열대림은 단지 인도네시아의 문제만이 아니라 전세계적인 문제라고 아니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깔리만딴의 원목은 벌써 오래 전부터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어서 아시아는 물론 유럽과 북남미에서 펄프나 가구용으로 수입하고 있다. 가난을 모면하기 위해 화전을 일으키는 것 또한 현재 인도네시아로서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이러한 현상은 신 자유주의 경제 체제가 빚어낸 결과로서 아마존 열대림에서 보여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국적 기업들이 값싼 노동력과 원자재를 확보하기 위해 제 3세계로 몰려들고 있는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예를 들어 아마존 열대림에서 소를 방목하기 위해 벌채 또는 방화하여 없어지는 면적이 하루에 축구장 정도라고 한다. 거기서 생산된 소고기는 전세계 맥도날드와 같은 일품 음식점이나 식당과 식료품점에서 소비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아마존에서 사는 원주민들에게는 삶의 근거지인 열대림이 점점 줄어들고 있어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으며, 전세계적으로는 열대림 화재로 인해서 지구 온실가스 중의 하나인 이산화탄소 량이 증가하고 산소 공급 및 생물 종의 다양성이 손실되고 있다.


일견 인도네시아의 한 지역에서 일어나는 문제로 보여질 수 있으나 조금만 넓게 생각하면 이 문제는 우리 전 세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연루된 공동 범죄임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세계 경제가 하나로 통합되어 가면서 지구 상의 어느 국가도 이 도도한 흐름에서 예외일 수 없게 되었다. 말 그대로 개인 간, 국가 간의 치열한 생존 경쟁이 빚어 낸 결과라고 아니 할 수 없다. 국부적으로는 인도네시아의 공무원이 부패하고 화전민이나 소 방목업자나 벌채업자들과 서로 공모해서 생겨난 문제이지만, 좀 더 넓은 시각으로 보면 세계 경제의 흐름에 의해 생겨난 결과이다. 이 문제에 대한 책임은 방화 당사자에게만 있지 않고 방화의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한 세계 신 자유주의 경제와 그 경제 체제에서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있다.


이 문제를 인식하고 UN을 비롯한 국제 기구에서는 열대림을 보호하기 위한 기금을 조성하거나 캠페인을 벌이고 있지만 실제적인 힘을 발휘하지는 못하고 있다. 일례로 전 지구적인 지속 가능한 개발을 위한 회의가 얼마 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요한네스버그에서 열렸다. 미래세대와 현세대의 필요를 충족하는 환경적으로 건전하고 지속가능한 개발을 이루기 위한 목적으로 열린 회의인데 구체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아직 역부족인 듯 하다. 왜냐하면 환경문제를 해결하려면 각 국가 간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과 같은 선진국은 자유 경제 시스템의 도움으로 사실상 인도네시아와 같은 개발 도상국이 경제적인 이익을 얻기 위해 치르는 엄청난 희생의 대가를 담보로 하여 현재 경제적으로 부유하게 되었다. 그러한 대가 중에 개발도상국의 환경적인 희생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근본적이고 치명적인 것이다. 단기적으로 얻는 경제적인 대가는 장기적으로 빚어지는 환경문제의 근본적인 폐해에 비하면 아주 적은 것인데도 늘 우선 순위에서 밀릴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 크리스챤들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인가? 제일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바로 인식의 전환이다. 깔리만딴에서 타고 있는 열대림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 지, 아니 정말 나의 일처럼 여겨져서 우리 집이 타고 있는 것 같은 아픔을 경험하고 있는 지 깊이 성찰해 볼 일이다. 우리가 이제껏 훈련 받아 온 영적인 일은 소위 의식적인 예배를 드리고 종교적인 행위를 하는 것 정도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조금만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 속에 하나님의 세심하신 인도하심을 보게 된다. 어떨 때는 우리도 이해 할 수 없을 만큼 역사의 중요한 순간 순간에 소위 비 그리스도인들을 사용하시고 계신 것도 보게 된다. 여기서 우리 크리스챤들은 영적인 일의 범위를 넓혀서 속칭 세상의 일 (모두 하나님의 일이지만)까지 우리의 섬김의 영역으로 삼아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하고 있는 학문 분야의 일이 될 수도 있고 심지어는 아무도 관심 쓰지 않는 영역의 일일 수 있다. 만인 제사장의 정신이 보다 충일해 질 때 각자의 소명에 대한 눈도 더욱 넓어 지리라 확신하다.


구체적으로 이러한 열대림 파괴에 우리 크리스챤의 자세와 행동강령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을까? 먼저 나무를 이용한 제품들을 사용하는 소비 주체로서 보다 건강하고 바른 소비행위를 해야 한다. 즉 필요하지 않은 제품을 사지 않아야 하며, 다시 쓸 수 있는 것은 다시 쓰고, 버릴 때는 보다 주의 깊은 고려가 필요하다. 특히나 열대림에서 나오는 소고기를 이용한 일품 요리를 먹는 것을 자제해야 할 것이다. 세계경제가 시장의 원리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사실이라면 더 더욱 열대림을 무분별하게 개발해야만 얻어지는 제품들을 소비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또한 각자의 전문 분야에서 이러한 환경문제와 연결된 연구 주제를 찾아서 공동의 연대를 도모하는 것이 필요하다. 생물학, 동물학, 경제학, 생명공학, 환경학, 지리학, 국제 정치학 등 관련 분야의 통합적인 연구가 절실히 요청된다.


우리 크리스챤 개인은 연합을 통해 각 지역 단체의 Opinion Leader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 즉 교회를 중심으로 또는 각 각의 관심분야를 중심으로 연합하여서 신앙적인 동지로서의 일도 할 뿐만 아니라 지역 환경문제에 대한 정부의 역할 등에 대한 의견을 개진 할 수 있다. 또한 국가 및 세계 환경문제에 대한 입장을 표명할 수 있다. 사회학적인 용어로 Social Capital이라는 용어가 있다. 이는 한 사회가 어느 정도의 자원적인 단체와 조직을 가지고 공동의 선을 위해 집단적으로 그에 참여하는가를 진단하여 한 사회의 신뢰수준을 평가한다. 사실상 우리 한국의 Social Capital은 매우 낮은 것 같다. 크리스챤들의 종교행사 참여를 Social Capital의 일부로 본다면 아마도 그 수준은 매우 높겠지만 우리 국민의 도덕성과 공동의 선을 위한 참여 수준으로 본다면 크리스챤들의 종교행사는 궤를 달리하는 면이 없지 않다. 지나치게 이기적이고 안심입명적인 모습이 우리들에게 있음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우리 크리스챤들은 빌립보서 2장 5-9절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의 자세를 본받아야 한다. 십자가의 정신이 전도의 현장에 뿐만 아니라 세상의 일 하나하나에 구체적으로 들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노력에 있어서도 개인 뿐만 아니라 크리스챤들이 연합하여야 함은 두말 할 나위도 없다.


성경에서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한 것은 아마도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교만하고 자기 중심적인 이 세상의 풍속을 두고 한 것이지 물리적인 세상 자체를 무시한 데서 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좋으셨다는 세상을 지키고 가꿀 책임을 인간에게 주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 받은 우리들에게는 어떤 책임을 주셨을까? 두 말할 나위 없이 창세기에서 인간에게 주셨던 동일한 책임과 권한을 주셨으리라 확신한다. 에덴을 돌보고 가꿀 책임을…


우주가 열려가고 인터넷을 통해 지구촌 구석구석이 실시간으로 연결되고 있는 이 시기를 살고 있는 회복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 크리챤들이 진정으로 가꾸고 돌보아야 할 에덴은 정말 어디인가?

[반영운] 지속 가능한 개발의 문제점과 대책

이코스타 2002년 10월호

인류는 산업혁명 이후 경제적인 풍요만을 추구해 온 결과 삶의 질 저하를 비롯한 다양한 환경문제를 일으키면서 생존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로마 클럽은 1972년에 ‘성장의 한계’라는 보고서에서 전 지구적인 환경위기에 대해 경고하였다. 이 보고서에 의하면 세계의 인구, 공업화, 자원과 에너지의 이용은 기하 급수적인 성장을 계속하는데 이러한 성장률이 계속된다면, 앞으로 100년 안에 지구상의 성장은 한계점에 도달하고 인구와 공업력의 갑작스런 감소가 발생할 것으로 예측하였다. 로마클럽 보고서가 나온 지 20년이 지난 1992년에 UN은 점점 악화되어가는 지구환경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로에서 세계 179개국이 참여하여 지구환경문제의 해결방안을 논하는 유엔환경 개발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를 통하여 ‘환경적으로 건전하고 지속 가능한 개발(Environmentally Sound and Sustainable Development: ESSD)’을 이룩하기 위한 범 지구적인 목표와 행동강령 설정에 기본이 되는 의제21(Agenda 21)을 채택하였다. 의제 21에서 말하는 지속 가능한 개발이란 “미래의 후손들이 자신들의 필요(needs)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그 능력과 여건을 저해하지 않으면서도 현세대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개발’로 정의된다(WCED 1987:43). 지속 가능한 개발의 원칙은 다음과 같다.



  • 인류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면서 건강하고 생산적인 생활을 할 권리가 있다.
  • 각국은 자국의 자원을 개발할 권리를 지니는 동시에 다른 국가의 환경에 손상을 주지 않도록 할 책임이 있다.
  • 개발 권리의 행사는 현재와 미래 세대의 개발과 환경상의 필요성을 충족시키는 범위 내에서 가능하다.
  • 환경 보호와 개발은 일체적으로 추진되어야 한다.

그러나 위 원칙에 근거하여 의제 21이 채택 된 지 10년이 지나고 있는 지금의 세계 환경 상태는 어떠한가? 지난 호에서 살펴 본 것처럼 세계는 각종 자연재해와 오염에 시달리고 있다.예를 들어, 브라질과 인도네시아의 열대림은 가공할 만한 속도와 면적으로 파괴되어 가고 있으며, 최근에 겪고 있는 전 지구적인 홍수 피해(전 세계 80개국 이상)는 더워진 지구 온도 때문이라는 분석도 조심스럽게 대두되고 있으며, 개발 도상국의 대도시는 극심한 대기 오염 피해를 겪고 있다고 보고 되고 있다. 게다가 무분별한 개발의 결과로 생겨나는 통제되지 않은 오염물질(유해폐기물)들이 주변 지역에 처리되지 않은 채로 배출되거나 주변 국가로 몰래 이동되어서 매장되기도 한다. 이러한 자연재해와 오염의 상당부분이 주의 깊지 않은 인간의 개발행위와 무책임한 관리에 기인하고 있음이 주지의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전 지구를 지속 가능하게 발전시키자는 목적에 의해 고안된 ‘의제 21’을 채택한 이후에도 환경이 계속 악화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본 고에서는 지속 가능한 개발을 개념적인 차원에서 검토하고, 지속 가능한 개발을 위한 대책들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개념적인 차원에서 지속 가능한 개발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지속 가능한 개발은 현대 산업문명의 지속적인 발전을 전제로 하는 제한적인 접근을 하고 있다. 즉 유한한 지구 시스템 내에서 어떻게 하면 산업사회를 지속 가능하게 할 수 있는가 하는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다. 지속 가능한 개발이라는 개념의 기저에는 현대 환경문제를 발생시킨 현대 과학기술문명에 대한 사상적 반성이나 환경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사상이나 철학의 추구 또는 선진국의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패턴의 변화를 전제하지 않는 상태에서 기존의 산업사회를 통해 현재 인류가 누리고 있는 혜택들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보여진다(윤칠석, 2000). 다른 말로 표현하면 지속 가능한 개발이란 세계의 정치 경제적인 구도 속에서 볼 때 선진제국이 누리고 있는 생활수준, 사회제도 등을 크게 변경하지 않는다는 전제에서 환경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근한 예로 최근에 온실가스 최대 배출국인 미국이 교토 협약에서 탈퇴한 것만 보아도 이러한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지금 요한네스버그에서 열리고 있는 환경회의에서도 역시 환경선언문 채택에 있어 미국의 부정적인 역할 때문에 고심을 하고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한겨레, 2002.8.27). 이러한 이유들로 지속 가능한 개발에 대한 개념적인 재고가 필요하다.


둘째, 지속 가능한 개발은 인간 중심적인 세계관이다. 지속 가능한 개발은 미래세대와 현세대의 인류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으로 그 목적을 삼고 있다. 즉, 지속 가능한 개발은 환경이라는 말 자체가 품고 있는 것처럼 인간을 둘러싼 것들을 인간이 지속 가능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대책을 논의하고자 한 담론으로서 이해된다. 따라서 인간 이외의 생명체나 자연자체의 내재적인 가치는 그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된 듯 하다. 예를 들면 자연의 내재적인 가치를 경제적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것을 이용하여서 각종 개발 사업을 허가하거나 수행함에 있어서 단기적인 개발 이익을 우선시 하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자연을 대하는 인간의 자세가 지나치게 오만함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보여진다.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인간은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에 대한 선한 청지기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모든 만물이 조화를 이루어 살 수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잘 알아서 관리해야 함에도 어쩐지 우리 인간은 그러한 존재인식에 있어서 많이 결여된 듯 하다. 결국 이러한 인간 중심적인 가치관에서 비롯된 무분별한 개발 행위들로 인간은 물론 지구 전체가 파멸하게 될 위기를 맞게 되었다. 궁극적으로 선진국이든 후진국이든 할 것 없이….


셋째, 지속 가능한 개발은 생산지향형 시스템을 기반으로 설정된 개념이다. 의제 21에서 사용되고 있는 지속 가능한 개발은 그 기저에 인간의 필요에 대한 되돌아 봄이 없이 필요(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생산을 정당화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생산 지향형 사회경제 시스템을 그대로 고수하면서 과학기술적 대응을 전제로 한 사후 환경관리 대책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자연의 정화능력과 개발 수용능력을 신중하게 검토하지 못한 결과 생겨나는 무분별한 개발을 막자는 선언은 있으나 정작 구체적인 강령으로 들어가면 결국 인류의 생산활동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은 찾아 볼 수 없다. 오히려 생산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한 기술적인 대안을 찾고 제시하고 있다.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틀에서 움직이는 생산지향형 사회경제 시스템은 인간 생활의 향상, 자유의 획득 등의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기도 했으나 일부 선진국이나 중산층 이상에 제한된 것일 뿐 대부분의 개도국이나 가난한 사람들은 과거보다 악화된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다. 대량생산 및 대량소비가 인류 진보에 있어서 필연적인 과정이라고 할 수도 있으나 앞으로 전개될 사회에도 여전히 필수 불가결한 시스템인지는 재고가 필요하다.


그러나 지속 가능한 개발이 품고 있는 두 가지의 중요한 개념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무한한 필요(욕구) 속에 세계 빈곤 층의 필요를 담고 있다는 것과 현재와 미래 세대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환경능력의 한계에 대한 인식이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면은 비록 위에서 지적한 문제점들에도 불구하고 지속 가능한 개발이 가지고 있는 장점이자 앞으로 추구해야 할 방향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지속 가능한 개발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대안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의제 21이 담고 있는 긍정적인 면을 살리고 부정적인 면을 보완하는 대안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인간 중심적인 세계관을 피조물의 공생 세계관(Symbiosis World View)으로 전환해야 한다. 이제까지는 자연을 인간의 필요를 채우는 도구나 재료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행동하였다면 이후로는 모든 피조물이 서로 상호 연결되어 공생하고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해야 한다. 인간의 필요에는 아무 가치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도 생태계 자체에서는 그 자체로서 소중한 존재임을 인정해야만 한다. 여기에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 무생물이 포함된다. 기독교적인 개념으로 정리하면 인간 또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 중의 하나로서 피조물의 생태를 이해하고 그에 맞게 잘 보살펴서 스스로의 필요만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생태계의 조화를 깨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필요를 충족해야 한다. 그러려면 인간 자신은 물론 자연 만물에 대한 면밀한 연구와 세심한 관심이 필요하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하는 세계관에 기초할 때에야 마치 창세 때에 세상에 질서가 생긴 것처럼 비로소 지구 상에도 질서와 조화가 생겨나게 될 것이다.


둘째, 생산 지향적인 사회경제 시스템을 전환하여야 한다. 즉 대량생산, 대량소비, 대량 폐기의 시스템에서 자원의 낭비를 피하고 반복적으로 순환시켜 환경 부담이 적은 사회인 순환사회(Recycle Society)시스템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순환 사회에서는 폐기물의 개념이 기존의 ‘가치 없는 것’에서부터 ‘처분되는 폐기물’과 ‘이용가치를 갖는 폐기물’로 나누어 생각하게 된다. 따라서 생산을 할 때는 가능한 한 폐기물의 발생을 회피하고, 폐기물 발생이 불하피할 때에는 발생된 폐기물을 기술적, 경제적으로 무해한 방법으로 소재 또는 에너지로서 재이용하며, 재이용이 불가능할 때에는 환경에 적합하도록 처분하며, 제품 생산자는 제품의 제조부터 폐기까지 모든 책임을 지도록 하는 사회 경제 시스템의 구축이 필요하다. 이러한 순환경제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장기적인 지속성을 고려한 재활용이나 자연환원 노력이 필요하며, 제도적으로는 환경부 및 환경문제해결을 위한 행정부서간 그리고 산학민관(産學民官) 간의 협력시스템 구축을 위한 환경조문의 강화가 필요하며, 과학 기술면에서는 순환형 과학 기술인 태양열 에너지 및 풍력, 조력 발전 등의 개발 및 보급과 환경산업의 육성이 필요하다.


셋째, 의제 21이 담고 있는 장점들인 빈곤개선에 효과가 있는 최소한의 성장률 확보를 위한 제 3세계의 성장회복, 자원 및 에너지 절약적 성장 질의 변경, 기본적 인간욕구의 충족, 인구증가의 지속가능 수준의 확보, 자원기반의 보호와 강화, 기술의 방향전환과 위험관리, 환경과 경제를 고려한 의사결정 등은 지속적으로 추진되어야 한다. 이 중에서 제 3세계의 빈곤 문제 해결을 위한 꾸준한 노력과 환경과 경제를 고려한 의사결정의 지속적인 추진을 정책의 중요한 축으로 삼아야 한다.


넷째, 의제 21은 여전히 인간의 끊임없는 필요(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음으로 인해 인간 스스로 궁극적인 파멸을 불러 일으킬 소지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인간 스스로 환경의 중요성을 인식하며 모든 피조물의 존재 가치를 인정함으로써 환경인식의 혁명을 이루어 내지 않으면 결국 인류는 다가올 종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에는 여러 가지 시도들이 있을 수 있으나 피상적이거나 본질적이지 못할 수 있다. 여기서 기독교적인 세계관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역설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으로 돌아 올 때 비로소 인간은 모든 피조물의 고귀함과 각자의 위치와 역할을 인식하게 되어서 인간에게서 일어나는 탐욕적인 필요를 성령의 힘으로 억제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복음으로 변화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하나의 중요한 현상 중에 하나로 이제는 환경에 대한 변화된 자세를 꼽아야 할 것 같다. 성령의 열매 중에서 가장 마지막에 등장하는 절제의 은사가 지금 이 위기의 시대에 절실하게 필요하다.


절제는 모든 영역에서 필요하지만 특히나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며 우리 각 개인과 공동체에게 관리하도록 맡기신 자연과 인간 사회를 사랑과 절제의 관점에서 세심하게 돌보아야 한다. 이러한 길이 우리와 우리 자손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며 살아갈 수 있는 근본적이며 실제적인 길이다. 위에서 살펴 본 것처럼 지속 가능한 개발은 위기에 처한 지구를 구하기 위한 몸부림에서 나온 개념이며 전 지구적인 시도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의제21이 채택된 이후로 개념적인 반성과 차기 방향성을 찾고자 하는 노력이 끊임없이 계속돼 왔다. 이제 환경문제는 각 개인, 단체, 단위국가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생명체와 무생물체의 환경적인 악화를 통해 개발 지상주의적인 시도는 점점 그 정당성을 상실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인간과 생명과 무생물이 함께 공유하는 지구 호는 구체적으로 위에서 지적된 문제점을 충실히 극복함으로써 이뤄질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긍휼을 고대하면서….

[반영운] 환경에 대한 크리스챤의 자세 (2)

이코스타 2002년 6/7월호

환경에 대한 크리스챤의 자세 (2)


환경문제 해결을 위한 성경적인 입장


지난 호에서는 기독교적인 시각에서 바라본 환경과 환경문제에 대해 살펴 보았다. 이번 호에서는 현재와 미래의 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성경적인 자세를 살펴보려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폐기물 처리문제, 오염된 물 정화, 오염된 땅의 정화, 대기질의 향상 등의 구체적인 환경 문제에 대한 기술적인 해결책을 제기하는 대신에 필자의 능력의 한계와 지면의 한정됨을 고려하여 성경에 바탕을 둔 기본적이고 원론적인 자세에 초점을 맞춰 논의를 진행하려고 한다.


1. 환경문제의 재조명


세계교회협의회(WCC)는 1989년에 발간된 ‘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존’이라는 보고서에서 세계의 종말적인 위기 상황을 환경문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다.



  1. 매일 생물종이 하나씩 멸종하고 있다

  2. 매년 남한 면적의 3/4 크기의 열대림이 파괴되어 없어진다.

  3. 지난 몇 십년 동안 매 십년 마다 해수면이 높아져 왔다. 이는 지구가 뜨거워지는 추세에 따른 것으로 우리 지구와 전 인류의 비참한 결과를 암시하는 것이며 이 추세는 앞으로 계속 될 것이다.

그 때로부터 10년이 훨씬 넘은 지금의 상황은 어떠한가? 화석연료의 과다 사용으로 인해 현재의 소비 수준을 그대로 유지하면 지구의 대기 온도가 오는 21세기 중반에 화씨 4도에서 15도 정도나 상승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다. 남미의 아마죤 (Amazon)은 축구장 만한 크기의 열대림이 하루에 벌목 되어 사라지고 있다고 보고되고 있다. 주로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생기는 문제이지만 그들의 경제문제는 여전히 힘든 상태이다. 열대림 및 전지구적인 삼림벌채로 인해서 토양유실, 온실효과, 물 부족 및 홍수 등의 문제가 우려되고 있다. 화학혁명으로 인해 기하급수적으로 생겨나는 화학물질로 인해 자연계 및 인간의 건강 등이 심각한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지난 97년 이후 한국을 포함한 많은 개발도상국들이 IMF 위기를 맞았고 아직도 그 여파에 시달리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경제의 위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지구적으로 사슬처럼 묶여 있는 경제 공동체의 위기를 말하는 것이다. 환경문제는 경제문제와 긴밀한 관계가 있는 만큼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당분간은 개발도상국들에 국한된 문제가 되겠지만 얼마 후에는 전 지구적인 위기가 될 것이다.


2. 환경문제 해결을 위한 성경적인 입장


지난 호에서도 살펴 보았듯이 이러한 환경문제의 원인은 흔히들 지적하듯이 인구의 증가나 통제되지 않은 기술개발 등에만 있지는 않다. 성경적으로 보면 오히려 피조물인 인간이 자연을 착취하고 이기적인 동기로 모든 관계를 어그러뜨리고 악화시킨 교만과 욕심이 모든 환경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환경문제는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하나님이 된 후 하나님을 중심으로 맺어진 모든 관계가 깨어지면서 생겨난 엄청난 무질서의 결과이다. 인간과 자연사이,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생겨난 관계의 파괴가 빚어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 닥쳐 올지도 모를 환경의 위기를 사전에 예방하면서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성경적인 자세는 무엇일까? 본 고에서는 그러한 성경적인 입장을 창조신앙, 속죄 (십자가)신앙, 부활 및 재림 신앙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한다.


1) 창조신앙의 입장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먼저 하나님께서 인간을 포함한 온 세상의 주인이 되심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곧 인간과 다른 피조물의 관계가 하나님을 중심으로 같은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이 같은 피조물로서 다른 피조물을 돌보는 관리자의 책임을 부여 받았다는 사실이다. 사물의 이치를 잘 알아서 이름을 짓고 이름을 지은 책임을 다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부모가 자식의 이름을 짓고는 평생토록 자식의 삶을 책임지며 돌보듯이.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이러한 고귀한 권한과 의무를 인간에게 주셨다.


창조신앙은 또한 우리에게 주인과의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나오는 진정한 의미의 순종을 가르쳐 준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면서 또한 생명의 주인이시다. 친근함에 있어서 아버지라고 한다면 권위와 질서의 면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주인이시다. 따라서 인간은 주인의 뜻을 잘 알아야 하고 아는 것을 그대로 실천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성경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뜻은 창세기 1, 2장, 이사야 11장, 35장 등에서 나타나는 모든 피조물이 조화를 이루어 잘 사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조화의 중심에 바로 인간이 있다는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의 힘과 성령의 인도에서 나오는 지혜를 동원하여 피조물들의 특성에 맞게 잘 섬기고 스스로의 행동이 다른 피조물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지를 파악해야 한다. 주인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다른 피조물을 근심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서 로마서 8장 21절에서 모든 피조물들이 신음하면서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남을 고대하고 있다고 한 것은 아닐까?


창조신앙에 들어가게 되면 인간은 인간만의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인간중심주의에 기반을 둔 모든 시도들을 포기하게 된다. 국가적으로 사회적으로 성장지상주의에 빠져서 무한 성장을 통한 ‘문명의 발전’을 추구해 오던 노력들을 재점검하고 방향을 선회하게 될 것이다. 창조신앙의 확고한 정립을 통해서만 인간은 인간우월주의와 욕망절대주의를 벗고 인간과 자연의 조화는 물론 인간 자신의 생존을 가장 확실하게 보장 받게 될 것이다.


2) 속죄신앙 (십자가) 신앙의 입장


우리 기독교에 있어서 또 하나의 중요한 기반은 바로 십자가를 통한 속죄의 신앙이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대속의 피로 인하여 죄 씻음을 받게 되었다. 여기서 죄 씻음이라 하면 구약적인 의미에서 보여지는 율법적인 의미의 개별 행위에 대한 해결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본질적인 죄인 ‘교만,’ 즉 인간이 하나님이 되려 했던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의 단절을 회복시켜 주시는 것을 의미한다. 즉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위와 자격의 회복이자 책임과 의무의 부여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게 되고 그 아버지를 더욱 깊이 알아갈수록 아버지의 뜻에 맞게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 속죄의 신앙 (십자가의 신앙)은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우리 인간의 어떠한 노력도 속죄를 위해 필요하지 않았으며 구원은 오로지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의 의지와 사랑으로 이루어 내신 은혜의 산물이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모든 만물이 하나님과 어그러진 관계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시고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멸시와 냉대를 무릅쓰고 결국 십자가의 희생이 되셨기에 우리의 구원이 이뤄졌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여기서 우리는 속죄 신앙이 자칫 소극적이고 패배적인 모습이 있지는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십자가에 담겨 있는 깊은 힘을 모르고 겉으로 나타나는 것만 보았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오히려 십자가의 신앙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의 시각과 은혜의 시각을 회복시켜 줌으로써 오직 성령의 힘을 의지하면서 예수께서 가셨던 고난의 길에 동참할 수 있도록 해 준다는 면에서 세상의 어떤 철학적인 시도보다 심오한 가치를 지닌다.


우리는 십자가의 신앙을 통해 참 회복과 희생의 자세를 갖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들로 회복해 주셨듯이 우리도 우리의 이웃인 사람들과 자연 만물들과 회복과 조화의 길을 찾아야 한다. 십자가의 신앙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와 이성을 동원하여 이웃과 자연 만물들과 하나됨을 이루어 낼 수 있게 된다. 오직 십자가의 신앙만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여 마치 부모가 자식들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듯이 전체의 질서와 화합을 위해서 자신의 권리와 이익을 포기하고 조화를 선택하게 한다.


작금의 한국 교회에 불고있는 이기적인 기복신앙은 기독교의 십자가 신앙을 뿌리부터 뒤흔들고 있다. 인간의 필요만 채우려고 기술을 개발하고 그 결과는 책임지지도 않는 경제 중심적인 제 행위들을 기복 신앙의 하나로 보면 무리일까? 우리가 입으로는 환경, 환경 하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정작 어떤 책임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가? 국가적으로나 집단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모두 다 돈 되는 일이면 혈안이 되어 사람도 해치고 땅도 해치고 있으니 기독교의 정체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종교적인 의식과 계명들은 거창하지만 정작 십자가의 신앙이 드러나야 할 곳에서는 모두 숨어 버리고 진지한 타 종교인이나 무신론자들에게 자리를 겸손히 (?) 양보하고 있다. 그러한 세속적인 일들에는 드릴 시간적인 여유도 없으며 거룩한 (?) 일들을 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는 이유들을 들면서…


하나님이 지으시고 좋았더라고 하셨고 우리에게 잘 관리하라고 맡기신 세상. 십자가의 신앙을 통하면 인간의 타락으로 함께 신음하고 있는 피조물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리게 된다. 아니 주께서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셔서 현재 뿐만 아니라 우리 자녀의 세대들이 겪어야 할 아픔까지도 보게 될 것이다. 어느 곳은 부가 편중되어 가난에 찌들고, 어느 곳은 경제를 살리기 위해 외국 기업의 위험한 쓰레기를 들여와야 하고, 어느 곳은 배고픔으로 인해 자식마저 먹어야 하고, 어느 곳은 숨쉴 수 없을 만큼 공기가 나빠져서 사람들의 건강이 극도로 나빠지고, 어느 곳은 먹을 물이 없어 헤매며, 결국 전쟁으로 연결될 이 땅의 처절한 아픔들을…


십자가의 신앙으로 우리는 이 손해나는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된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고….”라고 하는 예수님의 자신의 삶과 구원의 도리를 가리켜 말씀하신 이 절대 진리의 말씀을 오늘의 환경문제를 해결하는 근본적인 가르침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지금의 이기적이고 파괴적인 발걸음으로 그냥 걸어가면 우리는 머지 않은 장래에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될 것이고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천 년 전에 십자가를 지셨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과 앞으로의 세대를 위해 예수께서 지셨던 십자가를 자원하여서 지고 가야 할 것이다.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가정에서, 각자의 학문 영역에서, 각자의 직업에서,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현장에서, 국가의 정책이 입안 되는 과정을 감시하는 과정에서, 세계 경제의 흐름을 파악하고 그에 적절한 대응을 해 가면서…


3) 부활과 재림 신앙의 입장


기독교의 핵심은 십자가와 부활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에서 죽음이 우리의 죄를 해결하였다면 부활은 우리에게 이 땅에서 고난과 희생과 화합의 삶을 살아갈 근본적인 힘과 소망을 줌으로써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기 때문이다. 부활은 또 다른 의미로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과 연결되어있다. 구원으로 인한 위로가 우리에게 있지만 결국 부활과 재림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은 자칫 왜소해 지기도 하고, 오만해지기도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세상과 대립적인 입장에 섰던 것처럼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 또한 세상과 반대적인 입장에 서게 될 것이다. 여기서 세상이란 하나님의 주권과 아버지 됨을 거부하는 모든 인본적인 시도를 말하는 것으로서 겉으로는 평화와 화목을 도모하는 것처럼 보여도 참 중심에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신 사랑과 겸손이 없다. 따라서 세상적인 시각을 가진 대부분의 시도들은 인간 자신의 필요를 충족하려 할 뿐 진정한 조화를 이루어 내지 못하게 되며 궁극적으로는 인간마저 스스로 파놓은 함정에 빠져 버리게 할 뿐이다.


부활과 재림을 생각하지 않게 되면 이 세상만을 바라보게 되어서 극한 어려움이 오게 되면 자포자기의 모습이 되어버리게 된다. 그리고는 서로 간에 양보나 포기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고 어떻게든지 이땅에 있을 동안 더 많이 누리고 더 많이 가지려고 발버둥을 치게 된다. 여기에서 부활과 재림신앙의 중요함을 더욱 볼 수 있다.


재림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자칫하면 염세적으로 될 가능성이 있으나 그것은 재림의 근본 정신이 결여된 데서 오는 현상이다. 재림은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뵈옵고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순간마다 신랑이신 그 분을 얼마나 기억하고 그분의 뜻대로 살아갔는지를 고백하고 위로를 받는 환희 그 자체이다. 재림 때에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 있을 동안 맡기신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잘 관리하고 사용하여 마지막 주인에게 보고하고 하나님의 평가를 받게 된다. 한 번 뿐인 세상이니까 적당히 살자는 생각은 십자가와 부활, 재림의 신앙을 전제하면 결코 할 수 없게 된다.


요한 계시록에서 제시되고 있는 ‘새 하늘과 새 땅’ (계 21장)은 바로 이런 눈물어린 기다림이 전제된 것이라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따라서 이 재림 때에 모든 것이 다시 주어지니까 마구 파괴하며 살아도 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불신에서 출발한 질문에 불과하다. 부활과 재림의 신앙에 근거할 때만 현실에서의 우리의 삶이 가장 잘 깨어 있게 되고 모든 기회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게 될 것이다. 살아있는 동안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과 지혜 안에서 땅과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며 아끼고 돌보아야 한다. 본향으로 돌아갈 나그네로서, 신랑을 맞이할 신부로서…


3. 실제적인 대안들


창조신앙, 십자가의 신앙, 부활과 재림의 신앙으로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환경을 보호하고 서로 화목하게 할 수 있는 구체적인 일은 무엇일까? 각 개인이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삶의 예배를 드릴 제사장들로서 개인, 가정, 지역, 국가, 세계 차원에서 할 수 있는 대안을 찾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 이유는 각 개인이 바로 작게는 가정 크게는 우주의 구성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 각자에게 이 모든 영역의 관리자 또는 제사장으로 부르셨다. 따라서 모든 일에 있어서 우주적인 시각과 종말적인 시각을 가지고 접근해야 한다. 작은 의사결정에서부터 국가적인 의사결정에 까지 세심한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1) 개인


먼저 개인은 가장 기본적인 구성단위로서 하나님 중심의 사고에 기반을 둔 건강하고 독립적인 세계관을 키워가야 한다. 창조, 십자가, 부활과 재림의 신앙에 투철하여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들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가깝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에서부터 멀리는 우리의 시야를 벗어난 우주까지 하나님의 눈으로 사랑하고 보살피는 마음이… 이 마음으로만 개인이 날마다 숨쉬고 먹고 쓰는 행위들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충만하여 어떠한 조직이나 세상의 압박과 꾀임에도 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의사를 결정하고 선을 행할 수 있는 개인이 절실히 필요하다. 모든 정치 경제적인 갈등구조에서 파생되는 이익의 부조화 속에서 참 신앙과 현실에 바탕을 둔 지혜와 지식을 동원하여 화목을 이루어내는 한 사람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어느 그리스도인이 과학자로서 기술을 개발하려는 아이디어를 구상하거나 실제 실험을 하게 되었을 경우 그 기술의 득과 실을 잘 알 수 있는 현실적인 지혜가 필요하다. 그리고 혹시 그것의 위험이나 좋은 점을 발견하였을 때 국가적인 이익과 조직의 이익과 상반되어 많은 반대와 위협을 무릅쓰게 될 때에 하나님을 의지하여 담대히 나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필자의 전공인 도시환경계획 분야를 포함해서 인간의 활동이 관련된 모든 영역에 이러한 자세가 필요하다. 날마다 성령에 충만하고 성경의 진리로 무장하여서…


2) 가정


가정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기본적인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이 가정 안에서 이루어지는 의사결정이 곧 더 큰 공동체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따라서 각 가정은 이기적이고 폐쇄적인 가치관을 버리고 좀 더 공동체적인 시각에서 경제행위를 비롯한 대 사회 관계를 가져야 한다. 가정은 엄연히 한 개인을 넘어선 국가나 인류 공동체의 공적 기관이므로 각 가정의 구성원들은 의사결정에 있어서 책임감을 갖고 임해야 한다. 특히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 및 관계들을 대하고 이용할 때 가정 나름대로 바람직한 대안을 마련하는 것은 물론 이웃과의 연대를 추구해야 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모든 에너지를 사용할 때 가능한 만큼 아끼고 자연의 질서를 깨뜨리지 않는 길을 찾아가려는 시도를 할 필요가 있다. 수돗물과 전기를 쓸 때, 쓰레기를 버릴 때, 교통수단을 선택할 때 가능한 대로 환경 친화적인 방법을 찾아서 실천해야 한다.


3) 공동체 (교회, 학교, 마을, 직장 등)


개인이나 가정이 비슷한 기호, 종교, 지리적인 위치, 경제행위를 중심으로 뭉쳐서 이룬 기관을 우리는 공동체라 부른다. 대부분의 공동체는 경제행위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에 대한 중요한 의사결정을 하게 되는데 각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상황에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의견을 개진하고 필요하다면 정보를 공유하며 설득력 있고 전체의 공감을 얻어 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 특히 교회를 포함하여 의견을 같이하는 작은 공동체와 함께 대 사회적인 역할도 감당할 필요가 있다. 공동체적으로 주위의 어두운 곳을 돌아볼 뿐만 아니라 환경적으로 열악한 곳들을 찾아 고발하고 건설적인 대안들을 모색하도록 정부의 관심을 유도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지역적으로 유해한 정책결정에 대하여 적극적인 감시자 역할도 해야 한다. 각 교회나 공동체에서는 환경문제 뿐만 아니라 각 정치 경제 인권문제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고 적극적으로 표현해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다수의 힘과 자본의 힘이 지배하고 있으므로 뱀 같이 지혜로운 자세로 우리와 우리의 자손들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는 제 사건들에 심도 깊은 관심을 표현해야 한다. 흔히 재세례파로 구분되는 메노나이트 교도들은 미국의 종교단체로서는 유일하게 워싱톤에 대표부를 설치하고 각종 법제 및 정치적인 이슈에 대한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의 현실 안주적이고 이기적이며 좁은 시각을 반성해야 할 것 같다.


환경문제는 몇몇 전문가들이 해결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개인과 국가가 함께 노력하여 풀어가야 하는 인류 공동의 과제이다. 왜냐하면 환경문제는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영역과 관련되어 있어서 어느 누구도 예외일 수 없기 때문이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우리의 발걸음이 세심하게 신경 쓰지 않으면 환경을 악화시키고 결국 우리 자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손들의 삶을 황폐하게 할 것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며 이 땅의 관리자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환경문제는 더 더욱 중요한 과제라 아니할 수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인 개인은 물론 교회는 이 문제의 심각성을 좀 더 빨리 인식하여서 기도하면서 주님의 뜻에 맞게 구체적인 대안을 찾아 가는데 힘을 모아야 한다. 창조의 신앙과 십자가의 신앙과 부활과 재림의 신앙에 굳게 서서…


끝으로 알트너가 제시하는 몇 가지의 실천방안을 소개하면서 글을 맺는다.



  1. 자연자원을 최대한 아껴쓰고 재생이 가능한 자원은 재생하여 다시 사용한다.
  2. 생태계의 균형을 충분히 고려하고 그것을 파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생태계를 사용해야 한다.
  3. 지금까지 과학기술은 주로 경제적, 정치적 관심에서 발전되었으나 앞으로는 인간과 자연의 행복을 위하여 봉사하는 목적으로 발전되어야 할 것이며, 새로 발견되는 과학기술이 생태계에 대하여 어떤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가을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
  4. 지금까지 땅과 바다와 우주의 공간이 별다른 고려 없이 함부로 사용되었으나 앞으로는 땅과 바다와 우주의 공간은 책임적이며 이성적으로 사용되어야 할 것이다. 바다와 우주 공간에 핵 폐기물을 버리는 행위는 철저히 금지되어야 한다.
  5. 지금까지 묵살되어 온 힘없는 사람들, 특히 후진국 국민들과 말을 하지 못하는 자연의 삶의 권리와 존재 가치를 회복해야 한다.
  6. 언젠가 고갈될 수 밖에 없는 에너지 자원을 무계획적으로 사용함으로써 각종 오염과 파괴를 유발하였으나 앞으로는 고갈되지 않으며 오염과 파괴를 일으키지 않은 에너지 자원, 예를 들어 태양에너지, 물과 바람의 에너지를 개발하여 사용해야 한다.
  7. 지금까지는 핵무기, 화학무기, 광학무기 등의 현대무기를 통하여 평화를 보장하려 하였으나 앞으로는 무기의 제한과 폐기, 평화조약 등을 통하여 세계평화를 보장해야 한다. *

* 이인우, 1995, 자연환경에 대한 일반 은총적 인식의 중요성, 1996년 기독학문학회 발표문. p. 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