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호] 영원한 진리 –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1)

대학에 입학한 후 첫 등교 길, 신입생을 환영하는 여러 현수막들이 가득한 캠퍼스를 꿈에 부풀어 더듬어 올라갈 때, 푸른 창공에 휘날리며 내 눈을 사로잡는 한 글귀가 있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어느 단체에서 내다 붙인 현수막이었는지 전혀 기억할 수
없었고, 그 때는 그 글이 예수의 말씀인 것조차 몰랐지만, 그 글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갑자기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내면 깊은
곳에서 대학 생활의 막연한 기대와 용솟음치는 희망이 부풀어 올랐다. 대학입시라는 질곡을 통과하여 마침내 자유의 바닷가 앞에
위풍당당하게 세워진 것처럼, 지난 날 나를 둘러싸고 있던 모든 유아기적인 몽상과 신화로부터 탈출하여 진리의 대양으로 마음껏 노
저어 갈 수 있을 것만 같은 감회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싱그러운 봄날의 부푼 가슴으로 진리와 자유에 대한 동경심을 품고 찾아간 강의실에서 어느 젊은 교수의 실존주의 철학 강의로부터 나의 대학 생활은 시작되었다.

“인간은 피투성(被投性)이다”

아무 이유도 아무런 목적도 없이 이 세상에 그저 던져진
존재로서의 인간… 그 실존의 인식으로부터 인생이 시작된다는 그의 말에 나는 순간 당황하였다. 그것은 어쩌면 앞으로 펼쳐질
피비린내 나는 대학생활에 대한 예고요 선언이기도 했다. 모호한 것이 약간은 멋있어 보이던 그 교수의 강의를 통해 내가 받았던
감정은 절반은 매력적이게 느껴지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좀처럼 받아들이기 힘든 본능적 거부감이었다. 만일 인생이 그와 같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 줄달음질치는 것인가? 그리고 삶을 지배하는 절대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자유란 과연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독재 정권의 시녀로 전락해 자유로운 학문 정신을
상실해버린 피폐해진 캠퍼스, 지성의 전당이라고 상상하던 교실 안에서 자행되는 공공연한 부정행위, 절대 권위의 부재로 인한 영적
빈곤 상태를 권위주의로 억누르는 교수들에 대한 실망 감들로 진리와 자유에 대한 대학생활의 꿈이 허상이었음을 점차 깨달아가던 그
해 가을, 캠퍼스는 최루탄 연기 속에서 첫 휴교를 맞이했다. 그리고 최루탄과 실연의 따가움에 뒤섞인 눈물을 흘리며 진리를 향한
내 인생의 길고 험한 장외 투쟁의 노정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20대의 청춘을 술과 담배 연기 속에 쏟아 붓고, 먼 길을 돌고 돌아 마침내 진리를 찾게 되었을 때, 나는 다시 같은 자로 되돌아 와 있었다.

(2)

장님으로 살다가 눈을 뜨게 된 사람의 마음이 어떠할까?

그토록 보고팠던 딸 효녀 심청의 얼굴을 보고 울다 웃다
너무 좋아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을 심 봉사의 마음을 생각해 본다. 흑암의 세월 속에서 살다가 광명의 세계로 옮겨간 사람의 그
자유함… 얼마나 기뻤을까? 그러나 더러는 시각장애인이 되면서 비로소 진리의 빛을 찾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낮은 데로 임하소서>의 안요한 목사님의 이야기에 우리는 또 다른 감동을 맛본다. 참 자유란 반드시 육신의 질병과
고통으로부터의 해방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나는 2003년 캐나다 토론토 코스타에서 아주 특별한
두 사람을 만났다. 한창의 젊은 나이에 시력을 잃은 안요한 목사님과, 불의의 교통 사고로 인한 화상으로 청초했던 소녀의
아름다움을 잃은 이지선 자매가 함께 강사로 참석한 것이다. 흑암 속에서 잔잔히 빛나는 촛불을 바라보듯 그 두 사람의 간증을 듣는
동안 아름다움의 본질과 영혼의 자유함에 대한 근원적 생각을 다시 다듬게 되었다. 인간으로서 감내키 힘든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그들
안에서 타오르는 아름다운 생명의 빛은 꺼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의 간증은 우리의 건강한 육체를 오히려 부끄럽게 하였다. 이지선
자매의 정금같이 순수한 간증을 듣고 난 후, 안요한 목사님은 그의 맑고 투명한 두 눈을 허공을 향해 깜박이며 이렇게 말했다.
“자매야말로 우리의 자랑스런 미스코리아 진입니다.” 육순의 이 시각장애인 목사가 보았던 것이 무엇일까? 육신의 아름다움을 상실한
한 여인의 아름다운 영혼을 향한 그 고백이야말로 진리 속에서 위대한 자유를 체득한 자만이 낼 수 있는 승리의 목소리였다.

날 때부터 소경 된 자를 두고 제자들이 예수께 묻는다.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자기 죄 입니까 아니면 부모의 죄입니까?”
그러나 예수의 대답은 전혀 다르다.
“그가 소경 된 것은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다.”

예수는 종종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기적을 행함으로 자신의 빛 되심을 나타냈다. 그러나 그를 보고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심판이 있을 것을 선언하였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요한복음 9:39)”

예수가 이 땅에 온 것은 어두운 세상 가운데 진리의 빛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그러하기에 빛을 보고도 눈을 감아 피하는 자들은 스스로 소경 된 자들이며 이미 심판의 길로 들어섰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육신의 질병과 영혼의 불구로 고통 당하는 수많은 사람들… 저들에게 진리의 빛을 비추고 자유를 주기 위해 찾아온 예수, 그가 십자가에 매달려 당한 그 고통은 단순한 육체의 고통이 아니었다.“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고 간절히 부르짖었던 예수의 겟세마네의 기도는, 십자가에서 임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잔에 대한 영적 두려움 때문이었다.
순종의 아들 예수가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아버지와의 영적 분리(分離)와 유기(遺棄)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의 표현이었다.
겁에 질려 아빠 양을 찾는 어린양의 울음소리처럼 간절했던 그 기도… 사실상 그 형벌은 바로 우리들이 받아야 할 죄의
삯이었다. 그 시간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깨닫지 못한 제자들은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하나님의 심판이 다가오던 그
‘야훼의 밤’에 애굽의 모든 이들이 잠이 들었던 것처럼…

아버지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를
아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아들의 절규 앞에서 하나님은 침묵하신다. 우리에게 임할 그 심판은 오직 어린양의 흘린 피로만
대속 될 수 있음을 아시는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키 위한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하는 외 아들의 고통과 외침을 외면하시는 것이다.
아들의 죽음을 통해 많은 사람을 아버지께로 이끌어 살리는 것…,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침내 하나님은 그 아들을 버리셨다. 그리고 그 아들은 완전한 순종을 이루었다.
“다 이루었다.”

순종의 아들 예수가 가장 높은 하늘 생명의 보좌에서
가장 낮은 땅 사망의 십자가로 내려와 마침내 숨을 거두는 그 순간, 그의 가슴에서 뿜어져 나온 엄청난 사랑의 빛이 흑암에 싸인
온 세상을 비추기 시작했다. 그 진리의 광채가 역사의 시공을 따라 흘러 이 시간 이곳까지 이른 것이다. 그 섬광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그 기이한 빛을 한 번 비추인 사람마다 그의 딱딱한 머리와 얼어붙은 가슴은 녹아내리고 세상의 욕심을 향하던 그의
옛 눈은 멀어버리며 새로운 영적 세계를 향해 눈뜨게 되는 것이다.

(3)

만주 벌판의 끝없이 펼쳐진 구릉지대에 초원의 신록이
한껏 물을 먹어 싱싱하게 오르고 있다. 멀리서 보면 무덤을 갈아엎어 세운 학교가 흰 파도 거품처럼 꿈틀거리며 그 능선을 따라
물결 치듯 늘어서 있다. 화사한 주일 오후, 분홍색 벚꽃과 철쭉, 노란 개나리가 만발한 교내 정원에서 쌍쌍이 데이트하며 지나가는
대학생들 사이에 교직원 자녀 아이들이 깡충깡충 뛰논다. 이웃에 사는 동역자가 첫 딸을 낳고 이름을 ‘진리’라고 지었다. 그리고
다시 남동생을 보자 이름을 ‘길’이라고 지었다. 일곱 살짜리 내 아들 문영(데이빗)이도 길과 진리와 어울려 함께 달린다.

정신지체장애 아들을 둔 고등학교 후배 J 교수가 있다.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기며 걸어가는 얼굴이 하얀 찬영(가명)이가 그 집 아들이다. 막내 문영이와 동갑인 찬영이를 바라볼 때마다
나는 항상 가슴 한 귀퉁이가 아리며 당황스런 마음을 감추게 된다. J교수가 후배여서 그럴까? 아니면 찬영이가 우리 아들과
동갑내기여서 그럴까? 가슴이 아프다. 그 부부를 도우려 해도 어떻게 도와야 할지 모르겠고 위로를 하고자 해도 어떤 한계를
느낀다. 천사와 같이 천진스러운 찬영이를 간혹 안아주고 항상 밝음을 유지하며 지내는 젊은 그 부부가 기특(?)하게 여겨지다가도,
그들이 비장애인 아동들을 바라보며 어쩌다 흘리는 눈물 앞에서 우리 부부는 어쩔 줄 몰라 가만히 외면한다. 장애를 안고 태어난 그
아들을 바라보는 J 교수 부부의 마음속에 담긴 그 고통과 절규를 우리는 다 알 수 없다. 찬영이를 위해서 라면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다고 사랑 고백을 하는 그 아버지의 마음 뒤에는 어쩌면 십자가 위에서 침묵하시던 아버지의 마음이 있는 건 아닌지…

J교수가 언젠가 대학생들 앞에서 특강을 했다. “나는
여러분들을 만나고 싶어서 이곳에 왔습니다. 여러분들을 만나기 위해 연변과기대의 교수가 되는 것이 내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박사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하고 열심히 공부를 했습니다. 내가 가진 어떤 것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인생의
참 행복은 내가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때 얻어집니다. 여러분들이 장차 그런 사람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나는 내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내 아들 찬영이를 바라보며 과연 이 아이가 커서 누구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 것인가? 하고
생각해 봅니다.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그럴 수 있는 위치에 오르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줄 수 있는 그 도전을 내 아들에게는 할 수 없다는 것이 너무 가슴 아팠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찬영이로 인해 아픈
자녀를 둔 다른 부모들이 위로 받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찬영이가 상처 받은 다른 사람들을 위로해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찬영이가
항상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버지인 나는 찬영이가 있음으로 인해 정말 행복합니다.”

지금도 순종의 아들들이 당하는 고통 뒤에는 그로 인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시는 아버지의 더 큰 사랑의 계획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믿는다. 그 믿음으로만 함께
고통을 감내할 수 있다. 부활의 영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대면한 사람에게서는 빛이 난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사십 일간 하나님과 함께 거한 후 내려올 때에 그 얼굴에서 광채(shekinah)가 났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중국으로 오기 직전 깊은 기도로 매일 새벽 하나님과 만나고 있었던 무렵,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내 얼굴에서 어떤 광채가
나는 것 같다고 했었다. 그 이후로 더러는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하는 동역자들의 얼굴에서 은혜의 광채가 발하는 것을 드문드문
경험하기도 했다.

우리가 언젠가 새 하늘과 새 땅의 천국에서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로 대면하여 만나게 되는 날, 희미하게 깨달아 보던 그 진리의 빛을 완전히 바라볼 날이 올 것이다. 그곳에는 하나님이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고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으며, 이전에 있던 모든 상처와
질병들이 다 지나간 곳이라고 성경은 예언하고 있다. 새 예루살렘 그 성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고 진리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처럼, 수정처럼 빛나며 해와 달의 비췸이 소용이 없고 오직 어린 양 예수가 그 등불이 되며 만국의 백성들과 만왕들이 그 빛
가운데 지나갈 것이다.

그 행렬 가운데는 통일된 조선의 백성들도 흰옷을 입고
얼굴에 광채를 내며 함께 줄지어 지나갈 것이다. 거기에는 더 이상 한국인과 북한 사람의 경계도 없을 것이요, 중국 조선족과 미국
교포의 구분도 없을 것이다. 재일교포와 사할린 동포가, 우즈벡의 고려인 3세와 브라질의 교포2세가 함께 어울려 웃으며 지나가지
않겠는가? 연변과기대 졸업생과 한동대학 졸업생이, 평양과기대 출신과 포항공대 출신이 함께 지나갈 것이다. 목사요 장로요 집사의
구분도 없을 것이며 기업 총수와 문지기의 구분도 없을 것이다. 북한의 탈북자와 순교자가 나란히 걸어갈 것이다. 한족과 조선족이
하나가 되고, 이라크인과 미국인이 하나가 되어 예수 앞으로 모여들 것이다. 그때 거기서…… 루카스와 상재가 웃으며
손짓하고, 찬영이와 문영이가 어깨동무로 함께 손잡고 씩씩하게 걸어갈 것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던 그분이 인자하게 웃으시며, 다시 한번 영원한 진리를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실 것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장 32절)”

[정진호] 사랑, 부르다가 죽을 그 이름이여..

회복과 치유의 신학 – 내 아버지의 뜻


사랑, 부르다가 죽을 그 이름이여..


 


하나님 나라의 역사는 타락한 인간의 에로스 사랑에 대한 완전한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의 선포와 그에 따른 영적 전쟁으로 이루어져 왔다.


(1)


청춘 예찬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가장 애틋하게 남아있는 감정이 있다면 아마 젊은 날의 뜨거웠던 첫 사랑의 열정이 아닐까? 오직 젊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요 그 이름 만큼이나 순수하고 설레는 말… 첫 사랑!! 인간만이 지닌 보석같이 빛나는 그 사랑의 감정을 통해 얼마나 많은 시와 노래들이 탄생했을까? 그러나, 섣부른 첫 사랑의 함정에 발을 헛디뎌 헤어날 수 없는 깊은 상처와 수렁에 빠져버린 연인들이 또 얼마나 많았을까? 채 피어보지도 못한 인생의 젊은 꽃봉오리들이 실연의 구덩이 속에서 눈물과 고통으로 몸부림 치다가 지쳐서 쓰러져버리기도 한다.


 


첫 눈에 홀딱(?) 반하는 그런 뜨거운 사랑을 하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랑을 못 해본 것이 정말 아쉽다고도 한다. 물론 상상 속에서는 멋있고 좋아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사랑은 가급적 말리고 싶은 사람이다. 왜냐하면 경험상(?) 그런 사랑은 너무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후유증이 너무나 크고 깊게 마련이다. 상대방에 대한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미처 깨닫기도 전에 표피적인 감정에서 바로 파국으로 흐를 가능성이 더 높다. 더구나 첫 사랑이 그렇게 다가온다면 대개 실패할 확률이 크고 상처도 깊게 남는다. 예방 접종이 안 된 어린이가 급성 바이러스에 걸리듯, 인생의 경험도 예비지식도 없는 순수한 젊은 남녀가 그런 사랑에 노출되면 그들은 고열과 오한에 시달리며 다른 어떤 일도 할 수 없는 감정의 혼수상태로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그 같이 잘못 내딛은 어설픈 첫 사랑의 후유증으로 청춘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대학 생활을 완전히 날려버린 대표적인 한 사람을 소개하고자 한다.(같은 시행착오를 겪을 수 있는 인생 후배들과 언젠가 청춘의 열병을 앓아야 할 사랑하는 나의 두 아들을 위해서…)


 


나의 어린 시절을 회고해 볼 때, 나는 책벌레로 지내어 몽상에 쉽사리 빠져들고 더러 이상주의적 성향을 지닌 것을 제외하면 아주 평범한 학생이었다. 더욱이 사회적 관행을 따라 인생의 모든 척도를 좌지우지하는 대학 입시에 목매달며 오직 학교와 집 밖에 모르던 모범생이었다. 마침내 원하던 대학에 합격한 후, 그 당시 풍습을 따라 자랑스러운 S대학 배지를 달고 첫 등교를 하던 그 시절의 설렘은 아직도 추억 속에서 생생히 다가온다. 마치 온 세상을 내 손안에 얻은 것 같이 느껴지던 나날들이었다. 장미 빛 꿈과 희망이 내 인생의 앞길에 거침없이 펼쳐질 것만 같았던 그 무렵에 나는 친구의 소개로 신촌의 한 여대생을 소개 받았다. 그리고 그날 그 자리에서 첫 사랑의 타오르는 불꽃으로 눈앞이 혼미해지며 아마도(?) 정신을 잃었던 것 같다. 그 날 이후 나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었고 오직 그녀를 보고 싶은 한 가지 생각으로 내 머리 속은 진공 상태가 되고 말았다. 호젓한 찻집에서 두근거리며 그녀가 나타나기를 애태워 기다릴 때는 온 우주의 시계가 잠시 멈추어 선 것만 같았다. 만나서 신나게 거리를 활보하며 다닐 때면 세상에 아무 부러울 것 없이 마냥 그렇게 좋았다. 무작정 행복했고 잠시라도 헤어지기가 그토록 아쉬울 수가 없었다. 마치 소꿉장난하는 어린아이들처럼 자신의 작은 세계에 폭 빠져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연애 경험이 전혀 없었던 나는 여자가 항상 남자보다 현실적이라는 것도 나중에야 알았다. 그녀의 어느 정도 계산된(?) 순진한 표정과 춤추듯 하는 감정 변화에, 그리고 혼을 빼앗아가듯 하는 그 웃음소리에 내 온 마음과 정신이 홀려있었던 것 같다. 나는 그녀의 웃음 뒤에 조금씩 다가오는 감춰진 불안을 전혀 읽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동성동본이니, 집안이 전혀 맞지가 않는다든지 하는… 점차 현실적인 문제가 다가오기 시작하자, 그녀가 먼저 헤어짐에 대한 불안감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용히 떠날 준비를 한 것 같았다. 첫 해 크리스마스의 아련한 추억을 마지막으로 이별의 편지를 한 장 남기고 그녀는 모질게 사라져버렸다. 그 편지에는 그 동안 자신이 내게 고백했던 모든 말들은 거짓이니 이제 자신을 찾을 생각을 하지 말고 깨끗이 잊으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대처승이라고 하던 그녀는 마치 속세를 떠나버린 비구니처럼 내 시야에서 갑자기 종적을 감춘 것이었다.


 


문제는 그 때부터 시작되었다. 사실 나는 문제의 본질을 여전히 모르고 있었다. 내가 그토록 열망하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왜 내 안에는 손에 잡히지 않는 깊은 허무와 갈증이 심연처럼 출렁이고 있었던지, 그 공허를 채우기 위한 내 몸짓과 몸부림이 무엇을 향한 것이었는지, 그것을 미처 깨닫지도 못한 채 나는 술과 담배로 자신을 자학하며 깊은 수렁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 시절 세상 사람들을 향해 실연당한 사람의 표본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수염을 거칠게 기르며 장발의 히피처럼 살았다. 전공과 대학 생활의 의미는 완전히 상실해 버리고 말았다. 인생의 목적도 모르고 도로를 질주하던 어린아이가 막다른 골목을 만난 것이었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세상의 온갖 우수와 슬픔을 머금은 채 끝없는 허무를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나는 점차 시인이 되어가고 있었고, 주변에는 술 취한 아마추어 철학자의 취중 담론을 즐기는 더 많은 술친구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 후에 나는 몇 번인가 다시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내가 그녀를 만나게 되는 날은 항상 마음을 고쳐먹고 무엇인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고 결심한 날이었다. 마치 그녀가 풀어내는 불가(佛家)의 끈질긴 인연의 실 타래가 누에고치처럼 나를 칭칭 휘감고 있는 듯, 그런 날이면 영락없이 길거리에서 우연히 그녀를 만나곤 했다. 그 때마다 나는 다시금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고 원점으로 떨어지는 감정의 혼돈을 겪곤 했다. 대학가의 데모로 어지러웠던 80년의 봄, 그녀를 잊기 위해 나는 다시 다른 여인을 사귀고 있었다. 두 번째 여자는 아무 소망도 없어 보이던 나에게 미안할 만큼 헌신적인 사랑을 표현했다. 그 여인을 통해 어느 정도 삶의 안정을 되찾고 있었던 대학 졸업반의 어느 날, 첫 사랑의 그녀가 다시 나를 찾아왔다. 자신이 내게 보였던 지난날의 설명하기 힘든 행동 방식에 대한 변명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만일 지금 이 순간 그녀를 끊지 못한다면 내 인생은 이제 회복될 수 없는 낭떠러지로 떠밀려 갈 것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흔들리는 마음을 간신히 잡고 그녀를 냉정히 돌려보냈다. 그리고 나는 두 번째 여인과도 헤어진 후 졸업을 맞았다.


 


두 번째 여인은 큰 부잣집(?) 딸이었다. 처음엔 그런 사실에 관심도 없었던 나는, 그 일이 가져 다 줄 또 한번의 상처를 짐작조차 못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딸을 가난하고 힘없는 불량(?) 소년으로부터 강제로 격리시키기 위해 국외로 출국 시키는 그녀의 집안으로부터 또 다른 형태의 수모와 소외를 당하는 동안, 나는 세상에 대한 심한 염증을 느꼈다. 그리고 분노가 끓어올랐다. 나는 그 분노를 삭일 도피처가 필요했다. 군대를 마치고 인생을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첫 번째 여인은 종종 내 시야에 나타났다. 이번에는 TV의 뉴스 앵커가 되어 스크린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시절 나는 순수했던 나에게 무자비한 상처를 입힌 그녀들의 세상을 향해 복수의 칼을 갈며 오직 인생의 성공을 위한 질주에 매진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하며 All A+의 성적을 받아보기도 했다. 내 자신의 능력을 스스로에게 그리고 나를 무시하던 세상에게 과시하기 위한 도전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장래에 대한 성공 야망으로 불타 올랐다. 그 가운데에서도 내 생활은 술이 없으면 잠시도 견디지 못하는 알코올 중독 초기 증상에 빠져들고 있었다. 손이 떨려서 커피 잔을 들기 힘든 상황까지 되었다. 나는 심신의 깊은 상처에 허덕이며 극심한 편두통과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더 이상 내 자신을 견딜 수 없는 절망감으로 깊은 심연의 바닥까지 내려간 무렵… 지금의 아내를 만나게 되었다.


 


아내에 대한 고마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녀는 내가 만난 여자들 중에서 처음으로 신앙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 시절 만나기만 하면 술만 마시고 아무 말도 없이 음산한 정물화의 실루엣처럼 앉아 있던 나를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받아주었다. 그녀와의 짧은 만남 끝에 프로포즈도 한번 안 한 상태에서, 무작정 그녀의 집으로 쳐들어가 부모로부터 결혼 승낙을 받아버렸다. 그녀의 의사를 무시한 일종의 폭력이었다. 그 같은 나를 어찌 된 영문인지 그녀가 받아들인 것이다. 돌이켜보면 한 마디로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야말로 나는 수렁에서 건진 남자가 되었다. 그리고 영적 치유와 회복을 위한 첫 걸음을 떼게 되었다.


 


요즈음은 첫 사랑이 TV에 등장해도 담담히 바라볼 수 있는 내가 참 신기하다. 얼마 전 어느 정치 신당의 대변인이 되어서 그녀가 또 다시 화면에 나타났을 때 왠지 그녀가 측은하게 느껴졌다. 아내가 옆에서 장난스럽게 저렇게 매력 없는 여자를 어떻게 좋아할 수 있었냐고 눈을 흘겼다. 그 말을 들으니 나도 정말 저 여자가 옛날에 내가 그토록 사랑(?)하여 미칠 것만 같았던 그 사람인가 하는 생각에 세월의 무상함을 느꼈다. 그 순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그렇구나… 참 사랑의 본질을 알지 못할 진데, 인생이란 까딱 잘못하면 실상도 아닌 신기루에 속아서 허겁지겁 달려가다가 지쳐서 쓰러지고 마는 사막의 목마른 나그네에 불과하구나. 참 생수가 솟아나는 그 샘물을 발견하기 전에는 말이다.


(2)


그리스의 시인 헤시오도스는 미와 사랑과 풍요의 여신 아프로디테(비너스)의 탄생을 이렇게 묘사한다. 천공(天空)의 신 우라노스와 그의 아들 크로노스와의 싸움에서, 크로노스는 대지(大地)의 여신인 어머니 가이아의 음부 속에 숨어 있다가 아버지의 성기를 낫으로 잘라 바다에 던진다. 이렇게 하여 바다를 떠다니는 성기 주위에 하얀 거품(아프로스)이 모이고, 그 거품 속에서 아름다운 처녀 아프로디테가 생겨났다. 징그럽고 불쾌하기까지 한 이야기 속에서 미와 사랑의 화신이 탄생하는 이 설화가 담고 있는 의미의 이중성이 있다. 친부(親父) 살해를 통해서라도 권력을 획득하고자 하는 음모와 욕망… 그리고 바다를 떠다니는 거품처럼 덧없이 사라지는 아름다움… 그것이 바로 인본주의적 사랑의 정수인 에로스(Eros)의 개념이다. 권력과 욕망의 부산물로서 나타난 아프로디테는 남편인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 몰래 군신(軍神) 아레스와 통정하여 아들 에로스(큐피드)를 낳았다고 전해진다. 사랑의 화살을 쏘아 연인들을 사랑에 빠뜨리던 큐피드는 자신의 화살에 거꾸로 맞아 공주 프시케(Psyche)를 사랑하게 된다. 인간 정신과 혼(魂)을 상징하기도 하는 프시케는 지금도 큐피드의 화살을 맞은 수많은 젊은이들의 정신을 잃게 하고 물불을 가리지 않는 맹목적 사랑에 빠지게 하곤 한다. 


 


첫 사랑도 그 본질을 살펴보면 대부분 자기 성취와 만족을 위한 에로스적 욕망의 산물이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못했을 때 생겨나는 실연의 고통과 분노, 그리고 세상을 향한 야망과 질주 그 모든 것이 자기만족이라는 바위덩어리를 더 높은 욕망의 언덕 위로 끌어올리고자 하다가 끊임없이 실패하는 시지프스의 신화에 불과하다. 


 


그러나 예수는 사랑에 대한 우리들의 통념을 송두리째 바꾸어 버린다. 그가 가르치는 사랑은 우리가 도무지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사랑이란 자기 본위가 아니라 철저히 사랑을 받는 대상이 본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의 사랑, 아가페를 한 마디로 정의하면 도무지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일지라도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그 사랑으로 사랑했기 때문이다. 간음한 여인을 붙들어와 고소하며 예수를 시험하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질문 공세를 받으며, 허리를 굽히고 앉아 묵묵히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적고 있었던 예수… 그가 그 순간 적었던 글이 바로 ‘아가페’가 아니었을까? 자신의 불의는 끝없이 감추면서도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 용납하지 못하는 인간들의 완악함에 예수는 서글픔을 느꼈다. 그리고 바로 그들을 위해 자신이 져야 할 아가페의 십자가에 대해 다시 한번 묵상한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예수는 고개를 들어 그들에게 말한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 한 마디로 성난 군중을 모두 물리친다. 그리고 일어나 죄로 인해 죽어 가는 그들을 구원키 위해 마침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십자가는 아가페 사랑, 그 절정의 현장이다. 예수는 십자가상에서 우리가 정말 부르다가 죽을 사랑이란 에로스가 아니라 아가페임을 몸소 보여주었다. 에로스의 죽음은 죽음 그 자체로 끝나고 말지만, 아가페의 죽음은 수많은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씨앗이 되기 때문이다. 에로스는 자기 성취를 위해 주변에 상처들을 남기지만, 아가페는 자신이 홀로 상처 받는 그 희생으로 주변의 상처 받은 영혼들을 치유하고 회복시킨다.


(3)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을 하고 싶다.


그런 사랑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사랑 이야기를 쓰고 싶다.


 


그 사랑을 전하기 위해 고향 땅을 떠나 먼 타국으로 발걸음을 옮겼던 수많은 사람들… 그들을 통해 쓰인 사랑 이야기들이 지금도 세상 어디엔 가 보석처럼 빛나며 남아있을 것이다.


 


아무리 퍼부어도 사랑을 받을 줄 모르는 닫힌 영혼들… 겨우 그 마음 문 열어 놓으면, 받고 또 받기만 하면서 조금이라도 더 얻어내려고 끝없이 욕심만 부리는 사람들… 겨우 한 사람 변화시켜 놓으면, 이리 저리 눈치를 보다가 곧 실속을 챙겨 달아나는 사람들… 그들을 위해 애태우며 기도하다가 속상하고 힘이 들어 울음을 터뜨리고 마는 그 서러움…


그 마음을 체험한 사람만이 그 사랑을 배운다


 


1995년 겨울 티베트의 수도 라싸를 방문했을 때 만났던 어느 선교사 부부가 생각난다. 고산지대의 겨울은 음산하고 황량하여 길거리마다 모래바람이 죽음의 그림자를 몰고 이리 저리 굴러다니고 있었다. 비좁고 을씨년스러운 집으로 들어가며 어떻게 이런 곳에서 살 수 있을까 하고 기가 막힌 심정으로 우리를 맞이하는 부인을 바라보았다. 미국에서 살다가 왔다는 그녀의 얼굴은 매서운 고산 바람에 온통 갈라지고 거칠게 터져 있었다. 양 볼은 자외선에 오래 노출되어 현지의 티베트 여인들같이 마치 설익은 사과처럼 발갛게 물이 들어 있었다. 그 부인의 얼굴을 바라보는데 그냥 이유도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그날 밤, 그 부부로부터 들었던 이야기… 티베트에서의 첫 크리스천을 얻기 위해 그들이 쏟았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잊혀지지 않는다. 서장의 대학생 하나를 섬기며 무조건적인 사랑을 퍼붓기 몇 년만의 일이었다고 한다. 그들을 철저히 무시하고 욕하며 따돌리는 그 집 앞에서 정성스레 준비한 음식을 들고 문을 열어주기를 기다리며 몇 시간을 떨고 서 있었다고 한다.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며 그 학생이 나오더니 당신은 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는 거야 하며 엉엉 울음을 터뜨리며 결국 품에 안겼다는 것이다. 


그만큼은 아닐지라도, 절대로 변할 것 같지 않던 제자가 어느 날 눈물을 글썽이며 자신이 받은 사랑을 고백할 때 나 역시 함께 눈물지며 그 사랑을 느낀다. 중국 남방에서 직장 생활을 하며 또는 여러 나라에 유학을 떠난 제자들이 틈틈이 보내오는 편지들을 통해 그 사랑의 감격을 느낄 때도 있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유학중인 어느 제자가 보내온 편지 한 통….


정진호 교수님께,


 


안녕하세요?


교수님의 학생 M 입니다.


 


지금 저는 코스타 사이트에 방문하여, 교수님이 쓰신 글들을 읽고 있습니다.


읽으면서, 우리들이 받은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런데도 적다고 푸념까지 했던, 우리들이었군요…


그리고 교수님과 사모님, 그리고 다니엘의 고난에 가까운 삶을…


 


어린 다니엘을 배워줄 때, 좀 더 열심히 가르치지 못한 것이 후회 되는군요. 걔가 저보고  “형, 저 힘들어요.”라고 했던 말의 뜻도 이제야 많이 이해되는 것 같습니다. 옛날에는 그냥 막연하게 이국 땅에서 생활하는 게 힘들겠지 라고 만 생각했었어요…


 


행운스럽게도 몇 년 동안 교수님의 지도학생으로 가르침을 많이 받아왔지만, 교수님과 멀리 떨어져 있는 지금에야 제가 아주 행운스러운 놈이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가끔씩 내가 만약 교수님과 같은 처지라면, 이렇게 중국까지 올 수 있었겠는가 생각도 해봅니다.


 


아직은 교수님의 제자라고 하기는 참 부끄럽군요.


교수님, 기다려주세요. 꼭요.


교수님이 원하는 제자로 클 때까지요.


언젠가는 교수님이 중국 땅을 밟으신 것처럼, 저도 북한 땅을 밟고 싶습니다.


그분이 이끄심과 함께


 


한밭, 계룡산 기슭에서, 제자 M 올림.


2002년 겨울 토론토를 방문했다가, 1888년 조선 땅을 밟았던 캐나다 선교사 게일의 생가를 찾아간 적이 있다. 어느 목사님께서 나이아가라 폭포 구경을 시켜 주겠다고 아침 일찍 찾아오셨다. 폭포를 향해 가던 중 게일 선교사 이야기가 나와 가던 차의 방향을 중도에 북쪽으로 틀었다. 그러나 그날 따라 폭설이 내리기 시작하면서 차 앞의 시야를 가렸다. 여기 저기 길목에서 경찰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더 이상 올라가면 위험하다고 가로막았다. 그러나 모처럼 찾아온 나에게 게일의 생가를 꼭 보여주길 원하셨던 그 목사님은 끈질긴 집념으로 가시거리(可視距離)가 전혀 없는 위험한 눈길을 이리저리 헤매며 몇 시간 만에 마침내 그 집을 찾아내었다. 차에서 내려서 약 100m 정도의 길을 걸어가는데, 얼마나 바람이 무섭게 몰아치는지 몸이 번쩍번쩍 들리는 것만 같았고 안경은 곧 성애로 얼어붙었다. 게일의 생가 앞에서 겨우 사진을 몇 장 찍고 황급히 돌아서서 다시 차 안에 앉았다. 차 안은 따뜻하고 조용하여 바깥의 눈보라를 전혀 의식치 못하는 딴 세상 같았다. 묵묵히 기도를 하는데, 눈물이 쏟아졌다. 바로 그 먼 옛날 이 곳에서 어두움에 갇힌 조선 땅을 밟기 위해 소명의 길을 떠났을 스물 다섯의 젊은 청년 게일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들의 헌신과 사랑의 수고를 통해 조선 땅에 빛이 들어오고 생명의 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힘들고 지칠 때마다 사무실과 집의 벽에 붙여놓고 한번씩 읽어보는 시가 있다.


 


 


<뵈지 않는 조선의 마음>


                                                                언더우드


 


주여!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와 심으셨습니다.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한 이곳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있는 조선 사람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주겠다고 하면


의심부터 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 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지 않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어쩌나 합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나이다.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나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 수 있게 될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 있는 것 같사오나


지금은 우리가 서양귀신 양귀자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사오나


저희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의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우리 앞에 가신 믿음의 선진들… 그들이 남긴 사랑의 발걸음들, 그 발자국 위에 우리가 서 있다. 양화진에는 국적을 초월하여 죽기까지 조선 백성을 사랑했던 외국인들의 아름다운 아가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다. 그들의 믿음대로 이루어진 오늘날 한국의 실상을 확인하며, 중국과 북한 땅을 향한 새로운 사랑의 역사를 믿음으로 바라본다.


 


우리가 부르다가 죽을 그 사랑의 이름은 십자가에 새겨진 아가페이다.


 


 

[정진호] 지성, 그 깨지기 쉬운 유리알 유희

회복과 치유의 신학 – 내 아버지의 뜻


지성, 그 깨지기 쉬운 유리알 유희


(1)


문명 충돌과 붕괴의 時論 2001년 9월 11일 발생한 세계 무역 센터(WTC)의 붕괴 장면은 전 세계인을 경악하게 한 세기적 사건이었다. 정보화시대를 실감하며 생방송으로 엽기(?)적 상황을 지켜보는 동안 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바야흐로 다각화된 문화에 의한 문명 충돌의 시대로서 21세기를 예견했던 새뮤얼 헌팅턴과, 인류 역사 속에 나타난 문명의 한계 수익 체감에 의한 문명 붕괴의 필연성을 역설한 조지프 테인터의 노작(勞作)이 새삼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역사학자 토인비가, 2,000년 전 바울이 소아시아에서 지중해를 건너 유럽으로 건너갈 때 타고 간 배를 가리켜 유럽의 운명을 싣고 간 배였다고 말했듯이, 세계 역사는 끊임없는 서진(西進)을 계속하며 새로운 문명과 역사의 주역들을 탄생시켜왔다. 21세기의 개막과 더불어 발생한 WTC의 붕괴는 어쩌면 지난 20세기 세계 정치 경제 문화의 주역이었던 한 문명이 무너져 내리고 이제 또 다시 새로운 주역의 부상을 예고하는 역사의 한 서막으로 기억될지도 모른다. 지난 20세기는 인간의 합리적 이성을 앞세운 과학기술을 무기로 유토피아 사회 건설을 추구하며 시작되었다. 20세기가 평등과 자유의 이데올로기를 나누어 가진 체 동서 냉전의 양극화 구도로 치닫는 동안, 세계는 수많은 전쟁과 혁명 속에서 무고한 피 흘림과 비인간화의 값을 치렀다. 그러나 이제 21세기는 다원화된 문화 전쟁 속에서 새로운 형태의 피 흘림을 예고하고 있음이 아닌가?


인간의 본질에 대한 탐구는 철학과 과학의 가장 오랜 주제였다. 지난 18세기 계몽주의 시대 프랑스의 라메트리가「기계인간」의 개념을 제시함으로 출발한 소위 <생물학 결정론>은 모든 인간이 유전자에 의해 프로그램된 고도로 복잡한 기계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낳았다. 급기야 그것은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좋은 유전자를 지닌 사람만을 남겨놓아야 한다는 주장을 통해 열등한 인종을 도말(?)하는 히틀러 식의 급진 우익 사상까지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생물학 결정론에 반대하는 <문화 결정론>자들은 인간은 주변 환경과 교육 문화에 의해 언제든지 가변적으로 변화될 수 있는 존재라는 주장을 내세운다. 그러나 문화 결정론이 또 다른 극단으로 치우칠 때, 소위 행동주의 철학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인간을 환경적 자극에 의해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환경적 기계장치 또는 시스템으로 파악하게 된다.


결국 이 논쟁은, 인간이 안고 있는 피면 할 수 없는 두 가지 조건 <자연(Nature)>과 <문화(Culture)>에 대한 시각을 어떻게 갖느냐 하는 문제에서 비롯된다. 분명 인간은 자연적 요소를 지닌 존재이기도 하지만 또한 문화적 환경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되고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간을 파악하는 시각이 <자연>이냐 <문화>냐 하는 양자택일의 이원론에 빠질 때 결국 인간의 사물화(死物化)를 조장하는 이데올로기로 변하고 만다. 이데올로기화한 원리주의(原理主義)는 항상 위험요소를 안고 있다. 그래서 항상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균형 잡힌 생각을 유지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인간은 <자연>과 <문화> 사이에 존재한다. 그러나 그 중간 영역은 철학과 과학의 오랜 탐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완전히 파악될 수 없는 블랙박스(Black box)로 남아 있다. 내가 알 수 없는 어떤 영역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 그것이야말로 경직된 사고의 위험성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주는 균형 감각이며, 내 자신에 대한 무지로부터의 탈출을 위한 출발선이 될 것이다. 문명 충돌의 시대에 자신이 붕괴되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역사의 완충지대를 바로 읽는 지혜와 탄력성이다.


위 글은 2001년 10월 18일자 연변과학기술대학 신문의 <북산가 칼럼>에 실었던 글이다. 사회주의 국가의 대학 신문에 게재한 글이라 신앙적인 내용은 더 이상 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에 대한 그 해답을 논하기 위해서는 위에서 <블랙박스>로 처리 해버린 부분에 대한 신앙적 이해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인간에게 주어진 이성적 힘은 무궁무진해 보인다. 지난 20세기에 인류는 천체의 궤도를 예측하여 달과 화성에 로켓을 쏘아 올리고, 원자의 구조를 파헤쳐 신기한 반도체와 컴퓨터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그 이성의 힘으로 미사일의 탄도를 예측하고 원자 폭탄을 만들어 대량 살상을 일으킨다. 그것이 인간의 이성이 지닌 양면성이다. 어째서 이런 일들이 발생하는 것일까?


(2)


세계 제 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독일의 작가 헤르만 헤세는 그의 생애 최고의 대작이자 자신의 사상을 집대성한 작품 <유리알 유희>를 발표하여, 1946년 전후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는다. 그것은 나치스에 의해 갈기갈기 찢어진 독일 지성인의 자존심과 전쟁의 광란과 공포에 젖은 20세기 지성의 회복을 희구하는 헤세 문학 집념의 산물이기도 했다. 서기 2,400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미래소설이자 유토피아 소설인 <유리알 유희>는 인류가 20세기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나 지성의 회복을 통한 종교적 이상향을 건설하고 영재 교육을 통해 학문과 예술의 정신문명을 극대화하는 지적 유희를 벌이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인간이 만들어낸 학문과 예술의 최고의 경지를 헤세는 <유리알 유희>에서 마치 수학적 대위법으로 작곡된 바하의 파이프오르간 푸가(Fugue)를 연주하는 것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더 이상 정교하고 더 이상 웅장하며 더 이상 합리적이며 더 이상 경건할 수 없는 꽉 짜여진 위대한 음악… 그 음악의 명인들에 의해 펼쳐지는 유토피아라는 대곡은 마침내 연주될 수 있을 것인가? 과연 인간의 역사는 헤세가 지향하고 갈구했던 대로 이상향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가능한 일일까?


고대로부터 인간의 이성적 힘을 믿었던 소수의 사상가들은 탁월한 지도력을 지닌 소수 엘리트 혹은 철인(哲人)을 통해 다스려지는 이상국가(理想國家)를 만들고 싶어했으며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플라톤이 그랬고 공자가 그랬다. 그 시대와 환경, 그리고 방법론은 서로 달랐지만 퇴계와 율곡이 그러했고 크롬웰이 그러했으며 마르크스가 그러했다.


지금부터 꼭 100여 년 전. 19세기말에서 20세기로 인류 역사의 수레가 역동적으로 올라서던 시기에 서구 세계는 17세기 이후 자신들이 이룩해 낸 과학기술의 혁명적 진보와 그에 따른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과학 혁명에 의해 형성된 기계론적 세계관이 인간의 이성을 신봉하는 계몽주의자들에 의해 진보주의(progressivism)라는 일종의 이데올로기로 변하게 되었고, 마침내 서구 지성인들의 자만심으로 표출되었다. 19세기 중엽 찰스 다윈에 의해 조심스럽게 제기되었던 진화론은 그와 같은 시대사조를 등에 업고 채 20년이 지나기도 전에 전 유럽과 미국을 뒤덮는 사회학적인 혁명적 풍조가 되었고 진화 사상이 되어 나타났던 것이다. 서구 열강이 전 세계를 제국주의 식민지 영역으로 패권 쟁탈을 하며, 그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난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전 세계가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으로 첨예하게 나뉘는 과정 속에서도 양 진영 모두 과학 기술의 무한한 발전과 더불어 마침내 인류는 20세기의 유토피아를 건설하게 되리라는 신념만은 서로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보주의는 현대성의 상징이었고 20세기를 여는 화두였다.


그와 같은 신념 틀 속에서 교육을 받아오던 사람들이 점차 그 꿈속에서 깨어나기 시작한 것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그리고 마침내 인류가 이룩해 낸 과학기술의 열매가 핵 폭탄이라는 엄청난 살상 무기로 등장하면서 온 인류를 핵전쟁의 위협 속으로 몰아넣기 시작한 그 무렵이었다. 한국 전쟁과 월남전의 참상, 끝없이 이어지는 냉전 상황 속에서 서구의 지성은 자신들이 가졌던 진보 이데올로기가 어쩌면 신기루에 불과할 지 모른다는 것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하였다. 그와 함께 소위 탈 현대, 즉 포스트모던 논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지적 논쟁이 일반 대중들의 삶 속에까지 파급되기에는 상당한 시간이 요구되었다. 여전히 교육 현장에서는 진보 이념이 신앙 고백처럼 설파되고 있었고, 대다수의 대중들은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왔던 것이다. 탈 현대의 외침은 20세기 지성이 이룩해 내었던 거대하고 냉혹한 기계문명에 대한 반발과 자성 그리고 인간 이성에 대한 회의와 불안감의 표출이었다.


그 불확실성 속에서 전 세계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던 911테러로 21세기는 그 서막을 연다. 곧 이어 반격으로 가해진 아프간과 이라크 전쟁은 세계인들로 하여금 지난 20세기 세계의 학문과 예술을 이끌어 가며 정치와 경제의 종주국이요 지성 국가로 자처했던 미국에 대한 극심한 반발과 실망, 그리고 분노에 사로잡히게 했다. 이성과 이념으로 시작했던 20세기보다도 감성과 경제 논리만을 앞세우는 21세기는 역사를 더욱 극심한 지적 공황과 불안으로 몰고 갈 가능성이 높다. 과연 인류는 이제 지성을 포기해야만 하는 것인가?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3)


하나님의 형상(the image of God)으로 창조된 인간… 그 특별한 인간의 본질에 대하여 성경은 세 가지 구성 요소를 암시하고 있다. 창세기 1장에는 하나님의 개입이 없이는 불가능한 창조행위를 표현하는 바라(bara)라는 동사가 단계적으로 세 구절에 등장한다. 첫째가 절대 무의 상태에서 시공간과 물질을 창조하는 1절이요, 둘째가 의식적 존재로서의 생물을 창조하는 21절이며, 마지막 세 번째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하는 27절이다. 인간은 이 세 가지 단계를 통해 물질적 요소(body)와 의식적 요소(soul) 및 영적 요소(spirit)를 함께 갖춘 존재가 되었다. 물론 유기체로서의 인간에게 이 세 가지 요소가 삼분법(三分法)적으로 독립되어 있지는 않다. 육체적 결함과 상처가 더러는 의식과 영적인 함몰을 가져오기도 하며, 영적인 치유가 육체의 손상을 회복시키는 결과로 나타나기도 하기에 인간은 이 세 가지 요소를 지닌 하나의 통일체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인간이 지닌 한계성을 근원적으로 파악하기 위하여 세 가지 요소를 분리하여 생각하는 것이 필요할 때도 있다. D. G. Barnhouse는 인간을 하나님에 의해 아름답고 완전하게 지어졌던 3층집으로 묘사하고 있다. 제 1층인 몸(body)은 흙으로 지어진(formed) 물질적 요소요, 제 2층인 혼(soul)이 인격성(personality)을 나타내는 요소라면, 제 3층인 영(spirit)은 하나님과의 대화와 교제를 가능케 하는 영성(spirituality)적 요소이다. 문제는 그렇게 아름다웠던 인간이 불순종의 죄를 지어 타락(fall)하는 그 순간 마치 원자폭탄이 터진 것과 같은 엄청난 재앙이 발생하여 인간의 본질적 요소를 근원적으로 훼손해 버린 것이다. 폭탄이 투하된 순간 하나님과의 대화를 가능케 하던 제 3층은 완전히 날아가 버리고(파편만이 희미한 흔적으로 남음), 인간의 지성, 감성, 의지를 나타내던 제 2층은 파괴되어 절반이 남았으나 남은 절반도 심하게 손상되었으며, 제 1층 육체는 그 순간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지만 폭발진동에 의해 보이지 않는 미세 균열(micro-crack)이 가득 발생하여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결국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너희가 반드시 죽으리라고 약속했던 대로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인간의 지성을 과대 평가했던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인간 스스로가 자신의 존재를 규정하고 파악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이성의 힘으로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고 믿었다. 무신론과 유물론으로 무장된 그들은 하나님의 자리에 대신 과학을 올려놓음으로써 새로운 부르주아 지배계층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들이 인간을 결정론적으로 이해하고 분석해 가는 과정에서 서구 사회에 처음 등장한 것이 <기계적 결정론>이다. 즉 인간을 단지 유전자와 생체 화학반응에 의해 결정되는 물질적 산물로 보는 견해이다. 이는 나중에 유전자 구조의 이해와 분자 생물학의 시작과 더불어 <생물학 결정론>으로 발전하며 다윈이즘에 의한 적자생존의 원리와 결합하여 자본주의 보수,우익 사상의 철학적 기초를 놓게 된다. IQ, 가부장적, 성적(性的), 사회적, 인종적 나아가서는 정치,경제적 불평등의 기원을, 인간 내부에 선천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유전적 원인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심리학 결정론> 또는 <문화 결정론>은 인간은 오직 그가 자라온 환경과 교육에 의해 결정되는 역사적 산물로서 파악한다. 의식의 정신적 진화과정을 변증법적으로 기술한 헤겔에서 출발하여 인간 행동을 외부 자극에 의한 학습된 반응으로 파악한 스키너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인간의 정신 현상을 철저히 탈 신격화(脫神格化)한다. 이는 교육과 학습을 통한 사회변혁을 꿈꾸는 좌익 급진 사상에 영향을 주며 역시 다윈이즘의 자연도태의 원리와 결합하여 프롤레타리아 혁명 계급투쟁의 사회주의 철학으로 발전해간다.


인간은 비록 불완전하지만 자유 의지를 지닌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의 행동에 도덕적 책임을 담당해야 한다. 그러나 생물학 결정론이든 문화 결정론이든, 결정론적 세계관으로 바라본 인간에게는 도덕적 책임이 사라지고 만다. 그가 어떤 사회적 문제나 불평등이나 혹은 폭력을 야기하거나 당하더라도, 그것은 생물학적 원인 혹은 그가 처했던 환경적 원인에 의해 불가피하게 발생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상 위에 유토피아를 꿈꾸고 출발했던 결정론적 세계는 오히려 날이 갈수록 심각한 사회적 질병과 경제적 불평등 그리고 끔찍한 전쟁으로 지난 20세기를 점철시켰다. 보수 우익 사상이 빚어낸 우생학은 생명경시 현상으로 나타나 나치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 일본의 남경대학살과 713부대의 만행을 일으켰으며, 좌익 급진 사상이 일으킨 공산 혁명은 사회주의 국가마다 엄청난 피의 숙청을 불러왔다. 결정론주의자들은 타락한 인간의 이성이 얼마나 심하게 왜곡되어 있는지를 몰랐다. 그들의 이성은 너무나 불완전해서 인간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그 불완전한 이성으로 완전한 이상사회를 결코 이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동서 냉전으로 팽팽히 맞서던 20세기가 그 균형을 상실하고 사회주의의 몰락으로 내닫던 1980년대 후반부터 미국과 영국 사회를 중심으로 신 우익(New Right)이라고 부르는 정치권력이 새롭게 형성되기 시작했다. 레이건 과 대처를 거쳐 부시와 블레어로 이어지는 일련의 정권들의 배후에는 생물학 결정론의 사상으로 새롭게 무장하여 세계의 정치,경제 질서를 보수 우익의 패권 하에 재편하려는 움직임이 깔려있다. 그들은 기독교 근본주의와 결합하여 세계평화와 자유수호를 위한 신탁 국가로서 타민족을 징벌하는 정의의 칼을 휘두르며 새로운 십자군 운동과 우생학을 펼쳐가기 시작했다. 2000년 6월 26일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과 영국의 블레어 총리는 인간의 DNA 염기 서열의 위치를 판독하려는 인간게놈 프로젝트(Human Genome Project)의 초안을 발표했다. 그것은 생물학 결정론의 위대한 승전보였으며 신 우익 세력의 21세기를 향한 선전포고였다.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 하버드와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 옥스퍼드는 세계의 학문 정신을 이끌어 가는 최고 지성의 명문대학들이다. 그곳에 현대 진화론의 생물학 결정론을 주도하고 있는 두 선두 그룹들이 있다. 하버드 대학의 에드워드 윌슨과 옥스퍼드 대학의 리처드 도킨스가 그들이다. 강자의 생존을 위해 약자를 공격하는 것이 자연이 만들어낸 정당한 법칙이라는 그들의 논리가 이 두 기독교(?) 국가에 팽배해 있는 것이다. 마치 서구의 중세 시대가 표면적으로는 로만 카톨릭의 기독교 국가였지만 그들을 지배하던 철학과 과학 사상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헬레니즘 철학과 과학으로 무장되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중세 수도원 운동에서 출발한 옥스퍼드 대학, 청교도 정신으로 세워진 하버드 대학이 전 세계 인본주의의 산실로 탈바꿈한 사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하버드 대학의 설립 이념에는 모든 학문의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정신이 드러나게 하겠다는 선언문이 유리알처럼 빛나며 아직도 남아 있다.


유리알은 또 다시 깨어졌다.
그리고 윌슨과 도킨스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충격과 공포와 죽음의 현장…
깨어진 가정과 울부짖는 어린아이들의 울음소리…
포화의 연기 속에서 무너지고 스러져 가는 인간성들…배반과 약탈, 방화…
지난 세기 전쟁의 잔혹함을 경험했던 우리 민족에게 이 일은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저들의 통곡과 눈물의 상처들이 치유되기 위해,
이제 또다시 얼마나 많은 순교자의 십자가가 저 땅 위에 세워져야 할지…
사막의 모래 바람이 메마른 가슴을 스친다.

[정진호] 윗물이 맑아져야 아랫물이 맑아진다

치유와 회복의 신학 – 내 아버지의 뜻


윗물이 맑아져야 아랫물이 맑아진다


(1)


“두마안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 사~공~ ” 돌아가신 김정구 선생의 구성진 이 노래를 지난 반세기 줄기차게 부르며 술타령을 하던 한국 사람들… 그들이 중국 연길을 방문하면 손쉽게 찾는 곳이 가까운 도문시다. 두만강과 북한을 넘겨다보기 가장 쉬운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두만강을 처음 보고 느끼는 감정에는 약간의 짜증과 실망감이 섞이게 마련이다. 민족 분단 아픔의 현장을 미처 느끼기도 전에, 관광객들의 호주머니를 노리며 호객행위를 하는 조선족 아줌마들이 달라붙는다. 더러는 자칭 북에서 건너왔다는 탈북자들이 구걸을 하기도 한다.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려 하면 장소비를 내라며 가로막는 어이없는 텃세에 기분을 잡치기도 한다. 그 같은 난관을 뿌리치고 두만강 가에 서서 건너갈 수 없는 산하를 바라본다. 눈길에 처음 잡히는 것은 북한의 민둥산에 새겨진 <속도전>이라는 선전문구다. 그 사이를 가로질러 흐르는 샛강이 바로 말로만 듣고 노래만 부르던 두만강인 것이다. 그러나, 그 강은 결코 우리가 머릿속에서 상상하던 푸른 물이 넘실대는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이 아니다. 실망스러우리 만큼 협소하고 그나마 오염되어 온갖 오물이 함께 떠가는 더러운 탁류가 한줄기 힘없이 역사의 어두운 자락을 흘려보내고 있을 뿐이다.


두만강과 압록강의 물 근원이 백두산 천지에서 갈라져 내려온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면 산천어가 서식할 만큼 두만강 물은 맑아진다. 평상시에도 숭선이라 부르는 두만강 상류 지역의 마을로 들어서면 오묘한 산세와 맑은 강물이 굽이굽이 부딪혀 만나며 한 폭의 산수화와 같은 절경을 이루고 있다. 더욱이 가을철에 오색 단풍마저 들게 되면 아~ 이곳이 바로 금수강산 우리 땅이었구나 하는 탄식이 절로 나오리만큼 아름다운 곳이다. 장백산을 뒤로 돌아 압록강 쪽으로 넘어가면 북한의 혜산시와 마주하고 있는 중국의 변경 마을이 있다. 조선족 자치현인 장백현이다. 그 곳에서 맑은 압록강 줄기을 타고 올라가는 길 역시 10월 단풍은 미국 메인 주의 가을을 떠올리듯 절경을 이룬다. 더욱이 두만강 쪽에서 볼 수 없는 대 협곡이 압록강 건너 북한 쪽에 나타나 마치 그랜드캐년(?)을 연상케 한다. 어느 모로 올라가 보아도 백두산에서 내려오는 계곡의 물은 태고의 순수를 머금은 듯 맑고 차갑기가 이를 데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이 물이 하류에서는 저렇듯 부패하고 썩은 물로 변할 수 있었을까?


두만강 변경을 구경하기에 제일 좋은 코스는 도문에서 강변을 타고 따라 상류로 올라가는 길이다. 변경을 한번 보고 싶어하는 외부 손님들을 모시고 가끔 다니곤 하는 코스이다. 철을 따라 여름철에는 시원한 드라이브 코스가 되어 더러는 강 건너 민둥산조차 정겹게 느껴지기도 한다. 언젠가 97년경 북한이 한창 기아에 허덕이던 무렵 강을 따라 올라가던 나는 두만강 물이 이전과는 달리 갑자기 맑아진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예전에 보던 거무죽죽한 물이 아니라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웬일일까? 의아해 하며 강변을 달려가던 나는 마침내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연길서 승용차로 세 시간 쯤 가는 거리에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내려다보이는 접경도시 북한의 무산시가 있다. 무산은 자철광 마그네타이트가 13억톤 가량이나 매장되어 있는 아시아 최대의 철광 도시이다. 중국 측 언덕바지에서 내려다보면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올 만큼 가까이 있다. 도시 전체가 온통 노천의 철광석을 캐내는 공장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언뜻 첫 인상이 검게 느껴지는 곳이었다. 처음 그곳을 방문했을 때 다닥다닥 따개비처럼 붙어 있는 낡고 허름한 단층집들마다 가느다란 굴뚝에서 하얀 연기를 내뿜으며 밥을 짓는 모습이 너무나 인상이 깊었었다. 그 속에서 살고 있을 가난하지만 정겨운 가족들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런데 그 해에는 그 적막한 도시가 마치 죽음의 기운에 휩싸인 듯이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고, 그나마 살아 있는 증거로 보이던 굴뚝 연기마저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무산시가 움직이고 있을 때에는 공장에서 내보내는 시커먼 폐수가 두만강으로 유입되어 온통 강 하류를 오염시키는 근원이었다. 그런데 그 해에는… 극심한 기아 상황에서 공장을 움직일 전기마저 끊기고 일할 사람들이 먹을 것을 찾아 공장의 부품들을 뜯어 식량으로 바꾸어먹는 사태가 발생하자 공장의 가동이 멈추어 서며 온 도시가 죽어버리고 만 것이다. 오히려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다. 사람이 멈추어 서자 강물은 제 모습을 되찾았다. 굶주림에 죽어가는 북한 주민들을 생각하며 울어야 할지, 맑아진 두만강 물을 바라보며 웃어야 할지… 죄에 깊이 물든 인간들이 만들어낸 한 폭의 희화적인 코메디처럼 느껴졌다.


그때 깨닫게 된 단순한 사실이 있다. 창조주의 손길이 닿아있는 곳, 그 아름다운 상류에서 내려오던 맑은 물이 중간지점 무산에서 시커먼 폐수를 방출하기 시작하자 하류는 몽땅 탁류로 바뀌고 만다. 하류의 물을 다시 맑게 하려면 폐수를 방출하는 상류의 물 근원을 새롭게 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 폐수가 사라지면 물은 맑아진다. 아랫물을 맑히기 위해서는 윗물을 변화시켜야 한다.


(2)


1966년, 린 화이트(Lynn White Jr.)는 ‘우리의 생태적 위기의 역사적 근원(The Historical Root of Our Ecological Crisis)’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학계에 큰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유명세를 탄다. 그는 지구 환경 파괴의 주범으로 자연을 마음대로 착취한 서구 문명의 책임을 논하면서 그 사상적 배경에는 기독교가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고 주장한다. 창세기 1장 28절의 문화 명령을 근거로 한 성서적 자연관이 자연을 지배하고 정복하는 과정에서 무분별한 환경 훼손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이 논쟁을 계기로 고대의 유기체적 세계관의 복고 현상이 나타났다. 기독교 이외의 다른 문명권 특히 동양적 유기체적 범신론적 자연관이 환경 문제에 대한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최근의 제임스 러브록(James Lovelock)과 같은 생태주의 과학자들에 의해 제기된 가이아 가설1)이 나 어머니 지구 이론으로 이어진다. 또 하나의 현대적 유기체 이론을 탄생시키고 있는 것이다. 자연 만물에 영혼이 숨어 있다는, 그러니 함부로 다쳐서는 안 된다는 고대의 정령 숭배 사상과 범신론적 물활론이 생태주의의 포장을 하고 새롭게 부활한 것이다.(이 같은 생각들이 지구환경보호를 위해 일부분 기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서구 문명이 동양을 제치고 세계 역사의 주축으로 올라선 계기를 마련한 것은 16세기 과학 혁명 이후 근대 세계에 이르러서였다. 과학 혁명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견지해 오던 중세 이전의 유기체적 세계관으로부터 성서적 기계적 세계관으로의 천이를 가져다주었다. 그 일은 서구인들의 사고를 획기적으로 변화시켰다. 자연을 숭배하고 두려워하던 과거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자연을 이해하고 탐구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자연을 정복하고 다스리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이 시기 서양의 기독교 국가들이 타민족에게 자행한 제국주의적 환경 파괴에 대하여 역사적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린 화이트의 지적은 일견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역사의 한 단면만을 부각하여 전체의 책임을 전가하는 환원주의적 오류를 품고 있다. 과학혁명을 일으킨 당시의 기계적 세계관은 철저히 유신론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이, 뉴턴 등 과학혁명을 일으킨 장본인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 안에 감춰진 오묘한 설계와 목적성에 대해 추호의 의심도 없이 확신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과 충돌을 야기했던 중세적 세계관은 오히려 헬레니즘의 유기체적 세계관에 뿌리를 둔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이었다. 성경은 철저하게 모든 자연 세계가 하나님의 지혜로 만들어진(formed, fabricated) 것임을 천명하고 있다. 기계적 세계관은 광대한 우주를 구성하며 규칙적으로 운행하는 행성과 은하들에서부터 시작하여, 지구 생태계의 모든 동식물, 그리고 흙으로 만드신 사람의 몸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지으신 물질을 재료로 하여, 만물이 목적과 설계에 의해 기계적 2)으로 형성된 것이라고 알려주고 있다. 복잡하고 신비하기 이를 데 없는 자연이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지 자연 스스로가 자기조직화 하여 나타난 유기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생명현상의 특징인 유기체가 발현된 것은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간 이후에 나타난 것이라는 관점이다. 사람의 생명 또한 하나님이 만드신 몸속에 생기를 불어넣어 탄생한 것이기에 자연과는 구별된다. 우리의 몸은 죽어서 다시 흙으로 돌아갈 지라도 영혼은 여전히 남아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 대한 유신론적 기계론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계몽주의 철학자들에 의해 이신론(理神論)으로 탈바꿈하고, 마침내 무신론적 기계론으로 귀착되고 만다. 다스리고 정복하되 선한 청지기가 주인의 재물을 정성스레 관리하듯 해야 할 자연을 인간이 스스로 주인이 되어 마음대로 탈취하고 빼앗고 남용하게 된 것이다. 타락한 인간에 의해 끝없이 유린당할 그 자연의 모습을 미리 내다보셨던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이제는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고 예언적 저주를 하고 계신다. 하나님이 사라지고 난 이후의 기계적 세계관은 오직 인간의 이성만을 신봉하는 과학주의와 물질주의로 빠지게 된다. 그 이성의 시대가 만들어낸 사생아가 전 지구적 환경 파괴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오히려 자연을 살아있는 유기체로 보고 숭배하던 시절보다 더 못한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만일 기독교 자체가 환경파괴의 주범이라는 논리를 받아들인다면, 현재 기독교 국가마다 환경 파괴 현상이 더 심하게 나타나야만 한다. 그러나 현실은 정 반대다. 기독교 문명이 한번 휩쓸고 지나간 국가는 비교적 환경 보존이 양호한 반면에 유물론, 즉 무신론적 기계론 사상에 입각해 세워졌던 공산주의 국가마다 더 심한 환경 파괴와 훼손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환경 파괴는 기독교의 자연관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 살아가는 이기적으로 타락한 인간에 의해 야기된 문제인 것이다.


연길에 처음 왔을 때, 우리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 중의 하나는 온 도시를 휘감고 있는 먼지와 악취와 쓰레기들이었다. 우리가 처음 아파트를 얻었던 뻬이따라는 동네와 학교 사이를 오가는 길에는 진흙과 쓰레기가 뒤범벅이 되어 있었고, 각종 오물과 하수가 길 가에 그대로 버려지고 있었다. 여름에는 시뻘건 흙탕물과 싸워야 했고, 물이 안 나와서 항상 욕조에 물을 받아서 살았다. 그 물을 다 쓰고 나면 욕조 바닥에 마치 갯벌처럼 진흙이 남았다. 겨울에는 온 도시를 휘감는 석탄 매연으로 아이들은 폐렴에 시달렸으며, 어른들도 늘 기관지에 새까만 가래가 끓었다. 사람들이 마구 버린 플라스틱 비닐 종이가 바람에 날려 온 도시의 나무 가지마다 빨간 파란 열매처럼 매달린 진풍경을 낳았다. 노상에서 방뇨하는 모습은 다반사요 재래식 화장실에 얽힌 놀란 경험담이 너무 많아 (창피한 일이지만)늘 식탁의 이야기 거리가 되곤 했다. 사실은 그것이 바로 복음이 들어오기 전 한국 사회의 옛 모습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 우리들의 모습이었다. 복도에서 기숙사에서 교실에서 아무 곳이나 침을 뱉고 담배꽁초를 버리는 아이들을 붙들고 씨름하기 10년…


중국 전역에, 그리고 연변 지역에 10여년 전부터 조용히 불기 시작한 복음의 바람들… 수많은 발걸음들이 오고가며 씨앗을 뿌렸다. 과기대 교정의 아름답게 다듬어진 조경… 화사한 꽃들과 푸른 잔디밭 사이를 오간 많은 시민과 학부형들… 방문자마다 놀라고 감탄하던 깨끗한 기숙사… 그 생활에 물들어 오히려 방학 때 집에 돌아가기를 싫어하던 학생들… 함께 교정에서 생활하는 외국 선생님들의 깨끗한 옷차림과 예절들… 이런 모습을 보고자란 우리 학생들이 10년만에 어떻게 변했을까? 학생들이 변했다. 학교가 완전히 변했다. 연길 시 전체가 변하고 있다. 해가 다르게 연길이 깨끗해지고 있다. 아니 중국 전체가 깨끗해지고 있다. 이제는 2008년 북경 올림픽을 그린 올림픽으로 만들겠다고 나서고 있는 것이다.


복음은 치유의 능력이 있다. 그리고 그 복음은 물과 같이 스며들며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3)


성경에서는 모든 죄의 근원을 불순종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스스로의 길로 나섰던 인간들… 선악과를 따먹은 그들의 원죄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가 분리되고 모든 피조계마저도 분리되어 큰 상처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불순종의 죄를 일으킨 그 사건의 배후를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탐심과 교만 그리고 불신앙이 도사리고 있다.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 고 속삭였던 사단의 교만과 선악과에 손을 대는 순간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느꼈던 아담과 하와의 탐심이 숨어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상류의 오염원을 먼저 치유하지 않고는 결단코 우리의 행동을 순종으로 바꿀 수 없다.
























◆ 죄 (Sin):불신앙교만탐심불순종
◆ 치유(Healing):믿음회개자유함순종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 그러나 참 믿음은 반드시 회개를 수반한다. 그 속에서 떡(물질, 명예, 권력…)에 대한 자유함과 순종의 행위들이 흘러나오게 되는 것이다.


믿는다고 하면서 회개하지 않는 크리스천들… 이들은 이웃과 자연 속에 불신자들보다 더 큰 상처를 남긴다. 마치 하나님을 떠난 기계론이 하나님 없는 유기체론 보다 더 큰 환경 파괴를 일으킨 것처럼…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과 정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던 우리의 인생 방향을 완전히 180도로 전환시킨다. 비로소 하나님을 향한 순종의 삶으로 만드는 것이다. 회심의 순간 우리는 드러난 자신의 죄악을 내버리고 전 존재를 예수 앞에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게네사렛 호수가의 베드로와 같이… 만일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그의 삶이 45도 혹은 90도 정도 방향을 전환했다고 해서 그가 하나님을 향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그의 인생 방향은 세상의 또 다른 어떤 곳을 향해 나가고 있을 뿐이다.


자신은 하나님 편에 서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웃과 피조계에 서슴치 않고 파괴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다. 마피아 크리스천이라고 해야 할까?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던 수많은 십자군 전쟁의 참상, 그 이면에는 위정자들의 정치 경제적 통치 논리가 있었다.


정치적, 경제적 메시아를 갈망하며 예수를 붙잡아 왕으로 삼으려 했던 군중들의 손을 피해 스스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갔던 갈릴리 사람을 생각하며, 피 흘림의 현장에서 고통당하는 그의 신음 소리를 듣는다.


전쟁의 포화 속에 함께 유린당할 생태계를 슬퍼한다. 하루 속히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 피조계가 회복되고 온 인류의 상류 물 근원이 맑아지기를 희망한다. 완악한 종교인들을 향해 광야에서 외치던 세례 요한의 목소리가 이 시대에도 필요하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

[정진호] 선악과와 무감독 시험 – 그 원죄의 현장

치유와 회복의 신학


선악과와 무감독 시험 – 그 원죄의 현장


(1)


복음이 들어가기 전에 학생들의 마음 토양을 준비하기 위한 밭갈이 과목으로 <과학사>를 가르친다. 이 과목을 통해 서양 문명에 대해 상식이 부족한 중국 학생들을 일깨우고 더러는 충격을 준다. ‘아담에게 배꼽이 있었겠는가?’ 라는 첫 리포트에 아이들은 당황하기 시작한다. 도무지 아담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보는 학생들이 태반이다.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문화 비교, 로마제국의 흥망과 기독교의 전파, 중세 스콜라 철학,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 과학혁명 그리고 진화론에 이르기까지 가르쳐 나간다. 그러다 보면 학기 초에 굳게 닫혔던 학생들의 마음과 생각이 열리면서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하고 나중에는 심각한 혼란에 빠져들기까지 한다. 20여 년간 자신들이 지녀왔던 세계관이 허물어져 내리는 아픔 속에서 어떤 학생들은 리포트 빼곡히 자신의 하소연을 적어서 내기도 한다. 더러는 ‘요즘 잠을 이룰 수 없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진리입니까?’ 하는 절규가 담긴 글도 있다.


그러나 과학사 과목의 백미(白眉)는 역시 두 차례 치러지는 무감독 시험이다. 무감독 시험은 학생들에게 양심을 일깨우고 정직한 마음을 심어주기 위하여 실시하는 가장 좋은 훈련이다. 진화론과 유물론 교육에 철저히 물들어 있는 사회주의 학생들은 대체로 양심이 무뎌져 있어 죄의식에 둔감한 편이다. 더욱이 거세게 몰려드는 물질주의에 노출되어 있는 가난한 학생들이 장학금과 직결되어 있는 시험에서 자신의 양심을 지키는 것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들키지만 않으면 시험 부정행위를 하고도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예수를 믿는다는 학생들 중에도 그런 모습들이 종종 나타난다.


무감독 시험을 치르기 위해서는 철저한 사전 준비와 계획이 필요하다. 물론 세밀한 기도가 선행되어야 한다. 무감독 시험에 대한 경험과 이해가 전혀 없는 학생들에게 몇 주 전부터 정직성에 대한 교육을 실시한다. 감독이 있어도 어떻게든 치팅을 하려는 학생들에게 무감독 시험이라는 말은 너무나 생소한 느낌일 뿐이다. 학생들에게 정직의 중요성에 관한 예화를 들려주고 더러는 정직 서약까지 받은 후 시험을 치른다. 그러나 매년 끝까지 양심을 지켜내는 학생들은 삼분의 일에 불과하다. 다른 삼분의 일은 양심을 지키려고 싸우다가 마지막에 무너지는 학생들이고 나머지 삼분의 일은 물을 만난 듯이 처음부터 작심하고 베껴내는 학생들이다. 촘촘히 앉은 계단강의실에서 손만 뻗으면 잡히는 교과서와 강의 노트, 그리고 눈만 돌리면 보이는 옆 사람의 시험지를 외면하고, 더구나 다른 학생들의 부정행위 장면을 목격하면서 자신의 양심을 지켜내는 일은 한 바탕 전쟁을 치르는 일보다 어렵다. 바로 그들이 이제 나아가 싸워야할 세상 속에서의 영적 육적 전투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돌을 떡으로 바꾸라는 속삭임이 확성기처럼 시험 시간 내내 그들을 괴롭히는 것이다.


학생들이 제출한 시험지를 가지고 와서 채점을 하는 동안 그들의 병든 양심과 인격을 대면하며 사투를 벌인다. 보통 100여명의 수강생이 시험지 두 세 장에 가득 채워 제출한 논술형 답안지를 읽어보려면 일주일은 족히 걸리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 답안지는 그들이 살아온 병든 환경과 영적 상태뿐 아니라 앞으로 치유의 가능성까지 전부 담고 있는 병리 기록이기에 어느 한 장도 소홀히 다룰 수 없다. 특별히 무감독 시험의 성공 여부와 자신의 소감을 적으라는 마지막 문제의 답안에는 그들이 시험 시간에 겪었던 심각한 영적 전쟁의 상처들이 그대로 드러나게 된다. 특별히 감동과 충격을 주는 눈에 띠는 답안지들을 골라낸 후 그 다음 시간에 들고 들어가서 학생들에게 읽어준다. 내가 읽다가도 목이 매여서 읽기가 힘들만큼 적나라한 자기 고백과 회개의 글들이 튀어나온다. 일단 그 시간에 학생들은 심리적인 충격을 받고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한다. 그리고 옛날이야기 식으로 각색한 <두 아들 이야기> 즉, 돌아온 탕자 이야기를 해준다. 그러면 강퍅했던 아이들의 마음까지 대부분 허물어져 내린다. 양심을 지켰다고 자부하며 스스로 교만해져 있던 학생들조차 함께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시험지를 나누어주고 자신의 답안지를 스스로 양심 채점을 하여 점수를 정정토록 한다. 이 때가 되면 대다수의 학생들은 일시적이나마(?) 자신의 양심을 회복하게 된다. 물론 그들의 인생 속에서 또다시 실족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양심 회복에 대한 충격적인 이 체험은 영원히 잊지 못한다. 그리고 비로소 자기 안에 감추어져 있던 죄의 본질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죄에 대한 자각을 이끌어내는 것… 이것이 무감독 시험에서 얻게 되는 가장 큰 수확이다.


회개하고 돌아온 학생들에게는 양심을 되찾은 자유함으로 기쁨이 넘쳐흐른다. 그러나 그 가운데도 끝까지 양심을 속이며 자신의 불의한 이익을 챙기려는 학생들도 일부 남기 마련이다. 그들에 대해 화가 나고 안타까움이 끓어오르다가도 그냥 내버려둔다. 그들은 이미 자신이 선택한 길에서 심판과 벌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2)


어째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선악과의 시험을 주셨을까?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을 것을 다 알고 계셨을 텐데 왜 그런 시험을 통해 문제를 어렵게 만들었는가?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사람은 선과 악도 분별할 줄 모르는 무지한 상태에 있었는가?
선악과란 도대체 어떤 과일인가? 사과인가? 복숭아인가? 아니면 눈을 밝혀주는 신비한 묘약인가?


창세기 공부를 시작하자마자 넘어야 하는 첫 고개는 두말할 것도 없이 선악과의 준령이다. 말씀에 대해 반감을 지닌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어느 정도 신앙을 지닌 사람들조차도 선악과 문제만 나오면 쉽게 답변키 힘든 여러 가지 질문들을 퍼붓곤 한다.


무감독 시험을 치를 때마다 선악과는 하나님이 인간들을 향해 베푸신 일종의 무감독 시험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물론 선악과 시험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유익을 주기 위한 테스트(test)이지 아담과 하와를 걸려 넘어지게 하기 위해 일부러 처 놓은 덫으로서의 시험(temptation)이 아니다. 좋은 선생이라면 학생들을 위하는 마음으로 시험문제를 내는 것이 당연한 것과 마찬가지다.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표현된 가장 아름답고 완벽했던 환경… 그 에덴동산 중앙에 놓여졌던 한 그루의 나무 선악과… 금단의 열매, 그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6-7)”


문제의 그 현장으로 가 보자.


에덴동산을 지구상에 실존하였던 그 어떤 곳으로 보든지… 아니면 피안(彼岸)의 세계를 그리기 위한 또 하나의 가상공간으로 보든지… 아무튼 좋다. 역사의 시작이 그와 같이 아름다운 모습이었다고 가정해 보자. 에덴동산에는 온통 순금과 같은 보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것은 에덴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한 은유임에 분명하다. 그만큼 완벽하게 아름다운 곳이었다는 뜻이다. 그 속에서 완전한 모습으로 창조된 두 남녀에 의해 펼쳐지는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역사가 그렇게만 될 수 있었다면… 설사 에덴 이야기가 후세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간절한 바람일지라도 말이다. 아무튼 그 가상공간으로 한번 들어가 보자.


가장 사람이 살기 좋게 설계된 자연 환경 속에서 벌거벗고도 부끄러움을 몰랐던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가 있었다. 왜 그들은 벌거벗고도 부끄럽지 않았을까? 아니, 왜 인간은 벌거벗으면 부끄러워하는 것일까? 왜 인간만이 옷을 입고 살아가는 존재일까? 모두 비슷한 질문이다.


부끄러움은 존재의 불완전성을 나타내는 한 단면이다. 그러하기에 옷은 도덕적으로 격하된 존재의 열등의식을 가리고자하는 도덕적 표현이다. 반대로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의 벌거벗음은 두 사람의 완전한 관계성을 나타내고 있다. 그들에게는 가릴만한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서로를 투명하게 들여다보며 살아가는 존재였다. 결국 에덴동산에서의 아담과 하와는 도덕적으로 완전성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도덕적 완전성이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그들이 살고 있던 동산 중앙에는 특별한 한 그루의 나무가 있었다. 동산의 모든 실과는 마음대로 따먹을 수 있도록 되어있었지만, 유독 그 나무의 열매만은 금지되어 있었다. 이름하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the tree of knowledge of good and evil)… 선악과(善惡果)였다.


자… 선악과 이야기만큼, 성경을 믿는 자들에게나 혹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회자(膾炙)되며 제각기 해석되고 더러는 공격을 당해온 이야기도 드물 것이다. 많은 문학 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고,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에게 인간의 본질을 논하기 위한 학문적 주제로서 일련의 통찰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분명 선악과 이야기는 인간이 지닌 선과 악의 양면성을 설명하기 위한 중요한 은유임에 틀림없다.


인간이 지닌 선한 속성은 타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던지기에 이르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이 악해지기 시작하면 오히려 금수가 행하지 못하는 마귀적 행동이 나오기도 하는 것이다. 깡패 집단이 동료를 죽인 후, 토막을 내고 그의 내장을 파서 나누어 먹은 후 매장했다는 엽기적 뉴스를 접하고 인간의 악함에 새삼 놀라지 않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그 뿐인가? 지난 세기를 붉게 물들였던 수많은 전쟁과 수용소 군도에서 벌어졌던 그 참혹한 역사의 다큐멘터리들을 우리는 물증으로 가지고 있다. 마약과 매춘이 행해지는 사회의 어두운 뒷골목에서, 매일 밤 벌어지고 있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행위들은 어떠한가?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그렇지 않았단 말인가? 그들은 한 점 부끄러운 얼룩도 없이 완전한 존재로 남아있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도덕적 완전성… 그것의 기준은 무엇인가?


2차 대전 당시 나치 독일에 항거하여 비교적(?)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살다가 옥사(獄死)한 독일의 신학자 본훼퍼는 그의 중요한 저서 <윤리학(Ethics)>에서 완전한 도덕의 기준을 가장 간단명료하게 제시하고 있다.1) 불완전한 인간에 의해 제시되는 어떤 기준도 완전성에 이를 수 없기에, 도덕의 기준은 완전한 신에 의해서만 제시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즉, 완전한 신이 존재한다면, 바로 그 신이 원하는 것이 선이요, 그 신이 원치 않는 것이 악이라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신이 원하는 것을 행하는 것이 곧 선이요, 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행하는 것이 곧 악이라는 것이다.


선악과… 그것은 신의 뜻을 알리고 인간의 반응을 기다리는 시금석이었다. 선악과가 상큼한 사과이었는지 신 포도였는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특별한 성분을 지닌 과일이어서 먹는 순간 신기한 반응이 일어나서 선악에 대해 무지했던 아담과 하와의 눈을 일깨움으로 선과 악을 알게 한 것은 더욱 아니다.


완전한 신은 그의 형상(the image of God)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도덕적으로 완전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들이 신의 뜻대로 살아가는 존재가 되기를 원하여 선악과의 화두(話頭)를 던진 것이다. 피조물인 인간에게 창조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살아가는 것이 그들의 도덕적 완전성을 지키는 길임을 알려주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도덕적으로 완전한 존재로 지음 받은 인간… 여기에는 적어도 두 가지 함의(含意)가 들어 있다. 첫째, 그는 신과의 완전한 관계성을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둘째, 그 관계성을 유지하기 위한 선택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선택의 자유가 없는 존재는 도덕적으로 아무런 책임이 없다. 다시 말하면, 도덕적인 존재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책임(responsibility)이라는 단어 자체가 도덕적 요구에 어떻게 반응(response)하는가 하는 능력(ability)을 나타내는 말이다. 아담과 하와가 도덕적 존재였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신의 도덕적 요구조건을 지킬 수도 혹은 어길 수도 있는… 즉, 선악과를 따먹을 수도 혹은 따먹지 않을 수도 있는 완전한 자유가 주어진 존재였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신의 뜻은 그들이 선악과를 따먹지 않는 것이었다. 왜? 그들이 도덕적 완전성을 지니고 살아가기를 바랐기 때문에… 즉, 신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그들의 완전한 도덕을 유지하는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곧 인생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선택이었다.


선악과는 그 자체가 아담과 하와에게는 선과 악의 갈림길을 알려주는 이정표였다. 그 갈림길에서 그들은 불순종의 길을 택했다. 하나님이 원하는 길보다는 자신의 길, 인간의 길, 악마가 유혹하는 길…, 결국은 죽음의 길을 택했던 것이다.


(3)


(L학생) 무감독 시험_ 내 인생의 첫 양심 측정_ 감동과 뼈저림_ 교수님 뭐라 할까요? 느낌이 너무너무 복잡합니다. 내가 무감독 시험에서 양심을 지켜냈다는 뿌듯함과 그 성적에 대한 실망감… 사실은 시험을 치를 때는 많이 갈등을 했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무감독 시험… 너무 새로운 느낌을 저희에게 부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시험을 통하여 나는 만족한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자신에 대해 신심이 생겼습니다. 예전에는 단순한 학교생활을 하다가 복잡한 사회에 들어가면 내가 어떻게 적응을 하고 자신을 지켜갈 수 있을지 많이 근심을 했었는데… 지금은 아닙니다. 이번 시험을 통해서 내 자신에 대해 알게 되었고 신심이 생겼습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는 것… 확실히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는 그 마음속으로부터 나오는 뿌듯함… 이것이 내 평생의 재산이 될 것 같습니다. 이제 세상 어디를 가도 두렵지 않습니다. 떳떳이 난 정직한 사람이라고 외칠 수 있기에… 교수님, 너무너무 고맙습니다. 교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어서 너무 감사합니다.


(H학생) 전번 시험 때에는 여러 가지 고려가 많았습니다. 보고 쓰려니 마음이 내키지 않고 보고 쓰지 않으려니 밑지는 것 같고, 결국에는 내 양심을 버리고 커닝을 하였습니다. 훌륭한 21세기의 리더를 키우는 우리대학의 과학사 중간고사에 커닝을 하였습니다. 리더가 갖추어야할 양심과 정직성은 나의 손과 눈에 의하여 여지없이 짓밟혔습니다. 커닝을 하면서 전혀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머리 속은 끊임없는 내부 전쟁을 하였고, 시험지에 꽉 적어놓은 답안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전혀 기쁘지 않았습니다. 지난 일주일을 힘들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오늘 너무도 민망하여 교수님의 얼굴을 도무지 쳐다볼 수 없었습니다. 교수님께서 읽으신 동학들의 글은 채찍이 되어 나의 마음을 후려쳤습니다. 숨을 쉬고 있는 것마저도 나에게는 그렇게 큰 부담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량심적으로 다시 채점하라는 말에 나는 내 인생의 1949년이 온 것만 같았습니다. 해방된 기분이었습니다. 성실하게 채점해보니 49점이었습니다. 무려 23점이나 감점이 되었지만 나의 정직을 찾았다는 기쁨이 더 컸습니다. 동학들의 뉘우침과 성실한 고백을 듣고 그렇게 열심히 양심 채점을 하는 동학들을 보면서 이번 무감독 시험이 성공적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잃었던 양심을 되찾고 정직의 중요성을 너무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으니까요. YUST의 신입생으로서 기둥이 되어야할 내가 YUST의 취지_ 정직을 잃을 뻔한 가슴 아픈 교훈… 영원히 잊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는 나의 성적을 위하여 량심을 버리는 일은 전혀 없을 것입니다. 량심을 되찾도록 이끌어주신 교수님, 정말로 감사합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B학생) 시험을 치를 때, 좌우에서 많은 학생의 소곤대는 소리와 책장 넘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걸 아니꼽게 생각하고 아직 어려서 그렇겠지 하고 생각했다. 내가 앉은자리는 앞에서 두 번째 자리이고 그 앞자리는 시험지를 제출하는 자리였다. 어떤 학생이 먼저 답안지를 놓고 나가자 옆자리에 앉은 한 학생이 천천히 일어나 그 답안지를 가져다가 보려고 했다. 참 민망하고 불쾌하여 그 애를 지적하고 말렸다. 내가 마음 아팠던 것은 부정행위를 하는 그 친구들보다도 이미 제출한 시험지를 가져다 봐도 용납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주위환경 때문이었다. 어지러운 세상 환경을 보는 것 같았다. 다음 시간은 시험 문제를 다시 정리하는 시간이었다. 특별히 무감독 시험에 동의하는가 하는 문제를 놓고 교수님은 많은 학생들의 생각을 읽어주셨다. 반대하는, 찬성하는 여러 친구들의 시험지에 남겨진 마음들을 읽으면서 나에게 새로운 감동이 왔다. 다만 부정행위를 하는 애들이 틀렸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던 나에게 그들의 내면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안간힘을 쓰며 죄와 싸우려는 선한 마음들, 하지만 마지막에 대부분 넘어지는 모습들, 넘어지면서도 정직을 향해 외치는 모습…. 너무나 가슴이 뭉클했다. 내 마음과 눈에서 눈물이 나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들의 마음을 몰라주고 있었다. 그저 틀리다고 원망했지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들과 함께 부둥켜안고 울고 싶다. 아픈 마음을 찾아서 위로하고 어루만지고 선한 마음을 찾아서 같이 나서고 싶다. 교수님은 집 떠난 탕자와 남아있던 큰아들 이야기를 했다. 다시 돌아온 탕자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다. 나도 돌아온 탕자였다. 그러나 어느새 큰아들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이제 그 마음이 깨끗이 없어지기를 바란다. 항상 회개한 탕자의 마음으로 살고 싶다. 교수님께서 학생들의 마음을 읽어주시는 동안 나는 친구들의 선한 마음들과 만났다. 혹시 내 옆에, 내 뒤에 그런 친구가 있을까 하여 둘러보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그런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너무나 어두운 세상에 가려서 그저 무관심하고 삐지고 생각 없는 얼굴들이다. 그러나 그 속에 선한 마음들이 감추어져 있을 것이다. 이번 무감독 시험은 성공했다. 한 사람이라도 선한 양심으로 돌아왔다면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정직히 이 시험을 치러낸 친구들한테는 격려의 박수를 보내주고 싶다.

[정진호] 월미도와 이승복

회복과 치유의 신학 – 내 아버지의 뜻


월미도와 이승복


(1)


지난 9월 16일은 연변과학기술대학이 세워진 10주년 기념일이었다. 황량한 북산가 언덕 무덤가에 첫 삽을 뜨고 기초를 놓기 시작한 이래 숱한 고난과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제 어엿한 신흥명문(?)대학의 모습으로 발돋움하였다. 1992년 첫 해에 대학이 세워지기도 전에 마음이 급하여 부설 산업기술훈련원생을 먼저 모집하였었다. 93년 4년제 대학으로 학생을 받을 때만 해도 다른 대학에서 떨어져 오갈 데 없는 학생들을 받아 시작한 무명의 사립대학이었다. 그러나 10년 만에 연변과기대는 동북 3성에 있는 조선족들의 희망이 되었고 해가 갈수록 우수한 학생들이 앞 다투어 입학을 하고 있다. 이제 재학생이 1,500명을 넘어섰고, 2,000명에 가까운 졸업생들이 중국 전역에 흩어져 씨를 뿌리고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날 나는 10주년 행사를 돕기 위해 서울서 합류한 16명의 부흥한국팀(Revival Korea)과 더불어 백두산 천지에 올랐다. 구름 한 점 없는 드문 날씨 속에서 청아하게 모습을 드러낸 초가을의 천지는 태초의 신비 그 자체였다. 그 장엄한 창조의 위용 앞에서 우리는 백두산 정상에 서서 조용한 기도와 찬송으로 내일의 부흥을 위한 영적 조율을 먼저 맞추었다. <한라에서 백두까지, 백두에서 땅끝까지…>라는 타이틀의 부흥 3집을 제작하던 도중에 오른 백두산 정상이었기에 부흥팀에게는 더욱 큰 의미가 있는 산행이었다.


17일 저녁 야외 무대로 펼쳐진 기념 <열린 음악회>에서, 지난 10년을 회고하며 3,000여명의 청중들이 운동장에 운집한 가운데 고형원, 이무하 가수(?)를 앞세운 부흥팀의 기념비적인 만주 공연이 펼쳐졌다. 그들이 만주 벌판에서 목 터져라 외쳐 부른 노래는 대부분 가요였다. 그것은 그들에게도 매우 특별한 경험이었고, 사역의 지경을 넓히는 새로운 시도가 되었다. 무대 앞줄에는 공산당 영도들이 줄지어 앉아서 그들의 노래를 예의 주시하며 지켜보고 있었다. 그 전날에는 이미 가사 검열이 진행되었고 우리는 행여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는 부분에서는 가사들을 건전하게(?)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장장 3시간에 걸친 그 음악회를 감독하고 연출하기 위해 우리 부부는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으로 무대 앞 진행본부에 앉아 있었다. 그것은 실로 보이지 않는 전쟁이었다.


(2)


이곳 만주에서 일하는 동안 종종 내가 있는 이곳이 바로 우리 민족 근대사의 격전지였음을 새삼 체감하게 될 때가 있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우고 알았던 독립운동의 본거지와 역사 유적지들이 바로 인접지역에 흩어져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김좌진의 청산리 전투와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 격전지가 바로 이웃한 화룡현에 있고, 그들이 근거지로 활동했던 북로군정서가 위치하던 곳이 연길에서 두 시간 남짓한 왕청현이다. 그러니, 이곳 조선족들의 가계를 들추어보면 바로 항일독립운동사와 우리 민족의 근대사의 피 어린 애환들이 스며들어 있기 마련이다.


KBS 역사 스페셜에서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에 세워졌던 신흥무관학교의 역사를 추적 방영하는 것을 보며 더욱 감회가 새로웠다. 1910년 만주로 건너간 이회영, 이동녕 등에 의해 교포교육과 군사훈련을 목적으로 길림성 류하현에 세웠던 신흥강습소가 나중에 통화현 합니하로 자리를 옮겨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위한 무관 양성학교로 변신하게 된다. 1920년 폐교될 때까지 10년간 무려 3,000명에 달하는 졸업생을 배출하였으며, 그들이 서로군정서와 북로군정서, 상해 임시정부와 의열단 활동 및 광복군에 이르기까지 해방 전 중국 내 독립운동의 주체세력을 이루었던 것이다.


잃어버린 나라의 독립을 위해 만주로 만주로 모여들었던 지난날의 우리 선조들.. 그들 가운데는 한성에서도 가장 이름을 날리던 대 부호 가문의 이회영, 이시영, 이석영… 6형제의 헌신이 있었고, 일본 육사 출신의 직업 군인으로서 당시의 출세 가도를 뿌리치고 3.1운동 직후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으로 후진 양성에 투신했던 지청천 같은 인물이 있었다. 그들의 손에 키워졌던 제자들이 무릇 3,000명이나 배출되었던 것이다. 그들이 바로 청산리와 봉오동 전투의 주인공들이었으며 광복군으로 마지막까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사람들이다. 훗날 역사에 알려져 독립운동가로 기록되고 또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던 사람들과는 달리 신흥 무관학교 출신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조국의 독립을 바라며 항일 전쟁의 전선에서 이름도 없이 사라져갔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더욱 뜨거워졌다.


그토록 바라던 광복을 이루었건만 국토는 허리가 잘리고 민족상잔의 잔인한 전화가 다시 한번 한반도에 몰아침으로 우리민족은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어야 했으며 또 피눈물을 흘려야만 했는지…. 그 이후 반세기 동안 한반도는 안타깝게도 동서 냉전의 최전선이 되고 말았다. 우리는 형제를 원수로 생각하며 서로의 가슴에 총칼을 겨누어야만 했으며, 그 비극은 21세기에 이른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새롭게 알게된 사실은 남북한의 싸움으로만 알았던 6.25 전쟁이 사실은 이곳 만주의 조선족들까지 직접적으로 깊이 관여한 3국 전쟁이었다는 것이었다.


얼마 전 이곳 작가협회 주석으로 있는 K시인과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그의 부친이 항미원조(抗美援助)전쟁(중국에서 6.25를 지칭하는 말)에 참여했던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중국 인민해방군으로서 명성을 날렸던 팔로군(八路軍) 소속의 군인으로 장개석 군대를 몰아내기 위해 남방의 해남도 최전선까지 배치되었던 그의 부친은 1949년 말 겨울, 갑작스런 상관의 지시로 기차에 올라 어디론가 하염없이 끌려가게 된다. 그가 내린 곳은 뜻밖에 귀에 익은 조선 말씨가 들리는 북한 땅이었고 그는 중공군에서 인민군 장교의 군복으로 갈아입게 된다. 그와 같이 6.25가 발발하기 직전 북한으로 전격 배치된 팔로군은 1개 사단 병력이 넘었으며, 결국 파죽지세로 낙동강 전선까지 밀고 내려갔던 최전방 인민군들은 사실은 북한군인이 아니라 엄격하게 훈련받은 팔로군 정예부대 소속의 중국 조선족 군인들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인천 상륙작전 이후 유엔군이 북한으로 밀고 올라가자 중공군이 쳐들어와 1.4 후퇴를 하게 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중국 조선족 출신의 중공군은 처음부터 인민군 복장으로 6.25에 참전하였던 것이다. 그의 부친은 인천 전투에서 숱한 동료들의 시체를 남기고 결국 퇴각해야만 했던 눈물의 역사를 반추하며 죽는 날까지 아들에게 두고 두고 입으로 전해 주었던 것이다. 그 같은 사실을 알게되자 나는 다시 한번 역사의 회오리 속에서 영문도 모르고 전쟁에 참전해야했던 이곳 조선족들의 애환을 생각하며 더욱 뼈저린 아픔을 느껴야만 했다. 6.25의 민족상잔의 고통은 이곳 만주의 우리 조선족들에게까지 잊을 수도 씻을 수도 없는 아픈 상흔으로 남아있었던 것이다.


(3)


내가 처음 가르쳤던 1회 졸업생 중에서 한국의 고려대학교로 유학을 갔던 한 여학생이 있었다. 언젠가 유학생들을 모아 수련회를 하는데…, 그 여학생이 앞에 나와 처음 한국에 와서 자신이 겪었던 정신적 혼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자기는 유학이 결정된 이후, 마음 속으로 한국에 도착하면 꼭 한번 먼저 가보고 싶은 곳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도착한 첫 주말 부랴 부랴 길을 물어 신기한 전철을 타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곳을 향했다. 그녀가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인천 앞 바다의 “월미도”였다. 무엇이 이 여학생을 그곳까지 이끌고 왔을까? 나는 처음에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곧 그녀의 어린 추억을 들으며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녀는 소학교 시절 어느 날 학교에서 단체로 애국주의 영화를 관람하게 되었다. 그 영화의 제목이 월미도였다. 항미 원조전쟁 시, 인천 앞바다에서 악랄한 미 제국주의 항공기가 폭탄을 비 뿌리듯 쏟아 붓는 가운데 끝까지 사투를 벌이던 인민군 장교의 장렬한 최후를 보며 그 어린 소녀는 너무나 안타깝고 속이 상해서 엉엉 울어버리고 말았던 그 생생한 기억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말로만 듣고 교과서에서 배웠던 인천의 월미도는 그녀가 성장하는 동안에도 잊혀지지 않고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다가 마침내 한국 땅을 밟는 그 순간 그녀의 발길을 그 곳까지 이끌고 왔던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월미도에서 두 가지 사실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고 만다. 첫째는 영화에서 나왔던 그 비참하고 끔찍했던 전쟁터가 이토록 놀랍게 발전한 현대식 거리로 바뀌어졌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이었고, 둘째는 자신들이 그토록 미워하며 증오하던 미국 군대의 괴수 맥아더의 동상이 월미도에 세워져 있는 것을 보게 된 사실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한국인의 대다수가 맥아더 장군을 가장 존경하는 위인 중의 한 사람으로 꼽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그녀는 큰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도대체 그러면 지금까지 내가 알고 믿고 또 증오하던 그 실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이 한국 생활을 시작하는 그녀 앞에 던져진 첫 번째 질문이 되었다.


우리 역시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를 외치며 죽어갔던 이승복 어린이를 교과서에서 배우며 더러는 눈물지었던 세대였다. 죽어가면서까지 ‘공산당이 싫어요’를 외치던 애국소년 이승복의 입을 찢어 죽였다는 그 잔인한 공산당 간첩들이 미워서 치를 떨었던 그 시절이 있었다. 그 세대가 바뀌어 요즘은, 이승복 어린이가 ‘공산당이 싫어요’ 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콩사탕이 싫어요.’라고 말한 것을 잘못 알아들었던 것이라는 유머 개그까지 등장할 정도로 세월은 변했다. 그리고 그 세월의 간격을 뛰어넘어 나는 이곳 중국 공산주의 국가에서 공산당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앞에 놓인 이 간격…. <월미도와 이승복>의 간격을 어떻게 메워야만 할까? 그 세월의 아픔과 거짓과 미움과 허위들을 우리 모두의 마음에서 지우기 위하여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축제의 밤이 무르익어 가고 음악회가 절정에 이르렀을 무렵에, 부흥팀이 기도하고 준비한 노래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 동안 음악시간을 통해 아내가 가르치고 또 아이들 속에서 퍼져나간 두 노래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과 <보리라>를 함께 부르며 우리 안에 감추어진 사랑과 비전의 마음들을 안타깝게 표현했다.



당신은 사랑받기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
태초부터 시작된 아름다운(수정가사임) 사랑은…


이 노래가 울려 퍼질 때 내가 들어온 대학이 어떤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신입생의 고백을 들었다. 그 사랑의 힘으로 저들의 상처를 싸매어 줄 수만 있다면….



우리 오늘 눈물로 한 알의 씨앗을 심는다.
꿈꿀 수 없어 무너진 가슴에 저들의 푸른 꿈 다시 돋아나도록
우리 함께 땀 흘려 소망의 길을 만든다.
내일로 가는 길을 찾지 못했던 저들 노래하며 달려갈 그 길….
그날에 우리 보리라. 새벽이슬 같은 저들 일어나
뜨거운 가슴 사랑의 손으로 이 땅 치유하며 행진할 때….
오래 황폐하였던 이 땅 어디서나 순결한 꽃들 피어나고
푸른 의의 나무가 가득한 세상 우리 함께 보리라.


새로운 10년을 여는 비전 선언문이 낭독되면서 밤하늘을 아름다운 폭죽이 수놓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