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한상] 공동체 다시 들여다보기

이코스타 2004년 1월호

사방을 둘러보면, 각 모임마다 공동체성에 대한 관심과 열심이 있는 모습이 너무도 보기 좋은 요즘이다. 각처에서 열심을 내고 있는 각 소그룹들을 중심으로, 각 지역교회는 순모임, 셀모임, 혹은 가정교회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이 세우신 건강한 공동체를 세워가고 있는 모습이 너무도 아름답다. 이런 흐름 속에서, 우리가 가진 공동체에 대한 생각을 점검해 보고, 건강한 공동체의 모습을 살펴보는 것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1. ‘공동체’에 대한 왜곡된 인식


성경에서 우리는 자신의 몸을 내어 주시고 피로 사신 사람들을 함께 모으시고, 그들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 된다. 하지만, 이 모임을 나타내는 단어인 ‘교회’혹은 ‘공동체’두 가지 모두 어느 정도 왜곡되어 사용되어 왔기에, 진정한 의미의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을 표현하기가 쉽지 않다.


‘교회’라는 단어를 들으면, 안수 받은 목사를 중심으로 한 지역교회 혹은 조직교회를 바로 떠올리게 되는데, 그런 오해는 ‘성경적인 교회’를 바르게 이해하는데 심각한 오류를 일으키게 된다. 마찬가지로,‘공동체’라는 말을 들을 때는, 적어도 한국 교회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극단적인 반응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하나는 공동생활을 하며 열심 있는 신앙생활을 하지만, 늘 말썽만 일으키는 이단들을 떠올리거나, 혹은 ‘청년 공동체’, ‘찬양모임 공동체’와 같은 모임을 나타내는 이름 정도로 피상적인 동아리 수준의 모임을 떠올리기도 한다.


2. 공동체의 참 의미를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


그렇다면, 이런 단어에 대한 왜곡된 개념이 왜 생기게 되었는가를 살펴보자. 언어는 많은 경우에 사고의 반영이고, 그 근원을 바로 찾을 수 있다면, 문제의 원인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1) 공동체 자체가 개혁의 대상이었다.
로마 카톨릭을 영적으로 끌어 온 것은 교황이 아니라, 수도원을 중심으로 한 공동 생활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불행히도, 수도원 자체가 종교 개혁의 직접적 대상이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 하다. 종교 개혁 당시, 수도원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립하기 위한 공동 생활이라는 원칙을 버리고, 부패의 온상이 되 버렸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안위를 위한 이익집단이 되어 버렸고, 성적인 타락도 이미 수위를 넘어서 버린 수도원 공동체를 보면서, 종교 개혁자들은 ‘공동체’라는 말을 강조 하기가 무척이나 힘들었을 것이다. 마치, 성찬을 행할 때, 사제의 축사로 빵과 포도주가 물리적으로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고 가르쳤고 (화체설), 또 그 성찬에 참예하지 못하면 죄사함이 없다고 가르쳤던 카톨릭의 의식 때문에, 지금까지도 성찬을 통해 공동체적인 예배를 드린다는 점을 강조하지 못하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하겠다.


(2) 이단들이 공동체였다.
교회사에 나타난 이단들의 많은 경우가 공동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점도, 공동체에 대한 그릇된 의식을 심는데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예수님의 재림 날짜를 정해 놓고 기다린다던가, 집단 자살을 하는 경우, 그들 대부분은 공동생활을 하고 있었다. 급기야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를 강조하는 사람들 자체를 ‘혹시?’하는 눈으로 쳐다보는 상황에 까지 이르렀다.


(3) 공동체를 표현하는 단어가 오용되었다.
얼마 전 소천하신 대천덕 신부님께서는, 한국교회에서 진정한 코이노니아가 사라져 가는 이유로 단어를 잘못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셨다. 예를 들면, 에클레시아를 표기할 때, ‘가르칠 교(敎)’를 사용하는 교회(敎會)가 아니라, ‘사귈 교(交)’로 사용하여 교회(交會)라고 쓰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하셨다. 물론 교회가 말씀을 가르치는 곳이기도 하지만, 그 전에 성도가 함께 모여 성도 안에서 코이노니아를 이루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축도 시에 사용하는 ‘교통’이라는 단어의 왜곡이다. 예배 시간 마지막에 행해지는 축도는,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기도 의식이라기 보다는, 그 공동체의 리더가 그 모임의 구성원들을 축복하는 의식이라는 점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현재 가장 흔히 사용되는 축도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13장 13절로써,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구성원들에게 예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성령님의 교통하심을 바랐던 축복의 선언이었다. 하지만, 현재 사용되는 축도를 잘 들어보면, 예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은 대체로 바로 사용되는 반면, 성령님의 ‘교통하심’은 ‘성령의 감화 감동하심’ 혹은 ‘성령님의 인도하심’등으로 바뀌어 오용되고 있다. 다일 공동체 교회의 최일도 목사님은 그의 강의(‘아름다운 교회찾기’ 1강)에서, 이 점을 강조하면서, ‘성령이 교통하심이 자주 다른 말로 대체되는 것으로 대변되듯이 한국 교회의 공동체성 상실이 심각하다’고 하신 말은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4) 지나친 가족 중심의 사역
불과 10여년 전만 해도, 사역 때문에 가족을 소홀히 하셨다는 비난을 받는 권사님 혹은 집사님들을 어렵지 않게 만나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가족 중심의 사역의 바람은 ‘아버지 학교’, ‘행복한 가정 세미나’, ‘부부생활 세미나’등의 형태로 불기 시작했고, 이제는 목회자들도 ‘첫째는 하나님, 둘째는 가정, 세째는 교회’라고 당당히 외치게 되었다. 이런 가족 중심의 사역들이, 하나님께서 직접 세우신 가정의 바른 위치를 찾게 해주었다는 긍정적인 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면에서, 이제는 더 지나쳐 자기 가족만을 위하는 위험 수위에까지 이르지 않았나 하는 우려가 든다. 더구나 세상에 유행하고 있는 집단 이기주의와 맞물리면서, 가족 때문에 그보다 더 중요할 수 있는 교회 공동체에서의 역할을 포기하고, 또 그것을 ‘가족 중심 사역’이라는 말로 합리화하고 있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교회 공동체의 리더를 조차도, 가족의 사생활이 침해된다는 이유로, 집을 오픈하고 삶을 나누는 것을 꺼려하는 것도 이런 가족 중심 사역의 왜곡된 결과가 아닌가 싶다.


(5) 치유사역의 결과로 부딪힘을 두려워 함
가족 중심 사역과 더불어, 20세기말 기독교를 강타한 기독교의 심리학적인 접근, 즉 치유사역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각자가 가진 ‘쓴 뿌리’혹은 ‘상처’를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강조하고, 또 그 손길을 체험함으로써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데 방해가 되는 장애물들을 제거하고 더 나아가 사람들과의 더 깊은 교제 속으로 들어가게 하려는 이 시도는 분명 우리들의 삶에 좋은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지나치면 문제가 되는 법. 치유 사역이 장기화됨에 따라, 사람들은 이제 ‘쓴 뿌리’를 가지게 되거나, ‘상처’를 입게 되는 것을 너무도 두려워 하게 되었다. 물론 치유 사역에 대한 바르지 못한 이해로 인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로 인해, 구성원끼리 교제하고, 부대끼고, 또 그 문제를 통해 상호 성장케 하시는 하나님의 통로인 공동체 자체를 꺼리게까지 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괜히 사람들하고 부딪히고 상처 받느니, 적절하게 신앙 생활하는 게 더 나아’라는 말을 얼마나 자주 들을 수 있는가.


(6) 공동체를 경험한 참 목자가 드물다.
한 사람이 결심하고, 시험을 통해 학교에 입학한다. 소정의 수업과정을 마치면, 학위를 주고, 그 사람이 한 모임의 리더로 임명된다. 그리고 이 사람은 그 모임을 효과적으로 운영하고 이끌어 간다. 우리는 이런 모습에 너무도 익숙하다. 하지만, 하나님의 공동체에서의 리더는 다른 점이 요구된다. 바로 양을 치는‘목자’라는 것이다. 자신이 기르는 양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참 목자를 요구한다. 조직 교회가 공동체성을 외치면서도 공허한 외침으로 끝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여기에 있다. 조직교회의 리더인 목회자가, 많은 경우에 있어, 양을 돌보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과정 속에서 성립된 리더십이 아닐 뿐만 아니라 – 즉, 양들도 그들을 목자로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 그들 스스로도 양으로써 목자의 돌봄을 받아본 경험조차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비단 조직교회의 문제만은 아니지만, 각 지역 교회 리더들의 공동체에 대한 이해와 경험 부족은, 공동체에 대한 왜곡된 인식의 심각한 원인이 되어 왔다. 더구나, 교회의 리더를 배출하는 신학교 자체가 경쟁구도로만 되어 있을 뿐, 공동체를 경험할 수 없게 되어있다는 점도, 한국교회의 공동체성을 약화시키는 이유라고 대천덕 신부님은 지적하셨다.


(7) 좌절을 통해 적절한 수준으로 기대치를 낮추어 버렸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른 삶을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누구나, 초대교회와 같은 공동체의 회복에 대해 한번쯤은 고민하고 노력해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이상과 상당한 거리가 있어서, 늘 좌절과 실패만을 맛보게 되고, 또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이제는 기대치 자체를 낮추어 버린 듯 하다. ‘성경에서 말하는 공동체는 결국 이상이야.’라고 생각하며, 남들 보다 조금 더 잘 모이는 수준의 단체를 ‘공동체’라고 착각하고 만족하고 사는 경향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우리의 수준이 안된다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준이 바뀌는 건 아니라는 걸 너무도 잘 알면서도, 우리는 공동체에 관해서는 왜 이리도 넓은 마음을 가져왔는지 모르겠다.


3. 공동체의 성경적 의미


그렇다면, 성경에서 공동체가 왜 그토록 중요하며, 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간략하게 살펴보자.


(1) 하나님은 자체로 공동체셨다.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세상의 어떤 신으로 묘사된 존재도 세분이 완전히 하나되는 공동체성을 지닌 모습은 없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서로 높고 낮음도 없고, 불일치도 없으며, 분리됨도 없으신 완전한 공동체를 이루신다. 하나님의 속성 그 자체가 공동체이기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신 인간에게도 동일한 공동체성이 존재하게 된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모두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단 한가지 좋지 못하다고 하신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었다. 완전한 공동체이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혼자 있는 아담의 모습은 당연히 좋지 않게 보이셨고, 그로 인해, 하와를 창조 하심으로써 인간 공동체의 시작인 가정을 시작하셨다.


(2) 하나님은 공동체로 역사를 이끌어 오신다. (신인공동체)
아담과 하와로 대표되는 인간과 하나님은 그 자체로 하나되는 ‘신인(神人) 공동체’였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가 인간의 원하는 바요, 인간이 바라는 바가 하나님의 마음인 완전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되기를 자처하며 죄를 짐으로써, 그 신인공동체는 깨지게 되었다. 인간이 하나님으로 부터 분리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인간이 이루는 신인공동체는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요한계시록 21장에서 보여 주시듯이, 하나님은 새하늘과 새땅에서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함으로 새롭고 영원한 신인공동체가 완성될 것을 약속하셨다 (계21:1-3). 이 완성된 공동체는 그 구성원들이 죄가 없고, 또 죄를 지을 내적 요소가 없기에 절대로 파괴될 수 없는, 또 눈물이나 사망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은 영원한 신인공동체이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 깨어졌지만, 종말에 다시 완성하시겠다는 공동체, 즉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되는 신인 공동체를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다시 인간들의 공동체를 사용해 오셨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공동체와 옛언약을 맺으셔서 이끌어 오셨고,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사건 이후에는, 그의 피로 사신 공동체를 통해 일하시고 계시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공동체 추천 도서를 참조하기 바란다.)


(3) 예수님의 유언 (요 17장)
지상명령으로 알려진 마태복음 28:18 20이 예수님의 승천 직전에 주신 유언으로 큰 의미가 있다면,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에 하신 중보 기도인 실제적인 유언으로써 또 다른 의미를 가진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여 주십시오.”(요 17:18).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자신을 믿는 길을, 교회 공동체가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즉, 개개인을 통한 사역을 넘어, 믿는 자들의 연합을 통해 일하시려는 예수님의 뜻을 잘 알 수 있는 구절이다.


4. 공동체에 대한 인식의 전환


(1) 지금은 공동체의 시대이다.(에클레시아)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지금은 하나님께서 에클레시아를 통해 일하시는 시대이다. 각자 개인과 하나님의 관계성이 중요한 만큼이나, 그 하나님의 백성들이 교제 또한 너무도 필요함을 인식해야 한다.


(2) 공동체는 선택이 아니다. – 내가 공동체를 위해 죽는다.
‘왜 꼭 교회에 나가야 하나요?’라는 질문에 대한 가장 전형적인 대답은, 장작의 비유가 아닌가 싶다. 즉 장작 하나를 따로 떼어 놓으면 곧 꺼질 수 밖에 없으니, 장작 더미인 모임에 참석해야만 한다는 논리이다. 하지만, 성경적인 공동체의 모습은 이것보다 훨씬 강하다. 다시 말해, 홀로 있는 장작은 오래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홀로 있는 장작은 그 모습조차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 나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성이 가장 중요하지만, 그 관계성 자체가 공동체를 통하지 않고는 바르게 형성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성경의 가르침이다.


(3)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공동체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그 모임을 통해 받게 될 상처, 간섭, 혹은 후유증 등 때문이리라. 하지만, 본 회퍼의 말대로, 사람에게 철저하게 실망한 바로 그 자리에, 비로소 하나님께서 자신의 공동체를 시작하신다는 말을 기억 해야겠다. 우리는 죄된 본성을 지닌 인간들이기에, 그 사람들의 만남 속에서 부딪힐 수 밖에 없다. 마음을 열면 열 수록 더 그렇다. 하지만, 그것이 두려워서 공동체 자체를 포기할 수는 없다. 우리가 너무 연약하여,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고 쓰러진다고 해서, 포기해야 하는가? 절대 아니다. 결코 완전한 순종의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쓰러지면 일어나고 한걸음씩 전진해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공동체도, 우리가 쓰러진 그 곳에서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며 앞으로 조금씩 나아가야만 한다. 너무 힘들어 포기하고 싶은 때라도.


5. 공동체에 대한 초보적 대안


(1)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모토는 공동체의 회복을 의미
우리가 그토록 자주 드는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모토의 참 의미는, 초대교회와 같은 공동체성의 회복을 의미한다. 각 그룹의 소유까지 공유했던 실천 공동체인 초대교회! 자신이 속한 그룹에서 시간과 물질, 또 공간까지 기꺼이 나누며, 손해 본다고 생각하지 않는 실천의 삶이, 바른 공동체를 위한 첫 걸음일 것이다.


(2) 제자도를 실천하는 공동체
예전에는 열심이 있었다가, 최근에는 교회만 출석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아직도 자신이 좋은 크리스챤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하나님은 공동체를 통해 일하시기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공동체의 다른 지체들과의 부딪힘 없이는 내 자신을 바로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다른 지체들을 통하지 않고는 바른 훈련을 받을 수도 없다. 그래서, 각 공동체들도 이 점을 인식하고, 교제만 강조하거나 공부만을 강조하지 않는, 훈련 지향적인 방향성을 가지고 가야만 건강한 공동체의 모습을 가질 수 있으리라.


(3) 열려있지만, 또한 닫힌 공동체
공동체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최고의 고민은 공동체의 성격이 아닐까 싶다. 가족같은 공동체를 꿈꾸고 가자니, 외부 사람들에게는 자기들끼리의 모임으로 비춰져 다가가기 어렵게 되고, 또 외부인이 쉽게 접근하는 모임을 갖추자니, 내부의 결속이 떨어지는 점 말이다. 하지만, 우리의 눈으로 보기엔 양립할 수 없어 보이는, 이 두 가지 특징이 성령 안에서는 가능하리라 믿는다. 물론 그 구체적인 방안들은 계속 논의되고 있고, 또 우리고 계속 고민해야 할 문제이긴 하지만 말이다. ‘열려있지만, 닫힌 공동체’ –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이상적인 모습이어야만 한다.


(4) 기능 중심이 아닌 사람 중심의 공동체
한 모임은 그대로 놓아두면, 기능 중심으로 흘러가기 마련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렇게 하는 것이 쉽기 때문이다. 일 중심으로 사람을 배치하고, 또 일 중심으로 모임을 끌어가다 보면,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모임이 잘 흘러갈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람과의 관계성이다. 이 점은 모두 인지하지만, 놓치기 쉽기에 더 가슴에 담고 모임에 임해야만 한다.


(5) 실천적 행동에 의한 선교 중심지
늘 문제가 되는 것 중의 또 한가지는 공동체가 모여서 그것으로 끝나는 경우이다. 이런 모습을 많인 접한 사람의 경우는, 공동체가 필요 없다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하게 되고, 세상에 해야 할 우리의 사명만을 강조하기 쉽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바른 공동체의 모습은, 공동체를 중심으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실천적 공동체의 모습이다. 왜냐하면, 에클레시아의 시대를 사는 우리는 공동체의 삶이 없이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도 또 사역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흩어 버리는 교회가 아닌 스스로 흩어지는 공동체가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공동체의 모습이다.


(6) 작은 씨를 뿌리는 공동체의 개척자
본 적도 없고, 경험해 보지도 못한 일을 처음 시작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공동체를 경험해 본 리더가 드물다는 것은, 현재 공동체성의 부재 현상을 넘어서, 참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도 큰 걸림돌이 된다. 도대체 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혹은 무엇이 가장 중요하고 무엇을 피해야 하는지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늘 좋은 것으로 주시려고 함께 계시는 성령님이 함께 하신다. 그러므로, 현재의 상태에 적당히 만족하고 지내거나, 혹은 좌절하며 포기하고 있기 보다는, 도대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공동체의 모습이 무엇인지 계속 배워가며, 그 작은 일을 하나씩 실천해 나가는 프론티어의 길을 걸어가야만 하겠다.


하고픈 이야기는 많은데, 지면이 넉넉지 않아 아쉽다. 그래서 간략히 요점만 쓰다보니, 글이 딱딱해져 버린 점 양해해 주기 바란다. 이 글은 참고 도서 목록에 있는 글들을 많이 참고해서 쓰여졌다. 또한 부족한 한 유학생의 글이기에 틀린 점도 많으리라 생각한다. 애정 어린 질책과 충고를 기다리는 바이다. 또한 다른 의견도 많이 나누어 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김소연] 그 아무도 보는 이 없어도

유학생활 첫 한해 동안 거듭되는 실수를 통해 배운 교훈들이 이후의 삶에서 귀한 지침이 되어주고 있다.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유지되는 ‘아너 시스템(honor system)’이 지금은 편하지만 처음엔 생소했다. 대학원생을 동료 학자로 인정해주는 분위기도 내게는 어색했고, 자발적인 참여가 아니고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막막한 자유도 낯설었다. 그러나, 달라진 환경에 적응하려 애쓰면서, 좌충우돌 허점투성이의 말도 잘 못하는 이방인이 되어보고 나니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당신의 방법으로 사는 법을 조금씩 가르쳐주셨다. 생각할수록 참 감사한 일이다.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서 끊임없이 선택하고 계획하고 진행하고 책임져야 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일상사에서도 학업에서도 그런 일들의 연속이다. 그 안에서 오는 유혹도 만만치 않다. 이메일로 시험 문제를 받거나 문제지를 받으면 각자의 연구실에서 답안을 작성하고, 약속 시간 안에 담당교수의 이메일 계정으로 화일을 보낸다. 우편함이나 교수연구실 문 밑으로 답안을 넣어도 된다. 내 발로 먼저 찾아가 이야기하지 않으면 기말이 될 때까지 어느 누구도 무얼하고 있는지 간섭하지 않는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될 것 같은 좌절감도 맛보고, 그때마다 쉽게 가는 길이 자꾸만 눈에 보여 갈등도 한다. 시간관리에 소홀하다가 황급히 헤치우듯 써낸 페이퍼에는 본의 아닌 실수도 한다. 그런 자신의 모습이 너무 한심해보여 낙망도 한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되어 버린 상황에서 갈급한 마음에 눈물 뚝뚝 흘려가며 “큰 바위에 숨기시고 주 손으로 덮으시네” 찬송을 부른다. 그렇게 긴 시간 배워온 영어인데 말하는 것도 글쓰는 것도 왜 이리 더디고 어색한가. 한국어가 세계공용어가 아니라는 사실이 분하기까지 하다. 시간이 흘러 자기 연구분야에서 실력이 쌓이다보면 언어의 불편함에서 오는 의기소침한 마음이 극복 된다고 하지만, 당장은 큰 위로가 되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으니 꿈만 같다. 다른 나라 언어로 승부해야 하는 사회과학도들의 비애다.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낙망스런 현실에서 하나님 앞에 납작 엎드러지는 경험을 거듭거듭하며 나의 유학 첫해도 그렇게 훌쩍 지났다. 하지만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그 안에 숨겨진 하나님의 보화를 발견했던 것이다. 갑자기 이듬해에 우수한 학생이 된 것이 아니라,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님이 나와 함께하고 계시다는 사실때문에 마음이 평안해진 것이다. 먼 나라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특유의 한계 상황이야말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축복이었다. 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창12:1)”셨을까? 주님 말고는 부빌 언덕이 없는 외로운 광야의 삶을 살아 보아야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의 분량에 가까와 질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 때에 하나님은 당신만을 전심으로 신뢰하는 법을 알게 하신다. 어디에서나 형통하는 완전하신 하나님의 기준으로 사는 법도 배우게 하신다.


시험 답안이나 페이퍼를 쓸 때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성실성(authenticity)을 지키는 것이다. 학문적 정직성(academic honesty)에 대해 철저히 교육하지 않는 학문적 풍토에 길들여져 온 유학생들은 서구사회의 아카데미아에서 요구하는 기준을 종종 어기게 된다. 처음 주로 하는 실수는 자신의 문장으로 완전히 소화시키지도 못하고 다른 학자들의 아이디어를 여기저기 서툰 영어로 짜집기 하다가 끝나는 것이다. 그 다음엔, 읽을 때마다 인용할만한 아이디어들을 미리 꼼꼼하게 챙겨 놓지 않아서, 혹은 이 정도쯤이야 괜찮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에서 대충 마무리한 글들을 제출하게 된다. 이런 기억들은 상당히 오래 동안 부끄러움으로 남는다. 실제로, 글의 전거를 의심 받고 나서 마음의 상처가 남아 이후의 학업에 자신감을 잃는 이들도 보았다. 심한 경우, 적절한 인용 없이 표절한 답안때문에 학업을 중단하거나 학교를 옮기게 된 사례들도 있었다.


새로운 사회에서 살아 남기 위해 본능적으로 인간은 그 곳에서 통용되는 규칙을 습득한다. 내가 가진 생각과 주류의 생각이 달라보일 때 내가 바꿔야 한다는 것도 배운다. 그런데 그 규칙이란 것이 나라마다 사회마다 많이 다르다. 다른 나라 학생들과 이야기해보면 부정행위의 기준조차도 퍽 상이하다. 가는 곳마다 시대마다 달라지는 상대적인 가치관과 기준들을 묵상해보면 마치 움직이는 표적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의 삶은 혼란스럽게 moving target 을 따라다니며 살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무어라 말씀하시는가 성경 안에서 찾아보면 되기 때문이다.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롬13:1).” 사회의 법이 지적재산권을 존중하자고 한다면 철저히 따르는 것이 옳다. 또 이렇게 말씀하신다. “모든 일에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빌2:14-15).” 당신의 자녀가 세상의 빛이 되길 원하시는 하나님은 그 어떤 원칙보다 뛰어난 기준을 우리에게 주셨다. 혼란 속에 있다면,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흔들림 없는 기준점(fixed point)을 말씀 안에서 찾아보자.


말씀은 우리 마음을 일분 일초도 쉼 없이 감찰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눈을 생각하라 하신다. 우리가 의식해야 할 것은 교수님들의 눈도, 교수님이 돌리는 소프트 웨어의 감시도, 경쟁하는 동료 학생들의 눈도 아니다. 내가 열심을 다하여 수고하고 있는 그 일이 하나님 앞에 모두 무익한 것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 내면의 자아가 온갖 사회적 상과 벌들에 마음을 빼앗긴 채 노예처럼 길들여져 오지는 않았는지 돌아보자. 불타는 시기 질투로 동생을 죽여 놓고 딴전을 피우고 있던 인류 최초의 살인자 가인을 그분의 눈이 보고 계셨던 것 처럼, 여주인 사라의 학대로부터 도망하여 광야에 이르러 낙망하고 서있던 하갈을 그 눈이 보고 계셨던 것 처럼, 오늘 나의 모습을 그 눈이 보고 계신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 찌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 찌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찌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시139:7-10).” 다윗도 이렇게 하나님의 눈이 언제 어디서나 우릴 향하고 계시다고 고백하고 있지 않은가. 그분의 눈은 우리가 저지르는 잘못 때문에 우리를 떠나지도 않으신다. 이토록 끈질기게 우리를 찾으시는 것은 하나뿐인 아들을 대신 내어 줄 만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보디발의 아내로부터의 유혹을 물리친 요셉의 이야기에서 보다 실천적 지혜를 얻어보자. “나의 주인이 가중 제반 소유를 간섭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임하였으니 이 집에는 나보다 큰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 하리이까 (8-9절).” ‘꿈꾸는 사람’ 요셉이었지만, 현재의 삶 속에서 보여주는 그의 현명함과 순결함은 더욱 돋보인다. 사실 이런 결단은 굳이 하나님을 모른다 해도 도덕성이 투철하거나 자존심 강한 젊은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이라 말할 이도 있을 것이다. 자기의 의(self-righteousness)에 금이 가는 것이 정말 싫은 그 어떤 사람이라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드러난 결과는 같아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근본 동기가 어디에 있었는지 놓치지 말고 따져보자. 누구보다 강한 책임감으로 자신의 본분을 다했던 성실한 젊은이 요셉. 그가 궁극적으로 지키고 싶었던 것은 자기 의가 아니었다. 사람들의 평가를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요셉의 시선은 그 어떤 공평한 저울보다 더 정확하신 하나님을 향하고 있었다. “요셉이 시무하러 들어갔더니 그 집 사람은 하나도 거기 없었더라 (11절)” 보는 이가 아무도 없는 곳에서도 그는 언제나 하나님을 바라고 사는 자였기에 거듭되는 시험에도 넘어지지 않았다. 은밀히 다가온 유혹 앞에서 요셉은 옷을 버려두고 헐레벌떡 달음질쳐 나갔다. 겉옷을 버려둔 채 가식없는 양심을 가지고 환난 날의 피할 바위이신 하나님께로 도망했기에 그는 더욱 안전하였다.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내 공간 안에서 글을 쓸 때 시험을 치를 때, 이 요셉의 모습을 기억하자. 우리가 속한 아카데미아에서 기존의 축적된 연구 결과들을 우리는 재량껏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 받았다. 그러나, 우리에게 양심을 눈감는 표절이나 부정직한 행위들은 분명 금지되어 있다. 학문을 하고 있다면, 학문적 정직성(academic honesty)을 순결한 혼인의 언약과 같이 여기자. 그리고 세상의 평가가 두려워 이 약속을 지키자는 것보다는 그 약속을 깨뜨리는 악한 행위로 “하나님께 득죄” 할 수 없다고 말했던 요셉의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순결하자.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거룩하기 원해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정결하기 원해
  오직 주님 앞에서 순결하기 원해
  오직 주님 앞에서 아름답기 원해

  “내가 어떻게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범죄하리까?
  아무도 보는 없어도 결코 죄와 타협하지 않고
  자기를 지킨 젊은 요셉처럼 정결하게 살기 원해
  아무도 보는 없어도 거룩하게 살기 원해

  하나님의 이것이니 우리의 거룩함이라
  음란함 버리고 존귀함으로 주의 얼굴 보기 원해
  하나님의 바로 이것이니 뜻대로 살기 원해
  부정함 버리고 거룩함으로 주의 얼굴 보기 원해

 –강명식,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예수 믿는 학생으로서 지금 나의 삶은 어떠한가? 떨리는 마음으로 찬찬히 돌이켜 본다. 내 노력보다 큰 것을 탐하고 있었는지.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인 양 말하고 있었는지. 누구도 보아주지 않을 때 그 과정을 허수이 흘려 보내진 않았는지. 사회의 통제적 기준에 따라 급급한 노예의 삶을 살고 있진 않은지. 세상 윤리보다도 더욱 저급한 기준으로 살면서 작은 이익 앞에서 비굴해지지 말자. 눈에 보이는 여러 가지 상과 벌에 골몰할수록 하나님과 맺은 언약은 희미해져 버릴 것이다. 빛의 자녀된 삶에도 이런 유혹의 그림자는 끊임없이 다가올 것이며, 이 땅을 떠나지 않는 한 그 사투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 때마다 세상의 모든 윤리보다 탁월하신 주의 말씀에 매여 살아보자.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다 (시119:9).”


하루 분량의 삶만 고스란히 내놓고 말씀 앞에 비추어 보아도 입술의 고백과 실제 삶과의 간격은 너무나 크다. 다시 고쳐 살아볼 수도 없는 지나가버린 시간들이다. 그래도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오늘의 어려움을 내일의 영광으로 바꾸실 수 있는 능력이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님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진정으로 거룩한 삶을 살아갈 이유는 오직 하나님의 사랑에 있음을 기억하자. 우리 대신 아들 예수를 죽이기까지 하신 분인데, 그가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그 일을 하며 우리 삶을 살아보자. 말씀의 준거가 우리의 삶 가운데로 통합되어 빛으로 드러나길 소망한다. 그 정직한 순간 순간이 모여 사회적 윤리와 도덕의 기준을 뛰어 넘고 하나님의 거룩으로 향해 나아가는 삶을 만들어 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잠2:7)”는 하나님께서 결과는 책임지신다. 우리가 할 일은 매 분 초마다 우리의 흔들리는 마음과 생각을 요동치 않는 십자가 위에 못 박고 우리 삶을 예배로 드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권오승] “반윤리적” 기독교

이코스타 2003년 12월호


해적선장 이야기


어느 해적선이 어느날 크게 약탈을 하는데 성공하였다. 수많은 보화와 진귀한 물건 뿐 아니라, 여러명의 아름다운 처녀들도 납치해 오는 큰 성과였다. 해적선상에서 이를 축하하는 잔치가 열렸다. 잔치가 한참 무르익었을 무렵, 선원 몇 명이 해적선장 앞에 아리따운 처녀 몇 명을 데리고 왔다. 재미있게 한탕 놀아보자는 것이었다. 그때 해적선장은 소리를 버럭 질렀다. “네 이놈들, 너희들은 내가 결혼을 소중하게 여기는 크리스천임을 몰랐단 말이냐! 나는 결코 이 여자들에 손대지 않을 것이다!” 그날 밤 해적선장은 잠자리에 들기 전, 무릎을 꿇고 자신이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이 이야기는 복음주의권에서 자주 회자되는 이야기이다. ‘개인적으로 신실한’ 신자들의 모습을, 해적선장이라는 비윤리적인 자리에 있으면서 개인적인 신앙생활의 신실함을 지켜내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비유한 내용이다. 과장이 되어 우스꽝스럽긴 하지만, 이 모습은 어쩌면 아주 전형적인(typical) 한국적 그리스도인의 슬픈 모습을 그려놓고 있는지도 모른다.


A군의 직장생활 이야기


신실한 그리스도인인 A군은 한국의 어느 국가출연 연구소에 연구원으로 일을 시작했다. 학생으로 있으면서 캠퍼스에서 성경공부를 인도하기도 했었고, 지역교회에서도 성실한 일꾼으로 인정받던 A군은, 직장에 가서도 신우회 활동등을 통해 ‘직장 복음화’를 이루겠다는 꿈에 부풀어 직장에 들어갔다. 그런데 직장에서 A군이 부딪혀야했던 ‘세상’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일주일에 한번꼴로 있는 회식에서 여러가지 이유로 술을 거부하는 것이 마음 늘 부담이 되었다. 한약을 먹는다, 개인적으로 술이 안받는다, 운전을 해야한다는 등의 핑계도 이전 거의 떨어져 가고 있다. 주일마다 나와서 일을 하라는 압력을 받는 것도 A군에게는 심각한 도전이다. 교회에서 여러가지 일로 섬기고 있는 터에 주일은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원칙으로 세우고 있는 A군은 이 원칙을 깨지 않으려 정말 힘들게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 A군을 또 힘들게 하는 것은 가끔 ‘전문가 초청’ 가짜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가끔 세미나를 부탁한 전문가가 세미나를 펑크내면, 그냥 그 세미나가 열린 것으로 보고서를 써 내고 거기서 나온 경비로 연구실 회식을 하는 것이었다. 거짓 보고서로 회식이 마련되면 A군은 또한 여러가지 핑계를 대고 회식에 빠지려 노력하였다. 부정에 동참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가끔 직장 상사에게 피치못할 거짓말을 하는 것도 늘 마음에 걸렸다. 어쩌다 일이 밀려 기한내에 끝내지 못하면, 일을 이미 다른 부서로 넘겼는데 그쪽에서 아직 넘어오지 않아서 그렇다고 몇번 둘러대곤 했는데 이런 사소한 거짓말에도 A군은 심하게 마음이 찔렸다. 매일의 삶에서 이렇게 끊임없이 다가오는 도전들에 정정당당하게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은 역시 기도 외에는 없다는 생각에 A군은 힘들지만 매일 새벽기도에 나갈 것을 결심한다. 거짓말하지 말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 지어다. 이런 성경구절들이 A군의 QT 노트에는 자주 적히게 된다.


이것은 가상의 어떤 ‘경건한’ 그리스도인 청년의 이야기이다.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고자 노력하는 아름다운 모습이 담겨져 있다. 하루하루의 삶에서 작은 것까지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 노력하며 분투하는 모습. 그러나, 이 모습을 위의 해적선장 이야기에 대비시켜보면서 뭔가 석연치 않은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반윤리적인 기독교


많은 사람들이 한국 기독교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여러 가지 비판의 소리가 있지만 그 가운데 가장 큰 비판의 소리 가운데 하나는, 한국 기독교가 ‘도덕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목회자의 개인적인 비리와 부정축재, 당회장의 권력을 투명하지 않은 절차를 통해 아들에게 물려주는 문제, 교회가 다른 ‘사업’을 벌이면서 터져나오는 각종 탈세 혹은 비리 의혹들. 그 외에도 사회적으로 크고 작은 문제들이 터질 때 마다 항상 단골로 등장하는 교회의 집사, 장로, 권사, 목사님들. 이런 우리의 자아상이 우리 스스로 부끄러워서 일까, 어떻게든 하나님의 교회를 바로 세워야한다는 사명감에서일까, 아니면 함께 싸잡아서 욕먹는 것이 못내 분해서일까, 우리 안에서도 이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쏟아내는 목소리들이 높다. 그리스도인들의 도덕성이 땅에 떨어졌노라고. 적어도 세상의 상식 수준의 도덕만이라도 우리안에서 회복하자고. 사실 우리는 얼마나 교회나 기타 기독교 관련 단체 혹은 집회 등에서 ‘종교적’ 혹은 ‘도덕적’이길 도전받는가. 주일성수, 금연, 금주, 십일조와 같은 ‘종교적 규율’들과 정직, 청렴, 사랑, 자비와 같은 ‘윤리적 규율’ 등을 나열하면서 이것들을 지키는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자고. 그리고 우리 복음이 가지고 있는 기독교적 윤리 기준은 세상의 타락한 가치기준보다 우월하다고. 그러나, 정말 그런가. 철저히 인본주의적인 기반에서 미국내의 불법 이민자들, 미혼모들을 돌보는 social worker들을 보았는가. 이들은 그들과 하나가 되기 위에 일부러 흑인 저소득층이 사는 지역에 가서 자기 자녀들을 교육시키며 박봉으로 그들의 어려움을 온 몸으로 섬기는 사람들이다. 이런 이들의 도덕기준보다 과연 기독교의 도덕기준이 얼마나 더 우월하단 말인가.


자크엘룰(Jacques Ellul)에 따르면,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반윤리적’인 종교다.


“하나님과의 만남에 방해물로 나타나는 모든 도덕을 초월하라는 것이다. 사랑은 어떤 도덕에도 굴복하지 않고 어떤 도덕도 만들지 않는다. 계시된 진리들(자유, 진리, 빛, 말씀, 거룩)은 어떤 것도 도덕과 관계하지 않으며, 또한 도덕을 탄생시킬 수 없다. 그 진리들이 일깨우는 것은 존재 양식과 삶의 모습이다. 그 삶의 모습은 지극히 자유로우며, 끊임없이 위험에 처하지만 항상 새롭게 되는 것이다. 도덕이란, 그것이 어떤 것이든간에, 하나의 금지이며 장애물이고 또한 그 안에 정죄를 내포한다. 정확히 예수께서 모든 도덕적 인물들에의해 어쩔 수 없이 정죄받은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기독교 역사상 가장 근본적인 비극들 가운데 하나는 이 자유한 말씀이 도덕으로 변형된 것이다.” (자크엘룰, 뒤틀려진 기독교, p120-121,대장간 1990)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과 비그리스도인의 차이는 윤리적이냐 그렇지 않느냐, 혹은 윤리적으로 누가 우월하고 열등하냐하는 것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을을 비그리스도인과 구분하는 가장 중요하고도 유일한 원리는 이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나는 하나님이 아니다.


즉, 전적타자(全的他者)로서의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도무지 채울 수 없는 간극(gap)이 있어서 우리는 어떠한 방법으로도 하나님같이 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절대적으로 인정할 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모든 것들은 절대적인 하나님에 대하여 모두 상대화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나는 하나님이다’ 라고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내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만들어진 윤리적 강령들 심지어는 도덕적 강령들이 절대화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이것은 복음의 근본을 흔드는 심각한 도전이다.


앞의 A군의 예를 다시 생각해 보자. 물론 A군이 성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노력하는 열정은 분명히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A군이 지키려 했던 주일성수, 금주와 같은 종교적 강령들이나 정직, 성실과 같은 윤리적 강령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을 때, A군의 노력은 매우 소모적인 것이 될수도 있다. 또한, 경건하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이 반복해서 종교적, 윤리적이되는 이유도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이 계속 점검되지 않기 때문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의 기독교, 특히 한국 기독교가 비윤리적, 비상식적인 모습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종교적 윤리적 강령들을 강조함으로써가 아니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강조함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고난 (박해 : Persecution)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으로부터 출발하지 않는 종교적 윤리적 강령들이 소모적인 것이라면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으로부터 출발하는 순종은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게 될까. 성경의 예도 그렇고 역사적으로도 그렇고 그 결과는 고난 혹은 박해(persecution)였다.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외치는 세상에 대하여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하나님이시다’라고 외치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심각한 갈등과 충돌을 필연적으로 갖게된다.


그런 의미에서 박해는 세계관의 충돌에서 비롯한다. ‘나를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내가 하나님이 아님’을 발견했을 때, ‘나를 하나님’이라고 여기며 쌓아왔던 모든 전제들은 더 이상 이 새로운 세계관의 사람들을 담아낼 수 없는 것이다. 로마시대의 세계관이 그리스도인들의 새로운 세계관을 도무지 담을 수 없어 그리스도인들이 사자밥이 된 것, 세속화된 중세교회에서 성경적인 메시지를 선포하려했던 초기 종교개혁자들이 받았던 박해도 이 세계관의 충돌로 이해할 수 있다. 한국 선교 초기에 선교사들과 초기 신도들이 받았던 박해 역시 구한말의 유교 봉건적 세계관이 그리스도인들의 세계관을 참아낼 수 없었던 것에 기인한다. 그 충돌이 일어나고 있는 시대의 시대정신이 복음적 세계관과 충돌할 때 일어나는 것이 박해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있어서 그러한 충돌은 어디에 있는가? 이 문제는 많은 연구와 고찰이 필요할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더 이상 그러한 박해는 없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해의 근본적인 뿌리가 세계관의 충돌임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기꺼이 받아야만하는 박해의 내용들을 조금 자세히 볼 수 있다. 매우 치열한 충돌과 갈등이 있어야 하는데도 별로 그렇지 못한 예를 몇 개만 들어보자.


(1) 경쟁 하덕규씨가 노래했듯이, 우리 시대는 ‘함께 사는 법을 배우기보다 혼자 살아남는 것을 배우는’ 시대이다. 이러한 시대정신에 정면으로 대항하여 살아간다면, 비록 그것이 정정당당한 경쟁이라 하더라도 다른 이들을 위해 스스로 패배자가 된다면, 아니 적어도 자신이 당연히 차지할 수 있는 것을 적극적으로 나누고 산다면, 그리고 그로 인해 고통을 받게 된다면 이 사람은 이 시대가 가지고 있는 시대정신, 혹은 세상의 가치관에 대해 자신의 가치관으로 정면으로 대항하는 ‘박해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경쟁에서 낙오한 사람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인것같이 공감하며 함께 고통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 그러다가 어쩌면 자신도 치열한 경쟁에서 도태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어쩌면 진정으로 시대에 대항하여 사는 사람들이 아닐까. 우리 주변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과연 이러한 삶을 선택해서 살고 있을까.


(2) 성공주의 모두가 성공을 하고자 바둥바둥 하면서 사는 세상이다. 서점의 기독교 섹션에 가보아도 ‘성공’에 대한 수많은 베스트셀러들이 진열되어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렇게 모두가 ‘성공’을 향해 매진해 갈 때, 아내 혹은 남편의 자아실현을 위해 자신의 ‘성공’을 양보하고 스스로 한 단계 내려 앉는 삶을 선택했다면, 그 후에 주변에 자신과 함께 ‘성공’을 향해 달려갔던 사람들이 모두 어떤 성취와 성공을 과시할 때 자신의 초라한 모습과 비교하며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성공’만을 향해 달려갈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그러한 삶의 모습을 지켜나간다면 이 사람 역시 성공주의라는 거대한 시대정신에 맨몸으로 맞서도 있는 사람일 것이다.


(3) 직업선택 어떤 직업이 가지는 수입에는 두가지 결정 요소가 있다. 하나는 그 직업이 창출하는 사회적 문화적 가치이다. 즉, 그 일의 사회적 기여의 정도에 따라 그 임금 수준이 결정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일시적 혹은 장기적 사회 구조적 모순으로 인해 그 직업이 가지는 사회적 기여와 무관하게 그 임금 수준이 결정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 직업이 창출하는 사회 문화적 가치에 대한 고려를 하지 않고 자신의 취향과 수입의 정도를 가지고 직업선택을 할 때, 임금 수준이 낮다 하더라도 더 의미있고 가치있는 일을 선택을 한다면, 혹은 자신의 임금 수준이 사회 구조적 모순으로 인해 그 가치보다 더 많이 정해져 있으므로 적극적으로 그 잉여 부분을 다른 이들과 나눈다면, 이런 선택 역시 이 시대가 갖고 있는 가치관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자세일 것이다.


여기에 제시되어 있는 예들이 세상의 가치관에 대항하여 사는 가장 좋은 예들을 선별한 것은 아니다. 반드시 따라야할 지침들은 물론 더더욱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 각 사람에 맞게 어떤 길로 부르시고 그 부르심은 때로 세상의 시스템에 깊숙히 들어가서 사는 것일 수 있다. 이런 경우 전략적으로 겉보기에 세상의 가치관에 순응해서 사는 형태로 살아갈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매 순간이 정말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살아내고자 하는 의지와 자세가 아닐까.


고난받는 공동체, 거룩한 공동체


거대한 세상의 힘에 맞서는 일은 분명 두려운 일이다. 그리고 실제로 세상과 맞서 싸우다 낙오하고 ‘박해받는’ 일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낙오하는 것은 과연 실패일까. 여기에 공동체의 중요성이 있다. 물론 세상에 맞서 비성경적 시대정신에 온몸으로 저항하다 낙오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개인적인 경건의 영역에 그치게 된다. 그러나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일단의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함께 비성경적 시대정신에 저항할 때, 이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가져올 것이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그러하였다. 그들은 아주 단순히 자신들의 신앙의 양심으로 할 수 없는 일은 로마의 권력이, 시대 정신이, 사회적 통념이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던지 간에 하지 않았고, 자신들이 해야만하는 일들은 반드시 하고야 말았다. 성경말씀 그대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다시 해적선장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물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전체가 해적선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가 정면으로 대항해서 싸워야 하는 가치기준들을 외면한채 개인적인 종교적 윤리적 경건만을 추구한다면 우리의 모습이 해적선장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수도 있다. 조금 극단적인 비교가 되겠으나, 성적순결을 지키는 해적선장과 난봉꾼이지만 자신의 일에 충실한 해안경비대장 가운데 누가 더 유익한 사람이겠는가.


복음은 원천적으로 모든 권력과 모든 권세를 뒤집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 권력이 돈이건, 정치 권력이건, 사회적 통념이건간에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을 때 그것을 뒤집는다.


그런데 우리는 이 시대에, 하나님 나라 백성의 공동체가 세상의 경쟁주의, 성공주의, 배금주의, 인본주의에 대해 정면으로 대항하여 그것을 뒤집는 예를 얼마나 볼 수 있는가. 모두가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에 대하여 태클을 걸며 유일한 하나님되신 그분의 뜻 이외에는 모든 것을 거부하는 당당함을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는가. 정치권력, 금전권력, 쾌락주의, 사회적 통념등과 끊임없이 타협하면서 만들어내는 구차한 변명들을 얼마나 우리 공동체 안에서 많이 접하는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당당하게 거부하고,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을 타협함없이 지키는 진성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낙오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에 맞서 나가는 모습을 우리 안에서 더 많이 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공동체가 함께 고난을 기꺼이 감당해 나가는 자세를 견지하며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선포하는 일들이 편만해 지길 소망한다. 그렇게 할 때 이땅의 우리 공동체들은 천박한 종교적 윤리적 강령들에 얽매여 하나님 나라 백성의 공동체를 세상에 벤치마킹하는 모습에서 벗어나, 거룩한 공동체가 될 수 있으리라.


사족


이 글은 아직 미숙한 한 유학생의 묵상 글입니다. 많은 분들의 조언, 충고, 첨언들을 기대합니다.

[이정희] 어느 유학생의 가계 꾸리기

이코스타 2003년 11월호

삶을 살아감


아침에 일어나면 졸린 눈으로 아침 식사를 준비한다. 가장 만만한 것이 계란 후라이에 토스트와 커피 한잔. 한 손으로 만들며 한 손으로 먹으며, 점심에 먹을 샌드위치를 만들고, 한편에는 어제 먹었던 도시락 그릇을 설거지하며, 몇 가지 일이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나는 활기찬 아침이다. 학기 시작하여 주어진 Syllabus. 눈에 먼저 들어오는 것은 수업 내용보다 프레젠테이션 어사인먼트와 텍스트북이다. 어사인먼트 확인되면 필요한 책과 textbook이 도서관에 있나 잽싸게 확인하고 다른 사람이 빌려가기 전에 빨리 빌린다. 수십 불씩이나 하는 교과서를 모두 샀다가는 렌트 값 못 낸다. 한두 달 빌린 책을 보다가 정말 필요하고 소장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면 인터넷으로 유스드 북을 주문한다. 인터넷으로 사면 소비세가 면제되니 몇 불이라도 싸니까. 점심은 도시락으로 간단히 해결한다. 사 먹으면 빈곤한 식단에 돈까지 나가는 이중고에 시달리니까 아예 샌드위치로 먹는 게 마음도 편하다. 먹는 데에는 외국 학생뿐 아니라 미국 학생들도 다들 아끼고 절약하는 것 같다. 수업이 대충 끝나면 이메일 체크 겸 신문, 잡지를 도서관의 인터넷으로 읽고 필요한 부분을 스크랩하여 웹에 잘라 붙여 놓지만 프린트는 대개 하지 않는다. 종이 한 장도 아껴야 하니까.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싶을 때 도서관으로 향하여 인터넷의 무료 음악사이트에서 다운받고 영화는 티비에서 녹화했다가 틀어본다. 중간에 광고가 있긴 하지만 그런 대로 볼만하다. 그러나 가끔은 혼자 비참해진다. 공부도 힘들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한단 말인가?


하나님, 일과 안식의 주인공


하나님이 안식일을 쉬신 이유가 항상 궁금해왔다. 안식일 뿐 아니라 각종 절기, 안식년, 희년에 이르기까지 하루하루 살아가기 바쁜 인간들에게 삶을 중단시키는 하나님의 질서는 무엇일까? 성경책을 펼쳐본다.
너희가 저마다 이웃에게 무엇을 팔거나, 또는 이웃에게서 무엇을 살 때에는 부당하게 이익을 남겨서는 안 된다. (레위기 25:14, 표준 새번역)
일곱째 해에는 씨를 뿌려도 안되고, 소출을 거두어 들여도 안 된다면,  그 해에 우리는 무엇을 먹을까? 하고 물을 것이다. 그러나 여섯째 해에, 내가 너희에게 복을 베풀어, 세 해 동안 먹을 소출이 그 한 해에 나게 하겠다. (레위기 25:20-21, 표준 새번역)
같은 본문에서 언급되고 있는 일함에 있어서 정직과 안식을 취함에 있어서 근면은 일견 상반된 명령인 듯하다. 상반되어 보이는 일과 안식의 삶 속에 하나님의 일관된 메시지는 뭘까? 하나님이 정직하고 근면한 노동을 원하시는 건 분명하다. 열심히 일해서 정직한 대가로 돈과 재물을 얻고 불필요한 소비와 지출을 최소화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한편 칠 일째, 칠 년째, 오십 년째 되는 날과 해는 확실하게 또는 정직하게 쉬어야 함을 성경은 말하고 있다. 일을 통해 나에게 베풂이 있다면 안식과 구제의 일을 통해 이웃에게 베풂이 있다는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재물의 사용처 보다는 마음의 정직함이 아닐까 싶다. 일을 할 때는 일에 정직하고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고, 안식을 취할 때는 나에게는 쉼을 이웃에게는 베품을 정직하고 성실하게 다하는 것이 하늘의 뜻인 듯 싶다. 하루의 피곤이 조금은 풀린다. 오늘 하루도 나는 최선을 다해서 살았고 이제는 나에게 안식을 선물로 줄 때다. 일을 열심히 했으니 쉼에도 감사가 따르며 갑갑하고 가난한 일상에서도 보람이 뒤따라온다.


재정 생활의 원칙: 검소와 품위


대학교를 입학하여 재정적으로 반독립 상태에 들어선 이후 돈 문제에서 떠나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아르바이트에 학과 공부에 어느 것도 제대로 하는 게 없어 좌절했던 기억이 생생한데 거기에 교회와 기독학생회에서 받는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아 ‘에라 모르겠다’ 하고 그만 둔 실패의 기억이 아직도 상처로 남아있다. 어느 곳에서도 이해 받지 못했다고 할까. 그 와중에 그래도 배운 것이 있다면 재정 사용에 있어서 검소와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 천 원 아끼려다가 만 원 잃고 만 원 아끼려다가 건강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유학 생활에 있어서 재정 생활의 원칙이 있다면 검소와 품위, 두 가지를 들고 싶다. 얼마 되지 않는 수입은 수입을 떠나서 그 일에 최선을 다하고 지출은 동전 세어가며 최대로 줄이지만 안식을 해야할 땐 최대한 감사하게 품위를 지키며 살고 싶다. 쪼들리는 가계부에서도 마음의 여유를 갖고 살아가는 방법은 안식일을 최선을 다해서 충실하게 즐기며 사는 것 같다. 안식을 위해 시간을 떼어놓고 쉼을 위해 돈을 구분하여 놓을 때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고 편안한 마음으로 나를 위해 쓸 수 있다. 그렇게 얻은 힘으로 다시 검소하고 성실한 일주일의 삶을 누리며 살 수 있겠다. 안식과 일 모두의 주인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때 감사한 마음으로 일과 휴식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다. 


가난의 영성


가난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돈의 결핍, 정서적 안정의 결핍, 사랑하는 사람의 결핍, 안전의 상실, 자신감의 상실 등이 그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가난한 장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곳이 바로 하나님이 임재하시길 원하는 장소입니다.                        
-Henry Nouwen, Bread for the Journey


미국에 와서 유학 생활을 하는 사람이 생활이 힘들다고 말하는 것이 호사스러운 일이 아닐지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은 원해도 재정적인 문제로 오지 못하는 사실을 생각할 때  호강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재 적은 수입으로 생활까지 영위해야 하니 가끔씩은 혼자만 고생 다 하는 것 같다. 유학 생활에서 가끔 느끼는 가난에서 내가 얻는 것은 힘들게 생활할 때 하늘의 위로가 더 크다는 것이다. 항상 약자와 가난한 자의 편에 서 주신 하나님은 가난과 결핍의 장소에 임재하시길 원하시며 그곳을 비울 때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힘들 때마다 그 약속의 말씀을 떠올리며 다시금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곤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인 정직과 성실로 그 삶에 충실하며 안식으로 함께 하실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리곤 한다.
가난의 영성으로 얻는 또 다른 유익은 나의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한다는 것이다. 편하게만 살아온 내가 궁핍으로 힘든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게 된 것은 그들과 함께 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좀 더 충실하게 대답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 해준 것이다. 지금은 얼마 안 되는 물질로 나누는데도 인색할 수밖에 없지만 나중에 직장이 생기고 돈이 생기면 이때의 기억이 도움이 될 것 같다. 물질위주의 사회에 편입되어 이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어리석음을 범치 않기를 바랄 뿐이다.
교회에 가서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함께 하는 짧은 시간에 성도의 교제를 나누며 위로와 이해를 찾는다. 자주 서로 이해하지 못해 불신과 상처를 주고받지만 성령의 끈으로 하나된 공동체가 되기 위해 항상 노력한다. 찬양과 말씀으로 하나되는 공동체, 얼마나 많이 듣던 이야기던가! 하지만 아직은 교회가 빈자와 약자를 돌보는 하나의 모습이 되면 더욱 좋겠다. 특히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도 같은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인정되는 모임이 되면 좋겠다. 유학생의 처지를 인정받기 어려워 유학생은 유학생들끼리 모이게 되는 현상은 없었으면 좋겠다. 그만큼 유학생들도 교민들의 생활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겠다. 


다시 가계부를 꺼내며


저녁 5시가 되면 대개 집에 돌아간다. 그래도 한끼는 여유 있게 잘 차려 먹어야 하니까 고기도 굽고 국도 끓이고. 디저트로 과일도 한 조각. 쉬면서 보는 각종 고지서들 살펴보면 한숨만 나온다. 수입은 빠듯한데 빠지는 물구멍은 왜 이리 많은지… 가계부를 꺼내어 정리를 시작한다. 요즘 이래저래 너무 많은 돈을 쓰지 않았나 자책감이 몰려온다. 이런 추세로 학위 받을 때까지 수지를 맞출 수 있을지 걱정이다. 더 허리띠를 졸라매야 할까?
다시 마음을 정돈해본다. 하는 일에 정직하고 검소하게 그대로 신앙 인으로서 정체성을 잃지 않고 품위를 잃지 않기. 결과가 어떻게 되건 이 길로 정진하면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확신한다. 현재 하고 있는 일에 충실하면 다음 단계의 일이 맡겨질 거라고 기대하며 최선을 다해서 하고자 한다. 만약 그게 안 된다면 아직 내가 그 일에 준비가 덜 된 거라 받아들이면 된다. 지출은 최대로 줄이며 생활을 지혜롭게 짜 내본다. 부지런을 더 떨면 좀 더 좋은 방법이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주일이 기다려진다. 다음 주를 계획하며 머리를 쉴 수 있는 평안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내일의 시간표를 확인하며 가계부를 덮는다.
주님과 함께 한 내일도 무사히.

[김동록] Professional Student

이코스타 2003년 11월

<font size=”2″>Professional 이란 말은 전문성이 있는 직종을 가리켜서 쓰는 말인데 학생을 가리켜 professional 이라고 하면 두가지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그 학생이 정말 연구와 공부를 잘해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전문 직장인과 비교해서도 뒤지지 않는 완벽할 정도의 실력과 솜씨를 보이는 경우입니다. 둘째는 하도 그 학생의 학업이 늦게 진행되다 보니 그저 학생이라는 신분 자체가 전문 직업인인 것처럼 굳어져 버리는 경우입니다.


제가  이 두 번째 경우에 속하였습니다. 학위 과정이 길어지면서 학생이란 신분은 왠일인지 제 나이 또래의 다른 친구들과 달리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상태를 아주 당당하게 변명하도록 해 주었습니다. 비단 저 자신 뿐 아니라 저의 생활비를 보조해 주는 양가 부모나 가족들도 저희의 그러한 경제적 의존성을 당연히 여기며 공부가 얼른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설마 밑빠진 독은 아니겠지라는 심정으로 보조를 해 주셨습니다.


제가 특별히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장기적인 안목으로 저의 삶을 생각할 기회를 갖지 못하였던 제 실패담을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저축을 하지 않았습니다. 돌이켜 보면, 저축할 수 있는 상황이었슴에도 불구하고 늘 모자란 듯 살았습니다. 그리고 졸업만 하면 남들이 사는 것 처럼 모든 경제적인 문제가 풍성하게 되고 떵떵거리고 잘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둘째, 학생의 신분으로 있는 동안은 아직 돈을 생각할 때가 아니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유학생이었기에 당연히 학위가 저의 최우선의 목표였습니다. 아니, 사실은 유일한 목표로 삼았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입니다. 그래서 제 마음 속으로 “35세까지는 저 자신의 사회적 경제적 위치를 향상시키는 데 주력하고 그 이후로는 하나님의 일에 나서리라”는 야무진(?) 생각을 가지고 유학을 결심한 이후 오로지 저 자신의 학위와 또 그 학위 이후의 career를 향해 달려나갔습니다. 정말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후 우연히 씨애틀에서 제가 다니던 (정말이지 저는 “다니고” 있었습니다) 교회의 청년부를 섬기게 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제가 은혜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는 것은 그 섬김을 통해 저 자신의 딱한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의 딱한 모습은 “나는 이런 일 하기 위해 여기 온 것 아니야”라며 헌신하기를 주저하는 청년부의 학생들에게서 비추어 졌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살아 왔었는데, 그 지난 10년이 알고 보니 미래를 핑계로 삼아 현재를 사는 삶을 미루고 있었던 기간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제가 열심히 살긴 살았지만 왜곡된 열심, 균형을 읽어버린 열심으로 살았기에 현재를 제대로 살지 못하고 현재 내게 닥치는 많은 것들을 뒤로 미루며 살았던 것입니다. 미국땅에 살면서 항상 언젠가는 떠날 것이라는 생각으로 모든 일을 바라보니까, 작게는 학과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일들, 지역사회에서, 또는 자녀들의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주인의식이 전혀 없이 붕 뜬 기분으로 살았습니다. 과연 성인이 된 (심지어 가족을 거느린) 학생의 본분이 공부라고 하지만 공부하는 것 외에는 다 면책이 되는가 하고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유학생이라면 이민 사회에서는 열외로 취급하니까 이러한 분위기는 더욱 사회적인 인정(?)을 받아서 당연하게 여겨집니다. 저 자신도 예외가 아니어서 신앙생활은 지극히 소극적으로, 헌신하지 않아도 되는 범위내에서 이루어졌었고 당연하게도 10년동안 전혀 성장되지 않고 위축된 모습이 되어 버렸습니다. 많이 쓰이는 용어를 빌자면 고지론을 빙자한 이기적이고 소극적인 삶을 산 것입니다.


막연한 미래에 대한 기대감으로 저축도 하지 않고 또 돈을 굴리는 일에 문외한이 되어 있다가 놓쳐버린 아까운 기회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 스타벅스, 코스코, 등 소위 뜨는 회사들의 주식, 치솟아 오른 서북미 지역의 부동산 가격, 일찍 졸업하여 실리콘 밸리의 회사에 들어갔더라면 생겼을 막대한 수익, 그나마 졸업 후에 취직하여 드디어 왕창 부어넣었던 401k 의 반액에 가까운 마이너스 손실, 저축했던 돈이 없어서 아깝게 놓치고 때를 잘 못 맞춘 모기지 loan, 등등 돈이 희한하고 섭섭하게도 저와 제 가족들만 피해서 비껴지나 간다고 느껴집니다. 그렇지만 이제 무엇보다도 가슴아프게 아쉬운 것은 미래를 미리 앞당겨서 그것으로 현재를 대치해 버렸기에 놓쳐버린 그 10년의 세월입니다.


신기하게도, 성경에서는 미래에 대한 계획을 잘 세우라는 구절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미래에 대한 약속을 하지만 현재에 대해서는 잔인하리라만큼 현실적입니다 (특히 우리 인간의 음흉하게 숨은 깊은 속마음을 드러내는 데 있어서). 미래를 지레 앞당겨서 현재를 대치해 버린 삶은 뿌리가 없는 삶입니다. 저축을 하든지 돈을 굴리는 방법을 일찍부터 궁리하든지, 다 좋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궁리속에서 미래를 생각하다가 또 현재를 놓칠 까 두렵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 – 눅12:21 ). 그러나 현재를 충실하고 건강하게 (예를 들자면 직장, 지역사회와 교회에 대한 봉사와 베품, 그리고 개인의 영적성장) 열심히 살다가 보면 자연스럽게 이모저모로 재정에 대한 회계장부까지 하나님께서 만들어서 관리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 눅12:31).


유학은 특히 미래를 바라보고 사는 환경에 처한 기간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현재의 삶에 대한 면책권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여기에 유학생의 삶의 최대 약점이 있습니다. 저 자신이 이민자가 되는 과정에 있기도 하지만, 제가 절실하게 깨달은 것은, 유학생이나 이민자나 다 한가지로 내가 여기에서 사는 동안은 마치 평생 살 것 같이 충성하는 성실한 삶을 이루어 나가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는 점입니다. 사실 이미 대부분의 현대인들이 “temp (임시직원)”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곧 떠날 것 같이 책임지기 싫어하는 삶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쳐 주는 바는, 전인격적으로 현재에 헌신하는 삶, 즉 full time의 삶 이라는 것을 제 인생의 고개에서야 깨달았습니다. Professional student를 새롭게 정의한다면 “전인격적으로 현재의 삶에 헌신하는 학생”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font>

[편집부] Interview


예 전과 달리 현대 사회는 여성의 사회 진출로 인하여 일(공부)하는 엄마들이 계속 증가하다 보니 자녀를 양육하면서 부부가 함께 공부하는 유학생들도 역시 증가 추세다. 특히, 여성들이 가정을 갖고 자녀를 양육하면서 일(학업)을 병행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이번 달 이코스타에서는 일(공부)하는 엄마들이 그들의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나 갈등을 기독교 적인 시각에서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나누어 보기로 하자.


이코스타: 안녕하세요, 이렇게 인터뷰에 참여해 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번 달, 이코스타에서는 엄마로써 일 혹은 공부를 함께 하시는 자매님들이 겪게 되 는 여러 가지 애환들을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어떻게 바라보시는지에 대해 이 야기해 보는 시간을 갖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자기 소개를 해 주세요. (살고 계시는 지역, 직장, 학업, 가족 관계, 그리고 교회나 캠퍼스에서 하시고 있는 사 역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세요.)


K 자매: Boston에 살고 있으며, 결혼한 지 6 년이 다 되어가고 유치원에 다니는 딸아이 가 있습니다. Boston University 에서 Biomedical Engineering(의공학과) 박사과 정에 있습니다. 특별히 관심 있는 분야는 Biomaterials (생체재료)와 Tissue engineering (생체조직공학)입니다. 지금 교회나 캠퍼스에서 특별히 공식적으로 맡아서 하고 있는 사역은 없습니다.


R 자매: 저는 Cambridge, MA 에 살고 있습니다. 현재 Harvard 대학 전 산과 에서 포 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가족으로는 광통신 관련 회사에 다니고 있 는 남편과 16 개월이 좀 지난 딸이 있습니다. 매주 토요일 저녁에 성경공부를 하 고 있습니다. 모두 같은 교회에 다니지는 않지만, 하나님과 성경에 대해 알고자하 는 마음으로 모인 사람들입니다. 학생과 직장인, 미혼과 아이가 있는 가정, 하나 님을 믿는 사 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저희 모임 가운데서 하나 님을 배우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분들이 생길 때가 제일 행복 하고 하나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저희 부부가 이런 성경공부 모임에서 많이 배우고 자라고 섬김을 받았기 때문에, 저희도 그렇게 섬길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코스타: 가정을 갖고 특히 아이를 키우면서 직장 (혹은 학교)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힘든 일들이 참 많을 것 같은데, 가정, 일(또는 학업), (교회 또는 캠퍼스)사역 들 가운 데에서 우선순위를 정하시는 기준은 어떤 것인 지요? 그리고 그 기준을 지켜 나 가는 데에 어떤 어려움이 있으신 지요?


K 자매: 가정과 일(학업)을 우선으로 하고 있습니다. 결혼 전에 했던 것처럼 사역에 적극 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아이가 어느 정도 큰 후로 미뤄두고 있습니다. 그저 삶 속 에서 자연스럽게 섬길 기회를 만들려고 합니다. 아이와 제가 준비되고 (공식적 인) 사역을 적극적으로 할 시기가 되면 하나님께서 신호를 주실 것 같습니다. 결 혼 전에는 가정이나 학업보다도 사역을 더 중요시하는, 조금은 이원론적인 경향 이 있었고, 가정에 매여서 교회사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하는 어른들께 반 감을 가지기도 했지만, 가정을 가져보니 가정을 잘 보살피고 아이 하나를 하나님 안에서 잘 키우는 것이 얼마나 큰 사역인가 깨닫게 되었습니다. 실제 생활 속에서 가정과 일이 충돌될 때에는 그 때 그 때 필요에 따라 가정이나 일 어떤 것을 우선으로 할지 정합니다. 몇 가지 꼭 지키고자 하는 것들이 있다 면, 학교 일이 아무리 바쁠 지라도 저녁식사는 가족과 함께 하고 아이가 잠 들 때까진 함께 있어주려고 노력합니다. 또 주말은 집에서 가족과 함께 보내려고 합 니다. 매일 매일 학교에 있어야 하는 시간은 compromise하지 않고 철저히 지키 려고 합니다. 어려운 것이 있다면. (공식적) 사역이라는 걸 못 하고 있기에 내가 하나님 앞에서 이래도 되나 하는, 아주 큰 죄책감과 위기감을 때론 느끼기도 합 니다. 하지만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불러주실 거라고 믿고 기도하면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또 다른 어려움 들은 시간관리와 체력관리입니다. 항상 시간에 쫓기 고 일이 많아 피곤한 가운데 마음의 여유가 별로 없기도 합니다. 개인 시간을 못 가지기에 스스로를 충분히 점검하고 정돈할 시간도 별로 없고, 남편과 깊은 대화 를 나눌 기회가 별로 없기도 합니다. 항상 피곤한 몸 상태로, 계속 쏟아지는 일을 계속 해 나가야 할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시간, 체력, 또 다른 resources의 한 계 속에서 마음의 여유가 없다 보니, 가족에게도 따뜻하고 친절한 태도를 가지고 대하기가 힘들 때가 많습니다. 그런 가운데 가족끼리 intimate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특별히 신경을 써서 해야 할 경우가 많습니다.


R 자매: 가정, 일, 사역 가운데서 우선순위를 정하는 기준이라면, ‘하나님께서 제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시는지’라고 생각합니다. 매우 일반적이고 구체적이지 않은 말일수도 있겠지만, 하나님 뜻을 구하는 것이 모든 일에서 제일 먼저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 합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씀드리면,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최선의 길이 뭔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어린 딸에게는 엄마가 곁에 있는 것이 제일 좋을 테고 남편에게 좀 더 맛있는 식사를 준비해주고 싶으면서도, 지금까지 공부하게 하시고 일하게 하 신 하나님의 계획이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듭니다. 제 생애의 각 순간마다 어쩌면 우 선순위가 달라질 수 있겠다고도 생각하는데,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제게는 이 문제가 오래된 기도제목입니다. 내년 7월이면 Harvard에서의 계약이 끝 나고 새로운 일을 구해야 하는데, 어떤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 뜻에 맞을지, 아이가 더 클 때까지는 일을 쉬는 것이 나을지 계속 구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직 가정, 일, 사역 가운데 우선순위를 정하지 못하고 있으니 그 기준을 지켜나가는데 어려움 이라고 할 게 없겠네요. ^^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 뜻을 구하고 우선순위 를 정하는 게 제게는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이코스타: 엄마로서 직업을 가지고 계신 것에 대해, 하나님의 소명이라고 믿고 계신가요? 그 렇다면, 그 소명을 함께 나누어주실 수 있으신 지요? 언제 어떻게 그런 확신을 가지게 되셨는지요?


K 자매: 가정과 일을 동시에 꾸리는 것이 하나님의 소명이라고 믿습니다. 그 이유들은 다 음과 같습니다. 우선 Os Guinness의 The Call에서처럼, 하나님의 소명이란 직업 등에 대한 calling보다는, 하나님 그 분을 향한 부름이 우선된다는 데 동의합니다. 하나님이라는 분께 가까이 다가가는 과정으로 지금 나에게 허락하신 장이 현재 제 상황 (가정과 학업) 이라고 믿습니다. 때로는 입안이 바싹바싹 마를 정도로 바쁘 고 힘든 가운데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법을 배웁니다. 어떤 때는 전혀 의미가 없 어 보이는 일들을 하면서 하나님께 무조건적 순종을 배우기도 합니다. 자기 고집 을 피우는 아이와 씨름하면서, 하나님의 나에 대한 사랑에 대해서 배웁니다. 두 번째로는 학문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제가 공부하는 학문의 주 인은 하나님이시라는 걸 매순간 인정하면서 살고 싶다고 기도합니다. 또 저희 분 야가 하나님께서 주인 되시는 학문으로 온전히 회복되길 기도합니다.


또 하나님께 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데 쓰시는 학문이 되길 기도합니다. 아직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인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그런 계획 속에서 제가 담당할 일이 있다면 그 것을 위해서 준비시켜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세 번 째로는 직장에서 하나님 과 사람을 섬길 수 있길 기도합니다. 실험실에서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섬긴다는 것, 사실 잘 못 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실험실 내에서 각자 자기 project를 하는 가운데, 섬길 기회가 별로 주어지지 않기도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건 매일 한 사람 한 사람을 놓고 기도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졸업을 하고 진로를 결정할 때, 하나님과 사람을 좀 더 적 극적으로 섬길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하려고 합니다. 그렇다고 전임사역자가 되겠다 는 건 아니고, 지금껏 공부해 온 것들을 계속 연결해서 하면서 사람을 섬기는데 적 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진로 결정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으로 딸아이에게 좋은 role model이 되었으면 합니다. 딸아이가 일을 하게 될 지 전업 주부가 될지는 철저히 딸아이와 하나님과의 사이에 서 결정될 일이지만, 지금 사회의 흐름으로 볼 때 딸아이 세대에는 대부분의 여성 이 직업을 가지게 될 가능성이 클 거 같습니다. 그렇게 될 때 제 딸아이도 저와 같 은 고민을 가지고 살게 되겠지요. 그런 딸아이에게 제가 지금 삶으로서 모범을 보 여 줄 수 있으면 좋겠고, 나중에도 대화와 의논의 좋은 상대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기도합니다.


위 와 같은 소명을 매일매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확인하고 있고,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원하신다는 것을 경험하는 사건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아이를 막 낳고 대학원에 apply 했을 때 있었던 일인데, 하나님께서 내가 상상도 못 했던 방법으로 가정과 학업을 다 지킬 수 있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아이를 임신하고 한 1 년 반 동안 일을 하지 않고 전업주부로 있었던 기간이 있었 습니다. 아이를 낳기 한 달 전 GRE를 보고 원서 essay를 썼습니다. 아이를 낳고 application을 여러 학교에 냈습니다. 그 당시, 제가 공부하고자 하는 분야 (tissue engineering) 가 있는 학교가 보스턴에는 하나만 있다고 알고 있었기에, 보스턴에 서는 한 학교만 apply하고 다른 지역에 있는 학교들에 apply 했었습니다. 몇 달 후, Admission 결과가 나왔는데, 보스턴에 있는 그 학교에선 reject가 되고 다른 지역에 있는 학교에서만 admission이 왔었습니다. 남편과 떨어져 아이를 데리고 먼 곳에 있는 대학원에 가야 할 지, 아니면 대학원 가는 걸 포기하고 남편과 아이 와 다 함께 있어야 할 지, 많이 고민이 되었습니다. 오랜 고민과 기도 그리고 남편 과의 의논 후에 선 결심은 가족이 흩어져서 살아선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 다고 일하길 아주 포기한 것은 아니고 보스턴에 있는 직장을 알아보기 시작했었습 니다. 이곳 저곳 알아보는 가운데 tissue engineering을 연구하는 교수가 지금 제 가 다니는 학교에 1 년 전 부임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 전에 apply할 학교 들에 대해서 알아봤을 때는 몰랐던 사실이었지요. Application deadline이 몇 달이 나 지났음은 물론이고 admission 발표까지 다 난 후였지만 application을 보냈습니 다. 얼마 후, 학교로부터 admission은 물론이고 Deans Fellowship이라는 장학금까 지 주겠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서 가족이 다 함께 있으며 저도 제가 원하는 공 부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철저한 간섭과 섬세하신 인도하심이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진로 결정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선 제게 가정도, 일도, 또 제가 공부하는 학문도 포기하지 않길 원하신다는 걸 알았습니다.


R 자매: 엄마로서 직업을 갖는 것이 하나님의 소명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아이를 잘 키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또 반면에 일을 하면서 부딪히는 많은 문제들에서 제가 하나님을 더 알아가고 예수님을 따라 자라가고 또 이웃들을 더 잘 이해하고 사랑하게 해주시는 것도 많다고 생각합니다. 또 이렇게 고민하면서 하나님 뜻을 구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일 중에 하나 가 아닐까 합니다.


이코스타: 특별히 일하는 여성으로서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겪는 어려움은 어떤 것들이 있으 신 지요?


K 자매: 이기적으로 자기일 만을 챙기고, 자기를 내세우고, aggressive하고 competitive하 게 일을 추진해야 하는 work environment에서, Christian으로서의 섬기는 자세와 상대방을 인정해 주는 자세를 유지한다는 게 어렵습니다. 주변에 보면 가정을 소중히 생각해야 하는 Christian 여성으로서 일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직장에서 고민하며 사는 경우가 있는 듯 합니다. 하지만 전 family-friendly working environment 에서 일하고 있기에 그런 고민은 크게 겪지 않고 있습니다. 저희 지도교수도 가정을 꾸리고 있고, 같은 실험실에, 지금 임신 중인 post doc도 있고, 같은 과에 얼마 전 아이를 낳은 다른 여자교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남자 researcher 는 아이를 데리고 실험실에 나오기도 합니다. 그래서 가 정이 있고 아이가 있기에 직장에서 가지게 되는 괜한 자격지심으로부터는 자유로운 편입니다. 지역교회나 공동체에서 여자이기에 기대되는 일이 무겁게 느껴질 때가 있기도 했었습니다. 예를 들면, 교회에서 어떤 행사가 있을 때 음식 준비를 해야 한다거나, 아니면 구역예배 때 식사를 준비해야 한다거나 할 때, 아무래도 부담스 럽게 느껴졌었습니다. 아이가 어리고 시간에 쫓기는 가운데 한 가지 일이 더 주어 지는 듯 해서, 섬길 수 있다는 기쁨보단 일의 부담감이 더 크기도 했습니다. 다른 가정은 거창한 음식을 준비하는데 그렇게 할 수 없을 때 느끼는 죄송함 등도 컸습 니다.


R 자매: 하나님께서 정말 내가 일하기를 바라시는가에 대한 답을 구하는 것이 제일 어렵습 니다. 여성으로서, 아이와 남편에게 더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 하는 것은 아닌지, 일 터에서 더 열심히 일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항상 고민이 됩니다. 주님 안에서의 형 제/자매들에게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나누고 싶은데, 일하는 사람으로서 직장 일 에 쓸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아닌지 항상 돌아보게 됩니다.


이코스타: 일하는 크리스천 여성으로서 남편에게 기대하시는 바는 어떤 것들이 있나요?


K 자매: 저희 남편에게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큰 시험이 있을 경우, 공부에 만 집중할 수 있도록 많이 배려해 줬고, 집안 일도 잘 나눠서 해 주고 있습니다. 또 집에서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시간이 적기에 이메일로 QT share도 하고 생각도 나누자고 initiate하기도 했구요. 일하는 크리스천 여성을 아내로 둔 남편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가정의 일을 나눠서 할 경우, 그것을 ‘아내의 일을 돕 는다’는 맘으로 하지 않고, ‘내 일을 하는 것이다’라는 자세로 임해 주셨으면 좋겠 다는 겁니다.


R 자매: 남편이 영적으로 가정의 머리가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남편이 아이를 더 봐주고 집안 일을 좀 도와주는 것보다, 하나님 안에서 흔들림 없이 가정을 지켜주는 것이 가장 큰 힘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코스타: 엄마로서 일을 하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시는 지요? 장점과 단점으로 나누어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K 자매: 장점은, 어린 시절부터 함께 출퇴근했기에 규칙적인 생활 습관이 몸에 베이는 것 같습니다 아주 어릴 때는 다른 분이 봐 주시고, 더 어릴 적부터 학교 생활을 시작 했기에, 일찍부터 사회생활을 경험하고 많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보는 경험을 하 는 듯 합니다. 그래서인지 어릴 때부터 낯을 별로 가리지 않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 도 금방 친해지는 편입니다. 어떤 일을 하는데 있어서 독립적이고 부모에게 많이 의존하는 편이 아닙니다. 함께 지내는 시간이 제한되다 보니 가족의 소중함을 잘 아는 듯 합니다. 가끔은 엄마를 어린 자기가 care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지 자기가 절 위로해 주기도 합니다. 엄마가 피곤해 하고 스트레스 받는 기색을 보일 때, 옆에서 계속 웃으면서 재잘재잘 거리면서, 엄마를 결국 웃기고 맙니다. 또 아빠 가 학회에 가서 없을 땐 자기가 아빠 흉내를 내서 엄마에게 힘을 주기도 합니다. 정말 딸아이를 키우고 계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구나 라는 걸 매일매일 확인하게 됩 니다. 제가 딸아이와 함께 항상 있었다면, 딸아이를 양육하는데 제 생각과 제 고집 이 더 강하게 작용했을 텐데, 어린 시절부터 떼어놓으면서 저도 딸아이를 하나님께 맡기는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제가 평생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일이 하나 있습니 다. 제 딸이 세 살이 채 안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큰 시험이 있어서 새벽 일찍 학 교를 가야 했는데, 잘 자던 아이가 갑자기 깨서, ‘엄마, 학교 가지 마’라고 매달리 더군요. 아빠가 일어나서 안아줘도 다른 때완 달리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엄 마 학교 가야돼, 엄마가 큰 시험이 있어서 학교 가야돼’ 라고 꼭 안아주면서 이렇 게 저렇게 잘 설명해 줬더니, 아이가 울음을 멈추고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군요. 그러고 잠시 후, 무언가를 결심한 듯한 단호한 어조로, ‘엄마 학교 가세요. 학교 가 서 공부하세요,’ 라고 어른처럼 얘기해서 정말 많이 놀랐습니다. 집을 떠나 학교를 향하면서 딸아이가 너무 기특하기도 하고 딸아이에게 너무 고맙더군요. 그와 동시 에 그 순간 제 아이와 함께 하신 하나님을 생생하게 느꼈습니다. 반면에 단점은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제한되어 있다는 것이 가족의 소중함을 알 수 있는데는 장점이겠지만 또 한편으론 단점이기도 합니다. 함께 있을 때도, 아 이가 원하는 관심을 못 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아이가 혹시 불만을 가지게 되 지는 않을까, 내가 아이에게 충분한 사랑을 못 보여주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염려 가 듭니다.


R 자매: 남편이 영적으로 가정의 머리가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남편이 아이를 더 봐주고 집안 일을 좀 도와주는 것보다, 하나님 안에서 흔들림 없이 가정을 지켜주는 것이 가장 큰 힘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코스타: 여성학이 여성들이 직업을 가지고 활발히 활동하게 하는 계기를 제시했습니다. 하 지만, 최근에는, 그 여성학이 “일하는 여성은 우월하고, 살림하는 여자는 열등하다” 는 바람직하지 못한 이원론을 제공했다는 역풍 또한 맞고 있는데, 그로 인해 고민 을 하신 적이 있으신 지요?


K 자매: 있습니다. 일을 쉬는 동안 그런 사고방식에 많이 젖어있는 저 자신을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일을 하지 않기에 가지는 열등감도 있었고 이러다가 영영 일을 다시는 못 하게 되지는 못 할까 하는 불안감도 크더군요. 하지만 전업 주부로 있었던 약 2 년 동안, 교회 어른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전업 주 부들의 고충과 생활 속의 도전들에 대해서 많이 배우게 되었습니다. 사회가 일하는 여성을 더 인정해 주는 분위기 속에서 전업 주부로서의 설움과, 일을 하기 원하심 에도 불구하고 기회가 닿지 않고 여건이 뒷받침되지 않아 일을 하지 못하는 고민 등을 가지고 계시면서도, 가족을 위해서 희생하시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사시는 분들을 보면서 존경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또 반대로 가정을 가지고, 일하는 Christian 여성을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Christian 분들도 뵙습니다. 언젠가 자녀교육에 대한 기독교 서적을 보다가 아이가 있음에도 직장을 가지는 엄마들은 이기적이고 잘못되었다 라고 매도해서 말하는 부분을 보고 는 분노한 적이 있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한 여성이 전업주부를 하건, 직장을 가지건,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원하시는 것에 따라서 결정할 일이라고 봅니다. 어떤 생활방식으로 살게 되건 간에 그것이 하나님의 소명이라는 걸 알고 순종하고, 또 그 안에서 하나님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하나님과 이웃을 섬길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R 자매: 여성학이라는 것은 기본적인 생각이 인본주의이기 때문에 크리스천 여성에게는 그다지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이 우월하고 열등한 지 결 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 아시다시피 하나님께서는 차별이 없는 분이십니다. 하나님 뜻을 구하고 주만 바라보며 산다면, 여성학에서 누굴 우월하게 생각하고 열등하게 생각하건 아무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코스타: k and R 자매님, 이렇게 자신들의 경험담을 나누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고 앞으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두 자매님의 가정에 함께 하시기를 기도하겠습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