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정] 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윌로우크릭교회?

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윌로우크릭교회?
 
 
미국 내 가장 영향력 있는 윌로우크릭교회에 대한 한국교회의
평가는 지나친 감정적 대응 아니면 무비판적인 수용 등 양극단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최근 옥성호의
‘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라는 책에서 이 교회를 전형적인
마케팅교회로 정면 비판했습니다. 여기서 이 책에 대해 비평의 잣대로 반론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또한 그가 ‘마케팅에 물든 교회’로
규정하는 기준이 ‘부족한 포스트모더니즘 이해’를 근거로 한다는 아쉬움도 크게 반박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의 용감한 지적이 최근 윌로우크릭교회와 네트워크
교회들이 그들의 사역 철학과 프로그램에 대해 수년간 연구한 결과를 세상에 발표한 ‘Reveal: Where Are
You?’(2007)라는 책에서 어느 정도 드러나고 있음을 보고 놀랐습니다. 교회가 수많은 재정과 열정을 들여서 다양한 프로그램과
봉사활동을 잘 만들어(create) 놓으면 회중은 여기에 참여(participate)함으로 성숙해질 것이라는 이 교회의 사역 철학이
회중의 삶의 현장에서는 생각만큼 열매가 없었다는 것으로 밝혀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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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러한 비평의 시각에 대해 두 가지만 지적하고
싶습니다. 첫째는 이 책(Reveal..)의 의도는 윌
로우크릭교회의 핵심 타겟 회중인 ‘해리와 매리’에 대한
근본적인 부정은 아니었다는 것입
니다. 즉 이미 크리스천이 된 교회 성도들의 영적 성숙
프로그램에 대한 전략적인 방향전환일
뿐, 이 교회의 존재기반인 구도자예배 사역 자체를 뿌리 채
부인하는 ‘실패’는 아니었다는 것
입니다.
 
두 번째는 안타깝게도 옥 형제의 비판의 목소리에는 30년
목회 현장에서 잃어버린 영혼에 대
한 뜨거운 열정에 사로잡혀 눈물과 피땀흘려가며 회중과
씨름해온 한 탁월한 리더의 헌신적
인 열정에 대한 존경과 격려는 없고, 실수하고 부족한
리더에 대해 비난하는 태도만 배어있
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실수했다”>
한편, 부끄러운
교회의 치부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일급비밀 내부문서를 백일하에 드러낸 윌
로우크릭교회의 핵심 리더십(그렉 허킨스와 콜리 파킨슨)의
결단도 놀라운데, 이 연구 결과에
대한 빌 하이벨스의 반응은 더더욱 존경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이 보고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고, 인정했습니다. 작년 리더십
서밋(Leadership Summit)에서 전 세계 교회지도자
수만 명 앞에서 “우리가 실수했다(mistake)”고
겸허하게 고백했습니다. 중년의 자신은 물론
교회를 향한 자명종(wake-up call)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일부 한국 인터넷 언론은 이를 ‘실패’로 보도했는데 지나친
과장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초대형교회 담임 목사가 이러한 고백을
진실되이 할 수 있다는 것, 실수를
인정하며 과거를 지워버리고 근본부터 다시 시작하려는
윌로우크릭교회의 열린 태도를 보면서
적어도 그동안 이들이 성장을 위해 일부러 마케팅 수법을
이용함으로 거짓된 가설(assumption)
에 물든 비난받아 마땅한 교회가 아니었음을 증명해준다고
확신합니다.
 
<무너지는 구도자와 신자 사이의
벽>

이들은 이미 새로운 세대와 새로운 회중의 변화를 감지하고 예배의 방향을 조정하기 위한
내적 개혁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2001년부터 이 교회
뉴커뮤니티 워십리더 섬겨온 커트 코필드
(Curt Coffield)에 의하면, 실재로 현재
윌로우크릭교회에서도 ‘구도자 예배’ 참석자들과 주중 ‘신
자들의 예배’ 참석자들 사이의 벽이 차츰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 말은 참석하는 회중의 분포도가 바뀌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즉 교회에 대한 실망과 상처가 있는 베이비부머 세대 구도자에서 교회에 대해 아무런
저항감이 없는 포스트 베이비부머 세대 구도자로 바뀌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변화에 따라
윌로우크릭의 예배 정책이 향후 수년간 어떤 형식으로 바뀔지 매우 기대가 됩니다.

 
이처럼 포스트모던 사회 속에서 예배 회중의 구성원을 말할
때, 우리의 회중 스펙트럼은 과거와는 명백하게 달라져야 합니다. “온전한 예배는 온전한
신자만이 가능하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비신자들이 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구호는 복음전도를 가로막는 말로써 위험수위가 높습니다.

 
성경 어디에서도 이들이 절대로 예배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예배당 문 앞에서 저지하라는 구절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모겐달러(Morgenthaler), 던(Dawn), 올슨(M. Olson), 웨버(R. Webber) 암스트롱(R. Armstrong) 등 많은
예배학자들이 ‘진정성 있는 예배에 비교인들이 더욱 관심을 갖는다’는 의견을 지지합니다.

 
이유정 목사(한빛지구촌교회 예배 디렉터,
좋은씨앗(CCM))

[이유정]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최근 시애틀 평강교회 집회를 마친 다음날, 오승현 전도사와 함께 후배 피아니스트 안선 집을
방문해서
오랜만의 반가운 회포를 풀고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숙소가 넓은 만 건너편에 있는 관계로 페리
호를 타고 건너 야 했습니다.
가는 길 앞차들이 속력을 내지 않아 겨우 제 시간에 도착했는데 이미
만 차(boat is
full)였습니다. 코앞의 뱃길을 포기하고 먼 길을 돌아와야 했지요. 문득 시애틀에 사는
모 교회 선배 원순이 전도사님이
생각났습니다. 선배는 1년 전에 폐암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상태
시애틀에 오면 문안하려고 했는데, 혹시나 해서 전화를 걸었더니 마침 돌아가는 길목 인근에서 15분 즈음 남쪽에 살고 있었습니다. 스케줄 상 이날이 아니면 방문이 불가능했기에 바로 달려갔습다.
 
금만 캐라
마중 나오신 선배 아버님의 갑작스런 접대로 저녁을 먼저 하게 되었습니다. 이 분은 저의
모교회인 서울 문화촌 소재 홍성교회에서 유명한 분이셨습니다. 교회를 핍박하고, 예수 믿는다고
자식들까지 집에서 내 쫓는 무서운 분이셨지요. 그런데 그 분이 91년도에 미국에 와서 너무 심심해서
성경을 읽다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3년 전 이곳을 방문했을 때까지 만도 여전히 다가가기 어려운
분이셨는데 이번엔 달랐습니다. 딸의 아픔을 가까이 겪으면서 신앙이 연단되셨는지 한마디 한마디가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말도 안 되는 목사도 있고, 말도 안 되는 장로들도 있어. 성도이건
목사이건 자
기 비즈니스 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그러나 이런 것에 좌우될 필요는 없어. 목사님이 설교를 못해
도 불평할 필요가 없어. 금을 캐러
갔으면 금만 캐야지 돌까지 캘 필요는 없잖아. 아무리 설교를 엉
으로 해도 그날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금이 있거든.”
 
머리에 망치를 한 대 맞는 듯 했습니다. 그토록 복음을 핍박하던 과거의 모습은 온대간대
사라졌습니
다. 암 투병 중인 딸의 아버지로
보기에는 그 고백이 너무 건강하고 힘찼습니다. 70대 노 성도의 입에서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는 말씀마다 제 심부를 찔렀습니다.
 
폐암을 이긴 여장부
식사를 마치고 드디어 선배를 만났습니다. 처음 얼굴을 본 순간 믿을 수 없을 만큼 건강한
모습에 또
한 번 놀랐습니다. 처음 폐암을
발견해서 의사가 개복했을 때는 이미 폐의 좌우에 모두 번져서 수술도
할 수 없는 상태까지
갔었습니다. 의사는 2달 안에 죽으니 집에 가서 조용히 기다리라고 했답니다. 그
런데 선배는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답니다. 그녀의 내면에서 터져 나오는 소리는 “죽음을 인정할 수
없어, 나는
살꺼야!”였습니다. 몇 번의 진단을 통해 의사는 폐가 돌처럼 단단해져서 더 악화 되었다는
말만 반복했답니다.
그러나 선배의 내면의 소리는 단호했습니다. “나는 아직 하나님을 위해 할 일이
많아. 나는
살아야 해” 그래서 24시간 찬양과 기도하는 IHOP이라는 곳을 찾아
가서 하나님께
매달렸
습니다. 주위의 교회와 한국의 가족이 다니는 교회에서 기도로
동참했습니다. 3개월 뒤, 믿음의 기도는
기적을 낳았습니다. 의사들이 놀랐습니다. 아주 작은 혹 하나만 남고 암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그 극한 고통 가운데서도 순간순간 써내려간 수기가 200페이지가 넘는다니 역시 죽음의 그림자는 선배와 어울리지 않습니다. 헤어질 때 오히려 방문한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시는 선배의 목소리는 정상인강인한 듯 힘이
넘쳤습니다.
 
 
잠 못 이루는 밤
이날의 독특한 경험 때문인지 숙소로 돌아와서도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솔직히 선배를
만나러
가면서 내심 예상했던 분위기는
어둡고, 자조 섞인 병실의 위로, 격려 모드였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문
안 갔던 우리가 도전받고
돌아왔습니다. 오 전도사의 말처럼 ‘페리호를 타지 못한 뜻’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크리스천의 삶이란 거꾸로 사는 삶입니다. 편안한 뱃길 대신 돌아가는
길이 오히려 회복과
충전의 길이
되었습니다. 노년의 주름이라도 복음의 생명력에 젖을 때 오히려 청년보다 더 예리한 분별
력을
발휘합니다. 죽음의 그늘도 기도의 집중력에 노출될 때 그 사기(死氣)를
잃고 정상인보다 더
활기
찬 생기를 뿜어냅니다.
 
두 분의 삶은 거꾸로 사는 삶의 산 증거입니다. 선배의 아버지… 비록 병이란 병은 온몸이
다 지니고 있
는 아내와 함께 넉넉지 못한 삶을
사는 노년의 나이이시지만, 복음 안에서 누리는 영혼의 자유는 세상
누구보다 부요해 보입니다.
원순이 전도사님… 비록 폐암 말기를 선언한 의사들의 사형선고 앞에 무능
력한 중년의 여인이었지만,
하나님 안에서 믿음으로 고백한 불굴의 투지는 이미 세상이 이길 수 없는
승리자의 모습이었습니다.
 
지금도 제 눈 앞에는 외로운 노년의 위기는 간대없고 신앙에 올인하신 어르신의 단호한 낯 빛,
가장 극심
하다는 폐암의 고통을 참아내며
하나님의 치유의 강에 온 몸을 내어던진 선배의 여장부다운 패기, 그리
고 이미 99%의 암을
극복하고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꿈꾸는 그 생명력 넘치는 눈빛이 아른거려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이유정] 광우병사태와 인간의 존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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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국 광우병 사태를 보면서 마음이 찹찹합니다. 우왕좌왕하는 정부도, 초등학생까지 참여하는 국민적 촛불시위도, 종교계의 대처 그 어느 곳에서도
가슴 시원한 해법이 보이질 않습니다. 생산적인 논쟁보다는 ‘디지털 포퓰리즘의 승리’, ‘천민 민주주의’ 등 유희적 논쟁으로 매체가 들끓습니다.
비난을 위한 비난의 소리가 더 깊은 불신의 병을 낳을까 염려됩니다. 광우병을 둘러 싼 몇몇 입장에 묘한 공통점이 드러납니다.

시민들과
야당, 국민대책본부가 여당과 정부, 대통령을 향해 쏟아내는 성난 목소리, 그 속에는 ‘인간의 존엄성’이 사라졌습니다. 플래카드마다 입에 담기조차
어려운 비난의 소리가 가득합니다. 질책을 넘어 인격 모독입니다. 대통령을 무슨 길거리 촌부 취급합니다. 참여정권을 심판한다는 국민의 힘에 의해
압도적 표차로 뽑힌 대통령이 100일도 안 되어 그 국민에 의해 짓밟혔습니다. 국민의 권위가 국민에 의해 무너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국민의
생존권을 책임지는 나라의 권력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국민 생명이 담보가 될 소지가 있는 소고기 협상 과정에서 국민을 배려한 최선의 신뢰적 자세를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문제가 터지고 촛불시위가 일어났을 때 국민의 입장에서, 민초의 마음을 읽으려는 낮은 자세도 없었습니다. 국정의
책임자들이라면 적어도 국민들이 ‘국민의 생명의 존엄성과 인권을 헌신짝처럼 취급하는’ 느낌이 들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일부
크리스천 정치인이나 목회자가 ‘사탄의 세력’ 운운하는 것도 조심했어야 했습니다. 비 신앙인도 인간의 생명 그 자체로 존엄합니다. 긍휼과 사랑의
언어로 존중해야 합니다. 교회가 사회의 모든 현상을 성속의 이분법적 태도로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오만입니다. 그 어느 종교보다 인간의 존엄성을
귀하게 여기는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온 지 100년… 최근 사회에 기독교 불신과 안티세력이 급속도로 커져가는 것이 아이러니합니다. 반기련 등
수십 개에 달하는 안티 기독교 단체들이 ‘한국사회에 패악질을 일삼는 기독교를 박멸’하겠다고 도전합니다. 심상치가 않습니다. 이를 한국교회 총체적
난관으로 볼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 자정의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존엄성’ 이것은 대한민국이 추구하는 자유 민주주의의 기본 철학이며, 교육의 핵심개념입니다. 아무리 큰 잘못을 해도 인간의 생명이 붙어 있는 한
인간은 존엄합니다. 아무리 극악무도한 사형수라도 형틀에서 마지막 죽기 직전의 순간만큼은 엄숙합니다. 바로 생명 그 자체가 존엄하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은 80년대 민주화 운동 이후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이명박 정부에 이르기까지 민주주의를 기치로 삼고 달려왔습니다. 이제 그
민주주의가 추구해야 할 가치와 성숙이 무엇인지 돌아볼 때 입니다. 80년대와 사뭇 달라진 좌파우파의 논쟁도, 물고 뜯기가 끝없는 국회의 야당과
여당도, 권력의 추가 정부에서 국민에게 이동하는 시국현장에서도, 노동자와 사주 사이의 협상 테이블에서도 인간존중의 언어와 소통의 미는 없고
비난과 반목질시만 난무한다면 이는 민주주의의 역행입니다.

마가복음
5장에는 12년간 혈루증으로 앓고 있는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당시에는 혈루증을 부정한 병으로 취급했기에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없었고,
고통스럽게 살다가 생을 마쳐야했습니다. 그 사회에서 존재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의사들은 말합니다. “이제 당신은 안 돼요! 이 병은 더
이상 치료 불가능합니다!” 병자에게 신뢰를 주지 못하고 오히려 끊임없이 괴로움을 주었다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종교 지도자들도 말합니다.
“당신은 부정한 여인이요! 사람들에게 나타나지 마시오.” 종교적 기준으로 가차 없이 처단합니다. 이처럼 주변에서 들려오는 불가능과 절망, 비난의
소리에 갇혀 있던 여인이 예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문을 박차고 무리를 뚫고 예수께 가까이 가서 그 옷자락을 만진 순간 즉시 혈루병의 근원이
말랐고 병이 나았습니다. 근본적인 치유가 일어났습니다. 12년 동안 짓밟혀 있던 이 여인의 가치는 그 짧은 순간 예수 안에서 회복되었습니다.
예수 앞에 나아가기 위해 인간의 외형적 껍데기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저 살아있는 존재 그 자체로 충분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비난, 불신, 정죄, 절망의 소문이 아닌 예수의 소문이 필요합니다. 이름 난 대형교회의 소문이 아닌 예수의 소문이 필요합니다.
예수를 만나기 위해 그 어떤 정치적 입장, 이데올로기, 학술적 권위, 종교적 허울도 필요 없습니다. 그저 존재의 회복을 열망하는 솔직한 한
생명이면 충분합니다. 이 예수 복음은 개인과 사회, 국가가 추구해야 하는 가치와 신념의 근본적인 회복과 변혁을 가능케 합니다. 위기는
기회입니다. 이번 광우병 사태의 위기가 오히려 실종된 인간의 존엄성을 다시금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라며…

이유정
/ 한빛지구촌교회 예배목사, CCM 남성듀엣 좋은씨앗

[이유정] 옥합을 깨뜨린 찬양, 달렌 첵의 ‘Shout to the Lord’

달렌 첵이라는 여성 예배인도자를
소개합니다. 현재 전 세계 예배찬양의 흐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호주의 힐송쳐치의 예배 담당 목사입니다. 그녀가 작곡한 “내 구주
예수님(Shout to the Lord)”이란 곡은 1993년 처음 발표되어 전 세계 50여개 이상의 음반에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어
녹음되었습니다. 그가 속한 힐송교회에서 해마다 제작되는 경배와 찬양 실황 음반은 순식간에 전 세계 교회에 보급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쓰임 받게 된
그녀의 젊은 시절이 문득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그녀가 쓴 책을 뒤져보았더니, 달렌의 시작은 아주 단순했습니다. 단지 주님을 알기 위해 교회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커피를 타고, 심부름하고, 무슨 일이든지 할 일이 있으면 가리지 않고 하고 싶어 하는 젊은 여성이었습니다. 힘을 다해 자신의
삶을 교회에 헌신한 한 자매에 불과했습니다. “내 구주 예수님”은 그런 그의 헌신의 여정에서 너무나 지쳐있던 상황에서 탄생한 곡이랍니다.

보통 우리는 자신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그곳에 자신의 시간과 관심, 에너지와 돈, 그리고 사랑과 헌신을 쏟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깨달은 그녀는 결혼하고 2명의
자녀를 키우면서도 교회에서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자원으로 봉사했습니다. 그러나 생계를 위해서는 오토바이 판매점을 하며, 라디오, 텔레비전 광고,
배경음악 등 닥치는 대로 노래하며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그런 삶에 지치고, 좌절을
느끼던 어느 날 아침, 은행에서 잔액 초과 고지서가 날아왔습니다. 그녀는 이런 생각이 들었답니다. “하나님께 내 인생을 드리기로 약속했지만, 내
꼴 좀 보세요. 하나님, 더 이상 하루도 살 수 없어요. 이제는 더 이상 못하겠어요, 하나님 당신의 약속은 다 어떻게 된 겁니까?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믿을 수가 없어요.” 이런 숨 막히는 좌절감 속에서 갈급한 심정으로 성경을 읽고 있었는데 시편 97~100편에서 강력한 살아있는
말씀으로 다가왔습니다. 바로 피아노 앞에 앉아서 20분 만에 흘러나와 완성된 곡이 바로 “내 구주 예수님” 입니다. 당시 이 곡을 들은 담임
목사는 이 곡이 전 세계에 불릴 것을 예언했고, 결국 그렇게 실현되었습니다. 비록 달렌이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과정에서 고통과 좌절을
경험했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은 그녀를 보석과 같이 연단하셨습니다. 결국 그녀를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예배사역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제가 한빛지구촌교회에서 풀타임
예배디렉터로 헌신한 지 벌써 6년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그동안 예배사역에 헌신한 봉사자들도 30명에서 160명으로 늘어났고, 팀도 30여 팀으로
늘어났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결코 자랑할 일이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따름이지요.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은 이 사역에 뛰어든
각 사람이 어떠한 헌신을 주님께 드렸는가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항상 근본으로 돌아가자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봉사하고
사역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엇 때문에 매주 남보다 일찍 나와서 남보다 늦게 교회 문을 나섭니까? 교회 사역을 위해 평일에도 시간과 땀을
흘려야 합니까? 바로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과 헌신 때문 아닙니까?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헌신은 허공을 때리는 것입니다.

달렌이 보여 준 주님을 향한 그
순순한 사랑처럼, 각자의 헌신의 모양은 달라도 제각기 사랑의 분량을 담아 드리는 거룩한 지역교회 봉사 사역의 현장마다 눈물과 땀방울의 증거들이
드러나기를 원합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노동자 1년 치 월급에 해당하는 향유 옥합을 깨뜨려 발을 닦아 드렸을 때, 이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예수님은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막 14:9)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할 것이라며 자랑하셨습니다.

이 처럼 매 주일마다 한 곡을
부르더라도 옥합을 깨뜨리는 헌신의 찬양, 주일학교 한 아이를 대할 때도 힘을 다한 사랑과 헌신의 봉사, 음식을 만들고,
설거지를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주님께 드리는 자세로 임할 때, 그 상급이 하늘에 차곡차곡 쌓일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헌신을 기뻐하신 예수께서 온 세상에 그 헌신을 자랑하실 때가 올 것입니다. 그것은 ‘얼마나 화음이 아름답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얼마나 훌륭한 교재를 사용하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얼마나 질 좋은 음식을 준비했느냐?’의
문제도 아닙니다. 바로 ‘헌신의 문제’입니다. ‘순종의 문제’입니다. ‘드림의 문제’입니다. 코스탄 여러분, 다시 한 번 기초로
돌아갑시다.

-이유정 목사(한빛지구촌교회
예배 목사, CCM 남성듀엣 좋은씨앗) –

[이유정] 다음 세대의 리더십을 준비할 때…

최근 7년 만에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14일간 수도권, 부산, 대구 등 빡빡한 일정을 뒤로하고 지독한 목감기를 휘감고
돌아 왔습니다. 너무나도 달라진 고국의 모습에 거대한 도시 속의 서투른 이방인처럼 모든 것에 어리둥절했지요. 인천공항에 1시간 일찍 입국해서
공중전화를 이용하기 위해 거의 30분을 허비했습니다. 컴퓨터 모니터 같은 화면에 전화 이외에도 각종 정보를 이용할 수 있는 새로운 모델의
전화기인 모양인데, 나 같은 이방인들이 그 사용방법을 익히기 위해 머리 싸매고 공부를 해야 하는 한국의 공공문화가 무척 낯설었습니다.

어느 곳을 가도 원색의 색감과 엄청난 양의 광고와 표지판으로 쏟아지는 정보들, 공간이란 공간은 온갖 고층 빌딩으로
채워버린 서울의 비 환경 친화적인 발전상, 서울을 중심으로 위성도시를 잇는 모든 곳마다 가득한 수 십층의 고층 아파트들, KTX 고속열차로
서울-부산을 3시간 반 만에 잇는 전국의 일일생활권화, 거미줄처럼 서울과 외곽도시들을 잊는 지하철의 위용과 그 안에서 하루 종일 쏟아내는
TV화면의 뉴스와 프로그램들, 빨강, 파랑, 초록으로 새롭게 규정된 도시 내, 도시 간 버스들의 일사불란한 움직임들, 어느 곳을 가도 도로를
가득 메운 차들, 그 속에서 어디론가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는 시민들의 모습들 모두가 생소했습니다. 중산층이 무너지고 빈부의 격차가
확연히 벌어진 작금에 서민 계급의 탈출을 위한 몸부림은 신성한 공교육 현장을 무너뜨리고 무리한 사교육을 부추기는 부모들의 열기로 전국이 들끓는
현상을 보면서, 이곳이 불과 9년 전에 내가 숨 쉬고, 익숙하게 살던 바로 그 나라였나 싶었습니다.

짧은 기간 동안 개척교회로부터 대형교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교회들을 방문했습니다. 그 가운데 위성도시인 평촌, 산본을
중심으로 엄청난 성장을 하고 있고 한때 제가 음악전도사로 섬겼던 새중앙교회(박중식 목사), 부산 해운대 신도시로 이전하면서 강남 이남에서는 가장
큰 교회로 성장한 수영로교회(정필도 목사), 분당과 수지에서 수평이동을 최대한 억제하고 불신자를 중심으로 고속 성장하고 있는 지구촌교회(이동원
목사)를 섬길 기회가 있었습니다. 한편으론 살아있는 교회성장의 생동감을 느끼면서, 다른 한 편 한국교회가 위성도시 초대형교회를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는 듯한 착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문득 신음하는 한국 사회에 미치는 교회의 영향력에까지 생각이 미쳤습니다.

불과 3년 안팎으로 한국교회 영적 거인들인 1세대 목회자들이 대거 정년퇴임을 앞두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 말은 세계적인
교회성장이란 영적 유산이 다음 바톤인 386세대에게로 넘어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훌륭한 선배들이 본보인 희생과 공로를 인정하고, 후세를 위한
역사적 평가를 남기며, 감사함으로 받아야 하지만, 더불어 풀어야할 숙제도 만만치 않습니다. 교회성장이라는 게토에 갇혀 세상과의 접촉점을 잃고
땅에 떨어진 기독교 리더십을 회복하는 일, 바로 다음세대의 역할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전망해 봅니다. 즉 우리 세대의 영적 리더십은 몇 명의 영적
거인을 재편하는 형태를 지양하고, 기독교의 선한 영향력을 세상에 미치는 가교역할을 감당할 각계각층의 다양한 전문 사역자들이 건강하게 세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목회자와 평신도를 구분할 일이 아니지요. 이것이 하나님 나라 회복의 진정한 모델이라고 봅니다. 이를 위해
한국교회는 거대 기독교 유산의 기득권 세력다툼에 휘말리지 않도록 겸허함으로 미래를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비록 2주라는 짧은 일정이었지만 그래도 7년의 간격을 일순간 없애버린 고밀도 농축된 만남의 시간들이 있었기에
감사했습니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사랑하는 일가친족들, 찬양사역계의 선후배들, 디지털 컨텐츠로의 재편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크리스천 음반
비즈니스계와 일반 출판사에서 기독 출판물을 기획하는 후배들, 갑작스런 연락으로 만난 대학동창들, 중소형 교회에서 경험한 따스한 사랑과 예배의
깊이들, 그 무엇보다 이제는 고인이 되어 고이 잠든 어머니의 묘소 방문과 그분께서 평소에 좋아하셨다던 음식점 방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만남들이
아직도 가슴 가득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그래서 만남이란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인가 봅니다. 한국교회가 세상을 향한 아름다운 만남의 영향력을
회복함으로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그날이 뼈에 사무치게 기다려집니다.

[이유정] 부흥의 전조, 어두움의 도전

은혜의 자리에는 항상 어두움의 도전이 있습니다. 지난 2007년 가을 LA지역 침례교회협의회 주최로 진행된 좋은씨앗, 조재옥
찬양 간증집회 때 있었던 그 도전의 현장을 나누고 싶습니다. 이 집회는 남침례교단 소속 LA지역 중소형 교회 중심으로 한 달에 1회씩
함께 모여 서로 교제도 하고, 집회도 갖는 작은 교회 연합행사입니다.

당시 저희 교회에서 진행되던 90일 작정 새벽기도회가
체질화되었는지 이날 새벽부터 눈이 떠졌습니다. 한빛지구촌교회를 위해, 그리고 이날 저녁집회를 위해 기도를 하는데 ‘습관적인 근심과 염려에 대한
짐’을 내려놓으라는 메시지가 자꾸 떠올라 이 부분을 놓고 묵상하며, 중보 했습니다.

이날 스케줄은 제 의도와 상관없이
빡빡했습니다. 아침부터 시작하여 오후 4시에나 끝난 방송국 인터뷰, LA중앙일보 인터뷰, 식사 교제 등으로 사알짝 지쳐 있었는데, 집회 장소인
예닯교회까지 이동하는데 우여곡절을 겪으며 차 속에서 3시간 가까이 시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마음도 육체도 지칠 대로 지쳐있는 상태로
도착하자마자 음향 셋업과 찬양팀 연습을 시작했는데, 잇따른 음향 시스템 문제로 시간을 낭비하며, 식사도 못한 채로 집회 시작 시간에 가까스로
연습을 마쳤습니다.

이날 저녁 집회를 실패케 하려는 영적인 싸움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이 상태에서
2시간짜리 집회를 한다는 것이 불가능해보였습니다. 찬양팀과 함께 밖으로 나와서 기도했습니다. 모든 환경과 상황을 초월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기도를 짧지만 뜨겁게 올려 드렸습니다.

집회가 시작되었습니다. 8개의 지역 교회에서 오신 담임 목회자들과 성도들
150여명이 모였습니다. “이날 집회가 시작되기까지 여러분이 어떠한 마음으로 이곳에 도착했는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특별하신 계획이 있다고
믿습니다. 오늘 밤 모임을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기대감으로 기쁘게 시작합시다.” 말을 던진 순간 나도 모르는 힘이 솟구쳤습니다.

뜨거운 찬양과 간증이 이어졌고, 와이프의 간증과 찬양 “아침안개 눈앞 가리듯”에 이어 제가 예수님 만난 간증을 하면서 찬송가
455장을 함께 부르는데, 갑자기 오열이 터졌습니다. 성령님께서 회중의 마음을 만지신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왠지 마음이 너무 무겁고
아팠습니다. 찬양을 마치면서 예정에 없었던 통성기도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새벽부터 하나님께서 기도시키셨던 바로 그 부분을
회중에게 토해내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마음에 있는 모든 짐을 십자가 아래 내려놓으십시오. 한 치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우리
인생에서 관계의 짐, 미움의 짐, 미래에 대한 두려움의 짐, 습관적인 근심, 부정적인 생각들, 비교의식, 남을 비교하고, 비판하는 생각들을
예수의 십자가 앞에 내려놓으십시오.”

성령의 강력한 임재 가운데 회중은 눈물 바다가 되었습니다. 뜨거운 기도의 열기 속에 이곳에
모인 심령들의 아픔, 고통, 죄로 인한 탄식들이 마치 제 고통처럼 느껴졌습니다. 눈물 콧물 쏟으며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께서 치유하시고,
회복하시는 은혜가 가득했습니다.

이후 주님을 향한 사랑을 고백하고, 서로 축복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날 모인 회중을 확인해보니
Junior high school부터 노년층까지 1세와 1.5세, 2세가 모두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국말에 익숙치 않은 2세들도
있었습니다. 세대와 언어를 초원해서 1세가 1.5, 2세가 서로를 향해 축복하고, 사랑을 고백하는 시간에 이어 이날 오신 목회자들을 축복하는
시간을 통해 8개의 교회가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감격스런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지칠 대로 지쳐있던 저와 아내를 통해 하나님께서 은혜를 쏟아
부으셨습니다. 어떻게 집회를 마쳤는지 신기하기만 합니다. 100% 하나님께서 일하신 것입니다.

집회를 마치고 2세 여학생 한 명이
다가왔습니다. 자신은 솔직히 무슨 말인지 100%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성령께서 마음을 touch하셔서 큰 은혜를 경험했다고 했습니다. 언어를
초월해서 역사하신 성령님께 감사했습니다. 이후 이날 일어났던 간증들을 계속 듣게 되었습니다. 큰 기대감 없이 참석했다가 강력한 하나님의 음성과
함께 회개, 치유, 회복을 경험했다는 이야기도 듣습니다. 목회자들 간에 껄끄러운 부분도 있었지만 이날 성령께서 touch하셔서 회복된 일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으시는 부흥의 전조에는 항상 공중 권세 잡은 영(엡 2:2)과의 싸움이 있습니다. 내 삶에 짙은 어두움이
있을수록 하나님은 바로 그곳에 부흥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약한 자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