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근상] 요즘은 스피커 날라 줄 사람 찾는 것도 쉽지 않다

이코스타 2005년 11월


오래 전에 이코스타에 ‘찬양을 이야기하자’는 타이틀로 잠시 글을 연재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사실 찬양을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별로 말할 만한 지식도 사실 내겐 없는 것 같다. 그리고 내게 밑천이 떨어진 것 같은 느낌도 든다. 그러나 사실은 과연 누가 이런 유의 글에 관심이나 가질까 하는 생각이 더 많이 드는 요즘이다.


요 즘 우리 젊은 세대들이 성경을 연구하고 공부하는 것보다는 ‘찬양’이라는 음악 을 듣고 ‘워십콘서트’라는 눈앞에 펼쳐지는 시각적인 즐거움을 얻는 것을 훠얼씬 더 좋아하는지를 모르는 바 아니다. 그래도 청년 사역한다고 이들과 함께 어울린 날들이 꽤 지난 것 같다. 그런데 요즘 들어 자꾸만 드는 생각은 본인을 포함하는 우리 세대가 본질보다는 피상적인 겉모습에 점점 더 연연해 한다는 생각만 들어 한숨지을 때가 있다.


물 론 많은 노력과 투자가 필요한 어떤 ‘공부의 문화’보다는 단지 앉아서 감상하기만 하면 되는 ‘누림의 문화’가 누구에게나 다 편한 상대일 것이다. 그런데 정작 그런 누림을 통해서 무엇을 얻었고 어떠한 사람으로 변화해 가고 있는지 진지하게 물어보면 남는 것은 의문부호뿐일 때가 많다. ‘WOW Worship’이라는 타이틀이 말해주는 것처럼 정말 와우! 하고 한 번 외친 다음 그 예배에서 무엇을 얻었는데? 물어보면 답변을 듣기까지 꽤 오랜 적막이 흐른다. 예를 들어서 느낌이 무지하게 좋은 워십 콘서트- 말하자면 조명도 기가 막히고 콘셉트도 좋았고 안개효과에다가 어마어마하게 많은 회중들이 함께한 워십 실황-를 함께 시청하고 나서 연이어 있는 어떤 행사에서 섬겨 줄 자원봉사자가 필요하다고 크게 목소리를 높여도 자원봉사자를 구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다들 선약이 있거나 개인적인 일들 이 어찌 그리 많은지 이들과 깊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일은 서울 하늘에서 가끔 별 들을 보게 될 경우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기회가 되면 찬양팀에서 꼭 같이 싱어나 연주자로 무대를 장식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아도 그 시간을 위해 함께 스피커를 날라 줄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요즘은 그냥 스피커만 날라줄 사람 찾는 것도 쉽지 않다.


배 부르고 등 따습게 되면 만사형통인 우리 인간 본연의 모습인가. 아니면 우리 세 대에 유난히 눈에 띄는 현상인가. 혼자 이런 고민을 하고 있나 했더니 이미 다른 사람들이 눈에 불을 켜고 우리 세대를 연구하고 있었다. 최근 연합 뉴스에 실렸던 글이다.


“1990 년대 중반 ‘X세대’로 불리며 국내에서 세대 연구를 촉발시킨 2635세대(1970∼1979년생)는 지금 어떤 방식으로 살고 있을까. 제일기획은 올 5월부터 7월까지 26∼35세 남녀 640명과 36∼45세 남녀 160명을 대상으로 면접조사와 심층 인터뷰를 진행해 10년 전 X세대였던 2635세대의 특징을 담은 ‘우리 시대의 미드필더, 2635세대’ 보고서를 30일 냈다. 보고서는 현재의 2635세대가 △자기중심적(Individualized) △진보적(Innovative) △현실적(Into the reality) △ 유행 추구적(Inclined to fashion) △다양한 문화에 개방적(Inter-cultural)인 5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이런 특징을 바탕으로 2635세대를 ‘5I세대’로 이름 지었다.”


아하! 바로 우리 세대의 이야기네. 얼추 비슷하게 다 맞췄는데? 혼자 고개를 끄덕인다.


” 국내 전체 인구의 17%, 경제활동인구의 24%를 차지하는 5I세대는 1970년대 경제성장기에 태어나 1990년대를 거쳤다. 정치적 안정(Integration) 정보화(Information Society) 다양화(Inter-nationalization) 외환위기(IMF) 자립(Independence) 등 ‘5I’의 시대경험을 공유한다. 해외여행이 자율화돼 ‘배낭여행 1세대 ’인 동시에 경제적 풍요 속에서 다양한 문화와 상품을 소비한 ‘문화 향유 1세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념이 약화된 뒤 대학을 다녀 386세대와 같은 역사적 사건에 대한 집단 경험은 없다. 외환위기 이후 청년실업으로 방황하기도 했다.”


그 렇지 바로 그렇지 내가 두 눈 크게 뜨고 치열하게 살아왔던 8-90 년대의 일들이 쏜살 같이 지나간다. 그리고 나의 눈은 기사의 다음 구절에서 멈추고 만다. “자기중심적(Individualized) 가치관 = ‘우리’를 강조하는 386세대와 달리 2635세대는 ‘나’가 우선인 세대다.’사회규범보다 내가 원하는 바가 중요하다’는 질문에 54.2%가 긍정했으며 ‘나는 다른 사람과 다른 개성 있는 삶을 살고 싶다’는 물음에는 52.5%가 그렇다고 답했다. 반면 같은 질문에 대해 386세대는 각각 45%만이 그렇다고 답해 차이를 보였다. 또 2635세대와 386세대 중 자기개발과 관련된 활동을 하고 있다고 답한 비율은 각 각 36.1%와 26.3%로 조사돼, 2635세대의 자기중심적 성향이 자기 개발에 대한 투자로 이어지는 것으로 분석됐다.”


첫 번째 I에서 어느 정도 나의 고민에 대한 가닥이 잡혀가는 느낌이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진보적(Innovative)인 이성관ㆍ결혼관, 현실적인 소비관(Into the reality), 유행에 민감한(Inclined to Fashion) 세대, 개방적인(Inter-cultural) 세대, 이 모든 현상들에 대한 풀이도 첫 번째 단추에서 다 호박 줄처럼 쑤욱 하고 연결이 되어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으로 동의하는 마음으로 끄덕이게 된다.


*기사 참조
( http://news.empas.com/show.tsp/cp_yt/soc00/20051030n00564/)


중 요한 것은 그렇다면 무엇인가? 그냥 그러려니 하고 포기를? 아니 그럴 수는 없지. 제일기획도 포기하지 않는 2635세대를 왜 내가 포기하나? 누구말대로 포기는 김장할 때만 쓰는 용어가 아닌가? 찬양을 좋아하는 소비자로서의 회중은 많아도 예배를 목숨처럼 여기는 제자를 보는 것은 천연기념물을 보는 것처럼 어려운 이 시대에 2635세대를 바라보는 나에게 이러한 기사는 자연스레 기도문이 되고 만다.


” 하나님, 이 세대를 섬기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누림은 알아도 섬김은 구경하기 힘든 이 시대에 국내 전체 인구의 17%, 전체 경제활동 인구의 24%를 차지하는 조국의 젊은이들을 섬기는 한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현실적이고 손해 보지 않으려 하고 개방적이면서 또한 자기에게는 보수적인 이 세대에게, 엄청난 희생이 따르는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복음의 메시지를 온전히 전하는 한 예배자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이 글은 2005년 11월, 여전히 찬양을 이야기하며 살아야 하는 우리가 서있는 현재의 주소이다.

[조근상] 개인의 예배를 회복해야 한다

이코스타 2005년 9월


가끔은 예배인도를 하면서 그런 생각을 하곤 한다. 도대체 이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서 예배를 드리러 오는가? 혹은 이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면서 어떠한 생각을 하는가? 정말 하나님은 우리의 찬양과 경배가운데 임하시는 가? 단순한 감정으로 드리는 것이 아닌가하는 질문들을 수없이 내 자신에게 하는 경우가 있다. 단순히 나의 믿음이 부족하거나, 혹은 너무나 영적으로 충만한 나머지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있는 오류에서 벗어나 이러한 느낌은 특별히 은혜가 많은 코스타같은 집회나 혹은 교회의 부흥회 후에 찾아오는 생각들 중에 하나이다. 어느 교회의 한 청년이 수련회가운데 너무나 큰 은혜를 받고 돌아왔다. 그런데 은혜를 받고 돌아온 후에 시험의 시간들이 계속해서 형제에게 일어났다. 그 형제는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서 별의 별 방법을 다 동원했지만 수련회에서 가졌던 마음들을 회복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그 형제는 포기하고 다음의 수련회기간을 기다린다. 이런 스토리는 누구나 한 번은 경험했던 이야기일 것이다.


사 실 우리는 예배나 섬김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밝혀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통해서 내가 인정되어진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런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참으로 감사한다. 하지만 종종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기 보다는 우리가 사람들 앞에 드러나고 거기에 가치를 둘 때 우리의 근본 목적들이 상실되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공적인 예배는 사람들 앞에 서기 전에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정리하여야 한다. 즉 개인의 예배를 통해서 영혼을 정리해야만 회중들 앞에서 예배하면서 더 깊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어떤 공식처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 수 있다. 때로는 우리가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할 수 있고, 심지어는 죄 가운데 거하다가도 하나님께서 사죄의 은혜를 통해서 예배 안에서 새로워지는 놀라운 경험을 할 수도 있다.


하 지만 우리의 영혼을 변화시키는 것은 큰 집회나 어떠한 모임보다는 스스로 하나님 앞에 홀로 설 때 진정으로 우리의 영혼이 변화되는 것이다. 이 말이 큰 집회나 모임이 영향력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모임을 통해서는 하나님에 대한 갈급함과 변화의 동기를 만들 수는 있지만, 지속성에 있어서는 개인 스스로가 하나님 앞에서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그러한 예를 이야기하는 것이 많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선지자가 갈멜 산에서 바알의 선지자들과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그는 극심한 슬럼프에 빠졌었다. 그것도 바알의 신을 우상으로 삼는 아합왕의 아내인 이사벨의 단 한마디에 그 전날까지 그렇게 당당했던 하나님의 선지자의 모습은 사라지고 패자의 모습으로 나왔다. 하 지만 그런 엘리야에게 찾아가신 하나님은 결코 웅장하거나, 거대한 모습으로 다가오지 않으셨다. 아주 작고 세미한 음성으로 엘리야에게 다가가셨다. 작고 세미한 음성은 시끄러운 곳에서는 결단코 들리지 않는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경배와 찬양음악을 들으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생각하지 말라. 하나님 앞에 홀로 서야 하는 것이다.


내 개인의 삶에서 역시 마찬가지이다. 최근에는 너무나 많은 일들이 내게 생겨서 기도할 시간조차 없었다. 사역자가 기도할 시간이 없다니, 이 무슨 이야기인가! 사실 나는 새벽기도를 거의 매일 참석하고 각종 중보기도 모임에도 나가고 있다. 하지만 내가 말하는 것은 이러한 모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일대 일로 갖는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단순히 내가 죄를 짓고 짓지 않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개인적이 교제의 시간을 말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겠지만 하나님과 나는 알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한 번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놓친 후에는 다시 회복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곤 한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에게 개인 예배의 시간이 있는지 참으로 궁금하다. 하루를 묵상으로 시작하고 하나님 앞에 홀로 앉아서 경배와 찬양을 드리고 그 분의 음성을 듣기로 결정한다면 그것으로 훌륭한 예배가 될 수 있다. 그 예배는 어떠한 집회보다도 훌륭한 예배가 될 수 있다. 이렇게 하나님은 홀로 예배드리는 사람을 찾고 계신다.

[조근상] 무엇을 묵상하며 노래하는가?

이코스타 2005년 8월


오늘 날 현대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단에게 빼앗긴 것 중에 한 가지가 묵상하는 것이다. 묵상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되새기면서 그 뜻을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원래 이 묵상의 원어인 ‘메디칼루스’는 약이란 단어의 원어이기도 하다. 우리가 약을 먹으면 몸 안에 약이 들어와 온 몸에 퍼져가는 것처럼 우리의 생활 가운데 생각하는 것이나 사실이 우리의 내면으로 들어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처럼 하나님을 묵상하는 것이 우리에게 기쁨이 되고 우리가 많이 읽는 시편에는 묵상하는 사람의 형통함에 대해서 나와 있다. 사실 시편이란 찬양과 관계가 많을텐데 굳이 시편 기자가 묵상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찬양과 묵상에는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언급한 것처럼 현대 예배의 특징은 음악이 많은 경우에 예배에 영향력을 주고 있기 때문에 어쩌다보면 우리는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가 세상의 음악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을 예배하는지에 대해서 혼동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것을 구별하는 방법 두 가지는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이 누구인가와 그리고 노래를 부르는 그 가사가 누구에게 집중이 되어 있는가이다.


일전에 캘리포니아의 갈보리채플의 예배 모임에 참석했을 때, 나이가 중년이 넘은 예배인도자 한 분이 우리가 많이 부르는 ‘빛되신 주(Here I am to worship)이란 곡을 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분이 찬양을 대할 때 사랑스런(Lovely)같은 단어들은 연인들에게나 하는데 이제는 이런 단어들을 하나님께 부르는 것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부담없이 쉽게 하나님을 대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경외감이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아쉬워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우리가 예배 중에 부르는 찬양에 쓰이는 단어의 변화는 이 세대의 워십에 커다란 영향력을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최근의 찬양의 단어들은 묵상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보다는 음악적 색깔이나, 좀 더 사람들에게 감성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단어들을 택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물론 글을 쓰는 내가 점점 더 나이가 먹어간다는 의미가 되기도 하지만, 그리고 이전에 많은 선배들이 로마서 16장 19절을 부르면서 외치던 나에게 경고해 주었던 이야기를 내가 반복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 사실 우리가 어떠한 곡을 부르면서 예배에 몰입할 수 있고 때로는 그 곡과 전혀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을 수가 있다. 나는 한 번도 로마서 16장 19절을 할머니들과 할아버지들이 모인 실버대학에서 주제곡으로 선택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내가 부르면서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이 곡들을 통해 이 세대가 가지는 공감대를 형성해야만 하나님께서 찬양을 통해 주시는 은혜를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외로 우리는 예배 중에서 하나님을 묵상하고 우리가 부르는 찬양의 가사보다는 다른 것들에 신경을 많이 쓰곤 한다. 이 새로운 곡을 사람들에게 어떻게 효과적으로 가르칠 것인가, 아니면 이 빠른 곡을 과연 회중들이 소화할 수 있을까하는 문제로 인해 자기 자신도 의심가운데서 예배를 드리는 경우가 많다. 찬양의 문을 지나 주님이 계신 지성소로 들어가는데 제일 필요한 것은 주님을 묵상하는 것이다. 주님을 묵상하도록 해야 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선택한 음악적인 뛰어난 곡을 하는 예배인도자들을 종종 보곤 한다. 뛰어난 음악과 그리고 그들이 가진 너무나 아까운 은사들, 그리고 새로운 곡을 열망하는 회중들의 간절함, 하지만 중요한 것은 누가 중심인가 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음악적인 부분을 소홀히 하게 된다. 음악적인 부분을 소홀히 한다는 것이 탁월성을 가지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인도자로서 내가 가지고 있는 음악을 고수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음악을 전하는 음악전도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전하는 예배중보자가 되기 원하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새로 쏟아져 나오는 신곡들을 들으면서 묵상하면 묵상이 잘 되지 않는다. 너무나도 풀어헤쳐진 단어들 속에서 무엇을 건져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심오한 진리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경배해, 찬양해, 노래해 같은 가사들은 많은데, 뭘 경배하고 찬양하고 노래하는 지는 잘 모르겠다. 깊은 묵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단순한 진리들을 나열해 놓은 것 같은 노래들, 그러다 보니 원래 약이 효력이 있기 위해서는 온 몸에 퍼져야 하는데 퍼지지를 않기 때문인지 요즘 예배 안에 불리는 곡들은 많지만 의외로 예배가운데 하나님을 경험하고 만날 수 있는 곡들이 줄어들고 있다.


기도하기는 앞으로 많은 곡들이 하나님을 신령과 진리로 예배가운데 인도할 수 있는 깊은 묵상 가운데 나올 수 있기를 소원한다. 인도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예배에 참석하는 회중역시 시편 114편의 말씀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예배 가운데 흘러넘칠 것이다.

[조근상] 말씀 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참된 예배이다

이코스타 2005년 6월


일전에 한 목사님께서 예배 사역에 대한 질문을 하시면서 내게 물어 오신 것이 있었다. 예배 사역을 15년 동안 해 오면서 소감 비슷한 것이었는데, 그 때 나는 주저 없이 말씀 드린 것이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이다. 물론 많은 분들이 생각할 때 이것이 기본이라고 생각하실 것이다. 하지만 내가 오랫동안 발견한 사실은 예배 인도자들은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자기들의 직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지 말씀은 전하고 성경공부를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미루고 자기 자신은 예배인도에만 힘을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조금 다른다. 나는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들, 즉 예배안에서 찬양을 인도하는 자들은 말씀에 대해서 오히려 말씀을 전하는 자들만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의 유명한 작곡자인 밥 핏츠의 첫 번째 앨범은 9개월 동안 성경을 12시간 씩 보면서 연구하는 성경연구학교를 마친 후에 만들었다. ‘Take My Healing to The Nations’ 라는 이 앨범에 들어있는 밥 핏츠가 작곡한 가사의 곡들은 그가 성경을 어느 정도 묵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가에 대한 진지함이 들어 있다. 그 외에 우리가 잘 아는 엘 샤다이라는 유명한 곡을 작곡한 미국의 CCM 아티스트인 마이클 카드는 구약학을 전공한 박사이다. 그가 작곡한 곡들은 한국에도 많이 불려지고 있는데, 그 가사의 내용을 보게 되면 보통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발견할 수 있다.


요즘 들어 나오는 앨범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음악적 칼라가 두드러진다. 특히 예배 앨범들은 이제 보통 수준을 넘어서서 프로페셜날리즘과 전문성이 탁월하게 드러나고 있다. 특히 호주의 힐송뮤직은 달린 첵 이라는 탁월한 여성 예배인도자를 통해서 전 세계에 예배에 많은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이제 세계 어디를 가도 호주의 힐송뮤직의 예배앨범에 담겨 있는 곡들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작년에 한국에 갔을 때는 어느 교회를 가도 모든 곡들이 힐송 에서 나온 곡들이었다.


미국은 아직도 모던 워십의 강세가 식을 줄을 모른다. 크리스 탐린과 데이빗 크라우터 밴드는 아직도 젊은 크리스찬들에게는 가장 인기가 있는 밴드이자 예배 인도자들이다. 하지만 같은 미국인들조차 이런 인기 있는 밴드들이 너무나 세상적이라고 생각하며 걱정과 우려를 표한다. 하지만 의외로 이들의 가사는 성경적이고 복음적이며, 그리고 새로운 곡을 발표할 때마다 목회자들에게 검증을 받은 후에 곡들을 발표하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리고 힐송은 어느 누구보다도 강한 훈련들을 자체적으로 하고 있다. 힐송컨퍼런스를 다녀 온 사람이라면 그들이 얼마나 강한 자체적인 룰을 세워서 예배 팀을 훈련시키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교회의 예배를 섬기는 예배와 찬양팀은 말씀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예배와 찬양팀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재능과 달란트를 사람들에게 쏟아 붇기 전에 말씀으로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의외로 말씀을 공부하며 삶을 나누는 예배와 찬양팀을 많이 볼 수가 없다. 사실 나는 그 이유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사실 찬양을 위한 연습을 하는데,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찬양, 즉 곡에 대한 연습이다. 즉 우선권이 찬양을 인도하기 때문에 찬양에 대한 연습이 먼저라는 것이다. 그 다음이 기도이다. 회중과 다른 사람을 위한 중보기도를 하는 것은 후차적인 문제이다. 먼저는 준비되지 않은 자신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 후에 시간이 남거나 여유가 있으면 그 외의 기도를 한다. 열방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1년에 한 두 차례오시는 선교사님들의 말씀을 들은 후에야 할 마음이 생긴다. 너무 비약하게 말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예배와 찬양세미나를 했을 때 예배 인도자들의 솔직한 고백이다.


허나,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예배를 위해서 예배인도자들은 말씀을 준비해야 한다. 예배와 찬양팀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원하시는 말씀을 준비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고 음악적인 것과 어떤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서 예배를 준비하게 될 때에는 빌딩을 지을 때 기반이 없이 짓는 집과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이런 예배는 음악이 준비가 잘 될 때에는 예배가 잘 드려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것이지만 만약 음악적인 준비가 잘 준비되지 못할 때에는 마치 예배가 드려지다 만 느낌이 들 수 있다. 이렇게 예배를 드리게 되면 잘 드려지는 예배와 잘 드려지지 않는 예배의 높낮이가 커져서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예배라기보다는 환경과 상황에 지배되어지는 예배를 드리기가 쉽다.


그래서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을 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중심을 하나님께로 향하기 때문에 우리가 부족한 부분을 채워 주신다. 내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이것이다. 앞으로 음악을 잘하는 사람들은 더욱 더 많이 나오게 될 것이다. 음악적인 노력만큼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며 예배를 인도하는 팀들을 가르치기 시작하라.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수 있도록 QT와 묵상이 삶의 기본이 되는 것이라고 선포하라. 그것이 여러분이 섬기고 있는 예배와 찬양팀을 부흥케 하는 비결이다. 여러분이 섬기는 예배와 찬양팀이 말씀으로 새로워 진다면 섬기는 예배에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이 함께 하는 것은 자동적으로 따라오게 될 것이다.

[조근상] 예배는 종교적인 의식이 아니라 삶(Life Style)이다

이코스타 2005년 5월


우리가 이제까지 보았던 것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가 어때야 하는 가를 나누었다. 즉 예배가 어떻게 내적인 관점에서 흘러나와야 하는가 하는 예배의 정신을 배웠다면, 이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 예배자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적인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알아보는 것이다.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우리가 어떠한 상태인가를 알 수 있다. 예배는 잘 드리지만 밖에 나가서는 사람들과 싸우고 화목하지 못하고 자기 멋대로 사는 삶을 산다면 그것은 진정한 예배를 드리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수 없다.


우리가 성전에 가기 전에 형제와 화목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익히 들어서 알고 있다. 찬양을 열심히 하고 손을 열심히 들고 은혜가 있더라도 다른 사람과 항상 불화가 있다면 그것은 유명한 신학자인 T.W 토저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가, 쇼를 하는 것인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 해야 할 것이다.


내 가 전에 있었던 캘리포니아에는‘새들백 교회’가 있다.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이 교회는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교회 중에 하나이고, 여러분들이 참 좋은 교회라고 하도 많이 이야기를 해서 예배를 드리려 찾아 갔었다 (우리 집에서부터 겨우 1마일밖에 안 떨어져 있었다) 근데 막상 교회를 갔더니 잘 모르는 길인데다 너무나도 교회가 커서 주차장에서 헤매고 있었을 때였다. 거기서 안내하시는 분이 너무나도 친절하게 안내를 해주시는 것이었다. 여러분도 경험을 해 봐서 알겠지만, 이 친절함이 건성인지, 아니면 마음에 우러나와서 도와주는 것인지 몇 마디를 이야기하면 금방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날 그 분이 안내를 도와주는 것을 보면서 나는 속으로 새들백 교회 사람들은 주차장에서도 예배를 드리는구나라는 생각을 하고 감동을 받았던 적이 있다.


사실 내가 더 감동받은 것은 그 후의 일이었다. 몇 개월이 지나서 ‘새들백 교회’에서 예배에 관한 Conference가 있어서 모임에 참석을 했는데, 전 세계에서 무려 4천명이 모여서 예배에 관해서 공부하고 배우는 시간이었다. Conference가 시작된 둘째 날에 본당에서 강의를 듣다가 실수로 쓰고 있던 전자수첩(PDA)에 있는 펜을 잃어버렸다. 너무나도 작은 물건이어서 찾기가 어렵겠지 생각하고 그래도 혹시나 찾을 수 있을까하는 마음으로 잃어버린 물건을 찾는 곳(Lost and Found)을 찾아갔다. 마침, 거기에 안내하시는 한 자매 분이 있었는데, 혹시 이러한 물건이 들어 온 것이 없느냐고 물어보니까, 한참을 찾아 보더니 그러한 물건이 들어온 것이 없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그래서 그냥 돌아가려고 했는데 그 자매 분이 잠깐 기다리라고 하더니 나의 전화번호를 물어 보는 것이었다. 전화번호를 왜 물어보냐고 그러니까, 자기도 똑같은 기종이 있으니까, 내일 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어 주겠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날 큰 감동을 받았다. 사실 예배 컨퍼런스에 은혜를 받은 것이 아니라 그 교회에서 섬기는 성도 때문에 감동을 더 받았다. 사실 여러분이 교회에 발을 들여 놓을 때, 제일 먼저 마주치는 사람들은 목사님들이 아니다. 목사님이나, 아니면 부목사님들만이 설교를 하고 있다고 착각하지 말라. 사실 가장 중요한 설교는 이미 우리들의 생활의 모습에서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행동과 모습, 말,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새들백 교회에서 하는 모든 행사는 믿을 수 있고 참석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의 삶을 보았기 때문이다. 새들백 교회는 예배를 공연하는 교회가 아니라 예배적인 삶을 사는 교회인 것을 믿는다.


다시 한번 말씀으로 돌아가자.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요한복음 4장에 나와있는‘진리로 드리는 예배’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세워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예배는 우리를 영적인 공허함으로 치닫게 하며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인가를 알 수 없게 한다. 하나님을 완전하게 계시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임을 기억해야 한다. 찬양만 한다고 해서, 기도만 한다고 해서 예배가 다 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의 기도는 하늘의 문을 열리게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이 예배자들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시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이 찬양할 때에는 사단의 권세를 제압할 힘을 가지고 있게 된다.


예배는 습관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는 감격이다. 올해 이루어지는 코스타 집회가 20주년이 되었다든지 아니면 사람이 많이 모인다든지 다른 것 등으로 유명해 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 대신에 코스타의 예배는 살아있고 코스타에 갔다고 온 사람들을 만나면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나는 듣고 싶다.

[조근상] 예배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다

이코스타 2005년 4월


우리는 모두가 다 하나님의 축복을 원한다. 성경을 자세히 보게 되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있는데,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올바르게 드리는 사람들이었다. 이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친밀함(intimacy)이란 단어는 내가 누군가를 잘 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서로 친해질 때 서로의 눈만 봐도 상대방의 마음을 아는 것처럼 하나님과 친밀함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을 의미하는 것을 말한다. 예배와 찬양 사역팀안에도 같이 오래 사역을 하다 보면 서로의 얼굴을 봐도 무엇을 원하는지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인데, 이런 친밀함을 갖는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먼저 구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시계를 좋아한다. 손목시계든 벽걸이 시계든 어딜 가든지 시계를 보면 그렇게 마음이 좋을 수 없다. 교회에 처음 부임해서 사무실 물품을 사러 갈 때도 시계를 제일 먼저 살 정도로 나는 시계를 좋아한다. 왜 좋아하는지는 나도 잘 모른다. 그냥 시계가 좋다. 하여간 그래서 우리 집에는 쓰지 않는 시계가 몇 개 있는데, 그것은 내가 아내에게 선물을 한 것들이다. 생일선물이다, 결혼기념일이다 해서 선물을 한 것들인데, 하지만 문제는 나의 아내는 시계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결혼을 한 다음, 처음으로 아내의 생일이었을 때,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시계를 사 가지고 집에 갔었을 때 아내의 표정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나의 아내는 시계에는 관심이 없고 다른 것들을 더 좋아한다. 내가 아내를 정말 사랑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아내가 정말 원하는 것을 사 주어야 한다.


이렇게 예배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면서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는지 알게 되면 우리 안에는 하나님과의 친밀감이 생기게 된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은 하나님의 축복을 자동적으로 가져오게 한다. 하지만 하나님께 축복을 구한다고 해서 하나님과 친밀해지는 것은 아니다.


두 번째로 예배란 하나님만을 생각하는 것이다. 예배하면서 우리는 집중력을 필요로 한다. 우리가 많이 들어 온 ‘프로스퀘네오’라는 예배를 뜻하는 단어는 ‘키스하다, 입을 맞추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러분이 입맞춤을 해보셔서 아시지만, 입맞춤을 한다는 것을 집중력을 필요로 한다. 가끔 딸에게 입맞춤을 할 때 나는 딸에게 얼굴을 보면서 하지만 딸은 딴 짓을 하고 입맞춤을 할 때가 있다. 그러면 얼굴은 다른 것을 보고 입맞춤을 하면 제대로 입맞춤을 할 수가 없다. 하지만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예배를 드린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방문해서 일주일에 한 시간 정도 대충 함께 지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그 분은 우리와 보내는 그 시간을 정말 귀하게 여기시고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성령님께 사로잡힌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광적인 종교집단의 예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신령으로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만을 묵상하며 하나님만을 생각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의 심령을 가장 방해하는 것은 바로 무엇보다도 우리들 안의 생각이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면서도 우리의 계획, 필요, 행동들에 대해서 생각을 하는 경우가 더 많이 있다.


세 번째로 예배는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돌려 드리는 것이다. ‘예배’라는 단어에는 내가 존경하는 대상에게 무엇을 가지고 나아가다, 그 가치를 인정하다, 무릎을 끊고 상대방을 높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예배는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예배를 드리러 온다면 그것은 잘못된 동기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무엇이 부족한가? 하나님의 필요를 위해서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찬양을 다시 돌려드리는 것이 바로 예배의 참된 의미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아는 것은 그저 좋은 예배, 좋은 찬양, 좋은 설교를 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예배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서는 강조하는 것은 예배드리는 방법보다 예배드리는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