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근상] ‘예배에 대해서 이야기하자’ 시리즈 (1)

이코스타 2005년 3월


1) 예배의 형식


예 배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만남이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피조물인 우리 인간이 만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인 우리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원하고 하나님은 인간과의 만남을 원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과 만나는 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에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하나님과 아담은 너무나도 친밀함 가운데서 만날 수 있었지만, 인간에게 죄가 들어온 후에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없게 된다. 예배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성 경에는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두 가지의 다른 형식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는 공동체가 드리는 공적인 예배, 즉 회중 예배가 있고, 다른 하나는 개인이 드리는 개인 예배를 나타내주고 있다. 성경의 구약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리는 공적인 예배의 규례가 자세하게 나와 있다. 특히 성경의 레위기에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사를 위한 책으로서 하나님께서 주신 첫 번째 언약인 성소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를 어떻게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지가 나와 있다. 이 구약의 공적인 예배의 특징은 희생제물과 예물을 드리는 의식, 그리고 해마다 있는 절기 등이 이스라엘 공동체의 예배를 이루는 모든 요소가 되었다.


사 실 우리는 공적인 장소에서 자주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드리는 개인적인 예배가 진실하지 못하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과시해도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하게 된다. 요즘 젊은이들이 자주 보는 코미디 프로 중에 ‘웃찾사’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거기에 나오는 한 개그맨이 영어를 엉터리로 설명하면 같은 있는 진행자가 이해가 안 된다고 하며 다그쳐 물으면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 때, 그 때 달라요,” 하지만 우리의 예배는 그 때 그 때 다르면 되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 설 때나 혼자 있을 때의 예배가 같아야 한다.


개 인 예배는 야곱이 돌기둥을 쌓으면서 하나님을 기념했던 것에서 볼 수 있다. 사실 이 개인 예배는 성경 전체에서 볼 수 있는데, 우리 삶의 모델이신 예수님 역시 항상 한적한 곳으로 가서 하나님께 개인예배의 시간을 가지셨다. 이 개인 예배가 가장 잘 나타나 있는 곳은 바로 시편이다. 시편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릴 때 어떻게 마음을 준비해야 하는 가를 가장 잘 가르쳐 주고 있다.


대 표적으로 시편 51편 17절에는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정말 원하시는 예배는 바로 우리 마음의 중심으로 드리는 예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참된 예배는 보이는 형식뿐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마음에 있다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구 약에서는 동물을 죽여서 제사를 지내야만 예배의 형식이 갖추어졌었다. 하지만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에 보혈의 능력으로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하심을 근거로 해서 예배의 형식보다는 내용을 더 강조한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예배는 찬양과 가르침, 기도, 감사와 권면, 그리고 성령의 은사들을 포함하고 있다. 신약의 예배에는 현재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기초가 되어진다.


얼 마 전에 어떤 장로님께서 보자고 하셔서 이야기를 같이 나눈 적이 있었다. 결론적으로 장로님께서는 찬양 예배의 스타일이 맘에 들지 않으셨던 것이었다. 그러면서 A.W 토저의 ‘예배인가, 쇼인가’라는 책을 소개시켜 주면서 읽어보라고 하셨다. 나는 이미 그 책을 읽었었다. 그 책 안에 참으로 귀중한 내용들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모든 내용을 다 동의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 책의 내용대로라면 우리가 지금 드리는 열린 예배나, 구도자적 예배, 혹은 찬양과 경배 예배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하 나님이 응답하시고 임재하심이 있는 예배는 전통적인가, 또는 진보적인가의 문제가 아니고 예배를 드리는 사람의 마음 상태가 어떠한 가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어떠한 가를 판단하기 이전에 우리 자신이 어떠한 상태인가를 먼저 점검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는 밸런스가 필요하다. 보이는 형식도 중요하지만 보이지 않는 마음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회 중 예배를 통한 은혜가 일주일을 살게 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우리는 매일 매일 하나님께 드려지는 산 제물(Living Sacrifice)이 되어야 한다. 매일 드려지는 예배에는 형식을 따질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 안에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사모해야 한다. 왜냐하면 결국 예배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근상] 참된 예배에 이르게 하는 찬양의 능력

이코스타 2005년 2월


참된 예배란 무엇인가? 이 본질에 관하여 우리가 끊임없이 질문을 해 보아야 한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음악이 예배가 아니고 예배는 음악만이 아니다. 예배 때 음악은 중요하지만 절대적인 요소가 될 수는 없다. 이는 단지 하나님을 찬양하는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만약 여러분의 성가대가 노래는 기가 막히게 잘 하지만 기도한 번 하지 않고 올라선다면 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찬양에 관하여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그들이 아무리 탁월한 능력을 가졌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열납하는 찬양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예 배는 관계이다. 성경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께 원하는 한 가지는 그 분을 영화롭게 하고 그 분의 우리를 창조하신 이사야서의 근본적인 뜻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전에도 말했듯이 어떤 기술이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먼저 하나님과 관계를 가져야 한다. 진정한 예배와 찬양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사람에게 예배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필요를 보고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바로 진정한 예배이다. 사람들에게 보여지기 전에 여러분들이 해야 할 것은 바로 개인의 예배이다. 혼자 있을 때, 진정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홀로 서는 것이다. 아무도 없는 혼자일 때, 여러분은 하나님을 얼마나 생각하는가? 우리가 만약 개인적으로 드리는 예배가 생활화된다면 여러분의 찬양은 능력이 생길 것이다. 찬양을 아직도 노래하는 것이나, 그 외의 몸동작을 하는 것으로만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찬양이 가지고 있는 파워풀 한 것을 1퍼센트도 알고 있지 않는 것이다. 찬양은 중보의 기도 외에도 영적 전쟁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영적전쟁의 능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찬양을 드릴 때 온전한 믿음을 필요로 한다. 믿음의 발걸음이 한 단계 도약을 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찬양을 무기로 주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원하시고 그 믿음이 밖으로 드러나길 원하신다. 능력이 있는 찬양은 믿음의 무기가 되어지는 것이다.


예전에 강원도에 있는 홍천에서 예수제자 훈련학교를 인도하고 있을 때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그 당시 40여명 정도의 학생들과 함께 DTS라는 프로그램을 하고 있을 때, 내적 치유 에 관한 프로그램을 하고 있었을 때였다. 당시의 분위기는 너무나 거룩하고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해서 한 사람씩, 자기가 지은 죄들을 고백하고 있을 때였다. 모임도중 갑자기 한 형제가 뒤로 자빠지면서 이상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 형제는 성공회 신학교에 다니던 형제였는데, 훈련을 받는 동안 행동이 좋지 않아서 간사들 사이의 요주의 인물이었다. 늘 자매들을 터치하면서 접근해서 학생들 사이에서도 요주의 인물로 통했었다. 그런데 이 형제가 내적 치유 프로그램 도중에 거품을 물고 쓰러지면서 다른 사람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즉 형제 안에 귀신이 들렸던 것이었다. 같이 있던 모든 사람들은 놀라면서 예수의 이름으로 대적을 했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이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까? 오히려 너희들이 하는 말은 다 거짓말이라고 그 형제의 입을 통해 귀신은 우리를 조롱하고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 갑자기 찬양하라는 마음을 주셨다. 나는 즉시 기타를 잡고 ‘예수 우리 왕이여’ 라는 찬양을 부르기 시작하였다. 함께 한 학생들이 같이 찬양을 부르는 즉시 형제 안에 있던 귀신은 소리를 지르며 떠나가 버렸다. 내가 그때 느꼈었던 찬양의 능력?아직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그때 함께 한 모든 학생들은 그 사건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사실 그 때 나는 인도자이기 때문에 인도를 한 것이라기 보다는 성령님의 명령에 믿음으로 순종을 한 결과적으로 일어난 현상이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때 그 찬양 소리를 통해 주님께서 사단의 권세와 싸울 힘을 주신다. 그것은 바로 능력이 되는 것이다. 이 능력은 다이나마이트와 같이 폭발적인 힘을 갖게 된다.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 4장의 비밀이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의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메시야를 전파하는 예배자가 된 것이다. 예배를 장소라는 한계에 머물게 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서 하나님을 온전히 찬양하는 사람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처럼 우리 삶 속의 예배가 늘 이루어질 때 찬양은 능력을 더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매일 운동을 하면 건강해지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생각을 해 보라. 매일 운동하는 사람과 일주일에 한 번 나와서 운동하는 사람 중에 누가 더 건강한가를. 여러분의 찬양에 능력이 없다고 생각되는가? 그렇다면 나의 생활가운데 드리는 예배의 시간이 얼마나 있는지를 체크해 보길 바란다. 그리고 당장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앞에 경건한 시간을 갖도록 하라. 하나님의 회복시키심은 우리의 연약함보다 강하다. 믿음으로 나아갈 때 여러분안에 진정한 찬양의 능력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조근상]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이 있는 찬양에 관하여

이코스타 2005년 1월


예배 인도자로 오랫동안 사역하면서 가끔 메일을 통해 질문을 받는 경우가 있다. 오래 전에는 어떤 곡을 어디서 났느냐, 아니면 새로운 곡에 대한 질문들이 많았는데, 요즘은 웹 상에서 원하는 자료들은 무엇이든지 구할 수 있기에 그러한 질문들은 많이 사라졌다. 그 다음에 많았던 질문이 찬양 안에 있는 기름 부으심에 관한 부분이었다. 이 기름 부으심이라는 성경적인 단어는 사실 쉽게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아무래도 인도하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기에 자주 질문을 해오는 것이었다.


성경에 나타나 있는 기름 부으심이라는 단어는 여러 가지로 표현되어진다. 구약과 신약에 나타나 있는 기름부음의 목적은 사물이나 사람을 구별해서 하나님이나, 왕에게 받으실 만하게 만드는 것을 말한다. 구약에서는 131번 이상과 신약에서는 18번을 기름 부으심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결국 기름 부으심의 최종 목적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다. 즉 이것은 흉내낸다고 되는 것이 아니기에, 하나님께서 직접 기름 부으시지 않으면 할 수가 없는 것이기에 하나님께 간구해야 하는 것이다. 기름 부으심은 하나님의 깊은 임재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대면한 부속물이다. 즉,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통한 부산물인 것이다.


우 리가 찬양을 들으면서 구별할 수 있는 영적인 기준은 사실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찬양을 듣고 그러한 집회에 참석하게 될 때에는 여러분도 모르게 하나님 중심의 예배를 드리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평소에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인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사실 우리의 찬양은 너무나도 익숙한 하나의 ‘립싱크’가 되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입으로는 찬양을 드리고 있지만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다른 생각에 잠겨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이 우리의 찬양에 기름 부으심이 없는 이유이다. 온전하게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다른 불순물과 함께 생각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을 대하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인도하는 인도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삶의 태도에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한 국에 있는 동안 예배 세미나에 강사로 초청을 받아서 간 적이 있었다. 내가 강의해야 할 제목은 ‘예배의 본질’에 대해서였는데, 그 날 오셨던 분들은 대부분 교회에서 예배 사역이나 찬양 사역을 하고 계신 분들이었다. 강의를 시작하면서 본질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눈빛은 모두가 이미 강의 내용을 다 알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결국 강의 노트를 덮고 나는 세미나에 참석한 분들에게 조용히 눈을 감으라고 말하고 지금 이 시간에는 다른 것들을 생각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 보자고 나누었다. 그리고는 한 몇 분쯤 지나서였다. 갑자기 한 분의 통곡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그 외침은 너무나도 처절하게 들리는 듯 했다. 그렇게 시작한 외침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시작이 되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불과 우리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바라보는 몇 분이었다. 그 후에 같이 찬양을 나누었다. 그것은 단순하게 불려지는 한 코드의 반복되는 진행이었는데, 곡의 내용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서 부르는 것이었다. 즉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새 노래였던 것이다. 이 날에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세미나에 참석한 거의 모든 사람이 경험할 수 있었다. 우리는 찬양을 멈출 수 없었고, 기도가 끊이지 않는 것 같았다. 이러한 시간을 2시간 이상을 드렸다. 모두가 탈진한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그 날 세미나를 드리면서 깨달은 새로운 사실은, 하나님께 전심으로 초점을 맞춘다면 하나님께서 간구하는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허락한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정답 같은 이야기지만 이것은 반대로 말하자면 대충 구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 날 식사 준비를 했던 몇몇 분들은 모임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나는 일을 끝내 경험하지 못하였다. 즉, 하나님을 향해 전심으로 얼굴을 구할 수 없었기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원하시는 일들을 행하실 수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얼굴을 전심으로 구하여서 기름부음을 받는다면 당신의 찬양과 기도와 예배에는 탁월함이 드러날 것이다. 인도자가 아니라도 상관이 없다. 이미 기름부음 받은 삶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윤택해져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흉내내지 말아야 한다. 마치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 것처럼 쇼를 해서는 기름 부으심이 흘러갈 수 없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해서는 되지 않는다.


대 신에 정말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이것이 찬양 안에 기름 부으심을 더하는 길이다. 듣기 좋게 음악을 만들 수 있다. 세련된 편곡을 할 수도 있다. 엄청난 악기를 동원해서 사람들의 감동을 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름 부으시는 찬양은 하나님께로만 집중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찬양은 하나님을 하늘의 보좌 위에서 일어나게 하고 춤추게 하는 것이다.

[조근상] 무제

이코스타 2004년 2월


찬 양이 찬양되게 하는 것은 찬양 안에 있는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전에 나누었던 것처럼 물론 예배를 준비하는 찬양인도자의 준비가 중요하지만 예배에 참석하는 회중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앙을 찬양으로 표현하며 살아가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어떤 사람들은 찬양에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을 다른 이유로 말하기도 한다. 즉 전통적으로 예배와 찬양을 드리거나 드리지 않거나 하는 문제와 또한 그것이 익숙하지 않다고 할 때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부분들이다. 하지만 그것은 방법의 문제가 아니다 예배와 찬양을 드리는 사람이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사실 요즘 우리가 드리고 있는 찬양 대 부분은 몇 년 전만 해도 사실 교회에서 불려지기 어려운 곡들이 많다. 장르 역시 다양해져서 이전에는 발라드와 칼립소의 빠른 비트(찬송가의 빠른 곡들)를 가진 것이 전부였었지만, 이제는 세상음악과 경쟁이 가능하게 된 것이 현대 찬양이다. 모두가 아는 것처럼 지금 우리가 많이 부르는 찬송가 역시 과거에는 그러한 대접들을 받아 왔다.


과 연 이렇게 뭔가가 느껴지지 않는 것이 찬양을 하는 사람들의 문제 만일까? 솔직히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음악적인 사고방식에 길들여졌기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겸손한 마음, 갈급한 마음을 갖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찬양인도자로서 그리고 예배자로서 하나님 앞에 있었던 사람 다윗의 고백들은 우리로 하여금 예배의 마음이 어떤가에 대해서 잘 나타내고 있다. 고라자손의 그 유명한 시편 42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갈급함같이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인 것이다.


오 래 전에 부산에서 찬양인도를 하고 있었을 때의 일은 나에게 아직도 예배인도자로서 가져야 할 태도를 기억나게 한다. 한 번은 일주일 내내 찬양인도를 한 적이 있었다. 그 때 같이 찬양인도를 담당한 형제가 갑자기 불평 아닌 불평처럼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일주일 내내 첫 찬양이 목마른 사슴인데 이제는 너무 지겨워서 하기가 싫다고 말이다. 그 말을 하기까지 나 역시 몰랐었지만 일주일 내내 첫 찬양을 아니면 중간에라도 목마른 사슴이라는 찬양을 했었던 것이다. 그 때 후배에게 해 주었던 말은 이것이었다. 목마른 사슴이라는 노래를 부르지 말고, 네가 목마른 사슴이 되도록 노력해 봐라. 그러면 찬양의 지겨움이 없어질 것이라고. 사실 그렇다. 우리가 부르는 찬양은 노래로 표현한다면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즘 계속해서 새로 나오는 찬양들이 어떨 때에는 은혜 받기가 어려울 수 있다. 요즘의 찬양을 듣고 있으면 음악적인 센스는 뛰어나지만 오히려 뭔가가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면서 무엇인가가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한 문제이전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찬양에 대한 편협 적인 생각들 역시 고쳐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찬양이 단순히 노래하는 것이 아니기에, 그 이상의 것을 의미하고 있기에 단순한 노래하는 것으로 묶어 버린다면 아쉬운 일이다. 우리는 찬양하면서 기도할 수 있고, 또한 찬양하면서 영적인 전쟁을 할 수도 있다. 모르는 노래가 나오기 때문에 찬양하지 못한다고 하지말고, 오히려 그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나 역시 요즘 영어권 Youth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를 들으면 시험거리이다. 하지만, 그들의 입장에서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고 사랑한다면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는 따라 부를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찬양은 하나님이 대상이지만 그 대상을 향하는 우리 역시 중요한 것이다.


찬 양의 다른 표현은 묵상이다. 하나님을 묵상하고 그 분이 하신 일을 생각하는 것이 찬양의 또 다른 방법이다. 때로는 침묵가운데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조용히 듣는 것 역시 찬양의 한 방법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자연 묵상이다. 석양의 지는 해를 보고 있을 때에는 이 세상 최고의 아티스트이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바다에 출렁이는 소리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 어떤 오케스트라도 표현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다. 하늘을 나는 새들 역시 지저귀며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높이고 있다. 우리가 소리치지 않으면 돌들이 소리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이번에 텍사스에서 캘리포니아로 사역지를 옮기면서 24시간이라는 거리를 운전하면서 가는 동안 지나면서 각양 각색의 바위들과 돌을 보면서 하나님의 섬세하심, 그리고 광대하심을 경험하는 좋은 시간이었다. 그 오랜 거리를 지나는 동안(물론 하나님께는 짧지만) 하나도 똑같지 않는 모양의 바위들, 풍경들이 나로 하여금 절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만들었다.


그 러나 역시 하나님은 우리의 직접적인 찬양을 원하신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라’ 라고 말한 이사야서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사랑의 고백, 갈급함을 원하신다. 그렇기에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께 찬양을 드려야하는 마땅한 이유가 있다. 혹시 여러분은 오늘 찬양을 대할 때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앞에서 인도하는 사람들을 따라서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필요성이 있다. 왜냐하면 그 분이 우리를 지으시고 만드셨기 때문이다.

[조근상] 올바른 찬양을 위한 예배인도자의 역할

이코스타 2003년 12월

  최근에 예배와 찬양인도를 하면서 내 안에 자리잡은 궁금증은 ?도대체 얼마만큼 음악적인 자유를 가져야 하는 가? 이다. 94, 처음 미국에 와서 몬타나의 국제 YWAM베이스에서 있었던 쇼크는 아직도 예배와 찬양인도를 하는 나에게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영어로 노래 부르기에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하여간에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락 콘서트를 하는 것 같은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저게 크리스천이 맞아? 라고 질문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러나 더욱 나를 힘들게 했던 일은 놀랍게도 집회가 끝난 후에 많은 Youth아이들이 하나님을 영접했다는 사실이었다. 이럴 수가! 나는 혼란 속에 빠졌었다. 당시 부산지역에서 예배 인도자로 섬기고 있었지만, 한번도 그런 식의 예배를 드려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에게는 큰 도전이 되었다. 왜냐하면 당시의 한국의 경배와 찬양은 이른 바 발라드의 전성시대였기 때문에, 의례 예배에 쓰여지는 곡들은 한정되어 있고, 얌전하고 조용하게 하는 스타일이 주류였다. 결국 그 때의 경험이 후에 나의 예배인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95년도에는 이른 바, 한국의 많은 가요들이 서태지의 음악을 통한 영향력으로 랩이 절정을 이루었던 시기였다. 그 때 미국에서 가져온 앨범 중에 유명한 예배인도자인 밥 피치의 Proclaim His power라는 새로운 앨범을 듣게 되었다. 한참을 듣는데 참으로 희한한 곡이 있었다. Romans 16:19 says라는 곡이었는데, 로마서 16장의 말씀을 그대로 랩으로 담아서 만든 곡이었다. 물론, 완전한 랩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들으면서 나름대로 번역을 해서 곡을 불러 보았다. 일단 번역을 하면 같이 사역하는 뮤지션들과 같이 연습을 해 보는 것이 필요한데, 막상 노래를 하고 마지막 랩 부분을 하려 하니, 뭔가 어색하고 찬양을 한다는 느낌이 아니라 세상가요를 부르는 느낌이어서 번역을 했지만 한번도 부를 수가 없었다. 그렇게 1년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한번은 로마서를 묵상하다가 찬양의 구절들을 보게 되었다. 너희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인하여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 지어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내 안에 새로운 깨달음이 있었다. , 이 찬양은 단순하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그리고 우리의 원수인 사단에게 명령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찬양 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단순한 노래가 아닌 기도와 영적 전쟁이 함께 선포된다는 사실이었다. 그전에도 많은 분들이 강의해 왔던 사실이 내게 새로운 깨달음으로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96년의 YWAM의 중 고등부 수련회 마지막 날 이 찬양을 처음으로 부르게 되었다. 모르는 찬양을 처음, 그것도 랩이라는 장르로 부른 그 날 집회에서 우리는 이 찬양을 12번 이상을 불러야 했다. 1500여명이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께,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원수인 사단에게 말씀으로 굳게 서 있을 것을 노래했다. 덕분에 나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랩송을 인도한 예배인도자가 되었다.


  그 후 한국에서 앨범을 만들 때에도 이 곡은 메인 타이틀이 되었다. 녹음을 하면서도 사단의 방해를 느낄 수가 있었다. 다른 곡들은 정말 무리 없이 녹음이 되었는데, 이 곡을 녹음할 때에는 세 번이나 녹음을 하다가 중단이 되었다. 한번은 녹음을 했는데, 아예 녹음이 안 되었고, 두 번째는 녹음하는 테이프가 끊어져 버렸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곡을 좋아하지만, 때로는 이 곡을 통해서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도 경험을 하게 되었다. 음악스타일로 따지게 된다면 처음에 소개할 당시 래디칼하게 느껴질 수 있는 요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곡을 묵상하지 않는다면 이 곡이 주는 영적인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예배와 찬양곡들이 마찬가지이듯이, 원래 작곡한 사람의 의도나 혹은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회중들을 자기 중심의 구렁텅이로 빠뜨리기 쉽다. 하지만 반대로 어떤 곡을 하더라고 그 속에 담긴 뜻을 파악하고 연구한다면 곡을 부르는 동안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유명한 ?이와 같은 때엔?의 작곡자이신 데이비드 그레함은 이 곡을 자신의 아내와 자녀들이 집에 불이 나서 죽은 자리에서 불렀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직접 듣는 순간 이 곡에 대한 나의 태도를 달라지게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이야기한다면 나는 음악의 모습이나 형태는 이제 더 이상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자세히 기억을 더듬어 보면 94년 당시 YWAM 몬타나 베이스의 친구들의 노래 안에는 하나님에 대한 갈망, 그리고 영혼에 대한 열정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은 참으로 진실 되고 하나님 앞에 겸손한 사람들이었다. 단지 복장이나 모습이 내게 익숙하지 않기에 내 마음속에 과연 저 사람들에게 얼마나 신앙이 있을까 하는 판단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진정한 모습을 찾지 못한 것이었다. 한국의 하덕규 집사님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성경에 나오는 역청이 노아의 방주에도 쓰였지만, 바벨탑에도 쓰여졌다는 사실에 대해서, 음악이란 역청과 같아서 누군가에 의해 쓰여지는 것에 따라서 완전하게 다르다는 사실을 이야기했었던 기억이 난다. 결국 인도자의 역할이 중요한 것이다. 회중에게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기도로서 준비하지 않는다면, 결과적으로 노아의 방주로 시작해서 만들다가 바벨탑을 쌓고 끝나 버리는 것이다.


  올해로 나는 예배와 찬양인도를 해 온지 꼭 13년이 되어 간다. 정말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정말로 예배와 찬양인도가 어렵다는 것을 느낀다. 경험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영혼에 대한 마음을 갖지 않는다면 나는 울리는 꽹과리로 전락하는 것을 알기에 오늘도 두려운 마음으로 기타를 끄집어낸다.



[조근상] 우리의 찬양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

이코스타 2003년 10월

미 주 코스타 본부에서 오랫동안 기도하면서 대학원생과 대학생을 분리하여 처음으로 캘리포니아에서 시작된 cKOSTA는 내게는 찬양에 대해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 시간이었다. 작년의 시카고 코스타 이후부터 이번 cKOSTA를 준비하기 위해 찬양 팀에 속한 형제 자매들과 같이 기도해 왔었다.


그 런데, cKOSTA가 시작되기 전 주 수요일부터 갑자기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나의 목소리는 원래 좋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아예 말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장기간의 교회의 여름행사 때문에 무리해서겠지 하고, cKOSTA가 시작하기 전 주 금요일에 캘리포니아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고 떠났다.


먼 저 모인 찬양 팀과 연습을 하기 위해서 준비하는 기간동안 목소리가 회복되리라고 믿었지만, cKOSTA가 시작하기 전까지도 나의 목소리는 회복되지 않았다. 아니, 더 심해져서 이제는 말하는 것조차 부담스러워질 정도였다. 오랫동안 찬양을 인도해 왔지만 이러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결국 cKOSTA는 시작되고, 나는 찬양인도를 해야 했다. 안 나오는 목소리를 가지고 말이다.


목 소리가 나오지 않는 찬양인도자렁상상이나 할 수 있는가? 그러나 우리 찬양 팀 안에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우리 찬양 팀은 단지 찬양을 인도하고만 있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께 의지하며 찬양을 간절히 하나님께 드리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찬양 팀의 그 누구 하나도 드러나지 않고 하나님만이 높아지시는 감사의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저녁집회를 위해서 찬양을 준비하면 바로 그 찬양의 가사가 설교의 주제와 같이하는 일들이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이어졌다. 더군다나 한국에서 오신 강사 님과는 이야기조차 나눌 시간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말씀에 대한 찬양을 준비하고 있었다.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상황이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더욱 드러나게 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개인의 경험이나 찬양 팀의 능력을 원하신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기 원하셨던 것이다. 나의 목소리는 집에 돌아갈 때쯤에야 회복이 되었다.


하 나님께서 내게 주신 교훈은 간단했다. 진정한 찬양이 무엇인가? 찬양은 하나님께 드려져야 할 직접적인 행동이요 고백이지, 앞에 서서 인도하는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나 오랫동안 사역을 해 온 나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찬양인도를 한다고 해서 찬양을 온전하게 드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마음이 겸손하게 하나님께 가 있지 않으면 우리는 찬양이 아닌 연주를 하게 된다. 우리가 요즘 드리는 찬양은 때때로 뛰어난 연주자들과 훌륭하게 잘 준비된 시스템으로 인해 공연같이 드려질 경우가 많이 있다. 하지만 이렇게 잘 준비된 모든 상황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진정으로 찬양을 드리게 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연주자들과 시스템이 잘못됐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러나 내가 생각할 때 요즘 우리가 찬양을 온전하게 하나님께 드리기보다는 우리끼리 노래하고, 좋은 음악을 들으면서 자기 나름대로의 카타르시스를 해결하려고 하는 동기가 있음을 보게되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 결국 그것은 하나님께로 온전한 찬양을 드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온전한 찬양은 하나님만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노래의 잘함과 못함에 달려있지 않고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에 대한 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찬 양’이라는 단어를 생각할 때 거기에 함축되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자. 성경에서 가장 많이 ‘찬양’에 대해서 쓰여지는 단어는 ‘할랄’ 이다. 이것은 ‘할렐루야’의 원어로 ‘자랑하다’ 와 ‘떠벌리다’, 그리고 ‘흥분으로 가득 차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 단어인 ‘야다’라는 단어는 ‘고백하다’, 그리고 ‘선언하다’, ‘손을 들고 표현하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두 단어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 단어를 고백하는 대상이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나를 숨기고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다. 이것이 바르게 정의되어야만 찬양에 대한 올바른 생각을 가질 수 있다. 요즘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것보다 부수적인 것에 대해서 더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연주자들에 대해서, 회중에 대해서, 누가 새로운 악기를 하는가 이런 것들에 대해서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을 한다. 그러나, 찬양을 이야기 할 때, 하나님이 없는 것들을 논의한다는 것은 마치 엔진이 없는 자동차와 같다. 겉보기에는 그럴 싸 하더라도 결국 찬양의 목적인 하나님을 만나는 데에는 도달할 수가 없다.


코 스타 집회가 끝난 지 두 달이 되어 간다. 여러분은 코스타 집회에 역사 하신 하나님의 감동을 기억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냥 좋았던 추억에 젖은 채 일상 생활로 돌아와서 내년의 코스타를 기다리는가? 찬양은 과거, 현재, 미래 모두 다를 포함한다. 다시 한번 하나님께서 내게 행하셨던 놀라운 일들을 기억하고, 지금 주어진 환경에 감사하고 하나님께서 내게 행하실 일을 기대하면서 찬양하기 시작하라.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의 찬양가운데 거하신다고 약속하셨다. 집이든, 직장이든, 길을 걷든 간에 하나님을 온전히 찬양할 때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