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을 위한 헌신 2 – 이훈

다음은 2009 KOSTA/USA Chicago conference에서 이훈 목사의 ‘샬롬을 위한 헌신’이란 세미나를 eKOSTA 편집부에서 녹취하여 정리한 내용입니다.
—————-

가정을 한번 생각해보고
싶은데요. 저희 가정에도 아이들이 다섯 있지만, 아이들이
많은 가정에 보면 아이들 중에는 좀 똘똘하고 뭐든지
잘하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아이는 좀 상대적으로
좀 못하고 약하고 부족한 아이도 있잖아요. 그리고
심지어 어떤 가정에는 정말 특별한 장애와 아픔을 가진
아이들도 있어요. 그런데, 만약에 어떤 가정에서 아이들
중에 정말 똘똘하고 잘하고 정말 가정의 자랑거리가
될 만한 아이를 언제나 가정의 무대에 올려놓고 그
아이를 다 바라보게 하면 그게 정말 좋은 가정일까요?
정말 좋은 부모일까요? 정말 좋은 가정, 부모는 어떻게
할까요? 아이들 가운데 가장 아픔과 연약한 아이가
중심에 있게 될 거예요. 그래서, 그 아이를 바라보며
모두가 자신들을 돌아보게 하고 도울 수 있도록 하고
그럴 때 정말 그 가정이 아름다운 가정이 되고 정말
진정한 샬롬이 있는 가정이 되는거죠. 제가 고등학교
때 늘 아는 이웃집이 하나 있었는데, 담벼락 너머니까.
근데 어느 날 이웃집 담을 넘어보니까 거기 갑자기
제 또래 어떤 여자 아이가 바닥을 기고 있더라구요.
중증 장애인이었어요. 그런데, 저를 마주치는 순간
엄마가 이 아이를 막 집 안으로 밀어넣었어요. 그 아이는
사실은 그 나이가 되도록 단 한번도 바깥에 나와보지
못한 그 가정의 secret인거죠. 그 아이를 그렇게 그 부모가
그 안에다 둔 이유가 뭘까요? 어쩌면 그 아이를 사랑하는데
아이가 바깥에 나가면 그 아이가 혹시 조롱과 모욕
당할까봐, 그리고 자신들도 사람들의 눈총들을 받을까봐,
그것이 싫고 그것을 가정의 수치로 여겼기 때문에 숨겨두고
키웠던 거죠. 그런데, 우리 잘 알지 않습니까? 레나
마리아나 그리고 우리 한국에도 이지선 자매같은 사람들.
어쩌면 수치로만 생각하고 숨겨야 될 그런 아픔과 약함인데,
오히려 그것을 당당하게 빛 가운데, 많은 사람들 가운데
오히려 드러냄으로 오히려 정상인들과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을 부끄럽게 한다는 것. 우리 송명희 시인의
어떤 이야기도 알잖아요. 나 가진 재물 없지만, 나 가진
지식 없지만, 나 가진 것 없지만,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이
갖지 않은 것을 갖게 하셨다는 것. 사실 가장 약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더 보화와 같은 것을 주셨고 또 주시는
분이신데, 우리가 성공 스토리들을 무대와 사람들의
중심에 올린다는 것은 사실은 우리가 다시 한번 돌아봐야
될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 이 땅에 샬롬을 이루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성공한 사람들이 자꾸 중심이 되도록
해야되는 게 아니라, 혹 우리 가운데 더 소외된 사람,
우리 가운데 돌봄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가운데로
오도록 도울 수 있어야 되겠죠. 그 때 우리가 함께 서로를
더 도울 수 있는 샬롬의 관계들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성공하는 삶하고
열매맺는 삶은 다르죠. 성공하는 삶과 열매맺는 삶의
차이가 뭘까요? 이렇게 표현하고 싶어요. 성공하는
삶은 마치 꽃이 활짝 예쁘게 피어나는 것과 같다면
열매맺는 삶은 정말 열매가 맺는 것인데, 우리가 잘
알듯이 열매는 언제 맺히죠? 꽃이 화려하게 피어있을
때 맺히나요? 그것이 다 져야지만 맺히는 게 열매잖아요.
그 꽃잎이, 아름답던 꽃잎들이 낡고 시들어 다 땅에
떨어져 죽을 때 그 다음에 생겨나는 게 열매라는 것.
그렇게 본다면 우리가 성공하고 싶어하는 우리의 욕망과
야심이 십자가에 못박히고 땅에 떨어질 수 있을 때,
그 때 정말 우리가 주님의 열매,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아시죠? 어떤
거죠?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예, 그 아홉 가지 열매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그 열매 자기 좋으라고 있는 거 하나도 없어요. 사랑이
많은 사람이 있으면 옆사람들이 그 사랑 받는 거 아녜요?
기쁨이 가득한 사람이 있으면 그 기쁨이 옆사람들을
격려해주는 거고, 평화가 가득한 사람이 있으면 그
주변 사람들이 거기서 쉼을 얻는 거죠. 오래 참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 사람의 인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힘이 되는
거고, 자비로운 사람 때문에 그 주변 사람들이 자비를
얻고, 선한 양선의 마음을 가진 사람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그 사람의 선한 손길의 도움을 얻는 것이구요. 근데
열매도 실제로 그렇잖아요. 우리가 열매는 나무에 아름답게
탐스럽게 달려있거나 그릇에 탐스럽게 담겨 있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들짐승들의 먹이가 되고 사람들의
음식이 되는 거죠. 근데, 그렇게 될려면 이 아름답고
탐스러운 모양 자체가 부서지고 사라지는 것인데, 정말
열매맺는 그리스도인들이 된다는 것은 내가 보여지고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다른 사람들의 음식이 되고
먹이가 되는 거겠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추구하는 삶이 성공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정말
열매맺는 그리스도인이 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때 우리가 샬롬이라는 것을 이제 가져다 줄 수 있을
거예요. 우리가 소중한 가족 관계에서도 그렇게 서로의
음식이 되어주고 싶은 마음으로 내가 가정에서 꽃이
되고 싶기보다는 열매가 되어서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고 싶을 때, 그 때 그 가정이 얼마나 샬롬의 가정이
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도 믿음의 
경주가 있죠. 우리도 달려가야 될 믿음의 경주가
있는데요, 우리 믿음의 경주가 경쟁 사회의 경주랑
정말 다른데, 경쟁 사회의 경주는 라이벌과의 경쟁이잖아요.
경주. 옆에 뛰는 사람이 있기에 뛰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의 경주는
라이벌이 있어서 뛰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 부르심이
있기에 그 소명 때문에 달려가야 될 경주가 있는 것이지,
옆사람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 그리고 또 하나
우리가 달려가야 될 경주가 있다면 이 땅에 필요가
있기 때문에 달려가는 것이지, 누군가 옆에서 뛰기
때문에 뛰는 거 아니라는 것. 그리고 우리 앞서 걸어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가 있기에 우리가 그 뒤를 따를
경주가 남은 것이지, 옆에 있는 라이벌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 우리가 competition이 아니라 compassion으로 살아가도록
부름받았음을 늘 놓치지 않았으면 합니다. 북미의 native
indian에서 내려오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는데요.
어느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우리 안에는
두 마리의 늑대가 있단다. 근데 한 마리의 wolf는 아주
경쟁심, 이기심, 탐욕, 분노, 상처, 그래서 공격하고
먹으려는 그러한 wolf가 한 마리가 있고 다른 한 마리의
wolf는 이제 긍휼, 사랑, 자비, 온유, 나누고 싶어하는
그런 wolf가 있단다. 근데 이 두 마리의 wolf가 우리 속에서
싸우고 있다고 했어요. 한 마리 wolf는 competition의 wolf고
한 마리는compassion의 wolf고. 손주가 물었어요. 할아버지,
어느 쪽 wolf가 이겨요? 뭐라고 답했을까요? 니가 먹이를
주는 쪽이 이긴다. 어느 쪽에 먹이를 주느냐에 달려있다는
거죠. 우리가 이 치열한 경쟁 사회의 흐름과 논리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거기에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와
마음을 쏟고 살아간다면 이 competition의 wolf는 점점 더
살이 찔 것입니다. 더 강해지겠죠. 우리 안에 있는compassion의
wolf는 맥을 못출거예요. 우리에게도 그게 있긴 있지만,
사용할 수 있는 힘이 전혀 없어요. 그러나, 여러분들이
또 많은 이 시대의 사람들과 다르게 이렇게 코스타
집회를 선택하고 오는 것처럼 사실 이런 시간들은 우리에게
색다른 힘을 주는 거잖아요. 바로 이competition의 wolf에게
먹이를 제공하는 게 아니라compassion의 wolf에 먹이를
제공하는 선택을 하는 거죠. 이런 선택을 하느냐 안
하느냐가 얼마나 다른지는 우리가 알잖아요.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가 어느 쪽에 먹이를 줘야 하느냐 하는
것은 자명한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치열한 경쟁 사회
한복판을 살아가지만, 깨어서 이 쪽의 wolf가 먹이를
먹기보다는 정말 compassion의 wolf가 계속 먹이를 먹을
수 있도록, 그래서 우리가 이 시대의 흐름으로부터는
좀더 자유로와질 수 있고 그리고 오히려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 때, 우리는
정말 샬롬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 땅에 가져올
수 있지 않을까요? 근데 그 예수 그리스도의 길은 우리가
십자가를 통해서도 분명히 알고 있지만, 정말power를
사용하는 길이 아니라 power를 다 내려놓는 길이었잖아요?
power of powerlessness라는 것을 좀 생각해보고 싶은데요.
우리도 경쟁 사회 속을 살아가다보니 그리고 이 경쟁
사회에서 결국 세상을 움직이고 변화시킨 사람들이
다 power를 가진 사람들이다보니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자연스럽게 생겨나게 된 논리가 ‘우리가 힘이 있어야된다.
우리가 주류 사회에 들어가야 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위에 있어야 된다. 그래야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가
있다. 우리가 더 전문인이 되어야 된다. 우리가 전문성을
가져야 세상을 우리가 더 변화시킬 수 있다’ 그런
논리가 아주 자연스럽게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맞죠?
여러분들도 동의하세요? 그런 이야기들은 아주 자연스러워졌어요.
당연히. 그런 이야기의 함정은 ‘우리가 힘이 없으면,
우리가 결국 위에 서지 못하면, 우리가 가진 것이 없다면,
우리가 주류가 되지 못하면, 우리는 세상을 바꿀 수
없어. 우리는 별로 영향을 미칠 수가 없다’라는 그런
동일한 논리인거죠.
 

그런데, 예수님을 
우리 한번 다시 생각해봅니다. 예수님은 
사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세를 
가진 분이셨지만, 그 권세를 이 땅을 
변화시키는데 사용하신 분이 아니라 
오히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으로,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으로 그렇게 무력한 모습으로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줌으로 정말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분이잖아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높아지라고
하신 게 아니라 낮아지라고 하셨고, 올라가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내려가라고 하신 거죠. 대접받으라 하신
것이 아니라 대접하라고 하신 것이구요. 진정 우리가
오히려 power를 가지려고 하기보다 내려놓을 때 진정한
power가 나타난다는 것. 로마서 15장 1절과 2절에 보면
그런 바울의 고백이 있어요. ‘우리 강한 자가 연약한
자들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다 내게 미쳤다 함과
같으니라’. 그 표현을 가만히 보면은요. 우리 강한
사람에게 주어진 소명이 연약한 자들의 약점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고 그리고 비방과 모욕은 내가 받고 그런 것인데요.
우리가 세상에서 강한 사람들을 한번 보고 싶습니다.
세상에서 강한 사람들, 세상에서 소위 물질과 안정된
지위와 많은 것들을 갖고 있어서 강해보이는 사람들은
어떤 특징들을 갖고 있는가? 우선 강한 사람들, 모든
것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자기의 짐을 다른
사람들에게 넘겨줘요.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자기 수고를
대신하게 하는 거죠. 그리고 둘째, 자기들의 인생의
어떤 재미와 편안함을 정말 끊임없이 추구해가요. 그리고
또 하나 어려운 위기의 시기를 잘 넘어갈 수 있는 안전
장치들을 다 갖고 있어요. 보험도 들어놨지만 때로는
심지어 대신 감옥에 갈 사람도 갖고 있어요. 그 정도로
세상에서 강한 사람들은 자신의 짐을 다른 사람의 어깨에
올려놓고 그리고 자기를 기쁘게 하고 위기에서 안전한
거죠. 그런데, 다른 관점에서 한번 보고 싶은데요. 우리가
함께 아주 먼 길을 무거운 짐을 지고 함께 행군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보죠. 함께 먼 산 길을 같이 걸어갑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생기냐 하면, 도저히 이제는
지쳐서 주저앉게 되는 사람들이 생기죠. 더 이상 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됩니다. 그때 강한 사람들이
있어요. 어떤 사람들이냐 하면 그 사람들의 짐을 자기
어깨에 올려놓는 거죠. 그래서 자기 짐이 더 무거워진
사람들이 있어요. 그리고, 그 사람들은 그런 선택을
할 때, 자기를 기쁘게 한 게 아니라 그 약해진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거죠. 그리고, 그 사람들은 이제 다리가
풀려서 걷지 못하게 된 사람들을 위해서 앞서서 가서
위험 요소들을 다 제거합니다. 먼저 위급한 상황들을
다 처리해주는 거죠. 잘 걸을 수 있도록. 그러고보면
진정으로 강한 사람들은 약한 사람들의 짐을 자기 어깨에
올려놓는 사람이고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고
오히려 위급한 상황의 앞에 있는 사람들이예요. 그러고보면
세상에서 강한 사람들은 사실 가장 약한 사람들인거죠.
정말로 강함은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짐이 내 어깨에
올라오고 다른 사람들을 위하고 다른 사람들을 대신해서
위험을 맞이하는 것이 진정한 강함이라는 것. 예수
그리스도가 그렇게 사셨잖아요.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짐을 당신의 어깨 위에 올려 놓으셨고 단 한번도 자신을
기쁘게 하신 게 아니라 다른 우리 모두를 기쁘게 하려고
사셨고 그리고, 우리를 대신하여 모욕과 비방, 십자가의
고통을 다 받으셨으니깐요. 그래서, 이 땅에 샬롬이
오게 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의 십자가는 가장 powerlessness죠.
어느 누구 앞에서도 가장 힘없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진정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있었던
것이고, 이 세상을 다시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통치의
뜻이 있었던 거죠. 그래서, 바로 이 땅에 샬롬을 가져오는
길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위에 올라서는 길이 사실은
아니라는 것. 우리가 정말 내려갈 수 있을 때, 진정
샬롬이 오는 것이고, 우리가 가질 때가 아니라, 우리가
내려놓을 때, 우리가 오히려 가진 것을 나눌 수 있을
때, 그때 진정 샬롬이 찾아온다는 것을 좀 생각해봅니다.
 

Power에 대한, 둘째날에
유진소 목사님이 잠깐 언급한 말에도 나와있지만, power에
대한 헬라어 두 가지가 있는데, 두나미스와 엑소시아라는
두 단어에요. 두나미스는 거기서 다이너마이트가 나온
것이고, 엑소시아는 엑소시스트 이제 그런 것처럼 사실은
다른 의미가 나오는 것인데요. 똑같은 power인데, 하나의
power는 힘, 강력, 타율적으로 다른 사람을 움직이기
위해서 복종케 하는, 그런 보이는 어떤 power같은 것이라면,
엑소시아는 보다 원리, 가치, 그런 것입니다.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하고 따르게 하는 것이죠. 근데, 하나님은
두 가지 power를 다 가지신 분이죠. 예수 그리스도도
두 가지 power를 다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두나미스를 사용하실 때가 있어요.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power를 사용하실 때가 있는데, 그땐 어떤 때만
사용하시느냐 하면 예를 들어서 바로의 철권 통치에
대하여 최종적인 심판을 내리실 때 사용하시는 거죠.
그리고, 때로는 마귀에 사로잡혀서 거기에 묶여있는
사람을 해방하실 때, 그 마귀의 권세를 쫓아내실 때
사용하시는 거죠.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따를 사람들을 부르시고 제자들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고 이 땅을 변화시킬 제자들을 보내실 때,
그들을 이제 불러서 제자가 되라고 하실 때, 절대로
두나미스를 사용하시지 않았다는 것. 예수님은 엑소시아를
통해서 그들을 예수님께로 초청하신 것이죠. 결코 타율적으로
따라오지 않도록. 자발적으로만 오게 하셨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땅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꿈과 의욕이 있다면, 우리도 어떤 보이는 power를 가지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정말 섬김이 오히려 더
power라는 것. 내려갈 수 있는 것이 더 power고 포기하는
것이 더 power라는 것. 그것을 통해서 오히려 세상을
더 새로운 길로 안내하고 이제 초청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한편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제 그 세상 
한복판을 살아가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인데요. 그런 
점에서 우리는 순례자라고 표현하잖아요.
그런데, 이 순례자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인지 한번
표를 통해서 잠깐 잘 정리해보고 싶은데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면
하나는 잘 정착해서 살아가는 정착민들, 그리고 온갖
만족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관광객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순례자들이 있는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걸맞는 단어는 어떤 걸까요? 정착민입니까, 관광객입니까,
순례자입니까? 우리 순례자라고 고백하죠. 히브리서
11장에도 있는 표현처럼 그 믿음의 사람들에 대한 어떤
표현이 그거잖아요.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되,
땅에서는 그 약속을 따라 받지 못하였지만, 스스로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다구요. 그들이
또한 본향을 사모하고 있었는데, 돌아온 본향을 사모했다면
되돌아갈 기회가 있었겠지만 그들이 더 나은 본향을
사모했는데, 이제 하늘에 있는 본향을 사모했다구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하늘에 한 성을 예비하셨다는 그런 말씀이 있잖아요.
그런데, 그 고백을 통해서도 우리가 알듯이, 우리는
순례자라는 찬양도 부르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순례자는
이제 여행을 하는 사람들인데, 우리가 여행을 할 때는
떠남이 있는거죠. 그리고, 여행은 뭔가 목표가 있기에
추구하면서 여행합니다. 그리고, 여행의 과정에서 받아들여야
되는 게 있죠. 그리고, 여행이 쉽지만은 않기 때문에
싸움이 있습니다. 근데, 이 네 가지 영역에서 정착민과
관광객과 순례자가 어떻게 다른지 한번 완성해보고
싶은데요. 정착민은 떠나는 사람들인가요? 전혀 아니죠.
떠남이 없죠. 그리고, 떠남, 버림, 그리고 내려놓음이
사실은 없는 사람들이,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이 정착민이죠.
관광객은 떠남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떠나죠. 그러나
관광객들은 얼마만큼이나 떠나는 걸까요? 관광객들은
자기 문화를 다 내려놓고 떠나나요? 사실 그렇지 않죠.
우리가 아무리 관광 여행이 좋아도 나 고추장, 김치
없으면 안돼 하면서 챙겨가잖아요. 관광 여행에서는
떠나긴 떠나지만 사실은 부분적으로면 떠나는 거죠.
적당히 떠납니다. 하지만, 순례자의 떠남은 어떤 걸까요?
순례자는 가능한 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나는 거죠.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믿음의 여행을 할 때도 사실은 모든 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그런 떠남의 부름이 있었던 것. 또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름받았을 때, 그들이 그물과 배와
아버지를 다 버려두고 떠나게 됬던 것처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의 부름, 순례자로의 부름은 우리에게
익숙하고 우리에게 필요하고 소중한 안전 장치들조차도
실은 내려놓을 수 있는 믿음의 용기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추구함, 정착민은 뭘 추구할까요?
정착민들이 추구하는 것은 우선은 안정이구요. 그리고,
또 하나 붙인다면 번영, 형통을 추구하는, 안정과 번영을
추구하죠 당연히. 그럼 관광객들을 뭘 추구할까요?
관광객들을 즐거움, 만족을 추구한다고 표현하고 싶은데요.
세 가지 만족, 요한일서에 있는 표현처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 실제로 우리 관광
상품들을 보면 알 수가 있잖아요. 관광 상품에서 중요하거든요.
사실 몸이 즐거워야죠. 먹거리, 잠자리가 나쁘면 사실
관광객 모으기 어렵잖아요. 그리고, 몸만 즐거우면
뭐합니까? 볼 거리가 정말 중요하죠. 볼 거 없으면 왜
가겠어요? 다 눈요기 때문에 가는건데. 또 하나 이생의
자랑두요. 우리 관광 여행가면 제일 많이 하게 되는게
뭐냐하면 사진을 찍어오는 것인데요. 그 사진 많이
찍어서 이제 가져오죠. 근데 그 사진에서 결코 빠지지
않는 사람이 하나 있어요. 누구예요? 나. 관광지의 유적,
사람, 문화, 그것은 다 나를 위한 들러리고 내가 거기
있었다는 게 중요하죠. 그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자랑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이 관광객은 이런 것들을
만족시키는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 하지만, 순례자는
뭘 추구하는 사람일까요? 그 Kingdom seeker 잖아요.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나라,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받아들이는 것도 다르죠. 정착민은 뭘 받아들일까요?
다르게 얘기하면, 정착민들이 잘 못 받아들이는게 뭐죠?
외부인, 또 변화. 정착민들은 변화 싫어하잖아요. 또
바깥에서 오는 거 싫어하고. 그 얘기가 뭐냐하면, 익숙한
것만 받아들이는 거죠. 익숙한 것만. 관광객은 뭘 받아들일까요?
새로운 거 받아들여요, 받아들이지 않아요? 받아들이죠.
그런데, 단서가 있어요. 마음에 드는 것만. 새로운 거라고,
아무리 새로운 음식이라도 마음에 안 들면 왜 받아들이겠습니까?
마음에 드는 것만 받아들이죠. 순례자는 어떨까요?
순례자는 이 믿음의 여정, 순례 여정에 있는 모든 과정들을
받아들이는 거죠. 싸움이 있는데, 정착민은 주로 누구랑
싸울까요? 정착민의 싸움은 그 주변 정착민과의 싸움인데요.
왜냐하면, 그 마치 나라와 민족도, 국경이 붙은 나라와
민족치고 사이좋은 나라가 없어요. 이유는 이쪽도 안정과
번영을 원하고 이쪽도 안정과 번영을 원하니 경계선
분쟁이 생기는 거잖아요. 그러니 사람도 살지 않는
독도까지 가지고도 사실은 으르렁거릴 수 있는 게 관계잖아요.
근데, 그런 거처럼 우리가 개인적으로도 정착민으로
살아갈 때는 언제나 주변 정착민들과 어떤 영토 분쟁처럼
경계선 자리싸움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죠. 그러니까
주변 정착민과 싸웁니다. 그럼 관광객은 누구랑 싸울까요?
관광객은 주로 가이드랑 싸웁니다. 왜냐하면, 관광
여행을 나선 이유는 좋은 관광 상품을 소개받았기 때문이고,
거기에 대한 책임은 가이드에게 있는 거죠. 불만족에
대해서는. 우리가 알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길을
나서서 모세를 뒤따라갈 때 그들이 기대했던 것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어요. 좋은 관광 상품으로 소개된
거죠. 그러나, 아무리 가도 가도 먹을 것, 마실 것, 잠자리,
불편한 것 밖에 없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나타나지도
않고. 누구 책임입니까? 모세 책임이죠. 사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이 출애굽기 19장에서 들은 것처럼 ‘이제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명령을 지키면 너희가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그리고 제사장 나라가 될
것이며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다’ 이제 그런 비전을
주신 것이지만,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들려진 거는
그게 아니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어요. 그래서,
그 백성이 광야길을 관광객의 마음으로 걸었으니 계속
원망하고 불평하고 그랬던 거죠. 순례자는 누구랑 싸울까요?
순례자는 자기 자신과 싸우는 사람이죠. 우리 교회도
한번 생각해봅니다. 정착의 교회, 정착의 교회는 사실은
어두움을 갖기 쉬운 거죠. 때로 어떤 교회들은 전통과
옛날 것을 절대로 벗어버리지 못하는 교회들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원래 마음들이 그랬던 건 아니었어요, 보면.
우리 예수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나 바리새파나
율법학자들, 아마 그 사람들도 젊었을 때 처음 거기에
입문할 때는 굉장히 순수했을 거예요. 다른 유대인
어떤 사람보다 더 말씀을 사모하고 또 주님의 율법을
지키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졌기에 그리로
들어갔겠죠. 하지만, 거기에 오래 정착하다보니 완전히
정착민이 되어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도 없고 결국은
이제 정말 하나님의 뜻과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교회도 정착의 교회가 될 때, 그 세상
안에서 잘 정착하려고 할 때, 이러한 어둠을 갖게 될
수 있다는 것. 교회가 생각보다 정착의 교회는 언제나
안정과 번영을 추구하기 쉽고, 그리고 익숙한 것만
받아들이려하고, 그러다보면 그 안에서 참 갈등과 다툼을
많이 겪게 되고, 교회와 교회들 사이도 경쟁 관계가
되기 쉬운거죠. 그런가하면 관광객의 교회, 어쩌면
오늘은 좀 그런 모습도 많이 보여지는 것 같애요. 오늘
우리 시대가 customers’ satisfaction의 시대라고 표현할
수 있을 거 같은데요. 소비자 만족 시대. 정말 소비자들을
만족시키는 게 정말 중요하잖아요. 정말 많은 교회들도
성장하고 더 좋은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좋은 소비자들을
만족시킬 필요가 있으니까, 많은 성도들도 소비자처럼
모든 조건들이 잘 갖추어진 교회를 선호하게 되었어요.
우리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에서부터 모든 것들이
잘 갖추어진 교회가 좋죠. 마치 우리가 mall에 모든 것이
잘 갖추어진 mall이 쇼핑하기 좋은 것처럼, 사실 오늘의
교회는 정말customers’ satisfaction과 많이 이제 가까와져버린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우리가 다시 회복되어야될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 우리는 정말 순례자의 교회로
부름받았다는 것을 좀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교회도
그렇지만, 우리가 개인적으로도 그렇겠죠. 여러분들은
누군가요? 정착민인가요, 관광객인가요, 순례자인가요?
아마 섞여있다고 고백하게 될 거예요. 내 안에는 정착민의
모습도 보이고, 관광객의 모습도 보이고 순례자의 모습도
보이죠. 그런데, 우리가 정말 사랑하고, 우리를 또 너무나
더 먼저 사랑해주신 예수님께는 정착민의 모습이 전혀
없었고, 관광객의 모습도 전혀 없었잖아요. 오직 순례자의
모습만 있었죠. 그리고, 그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
하시는 이유가 있겠죠. 예수님은 우리가 정착하는 거
싫어하시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만족을 누리는 거
싫어하시는 게 아니라, 우리 개인보다 주님께서 정말
사랑하시는 모두를 위한 것이죠. 저도 저희 아이들이
다섯이지만, 아이들이 이제 처음에는 같이 먹을 것을
분배해 주잖아요. 어렸을 때. 그럼 각자 자기 것을 갖고
있잖아요. 그러다가 어떤 애는 빨리 자기 것을 먹어치워버리고,
어떤 애는 잘 보관해둬요. 그러면 이제 시간이 지난
다음에 보관해둔 애가 그것을 먹으려 그럴 때, 먹었던
애가 나 좀 달라 그러죠. 그러면 안 줄 권리가 있죠.
당연히. 안 줘야 더 공평하죠. 그런데, 그 때 그 아이가
안 주고 절대로 안 준다고 지키고 있을 때 부모가 볼
때는 ‘아이, 그래도 그거 좀 주지’ 그런 마음 드는게
사실이예요. 그렇잖아요? 설사 잘 보관해놓고 지킨
아이가 자기 것을 먹는 게 당연한 권리이기도 하지만요.
그래서 참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정말 언제나 sharing에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고 싶어요. 하나님은 이 땅에
진정한 샬롬, 조화를 바라시는데, 그것은 우리에게
있는 것을 우리가 서로 아끼지 않고 사랑으로 서로
나누려고 할 때, 우리가 나를 위해서 살기보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려고 할 때 이루어진다는 것을요.
 

이 세상에는 
크리스챤들 중에서 참 이 샬롬을 
위해서 특별히 헌신한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어요.
저는 제가 몇 가지를 예로 들고 이제 마치고 싶은데,
혹시 여러분, 떼제 공동체라고 들어보셨어요? 떼제라는
크리스챤 공동체가 있는데, 한국에도 이제는 떼제 음악으로
많이 알려져 있죠. 근데 이 떼제 공동체는 프랑스의
떼제라는 아주 시골 벽지에 있는 곳인데요, 거기는
이차 대전 끝날 즈음에 어느 한 청년이 혼자서 중보
기도하러 산 속으로 들어가서 거기 거주하게 되면서
생겨났어요. 그런데, 거기를 지나가던 어떤 다른 청년도
같이 중보 기도에 참여하게 되고, 그러다가 이제 거기에
형제들의 공동체가 형성되게 됬는데, 지금은 매년 유럽의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찾아가는 곳이 되었습니다. 근데
그 공동체가 헌신하는 거는 뭐냐하면 화해와 일치예요.
화해와 일치, 정말 샬롬이 이땅이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결혼도 하지 않기로 결정한 개신교 청년들이라고 볼
수가 있는데요. 남자 형제들인데, 그런데 이 떼제 공동체에서는
언제나 하루에 세 번 예배가 드려지는데, 그리고 그
예배는 다 라틴어로 이루어져요. 프랑스 마을에 있는데도.
라틴어를 선택한 이유가 있어요. 그 이유는 유럽은
아시는 분들은 알겠지만, 로마가 기독교 국가가 된
후에 계속해서 기독교 세계였잖아요. 그렇지만, 나중에는
개신교와 캐톨릭 사이에, 또 프랑스와 독일, 프랑스와
영국, 이태리, 모든 나라들 사이의 전쟁의 역사예요.
계속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아는 사람들끼리 죽이고
죽인 전쟁이죠. 그 전쟁의 역사 속에서 서로 다 싫어합니다.
마치 한국 사람들이 일본 사람 싫어하고 그러듯이 유럽에
있는 사람들도 생각보다 긴장과 그 갈등이 많아요.
근데 그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제 함께 서로를 소중히
여기고 회복하고 하나될 수 있도록 그래서 중보 기도하는
곳이고 또 모든 언어, 영어, 독어, 불어, 스페인어의
모체가 라틴어잖아요. 그래서, 라틴어로 선택해서 찬양을
부르는 거죠. 거기가 정말 샬롬을 위해서 참 아름다운
헌신을 한 젊은이들을 많이 볼 수 있는 곳이고. 그리고
또Christian Peacemaker 팀에 헌신한 사람들이 있어요. 이
사람들은 우리 한국에는 또 다른 단체지만, 혹시 여러분들
프론티어즈라고, 개척자들이라고 들어보신 분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한 단첸데요. 이Christian Peacemaker들이나
개척자들은 어떤 사역만 하냐면 세계 분쟁과 전쟁이
있는 지역으로만 사람을 보냅니다. 거기에 그 전쟁과
분쟁으로 인해서 갈라진 사람들 사이에 이제 중재자가
되기 위해서 헌신하는 거죠. 상처입는 쪽의 사람들을
위로하고 거기의 아이들을 위해서 사역하고 가능하면
그것이 다시 복수와 분노로, 복수로 나가지 않도록
화해와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저는
모두가 그렇게 살아야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정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샬롬을 위해서 헌신한다는
것은 우리 주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그 샬롬이 나로부터
나의 가까운 가정과 이웃, 또 교회, 또 직장, 또 학교,
또 심지어 나의 민족을 넘어서서 다 전해지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샬롬에 대한 정말 진지한 이해와 헌신이 필요하다는
것. 멀리까지 갈 이유는 없다 하더라도 정말 샬롬을
위해서 중보 기도하고 또 우선 내가 가정 안에서도
샬롬을 위해 헌신한 사람이 될 수 있을 때 그때 예수
그리스도의 뜻은 하늘에서와 같이 또 이 땅에도 이루어지지
않을까 그렇게 기대합니다.

샬롬을 위한 헌신 1 – 이훈

다음은 2009 KOSTA/USA Chicago conference에서 이훈 목사의 ‘샬롬을 위한 헌신’이란 세미나를 eKOSTA 편집부에서 녹취하여 정리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평화의 
왕이시고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는 분이시고 
무엇보다 한편 평화, 샬롬을 누리신 
분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 이 땅의 
어느 누구보다도 샬롬을 누리신 분인데 
그러나 한편 성경을 읽어보면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가장 슬퍼하셨던 
분인 것 같기도 해요. 슬픔과 평화는 
반대편에 있는 것 같기도 한데, 예수님은 왜 슬퍼하셨나?
예수님의 슬픔을 성경에서 좀 본다면 특히 누가복음
19장 42절에 보면 예루살렘성을 보며 우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오늘 네가 평화에 이르는 길을 알았더라면 좋았을텐데,
그것이 너의 눈에는 가리워져 있구나.’ 평화에 이르는
길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이 땅의 사람들을 보면서
슬퍼하신 거죠. 예수님은 하늘의 평화가 뭔지 아시고
누리시는 분이었지만 그것을 알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 때문에 슬퍼하셨다는 것. 예수님은 평화를 위해서
샬롬을 위해 헌신하신 분인데요. 그래서 그렇게 예수님은
함께 이 땅에 샬롬, 평화를 위해 헌신할 사람들을 필요로
하셨고 그래서 찾아오셨고 부르시기도 한 거죠, 제자들을.
근데, 제자들이 얼마만큼이나 이 샬롬을 위해서 잘
준비되었었는지 우리가 성경을 보더라도 제자들은
참 변화되지 못한 제자들이었음을 우린 성경에 있는
에피소드들을 통해 많이 보게 되잖아요? 예수님의 제자
중에 야고보와 요한이 어머니까지 대동해서 한 번 청원을
한 적이 있죠. ‘주님 나라에서 우리 두 사람, 우리
두 아이,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혀달라’고
했습니다. 그 말씀을 들으셨을 때 예수님 뭐라고 하셨냐하면
‘너희가 무엇을 추구하는지, 구하는지 알지 못하는구나.
너희가 내가 마시려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 그렇게
물으셨어요. 그때 제자들은, 야고보와 요한은 ‘예,
마실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했죠. 근데 그 잔은 원래
어떤 잔이죠? 고난, 죽음의 잔인데, 그 의미도 모르고
‘마실 수 있습니다’ 했죠. 그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래, 너희도 언젠가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게
될 것이다. 하지만, 너희가 나에게 구한 것,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너희에게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해
예비되었든지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주실 것이고 내가
너희들에게 원하는 것이 있다. 부탁하는 것이 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나 권세를 부리는 자들은 그렇게
세도를 부리고 위에 서려고 하지만 너희 중에는 정말
그렇지 않았으면 좋겠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되겠고 대접을 받으려하는
자는 대접하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내어주러 왔다’ 그렇게
말씀하셨죠. 근데 그 에피스드에서 야고보와 요한이
그렇게 좌우편에 앉혀달라고 어머니까지 모시고 와서
청원했을 때 그 이야기를 들은 나머지 제자들이 어땠어요?
다 제자들이 분이 났다고 했어요. 그러고보면 그 제자들이
함께 동역자고 친구들이고 정말 가족이 되었었는데,
그 제자들 중에 헛된 야망과 꿈을 가진 제자들의 이야기가
결국 관계들을 갈라놓게 된 거죠. 그래서 우리가 진정으로
샬롬을 이루고 샬롬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있는 잘못된 꿈을, 어떤 야망을 좀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먼저 좀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제가 샬롬이 
무엇이냐 라는 샬롬의 의미에 대해서 
세미나를 할 때 샬롬은 다름아닌 
조화이고 관계의 회복이고 그리고 sharing이라고 
표현했었는데요. Empire builder와 Kingdom seeker를 한번 이제
어떻게 다른지 좀 생각해보고 싶어요. Empire builder는
자기의 왕국을 건설하려는 사람이라면, Kingdom seeker는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사람인데요. 여러분들은
Empire builder 입니까, Kingdom seeker 입니까? 어떻게 다를지
좀 생각해보고 싶어요. Empire builder는 자기의 왕국을
세우려는 사람인데, 자기 왕국을 세우는 사람은 스스로
통치하죠. 왜냐하면 나의 왕국이니까 내가 다스립니다.
하지만, Kingdom seeker는, 즉 하나님의 통치를 추구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고 또한 신뢰합니다.
그분이 다스리신다는 것을 아는거죠. 스스로 통치하는
사람은 자기가 통치하지만, 언제나 마음에 불안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다스려지지 않는 영역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내가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불안한 거죠. 통치할 수 있지만, 통치 안 되는
영역이 있으니까. 그러나, Kingdom seeker는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분의 통치를
신뢰하기에, 마음에 평화가 있습니다. 그리고, Empire
builder는 자기의 영토가 분명해야할 필요가 있어서 울타리를
세우고 자기 편을 만듭니다. 왜냐하면 내 통치의 영역이
안정되고 확정될 필요가 있으니까, 분명할 필요가 있어서이지요.
그러나Kingdom seeker는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지 않을 곳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자신이 갖고 있던 울타리도 걷고
그리고 자기 편 만들지 않죠. 자연히 사람들에 대한
태도가 참 다른데요. Empire builder는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하죠. 왜냐하면 내가 다스리니까. 그리고 사람들을
이용하게 됩니다. 나의 목적을 위해 사람들이 필요한
것이니까요. 그리고 사람들을 묶어두려고 하죠. 왜냐하면
내 통치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 싫으니까요. 하지만,
Kingdom seeker는 하나님의 통치의 뜻을 따라서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하지 않고 섬기려 하고 또 이용하려고 하기
보다는 사람들을 세우려 하고 사람들을 묶어두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풀어줍니다. 자연히 함께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차이가 나타나는데Empire builder로 살아갈 때 관계
속에 긴장과 불신이 많이 생기죠. 왜냐하면 내가Empire
builder일 때 지금은 내 밑에 있고 나와 함께 있는 것
같지만 이 사람도Empire builder로 보이기에 언제 나를
치받고 올라올지 모른다는, 사람에 대한 불신과 긴장이
생겨나게 되는 거죠. 그러나, Kingdom seeker는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신뢰가 있기에 관계 속에서도 긴장이 아니라
평화와 신뢰가 있습니다. Empire builder로 살아간다면
친구와 이웃은 늘어날까요, 줄어들까요? 줄어들 수
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경쟁자와 적은 늘어나게 되겠죠.
그러나, Kingdom seeker로 이렇게 살아간다면 오히려 친구와
이웃들이 늘어나게 되고 경쟁자와 적은 사라져가게
되는 거죠. Empire builder와 Kingdom seeker와 이렇게 다른데요,
야고보와 요한이 그렇게 주님의 나라에서 좌우편에
앉혀 달라고 할 때,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을 위해서
헌신했고 주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한 것
같았지만 스스로, 사실 그들 안에는Empire builder의 야심을
그대로 갖고 있었던 거죠.
 

근데 이런 질문을 
한다면 어떨까요? 목회자들이나 오지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도Empire builder가 될 수 
있을까요? 예, 좀 안타깝지만 그럴 수 
있습니다. 비록 내가 대단한 헌신을 
했다고 스스로 자부한다 하더라도, 내가 정말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했다 생각한다 하더라도 만약 나의
삶에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이런 부분들이
있다면 내 마음이 뭔가 불안하고 내가 스스로 다 control해야
마음에 좀 안심이 생기고 그리고 자꾸 나의 분명한
울타리를 만들고 내 사람을 만드는 경향이 있다면,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을 자꾸 지배하려고 하고 그리고
이용하려고 하고 묶어두려고 하는 것이라면, 함께 있는
동역자의 관계 속에 자꾸 긴장과 불신이 생겨난다면,
자꾸 소중한 관계들이 경쟁자와 적이 되어간다면, 아무리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대단해보이는
사역을 한다 하더라도 그 사람은Empire builder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것. 사실 기독교도, 교회도 Empire 일 수
있다는 것을 교회 역사를 통해서도 보게 됩니다. 만약
기독교가, 교회가 세상 속에서 어떤 다스리려고 할
때, 스스로 모든 것을 주도하려고 하고, 그리고, 울타리를
세우고 배타적으로 자기의 세력들을 결속시키려고
할 때, 기독교가 다른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지배하고 이용하고 또 묶어두려고 할 때, 그리고 바깥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긴장과 불신들을 만들어낼 때,
사실은 기독교 세계도 Empire가 되고 마는거죠. 로마가
기독교 국가가 되었을 때 그 당시의 기독교는 사실은
Empire였지 하나님 나라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군
전쟁을 일으켜서 주변 민족들을 침략하고 약탈하고
그래서 어두운 역사를 남겨놓게 되었던 거죠. 사실
이 Empire builder냐, Kingdom seeker 냐는 우리의 작은 관계
속에서도 늘 이제 왔다갔다 하기가 참 쉬운 거잖아요?
우리 부부 관계에서도 사실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만났지만,
서로 영역 다툼하기가 참 쉽고 사실은 지고 싶지 않은
것이고, 내가 주도하고 싶어하고, 그리고 나의 이익을
추구하려고 할 때, 우리는Kingdom seeker가 되기보다는Empire
builder가 되서 결국은 샬롬이 아니라 갈등과 분쟁을
만들어내기 쉽다는 것을 생각해봅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렇게 좀 생각해봤는데요. 오늘
우리 한국 기독교가 굉장히 많이 공격과 모욕을 당하고
있잖아요. 개독교라는 말까지 듣고 있는데, 근데 도대체
이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좀 생각해보면 저는 이렇게도
표현하고 싶어요. 안타깝게도 우리 믿음의 선배들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셨기 때문이라고요. 어떤
의미냐 하면 저도 기독교 가정에서 이제 몇 대째 자랐는데요.
제가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니면서, 그리고 교회에서
때로는 목사님이 오셔서 심방을 해서 축복해주시고
기도해주시잖아요? 또 교회 장로님들이 다음 세대를
위해서 기도하고, 또 부모님들이 다음 세대를 위해서
많이 기도하잖아요. 제일 많이 들었던 기도가 어떤
기도냐 하면 ‘하나님, 이 아이가, 우리 다음 세대가
꼬리가 되지 않고 머리가 되게 해주시고, 꾸는 자가
되지 않고 꾸워주는 자가 되게 해주십시오.’ 그런
기도 들어보셨어요? 그 기도를 하나님이 그래도 들어주신
거 같애요. 그러니 기독교인들이 대통령도 되고 사실
우리 나라의 정치, 경제, 교육, 문화, 어느 영역을 가든지
위로 가면 갈수록 크리스챤 비율이 높잖아요. 크리스챤들이
리더가 된 영역이 참 많습니다. 그렇지만, 사실은 그들
안에 정말 섬기려는 마음, 대접받는 것이 아니라 대접하려는
마음, 으뜸이 되기보다는 종이 되려는 마음이 너무나
배우지 못했고 없었기에 단지 위에만 섰을 뿐 결국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삶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것 같아서 결국은 바깥으로부터 멸시와 모욕을 받게
된 것 아닐까요? 만약 우리의 윗 세대의 신앙의 부모들이
이렇게 기도했더라면 어떨까요? ‘하나님, 우리 아이가
머리가 아니라 꼬리가 되어도 좋으니 정말 섬길 줄
아는 아이가 되게 해주십시오. 하나님, 우리 아이가
이 세상에서 대접받는 아이가 아니라 정말 대접할 줄
아는 아이가 되게 해주십시오. 하나님, 우리 아이들이
정말 이 땅에서 우뚝 서는 아이들이 아니라 정말 바닥에서
섬길 줄 아는 아이들이 되게 해주십시오’. 그런 기도들이
드려졌다면 오늘 한국 기독교는 정말 많이 달라졌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여전히 오늘도 야고보의 어머니처럼,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처럼 동일한 기도들이 계속
올려지고 있는 것 같애요. 하지만 예수님은 말씀하셨죠.
‘너희가 정말 무엇을 구해야 하는 줄 알지 못하는구나.
내가 마시려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하겠고, 대접을 받고자 하는
자는 대접하는 자가 되라’고. 예수님은 친히 제자들
앞에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면서 정말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그 길을 잘 보여주셨잖아요.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단 한번도 땅에 있는 어떤 영광을 얻으려고
하신 적이 없고 끝까지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오직 Kingdom
seeker로만 사셨는데, 그 Kingdom seeker로 살 제자들을 부르신
것이고 기다려주신 거죠. 그런데, 우리가 알 듯이 제자들도
나중에 변했잖아요. 그렇게 엉뚱한 야망을 가졌던 제자들도
나중에는 다 달라졌습니다. Kingdom seeker가 된 것이죠.
 

예수님께서 동일하게 
우리도 부르고 계시는데, 우리를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게 되기를, 우리의 
나라, 나의 empire가 아니라 먼저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6장에 나오는 그 말씀을 하실 때보면
예수님께서 그런 말씀하시죠. ‘너희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만, 그런 것들은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너희에게는 하늘 아버지가
있지 않냐고. 하늘 아버지는 너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다 알고 계신다’라고요. 그러니, 너희는 그런 것들
염려하지 말고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하셨죠.
그러면서 그때 예로 드신 것이 너희가 공중에 나는
새를 봐라. 그리고, 들에 핀 백합화를 봐라. 다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기르시고 입히시지 않냐고.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그런데, 정말 한번 그렇게 생각해보죠. 공중에 나는
새가 하나님께서 먹이시나요,  스스로 먹이를 찾아서
사나요? 그리고, 들에 핀 백합화. 스스로 그렇게 이제
피어나는 건가, 하나님께서 다 입혀줘서 그렇게 아름답게
된 건가요? 우선 새를 먼저 생각해보면, 어떤 관점에서
보면 새가 열심히 먹이도 찾아서 먹고 살아가는 것
같아요. 하나님이 먹이시는 게 아니라. 그래서 심지어
early bird라는 말도 있잖아요?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이를
얻는다. 그러니까, 경쟁, 땀흘리고 노력해야 뭔가를
성취할 수 있다라는 생각에서 보다 근면해질 것을 말하기
위해서 생겨난 속담이죠. 그런데, 실제로 새들 중에
더 먹이 때문에 일찍 일어나는 새가 있을까요? 그리고,
우리가 알듯이 새들은 우리가 갖지 않은 눈과 날개를
갖고 있는데,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먹이를 참
잘도 찾아요. 그리고, 우리가 갈 수 없는 곳에 잘 가는
거죠. 근데, 그것이 노력일까, 선물일까 좀 생각해보고
싶은데요. 갓난아기들이 태어나서 엄마 젖을 쪽쪽 빠는
것은 노력일까요, 본능인가요? 빨라고 해서 빠나요,
저절로 빨게 되나요? 저절로 빨게 되는 것이죠. 그거는
하늘이 주신 선물이잖아요. 그거는 노력도 아니고 땀도
아니라구요. 저절로 하게 된 것. 그런 점에서 그것은
하늘이 주신 선물이니까, 하나님께서 먹이시는 거고
기르신다고 말할 수 있죠. 그러니까, 너무 스트레스받고
살지 말라는 면에서 어떤 사람이 재밌는 도전을 했어요.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이를 얻는다’는 말에 대해서
‘일찍 일어나는 벌레가 먼저 잡아먹힌다’. 똑같은
논리겠죠. 만약에 정말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이를
얻는 거라면 일찍 일어나는 벌레는 먼저 잡아먹히니까.
자연의 세계는 스스로 땀흘리고 노력하고 노력해서
살아가는 게 아니라, 하늘이 주신 그 선물, 은사, 본능을
따라서 그 축복을 누리는 것 같습니다. 들에 핀 백합화도
그 자그만한 씨앗에서 실같은 뿌리가 내려오는데, 참
멀리도 잘가요. 물도 잘 찾아가잖아요. 그것을 어떤
눈으로 보면 노력인 것 같지만, 그러지 않는 씨앗들이
있는게 아니잖아요. 안에 생명만 충분히 있으면 다
찾아가요. 그냥 그러면서 하늘이 주신 선물을 따라
꽃을 피워내는 거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백합화를
말씀하실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솔로몬이
입은 그 모든 영화도 이 들꽃 하나만 못하였다’ 하셨죠.
솔로몬의 영화와 들꽃의 영화. 어떤 게 더 영광스럽습니까?
우리가 보기에는 솔로몬의 영광처럼 대단해보이는
게 없는 거 같은데, 왜 예수님은 솔로몬의 영광보다
이 들꽃의 영광이 더 크다고 하셨을까요? 저는 이 말씀을
곰곰히 묵상하면서 주님의 뜻을 깨닫게 된 기회가 있었는데요,
가만히 보면 이 솔로몬과 들꽃을 비교해본다면, 솔로몬의
영광은 소유로 인한 영광이라면 들꽃의 영광은 존재의
영광입니다. 솔로몬이 그렇게 우리에게 영광스러워
보이는 이유는 뭘까요? 솔로몬의 벌거벗은 몸뚱아리가
아니라 그에게 덧입혀진 것들이예요. 그가 가진 지혜와
지식, 그가 갖게 된 인기와 명예, 그가 가진 물질과
권력, 그것이 솔로몬을 영광스럽다 보는 거죠. 만약
솔로몬에게 그런 모든 게 없다면, 지혜와 지식도 없고,
인기도 없고, 권력도 부도 없다면 누가 솔로몬 영광스럽다고
말하겠어요? 우리가 말하는 솔로몬의 영광은 그가 가진
소유에 대한 영광이죠. 그러나, 들꽃은 덧입혀진 것이
있는 게 아니라 창조주가 자신에게 준 몸뚱아리 그
자체로 창조주의 아름다우신 영광을 드러내고 있는
거죠. 또 하나 차이는 주변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달랐습니다. 솔로몬은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멀리서 다른 민족의 사람들까지 구경하러
올 정도로 부러움도 사기도 했죠. 그런데 솔로몬은
잘 몰랐던 거 같애요. 솔로몬이 죽고 난 뒤에 아들 르호보암이
나라를 다스릴 때, 백성의 지도자들이 찾아와서 간청을
하죠. ‘임금님, 선왕 솔로몬께서 우리를 다스리실
때 우리의 어깨에 얹어준 멍에와 짐이 너무나 무거워
이젠 더이상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이 짐을 좀 내려놓게
해주십시오.’ 솔로몬이 통치할 때 7년 동안의 성전
건축과 이어서 13년의 왕궁 건축을 하면서 백성들을
강제 노동에 동원시켰던 거죠. 근데, 그때 그 말을 들었던
르호보암은 왕궁에 있는 신하들 중에 젊은 친구들의
조언을 따라서 강경책으로 나갔었죠. 그래서 더 강하게
나가니까 백성의 마음들이 떠나고 여로보암을 중심으로
열 지파가 떼어서 나가면서 이스라엘이 두 쪽이 나고
말았습니다. 르호보암의 정치력의 부재였다고 말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원인 제공은 누가 한 겁니까?
솔로몬이 한 거예요. 솔로몬이 왕궁에서 편한 잠을
잘 때, 백성들은 허리가 아파서 신음하고 있었고, 솔로몬이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며 만족하고 있을 때 백성들은
눈물 뿌리며 고통하고 있었다는 것. 솔로몬의 영광은
백성들,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담보로 얻은 영광이었죠.
하지만, 들꽃은 어느 누구도 아프게 하지 않잖아요?
지나가는 길손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줄 뿐, 누구도
아프게 하지 않습니다. 또 남기고 가는게 달랐어요.
솔로몬은 뭘 남기고 갔나요? 한편 솔로몬은 안정된
국가와 모든 부와 권력을 아들에게 다 고스란히 물려줬어요.
보통 솔로몬을 가장 부럽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어요.
솔로몬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형통했던 사람이예요.
아버지 다윗은 역경도 많이 겪고 고난 많았잖아요.
사울 왕의 시기 때문에도 참 고생고생했지만, 왕위에
오른 다음에도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또 피난 생활했어야
됬고, 정말 우여곡절을 많이 겪었는데,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이 안정된 국가를 물려줬거든요. 그래서 요람에서부터
정말 형통하게 시작했어요. 그리고, 왕위에 있는 동안에
외적의 침략을 받아본 적도 없고 안에서 내란이 있지도
않았어요. 죽을 때 아들에게 다 물려주고 갔어요. 그러니,
복지 사회의 구호라고 말할 수 있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형통했던 사람이 사실 솔로몬이죠. 근데, 솔로몬은
다 잘 물려준 것 같았는데, 사실 솔로몬이 뿌려놓고
간 어둠의 씨앗들이 있었어요. 그 하나는 앞서도 얘기했지만,
결국 이스라엘이 두 쪽으로 날 어둠의 씨앗을 남겨놓고
간 것이고, 또 하나 솔로몬이 왕위에 있을 때 수많은
이방 여인들을 품에 안게 되면서 우상 숭배의 문을
활짝 열어놓고 갔어요.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이후에, 솔로몬 이후에 이스라엘 왕들은 거의
예외없이 우상 숭배에 빠지게 된 거죠. 솔로몬은 어둠의
씨앗들을 가득 남겨놓고 갔습니다. 그게 솔로몬의 영광이예요.
하지만, 들꽃은 뭘 남겨놓고 갈까요? 자기 생명의 씨앗들을
남겨놓고 가겠죠. 그 씨앗들은 또 들꽃들이 되어서
창조주의 정원을 아름답게 할 것이구요. 솔로몬과 들꽃,
뭐가 더 영광스럽습니까? 네, 그러면 솔로몬 되고 싶으세요,
들꽃 되고 싶으세요? 주님은 솔로몬의 영광을 꿈꾸고
살아가고 그렇게 되고 싶어하는 우리, 그래서 보다
더 필요를 더 채우고 갖고 싶어하는, 그래서 무엇을
더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정말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시는 거죠. 너희가
그렇게 살아가다보면 결국 너희의 모든 관계들은 전쟁터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 더 위에 서려고, 더 가지려고
아귀 다툼을 하다보면 모든 관계들은 깨지고 만다는
것. 너희에게는 너희를 사랑하시는 하늘 아빠 아버지가
계시지 않느냐고. 그 아빠 아버지는 너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시고 그것을 다 주실 준비를 하고
계시다고. 그러니,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말씀하신거죠.
 

우리는 샬롬을 
위해서 정말 기도할 필요가 있는 거 같습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서도.
우리가 진정 이 땅에 샬롬이 올 수 있도록 기도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애요. 최근에 한국에도 소개된 다음에 몇
해 전 부터 꽤 인기가 있었던 기도가 있죠. 야베스의
기도. 근데 이 야베스의 기도는 어떤 거였죠? 내게 복에
복을 더하셔서 나의 지경을 넓혀주시고 또 환란이 없어서
근심도 없게 해달라는 그런 기도잖아요. 근데 그 기도가
아주 인기가 있게 되서 마치 심지어 부적처럼 어떤
사람들은 차에도 붙이고 집에도 붙여놓고, 또 많은
크리스챤 집회의 어떤 제목으로도 많이 등장하게 되었어요.
근데 저는 이 기도에 대해서 좀 아쉬운 마음이 있는데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 그
주기도문과 한번 이렇게 비교해보고 싶어요. 야베스는
복에 복을 더해달라 기도하고 있지만, 예수님은 일용한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시잖아요. 야베스는 나의 지경을
넓혀달라고 기도하는데, 예수님은 주님의 나라가 임하고
주의 뜻이 이뤄지기를 기도하고 있구요. 야베스는 어떤
환란도 근심도 없기를 기도하지만, 예수님은 유혹과
싸우고 악을 이기는 그런 거룩한 근심을 담은 기도를
올리고 있다는 것. 남미의 우루과이에 있는 어느 한
성당에 붙어있다는 주기도문에 대한 글을 제가 접해서
들은 적이 있는데, 굉장히 도전이 됐었어요. 혹시 여러분들
중에도 들어보신 분들도 있을 거 같은데, 제가 한번
읽어드릴께요.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하늘에 계신
하지 말아라. 세상 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우리 하지
말아라. 너 혼자만 생각하며 살아가면서. 아버지 하지
말아라. 아들 딸로서 살지 않으면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 하지 말아라. 자기 이름을 빛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나라가 임하시며 하지 말아라.
물질 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지 말아라. 내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면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하지
말아라. 평생 먹을 것을 기대하면서. 우리에게 잘못한
일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하지 말아라.
다른 사람에게 아직도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하지 말아라. 죄지을 기회를 찾아다니면서.
악에서 구하소서 하지 말아라.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으면서. 아멘 하지 말아라. 주님의
기도를 진정 나의 기도로 바치지 않으면서.’ 굉장한
도전이 되는 표현이죠. 저는 주님의 기도가 그렇게
어려운 기도인지 몰랐어요. 우리가 늘 외워서 하는
기도. 그 기도는 정말 이 땅에 하나님의 샬롬이 주님의
진정한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드려져야될 기도인거죠.
야베스의 기도를 폄하하고 싶진 않지만, 야베스의 기도가
사랑받기 보다 정말 주님의 기도가 사랑받게 되기를
바라고, 주님과 함께 이런 진정한 기도를 이 땅의 샬롬을
위해 드릴 수 있게 되기를 이제 그렇게 헌신하는 마음을
좀 더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참 고아와 같은
마음들을 갖고 있어서 자연히 경쟁을 많이 하게 되는
것 같애요. 하지만, 경쟁하는 것이 아주 익숙해져있고
우리의 라이프 스타일이 되어버린 우리의 삶에 대해서
주님은 우리를 서로 사랑의 자리로 초청해주신 거잖아요.
근데, 그 경쟁을 competition이라는 단어로 우리 알고 있는데,
발음이 약간 비슷하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초청하신
그 마음은 compassion인데, 우리가compassion을 따라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좀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compassion이라는 단어는 라틴어 어원을 보면 com 은 with
함께 한다는 뜻을 갖고 있고, passion은 suffering인데요.
suffer with 함께 고통받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compassion을 갖는다는 것은 로마서 12장 15절에
있는 말씀처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그런 정말 기쁨과 아픔을 함께
나누는 그런 마음으로 이제 우리를 불러주신 것인데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셨던 마음이 바로compassion이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바로compassion이죠. 그런데 우리가compassion을
갖고 살 때도 있죠. 그러나, 우리는 이 거대한 경쟁
사회 한복판을 살아가면서 이competition에 의해서 사실
움직여지고, 그렇게 끌려가고 결국 우리도 competition의
마음으로 우리 인생을 살아가기가 참 쉽다는 것. 지금
이 자본주의 사회라고 표현할 수 있는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현재 모든 세계는 치열한 경쟁 관계고, 국가와
국가 간에도, 민족과 민족 간에도, 그리고 한 민족 안에서도
이념 사이에, 그리고, 어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
그리고 더 작게는 교회 안에서조차도, 그리고 가정
안에서도 계속 competition이 있는 거잖아요. 심지어 아이들이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형제 관계에서도 얼마나 competition이
많이 있어요? 근데, 그런 competition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충분히 받고 있는 아들
딸이라는 생각이 있기 보다는 우리가 너무나 뭔가 갈증,
채워지지 않은 마치 고아와 같은 심정을 갖고 있어서
자꾸 더 갖고 싶어하고 이기고 싶어하고 경쟁하게 되는
거죠. 근데 우리가 한편 치열한 경쟁 사회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다르게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다르게 살아가야지만,
정말 하나님의 샬롬, 조화를 위해 우리가 헌신할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런 도전, 질문을 던져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경쟁은 어둠을 많이 갖고 있죠. 때로는
어떤 사람들은 경쟁이 있어야 발전이 있다고 표현하기까지
해요.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세계, 자연의 세계를
우선 다시 한번 돌아보면 자연의 세계가 경쟁을 통해서
발전하는 것일까 하면 정말 그렇지 않아요. 자연에
있는 모든 초목들이 경쟁자가 더 많아서 더 잘 자라는
걸까요? 그렇지 않잖아요. 혼자 벌판에 홀로 떨어진
씨앗도 잘 자라요. 경쟁자가 많든 적든, 상황이 좋든
나쁘든, 사실 초목들은 정말 자기 자신이 되는데 최선을
다하고 그리고 멋있게 자라나요. 그런데, 그것을 보면
그들을 그렇게 아름답게 자라나게 하는 것은 경쟁이
아니라 그들 안에 있는 생명의 힘이라구요. 그 생명력이
그들 자신이 되게 하는 것이지, 비교하고 경쟁하는
것이 그들을 만들어 내는게 아니라는 것. 오히려 우리의
인생은, 경쟁 사회는 굉장히 비교 중심이잖아요. 모든
것을 비교해서 우리를 하나님이 만드신 작품이 아니라
상품으로 보게 하는 것인데요. 근데 비교는 얼마나
우리로 하여금 진정 우리 자신이 되지 못하게 하고
자꾸 다른 사람처럼 되려고 하고 자꾸 평가하고 판단하고
또 판단받고 그래서 상처를 주고 받고, 그래서 가정
안에서도 얼마나 부조화를 만들어내는지. 아마 어려서
성장할 때, 가정에서 비교당하면서 자라신 분이 있다면
얼마나 그게 아픈 것인지 알 거예요. 그리고, 우리가
어려서 학교 다닐 때 다른 사람들과 비교당하면서 살았다면
얼마나 그게 싫은 것인지. 우린 비교당하고 싶지 않으거죠.
하나님은 어느 생명도, 우리 어느 누구도 비교하지
않으시는데, 모두가 존귀한데, 우리가 치열한 경쟁
사회 속에서 자꾸 비교되고 비교하면서 살아가며 관계들을
파괴해왔다는 것을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경쟁은 참 결과 중심이라서 성과에 의해서 모든 것을
판단하다보니까 자꾸 성과, 결과에 목매게 되는 거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compassion은
정말 결과와는 상관이 없는 일인데요. 우리 예수님의
삶을 한번 생각해보고 싶은데, 예수님께서 마지막 십자가에서
이제 숨을 거두시기 전에 이런 가정을 해보죠. 오늘로
말하면 어느 언론의 인터뷰 기자가 예수님께 인터뷰를
요청했습니다. ‘도대체 당신이 이 땅에서 사역하면서
얻은 결과가 뭐가 있냐고’. 그때 예수님께서 아마
보고하실 수 있는 결과가 있다면 많은 사람들 나를
따랐었지만, 지금은 아무도 없다고, 나를 따르던 제자들도
다 떠나고 없다고. 그 죽음 앞에서 예수님께서 보여줄
수 있는 결과는 제로, 0 이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 죽음을 맞이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다 이루었다’
하셨어요. 도대체 뭘 이루었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이루어낸 게 도대체 뭡니까? 예수님께서 이루신 것이
있다면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그 부르심, 그
부르심의 소명을 따라 내가 이 땅에서 걸어가야 될
걸음을 끝까지 성실하게 걸었다는 점에서 다 이룬거죠.
내가 뭔가 보여줄 수 있는 결과가 있어서 이룬 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기에 그분의 뜻에 순종하기로
한 나의 걸음에 신실했다는 점에서, 나의 마음의 동기와
그 과정을 변경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다 이룬거죠.
결과가 있어서 다 이룬 게 아니라는 것. 우리는 너무
결과에 의해서 평가하고 평가받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거죠.
 

저는 이제 그 선교사들을,
선교 단체도 보내고 교회도 파송하잖아요? 그러면 현장에서
일하는 선교사들은 이제 후원을 받으면서 열심히 사역하는데,
근데 정기적으로 선교 보고를 해야되죠. 근데, 후원
교회에서는 어떤 보고를 받고 싶어할까요? 좋은 결과를
보고 싶어하는 거죠. 그러니, 이제 대개 선교 보고를
써야 되는데, 결과가 없으면 선교사들은 불안해져요.
그래서 자연히 때로는 후원이 끊길까봐 과장 보고의
유혹을 받게 되기도 하고, 그리고, 때로는 현지인 서로
끌어당기기 선교사들 사이에 경쟁도 생겨나게 되는거죠.
근데, 선교 본부나 파송 교회가 현장에서 일하는 선교사들에게
결과 보고를 기대하지 말고 그 선교사들이 선교지로
갈 때 그 순수한 초심, 그 마음의 동기가 혹 바뀌어지지
않도록, 그들이 선교지에 가서 혹시 잘못된 어떤 관계를
만들어서 empire builder가 혹 되지는 않도록 오히려 그들의
마음을 지속적으로 도와주고 그들이 결과를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런 것들을 support하는 마음을
가지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리고, 선교사들도 그런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정말 순수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그냥 내가 이 땅에서 걸어야 될 그 걸음에만 신실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실은 어떤 선교사가 한 민족
가운데 가서 십 년 이십 년 동안 살다가 거기서 목숨을
잃었다 하더라도, 그리고 그 기간 동안에 한 사람의
결신자도 얻지 못했다 하더라도 어쩌면 그 사람의 죽음
이후에 거기 복음의 싹이 트고 나중에 교회가 세워질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우리가 살아있을 때 결과를 보고자
하는 것이 얼마나 우리를 상하게 하고 우리의 관계들을
무너뜨리는 것인지.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경쟁 사회는
굉장히 성공 스토리를 보고 싶어 하잖아요? 성공 스토리가
언제나 무대의 중심에 오르죠. 그 스토리를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많은 사람들은 도전도 받고 또 격려
받고, 동기 부여도 돼서 이제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되기도
하죠. 꿈을 갖게 되기도 하죠. 하지만 그런 성공 스토리를
들을 때 어떤 사람들은 ‘나는 사실 그렇게 될 수 없다’라는
사실 때문에 더 낙심하고 절망하는 사람들도 사실 있어요.
그런데, 교회들도 보면 교회의 간증 집회나 무대 위에
대개 성공 스토리를 가진 사람들이 많이 오르죠. 좋은
결과를 가진 사람들이죠. 물론 귀한 믿음과 헌신을
따라 살다가 결국 아름다운 결과를 만들어낸 사람들이
무대 위에 올라서 많은 사람들을 주목하게 하고 도전도
하고 또 꿈도 주고 변화의 계기도 많이 만들어줍니다.
그렇지만, 역시 그 교회의 올라오는 성공 스토리들도
어떤 사람들에게는 또 낙심과 아픔을 가져다주기도
해요. 근데, 한번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해봅니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을 무대 위에 올릴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소위 성공한 사람들을 무대 위에 올리신
적이 있었나요? 예수님과 관련된 에피소드 중에는 제자들
사이에 누가 크냐 라는 자리 다툼이 있을 때 예수님은
제자들 가운데 누구를 세우셨냐면 어린 아이 하나를
세우셨어요. 너희도 이 아이와 같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 하셨죠. 예수님은 제자들의 눈이
위에 있는 사람, 성공한 사람, 뭔가 더 누리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는 그 제자들의 눈이 오히려 어린
아이에게 가고 또 그 당시에 고통받고 소외된 사람들을
향할 수 있도록 예수님은 오히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마음이 오히려 고통받고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가도록
하셨다는 것을 우리 기억하고 싶습니다. 


샬롬의 의미 2 – 이훈

다음은 2009 KOSTA/USA Chicago conference에서 이훈 목사의 ‘샬롬의 의미’란 세미나를 eKOSTA 편집부에서 녹취하여 정리한 내용입니다.
—————-
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한 민족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한 민족의 역사를 우리가 구약을 읽어가다보면 구약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up and down
있었잖아요? 그런데, up and down 가만히 돌아보면 가장 두드러진up and down 어떤 제도의 변화였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우리가 알듯이 백성들에게는 왕도 없었고 사실 군대도 없었죠. 사사시대까지는 왕도 군대도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그들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섰을 때는 하나님 안에서 샬롬을 누린 것이고, 그들이 하나님을 놓치고 우상을 숭배하거나 문제가 생기면 다른 민족들의 침략을 받아서 이제 고통을 겪었죠. 그러나, 다시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하나님이 사사를 세우셔서 다시 이제 그들을 회복시켜준 그런 계속 반복되는 스토리가 사사시대의 이야긴데요. 그러나, 그때 사사기까지만 하더라도 하나님의 주되심을 아주 극명하게 보여주는 그런 시기였음을 우리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편 우리 인간의 눈으로 때는 사사시대는 어쩌면 무정부상태였어요. 정부 조직이 없는 거예요. 지파들의 느슨한 연합체였잖아요. 어떤 문제가 생기면 지파 대표들이 그때 와서 함께 의견을 나눠야되고,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일이 같이 하나되기 어려운 시대였어요. 우두머리가 없는 시대, 그리고 군대도 없어서 자신들을 방어할 어떤 무기를 갖고 있지 않은 시대였죠. 그래서, 때로는 왕이 없었으므로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함으로 혼란하고 무질서스러운 시대였지만, 사사시대를 말하는 성경의 표현은 그들이 왕이 없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문제를 겪었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언제나 그분의 통치 아래서 안전했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마지막 사사인 사무엘을 만나면서 어떤 아이디어를 갖고 찾아오죠. ‘우리도 다른 민족들처럼 왕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우리에게도 왕을 세워주십시오.’ 그렇게 요청합니다. 그때 사무엘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말하죠. ‘이 백성이 왕을 세워달라는 것은 나를 버려서 왕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라고. 그렇지만, 사실 어느 이스라엘 사람이 하나님 버린다고 생각했겠어요? 우리는 하나님을 버리겠다는 아니라, 안전장치를 갖고 싶다는 거죠. 다른 민족들은 왕도 있고 군대도 있고 조직이 정비되어있는데, 이거 우리는 아무 그런게 없으니까 너무 불안하다는 거죠. 그러니 계속 주변 민족들한테 당했다고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왕을 세워주십시오’ 한거죠. 하도 고집을 부리니까 하나님이 이제 경고하시면서 세워주시죠. 너희가 왕을 세우게 되면 어떤 결과가 있을 아느냐고. 왕을 세우면 왕이 너희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신하로, 너희 딸들은 데려다가 시녀로 부리게 거다. 그리고 너희가 땀흘려서 밭에서 얻은 소산들을 세금으로 거둬다가 왕과 주변 사람들은 배부르게 되고 너희는 가난해질텐데 그때 가서는 나에게 울부짖어도 내가 들어주지 않겠다 하시죠. 그러면서도 고집은 꺾지 않고 결국 세워지게 것이 이스라엘의 왕이고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의 왕정제도는 하나님의 design 아니라 아이디어가 아니라, 사람들의 고집스러운 의견을 하나님이 한번 그래 겪어보라고 해서 허락해주신 거였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경고처럼 이스라엘의 사사시대까지와 이후 시대는 굉장히 많이 달라졌는데요, 가장 달라진 두드러진 것은 바로 이런 sharing 관련된 것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당시에 광야를 살아갈 때나 사사기를 살아갈 때는 그들 가운데 리더가 있었어도 리더들에게 어떤 특권도 없었어요. 모세나 혹은 여호수아나 갈렙이나 혹은 사사들이 좋은 음식을 먹거나 좋은 천막에 거하거나 특별한 특혜를 가지는 사람들이 아니라, 모두 동일한 사람들인데 그들이 어떤 특별한 시기에 부르심을 따라 사역했을 뿐이었던 거죠. 특별히 우리가 광야를 걸어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여정을 읽어보면 그런 사건을 하나 알고 있죠. 정탐꾼을 보내고 정탐 보고를 듣는데, 사람이 부정적인 보고를 합니다. 자연히 보고를 들은 백성 전체가 불안해하면서 나중에 원망하고 불평하게 되죠. 그래서 때문에 하나님께서 백성에게 사십 년의 광야길을 걷게 하는 징계를 내리셨는데, 근데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음의 보고를 했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와 갈렙도 사실 사십 년의 광야길을 같이 가게 하신 거죠. 근데, 오늘을 사는 우리 현대인들 같으면 그런 질문을 해볼 있을 같애요. 여호수아와 갈렙이라면, ‘하나님, 우리 둘은 먼저 들어가게 하시고, 나머지만 사십 돌리시지. 우리까지 사십 년을 돌아야 됩니까?’ 그렇게 질문할 있잖아요?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런 질문을 하지 않잖아요. 하지 않았을까요? 그들을 각각 개인 개인으로 것이 아니라, 어떤 body 지체로 본거죠. 운명 공동체로 아닐까요? 그래서 그들은 그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 무엇이든지 함께 share하고 그들에게 주어지는 고난이 무엇이든지 그것을 함께 share하는 사람들이었다는 . 그런데, 그렇게 함께 기쁨과 아픔을 나누던 이스라엘 백성이 왕정 시대를 살아가면서 아주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왕과 주변에 있는 귀족들은 특혜를 받게 되는 것이고, 상대적으로 고통받고 소외된 백성들이 생겨나게 거죠. 전에는 리더는 전쟁의 앞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이었다면, 나중에는 백성들이 고통을 받지만 특권층들은 안전할 있는 그런 시대로 바뀌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어떤 리더쉽의 차이도 보면 사사 시대의 리더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있는 리더들이었어요. 하지만 왕정 시대의 왕들은 하나님께 귀가 먹은 것처럼 오히려 왕과 주변에 있는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야인이라고 있는 예언자들을 통해서 계속 도전을 받게 거죠. 그래서 사사 시대와 왕정 시대의 차이는 하나님의 주도 아래서 한편 이스라엘 백성은 겉보기에는 제도가 정비되고 안전장치를 가진 국가 체제를 가졌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통치의 뜻과는 멀어진 시대가 되고 말았다는 . 그런데, 그것을 우리 신약 시대 교회사의 역사에서 보고 싶은데요. 예수님의 공동체,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한 공동체에 누가 특권을 가졌겠어요? 모두가 함께 어떤 것이든 함께 share하는 모임이었죠. 예수님께서 나은 잠자리를 가지신 것도 아니었고요. 그래서, 사도행전에서 시작된 초대 교회의 이야기들을 우리 읽어보면 그때 초대 교회 성도들은 때로 심지어는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고 하는 사람도 없이 모든 것을 함께 공유했던 그런 공동체까지 이루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에게 있는 삶의 축복과 아픔들을 나눌 있었던 거죠. 그러던 이스라엘이, 그런 교회가, 하지만 교회 역사속에서 크게 바뀌게 되는데, 바로 로마가 기독교 국가가 되는 변화였어요. 로마가 기독교 국가가 , 그것은 한편 고난과 박해 속에서 기도하던 성도들의 기도가 응답된 거죠. 황제로부터 로마의 모든 시민들이 하나님을 알게 것이니까 기독교의 승리처럼 보였습니다. 이제는 모든 곳에서 예배가 되어지게 됐으니까, 모든 사람들의 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높임을 받게 됐으니까, 황제부터 모든 로마의 시민들이 세례를 받았으니까, 이제는 정말 기독교의 승리로 보여졌습니다. 그런데 한편 정말 교회가 많이 바꼈어요. 전에 로마가 기독교 국가가 되기 전의 교회는 상대적으로 소수이고 고난받고 박해받던 교회였는데, 로마가 기독교 국가가 되니까 황제의 특혜와 사랑을 받는, 총애를 받는 기독교가 것이고, 자연히 고난을 앞서 받던 기독교 지도자들은 로마의 특권층과 귀족들이 되게 된거죠. 그래서, 로마의 시스템이 교회 안으로 그대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치 로마에도 황제로부터 귀족 계급이, 수직적인 계급이 있었던 것이 교회 안에도 그대로 도입되어서 교회 안에도 교황 제도와 그런 제도들이 생겨나게 거죠. 전에는 건물도 없이 가정에서 주로 모였던 교회가 이제는 거대한 성전 건물들을 갖게 되었습니다. 가난했던 교회는 부유한 교회가 거죠. 한편 교회는 성공한 같았고 로마를 정복한 같았지만, 사실은 하나 완전히 무너진 것이 있었다면 그리스도 인들 사이에 sharing 이제 더이상 가능해지지 않게 거죠. 마치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사 시대에서 왕정 시대로 가게 되면서 평평했던 곳이 이제 높은 산과 골짜기가 세워지게 것처럼 다시 초대 교회의 아름다운 나눔의 관계는 이제는 교회 안에서도 귀족 계급과 천민 계급들이 생겨나는 것처럼 수직적인 교회들을 만들게 것이고 이제는 더이상 함께 삶의 기쁨과 아픔을 나눌 없게 교회가 것이죠. 그런 점에서 로마가 기독교 국가가 것은 기독교가 로마를 정복한 것인가요? 아니면 기독교가 로마에게 삼켜진 것인가요? 한편으로 로마는 기독교라는 옷을 입었어요. 그래서 기독교라는 무늬를 완전히 갖게 됐지만, 그러나 로마는 사실 별로 달라진 것은 없었습니다. 로마의 모든 시스템은 그대로 있었고, 로마의 꿈은 그대로 있었고, 로마의 영광도 그대로 있었던 거죠. 하지만, 교회가 많이 달라졌어요. 교회는 한편 기독교를 로마에 전한 어떤 승리의 기쁨을 갖고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시스템은 로마의 것이 들어왔어요. 그래서 교회가 정말 달라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기독교가 로마를 정복한 것이 아니라, 로마가 기독교를 정복하게 거죠. 그래서 이후에 우리는 교회의 역사를 보면 기독교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고 주변 민족들을 약탈한 사건들, 그래서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뜻과는 다른 정말 어리석은 죄악들을 저지르게 Christendom, 그리스도와 세상 왕국이 통합된 모델의 어둠을 극명하게 보여주게 되었습니다.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샬롬, 하나님께서 땅에 이루시고자 하시는 샬롬이 도대체 무엇일까,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 그것을 우리가 그런 역사적인 흐름을 통해서도 한번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을 같애요.  
 
Upside down kingdom
거죠. 하나님의 나라는 완전히 뒤집어져 버렸습니다. 그것이 다시 upside down 필요가 있다는 . 그리고 그것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나라는 관계에 있고, 조화에 있고, 그것은 sharing 있다는 것을 생각해봅니다. 우리는 우리 인간의 연약함이 거기에 있는 같애요.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 딸이라는 것을 놓칠 , 우리에게 어떤 불안함과 두려움이 찾아올 , 자연히 우리는 우리 주변에 있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안전장치들이 좋아보이고 그것이 나를 보호해줄 같고 나를 지켜줄 같으니까 그런 것들을 유혹으로 찾아가게 되고 선택하게 되는 거죠. 그런 것처럼 역사적으로도 교회도 언제나 교회는 역사 속에서 약하고 작았었지만, 그러나 주변 세상 속에 있을 , 마치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너희는 가나안 사람들로부터 배우지 말고 섞이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과연 세상 속에서 다르게 살아갈 가능성이 사실 너무나 없었다고 말할 밖에 없는거죠. 동일하게 교회도 우리가 거대한 세상 속에서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은 마음으로 세상 속에 들어가지만, 정말 우리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일까, 아니면 세상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일까. 오늘의 우리의 교회들은 우리의 교회가 정말 세상을 바꿔가는 것일까, 아니면 세상에 있는 것들이 교회를 변화시켜가는 것일까. 질문 앞에 우리가 고민하면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세상이 바뀌어지기보다 세상에 의해서 바뀌어지는것이 많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려운거 같애요. 바벨탑을 세우게 인간의 역사는 여전히 지금도 반복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흔들려왔고 교회의 역사 속에서 크리스챤들이 세상 속에서 흔들려 왔던 것처럼 우리도 계속적으로 흔들리면서 때로는 하나님의 진정한 통치의 뜻을 어긋나게 된다는 , 그것을 계속 경험하게 된다는 것을 생각해보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원하지 않고,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교회 안에서도 수직적인 시스템이 생겨나게 되기 쉽고, 교회 안에서도 상처를 주고 받게 되고, 교회 안에서도 우리가 방어와 공격의 무기를 만드는 경향들이 생겨나는 이유가 도대체 어딨을까, 정말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샬롬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준비되어야 하는 것인가를 다시 한번 이제 돌아보게 되는 거죠.  
 
제가 가지 질문을 하고 싶은데요.
Need

greed
차이가 뭘까요?
Need
대해서 여기까지가
need
라고 누가 규정할 있을까요? 사실 구별하기 어렵다고요. 왜냐하면 어떤 사람에게는
need

‘나
이것까지 있어야 된다’생각하는데, 어떤 사람은
‘나
더이상 있어야 된다’생각하니까. 하지만,
need

greed
구별할 있는 있어요. 어떻게 구별할 있냐하면, 예를 들어서 재난과 기근이 있어서 어느 지역에 이상 사람들이 먹을 없어서 굶주리고 있었는데, 이제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거기에 구호물자가 도착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대여섯 사람에게 조각이 던져졌어요. 그런데, 조각은 사람의 굶주린 배를 채울
need
에도 턱없이 부족한 거죠. 근데, 사람이, 첫번째 빵을 손에 사람이 빵을 자기 속에 넣어버렸다면 사람은 자기의
need
채운 건가요?
Greedy
해진 건가요? ,
greedy
한거죠. need에도 턱없이 부족하지만. 왜냐하면 함께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는 완전히 실종된 것이니까요. Need greed 차이는 관계 문제라는 . 예를 들어서, 풍년이 일어나서 마을 사람 모두가 배터지게 먹었다고 사람들더러 greedy하다 하지 않거든요. 그거는 하늘이 축복을 모두가 함께 나눈 것이니까. 그런데, 아무리 가진 없다 하더라도 그것이 나만의 것이 되고, 다른 사람들과는 상관없는 것이 된다면, 아무리 나의 need에도 턱없이 부족하다 해도 그것은 나로 하여금 greedy하게 만든 것이라는 . 그래서 우리가 훨씬 어떤 필요가 무엇이냐를 보기보다 우리의 언제나 함께 있는 관계들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우리가 우리 속해있는 믿음의 공동체들, 교회를 생각해볼 때도, 아니면 작은 우리 가정을 생각해볼 때도 가정 안에서 sharing 충분히 일어날 가정은 조화롭고 행복할 있지만, sharing 문제가 생기면 사실 가정도 아프고 정말 상처가 많은 곳이 되잖아요. 우리가 성경에서도 보지만, 이삭과 리브가는 쌍둥이를 낳았었지만, 편애 때문에 결국 원수 만들고 말잖아요. 야곱도 아들이나 있었지만, 결국 요셉에 대한 특별한 사랑을 보여주다 보니까, 그것이 결국은 형들의 미움을 사서 그런 아픔을 겪게 것이고요. 아무리 가정이라 하더라도 가정 안에 있는 축복과 아픔을 share하지 않게 되면 서로 결국 상처를 주고 받게 되기 쉽고 샬롬은 더이상 있지 않게 된다는 . 샬롬은 정말 sharing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제가 저희 가정 이야기를 잠깐 하고 싶은데요. 저희는 아이가 다섯인데, 그중에 저희는 넷을 입양해서 양육했는데, 처음에 저희는 아이만 낳고 하나만 입양해서 키우려고 했었습니다. 그래서 갓난아이를 입양해서 남매를 키우다가 군포 공단 지역에서 소외층 사역을 하다가 공부방에서 만난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를 알게 됬어요. 부모가 없고 할머니가 양육하는 아이들이었는데, 할머니까지 건강이 좋지 않게 되고, 위암 수술을 받으셨지만 의사는 일년 밖에는 사실 없다고 해서 아이들 양육에 대해서 저희도 걱정하게 됬고 그것이 계기가 되서
93
년도에 아이를 입양하게 됬었어요. 아이는
5
학년,
4
학년,
3
학년이었고, 저희가 낳은 아이가 2학년, 그리고 밑에 밑에 막내, 그렇게 다섯을 키워오게 됐는데요. 그런데, 저희 다섯 아이들이 가족이 있는 뭘까. 사실 만약에 어떤 핏줄이나 특별한 인연 관계를 생각한다면 우리 위의 아이는 집안 아이들이라 남다른 친밀감과 결속력을 갖고 있었어요. 근데, 아이가 가진 친밀감과 결속력이 밑에 있는 아이에게는 때로는 위협이 되기도 했어요. 왜냐하면 아이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면 셋이서 편드는 거는 자연스러운 것이니까. 그럼 밑에 아이는 솥밥 먹고 컸으니 둘이서 편들죠. 그런 갈등 관계를 해결하는게 초기에는 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 사실 저희가 낳은 아이에게는 기라성같은 응원부대가 있잖아요. 할아버지, 할머니, 이모, 삼촌 등등. 그리고 위의 아이에게는 할머니가 계시다면, 막내는 저희가 입양 기관을 통하여 갓난아이 데려왔으니 아무런 응원부대가 없는거죠. 그런데, 예를 들어서 만약에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선물을 주고 싶을 분명히 저희가 낳은 아이에게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며 사람들이 선물을 얘한테만 주고 싶은 마음이 있을 있잖아요. 그리고, 아이의 할머니는 아이에게만 특별한 마음을 갖고 있는 거죠. 그런데, 그런 것을 당연하게 여겨서 가만 나눈다면 우리 다섯 아이는 가족 되기가 정말 어려울 거예요. 근데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선택은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아이들을 입양해서 우리의 자녀를 삼기로 언약을 맺고 약속을 했기에 모두에게 우선 감정적으로는 같지 않더라도 정말 공평해야될 이유가 있었다면, 공평을 주변 사람들의 협조를 필요로 했어요. 그래서, 주변에 있는 친척들이 선물을 준비한다고 하면 다섯 개씩, 그래서 모두에게 같이 나누어주는 것이 정말 중요했다는 . 그리고, 하나 아이들의 할머니가 굉장히 아프실 아이들 셋은 할머니에 대한 걱정을 갖고 있죠. 그러나, 밑에 있는 아이는 할머니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 있겠어요? 그러나, 우리가 가정예배를 드릴 , 밑에 있는 꼬마 아이들이 위에 있는 아이들의 할머니를 건강을 위해 기도하도록 하고, 아이들이 입술로 그런 기도를 하게 , 자연히 아이들은 이제 우리가 각각 남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고 우리에게 있는 축복들이 우리 모두의 것이고 우리에게 있는 아픔도 우리가 함께 나누는 것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느끼기 시작하고 배우게 되는 거죠. 그래서 감사하게도 어려운 시간들, 사건들, 에피소드들은 많았었지만, 커서 지금은 장성해서 첫째랑 셋째는 결혼도 하고 딸들도 하나씩 낳아서 저희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됬고, 막내는 대학 3학년 들어가요. 이제는 세월이 많이 지났으니까요.   
 
우리는 함께 가정을 이루면서도 정말 샬롬이라는 것이 어떻게 오는 것일까. 무엇보다 하나님의 진정한 조화, 샬롬은 우리의 삶의 나눔에 있는 것이고, 우리의 삶의 기쁨과 아픔을 충분히
sharing
있는 것이지, 조금이라도 설사 피를 같이 나눈 관계라 하더라도 우리에게 나의 것을 지키고 나만이 누리려고 그것은 설사 그게 나의
need
하더라도 그건
greedy
하게 되는 것이고 관계들이 부서져 가게 된다는 .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의 샬롬이 땅에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우리라는 울타리가 점점더 넓어져갈 필요가 있는 것이겠죠. 예수님께서 평화를 말씀하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겠다고도 말씀하시고 주심을 선포하기도 하셨지만, 아주 무서운 말씀을 하신 적이 있죠.
‘내
세상에 화평을 주러온 줄로 생각지 말라’. 주러 오셨다 했어요?
‘검
주러 왔다’. 샬롬을 주러 오시지 않고 검을 주러 오셨다 했어요. 그런데, 검을 어디다 사용하시겠다 했어요? 검으로 모든 가족 관계를 부수겠다고 하셨어요. 그렇잖아요. 아비와 자식이, 형제와 형제가 원수되게 하시겠다고. 도대체 말씀이 무슨 말씀일까요? 말씀도
sharing
관점에서 한번 보고 싶은데요. 사실 우리의 모든 가족, 가정, 우리는 사랑하지만, 배타적으로 사랑하는 거고, 어쩌면 이기적으로 사랑하고 있는 거죠. 우리는 가족 이기주의라는 알고 있습니다. , 민족 이기주의도 있는 거죠. 모든 민족과 국가도 사실 이기적이죠. 세상에 이타적인 민족이 어딨겠어요? 이타적인 국가가 어디있겠습니까? 그리고 이타적인 가정이 정말 있을까요? 우리는 태생적으로 팔이 안으로 굽는 사랑을 갖고 있고, 그런 점에서 이기적일 밖에 없기에 우리의
sharing
때로는 배타적인
sharing
이고, 우리는 그래서
defensive
하게 되고, 자연히 가진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competitive하게 되고 그런 과정에서 자꾸 주도권 다툼을 하게 되니까 정말 하나님의 샬롬은 땅에 오는 자꾸 미뤄지고 부서져 가게 되는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의 그런 도전은 우리가 소중히 여기고 있는 관계를 넘어선 관계로 우리를 초청하는 거겠죠. 우리가 절대적으로 없다고 생각하는 관계보다 우선된 하나님과의 관계가 있고, 하나님의 뜻이 있고, 뜻은 우리의 울타리가 넓혀져서 우리의 사랑이 흘러가게 되는 . 근데 제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어떤 타율적인 분배예요. 절대로 하나님은 땅에 샬롬을 가져오시고자 하시지만, 타율적인 분배를 명령하신 적도 없고 그것을 기대하신 적도 없다는 . 저는 저희 아이들 얘기했지만, 때로 초기에 위의 아이가 덩치도 컸지만 아이가 가진 친밀감과 결속력을 깨고 싶은 마음이 때가 있더라고요. 그런데 언뜻 생각해보면 아이가 가진 친밀감과 결속력은 하늘이 주신 선물이잖아요. 아이가 입양될 각각 다른 가정으로 입양됐다면 아이들은 얼마나 사실은 불행한 아이들일까요? 집안에서 태어난 아이들인데, 그래서 형제가 됐는데, 아이들이 가정에 같이 들어오게 아이들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축복이잖아요. 근데 문제는 축복은 하늘이 주신 것인데 축복이 다른 사람들에게 위협이 문제가 되는 거겠죠. 우리가 축복의 통로라는 많이 하잖아요? 근데, 통로는 뭐가 쌓여있는 곳이 아니잖아요. 통로에 뭐가 쌓여있으면 문제쟎아요. 통로는 지나가게 하는 거죠. 우리가 축복의 통로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하늘로부터 받은 것이 있다면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가게 축복의 통로겠죠. 우리 아이들에게 있는 소중한 친밀감과 결속력이 동생들에게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해질 있도록 돕는 것이 우리의 과제지, 그것을 뺏어서 갈라놓는 하나님의 뜻은 아니라는 . 그래서, 샬롬은 늦기도 같습니다. 우리가 기대하기는 ‘하나님, 세상에 있는 모두 모아서 딱딱 갈라서 쫙쫙 나눠주면 좋겠다’ 싶은 마음이 때도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주님은 번도 그런 아이디어를 말씀하신 적도 없고 지시하신 적도 없죠. 하나님의 통치는 우리 안에서 시작이 되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움직여서 저절로 이제 우리가 선택해서 있게 되기를 바라신다는 .   
 
계속 잠깐 남아있는 부분들을 다루고 싶은데요. 하나님은 샬롬을 위해서 계속 일해오신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많이 보죠. 제가 요셉과 요셉의 형제들이 갈라져서 이산 가족이 얘기를 잠깐 언급하게 됐었는데, 근데 어떻게 형제 관계가 다시 회복되게 되었나 한번 보면요, 사실 이산 가족이 만날 가능성이 거의 없었어요. 왜냐하면 요셉의 부모, 야곱과 요셉의 어머니는 아들들이 요셉의 옷에다 짐승 묻혀 와가지고 요셉이 이렇게 됐다 했으니 때는 마음이 무너져 내렸겠지만, 어떻합니까 죽은 자식, 세월이 지나가면서 잊어갔겠죠. 이집트에 있다고는 상상을 수가 없으니깐요. 형들, 요셉 미워서 팔았는데, 찾겠습니까? 그러니 요셉을 찾는 마음을 가진 가족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렇담, 요셉. 요셉은 특이한 인물이었어요. 보통 사람 같으면 상처받은 마음으로 고향 그리워하면서 억울한 마음을 쏟으면서 울면서 지낼 같은데,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도 정말 신실한 사람으로 살아갔죠.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는데도, 품고 살아간 사람이 아니라 거기서도 충성스러워요. 그런데, 보디발의 집에서나 감옥에서야 자유의 몸이 아니니까 어쩔 없다 하더라도 이후를 생각해보면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 대신이 되었는데, 총리 대신이 되면 우리 같으면 왕에게 재가 얻어서 고국의 소식도 들어보고 방문도 해볼만한데 실제로 보면 요셉은 거기서
9
년이 지나도록 그냥 거기만 있어요. 그러고보면 요셉이라는 인물은 어쩌면 과거 지향적인 사람이 전혀 아니고 그냥 어디에 있든지 현실에서 살아가는 사람인 같애요. 만약 그런 요셉이라면 어떻게 요셉과 요셉의 가족들이 다시 만날 있을까요? 정말 가능성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듯이
7
동안의 풍년과
7
년의 흉년의 사건이 있었잖아요. 그거는 천지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이제 내리신건데, 하나님께서 하필 이집트와 가나안에
7
풍년과 흉년을 계획하셨을까요? 사실 흉년과 풍년 사건이 없었다면 가족들이 만날 가능성이 사실은 없었다고 보여져요. 우리가 알듯이 이집트에는 곡식이 준비됐는데 가나안에 곡식이 떨어지고 나니까, 흉년
2
년째에 가서 곡식이 이집트에는 많이 있다는 소식을 들은 야곱이 아들들을 보내게 거잖아요. 그것이 계기가 되서 이제 요셉이 어느 총리 자리에 앉아있을 , 멀리서 곡식을 찾아온 사람들을 보니 몰골이 형들인 것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깨닫게 거죠. 어렸을 때의 꿈이 이렇게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산 가족의 화해 상봉의 스토리는 누구 작품이예요? 정말 하나님 작품이라고요. 사람은 깨고 부수지만, 하나님은 주선하는 상봉의 자리를 주선하셔서 다시 화해와 회복을 이루게 하셨다는 . 그런 관점에서 성경의 스토리들을 읽어보면 많이 있습니다. 나눌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는 땅에서 관계를 실패하고 깨고 결국 샬롬을 잃어버리지만, 하나님은 다시 우리를 만나게 하시고, 화해케 하시고, 회복되게 하셔서 정말 하늘의 샬롬을 누리게 하신다는 .   
 
샬롬은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한번 주먹을 한번 불끈 쥐어 보죠. 불끈 주먹, 우리가 어떤 불끈 주먹을 쥐죠? 불끈 주먹을 우리의 마음이 안에 담겨져 있는 거죠. 여러가지 생각과 마음이. 근데 한번 손을 펴보세요. 우리가 어떤 손을 펴나요? 근데, 불끈 주먹과 손에는 전혀 다른 대조된 것들이 담겨져 있는데요. 우선 우리가 상대방을 거절할 불끈 주먹을 쥐죠. 하지만 손은 상대방을
welcome
하는 마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불끈 주먹을 때는 내가 더이상 기다릴 없다는 조급함, 서두름이 있다면, 손은 잠잠히 기다리는 마음을 담고 있는 거죠. 그리고, 불끈 주먹은 이제는 주먹 밖에 없다라는 절망적인 상황을 담고 있다면 손은 그래도 희망을 담고 있는 거죠. 그리고, 불끈 주먹은 나의 뜻을 성취하겠다는 마음을 담고 있다면 손은 섬기고 당신의 뜻을 따르겠다는 것을 담고 있는 거죠. 그리고, 불끈 주먹은 상대방을 때릴 , 상처를 사용한다면 우리 언제 펴죠? 맞을 펴쟎아요. 근데, 불끈 주먹과 손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먼저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실 불끈 주먹으로 다가오시는 아니라 손으로 다가오시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잖아요? 하나님은 우리를 허물과 투성이지만 우리를
welcome
하시는 분이시고,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서 서두르거나 조급해하지 않으시고 기다려주시는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우리에 대하여 결코 절망하지 않으시고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시는 분이시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고자 하시는 분이시지만, 사실은 아까 제가 이스라엘의 왕을 세우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고집을 꺾지 않으시고 때로는 우리가 우리의 뜻대로 하도록 허락해주시는 분이시고, 그분의 뜻을 고집스럽게 끌고 가는 분이 아니시라고요.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때리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 때문에 맞으시는 분이시죠. 손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정말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샬롬이 어떤 것인지 우리가 배울 있게 하시는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도 동일한데요, 우리가 하나님께 불끈 주먹을 쥐고 있겠죠. 때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너무 선대하시기보다는 나를 너무 힘들게 하신다는 이유로 하나님에 대하여 저항하는 마음이 생기고 하나님에 대하여 더이상 기다릴 수도 없고 그래서 뜻을 이루려고 하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을 계속 원망하는 마음으로 달려갈 수도 있겠죠. 그러나, 그것이 때로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을 향한 몸부림일 수는 있어도 우리도 알듯이 정말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나됨을 이룬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손을 때겠죠. 하나님을 우리가 welcome 하고 그분에 대하여 서두르지 않고 잠잠히 기다릴 , 하나님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을 , 그리고 나의 뜻을 이루려고 하기보다 하나님의 뜻을 섬기려고 , 그리고 때로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yes 하지 않고 no라고 응답하시는 매맞음을 경험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손으로 그분을 만나고 다가갈 , 우리가 진정 하늘의 샬롬을 얻게 된다는 . 그것은 동일한 우리 인간 관계도 동일하다는 것을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우리의 인간 관계는 서로 주먹을 쥐기가 쉬운 같애요. 우리가 서로를 환영하기 어려울 때가 많아지고, 우리가 서로에 대해서 조급해지기 쉽고, 사람에 대한 희망을 이제는 내려놓게 되고, 그리고 나의 뜻을 성취하려고 하게 되고 상대방을 아프고 상처를 주게 때가 많은거죠.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예수의 평화 샬롬을 땅에 전하고자 한다면 길은 우리의 쥐어져 있던 주먹을 펴는 밖에 없다는 .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처럼 우리가 함께 있는 이들을 심지어 나를 아프게 하고 공격하는 이들에 대해서도 welcome하는 마음으로 손을 펴고 그리고 결코 조급하거나 서두르지 않고 잠잠히 서로에게 기다려줄 있고, 사람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그리고 나의 뜻이 있지만, 오히려 상대방의 뜻을 꺾으려고 하기보다 섬겨주려는 마음을 갖고, 때로는 상대방 때문에 내가 아픔과 고통을 겪지만 그것을 묵묵히 인내로 받아들일 , 우리는 정말 샬롬을 알고 이해하고 전하고 누리게 하는 그런 사람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것이 정말 진정한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고요. 우리의 관계는 contract 되기 쉬운 같애요. 심지어 결혼 관계도 우리가 사랑의 언약을 맺지만, 상대방에게 달려있다는 거죠. 상대방이 잘해준다면 나도 잘해줄 있지. 하지만, 상대방이 전혀 잘해주지 않는다면 나도 잘해줄 이유가 없다. 사실 그런 관계라면 인간 관계는 거래가 되고 것입니다. Contract 맺은 거겠죠. 그러나 contract 관계 속에 진정한 샬롬은 있을 없다는 . 어렵지만, 진정한 샬롬은 covenant에서 이루어진다는 . 우리의 상태와 관계없이 변함없는 사랑을 갖고 우리에게 찾아오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샬롬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되는 것처럼 여전히 우리도 땅에 진정 샬롬을 기대한다면 우리가 covenant 마음을 갖고 서로의 관계들에 신실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봅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말씀을 이제 마무리하는데요. 자연을 다시 한번 잠깐 엿보면서 생각해보고 싶어요. 우리에게 정말 주되신 그분의 통치가 있습니다. 우리가
‘Be under God’s control’로
살아가는 너무 중요한 같애요. 그리고 정말 ‘Be yourself’ 우리 스스로가 되는 너무 중요하다는 .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고 나의 역할에 충실한 . 그러면서도 ‘Be patient’ 우리 서로에게 정말 인내할 있을 , 그때 우리는 샬롬, 자연의 세계에 있는 샬롬을 우리의 관계 속에서도 이룰 있고 샬롬이 우리를 통해서 세상 전체까지 확장되기를 기대하시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샬롬의 의미 1 – 이훈

다음은 2009 KOSTA/USA Chicago conference에서 이훈 목사의 ‘샬롬의 의미’란 세미나를 eKOSTA 편집부에서 녹취하여 정리한 내용입니다.
—————-

우리 마음이 가장 평화로왔던 때가 인생에서 언제일까 이렇게 질문을 해본다면 아마도 엄마 뱃속에 있었을 같애요. 안처럼 안전한 때가 없고, 그리고 안에서 있을 때처럼 만족스러운 때가 없을 테니깐요. 우리 인간이 가장 마음에 편안함을 얻을 때는 안전할 때고, 그리고 만족스러울 땐데, 안전과 만족을 우리 인간은 끊임없이 추구하는데, 샬롬이라는 것이 안전이나 만족과 얼마만큼 관련이 되는 것일까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가하면 한편 우리는 조화라는 단어를 알고 있는데요. 안전과 만족이라는 것과 샬롬이 가까운 것일까요? 조화와 가까운 것일까요? 샬롬은 정말 조화를 말하는 것인데, 우리가 개인적으로는 안전과 만족을 추구하는 존재지, 조화를 추구하는 존재는 아닌 같애요. 그런데, 우리는 예외없이 안전과 만족을 추구하는데, 그런 안전과 만족을 추구하는 인간들 사이에 갈등이 빚어지고, 거기서 분쟁이 생기게 되죠. 그러다보면 결국 우리의 관계 속에 문제가 생기고, 더이상 진정한 샬롬이라는 것은 사라져버리게 됩니다. 우리가 그러고 보면 샬롬이라는 것을 알고 누리기 위해서는 조화라는 것에 대해서 필요가 있을 같은데요. 우리 인간은
relational
존재죠. 관계를 통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가만히 우리 인생을 돌아보아도 우리 인생이 가장 행복할 때와 불행할 때를 생각해본다면 행복과 불행도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을 수가 있어요. 만약 우리에게 있는 소중한 가족 관계가 정말 서로 사랑하고 서로를 정말 존중히 여기고 사랑이 충분히 나누어지고 있다면 그처럼 행복한 때가 없는 거고, 반면에 우리의 소중한 가족 관계에 긴장이 있고 나눔도 없고 뭔가 벽을 느끼고 있다면 그것처럼 불행하게 느껴질 때가 없는 거죠. 인생의 행복은, 진정한 마음의 평화는 어떤 완벽한 안전장치를 갖고 있을 때도 아니고 어마어마한 모든 필요를 내가 갖고 있을 평화로운 아니라, 오히려 관계에 있다는 . 설사 안전장치는 되어있지 않고, 필요한 것도 넉넉지 않아도 우리의 관계가 정말 사랑스러울 때는 우리는 거기서 행복을 느끼게 되는거죠. 그런 점에서 샬롬은 정말 관계에 있다는 것을 먼저 전제해보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속에 하나님의 진정한 통치를 통한 샬롬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시는데, 샬롬은 다름아닌 관계 회복이고 깨어진 사이들이 다시 화해케 되는 것이라고 말할 있을 것입니다. 근데, 샬롬은 분명 누구나 원하는 것일 것입니다. 모두가 원하는 것인데, 사실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유는 진정한 샬롬이 뭔지 모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샬롬은 결코 우리 개인의 어떤 안전이나 만족과 관련되지 않는다는 , 전적으로 우리의 관계에 달려있다는 것을 놓치지 않고 지킬 필요가 있는 같애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기도하지만, 샬롬은 기도로도 이루어지는 같지 않습니다. 만약 기도로 이루어지는 거라면 이미 이루어졌을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도 기도하셨고, 우리도 정말 샬롬을 위해 기도하니까요. 그러나, 우리가 기도하지만,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샬롬은 기도를 통해 저절로 응답받는 것만은 아니라는 . 그리고 또한 선포하기도 하죠. 평화가 너희에게 임할지니라 주님 말씀하셨잖아요? 그리고 제자들을 전도 여행을 보내시면서도 너희가 어느 집에 거하든지 집에 평안을 빌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선포하고 제공하지만 그렇지만 거기에 평화나 샬롬이 이루어지지 않죠. 전제가 있습니다. 평화를 진정으로 환영하고 받아들일 때만 주어진다는 . 그것을 단지 선포한다고 주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 샬롬은 기도나 선포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말 샬롬이 무엇인지 알고 샬롬을 위해서 살아가려는 사람들의 마음들이 모아질 가운데서 조화가 경험되고 거기에 샬롬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실 , 바리새인들이 물었었죠.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임하는 거냐고, 언제 임하느냐고 물었을 ,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수도 없고 어디 있다 하셨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너희 안에 있다라는 것을 우리 마음 안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너희 안에 있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을 단어의 의미는
‘안
은’
“among you”
너희들 사이에 있다, 너희들 가운데 있다. 너희들이 땅에서 무언가 합심하여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 너희들의 관계를 통해서 정말 하나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나라는 바로 너희들의 관계 속에 있다. 뜻을 갖고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5 23절에서 2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그런 말씀 하신 적이 있어요. 너희가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다가 형제와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어떻게 하라 그랬죠? 예물 거기 두고 먼저 가서 사람과 화해한 다음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하셨습니다. 말씀을 오늘로 적용해본다면 너희가 예배드리러 나가다가 주일 교회에 출석하려다가 누군가와 관계가 깨어지고 원망들을 만한 사이가 되었으면 멈추고 돌아가서 사람과 화해한 다음에 와서 예배를 드리라는 거죠. 그런데, 말씀 그대로 적용한다면 어쩌면 교회들마다 주일 출석율이 떨어질지 모르겠어요. 사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우리의 관계가 여전히 뭔가 문제가 있고 깨져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계속 나아가는 예배는 계속되는 거잖아요. 근데,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그렇게 도전하신 것일까? 거기에 주님의 진정한 뜻이 담겨있겠죠. 주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헌신이나 예배보다 어쩌면 우리의 관계를 원하신다는 .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보다 우리 서로간의 진정한 회복 관계를 원하신다는 .   
 
저는 공동체에 관심이 한국에 있을 때부터 있어서, 한번 한국에 있을 때도 예수원이라는 공동체도 많이 가봤었지만, 유럽에 있는 공동체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요. 독일에 다름슈타트에 마리아 자매회라는 공동체가 있습니다. 바실레아 슈링크 라는 분에 의해 시작된 곳인데, 거기를 한번 방문해서 거기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었어요. 그런데, 자매들이 공동생활을 오래하면서 기도해온 있었대요. 언제나 놓치지 않고 기도해온 것은
‘하
나님, 우리의 관계에 문제가 있으면 우리가 하는 일이 안되게 해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 함께 생활하기 위해서는 같이 농사도 짓고 거기는 출판도 하기 때문에 인쇄를 위한 윤전기도 돌아가는데, 어느 인쇄를 위한 윤전기가 돌아가다가 멈추면 우리 상식적으로 보통 사람같으면 기계를 손보거나 아니면 고칠 있는 기술자를 불러야죠. 그런데, 자매들은 그런 일이 생길 때마다 하던 일손을 멈추고 각자 방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는 관계를 점검하는 거죠. 그러다 어떤 자매가 다른 자매에게 뭔가 불편한 마음이 있는 것을 이제 알고 용서를 구하고 화해를 청하는 편지를 써서 상대방 자매의 방에 밀어넣고 자매도 자신이 용서를 청하는 편지를 이제 주고 받고 그렇게 화해가 이루어지면 멈춰있던 윤전기가 저절로 돌아가게 그런 기적을 많이 갖고 있더라고요. 저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
자매들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놓치지 않고 있다’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과연 우리가 그렇게 기도할 있을까 하는 반문도 해봤어요.
‘하
나님, 우리 가족 관계에 문제가 있으면 우리 가족이 하는 사업이고 뭐고 안되게 해주십시오.’
‘하
나님, 우리 교회의 형제 자매들 사이에 관계 문제가 있으면 교회가 하는 사역이고 뭐고 제대로 안되게 해주십시오.’ 사실 우리는 그렇게 기도하기 어려워합니다. 그렇게 기도하기 어려워하는 이유는 우리의 우선순위가 많이 바뀌어버린 거죠. 우리는 우리의 관계보다 중요해져 버린게 생긴 아니겠습니까? 일이 중요하든지, 돈이 중요하든지, 우리가 성취하고자 하는 어떤 다른 것들이 우선 순위가 되어버렸기에 우리는 관계들은 어렵고 망가져있어도 자꾸 뒤로 미루게 되는 거죠. 그런 우리가 그대로 살아간다면 땅에 정말 주님께서 원하시는 샬롬이란 이루어지기가 요원할 것입니다
 
샬롬은 관계에 있다, 조화에 있다’전제할 , 샬롬을 우리가 가장 느낄 있는,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가 자연의 세계인데요. 종종 우리는 스트레스 받고 많이 지치고 피곤할 , 대개 훌쩍 자연에 가서 많이 쉬잖아요? 그리고, 자연에서 우리는 정말 특별한 위로와 쉼을 많이 얻게 됩니다
 
근데, 우리가 가는 자연도 어떤 자연이냐 하면 어떤 존재가 모든 전체를 장악하고 있는 자연이 아니예요. 우리가 가서 쉼을 누리는 자연은 여러 가지 생명들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자연이고, 거기에 물이 넉넉하고 모두가 어떤 풍성한 초록빛을 나타내는 자연 거기서 쉼을 얻는 거지, 황량한 사막에서 얻는 것도 아니고 어떤 가지 짐승이나 식물이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는 곳에서 평화를 누리는 아니라고요. 그러면 우리가 자연, 조화, 그리고 샬롬을 느낄 있는 자연의 모습을 한번 생각해볼 , 자연이 어떤 상태이기에 우리가 거기서 샬롬, 평화를 얻게 되는 것인가 한번 질문을 던져보고 싶어요. 먼저 우리 보통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내는 오케스트라를 한번 생각해보면, 탁월한 오케스트라 악단들이 이제 음악을 연주해낼 , 우리는 연주가 이루어지기 위한 가지 조건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볼 있습니다. 우선 아무리 탁월한 연주자들이라 하더라도 만약 그들 가운데 지휘자도 없고 공동으로 주어진 악보가 없다면 과연 그들이 함께 아름다운 조화로운 음악을 만들 있을까요? 불가능하다는 우리가 알아요. 그리고, 만약에 그들 모두가 나름대로 솜씨가 있더라도 수많은 사람 가운데서 나쯤이야 하면서 군중 속에 숨으려고 하거나 나의 역할에 충실하지 않고 자꾸 다른 사람과 비교하거나 경쟁한다면 함께 조화로운 음악을 만들 있을까요? 그것도 사실 어렵다는 알거예요. 그리고, 하나 굉장히 거기서 중요한 것은 우선 어떤 주도권이 필요한 거죠. 내가 아닌 어떤 지휘자가 필요하다는 . 그리고 하나는 내가 나의 역할에 굉장히 충실해야한다는 . 다른 사람의 역할과 관계없이 나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는 . 그리고 하나 굉장히 중요한 것은 연습할 때부터 필요한 태도인데요. 나는 연습이 됐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충분히 연습이 되지 않았으면 같이 기다려주면서 연습해야 되는 거죠. 서로를 인내하면서 견뎌주어야 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죠. 그런 과정을 통해서 나중에 이제 함께 아름다운 조화로운 오케스트라 음악을 연주해내게 됩니다. 근데 그것을 자연에다가 한번 생각해봅니다. 정말 자연이 그렇거든요? 우리가 알듯이 자연은 스스로 주도권을 갖고 있기보다 정말 창조주 하나님의 주도권 아래 있어요. 자신들의 계절을 자신들이 통제하지 않잖아요. 전적으로 창조주에게 의존되어 있어요. 창조주가 주신 계절, 창조주가 주신 , , 비를 맞으면서 움직여가는 것이지, 자기가 자기들의 삶을 스스로
control
하고 있지 않다는 . 그러면서 우리가 자연에서 있는 것은 어떤 존재도 서로 비교하지 않아요. 단지 자신됨에 충실할 뿐이지. 종종 우리가 땅에 떨어져서 자라는 나무들이나 풀들을 어떤 씨앗들은 운명적으로 나쁜 떨어졌어요. 예를 들어서 계곡, 절벽 중간에 아슬아슬하게 서있는 나무들이나 정말 황량하고 건조한 땅에 홀로 자라게 나무들이나 풀들을 보면 상대적으로 만약에 본다면 너무 환경이 좋아요. 근데 만약에 자신들에게 주어진 그런 상황을 다른 좋은 곳에 떨어져 있는 생명들과 비교한다면 얼마나 사실 서럽고 원망스럽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알듯이 자연에 있는 모든 생명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을 어느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고 생명됨에 충실한 거죠. 군중 속에 숨지도 않고 비교하지도 않습니다. 정말 자기 자신이 되는 거죠. 그러면서도 하나, 자연에 있는 생명들을 보면 서로를 정말 견디는 것을 수가 있어요. 우리가 아름다운 여러가지 씨앗들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들판을 가보면 거기 어쩌면 씨앗들은 혼자만 넓은 영역을 차지하고 자라고 싶겠죠. 그러나 예외없이 이런 저런 씨앗들을 옆에 와서 같이 자랍니다. 그러면 상대적으로 사실은 불편하고 성가시고 그리고 어쩌면 없었으면 하는 마음들이 들겠죠. 우리 인간이라면. 그러나, 우리가 이제 집에 정원이 있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잔디밭에 민들레가 자라고 토끼풀 자라는 보기 싫어서 자꾸 뽑거든요? 그건 사람 눈에 그런거지. 잔디밭도, 잔디들도 다른 존재가 오는게 환영하는 마음이 별로 없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정말 조화로운 들판은 어떤 가지가 전체를 장악하고 있는 아니라, 자연스럽게 찾아오게 이런 저런 손님들을 모두가 함께 결국은 견디면서 조화를 이루는 것을 우리가 아름다운 거죠. 결코 독점이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이런 저런 모든 존재들이 어우러져서 서로를 견디고 있는 아름답다는 . 그래서 자연에게서 우리가 있는 하나님의 샬롬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를 우리 인간의 관계 속에서도 비춰볼 있는 같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인생에 대하여 주도권을 정말 갖고자 하지 않을 , 오직 우리 인생의 주도권은 그분께 있음을 언제나 놓치지 않을 , 그리고 그분의 지휘에 민감하여 움직일 있을 ,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악보라고 말할 있는 말씀에 보다 신실할 있을 , 그리고 어느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고 나에게 맡겨진 나의 역할에 최선을 다할 있을 , 그리고 함께 있는 사람들이 때로는 불편하고 나를 힘들게 수도 있지만 견디고 그걸 소중히 여겨줄 , 그때 우리가 함께 조화라는 것을 만들어 있는 것이겠죠. 우리가 개인적으로 속해 있는 가정이든, 믿음의 공동체든, 부분에서 약할 , 사실은 조화가 깨지고 결국은 샬롬은 사라지고 더이상 우리의 마음에 평화도 있게 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하고 살아갑니다. 성경에 보면 인간 사회만이 자연의 세계와 달리 부조화의 연속이라는 것을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 속에서도 동일하게 수가 있죠.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의 세계에는 어떤 질서와 조화가 있는데, 우리 인간 사회에는 그것이 사실 없습니다. 이유도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주도권을 놓쳤기 때문이겠죠. 근데 주도권과 관련해서 생각해보고 싶은데요. 우선 주도권을 서로 잡고 있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마치 고아들의 싸움터라고 말할 있을 거예요. 아버지없이, 부모없이, 어떤 누군가의 리더쉽없이 각자 그냥 고아가 되어버린 사람들 사이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결국 아귀다툼이 일어날 밖에 없고, 거기서는 조화라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 우리 충분히 상상해볼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인간 관계는 높고 낮음이 생겨났죠. 자연히 거기서 보다 경쟁력이 있고 힘있는 사람들은 위에 서게 되고, 상대적으로 약하고 결국 당하는 사람들은 이제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서 서로 상처를 주고 받고 원망과 분노들이 쌓여지게 되고 그리고 이제 자연히 그러다보니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한 무기를 만들고 어쩌면 이기기 위한 무기를 만들어가게 됩니다. 근데 그렇게 해서 샬롬이 더이상 있지 않은 인간 사회에 대해서 구약의 예언자였던 이사야가 환상으로 보게 샬롬에 대한 그림이 있어요. 주님이 다스리는 나라가 되면은 어떤 변화들이 있을까라는 그림인데, 강의안에도 있지만, 크게 가지 그림을 생각해볼 수가 있는데, 모든 높은 산들, 언덕들은 낮아지고 골짜기는 메워져서 이제 평평한 곳이 것이다. 그리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고 이리와 양이 함께 뒹굴고 그리고 사람들이 칼과 창을 부수어서 그것으로 보습과 낫을 만들고. 어떤 변화들을 보여주고 있는 거죠. 근데 변화들은 관계 변화를 보여주고 있는 것인데요. 사실 변화는 우리 안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를 알지 못하고 고아와 같은 심정으로 살아갈 , 우리의 인생 안에도 보면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스럽게 여길 만한 높은 언덕과 산이 있는가 하면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어떤 수치의 골짜기들을 우리는 갖고 있다고 말할 있을 거예요. 그리고, 그분의 사랑의 통치를 알지 못할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언제나 긴장하는 마음도 갖게 되고, 상처도 받지만, 주게 되고, 자연히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서 방어와 공격을 위한 무기들을, 칼과 창을 만드는 에너지를 쏟게 되고,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고 통치를 알고 나니까 이제 안에서도 그렇게 잘난 것이 사실 잘난 것도 아니고, 안에 수치스러운 것도 그렇게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 아래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나의 삶의 모든 영역이 그분의 사랑 안에 있다는 , 그래서 모두가, 나의 삶의 모든 영역이 그분의 은총 아래 평평해지게 되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경계심도 사라져가게 되고, 상처를 받지도 않지만 주지도 않게 되고, 나아가서는 인생의 에너지를 이제는 방어와 전쟁 무기를 만드는데 사용하는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돕고 살리는 사용하게 되는 그런 변화들을 그림으로 통해서 수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함께 아름다운 관계를, 공동체를 세워가는 것이 바로 샬롬이라고 말할 있을 것입니다.   
 
근데 샬롬을 우리가 세워나가는데 있어서 가지의 대조된, 성경에 나오는 건축을 통해서 생각해보고 싶은데요. 성경을 갖고 계신 분들이 있다면 한번 찾아보시면 좋겠는데요. 에베소서
2

20
절부터
22
.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세워져 가는 것인지. 그런가하면 대조가 있는, 성경에 나오는 하나의 대조된 건축이 있는데요. 창세기
11

1
절부터
9
절에 나오는 바벨탑. 세상을 대표하는, 상징하고 있는 하나의 건축이라고 수가 있는데, 에베소서
2
장만 한번 읽어보고 싶습니다.
‘너
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어떤 건축되어져가는 그림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관계,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11
장에 있는 말씀은 우리가 알고 있는 바벨탑 사건인데요. 사람들이 어떤 아이디어가 생겼죠. 우리가 함께 성과 대를 높이 쌓아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그래서 그들은 아이디어가 좋아 보여서 시날이라는 평지를 선택하고 거기에다 성을 쌓기 시작했죠. 그런데, 성을 쌓다보니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뻐하지 않으셨기에 그들의 언어를 통하지 않게 하셨죠. 자연히 대화가 가능하지 않게 되고, 대화가 단절되니 협력도 불가능해진거죠. 자연히 성쌓기를 그치고 지면에 흩어져버린 이야기입니다. 나름대로 연합을 시도했지만, 나름대로 자신들의 이름을 내고 하나되고자 하는 성공과 연합을 추구하는 괜찮은 아이디어 같았지만, 오히려 결과는 분열로 끝나고 그런 건축입니다. 근데, 건축을 우리가 건축할 중요한 것이 보면 건축은 어떤 위에 것인가, 터가 굉장히 중요하고요, 그리고 누가 설계하며 누가 건축할 것인가, 설계자와 건축가가 누구인가가 굉장히 중요하겠죠. 건축하려고 하는지, 건축의 목표, 목적이 무엇이냐도 중요한 요소겠고요. 다음에 건축의 과정도 굉장히 중요한 요소가 것입니다. 근데, 가지 영역에서 개의 건축이 어떻게 대조가 되는지 생각해보고 싶은데요. 바벨탑을 세우려고 했던 사람들이 선택한 터는 시날 평지였죠. 근데 시날 평지는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님의 눈에 보기에 좋은 것이 아니라 사람의 눈에 보기 좋은 곳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어떤 누가 설계하고 건축하고 있었냐면 이렇게 말했잖아요.
‘자,
우리가 성과 대를 높이 쌓아’. 그러면 누가 설계하고 건축한 거죠? 사람이 설계하고 건축합니다. 목적이 있었어요. 목표는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우리 이름을 낸다는 것은 스스로를 높이는 거죠. 근데, 건축의 과정에서 어떤 일이 있었냐면 결국 대화가 단절되고 협력이 불가능해졌습니다. 결과로 결국은 분열되고 흩어져 버리고 만거죠. 근데, 지금 에베소서에서 읽은 성경구절을 보면 어떤 터를 소개하고 있죠?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 사도와 선지자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따라서 살았던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약속의 말씀이 전해진 것이죠. 구약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신약은 사도들을 통해서. 사도와 선지자의 터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의 터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설계자와 건축가가 누구인가? 지금 함께 읽었었지만, 성경구절에 보면 너희는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다. 성전이 되어가고,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수동형으로 표현하고 있어요. 능동형의 표현이 하나도 없죠. 이야긴 뭘까요? 우리가 설계하고 건축하는 아니라, 우리는 그분의 주도권 아래서 지어져 이라는 . 설계자와 건축가가 인간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거죠. 하나님께서 친히 설계하시고 건축하는 것입니다. 목표도 다르죠. 지금 읽었지만,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의 모임 안에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하고,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기뻐 거하시는 그런 곳이 되기를 원해서 그들은 지어져 가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과정에서도 보면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그리고 함께 지어져 간다고 했죠. 건축의 가지 요소에서 아주 뚜렷하게 대조되고 있는 것을 수가 있어요. 우리가 땅에서 하나님의 샬롬을 추구한다고 , 샬롬은 어떻게 그러면 가능한 것일까? 한번 건축에 비추어서 점검해 있을 같애요. 우리의 가정이든, 우리의 교회든, 아니면 어떤 우리의 시도든간에, 우리의 인생이든 간에 우리의 터가 도대체 무엇일까? 우리가 터를 잘못 선택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터를 삼기 시작하면 우리의 기대는 사실 실패하기 쉽다는 .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주도권을 가져서는 결코 우리가 조화를 이루어낼 수가 없다는 . 그분의 control, 그분의 주도 아래 있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다는 .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의 모임 안에 관계 속에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께서 기뻐 거하시는 곳이 되도록 우리는 부름받았다는 . 우리의 관계, 연결과 함께 지어져가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다는 . 그것을 소흘히 여기지 않을 우리는 조화와 샬롬을 얻게 되는 것이고, 우리가 이런 부분들을 소흘히 여기면 마치 바벨탑의 의도는 그럴 해보였지만 실패하고 마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되고 싶지만 실패하고 분열될 밖에 없다는 것을 수가 있습니다. 바벨탑 사건은 아주 고대에 있었던 어떤 physical 건축으로 우리에게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만, 어쩌면 사건은 인류의 문명, 민족과 국가, 문명이 어떻게 형성되어 왔고 어떻게 이루어져 왔는지를 그림처럼 보여주는 하나의 메세지를 담고 있게 돼요. 그리고, 분명 바벨탑은 고대의 건축이라기보다 여전히 오늘도 계속 건축되고 있는 거라는 . 오늘의 모든 민족과 국가, 모든 인간의 시도들이 사실 에베소서에 있는 말씀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면 의도는 그럴 하지만 실패할 밖에 없다는 것을 어쩜 우리에게 메세지로 던져주고 있는 아닐까? 그렇게 돌아보고 싶은 거고요. 그리고, 바벨탑을 세우려고 했던 사람들의 심리를 생각해보고 싶어요. ‘자, 우리가 성과 대를 높이 쌓아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내고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그런 마음을 이야기하는 사람들 안에 있는 심리는, 어떤 심리들이 있냐하면 우선 배타적인 심리가 있어요. Exclusive, 그리고 하나 굉장히 defensive 심리가 있어요. 왜냐하면 우리가 성과 대를 높이 쌓아서 하나되지 않으면 흩어질지 모른다. 그런 불안한 심리를 피하기 위해서 보이는 거라도 세워서 뭉쳐보자는, 우리 가만히 있다가는 흩어질지 모른다라는 그런 불안한 심리를 방어하기 위한 defensive 마음이 있는 거죠. 그리고 하나 이들에게 competitive 심리도 있어요. 우리 이름을 내자. 그리고 하나 덧붙인다면 take initiative 한거죠. , 우리가 해보자는 거죠. 그런데, 이제 가지 심리를 체크해보고 싶은데요. 만약 사람들이 배타적이고, 방어적이고, 경쟁적이고, 주도적인 마음을 갖고 함께 모인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는 것인데요. 예를 들어, 우리 인류가 정말 하나될 가능성이 가지 있어요. 언제냐 하면 외계인이 침략할 . 외계인이 침략하면 모든 민족과 국가는 연합할 가능성이 있어요. 왜냐하면 그때 공동의 적이 생긴 거니까. 그렇지만, 연합은 사실 잠시뿐이라는 우리 알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우리 민족을 생각하더라도 2002 월드컵 모두 붉은 옷을 입고 정말 다같이 모든 광장들을 메우며 열광할 분명 우리는 하나였어요. 우린 하나였는데, 그때 우리의 하나됨은 exclusive 건가요 아닌가요? 굉장히 exclusive 거죠. 그때 defensive한가요 아닌가요? 굉장히 defensive해요. 왜냐하면 예를 들어서 우리 팀이 경기하는데 어느 심판이 불리하게 우리 편에 불리하게 판단한다면 다같이 그냥 굉장히 방어적이 되는 거잖아요. 그때 competitive한가요 한가요? 정말competitive하죠. 그때 얼마나 주도권을 가질려고 하는지, 다들 감독과 코치가 되서 선수 빼고 선수 넣어라 이렇게들 한마디들 하잖아요. 그런 심리들이 모여있지만, 때는 하나인 같았던 거죠. 그런데, 하나됨은 깨질 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 있는데, 예를 들어 교회도 마찬가지지만, 배타적인 사람들끼리 함께 뭔가를 만들면 배타적인 심리는 안에서도 파당을 형성할 밖에 없다는 언젠가는. 그리고, 방어적인 심리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있을 때는 어떤 어려움이 생길 때마다 서로 돌리게 되고 책임이 아니라고 하게 된다는 . 그리고, 경쟁적인 심리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자연히 주도권, 자리싸움을 하게 된다는 . 그리고, 각자 주도하려는 사람들의 심리가 모여있으면 서로 자기의 주장, 목소리를 지키려고 하다가 결국 대화가 더이상 가능하지 않게 된다는 . 그래서, 우리가 기대하는 하나됨은 우리 안에 있는 심리들을 사실은 우리가 극복할 없다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건축이라고도 있을 같애요. 저는 건축을 어떤 physical 건축이 정말 아니라, 우리가 땅에 기대하고 있는 샬롬이라는 것이 오지 않는 것인지, 어떻게 하면 있는지를, 정말 샬롬이 무엇인지를 보게 해주는, 대조가 있는 그림이라고 생각해서 이렇게 예를 들었습니다. 사실 성공과 연합이라는 그럴듯한 아이디어였잖아요. 바벨탑은. 성공과 연합이라는 그럴듯한 아이디어였지만, 사실 그것은 우리끼리라는 어둠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결국 저는 샬롬을 무엇으로 말하고 싶으냐하면 ‘샬롬은 sharing이다’ 말하고 싶어요. 샬롬은 나의 어떤 배타적인 , 울타리를 벗어나서 다른 사람들을 welcome하고 exclusive 자리에서 inclusive 자리로, 그리고 어떤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어떤 위기를 느낄 때마다 나를 방어하려는 defensive 그런 마음에서 자꾸 나를 위한 방어장치들을 만들려고 하기 보다 때로는 오히려 내가 짐을 지려는 그런 인내하고 견디려는 그런 마음을 갖고, 경쟁하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compassion, 어떤 긍휼의 마음을 서로에게 제공해주고, 그리고 주도하려고 하기 보다는 정말 그분의 주되심을 놓치지 않고 그럴 우리가 함께 경험해 있는 것이라는 거죠.  

우리 삶에 구현된 하나님 나라의 모습 – 신선묵교수


저는 신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데  코스타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신학적 내용을 말씀해달라고 부탁받게 되어 강의를 맡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여러 가지 개념적인 정의를 내릴 있고,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선 어떤 것을 정의하는 문제를 얘기해보겠습니다. 어떤 것을 정의할  “A A이다.”라고 수도 있지만 “A B 아니다.”라고 설명할 수도 있을 같습니다. 

제가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를 고민하면서 LA에서 이곳으로 오는 비행기를 타고 왔습니다. 여러분 나이쯤 되는 여학생이 바로 옆에 앉아 있었고 그다음 자리는 비어 있었습니다. 비행기가 이륙하기 직전에도 자리가 비어 있어서 속으로 여학생이 그리로 가길 바랐습니다. 그러면 편하게 가겠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비행기가 뜨기 직전에 어떤 아주머니가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이 자리를 지나쳐 가서 다행이다 싶었는데 다시 빈자리로 돌아왔습니다. 비행기가 이륙한 후에 각자 책을 보면서 가고 있는데 아주머니가 아가씨에게 뭐라고 하는데 아가씨가 아줌마에게 쏘아붙였습니다.
어떻게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렇게 할까하는 생각을 했는데, 아주머니 또한 정신이 없어 보였습니다. 저는 불을 켜고 책을 보고 있는데 아주머니는 제가 아래서 책을 보았습니다. 나중에 보니 분은 모녀지간이었고 어떤 상황인지 모르지만, 갈등이 있었습니다. 딸은 어머니에게 혐오감을 느끼고 있었고 어머니는 딸에게 어떻게든 얘기해 보려고 했습니다. 그들의 갈등과 마디 마디를 보면서 어떤 마음을 느꼈는데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도와주고 싶은데 도와줄 수가 없었고, 상담할 수도 없었고, 아픔만을 내가 느끼면서 너무 아프겠다, 힘들겠다하는 생각을 하며 왔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런 모습들이 우리의 삶에도 우리의 관계에도 있고, 제가 이것을 보면서 하나님 나라의 반대에는 사단의 나라가 있고 사단의 나라는 바로 저런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분들이 사단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들도 피해자입니다.
인간관계와 모든 속에서 사단은 어떻게든지 사람들 사이에 갈등을 일으키고, 죄의식을 일으킵니다.
그것 때문에 바른 사랑을 못하게 하고 사랑이라고는 하지만 인간의 사랑이 죄로 물들어 있기에 남에게 아픔을 주고, 아픔을 받으면 내가 밀쳐내고 더한 아픔을 줌으로써 자기가 살아가려고 합니다. 이런 아픔과 힘듦과 갈등이 사단의 나라가 아닌가 합니다. 원래 우리에게 하나님이 계획하신 나라는 그런 나라가 아니라 정말로 사랑과 화평과 기쁨과 평안함이 있는 나라였는데 어느새 사단이 인간의 태초인 아담으로부터 인간의 삶에 들어오고, 인간의 삶에서 자신이 노릇하고, 인간의 삶을 다스리면서 사단의 인도함을 받게 하고, 사단의 원칙을 따르게 하였습니다. 결과로 많은 고통을 가지고 살게 것이 사단의 나라의 모습이고 그런 것이 인간  삶의 현재 조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제가 구약에서 다니엘서를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얘기하는데 오늘은 얘기는 하지 않고 넘어가겠습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하나님의 나라가 있는데 사단이 인간의 삶을 조정하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부르시고,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훈련하고 가르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통해서 세상의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회복하도록 계획 하시고, 추진하신 것이 구약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일들입니다. 다니엘서를 간단히 설명 드리면 다니엘서는 하나님이 왕이시다, 주권자이시다는 주제를 가지고 쓰인 책입니다. 책을 보면 다니엘과 다니엘의 삶에서 하나님이 왕이심을 보여주고, 다니엘의 친구, 신앙의 공동체에서 하나님이 왕이심을 보여주고 있으며, 하나님이 세상의 왕이신 것이 세상으로 대변되는 느부갓네살왕을 통해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당시 무엇이든지 있는 왕에게 정신병이 들게 하고, 왕은 동안 들판에 나가서 잠을 자고 풀을 뜯어 먹으며 지내다가 하나님이 정신을 회복해 주셨습니다. 경험을 통해서 느부갓네살왕은 내가 왕이 아니고 하나님은 왕이시다는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은 기독교 공동체만을 다스리는 왕이 아니라 세상을 다스리시는 왕이십니다. 느부갓네살이 꿈을 꾸었는데 꿈을 다니엘이 해석해 주었습니다. , , , , 흙으로 동상이 뜨인 돌에 의해서 부서지고 가루가 되는 꿈이었습니다. 이들은 바빌론과  페르시아 그리고 로마, 인간의 왕국을 상징합니다. 예언을 푸는 사람들은 이것이 구체적으로 어느 나라인지 풀려고 하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이라기 보다는 중요한 것은 인간의 왕국이 계속 바뀌며 지속하는 가운데 언젠가 하나님의 나라가 땅에 임해서 모든 인간의 왕국을 폐하고,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예언이 가르치는 것은 인간의 역사가 왕들이 자신의 권력을 확장하여 다른 왕국을 멸하고 새로운 왕국을 세우고, 자신이 왕이 되는 그런 역사가 계속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를 방향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땅에 서는 방향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개인의 삶의 왕이시고, 신앙 공동체와 세상의 왕이십니다. 사람들이 알지 못해서 고백하지 못하지만,
속에서 하나님은 주관하십니다. 그리고 인간의 역사도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다니엘서에서 그런 것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왕국이 계속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예언대로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임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땅에 가져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성육신을 통해서 인간이 되시고, 십자가와 고난을 통해서 죄의 값을 지불해 주시고, 부활을 통해서 생명을 처음으로 가지시고 오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이 원래 계획하셨던 평화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죄의 해결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임했다고 선포하시고, 우리가 이러한 선물들을 구원자 예수님 안에서 받고 누리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 것입니다. 원래 계획하셨던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삶의 모습들이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이뤄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해결되고, 마음속에 평안함이 생기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뿐만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로서 예수님의 고난과 낮아짐과 섬김의 삶을 살도록 명하셨습니다.

이번에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배우면서 부분을 많이 강조하였습니다. 우리도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길을 가야 합니다. 얼마 전에 학생과 식사를 함께 했는데 학생이 자신은 고난을 선택해서 있는 용기가 없다고 얘기했습니다. 마음에 부담이 있었나 봅니다. 구주로 예수님을 받아 드렸지만, 예수님을 주로 받아들이기 힘든 부담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것을 받아 누리기를 꺼리는 마음이 있습니다. 부분을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에 임하셔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여 평안을 주시고, 예수님을 우리가 구세주로 영접함을 통해서 자녀의 관계가 회복되었는데, 그다음으로 우리에게 낮아지는 , 섬김의 , 희생의 삶을 살라고 예수님께서 삶과 말씀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부담으로 다가오는 것이 사실입니다. 말은 쉽지만, 실제로 우리가 살려고 하면, 그리고 이것이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이라면 굉장히 부담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자들이 벽을 넘지 못하고 갈등 속에 있습니다.

전에 제가 LA에서 목회하시는 미국 목사님 스웬들이라는 유명한 목사님이계시는데, 그분의 설교집을 읽으면서 맞는 얘기구나 생각했던 예화가 있습니다.  어떤 분이 LA에서 뉴욕을 가려고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계를 가져오지 않아서 옆에 시계를 사람에게 지금이 시인지 물었습니다. 사람은 뉴욕의 시간뿐 아니라,  온도와 기상 상태까지 말해주었습니다.
사람이 궁금한 것을 시계를 보면서 얘기해 주었습니다. 사람이 시계에 웬만한 정보가 있다는 것에 감동해서 시계 주인에게 시계를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분은 당신이 원한다면 드리죠. 오천 불입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사람은 비록 값이 비싸지만 원하는 정보들을 얻을 있다면 얼마나 좋은 시계인가 하는 생각에 오천불을 주고 시계를 샀습니다. 시계를 받고 떠나려는 시계를 사람이 잠깐만요하고 부르더니, 시계를 쓰기 위해 필요하다고 개의 이민용 가방을 주었습니다. 컴퓨터가 작동하려면 이것을 들고 다녀야 하고 시계만 가지고는 동작이 안된다고 말했습니다. 많은 경우에 기독교 신앙이 우리에게 이런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그저 기독교로 들어오면 죄가 용서되고 하나님이 자녀 삼아 주시고 모든 것이 은혜로운 것으로 인식됩니다. 예수님을 믿기로 하고 교회에 갔더니 매일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시계를 가지려 했더니 이민 가방 개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시계를 포기해 버리고 맙니다. 구원의 부분은 좋은데 Lordship
부분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는 있어서 매일 같이 주저함이 있는 것이며, 그런 갈등 속에 코스타에서 가야 한다고 하니 것이고 집회 동안 고난의 , 십자가의 길을 가야지 하고 결심했다가 집에 돌아가면 결심은 단지 은혜 충만할 것이고, 그렇게 없다고 돌아서고 마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의 성격에 대해서 얘기해 보고 싶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lordship 짐이라고 생각하는 구원이 선물인 만큼 lordship 선물입니다. 사실 구원도 선물이지만 십자가의 삶은 선물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것을 가르쳐주시면서 높아지는 삶보다는 낮아지는 , 지배하는 삶보다는 섬기는 , 받는 삶보다는 주는 , 원수를 갚는 삶보다는 용서하는 삶을 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런 것이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들입니다. 원리는 다양한 모습으로 표출되지만,
안의 원리들을 한마디로 얘기하면 역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역설(paradox)입니다. 파라독스가 무슨 뜻입니까?  파라독스는 언뜻 보면 모순이고 말이 되지만 거기에 진리가 있습니다. 높아지기 보다는 낮아지는 , 지배하기보다는 섬기는 , 받기보다는 주는 , 이것을 처음 보면 말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선물을 주신다면서 어떻게 이것이 길입니까. 말이 안됩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것이 행복에 이르는 바른길입니다. 우리가 높아지면 행복해질 같지만, 사실 행복은 높은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배하면 좋을 같지만, 사람들이 좋아하는 지배자는 사람들을 섬기는 지도자입니다. 원리들이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길을 가라고 하신 것은, 내가 좋은 선물을 주었으니 이제 힘든 길을 가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통해서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행복한 삶을 우리에게 주시고자 진리를 주신 것입니다. 진리는 언뜻 보기에는 말이 되지 않지만 진정한 의미의 행복에 이르는 길입니다.

사실 우리의 삶은 역설의 삶입니다. 우리가 건강하고자 운동을 많이 하는데, 운동 자체는 힘이 들고, 시간도 많이 듭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운동을 합니까? 고난을 거친 후에 건강한 때문에 힘든 운동을 기꺼이 하는 것입니다. 운동을 선택하는 자체만 보았을 때는 말이 되지만 그것이 건강한 삶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에 가치가 있고, 기쁜 마음으로 돈을 내면서도 합니다. 공부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가끔 있고, 공부가 가끔은 재미있지만, 기본적으로 공부는 힘들고, 하기 싫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공부를 해야 필요가 없는데도 공부를 선택한 이유는 그것을 통해서 보상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Lord라는 것이 우리가 무조건 명령에 순종 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이 (lord)라는 사실이 진정한 행복과 진정한 의미의 하나님의 나라, 구원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나라, 정말로 깊은 의미의 하나님 나라로 우리를 인도한다. 아까 말씀드린 비행기의 어머니와 딸의 관계에 많은 갈등과 아픔이 있는데 중에 누군가가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원리대로 살아간다면 아마도 그들의 관계가 조금씩 회복될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딸이 엄마가 나를 불행하게 한다는 이유로 엄마를 원망하거나, 혹은 엄마가 딸의 삶을 계속 조정하려고 하는 것은 사탄이 원하는 삶의 원리이다. 그런 사탄이 원하는 삶의 원리들을 따라서 산다면 어떻게 보면 제가 보았던 둘의 반응이 자연스러운 것일지 모르지만, 삶에는 계속 사탄이 일으키는 아픔과 상처가 계속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원리대로 딸이 분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엄마를 용서하기로 선택할 있다면 그런 선택이 당장에는 말이 되어도 그런 용서를 통해서 둘의 관계가 회복되고 결국 하나님의 나라가 관계 속에서 가정 속에서 임할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래서 낮아지고 섬기는 삶이 우리에게 도전되고 힘이 들지만, 예수님께서 이러한 삶의 원리를 주신 것은 우리를 괴롭게 하려는 것이나, 좋은 것을 주었으니 정도는 해야지 하는 식이 아니라 우리에게 정말 깊은 하나님 나라의 축복과 은혜를 경험하게 하려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진리입니다. 명령으로가 아니라 진정한 하나님 나라를 위한 원리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고난을 선택하는 것은 그것을 통해 약속된 축복이 있기에 기쁨으로 선택하는 것이며 죽지 못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너무 고난을 선택하려 하지 마십시오. 작은 고난, 작은 낮아짐, 작은 양보로부터 그런 삶의 맛을 보면서 하나님 나라의 원리가 이렇게 실제적이구나 하는 느끼십시오. 그러면 그런 가운데 신앙이 성숙해지는 것을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질문 있으신 계십니까?

질문: 사탄이 생겼고, 하나님이 사탄의 행동을 저지하시지 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모두 궁금해하지만, 정답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닌 같습니다. 굉장히 신학적인 질문인데,
하나님이 사탄을 허용했다기보다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선택하는 사랑을 받으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선택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사단의 유혹을 선택했습니다.질문에 대한 정확한 대답은 아닙니다. 가장 신학적인 질문이지만 아무도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통해서, 그리고 예수님의 삶의 모범과 말씀과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 가운데 임했고, 우리가 구원자로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사함을 받고, 양자 됨을 가지고 살아가고, 때로는 주저하기도 하지만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삶의 원리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물론 사람마다 성숙한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사람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 안에서 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함으로 사단의 권세가 멸하고 예수님을 통해서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의 삶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탄의 영향력은 아직 세상에 남아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 나라가 땅에 임한 것을 모르고 의식하지 못하며 사탄이 조정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크리스천들의 선교적인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교적 사명은 성경의 요나서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에 가서 심판의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요나에게 느니웨는 비유로 말하자면 한국사람에게 일본과 같았습니다. 이스라엘을 박해하는 원수와 같은 나라였습니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이 빨리 멸망 받아서 자신의 나라가 행복해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겼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러니 요나가 가기 싫어했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갔습니다.
그때 요나는 풍랑을 만나서 바다로 던져졌고 고래 배속에 들어갔는데 고래가 요나를  니느웨에 토해 놓습니다. 요나는 없이 다시스 사람들에게 심판의 메세지를 전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요나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심판하는 것을 즐기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지 않으셨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요나서의 진정한 교훈은 4장에 있습니다. 많이 얘기되지 않는 주제가 4장에 있습니다. 요나는  짜증이 났습니다. “그것 봐요. 하나님, 내가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필요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어차피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이시고 용서해 아니었습니까?” 요나는 하나님께서 용서하셨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요나는 용서하시는 하나님에게 화가 있다가  담벼락 아래서 잠을 자기 시작했습니다. 호박 덩굴이 위에서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벌레를 보내서 덩굴의 줄기를 먹어서 마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늘이 없어졌습니다. 이미 화가 났던 요나는 하나님,
잠도 자게 합니까? 나를 괴롭히십니까? 내게 그늘을 주는 덩굴은 없애십니까?” 하고 불평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니느웨에 있는 수십만의 사람들과 수만 마리의 소와 양을 바라보시며 자신의 소유인 그들이 하나님 나라에 사는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앞뒤를 분간 하며 사탄의 저주에 이끌려 사는 것을 안타까워 하셨습니다.“너는 호박 덩굴 하나에 분노하고 안타까워하는데,
많은 사람과 양과 소를 향한 나의 마음을 이해해주지 못하니?”하고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지만 세상의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의 왕이시고, 세상을 똑같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귀한 자식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사탄의 조정을 받는 삶을 살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먼저 부르시고, 모든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삶으로 회복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자신만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 생각하며 다른 사람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요나는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요나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