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n 1, 2004 | 이달의 초점
이코스타 2004년 6월호
이코스타의 독자들이 이 글을 보는 즈음이면 올 해의 화제작, “The Day After Tomorrow”가 이미 개봉을 했겠네요. 지구 온난화로 지구 곳곳이 상상도 못할 기상이변을 겪게 된다는 바로 그 화제의 영화말입니다. 이 영화의 극본을 쓴 사람중의 하나인 제프리 나흐마노프는 “근본적으로 이 영화는 비정상적인 환경을 극복하는 보통 사람들의 드라마”라고 얘기하더군요. 저의 관심을 끌던 한 마디는 바로 “Where will you be?” 라는 부제입니다. 사사기의 마지막 구절(사사기 21:25)의 말씀처럼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이 시대에 과연 하나님의 백성들인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디입니까?
“하나님의 모략”, 그리고 “마음의 혁신” 등을 저술한 달라스 윌라드에 의하면 이 시대의 기독교 혹을 기독교인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Consumer Christianity, 혹은 “consumer Christian” 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단어의 뉘앙스에서도 감을 잡을 수 있는 것처럼 주는 것보다는 받는 것에 익숙한, 희생보다는 유익에 관심이 많은, 고난보다는 즐거움에 관심이 많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 자신의 모습도 그런 시대의 흐름에 자의반 타의반 몸을 맡기고 구해줄 사람도 없이, 빠져 나오려는 의지도 없이 그저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더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고난받는 공동체, 거룩한 공동체”라는 주제로 두번째 칼리지 코스타를 준비하면서 과연 얼마나 많은 이 땅의 대학생들이 ‘고난’과 희생에 대하여 고민하며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려고 몸부림치고 있는가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 봅니다. 부의 복음, 건강의 복음, 기도 응답의 복음 이전에 우리의 왕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복음은 바로 고난의 복음이 그 본질이었음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하여 내 삶의 근본적인 목적에 대하여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여정은 결국 우리를 십자가에 달리셨던 그리스도에게로 우리의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여정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동시에 고난받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 자신은 타인의 고난을 그리스도의 눈으로 바라보며 “그들로 하여금 완벽성과 불멸성의 환상속에서 벗어나 우리는 죽을 수 밖에 없고 깨지기 쉬운 존재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고”(‘한길 가는 순례자’ 유진 피터슨)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 존재임을 생각나게 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 고난을 짊어지고 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바라보며 그분을 우리의 주되신 그 분의 삶을 통하여 우리가 당할, 그리고 당해야 할 고난의 영적 지표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자신을 “고난받아야 하는 인자”(막 8:31)로 스스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도 아닌, 엘리야도 아닌 고난 받아야 하는 인자이신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기에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드러내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막 8:32)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된 우리는 예수님처럼 자신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의지의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의지의 자유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겠다는 노력이 없이는 고난의 제자의 길로 들어서는 것 역시 요원한 일이 될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이 의지적인 고백은 구체적인 섬김을 통하여 증명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너무나도 선명하게 각인되도록 보여 주시는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고난을 받아야 할 인자로 자리매김하신 것은 곧 “죽임을 당하시게 될 것”(막 8:31)을 의미하며 예수님은 그것을 두려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고난은 단순히 말의 향연이 아닌 구체적인 희생을 품어야만 그 모습이 온전해지는 단어입니다. 예수님께 그 고난은 십자가에서의 고통이셨으며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하신”(막 10:45) 이 땅에서의 삶의 목적의 성취요 완성이셨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어떤 삶의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 군상의 모습들을 ‘유목민’의 삶이라고들 표현합니다. 유목민의 삶이 무엇입니까? 바로 축적이 아닌 “경험”을 선택하는 삶입니다. 축적이 아닌 경험은, 바로 그 고난의 경험은 세상이 아닌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보여 주었어야 할 모습들인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고난받기를 자처하기 보다는 피하려 하는 베드로를 향하여 꾸짖으신 예수님(막 8:32 33—“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매 예수께서 돌이키사… 베드로를 꾸짖어 가라사대..”)이 어쩌면 오늘의 베드로인 우리를 향하여 또한 동일한 말씀으로 꾸짖고 계신다는 생각을 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막 8:33) 축적(사람의 일)이 아닌 고난의 경험(하나님의 일)을 즐거워 하는 젊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그리고 아마도 이 상상은 예수님이 우리를 향하여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가지셨던 상상이었을 것입니다. 이 상상은 바로 기대감입니다. 그리고 그 기대감은 우리에게 책임을 요구합니다. 주저함이 없이 기꺼이 받아들일 그 거룩한 책임 말입니다. 왕되신 주님은 종의 책임을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막 8:34) 이것이 바로 고난과 함께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의 모습입니다. 세상의 풍요나 풍성함과는 정반대로 “예수의 나라에서는 순종이 곧 풍요함”이라는 진리를 우리 모두는 명심해야 합니다. 그 순종은 바로 고난과 함께해야만 하는 순종이기 때문입니다. 고난받는 그리스도인, 고난받는 공동체 저 너머에 있는 거룩한 영광을 꿈꿔 봅니다. 이 시대가 우리에게 주는 상상력이란 고작해야 집, 자동차, 연봉 정도이겠지만 우리가 꿈꾸는 것은 바로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히 12:1) 가운데 기쁨으로 손흔들며 춤추고 있는 바로 나 그리고 우리들입니다. ‘Where will you be?’ 라는 질문앞에 당당히 우리의 자리를 선포할 수 있는 공동체말입니다.
그 고난너머의 거룩함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기뻐하는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가득한 칼리지 코스타를 기대하며 또 기도합니다.
(참고서적)
1.’비교할 수 없는 그리스도’, 존 스토트.
2. ‘한 길가는 순례자’, 유진 피터슨
3. ‘하나님의 모략’, 달라스 윌라드
4. ‘마음의 혁신’, 달라스 윌라드
Jun 1, 2004 | 이달의 초점
이코스타 2004년 6월호
2003년 코스타 준비가 막바지로 가던 일년 전 이 즈음 코스타 2004 주제를 위한 모임이 있었다. 2003년에는 “세상속의 순결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주제로 하나님 앞에서의 정결함을 촉구했다면, 2004년에는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전세계적으로 흩어져있는 한국인 학생 디아스포라에게 어떤 메세지를 주시기를 원하실까? 미국 전역에 있는 한국인 학생들의 상황과 시대적인 상황을 가지고 뇌폭풍(브레인 스토밍)을 하는 가운데, 몇가지 주제들이 희미하게 드러나고 점점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먼저 “낮아지신 예수, 섬기는 그리스도인(2001)” , “회복되는 하나님 나라, 치유되는 자아(2002)”, “세상속의 순결한 그리스도인(2003)”으로 이어지는 주제들이 한결같이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강조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제는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신앙의 바탕 하에 ‘우리’를 돌아보아야한다는 마음을 주셨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테러, 집단적 반목과 살인 등은 세상의 권세잡은 자에 의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군중’으로 세상의 가치를 좇으며 서로 살리기보다는 서로 죽이는 삶으로 끌려다니고 있는 지를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인간으로 오셨을 때에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힘으로 세상을 정복하시기보다 스스로 고난을 지심으로 세상을 이기는 방법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그 고난을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함께 질 것을 명하셨다. 이러한 바탕 가운데서 올해의 주제 “고난받는 공동체, 거룩한 공동체”가 잉태되었다.
‘우리’라는 단어는 한국인들에게 너무나 자연스럽고 친근한 단어이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우리’와 한국인이 생각하는 ‘우리’와는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성경에서 말하는 ‘우리’에게는 그리스도만이 궁극적인 이유요 양보할 수 없는 기준이다. 나머지는 자유하다. 성경에서 말하는 ‘우리’는 ‘우리’ 외의 사람들을 ‘죽이기’ 위함이 아니요 ‘살리기’ 위한 ‘우리’이다. ‘우리’ 외의 사람들을 지배하고 그들과 경쟁해서 이겨야 하는 ‘우리’가 아니라, 섬기고 긍휼히 여겨야 하는 ‘우리’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함께 지도록 격려하고, 희생하며, 섬기는 진정한 사랑의 공동체이다. 하지만 한인 학생 디아스포라는 유학 또는 이민의 상황에서 소수 민족으로서의 ‘우리’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함께 이웃을 품고 동역하고 고난을 지기보다는 ‘우리’ 외에는 무관심하고, ‘우리’ 것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며, 삶의 현장에서 스스로 만든 ‘우리’ 안에 갇혀서 이방인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된다.
코스타 2004는 진정한 ‘우리’에 대한 성경적 인식을 제공하고, 함께 ‘고난’을 받기까지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우리’의 모델을 제시할 것이다. 아울러 그러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함께 ‘고난’을 지고갈 동역자들과 믿음의 선후배와의 만남을 제공할 것이다. 코스타 2004 연차 수련회를 통해 우리는 지역적으로 흩어져있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만들어내는 지역을 초월한 하나님의 공동체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코스타 2004는 연차 수련회로 마쳐지는 것이 아니다. 코스타 2004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고난’을 받기까지 순종하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일년 내내 이루어 나가는 삶으로 드리는 제사의 시작점이 될 것이다. ‘우리’의 섬김과 순종을 통해 지역을 초월한 ‘고난받는 공동체’를 경험하게 할 것이요, 그것으로 인해 ‘우리’의 교회, 캠퍼스, 일터가 하나님께 거룩하게 드려질 것을 꿈꾼다.
해가 더할 수록 코스타 사역을 통해 각 지역에서 영혼들을 섬기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세워지고 있다는 것으로 인해 주께 감사드린다. 오직 그리스도 때문에 자신의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권리와 이득을 주장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영혼들을 섬기기를 기뻐하는 제자들을 보며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기뻐하실까! 그리고 그러한 제자들로 말미암아 또다른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배태되고 움을 틔울 것이다. 전국에 있는 많은 한인 학생들이 이 거룩한 대열에 함께 참여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우리’가 되기를 기대하며, 함께 ‘고난’을 받기까지 성숙하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May 1, 2004 | 이달의 초점
이코스타 2004년 5월
“영화 <패션>을 보셨습니까?” 지난 1월 캘리포니아 패사디나에 있는 풀러 신학교에서 존스톤교수가 나를 만나자 마자 건네온 첫마디였다. <영화와 영성> Reel Spirituality라는 책으로 한국에도 알려진 존스톤은 개신교 신학자 가운데는 드물게 영화를 비롯한 현대예술과 기독교를 연구해온 사람이다. 그는 영화가 영적 통찰을 줄 수 있다고 주장하며 영화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또 할리우드가 가까운 관계로 자주 영화계 사람들을 만나고 작업을 같이 하기도 했다. 물론 이 영화도 편집과정에서 볼 수 있었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이 영화에 대해서 “패션” (열정)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가 내게 건넨 큼지막한 포스터를 말아 쥔 채 그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전체 120여분 중 100분이 넘게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영화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서 상세하게 묘사한 것에 대한 찬사가 핵심이었다. “그것 만으로 영화가 될까요?” 그것이 내가 보인 반응이었다.
그 다음 주일 나는 LA 근교의 잘 알려진 대형교회 예배에 참석했다. 거기서도 영화 <패션>에 대한 “광고”를 10여분에 걸쳐서 들었다. 이 교회는 LA 주변의 상당 수 영화관을 빌려 이 영화를 시중 개봉 이전에 성도들에게 보여주는 행사를 주최하는 중이었다. 아마도 그 행사를 한 미국 전역의 교회 중에서도 선봉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마도 목사가 권할 유일한 R등급의 영화일 겁니다.” 목사님은 성도들에게 영화를 강력히 권하면서도 피로 얼룩진 작품임을 거듭 경고했다. 만약 그렇게도 폭력적이고 잔혹한 장면이 내내 계속된다면 정말로 교회가 나서서 성도들에게 권할 만한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2월에 들어 수난절의 시작인 “재의 수요일” (Ash Wednesday)에 맞춘 개봉을 몇 주 앞두고 영화는 이미 많은 관심과 비판을 불러일으키며 뉴스 거리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그 중 하나가 이 영화가 유태인을 비하하고 예수를 죽인 사람들로 묘사한다는 논란이었다. 한국 사람들에게 “반유태주의”는 그리 절대적인 관심사가 아니므로 그 논쟁에 뛰어들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단지 아쉬웠던 것은 빌라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처형을 놓고 번민하는 모습을 분명히 보여준 것과 달리 가야바를 비롯한 제사장들을 철저한 악당으로 그린 점이었다. 그들은 시종일관 교활하고 주도 면밀한 음모자요 인간성을 완전히 상실한 악마처럼 묘사되었다. 요한복음이 가야바가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을 유익으로 생각했다는 점(11:50)을 밝혀 그 역시 고민이 없지 않았던 것을 보여주는 것과는 차이가 있는 시각이다. 아마도 이런 다소 치우친 관점이 “반유태주의적”이라는 지적을 불러온 것이 아닐까 한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보러 갔고 많은 이야기들을 들었다. 본래가 개봉 초기부터 뛰어가 보는 것보다 기다려 평을 참고하여 볼 가치를 결정하는 버릇이 있는 터였지만 일부러 조금 더 시간을 끌었다. 계속되는 평들은 극히 엇갈린 것들이었다. 다른 예술도 그렇지만 영화가 엇갈린 평을 받는 것은 있을 수 있고 실제로 많은 경우 그렇다. 하지만 특히 종교적인 영화가 그렇고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한 경우 거의 그래왔다. 예외가 있다면 50년대의 <왕중왕>이나 <벤허> 정도일 것이다. 마틴 스콜세이지의 <그리스도의 최후의 유혹>은 오랫동안 한국서 상영되지 못할 정도의 반대에 봉착했었다. 영화 <패션>이 논란을 불러 일으키고 극찬과 혹평이 엇갈리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영화는 전세계의 기독교인과 일부이지만 비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주제로 토론과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얼마간의 가치를 인정 받아야 할 것이다.
문제는 <패션>이라는 주제이다. 멜 깁슨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사실적으로 그리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고서야 피로 얼룩진 최후의 10여 시간에 그토록 가까이 카메라를 현미경 대듯 들이대지 않았을 것이다. 제작의도는 사람을 즐겁게 하는 보통 의미의 “오락물”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었던 것은 분명하다. 제작비를 많은 부분을 사재를 들였고 각종 논란과 비난 그리고 위험을 감수해야 했던 작업이었다. 영화산업은 돈이 결정권을 가진다는 것이 상식이므로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는 평가도 일리가 있다. 제작 의도가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고 과정도 상당부분 신앙으로 난관을 극복하며 진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제를 다루는 방식도 극도로 “사실적”이고자 애를 쓴 흔적이 역력하다. 우선 “사실성”을 더하려는 의도에서 인지 언어를 아람어와 라틴어로 했다. 비록 비교적 적은 예산을 들인 영화지만 세트나 의상, 분장도 많은 공을 들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내용면에서도 상상력을 자유롭게 발휘한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의 유혹>같은 영화와 달리 성경에 성실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주제인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이르는 과정의 묘사는 지금까지 그 어떤 묘사보다 자세한 것이었다. 바로 이 점에서 많은 사람들은 “은혜”나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리고 충격을 받기도 한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반면 너무 “사실적”이고자 애쓴 나머지 지나쳤다는 것을 지적하는 사람도 많다. 예를 들어 채찍질 장면이 9분여 계속되는데 많은 의사들은 그런 식의 고통을 건강한 사람도 3분을 넘기지 못할 것으로 이야기 한다는 것이다. 그에 앞서 쇠사슬로 내리치는 등의 가해진 구타까지 더하면 지나침은 도를 넘었다고들 한다. 그 후 처형 장소까지 십자가를 지시고 가야 했던 점을 감안하면 과장에 대한 비판은 옳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가 신적인 능력으로 견디셨다고 단순히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패션>의 주제를 벗어난 것이다. 그의 수난은 철저히 인성에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던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찢으시는 처절한 고난과 죽음을 주제로 보여주고자 한 시도 자체는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영화를 비롯한 모든 예술 작품은 작가의 관점에서 주제를 해석하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 영화의 경우는 그것을 “보여주려” 했던 것이다. 그것이 멀티미디어요 특히 시각에 중점을 둔 영상매체인 영화의 본질이다. 특히 이 영화는 언어조차 자막으로 접해야 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보여주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패션>은 고난을 “보여주기” 위해서 극단의 조처를 마다하지 않은 영화이다. 많은 비판가들이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극도의 폭력이 한 시간을 훨씬 넘어서 계속되는 끔직한 영화이다. 평론가 로저 에버트(시카고 선타임즈) 는 “자기가 본 영화 중 가장 폭력적인 영화”라고 했다. 뉴요커의 평론가 데이빗 덴비는 이 점을 강하게 비난하면서 최하위 등급인 별 한 개를 주었다. 상식적인 영화 비판에서 늘 문제가 되는 것이 선정성과 폭력성인 점을 감안할 때 아무리 주제상 또는 특별한 의도가 있더라도 이처럼 생생하고 나아가 과장이 심할 정도로 길게 폭력적인 장면에 초점을 둔 것은 비판거리가 될 수 있다. 물론 나 자신은 폭력의 묘사 자체가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나 <쉰들러스 리스트>는 내가 본 영화 중 가장 폭력적이었지만 그것을 비난할 생각이 없다. 문제는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폭력을 묘사하고 “보여주는가”하는 것이다.
영화 <패션>의 의도는 이미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자세히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충분한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우리는 “보는 것을 믿는” 시대에 살고 있다. 텔레비전과 컴퓨터, 인터넷 등 멀티미디어와 더불어 자라난 세대는 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듣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보는 것 역시 명백한 한계를 가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고속도로 변의 목장의 송아지처럼 큰 눈망울을 굴리며 빠르게 지나가는 영상을 하루 종일 보아도 아무런 생각이 없을 수 있다는 한 비평가의 말을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특히 사람들이 폭력의 묘사에 익숙해져 어지간해서는 아무런 감동이나 시각적 충격도 줄 수 없다고 생각해서 극단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면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나 자신은 이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수난의 장면부터 오히려 긴장을 잃기 시작했고 도가 지나친 폭력의 묘사에 무감각해지기 시작했었다. 더러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있는 것으로 보였지만 나는 그렇질 못했다. 평소에 눈물이 인색하지 않은 자신이 미안할 정도였다. 남들처럼 감동하고 “은혜”를 받지 못한 것을 굳이 변명하자면 바로 “보는 것으로”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잠시 오가는 플래쉬 백으로만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를 영화는 충분히 “보여주지” 못했다. 피가 마리아의 얼굴에 까지 튀기는 장면으로도 고난의 의미는 살아나질 못했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은 사고나 상상력이 훨씬 월등하여 그것을 살려내며 감동과 “은혜”를 받았을 것으로 믿는다.
일부에서 이 영화가 역시 제작자 멜 깁슨의 카톨릭적 신앙을 반영한다는 지적은 옳다고 보인다. 특히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어머니 마리아의 관계가 부각되는 여러 장면이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십자가에서 어머니를 “여인이여”라고 부른 이유를 아들로서보다 메시야로서 대하신 것으로 해석해온 개신교 신학에서는 생소한 모습이 영화 전체에 상당히 있다. 가장 카톨릭적인 면은 주제인 <패션>에 대한 접근이다. 그리스도의 수난의 의미는 우리가 받을 형벌을 대신 하신 것이다. 이는 카톨릭과 개신교 신학이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그것을 가능한 비참하고 참혹하게 묘사하는 경향이 카톨릭에 강하다. 중세의 성화들 중 <피에타>라고 불리는 그림이 있다. 거기에는 대개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을 안고 있는 마리아를 측은히 내려다보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한 구석에 등장한다. 마치 너무도 참혹하게 죽은 성자의 모습이 안쓰러워 인류의 죄를 사하신 듯한 인상을 풍긴다.
멜 깁슨이 수난과 죽음에 집착하는 것은 이런 전통 때문이 아닌가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의 지나친 생각일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도 남미나 필리핀 등지에서 간혹 수난절 행사에 실제로 십자가를 지는 재현행사를 포함해 각종의 고행과 고난이 강조되는 이면에는 이런 전통이 흐르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신학적 비판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런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카톨릭의 저력은 부러웠다. 그것은 물론 멜 깁슨이라는 한 사람의 비전과 노력의 결실일 수 있다. 하지만 1920년대 영화와 정면 충돌해서 싸웠던 카톨릭은 바티칸 공의회 II 이후 1960년대에 들어서는 대중문화에 대한 시각을 바꾸어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 영화에 대해서는 카톨릭 안에서도 반대와 이견이 없지 않았으나 그러한 배경이 이 영화의 출현과 무관하다 할 수 없다. 대중문화가 일상 환경이 된 오늘날 개신교 역시 대중문화와 특히 영화에 대해서 보다 적극적으로 연구하고 바로 보고 비판하며 나아가 변혁하려는 비전을 가져야 한다. 이런 영화가 주류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지고 배급되었을 뿐 아니라 상업적으로도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히 영화사의 한 획을 그은 것은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나아가 이 영화의 성공으로 인해 앞으로도 좋은 “종교영화”가 더 많이 제작되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면 그 이상 바랄 것이 없다.
끝으로 이 영화를 과연 볼 가치가 있는 것인지에 대해 한 마디 덧붙이고자 한다. 앞서 말한 지나친 폭력적 장면으로 인해서 이 영화는 성인등급인 R을 받았다. 하지만 로저 에버트의 말과 같이 “종교 영화”가 아니었더라면 17세 미만 절대 불가인 NC17을 주었어야만 했다는 말에 나도 동의한다. 따라서 여러 비평가들이 지적한 것처럼 어린아이들을 이 영화에 동반하는 것은 전혀 권할만한 일이 아니다. 다른 것은 접어 두더라도 좋은 약도 지나치면 독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나는 교회에서 모든 교인을 불러 놓고 상영하는 일은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지금 한국서 일부 교회가 불법 DVD를 상영한다고 하는데 이는 제작권 존중은 제쳐놓고라도 과연 상식적으로 타당한 일인지를 물어야 할 일이다.
<패션>외에도 모든 가족이 보아서 좋을 영화는 많다. 특히 신앙인으로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실화”들 가운데 많다. 예를 들어 1982년 휴 허드슨이 만든 에릭 리틀이라는 올림픽 달리기 선수의 이야기인 <불의 전차> 같은 것이 그렇다. 이 영화는 좁은 의미의 종교영화는 아니지만 정말 감동적이다. 부디 “종교영화”라는 좁은 장르에만 집착하여 “은혜”를 받으러 영화를 보러 가지 않기를 바래본다. 사실 “은혜”는 눈물만으로 입증되지 않는다. 진정한 “은혜”는 도전을 받아 삶의 변화가 일어날 때 강하게 임한다. 그리스도를 측은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이 우리도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할 때, 아니 조금이나마 그렇게 될 때 진정하게 임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눈물보다 훨씬 진하다. 그것은 스크린을 피 빛으로 물들이는 것보다 훨씬 진하다. 무엇보다 그것은 우리의 심령을 씻어 새롭게 변화시킨 진정한 은혜의 샘터이다.
May 1, 2004 | 이달의 초점
이코스타 2004년 5월호
이렇게 이코스타 좌담회에 참여해 주신 여러분께 먼저 감사드립니다. 우선 각자 자신에 대해 소개를 해주시겠습니까?
차문희: 저는 차문희이고요 현재 살고 있는 곳은 조지아 아틀랜타입니다. 처음에는 공부하러 미국에 왔다가 졸업하고 교사로 일하면서 계속 공부하고 있습니다. 직장생활하면서 학생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조한상: 저는 조한상이고 시애틀에 살고 있고 전자공학을 전공하는 박사과정 유학생입니다.
권오승: 보스턴에 있는 권오승입니다. 반도체 제조학을 공부하고 있고 보스턴에서 유학생 성경공부를 섬기면서 그레이스 채플이라는 미국 교회에 출석하고 있습니다.
이코스타에서는 1월부터 고난과 공동체라는 주제로 기획기사를 준비하였습니다. 이번 코스타의 주제인 고난받는 공동체, 거룩한 공동체에 대한 일종의 사전준비형식이었는데요, 이 주제가 2004년을 살고 있는 우리 유학생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한번 짚어볼까요?
조한상: 사실 저는 주제가 나온 것을 처음 보고 매우 놀랐습니다. 사실 흔하게 듣는 말 중에 하나가 미국이 편한 곳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위해서 고난을 받을 일을 없다 고난을 받으려면 미전도 종족에게 가보면 잘 알 수 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적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어디에 살던지 고난을 받는 것이고 공동체가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요, 그런 말을 한 다는 것 자체가 고난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잘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고 기독교인이 고난에 대하 나름대로 정의를 내리고 삶 속에 적용될 수 있는 기회가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차문희: 저같은 경우 이번 기사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고 느꼈습니다. 보통 유학생들을 보면 경제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비교적 안정된 사람들이고 처음 미국에 올 때 꿈이나 비젼, 야망을 갖고 오기 때문에 성공 지향적인 삶을 살기 위해 이기적인 마음이 많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고난이 닥쳐오면 내가 왜 이런 고난을 받아야 하는가 내가 성공의 길을 가고 싶은데 하는 사고로 좌절감에 빠지기도 하고 그런 것을 받아들이기 보다는 피해가려는 경향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저도 유학생활을 해보았지만 유학생들은 고난에 부딪쳐도 도전받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것을 피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같습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서 코스탄들이 고난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고난을 하나의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기회가 됐으면 합니다.
권오승: 저도 차문희 자매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다만, 유학생들이 받는 고난에는 제가 생각하기에 두 가지 종류의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유학생으로 살아가면서 겪는 문화적 충격, 경제적 어려움, 학업에서 받는 스트레스 등 일상 생활에서 겪는 어려움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나름대로 성령의 열매를 맺고 사는 것이고요, 두번째는 세상의 가치관에 싸워 살아가기 때문에 예수님의 삶을 살면서 받는 고난이 아닐까 싶습니다. 첫번째 고난은 우리 유학생들의 삶에 많이 발견되는 것이고 성경공부 시간등에서 많이 나눠지는 것인긴 한데 사실 이번 좌담회와 코스타의 주제는 두번째의 고난의 것에 더 강조가 되어있는 것같습니다.
고난이라는 가치를 별로 생각하지 않는 현대 교회에서 고난의 이슈를 머리 속에 담으려고조차 하지 않는 태도가 팽배해 있는 시대에 이번 주제가 아주 가치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부활절의 절기에 맞게 고난이라는 주제와 파편화되어가는 사회에서 기독 공동체에 대해 여러가지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인 것같습니다. 먼저 기독공동체의 여러 경험을 조한상 형제님께서 정리해주셨는데요 그 글을 준비하시면서 어떤 마음이 들으셨는지요?
조한상: 기독 공동체에 대한 정의를 글을 쓰면서 좀 보았는데, 역사적으로 왜 공동체성이 점차 결여되어가는가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현대에 역사에 나타나는 공동체성이 왜 없어졌는가하는 의문에는 공동체에 대한 개념이 중요한 것같습니다.
공동체에 2개의 극단이 존재하는 것같애요. 성경적인 공동체가 어떤 것인가 고민없어서 없거나 우리 공동체가 제일이다는 자부심을 고조하는 공동체게 존재하는 것같습니다. 그래서 나타나는 현상들은 완전히 공동체에 대한 관심이 없거나 공동체에 대한 자부심이 지나친 나머지 교만에 빠지는 두 유형이 있는 것같습니다.
공동체로서 받을 고난을 고민하기 이전에 어떤 공동체를 형성해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바른 공동체를 형성해 가는 과정 자체가 고난을 수반하는 일인 것 같습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생각의 변화가 많이 필요하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권오승: 저도 그 글을 아주 잘 읽었습니다. 한가지 사족을 단다면 예수님의 몸(Body of Christ)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추가하고 싶습니다. 특별히 유학생 집단 같은 엘리트 집단에 던져지는 메세지 중에 하나는 유학생 리더 같은, 훈련된, 잘 나가는 크리스챤은 수퍼 크리스챤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를들면 성경공부 리더가 된다면 학교에서 공부도 잘해야하고 직장에서도 잘해야 하고 기도도 잘하고 성경공부도 잘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심지어는 교회 봉사도 못하는 거 없이 다 잘해야 하고, 상담도 잘하고, 노래도 잘 부르고… 그러나 성경적인 관점에서는 개개인이 수퍼스타가 되기 보다는 각자가 장점과 단점을 서로 맞춰가면서 예수님의 몸을 만들어가고 세상이 상상하지 못하는 하모니를 만들어내는 것에 강조가 더 있는 것같습니다.
고난의 이슈에 이런 원리를 적용하면요, 개인이 고난을 받는 것이 아닌, 공동체가 고난을 받을 때 각 지체가 감당해야할 고난의 영역이 있고 함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고난을 감당해 낼때 진정한 기독공동체의 하모니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편 실질적으로 그런 하모니를 가진 공동체를 별로 보지 못한 점이 중요한 이슈인 것같습니다.
조한상: 역사적으로 보면 한사람의 뛰어난 수퍼 스타같은 지도자에 의해서 세워지고 유지되는 공동체, 그러나 그 사람이 사라지면 철저하게 타락되는 공동체의 모습이 많았습니다. 좋은 지적이신 것같습니다.
예, 공동체가 능력있는 개인보다 중요하다는 말씀이신데요, 예수님에 대한 신앙과 공동체 생활과 떨어질 수 없는 관계가 있음은 우리들의 신앙생활에서도 많이 느끼는 부분입니다. 각자 기독 공동체를 경험하시면서 어떤 모습이 진정한 조화를 추구하는 기독공동체의 모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차문희: 기독 공동체의 바른 모습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선교 단체를 섬긴 경험에 비춰보면서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사실 실망스러운 부분도 많이 있었던 것같습니다.
기독 공동체에서도 직책에 너무 의존하는 경우가 있는 것같애요. 섬기는 사역자와 봉사하러 오시는 분들 사이에 조직 사회가 유지되는 것같거든요. 지위가 높으신 분은 권위를 내세우는 경우도 있고 서로 못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었어요.
두번째로는 기독 공동체는 서로 다른 점을 인정해줘야하는데 다양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자신의 것을 강요하는 것이 많았던 것같아요.
세번째로는 말씀 위주의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같습니다. 예수님의 몸을 권오승 형제님께서 말씀해주셨는데, 기독 공동체의 기초가 말씀을 바탕으로 성립 되는 것이 옳지 않나 봅니다. 물론 친교가 중요하긴 합니다. 먹는게 없으면 안오니까요.(웃음) 교회 안의 공동체도 너무 사회 클럽같은 것을 느끼곤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어느 조직이건 갈등이 있고 그것을 어떻게 해결하는 것이 중요한 것인데 갈등을 부인하고 없는 것처럼 가정하고 피하려고 하는 것은 문제를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놓는 것같애요. 교회에서도 갈등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고 어떻게 이것을 잘 해결할 것인가를 고민하는게 좋을 것같아요.
그런 다양성을 어떻게 담아내야할까요? 보이지 않는 분위기로 다양성을 억압하는 경우도 많이 있는데요.
차문희: 다양성에 대한 훈련 자체도 기독 공동체에 많이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기숙사 RA를 하면서 학교나 세미나에서 다양성에 대한 훈련을 많이 받았는데요, 교회에서도 그런 훈련이 많이 필요하지 않나 싶어요.
조한상: 다양성이 중요하긴 한데 열려 있지만 닫혀 있는 공동체로서의 기독 공동체의 특징으로서 정체성이 중요한 것니까요, 기독 공동체의 보편성과 다양성을 조화하는 기초가 말씀이 될 것같은데요, 삶의 나눔이 필요하지만 말씀 중심으로 공동체의 기반이 분명히 설 때 공동체가 지속적으로 유지될 것같습니다.
교회는 한편 보편성을 가지면서 다양성을 유지하는 균형을 갖기가 어려운 문제이긴 한데요.
권오승: 제가 보기에는 신앙 공동체에는 제자 공동체와 회중공동체의 형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제자 공동체는 예수님의 제자들의 공동체에서 회중 공동체는 바울 서신 등에 나타난 교회에서 볼 수 있는데요. 제자 공동체는 선택과 배제(selection & exclusion), 회중 공동체는 포용이라는 원칙이 보여지는 것같거든요. 예를 들면 교회에서 문맹인 사람과 철학 박사와 같이 성경공부를 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문제가 될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의 몸이라는 이유로 같아져야 한다고 강압할 수는 없거든요. 지혜롭게 동심원적 구조를 세우면 선택과 배제라는 원칙과 하모니를 가져야 한다는 균형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조한상: 밑에서부터의 공동체, 한 사람에 의해 주도되지 않는 공동체가 세워지고 말씀이 소그룹에 기초가 되고 조직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닌 위로 올라가는 공동체가 되면 힘이 생기는 것같애요. 공동체가 조직이지만 조직을 벗어나지 않는다면 공동체로서 실패하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밑으로부터의 공동체 조직이 되면 굉장히 어려워지는 것같아요.
한편 기독공동체가 세상의 공동체 혹은 조직과 근본적으로 다른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면 어떤 것이 필요할까요? 많은 한국 교회가 한국 사람들이 교회에 오니까 오는 사람을 이민에 정착시키고 교회를 통해서 미국 사회에서 적응하고 성공하는게 좋다는 것이 기조인데요 이해가 가는 측면이 있긴한데 문제가 있는 것같습니다. 기독 공동체가 다른 타자를 위한 기독공동체의 정체성을 세우지 않으면 쉽게 교회가 흔들리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조한상: 기독 공동체가 근본적으로 다른 가치를 추구해야 하는 것이 정답이긴 한데요. 나를 포기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는 기독교인, 기독 공동체가 중요한 것인데요, 몇몇의 헌신된 제자가 작은 공동체가 점차 우리가 갖고 있는 이상적인 공동체의 모습이 될 원동력이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차문희: 타자를 위한 공동체라는 표어는 매우 중요한 것같습니다. 교회 공동체 구성원의 역량이 중요한 것같은데요. 제 경우도 교회를 생각해보면 교회 신도수는 어느 정도 되고 재정도 튼튼한데 왜 섬기는 사람이 없는가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 몇몇의 헌신된 제자, 구성원인 제자의 역량이 중요한 것같습니다.
권오승: 때로는 교회에 뭔가를 원하고 찾아오는 사람에게 그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는 것이 가끔은 필요한 것같습니다. 금과 은을 찾는 거지에게 우리가 줄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분명히 말해주는 것이 필요한 것같거든요. 최근 교회에서 섬김이 없는 것보다는 선포(케리그마)가 적은 것이 공동체의 문제가 아닐까요.
신앙의 원론적인 메세지가 없는 상태에서 잘해주는 섬김만으로는 공동체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데 어려움이 따를 것같습니다. 메세지가 좀더 중요하지 않나 싶어요. 물론 이것은 상황에 따라 강조점이 달라질 수 있겠습니다만, 적어도 제가 경험한 유학생의 사회속에서는 그렇습니다.
고난이라는 주제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각자 생활에서 어려움과 시련이 많았을 것같은데 생활의 어려움이나 유학 생활 중의 어려운 점이 있으면 나누어주시겠습니까?
차문희: 저 같은 경우는 고난이 좀 많았던 것같은데요(웃음) 언어의 문제로 힘들었고 남부라서 인종 갈등도 있었고 직장 생활에 적응하기까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미국 어린이를 다루는데 어려운 일이 많이 있었고 오해도 많이 있었습니다. 요즘은 처음 오는 한국 유학생들이 이런 얘기를 하면 다 겪어봐야 하는 일이다라고 말을 해주죠.(웃음)
그러면서 내 자신을 알고 자신을 되돌아보는 기회가 되는 것 같습니다.
권오승: 다른 문화에 적응하느라고 겪는 어려움은 저도 참 많았는데요, 제가 나름대로 생각했던 것은 세상의 가치관에 적극적으로 대항했던 그리스도께서 능욕을 지고 십자가를 지셨던 고난은 아니었던 것같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할 필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받으셨던 고난이었거든요. 앞으로 직장생활을 하면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가치있지 않은 일을 붙들고 오랫동안 씨름해야하는 경우가 있을 것같고 성공보다 다른 방향으로 나가야 하는 것이 앞으로의 고난이겠죠.
기획 기사가 기독공동체의 고난을 연결시켜보려고 노력했는데요, 원론적으로 생각해서 기독인이 또 기독공동체가 고난을 수반하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죄때문이라 하겠는데요, 고난이 창조질서의 붕괴에서 나왔다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 치유책이 나와야 할 것같습니다. 각자 신앙이 고난을 극복하는데 어떤 의미가 있으신지요?
차문희: 저는 유학생 생활을 시작하면서 인터내셔날 미니스트리에서 다시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는데요, 행동으로 보여준 좋은 친구의 전도가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바탕이 되서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삶을 시작하니까 먼저 평안해지고 그분을 의지하게 됩니다. 예전처럼 내가 왜 이래야되지 하고 불평을 늘어놓기 보다는 고난을 통해서 뭔가 또 배우고 있구나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성장하고 있구나 하고 느낍니다. 고난의 결과보다는 과정을 통해 성숙하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나름대로 큐티도 더 열심히 하고 성경공부도 더 열심히하고 있습니다.
권오승: 제가 앞에서 말씀드린 두가지의 고난 가운데에서요, 첫번째 카테고리의 고난은 세상과 싸우면서 생기는 고난은 아니지만 그 나름대로 제 스스로를 돌아보고 예수님 닮은 사람으로 만들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느껴졌고, 두번째 종류의 고난은 그것을 경험할 때 표면적으로 힘들지만 보이지 않는 기쁨이 있었던 것같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신앙이 그런 고난 속에서 아주 자랑스럽더라구요. 사소한 얘기지만 제가 직장생활할 때, 제 신앙의 양심에 비추어 하기 어려운 일을 요구받았을 때, 그러면서 갈등할 때 금방은 아니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기쁘고 평안한 마음이 생기더라구요. 이런 일들을 통해서 스스로 어디에 서야할 것을 확실히 발견하게 됬던 것같습니다. 제 삶에서의 전선(battle line)도 더 명확해지는 것 같고요.
기독인과 기독 공동체의 정체성이 우리의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다시 생각하게 되는데요, 이번 코스타의 주제가 세상에 대해 대항하는 기독공동체가 고난과 더불어 거룩함을 유지해야 할 필요에 의해 정해진 것같습니다. 이번 코스타 주제가 어떤 배경에서 정해지게 되었는지 한번 생각해볼까요?
권오승: 고난을 받음으로써 공동체가 거룩해진다라기 보다는 거룩한 공동체는 고난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요? 이번 코스타 취지문에 잘 나와있듯이 실질적으로 초대 공동체나 모델 공동체들이 가지고 있었던 공통점, 독특성이 있는데 그런 아이덴티티가 고난을 견딜 수 있는 큰 힘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크리스챤 공동체만이 지니고 있는 힘이 닥쳐왔던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는 점이지요. 예수님이라는 궁극적인 목표가 우리안에 약해졌기 때문에 우리안에 당연히 있어야할 영광스러운 모습이 약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고민에서 주제가 잡혔던 것같습니다.
차문희: 유학생들에게 이번 주제가 시의적절한 것같습니다. 이런 주제를 통해서 기독 공동체의 바른 모습에 대해서 올바른 지식과 시각을 심어주길 기대합니다. 대부분 공동체에 대해서 생각을 안하지만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코스타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요, 올해 코스타 컨퍼런스를 준비하면서 주제와 관련되어서 어떤 기대를 갖고 계신지 나누면서 오랜 시간의 말씀을 줄였으면 좋겠습니다.
권오승: 제가 코스타에 참여한 지가 벌써 8번이나 되었네요. 매년 다른 기대를 갖는데요, 저도 이제 박사과정을 마치면서 좀더 세상과 직접 맞부닺치는 단계에 들어갔는데 이번 수련회를 통해서 세상에서 어떻게 지혜롭게 살아가야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배우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함께 공동체의 약해짐을 가슴아파하고 고민하는 시간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차문희: 저같은 경우는 여러 강사님의 말씀을 통해 많을 것을 배웠으면 좋겠고 그것을 공동체에 적용하는 전략을 배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컨퍼런스를 참여함으로써 알게된 지식을 공동체에 최선을 다해서 적용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긴 시간 함께 해주셔서 감사드리고 컨퍼런스 기간까지 코스탄들의 삶에도 고난과 공동체라는 주제가 준비되고 내면화되기를 기도해봅니다. 함께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Apr 2, 2004 | 이달의 초점
이코스타 2004년 4월호
영화를 본 후 자꾸 생각이 났던 말씀들이 있어서 잠깐 나눕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보고 놀랄 것이다. 이것은 그의 모습이 너무 상하여 사람같지 않기 때문이다 (사 52:14, 현대인의 성경)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 (개역한글)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시22:6)
심해지는 채찍질과 십자가의 못 박히시는 장면들은 눈뜨고 보지 못했고 (그것을 눈뜨고 보지도 못하겠고 마음 깊숙이 받아들이기도 힘이 들어서 내 안에 싸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말씀 그대로 정말 사람의 모양을 찾아볼 수 없는 모습으로… 벌레의 모습으로… 도수장에 끌려가시는 잠잠한 어린양의 모습으로… 나를 놀라게 하셨습니다. 그 모습으로 예수님께서 나를 보고 계셨습니다.
(DC에서 K 자매)
저는 감정이 팍팍한 사람이라서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서 늘 회의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C.S. Lewis가 예로 든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이고 죽어서 부활할 것을 확실히 알고 있는 사람이 당하는 고난이 뭐 그리 대단하냐고 회의하는 마음이 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고서 예수님의 고난이 장난이 아니었구나 하는 것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리얼하게 느껴지던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고 나니 -아리러니컬하게도 – 오히려 안도의 한숨이 나왔습니다.
사실 십자가는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잔인한 고통을 주는 형벌이라는 식으로 십자가의 고통을 극대화 시키는 말들을 우리가 많이 들어 왔습니다. 저는 아직도 그 말에 찬성하지는 않지만, 이 영화를 보고서 굳이 십자가가 가장 지독한 형벌이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은 우리의 육체가 감당하기 불가능할 정도의 지독한 고통이 있었다는 (가장 지독하고 아니고는 관계없이) 것으로 인해 그 구체성과 상징성이 다 만족되는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십자가의 고통이 제게 크게 다가와서 저를 심각하게 만들었던 이유는, 예수님께서 그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려고 단호히 기도 하고 끝까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언덕으로 가시려고 하는 장면들이었습니다. 글쎄요, 며칠 갈 지 모르겠지만, 고난받으시려고 기도하고 결심하고 (맨 첫장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끝까지 그 길을 나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계속 생각납니다. 피할 수 있는 많은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고통을 정면에서 받으시니까 더욱 그분의 고난이 증폭되어 다가 왔었고, 이제 제 마음을 심각하게 돌아보게 만듭니다.
빌라도가 기회를 줄 때에, 차라리 대답을 잘 해서 그냥 풀려나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였는데, 베드로가 똑 같은 제안을 했다가 “사단”이라는 꾸중까지 듣는 것이나 영화 속의 사단의 생각이나 다 한가지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동정이 아니라 사실은 저 자신에 대한 동정이요 두려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마리아의 엄연한 태도가 부각됩니다. 그녀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그 사랑으로 인해 예수님이 받는 고통이 그대로 그녀에게 느껴지는 장면들, 그러면서도 예수님의 사명에 대한 인식의 확고함 (믿음)이 그려졌습니다.
(Seattle의 K형제)
작년 초에 멜깁슨이 예수님에 대한 영화를 만든다는 기사를 잡지에서 읽으면서 흥분했었습니다. 헐리우드에서 영향력있는 영화배우 중 하나인 멜깁슨이 크리스찬이라는 것도 놀랍고 기뻤고, 그가 자비를 들여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관한 영화를 만든다는 것도 참 고무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영화가 개봉되면 꼭 성경공부 지체들과 함께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예정일보다 조금 늦게 그러나 때 맞춰서 “The Passion of the Christ”가 개봉되었다는 광고를 보았습니다. “때 맞춰”라고 생각한 이유는 마침 성경공부에서 요한복음을 공부하고 있을 때였기 때문입니다. 바울 서신을 볼 때와는 달리 요한복음을 공부하면서는 지체들이 본문을 많이 어려워했고 특히 예수님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하는 걸 느끼고 있었기에 이 영화가 본문이해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관람에 대해 광고를 하고 함께 볼 날짜를 정한 후에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려져있는지 보지 않았기에, 지체 중에 혹 믿음이 약한 이들이 보다가 감당 못하고 시험에 들게 되진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고, 멜깁슨이 어느 정도로 자세하게 묘사했는지 모르기에 혹 왜곡된 장면이 있을까 염려가 되었습니다. 또한 함께 보는 지체들이 이 영화를 통해 예수님의 고난을 깊이 느껴보고, 지금 공부하고 있는 요한복음을 잘 이해하게 되었으면 하는 욕심도 생겼습니다.
성경공부 지체들도 지대한 관심을 보이며 영화를 보기 전에 뭔가 준비를 하고 싶어했습니다. 어느 자매는 마태복음을 읽으며 제게 영화를 보기 전에 성경 어디를 봐야 도움이 되냐고 묻기도 했습니다. 지체들의 관심과 그 관심을 행동으로 옮기는 모습에 감동하며 성경공부 사상 처음으로 터프하게 숙제를 냈습니다. “영화보기 전에 요한 복음 읽어오기.”
영화를 보는 날 저녁 캠퍼스에 모여 출발하기 전에 기도를 했습니다. 여느 때 친구들과 영화보러 갈 때와는 사뭇 다른 마음과 자세로 가는 길 내내, 또 극장에 들어가면서도 지체들을 보며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극장에 들어가면서 한 자매가 “난 영화보러 극장에 가면 항상 자거든. 그래서 친구들이 나랑 영화보러 가는 거 싫어했어” 라고 하는 겁니다. 속으로 가슴이 철렁해서 그 자매가 졸지 않기를 또 기도했습니다^^
드디어 영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듣던데로 잔인하고 피흘리는 장면이 많이 나왔습니다. 개인적으로 잔인하고 무서운 장면을 볼 때는 눈을 질끈 감거나 소리가 안들리게 귀를 막으면서 보던 제가 그 날 만은 두 눈 똑똑히 뜨고, “잔인하다, 징그럽다”는 생각 한번 안하고 조용히 눈물만 흘리며 보았습니다. 그 분이 맞으시는 채찍, 바닥에 낭자하던 피, 지고 가시는 크고 무겁게 보이던 십자가, 그 분의 손과 발에 대고 무섭게 때리던 망치소리… 그 모두가 제게 외치고 있었디 때문입니다. “나는 너를 사랑하노라.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영화가 끝나고 나오는데 옆에서 보던 예의 그 잘 잔다던 자매의 눈이 퉁퉁 부어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자매 옆에 앉았던 지체들이 나오면서 하는 말이 그 자매가 영화 시작하면서 부터 끝날 때 까지 어찌나 엉엉 울며 통곡을 하던지 시끄러워서 영화를 못봤다고 했습니다.
영화의 무거움에 마음이 부담이 된다는 지체들에게 미안했지만 그래도 영화본 걸 나누러 캠퍼스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이대로 헤어지는 것 보단 나누면서 서로 느낀 것들을 정리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몸이 아파서 함께 영화보러 가지 못한 어느 자매가 사랑으로 준비해준 스파게티를 먹고나서 돌아가면서 느낀 것들을 나누었습니다. 저는 지체들이 어떻게 봤는지 너무 궁금했습니다.
부모님이 아직 안 믿으셔서 전도에 관심이 많은 한 자매는 “전도용으론 안 좋은 영화같아. 좀 더 구체적으로 예수님이 어떤 일들을 하셨는지 다루었으면 좋았을 텐데… 너무 고난에만 촛점을 둔 것 같아” 라고 했습니다. 다른 한 자매는 “영화보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어요. 예수님이 정말 저렇게 까지 잔인하게 고난당하신 줄 몰랐어요” 라면서 예수님의 사랑이 조금 느껴졌다고 했습니다.
또 한 형제는 “인간이 저렇게 까지 잔인할 수 있다는 걸 느꼈고,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생각했다고 했습니다. 지체들의 나눔을 들으며 감사했습니다.
“한 편의 영화가 얼마나 많이 얼마나 깊이 그리스도의 우리를 향한 사랑을 표현하고 느끼게 할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한 적도 있지만, 지체들의 나눔을 들으며 그 한 편의 영화를 통해 조금이나마 그 분의 사랑을 느끼게 되고, 그 분의 고난을 묵상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The Passion of the Christ”는 성공한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영화를 본 다음 주에 요한복음 19장을 공부하면서 지체들이 이제는 영화를 보고 나니까 장면이 상상이 되고 이해가 된다며 풍성히 나누는 걸 보면서 또 한 번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그 영화의 장면들이 지체들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아서 세상살이 하다 믿음이 약해지고 시험에 들려고 할 때, 그 장면들을 떠올리며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 때문에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되길 소원하며 기도해 보았습니다.
(NY에서 K 자매)
Apr 1, 2004 | 이달의 초점
이코스타 2004년 4월호
1. 자발적 고난: 예수님의 고난만을 강조하다보면, 외부에 의한 타율적인 고난으로 비쳐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영화를 접했습니다. 하지만, 요한이 끝없이 강조하는 예수님의 자발적인 고난의 관점이 대단히 잘 그려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스스로 택해서 가시는 고난의 길…
2. 영적인 고난: 고난을 시각화하면서 발생할 수 있는 단점은, 지나치게 육체적인 고난에만 초점이 맞춰질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인간의 죄로 인해 성자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되어 가는 영적인 고난의 의미도 나름대로 잘 부각되어 있는 듯 싶었습니다. 또한 자발적인 고난의 동참이기는 하지만, 어려움을 피하고픈 인간적인 마음을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키면서 오는 고난 또한 잘 표현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3. 건강한(?) 사탄: 가장 우려한 부분은 사탄의 역할이 어떻게 나타날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우리가 그저 그렇게 교회를 통해 들어오던 사탄의 역할, 즉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는 승리했다고 생각하고 좋아하는 사탄의 모습으로 그려지면 어쩌나 하는 염려였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 나타난 사탄의 역할은 초지일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막으려고 애쓰는 모습이었고, 또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자, 패배에 고뇌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곧 그들의 종말을 의미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탄… 그 건강한(?) 사탄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 ^
(Seattle에서 C형제)
Passion of the Christ 가 원 제목인데 여기서의 Passison 이란 ‘열정’이라는 뜻이 아니라 ‘수난’이라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서양의 역사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을 주제로 한 많은 유산들이 있지만 흔히 잘 알려진 것으로는 음악에서의 수난곡을 들 수 있습니다. 독일의 하인리히 쉬츠의 마태수난곡을 위시로 해서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바흐의 마태수난곡, 요한수난곡이 특히 유명하죠. 물론 핸델의 메시아 2부의 제목도 수난과 죽음이죠. 따라서 이 음악들은 대개가 아주 슬프고 애절합니다. 아마 이 영화의 제목이 Passion으로 정해진 것도 이런 서양의 전통과 무관치 않을리라 생각합니다.
신문지상에서의 설명을 보면 아주 엉터리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경의 내용대로 만들었다는 말도 그렇고 모니카 벨루치가 연기한 역을 막달라 마리아라고 써 놓은 것들도 그렇습니다. 후자를 먼저 언급하면 성경상에는 많은 마리아들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의 누이인 마르다와 마리아에서의 마리아(예수께 향유를 부은 바로 그 여인), 일곱 귀신 들렸다가 풀려난 마리아(눅 11:2),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등등등….. 이중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바로 일곱 귀신들렸다가 풀려난 그 마리아 입니다. 물론 누가, 요한복음에 따르면 이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돌아가실때도 있었던 것 같고, 또 무덤에 간 여인들 중에도 포함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근데 영화에서의 모니카 벨루치는 분명 간음하다가 붙잡혀 예수님 앞에 왔던 여인으로 나옵니다, 이 여인은 이름이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요 8:1-10) 그냥 간음한 여인일 뿐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와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간음한 여인과 막달라 마리아를 일치시키는 인식은 꽤 오랫동안 자리잡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멜깁슨도 그런 인식을 하고 있었기에 예수님의 임종에 함께 하던 막달라 마리아와 간음한 여인을 동일한 배우로 연기하게 한 모양인데 성경상으로는 전혀 근거가 없습니다.
자연히 이야기가 성경과의 일치로 옮겨졌는데 대개 성경에 근거하긴 했지만 중요한 부분들에서 성경과는 무관한 내용들이 나타났습니다. 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 후에 뱀의 머리는 부수는 모습은 매우 상징적인 모습이기에 성경에는 없더라도 꽤 좋은 장면인 것 같습니다. 빌라도의 부인이 피를 닦을 수건을 주는 것도 상상할 수 있고요. 그러나 헤롯에게 넘겨진 후 다시 빌라도 앞에 올때 헤롯은 분명 빛나는 옷을 입혔다고 되어있지만(눅 23:11) 영화에서는 복장이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이건 뭐 작은 부분이지요. 십자가를 매고 골고다로 올라가시는 길에 한 여인이 수건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이 얼굴을 닦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건 전혀 성경에 나오지 않는 허구입니다. 다만 이 장면이 삽입된 이유는 충분히 추측 가능합니다. 전설에 따르면 베로니카라는 여인이 예수님에게 다가가서 수건을 드렸고 그 수건에 예수님의 얼굴이 그대로 찍혔다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에서는 이 전설에 의거하여 베로니카를 성인의 반열에 올리고 축일도 만든 모양이지만 성경상의 근거는 전혀 없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후 고통속에서 갈증을 호소하시는 장면에서 로마 군병이 해융에 포도주를 적셔서 창에 끼워 예수님의 입에 대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상에는 해융을 댄 주체가 누군지 모를 뿐 아니라 창이 아니라 우슬초에 매어 댑니다(요 19:29)
뭐 좀 더 있겠지만 제가 지적할 수 있는 내용은 이 정도입니다. 상당히 성경에 근거해 만들었지만 완벽하다는 말은 할 수 없지요. 이건 제 느낌이지만 성경과 더불어 가톨릭의 전승이 아마도 함께 주요한 원전이 된 인상을 받습니다. 베로니카의 이야기도 그렇고 어머니 마리아의 고통이 극명하게 부각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볼 때 그렇습니다. 예수의 고난 못지 않은 고통을 겪는 것으로 영화에서는 묘사되고 있는데 성경에 근거하기 보다는 가톨릭에서 성모를 존숭하는 상황이 투영된 인상이 짙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내린 후 그를 바라보는 마리아의 모습은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떠오르게 합니다. 주지하듯 미켈란젤로는 교황의 임명하에 가톨릭 성화 조각을 그리는 데 평생을 보낸 인물이죠. 그리고 시신의 발아래서 마리아가 불렀다는 노래는 가톨릭 작곡가들에 의해서 ‘스타바트 마테르’ 라는 곡명으로 아주 많이 작곡 되었습니다. 우리말로 하면 ‘눈물의 성모’가 되죠. 교황청 공식 인정 성가입니다.
멜깁슨이 아주 보수적인 가톨릭 신도임을 감안한다면 영화의 내용이 이렇게 된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Ann Arbor의 H형제)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저는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제 자신이 매우 주관적이고 논리에 약한 typical intuitive thinker 인 관계로 보다 비판적, 분석적인(^^) 평가를 원하신다면, 그것은 다른 분들께 미루고 싶구요. 간략하게 몇 가지만 나눌까요?
영화화 되었다는 것에 대해…
무엇보다도, 영화를 직접 눈으로 보면서 그간 말씀과 일상 속에서 가져온 ‘강렬하고 가슴 아프긴 하지만 여전히 추상적이었던’ 주님의 고통에 대한 느낌을 좀더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단순히 예수님의 신체적 고통을 드러내는 데에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 하여서 관객의 눈물을 짜낸다는 비판에는 동의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우선 성경말씀에 바탕하여 (난잡하게 말씀을 우롱하듯 이용해온 다른 영화들과 달리) 영화를 만들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말씀이 다시 한번 대중에게 선포되어지는 효과가 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고난받으시는 ‘피가 낭자한’ 장면마다 성경 말씀이 함께 시각화 되었고, 대부분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말씀이 우리 마음을 읽어내려가는 은혜가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영화 속 폭력성에 대해…
또한, 영화 속 장면들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too much bloody”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말에 대해서는 우리 죄가 바로 그만큼 무고한 피를 흘리게 하는 사악한 것이라고 대답해주고 싶습니다. 우리 죄성이 그만큼 끈질기고 추악하기 때문에 주님의 피흘리심도 끝까지 한방울도 남김없이 쏟으셔야만 했던 것 아닌가요? 그런점에서 눈물을 짜내기 위해 피흘림이 과장되었다거나 너무 폭력적이었다는 비판은 옳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어떤 자세로 관람하셨는지…
영화를 관람하기 전 어떤 마음을 가지고 극장에 갔는지도 영화의 소감에 상당한 변수로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한 자매가 있어요. 새벽기도할 때, 지난 2년간 무릎 꿇는 것을 본 적이 없었는데, 영화를 본 다음날로 부터 매일매일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고 눈물로 참회하기 시작하더군요. 저는 삼일 동안 이 자매의 전화와 이메일에 채근되어 등떠밀리다시피 극장에 갔습니다. ‘뭔가가 진짜 있나보다!’ 기대가 은근히 되었습니다. 그리고 극장에 가기 전, 공관복음의 말씀을 찬찬히 복습하고 갔습니다. 아예 은혜 받으려고 작정하고 갔는데 왠만한 거슬리는 것들이 있었다해도 크게 영향을 받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객관적 평가가 힘드네요. ^^ 일각에서는 영화에 대해 격찬을 너무 많이 듣고 기대를 하고 가는 바람에 오히려 기대에 못미쳤다는 이야기들도 하더군요.
한 가지 덧 붙인다면…
‘주님의 고난이 바로 내 죄때문’이라는 것을 잘 연결시키지 못할 것 같다는 지적도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나네요. 곰곰 생각해봤는데, 제 짧은 생각으로는 그 부분은 영화 제작자가 나서서 뭐라 말 할 수 없는 부분인 것 같습니다. 마치 저희 사회학과의 모든 교수님들과 대학원생들이 성경을 적어도 한번 이상 정독했지만, 이들 중 절대 다수가 하나님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처럼, 무엇을 본들 무엇을 들은들 믿음과 합하여지지 않았는데 무슨 유익이 있을까요? 저는 그냥 영화 끝나고 앉은 자리에서 기도하고 나왔습니다. “하나님, 이 자리에 앉을 사람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그저 그 사람의 마음이 ‘저 피가 내 죄를 사했다’고 인정하게 하옵소서.”
끝으로…
아래는 메신저에 연결된 친구들, 학우들, 성경공부 지체들에게 물어서 급하게 모아본 후기입니다.
21살 남. 대학생. NY. “파워풀하다. 그렇게 적나라하게 보여준 점이…영화에 대해선 잘 만들었다 못만들었다 등등.. 뭐라 할말은 없다. 왜냐하면 그게 사실이니까”
31살 여. 대학원생.MI. “I wasn’t as impressed as the “public”. It made me think about Jesus’ suffering but don’t think it had that much impact other than that. And I thought this as just Mel Gibson’s interpretation… and I feel that reading Bible has much more impact on me than seeing the movie.”
36살 남. 선교사. NY. “성령에 감동된 영화다. 타락해가는 미국 영화 산업에서 하나님의 일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되도록 많은 사람이 보고 감동 받도록 기도해주십시오.”
27살. 여. 대학원생. NY. “영화 속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 하신 말씀이 계속 마음에 남는다.”
29살. 여. 대학원. NY. “잔인하다고만 생각하면 잔인하지만, 그 안에서 보여지는! 하나님의 그 사랑을 볼 수가 있었다. 그 안에서 벌어지는 진정한 의미라고나 할까..”
30대 후반. 남. 청년회 담당 목사님. NJ. “가장 성경적인 영화다. 예수님의 고난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므로 초신자보다는 나일론 신자가 보면 좋을 것 같다.”
20대 후반. 남. 직장인. NJ. “일부에선 폭력적이라는 말도 있지만, 내 생각에는 기우다. 고난 주간에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적극 추천. 저도 고난주간에 다시 한번 볼 생각입니다. 크리스찬 문화가 세상 문화에 일침을 가했다고 생각한다. 성경적인 내용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는 것만으로도 높이 평가되었으면 한다. 성경적으로 돌아가면 가장 확실히 어필한다는 확신을 준 영화였다.”
27살. 남. 대학원생. (비기독교인) NY. “너무 헤비한 영화다. 진정이 잘 안된다. 왜 그렇게 유대인들은 잔혹하게 했는지 이해가 안된다. 난 아직 볼 준비가 안된 영화 같다. 괜히 본 것만 같다.”
28살. 남. 대학원. (비기독교인) NY. “정말 사람들의 잔인함 속에서…그 예수라는 사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사람은 왜 그래야만 했을까?”
33살. 남. 대학원. NY. “두가지 견해가 있을 수 있죠.하나는 아마도 실제적상황에 가까이 가고자 하는 제작자의 노력 의도로 본다면 그런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 자체에 상당한 성공을 한 영화라고 생각하구요,,.두번짼 예수님의 그런 사역의 고통이 제작자들의 영화틀속에 고정화되어 또다른 편견이 생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이를테면 예수님의 육체를 통한 고통을 잘 표현했다고 할 수 도 있지만 실제로 낮은 곳에서 더 천한 피조물들이 예수님께 가하고자 하는 정신적인 모멸감과 학대 그것을 능히 감당하셨다는 면이 오히려 더 클수도 있고 육체적인 고통보다는 그러한 정신적 고통이 더 컸을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
(NY에서 K자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