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은실] 소그룹의 힘: 문제 해결, 리더십 개발

 “교육부가 제대로 준비가 안 돼 교회가 더 부흥을 못합니다.”

 제직회에서 교육부 보고를 하던 자리에서 어느 나이 많은 집사님이 내게 던진 말씀이다. 미국의 경우, 신학교가 없는 작은 도시의 이민교회에서는 담임목사님 외에는 부교역자를 찾기 어렵다. 십여년 전 내가 섬기던 교회도 작은 도시에 터를 잡고 개척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는 교회였다. 그런데 갑자기 교인이 늘어나면서 아이들의 수도 계속 늘어나 교육부 전체를 평신도 여집사 한 사람이 유치부부터 청년부까지 각기 다른 연령의 아이들을 예배 인도부터 성경공부까지 모두 감당해야 했고, 그것이 교인들 눈에는 아무래도 역부족으로 보인 듯했다. 솔직히 스스로도 교회의 부흥이 반갑기보다는 아이들이 더 많아지는 것이 두려웠다. 주일마다 몇 개의 예배와 성경공부를 인도하느라 너무 피곤한 탓에 큰 부담으로 주일을 맞이하곤 했다. 교육부 사역자의 증원을 요구하는 교인들의 요구는 계속 커져 갔지만, 부교육자를 청빙할 형편도 안 되는 터에 평신도 리더들은 남들 눈에 띄는 성가대나 찬양팀, 안내나 어른들 사역 쪽으로는 많이 관심을 보이고 지원을 하면서도 아무도 알아주지도 않고 아이들에게 시달려야 하는 교육부는 영어에 자신이 없다는 핑계로 동참하는 것을 꺼렸다. 그러면서도 학부모와 교회의 제직들은 모이기만 하면 피상적인 충고와 대책을 늘어놓으며, 해결을 위한 도움보다는 지금 무엇이 잘못되어 가고 있는지를 비판하는 미팅을 계속하고 있었다.

 몸도 피곤하고 마음도 많이 상한 채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며 기도하던 중, 당시 주말마다 인도하던 청년부 리더들의 소그룹 모임이 이 문제를 함께 풀어주었다. 그 주에서 가장 큰 대학을 다니는 학부 학생과 대학원 학생들이 중심이 된 청년대학부는 수가 점점 늘어 많은 학생이 성경공부에 나오고 있었다. 전체 모임은 내가 인도했지만, 성경공부 시간은 인원이 너무 많아져서 여러 개의 소그룹으로 나누어 각기 리더를 세우고, 그 리더들과 정기적으로 모여 훈련과 함께 여러 가지 일을 의논하는 형태로 운영하고 있었다.

 교육부의 큰 문제를 처음 그들에게 나누고 기도를 부탁할 때는 그저 답답한 마음에 함께 기도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솔직히 큰 기대는 없었다. 그런데 합심하여 기도를 한 후, 그 청년들은 교회가 당면한 교육부 문제를 정확히 진단하고 건설적이고 긍정적인 의견들을 나누기 시작했다. 필요한 부분이 무엇인지 먼저 정리하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원들을 다양한 시각에서 발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인적 자원의 한계 속에서 많은 필요를 충족시킬 최고의 해결책을 찾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론과 대책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때 그 다섯 명의 리더가 각기 자신의 경험과 은사에 따라 각 부서의 담당자로 자원했다. 유치부, 유년부, 중등부, 고등부, 대학부를 부서별로 맡아 책임을 지고 사역하기로 한 것이다. 각 부서를 맡은 사람이 부서에 필요한 선생님을 청년부와 대학부, 장년들 중에서 발굴하고, 내가 세미나 등을 통해 그분들에 대한 정기적인 훈련 프로그램을 맡아주면, 각 부를 책임진 담당자들이 선생님들을 돌보고 양육하면서 그 부서에 필요한 활동들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시스템을 마련할 수 있었고, 이렇게 하여 연령별로 필요한 행사를 통해 모든 부의 교육 프로그램을 활성화하게 되었다. 나는 담당자들과 정기적으로 모여 말씀 앞에 서로를 훈련하고, 사역을 검토하고 격려하며,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통해서 교회의 열악한 교육상황을 얼마나 놀랍게 바꾸시는지를 목도할 수 있었다. 모든 부서에 젊고 창의적인 청년 선생님들이 헌신적으로 섬기게 되었다. 그때 세워진 청년 리더들은 지금 건강한 평신도 사역자로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기둥과 같은 역할을 성실하게 감당하고 있다.

 심각한 갈등이나 어려운 문제에 부딪혔을 때, 한 개인의 지혜와 능력으로는 그것을 헤쳐 나가는 것이 무척 난감하고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소그룹이 각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창조적인 의견과 각자 가지고 있는 은사들을 동원하여 문제를 대하게 되면, 탁월하고 객관적인 해석을 찾게 되고, 모두 주인의식을 가지고 함께 찾은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데 헌신하게 된다.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모두가 함께 일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함께 일하는 소그룹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경험하게 된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니라.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나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전도서 4장 9절-12절) 

 리더십 개발

 좋은 소그룹 인도자는 하나님뿐만 아니라 그룹원들과 좋은 관계를 형성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의 본을 보이고, 강의하여 주입하는 학습법이 아니라 각자가 스스로 발견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자이다. 이런 인도자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놀랍게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소그룹 사역의 성패는 프로그램의 좋고 나쁨이 아니라 인도자들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 말씀과 사람들을 사랑하고, 성령님과 하나님의 말씀과 또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며 늘 기도하는 사람이 좋은 소그룹 인도자가 될 자질을 갖춘 사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길 잃은 영혼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일에 열정을 다하고, 늘 복음을 증거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 모든 것들과 함께 인도자가 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임무는 다른 리더들을 양육하는 일이다.

 그것은 소그룹 리더는 소그룹 안에서 가장 잘 개발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리더십의 개발은 소그룹이 기초가 되어야 한다. 소그룹 사역의 생명은 소그룹원들의 영적 성장뿐만 아니라 재생산과 증식을 통하여 교회가 수적, 질적으로 성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그룹 사역의 성패는 유능한 인도자들을 발굴하고 양성하여 새로운 소그룹에 투입하는 전략을 효과적으로 수립하는 데 있다.

 소그룹 안에서 소그룹 인도자들을 가장 잘 개발할 수 있는 이유는 소그룹 경험을 통해서, 또 이미 세워진 인도자들의 모범을 보면서 강의로 배울 수 없는 많은 것들을 단번에 몸에 익히고 배울 수 있을 뿐 아니라, 먼저 세워진 인도자의 친밀한 멘토링을 지속적으로 받으며 소그룹을 인도할 때 필요한 중요한 지침들을 반복해서 학습하는 훈련을 장기간에 걸쳐 확실하게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 소그룹 사역을 위해 인도자들을 세워야 할 때, 목사님이 몇 번의 훈련을 하신 후 그동안의 신앙생활로 대강 평가하여 소그룹에 바로 투입하는 방법은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먼저 목사님과 준비된 사람들이 함께 소그룹 모임을 충분히 가져서 목사님이 소그룹을 어떻게 운영하는지, 멘토링의 모범이 무엇인지 경험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그분들이 소그룹을 시작하도록 돕는 한편, 그분들이 다른 리더십 개발을 위해 부인도자를 선임하여 그 사람을 멘토하고 양육하게 하여 필요시에 목사님께서 인도자로 인준하는 방법이 가장 건강하게 소그룹 인도자들을 세워가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러스티 칼웰(Rusty Calwell)은 멘토링의 공식을 “내가 하면 당신은 보십시오. 그리고 도우십시오. 당신이 하면, 내가 돕습니다. 그리고 봅니다.”라고 표현했다.

 이 공식을 리더들에게 설명할 때 나는 UCLA에서 경험한, 개구리를 물에 삶는 실험과정을 설명해 주며 이해를 돕는다. 개구리를 처음부터 끓는물에 넣으면 바로 튀어서 도망가기 때문에 먼저 찬물에 넣어야 된다고 한다. 그리고 그 찬물의 온도를 0.036도씩 올려서 개구리가 물의 온도에 익숙해지도록 하면, 그 물이 끓어도 개구리가 아주 편안한 상태에서 반항 없이 죽는데, 그 시간은 2시간 30분 후라고 한다.

 누구든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바로 소그룹 인도자가 되라고 하면 개구리가 튀어 나가듯 거절한다. 그래서 먼저 찬물에 넣는 단계가 필요하다. ‘제가 할 때 그냥 보시기만 하시지요.’가 바로 그 단계이다. 이 단계를 통해 그들은 인도자가 어떻게 인도하고 모든 상황에 대처하는지 관찰하게 된다. 그후 ‘제가 도움이 좀 필요한데 저를 도와주시겠어요?’라는 단계로 넘어가는데, 이 단계는 다시 몇 단계로 나뉜다. 처음에는 머리를 안 써도 되는 가벼운 일들을 부탁한다. 그렇게 몇 개월을 함께하며 교재를 몇 권 정도 공부하고, 또 인도자 훈련 워크숍을 받게 한 후에 다음 단계로 넘어가서 한 달에 한 번이나 두 번 정도 소그룹을 인도해 달라고 부탁한다. 이때 준비에 필요한 모든 것을 함께 돕겠다고 하며 반드시 지시가 아니라 부탁하는 자세로 해야 한다. 그리고 몇 달 동안 그 사람에게 인도할 수 있는 기회를 자주 주면서 그때마다 건설적인 피드백을 준다. 어느 정도 준비가 되고, 또 소그룹 인원이 너무 많아져 분가를 해야 할 때가 되면 ‘당신이 하면 내가 돕습니다. 내가 봅니다.’의 단계로 넘어가서 그 사람에게 힘이 되어 줄 소그룹원들을 맡기고, 기존의 리더가 조금 어려운 사람들을 맡아서 분가하도록 한다. ‘너무 두려워하지 말고 이제 인도해 보세요. 제가 옆에서 늘 지켜보며 필요한 일이 있으면 항상 돕겠습니다.’ 분가 후에도 지속적으로 돕고 보살펴야 하므로 멘토링의 금기사항과 권장사항을 기억하여 좋은 멘토가 되어 주어야 한다. 

멘토링의 금기사항 

1.    지배하지 않기: 자신이 선임 인도자라고 하여 자기 생각대로 따르는 것이 영적 질서를 지키는 일인 것처럼 교육하거나 강요해서는 안 된다. 존경받는 리더십은 강요로 얻어지는 절대 복종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투명하고 진실한 삶의 모습을 통해 상대방의 마음을 감동시켜 함께 목표를 이루어 나가게 하는 힘이다.

2.    경쟁하지 않기: 혹시 소그룹원들이 자신보다 새로 세워지는 사람을 더 좋아하거나 따르지 않는지 노심초사하며 자신이 더 유능한 리더임을 보여주려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다른 소그룹 인도자들과 양적 부흥을 놓고 서로 경쟁적인 태도를 보이지 말아야 한다. 진정한 부흥은 소그룹원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과 친밀해지는 가운데 그들의 삶이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3.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기: 새로 세워진 인도자가 선임 인도자인 자신과 다른 의견을 내놓거나 자신의 의견에 반대할지라도, 감정적으로 받아들여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반목하고 대립해서는 안 된다. 자신에 대한 비판을 감사함으로 받고 잘못을 인정하고 시정하려는 태도야말로 많은 사람으로부터 더한 존경심을 일으키게 하는 겸손하고 진실한 리더의 태도다.

멘토링의 권장사항 

1.    모범 보이기: 멘토링에서 가장 중요한 원리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좋은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 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상대의 말보다는 행동을 보며 따라한다. 그러므로 선임 인도자들은 항상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고, 소그룹에서 인도자로서 좋은 모범을 보이도록 하여야 한다.

2.    영적 지도력 발휘하기: 영적 지도력이란 멘토가 모든 상황에서 자신의 지식이나 경험으로 결정하지 않고, 늘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다른 사람들을 이끄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기도와 말씀을 떠나 외적인 환경과 상황으로 판단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도록 늘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

3.    후원하는 태도: 소그룹 안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어느 자리에서도 양육하는 사람들을 세워주고, 긍정적인 격려와 구체적인 칭찬을 주며 후원하는 멘토는 지치고 두려운 발에 힘을 실어주고, 포기하지 않고 용기를 갖고 나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리더이다.

 지금 이렇게 평신도 소그룹 사역자로 감히 쓰임을 받을 수 있게 되기까지 나를 길러주신 많은 영적인 선생님들, 멘토들이 계셨다. 어릴적, 무슨 일을 하더라도 정말 잘한다며 박수 치며 칭찬해 주시고 마음을 다해 내 생각을 경청해 주신 아버지가 따뜻하고 존경스러운 영적 리더셨고, 처음 강의를 위해 길을 떠나던 날, 다니며 배고플 때 밥이라도 사먹으라며 용돈을 주신 담임목사님을 잊을 수 없다. 목사님은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을 두려워하던 나를 일으켜 교회에서 새벽예배나 수요예배를 인도할 수 있도록 세워주시고 자신감을 키워주셨을 뿐 아니라 앞으로 세계적인 강사가 될 거라며 늘 비전을 불어넣어 주셨다. 그리고 지금 대표를 맡고 있는 커피 브레이크 사역의 전 대표는 지금도 영적인 멘토로 격려와 후원을 아끼지 않으시고, 늘 기도하시며 부족한 사람을 세워주시고 계신다.

 성경적 리더십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과 불신자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상호 사역의 기회로 인도하는 목적을 갖고 있기에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자신이 주님과 친밀하고 성숙한 관계를 유지하고,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늘 인식하며, 다른 사람을 세우려는 비전 가운데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소그룹 사역은 교회 목회의 전부도, 목회의 만병통치약도 아니다. 그저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의 일부를 이루는 겸손한 도구일 뿐이지만, 소그룹 환경을 통해서 예수님의 생명의 복음을 각기 처한 삶의 현장에서 바로 적용할 수 있도록 전하는 소중한 사역이기도 하다. 소그룹 사역을 통해 사랑과 권면, 서로 동역함의 필요가 아름답게 나누어지고 채워질 수 있는 것이다.

소그룹 사역의 관건은 잘 훈련된 사역자들이므로 교회는 리더십 개발에 주력하여 시냇가에 심어진 나무처럼 건실한 소그룹 사역자들이 소그룹 안에서 많이 세워지도록 해야 한다.그래서 새들백 교회나 윌로우 크릭 교회처럼 소그룹 중심의 교회들이 수없이 일어나서 이 마지막 때에 많은 영혼을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는 데 귀하게 쓰임 받는 아름다운 주님의 교회들이 되기를 소원한다 
  

[최주희] 신앙생활의 본질

2008년 후반기부터 써온 ‘최주희의 사랑이야기’를 이제 마무리하려 한다. 코스타 홈페이지 담당자로부터 ‘사랑’에 대한 글을 요청받은 후 처음에는 이웃 사랑과 하나님 사랑에 대한 글을 많이 썼다. 하지만 젊은이들의 혼전 성관계가 독버섯처럼 퍼지고 불륜과 욕심으로 가정이 무너지는 심각한 현실 앞에서, 올바른 사랑이 무엇인지 결혼과 가정의 기초가 무엇인지 강조하였다. 이제 마지막 글을 쓰려고 하니, 마음 깊은 곳에서 신앙생활의 본질이 무엇인지 나누고 싶어진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건전하고 건강하게 만들며 주님 나라 위해 이 땅에서 선한 열매 맺는 그리스도인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 기독교는 신앙생활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균형이 많이 깨어진 것 같다. 기도만 열심히 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확신만 하면 그 사람은 신앙이 좋은 사람이 된다. 삶에 있어서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넉넉함도, 섬김도 없는데 기도는 몇 시간 한다. 기도의 내용은 고난 극복, 물질 채움, 욕심(비전 혹은 꿈이라고 표현하지만) 성취가 주를 이룬다. 우리는 주인이고 하나님은 종이 되셔서 부지런히 우리를 섬기셔야 한다. 하나님은 항상 사랑과 은혜가 넘치셔서 우리의 요구를 반드시 들어 주셔야만 하고 이 일에 급급한 분이라고만 생각한다. 기도는 하는데 삶은 이기적이고 얌체 같다. 그런데도 믿음은 좋아 보인다.

신앙 좋다고 간주되는 사람의 또 다른 특징은 부지런히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성경 곳곳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분명한 음성, 즉 ‘거룩과 사랑’에는 관심이 없으면서 선택의 기로에서 구체적인 결정이 필요한 상황이 되면 부지런히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며 그분의 음성을 들으려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분명한 뜻인 거룩과 사랑은 우리에게 부담을 주고 희생을 요구하지만, 개인적인 삶의 선택 기로에서는 하나님이 결정해 주시면 안전하고 유익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며 종종 확신에 차기도 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신앙생활의 본질은 ‘기도를 많이 해서 하나님 음성 듣기’가 아니다. 신앙생활의 본질은 ‘하나님을 경외(fear & respect)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공경하는 것이다.

천지를 창조하시되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며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신 권세와 능력의 하나님을 우리는 공경해야 한다(사40:26). 그 하나님이 타락한 인간의 죄악에 진노하시고 심판하셔도 마땅한데, 인간의 몸을 빌어 이 땅에 오시고 친히 우리 죄악을 담당하신 그 큰 사랑을 공경해야 마땅하다. 우리에게는 은혜로 거저 주시는 구원이지만, 하나님 입장에서는 모진 고난 다 겪으시고 생명까지 버리신 엄청난 희생이다. 우리는 이 사랑을 단순화시키거나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애써 늘 기억하며 이로 인해 하나님을 공경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구원받은 우리들도 이 땅에서의 삶을 놓고 하나님과 반드시 계산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혈질인 베드로도 그의 서신에서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1:17)고 권면하셨다. 더욱 더 두려운 것은 하나님 앞에 우리의 모든 행위가 숨김없이 다 드러난다는 것이다(전12:13-14, 눅12:2-5; 롬14:11-12, 고후5:9-10, 벧전1:17).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믿음이 없어서 생기는 부정적인 감정이 아니다.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만큼 그분을 두려워해야 한다.(눅12:5)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기장 중요하고 기본 되는 본질임은 성경 곳곳에서 강조하고 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을 때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라고 말씀하셨다(창22:12). 행함 있는 믿음의 출발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여호와께서 호렙산에 선 모세에게 “나를 위하여 백성을 모으라 내가 그들에게 내 말을 들려서 그들로 세상에 사는 날 동안 나 경외함을 배우게 하며 그 자녀에게 가르치게 하려 하노라”고 말씀하셨다(신4:10). 우리가 즐겨 인용하는 시편 103편 말씀의 내용을 보자.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시며…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기심 같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며… 그런데 이 모든 내용이 적용되기 위해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이어야만 한다(13, 13, 17절).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조건에는 관심이 없다. 구원받기 위해서는 회개(뉘우치고 돌이킴)라는 조건이 있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바른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는 조건이 있다. 하나님은 그분을 경외하는 사람이나 교회를 받으신다(행9:31, 10:2, 22, 35).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남편과 아내만이 행복한 가정을 만들 수 있다(엡5:21). 지식의 근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다(잠1:7).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치유의 광선을 발하신다(말4:2).

지금 우리는 입술로는 하나님을 많이 찾고 존경하는 것 같은데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있다(막7:6). 오히려 하나님을 가볍게 생각하고 수단으로 삼으며 우습게 본다. 그저 자기중심적으로, 자기 성격대로, 자기 가치관대로 신앙생활 할 뿐이다. 결국 그리스도인들의 정신세계는 이중생활 속에서 황폐화 되어가고 있다. 심지어 믿음 좋아 보이는 사람들이 우울증, 강박증, 망상, 불안증을 겪고 있다. 온갖 성적인 범죄와 투명하지 않은 돈 문제 그리고 욕심이 그리스도인들을 침몰시킨다.

이제 우리는 돌아가야 한다. 하나님을 믿은 지 몇 년 되었고, 교회에서 어떤 활동을 하며, 무엇을 섬기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 숨김없이 우리의 모든 삶과 생각을 드러내어 점검 받는 것부터 시작하자. 두려움 가운데 이 일을 이루자. 그리고 그분을 마음으로 공경하며 말씀하시는 교훈에 순종하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의 본질이다. 이 본질 위에 가정이 있고 직업이 있고 사역이 있다.


[이유정] 외로웠던 첫 크리스마스

첫 번째 크리스마스는 부산하기 이를 데 없었다. 총독 구레뇨는 명을 내려 인구조사를 실시했다.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은 자신이 태어난 고향으로 돌아가서 호적을 등록해야 했기에 요셉과 마리아도 유대의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마을로 올라갔다. 갑작스레 방문한 수많은 여행자들 때문에 숙소를 찾다 못해 결국 마구간에 기거해야 했다. 그 초라한 말구유에서 인류를 구원하실 왕 예수가 탄생한 것이다. 왕의 탄생 치고는 외로움 그 자체였다.

당시 이스라엘은 선지자 없이 400년을 지내던 때라 메시아 대망사상(Messianic Expectation)이 그 어느 때보다 강세였다. 한 예로 메시아의 탄생지가 다윗의 동네라는 예언 때문에 베들레헴에는 결혼하지 않고 메시아를 낳겠다는 처녀가 수백 명이었다는 전례도 있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메시아 대망 기운이 폭발하기 일보직전이던 사회 분위기에 비해 정작 아기예수 탄생에 대한 이들의 반응은 참담할 정도로 외면 일색이었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네 종류의 반응을 발견한다. 첫째, 매우 적대적인 경배자 헤롯왕이다. 헤롯왕은 박사들에게 말했다. “아기를 찾거든 내게도 알려 주시오, 그러면 나도 가서 그분께 경배하겠오.” 그러나 헤롯의 속셈은 다른데 있었다. 아기가 발견되자마자 죽일 계획이었다. 그분께 경배하겠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에 불과했다. 헤롯은 다윗 왕 이래 가장 강력한 왕이었지만 당대에 가장 악독한 왕이었다. 자기 지위를 넘보는 자들은 가차 없이 죽였다. 탱크로 시위대를 깔아 뭉게고, 그들에게 로켓을 발사했던 루마니아의 차우체스쿠 같은 사람이다. 오늘날에도 자신의 명예와 권력 때문에 예수를 핍박하는 자들이 있다.

둘째, 자신의 지위 때문에 회피한 경배자 종교지도자들이다. 그들은 성경에 대해 해박한 자들이다. 메시아가 태어날 장소까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헤롯왕이 질문했을 때 일말의 지체 없이 관련 성구(미가 5장 2절)를 언급하며 베들레헴이라고 답했다. 그러나 현재 자신이 누리고 있는 기득권과 부에 대한 집착 때문에 예수를 경쟁상대로 삼았다. 한해를 살면서 자신의 기득권과 욕심에 눈이 멀어서 예수를 부인하고 외면한 한 일은 없었는가?

셋째, 무관심으로 회피한 유대 백성들이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새로 태어난 유대의 왕께 경배하러 왔다는 소문이 온 나라에 퍼졌다. 그렇지 않아도 메시아 기대감으로 들떠있던 백성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헤롯왕의 시기심으로 자신에게 돌아올 박해와 손해를 두려워했기 때문일까? 정작 메시아 예수를 찾아 경배하는 일에는 철저하게 무관심했다.

이들과는 대조적으로 동방박사들은 최고의 경배자들이다. 먼 나라에서 별 하나 의지해 갖은 고생 끝에 메시아를 찾았다. 아기 예수께 드린 예물도 아무런 대가나 이익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더욱이 황금, 유향, 몰약은 범상치 않은 선물이다. 황금은 가장 귀중한 가치를 의미한다. 이것은 왕에게 적합한 예물이다. 유향은 아라비아나 아프리카에 있는 유향나무의 분비액을 말려서 만든 향으로 향료나 제사 때 사용되었다. 이것은 제사장에게 적합한 예물이다. 몰약은 시체에 바르거나 사형수들의 마취제로 사용되었다. 이는 예수의 죽으심을 예표하는 선물이다. 이 예물들은 각각 그리스도의 왕권과 제사장직과 죽으심을 상징한다. 어떻게 동방박사들이 이런 예물을 준비했는지 놀랍기만 하다. 성령의 감동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경배를 마치고 이들이 한 일은 헤롯의 부탁을 무시하고 꿈속에서 본 지시대로 몰래 유대를 빠져나갔다. 참으로 사심 없는 진정한 경배자들이었다.

오늘의 크리스마스는 아기예수에 대한 경배보다는 목적과 대상도 없이 떠들고 흥청거리는 즐거움과 쾌락이 주를 이룬다. 사람들은 자신의 바쁜 일 때문에, 자신의 안락과 쾌락 때문에 예수 경배를 뒷전으로 미룬다. 동방박사들과 같은 참 경배자보다 헤롯이나 유대 종교 지도자들, 그리고 백성들 같은 거짓 경배자들이 더 많은 세상이다. 성탄이 3일 남았다. 우리를 위해 자신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아기 예수의 마음을 더 이상 외롭게 하지 말자. 아무런 사심 없이 경배의 최고봉을 보여준 동방박사를 본받아 아기 예수께 가장 귀한 예물을 준비하자.

– 이유정 (한빛지구촌교회 예배목사)

[채영광] Living out The Dream (1) – 정체성 속에서 꿈이 태동한다.

2010 KOSTA/USA Youth Conference에서 있었던, 채영광 박사의 선교적 삶(Living out The Dream) 세미나입니다.

채영광 (youngkwang.chae@gmail.com)


우리는 우리 모두가 꿈꾸는 그런 삶이 있습니다. 그 꿈이 실현되는 그 날 우리는 행복해질 것이며 우리의 삶은 성공적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꿈이 나의 것인지 하나님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정확히 말해, 내가 무엇을 위하여 공부하는지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이 번 세미나를 통해, 학교에서, 교실에서, 지금 이 시간 내가 딛고 있는 이 곳 미국 땅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멋진 Missionary로 살아갈 수 있는지 다 같이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하나님의 꿈이 비로서 내 꿈이 되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이미 땅끝의 선교사로 살아가고 있음을 깨달을 것입니다.


서론

Living out My Dream

2010년 시카고 의대 MD PhD 통합 과정을 20세의 나이로 졸업한 쇼 야노군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나는 지금 서른이 넘은 나이로 병원에서 전공의로 일하고 있지만, 그는 이제 갓 이십대 초반의 나이로 전공의로 일하고 있다. 시카고에서 자란 그는 한국인 어머니와 일본인 아버지 밑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모두 홈스쿨링을 하고 9세에 로욜라 대학에 입학하고 12세에 시카고 의대에 입학해서 이미 한국과 미국에서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2세에 쇼팽을 연주하고 3세부터 작곡을 했다는 믿기지 않는 신동이라고 했다. 그의 인터뷰를 보면서 그가 인격적으로도 참 성숙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남들보다 일찍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으니 뇌 연구를 통해 인류에 공헌하고 싶다고 하면서, 앞으로 어떤 꿈이 있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I am living out my dream now.” 이 말이 상당히 오랫동안 나의 뇌리에 남았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있다면 자기 꿈을 살아내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남들이 성취하지 못한 것들을 가지고, 남들보다 빠른 속도로 인생을 살아가는 그 청년이  부럽기도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부담스러운 주변의 관심은 차지하고서라도 그를 극성 아시아계 부모의 희생양으로 바라보는 부정적인 시각과 그를 외계인 취급하며 인터뷰 때마다 노벨상이 목표가 아니냐고 다짜고짜 묻는 미디어의 냉소적인 태도 때문에도 참 힘들었겠구나 하는 마음도 들었다. 그래서일까? 오프라 윈프리 쇼나 제이 레노 쇼의 거듭된 출연 요청도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그 모든 세간의 관심 속에서 그 청년은 자신이 꿈꾸는 삶을 살고 있기에 행복하다고 했다. 행복이란 과연 무엇일까? 꿈이 실현되면 행복할까? 과연 나에게는 그런 꿈이 있는가? 만약 없다면 나에게 행복이 어떻게 찾아올까? 꿈이 있다면, 그 꿈은 어떻게 생겼는가? 여러 가지 질문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청년은 지금도 매 주 고전을 몇 권씩 읽으며, 고전 중의 고전, 성경은 어려서부터 이미 여러 번 완독했다고 한다. 나는 그가 크리스천인지는 모른다. 그가 말하는 그의 꿈, “my dream”은 과연 무엇일까? 꿈을 단순히 ‘자기가 하고 싶은 일’로 정의해도 좋은 것일까? 꿈을 살아내긴 하되 ‘어떤 꿈’을 살아내야 하는가가 더 중요할 지 모른다. 또 ‘누구의 꿈’을 살아내야 하는 것인지 생각해 볼 일이다.

본론

행복의 조건은 무엇인가?

청소년들에게 세 가지 질문을 하면 그들을 고민을 어느 정도 다 알 수 있다고 한다. “공부 잘해?”, “여자친구, 남자 친구는 있어?”, 그리고 “앞으로 뭐 할거니?” 가 그 질문들이다. 설명할 필요도 없는 공부로 인한 스트레스, 한창 이성에 대한 관심이 넘치는 시기이니만큼 좋아하는 이성에 대한 고민, 그리고 나중에 어떤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진로에 대한 걱정이 이 세 질문에 대한 대답 속에 고스란히 담긴다. 돈이 곧 힘이 되는 미국 이민사회에서 또 한가지 질문을 추가해본다. “너희 집 잘 살아?” 자신의 교육을 위해 아낌없이 외제차 몇 대 정도되는 어마어마한 사교육비를 투자하는 기러기 부모님도 계신 반면, local business를 하시며 어렵게 자녀들을 뒷바라지하시는 이민자 부모들도 있다. 두 경우 모두 그들이 ‘부모님의 우상’이라는 것도 청소년들은 안다. 미국 땅에서 자식 농사 잘 지어 남 부럽지 않은 멋진 가문을 만들어 보고자 하는 보모님의 부담스러운 기대를 모르는 청소년들이 있다면, 그들은 아직도 한참 더 철이 들어야 한다. 청소년들에게 부러워할 모든 것을 가진 청년 쇼군의 이야기는 신선한 자극제가 되기보다 어느 별나라 이야기로, 아니면 잘못하면 부모님이 인용할 ‘짜증나는’ 예화 소재거리로 인식되기 쉬울지 모른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내가 공부를 잘하게 되고, 맘에 드는 이성친구가 생기고, 넉넉한 부모님의 후원 아래 보장된 미래가 있는 진로가 결정되면 나는 과연 행복해질까?

고민의 뿌리는 어디에 있을까?

먼저 위의 질문들에서 드러나는 현재 내 고민들의 근본 뿌리가 무엇인지 생각 보자. 계속되는 고민은 결국 우리를 우울의 숲으로 인도한다. 고민을 더 한다고 해결책이 보일 것 같지 않다. 단언하건대, 우리 고민의 원인은 ‘자기 사랑’에 있다. 내 자신에 대해 많은 기대를 하고 있는 만큼 더 큰 상처가 생길 수 있다.  컷트라인이 있을 때 합격과 불합격이 있기 마련이다. 목표가 없다면 좌절도 없다.  그런데 목표, 기준치, 컷트라인이라는 것이 내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가치가 있기에 생긴다. 내 안에 내가 정해놓은 목표가 무엇인가? 내 성적은 이 정도는 되어야지, 내 여자친구는, 내 남자친구는 이 정도는 되어야지, 내가 성공하려면 적어도 이 정도 집안 배경은 있어야 하는데, 내가 좋은 대학 가려면, 이 정도 스펙을 쌓아야 하는데, 내가 나중에 성공하게 되면 적어도 이 정도 차를 사고, 이 정도 집에서 살아야 하는데, 등등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자신이 정해놓은 목표를 향해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또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의 결과를 얻을 수 있는 무엇인가를 추구한다. 고생을 많이 하면, 내 손해이다. 누구나 고생을 최소화하여 가장 많은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는 직업을 선망하게 된다. 꼭 내가 만든 목표가 아니더라도, 주변에서, 부모님이 우리에게 심어준 목표일 수도 있다. 우리 아들, 우리 딸은 적어도 미국에서 이 정도 대학은 들어가주어야 한다. 부모님의 기대치가 내 기대치로 나도 모르게 바뀌었는지도 생각해 볼 일이다. 많은 경
우, 내가 무엇인가를 성취함으로써 나의 가치를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한다.

내 꿈은 어디서 생긴 것일까?

이제 가만히 생각해보자. 내 꿈은 어디서 온 것인가? 내 꿈이 세상이 불어 넣은 것인지, 주님이 주신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 부지불식간에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부모님과의 대화에서, 또는 미디어의 영향 속에서 생겨난 꿈이 있을 수 있다.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보자.  나에게는 없는 것을 친구는 가졌을 수 있다. 내게 없는 미국 시민권이 친구에게 있다. 나보다 영어를 훨씬 잘 한다. 나보다 학교에서 인기가 있고, 나보다 학교 성적이 좋다. 나에게 없는 무언가를 부러워하면서, 우리의 꿈이 자라났었을 수 있다. 내가 없는 것을 가지기 위해,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형성된 방어기제적 꿈도 있다. 연예인이 되고 싶은가? 억대 연봉을 받고 싶은가? 이렇다 할 꿈이 없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자라서 막연하게 하고 싶은 일이 있는가? 좋은 집에서 좋은 차를 타고 다니면서 마음껏 세계 여행을 하고 싶은가? 좋은 옷을 입고 멋진 스타일의 머리를 하고, 예쁜 핸드백을 유행에 맞게 구입해서 들고 다니고 싶은가?  좋은 독일차를 몰고 다니며, 고급 레스토랑에서 품격 있는 사람들과 교제를 나누고 싶은가? 그런데, 현실을 보니 부자들이 자기 하고 싶은 것들은 마음대로 다 하면서 편하게 사는 것 같은가? 그래서,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면, 내 적성에 크게 어긋나지만 않는다면, 어떤 직업이든 상관 없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지금 하고 싶어하는 것들이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가 생각해보자. 물론 이 답은 각자 한 사람 한 사람마다 다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한 가지 질문을 먼저 던지고 싶다. 우리 인생 가운데, 하고 싶은 모든 일들 가운데, 그 중심에 하나님이 계신지를 묻고 싶다.

꿈인가?  본성인가?

이제 ‘꿈’을 막연히 하고 싶은 일 정도로 정의해도 좋을지 생각해보자. 적어도 ‘꿈’이라고 한다면, 내 본성이 하고 싶은 대로 내 맡기는 것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마음껏 먹고, 놀러 다니고 싶은 곳을 거침 없이 다는 것을 꿈이라고 하기엔 미안하지 않은가? 예쁜 사람, 잘 생긴 사람을 만나 사귀고 결혼하는 것을 꿈이라고 하지 않는다. 꿈이라면, 적어도 꿈을 생각하면 가슴이 뛰고,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그런 것이 아닐까? 이제 꿈과 본성을 구별해보자. 꿈은 나의 본성에 역행하는 것이다. 공부가 자연스럽게 삶의 일부로 느껴지는가? 너무 쉽게 느껴지는가? 아니면, 공부를 하기 위해, 마음을 굳게 먹고, 계획을 짜고, 의지를 가지고, 늘 열심히 하려 노력을 하고 있는가? 누가 나에게 불쾌한 일을 하면, 그 사람 험담을 하고 싶어지는가 아니면,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며 기도하게 되는가? 크리스천인 우리들은 꿈을 이야기할 때, 적어도 우리의 본능에 우리의 몸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을 걸, 그 이상의 가치를 말해야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러한 꿈을 어떻게 가질 수 있는 것일까?



정체성에서 꿈이 생긴다.

온전한 꿈은 내 정체성이 분명해질 때 생긴다. 정체성이 먼저이고 꿈은 나중이다. 대한민국에 대한 자긍심이 없으면 애국자가 될 수 없는 것과 같다. 독립운동가들은 모두 대한민국에 대한 통렬한 역사의식과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불과 50년 전 전쟁의 잿더미 위에서 배고픔과 가난 속에서 허덕이던 변방 국가였던 한국이 이제는 G20 세계 정상 회의의 의장국이 되었다. 세계에 유래 없는 기적의 주인공 대한민국,  전 WHO 사무총장(Secretary General)도, 현 UN 사무총장도 한국인이다. 인터넷 인프라와 모바일 통신 기술에서 대한 민국을 따라올 국가가 없다.  한번도 본선 진출, 아니 1승을 올려본 적이 없는 한국 축구가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4강의 신화를 이룩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울렁인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정체성이 있다면, 대한민국을 사랑하게 되고, 걱정하게 되고, 나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게 되어 있다.
모국을 떠나면 누구나 애국자가 된다고 한다. 내가 10살 때 델라웨어의 한 초등학교를 다녔다. 그 때 한국을 아는 미국 친구들은 한국에서 입양된 친구 빼고 아무도 없었다. 한국에서 올림픽을 개최하게 되었는데도, 아무도 몰랐다. 그 때는 그 사실이 참 안타까웠다. 쇼핑몰에 가면, 나를 보고 중국인이라고 놀리는 아이들도 심심치 않게 보던 때였다. 내가 아는 친구는 벽에 큰 태극기를 걸어놓고 공부했다고 한다. 미국 친구들의 유창한 영어에 주눅이 들었을 때는 속으로 ‘너희들 한국말로 하면 다 죽었어.’라고 되뇌이며, 스스로 자신감을 북돋우며 공부했다고 한다. 미국에서 혼자 고생하면서 공부할 때, 내가 잘 못하면 대한민국이 욕먹는다는 생각 때문에 더 열심히 공부했다고 한다. 나와 대한민국을 동일시 할 때, 대한민국이 나의 자랑이 될 때, 나 역시 대한민국의 자랑이 되길 원하게 되다. 적어도 미국 땅에서 대한민국의 망신이 되길 원치 않게 된다.  마찬가지이다.  나에게 부모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있다면, 부모님의 기대가 나에게는 무거운 짐이 되기 보다, ‘행복한 부담’이 될 수 있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내 어버지의 아들, 내 어머니의 딸이 나의 정체성이 된다면, 그 부모님을 실망시켜드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의 최선을 다하게 된다. 누가 내 욕을 하고 다니면 참을 수 있어도 아버지 욕을 하고 다닌다면, 그것만은 참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드는가? 아버지의 명예를 위해, 내가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하고 싶다는 의지가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아버지와 당신을 동일시 하고 있다. 아버지 아들, 딸이라는 당신의 정체성은 당신을 움직이는 동력이 되고 있는 것이다. 정체성 속에서 꿈이 태동한다. (다음편에서 계속)

[이유정] 크리스마스 남우 조연상



해마다 성탄 시즌이 오면 늘 동방박사를 묵상하곤 한다. 주인공인 아기 예수가 탄생한 바로 그날, 이 지구상에는 오직 두 부류의 조연이 있었다. 목자들과 동방박사들이다. 그 가운데 후자는 독특하다. 이들은 예수의 탄생을 경배하기 위해서 먼 동방으로부터 예루살렘을 향해 긴 여행길을 떠났다. 동방박사를 뜻하는 영어 매기(Mage)는 먼 옛날 바사와 메대 나라의 제사장을 의미한다. 이들은 백성들 가운데 가장 높은 교양을 지닌 천문학자였고, 왕실에서 왕의 고문, 또는 왕자들의 선생이기도 했다.

어느 날 박사들은 이상한 한 별을 발견했다. 과연 이들은 어떻게 이 별을 예수 탄생과 연계 해석했을까? 고대 근동 아시아에는 메소포타미아를 중심으로 발전한 점성술과 천문학이 상당한 과학적 수준에 이르렀다. 이들은 별을 연구하는 학자들이었기에 당시의 모든 문헌들 속에서 별에 관한 자료를 모두 수집했다. 유대인들은 바벨론 포로생활 이후 이스라엘 근동 아시아 지방에 퍼져서 디아스포라를 이루고 살고 있었다. 이들의 특징은 가는 동네마다 회당을 지어 놓고 예배를 드렸다. 박사들은 이 회당을 통해 다니엘의 예언이나 메시아에 관한 구약의 각종 예언을 쉽게 접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천문학과 유대 자료를 통해 이들 마음에 모종의 감동을 주셨다. 이방나라의 점성술가인 이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있었는지 알 수 없다. 하나님은 종종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을 통해 자신의 일을 이루신다. 발람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그는 당시 국제적으로 알려진 점술가였다. 그도 한때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따르는 것처럼 보였으나 나중에 사이비 점술가가 되었다.(신명기23:4,5) 구약성경에 발람이 하나님의 신을 받아서 예언한 내용이 나온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민수기 24:17) 학자들은 이 구절을 예수 탄생으로 본다.

그러나 발람은 하나님의 뜻보다는 돈에 의해 움직였던 거짓 선지자였다. 그는 하나님에 의해 쓰임 받는 축복을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자기 길’로 갔다.(민 24:25) 그는 결국 이스라엘 백성을 죄 가운데 빠뜨렸고, 그로 인해 죽임을 당했다. 때때로 우리도 하나님께로부터 큰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고 나서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자기 길로 빠질 때가 있다. 그러나 동방박사들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놀라운 사인을 보고 이를 자신들의 명예나 부의 기회로 삼지 않았다. 오히려 아무도 모르게 그 별을 좇아 외롭고 긴 여행을 떠났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예루살렘 성에 있던 사람들은 목동 외에는 아무도 그 별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왕은 물론 성경학자, 제사장,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그 누구도 보지 못했다. 다른 별에 비해 밝았고 움직이는 별이었기에 조금만 신경 쓰면 볼 수 있었다. 그 뿐인가? 이스라엘에 도착한 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분을 찾고 있습니다. 동방에서부터 그의 별을 보고 경배하러 왔습니다.” 공공연하게 묻는 바람에 당시 정계와 예루살렘 성은 발칵 뒤집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에서 양을 치는 목동 외에는 그 누구도 별에 대해 관심 없었다. 아기 예수가 탄생한 곳을 찾는 자도 없었다. 참으로 대조적이다. 먼 이방나라에서 온 학자들의 수고와 열정에 비해 정작 메시야를 그토록 열망하던 유대 종교지도자들, 백성들은 이상하리만치 철저하게 무관심했으니 말이다. 만일 크리스마스 아카데미 영화제 같은 것이 있었다면 이 동방박사들에게 최우수 조연상이 돌아갔을 것이 틀림없다

지난 한 해 동안 이 땅에 오신 예수를 만나기 위해 얼마나 시간을 투자했는가? 아무런 이득이 없다 해도 그분께 경배하고자 하는 그 마음 하나로 세상 명예와 유혹을 얼마나 포기했는가? 별 하나에 목숨을 걸고 먼 이방 땅을 찾아온 동방박사들처럼, 우리에게 다가온 크고 작은 하나님의 사인이나 주의 음성에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했는가? 성탄의 계절, 휘황찬란한 크리스마스트리의 별에 흥청대기보다 동방박사의 별을 찾아보지 않겠는가?

– 이유정 목사

[백은실] 소그룹의 힘 5: 모험과 경험, 상승작용






  블루베리 치즈케이크를
만들려고 재료를 사러 장에 갔다
.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그날 따라 블루베리가 보이지 않았다.
가족들에게 오늘 저녁 후식은 블루베리 치즈케이크라고 광고를 한 터라 잔뜩 기대를 하고 들어올 게 뻔해 꼭 만들어야 했는데,
블루베리가 아닌 다른 토핑(topping)은 아직 한 번도 만들어 본 적이 없어
시도하고 싶지 않았다
. 사과나 산딸기로도 만들 수 있지만 용기가 없어 결국 디저트로 과일만 내놓았다.
그날 저녁 가족들의 실망이 대단했는데, 특히 어느 식당엘 가더라도 먹어 보지 않은
음식은 절대 시키지 않아 늘 같은 음식만 먹는 작은딸이 한마디 했다
.

 제게는 늘 새로운 것을 시도해 보는 것이 좋다고 하시더니 엄마는 왜 새로운 토핑을 시도해 보지 못했어요?

 그때 큰딸이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엄마!
내일 우리랑 같이 만들어요. 저희들에게 치즈케이크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세요.
전 산딸기 치즈케이크를 꼭 만들어 보고 싶었어요

 다음날 우리는 블루베리보다 훨씬
더 맛있는 산딸기 치즈케이크를 후식으로 먹을 수 있었다
. 

 지금 우리는 주위의 모든 것이
급변하고
,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날마다 우리 삶 속으로 날아드는 그런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
. 그렇기 때문에 크리스천과 교회 리더십은
이처럼 변화하는 환경에서 새로운 것을 경험하기 위해 모험을 시도해야 하는 상황에 자주 놓이게 된다
. 그럴
때마다 리더십이 직면하는 심각한 문제는 한국교회의 성도들 중 많은 분이 아직은 모험을 하거나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고 변화를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 그러나 성장하는 교회들의 사례를 통해 소그룹 사역이 바로 이 부분을 도울 수 있는 중요한 도구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 그것은 사람들은 혼자일 때보다 소그룹이 함께할 때 더 큰 모험을 시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소도시에 있는 한 교회에서
여태까지 친교 중심의 구역예배를 해온 모임들을 전도 목적 소그룹 모임으로 바꾸기 위해 목사님이 이름부터 다 바꾸자고 제안하시자
, 절대 그럴 수 없다고 장로님들이 반대하여 온
교회에 큰 분란이 일어난 일이 있었다
. 그때, 목사님께서 소그룹에 관한
세미나를 해달라고 부르시며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도와달라고 하셨다
. 갔더니 세미나에 참석하신 분들의
표정이 너무도 살벌했다
. 마치 적군이 침입했다는 듯 무장을 하고 경계하는 눈빛이었다. 그분들에게는 모임의 내용과 목적이 어떻게 바뀌느냐보다 이름이 어떻게 바뀌느냐가 더 심각한 문제인 듯했다. 자신들이 익숙한 이름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다고 하셨다. 세미나를 통해 그분들은 소그룹의 목적이
개개인이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생명력 있게 성장하게 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 목적을 정확히 알고
모이는 것이 이름부터 다르게 바꾸고 시스템을 다 바꾸는 것보다 더 시급한 것이라는 데 동의하게 된 목사님과 교회 리더들이 구역예배라는 이름은 그대로
둔 채 각 모임을 더 작은 규모로 나누고
, 각 그룹에서 자신들의 소그룹에 맞는 좋은 이름들을 붙이도록 하셨다.
그리고 밥 먹고 친교하다가 헤어지는 소그룹이 아니라, 말씀 앞에서 삶을 나누고,
불신자 전도를 위해 함께 계획을 세우고, 자신이 속한 소그룹의 성격에 따라 창조적인
이름을 붙이고 이 그룹의 이름으로 선교지를 후원하고 교회 안의 여러 기관들을 돕기 시작하면서 이름으로 시험에 들어 화가 났던 시간들이 모두의 기억에서
사라지게 되었다고 한다
. 지금 그 교회는 다른 어느 교회보다 소그룹 사역을 활발히 하면서 많은 불신자들이
찾아오는 교회로 성장하고 있다
.

 목적을 정확히 알고 소그룹원들이
함께 모험과 변화를 시도하면 익숙한 것들로부터 떠나는 일이 의외로 쉽게 이루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 서로서로 믿고 후원하는 소그룹 안에서는 큰
감정적 소요 없이 새로운 것을 시도하게 된다
. 소그룹에 대한 새로운 세계관을 가지고 교회 안의 소그룹 사역을
개혁하고자 하시는 목사님들은 이름이나 책임자를 먼저 바꾸는 것보다 새로운 목적과 비전을 심어주어 내면을 먼저 바꾸고 소그룹 안에서 그분들에게 맞는
겉옷을 각자 입도록 하면
, 결국 소그룹의 힘을 통해 건강한 소그룹 사역을 구축할 수 있게 된다.
많은 교회가 겉옷부터 바꿔 입히려다 분란이 일어나서 내면의 변화를 시도해 보지도 못하는 안타까운 상황을 겪는 것을 보는데,
그것은 사소한 것 때문에 더 중요한 것을 잃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소그룹에서는 서로에게서 자신들이
시도하는 새로운 일에 필요한 피드백을 얻게 되어 자신감을 가지고 성장하게 된다
.

 지금은 탁월한 소그룹 인도자로
사역하고 있는 한 집사님의 이야기다
. 그분은 어릴적부터 주입식 교육을 받아 온 탓에 질문 만들기 세미나를 몇 번이나 듣고서도 교회로 돌아오면 자기도 모르게
다시 강의와 주입으로 인도하는 모습을 보며 무척 괴로우셨다고 한다
. 그런데 리더들이 다 모이는 리더모임을
강의와 지침을 전달하던 시간에서 리더들이 각자 만들어 온 질문들을 나누고 서로에게서 그 질문에 대한 피드백을 받는 시간으로 바꾸자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은 기쁨을 누렸다고 한다
. 그 집사님께서는 정말 지혜로운 선택을 하셨다. 왜냐하면 리더모임을 강의로 이끌면 그 리더들도 그들의 소그룹에서 강의를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리더들은 질문을 나누는 리더모임을 통해 질문을 잘 만들어 오는 다른 리더들에게서 많이 배울 수 있었고, 또 자신이 만든 질문들의 문제가 무엇인지도 서로가 주는 피드백을 통해 알아 가면서 소그룹 인도에서 더 건설적인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고 한다
.

 리더모임을 통해 자신들의 질문에
대해 더 자신감을 가지고 인도하게 된다는 리더들을 자주 만나면서 새롭고 모험이라고 생각되는 일이라도 소그룹 안에서 함께 의견을 나누고 알아가며
함께 시도하면 더 큰 자신감을 가지고 변화를 경험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 이 원리는 가족에게도 적용이 되는 것 같다. 우리는 모두 연약한 존재이고, 그 연약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곳이 가정이기 때문에,
가족이라는 소그룹의 성원들은 서로 이 연약함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함께해 주고 피드백을 주며 성장과 변화를 도와야 할 책임이
있다
.

 둘째 딸은 큰아이와 달리 수줍고
글로 표현하기를 좋아해 사람들 앞에서 뭔가 발표하는 일은 늘 어려워한다
. 그러나 미국 학교는 발표를 통해 학생들이 수업 진행에 참여하는 것을 권장하기 때문에 자주
발표를 준비하게 한다
. 5분 말할 것을 준비하느라 며칠씩 땀을 흘리는 딸에게
엄마도 너와 똑같은 연약함을 가지고 태어났는데, 기도하며 열심히 노력했더니 이제는 8시간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용기를 주었다. 그리고 아이가 준비한 것을 가족들이 먼저 시간을 재면서 들어주고, 좋은 점과 시정해야 할 부분들을
온 식구들이 나눠 주었더니 아이가 점점 자신감을 회복해 사람들 앞에 서기를 두려워하던 연약함을 조금씩 극복해 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
이런 과정들을 통해서 서로를 더 믿고 신뢰하는 소그룹으로서의 가정이 되어 가는 것을 경험했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소그룹에서
서로의 삶을 지켜보며 다른 사람들이 새로운 상황을 대하는 태도를
, 다른 세계관을 배울 수 있게 된다.

 한국도 마찬가지겠지만, 이곳 미국에서도 가정문제로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고 있다
. 특히 결혼 전에 평안한 가정에서 지내다 결혼과 함께 힘든 삶이 시작되어 회의와 갈등 속에서
고통스러워하다 결국 이혼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 이런 어려움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혼은 죄라는 식의 피상적인 설교나 충고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오히려 반발심으로 교회와 소그룹을 떠나게 하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

 한국교회에서는 아직도 이혼한 분들이나
미혼모처럼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분들을 돌보기 위한 노력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고
, 이분들도 자신의 처지를 부끄럽게 여겨 숨기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30~40대의 이혼율이 20%를 넘긴
최근의 현실을 생각할 때 이분들을 더는 방관해서는 안 된다
.

 5년 전 남가주 얼바인에서
4
명의 소그룹원과 함께 시작한 성경공부 모임이 2년 반이 넘어가면서
100
여 명으로 늘고, 소그룹도 12그룹이나
새로 생겼다
. 그중에는 자폐아를 둔 어머니들이 모인 그룹, 이혼한 분들이
모인 그룹
, 대학 진학을 앞둔 자녀를 뒷바라지하느라 바쁜 부모님들의 그룹, 결혼한 지 얼마 안 되는 새댁들의 그룹, 딸과 며느리를 돌보느라 여러 가지로 힘든 마음을 위로받기
위해 모이는 어머니들의 그룹 등이 있었는데
, 특히 아기를 출산한 지 얼마 안 된 분들이 모이는 그룹은 모임에
나올 때마다 아기용품을 다 챙겨 들고 나오시느라 어려움을 겪기도 하셨다
. 리더들을 통해 그분들의 아픔을 듣기는
하지만
, 직접 그 많은 분들을 돌보기에는 힘이 많이 부쳤다.

 고향과 부모님을 떠나 당하는 어려움은
고행할 때 겪는 어려움과는 또 다른 슬픔을 준다
. 그래서 많은 경우 감정적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데, 이때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들과 소그룹 활동을 함께 하며 말씀 앞에 자신들의 삶을 재조명하고
,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 나가는지를 보면서 스스로 만들어 놓은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각으로 자신의 현실을 보게 된다
.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우리를 넓혀 주시고 새롭게 해주시는 세계관을 통해 관계의 어려움과 자신의 연약함을 보게 되면서 건강한
회복을 위한 노력을 시작하게 된다
. 이런 때 소그룹은 피상적인 충고와 정죄가 아닌 공감대와 슬픔을 함께 나누며
함께 기도하고 회복을 돕는 따뜻한 하나님의 손길로 쓰임을 받게 된다
.

 그리고 소그룹은 자신들의
새로운 시도가 실패하여 계속하기 두려워졌을 때
, 친밀한 격려와 힘을 얻을 수 있는 곳이다. 자신의
용감한 시도에 대해 소그룹원들의 칭찬과 인정을 받으며 더욱 힘을 얻어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된다
.

 미국은 소도시일수록 남자들의 도박이
심각한 문제다
. 미국 사람들이
원주민이었던 인디언들의 문화와 삶을 도태시키기 위해 그들의 생활비를 대주면서 보호구역
(reservation)이라는 곳에서만 거주하도록 한 뒤, 그 주위에 도박장을 많이 세워 그들에게 주는 돈을 다시
거두어들이는 방법을 쓰고 있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 도박이야말로 한 사람과 인종을 망하게 하는 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 한번 도박에 빠지고 나면 목사님이 찾아가서 타이르고, 온 가족이 매달려도 고쳐지지 않는다. 급기야 목사님들이 벼락맞을 거라고 협박성 설교까지 해도
소용이 없다
.

 내가 아는 한 소그룹은 손가락을
잘라도 발로 도박을 하겠다던 한 형제의 도박벽을 함께 이겨냈다
. 도박을 끊으려는 노력이 거듭 실패했지만, 그 형제를
결코 정죄하지 않고 유혹을 견디기 힘든 순간에 같이 있어 주고 기도해 주어
1년 반 만에 그분이 온전히 도박에서
벗어나게 되었다고 한다
. 함께 있어 주고, 함께 돌봐 주는 소그룹의
아름다운 기능은 좋을 때보다 위기의 시기에 더욱 빛을 발하게 된다
.
 

 상승작용(Synergy)

 시너지(Synergy)는 에너지(Energy)와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로, 각기 다른 악기를 연주하여 장엄한 오케스트라를 이루듯 작은 것들이
모여서 이루어 내는 어떤 핵 같은 힘을 말한다
.

 그 동안 소개한 소그룹의 원리들은
모두 서로 연결되어 있다
. 후원과 소속감의 원리, 학습효과, 변화의 힘,
상호책임의식, 그리고 지금 소개하는 모험과 경험의 원리는 다른 원리지만,
모두 서로 깊은 연관을 갖고 있는 것들이다. 이 원리들이 한 개인이 아니라 소그룹에
적용되었을 때
, 많은 일들이 훨씬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성취된다고 한다. 그리고 소그룹원들도 각기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연결되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을 이루어 혼자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위대한
일들을 이룰 수 있게 된다
.

 그 이유는, 사람들은 함께 일할 때 더 큰 동기를 부여하고
더욱더 헌신하게 되어 각각의 재능과 탤런트가 시너지를 일으켜 더 구체적이고 특별하게 일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십여 년 전, 몇 사람이 모여 교회를 개척하고 목사님을 모셔왔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모여드는 통에 이분들을 어떻게 돌봐야 할지 난감했던 적이 있다. 유치부부터 성인 성경공부까지 교육부 일을 다 맡아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정신없이 사역하다 청년 소그룹 모임과 평신도 리더모임을 통해
여러 사람의 재능을 발견하고
, 그분들을 유치부와 유년부, 중고등부와
성인 소그룹의 리더로 훈련하여 세우는 일을 시작했다
. 그리고 그 결과 교육부만큼은 든든하게 자리를 잡아 갈
수 있었다
. 남자들이 모여 무슨 말을 할 게 있느냐며 시작을 꺼려하던 남성 소그룹은 몇 달도 안 되어 수가
배로 증가했고
, 모든 교회일에 핵 같은 존재가 되었다.

 모험을 싫어하는 사람도 소그룹
안에서 새로운 변화를 위해 함께 모험을 시도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가는 일을 위해 섬기는 자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게 된다
.


[이유정] ‘미리 감사’는 하나님을 움직인다


뉴욕 타임즈 베스트셀러인 ‘감사의 힘’이란 책이 있습니다. 저자는 500만 명이 시청하는 미국의 인기 TV 뉴스 프로그램인 <인사이드 에디션>의 진행자 데보라 노빌입니다. 그녀는 위대한 성공은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자주하는 사소한 습관에서 비롯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감사’를 연습하라고 합니다. 감사의 대상이 3가지 있는데 첫째는 다른 사람들에게, 둘째는 세상을 향해, 마지막으로 나 자신에게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의 로버트 에몬스 교수에 의하면 하루에 5번씩 감사의 말을 쓰는 사람들과 전혀 감사의 말을 표현하지 않는 사람들의 삶의 결과가 완전히 다르다고 했습니다. 5번씩 감사를 표현하는 사람들은 스트레스도 확연하게 줄고, 건강에도 큰 차이를 보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감사할 때 우리를 살리는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감사를 잘하는 사람은 감동을 잘 받는 사람입니다. 내가 받은 감동으로 감사하면 상대방에게도 그 감동이 전달됩니다. 웃음을 줍니다. 웃을 때 우리 몸에 좋다는 면역성이 있는 앤드로핀이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가 감동을 받을 때는 앤드로핀 보다 5천 배나 강력한 다이도르핀이 나온다고 합니다. 이것이 감동 호르몬입니다. 이렇게 일반은총의 영역에서도 감사는 우리 삶에 엄청난 에너지를 가져다줍니다.

하물며 하나님께 감사할 때 우리에게 돌아오는 인생의 에너지는 데보라 노빌의 ‘감사의 힘’이나 감동 호르몬과 비할 바가 못 됩니다. 문제는 우리가 감사할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열 명의 문둥병 환자가 “제사장들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라”(눅 17:14)는 예수의 말씀에 순종해서 성전을 향해 가는 도중에 모두 치유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중 단 한 명 사마리아 사람만이 감사하기 위해 돌아왔습니다. 10명 중 한 사람만이 감사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 시대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감사에 인색합니다.

감사를 방해하는 가장 큰 적 가운데 하나가 ‘근심’입니다. “근심이 사람의 마음에 있으면 그것으로 번뇌케 하나…”(잠 12:25) 근심은 감사가 아닌 번뇌를 낳습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품고 염려한다는 것입니다. 심리학자 어니 젤린스키의 연구 결과가 이를 증명합니다. “우리가 하는 걱정의 40%는 절대 현실로 일어나지 않는 것이고, 30%는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것이며, 22%는 안 해도 될 사소한 일이고, 4%는 우리 힘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다” 결국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걱정은 겨우 4% 밖에 안 된다는 것입니다.

Thank와 Think는 모음하나 차이입니다. 생각만 바꾸면 감사하지 못 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눈이 환경에 고정되어 있을 때는 불평과 염려가 나옵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을 들어 하나님께 고정할 때 감사가 시작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그래서 바울은 자신있게 말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어떠한 상황에 있던지 감사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2008년 가을 어느 날 아침, 시편 138편을 묵상하는데 문득 다윗의 고백인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라는 말씀에 영감을 받아 곡을 썼습니다. 처음엔 그 의미가 다소 생소했는데 영어성경에서 풀렸습니다. “with my whole heart”, 즉 ‘내 모든 마음으로’ 하려면 감사의 조건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감사할 일이 있을 때만 감사합니다. 그러나 감사할 이유를 찾아보세요. 생각보다 많아 깜짝 놀랄 것입니다. 

이 시의 구조가 독특합니다. 7절은 일종의 병행구입니다. “내가 환난 중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를 소성케 하시며…” 감사가 나오고 하나님의 응답이 뒤따릅니다. 일반적으로 곡의 후렴은 절의 결론입니다. 1절이 있기에 후렴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시는 먼저 결론이 나옵니다. 즉 감사를 선포하고 후렴에서 감사의 조건이 나옵니다. 적어도 ‘감사’의 원리에 있어서 이 시의 구조가 맞습니다. 미리 감사는 하나님을 움직이는 힘입니다. 바로 오늘부터 미리 감사하는 습관을 만들어봅시다. 그럴 때 이번 추수감사 연휴는 물론 우리의 인생이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풍성함으로 넘칠 것입니다.



– 이유정(한빛지구촌교회 예배목사)

[김정아] 치유의 길(용서) (4) – “기억할 것은 우리가 어떻게 용서받았는지입니다.”

2010 KOSTA/USA 스크랜튼 집회에서 있었던, 김정아 교수님의 ‘치유의 길: 용서 (The way to healing: Forgiveness)’ 세미나를 정리해보았습니다. 



핵심으로 들어가서 여태까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원리를  가르쳐 드렸는데 구체적으로 삶 속에서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상대편이 나에게 상처준 것을 생각하면 절대 용서하지 못합니다. 그것을 기억하면서 용서하려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기억할 것은 우리가 어떻게 용서받았는지입니다. 영화 ‘Passion of Christ’를 보면 예수님의 아픈 모습이 나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offend한 거 아십니까? 우리가 모든  죄를 졌을 때 그 모든 offend는 하나님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용서하셨는지를 기억한다면 우리가 용서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를 기억한다면 결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용서할 때 우리가 어떻게 용서받은 자인가를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을 기억 안하고 용서하려고 한다면 참 힘들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 김철수 선교사님도 말씀하셨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소중하게 보시고 사랑하시고 얼마나 큰 대가을 치르셨나요? ‘Passion of Christ’에서 그려진 하나님의 모습은 그 육체의 고통을 잘 표현해 줍니다. 육체의 고통도 너무 아프지만 제가 더 가슴이 아픈 것은 하나님이 외로워 보인다는 것입니다. 근데 여러분은 한번도 외로운 적이 없는 분들입니다. 여러분이 느끼지 못하지만 항상 예수님이 여러분 곁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육체적인 고통은 둘째치고 하나님께서는 유아독존으로 유일하게 혼자가 되어보신 분입니다. 여러분을 위해서 완전하게 separation되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 보신 분은 어떤 기분인지 아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게 일시적이라도 힘들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그 독생자를 완벽하게 버리셨습니다. 그렇게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한다면 용서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내 상처가 너무 크게 보이기 때문에 절대 용서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용서를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이 어떤 대가를 치르시고 여러분을 용서하셨는지 먼저 묵상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이것이 용서의 첫번째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이 단계가 없으면 용서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 더 사랑할 수 있듯이 용서를 받아본 것이 머리에만 있고 가슴으로 내려오지 않으면 힘들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예수님이 나를 어떻게 용서하셨는 지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고, 그 사랑과 용서를 기억하시면서 용서의 단계를 시작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안되면 용서가 여러분에게 너무 큰 짐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를 어떻게 용서해 주셨는지, 우리가 하나님에게 얼마나 괴로움을 주었던 존재였는 지 기억하시는 여러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두 번째 단계로,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지 깨달은 후 해야할 것은 상대편의 죄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서 솔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cool’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다 적으십시오. 상대방이 나에게 얼마나 망신을 주었는지, 자매 같은 경우에는 사랑한다고 해서 순결을 주었는데 어떻게 날 버릴  수 있는지. 그 모든 것을 다 적으세요. 그렇게 아픈 것까지 종이로 다 적어서 내려놓는 것이 필요합니다. 왜냐면 여러분의 상처가 다 빛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상처가 치료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픈 감정들을 다 적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raw feeling’을 전부 다 적으시고, 그것을 잘 소각하고 버리시길 바랍니다. 정말로 여러분의 아픔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치유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는 지를 정확하게 드러내셨으면 좋겠습니다. 머리로 하면 많이 잊어버리기 때문에 모든 쓴 뿌리들을 하나님 앞에 다 적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모든 고통은 하나님에게 그대로 전해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른 형제,자매에게 죄를 짓는 것이 무서운 것은,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하나님에게 상처를 주는 것과 똑같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raw feeling’을 모두 하나님 앞에 내어 놓으십시오. 이 일이 정말 힘들지만 우리가 용서의 원어에 담긴 의미처럼, 탕감해주고, 던져주고, 버리는 것입니다.  이 만큼 아팠으니 나에게 보복의 권리가 있지만 하나님이 더 좋은 ‘just maker’이기 때문에 그것을 내려 놓는 것입니다. 이게 상대편의 죄를 탕감해 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상대가 저지른 행동이 죄가 아니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용서하셨는지 알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그 모습을 따르기 위해서 용서를 실천하시는 것입니다. 상대편의 죄를 탕감해주고 복수할 권한을 포기해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복수할 권한이 있지만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나에게 빚을 진 형제가 나에게 ‘백만 불’을 주어야 되는데 그 백만 불을 찢는 것입니다. 나에게 다시 갚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용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여러분이 용서했을 때 여러분을 귀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선교가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 만큼 중요한 것이 나에게 잘못한 상대를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는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가  많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복수할 권한이 있는데 그것을 내려 놓았고, 그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상처로 끝내지 않고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면서 담대하게 이 일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인간으로는 이 일이 너무 힘듭니다. 그래서 다시 첫 번째 단계로 돌아가서 하나님이 날 어떻게 용서하셨는지를 기억하는 게 중요합니다. 용서를 하려고 할 때 하나님의 자녀라 하고 싶지만 그래도 불공평하다는 마음이 머뭇거릴 것입니다. 정상입니다. 용서를 한다는 것은 그 죄가 없어졌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정죄할 권리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는 사랑할 권리만 주셨지 정죄할 권리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정죄는 모든 상황을 정확히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간디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하다보면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blind가 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정죄권을 안주시는 것은 즐거운 복수를 혼자 하려고 하시게 아니라 복수의 과정에서 상처받는 게 우리이기 때문에 그것을 당신에게 맡기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는 결과적으로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내가 복수할 권한이 있는데 하나님이 더 나은 ‘just maker’라는 믿음으로 하나님이 공평하게 할 수 있도록 올려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용서했다고 죄가 없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 이 사람 용서했으니 봐 주세요’하더라도 그 사람이 괜찮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just maker’로서 일을 하십니다. 물론 상대편을 사랑하셔서 그 사람이 잘 되는 방향으로 하시겠지만요. 모든 죄에는 그에 따른 결과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해서 굉장히 정확하십니다. 우리가 용서했기에  하나님께서도 용서하신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스데반도 그렇고 예수님도 저희 죄를 용서해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이 용서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본인들이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내가 용서했다고 죄가 없어지는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저는 처음 용서를 시작할 때 속이 시원해지는 것이 좋았습니다. 이것 때문에 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이 좀 더 자라면서 좀더 성숙한 이유로 용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굉장히 정확한 분이십니다. 얼마나 정확한 분이신지는 물리적인 법칙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많이 들으셨을텐데 지구의  상태가 약간만 달라져도 지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물리적인 세상도 굉장히 섬세하게, 정교하게 만드셨는데 여러분이 받은 상처를 하나님은 그냥 넘어가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차라리 여러분도 용서받고 싶은 것처럼 상대를 불쌍하게 여기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보다 죄를 더 심각하게 여기십니다. 만약 사람들이 죄를 가볍게 여기는 것처럼 하나님도 그러셨다면 예수님이 돌아가실 필요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가 죄가 아니라고 할 만큼 정신이 이상한 분도 아니었고, 다른 길도 있었는데 그 길을 가신 것입니다. 독생자를 주실만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의 신앙이 어리다면 하나님이 복수해 주시는 것 때문에 용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숙하게 될수록  내가 받은 용서때문에 남을 용서하게 되고 내가 감사해서 용서를 하게 됩니다. 내가 일억의 빚을 졌는데 그게 탕감되었다면 누가 나에게 일 불을 탕감해 달라고 한다면 안 해줄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런 감사의 마음으로 용서하게 되었으면 좋겠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의미에서 용서하셨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이 better ‘just maker’라는 믿음에서 하셨으면 좋겠고, 그 사랑에 의해서 여러분이 용서하시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용서는 공평하지 않습니다. 쉽지 않습니다. 나쁜 사람도 용서를 해야 됩니다. 용서는 믿음의  행위이고, 선택하는 것이며, 복수할 나의 권한을 내려 놓는 것입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하시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게 하는 것이며, 여러분을 위한 일입니다. 용서의 유익이 너무 많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용서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당신과의 친밀한 교제를 갖으시길 원하십니다. 다시 이야기하지만 백만 달란트, 만 달란트와 백 데나리온의 차이는 백 일과 천 오백 년의 노동의 차이와  같습니다. 용서를 안하겠다는 것은 일억 갚음을 받은 사람이 일 불을 안 주겠다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제삼자와 가해자에게도 할 일이 있습니다. 상처받은 사람이 아픈데 주위에서 부채질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넌 크리스천인데 왜 용서 못해?”라고 말하지만, 그 사람이 그 상황에 있으면 펄펄 뛰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상처를 받지 않은 사람이라도 조심하는 게 필요합니다. 여러분이 제 삼자로서 도와야하고 곁에 있어주어야 한다면 기억하세요. 절대 쉽게 이야기하지 마십시오. 정말 당한 사람에게는 큰 아픔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용서는 제 삼자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모든 죄를 용서하신 것도 하나님이 우리들의 아픔을 다 받으신 유일한 분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대신 용서할 수 없는 것을 기억하시고 상대편의 입장에서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쉽게 해결점을 제시하지 마십시오. 상대편이 해결점을 몰라서 못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들어주시고 아픔을 공감하고 기억해 주시는 것이 너무 필요합니다. 가해자로서 중요한 일은 사과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사과를 받지 않아도 해야 하는 것이지만 사과를 하게 되면 그 사람의 상한 감정을 치유해 주고 회복을 시작시켜 줍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실수로 상처를 주었고 사과를  하면 상대편의 상처의 치유가 굉장히 빨라집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가해자일 때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자하고 넘어가지 마시고 그 사람의 상처치유를 위해서 사과를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일은 아름다운 일이고 상대방을 존중해주는 것입니다. 사과를 안 하는 것은 내가 상처를 주어도 나는 상관없다는 냉정한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사과할 때 기억할  것은, 상대편에게 아픔을 준 것이 내 의도가 아니었다고 말하면 많이 싸우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 사람이 의도를 하지 않았는데 당한 나만 바보가 되었다는 생각을 주기 때문입니다. 상처를 주었기 때문에 의도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의도하였던 그렇지 않던 상처를 받았다는 게 아픈 것입니다. 내가 책임을 지겠다고 표현하고 정확하게 무엇을 잘못했는지 고백하는 게 중요합니다.  제가 나쁜 예제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상대가 무엇이든지 잘못한 것 같으면 용서해 주세요.’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결국 잘못 안 했다는 말과 똑같기 때문입니다. 정확하게 상대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집어주지 않으면 상대는 잘못한 것도 모르면서 ‘왜 용서를 해?’ 하는 식으로 나와서 여러분을 더 아프게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모든 것은 실수다’라고 넘어가면 안됩니다. 고의건 아니건 더 중요한 사실은 그 사람이 상처받았다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상처를 주었다면 막연하게 화해를 청하는 것은 문제가 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저도 알고보면 좋은 사람이에요.’하는식으로 변명을 합니다.  하지만 상처는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이어서라기 보다는  그 행동 때문에 상처받은 것이기에 이 말은 올바른 사과가 아닙니다.  고백은 내가 나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한 부분에 잘못한 것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잘못을  했더라도 사과를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훨씬 축복이 되는  일이라는 것을 기억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지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고, 그것 없이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을 묵상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 안에서 용서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용서할 사람을 하나님 앞에서 내려 놓으시고, 모든 일을 종이에 자세히 다 적으십시오. 그리고 내 안에 용서의 마음이 없는 것조차 고백하세요.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부드럽게 해주십니다. 용서할 힘도 구하십시오. 용서는 정말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정말 그 마음과 힘도 구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모든 감정과 분노를 생각나게 하세요. 상처가 곪으면 정말 아프기 때문에, 그것을 터트려야 합니다. 이 일은 굉장히 고통스럽습니다. 그래서 모든 감정과 아픈 고통들을 다 적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머리에서만 맴돌다가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모든 감정들을 성령님께 드러내는 것이 치유의 시작입니다. 다  드러나도록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잊어버릴, 던져버릴, 그리고 뒤돌아갈 힘을 구하십시오.  
이 일들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진정으로 믿어야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이 어려움과 아픔을 통해서 나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신다는 믿음이 없으면 하기 힘듭니다. 한 번 용서하면 끝난다고 생각하는데, 한 번 받은 상처는 오래 생각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마다 여러분은 이 과정을 반복하셔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끝없이 축복하십시오. 그것이 진짜 여러분이 용서를  한 증거입니다. 축복을  하라고 하니, 정말 화가 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사람을 용서할 때의 모습이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뜻으로 살 때에는 축복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끝)

[최주희] 자녀교육의 목표


자녀가 생기는 순간부터 부모들은 많은 에너지와 노력을 자녀양육에 둔다. 잘 키우고 싶고 그들을 행복하게 해 주고 싶기에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그런데 그 노력이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면 실수나 실패 혹은 방황이나 혼돈을 줄여줄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교육학자들은 교육의 목표를 크게 두 가지로 둔다. 하나는 ‘마음을 지키는 도덕과 윤리의식’을 아이들에게 심어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을 사랑하고 인류에 공헌하려는 사명감’을 가지도록 돕는 것이다. 이것은 학문적인 정의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볼 때 큰 의미가 있다. 바로 ‘거룩’과 ‘사랑’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성품이기도 하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기대하시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요소이기도 하다. 이것이 바로 우리 자녀들의 교육목표가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 모른다. 특별히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사회의 특징을 볼 때 이 두 가지 목표는 너무나 현실적이고 중요하다.



먼저 첫 번째 교육 목표인 ‘마음을 지키는 도덕과 윤리의식’ 즉 ‘거룩함’은 우리 자녀들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 수년 전 출강하는 학교에서 ‘현대사회가정’이라는 과목을 강의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때 강의준비를 위해 연구하면서 발견한 현대사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 두 가지가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사회는 사회구성원들이 본능적이고 감각적으로 살도록 자극하고 유혹하고 있다는 것이며(제1특징), 다른 하나는 그렇게 본능적 충동에 의해 살다가는 이 사회에서 생존하기 힘들게 만드는 신용 및 도덕성을 요구하는 사회(제2특징)라는 것이다.

제1특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우리는 거리에서나 TV에서나 맛있는 먹을거리를 쉽게 접한다. 입고 싶은 예쁜 옷들도 엄청 많다. 핸드폰, 스마트 폰 정신이 없다. 세련되고 성능 좋은 멋진 차들도 너무 많다. 뿐만 아니라 Sexy 한 몸매와 차림으로 다니는 여자들은 어디서나 볼 수 있다. 법만 없다면 마음껏 가지고 싶고 만지고 싶다.

문제는 제2특징이다. 이렇게 감각적이고 유혹적인 상황에 대책 없이 일단 반응부터 하다가는 이 사회에서 경제적으로 도덕적으로 몰락하게 된다. 규모 없이 돈 쓰다가는 신용불량자 되고 아무리 높은 지위에 올라가도 성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도덕적 하자가 생기면 추락하게 되어 있다. 과거에는 어느 정도의 불륜은 그 사람의 힘이었고 부정한 돈은 능력이었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다. 그냥 추락이다. 특별히 지금은 비밀이 없는 사회가 되었다. 돈의 흐름은 통장와 카드에 고스란히 기록되고 어떤 대화도 핸드폰에 녹음시킬 수 있다. 움직임과 행동은 손안의 핸드폰과 곳곳의 CCTV에 그대로 살아있다. 네티즌의 고발도 한몫이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으며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고 하신 말씀의 실현이다(마10:26, 눅12:3).

그러므로 자녀를 양육하는데 있어서 도덕과 윤리의식을 의도적으로 심어주는 것은 이 사회에서의 생존을 위한 기본이 되었다. 사회질서와 인간관계에 대해 너무나 짧고 간단명료하게 명령하신 십계명의 내용이 우리 자녀들을 살리게 한다. ‘부모를 학대해서는 안 되며 다른 사람에게 신체적으로 폭행하거나 성적인 범죄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 내 돈과 남의 돈을 구분하여 다른 사람의 재산에 해를 끼치지 않으며 거짓말로 사람들을 괴롭혀서는 안 된다.’ 부모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생활가운데 구체적으로 자상하게 설명해주어야 할 것이다.

자녀를 너무 사랑하는 요즘 부모들은 그들이 태산을 넘을까 험곡에 갈까 노심초사하며 앞길을 평탄케 해 주느라 정신이 없지만, 그보다 ‘빛 가운데 걸어가라’고 강하게 가르쳐야 한다. 아들에게 자주 이런 이야기를 한다. “진호야, 엄마 아빠가 인생을 살아보니 태산도 험곡도 피할 길이 없더라. 정말 중요한 것은 빛 가운데로 걸어가는 삶이야. 그리고 세상에 비밀이 없음을 기억해야 해. 네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은 언젠가는 다 드러나게 되어있어. 그러니까 네 행동, 네 말 심지어 네 생각도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훤히 드러나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 차라리 편하단다. 너 자신을 누구 앞에서든지 떳떳하고 당당하게 만들테니”

두 번째 교육목표를 보자. ‘이웃을 사랑하고 인류에 공헌하려는 사명감’은 너무 교과서적이다. 그래서 현실감이 없기도 하다. 하지만 이 또한 학습이란 관점과 현대사회의 흐름 가운데 살펴본다면 얼마나 현실적이고 중요한지 발견하게 될 것이다.

먼저 학습이란 관점에서 본다면, 학습의욕을 일으키는 가장 중요한 동기 부여가 바로 ‘세상의 필요’임을 인식해야 한다. 이웃과 세상의 어려운 점을 보고 내가 무언가 도움 주는 일을 하고 싶다고 느끼는 것이 바로 학습에 대한 동기부여가 된다는 것이다. 가난한 이웃을 보며 후에 사업가가 되어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려 공부하고, 장애우 친구를 도와주다가 특수교사의 꿈을 가진다. 시각장애인 강영우 박사의 아들이 안과의사라는 사실은 유명하다. 우리 아들은 건축설계를 전공하는데, 십여 년 전 침례교단 선교훈련센터를 짓다가 건설회사가 부도나 고생하던 아빠를 옆에서 보고 건축사에 대한 꿈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나라 대학교들 중 실력과 인격 면에서 가장 신뢰받고 있는 한동대학의 교육목표는 ‘Why not change the World?'(세상을 한번 변화시켜 보지 않겠습니까?)이고, 미국의 필립스 아카데미는 ‘Not for Self'(자기 자신만을 위하지 말라)이다.

현대사회의 흐름이란 관점에서도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현대가 강조하는 리더십이 바로 섬김의 리더십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수많은 리더십 아카데미에서 궁극적으로 강조하는 것이 섬김이다. CEO 들이 사내 식당에서 줄을 서서 밥을 먹거나 손수 화장실 청소하는 모습들은 이런 면에 매우 의미 있는 상징이다. 또한 대기업에서 신입사원을 뽑을 때 실력, 영어, 창의성 뿐 아니라 ‘인성’이 추가되었다. 아무리 실력과 능력이 있다할지라도 겸손하고 섬김의 성품이 받쳐주지 않으면 의미 없다는 것을 대기업들이 알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중학교에서 반장을 뽑는데 어느 학생이 똑똑하고 말 잘하고 비전 있고 열정 있어도, 만약 잘난 척하거나 친구를 무시한다면 결코 반장에 선출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아무리 실력과 의욕이 있어도 그 아이가 영향 미칠 수 있는 대상은 한 반의 20여명도 안 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부모는 자녀에게 세상의 필요를 끊임없이 보여주고 그들을 향한 따뜻한 마음과 섬김의 자세를 가지도록 의도적으로 노력하며 도와야 할 것이다.

‘마음을 지키는 도덕과 윤리의식’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고 인류에 공헌하려는 사명감’, 이것은 부모가 자녀의 손을 잡고 늘 바라보고 향해 가야하는 너무나 중요한 교육목표이다. 또한 우리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도 잘 살게 하는 귀중한 푯대가 된다.

 

[김정아] 치유의 길(용서) (3) – 용서는 “하나님께 던져 버리는 것입니다.”

2010 KOSTA/USA 스크랜튼 집회에서 있었던, 김정아 교수님의 ‘치유의 길: 용서 (The way to healing: Forgiveness)’ 세미나를 정리해보았습니다. 

용서라는 말의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어원을 보면 ‘나사’, ‘아피에미’ 즉, ’보내는 것’, ‘던져 버리는 것’이고 , ‘살락’, ‘카리조마이’ 즉, ‘자비를 베푸는 것’, ‘던져버리는 것’입니다. 상처를 받았을때 그 상처를 안고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던져 버리는 것입니다. 용서라고 하는 것은 누가 여러분에게 상처를 주었지만, 그것을 던져 버려서 더 이상 상처가 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게 용서의 어원입니다. ‘던져버리는 것’, 그 어원을 기억하세요. ‘자비를 베푸는 것’은  여러분에게 누군가가 상처를 주었는데 용서하는 것은 불쌍한 내가 당하고, 착한 내가 참아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상처를 받으면 세상의 눈으로는 여러분이 복수할 권리를 갖습니다. 솔직히,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그 권리를 포기한다는 것은 굉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용서는 보내 버리고 던져 버리는 것이고, 그 행위에 대해 하나님의 역사를 믿는 믿음가운데 그 담대하게 자신감을 가질 만한 일인 것을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moving on’하는 것입니다. 뒤돌아서서 잊어버려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갖고 있는 상처와 배신 이런 것들을 밑으로 던져 버리는 것이 용서입니다. 저도 상처를 받고 용서하는데 일 년 반이 걸렸습니다. 지금도 자다가 그 생각이 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예전에는 일 년 반이 걸렸던 게 지금은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아니까 5분이 걸립니다. 원칙을 생각하며, 날 위한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니 5분 안에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맨 처음부터 용서가 쉽지는 않지만 점점 더 좋아집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받으면 일기장에 써 놓고 계속 묵상을 하게 되는데 그러지 마시고 던져버리고 잊어버려야 합니다. 자꾸 생각을 끄집어 내는 것은 우리 스스로를 괴롭히는 일입니다. 생각을 끊어버리는 게 필요한대 여러분은 할 수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를 유혹할 수 있지만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유혹이 어디로 들어오느냐면 생각으로 들어옵니다. 과거가 자꾸 묵상의 주제로 올라오면 생각의 주제를 바꾸도록 해야 합니다. 삼 분만 “초콜렛 초콜렛” 해보십시오. 초콜렛에 알레지가 있는 사람이 아닌 한 생각나는 건 초콜렛밖에 없을 것입니다. 상처를 ‘잊어야지 잊어야지’하면 상처밖에 생각나는게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던져버리는 것입니다. 왜냐면 여러분에게 유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레위기에 보면 속죄양이라고 해서 양이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  광야로 보내 버립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과거의 상처들을 버리고 속죄하는 것처럼 양에게 그 상처들을 묶어서 다시 오지 못하게 보내 버렸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용서입니다. 여러분이 진, 큰 빚을 탕감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 번 당하고 마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기 때문에 그 사람이 진 빚을 내려주는 것입니다. 용서라는 말은 보내주고 과거를 잊어주고 잘못을 잊어주고 상대편을 자유케 해주는 것입니다. 죄책감을 건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보내주는 것입니다. 놓아주고 빚을 탕감해 주고, 빚을 없는 것으로  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심해야 할 것이, 용서하지 않을 일을  용서해 주는 일입니다. 내가 혼자 조금 ‘오버’한 것인데 무조건 모든 사람을 용서해야 할 사람으로 보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  사람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큰 선물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교만하면 안 되지만, 용서했을 때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했다는 것을 알고 여러분만 당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상처를 받은 일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룰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이유는 ‘은혜’, 또 다른 표현으로는 ’용서’ 때문에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용서가 다른 게 또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그 악의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아 보인다는 것입니다. 용서 안에는 그 일을 하나님께서 하시겠다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기도 하지만 ‘공의의 하나님’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더 좋은 ‘just maker’이기 때문에 하나님꼐서 하시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용서해야 할 때 너무 힘들지 않나요? 만약 상처를 준 사람이 정신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면 여러분은 괜한 고민을 하게 된 것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큰 그림을 보지 못할 때 제대로 판단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큰 그림을 볼 수 있는 당신이 하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용서는 선택입니다. 감정을 기다리지 마십시오. 감정은 한참  뒤에 오기에 용서는 자신이 선택하는 것입니다. 

제가 짚고 넘어갈 것 중에 하나가, 사람들이 헷갈리는 것 중에 하나인데 용서와 화해입니다. 용서는 그 사람의 input과 상관없이 던져주고, 버려주고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화해는 박수를 치는 것처럼 두 사람이 함께 해야 합니다. 인간관계가 두 사람 사이에 이루어지는데 한 사람이 용서를 하고 싶어도 상대편이 계속 상처를 주면 그 관계는 정상적인 관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용서는 상대편이 죄를 인정하지 않아도 해 주어야 하지만, 화해는 상대편이 죄를 인정하고 돌아와야만 가능합니다. 남편이 부인을 때리면 부인은 남편을 용서해야 하지만 abuse하는 관계로 들어가라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분별해야 합니다. 용서는 죄를 인정하지 않아도  해야 하는 것이지만, 화해는 상대방이 잘못을 인정할 때 가능합니다. 상대가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때 관계를 끊으라는 것은 그 사람에게 더 이상 나를 보여주고 상처를 주게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바닷가에서 예수님도 (다르게 해석하는 사람도 있지만) 세 번을 확인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사랑하느냐?” 본인이 깨달을 수 있도록 기회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잘못된 것을 가르쳐 주어야 상대방이 돌아설 수 있습니다. 화해에는 공평과 정의가 바탕이 되는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강한자만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용서하면 무언가 져준 것 같지만 강하지 않은 자는 결코 용서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자만이 가능합니다. 용서와 관련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정의가 없는데 무조건 친한 척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14장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의가 먼저 나와 있습니다. 진정한 화해는 의가 있을 때 가능합니다. 용서와 화해를 구분했으면 좋겠습니다.  (다음 글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