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l 16, 2010 | 삶과 신앙/최주희의 사랑이야기
이번 달 칼럼은 지난 달 칼럼 “혼전 성관계에 대한 오해와 진실” 후속 편이다. 혼전 성관계에 대한 진실을 올바르게 인식했다면, 이제는 이미 혼전 성관계를 경험한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이 필요할 것이다.
가장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회개”이다. 회개는 잘못에 대해 뉘우치고 돌이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잘못 즉 “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혼전 성관계를 가진 사람은 자신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에 대한 바른 인식이 먼저 필요하다. “사랑하기에… 유혹적인 환경에서 실수로… 잘못인지 알지만 그 사람의 요구가 너무 강하고 거절하면 떠날 것 같아서… 결혼을 약속하였기에 조금 일찍 성관계를 가지는 것은 괜찮을 것 같아서… 몸을 함께 했습니다”가 아니다. 단순하지만 명백하게 “하나님 앞에 간음죄를 범했습니다”라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죄를 고백하여야 할 것이다. 간음은 부부가 아닌 남녀가 성관계를 맺는 것으로, 십계명을 비롯하여 구약과 신약 구석구석에서 죄로 선포하고 있다.
간음죄를 비롯하여 여러 죄악들을 행하는 데까지 이르는 과정에는 몇 가지 단계가 있다.(엡4:18-19)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다. 즉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귀 기울이고 그것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가치대로 자기 성격대로 말씀을 해석한다.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선택적으로 믿는다. 다음 단계는 마음이 굳어진다. 이렇게 굳어진 마음은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떠나게 만들며 영적인 감각을 잃게 한다. 결국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고 모든 것을 욕심으로 행한다.
그러므로 회개할 때 하나님을 온전히 경외(fear and respect)하지 않았음을,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가치대로 자신의 가치관을 바꾸지 않았음을 먼저 철저히 회개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악한 길, 불의한 생각 가운데 있지 말고 거룩하고 도덕적인 삶으로 돌이켜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긍휼히 여기시고 용서하신다.(사55:7, 시103, 요일1:9)
두 번째는 혼전 성관계를 가지게 된 원인을 분석한다. 그래야만 자신의 약점을 고치고 보완하여 또다시 죄를 범하는 것을 막아주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원인으로 내실 있는 이성교제가 되도록 준비하는 것이 부족했는지(이성교제가 서로의 성장과 발전을 도모하며 건전하고 성숙한 관계가 되도록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 여자의 지나친 노출 패션이 남자에게 성적인 자극을 주지 않았는지, 만나는 장소가 은밀하거나 고립되어 있어 유혹적이지는 않았는지, 자기조절능력이 부족한 성격적 결함이 있는 것은 아닌지 섬세하고 예민하게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원인을 다시는 제공하지 않도록 한다.
세 번째는 성 에너지 관리를 위해 적당한 운동을 규칙적으로 하며 야한 동영상을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푼다는 명분하에 폭력적이고 음란한 게임을 즐기며 심지어 사이버 섹스를 하기도 한다. 이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고 오히려 스트레스를 만드는 일이다. 운동과 자연을 많이 접하는 산책은 우리의 정신건강을 좋게 하며 성 에너지도 건전하게 관리해 준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음란물에 중독되어 있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이것을 영적 싸움으로 단정하고 그저 사단을 대적하는 기도 소리만 높이 부르짖고 돌아서면 다시 음란물을 접한다. 그러고는 사단이 너무 강하여 자신은 무기력하고 패배할 수밖에 없다며 자포자기이다. 혹은 자기 조상의 죄 때문에 자기가 그럴 수밖에 없다며 묶는 기도, 끊는 기도에 몰두한다. 사람들이 이런 식의 접근을 좋아하는 이유는 자신의 옳지 않은 행위를 사단이나 조상에게 책임전가하고 자신을 피해자로 인식해서 자신의 죄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비성경적인 잘못된 교리이다.
창조주, 만왕의 왕,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이미 승리하셨으며 사단에게 전혀 영향 받지 않으신다.(욥1:6-7; 엡1:10-13, 20-22, 6:10-20; 야4:6-8; 벧전5:8-9…) 또한 아들이 부모의 죄악을 담당하지 않는다.(렘31:29-30, 겔18:20) 오히려 사단은 우리가 자기관리에 소홀하여 실수할 때 그 실수를 가지고 우는 사자처럼 삼키려 덤벼든다.(벧전5:8 ‘근신하라’는 영어로 ‘Be self-controlled’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단의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절제를 통해 자기관리를 철저히 해야 한다. 또한 믿음을 가지고 진리대로 행하며 살아가는 삶 그 자체가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는 삶이다.(엡6:14-17)
야하고 음란한 것들을 피하고 운동과 산책을 규칙적으로 하는 자기관리가 성적인 범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네 번째는 매일 주님께 자신의 약점을 내어 놓고 도우심을 구한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은 오로지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자기를 관리하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시다. 물론 무겁고 얽매이기 쉬운 죄들을 벗어버리기 위해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며 인내해야 하는 우리의 몫이 있으나(히12장), 하나님은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는 분이시다.(대하16:9) 더욱이 주님의 가르침대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려는 자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은 넉넉하리라 믿는다.(고후7:1, 롬8:37)
하나님의 법도대로 결혼을 통한 부부관계 속에서 떳떳하고 자유롭게 성관계를 즐기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매우 놀라운 축복이다. 하지만 혼전 성관계를 이미 가진 사람들도 철저한 회개와 위에 언급된 회복의 과정들을 온전히 거침으로 충분히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죄에서 건져주신 구세주(Savior)이시며, 동시에 주님 안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우리 인생의 주인(Lord)이 되신다. Praise the Lord!
Jul 15, 2010 | 코스타 사역/강사 코스탄과의 만남
KOSTA/USA-2010 Chicago 코스타 보이스에 실렸던 김태평 목사님의 인터뷰 기사입니다.
코스탄들에게 간단히 자기소개를 해주시겠습니다.
저는 미국 코스타를 처음 알게 된 때부터 지금까지 코스타가 좋아서, 코스타에 오는 식구들을 만나고 교제하기 위해서 오고 있는 김태평 목사입니다.
코스타와 남다른 인연을 가지고 계시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처음에 코스타에 오시게 되었나요?
1982년에 유학을 나와서 성경공부 모임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1984년부터 모임의 다른 분들과 함께 워싱턴 지역을 미국의 영적인 예루살렘으로 삼아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1986년에 워싱턴지역에 젊은이들을 위한 수양회가 있다는 놀라운 소식을 들었고, 이것이 저희 기도의 응답일지 모르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당시 클리블랜드에서 여덟 분과 함께 코스타에 참석하였습니다. 그렇게 집회에 참석하며 코스타가 하나님께서 귀하게 만드셨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고, 그 이후에 코스타에 계속 참석하고 있습니다.
그럼 1회 때부터 계속 참석하신 건가요?
피치 못할 사정으로 한 번 참여하지 못했는데, 그것을 제외하고 계속 참여하고 있습니다.
직장을 다니시면서 이렇게 계속 코스타에 참석하시려면 쉽지 않으셨을 텐데 우여곡절은 없었나요?
아버님께서 위독하셔서, 한국에 나가야 했던 해에 참석하지 못한 적이 있습니다.
또 한 번은 코스타가 열리는 주에 회사의 프로젝트 마감이 있었는데, 그 때문에 회사에서 누구도 휴가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이미 직장 상사에게 휴가를 요청하였다가 거절을 당한 저는 회사의 사장님께까지 휴가를 요청했다가 결국 허락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 일 후에 기도하며, 생각을 정리하였습니다. 저는 회사와 집회 참석이 둘 다 중요하고, 집회 참석이 회사 생활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필요를 채우기에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모두 희생하지 않고 잘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의 이런 생각에도 회사에서는 어떤 경우에도 예외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휴가를 받지 못한 채 해고를 각오하고 집회에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프로젝트가 잘 마무리 되었습니다. 제가 집회에 참여하기로 한 후 저 뿐 아니라 함께 일하는 팀 모두가 열심히 힘을 모아 일했고, 그 결과 프로젝트를 미리 끝낼 수 있었습니다. 프로젝트의 결과가 좋았던 것 물론입니다. 그 이후에 회사에서 제가 코스타에 참석하는 것을 당연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코스타의 지난 25년을 거의 다 지켜보셨는데요, 그동안 코스타에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처음에 180여 명, 그리고 230여 명이 참석하던 코스타가 오늘까지 온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코스타가 한 영혼 한 영혼을 복음으로 품었고, 이를 하나님께서 사용하여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초창기에는 강사들이 밤새 모여서 집회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거기서 나온 의견을 가지고, 다음 날에 새로운 프로그램을 시도해보기도 하고, 기존의 프로그램을 바꾸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가운데 하나님의 큰 역사를 많이 경험하였습니다. 이제는 이런 식으로 변화를 추구하기에 코스타의 규모와 조직이 커졌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성령님의 역사가 이뤄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좋은 멘토링과 상담 시스템도 생긴 것 같습니다.
25주년이 된 코스타에 제안하시고 싶은 점이 있나요?
지금까지 모든 것들이 다 좋지만, 굳이 제안하자면, 복음이 더욱 강조되었으면 합니다. 초반 미국 코스타의 예를 들자면, 집회 참석자의 삼분의 일정도가 복음을 접하고, 받아들이고, 이로 인해 삶에 깊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두번째로는 목회자들과 평신도 사역자들, 조장, 조원들이 함께 갈 수 있고, 지역 교회가 서로 더욱 좋은 방향으로 동역이 이뤄졌으면 좋겠습니다. 지역 교회에서는 청년을 코스타 집회로 보내고, 청년들도 돌아가서 지역교회의 부족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교회의 부족함을 채워서 교회의 덕을 이루며 아름답게 함께 나아 갔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 25년을 바라보시며, 코스타를 향해 기대하시는 것이 있으신가요?
제가 경영을 공부했는데, 인간에게 수명이 있는 것처럼, 조직에도 수명이 있습니다. 보통 20년에서 25년을 조직의 수명이라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100년을 가는 조직이 있습니다. 이러한 조직에 특이한 점은, 조직 가운데 지속적인 변혁과 진취가 있지만, 기본적인 가치가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코스타가 25년간 주님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왔다면, 앞으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귀를 기울였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해왔기 때문에 지속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열어 주시는 길을 주의 깊게 따라갔으면 합니다. 코스타의 기본 가치인 복음과 학문을 가지고, 코스탄들과 그것을 함께 나누며 하나님께서 코스타에 주신 고유한 것들을 유지해 나갔으면 합니다.
한가지 일화를 말씀드리자면, 1회부터 3회 정도까지 코스탄들의 뜨거운 고민은 “하나님께 은혜를 받았으니, 제가 신학교에 가야 합니까?” 였습니다. 물론 목회자의 길을 가는 것도 의미 있지만, 그 이외의 길에 대한 말씀이 드물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코스타는 은혜를 받은 분들께 캠퍼스가 mission field임을 강조하였습니다. 이 말씀이, 학문과 신앙의 통합을 고민하던 많은 학생에게 방향을 제시하였습니다. 포스트모던, IT 시대의 코스탄들에게 갈 길을 어떤 식으로 제시해야 할 가를 코스타가 고민하고 제시했으면 합니다.
Jul 14, 2010 | 코스타 사역/코스타 보이스
작년 KOSTA/USA 집회 후 layoff 통보를 받고 맘 고생하던 A 형제는, 고민 끝에 한국의 한 회사로 직장을 옮겼다. 오랜 미국 생활을 마치고 귀국해서 접한 한국의 현실은, 어떤 이의 말처럼 ‘신앙의 진검 승부처’였다. A 형제가 몸담게 된 회사가 대기업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업무 자체보다는 인간 관계에서 갈등에 처하기 일쑤였다. 경력사원으로 적지 않은 나이에 새로운 직장으로 옮긴 탓에, A형제는 주위 동료로부터 환영보다는 견제를 받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렇다치더라도, 다른 사람을 밟아야만 앞으로 갈 수 있는 현실이 암담하기만 했다. A 형제가 신앙의 진검 승부를 해야하는 또 다른 곳은 다름 아닌 아이들의 교육 현실이었다. 승자만이 살아 남을 수 있는 정글이 한국의 학교이다. 가정, 직장, 교회, 문화, 학교 등 모든 곳이 어그러저만 보이는 곳,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어떻게 이루어질까하는 의문이 드는 이 곳은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 하나님이 왕이 되시는 곳이 ‘하늘’이며, 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곳이‘땅’이다. 하지만, 이‘땅’은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버림받은 곳이 아니다. 하나님은 어그러진 이 땅을 회복시키시겠다고 계속 말씀하셨고,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셔서 그 약속의 신실하심을 보이셨다. 그리고 결국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심으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나라가 이 곳에 들어오게 되어,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이제 하나님이 왕이 되시는 모든 곳이 하나님나라이며, 바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왕으로 통치하시는 곳(그곳이 어디던 간에)이‘하나님의 나라’인 반면, 여전히 하나님의 주권이 인정되지 않는 모든 곳(그 곳이 어디던 간에)이‘땅 끝’이다. 하나님나라를 이 땅에 오게하신 예수님에 대해 전혀 들어보지 못한 미전도종족을 우리가‘땅끝’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바로 그곳에 하나님의 주권이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땅 끝’은 지역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곳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하나님의 주권이 인정되지 않는 모든 곳이‘땅 끝’이라면, 그‘땅 끝’은 우리 주위에서 참으로 쉽게 만날 수 있다. 사람을 인격으로 대하지 않고 도구만으로 여기고 기능적으로만 취급하는 직업의 현장이 바로‘땅 끝’이다. 아이들에게 숨쉴 공간조차 허락하지 않고 공부하는 기계로 만들어 밤늦게까지 학원으로 내돌게하는 한국의 교육 현실이‘땅 끝’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마음을 안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에 집중하기 보다는, 각종 프로그램으로 자신의 만족을 추구하게 하는 교회가 바로‘땅 끝’이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도록 부름받은 교회 공동체는 분명 ‘땅 끝’을 향해 나아가야만 한다. 다시 말해, 아직 하나님의 주권이 인정되지 않는 창조세계 곳곳에 ‘예수는 왕이시다’라는 복음을 선포하고,”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고후 10:5)” 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땅 끝’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어떤 이처럼 ‘평화를 이룬다’는 명목 하에 전쟁을 일으키고,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을 무참히 죽이는 일을 우리가 할 수는 없는 노릇아닌가? 세상의 논리로 ‘땅 끝’을 ‘하나님 나라’가 되게 할 수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땅 끝’으로 나아가야 할까?
예수님과 바울은 무엇이라 말씀하시는지 귀를 기울여 보자. ‘나는 이것을 내게서 떠나게 해 달라고, 주님께 세 번이나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고후 12:8~9a) 고린도 후서에는, 바울이 하나님께 몸에 있는 가시를 없애달라고 세번씩이나 간청했으나, 하나님께서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응답하셨다는 유명한 고백이 나온다. 너무도 익숙한 내용이고, 또 자주 듣고 보는 구절이지만, 그 때마다 이 내용에 대해 석연치 않은 마음이 든다. 고린도후서가 쓰여진 배경 중 가장 큰 것이 바로 ‘바울이 과연 사도냐’는 것이었다. 사도는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고 그의 죽으심과 부활을 목격한 자이여야 하는데, 바울은 뒤늦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회심했기에, 그에게는 늘 그의 사도권의 진위에 대한 논쟁이 따라다녔다. 고린도후서에서는, 바울이 글은 잘 쓰지만 말이 어눌하고 큰 이적도 보이지 않는 것을 트집잡아 바울의 사도권을 공략하는 거짓 사도들이 등장하고, 바울은 이에 대해 절규하듯이 고린도교회에게 자신의 사도권을 변론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정황 가운데서 나라면 어떤 논리를 전개할까? 아마도, 12장 초반에 나오는 바울이 세번째 하늘에 올라갔었다는 이야기를 좀 더 크게 이야기할 것 같고,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여러 병고침의 사건들을 증거로 제시할 것 같다. 그리고 ‘난 기도만 하면 하나님이 응답하신다’는 증거를 보이기 위해 작은 일이라도 크게 부풀릴 유혹을 이겨내야만 할 것이다. 아니, 나는 적어도 ‘내가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그만하면 됐다’고 하시더라’는 경험이 설령 있다 하더라도, 그냥 말하지 않고 넘어가겠지, 그걸 떠벌릴만큼 바보는 아니다. 그런데 바울은 정말 바보다. 자신의 사도권에 대해 의문을 제시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몸에 가시가 있다고, 그래서 없애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하셨다고 대놓고 떠드는 이가 바로 바울이다.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 내용을 내어놓으면서 바울이 스스로 바보가 된 이유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나는 더욱더 기쁜 마음으로 내 약점들을 자랑하려고 합니다.’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자신이 약할 때 하나님의 강함이 드러나며, 자신이 자신의 약점을 드러낼 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신에게 머물게 된다고 고백한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을 문제삼아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막는 ‘땅 끝’에 대해 자신의 약함을 자랑했다. 자신의 지위를 능력으로 삼아서 하나님의 강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약할 때 일하시는 하나님의 참 능력이 드러나게 하기 위해 애썼다. 바울은, ‘강해야 효율적이다’ 혹은 ‘로마를 정복해야 하나님나라가 온다’고 생각했던 세상에 대해 무기력하게 죽으심으로 하나님나라를 이루신 예수님을 가장 잘 이해한 자일 것이다. ‘오른뺨을 때리거든 왼뺨을 돌려대’고, ‘오리를 가자하면 십리를 가’는 하나님나라 백성의 ‘바보같은 삶’을 몸으로 살아낸 자가 바로 바울이다.
하지만, 여기서 한가지 더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면, 우리의 약함이 드러나는 대상이 다름아닌 우리의 이웃이라는 사실이다. 마태복음 25장에는 그 유명한 ‘양과 염소’의 비유가 나온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즉, 예수님(비유에서의‘왕’)과의 관계성은 다름아닌 보잘 것없는 한 사람과의 관계에 달려 있다고는 말이다. 이 세상은,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에게 시간과 정성을 쏟는 것을 어리석다고 한다. 그나마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도, 그 사람 자체로 대하기 보다는, 그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기능으로 대한다. 그렇게 한 사람의 기능을 잘 활용하는 사람을 유능하다고들 한다. 하지만, 예수님이 세상을 바라보시는 방법은 완전히 다르다. 늘 소외된 자들에게 다가가셨고 그들과 함께하셨다. 한 사람을 그 자체로 사랑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다.
20세기 유대 랍비인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은 ‘예배’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예배다”. 우리는, 하나님이 왕으로 인정되지 않는 세상의 곳곳에 하나님의 왕되심을 선포해야한다. 하지만, 그 목적을 이루는 과정 가운데서도 철저하게 예배자여야 한다. 세상의 논리인‘힘’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룰 수는 없다.만일 힘을 통해 하나님나라를 이루려 한다면, 비록 하나님나라가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것은 우리가 세운 ‘인간의 나라’이지 하나님나라가 아니다. 하나님나라는, 철저히 십자가로 대표되는 약함을 통해 하나님께서 직접 이루어 가신다. 이루어져 가는 과정을 우리의 눈으로 직접 볼 수 없다고 할 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약함을 통해 그의 강함을 드러내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신다는 말이다. KOSTA/USA-2010을 통해, 우리의 약함을 자랑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되고, 이를 통해 세상의 모든‘땅 끝’에 하나님의 주권이 드러나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Jul 14, 2010 | 코스타 사역/코스타 보이스
A형제는 초등학생 두 아들이 있다. 그는 두 아들과 함께 가끔 성경을 펴고 이야기를 나눈다. 우선 아이들에게 성경본문을 읽고 ‘본문에서 하나님을 누구라고 하나?’, ‘예수님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나?’, 그리고 ‘본문은 우리 자신들에 대해 뭐라고 말하고 있나?’ 등의 질문에 미리 답하게 하고, 그 후에 함께 앉아 본문을 살피며 이야기를 나눈다. 지난 주부터 로마서를 보기 시작했다. 로마서 1장 5절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다. “우리는, 그 이름을 전하여 모든 이방 사람으로 하여금 믿어서 순종하게 하려고, 그를 통하여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았습니다.” 그 구절을 설명하면서 ‘이거 어디서 보던 구절 아니니?’라고 물었지만, 아이들은 두 눈만 껌벅거릴 뿐이었다. ‘이사야에 나오는 구절과 비슷하지 않니?’ 그리고는 이사야 60장 3절을 펴서 읽어 주었다. – ‘이방 나라들이 너의 빛을 보고 찾아오고, 뭇 왕이 떠오르는 너의 광명을 보고, 너에게로 올 것이다.’ – 아이들의 반응은, 아니나 다를까 ‘정말 비슷하네’였다. ‘근데 아빠. 유대인들이 그렇게 특별해요?’ 큰 아이가 A형제에게 물었다.
유대인들이 정말 그렇게 특별할까? 특별하다면 어떤 면에서 그럴까? 구약의 유대인들은 잠시 제쳐두더라도, 신약시대 유대인 크리스천들은 자신의 민족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를 보면,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동료 이방인 크리스천들에게 유대인의 정체성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할례를 강요하고 정결의식을 치룰 것을 요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대인들은 정말로 할례 등의 율법 준수를 통해 하나님의 의에 기준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일까?
애굽 땅에서 벽돌을 구우며 바로의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을 먼저 찾아오셔서, 애굽에서 불러내시고 그들의 왕이 되셨음을 하나님께서 확인해 주셨다. 이스라엘이 먼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찾아 오셨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 땅을 사는 하나님나라의 백성의 삶의 모습이 어떠함을 알리시려고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셨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야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되신 것이다. 이 얼마나 엄청난 은혜인가? 자신들의 공로와 관계없이, 그들을 먼저 찾아와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너무도 잘 아는 유대인들이기에, 그들이 몇가지 율법의 조항을 준수함으로 하나님의 의에 도달하려고 했다고 결론짓기는 다소 성급해 보인다. 어쩌면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건져내시고, 자신들을 하나님의 백성 삼으시고, 그 증거로 하나님께서 친히 내려주신 ‘율법’을 차라리 ‘은혜’로 여기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 그렇게 은혜로 이르게 된 하나님의 백성의 자리에 머물기 위해, 아니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율법을 지켜 나갔을는지 모르겠다.
구약성경을 살펴보면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바라보는 두가지 관점이 공존함을 알 수 있다. 이방인에 대해 철저하게 배타적인 본문들이 있는가 하면, 요나서나 이사야같이, 유대인들의 존재 목적이 자신들만이 아니라 다른 이방인에게 빛이 되어 그들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것이라는 본문도 있다. 하지만, 이 두 관점이 공통적으로 견지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의 언약백성인 유대인을 통해 이 세상을 회복하신다’는 점이다.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어떤 유대인들은 자기 유대민족만이 회복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것이라고 믿었던 반면, 다른 유대인들은 이방인들도 “유대인이 됨”으로써 회복된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는 점이다. 신약의 유대인들, 그 중에서도 적어도 유대인 크리스천들은 후자의 의견, 즉 하나님은 이방인들도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삼으시는데, 단 그 조건은 그들이 유대인이 되어야 가능하다고 믿은 듯 하다. 그래서 예수님만이 이 세상의 유일한 왕이심을 고백하면서도, 이방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의 백성인 유대인이 되라고 권유할 수 있었다.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이 되는 길이 할례요 정결의식이기에, 초대교회 유대인 크리스천들은 이방인 크리스천들에게 할례를 받고 유대인이 되라고 강요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지만, 그 길에 들어가는 방법은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인 유대인이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과 바울은 다르게 이야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불러 백성 삼으신 이유는 다름아닌 ‘세상의 빛’이 되라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유대인들은, 그들을 통해 세상 모든 민족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통로가 되기를 기대하셨다는 말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첫 내용도 ‘너로 인해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을 선택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이 창조 세계 전체를 회복시키시겠다는 약속의 증표였다. 좀 쉽게 풀어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은 내가 회복할 땅이야’라고 약속하시면서, 유대인들을 선택하심으로써 ‘찜’하신 것이다. “지금은 비록 어그러져 있지만, 난 반드시 이 세상을 회복 시킬꺼야”라는 증거로 유대인들을 자신의 백성삼으셨다는 말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세상의 빛’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오해하고, 이방인에게 유대인으로의 개종을 요구했던 것이 참 많은 문제를 야기했던 것이다. 톰 라이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문제 해결을 위해 불러낸 유대인들이, 문제를 해결하기는 커녕 문제 자체가 되어 버린’ 형국인 셈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유대인들을 통해 인류와 맺은 언약에 끝까지 신실하셔서, 예수님을 통해 그 약속을 완성하신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이스라엘에게 요구된 완전한 순종을 이루셨을 뿐 아니라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창조세계에 하나님의 영광을 알리셨다. 바로 유대인들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셨던 그 약속을 친히 성취하신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구약의 유대민족에게 하신 ‘너희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복을 얻게 하겠다’는 약속이 이제는 교회에게 고스란히 이어졌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다’라고 하심으로써,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유대인에게 하신 약속을 갱신하신 것이다.
한민족 디아스포라로 세계의 곳곳에 흩어져 있는 청년학생인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한가지가 있다면, 우리를 어그러진 세상에서 불러내어 하나님의 백성된 교회를 세우신 이유일 것이다. 한민족 교회가 진정으로 교회다와지는것은, 우리 스스로가 만든 한민족 교회의 정체성에 얽매이지 않고, ‘세상의 빛’으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청년 학생 디아스포라를 통해 이 땅에 진정한 교회를 세우시고, 어두운 이 땅에 빛이되라고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은혜를 확인하는 KOSTA/USA-2010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Jul 13, 2010 | 코스타 사역/코스타 컨퍼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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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 13, 2010 | 코스타 사역/코스타 보이스
2009년 KOSTA/USA 집회를 마친 직후, A 형제는 지난 몇년을 다니던 회사로부터 layoff 통보를 받았다. ‘예수의 평화, 세상을 향한 용기’라는 주제로 열렸던 KOSTA/USA-2009를 통해 깨닫고 확인한 감격이 너무도 컸기에 layoff의 충격 또한 클수 밖에 없었다. 우리는 비록 지금 우리의 죄로 인해 어그러진 세상을 살고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내버려 두시지 않으시고,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의도하셨던 ‘그럴지어다’의 상태, 즉 ‘샬롬’을 회복하실 것임을 이야기했던 집회였다. 더 나아가, 비록 지금 세상은 실직, 질병 등 각종 어려운 일들을 통해 우리를 집어 삼킬 듯 달려들지만,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죽으시고 그 육신을 다시 입고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땅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미 승리하셨음을 나누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어려움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님의 완성인 샬롬을 담대하게 외칠 수 있음을 깨달으며 참 많이 울면서 감사했던 A 형제였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한 몸을 입고 이 땅에 회복된 하나님나라를 살아갈 수 있기에, 실직이나 질병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죽음조차 두렵지 않다고 외쳤었다. 하지만, layoff의 통보를 받은 A형제가 기도 가운데 외친 한마디는 ‘하나님, 살려주세요.’였다. 세상의 힘은 여전히 강하고 두렵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세상의 논리가 우리를 지배하고 통제하는 것 같더라도, 이 세상의 왕은 예수님이시다. 이토록 어그러진 세상 가운데서도 ‘예수는 왕이시다’는 소식이 바로 <복음>이다. 유대인들이 인류 역사에서 상상하기 조차 힘든 민족적인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희망 가운데 감사하며 지낼 수 있었던 것도 다름아닌 ‘하나님이 이 세상의 유일한 통치자시며 왕이시다’라는 <복음>이었다. 세상에서는 자신이 왕이라고 외치는 자들이 늘 있고, 그 힘이 너무도 커 보여 두렵기도 하지만, 이 세상의 신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며 그가 유일한 왕이시다. 더구나 유대인들은 모든 만물의 왕이신 한분 하나님의 백성임을 잘 알았기에, 언젠가는 하나님의 백성다운 모습으로 회복될 것임을 믿고 감사할 수 있었다. 그런 힘이 바로 다니엘에 사자굴에서도 꿋꿋할 수있는 이유였으며, 예레미야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던 이유이기도 했다.
‘하나님이 왕이시다’라는 이 기쁨의 소식은, 예수님이 오시면서 그 의미가 더욱 확실해졌다. 예수님이 오실 당시 세상은 로마가 지배하고 있었으며, 그 지배력은 너무도 강대해서, 로마의 가이사만이 유일한 왕처럼 보였다. 하지만, 제 2위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이 세상의 진정한 통치자인 사탄의 세력을 무력화시키셨다. 그것도 우리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강한 힘을 통한 정복이 아닌, 십자가에 무기력하게 돌아가심으로 이루셨다. 세상의 논리를 뒤짚는 하나님의 진리의 능력으로 죽음의 세력을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진정한 승리를 이루신 것이다. 그래서 초대교회 는 이렇게 외쳤다. “예수는 왕이시다” 초대교회의 “예수는 왕이시다”라는 외침은, 지금처럼 종교적인 용어가 아니었다. 그 고백은 “가이사가 주인이 아니고, 예수님만이 주인이시다”라는 다분히 정치적인 외침이었다. 초대교회는 이 고백에 목숨을 바쳤고, 그에 대한 엄청난 댓가를 치루었다.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은, 세상 지배자들의 힘이 아무리 거대할지라도, 왕이신 예수님께서 어그러진 세상을 회복하실 것을 신뢰하고 한걸음 나아갈 수 있었다. 이것이 ‘믿음’이다. 하나님은 어그러진 이 세상을 회복시키 시기로 작정하시고, 여전히 딴길로 가는 우리를 믿어 주신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믿음에 반응하여, 감사함으로 하나님만을 신뢰하며 이 세상을 살아간다. 이것이 ‘믿음’이다.
‘예수는 왕이시다’라는 기쁜 소식, 즉 <복음>은 우리가 이 땅에서 ‘믿음’으로 하나님나라를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이다.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하나님만이 왕이 되셔서 어그러진 이 땅을 회복시키실 것임을 선언한다. ‘나’라는 한 개인이 예수를 믿고 천국에 간다는 단순한 고백을 넘어, 우리를 통해 이 세상을 회복시키시고 예수님만이 왕이 되신다는 <복음>이 이번 KOSTA/USA-2010을 통해 선포되고, 우리는 그 고백에 내 모든 것을 걸게 되는 모습을 기대해 본다.
Jul 6, 2010 | 찬양과 예배/이유정의 예배를 이야기하자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시 10:4)
예배는 드리는 자보다 드릴 대상이 더 중요하다. 그런데 오늘 날 많은 예배가 ‘드리는 자’의 경험 쪽으로 무게 중심을 이동하고 있다. 우리가 예배하는 대상에 대해 소홀히 할 때 두 가지 위험이 생긴다. 하나는 알지 못하는 신에게 예배하게 된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무신론적 공격에 대해 아무런 변증도 못하는 무력한 감상주의에 빠지고 만다.
역사적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에서부터 하나님은 없다는 무신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반 기독교적 운동과 학문이 일어났고 최근 그 양상은 더욱 심해지고 있다.
현대 과학자 가운데 기독교 신에 대해 가장 신랄하게 공격한 자가 있다. 진화 생물학자로서 옥스퍼드대 석좌교수인 리처드 도킨스이다. 그의 2006년도 저작 《만들어진 신 the God Delusion》은 만감을 교차하게 하는 책이다. 《이기적 유전자》로 전 세계 과학과 종교계에 파란을 일으켰던 도킨스의 신작인 이 책은 뉴욕타임즈 연속 베스트셀러로 세간에 주목을 받았다.
이 책은 일면 의미 있는 도서이다. 무신론자인 저자는 기독교의 치부를 기독교인 대신 파헤쳐 주었다. 돈 주고도 못할 대단한 과업을 엄청난 시간을 들여 헌신적으로 연구해주었고, 문학적으로 나름 가치 있는 글로 남겨주었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기독교인들이 깊은 반성과 반추할 수 있는 기회를 친절하게 제공해 주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인들은 이 책을 빌려서라도(?) 읽을 필요가 있다. 책이 두꺼워 불편하긴 하지만….
다른 한 편, 이 책은 3가지 의미에서 슬픈 책이다. 기독교의 환부가 생각보다 심하게 곪은 것을 보여준다. 고름이 터져 다른 이에게 악취를 풍긴다. 만용을 넘어 자만에 빠져있다. 그래서 오늘의 기독교는 끊임없이 개혁되어야 한다. 고인물이 썩는 것처럼 어떤 종교라도 끊임없는 자기성찰과 갱신을 추구하지 않으면 부패할 수밖에 없다.
두 번째 슬픔은 기독교 환부에 대한 그의 전투적 태도가 어딘가 어설프다. 옥스퍼드 대 역사신학자인 알리스터 맥그라스가 《도킨스의 신》에서 밝혔듯이 도킨스는 이미 《이기적 유전자》때부터 뛰어난 과학의 보급자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벗어났다. 그는 난폭한 반종교적 논객이 되어 자신의 입장을 논증하기보다는 설교하고 있다.1)
즉 도킨스는 진화 생물학 분야에서는 지적으로 활기 넘치는 무신론자이지만 기독교에 대해 논의하면서는 갑자기 전면전을 치루기 위해 과장, 단순화, 허위진술까지 일삼는 학생 토론클럽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맥그라스의 《도킨스의 신》은 사실《만들어진 신》이전의 책들인 《이기적 유전자》와 《눈먼 시계공》에 대한 맹점을 차분하게 지적해 준 대단한 역작이다.
또 하나의 슬픔은 이토록 남의 종교의 치부를 드러내기 위해 대단한 헌신과 노력을 기울인 도킨스에게 깊은 연민의 정을 느낀다. 그는 기독교의 음지에는 박식하지만 양지에 대해서는 심하게 무식하다. 평생 남의 뒷얘기나 가십거리를 들춰내는데 열심인 불쌍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 인생의 환희와 기쁨, 감사와 행복은 쓰레기 같은 단어들이다.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지식인인 그가 왜 굳이 이렇게 어두운 그늘과 냄새나는 썩은 고깃덩어리에 그토록 집착했는지 이해가 안 간다. 실재로 그가 다룬 기독교의 치부들 가운데 상당수가 아쉽게도 가십성 기사요, 인터넷에 떠다니는 싸구려 재료들에다 과거의 케케묵은 논쟁이 상당수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체험해보지 않은 그 무엇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직접 체험해 보기 전에는 제대로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는 귤의 생김새, 색깔의 종류, 원산지, 재배방법, 유통과정, 그리고 귤로 만들 수 있는 다양한 요리에 대해 얼마든지 연구하고, 책도 쓸 수 있다. 그러나 직접 그 귤을 먹어보기 전에는 결코 귤의 맛을 알 수도 설명할 수도 없다.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종교, 체험하지 않은 기독교에 대해 제아무리 많은 객관적인 자료와 주관적인 느낌을 논해도 결국 그는 기독교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으로 그친다. 그래서 수사학적인 기교와 문장의 전개방식은 현란할지 모르나 그 말에 힘이 없다. 가슴에 남는 감동과 삶을 움직이는 지혜가 없다.
참으로 아쉽다. 남의 집 쓰레기나 뒤지며 더러운 냄새에 인상 찌푸리고 격분하는 지성이 아니라 인류의 희망과 꿈, 헌신과 평화, 화목과 하나 됨, 희생과 사랑을 이야기하고, 사람들의 머리보다 가슴을 움직이는 감성과 지성을 조화한 창조적인 지성이 되어줄 수는 없을까? 언젠가 그가 기독교의 진수를 제대로 경험하고 《만들어진 신 the God Delusion》 후속 탄으로 책 한 권 써주었으면 참 고맙겠다. 《구속하는 신 the God Deliverer》이란 제목으로 말이다.
– 이유정 목사(한빛지구촌교회 예배디렉터)
1) 알리스터 맥그라스, 리처드 도킨스 뒤집기 – 도킨스의 신 (서울 : SFC, 2007), p. 31.
Jun 24, 2010 | 찬양과 예배/이유정의 예배를 이야기하자
작년에 한빛지구촌교회 예배사역 7년 만에 4개월 안식을 가졌다. 지쳤던 심신도 회복하고 지난 사역도 정직하게 돌아볼 수 있었다. 예배 공부를 위해 도미한지 10년, 한 분야에서 10년 집중하면 맥이 뚫린다고 하는데 말 그대로 예배의 맥이 보였다.
이 깨달음을 바탕으로 책을 쓰기 시작했다. 글이 진행될수록 예배에 대해 얼마나 무지했는지 눈이 뜨였다. 예배공부 4년에 전임 예배목사 7년 된 자가 예배에 무지하다면 문제 아닌가? 그러나 예배를 몰라서가 아니다. 지식과 정보가 없어서도 아니다. 기술이 부족해서도 아니다. 예배의 본질에 목숨 걸지 않았기 때문이다.
많이 반성했다. 예배보다 예배드리는 일에 더 열심을 냈다. 비본질적인 것에 바빴다. 일 때문에 가정도 희생시켰다. 아내가 수없이 지적했는데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렸다. 완벽주의, 일중독이란 말도 들었다. 뒤늦게라도 깨달은 것을 감사하고 있다.
우리는 종종 예배 행위자체를 예배로 착각한다. 예배 세미나에서 만난 찬양팀원들에게 종종 듣는 말이 있다. “주일 날 찬양 봉사에 대한 의무감, 책임감 하나 때문에 교회 나올 때가 많아요.” “찬양하고 단에서 내려오면 예배에서 내 역할은 끝났다, 내 할 일 다 했다는 안도감만 남아요.” 일반 성도들도 비슷한 고백을 한다. “주일날 교회 오는 것은 일종의 책임감이죠. 예배시간에 하나님을 만난다는 거룩한 기대감보다는 솔직히 집사로서 마땅히 성수주일 해야 하는 의무감이 앞섭니다.”
하나님은 일꾼보다 예배자를 찾으신다. 하나님을 구하는 마음을 찾으신다. 예수님께 마음을 온통 빼앗긴 사랑의 열병에 빠진 자를 찾으신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눅 10:27)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예배는 행위로 끝내고, 유명 연예인과 스포츠 스타에게 마음을 다 빼앗긴다. 하나님을 배제한 사랑은 우상숭배로 빠진다. 사람을 온전히 사랑하는 길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야 신적 사랑이 넘쳐 사람을 온전히 사랑하는 능력이 생긴다.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눅 10:27)
이것이 예배자를 통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이다. 즉 우리가 예배할 때 하나님이 일하신다. 우리가 예배할 때 이웃을 사랑하는 능력이 흘러나온다. 그러나 오늘 우리 시대는 이 순서가 뒤바뀌었다. A. W. 토저의 말처럼 ‘예배자보다 일꾼이 많은 시대’이다. 하나님을 ‘일손이 부족해서 쩔쩔매는 공사판의 감독’[footnote]A. W. 토저, 이것이 예배이다 (서울: 규장, 2006), p. 66.[/footnote] 정도로 여긴다. 그래서 하나님을 위해 바쁘게 일한다. 심각한 착각이다. 하나님은 일꾼보다 예배자를 원한다.
예배자로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삶의 현장에서 따로 시간을 내서 성경공부하고 찬양하고 예배를 드리는 것인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우리는 자꾸 예배라는 것을 어떤 행위로 규정하려고 한다. 예배는 행위 이전의 문제이다. 마음의 문제요 본질의 문제이다. 여기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예배행위는 껍데기다. 예배자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 사는 것이다. 가정에서 설거지를 하는 주부, 직장에서 커피를 타는 사무원, 길거리의 청소부 등 어떤 직종, 어떤 일이든지 그 일을 하나님 앞에서 한 점 부끄러움 없이 행하는 것이다.
17세기 프랑스의 한 수도원에서 평범한 주방 일을 하면서 당대의 영적지도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친 로렌스 형제(Br. Lawrence)는 삶으로 드리는 예배의 좋은 모델을 보여준다. ‘주방성자’로 불리는 로렌스는 항상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살았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는 어떤 프로그램으로 체험할 수 없으며, 반복되는 연습을 통한 삶의 습관이라고 했다. 즉 임재란 하나님이 언제나 곁에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하나님께만 영혼의 관심을 집중하는 것이다[footnote]로렌스 형제, 하나님의 임재연습 (서울: 좋은씨앗, 2008), p. 18.[/footnote].
오늘날 많은 교회가 하나님의 임재 없이 ‘내’가 팔팔하게 살아있다. 내 관심사가 하나님보다 우선한다. 교육도, 훈련도, 전도도, 선교도, 심지어 예배조차도 하나님 임재 없이 ‘일’로 행해진다. 예배자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일만 하는 사람은 나무, 풀, 짚을 쌓아올리는 것에 불과하다. 나중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불로 심판할 때 다 타버릴 것들이다. 하나님은 일꾼보다 예배자를 찾으신다. 그 예배자를 통해 하나님 자신이 일하신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이다.
– 이유정 목사(한빛지구촌교회 예배디렉터)
Jun 19, 2010 | 삶과 신앙/최주희의 사랑이야기
대학생들의 혼전 성관계에 대한 여러 설문조사 결과는 가히 충격적이다. 2009년 알바천국 ‘성의식’ 설문조사에 의하면 대학생 10명 중 7명이 성관계 경험이 있고 그중 70%가 만난 지 한 달 이내 성관계를 가졌다. 2009년 학원 복음화 협의회 ‘전국 대학생의식 조사’에 의하면 10명 중 6명이 성관계를 경험하였고 기독대학생중 23.9%가 ‘혼전성관계 가능’이라고 답했다. 또한 2009년 죠이선교회 ‘대학생들의 성의식 조사’ 결과는 혼전성관계 ‘필요하다’가 67%이다. 동거 ‘반대’는 23%로 77%가 동거를 찬성하거나 인정한다. 또한 2010년 월드컵 경기가 있는 날 없어서 못 판 품목이 김밥, 치킨, 그리고 콘돔이라고 한다. ‘2002년 월드컵 베이비’라는 신종어도 있다.
이런 현실 앞에 이제는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음을 느낀다. 위의 언급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집단만의 통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너무나 많은 기독교 젊은이들도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며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고 있다.(엡4:18-19)
혼전 성관계의 명분은 이러하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너를 너무나 사랑하기에 이 사랑을 마음껏 표현해 주고 싶다!’고 말한다. 혹 ‘결혼 후 떳떳하게 성관계를 가지자’는 여자의 반응에는 ‘넌 날 못 믿니?’라고 따지기까지 한다. 여자는 거절하면 남자를 끝내 믿지 못한다는 말로 여기고 남자가 화를 내거나 돌아설까 두려워 그저 따라갈 뿐이다. 하지만 만약 여자가 성관계를 거절했기 때문에 떠날 남자라면 진작 보내는 것이 낫다. 그런 남자는 결코 신뢰할 수 없다. 더욱이 평생을 믿고 삶을 나누기에는 너무나 불안하다. 사실 이런 상황에서 여자는 상냥하고 부드럽게 “널 믿지! 그리고 네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다 알지. 하지만 우리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떳떳한 사랑을 나눌 때 까지 참자!”라고 말하며 빨리 밝고 사람 많은 곳으로 나와야 한다. 그런데 어떤 여자들은 야한 옷차림과 향수, 야릇한 몸짓으로 오히려 남자를 유혹하기도 한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그것은 자신의 몸을 파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
혼전 성관계를 가지는 사람들은 그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 동기와 목적을 모두 ‘사랑’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절제할 수 없는 성 충동’ 때문이다. 남자는 사랑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여자와 성관계를 가질 수 있다. 또한 한번 성관계를 가진 여자에 대해 더 이상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 그저 육체적 욕구만 채우려 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남녀 관계는 성관계를 가지기 전과 가진 후가 정반대로 변한다. 성관계를 가지기 전에는 남자가 여자에게 적극적으로 열애해왔지만, 성관계 후에는 여자가 남자를 적극적으로 따라다니는 격이 된다. 왜냐하면 남자는 여자에게 매력을 잃고 오히려 그녀를 헤픈 여자로 우습게보지만, 여자는 이미 몸을 주었기에 이 사람과 반드시 결혼해야 한다는 불안한 생각으로 오히려 지나치게 적극적이 된다. 그럴수록 남자는 여자가 귀찮아지고 짜증이 나며 슬그머니 관계를 끊는다. 실제로 혼전 성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결혼할 확률은 매우 낮다. 1달 이내 헤어질 확률이 21%, 1년 이내 헤어질 확률은 81%라고 한다. 결국 사랑은 깨어지고 서로가 온 몸과 온 마음으로 상처를 주고받는 것이다.
혼전 성관계로 인한 결과는 이뿐 아니다. 남자 여자 모두에게 여러 가지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오는데 여자의 경우 더 심각한 아픔을 겪는다. 첫째, 자존감이 낮아지고 내면이 불안정해 진다. 도덕성은 자존감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떳떳하지 못한 행위를 하고 있는 사람들은 결코 자기를 존중하거나 사랑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혼전 성관계를 가지는 사람들은 수치심과 죄책감으로 늘 잔잔한 불안감 속에 우울해지기 쉽고, 또한 자신을 사랑하고 신뢰하기 어렵다.
둘째, 그들의 만남이 인격적인 만남이 아닌 욕구 충족에만 급급한 만남이 되기 쉽다. 서로를 알아가며 영적으로나 지적으로 전인격적 친밀감을 충족하고 서로를 성숙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셋째, 임신의 가능성과 낙태의 위험이다. 혼전 성관계는 계획 없이 충동적으로 하는 것이어서 임신할 가능성이 크다. 만약 낙태를 한다면 이는 살인이다.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생명체가 아닌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넷째, 낙태를 한 사람들은 불임의 가능성이 매우 높다. 낙태 시 자궁벽을 긁어내는 작업은 후에 정자와 난자가 착상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고, 혹 임신하여도 유산의 가능성이 높다.
다섯째, 만약 결혼한다하여도 서로에 대한 존중감과 신뢰도가 낮다. 이것은 혼전 성관계 경험자가 그렇지 않은 부부의 이혼율보다 3배 높다는 연구 결과에도 나타난다. 그들이 제시하는 이유로는 혼전 성관계를 가진 자의 특징이 관습에 덜 메이고 약속이나 언약을 적게 하며 그것을 지킬 개인적인 능력도 약하다는 것이다. 또한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다툼과 불화를 일으키며 폭력과 음주 문제가 많다는 것이다. 결국 겉으로는 열정적인 사랑을 하며 자유로운 사람처럼 보이지만, 속내는 감정적이며 책임감과 자기조절 능력이 약하다는 것을 나타낼 뿐이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행위에 대해 하나님과 계산할 날이 온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도 마지막 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에 따라 받게 되어있다. 특별히 혼전 성관계, 즉 간음(십계명 중 제 7계명인 ‘간음하지 말라’에서 간음은 부부가 아닌 남녀가 성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을 행한 사람들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매우 엄하게 책망하시고 경고하심을 볼 수 있다. 이 하나님을 우리는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고후5:9-10, 고전6:9-10, 갈5:16-21, 골3:5-6, 데전4:1-5, 야4:4, 벧전1:15-17, 계2:19-23). 이것이야 말로 혼전 성관계의 진실이다.
Jun 19, 2010 | 코스타 사역/코스타 컨퍼런스
미국에서의 유학생활을 시작한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작년이 되어서야 코스웍을 마치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공부를 잘해서 장학생이 아니라, 오래 공부해서 장(長)학생인 셈이다. 요즘 같은 불경기에 학생처럼 좋은게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오랜 시간동안 갇혀있는 듯한 삶을 살아온 나로서는 이젠 탈출구가 필요하다는 고민을 하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청년/학생으로, 혹은 그들을 섬기며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이런 고민들이 있을 것이다. 상급 학교 진학을 위해 머리를 싸매고 있는 사람들이 가진 답답함이란 말로 표현하기 힘들 것이고, 결혼을 생각하고 있으나 아직 마땅한 배우자를 찾지 못한 청년들의 고민보다 더 심각한 고민이 있을까. 이미 바닥을 친 통장의 잔고로 인해 시름에 놓인 친구도 있고,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 놓인 가족들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후배와 제자들의 절절한 눈물을 보면 참 마음이 아프다. 그렇다고 청년/학생의 때를 지나 장년이 된다면 그 삶의 무게가 한결 가벼워질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손에 잡힐 듯한 삶의 일상적인 영역에서의 어려움들이라고해도 이런 종류의 고난도 무시할 수 있을만큼 쉽게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이런 문제들로 인해 정신적 질병에 시달리기도 하고 자해와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의 삶이 자기 앞가림을 하기에도 급급한 마당에 복음과 민족과 나라는 어디있으며, 땅의 끝은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1986년 여름, 고물차를 끌고 또 아이들을 들쳐업고 전국 각지에서 모여 든 젊은이들이 있었다. 폐차장을 연상케하는 주차장에 세워진 참석자들의 고물차들은 당시 아무런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조국의 암울한 미래를 대변하고 있는 듯 했다. 그렇게 첫번째 코스타 수양회에 참석했던 코스탄들 역시 지금 우리가 겪고 있던 유학생으로 고뇌를 고스란이 안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모일 수 밖에 없었고, 눈물을 뿌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은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선배들이 처해있던 시대적인 문제 속에서 풀어야 할 숙제들과 현실에 짓눌렸던 총제적인 어려움은 어쩌면 사람의 노력으로는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복음으로 인해 감사하며, 눈물로 민족의 미래를 하나님 앞에 의탁함으로 마침내 그들의 땅끝을 발견할 수 있었다.
25년 전 코스탄들의 어려움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고민 사이에는 큰 괴리감이 있는 듯 하다. 그 동안 강산이 두 번이 넘게 바뀌면서 시대도 달라졌고, 사상과 가치체제 그리고 세대의 폭도 달라졌으니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난 25년 동안 KOSTA/USA를 통하여 미국 내 한인 학생/청년들을 향한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다. 어그러진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필연적으로 겪을 수 밖에 없는 삶의 고통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의 눈으로 마주할 수 있게 하셨고, 우리로 민족과 세대를 끌어 안을 소명과 소망을 알게 하셨다. 또한 편하고 안정된 삶을 추구하고 그것에 만족하며 안주하는 것이 아닌, 삶의 영역을 뛰어넘을 수 있는 땅끝을 향한 도전을 부어주셨음에 감사드린다.
지금까지 KOSTA/USA를 통해 수많은 헌신자, 그리고 일상에서 복음적인 삶을 살아가며 끊임없이 도전하고 실현해가는 숨겨진 보석같은 코스탄들이 있다. 이제 25년을 맞이하는 2010년 KOSTA/USA 연차수양회를 통해 코스타 운동을 이어가고, 하나님 나라를 이땅에 세워갈 한인 청년/학생 디아스포라를 부르신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귀한 복음의 축제와 부르심의 현장으로 여러분들을 초대한다.
KOSTA/USA
총무간사 김동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