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역사속에 왜곡된 민족주의, 인종주의, 파시즘, 제국주의, 패권주의, 일방주의가 침투해 들어온 것에는, 구약 이스라엘 공동체의 성격을 ‘민족적, 인종적 관점’으로 오해해온 것도 큰 영향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구성원의 대부분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열 두 아들의 혈연적 후손으로 구성된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이스라엘은 혈연 보다는 ‘언약’에 의해 구성되는 공동체였습니다.혈통적으로 이스라엘일지라도, 그가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않으면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는 말씀이 수차례 반복됩니다. 동시에 혈통적으로 비 이스라엘일 지라도, 하나님의 율법과 정의를 사모하여 그 공동체에 들어오고자 하는 이들은 이스라엘에 편입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마태복음의 예수님 족보에 나오는 인물 중, 다말, 라합, 룻, 헷 족속 우리야의 아내 등 다수가 이방출신이었습니다. 근본적으로 누구나 이스라엘이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2:36-37]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을 떠나서 숙곳에 이르니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량이요 수많은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가축이 그들과 함께 하였으며 [렘18:27-29] 너희의 전에 있던 그 땅 거민이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였고 그 땅도 더러워졌느니라 너희도 더럽히면 그 땅이 너희 있기 전 거민을 토함 같이 너희를 토할까 하노라 무릇 이 가증한 일을 하나라도 행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 (개정개역)
[이사야 56:3-7]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그의 백성 중에서 반드시 갈라내시리라 하지 말며 고자도 말하기를 나는 마른 나무라 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내가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잡는 고자들에게는 내가 내 집에서, 내 성 안에서 아들이나 딸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그들에게 주며 영원한 이름을 주어 끊어지지 아니하게 할 것이며 또 여호와와 연합하여 그를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그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에스겔44:9]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이스라엘 족속 중에 있는 이방인 중에 마음과 몸에 할례를 받지 아니한 이방인은 내 성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아모스 9:7] 이스라엘 백성들아 너희가 나에게 있어 에디오피아 백성과 무엇이 다르냐? 이스라엘을 에집트에서 이끌어낸 것이 나라면 블레셋 백성을 갑돌에서 데려 내오고 시리아 백성을 키르에서 데려온 것도 내가 아니겠느냐?
[누가복음 3: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위의 말씀들을 보면, 출애굽 당시부터 다양한 족속들(이집트 내의 피압박자들)이 이스라엘 공동체에 합류해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출발했었고, 이방인일지라도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는 마음과 육체의 할례를 통해 이스라엘 공동체에 합류 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오해하고 있지만, 이스라엘은 혈연에 기반한 공동체라기 보다 (그들중 다수가 아브라함의 혈연적 후손일 지라도), 언약에 기반한 공동체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배반 할 경우 백성중에서 끊쳐진다는 것은, 단순한 혈연이 하나님의 백성의 자격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또한 가나안 땅은 약속의 땅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언약의 땅(The Land of the Covenant)’, 즉 언약을 지키는 자에게 주어진 땅이며, 언약을 지키지 않으면 잃어버리게 되는 땅이었던 것입니다. 앞 글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이스라엘이 그 땅을 얻게 된 것은 가나안 원주민들의 죄악이 극에 달해 땅에서 뽑힐 정도로 관영했기 때문이었으며, 하나님은 이 사실을 분명히 하시고, 그 땅에서 거주하기 위해 지켜야 하는 언약을 이스라엘과 맺으십니다. 그러므로 그 언약을 배반한 이스라엘이 그 땅에서 쫓겨나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은, 이스라엘이 특별한 백성이고, 이방인들보다 우월하며,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안보와 번영을 무조건 적으로 보장하신다는 ‘선민사상’과 정확히 충돌합니다. 심지어 성궤를 가지고 나가도 죄가 있으면 전쟁에서 패배했습니다. 어떤 ‘상징, 명칭, 이름, 혈연’이 아닌,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는가가 하나님의 백성을 구분하는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러한 원칙을 현재 국제관계의 상황에 적용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현재 민족국가 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지지하고, 팔레스타인 인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학살과 폭력에는 눈을 감는, 미국과 한국 기독인들의 입장이 과연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는지 심각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현재 세계 많은 민족 국가중 하나일 뿐인 국가 이스라엘을, 성경 예언의 성취로 확신하거나, 위에서 설명했듯이 언약공동체이자 신앙공동체였던 구약의 이스라엘과 등치 시킬 수 있는지는 상당히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 설령 그것에 동의한다 하더라도, 인종이 아닌 언약의 순종여부를 보고 심판하셨던 성경의 역사를 볼 때, 팔레스타인 땅이 무조건 인종적 이스라엘인들에게 주어졌다고 믿는 것이 성경적인가도 의문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현재 미국의 지원과 강력한 힘에 기반해 그 땅에서 대대로 살아온 팔레스타인인들을 몰아내가는 이스라엘은, 다윗 보다는 골리앗에, 피해자 보다는 압박자와 가해자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현재 이스라엘에는 수천명의 팔레스타인들이 적절한 재판도 없이 구금되어 있고, 지난 2008년 12월 27일 가자지구 전쟁때는 무방비 상태의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해 1400명 가량이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살해되었습니다. 하마스의 로켓 공격도 문제이지만 이로 인해 사망한 이스라엘인은 8년동안 20명에 불과한 반면, 이스라엘 전투기가 하루 공격으로 300명에 가까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죽이는 것이 흔한일이라고 합니다. 2010년 1월에는 모사드 요원으로 추청되는 암살자들이 유럽과 호주 등의 여권을 위조해 두바이의 호텔에서 하마스 간부를 암살하기도 했고, 2010년 5월 31일에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로 향하던 국제 구호선의 승선자들에게 발포해 10여명을 숨지게 하는 등, 이스라엘의 정책은 말 그대로 국제법과 인권을 무시하고 국가 테러를 통해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모습입니다. 역사적으로 중세의 기독인들은 반유대주의에 기반해, 유대인들을 처절하게 차별하고 핍박했습니다. 이와 반대로, 현재 보수적 기독인들은 이스라엘이 하는 것은 무조건 옳다는 식의 반대극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이스라엘이 핍박과 차별을 받은 것이 사실이지만, 미국내에서는 홀로코스트가 다른 역사상의 학살들보다 특별하고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인식이나 (실제로 북미와 남미의 원주만들에 대한 학살은 숫자나 처참함에서 비교할 수 없을 정도임에도, 홀로코스트에 비하면 무시되다 시피 한 것이 현실입니다), 또한 이스라엘에 대한 어떠한 비판과 문제제기도 곧 ‘반유대주의’로 취급되고, 결코 용납될 수 없다라는 식의 분위기가 미국 내에서 팽배한 것도 상당히 기이한 현상입니다. 심지어 미국의 몇몇 국제정치 학자들은 미국의 외교정책은 이스라엘의 로비에 의해 납치 되었다고 할 정도니까요. 예전에 한 유대인 친구와 이야기 한 적이 있는데, 웃으면서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이 유대인들보다도 오히려 이스라엘 문제에 열을 올리고 극단적인 친이스라엘 정책을 보이는 것이 자기도 신기하다는 말을 하더군요. 실제로 미국의 팻로버트슨 목사 같은 경우는, 팔레스타인의 완전 점령을 주장하는 이스라엘 극우파의 입장을 지지해 왔는데, 지난 1995년 영토와 평화의 교환이라는 개념 아래 팔레스타인과의 평화를 시도했던 이츠하크 라빈 전 이스라엘 총리 암살과 2006년 샤론 전 총리의 뇌출혈로 인한 사망을 하나님의 땅을 나눈 데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까지 주장한 바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런 조악하고, 성경적 근거가 희박한 주장을 상당수 미국 기독인들이 공감하고 있다는 점은 무척 안타까운 일입니다. 유대교 신자들이 구약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특별한 마음과, 마지막 때에 이들이 예수님을 영접할 것을 기대하는 것은 기독인들에게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것과 현재 국가 이스라엘의 정책은 구분할 필요가 있을 것 같고, 무엇보다 상식과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정의에 비춰볼때, 이스라엘이 하는 것은 무조건 지지해야 한다는 입장은 상당히 비성경적이라고 생각됩니다.
한편, 미국의 보수기독인들안에는 “God bless America”로 대표되는 자국중심주의와 기독교신앙의 결합이 두드러집니다. 미국은 ‘기독교 국가’이고 그렇기에 ‘선’이며, 하나님이 미국을 ‘축복’하실 거라는 생각은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상당한 문제점을 드러냅니다. 먼저 기독교 국가라는 개념 자체가 성경적인가, 그것을 무엇으로 정의할 수 있는가 질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히 기독교 인구가 많다고 해서 그 국가가 기독교 국가인가,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나님나라의 운동이 일개 국가에서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인가 등 의문점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의 후손이기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축복을 받을 것이며, 이방과의 전쟁에서 이길 것이라고 생각한 구약 이스라엘의 선민사상의 오류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궤를 가지고 나갔어도, 이스라엘 안에 죄가 있을 경우 전쟁에서 패배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냐가 아니라, 그들이 오늘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느냐 였습니다. 언약을 지킨 다는 것은 하나님의 정의를 따를것을 의미했는데, 하나님은 혈연이나 기독인들의 숫자가 아닌, ‘정의와 공평’에 따라 이스라엘과 이방을 심판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이 선을 행한다면 하나님이 미국의 편일수도 있겠지만 불의를 행한다면 하나님은 자신의 정의에 따라 미국이나 그 어느나라도 심판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링컨대통령은 하나님이 우리편인가를 기도하지 말고 우리가 하나님 편인가를 기도하라고 했는데, 미국의 보수 기독인들은, 미국이 무슨 짓을 하든 하나님이 자기들 편이고 자기들 편이어야 한다고 믿음으로서, 성경과 기독교의 정신을 왜곡했으며, 스스로에 대한 반성력을 상실하고, 자국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합리화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짐 월리스는 자신의 책 ‘회심’에서 진정한 회심은 우리가 섬기던 모든 죄와 우상에서 돌아서는 총체적인 것이라고 말하면서, 우리가 하나님 외에 절대적으로 생각하는 그 어떤 것이 우상일 수 있고, 미국의 보수 기독인들은 ‘미국의 안보와 번영’을 우상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을 했습니다. 미국에서 살면서 관찰한 보수 기독교의 모습을 보면, 결국 미국이 기독교화가 된 것이 아니라 ‘기독교가 미국화’ 된 것이, 오늘 미국 보수 기독교의 안타까운 현실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국의 기독인들안에도 이런 민족중심적 사고가 많이 나타납니다.그 예로, 한국은 특별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제사장 민족이요, 앞으로 공산권과 무슬림을 향한 복음의 서진을 위해 하나님이 크게 쓰실 민족이라는 생각을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한국 교회에 부어주신 축복은 말할 수 없이 놀랍고, 저도 위의 바램이 이루어 지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신약성서 이후 ‘제사장 민족’이라는 개념이 성경적으로 가능한가, 그리고 우리안에 집단적 물질적 축복과 성공을 신앙적으로 합리화하는 기대가 있는 것은 아닌가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3세계에 나간 일부 한국의 선교사들이, 한국처럼 예수 잘믿으면 경제가 발전하고 잘살게 된다는 것을 복음(?)으로 가르쳐서 문제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합니다 (그게 복음의 핵심이라면, 예를 들어 기독인과 교회가 적은 일본은 왜 잘 살고 있는걸까요? 축복이 아닌 핍박을 받은 순교자들의 삶은 또 어떻게 설명합니까?). 한국교회와 한국의 미래에 대한 기대를 보면, 한국의 선교사들이 유라시아 대륙으로 뻗어나가는 동시에, 한민족이 대륙을 달리며 세계 역사를 주도할 것이다(?)는 식의 희망을 피력하는 분들이 있는데, 이러한 담론에서는, 심지어 과거 제국주의 선교모델과의 유사성까지도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러한 축복론적 관점은 하나님의 윤리와 정의보다 성공과 부를 우선하게 하고, 그에 대한 욕망을 신앙적으로 합리화 해줄 가능성이 큽니다. 내부적으로는, 한국의 보수 기독교가 독재정권시기 비판의 목소리를 강하게 내지 못한 것, 많은 사회 이슈들에 있어서, 약자의 입장에 서기 보다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강자의 편에 서는 경우가 많았던 것에 대해서도, 교회안에 존재하는 국가주의, 민족주의적 사고의 악영향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엄밀하게 말해, 하나님이 어떤 민족이나 국가의 편이라고 믿는 것은 세계 열방의 하나님을 일개 민족이나 국가의 수호신으로 전락시키는 신성모독적 행위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목적을 위해 이용될 수 있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중세의 십자군이나, 이스라엘의 왜곡된 시오니즘, 그리스도인들안에 존재하는 인종주의, 민족주의, 패권주의, 선민사상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명백한 왜곡입니다.
P.S. 미리 소개하는 결론
이 시리즈의 결론이 되겠지만, 결국 근본적인 문제는, 대부분의 국민들은 물론이고 기독인들 마저, 국제관계와 국내 정책에 있어 “안보와 번영”을 최 우선으로 한다는 데 있습니다. 쉽게 말해, 안보의 위협을 제거하고 경제발전을 이루어 잘먹고 잘살게 되는 것이 지고지선의 가치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전형적 부국강병의 논리이지요. 오늘이 한국에서는 지방선거일인데, 결국 선거를 좌우하는 메시지도 이렇게 요약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안믿는 이들이 이를 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기독인들마저 이를 최고의 가치로 추구하고 있다는 점은 실로 안타깝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안보와 번영”이 아니라, “공평과 정의, 화해와 평화”로 대표되는 하나님의 법도를 최우선으로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처음 도입 질문에 소개했듯이, 이라크 파병과 같은 정당성이 부족한 정책에 있어, 저는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을 받더라도 국가 이익보다 정의를 우선하고 끝까지 반대할 사람들은 기독인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되고 안되고의 여부를 떠나, 모두가 이익을 좇을 때라도, 정의를 위해 No라고 말하는 자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니겠습니까? 다른 말로, 궁극적인 하나님나라의 정의와 승리를 믿는 자가, 당장의 이익이나 위협에 굴하지 않고 정의를 외칠 힘을 갖게 된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많은 보수 기독인들은 오히려 성경의 가르침인 ‘정의’ 보다도, ‘국익’을 금과옥조로 따르는 것 같아 의아함을 많이 느낍니다. 이런 왜곡의 결과는 역시 국가의 기독교화가 아니라, ‘기독교의 국가주의화’겠죠.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단기간의 국익보다 정의를 우선했을 때, 장기적인 측면에서 더큰 국익이 찾아질 수 있다고 봅니다. 동시에 단기적 국익을 위해 정의를 희생했을 때, 장기적으로는 국익에 손실이 올 수도 있다고 봅니다. 물론 시기를 얼만큼 잡느냐, 그리고 국익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논의가상당히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상당히 믿을만한 정보에 따르면, 파병결정 당시, 정책담당자들은 이라크 파병과 부시정부의 대북정책 유연화를 놓고 일종의 ‘빅딜’을 기대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과연 이러한 현실주의적 정책결정이 어떠한 득실을 가져왔는지 분명한 성찰이 필요할 것입니다. 부시 대통령은 2004년 9월 3일 연설에서 제 3위의 파병국인 한국의 이름을 거론조차 하지 않았으며, 미국이 대북 정책을 선회는, 한국의 이라크 파병 이후가 아닌, 미국 국내 선거의 공화당 참패와 네오콘들의 퇴진, 그리고 북한의 핵실험으로 부시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미국 내 비난이 고조된 2006년 말, 2007년 초에 일어났기 대문입니다. 많은 경우 안보와 번영을 추구하면서 평화와 정의가 파괴됩니다. 다른 말로, 세상의 권력자들은 ‘안보와 번영이라는 거짓된 약속’을 내세워 평화와 정의를 파괴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안보와 번영은, 현재 대부분의 국가들처럼’ 그것을 절대화된 ‘우상’으로 섬길 때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도 – 즉 공평과 정의를 추구할 때 ‘따라’오는 것이라는 점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역사적으로, 많은 나라들이 무너진 것은 외적의 위협도 있지만그 안에 이미 정의와 공평이 파괴되고 극심한 빈부격차, 토지제도의 문란 등으로, 국민들이 그 나라의 체제를 지킬만한 가치가 없다고 느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속에서도 외적의 침입과 나라의 상실은 이스라엘의 국내적 죄(개인윤리와 사회윤리의 총체적 타락)에 대한 당연한 결과였고, 동시에 하나님의 최종적 심판이었습니다. 반대로 국민들이 삶에서 공평와 정의를 누리는 나라는 그 누구도 쉽게 침략할 수 없고, 그렇더라도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 나라는 지킬만한 가치가 있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성경의 원리를 따를 때, 진정한 안보와 번영은 따라 오는 것입니다. “안보와 번영이 최고가 아니라면, 어떻게 나라를 지킬것이고, 어떻게 먹고 살려고 하느냐? 순진한 소리 말아라”라고 한다면 이렇게 이야기 하겠습니다. 안보와 번영을 우상으로 섬기고 싶은 욕망을 누르고 먼저 공평과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요, 공평과 정의가 서면 하나님이 안보와 번영을 책임지신다는 것을 아는 것이 ‘지혜’라고. 이는 개인의 신앙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부와 성공과 생존”이 아닌 하나님을 섬기고 정의와 공평과 인애의 삶을 살 것을 가르치고 있으며, 그럴 때에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와 성공을 추구하는 욕망에 굴복하기 쉽고 그럴때에 우리 삶에서 정의와 공평과 인애는 파괴됩니다. 현재의 기독교는 오히려 성경의 가르침보다 부와 성공을 합리화하고 축복하는 왜곡을 보여주고 있고, 심지어 복음의 내용 자체도 물질주의, 성공주의, 승리주의로 교체되는 경향마져 나타납니다. 이것이 현대 기독교회의 비극이며, 하나님 앞에서 심각한 ‘악’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어떠한 사회가 되길 원하셨고, 그분의 제시하신 언약의 내용은 무엇이었는가를 살펴보면서, 기독인과 사회, 국가의 관계에 대해 고민해 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관련 성경구절을 몇구절 소개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성경에 나오는 ‘의’는 가급적 정의로 바꾸어 읽어야, 그 의미가 더 분명하게 전달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래 두 구절은 제가 개인적으로 바꾸어 읽은 것입니다.)
[마6:33]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정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마5:10] “정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벧전3:14] 그러나 정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여러분은 복이 있습니다. “그들의 위협을 무서워하지 말며, 흔들리지 마십시오.”
[사10:31] 너희 소돔의 통치자들아! 주의 말씀을 들어라.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여라. 주께서 말씀하신다.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기름기가 지겹고, 나는 이제 수송아지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도 싫다. 너희가 나의 앞에 보이러 오지만, 누가 너희에게 그것을 요구하였느냐? 나의 뜰만 밟을 뿐이다! 다시는 헛된 제물을 가져 오지 말아라. 다 쓸모 없는 것들이다. 분향하는 것도 나에게는 역겹고, 초하루와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참을 수 없으며, 거룩한 집회를 열어 놓고 못된 짓도 함께 하는 것을, 내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나는 정말로 너희의 초하루 행사와 정한 절기들이 싫다. 그것들은 오히려 나에게 짐이 될 뿐이다. 그것들을 짊어지기에는 내가 너무 지쳤다. 너희가 팔을 벌리고 기도한다 하더라도,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겠다. 너희가 아무리 많이 기도를 한다 하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의 손에는 피가 가득하다. 너희는 씻어라. 스스로 정결하게 하여라. 내가 보는 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을 버려라. 악한 일을 그치고, 옳은일을 하는 것을 배워라. 정의를 찾아라. 억압받는 사람을 도와주어라. 고아의 송사를 변호하여 주고 과부의 송사를 변론하여 주어라.” 주께서 말씀하신다. “오너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빛과 같다 하여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며, 진홍빛과 같이 붉어도 양털과 같이 희어질 것이다. 너희가 기꺼이 하려는 마음으로 순종하면, 땅에서 나는 가장 좋은 소산을 먹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거절하고 배반하면, 칼날이 너희를 삼킬 것이다.” 이것은 주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다. 그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녀가 되었습니까? 그 안에 정의가 충만하고, 공의가 가득하더니, 이제는 살인자들이 판을 칩니다. 네가 만든 은은 불순물의 찌꺼기뿐이고, 네가 만든 가장 좋은 포도주에는 물이 섞여 있구나. 너의 지도자들은 주께 반역하는 자들이요, 도둑의 짝이다. 모두들 뇌물이나 좋아하고, 보수나 계산하면서 쫓아다니고, 고아의 송사를 변호하여 주지 않고, 과부의 하소연쯤은 귓전으로 흘리는구나. 그러므로 주, 곧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전능하신 분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나의 대적들에게 나의 분노를 쏟겠다. 내가 나의 원수들에게 보복하여 한을 풀겠다. 이제 다시 내가 너를 때려서라도 잿물로 찌꺼기를 깨끗이 씻어 내듯 너를 씻고, 너에게서 모든 불순물을 없애겠다. 옛날처럼 내가 사사들을 너에게 다시 세우고, 처음에 한 것처럼 슬기로운 지도자들을 너에게 보내 주겠다. 그런 다음에야 너를 ‘의의 성읍’, ‘신실한 성읍’이라고 부르겠다.” 시온은 정의로 구속함을 받고, 회개한 백성은 공의로 구속함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거역하는 자들과 죄인들은 모두 함께 패망하고, 주를 버리는 자들은 모두 멸망을 당할 것이다. 너희가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우상 숭배를 즐겼으니, 수치를 당할 것이며, 너희가 동산에서 이방 신들을 즐겨 섬겼으므로 창피를 당할 것이다. 기어이 너희는 잎이 시든 상수리나무처럼 될 것이며, 물이 없는 동산과 같이 메마를 것이다. 강한 자가 삼오라기와 같이 되고, 그가 한 일은 불티와 같이 될 것이다. 이 둘이 함께 불타도 꺼 줄 사람 하나 없을 것이다.
인간의 사랑 특별히 연인들의 사랑이나 부부의 사랑에 대해 논할 때, 사람들은 사랑의 속성에 대한 잘못된 정의를 내리는 것을 종종 본다. 너무나 당연하게 “사랑은 이런 것이야”라고 정의 내리고 그냥 그 정의를 믿어버린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많은 관계들을 오해나 곤경에 빠지게 하는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중요한 몇 가지만 살펴보자.
첫째, 사랑은 통제할 수 없는 열정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은 내 의지로 컨트롤되지 않는 그 어떤 것으로 감정에 바탕을 둔 로맨스라는 것이다. 즉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의 감정이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마구 솟아오르는데 나도 그 마음을 어떻게 조절할 수 없을 정도로 커 그냥 그 감정을 따라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영화나 TV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많은 젊은이들이 감정적인 열정으로 사랑에 빠진 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더 이상 사랑의 감정이 생기지 않는다며 무책임하게 뒤돌아서버린다. 그간의 행동에 대해서는 “그때는 사랑했으나, 지금은 사랑의 감정이 생기지 않으므로 어쩔 수 없다”라는 답만 돌아올 뿐이다. 심지어 육체적인 관계를 가졌음에도 사랑의 감정이 생기지 않으니 어쩔 수 없다고 돌아선다. 이것은 사랑에 대한 잘못된 정의다. 통제할 수 없는 열정이라고 사랑을 정의내리는 것은 자신의 감정적이고 현명하지 않은 처신을 합리화 하는 것으로 책임 없이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부추기는 격이 된다.
하지만 사랑은 통제 가능한 것이고 책임이 따른다. 즉 사랑은 절제와 책임을 포함한다. 절제와 책임이 따르는 사랑은 자신에게나 상대방에게 상처를 남기지 않으며, 오히려 성숙하고 생산적인 관계를 위한 디딤돌이 된다.
둘째, 사랑하면 서로의 생각이나 감정 심지어 욕구까지 무엇인지 다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상대방이 내 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엉뚱하게 행동하거나, 혹은 내 욕구가 무엇인지 몰라 눈치보고 있다면 우리는 쉽게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단정 짓는다. 그리고 화를 낸다.
하지만 아무리 사랑한다하여도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상대방에게 표현하지 않으면 알기 어렵다. 특별히 여자들의 경우 굳이 말로 그것을 표현해야 하느냐며 스스로 자기의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는 것에 대해 자존심 상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비현실적이고도 잘못된 기대이다. 가정상담 전문가들은 부부가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서로의 생각과 감정을 알게 되는데는 대략 27년 정도 걸린다고 한다. 물론 투명하고 성숙한 의사소통을 하는 부부라면 시간이 좀 더 단축되겠지만, 그만큼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표현하지 않아도 서로의 생각과 감정까지 알 수 있는 친밀감을 만들기 위해서는 “하나로 연합하기 위한 노력에 헌신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사랑한다는 것은 이런 노력을 하는데 헌신하겠다는 결단을 포함한다.
셋째, 사랑하면 서로의 생각이 늘 같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생각이 같으면 서로 사랑하는 것이지만 생각이 다르면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오해하고 갈등한다. 그렇지 않다. 사랑해도 생각이 충분히 다를 수 있다. MBTI 성격검사에 의하면 16가지의 성격유형이 나온다. 이는 내 성격은 단지 1/16에 불과하며, 나와 다른 성격의 유형이 15가지나 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만약 상대방이 모든 일에 늘 나와 생각이 같기를 기대한다면 그 사람이야 말로 사회부적응이다. 그런 마음으로 인생을 살아간다면 평생 불만족과 불평, 그리고 갈등과 분노 가운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사랑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해 주고 서로에게 맞추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나아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당신이 더욱 필요함을 고백하게 된다. 나와 남편은 서로 반대되는 성격이다. 나는 예민한 편이고 남편은 둔한 편이다. 나는 남편 덕분에 안정감과 여유를 배우게 되고 남편은 나로 인해 섬세함과 배려를 배운다. 나는 곱창전골과 돼지족발과 도가니를 좋아하지만 남편은 순 살코기를 좋아한다. 남편은 나에게 “무슨 여자가 술안주 감을 좋아하느냐?” 비난할 수 있고, 나는 “무슨 남자가 음식을 여자처럼 가리냐?”고 불평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닭 한 마리 사면 남는 것이 없다. 나는 닭의 날개와 연골을 먹고 남편은 퍽퍽한 흰살을 먹는다. 매우 경제적이다. 서로의 다름이 복으로 인정되는 순간이 많이 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사랑은 영원히 지속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다. 하지만 인간의 사랑은 결코 그렇지 않다. 한계가 있다. 아무리 서로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고백하였다할지라도,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는 일관된 사랑의 감정을 가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영원한 사랑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의 능력을 공급받을 수 있다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특권일 뿐이다. 우리 부부도 마찬가지다. 지난 24년의 결혼생활을 뒤돌아보면 큰 갈등이나 다툼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늘 사랑했던 것은 아니다. 성격이나 관점의 차이로 서로 답답하기도 했고, 사랑하는 방식이 서로 달라 갈등이 생기기도 했다. 한때 중년 권태기로 무미건조한 시간을 보낸 기억도 있다. 하지만 그때 마다 우리는 사랑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엎드려 사랑을 구했고 그분은 풍성한 사랑을 늘 공급해 주셨다. 중요한 것은 내 안에 사랑이 없을 때 곧바로 영원한 사랑의 공급자 되시는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사랑의 능력을 공급받는다.
사랑에 대한 잘못된 오해는 사랑의 관계를 해친다. 그러므로 사랑 가운데 있거나 사랑을 시작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사랑에 대한 정의가 올바른 것인지 잘못된 것인지, 건강한 것인지 건강하지 않은 것인지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다. 아름답고 성숙한 사랑의 관계를 위하여!
안녕하세요. 저는 조지아주에서 아내와 함께 살면서, 국제정치학을 공부하고 있는 이인엽이라고 합니다. 2009년 코스타에 처음으로 참석했었는데, TM 코스타에서 강의를 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했었습니다. 그때 “국가주의와 그리스도인: 평화를 위한 우리의 역할”이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했었고, 강의안을 정리해서 올리기로 eKOSTA에 약속드렸었는데, 분량이 너무 길어져서 마무리를 못하던 중, 이번에 블로거로 초대해 주셔서, 앞으로 정기적으로 글을 올려보려고 합니다. 지난번 강의안으로 부터 시작해서, 성경을 읽으며 전공인 국제정치를 공부하면서 고민 했던 것을 정리해 올리는 글이 될것 같네요. 제가 신학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전공분야에서도 아직 기초를 다지는 중이라, 이렇게 글을 올려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신앙과 세상을 함께 고민하는 하나의 시도로 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소 딱딱하거나, 정치적인 견해차이가 있을 수도 있는 점 또한, 다양성 차원에서 이해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들어가며>
이런 류의 강의를 할때 제가 주로 시작하는 도입 질문중의 하나가, ‘이라크 전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며, 당신이 당시 대한민국의 정책 결정권자라면 (파병 여부에 대해) 어떤 선택을 할 것이냐’ 입니다. 이 질문에는 국가의 이익과, 윤리라는 두 가지 변수가 중요할 텐데, 국가 이익이 있다고 가정할 경우, 크게 세가지 정도의 답변을 들을 수 있습니다. 1. 파병을 통한 국익도 있고 이라크 전쟁이 윤리적으로도 정당하기에 찬성한다. 2.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지만 국익을 생각해서 찬성한다 3. 국익이 있더라도 윤리적으로 옳지 않기에 반대한다.
이 질문을 할 때마다 놀라는 것은 비기독인은 물론이고, 상당히 많은 기독인들이 두번째, 즉 현실주의적 선택을 내린다는 것입니다.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더라도, 결국 국익이 최종 선택의 기준이 된다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보수나, 진보보다도 강력한 담론은, 현실주의혹은 국익 우선주의가 아닌가 생각 해 봅니다.실제로 노무현 정부하에서의 이라크 전쟁 파병 결정, 한미 FTA 체결과, ‘경제 살리기’를 내세웠던 이명박 정부의 집권과 정책들 뒤에는, 공통적으로 이러한 국가이익(경제와 안보에 있어서의 물질적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현실주의적 논리가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쉽게 말해서, ‘올바로, 정의롭게, 평화롭게 살아보세’ 보다는 ‘잘먹고 잘 살아보세’가 아직도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또한 이는 국내적으로는 애국주의, 민족주의, 국가주의, 그리고 국제적으로는 자국 중심주의, 일방주의, 패권주의와도도 연결된다고 봅니다. 크게 보자면, 미국의 일방주의 외교정책, 남북한과 중국, 일본 등에서 나타나는 민족주의적 경향, 그리고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정책 등도 이러한 논리로 설명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접하는 많은 사회문제의 기저에는, 그리스도인이 국가를 어떻게 볼 것인가, 국가이익이라는 강력한 이슈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말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자리잡고 있는데, 특히 한국의 그리스도인들 안에, 이러한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고민이나 논의가 별로 없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로 신앙을 개인의 차원으로 국한하는 이원론적 관점이나,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국가에 대한 충성이 언제나 일치한 다는 관점, 혹은 하나님 잘 믿으면 우리 나라가 잘 된다는 축복론적 입장 등이 암묵적으로 우리의 사고를 지배해 온것이 아닌가 싶은데, 과연 이런 관점이 성경적인가를 고민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미국에서 살면서 미국 그리스도인들의 사고와 정치적 역할의 문제점들을 살펴봤을 때도, 역시 이 문제가 가장 근본적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앞으로 몇 회에 걸쳐, 이에 대한 논의와 고민들을 소개해보려고 합니다. 주제는 대략 아래와 같고, 인용한 성경은 표준새번역을 썼습니다.
(1) 가나안 정복과 이집트 심판에 대한 오해
(2) 혈연 공동체 vs. 언약 공동체
(3) 율법의 정신을 대표하는 희년 제도
(4) 하나님이 제시하신 구약의 윤리와 선지자들의 비판 전통
(5) 신학의 문제: 이원론과 콘스탄틴 주의
(6) 국가의 기원과 그 속성. 권력의 악마성과 그 대안.
(7) 정치적 권위에 대한 두 가지 왜곡된 생각
(8) 국제관계에서의 정의: 제국의 정신과의 충돌
(9) 예수님의 삶, 십자가의 영적 의미와 정치적 의미
(10) 성령의 역사와 해방적 함의
(11) 뒤틀려진 기독교
(12)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으로서의 요한계시록
(1) 가나안 정복과 이집트 심판에 대한 오해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는 구분되는 개념이지만 많은 경우 연결되어 나타납니다. 국가주의가 정치 조직과 구조에 기초한다면, 민족주의는 인종과 문화에 기반한다고 하겠죠. 한국처럼 비교적 인종적으로 단일한국가라면(이 부분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고 최근에는 외국인 노동자 유입을 비롯해 많은 변화가 있습니다만), 두 개념이 중첩되고 서로 강화하는 형태를 띌 것이고, 미국처럼 다인종 사회 같은 경우, 인종보다는 문화와 정치조직이 더 중요시 될 것입니다. 하지만, 두가지의 공통점은, 자기 집단을 최우선으로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혹자는 민족주의나국가주의를, 자기애와자기 중심성의 확장이라고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내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것이 왜 나쁘냐고 물을 수 있겠으나, 문제는 그것이 애국 애족을 넘어, 우리를 ‘선’으로 타자를 ‘악’으로 규정하는 차별과 폭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언제나 존재하고, 또한 내부적으로는,전체의 이익이라는 이름으로 약자의 희생을 정당화하고, 내부의 비판세력을 억압하며, 집단의 비민주성을 합리화 하는데 악용될 소지가 언제나 있다는 점입니다.
먼저, 이러한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라는 부분을 성경의 관점에서 한번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구약의 역사 중, 출애굽기와 여호수아서에서 나타난 이집트 심판과 가나안 정복은 많은 경우 이스라엘에 대한 민족주의적, 인종주의적 관점으로 읽혀져 왔습니다. 실제로 유럽의 기독교인들과, 흑인노예제 및흑백차별제도하의 미국 남부 기독인들은, 노아의 세 아들 중 함이 저주받은 일화를 이용해 인종차별을 합리화 하기도 했고, 미국 역사 초기에 일어난엄청난 숫자의 아메리카 원주민(인디언)들의 학살에 대해서도, 당시 미국의 기독인들은 가나안 정복이야기를 통해 합리화 했습니다. 최근에도 미국의 보수적인 목사들 중에는, 이라크 전쟁이나 대 테러 전쟁을 ‘이스마엘의 후손 대 이삭의 후손’의 전쟁이라는 식으로 해석하는 분들이 있는데, 이것이 과연 위의 인종주의적 오류들과 얼마나 다른가 고민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리 민족, 혹은 국가의 수호신으로 왜곡하고, 이를 넘어서 폭력이나 학살을 합리화하는 데까지 성경의 가르침이 악용 될 수 있다는 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한편, 사랑의 하나님이 이집트의 모든 장자를 일순간에 쳐서 죽인이야기나, 어린아이와 가축까지 모조리 없애라고 하신 가나안 정복의 이야기는 현대를 사는 기독인의 관점에서 이해하기 상당히 힘든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이유로 많은 기독인들은, 구약은 신약으로 대체되었기 때문에그냥 넘어가자라고 하거나, 이를 영적인 싸움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하거나, 아니면 위에서 언급했던 역사적 오류들처럼,이를 민족주의나 패권주의 적으로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저도 이 부분에 대해 고민을 하면서 성경과 신앙서적들을 살펴보았는데, 나름대로 아래와 같이 정리를 해 보았습니다.
먼저 위에서 열거한 민족주의적 성경해석의 오류를 풀어주는 성경구절들을 몇가지 소개해 보겠습니다.
[창 15: 13-16] 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똑똑히 알고 있거라. 너의 자손이 다른 나라에서 나그네살이를 하다가, 마침내 종이 되어서, 사백 년 동안 괴로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의 자손을 종살이하게 한 그 나라를, 내가 반드시 벌할 것이며, 그 다음에, 너의 자손이 재물을 많이 가지고 나올 것이다. 그러나 너는 오래오래 살다가, 고이 잠들어 묻힐 것이다. 너의 자손은, 사 대째가 되어서야 이 땅으로 돌아올 것이다. 아모리 사람들의 죄가 아직 벌을 받을 만큼 이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레 18:24-29] 위에서 말한 것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저지르면, 이것은 너희가 스스로를 더럽히는 일이니, 그런 일이 없도록 하여라.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낼 민족들이, 바로 그런 짓들을 하다가 스스로 자신을 더럽혔다. 따라서 그들이 사는 땅까지 더럽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 악한 땅을 벌하였고, 그 땅은 그 거주자들을 토해 내게 되었다. 너희는 모두 내가 세운 규례와 내가 명한 법도를 잘 지켜서, 온갖 역겨운 짓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범하지 않도록 하여라. 본토 사람이나 너희와 함께 사는 외국 사람이나 다 마찬가지이다. 너희보다 앞서 그 땅에서 살던 사람들은, 이 역겨운 모든 짓을 하여, 그 땅을 더럽히고 말았다. 너희가 그 땅을 더럽히면, 마치, 너희보다 앞서 그 땅에 살던 민족을 그 땅이 토해 냈듯이, 너희를 토해 낼 것이다.누구든지 위에서 말한 역겨운 짓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범하면, 백성은 그런 짓을 한 그 사람과는 관계를 끊어야 한다.
먼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창세기 말씀은, 하나님이 가나안 주민들에 대해 이스라엘의 수호자가 아니라, 공정한 열방의 심판자로서 접근하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즉, 하나님이 아브라함 때에 그 땅을 줄 수도 있었지만, 사대를 걸쳐 기다려야 했는데, 그것은, 가나안 원주민들의 죄가 그 땅에서 쫓겨나거나 멸망 당할 만큼 ‘차고 넘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여호수아 정복 시기에는 그들의 죄가 ‘관영’했음을 알 수 있는데 심지어 수간이나 인신제사 같은 극악한 죄악이 만연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레18:1-23) 결국, 하나님의 심판은, 단순히 그들이 민족적으로 이방민족이거나, 하나님을 안믿었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의 기준에서 그들의 악이 멸망과 땅에서 토함을 받을 정도에 이르렀기에 심판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십자군시기나 제국주의 시기에 주장된 것처럼, 단순히 원주민들이 이교도들이기 때문에 죽여도 된다는 논리는 전혀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이지요. 만약 그런 논리가 맞다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외에 모든 민족을 멸망시켜야 하셨어야 할텐데, 성경은 오히려 이스라엘을 통해 만민이 구원을 경험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선민사상에 어두워 그 소명을 감당하지 못한것 뿐이지요. 그러므로 가나안 주민들은 단지 이스라엘에게 땅을 내주기 위해 없어져야 했던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죄 때문에 멸망당한 것이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서 그 심판을 수행했다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너희도 같은 죄를 범하면 멸망당한 가나안 원주민들과 동일하게 땅에서 ‘토함’을 당할 것이라고 이스라엘에게 경고하고 계시는 점입니다.이 경고는, 이후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이루어져서, 가나안 못지않은 죄를 범한 이스라엘은 처절한 심판과 포로됨을 경험하게 됩니다. 결국 그 땅은 이스라엘에게 무조건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 거주민이 하나님의 뜻과 언약에 따라 ‘살아갈 때’, 거주할 권리를 갖게 되는, ‘언약의 땅’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민족적, 인종적으로 이스라엘만을 편애하시고, 가나안 족속을 무고하게 멸망시키시고, 이집트백성들을 죄 없이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실제로,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거주하던 시기, 그는 가나안족속과 평화로운 관계를 맺었고(창23장), 야곱과 요셉 시기에도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우호적인 관계를 가졌습니다(창47:1-12). 그들이 인종적으로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고 볼 근거가 없다는 것이지요. 모세의 인도 하에 출애굽 할 때 일어난 이집트에 대한 심판을 살펴보면, 이집트에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면서 그들이 당시 약자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며, 강제노동과 영아살해와 같은 극악한 범죄를 저질렀고, 그들을 보내라는 하나님께 명령에 불순종했다는 점을 주목해 봐야 합니다. 전 이집트의 장자들이 하루아침에 죽임을 당하기 이전에, 이미 이스라엘의 남아들은 태어나는 족족 죽임을 당했습니다.결국 하나님의 심판은 ‘압박자와 피압박자’, ‘가해자와 피해자’, ‘강자와 약자’사이에서 일어난 것이지, 인종적 차이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참고로 이사야서 19장의 이집트에 대한 심판의 경고는 다음과 같은 회복과 구원의 예언으로 끝납니다.
[이사야 19:21-25] 주께서는 이렇게 자신을 이집트 사람에게 알리실 것이며, 그 날로 이집트 사람은 주님을 올바로 알고, 희생제물과 번제를 드려서, 주께 예배하고, 또 주께 서원하고 그대로 실천할 것이다. 주께서 이집트를 치시겠으나, 치시고 나서는 곧바로 어루만져, 낫게 하실 것이므로, 그들이 주께로 돌아오고, 주께서는 그들의 간구를 들으시고, 그들을 고쳐 주실 것이다.그 날이 오면, 이집트에서 앗시리아로 통하는 큰길이 생겨, 앗시리아 사람은 이집트로 가고 이집트 사람은 앗시리아로 갈 것이며, 이집트 사람이 앗시리아 사람과 함께 주님을 경배할 것이다. 그 날이 오면, 이스라엘과 이집트와 앗시리아, 이 세 나라가 이 세상 모든 나라에 복을 주게 될 것이다. 만군의 주께서 이 세 나라에 복을 주며 이르시기를 “나의 백성 이집트야, 나의 손으로 지은 앗시리아야, 나의 소유 이스라엘아, 복을 받아라” 하실 것이다.
결국,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의 역사는, 열방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정의의 차원으로 해석되어야 하지, 민족적, 인종적인 차원에서의 폭력과 학살을 합리화할 근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동시에 이스라엘이 심판 받은 역사에서 나타나듯이 하나님은 말씀을 모르고 범죄하는 이방인과 싸우시지만, 말씀을 알고도 지키지 않는 이스라엘과도 처절하게 싸우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많은 신학자들이 말했듯이, 하나님의 칼은 양날의 칼이요, 하나님의 전쟁은 이방과 이스라엘 모두를 향한 정의의 전쟁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후, 타락하고 나서 앗시리아와 바빌로니아에 점령당하고 포로되는 장면을 보면서, 하나님이 어떻게 그리도 잔인하실 수 있는가를 묻지만, 그 전까지 이스라엘 사회에서 나타난 총체적 타락상 – 성적타락과 부정직이 만연하고, 희년을 지키지 않고, 가난한 자를 압제하고 노예로 부리고 팔아버리며, 뇌물을 받고 불공정한 재판을 하고, 하나님이 아닌 군사력과 강대국을 의지하고, 이방종교와 우상을 섬기는 – 을 살펴보면, 심판받을 당시의 이집트나 가나안 원주민이 보여준 타락과 포악의 정도에 뒤지지 않음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의 심판이 공정할 뿐더러, 오히려 그때까지 참고 기다리신 하나님의 오래참으심이 놀랍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결코 한 민족의 수호신이 될 수 없으며, 기독교의 사상은 왜곡된 민족주의, 인종주의, 파시즘, 제국주의, 패권주의, 일방주의와 근본적으로 충돌합니다. 과거 많은 정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목표와 이익을 위해 불의한 인종차별과 학살, 전쟁등을 합리화 하고자 했고, 이에 발맞춰 일부 기독교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곡해하는 악을 저질러 왔습니다. 자신들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관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장하고, 성경을 그에 맞춰 왜곡하는 행위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과 그분의 정의를 더럽히는 심각한 죄일 뿐더러, 정의와 공평을 기대했던 많은 이들을 교회와 복음으로 부터 멀어지게하는,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 다음 글에는 구약의 이스라엘을 보는 두가지 관점 (혈연적 공동체 vs. 언약적 공동체)을 소개하고 비교해 볼 예정입니다.
현대인은 편리함이 편안함보다 우선하는 문화에 젖어 산다. 그 중의 하나가 인스턴트 문화이다. 리처드 포스터는 현대 사회의 가장 큰 세 가지 적을 소음, 성급함 그리고 번잡함으로 보았다. 정신의학자 칼 융 (Carl Gustav Jung)은 바쁜 것은 사단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사단 바로 그 자체라고 강조했다. 이처럼 현대인의 내면세계를 공격하는 바쁜 도시생활은 생각보다 훨씬 악질이다.
이런 초고속 사회에 적응해야 하는 도시인에게는 정성스럽게 만든 음식보다 빠르고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인스턴트 음식이 그만이다. 그뿐인가? 사람들은 편지보다 이메일을 선호한다. 미국은 해마다 줄어드는 우편물 때문에 수백 년 역사의 우체국이 위기를 맞고 있다. 사람들과의 의사소통도 사이월드나 페이스북, 트위터 같은 온라인을 통한 인스턴트 대화로 변하고 있다.
요즘 한국의 1318세대[footnote]대흥기획이 만들어 낸 용어로써 13~18세에 해당하는 세대를 지칭한다. 대홍기획에서는 1318세대를 WANT(Wide Active New Teenager)세대로 명명했다. 1993년 이후 출생자로 현재 13∼18세의 중·고등학생이 여기에 해당한다. WANT세대란 명칭은 이들 1318세대가 다수 대 다수의 커뮤니케이션을 주도하고(Wide),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거침없이 넘나들며 자유롭게, 열정적으로 행동하며(Active), 새로움과 다양함을 열망하는 새로운 십대(New Teenager)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일각에서는 한 광고기획사에서 1318세대, 1924세대 같은 조어를 만드는 것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모습도 보인다. 경향.com 기사 ‘문자에 살고 메신저에 죽는다.(2006. 5. 23자) 참조.[/footnote]는 ‘문자’에 살고 ‘메신저’에 죽는다. 한 통계[footnote]대홍기획이 2005년 10월부터 2006년 3월까지 6개월간 서울에 거주하는 13~29세의 남녀 600명을 대상으로 개별 면접 조사한 결과이다.[/footnote]에 의하면 이들은 단 1초의 기다림도 지겨워하고 즉각적인 반응을 기대한다. 조사 결과 청소년의 평균 텍스팅(texting) 시간이 하루 네다섯 시간이 넘는다. 인터뷰한 중학생은 “하루 종일 문자 안 보내고 수다 안 떨고 메시지 안 보내는 시간은 2시간도 되지 않는 것 같다”고 했단다.
오늘의 대중문화는 깊이보다 인스턴트에 열광한다. 데이비드 웰스의 언급처럼 현대의 신기술이 기존의 기술을 점차 빠른 속도로 대체하면서 제품 수명의 주기가 급속히 짧아졌을 뿐 아니라 삶 속에서 영원함의 자취도 대부분 사라졌다.[footnote]데이비드 웰스, 윤리실종 (부흥과개혁사, 2007) p. 47.[/footnote] 이제 빨리빨리 문화를 한국병으로만 치부하기[footnote]민경배 교수는 “빨리빨리 문화는 한국인의 공통된 특성이지만 기성세대가 성과에 집착한 ‘빨리빨리’라면 10대들의 성향은 반응을 빨리한다는 의미에 가깝다고 했다. 경향.com 기사 참조[/footnote]에는 세상이 너무 많이 바뀌었다.
이러한 시대정신은 사물의 일부가 아닌 전체를 파악하고 존재를 지엽적이 아닌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인간의 기본 능력을 무너뜨렸다. 리처드 포스터는 이를 피상성의 수치라고 통렬하게 지적했다. 즉각적인 만족을 누리고자 하는 사상은 근본적인 영적 문제이다. 그래서 오늘날 절실히 요청되는 사람은 지능이 높거나 혹은 재능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깊이가 있는 사람이다.”[footnote]피처드 포스터, 영적훈련과 성장 (생명의 말씀사, 1986) p. 13.[/footnote]
세상은 감각을 터치해줄 사람을 찾지만 오늘 우리는 깊이 있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 요즘 기독교 출판도 깊이 보다는 감성터치 작가가 인기이다. 목회자의 설교도 깊은 복음의 진수보다는 감성을 터치해야 인기가 있다. 신앙도 인스턴트 신앙을 추구한다. 영적 성숙도 3개월 숙성반처럼 단기에 드러나는 실적이 나와야 한다. 교회도 초고속 성장이라야 세간의 주목을 받는다. 기독교가 거꾸로 가고 있다.
거꾸로 가도 근성이 필요하다. 한번은 연어 떼의 일생을 다큐멘터리 채널에서 본 일이 있다. 수천, 수만 킬로미터의 바다 여행 끝에 세차게 흘러내리는 민물계곡을 거슬러 올라가 알을 낳고 죽는 거대한 연어 떼의 본능을 보면서 비록 동물이지만 그 근성 만큼은 인간보다 위대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 연어들처럼 오늘 우리 시대는 거친 세파를 거슬러 올라가는 근성과 다음 세대를 위해 수만 킬로를 준비하는 깊이를 지닌 사람이 필요하다.
영적성숙의 동의어는 깊은 영성이다. 성숙은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인생 전체의 여정에서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인스턴트 성숙이란 있을 수 없다. 오늘의 예배 문화도 인스턴트에 절어 있다. 단 한 번의 예배로 최고의 예배자가 탄생해야 할 것처럼 몰아간다. 물론 한 번의 예배가 중요하다. 사울은 한 번의 예배 실패로 하나님의 축복의 대열에서 낙오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 한 번의 예배로 신앙의 전체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힌 존 번연의 《천로역정》은 장차 망하게 될 죄악의 도성을 떠나 천성을 향하여 떠나는 한 순례자의 여로를 장엄한 서사시처럼 그려낸다. 한 사람의 크리스천이 그의 인생 마지막까지 가는 길목마다 고뇌, 회심, 전도, 박해 등 다양한 국면을 경험한다. 이것이 신앙의 여정이다. 예배는 이러한 인생여정의 가장 중요한 동반자일 뿐이다.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으로 삶의 깊이와 여백을 누리며, 예배를 축으로 인생 전체를 관망할 줄 아는 깊이 있는 기독교인, 깊이 있는 목회자, 깊이 있는 예배인도자가 필요한 시대이다.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 (잠 20:27)
이유정 목사 / 한빛지구촌교회 예배디렉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오직 주 만이’ 작곡자
‘과학하는 크리스천’ 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생각 해봄직한 질문이 있다.’내가 개발하는 기술 혹은 발견하는 자연 원리의 최대 수혜자는 누구인가?’하는 것.이 질문은 순수 과학을 연구한다 하여 비껴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결코 아니며,주가 지으신 대 자연의 이치를 탐구하는 기본적인 목적과도 결부되어 있는 ‘기저 질문’ 이다.세상의 모든 것이 주께서 정하신 목적이 있듯, 우리가 자연을 탐구하는 일도 마땅한 목적이 있으며, 그 목적은 일관되게 우리 주 하나님을 향해 있어야 하는 것이다.그렇다면 현재 우리의 수행하는 과학은…그 기본적 목적에 합하는가?혹시 너무 한쪽 – 부자 – 만을 위한 것은 아닌가?하나님의 관심사와 얼마나 유사한가?세상을 대신 맡은 청지기로서의 사명을 완수하는 데 적합한 방향을 취하고 있는가?이러한 고민들을 부족하나마 함께 나누고자 한다.
GTM 900 정치학 분야 : 이인엽
국가주의와 그리스도인: 평화를 위한 우리의 역할
이라크 전쟁 파병 결정, 한미 FTA 체결, ‘경제 살리기’를 내세웠던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 등, 최근 몇 년간 가장 큰 논란이 되었던 이슈들의 뒤에는, 국익을 최 우선으로 하는 현실주의적 논리가 자리잡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소 문제가 있으나 국익이라는 현실을 고려할 때, 어쩔 수 없다’는 이런 논리는, 극우나 극좌의 논리보다도 더 큰 파급력으로 우리의 현실을 규정해 온 것이 사실이며, 크게 볼 때, 미국의 일방주의 외교정책, 남북한과 중국, 일본 등에서 나타나는 민족주의적 경향, 그리고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정책 등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내부적으로 약자의 희생을 정당화하고, 내부 비판세력을 억압하며, 권력의 비민주성을 합리화 하는데 악용될 소지가 있습니다. 또한 우리를 일방적인 선으로, 타자를 악으로 규정하며 전쟁과 폭력을 정당화 하고, 우리의 평화에 대한 심각한 위협의 뿌리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편, 역사적으로 일제시대와 6.25, 군부독재를 거치면서 형성된 한국의 보수 기독교는, 일방적인 친미, 반공, 보수적 사고를 내재화 하고, 정치 권력에 대한 일방적인 지지, 혹은 그에 대한 헤게모니적 장악과 같은, 성경적 근거가 빈약한 입장을 취해 왔습니다. 이런 점에서, 구약의 율법서에 나타난 계약사상, 선지자들의 권력과 불의에 대한 비판, 예수님의 비폭력주의, 성령강림의 해방적 함의, 초대기독교인들과 로마제국과의 관계, 요한계시록에서 나타나는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 등을 간략히 살펴보고, 성경은 물질적 축복과 세속적 성공인 ‘잘 살아 보세’가 아닌, ‘올바로, 정의롭게 그리고 평화롭게 살아보세’를 외치고 있으며, 화해와 평화를 추구 하고 있다는 것에 기반해, 그리스도인의 역할에 대한 고민을 나누고 싶습니다.
GTM 1000 경제학 분야 : 신자은
Capitalism in Christian Perspective: Theory and Practice
공산주의라는 역사적인 실험이 실패로 드러난 이후, 전세계의 경제체제는 ‘자본주의’의 틀 아래에서 빠르게 진화해나가고 있습니다. 개인의 이익극대화 추구와 시장의 기능을 통해서 모든 경제문제를 해결할 수있다는 neo-classical economics의 이념은 이러한 초자본주의의 흐름에 부응하여 Academia와 실물경제 모두에서 주류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한편, 국가간, 사회계층간, 지역간의 빈부격차 문제, 식량문제, 그리고 environmental injustice 는 더욱 심각해져만 갑니다.
경제 영역에서, 연구자로, 경영자로, 정책결정자로써 활약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가치의 conflict에 직면할 수 밖에 없는 이러한 환경 가운데서, 우리의 선택과 역할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우리가 경제영역의 주도적 세력으로 각 방면에서 활동하면서 그리스도의 평화와 사랑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소명을 온전히 이루어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본 세미나는, 성경적 경제관을 바탕으로 현 경제구조와 흐름을 진단해보고, 성경적 경제관을 직업과 학문에서 구체화하는 사례들을 살펴보면서, 자본주의에 대한 기독교적 대안을 나의 삶 가운데서 구현가능한 형태로 발견해가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GTM 1100 행정학 분야 : 최유진
성경적 정책결정 (Bible-based decision making): 인간의 결정 vs. 하나님의 생각
행정 및 정책 연구자들의 연구 범위는 그 어느 학문보다 넓은 것 같습니다. 사람(labor force)을 연구하기도 하며 때론 사람들의 집합체인 조직(organization)을 연구하기도 하고 그 조직을 움직이게 하는 물질(finance)을 연구하기도 합니다. 또한 의사결정, 환경, 복지, 도시 등 정말 연구의 대상은 무궁무진합니다.
행정 및 정책 연구의 본질은 “공공의 가치” 혹은 “공공의 이익 추구”라고 할수 있습니다. 나 자신 만이 아닌 이웃을 생각한다는 점에서 성경적 세계관과 닮았다고 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배제된 공공에의 관심은 우리 모두를 하나님과 더 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 없이 정책 수예자만 잘 살게 만드는 것이 정책의 본질이 되어 인간의 배를 불리우지만 영혼은 매마르게 합니다. 과연 공공의 관심과 하나님의 관심이 다른 인본주의의 막장 시대에 행정 및 정책연구자들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요? 이 딜레마에 대한 본질적 해답은 어쩌면 불가능한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고민까지 멈출순 없습니다. 광역 단위의 정책결정이 미치는 삶에 미치는 영향을 우리는 너무 잘 알기 때문입니다. 해답을 찾지 못해도 같이 고민하는 동역자를 찾고 싶습니다. 서로의 연구주제 속에 하나님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계신지 나누고 싶습니다.
GTM 1200: 음악분야 : 배윤영
음악부문 tm kosta 에서는, Christian음악인으로 살아가면서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갈지 함께 모색해보고자 합니다. 예술의 진정한 가치보다 등수와 점수, 스타성이 인정받는 이 경쟁의 현장에서 우리의 신앙을 지켜나가며, 복음을 나누는 길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음악계의 모습, 나의 모습은 무엇인지 함께 토의하고자 합니다. 비교의식, 열등감, 자만심, 완벽주의 속에 개인주의가 자리잡은 이 음악계의 현실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가지고 역류하며 살아가야 하는 Christian Musician들이 tm kosta를 통해서 혼자만 또는 각 학교만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고군분투하는 전 미주지역에 퍼져있는 지체들을 만나게 될 것 입니다. Competition, audition 등의 제도 안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진정한 승리는 무엇인지, 하나님이 주신 창조의 영역에서 무엇을 주님이 창출해내길 원하시는지 진지하게 토의하고자 합니다. 현재 미국전역의11 곳의 음악학교의 캠퍼스 사역들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음악이라는 tool을 가지고 앞서서 선교사로 살아가시는 분들의 이야기도 나누려 합니다.
GTM 1300 지구/환경/해양 분야 : 유상준
위기의 지구환경문제를 해결할 성경적 대안은 없는가?
새천년의 막이 오른지 10년이 채 지나지 않은 오늘날, 인류는 기후변화와 자원고갈, 그리고 환경오염문제로 인하여 중대한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에너지를 포함한 자원은 그 바닥을 드러내고 있으며 기후변화로 인해 수많은 종이 인류에 앞서 멸종위기에 처해있다. 빙하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는 북극권에 사는 북극곰은 먹이사냥을 위해 조오련이 횡단했던 대한해협보다도 먼거리를 매일 헤엄쳐 다닌다고 한다. 토양은 필터기능을 상실했고 바다는 쓰레기국이 되어가고 있다. 유기농이란 농약 이외의 오염물질에 노출된 농수산물로 정의가 바뀌어야 할 판이다. 모두가 우리의 무절제와 탐욕에 의한 결과물들이다. 결국 지구환경문제가 가장 먼저 세계화를 달성한 분야가 되었다. 더욱 암울한 것은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각국은 문제해결보다는 자기 밥그릇 챙기기에 급급하다는 사실이다. 마치 침몰하는 타이타닉호에서 가장 높은 곳을 차지하려고 아우성치는 모습을 보는 듯하다.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과연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지구환경문제를 해결할 성경적 대안이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몇가지 토의주제를 다룰 것이다. (1) 지구환경문제를 야기한 근본적 원인은 무엇인가? (2) 현존하는 지구환경문제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3) 지구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하는 세계관은 무엇인가?
GTM 1400 종교/신학 분야 : 김상권
청년 크리스천의 교회론 깔끔하게 다지기
교회가 만든 청년들을 다 어디로 갔나? 전통적인 교회론에 입각한 한민족 공동체의 100년 역사는 청년들을 교회 밖으로 몰아내고 말았다. 무엇이 문제인지 알지도 못한 채… 그리고 다가올 미국교회, 유럽 교회의 ‘급속한 쇠퇴’라는 우려를 짐작하는 기성세대만을 남긴 채… 이제 그리스도께 헌신한 청년들이 만들 교회는 다음 세대들인 또 다른 청년들을 교회 안으로 다시 초대할 능력을 갖출 수 있을까? 왜 청년들은 교회를 떠나고 있는가? 다음 세대를 대변하며, 다음 세대 교회를 책임질 청년들에게 교회란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현재의 교회가 가지고 있는 심각한 변종 바이러스는 무엇인가? 우리는 교회의 심각한 병리현상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주께서 피값으로 사신 그래서 우리가 목숨을 걸고 지켜내야 할 교회란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이 시간을 통해 전통적인 교회론의 잃어버린 성배를 찾아보고, 오늘 날의 교회에 대한 청년들의 생각들을 나누며, 꿈에 그리는 그 교회와 다음 세대 교회관을 정립하는 시간을 가질 것이다. 교회에 대한 그 아름다운 꿈을 꾸면서…
GTM 1500 Tent-making : 박나영
Tent-making
기독교 선교는 시대의 흐름을 따라 선교방법론과 전략에 있어서 더욱 구체적이며 효과적인 형태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선교적 흐름아래 대한민국은 미국에 이어 두번째로 기독교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는 선교 핵심 국가로 자리잡았습니다. Tent-making은 현 시대에 효과적인 하나의 선교전략으로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직업을 가지고 타문화 권에서(Cross-cultural countries/settings) 선교사적 사명과 부르심을 가지고 기독교 신앙을 전하고 나누는 선교 형태입니다. Tent-making이란 무엇인가 성경적인 (Biblical) 관점과 선교적인(Missiological)관점에서 조명하고, 왜 Tent-making 사역이 현 기독교 선교에 효과적인지- 이 선교 전략의 효과적인 특징들과, 실제적인 Tent-making사역의 예 들을 살펴보고, 또한 Tent-making선교 전략에 대한 토의점들을 나누려고 합니다.
자신의 Career와 직업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선교를 하고자 하시는 분들, 또 타문화 지역에서 생활하는 가운데 자신의 직업과 삶을 통해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기를 원하시는 분들을 환영하고 함께 이 주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GTM 1600 의료분야 : 채영광/김용정
Healthcare as a Mission
Healthcare 분야의 최전선에서 사역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넘어야 할 내적 외적 장애물들이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환자의 모든 요구를 제한적으로밖에 충족시킬 수 없는 사회적 제도적 한계에 좌절하는 순간들이 있는가 하면 내적으로는 매일 매일 일상에 함몰되어 환자 한명 한명에 대한 compassion을 상실하게 되는 정신적 영적 권태감이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본 세미나에서는 Healthcare 분야에서 필연적인 이 내적 외적 ‘환난’ 속에서,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의 용기’를 가지고 Healthcare를 주님 주신 ‘Mission’으로서 회복할 수 있을까 고민해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현재 healthcare 분야에 계신 분이나 healthcare 및 의료선교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 모두 함께 Healthcare 사역자가 어떻게 ‘예수의 평화’를 전하는 주님의 손과 발이 될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GTM 1700 생물학분야 : 김성중/김병재/이성일/이지혜/한상진
the second calling
문제의식: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훈련하신 것은 이방 민족들의 침노 받은 땅을 정복하고 거룩의 땅을 회복하시고자 함이었다. 우리의 학업을 하나님이 허락하신 땅으로 나아가기 위한 광야 훈련이라고 할 때, 우리를 통해 되찾고자 하시는 거룩의 땅은 어디이며, 어떻게 되찾을 수 있겠는가?
초 록: 주님께 부름 받은 우리는 성도로 제자로 하나님의 가족이란 동일한 아이덴티티를 갖게 되었다. 하지만 가나안 땅에 들어선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게 각각 다른 땅과 영역이 주어졌듯이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세워나가기 위해 삶으로 섬기고 감당해야 할 영역들은 다양하다. 본 TM에서는 먼저 이 시대에 생물학 영역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어떤 소명을 가지고 있는지를 나누고자 한다. 그리고, 그 소명이 하나님 나라에서 갖는 의미와 비젼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자 한다. 아울러 진화론과 같이 기독교적 관점에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과학계의 이슈들에 대한 크리스챤 생물학자들의 의견과 고민들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나눌 내용들:
1) 크리스챤 생물학자들의 소명
2) 진화론에 대한 크리스챤 생물학자들의 견해
3) 성경적 관점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researches
GTM 1800 경영분야 : 조성문
크리스천 기업 경영과 롤 모델
1. Discussion
* Job and Mission: What does it mean to find ‘vocation’? 하나님의 사역과 내 job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
* MBA란? Business School과 Christian Life를 연결하기
* 성경적 기업 경영이란 무엇일까? 성경에서 배우는 성공적 사업 전략? 예)욥기 22:21-30,요한복음 4:13~15,고린도전서 10:31-33
2. Sharing
* 주변 사람, 또는 유명인 중 진실된 Christian인 동시에 성공한 business person 의 이야기 공유하기 (롤 모델로 삼을 수 있는 크리스천):
o 예) John Wanamaker (세계 최초 백화점 창시자), 한동대학교 김영길 총장, 강영우 박사 (3C 혁명 저자), 황성주 목사 (이롬생식 창업자), 김성오 (메가스터디 대표, ‘육일약국 갑시다’ 저자)
GTM 1900 예술분야 : 임채석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 크리스천 예술인들의 가져야할 바람직한 Art Management 이야기
음악, 미술, 공연 등 수 많은 예술관련 크리스천들은 고민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 수 있을 지를… 이 세미나는 특별히 예술과 관련한 공부를 하는 젊은 청년들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여러 귀한 달란트를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지를 현실세계에서 일어나는 경영 Flow를 통해서 접근하고자 합니다. 우리나라도 예술의 필요성과 전문성을 요구하고, 그에 맞는 경영기법을 연구, 개발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장 아름답지만, 가장 어렵고 힘든 곳. 예술 세계에서 우리가 무서운 속도로 변화하는 세상속에서 무엇을 어떻게 고민해야 할 지를 각 예술 분야에 종사하는 혹은 공부하는 우리들이 그 방법을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우리 예술을 공부하는 학생, 청년들이 변화하는 이 세상에서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준비해야 할 지를 같이 고민하는 시간이 되길 소망하는 마음으로 준비하였습니다. 폭 넓은 예술 분야의 사람들이 한결같이 고민하는 부분을 놓고, 현재 현실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경영 과정들을 보면서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곳에서 예수님의 향기를 풍기며 살 수 있을지 같이 고민해 보고자 합니다.
아래의 이야기를 eKOSTA에 쓸까 말까 망설였다. 그동안 이곳에서 나누었던 최근의 이야기들이 복음에 대한 이야기들이라 좀 다른 내용의 이야기를 나누어 보아야 되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러 주제들이 내 마음을 스치고 지나갔다. 여러가지 주제를 놓고 기도하며 고민하며 몇자 적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eKOSTA페이지 오른편 맨 윗부분에 있는 금년 코스타의 주제로 “복음, 민족, 땅끝”이 내 눈에 확 들어와 그 주제가 마치 활이 과녁에 꼽히듯 내 마음에 박혀 버렸다. 아무래도 다른 내용 보다는 계속 복음행전에 대한 내용을 계속 해야 될것 같은 생각이 나를 지배해 버렸다.
아래의 내용은 미국에 살면서 섬겼던 어느 한인교회에서 실제 있었던 이야기이다. 조심해서 소화 해야할것은 아래의 내용을 읽으며 복음의 열정만 가지고 무조건 교회의 직분자에게 무례히 구원 받았는지 묻고 또 함부로 점근하게 됨으로 교회의 질서를 깨어 버리면 안된다는 것이다. 중요한 요점은 복음은 교회 내부 라고 해서 제외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의 직분만을 가지고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같은 점을 고려하며 읽기를 바란다.
미국살면서 우리는 많은곳을 이사다녔다. 그러는 가운데 어느 지역으로 이사가는 과정에서 만난 어느 한국인 부부가 있다. 나는 이 분들을 생각할때 마다 복음은 교회 밖에서만 전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 안에서도 전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전도의 대상도 직분자와 상관 없이 복음을 알지 못하는 대상이라면 장로, 권사 혹은 안수집사의 직분을 가졌다 할지라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것을 재확인 할 수 있었다.
우리 부부는 새로운곳에 집을 사러 오면서 이들 부부를 아주 우연히 만났다. 처음의 만남 이었지만 나보다 나이가 더 위이신 이분들과 교제가 처음부터 아주 친근하였다. 그분들은 우리들에게 매우 친절하셨고, 또 겸손하시기도 했다. 사업을 하시는 분들이라 또 진취적이셨고, 장로님은 경제적으로 어려워하는 지역 교민들을 열심으로 돌보시는 그런 분이셨다.우리와 대화중 남편되시는 분은 그곳 어느 지역교회의 장로로 섬기고 계셨고, 아내되시는 집사님은 여선교회에서 열심히 섬기시는 교회의 리이더 였다. 처음의 만남은 우연이었지만 두번째 방문에서는 우리들이 일부러 찾아가 교제를 할 정도로 가까워졌다. 이후 우리들이 그곳으로 이사간뒤 우리는 그 장로님 부부들이 섬기시는 지역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장로님 부부와 교제는 전보다 더 빈번하여졌다.
여러번의 교제를 가지면서 이분들을 알아 갈 수록 한가지 염려가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이분들이 교회를 열심히 다니시고, 또 성도들을 정성껏 섬기시지만 신앙이 없이 교회생활, 즉 종교생활을 열심히 하지 않는가라는 염려가 갈수록 짙어 졌다. 혹 우리가 잘못 생각할 수도 있어서 우리는 꾸준히 이분들을 위한 기도를 하면서 언제고 신앙간증을 들어 보면서 삶을 나누어 보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약 서너달동안 기도하면서 이분들과 별도의 만남 위한 하나님의 때를 살펴보았다.
그러던중 이분들을 저녁식사로 우리집에 초대할 수 있었고, 그들과 교제하면서 서로의 삶, 특히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던 가운데 우리들이 그분들에게 가진 신앙의 염려가 공연한것이 아니었음을 대화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담대히 그리스도의 오심과, 죽으심, 죄의 문제, 구원 및 영생에 대한 여러 주제를 가지고 대화를 나누었다. 혹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또 삶의 주인으로 영접한적이 있냐는 질문에 긍정적인 대답이 없으셨다. 한참 신앙이야기를 나누다가 장로님은 본인이 신앙이 없음을 우리에게 고백하셨다. 이미 추측하였던 것이라 우리들을 놀라지 않았고, 그날 대화를 통해 혹시 복음을 전하면 어떨까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모든 이야기를 간략하지만 아주 성경적으로 잘 설명해주는 사영리를 함께 읽어 보지 않겠냐고 제안하였다. 사영리의 내용과 성경말씀을 나누며 아내와 나는 그분들에게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지 않겠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좀 불쾌한 표정을 지으셨지만 그날은 바쁜일이 저녁에 있어서 얼른 가야할것 같다고 하셔서 복음전도는 거기서 끝났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장로로서 자격지심도 있고하여 불쾌하셨다고 하였다. 심중의 것을 있는 그대로 잘 들어 내실줄 아는 것이 사실상 장로님의 매력이였기에 나는 그분을 몹시 좋아한다.
여하간 그날 이후 우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예비하신 영혼임을 분명히 알았기에 더 기도하였고, 기회를 보다가 그분들이 계시는 일터로 찾아가서 다시 복음을 전했다. 먼저 우리집에서의 만남과 달리 두번째 전도의 만남은 마음의 문이 더 많이 열린듯 하였다. 우리들이 대화가 진행되면서 하나님께서는 그분들의 마음을 여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자신들의 구원자로 또 주인으로 영접하였다. 전에 갖지 못했던 놀라운 평안을 밀려온다고 장로님 부인 되시는 집사님의 고백을 들으면서 우리들은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이후 이 두분들을 만나 교제할때 마다 이분들은 자신이 주님과 주님의 교회에 잘못한 것들을 마음으로 회개하시곤 하였다. 장로로 잘못했던것, 교회에서 사역하며 주의 진리로 주님을 위해 섬기기 보다 자신의 명예를 위해 섬겼다고 회개 하셨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분들이 주님과 가까워 지는것을 보았다. 물론 한번에 모든것이 변하지 않으시니까 삶의 어려운 부분들에대해 꺼내 놓으면서 기도를 부탁하곤 하셨다. 우리 부부는 그분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사가기전 두분과 함께 우리는 가정예배를 드렸다. 예배의 기도를 부탁드렸고, 함께 찬양을 하였고, 나는 말씀을 전하고… 장로님은 눈물을 흘리며 주님께 마음을 찟으며 하나님께 부르짖으셨다. 이제는 새롭게 살겠노라고… 복음의 위력은 대단하다. 사람의 마음을 송두리째 바꾸어 버리는, 새 사람으로 만드는 능력은 바로 복음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복음은 교회 밖에서만이 아니라 안에서도 전해야 되는 것이다. 또한 직분자라 할지라도 복음을 알지 못하고 종교생활을 하고 있다면 우리들이 기도를 통해 전도해야할 대상이 될 수 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 (이사야 60:1~3, 개역개정)
KOSTA/USA가 시작된 지 어언 25년이 되었다. 지난 25년 동안 KOSTA/USA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돌이켜보면, 그 안에 있었던 소중한 만남과 추억, 그리고 하나님의 세밀한 손길에 우리는 감격하게 된다. 무엇보다 KOSTA/USA를 이끌어왔던 ‘복음, 민족, 땅끝’이라는 모토가 한국 복음주의권에 시대적인 영향력을 끼쳤음을 감사드린다.
복음, 민족, 땅끝(삶과 신앙의 통합)은 지난 25년 전 KOSTA를 시작할 때부터 KOSTA 운동을 이끌었던 핵심가치(core value)였다. KOSTA/USA가 시작되었던 1986년의 상황을 돌이켜 보자. 당시 KOSTAN들은 유학생으로서 고된 삶 가운데 있었고, 암울했던 조국의 상황을 그저 멀리 타국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이들은 “1980년대를 사는 한국인 그리스도인에게 복음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매우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그 대답은, 복음이 진정으로 한국 민족에게 소망이 되고, 그 소망을 세상에 선언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기 위해 준비해야 한다는 엄숙한 소명이었다. 복음이 삶으로부터 괴리되고 신앙이 종교의 영역에만 국한되는 당시 기독교 현실의 이원론적인 폐쇄성을 극복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KOSTA 내부에서 나오기 시작했고, KOSTAN들은 삶의 현장에서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게 하는 일에 헌신하기로 결단했다. 이런 고민과 결단은 지난 25년간 KOSTA/USA를 이끌어온 원동력이었다.
25년이 지난 지금, ‘복음, 민족, 땅끝’은 여전히 우리가 고민해야 할 문제일까? 처음 KOSTA를 시작했던 선배들의 치열한 고민이 지금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것일까? 우리는 올해 KOSTA/USA를 통해 ‘복음, 민족, 땅끝’의 주제가 이 시대에 의미하는 바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보고자 한다.
먼저 복음은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25년 전 복음이 우리 선배 KOSTAN들에게 소망이었듯, 여전히 복음이 우리의 소망임은 분명하다. 복음은 창조주의 선한 창조의지에서 벗어남으로 인해 파괴되었던 인간성이 회복될 길이 마침내 열렸다는 선포이자, 끊을 수 없는 죄의 악순환으로부터 비로소 자유를 얻었음을 알리는 선포이다. 하지만 복음의 진정한 의미는 개인적인 구원에 국한되지는 않으며, 자연, 사회, 문화, 학문 등 피조세계 전체가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우주적 선포인 동시에, 어그러진 이 세상에 빛의 역할을 하게 될 새로운 언약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예수께서 세우셨다는 공동체적 선포이기도 하다. 즉, 복음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장 궁극적 목표이자, 민족과 땅끝의 기초가 되는 포괄적인 가치인 것이다.
민족이라는 가치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한국인으로 태어나게 하신 이유가 있음을 믿는다. 특별히 일제 강점과 한국 전쟁, 가난과 독재 등의 고난 속에서 우리를 전세계에 디아스포라로 흩으신 목적이 있음을 믿는다. 다만 25년 전 우리 선배들은 한국인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조국을 섬기는 일을 통해 발현시켰다면, 이제 우리는 자민족중심주의나 국가주의와 같은 폐쇄성에 빠지지 않고, 타국에 있지만 한국인으로서 우리에게 부여된 탤런트와 성품을 사용해 우리 조국뿐만이 아닌 전 세계에 유익을 끼치는 일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한국인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은 폐쇄적이거나 이기적이기보다는,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섬김’의 정체성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땅끝이라는 가치는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를 지닐까?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자민족의 유익만을 추구하는 국수주의의 유혹에서 벗어나, 우리 민족에게 허락하신 복음의 복(blessing)을 전 세계의 모든 이들과 나눌 것을 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땅끝은 선교적인 의미를 가지는 가치이다. 그러나 땅끝의 의미는 단지 선교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복음은 언제나 우리가 정해놓은 경계(boundary)를 넘도록 요청한다. 예배당 안에서 이루어지는 편안한 종교행위로 신앙생활의 전부를 채우고자 하는 우리에게, 복음은 삶의 전 영역에서 그리스도를 주로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이야기한다.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우리의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종교적 영역에서만 우리의 주(Lord)로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학문, 가정, 사회, 문화, 인간관계, 직장 등 삶의 전 영역(sphere)에서도 역시 우리의 주로서 선언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25년 전 우리 선배들의 통찰은 여전히 이 시대에도 적용된다. 한 가지 역설적인 것은, 오늘날 우리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세속화 및 혼합주의(syncretism)의 도전 또한 맞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원론의 극복이라는 명목으로 세상과 대화하려는 시도가 자칫 세속화나 혼합주의로 변질되는 것을 우리의 삶 속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삶과 신앙의 통합을 위해 이원론 및 혼합주의를 동시에 극복하고, 피조세계 전 영역에서 그리스도가 주되심을 선언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함축하는지 고민하는 것은 우리에게 남겨진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2010년, KOSTA/USA 25주년을 맞는 이때에 우리는 복음, 민족, 땅끝의 세 단어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이며, 또한 오늘 우리에게 새롭게 도전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깊이 있게 고찰해보고자 한다. 복음이 이 시대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우리 민족에게 주신 복음의 사명이 어떤 것인지, 선교적인 의미로서의 땅끝의 가치, 또한 피조세계 각 영역의 복음으로서의 땅끝의 가치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고민해보고자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로 인해 뒤틀려진 이 세상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유대 민족을 택하시고 그들과의 언약으로 하나님이 여전히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분이심과 궁극적으로 온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신실하심을 표현하셨으며, 그 언약은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다. 이제 우리는 이 어그러진 세상 가운데 빛으로 부름받은 새로운 언약 공동체인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음성에 겸허히 귀를 기울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