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주희] 결혼 준비

많은 경우 결혼을 위한 준비는 결혼할 대상이 있고 결혼날짜를 잡으면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결혼식’을 위한 준비이지 진정한 의미에서 결혼준비라고는 할 수 없다. 사람들은 결혼식을 위한 준비에는 많은 돈을 들이고 계획을 세우며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 부으면서 정작 진짜 해야 할 결혼준비에는 너무나 소홀 한 것을 본다. 그 결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유무와 상관없이 가정들이 깨어지고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결혼준비는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을 안정감 있고, 책임감이 있으며, 진실한 사람으로 준비하는 것이다.

먼저 안정감에 대해 생각해 보자. 안정감이 있는 사람은 마음이 편안하고 고요하며 외부환경의 변화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고 침착하다. 반대로 안정감이 없는 사람은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대안이 없는 충동적인 일을 벌이며 주변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행동을 하기 쉽다. 또한 상황과 기분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일관성 없는 행동을 하게 된다. 만약 남편이 안정감이 없어 이 직장에서 저 직장으로 쉽게 옮겨 다니거나 혹은 이 일 저 일을 마구 벌이고 수습하지 못한다면 가정은 매우 불안할 것이다. 또한 아내가 불안정하여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일관성 없이 이랬다저랬다 할 경우 이는 교육전문가들에 의하면 자녀들에게 가장 좋지 않은 교육환경이 된다. 그러므로 결혼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정체감을 분명히 할 뿐 아니라 깊이 있고 신중하게 사고하며 감정과 행동을 절제하는 훈련을 하여야 할 것이다.

책임감도 결혼준비를 위해 중요하다. 혼자 독신으로 산다면 부담 없이 자신이 원하고 즐기는 일만 선택하여도 크게 문제되지 않겠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 하기 싫어도 힘이 들어도 해야 하는 일들이 많이 있다. 만약 그것이 버겁고 억울하게 생각된다면 결혼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의미이다. 특별히 여러 책임감 중에서도 돈에 대한 책임 있는 관리는 매우 중요하다. 이혼하는 부부들의 실제 이혼 사유 중 첫 번째와 두 번째가 외도와 경제 문제임을 생각할 때 더욱 그러하다. 만약 남편이나 아내 중 어느 한쪽이라도 돈을 자신의 욕구에 따라 규모 없이 함부로 쓰거나 원하는 것은 일단 카드로 긁고 보는 것이 습관이라면 결혼 후 얼마가지 못하여 가정경제의 뿌리가 크게 흔들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수입과 분수에 맞는 씀씀이와 부족할 경우 일을 통한 정당한 노력의 대가를 수입원으로 하는 책임 있는 재정관리가 연습되어져야 할 것이다. 나 자신도 결혼을 앞두고 가계부를 기록하며 돈을 아껴 쓰는 연습을 집중적으로 하였다. 그 당시 나는 급하면 택시 타는 습관이 있었는데 그것을 절제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었다. 결혼 후에도 가계부를 기록하며 수입 범위 안에서 각 항목 별 예산을 세워 그에 맞게 지출하였는데 20년 동안 그렇게 하였고 지금은 몸에 밴 습관으로 가계부 없이 생활한다.

마지막으로 진실성이다. 진실성은 부부관계에 있어서 신뢰의 기초가 되기 때문에 아내와 남편 모두에게 있어서 중요하다. 거짓이 없이 투명하게 서로를 대하며, 돈이나 다른 사람과의 만남에 있어서 속이지 아니하고, 이성과의 만남에 있어서 오해가 살만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다. 서로에 대한 진실성을 믿지 못하게 될 때 몰래 반려자의 핸드폰을 확인하거나 주머니를 뒤지게 되는 안타까운 일들이 벌어진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거짓말과 대화단절을 불러일으키는데, 이 두 가지가 부부갈등의 주요 원인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 그러므로 정직한 언어와 마음으로 하는 진실한 커뮤니케이션은 결혼을 위해 평소에도 부지런히 준비해야 한다.

안정감, 책임감, 진실함 외에 특별히 자매들에게 몇 가지 더 당부하고 싶은 것들이 있다. 그것은 상냥함과 이해심, 그리고 희생정신이다. 가정의 분위기는 아내가 주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밝은 모습으로 현관문을 들어서는 가족들을 환영하며 그들이 가정에서 쉬고 에너지를 충전하도록 기본 분위기를 만들어주면 좋겠다. 또한 일반적으로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더 섬세하고 예민하기 때문에 눈치 없고 둔한 남성들의 행동에 만족하기가 어렵다. 뭔가 부족하고 섭섭하며 아쉽고 속이 상하는 일들이 많이 생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한다. “잘난 우리 여자들이 너그럽게 이해하고 참읍시다!” 희생정신에 있어서도 그렇다. 아무리 남성들이 도와준다고 하여도 여전히 가사 일은 여성의 부담과 희생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므로 부지런하고 희생할 줄 알며 섬기는 것을 기쁨으로 여긴다면 결혼생활을 즐겁고 행복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당장 반려자가 없어도 결혼 준비는 가능하다. 오히려 행복한 결혼을 위해 더 든든한 기초를 다지는 좋은 준비 기간이 될 것이다. 안정감, 책임감, 진실함, 상냥함, 이해심, 그리고 희생정신… 이러한 것들이 사랑과 행복이 넘치는 가정을 위한 진정한 결혼준비 내용들이다.

[양승혜] 엄마의 복음


신앙을 지켜나갈 때 가장 많은 필요를 느끼는 것은 좋은 멘토를 만나는 것이다
.

예전에 어떤 멘토가 좋은 멘토인지에 대한 강의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될 수 있으면 가족이나 나를 잘 아는 사람보다는 제
3자가 좋다고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에게는 그런 사람이 없다. 지금까지는 가족이면서
나를 가장 잘 아는 우리 엄마가 나의 멘토이다
.

 

우리 집은 딸만 셋인데 가장 먼저 결혼한 막내가 선교사로 M국에 가있다.
사람들은 오지라고 말하는 곳이지만 동생말로는 그곳도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라고 한다
.
대부분의 부모님들은 교회에서 하는 선교에 열심히 동참하시고,
선교의 중요성도 잘 알지만 막상 자식들이 선교사가 된다고 하면
반대부터 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
. 하지만 우리 부모님은 조금 다르시다.
두 분 모두 평범한 평신도이지만 하나님께 쓰임받는 일을 기뻐하시고,
부르심에 따라 사는 삶을 축복이라고 생각하신다.
특히 엄마의 신앙은 말과 행동의 일치로 이어지면서 우리들에게 많은 영향력을 끼쳤다.  

 

오랫동안 옷가게를 하신 엄마는 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신다.
경제가 어려워 모든 상권이 주춤하고 있는 상태지만 항상 밝게 웃는 엄마를 보고
장사가 잘 된다고 생각하신 어떤 분이
아줌마는 교회다니셔서 이렇게 잘 되시나봐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 엄마는 평소에 안면이 있는 그 분이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지만
다른 말은 하지 않고
그러게요. 참 감사한 일이지요하셨단다.

그래서 내가 왜 교회에 나가보라고 권유하지 않았냐고 묻자
복음을 들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는데 그 귀한 것을 함부로 말할 수 있겠니?
무조건 교회만 나가라고 하는 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니까.
하나님께서 기회와 상황을 열어주실 때가 있어. 그 때를 잘 알아야지.” 라고 말씀하셨다.   

 

며칠 전에는 교회말고 다른 곳에 선교헌금을 하고 싶다는 어떤 할머니가 소개를 받고
찾아오셨는데
동생 내외에 대해서 꼬치꼬치 묻더란다.
그런데 얘기를 듣다보니 그 할머니가 평생 교회를 다니셨지만 
복음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 선교헌금을 했다는 것을 알리고만 싶어하는 것 같아서
엄마는 과감하고 직선적으로 할머니께 복음을 전하셨다고 한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도 모르고 이렇게 교회만 다니시면 아무 소용없다며
일침을 가하셨다고
그리고 선교헌금은 반드시 교회에 하시라고 권면하셨다고 한다.   

그 할머니는 놀라면서 지금까지 한번도 이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하셨다는데

내가 그 할머니가 이상한 교회 다니신거 아니냐고 묻자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큰 교회라고 하셨다. .;

 

평생 교회를 다녔지만 복음을 모르는 사람.

교회가 뭔지, 복음이 뭔지, 들을 기회조차 없는 사람.

교회를 다닐 여건이 되지만 도대체 귀를 막고 복음을 들으려 하지 않는 사람.   

어찌됐건 이 세상에는 아직도 복음이 전해져야 할 곳이 많으니
예수님이 오실 날은 점점 미뤄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  

 

매일 반복되는 똑같은 일상일지 모르지만 그 안에서 빛을 발하는 나의 복음은 어떤 것일까?

생명을 살리는 복음의 능력을 알기에 자신이 있는 위치에서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러나 값싸지 않게
복음을 전하는 모습이 나에게는 있는지 돌이켜보게 된다.

복음의 능력은 잘먹고 잘사는데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 그 분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엄마의 일상은 늘 활기차고, 하나님이 하실 일들을 기대하는 소망함으로
가득차 있는 것 같다
.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
라. 마태복음 6:33

 

이 시대에 엔지니어로 열심히 일한다는 것

제가 자주 들르는 인터넷 커뮤니티가 있습니다. 제가 그곳에 글을 쓰거나 하는 형태로 참여하지는 않지만 거의 매일 들러서 올라오는 글들을 보곤 합니다. 그곳에는, 지금 대학생으로부터 제 나이 정도 되는 사람에 이르는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을 나눕니다. 대부분은 공대생/공학자/엔지니어입니다.

이들은 자신을 스스로 ‘미싱공’이라고 칭합니다. 그 논리는, 60-70년대 한국의 경제 성장이 ‘미싱공 언니’들의 노동착취를 통해 이루어졌다면, 21세기 초반 한국의 경제 성장은 현대판 미싱공인 엔지니어들의 노동착취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월화수목금금금’의 생활 방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45세면 다니고 있던 회사 나와서 뭐 하며 살지 막막해지는 현실은 40년 전 미싱공 언니들의 사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푸념입니다.
지긋지긋한 가난을 이겨보겠다고, 동생들 학교 보내겠다고 시골집을 나와서 상경, 공장에 들어가 하루 15시간씩 노동에 시달려야 했던 예전의 ‘미싱공 언니’들에 비하면 물론 지금 엔지니어들은 여러 가지 처우가 훨씬 좋습니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엔지니어들이 느끼는 박탈감이랄까요 그런 것이 매우 심각한 수준입니다.

저는 수년 전 KOSTA/USA 집회에서 손봉호 교수님께서 하셨던 한마디를 잊지 못합니다. 제가 그때까지 씨름했던 학문/직업세계와 신앙의 통합에 관하여 가장 명쾌한 그림을 그려주는 말이었습니다. 손봉호 교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후에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이 땅의 모든 것들을 그분의 주권 아래 회복하시는 그때가 되면 (하늘나라에 가면), 그곳에서 열심히 땀 흘리며 일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 주님과 함께 열심히 땀을 흘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노동의 기쁨이 그때는 회복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도인들은, 이 세상에 살면서도 올 세상의 삶 (life to come)의 가치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서 삶과 사역과 선포와 죽음과 부활로 선포하셨던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가치, 새 창조가 이제 이 땅에 이미 시작되었음을 알고 그 가치대로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살고 있지만, 영원한 가치를 가지고 사는, 전혀 다른 세계관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과연 ‘월화수목금금금’을 하며, 자신의 상황에 절망하는 21세기 초반의 엔지니어들에게, 예수께서 선언하신 이 새로운 세상, 새 창조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그 고민을 가지고 실제 삶을 살아내는 일은 이론적으로 단순하게 이야기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복잡하고 어렵게 느껴집니다. 제가 대학생 때, 대학원생일 때 열심히 배웠던, 창조-타락-구속의 소위 ‘기독교 세계관’의 틀은 현실에서 적용하는 것이 너무 벅차게 느껴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과연 그것이 적용 가능한 이야기이긴 한 걸까 하는 좌절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결국, 그 세계관을 이야기했던 이들은 다들 교수님이 아니었던가. 정말 ‘세상’에서 뒹구는 공돌이-미싱공들의 현실에는 그저 맛있어 보이는 자린고비의 굴비는 아닐까.

제 나름대로 1980년대 후반 소위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것을 접하면서 그야말로 가슴이 벅차게 뛰는 경험을 했었습니다.  그곳으로부터 이원론의 극복이라는 가치를 끄집어내서 살다 보니  심하게 세속화되어버린 저 자신을 보기도 하였습니다. 소위 ‘빡센’ 세상을 접하면서 그 기독교 세계관(혹은 개혁주의 세계관)의 프레임워크가 정말 유효하긴 한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가지기도 하였고요.

물론 제 나름대로 이에 대하여 정리해가는 생각이 있긴 합니다만, 그리고 기회가 되면 이곳 eKOSTA 에서도 그런 내용을 나누며 많은 다른 분들의 생각을 듣고 싶기도 합니다만, 오늘의 글은 이 정도에서 애매하게 맺어보려고 합니다. (혹시 댓글 등으로 제 생각에 ‘딴죽’을 거시거나 추가 설명을 요구하시는 분이 계신다면 그렇게 좀 더 이야기를 진행해 볼 수도 있겠습니다.)

어쨌든 제가 여전히 포기할 수 없는 것은, ‘회복된 그 세상에서 예수님과 함께 즐겁게 노동할 것이다.’라는 그 그림입니다. 도대체 지금 이 시점에 엔지니어로 열심히 사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하냐고 어떤 분들이 제게 물으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 땅에 살면서도 저 영원한 가치를 가지고 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저 영원한 나라가 품는 가치 가운데에는 온전하게 회복된 노동도 있다고, 그리고 비록 여러 가지 현실이 여전히 어그러진 모습 속에 있지만, 나는 그 속에서 그 회복된 가치가 마치 지금 현재의 가치인 것 같이 살아내는 특권과 책임을 가진 사람이라고 그렇게 대답을 할 것 같습니다.

[이영길] John과의 만남

John [가명] 칼빈대학 학생이다. 칼빈대학에는 멘토링 프로그램이 있어서 학교에서 나에게 학생하나를 멘토하면 어떻겠냐고 권유하여 최소한 한해 한명은 기도하면서 성실히 섬길 수 있을것 같기도 하다고 허락하여 만난 학생이 John이다. 나와 John은 격주에 한번씩 만난다. 보통 두시간, 어떨땐 조금 넘을때도 있고 또 모자랄때도 있지만 우리는 정기적으로 만난다.

지난 가을 학기 부터 시작하여 이번 봄 학기 까지 꾸준히 만났다. 만남 초기의 대화는 삶의 문제를 꺼내 놓고 그 해결을 위한 상담이었다. 삶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만한 능력과 지혜가 없음을 분명히 알고 있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이다. 주로 만남이 있기전 우리의 만남 앞두고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고 또 우리의 만남을 의탁드린다. 이렇게 우리들은 만난다.

John뿐 아니라 다른 학생들과의 상담에서도 나는 비슷한 방법을 취한다. 그냥 기도하고,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조르는 것이다. 좀 세련된 방법은 아니고, 좀 무식해 보일 수도 있는 방법이지만 나는 이같은 접근을 아주 좋아한다. 그동안 여러 학생들과 교제하고 상담하는 과정 속에서 얻는 귀한 통찰이 하나 있었다. 엄청나게 멋있게 들려지는 그런 통찰이 아니고 이미 성경에 수없이 많이 제시된 보편적이며 단순한 진리이다. ,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 근원은 하나님을 떠남, 혹은 하나님 보다 나와 사람을 더 의지함에 있다는 것, 그러기에 모든 문제의 해결책은 하나님께 돌아감 혹은 나를 포기하고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함에 기인한다는 성경적 원리인 것이다.

이러한 생각과 경험을 가지고 기도하며 John을 만났다. John은 교회도 다니고 있었고, 또 칼빈대학 같은 크리스쳔 대학을 다니고 있었기에 나는 그가 하나님을 잠시 떠난 상태이거나 자기 중심적 사고를 가지고 사람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줄 알았다. 그러나 우리들의 두번째 만남을 통해 하나님은 John의 문제가 하나님을 떠남에 있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르는것에  있다는 생각을 하게 도와 주셨다. 즉 기도중 그같은 의심이 생겨 났고, 구원에 대한 확인이 있어야 한다는 강열한 생각이 솟아난 것이다.

그래서 그 이후 우리의 대화는 복음제시로 방향이 바뀌게 되었다. 처음에 John은 좀 놀라는듯 했지만, 자신의 신앙의 상태에 대해서 매우 솔직했다.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다고 내게 분명히 대답하는 매사 분명한 아이였다. 나는 대화식으로 구약과 신약을 이야기 하며 교제 하였다. 그렇게 몇번을 만나다가, 학기말 시험이후 John과 그의 여자친구를 함께 우리집으로 점심 초대 하였다. John의 신앙상태를 알기 시작하면서, 또 집으로 초대해 놓고 나와 우리 가족은 매일 저녁 John의 구원문제를 위해 기도하였다. John에게 나의 가족도 소개하고, 또 점심을 함께 먹으며 많은 이야기 하다가 기회를 내어 사영리를 가지고 복음을 제시하였다. 놀랍게도 John은 여자친구가 지켜 보는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영접하였다. 그날 처음 만났던 John의 여자친구였지만, 그녀는 내게 이 순간을 위해 제법 끈질기게 기도하였다고 귀뜸해주었다. 그래서 나도 이 순간을 위해 눈물을 뿌리며 끈질기게 기도하였다고 귀뜸해 주었다. 우리는 함께 하나님의 끈질긴 사랑을 함께 고백하며 주님을 찬양하였다.

하나님의 자녀가된 이후 봄학기에 가진 우리의 첫 만남에서 John은 삶의 여러 문제를 더 이상 가져 오지 않고 신앙성숙과 관련된 질문들을 하였다. 어떤 질문에는 스스로가 묻고 대답하기도 하는데 그 대답들은 John의 신앙 고백으로 들려 졌다. 전에 나누었던 삶의 혼돈 및 장래에 일어날 염려에 대한 질문은 우리들의 대화에 조금도 끼어들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예수님 없는것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고, 예수님 있는 것이 모든 문제의 해결임을 다시 실감한 복음전도 였고, 또 멘토링이였던 것이다.

크리스쳔 교수의 참 맛은 학생이 좋은 직장으로 좋은 보수를 받고 일하게 되어서가 아니다. 또 한학기를 잘 가르쳤다고 학생들이 감사로 스타벅스 카드나 책을  선물로 가져다 주어서도 아니다. 학기말에 주로 행해지는 학생들의 강의 평가가 좋아서 또한 아니다. 크리스쳔 교수로서 가장 신나는 일은 강의실과 강의실 밖에서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그리스도를 모르는 학생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를 알게되는 일이다. 영원이라는 차원의 엄청난 사역을 보잘것 없는 나에게 맡긴 하나님은 참으로 위대 하시다. 나는 그같은 하나님이 너무 좋아 오늘도 혹 내게 맡기신 영혼이 없는지 호시탐탐 기회를 옅보게 된다. 할렐루야!

[이유정] 추락하는 것에 날개가 있다

추락하는 것에 날개가 있다1)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욥 23:10

여행가 한비야가 그의 책《그건 사랑이었네》2)에서 고교시절 미국인 선교사에게 받은 시를 소개했다.

천길 벼랑 끝 100미터 전,
하나님이 나를 밀어내신다. 
나를 긴장시키려고 그러나?
10미터 전, 계속 밀어내신다. 
이제 곧 그만두시겠지.
1미터 전, 더 나아갈 때가 없는데 
설마 더 미시진 않을 거야.
벼랑 끝, 아니야 하나님이 나를 
벼랑 아래로 떨어뜨릴 리가 없어.
내가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 너무나 잘 아실 테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벼랑 끝자락에 간신히 서 있는 나를 
아래로 밀어내셨다.

그때야 알았다. 
나에게 날개가 있다는 것을” 3)

나도 짧은 인생이지만 여러 번 낭떠러지를 경험했다. 17년 교회 생활의 끝에 나는 자살을 생각하는 대학 2년생 젊은이로 무너지고 있었다. 인생의 도피처로 들어간 군에서 극적으로 예수님을 만났고, 그 직후에 하나님은 나에게 날개를 달아주셨다. 군 생활 2년 동안 기타하나 메고 3사단 전역을 돌아다니며 찬양하고 복음을 전하는 찬양 군종조 활동을 했다. 한국에서 미국에 건너올 때도 10여년의 기독교대중음악(CCM) 사역의 끝에서 영적 침체를 경험하며 헉헉거리고 있었다. 그때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예배회복’의 부르심으로 날개를 달아 미국으로 건너왔다. 

유학 와서 1년 지나니 한국에서 가져온 재정이 바닥났다. 빈털터리 일보직전, 4시간 반 떨어진 이민교회에서 주말 사역 요청이 들어왔다. 분쟁의 어려움을 찬양으로 극복하려는 염원이 있었음을 나중에 알았다. 한국에서 찬양사역 전문가로써 10년 넘게 사역했던 내 마음이 밑바닥까지 무너져 내리던 기간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광야 같은 시간을 통해 나의 내면을 다루셨다. 한국에서 영향력 있는 위치에서 사역하면서 나도 모르게 높아져 있던 마음을 겸손케 하시는 은혜를 누렸다.

미국생활 10년의 마지막 3년 간 나는 다시 한 번 낭떠러지로 나를 밀어내시는 하나님을 경험했다. 처음에는 왜 영광스런 주의 몸 된 교회가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하나님께 불평도 많이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이 광야 같은 기간이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 23:10)는 욥의 고백처럼, 오히려 우리를 정금처럼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광야 학교 레슨 기간임을 깨닫게 되었다. 

광야의 헬라어 ‘에레모스’의 의미는 적막하거나 사람이 살지 않는 ‘광야’, 물과 식물이 없어 살 수 없는 ’황무지’, 황폐하여 주민이 떠나버린 유기된 땅이다. 한홍은 《거인들의 발자국》에서 이 광야를 자신의 자아가 부서지는 곳, 교만과 독선이 녹아내리는 곳, 억울한 누명을 쓰고 독한 공격을 당하는 곳, 끝없는 방황 속에 탈진되는 곳,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곳, 나의 계획이 실패하고 나의 생각이 전혀 먹히지 않는 곳, 한없이 외롭고 한없이 서러운 곳, 서글픈 마음이 드는 힘든 곳으로 표현했다. 그래서 엘리트는 고급 시설을 갖춘 명문 학교에서 나올지 몰라도 리더는 반드시 광야라는 학교를 통해서 빚어진다고 했다.

사무치게 동감이 되는 말이다. 성경의 위대한 지도자들은 한결같이 그 광야학교를 통과했다. 40년 동안 광야에 도피해 있던 모세, 10년 넘게 엔게디 광야를 도망 다닌 다윗, 애굽의 밑바닥을 죄다 경험한 요셉이 그랬다. 심지어는 예수님도 30세까지는 야전경험을 하시지 않았는가? 

이 광야 시간을 통해 하나님은 나를 정금같이 단련하셨다. 겸손하게 만드셨다. 전경일은 그의 책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에서 한 산악인 친구가 한 말을 소개했다. “넘어져 봐, 한 번도 넘어지지 않고 정상까지 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말 그대로 나는 낭떠러지를 경험하지 않고는 결코 깨달을 수 없는 새로운 빛을 발견했다. 광야 같은 10년의 끝자락에 허락된 안식월 4달 동안, 나에게 새로운 날개가 자라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깨달음의 산물이 바로 곧 출간될 책 《존재를 살리는 예배의 힘》(가제)이다.  

하나님 안에서 모든 떨어지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쉬운 말로 표현하면 “고통에는 뜻이 있다.” 옥한흠 목사는 《고통에는 뜻이 있다》에서 이를 ‘변장된 축복’이라 말했다. 고난  자체의 문제를 보지 말고 고난을 통하여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고난의 문제를 다루는 중요한 핵심이다. 때때로 우리를 낭떠러지로 몰아가시지만, 결국에는 창공을 날도록 날개를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찬양한다.            

– 이유정 목사 / 한빛지구촌교회 예배목사, 좋은씨앗


<주>
1) 오스트리아 여류시인 잉게보르크 바하만은 그의 시 ‘유희는 끝났다’(Das Spiel ist aus)에서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있다”는 표현을 썼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일반적으로 추락하는 사람은 높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추락하는 것이고, 그래서 이미 그에게 날개가 있었다는 의미로 본다. 이문열은 동명의 제목으로 소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를 썼는데 젊은 날의 광기어린 사랑을 그린다. 이 책에서는 ‘추락하는 것에 있는 날개’를 끝 모를 추락, 즉 죽음이야말로 인간이 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풀었다. 나는 바하만의 의미로 이 제목을 붙였다.

2) 한비야, 《그건 사랑이었네》(푸른숲, 2009) p. 89. 한비야는 그녀의 나이 35세에 배낭하나 달랑 메고 7년간 세계여행을 한 여행가이자 작가이고, 월드비전 긴급 구호팀장으로 뛰기도 한 독특한 분이다.

3) 한비야가 이십대 초반, 자신에게만 모든 문이 닫혀 있는 것 같았던 시절이 있었단다. 아무리 몸부림치며 노력해도 세상이 합심해서 자신을 벼랑 끝으로 밀어내고 있다고 생각하며 힘들어 하던 시절이 있었단다. 여고시절 영어성경반을 가르치던 미국인 선교사 부부가 격려의 편지와 함께 보내주었던 글, 일기장을 새로 시작할 때마다 맨 앞장에 써 놓았던 시. 이 순간 정신없이 담금질을 당하고 있는 젊은이들과 나누고 싶다고 소개한 시이다.

[김운학] 2010 NC-gpKOSTA를 참석하고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는 분께

 

벌써 3주가 지났네요.  3월 11일부터 13일까지 있었던 NC-gpKOSTA에 참석한 것이 말입니다.  2004년부터 코스타에 참석했으니 벌써 여섯 번이나 다녀왔네요.  매년 코스타에서 돌아오면 변화되지 않은 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실망하지만, 그때마다 저를 변화시키는 것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삶을 사는 저를 사랑하시기를 멈추지 않는 당신의 마음일 것입니다.  

 

이번 주 금요일은 수난일입니다.  2000년 전 당신의 고통을 같이 느끼고 당신의 고난에 동참하는 기간입니다.  제가 살아가면서 당신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제 이웃의 고통에 무관심하지 않기를,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바라보지 않기를 바라며 그것들에 민감하게 반응하기를 결단하는 마음으로 제가 2박 3일 동안 집회에서 받았던 은혜들을, 그중에서 제게 특히 인상적이었던 강의들을 중심으로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강의였던 섬김의 리더십과 성경적 세계관이 저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첫 번째 강의는 신명기 17장 14절부터 20절 말씀을 배경으로 이루어 졌는데 요점은 Leadership Transformation이었습니다.  세상적인 세계관으로 본 리더십은 to do good이지만 성경에 나와 있는 리더십은 to be well 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to do good 에서 to be well 로 가는 것이 Leadership Transformation 이고 그것은 4가지 단계로 나누어진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Innovation 이고 두 번째는 Integrity 이며 세 번째는 Influence 그리고 네 번째는 Incarnation 입니다. 

 

Innovation

이것은 내면의 끊임없는 변화입니다.  성경적 세계관에서 말한 인식/초점의 변화가 이것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에서 정녕 죽으리라.  인식의 틀이 회복되는 것, 더 이상 육의 제한된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담대하게 버리고 온전하게 현실을 인식하는 것이 리더로 거듭나는데 절대로 필요한 변화가 아닐까요?

 

Integrity

이것은 치우침 없는 양심입니다. 현혹된 인식이 회복되면 이제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런 정욕의 가치관으로 보았을 때 소중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강의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아마 치우침 없는 양심은 그러나 내게 유익하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다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내가 참으로 모든 것을 해로 여기는 것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내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심지어 배설물로 여기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안에서 발견되기 위한 것입니다. 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언제나 이렇게 깨끗한 마음으로 당신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Influence

이것은 지시보다 마음의 감동입니다.  인간이 타락하면서 인간들과의 관계가 파괴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지배하려고 하고 이웃을 사랑할 대상이 아닌 경쟁해야 할 상대, 즉 내가 밟고 일어나야만 하는 상대로 보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세속적인 리더들은 권력을 사용하여 명령으로 사람들의 몸 움직이려고 하지만 성경적인 리더는 사랑으로 이웃에게 감동을 주어 그들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저는 언제쯤 세계관이 회복되어 사람들을 힘으로 찍어 누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권력이 아닌 거룩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까요?

 

Incarnation

이것은 완전한 자기부인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으시고 종의 모습으로 죽기까지 순종하신 그 마음이 진정한 자기부인입니다. 

이렇게까지 낮아지고 섬기는 것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산다는 것의 참 의미가 아닐까요?

 

변화는 기도, 양심은 순종, 영향은 겸손, 그리고 자기부인은 섬김입니다.

 

Leadership and world view transformation이라는 과정은 말씀으로 시작되어서 말씀으로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변화의 시작도 말씀이고, 내 양심을 지켜 주는 것도 말씀이며, 내 마음의 감동을 주는 것도 말씀이고, 섬김의 본질도 말씀이라는 것을 이번 집회를 통해 알게 되어서 너무나도 기쁘고 감사합니다.  이제 이것을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는 일만 남았군요.

 

6년 전 무더운 한여름 밤 자정에 아무도 없는 제 방에서 조용히 성경을 읽다 당신을 처음 만났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저 자신을 Spiritual Cinderella라고 부릅니다.  12시 전에는 세상의 화려한 자녀였지만 12시 후에는 초라한 당신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당신이 저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저를 사랑하시기에 어떠한 일을 하셨는지 알게 된 그날을 돌아보면 지난 6년을 돌아봅니다.  그동안 걱정도 많이 시켰고 불효도 많이 했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저를 놓지 않으시고 붙잡아 주시는 당신.  이번 코스타에서 내린 결단은 이 과정을 마무리하겠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끝까지 당신이 제 손을 놓지 않으시는 한 저도 손을 놓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저를 호적에서 파버리시고 아들이 아니라 부인을 하시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만을 바라보겠습니다.

 

이 글을 맞추고 나면 저는 벚꽃 놀이를 하고 있겠죠. ^^

유난히도 눈이 많이 와 지나지 않을 것 같았던 겨울이 가고 꽃 피는 봄이 왔듯이

D.C.에 벚꽃이 피듯 N.C.에 하나님의 나라가 피기를

차가운 마음의 겨울도 가고 따뜻한 봄이 오기를

떨어지는 꽃입처럼 제가 낮아지기를

 

아들됨과 채찍질하심을 같이 받기를 사모하는 자가


세상에서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작년이었던가요, 제가 어떤 지방에 가서 다른 교회에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gpKOSTA를 마치고 제가 아는 어떤 분이 담임목사님으로 계신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 것이었습니다. 그 목사님께서 제게 주일 예배에서 간증해 달라고 하셨는데, 저는 제 간증을 하는 것을 늘 불편하게 생각할 뿐 아니라 간증을 잘하는 사람도 아니어서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그 목사님께서 워낙 완강하게 말씀하셔서 울며 겨자 먹기로 간증을 하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그 형편없는 간증 동영상이 제 아내에게 입수된 것이었습니다. 제 아내는 그 간증을 듣더니 다시는 다른 곳에 가서 이렇게 이야기하지 말라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심지어는 자신도 듣기 어려웠다나요.

그 간증의 내용은 대충 이런 것이었습니다.
‘나는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잘했다. 모범생이었다. 그러나 그 마음속에 공허함이 있었다.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그 공허함이 해결되었다. 그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내가 잘했던 공부를 어렵게 하심으로써 내가 하나님 나라 백성다움을 갖추어나갈 수 있게 해 주셨다.’

제 아내가 문제로 삼은 것은 간증의 전반부였습니다. 소위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식의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반감만 주기 쉽다는 것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제 아내의 생각이 맞습니다.

eKOSTA에서 제게 ‘직장생활’에 관한 글을 써 보라고 권유했을 때, 저는 흔쾌히 그렇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직장 생활을 하는 여러 가지 고민과 기쁨과 좌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 이야기가 마치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와 같은 식으로 들릴 수 있다는 우려를 깊이 하지 않은 채 글쓰기를 허락한 것 같다는 우려가 그 후에 닥친 것이었습니다.

저는, 사실 미국에서 소위 ‘명문학교’로 일컬어지는 곳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좋은 직장’으로 여겨지는 곳에서 일하였고, ‘살기 좋은 곳’으로 알려진 실리콘 밸리에서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직장의 안정성에 대한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같은 시대를 사는 다른 분들에 비하면 꽤 안정적인 환경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현재 일하는 내용도 소위 ‘첨단’으로 분류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직장생활에서의 만족도도 매우 높습니다.

그런 제가 제 사는 이야기를 쓴다면 여러가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겠지요. 이렇게 미리 언급해둠으로써, 제가 엘리티시즘을 추구하는 것이라든지, 혹은 제 자랑을 하려고 글쓰기를 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밝혀두고 싶은 것인데, 제대로 전달이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얼마가 될지 모르겠으나, 이런 자기소개와 변명이 뒤섞인 애매한 글로 제 eKOSTA 글쓰기를 시작하려 합니다.  제 직장생활에 대한 글을 쓰면서, 제 스스로 제 생각을 정리해볼 기회를 얻기 원함도 있으나, 무엇보다 다른 분들의 충고와 조언, 질책과 코멘트를 듣고 싶습니다. 가능하다면 인터렉티브한 대화가 오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유정] 예배의 힘

“이제부터 너희에겐 세 가지 자유가 없다. 첫째 자유, 둘째 행동할 자유, 셋째 웃을 자유!”

1983년 초여름, 삼 사단 백골부대 신병교육대에 도착하자마자 매섭게 생긴 교관이 던진 서리에 찬 말이다. 눈썹까지 내려온
모자를 눌러쓴 조교의 검게 그을린 얼굴 때문인지, 그 밑에 겨우 보이는 하얀 눈은 마치 독수리의 날카로운 눈빛처럼 매섭게 빛났다.

“뒤로 취침! 좌로 굴러!, 우로 굴러!”

말이 떨어지자마자 30여명의 신병은 연병장을 구르기 시작했다. 조교는 뙤약볕 무더위에 아랑곳 않고 어리벙벙한 신병들의 사회티를 벗겨내기 위해 군기를 잡는데 혈안이었다. 소금을 먹지 않으면 쓰러져 거품을 정도였다. 2시간 넘도록 연병장을 뛰고, 구르는 동안 문득 이제 나는 이상 마음껏 자유를 누릴 있는 사회인이 아니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렇다. 자리에 있었던 30여명의 신병은 이제 사회와 격리된 군인인 것이다. 그래서 이등병으로 입대한 모든 대한한국 남자는 사회에서 가졌던 모든 지위, 출신, 배경, 교육, 신분을 떠나군인이라는 새롭고 동등한 지위로 바뀐다. 그래서 장관의 아들이건, 시골 농부의 아들이건 똑같은 입장에서 똑같이 훈련받고, 기합 받고, 차례를 받는다. 

예배의 현장도 마찬가지이다. 예배드리는 모든 성도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하나님 앞에서 존재의 가치가 동등하다. 나라의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이건 공사판에서 흘려 일하는 막노동 일꾼이건 상관없다. 대기업 최고 경영자이건 이십대 비정규직 사원이건 상관없다. 사성장군이건 환경미화원이건 상관없다. 순간 모두가 동등한 하나님의 자녀로 바뀐다. 이것이 예배의 힘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그려주신 예배의 그림이 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_ 4:23

말씀은 예수님께서 유일하게 예배에 대해서 가장 직접적으로 언급하신 예배의 본질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에 어떤 대상이 따로 없다. 있다면 가지이다. 그것은 아버지께 드릴 있는 성도의 지위이다. 바로 하나님의 자녀 말이다. 그래서 예배자의 조건은 하나이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이다.

영접하는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_ 1:12

예배 현장에서 하나님의 자녀 이외에 지위와 학력이 영향을 미친다면 그것은 이상 예배가 아니다. 교회 안에서 사회적 능력과 부가 사람을 차별한다면 이상 교회가 아니다. 교회 안에서는 서로를 향해형제자매라고 부르는가? 예수를 머리로 몸을 이룬 지체들의 모임이 교회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는 결코 상상할 없는 평등의 패러다임이다.

그래서 예배는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권력투쟁, 빈부격차, 상하계급, 인종차별의 검은 파워를 일순간 지워버린다. 모든 관계, 모든 입장, 모든 스타일, 모든 인종, 모든 형식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재창조한다. 그래서 땅에서 회중 예배 현장만큼 감사와 기쁨, 사랑과 평화, 치유와 회복, 자유와 해방, 신뢰와 소망의 함성이 터져 나오는 곳은 없다.

예배는 어떤 지위, 계급, 빈부, 종족의 사람이라도 담아낼 있다. 그것이 바로 예배의 그릇이다. 예배의 넓이는 우주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넓이이다. 예배의 높이는 모든 이름위에 뛰어나신 예수님의 높이이다. 예배의 깊이는 모든 진리를 꿰뚫는 성령님의 깊이이다. 예배 현장에 살아계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지혜를 뛰어넘으신다.

여호와의 말씀에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_ 55:8,9

가슴 벅차지 않은가? 통쾌하지 않은가? 세상의 어떤 허울도 통하지 않는 인간 존재의 본질 자체가 인정되는 현장, 모든 가식과 껍데기, 위장과 술수가 통하지 않는 준엄한 정의가 살아 있는 , 모든 미움과 시기, 분쟁과 갈등, 경쟁과 시비가 힘을 잃고 섭씨 수천 도의 십자가 용광로 사랑으로 녹아버리는 , 연금술의 지존인 아버지 하나님께서 새로운 피조물을 빚으시는 신비의 현장이다. 바로 그곳이 예배의 현장이다. 이것이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예배의 그림이다.

[최주희] 신뢰성(Faithfulness)

사랑의 공동체는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요구하시고 기대하시는 중요한 주제이다.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간절히 원하는 바램이기도 하다. 늘 내 주변에는 좋은 사람들만 있어서 사랑을 마음껏 주고받으며 행복하게 살고 싶다. 그리고 나도 그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받아들여지고 싶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랑의 공동체가 그리 만만해 보이지 않는다. 목사님의 설교나 좋은 책들, 또한 구역이나 셀 모임에서 그렇게 많이 강조하였건만 여전히 우리들에게는 풀리지 않는 숙제들이 남아있다. 무엇이 문제일까?

한국 교회는 지난 이십여 년 동안 기독교 상담의 좋은 영향을 받아 왔다. 그리하여 공동체 가운데 자기를 개방하고 상대방의 감정에 공감하며 서로 이해하고 용납하는 것의 중요성을 배웠고 또한 실천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결여된 것이 있다. 바로 ‘신뢰성(faithfulness)’에 대한 문제이다. 신뢰성은 믿을만한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 주는 타인의 믿음으로, 공동체가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다.

만약 어느 공동체에서 서로 마음을 열고 섬기고 사랑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데, 어떤 사람이 거짓말로 이간질 하거나 돈을 빌리고 갚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더욱이 얌체처럼 말만 잘하고 이기적으로 자기의 실속만 차리며 져야할 공동체적 책임을 회피한다면 과연 그들이 깊이 있게 하나가 될 수 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신뢰성을 가지고 있지 않는 공동체는 시간이 가면 무너진다. 처음에 서로 잘해 줌으로 친밀한 모양새를 갖출 수는 있지만 얼마가지 못하여 곧 갈등과 문제가 생기게 된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신뢰성이란 무엇일까? 수업시간에 신학생들과 ‘신뢰할 만한 사람’의 특징에 대해 토론했는데 다음과 같은 대답이 나왔다. 정직한 사람, 겉과 속이 같은 사람, 비밀을 지키는 사람, 자기가 한 말을 지키는 사람, 성실한 사람,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지 않고 자신이 책임지는 사람, 자기의 분수를 아는 사람, 옳은 일에 대해 바른 말을 할 줄 아는 사람, 뒤에서 다른 사람을 비난하지 않는 사람, 자기의 유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거나 해롭게 하지 않는 사람, 겸손한 사람, 사람을 존중하는 사람… 모두 맞는 말 이다.

성경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도 신뢰성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신뢰성 중에서도 특별히 정직, 성실, 진실은 으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정직은 구체적으로 돈에 대한 정직과 말에 있어서의 정직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우선 돈에 대한 정직은 내 돈과 남의 돈을 구분하는데서 출발한다. 비록 남의 돈을 훔치거나 사기 치지는 않을지라도 공금을 개인 돈처럼 사용하거나, 마땅히 내야 하는 세금을 편법이나 여러 가지 옳지 않은 방법으로 내지 않는다면 정직하지 않는 것이다. 말에 있어서도 사실이 아닌 말을 하거나 혹은 내용을 빼거나 덧붙임으로 나의 목적을 위하여 본말을 왜곡시킨다면 정직하지 않은 것이다. 언젠가 아들이 운전면허를 딴 후 몰래 아빠의 차를 가지고 돌아다니다가 들켰는데, 그 후 언어의 정직을 스스로 훈련하면서 깨달은 것을 우리에게 나누었다. “엄마, 정직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마치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어려운 것 같아요.” 언어를 정직하게 사용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은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언어에 정직하지 않았는지 부끄러움과 당황스러움을 경험하는 것 같다. “저희가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시12:2)

주어진 일에 책임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는 성실도 사람들의 신뢰를 받는 중요한 덕목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성실함의 수준을 “사람을 의식하여 행하는 눈가림질”에서 “무슨 일을 하든 주를 두려워하여 주께 하듯”의 수준으로 올려놓으셨다.(골3:22-24)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식하며 성실히 행하는 자의 자유함을 나도 평생 누리고 싶다.

진실은 거짓이 없이 참되고 말과 행동이 같은 것을 의미한다. 수년 전 어느 교회에서 주일 오후 강의를 하였는데 그날이 찬양을 인도하시던 목사님이 유학을 위해 마지막으로 섬기시는 날이었다. 그 목사님이 찬양인도를 마무리하면서 교인들에게 작별인사하신 내용은 아직도 내 마음에 남아 있다. “지금까지 찬양을 인도하면서 진실치 않았던 때가 너무나 많았음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합니다. 지금까지 찬양을 하며 많은 멘트를 했지만, 솔직히 제가 멘트 한 내용의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어떤 때는 그것이 너무 괴로워 눈을 감고 찬양을 하기도 했고… 그래서 20분이 2시간처럼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진실을 향하는 그의 간증이 참으로 귀하게 여겨졌다.

정직하고 성실하며 진실한 사람은 주변 사람들이 좋아하며 따르고 의지하고 싶어 한다. 그들은 연약한 공동체를 세우며 나아가 그것을 사랑과 성숙한 공동체로 만든다. 하지만 돈이나 말에 정직하지 않고 맡은 일에 무책임하며 진실치 않은 신뢰할 수 없는 사람들은 공동체를 깨트리고 무너트린다. 그러므로 성숙한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마음을 열고 서로 용납하는 것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을 신뢰할 만한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 것도 매우 시급한 일인 것 같다.

[이영길] 영혼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열심

제법 오래된 이야기다. 아내와 내가 아끼고 사랑하던 자매가 하나 있었다우리 부부와 아이들은 자매의 사랑을 흠뿍 받아왔다자매는 또한 교회에서 열심히 하나님과 지체들을 섬기고 있었고, 그 섬기는 모습은 볼수록 아름답기도 하였지만 은혜가 충만하기도 하였다. 이같은 자매를 형제들이 가만히 두겠는가? 자매는 교회에서 어느 청년과 교제를 시작하게 되었고, 그들의 관계는 아주 가까워져 갔다. 나또한 이 커플의 모습이 보기 좋아서 제법 흐뭇해 하였고다른 지체들도 둘의 사귐을 기뻐하고 있었다선남.선녀라는 말이 너무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한쌍같아 보여서 흐뭇해 하였다.

그런데 어느날 저녁 늦게 자매로 부터 다급한 전화가 걸려 왔다자신과 별거중인 남편이 미국에 막 도착하였고자신을 찾고 있으며, 만나게 되면 자기에게 해를 가하게 될것이라는 이야기 이다전 남편이 대화중 자매를 가만히 두지 않겠다라는 전화협박이 있었기에 자매와 남자 친구는 얼른 경찰에 신고도 하였고경황을 따질것 없이 형제는 자매를 보호하려 애를 쓰고 있었다더우기 별거중인 남편은 해병대 출신으로 성격이 포악하기도 하여 같이 살 수가 없었다고 하며 염려를 하고 있었다자매가 결혼했다는 사실 자체도 내게는 충격이었지만 본능적으로 우선 자매를 보호 하는것이 급하다는 생각에 유학전 자매의 삶에 대한 질문은 접어두고 문제 수습에 골몰해 있었다.

기도하며 그 다음날 사태 수습을 위해 하나님께 묻기 시작 하였다하나님왠 날벼락 입니까어떻게 해야 이 날 벼락을 피할 수 있나요뭐 이렇게 다급한 기도를 했던것 같다아침이 되어 자매로 부터 또 전화 왔다.어느 어느 호텔에 있으니 이 자매가 찾아 오던가아니면 자매가 살고 있는 아파트를 그 별거중인 남편이 찾아가겠다는 것이다그 상황에서 내가 알 수 있었던 것은 두 세가지 뿐이었다호텔 이름폭악하다는 별거중 남편그리고 이들이 만나면 위험할 것이다 라는것. 다시금 기도하다가 평소에 없던 용기가 솟아 낫다이 방분자에게 복음을 전해야 겠다는 생각과 아울러 얼른 한국어로 된 사영리 두권을 찾아서 주머니에 넣었다그리고 그 호텔을 내가 찾아 가겠다고 하였다자매의 남자 친구가 위험하다고 말렸지만내 안에 솟아나는 용기는 형제의 경고를 거부할 수 밖에 없었다결국 형제는 내게 부탁을 하나 하였다그 방에 들어가면 문을 닫지 말고 조금 열어 놓으라는 것이다쿵쾅거리며 몸 싸움이 나면 자기가 곧 바로 뛰어 들어 상황을 제압 하겠다는 것이다

사실 평소 나는 선한일을 위해 위험한 일에 뛰어들 용기와 배짱이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당시 내게 딸린 두 아이가 있었고, 또 사랑스런 아내가 있어서 그같은 위험은 누구보다도 가장 먼저 피해가고 싶을 정도로 안전을 택하는 그런류의 사람이다몸싸움이 나면 몸을 방어할 정도로 힘도 넉넉히 있다고 생각치도 않았고, 더우기 멀리서 부터 원한을 품고 달려온 사람의 힘을 당해낼 자신이 있을 정도는 결코 아니었다그러나 나같은 사람이 이렇게 용기를 낸것은 분명 성령님의 강권적 역사임을 나는 어느 누구 보다도 잘 알았던 것이다복음을 위해 죽으면 죽으리라는 배짱은 나의 선함으로 나올턱은 전혀 없고분명 하나님의 복음전파에대한 열심이 내 안에서 느껴진 것이다내 안에 솟구치는 사랑특히 아픔을 가지고 미국 까지 달려온 그 방문자에 대한 불쌍함이 내게 가득차 있는한 가만히 사태를 불구경 하듯 바라볼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결국 나는 한국에서온 방문자의 호텔을 향해 운전해 갔고, 그의 방 번호를 찾아 문을 두드렸다문이 열리면서 방에 들어 서는 순간 방이 참으로 어둡다라고 느꼈다그 방문자는 문을 열어 주고는 침대가 둘 있는 방중 구석 침대로 얼른 걸어가서는 침대위에 곧곧이 앉아 있었다그리고 침대 중간에 전화를 놓는 탁자위 불이 조금 어두운 빛을 내고 있었다어색함을 깨려고 얼른 나의 소개하였더니이미 나에 대해 들었다고 하며 아내를 잘 돌보아주어 고맙다고 굳은 표정으로 인사를 하였다.

그뒤 나는 바로 그 방문자에게 약 5분간 들려줄 이야기가 있다고 말한뒤에 사영리 하나를 그의 손에 들려 주고나는 다른 사영리를 들고 한 페이지씩 읽어 나갔다그리고 페이지 마다 간단한 설명을 더해 주었다.순한양 같이 가만히 듣고 있는 그 방문자가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러다가 세번째 영적원리 부분에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사람의 죄를 해결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부분을 다룰때 방문자의 얼굴이 이그러 졌다. “이제까지 잘 참았는데 드디어 참기 어려워 이 막 폭팔하려나?”라고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사태를 파악하려 애쓰고 있었다다행히 아무런 저항도 없어서 네번째 원리까지 진행 시켜 나갔다나는 용기를 내어 네번째 원리를 직접 소리내어 읽으라고 부탁하였다그 방문자는 또박 또박 읽어 내려 갔다. “우리 각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영접하겠습니까?” 물었다. 1-3원리를 어떻게 이해하였는지는 모르지만 잠시 침묵이 있었다 1분 이었겠지만 내게는 제법 길게 느껴 졌다그러던 그가 한참만에 !”라고 말하며 흐느끼는 인기척을 듣고는 정신을 차렸다나는 얼른 정말요?”라고 하며 당황하며 영접기도를 인도하였다” … 지금 나는 내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합니다 …” 

얼굴에 가득한 그의 눈물을 보며 축하해 주었다눈가를 타고 흘러 내리는 그의 눈물은 설움과 섞여 있었는지 하염없이 솟아 내렸다내가 축하하는 의미로 시간은 좀 이르지만 점심을 사겠다고 하였다한국에서 출발하여 비행기를 타며 분노로 인해 식사도 하지 못하고또 미국에 도착해서는 먹는둥 마는둥 하여 배가 몹시 고팠다고 하며 우리는 함께 중국집을 향해 걸어 나갔다.

나를 따라 오는 형제 (“방문자”라는 호칭에서 “형제”라는 호칭으로 바뀌었다)의 얼굴을 장난스레 쳐다 보았다거짓말 같이 그의 딱딱하고 분노에찬 얼굴이 펴지고밝은 햇살을 바라보며 햇살이 너무 이쁘다고 말했다그러더니 평범한 도로변의 가로수 나무를 보더니 나무가 참으로 아름답다고 표현하였다함께 아점 (아침 점심)을 먹은뒤자매를 만나겠냐고 물었다고개를 양쪽으로 저의면서 만나지 않고 한국으로 바로 되돌아 가겠다고 하였다그러나 부탁이 몇개 있다고 하였다첫째로 자신을 공항으로 데리고 갈 수 있냐는 것이었다두번째는 자매와 사이에 세살짜리 딸 아이가 있는데다른 날은 몰라도 생일은 기억하여 꼭 선물을 보내거나 전화를 해주라는 말을 아이엄마에게 전해 주라는 것이었다세번째는 자기가 선물을 살 기회가 없었는데 자기가 현금을 조금 줄테니 나의 두 자녀에게 선물을 사주라는 이야기 였다첫번째와 두번째 부탁은 수락 하겠지만 세번째는 굳이 안해도 된다고 강하게 사양 하였다. 그러나 형제의 간구가 너무도 진지할뿐 아니라 형제를 자유롭고 편하게 해주기 위해 결국 돈을 받았다.  

나는 공항에서 돌아오며 한참을 울었다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먼곳에서 이렇게도 보내시는 하나님의 진한 사랑에 감동해서 였다. 마침 차안에 틀어 놓았던 CD의 곡중에 송정미 사모의 “매일 스치는 사람들”이라는 찬양이 흘러 나와 따라 부르며 이상한 방법으로 그 형제를 이곳에서 만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매일 스치는 사람들 내게 무얼 원하나 공허한 그 눈빛은 무엇으로 채우나 
모두 자기 고통과 두려움 가득 감춰진 울음소리 주님 들으시네

(후렴)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깨지고 상한 마음 주가 여시네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모두 알게 되리 사랑의 주님

캄캄한 세상에서 빛으로 부름 받아 잃어버린 자들과 나누라고 하시네
주의 사랑으로만 사랑할 수 있네 우리가 나눌 때에 그들 알겠네

우리의 생활의 주된 터전인 이곳 미국 캠퍼스로 보내진 많은 청년들이 있다. 하나님은 내가 전에 만났던 그 형제에게만 그같은 구원을 위한 열심이 있는것 만은 아니다. 주변에 스쳐 지나가는 많은 캠퍼스의 청년들 또한 하나님께 돌아 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열망이 있으시다. 상한 마음, 빈 마음, 지친 마음에 필요한것은 복음이다. 오늘날 캠퍼스에 가장 중요시 여겨져야할것은 학위가 아니고 복음이다. 이것이 뒤 바뀌는한 우리들의 캠퍼스는 계속 죽음의 행진을 하고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