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 1, 2006 | 삶과 신앙/김한준의 묵상일기
이코스타 2006년 11월호
OO 자매님께,
자매님이 가지고 계셨던 의문과 고민들에 관하여 지난 번에 나누어주신 이야기들이 그후로도 참 많이 생각이 났었습니다. 어려운 여건들 가운데서도 헌신과 봉사로 섬김의 수고를 다하는 삶의 모습이 애처로우리만큼 감동적이었고, 일면 부끄러운 마음으로 제 자신을 돌아보며 채찍질하는 계기도 되었습니다. 잘못아닌 잘못과 나아지지 않는 상황들로 인하여 힘들어하고 계신 점에는 참 많이 안타까왔습니다. 이토록 주님 앞에서 충성되고 신실하게 살아가고자 애쓰는 자매님인데, 하나님의 뜻은 과연 어디에 계신 것인지 모르겠다는 물음만 스스로 되뇌어보기도 했었습니다. 자신의 부족함과 무력함을 주님 앞에 내려놓고 고백하는 겸손한 마음이 아름다왔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혹 주님 앞에서마저도 마음이 계속 상하기만 하는 건 아닐까 공연한 걱정이 앞서기도 했답니다. 자매님이 치열하게 struggle하며 살아가는 것과 병행하여 주님 주시는 평화와 기쁨 또한 그 마음 안에서 나날이 더욱 커져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자매님의 이야기들을 떠올리던 중 문득 본회퍼의 고뇌와 어딘가 모르게 닮아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나치의 유대인 말살정책에 항거하다 체포된 본회퍼는 감옥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예수님을 연상시키듯 따뜻하고 의연한 모습으로 오히려 간수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처형되어 순교하기 얼마 전에 자신을 돌아보는 시를 한 편 지은 것이 사후에 널리 알려졌는데, 그가 주위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인격적으로 비추어지고 있었는지, 자신의 내면에 흐르는 연약함과 두려움에 대해서 어떻게 느끼고 있었는지, 그리고 전능자 하나님 앞에서 어떤 겸허함과 신뢰를 가지고 있었는지가 잘 나타나 있는 글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이 글을 읽을 때마다, 여기까지 믿음으로 달려와 이제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주님 앞에 자신을 내어드리고 있는 그의 감회와 눈물을 보는 것같은 느낌을 받곤 합니다. 그의 마음을 헤아려보고픈 마음에 제 나름대로 한 번 번역해본 것으로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디트리히 본회퍼
나는 누구인가? 그들은 때로 말하기를,
나는 감옥의 갇힌 공간을 나설 때에
침착하고, 활기차며, 담대하다고 한다.
마치 자기 집 문을 나서는 유력자처럼…
나는 누구인가? 그들은 또한 말하기를,
나는 간수들과 이야기할 때에
자유롭고, 친절하며, 분명하다고 한다.
마치 내 자신 지시를 내리는 사람인 것처럼…
나는 누구인가? 그들은 또한 말하기를,
나는 어려운 시간들을 견뎌내는 가운데에도
한결같고, 웃음을 잃지 않으며, 기품이 있다고 한다.
마치 늘 승리하는 자의 모습처럼…
그럼 나는 정말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그런 사람인가?
아니면 단지 내가 알고 있는 나 자신일 뿐인가?
새장에 갇힌 새처럼 피곤하고 갈망하며 병들어있는,
마치 누군가가 목을 조르는 듯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아름다운 색들과 꽃들과 새들의 지저귐을 그리워하고 있는,
친절한 말 한마디와 이웃과의 정다운 삶에 목말라하고 있는,
가혹함과 사소한 모멸감에 대한 분노에 어쩔줄 몰라하고 있는,
기적같은 일은 더이상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체념하고 있는,
머나먼 곳에 떨어져있는 동료들 걱정에 힘없이 떨고 있는,
기도하기에, 생각하기에, 무언가 만들어내기에 지쳐 공허해져 있는,
기진맥진하여 이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버릴 준비가 되어있는, 그런…
나는 누구인가? 이편인가 저편인가?
오늘은 이편이었다 내일이면 저편인 것인가?
동시에 둘 다인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위선자요,
내 스스로는 비겁하고 수심에 찬 나약한 사람인가?
아니면, 아직도 내 안에는 패잔병의 모습이 남아있어서
다 얻은 승리 앞에서조차 뿔뿔이 도망치고 있는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
이 외로운 질문들이 나를 비웃고 있구나…
내가 누구이든, 그분은 아시리라. 오, 하나님,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1944년 6월, 나치의 수용소 감방 안에서)
“WHO AM I?” (from “The Cost of Discipleship,” pp.19-20)
by Dietrich Bonhoeffer
Who am I? They often tell me
I would step from my cell’s confinement
calmly, cheerfully, firmly,
like a squire from his country-house.
Who am I? They also tell me
I would talk to my warders
freely and friendly and clearly,
as though it were mine to command.
Who am I? They also tell me
I would bear the days of misfortune
equably, smilingly, proudly,
like one accustomed to win.
Am I then really all that which other men tell of?
Or am I only what I myself know of myself,
restless and longing and sick, like a bird in a cage,
struggling for breath, as though hands were compressing my throat,
yearning for colors, for flowers, for the voices of birds,
thirsting for words of kindness, for neighborliness,
trembling with anger at despotisms and petty humiliation,
tossing in expectation of great events,
powerlessly trembling for friends at an infinite distance,
weary and empty at praying, at thinking, at making,
faint, and ready to say farewell to it all?
Who am I? This or the other?
Am I one person today, and tomorrow another?
Am I both at once? A hypocrite before others,
and before myself a contemptibly woebegone weakling?
Or is something within me still like a beaten army,
fleeing in disorder from victory already achieved?
Who am I? They mock me, these lonely questions of mine.
Whoever I am, thou knowest, O God, I am thine.
(June 1944, in the prison cell of Nazis camp)
저에게도 어려움과 고민으로 채워졌던 시간이 있었는데, 그런 가운데 큰 힘이 되어주었던 한 가지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속이는 자”를 뜻하던 야곱의 이름을 하나님께서 직접 “이스라엘”이라고 바꾸어 주신 그 드라마틱한 장면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이름들이 종종 한 사람의 일생을 종합적으로 간추려 상징하는 경우가 많은데, 제가 주목한 점은 나중에 하나님의 백성 전체의 이름이 되는 그 이름이 “거룩한 자”나 “복받은 자”와 같은 뜻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씨름(struggle)하는 자”의 의미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분과 더불어 씨름(struggle)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정직한 의미에서 우리가 주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연약하고 게으름과 죄에 미혹되기 쉬운 나이기에 그분께서 맡기신 소명을 어떻게든 감당하고자 한다면 그 과정에서 struggle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하여 그 모든 일을 능히 감당하고 이루실 주님이건만, 그분의 도우심 앞에 내 자신을 내어드리기까지는 나의 본성을 거스르는 struggle이 있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랑 없는 마음에 그분의 사랑을 담아 이웃을 사랑하는 자리에 나아가는 과정에서도 감당해야할struggle은 늘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의struggle이 그러하였고 본회퍼의 struggle이 그러했던 것처럼, 자매님께서 “하나님을 붙잡고 씨름하며” 통과하고 있는 지금의 이 시간들 또한 어쩌면 자매님이 드릴 수 있는 가장 순전한 영광을 그분께 드리고 있는 순간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하나님께서는 감당하지 못할 어려움을 허락지 않으신다 하셨으니, 아마도 주님께서는 그 정도의 난관을 감내할 만한 삶의 실력과 성숙함이 자매님에게 이미 있다고 인정하고 계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피할 길을 또한 마련하셔서 능히 감당하도록 도우신다 하셨으니, 말과 경주하여도 능히 이기고 요단강의 창일한 가운데서도 안전할 수 있게 하시는 그분의 손길을 혹 조만간 고백하게 되실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미 최선을 다했지만 더 이상 붙잡고 있기가 어렵다고 느껴지는 일이 혹시 있으시다면 때로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분 품 안에서 존재 자체의 안식을 경험할 수도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가장 이루고 얻기 원하시는 것은 자매님을 통한 그 어떤 것이기 이전에 자매님 자신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한 찬양곡의 가사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Savior on a hill, dying for my shame, could this be true? … For you so loved the world, you gave your only Son to say “I love you so. Oh, how I love you so…” (Hillsong, “Saviour”)
그 사랑이 자매님을 어디든 쫓아가서 위로하시고 힘주시고 놀라게 하시며 만족케 하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자매님은 귀중한 “하나님의 소유”이시고, 그 사랑이야말로 자매님이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이” 그분 품안에 머물도록 하시는 진정한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주 안에서.
OO 드림
Nov 1, 2004 | 삶과 신앙/김한준의 묵상일기
이코스타 2004년 11월호
동양 속담 중에 “나 이외의 모든 사람은 다 나의 스승이다” 라는 말이 있다. 어떤 사람은 본받을 만한 모델로서, 또 어떤 사람은 본받지 말아야 할 반면교사(反面敎師)로서, 다 나름대로 배울 만한 점들을 제공한다는 의미로 이 말이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조금 다른 시각으로 보면, “모든 사람으로부터 최소한 한 가지씩의 장점을 발견할 줄 아는” 눈을 가지도록 하는 권유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살아가면서 인격적으로, 또는 책 등을 통하여 직간접적으로 만나게 되는 만남이 믿는 이들에게 주는 의미는 각별하다. 각 사람들에게서 부분적으로만 드러났던 ‘하나님의 형상’이 만남과 나눔들 가운데서 더욱 온전한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헨리 나우웬(Henry Nouwen)과 ‘간접적으로’ 만나는 만남도 우리의 묵상과 깨달음에 풍성함을 더하여 주는 한 좋은 예인데, 다른 사람들의 삶을 통하여 주님을 만나는 일에 탁월하였던 그를 통하여 우리 역시 주님을 만나기를 소망한다.
헨리 나우웬의 삶은 사역적인 면에서 크게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예일대에서 신학적 심리학을 가르쳤던 70 년대, 하버드에서의 파트타임 강의와 남미 선교를 병행하였던 80 년대, 그리고 캐나다의 라르쉬 공동체 데이브레이크에 들어가서 장애인들, 특별히 아담이라고 하는 한 중증 장애인과 함께 남은 생애를 보낸 90년대가 그것이다. 그가 유명 작가와 일류 대학의 교수라는 영향력을 뒤로 하고 (사실은 그의 모든 존재를 집약해서!) 한 영혼을 섬기는 삶을 사는 데에 생의 마지막 10년을 보낸 사실은 잘 알려진 대로이므로, 그런 면에서 “아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 라는 책에는 그의 인생의 무게가 실려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아담과의 만남
아담 아네트(Adam Arnett)는 1996년 2월에 34 년의 생을 마감하였으며, 헨리 나우웬도 이 책을 쓰고 난 직후인 같은 해 9 월, 마치 자신도 할 일을 다 하였다는 듯 아담의 뒤를 따라갔다. 그는 아담의 삶을 통하여 본 예수님과 그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고자 이 책을 썼다고 밝히고 있다.
“…나는 관에 누워있는 아담의 시신을 본 순간부터, 그의 삶과 죽음의 신비에 사로잡혔다. 그때 섬광처럼 내 가슴에 와닿은 사실은, 바로 이 장애인이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며 독특한 사명을 띄고 이 세상으로 보냄을 받았다는 것, 그리고 이제 그 사명을 완수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그런 시선으로만 아담을 보았던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를 아끼던 많은 친구들은,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한 도움, 더 체계적인 인도함, 더 큰 섬김의 기회들을 마다하고 이런 곳에 와 있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헨리, 자네가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데가 여기인가?” 그는 혼란스러워했을 뿐만 아니라 화를 내고 있었다. “아담에게 자네의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기 위해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던 대학을 떠났단 말인가?”…”
생각의 변화
사명감과 의욕으로 시작하였던 새로운 섬김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의문과 방황과 영적 침체의 모습으로 그에게 다가오게 된다. 그러던 그의 마음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금씩 변화되어 갔다.
“…한 주 두 주, 한 달 두 달이 지나면서 나는 아담과 함께하는 한두 시간을 사모하게 되었다… 형세가 역전되고 있었다. 아담은 나의 선생이 되어가고 있었고, 내 삶의 광야를 혼란 가운데 헤메고 있는 나와 함께 걷고 있었으며, 나를 이끌어주었다. 아니,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그와 함께있는 동안 나는 그를 돌보는 모든 활동을 넘어, 내면에서 들려오는 사랑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 시간은 순수한 선물이요, 묵상의 시간이었다. 우리는 함께 하나님의 어떤 부분과 만나고 있었다. 아담과 함께 나는 거룩한 존재의 현존을 알았고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
모두의 눈에 ‘선생’이었고 ‘돕는 자’였던 그가, 실제로 주님 안에서 배우고 도움을 받은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의 섬김과 양육의 대상이 되어주므로써, 그러한 일들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하였을 배움과 자라남을 가능케 했던 아담이야말로, 그 자신을 위하여 세워주신 ‘영적 스승’이요 ‘영적 은인’이었다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아담을 통하여 만나는 예수님, 그를 통하여 만나는 우리 자신
“…예수님은 권세와 힘을 가지고 오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연약함의 옷을 입고 오셨다. 나는 아담이 제 2의 예수님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예수님의 연약함 때문에 아담의 극도로 연약한 삶을 최고의 영적 의미가 있는 삶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아담에게는 내면의 공간을 채우려는, 마음의 산란함이나 집착 그리고 야망이 거의 없었다. 따라서 아담은 하나님을 위해 마음을 비우는 영적 훈련을 할 필요가 없었다. 소위 그의 ‘장애’가 그에게 이러한 선물을 준 것이다… 대부분은 아담을 불구자로 보았다. 우리에게 줄 것이 거의 없고, 가족과 공동체와 사회에 짐만 되는 사람으로 말이다. 그가 그런 식으로 여겨지는 한, 그의 진리는 숨겨진 채로 있을 것이다…”
헨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아담의 참된 가치를 보았으며, 아담을 통하여 ‘세상’이라는 거품을 걷어낸 예수님의 참 모습을 그의 마음에 되새길 수 있었다. 내게 다가오는 예수님의 이미지는 정직한 의미에서 어떤 모습일까? 나는 혹 내가 보기 원하는 주님의 모습만 보고 있으면서도 그런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눈을 덮고있는 ‘비늘’을 벗겨주기 위하여 때때로 삶의 한복판으로 찾아오는 ‘장애’와 ‘고난’의 의미에 대하여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그들은 그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신 자로, 곧 철저한 연약함 가운데서 하나님의 축복의 도구가 되도록 하기 위해 보내신 자로 환영했다. 그를 이렇게 바라보면 근본적으로 모든 것이 바뀐다. 그때부터 아담은 특별하고, 경이롭고, 타고난 재능이 있는 약속의 사람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의 경이로운 존재 자체와 믿어지지 않는 가치는 우리에게, 우리도 그처럼 하나님께 귀히 여김을 받고 은혜를 입었으며 사랑받는 자녀임 – 자신을 부자라고 생각하건 가난하다고 생각하건, 지성인으로 보든 불구자로 보든, 잘생겼다고 생각하든 매력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하든 상관없이 – 을 이해할 수 있도록 안내해줄 것이다…”
우리는 존귀한 존재들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존재 자체를 그토록 귀히 여겨주시며 사랑하고 계시는 그 단 한 가지의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실을 너무도 자주 잊어버리곤 한다. 그렇기에, 나의 수고와 지식, 성취에 기대어 존귀함을 획득하고자 애쓰기도 하고, 같은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도 한다.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네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네가 진실로 아느냐? 네가 이토록 귀하기 때문에 네 죄 값으로 인하여 네가 죽는 것 보다는 내가 대신 죽는 편이 낫겠다고 여긴 것이란다…”
‘존재’에 관하여…
“…인생은 선물이다. 우리 각 사람은 독특하며, 우리 이름이 아신 바 되었으며, 우리를 만드신 그분의 사랑을 받는다. 불행히도 우리 사회로부터 우리에게 다가오는 너무 크고 끈질기며 강력한 메세지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과 가진 것 그리고 성취할 수 있는 것으로 사랑받는 존재임을 증명해야 한다고 믿도록 한다. 우리는 이생에서 ‘무언가 해내는 일’에 몰두해 있으며,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진리 곧 우리의 기원과 종말에 대한 진리를 이해하는 데 너무나 느리다… 그들은 아담의 장애만을 보게 하는 시험을 이겨냈다. 그들은 그가 돌을 떡으로 바꾸거나, 높은 탑에서 안전하게 뛰어내리거나, 큰 부를 획득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받아들였다. 아담은 이런 세상적인 일들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마음 깊은 곳에서 그가 사랑받는 자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우리 자신의 존재로서만은 귀히 여겨질 수 없다는 생각에 불안하고 두려워질 때가 있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심지어는 가정에서조차, 우리가 귀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무엇 ‘때문에’ 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들이 필요하다. 용모가 아름답거나 능력이 있기 때문에, 열심히 하고 있으며 좋은 결과를 내고 있기 때문에, 학벌이나 지위가 주는 신분적인 잇점들 때문에… 믿는 이들의 모임은 대개 이런 점들에서 다소나마 위로와 소망을 주곤 한다. 그러나, 본질적인 면에서도 이보다 낫다고 늘 자신할 수 있을까? 출석과 봉사를 잘 하고 있기 때문에, 책임과 섬김을 다하고 있기 때문에, 믿음이 좋기 때문에, 말씀이 좋기 때문에 귀할 뿐, 그러한 이유들을 상실할 때에는 더이상 귀중한 존재가 아닐 수도 있다면 말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존재 하나만으로도 귀중히 여김을 받을 수는 없는걸까? 잘못했던 일까지 칭찬하고 내버려둘 수는 없겠지만, 어느 경우에도 존재 그 자체만은 남겨져서 최소한 계속 더불어 살아갈 수는 없는걸까? 모든 수고와 섬김과 업적들은, 이미 귀중한 존재 위에 더하여진 감사 제목일 수는 없는걸까? 그러나, 진정한 문제는, 오히려 나 자신이야말로 그러한 세상과 공동체와 만남을 만들어가고 있는 당사자라는 점일 것이다. 사람들로부터 끊임없이 평가받고 때로는 버려지기도 하는 우리가 동시에 우리의 옆사람들을 평가하고 때로는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밀어내기도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들이 있기 때문에… “너희는 그저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말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마 5:37)”
‘사역’에 관하여…
“아담이 기도를 할 수 있었을까? 하나님이 누구시며 예수님의 이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을까?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신비를 이해했을까?” 나는 오랫동안 이런 질문들에 대해 생각하였다. 나는 오랫동안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얼마나 아담이 알 수 있는지 그리고 내가 이해하고 있는 바를 얼마나 아담이 이해할 수 있는지에 대해 알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들이 ‘아래로부터 오는’ 질문들임을 알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보다는 나의 걱정과 불안이 반영된 질문이었다. 하나님의 질문, 곧 ‘위로부터 오는’ 질문들은 “아담이 너를 기도로 이끌도록 맡길 수 있느냐? 너는 내가 아담과 깊은 교제 가운데 있다는 사실과 그의 삶이 기도라는 사실을 믿을 수 있느냐? 아담이 너의 식탁에서 살아있는 기도가 되도록 할 수 있느냐? 너는 아담의 얼굴에서 내 얼굴을 볼 수 있느냐?” 였다…”
“너는 그의 얼굴에서 나의 얼굴을 볼 수 있느냐?” 사역하느라 정신이 없고 씌임받느라 지금 분주한 나에게, 주님께서 내 옆의 한 사람 한 사람을 가리키시면서 이렇게 물으신다면 과연 나는 어떻게 대답하게 될까…
“…나는 내가 한 일과 얼마나 많이 이루어낼 수 있을지에 대해 염려하는 동안, 아담은 내게 “행위보다는 존재가 더 중요합니다” 라고 선포하고 있었다. 내가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 어떤 말을 하는지에 몰두해 있을 때, 아담은 내게 조용히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의 칭찬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이 더 중요합니다” 내가 나의 개인적인 성취에 관심을 쏟고 있었을 때, 아담은 내게 “혼자서 하는 것보다는 함께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라고 나를 일깨워주었다. 그는 바로 삶 그 자체로, 내가 접한 인생의 진리를 가장 철저하게 증거해 주었다…”
Jun 1, 2004 | 삶과 신앙/김한준의 묵상일기
이코스타 2004년 6/7월호
몇해 전, 코스타에서 다시 뵙게 된 한 은사로부터, 학교에서 하고 있는 연구가 성경 공부 및 묵상과의 사이에서 어떻게 서로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는지에 관한 말씀을 들은 적이 있다. 연구에 사용된 방법들은 성경 말씀을 체계적으로 묵상하고 깊이 이해하는 일에 도움을 주었고, 반대로 성경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습득한 방법론들은 논문을 찾아 읽고 분석하며 종합하여 새로운 연구 주제로 연결시키는 일에 그대로 적용이 되었다는 경험적 통찰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며, 그 모습은 다양한 형태로 드러난다. 우리의 믿음은 말이나 생각으로만 그치는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삶과의 분명한 연결고리를 가지는 실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성경 말씀의 ‘원리’가 매일매일의 삶과 만나 ‘적용’되는 바로 그 지점에서 말씀이 온전히 이해되고 우리 안에서 ‘생명’으로 자라나는 일은 어찌보면 너무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삶의 의미를 분명하게 세워주는 신앙, 그리고 신앙을 더욱 풍성하게 하는 삶의 상호 역동적인 관계의 열쇠가 말씀 묵상과 기도를 바탕으로 한 주님과의 깊은 교제에 있다는 것은 전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떤 사람은 교회 예배나 부흥 집회, 또는 인터넷에서 듣는 설교로부터는 곧잘 은혜를 받지만 매일매일 스스로 말씀 안에서 삶 가운데서 주님의 음성을 듣는 일에는 상대적으로 부족함을 보이기도 하며, 다른 사람은 한 그루의 나무를 살피는 일에는 잘 훈련이 되어있지만 숲 전체를 보는 일을 더러 놓치기도 한다. (사실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닌 나 자신의 일일 때가 많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은 우리 모두가 일생을 두고 이루어가야 할 신앙 성장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한 순간에 해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다만,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과정 자체와 방법론에 관한 고찰이 혹 깊은 묵상을 이루는 데에 우선적으로나마 도움을 주는 부분이 있다면 그러한 측면들을 한 번쯤 고려해 보는 일도 의미없지는 않으리라 생각된다.
그런 면에서, 책을 읽는 방법론에 관한 고전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는 “어떻게 책을 읽을 것인가? (“How to read a book?” M.J. Adler & C. van Doren 저)”라는 책은 나름대로의 유용성을 제공한다. 이 책에서 저자들은, 어떻게 정보의 습득에 그치는 것이 아닌 ‘이해를 위한’ 독서를 할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지식의 증가에 그치는 것이 아닌 ‘마음을 자라나게 하는’ 독서를 할 것인지에 대하여 단계별로 책 읽는 방법을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상위 단계가 하위 단계의 측면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이 책에 제시된 네 가지의 분류는 서로 다른 ‘종류’가 아니라 상호 연관성을 갖고 발전하는 ‘단계’를 표현한다:
- 기초적 읽기 (Elementary reading)
- 관찰적 읽기 (Inspectional reading)
- 분석적 읽기 (Analytical reading)
- 합적 읽기 (Syntopical reading)
첫 번째 방법인 ‘기초적 읽기’는, 주어진 문장이 무슨 뜻인지, 본문의 이야기와 비유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에 대한 의미 그 자체를 파악하는 단계이다. 이는 마치 외국어를 번역할 때 원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고자 노력하는 과정과 같다.
첫 번째 단계에서 이룬 문장과 단락의 문자적 이해를 바탕으로, 두 번째 단계인 ‘관찰적 읽기’ 에서는 문법과 문맥에 주목하면서, 본문이 가지는 전체 구조를 보다 ‘구조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이 단계에 이르면, 전후 문맥 상에서 현재의 문장 또는 문단과 그 앞뒤를 이어주는 이야기의 흐름에 주목하게 된다. 이러한 ‘관찰’은 어디까지나 글의 이야기 전개 과정을 충실히 따라가며 ‘새겨듣는’ 것인 만큼 저자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 독서 방식이라는 점에서 다음 단계인 ‘분석적 읽기’와는 구별된다.
세 번째의 단계인 ‘분석적 읽기’의 경우는, 반대로, 나름대로 생각의 틀을 가진 독자 스스로가 읽기를 주도하는 독서 방식이다. 두 번째의 읽기가 어느 정도 정해진 시간 범위 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세 번째의 형태는 많은 시간이 걸리는, 즉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읽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것은, 읽으면서 수시로 질문을 던지기도 하고, 본문 안에서 답을 찾아보기도 하며, 이미 알고 있었던 일들과 연계하여 스스로 답을 달아보는 가운데 때로는 비평가의 입장에 서기도 하면서 글을 재구성 해보기까지 하는 적극적인 방식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책을 읽는 경우에 관한 한 가장 높은 수준의 읽기가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단계인 ‘종합적 읽기’는 세 번째의 단계가 여러 권의 책에 적용되어 비교 분석 및 통합을 이루는 과정이다. 따라서, ‘종합적 읽기’는 한 권의 책에 대하여 이루어졌던 ‘분석적 읽기’의 방법론이 여러 책들에 창조적으로 확대 적용되는 것으로도 (i.e., “How to read two books?”) 이해할 수 있다. 이 단계에 이르러서는 독자가 새로운 관점을 창조적으로 도출해 내기도 하므로 고유성(originality)을 지닌 논문을 쓰는 연구 과정에 비견되는 독서이기도 하다.
이러한 독서 방식들에 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 첫 세 방법들에 대해서는 점과 그래프의 관계로 한 번 표현해 보았다(아래). 여기서는 나타내지 않았지만, 네 번째의 읽기는 ‘분석적’인 그래프가 여러 개 겹쳐있어 어떤 경향을 표현하는 것으로 묘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읽기의 단계들과 방법들을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데에 적용해 보면 어떨까?
첫 번째 읽기는 우리가 어떤 본문을 처음 읽을 때라면 언제나 해당되는 방법이다. 초보적인 단계이지만, 이후 모든 단계의 기초가 되는 만큼 그 중요성이 낮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한 번 두 번 성경을 반복하여 읽으면서 익숙해짐에 따라 우리는 그 본문들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고 ‘기초적인 읽기’를 무시하는 경향이 생기기 때문에, 묵상은 매너리즘에 빠지고 본문으로부터는 아무런 새로운 것도 얻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익히 알고 있는 본문일지라도 그 말씀들을 다시 대할 때에는 내가 이전에 알고 있던 것들을 다 내려놓고 ‘초심으로’ 돌아가서 ‘기초적 읽기’부터 새로이 시작하는 것이 오늘 주신 말씀 앞에 겸손함을 유지하는 길이기도 하다.
귀납적 성경 공부나 QT시간에 우리는 본문 말씀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그러나 놓치는 것 없이 받아들이고자 많은 시간을 기울이는데, 바로 이 때가 두 번째 읽기 과정에 해당된다. 여기서는, 문맥과 문법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면 놓쳤을 수도 있었을 성경의 의미를 건져올리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고린도전서 1장 2절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의 문법과 문맥을 자세히 짚어보면, 성경이 말하는 교회란 건물이나 조직, 또는 기관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모임’ 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과 같다.
본문 말씀에 대한 관찰은 곧 읽은 말씀에 대한 해석과 묵상으로 이어지는데, 세 번째 읽기는 바로 이 단계를 의미한다. 이러한 읽기에 충실했을 때, 독자는 저자의 의도를 알게 되며, 이야기 뒤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말씀의 정신’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스스로 해석하고 적용하는 노력을 기울인다는 점에서, 이러한 독서는 주어진 본문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이 단계에서는 복음서, 서신, 역사서, 예언서, 시편 등 다른 장르의 글들에 대하여 각각에 알맞은 다양한 접근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분석적 읽기’의 한 예를 들면, 요한복음 21장에서 예수님이 베드로를 만나주신 대목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베드로를 만나신 예수님은 그에게 다른 말씀 없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한 질문만 세 번을 반복하셨다. 겸손하게 대답하는 그에게서 주를 사랑한다는 고백을 받으신 후에는 역시 다른 말씀 없이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는 말씀만 세 번을 반복하여 하신다. (특별히, 공동번역 성경에는 위의 말씀으로 세 번을 동일하게 대답하신 것으로 번역되어 있다.) 따라서, 전후의 정황 및 다른 곳에서 주님께서 하셨던 말씀들을 함께 떠올리고, 여기서의 일들을 나 자신에 대한 적용과 연관지어 묵상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들을 깨닫게 된다. 먼저, 주님께서 그분의 ‘제자’들에게 가장 중요히 여기시는 것 한 가지를 든다면 그것은 다름아닌 ‘주님을 사랑하는 일’이라는 것을,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 대한 삶의 구제적인 표현은 그분의 양들, 즉 ‘영혼들을 잘 돌보는 일’이어야 함을 깨닫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주님의 ‘제자’로서 살기 원하는 나에게도 오늘 동일하게 말씀하고 계시는 그분의 음성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오늘 해야할 일들과 오늘 결정되어야할 사항들은 이 묵상을 염두에 둔 가운데서 이루어진다…
네 번째 읽기에 관련한 말씀 묵상은 개인적인 신학이 수립되는 단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교부시대에 삼위일체 교리가 확립되기까지는 아마도 이러한 읽기와 묵상의 결과들이 축적되고 적용되었을 것이다. 삼위일체의 개념은 성경 어디에서도 직접적으로는 언급되지 않지만 곳곳에서 그 의미가 묻어나오는 하나님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다른 예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때에 따라 어떻게 역사하셨고 그들은 또 어떻게 반응하였는지를 나 자신의 삶에 나타나는 패턴들과 오버랩시키면서 스스로의 신앙의 현주소를 되물었던 순간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을 두고 구축해가는 이러한 개인의 신앙과 신학은, 마치 오랜 시간동안 바닷가를 다니면서 손수 주워 모으고 닦고 다듬은 하나하나의 조개껍질들을 한데 엮여서 만든 목걸이와도 같다. 이 과정의 읽기와 묵상에 눈을 뜨고 거기에 필요한 시간과 노력을 들일 때 우리의 신앙은 점차로 깊은 뿌리를 더하여갈 것이며, 우리는 주변 상황에 덜 좌우되는 신앙 인격을 연마하게 될 것이다.
주님과 함께하는 영적 세계로의 여정은 그 깊이가 끝이 없는 과정이라고들 많은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그런 깊은 세계에 대하여, 부족한 영성과 경험을 가지고서 방법론을 표현해보고자 하다보니 매우 어설픈 글이 되어버린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가 말씀을 이해하게 되는 일은 궁극적으로는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먼저 문을 열 때에 문 밖에 서서 기다리고 계시는 주님께서 비로소 우리 안에 들어와 함께 잡수시는 것을(계 3:20) 생각할 때, 말씀을 받고 이해하는 자리로 나아가고자 노력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우리 자신의 몫일 수 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올바른 방법과 단계적인 접근을 염두에 두고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가운데, 매일매일 우리에게 다가오는 삶의 현장에서의 문제들이 비록 어제까지는 희미하게 보였을지라도 오늘 삶의 한 영역에서 만큼은 주님과 얼굴을 마주하는 것 같이 온전히 깨달아 가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매일 임하기를 소망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야고보서 1:5)
[정정합니다] “바하의 ‘마태수난곡’을 통하여 묵상하는 예수님의 고난” 글의 각주 8) 번에서, 해슬러(Hassler)의 원곡은 요한수난곡에서 ‘도입 합창’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중간 삽입곡으로 사용되었습니다.
Apr 1, 2004 | 삶과 신앙/김한준의 묵상일기
이코스타 2004년 4월호
최근에 멜 깁슨이 감독한 “The Passion of the Christ” 영화가 개봉되어, 여러 논란이 있는 가운데서도 예수님께서 감당하신 고난의 무게에 관한 강렬한 영상으로 많은 이들에게 도전을 주고 있다. 이 영화로 인하여 믿는 자들의 신앙이 새로와지고 믿지 않는 자들이 주님을 영접하고 있다는 소식은 금년의 사순절과 고난주간에 특별한 의미를 더하여 주고 있는 듯하다. 지금으로부터 약 백 팔십 년 전 유럽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났었는데, 그 당시에는 영화가 아닌 요한 제바스티안 바하(Johann Sebastian Bach)의 음악들이 그 매개체가 되었고, 그 한 가운데에는 ‘마태수난곡’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바하의 모든 음악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작품”, “합창 음악의 최고봉”, 더 나아가서는 “인류 음악 예술의 최고 걸작” 등 찬사를 아끼지 않는 작품이건만, 당시에는 난이하고 복잡하게만 받아들여진 탓에 작곡된 무렵에 세 번 정도 연주된 이후로는 근 백 년간이나 사람들의 기억으로부터 잊혀지게 된다. 그러던 것을 당대의 작곡가 겸 지휘자였던 멘델스존이 발굴하여, 작곡된지 꼭 백 년이 되는 해에 다시금 연주되어 열렬한 반응을 얻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주님께서 당하신 고난에 대한 각성과 신앙적인 도전이 이루어짐은 물론, 당시 전 유럽을 휩쓸고 오늘날까지도 맥을 이어 내려오는 ‘바하 르네상스’ (“바하의 음악으로 돌아가자” 는 음악 무브먼트) 의 싹이 틔여지게 된다.1) 바하 음악이 지니는 완벽함과 순수함,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경건함으로 나타나는 그의 음악의 깊은 정신성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음악적인, 그리고 사회적인 반향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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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수난곡은 바하가 라이프치히의 토마스 학교와 교회에서 칸토르(음악감독)로 지냈던 그의 장년기 시절에 만든 작품으로, 마태복음에 나와있는 예수님의 수난 부분(26, 27장)을 기본 텍스트로 하여 작곡된, 연주 시간이 세 시간 반이나 걸리는 대곡이다. 비슷한 시기에 작곡되었고 백 년 후에는 이미 상당히 유명해져 있었던 헨델의 “메시아”가 3부로 구성된 전체의 한 부분(제 2부)을 예수님의 수난에 할애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바하의 수난곡들은 주님의 십자가 사건에만 촛점을 맞추고 있다.2), 3) 당시에는 네 개의 복음서를 바탕으로 한 각각의 수난곡들이 존재하였다고 알려지고 있으나, 마가수난곡은 분실되었고 누가수난곡은 후세의 위작으로 여겨지고 있는 까닭에 현재에는 마태수난곡과 이보다 몇 년 앞서 작곡된 요한수난곡만이 연주되고 있다. 음악적인 면을 살펴보면, 독창자들과 두 개의 합창단 및 두 개의 오케스트라가 솔로에서 이중 합창에 이르는 다양한 음악적 스펙트럼을 제공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다양한 음악적 기법들이 동원되어 예수님, 성경 나레이터, 베드로, 빌라도, 군중들 등 다양한 인물들의 심리 전개와 그에 따른 일련의 사건의 흐름들을 그림을 그리듯 묘사하고 있다. 개별곡들은 단순한 모음집의 차원을 넘어서 하나의 미적인 통일체로서 파악되는 전체적인 구조를 가지며, 이 안에는 회화적인 특성과 상징적인 표현들이 풍부하게 나타날 뿐만 아니라, 매우 사실적이면서도 극적인 묘사들, 정열과 냉정함, 드라마적인 요소와 정신적인 요소 등 다소 상반된 성격의 측면들이 조화 속의 대비를 이루는 가운데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음악 자체만으로도 비할 바 없이 뛰어난 이 모든 기법들이라 할지라도, 작곡자 자신의 신앙 고백으로 승화된 주님의 십자가 고난의 메세지를 음악을 듣는 이들에게 같은 감동과 도전으로 전달하기 원하는 작곡자의 의도를 놓치는 경우에는 이 음악 작품이 가지는 진정한 가치와 기능에 대한 온전한 자리매김을 이루기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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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하의 마태수난곡이 단지 음악적으로만 위대한 작품이 아니라, 작곡자 자신의 신앙이 음악을 통하여 표현되고 승화된 것이었다는 점에 관하여, 그의 부인 안나 막달레나 바하는 남편이 작고한 얼마 후에 그가 마태수난곡을 작곡하던 때를 회상하며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어느날 그의 방으로 불쑥 들어갔을 때, 마침 그는 마태수난곡의 알토 독창 “아, 골고다”를 작곡하고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평안하고 안색도 좋았던 그의 얼굴이 완전히 눈물로 범벅이 되어 어두워진 모습을 본 순간 나는 얼마나 감동했는지 모릅니다. 나는 조용히 밖으로 나와 그의 방문 옆 계단에 앉아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는 자신이 곡을 쓰면서 비통해하는 모습을 내가 보았다는 사실을 끝내 모른 채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지금도 나는 그 사실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하나님만이 볼 수 있는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이 곡을 쓰고 있었을 때, 그는 간절하게 구원받기를 원하는 영혼들의 모든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숭고하심과 그 비밀들에 관하여 깊이 느끼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이후 한 수난절에 토마스 교회에서 마침내 연주된 마태수난곡을 듣게 되었을 때 나는 영혼을 뒤흔드는 감동으로 벅차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곡에 주목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너무 난해하고 상당히 많은 연습을 하지 않으면 연주하기가 어려운 곡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마 언젠가는 그 음악을 천국에서 다시 들을 수 있겠지요…” (안나 막달레나 바흐 저, “내 남편 바흐”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음악의 아버지”로 추앙하고 있으며 수많은 연주자들과 음악학자들이 자신의 평생을 바칠 만한 “순수 서양 음악의 시작이요 완성”이라고 여기고 있는 바하.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이 생각한 음악이란, 루터 신학이 강조하는 바와 같이 “explicatio textus (interpreting texture)” 였으며, “praedicatio sonora (resounding proclamation)” 이었다. 즉, 그에게 있어서의 음악 철학이란, 하나님께 경배드리고 그분을 계시하는 ‘예배의 행위’요, 그러한 목적에 사용되도록 인간에게 허락하신 또 하나의 ‘언어’와 다름아니었던 것이다. 일찌기 바하 음악에 깊이 심취하였던 슈바이처 박사(Albert Schweitzer)는 이러한 바하의 음악의 본질적인 면모를 일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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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있어서 음악이란 예배의 행위이다. 따라서 모든 예술, 심지어는 세속적인 것들마저도 그에게는 신앙적인 표현의 대상이 된다. 그 결과로 그의 음악은 가장 깊은 기도와도 같이 하나님께 상달되는 그 무엇이 되고 있다”
라고 평한 바 있다. 학교의 음악감독으로 있으면서 때로는 학생들에게 직접 성경을 가르치기도 했던 바하는, 루터가 독일어로 번역한 성경을 늘 깊이 묵상하였으며, 자신이 직접 묵상하고 연구한 점들은 본문 옆에 스스로 주석으로 달아놓곤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가 소장했던 성경책의 역대하 5장 부분을 보면, 솔로몬이 성전 봉헌 제사를 드렸을 때 찬양대와 기악대가 함께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기 시작하자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과 같이 임하였다는 대목이 나오는 13절 옆에다 바하는 자필로 다음과 같은 주석을 적어놓았다고 한다.
“경건한 음악에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함께하신다!”
어쩌면 이 말이야말로 작곡가로서의 바하의 일생을 지배한 그의 삶의 동기요 소명이자 간증을 가장 적절한 말로 표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본격적인 작곡 활동의 첫 소산이라고 할 수 있는 그의 첫 칸타타의 제목이 “하나님은 나의 왕”4) 이었으며, 숨을 거두기 바로 며칠 전 그의 생애 마지막으로 작곡한 오르간 코랄전주곡의 제목이 “주의 보좌 앞으로 이제 나아갑니다” 였다는 점은 이러한 측면에서 특별히 주목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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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의 작품들 가운데에서 예수님의 수난을 기리거나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한 흔적들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백 여 개나 되는 칸타타와 수난곡 등 직접적인 찬양 가사가 달려있는 합창 음악들이나, 성경 말씀을 멜로디로 표현한 수백 개의 오르간 곡들은 우선 그 직접적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슈바이처 박사가 말한 “세속적인 것에 묻어있는 성스러움”이라는 측면은, 일반인들이 좋아하는 쾨텐 시절의 기악곡들 – 무반주 첼로곡, 평균율 피아노곡, 각종 기악 협주곡들 등 – 으로부터 ‘커피 칸타타’, 결혼 음악 등과 같은 세속 주제에 의한 곡들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영역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곡들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신성을 그 문맥에 실어 노래하고 있다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입증은 아마도 직접 들어보는 것으로써 가능할 것이다.5) 몇 년 전에는 한 연주가가 그러한 고백을 했던 것이 알려지기도 하였는데, 현존하는 가장 손꼽히는 피아니스트의 한 명인 머레이 퍼라이아(Murray Perahia)는, 연주자의 길을 거의 포기할 뻔한 위기를 넘긴 직후 “골드베르크 변주곡”6) 을 녹음하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남겼다.
“이 변주곡들은 각각 예수님의 다양한 사역을 표현하고 있으며, 특히 25번 변주곡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을 연상시킨다.”
한편, 당대 최고의 오르간 연주가이자 바하 전문가이기도 했던 슈바이처 박사는, 바하의 음악에는 인간 정신의 깊이가 담겨있고 영성이 있으며 내적 평화가 깃들여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음악들에는 무의식 중에라도 사람들의 영혼을 일깨우는 힘이 있다고 확신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아프리카에서 사역하는 동안 원주민들의 정신과 영혼을 가꾸는 데 도움을 준다는 생각으로 매일 아침 교회의 문을 열어놓고 바하의 오르간 음악들을 연주해 들려주었다고 전해진다.7) 그리고, 그런 노력은 슈바이처 자신의 사랑 및 섬김의 삶과 더하여져 영혼들을 일깨우고 변화시키는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
이와 같이, 바하의 음악은 조금만 귀기울여 들으면 그 안에 주님의 흔적이 직간접으로 가득히 표현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그 안에는 참다운 의미에서 ‘영혼을 울리는’ 힘이 있음을 우리는 또한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다. 바하의 음악에 보편적으로 영성에 관련된 측면이 묻어있다는 점은, 마태수난곡이 지닌 면모가 그의 음악들 중 결코 이 한 곡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웅변하고 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다른 모든 곡들에서도 드러나고 있는 주님의 흔적이 가장 직접적으로 표현된 곳 그 정점에 마태수난곡이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이 곡이 지니는 의미에 대한 가장 훌륭한 찬사이기도 한 것이다.
자, 그러면 이제 마태수난곡의 개별 곡들을 일부 간략하게나마 살펴보도록 하자.
제 1곡은 전 곡을 여는 도입 합창으로, 두 개의 합창단이 주고받으며 엮어내는 장엄함과 엄숙함은 주님의 고난의 메세지를 파도와 같은 감동으로 전달하고 있다. 이 음악을 듣는 동안 우리의 마음가짐은 주님께서 고난당하셨던 그 현장에 찾아온 듯 옷깃을 여미는 마음으로 준비된다. 음악적으로도 완벽한 대위법적 어법은, 이 곡을 능가하는 대위법적 합창곡이 있으리라는 생각을 도무지 갖지 못하게 할 정도로 합창 음악의 극치를 들려주고 있다.
음악으로 그림을 그리는 듯한 표현법은 전 곡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 길게 늘여서 연주하는 현악 반주로 예수님을 둘러싼 빛을 표현한다든가, 마리아가 주님의 발에 향유를 붓는 대목에서 플룻이 스타카토로 떨어지는 음을 연주하므로써 예수님의 발 위에 떨어지는 눈물을 묘사하고 있는 점, 그리고 예수님이 감람산에 오르시는 모습을 베이스가 상승하는 음으로 표현하고 있는 점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예수님이 잡히신 장면을 묘사하는 제 33곡에서는, 주님을 따르는 여자들을 묘사하는 알토와 소프라노의 이중창이 “나의 예수님이 이제 잡히셨네” 하면서 느리고 구슬픈 노래를 부르는 동안, 군중을 나타내는 합창은 격정적이고 빠른 멜로디로 “놓아줘! 잠깐, 묶으면 안돼!” 하며 다급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한 곡 안에서 서로 전혀 다른 분위기와 템포의 멜로디들이 절묘하게 조화되는 이런 모습들은 마치 여러 영상이 시각적으로 오버랩되는 듯한 느낌을 연상시켜 주므로써 듣는 이로 하여금 감정이입이 일어나는 것을 돕는다.
제 47번곡(버전에 따라서는 39곡)은 베드로가 주님을 배반한 직후에 부르는, 아마도 전곡에서 가장 유명한 알토 아리아인데, 바이올린의 애를 끊는 듯한 독주를 타고 베드로의 애절한 심경이 노래된다. “불쌍히 여기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이렇게 울고 있나이다. 마음도 눈도 아프게 울고 있는 나를 보소서…” 때로는 나 또한 베드로와 같은 입장에서 이렇게 주님께 참회의 기도를 드려야 했었음을 돌이켜 생각할 때, 이 노래는 내 마음 안에 밀려들어 공명하는 ‘나의 노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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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숨가쁘게 진행되는 재판 과정,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의 애처로운 모습, 격앙된 군중의 반응, 주님의 십자가를 마음 아프게 바라보는 여인들의 애닲은 마음들, 돌아가시고 난 후 지진이 일어나며 성전의 휘장이 찢어지는 장면 등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성경의 이야기들이 한 편의 드라마로서 펼쳐지고 난 후에, 맨 마지막으로 찬송가 145장(“오 거룩하신 주님”)에 수록되기도 한 종결 합창8)으로 마무리되면서 주님의 수난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마지막으로, 바하의 마태수난곡과 같은 작품이 오늘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유익은 무엇이며,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고 주신 소명에 충실하기 원하는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를 주고 있는지에 관하여 잠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첫째로는, 우리에게 문화 유산이라는 형태로 이미 주어진 이러한 삶의 자원들이 우리의 일상적인 공간들을 더욱 주님으로 풍성한 곳이 되도록 만드는 데에 도움을 준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가장 직접적인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영적 문화 유산’들의 유익이 될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자신의 일을 통하여 끊임없이 하나님을 계시하고 경배하는 수고를 그치지 않았던 한 신앙의 선배를 통하여, 오늘 우리가 주님을 묵상하며 깊은 교제를 나누는 일에 또 하나의 본보기와 길잡이를 삼을 수 있다는 점을 들어야 할 것이다. 그들처럼 우리도 하나님께서 부르신 이 삶을 그분의 온전한 ‘작품’이 되도록 가꾸어 가야할 것인데, 그런 면에서 이러한 작품들이 뜻밖에도 우리에게 지속적인 격려와 도전을 주는 매개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고난을 조명한 한 영화가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에 대한 우리의 깊은 묵상을 도와주었듯이,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기 위하여 하늘이 낸 사람” 이라고 혹자는 일컫기도 하는 바하의 음악들과 가까이 하는 일 또한 보다 다른 각도에서 주님의 고난을 기념하고 묵상하는 일에 도움과 동기 부여를 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해본다. 그러한 가운데서, 그 어느 때보다 그분의 고난의 메세지에 가까이 다가서며, 주님 서신 그곳에 동참하라 부르시는 부르심에 순종하는 마음이 그 어느 때보다 내 안에 깊이 새겨지는 이번 사순절과 고난 주간이 되기를 소망해본다.
“우리는 다 양과 같아서 각각 제 길로 갔으나 여호와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의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입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사야 54:1-2)
1)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바하 음악의 순수음악적인 측면과 기술적인 측면들만이 남고, 정작 그의 삶의 철학이요 근본적인 창작의 동기가 되었던 신앙적인 측면이 도외시되어 가는 것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깊은 아쉬움을 느낀다.
2) 같은 해(1685년)에 독일의 이웃 동네에서 태어난 헨델과 바하는 동시대를 산 위대한 음악인들이었지만, 헨델이 영국 왕실의 지원 아래 부귀와 전유럽에 걸친 명성을 누렸던 것과 달리, 바하는 때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절을 보내기도 하였으며 그의 명성 또한 주로 독일 국내에 국한된 것이었다. 더우기, 바하의 음악은 그의 사후에 사람들의 기억으로부터 상당 부분 잊혀져 오고 있었다.
3) 헨델의 “메시아”가 이전에 나온 “Jesus of Nazareth” 등과 같은 주님의 일대기 영화와 같은 방식이라면 바하의 수난곡들은 멜 깁슨의 “The Passion”과 비슷한 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
4) 결코 신동이 아니었던 그의 작곡가로서의 경력은 열 살 전에 이미 교향곡을 작곡한 모짜르트와는 달리 20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나, 주어진 시간 사용을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응답이라고 여겼던 그는 그 누구보다도 많은 작품을 남기고 갔다. 그에게는 작품 번호가 매겨져 있는 작품들이 1080 가지가 있으며, 세 시간 반이 걸리는 마태수난곡도 그 중 한 번호(BWV 244)를 부여받고 있다.
5) 바하의 음악이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평화가 어떤 것인지 우선적으로 느껴보기 원하는 분은 (Karl Richter 등이 지휘한) 칸타타 140번 “시온은 파숫꾼의 노랫소리를 듣는도다”, 147번 “예수, 나의 기쁨되시네” 나 (Helmut Walcha 등이 연주한) 오르간 코랄 전주곡 BWV 639, BWV 731 등을 들어보기를 권장한다. 가사가 없는 일반 기악곡들 또한 얼마나 정신적 순수함과 영적 경건함을 이끌어내어줄 수 있는지 경험해보기 원하는 분께는 (S. Richter 등이 연주한) 평균율 피아노곡집이나 (Fournier, Maisky 등이 연주한) 무반주 첼로 조곡을 추천한다. 바하의 음악이 어떠한 경건한 마음을 갖게 하는지, 그의 음악이 어떠한 평화를 가져다 주는지에 대해서는, 직접 느껴보지 않고서는 필설로는 설명이 어렵다고 생각된다.
6) 주제곡인 아리아(aria)에 대한 30 가지의 다양한 변주가 덧붙여진 바하의 유일한 변주곡(BWV 988)으로, 그 완벽함과 즉흥성의 조화는 클래식 음악 애호가는 물론 재즈를 좋아하는 사람치고 이 곡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없게끔 만드는 그 어떤 매력이 있다. 여기의 주제곡은 바하의 음악들 중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다른 소품들과 더불어 “안나 막달레나 바하를 위한 곡집” 에도 삽입되어 있다.
7) 슈바이처 박사가 영혼을 매만지는 사랑을 담아 연주한 바하의 오르간 곡 연주들은, 그가 당대 최고의 오르가니스트였던 만큼 그 녹음이 현재에도 남아서 일부 (음반 석 장의 분량으로) 전해지고 있다 (1930 년대 후반; EMI Record). 위에서 추천한 BWV 731 (“사랑하는 예수님, 저희가 여기 있나이다”) 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한껏 묻어난 그의 바하 연주를 대표할 만한 곡이다.
8) 원래 해슬러(Hassler)가 작곡한 이 곡은 바하가 특별히 애착하여 요한수난곡에서 도입 합창으로 사용하였을 뿐 아니라 마태수난곡에서도 다섯 번이나 반복되어 나온다.
※ 현재 시중에는 마태수난곡 연주를 수록한 좋은 음반이 많이 나와 있다. 크게 정통적인 (authentic) 연주와 원전 악기 (periodic instrument)를 사용한 연주의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는데, 마태수난곡 연주의 모범적인 전형을 세운 칼 리히터 (Karl Richter)의 연주 (Archiv; 1958)는 전자의,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를 애절하고 감미로운 음악으로 승화시킨 가디너의 연주 (Archiv; 1988)는 후자의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최근의 연주로 호평받는 것으로는, 아르농쿠르 (Harnoncourt)의 신작 (Teldec; 2001), 헤레베헤 (Herreweghe)의 신작 (Harmonia Mundi; 1999), 그리고 일본인 스즈키 (Suzuki)의 연주 (Bis; 2000) 등이 통상적인 명연주들로 꼽히고 있다. 경제성과 쉽게 친숙해질 수 있다는 측면을 고려하면, 처음에는 주요 곡들로만 구성된 하이라이트 음반으로 시작해서 나중에 전곡 감상에 도전하는 방법도 권장할 만하다.
Mar 1, 2004 | 삶과 신앙/김한준의 묵상일기
이코스타 2004년 3월호
동양의 사상이나 철학은 뛰어난 관찰과 직관으로 대변되는 그들의 특징적 장점들로 인하여 삶이나 인간 자체에 대한 깊은 이해에 도움을 주는 경우가 많다. 때로는, 성경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고전의 문구들 가운데에서 오히려 신선한 어법으로 기독교의 진리를 잘 표현해주는 듯한 말이나 내용들을 종종 발견하기도 하는데, 그럴 때마다 “만물 속에 드러난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 의 구체적인 사례들을 보는 것만 같아 흥미롭다. 개인적인 소견으로, “어떤 리더가 참된 리더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노자가 제시하고 있는 ‘리더의 네 가지 유형’은 그 한 좋은 예가 된다고 사료된다.
노자의 도덕경은 약 5천 자 내외로 구성된 비교적 짧은 책으로, 그 첫 사분의 일 지점을 보면 ‘다스리는 자’에 관한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太上下知有之 其次親之譽之其次畏之 其次侮之
다소 의역하여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가장 훌륭한 지도자는 백성들이 그의 존재를 알며, 차선(second best)의 지도자는 백성들이 그를 사랑하고 존경한다. 백성들이 두려워하여 따르는 지도자는 그보다 못한 지도자이며, 가장 바람직하지 않은 지도자는 백성들에게 경멸 당하는 자이다.”
재미있는 것은, 백성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는 지도자는 차선의 리더일 뿐 가장 훌륭한 리더는 아니라고 언급하고 있는 점이다. 그리고 말하기를, 최고의 지도자는 백성들이 “그 존재를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다른 말로 하면, 뭇 사람들에게 적극적인 사랑과 존경을 받고있다고 해서 최고의 리더인 것은 아닌데, 그것은 가장 훌륭한 형태의 리더십이 발휘되고 있다면 사람들은 자기의 삶과 소명에 더욱 충실하게 될 뿐 특별히 그 리더 자체에게 집중하거나 연연해 하지 않기 때문이다. 노자가 말하는 가장 훌륭한 리더십은, 앞에서 강압적으로 끌고 가거나 소위 카리스마를 내세우는 스타일이 아니라, 뒤에서 말없이 따라오면서 혹 엇나갈 때마다 “막대기와 지팡이”로 툭툭 쳐주며 인도하는 가운데 스스로 바른 길을 깨달아 가게끔 이끌어주는 형태이다. 이런 경우, 스스로의 자발성이 위축되거나 손상을 입지 않으므로 자신의 능력과 의지를 다하여 일에 임하게 되는 장점은 있지만, 일이 되어진 결과 자체에 대해서 대개는 스스로의 덕택에 그렇게 된 줄로 생각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백성들은 리더에게 어떤 특별한 감사나 존경을 줄 필요조차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공기나 물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 존재에 대해 매순간 특별한 경외심이나 감사한 마음을 품지 않는 것과 같다.
이러한 형태의 리더십은 언뜻 보기에는 수동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적극적인 관찰과 기다림, 그리고 신뢰가 요구되는 것이다. 그것은 전체를 조망하는 안목과 확신이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며, 그 대상자들 한 영혼 영혼에 대한 지속적이고 애정어린 관심이 없이는 이룰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혹 일의 진전이 더디거나 뜻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에는 답답함 속에서 기다려줄 줄 아는 인내가 요구되기도 하며, 이를 위해서는 근거도 보장도 없는 상황 가운데서 거의 속아주는 것에 가까운 신뢰가 수반되어야 하기도 한다. 붙잡아야 할 것을 끝까지 붙잡으면서도 스스로 지치지 않을 수 있으려면, 끊임없는 자기연마와 더불어 그 일을 둘러싼 소명 (또는 언약) 자체가 지속적으로 갱신되는 내면적인 과정 또한 필수적이다. 그리고, 이런 모든 과정들을 다 거치고 난 뒤에, 그 공로에 대한 사람들의 인정이나 칭찬조차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비워진 마음이 있어야만 한다. 즉, 자기 분량의 수고를 애정어린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여 하고 난 후에 댓가도 없이 이름도 없이 자신의 존재를 감출 수 있는 사람만이 이러한 리더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리더십이 가능한가? 사상가나 철학자의 이야기들에는 “되어져야 할 삶의 모습” 은 있지만 “어떻게 그러한 모습으로 되어갈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주어져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아마도 어떤 특정한 방법에 따라서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 가기에는 너무나도 난제들인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만큼, 그 내용을 생각하고 말할 수 있었다고 해서 이러한 리더십의 실제적인 구현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현실적으로는 아직도 요원한 일일 가능성이 더 크다. 그러나, 하나님만이 나의 삶의 주인이시며, 내 자신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고 오직 내 안에 그분만이 사신다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그는 누구보다도 이러한 리더십을 실천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사람일 것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부인이 있는 사람일 것이며, 썩어지는 한 알의 밀알이 되는 일을 주 안에서의 생의 소명이요 영광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사람일 것이므로, 주님의 부르심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나보다 남을 귀히 여기며 복음 앞에서는 내 생명조차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살아가는 그의 삶 가운데서 이런 리더십의 모습 또한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 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노자가 말로써 표현한,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삶으로 본을 보여주셨던 이러한 리더의 모습에 비추었을 때, 나 자신의 지난날의 모습은 과연 어떠하였던가? 믿음과 사랑 안에 온전히 서있지 못하거나 성실하지 못하여 “사람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하는” 인도자가 되었던 것은 혹 아니었는지? 주님의 영혼들을 일의 목적으로 삼지 않고 일의 성취를 위한 도구로 삼거나, 그들로 하여금 의무감 때문에 “마지못해 따르게 하는” 사람이 되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더러는 시의적절한 관심과 사랑과 가르침을 주어 그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리더가 혹 될 수 있었을런 지는 몰라도, 칭찬과 인정을 받기 원하는 유혹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주님이 아닌 나 자신을 바라보게 하거나 아니면 주님과 더불어 나 자신도 늘 함께 바라보게 만드는 ‘영혼의 걸림돌’이 되고 말았던 것은 아니었는지?
언젠가 신앙의 멘토 한 분으로부터, 그분이 “보이지 않는 격려자 (hidden encourager)” 라는 모토(motto)를 일관되게 지니고 살아왔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지난 시간들 가운데서 개인적으로 도움을 받아왔던 영적 멘토들 몇 분을 떠올려보면, 그분들은 참으로 “보이지 않는 격려자” 의 면모를 가지고 있는 분들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된다. 몇 년간이나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살펴주어 오신 분들이었고, 올바른 신앙의 길로 스스로 들어설 수 있도록 지대한 영향을 주어 오신 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겸손하고 친근한 자세 때문에 오래동안 멘토링을 받고 있는 줄 조차 알아차리지 못하게 했던 분들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뒤늦게나마, 눈에 보이지는 않았으나 말없이 할 일을 이루어갔던 그분들의 리더십이야말로 노자가 말하는 리더십이며, 예수님께서 스스로 모범을 보이셨고 말씀 안에서 오늘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계시는 성경적인 리더십이었음을 깨닫고 있다.
나 자신 또한 그러한 온전한 리더쉽이 실천되는 삶을 살 수는 없을런지…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랑과 은혜로써 불꽃같은 시선을 내게 두고서 매순간 인도해 주고 계시는 “가장 훌륭한 리더” 이신 주님께서 내 안에 함께 하시기에 소망을 가져본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주님의 선하고 온전하신 리더쉽이 나의 삶 가운데에도 조금이나마 묻어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뿐이니라.” (고린도전서 3: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