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타 보이스 2009 – 코스타 세미나] 정진호 교수

코스타 세미나는 전체 집회 참석자 천여 명 중 아주 제한된 수만 참여할 수 있기 때문에 세미나의 중요한 내용이 모든 분께 전달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KOSTA VOICE에서는 코스타 기간에 열리는 세미나 중 다섯 분의 세미나 강사님들을 인터뷰하여 전체의 참석자이 지면을 통해서 평소에 만나기 어려운 만날 분들과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드립니다.

정진호 교수 – 샬롬의 언약궤를 찾아서
제 1강 : 존재의 이유 (the Reason of Existence)
제 2강 : 메시아적 선교의 본질, 칼-활-물 (The Substance of Messianic Mission, Sword-Bow-Water)
제 3강 : 하나님의 경륜 (Dispensation of God)

1. 정진호 교수님, 안녕하세요, 미주 코스타에 다시 찾아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코스타에 처음 참석하시는 분들을 위해 자기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연변과기대의 정진호 교수입니다. 저는 90년 미국 코스타에서 헌신하여 선교 필드로 나가게 된, 여러분들의 코스탄 선배입니다. 그래서 더 미국 코스타 후배들을 향한 애틋한 부담감을 가지고 있고요. <복음, 통일, 부흥>의 화두를 가지고 지난 15년간 중국과 북한을 섬기는 일로 달려왔습니다. 제 비전은 전 세계에 흩어진 코리안 디아스포라 청년들을 선교적 재원으로 훈련시켜서 임박한 통일시대와 동아시아 시대에 복음의 물류를 따라 흘러가며 쓰임받는 부흥세대를 키워내는 것입니다.

2. 평양과기대학교에 대한 책임을 맡으시고 여러가지로 일을 해오셨는데요, 그간 활동에 대해서 그리고 어떻게 진전되고 있는지 소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현재 평양과기대는 이미 건축이 완공되어 장대한 캠퍼스가 나타나 있습니다. 개교준비를 하고 학생을 받아야할 시점에 밀어닥친 남북관계와 북미관계의 정치적 긴장 속에서 지금 실마리가 풀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이 일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주셨던 마음이 스룹바벨 프로젝트의 성전회복의 꿈이었는데, 이 일은 스가랴 4장 6절의 <오직 여호와의 신으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무너진 성전 회복의 역사는 하나님이 친히 움직이셔야 하는 일이기에 사람들의 힘(노력)과 능(재능과 학문적 지식 등)으로 준비는 하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때에 성령께서 그 땅에 돌아오셔서 임하시는 그날 새 역사가 시작될 것이라 믿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역사속에서 <스룹바벨> 성전 회복을 위해서도 20년의 역사가 걸린 것처럼, 이 일은 장기적인 안목으로 풀어가야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3. 기독교인이 되면서 삶의 변화, 생각의 변화, 선교가 함께 시작되어야 한다고 할 때, 선교에 대한 인식과 행동이 더 강조되어야 할 것같습니다. 선교사적 삶을 산다는 것의 의미를 코스탄들에게 설명해주시겠습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잃어버린 영혼을 살리시기 위함이었듯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부터 선교적 사명은 시작됩니다. 선교적인 삶이란 생명을 살리는 일이요, 그것은 하나님이 처음 우리 사람을 만드시고 주셨던 문화명령과도 일치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생육하고 번성하기 위해 지음 받은 존재이기에,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일들이 생명을 살리는 비즈니스와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직업과 삶의 터전에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도록 하는 일을 Kingdom business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선교적 사명은 Kingdom Business가 우리들 주변 뿐만 아니라, 주의 재림의 때와 땅끝을 향해 확산되도록 나아가게 만드는 종말론적인 전제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4. 세미나 연속 강의가 전문인선교 트랙에서 ‘메시아적 선교’, 전방위 선교(all scope mission)라는 주제로 펼쳐지는데요, 좀 생소한 단어인 것같습니다. 강의를 듣지 않는 코스탄들에게 간단히 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메시아적 선교>란 이땅에 찾아오셨던 완전한 선교사로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셨던 것처럼, 그분이 행하신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의 사명을 함께 이루어가는 총체적 선교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활-칼-물>이라는 세 화두를 가지고, 비전과 전략 방향성에 대하여(활) 알아보고, 영성과 전문성의 양날이 선 (칼)에 대하여 살펴보며, 비록 활과 칼이 준비되어 있을지라도 샘물 근원에서 솟아나는 성령의 능력을 받는 (물)이 없으면 안되기에, 세 가지를 함께 구비한 사람들이 이루어가는 총체적 선교를 배우고자 합니다. 그에 비하여 <전방위 선교>는 상황화와 컨택스트의 문제를 다루며, 21세기 시대적 변화와 종말론적 컨택스트에서, 과거의 지역화되고 특성화된 선교전략에서 벗어나, 개방사회와 유비쿼터스 사회 그리고 빛의 속도로 달려가는 종말적 징후들 속에서 (시간, 공간, 물질, 대상, 토양, 인력, 팀웤 등) 모든 선교적 변수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함께 고려되어야만 하는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고 있음을 직시하고, 선교전략적 차원의 새로운 패러다임 변화의 필요성을 제기하며 업그레이드가 아닌 시스템 체인지로서의 사고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5. 선교가 한국 기독교인들과 코스탄들에게 어떤 시대적 사명이라고 할 때 어떤 근거를 말할 수 있을까요?

선교는 예수님의 몸인 교회를 완성해 가는 과정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나타나 성령님께서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그들의 배교와 패역을 통해 열방 가운데 흩으신 디아스포라 유대인을 사용하셔서 초대 교회의 신속한 확산을 이루셨던 성령님께서, 이제 한국 근대사의 부흥과 핍박과 배교의 역사를 통해 뼈아픈 고난과 분단을 허용하심으로 전세계에 흩으신 코리안 디아스포라를 사용하셔서 마지막 때에 총체적인 전방위 선교를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그 시대적 사명과 하나님의 경륜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6. 한편 근래 기독교인들의 배타적 태도, 근거없는 우월의식 등에 근거한 ‘공격적인 선교’에 대한 반성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한단계 성숙한 선교활동이란 어떤 모습을 띄어야 한다고 보십니까?

선교는 본질적으로 성육신의 낮아짐에서 시작됩니다. 서방 중심적인 선교가 한반도에 뿌리내리는 과정에서 베푸는 선교, 선교사들의 우월적인 자세가 잘못된 선교관을 낳은 면이 없지 않았고, 이제 세계 제 2위의 선교 대국이라고 자랑하는 한국 기독교가 그같은 태도를 답습함으로써 믿지않는 사람들에게 배타적인 공격적인 우월적인 모습으로 비추어지고, 또한 피 선교지에서 동일한 관행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게됩니다. 그리될 때, 올바른 복음이 전해지지 못할 뿐 아니라, 복음이 확산되는 범위를 축소시킴으로 복음 유통을 가로막는 장애요인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성숙한 선교란 높은 위치에서 나누어주는 시혜적인 선교가 아니라, 복음이 전파되는 순간부터 선교지의 제자를 즉시 동역자로 인정하고 그들을 선교의 주체로 세워 그들이 예배하고 일하는 방식에 따라 선교사가 따라가며 맞추어가는 선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예수님이 그리하셨듯이 선교사들의 끝없는 낮아짐의 자세가 요구됩니다.  

7. 좀 개인적인 질문을 드려볼까요? 많은 코스탄들의 관심사는 역시 진로, 그리고 결혼, 가정생활인 것같습니다. 선배 신앙인으로서 진로를 결정할 때, 그리고 가정생활에서 성숙한 결정을 내릴 때 필요한 지혜를 조언해주시겠습니까? 사역과 가정생활을 어떻게 균형잡고 계신지, 자녀교육은 어떤 방식으로 하고 계신지, 아버지의 역할은 어떤 것인지 등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세월이 지날수록 가정이 근본임을 더욱 실감합니다. 30-40대에는 사역에 대한 열심으로 가정을 희생하고 놓치는 일이 많습니다. 즉 아내와 자녀들에게 마땅히 드려야할 시간과 희생과 노력이 결여되었다는 것이죠. 그러다보니 수많은 청년들에게 심어준 헌신과 희생에 비하여 내 자녀가 그 부분이 취약한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직업을 정하는 문제는 물론 돈을 벌기위한 job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명하신 문화적 사명으로서의 occupation과 나를 지으신 분의 부르심의 목적에 합당한 calling으로서의 직업을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결혼관 역시 가정이 가장 기초적인 교회라는 것을 인식하고 그 머리와 몸의 만남으로서의 한몸을 이룰 수 있는 배우자를 찾아 같은 목적과 사명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갈 수 있도록 기도해야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미숙한 가장과 아빠인 저에게 젊었을 때 미처 다 깨닫지 못하고 이루지 못한 가정의 훈련을 다시 시키시기 위하여, 거의 10년터울로 하나씩 세 아이를 주셔서 지금 재수를 너머 삼수째 아빠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세 살짜리 늦둥이 막내 딸을 키우며 이번에는 정말 좋은 아빠가 되어서 합격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특별히 요즈음은 선교적 사명이 땅끝까지 나아가는 공간적 사명 뿐만 아니라 세대를 통해 시간적으로도 바로 흘러 내려갈 수 있도록 하는 수직적 선교의 장이 바로 가정인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정진호] 제 13 떡 – 내 잔을 마시려느냐? (Can you drink My cup?)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 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Now Jesus, going up to Jerusalem, took the twelve disciples aside on the road and said to them,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Behold, we are going up to Jerusalem, and the Son of Man will be betrayed to the chief priests and to the scribes; and they will condemn Him to death,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박게 하리니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and deliver Him to the Gentiles to mock and to scourge and to crucify.
And the third day He will rise again.”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Then the mother of Zebedee’s sons came to Him with her sons, kneeling down and asking something from Him.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And He said to her, “What do you wish?”
She said to Him, “Grant that these two sons of mine may sit, one on Your right hand and the other on the left, in Your kingdom.”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But Jesus answered and said, “You do not know what you ask. Are you able to drink the cup that I am about to drink, and be baptized with the baptism that I am baptized with?” They said to Him, “We are able.
” 가라사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So He said to them, “You will indeed drink My cup, and be baptized with the baptism that I am baptized with; but to sit on My right hand and on My left is not Mine to give, but it is for those for whom it is prepared by My Father.”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And when the ten heard it, they were greatly displeased with the two brothers.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But Jesus called them to Himself and said, “You know that the rulers of the Gentiles lord it over them, and those who are great exercise authority over them.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Yet it shall not be so among you; but whoever desires to become great among you, let him be your servant.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And whoever desires to be first among you, let him be your slave–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just as the Son of Man did not come to be served, but to serve, and to give His life a ransom for many.” (마태복음 20장 17-28절)


인간의 탄생은 고귀하고 기쁜 일입니다. 그 중에서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탄생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입니다. 그래서 온 세계가 그를 기념하고 함께 기뻐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탄생은 기쁜 일인 동시에 슬픔과 고통을 함께 배태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죄의 심판을 면할 수 없는,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새로 태어난 아기의 앳된 울음 속에도 그의 인생 앞에 닥쳐올 죽음의 그림자가 이미 길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이것이 인생의 역설이요 이중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셨지만 또한 완전한 사람으로 우리 가운데 나타나셨던 분이기에 죽음을 앞둔 한 사람으로 세상을 사셨습니다.


2004년 한 해 동안 가장 많이 팔린 책, <다빈치코드>라는 베스트셀러가 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을 주제로 그 속에서 <聖杯>의 비밀을 파헤치려는 공상 스릴러 소설입니다. 예수가 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 시에 사용했던 잔을 성배라고 부릅니다. 역사 속에서 이 성배에 관한 수많은 추측과 거짓된 소문들이 난무했습니다. 이 소설 역시 다빈치의 그림을 소재로 예수의 신성을 파괴하는 내용으로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그러나 보티첼리와 미켈란젤로를 포함하여 르네상스 시대의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그랬듯이, 레오나르도 역시 인본주의와 고대 그리스의 헤르메스 주의라는 신비적 인간 숭배 사상에 깊이 물들어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비록 그 당시의 많은 작품이 성경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다할지라도 그들의 작품 속에서 이교도적인 내용이 발견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을 근거로 성경을 부인하고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고자 하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일입니다.


아무튼 오늘 다루고자 하는 주제는 잔(cup), 성배입니다.
예수의 일생은 떡의 인생이라고 지난번에 말씀을 나눈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인생 속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또한 잔입니다. 구약시대 예수님의 현현이라고 알려진 창세기 14장의 멜기세덱 역시 처음부터 떡과 포도주를 양손에 들고 나타납니다. 떡과 잔, BREAD AND CUP 이것이 바로 예수 인생의 키워드(key word)였던 것입니다.


떡과 포도주는 잔치에서 빠질 수 없는 풍요와 기쁨의 상징입니다. 예수는 우리를 에덴의 풍요로 다시 초청하여 천국 잔치로 인도하는 생명의 떡과 잔입니다. 그러나 떡이 십자가에서 찢기신 예수의 몸으로서 고난과 희생을 상징한다면, 잔(cup) 역시 성경의 많은 곳에서 오히려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등장합니다.(예레미아 25장 15절, 에스겔 23장 33절, 요한계시록 16장) 이것이 예수의 인생이 지닌 이중성입니다. 잔칫집과 초상집이 공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를 따라가는 제자들인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크리스천의 인생은 기쁨과 고난이 함께 가는 인생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의 마지막 기도에서 그 진노와 심판의 잔을 자신에게서 옮겨달라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님에게 조차 잔은 정말 피하고 싶은 두려운 것이었습니다. 예수가 진정 두려워했던 것은 단순히 십자가에서 당할 능욕과 육체적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한번도 아버지의 곁을 떠난 일이 없던 순종의 아들이 우리의 죄 때문에 심판과 진노의 잔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했기 때문입니다. 즉, 아버지와의 영원한 분리와 유기를 당하는 그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에 대한 영적 두려움이 더 컸던 것입니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완전히 이해하기 힘든 일이지만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실제로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습니다. 버림받는 척 하고 연극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우리가 받아야할 그 고통, 그 형벌, 그 진노의 잔을 그는 실제로 받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두려웠을까?
예수는 그 잔에 대하여 깊이 묵상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피 흘림의 의미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하고 또 생각했을 것입니다.


잔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예수가 십자가에서 흘린 피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왜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려 마지막 한 방울의 피까지 다 흘려야만 했습니까?


우리가 받을 진노의 심판을 대신 받기 위해서?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는 예수의 십자가로 이미 종결된 것이요, 더 이상 우리에게는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을 향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를 위해 전토와 소유물은 물론이요 부모, 형제, 아내와 자식마저 버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져야할 십자가는 과연 무엇일까요?


십자가의 피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는 죄사함의 언약에 관한 구약의 제사입니다. 이 언약은 히브리서에서 밝히 언급한 것처럼 예수의 십자가로 충분히, 일회적으로 완성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양의 제물로 피를 흘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둘째로, 십자가의 피는 죄사함을 받은 성도들에게 던져지는 새 언약(New covenant)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만찬석상에서 제자들에게 미리 잔을 나누며, 그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한글 성경에서는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막 14:24)”라고 그냥 언약이라고만 쓰고 있지만, 한글성경과 NIV를 제외한 영어 성경 또는 원전의 마태, 마가, 누가의 공관복음에는 모두 “새 언약”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곧 우리가 믿는 신약 곧 New testament입니다. 이 새 언약은 요한복음에는 새 계명(new commandment)으로 나타납니다.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벌어지는 제자들의 다툼과 시기 질투를 바라보던 예수께서는 저들의 발을 씻어 종의 본을 보여주신 후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줍니다. 이른바 그 유명한 아가페(Agape) 명령입니다. 이것이 신약의 본질인 새 언약이요 새 계명인 것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 13: 32-5)”


이웃 사랑, 서로 사랑, 형제 사랑에 대한 이 명령, 우리가 목숨을 걸고 지켜야할 이 계명, 이것이 바로 예수가 십자가에서 피 흘리며 우리에게 가르치고 떠난 약속 있는 새 계명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져야할 십자가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채워야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입니다. 구약의 제사가 죄사함의 구원을 위한 언약이었다면, 신약의 제사는 아가페 사랑의 완성을 위한 새 언약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날마다 져야할 산제사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도무지 형제를 서로 사랑할만한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는 이웃을 내 몸같이 결단코 사랑할 수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예수는 피 흘려야 했습니다.


죽음을 앞둔 스승 앞에서 서로 높아지려고 다투는 제자들,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조차 누가 크냐하며 다투는 제자들(눅 22:24)을 바라보며 예수는 자신이 피 흘려 죽지 아니하면 안 되는 이유를 절감했을 것입니다.


결국 예수를 죽인 자들은 로마인들이 아니었습니다. 같은 말을 쓰고 글을 쓰던 유대인들, 가장 가까운 친족들 때문에, 예수를 따른다고 좇아가던 제자들 때문에, 종교지도자들이라고 일컫던 바리새인과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시기 질투에 의해 참소당하여 십자가로 끌려간 것입니다.


오늘날도 예수의 이름을 훼방하는 가장 큰 원흉은 이방인들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몰려드는 무리들 때문에, 교회에서 큰소리치는 집사 장로들 때문에, 예수를 가르치고 전하겠다고 나선 목사요 선교사들 때문에 예수의 이름이 짓밟힙니다. 바로 옆의 한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여 절망할 수밖에 없는 자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서로 높아지려고 시기 질투하고 다투는 자들입니다. 예수를 죽인 자들은 우리들입니다. 예수는 바로 우리 때문에 피 흘려 죽어야 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는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기 직전, 그를 따르던 12제자들에게 처음으로 십자가를 직접 언급하며 자신의 고난에 대한 분명한 통지를 하고 있습니다. 이미 여러 차례 상징적으로 또한 직설적으로 자신이 받을 고난에 대하여 이야기한 일은 있었지만 십자가에 달려 죽을 것을 직접 언급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은 예수가 보인 영적 권위와 말씀의 능력 그리고 기적들을 체험하면서 예수에 대한 나름대로의 환상과 기대를 키워왔습니다. 자신이 따르고 있는 스승 예수야말로 로마의 압제로부터 유대민족을 구원하고 그들에게 오병이어의 기적과 같은 경제적 배부름을 가져다 줄 정치가로서 혹은 민족 지도자로서 이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예루살렘 성을 향한 마지막 입성은 결전을 앞둔 비장함이 흐르는 그런 분위기였을 것입니다. 마가복음10장에 보면 저들이 놀라고 두려워하며 주를 따랐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세베데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가 예수 앞에 나타나 무릎을 꿇고 간청하는 뜻밖의 장면이 나타납니다. 자신의 두 아들을 예수께서 주의 나라를 얻으신 후 권좌의 좌, 우편에 앉게 해 달라는 청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아들을 위한 치맛바람이 등장한 셈입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이 장면을 야고보와 요한이 직접 예수께 간청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들들이 어미를 앞세워 온 것인지 어미가 아들들을 위해 강제로 데리고 나타난 것인지는 모르되 분명한 것은 이들은 예수께서 조만간 왕위에 오를 것이며 그 이후의 권력 배분에 대하여 벌써 관심을 가지고 자리다툼에 들어가고 있음을 알게 합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대하여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가 말한 십자가의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든지, 단순히 비유적인 말씀으로 받아들여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난다는 그 말 속에서 희망을 걸고 초반의 어려움을 겪지만 극적인 반전을 통해 결국 메시아가 승리할 것이라는 그런 상상을 하고 있었음에 분명합니다.


아무튼 이 황당한 요청을 듣고 예수는 그들을 묵묵히 바라봅니다. 어쩌면 속으로 절망에 가까운 슬픔을 느꼈는지도 모릅니다. 삼 년 간이나 데리고 다니며 직접 가르친 제자들이 겨우 이 수준이라니….. 항상 자신의 먹을 떡만 챙기던 제자들을 향해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 둔하냐? 하며 호되게 질책하던 것도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그렇게도 자신의 마음을 모르는지… 이들의 어리석음에 대하여 화가 나다가도 나중에는 측은한 심정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저들의 눈을 번갈아 바라보며 질문을 던집니다.
“너희가 지금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너희가 진정 내가 마시려는 잔을 마실 수 있겠느냐?”
그들은 여전히 큰 소리로 답합니다.
“마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죽기까지 당신을 따라 충성할 것입니다.”
예수는 그들의 대답에 수긍하며 예언적인 말을 다시 던집니다.
“그렇구나. 과연 너희가 장차 내 잔을 마시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의 좌우편에 누가 앉게 될는지는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예비한 자가 앉을 것이니 너희는 상관마라.”


이 대화를 듣고 있던 나머지 열 제자가 이 두 형제에 대하여 분을 터뜨립니다. 안 그래도 예수님이 베드로와 더불어 세베대의 아들들을 특별대우 하는 바람에 마음에 가시처럼 느끼고 있던 그들은 참지 못하고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들의 다툼을 듣고 있던 예수는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어서 제자들을 특별히 불러다 앉히고 일장 훈계를 시작합니다. 이른바 십자가의 정신에 대한, 종의 의미에 대한 강화가 시작됩니다.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교훈의 핵심은 세상의 집권자들이 권세를 부리는 원리와는 전혀 다르다. “너희가 크고자 하느냐? 먼저 섬기는 자가 되라. 너희가 으뜸이 되고자 하느냐? 먼저 종이 되어라.” 하며 종의 제자도에 대하여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세상에 온 이유가 다른 사람을 위하여 목숨까지 바치는 섬기는 종이 되기 위함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러니 너희도 서로 종이 되어야 마땅하지 않느냐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자… 여기까지가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종이 무엇입니까?
흔히 주의 종, 주의 종 하는데……. 과연 누가 주의 종입니까?
종은 주인을 의식하고 사는 사람을 뜻합니다.
종은 주인의 뜻을 헤아리고 주인이 원하는 것을 행하는 자입니다.


믿는 자는 하나님을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모두 주의 종입니다. 특별한 직분을 가진 목사나 선교사만 주의 종이 아닙니다. 종은 주인 앞에 항상 나아가는 자입니다. 주인이 부르면 항상 달려갑니다. 그리고 그가 시키는 일을 마땅히 행합니다. 따라서 종은 곧 예배자를 의미합니다. 예배는 주인의 음성을 듣고 달려가서 그의 뜻을 순종하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얼마 전 예배의 본질에 대하여 살펴본 바 있습니다. 예배는 우리의 행위로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선행과 행위로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모든 노력들은 인본주의적 종교 행위에 불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올라가서 그의 마음을 움직여 상급을 받아내는 것이 예배가 아니라는 말이죠. 예배란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그 음성을 들려주시는 것이요 그 음성에 화답하여 우리가 그의 앞으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방향성이 중요합니다. n-턴이 아니라 u-턴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예배자로 선다는 것은 우리의 삶의 방향성을 완전히 180도로 뒤바꾸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로 나아가는 것, 예배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거기서 모든 것이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종의 역할이, 예배자의 삶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다음 단계가 남아 있습니다.


종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세 가지로 요약 됩니다.
종은 첫째 섬기는 자입니다. 낮은 곳에 임하라는 것이요, 겸손히 행하는 종의 자세를 가리킵니다. 섬김은 주인을 바라보는 자세입니다.
둘째, 종은 순종하는 자입니다. 이것은 종이 지녀야할 정신을 의미합니다.
종은 자기 생각을 행하는 자가 아니요, 주인이 명하는 것을 행하는 자를 뜻합니다. 주인이 원하는 것이라면 죽기까지라도 그 명령을 따르는 것이 종입니다.
셋째, 종은 일하는 자입니다. 충성된 종은 주인의 명한 것을 행하기 위해 부지런히 뛰어다닙니다. 주인이 보든 안보든 최선을 다해 그 일을 완수합니다. 이것이 종의 바른 행위입니다.


벤쿠버에 있는 리전트 칼리지(Regent College)에 폴 스티븐스(Paul Stevens)라는 유명한 신학자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저서 즉 <나머지 6일>이라는 책 속에서 진정한 예배는 주일 하루만 치루는 행사가 아니라 크리스천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나타나는 통전적인 산제사(living sacrifice)가 되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심지어 그는, 마르틴 루터에 의해 촉발되었던 과거의 종교개혁은 구원론의 관점에서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지만, 교회론의 관점에서는 절반의 개혁밖에는 하지 못하였다고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우리가 종의 삶을 통해 진정한 예배자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교회 안에서의 종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이웃을 향한 종의 모습으로 다시 내려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그림에서 나타낸 것처럼 U턴에서 P턴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때 비로소 크리스천의 능력이 세상에 나타납니다.


낮아짐의 능력! 이 사실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학생들에게도 반드시 가르쳐서 내보내야할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만일 U턴에서 그친다면 어쩌면 한국 교회의 수많은 나약한 크리스천들처럼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는 선데이 크리스천만 양산할 수도 있습니다.


P턴을 통해 이웃에게 나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교회를 세우는 일입니다. 교회는 예배 처소나 크리스천들의 공동체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친히 우리에게 본을 보인 것처럼 세상 속의 영적 전투장에서 피를 흘리며 십자가를 지는 종을 통해 비로소 탄생한다는 것이죠. 십자가상에서 예수가 로마 군병의 창에 옆구리를 찔려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다 쏟아내는 그 순간 신랑 예수의 신부된 교회가 탄생한 것처럼 말입니다. 아담이 죽음처럼 깊은 잠에 빠진 그 순간 하나님의 손이 그의 옆구리에서 피 흘려 하와를 끄집어낸 것처럼 말입니다. 교회는 피 흘림의 현장 속에서 세워집니다. 산제사는 U턴에서 P턴으로 다시 내려갈 때 이루어집니다. 그때 비로소 십자가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1)
21장에서부터의 내용은 예루살렘 입성 이후 고난을 향한 급박한 전개가 이어집니다.
그러나 그 모든 내용이 <종의 제자도>를 가르친 예수의 마음 속에 일어나고 있었던 십자가와 <잔(cup)>의 의미에 모두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는 제자들의 모습과 불순종하고 교만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종교지도자들의 모습 속에 나타난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깊은 묵상 가운데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가 죽어야 하는 이유가 높아진 인간들의 교만 때문임을 자각하고 계셨습니다.


1)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겸손한 종의 모습)
2) 성전 청결(성전 회복을 위한 자신의 사역을 천명, 자신을 성전으로 드리려는 상징)
3) 열매맺지 못한 잎만 무성한 무화과 나무를 저주(예루살렘과 이스라엘에 임박한 저주를 예언)
4) 바리새인과 서기관 무리들과의 격돌

-  권위에 대한 도전
-  두 아들의 비유, 불의한 농부의 비유, 혼인잔치의 비유…
-  예수를 시험하는 바리새인들(납세 문제, 부활의 문제,
-  바리새인들의 위선과 악독을 질타함(위선자, 높아지려는 자, 외식하 자, 소경된 인도자, 거짓맹세하는 자, 탐욕과 방탕하는자, 회칠한 무덤들, 선자자를 죽이는 자…) 5)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탄식
6) 종말과 재림의 때에 대한 예언들
7) 종말론적 비유 세 가지(열처녀의 비유, 달란트 비유, 양과 염소의 비유)
8) 마리아의 향유 옥합 헌신: 장사지냄을 예비하심
9) 최후의 만찬 : 떡과 잔을 나눔
10) 겟세마네의 기도


예수의 사역의 본질은 교회를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는 예배당 안의 교회가 아니라 치열한 전쟁터에서 순교자의 피의 터전 위에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자기 자신이 성전이셨던 그분이 피 흘려 세운 그 교회 위에 이제 우리 자신의 몸을 드려 또 다른 교회들을 세워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곳 연길에 와서 하고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대학을 세우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의 사역 자체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어제 그제 우리가 만일 한국이나 미국에 있었다면 우아한 크리스마스 예배를 드리며 교회 안에서 시간을 주로 보냈겠지요. 그러나 이곳 전투장에 나와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포기하고 강의와 회의로 뛰어다녔으며, 소외된 학생들을 집에 초대하였고, 혹은 고아원을 찾아다니며 그들을 섬기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한 일은 예배가 아닙니까? 예배입니다. 오히려 예수께서 진정으로 원하셨던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참 예배, 사도 바울이 로마서 12장에서 권하였던 우리들의 몸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요 교회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평양에 가서 하고자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대학을 세우는 일입니까?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것 또한 교회를 세우는 일이요, 무너져 내린 성전을 회복하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전 회복의 현장에는 반드시 희생과 피 흘림이 뒤따릅니다.


예수는 그것을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습니다. 자신을 모함하는데 온 정신이 팔린 위선적인 종교지도자들과 바리새인을 향해 질타하며, 과거에 그들이 시기 질투하여 죽인 선지자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순교자의 역사를 들추어냅니다. 마태복음 24장 35절을 보면,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하고 부르짖으며 자기 동족 이스라엘에게 임할 저주를 예언하며 통곡합니다. 마치 주기철 목사님이 하나님의 신이 떠나는 평양성을 향해 통곡했던 그 음성으로 말입니다.


이때 예수께서 언급하신 선지자 사가랴가 바로 스룹바벨 성전을 세울 때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스갸랴 선지자입니다. 성경에는 무려 30명에 가까운 스가랴가 등장하지만 예수가 언급한 이 스가랴가 바로 스룹바벨 성전을 짓다가 죽임을 당한 순교자 스가랴입니다. 아버지 바라갸의 이름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슥 1:1) 땅의 선지자 학개와 더불어 하늘의 선지자라 불리며 온갖 정치 경제적인 난관을 뚫고 스룹바벨 성전을 쌓는 그 일에 헌신하였다가 죽임을 당한 선지자 스갸랴를 묵상하며 예수는 자신에게 임할 피 흘림과 잔의 의미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자신의 몸으로 드릴 그 성전 회복의 역사를 묵상하며 스가랴처럼 그렇게 피흘리지 않으면 결단코 세워지지 못할 교회의 다가올 앞길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동족을 향한, 이웃을 향한, 형제를 향한 사랑보다는 질투심에 불타오르는 저들 카인의 후예들을 위해 자신이 피 흘려 죽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그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에게는 자신이 그 당시 구했던 그 잔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자식들의 출세를 위해 예수께 나아와 특별히 간청했던 살로메에게는 자신의 그 말을 되새기며 뼈아픈 통곡을 하여야 할 날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 비교적 잘 알려진 부유한 어부 세베대의 아내로서 두 아들을 키우며 그들이 아비의 기업을 이어가기를 기대하였던 어머니, 그러나 어느 날 메시아를 만났다며 생업과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게 된 두 아들을 위해 함께 예수를 따라다니며 봉양했던 살로메에게는 예수는 자식들의 출세를 위한 든든한 발판으로서 여겨지던 정치가요 실력자로 보였습니다. 그토록 믿었던 예수가 마침내 허망하게 십자가상에서 매달려 죽어버리는 것을 살로메는 바로 옆에서 목도하게 됩니다. (마 27:56, 막 15:40) 그녀의 마음속에서 일어났던 좌절과 절망은 처음에 제자들이 품었던 것과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살로메는 예수의 부활로 인해 새롭게 희망을 품게 됩니다. 아마도 마가의 다락방에 함께 모여 성령 세례를 받게 되었으며 초대 교회에서 열심히 공궤하던 권사님(?) 중에 한 사람으로 변모하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던 중 청천벽력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사도행전 12장에 나타난 것처럼 그토록 기대하고 아끼던 장남 야고보가 사도들 가운데 첫 순교자로 헤롯의 칼에 어이없이 살해되고만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과 더불어 3대 수제자 그룹에 있었던 야고보가 제대로 역할 한번 해보지 못하고 허무하게 죽어버린 것입니다. 아들을 우상으로 살아가던 살로메가 받았던 그 아픔과 충격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장남의 시신을 끌어 앉고 통곡하며 오열하던 살로메는 언젠가 자신이 예수를 찾아가 간청하던 그때의 일이 떠오릅니다. 너희가 내 잔을 마시려느냐고 예수가 던졌던 그 말이 생생히 떠오릅니다. 그리고 그 잔을 받을 수 있다고 큰 소리쳤던 지난 날 자신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예수가 받았던 이 십자가의 잔, 복음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던져야만 했던 그 순교의 잔을 자신의 아들이 가장 먼저 받게 될 줄이야…. 그리고 그 의미도 모르면서 그것을 위해 간청했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생각하며 가슴을 쳤을지도 모릅니다. 살로메의 간구는 받아들여졌습니다. 야고보는 가장 먼저 예수의 왼편 자리에 가서 앉는 제자가 된 것입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천국에서 예수의 왼편에 앉아있을 장남 야고보를 떠올리며 살로메는 자신의 간구대로 들어주신 하나님의 큰 은혜를 절절하게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요즘 저는 셔우드 홀 선교사가 쓴 조선회상이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양화진에 묻혀있는 수많은 개신교 선교사들의 삶과 죽음을 통해 지난날 흑암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있던 참담하고 어두운 기억 속의 우리 민족을 해방시키기 위해 목숨을 마다않고 찾아왔던 그들의 십자가, 그 속에 담긴 떡과 잔의 의미를 다시금 반추해 봅니다.


27살의 젊은 나이에 대동강 변에 뿌려진 토마스 선교사의 피와 순교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던져줍니까? 토마스의 기념 교회가 있던 그 순교의 터 위에 세워지는 평양과학기술대학… 그래서 우리는 그 일을 <스룹바벨 프로젝트>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토마스 선교사로부터 성경을 전해 받은 자들을 통해 세워졌던 평양의 널다리골 교회, 장대재 교회, 장대현 교회와 그 부흥의 역사를 기억합니다. 무너져내린 그 도성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던 예수님의 무겁고 쓰라린 마음을 떠올립니다. 오늘도 그 제단 위에 뿌려질 스가랴의 피와 또 다른 토마스의 피를 묵상합니다.


예수께서는 오늘날도 한국 교회 지도자들을 향해 더럽혀진 성전을 깨끗게 하시며 그들의 위선을 그들의 탐욕을 지적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도무지 깨우치지 못하고 자신의 영욕에 매달려 떡을 움켜쥐느라 바쁜 이 시대의 교회와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 질타합니다.


예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지십니다. 예수를 따르겠다고 좇아 온 우리들을 향해서도 그의 피 묻은 눈길을 보냅니다. 예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십니다. 사역지에서조차 서로 비방하며 싸우며 시기 질투하고 높아지기를 원하는 한심한 우리들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너희가 내 잔을 마시려느냐?


너희가 지금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네 욕심과 명예를 위함이 아니더냐? 민족심 때문이냐? 너희가 과연 자신을 욕하고 비방하며 죽이려 덤비는 저들을 향해 피를 흘리는 이 아가페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겠느냐? 너희가 내가 피 흘려 산 교회와 성전을 짓는 그 일에 스가랴처럼 순교의 피를 흘릴 준비가 되어 있느냐? 아니 네 옆에 있는 한 형제를 용서할 수 있겠느냐? 너희가 진정 죽고자 하느냐? 성배를 찾아 나서는 이 모험에 네 인생을 걸 수 있겠느냐?


진정코 너희가 내 잔을 마시려느냐?





(1) 21장에서부터의 내용은 예루살렘 입성 이후 고난을 향한 급박한 전개가 이어집니다.
그러나 그 모든 내용이 <종의 제자도>를 가르친 예수의 마음 속에 일어나고 있었던 십자가와 <잔(cup)>의 의미에 모두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는 제자들의 모습과 불순종하고 교만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종교지도자들의 모습 속에 나타난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깊은 묵상 가운데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가 죽어야 하는 이유가 높아진 인간들의 교만 때문임을 자각하고 계셨습니다.

1)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겸손한 종의 모습)
2) 성전 청결(성전 회복을 위한 자신의 사역을 천명, 자신을 성전으로 드리려는 상징)
3) 열매맺지 못한 잎만 무성한 무화과 나무를 저주(예루살렘과 이스라엘에 임박한 저주를 예언)
4) 바리새인과 서기관 무리들과의 격돌

-  권위에 대한 도전
-  두 아들의 비유, 불의한 농부의 비유, 혼인잔치의 비유…
-  예수를 시험하는 바리새인들(납세 문제, 부활의 문제,
-  바리새인들의 위선과 악독을 질타함(위선자, 높아지려는 자, 외식하는자, 소경된 인도자, 거짓맹세하는 자, 탐욕과 방탕하는자, 회칠한 무덤들, 선자자를 죽이는 자…) 5)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탄식
6) 종말과 재림의 때에 대한 예언들
7) 종말론적 비유 세 가지(열처녀의 비유, 달란트 비유, 양과 염소의 비유)
8) 마리아의 향유 옥합 헌신: 장사지냄을 예비하심
9) 최후의 만찬 : 떡과 잔을 나눔
10) 겟세마네의 기도

[정진호] 제 12 떡 – 최후의 만찬 – 천국 쿠데타

 

(1)


1979년 10월 26일 밤 7시 40분경 서울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밀실에서 만찬 중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대통령 박정희와 경호실장 차지철을 권총으로 살해했다. 이로써 18년간 지속되던 박정희 군사 정권과 유신 독재 시대는 막을 내렸다. 그 총성은 한국 정치사의 새로운 전환점을 알리는 대단히 중요한 순간이었고 한국은 걷잡을 수 없는 정치폭풍 회오리에 다시 한번 휘말리면서 민주화라는 새로운 파도를 타고 1980년대의 격동기를 맞이하게 된다.


<군주론>에서 부하를 다스리는 냉혹한 권력 세계의 법칙과 기술을 군주에게 가르쳤던 마키아벨리는 <로마사 평론>에서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들은 목숨이 위태로우면 먼저 군주를 타도하도록 쿠데타를 종용한다.(1) 군주는 승리한 장군을 두려워하여 세력이 커지기 전에 종종 제거하기 때문이다. 죽느냐 죽이느냐? 그것이 바로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피의 역사였다.


쿠데타(Coup d’etat)는 정권 찬탈을 위해 부하가 무력으로 집권자를 제압하고 권력을 장악하는 하극상(下剋上)의 반란을 의미한다. 수많은 독재자가 만찬석상에서 하극상 쿠데타를 당해 그의 측근인 부하에 의해 갑작스런 배반과 살해를 당함으로써 역사의 뒷문으로 사라져갔다. 타락한 인간이 지닌 집요한 권력에의 의지는 모든 친밀했던 관계를 깨뜨린다. 절친한 친구 사이나 주인과 종, 아버지와 아들, 주군과 신하 등 충성과 복종으로 이루어진 어떤 밀월 관계도 권력을 향한 야심이 들어가는 순간 배반과 살인의 피흘림의 현장으로 돌변하게 된다. 시저와 부르투스가 그랬고 고려 우왕과 이성계가 그랬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크로노스는 아버지 우라노스를 살해하고 권좌를 찬탈하지만 결국 그의 아들 제우스에게 또 그 자리를 빼앗긴다. 친부(親父) 살해를 통해서라도 권좌를 빼앗고자 하는 권력 세계의 비정함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동양 신화도 마찬가지다. 신농(神農)이라 불리던 농업의 신 염제(炎帝)를 남방으로 몰아내고 중국의 중원을 차지한 황제(黃帝)와 그에게 다시 도전하였다가 죽임을 당한 동방의 신 치우(蚩尤)사이의 치열한 권력 다툼이 전설로 전해지고 있다. 동양 신화 속에 감추어진 이런 이야기들은 고대 동아시아의 각 민족 간에 패권 쟁탈을 위한 수많은 피흘림의 역사가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2)


그 쿠데타의 현장마다… 감추어진 살의(殺意)와 음모, 위장된 거짓 웃음을 띤 최후의 협상안들이 오간다. 만찬의 풍성한 음식과 화려한 가무(歌舞) 뒤에는 날카로운 비수가 감춰져 있고 배반자는 시시탐탐 칼을 뽑을 결정적인 기회를 엿보고 있다. 마침내 협상은 결렬되고 배반자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권력자에게 다가가 최후의 키스를 던진다. 추종자의 충성의 눈길에 만족하며 권력자가 돌아설 때 배반자는 소리 없이 등 뒤에서 칼을 뽑아드는 것이다. 가장 부드럽게 웃으며 그러나 가장 잔인하게 칼을 꼽는 것, 그것이 배반의 미학이다. 그 같은 배반의 총칼에 맞아 쓰러질 때, 배신자를 확인한 후 놀라고 당황하여 그리고 분노에 치를 떨고 이를 갈며 죽어간 수많은 권력자들이 있었다. 그것이 쿠데타의 현장에서 발생하는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여기……. 역사상 가장 이상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한 쿠데타가 있었다. 그 쿠데타에 의해 역사상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처형당한 한 사람, 그 분을 소개한다.


온 천하의 권세를 한 몸에 지닌 지상 최대의 권력자로 세상에 나타나실 수도 있었던 분, 그러나 그 권세를 스스로 버리고 가장 낮고 비천한 구유에서 태어나셨던 분,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자라나며 순종으로 가족을 섬기셨던 분, 겸손히 무릎 꿇어 세례 받으실 때 하늘 문이 열리며 축복받으셨던 분, 광야에서 시험받으며 사탄의 떡의 유혹을 단호히 물리치셨던 분, 성전 꼭대기에 올라설 수 있었던 명예욕을 뿌리치셨던 분, 천하만국의 영광과 권세를 주겠다는 사탄의 유혹을 말씀으로 제압하신 분, 그러나 그 말씀의 권세로 세상의 수많은 권력자들을 놀라게 하셨던 분, 사랑의 권능으로 기적을 일으키며 가난한 자들을 배불리 먹이신 분, 소경된 자들을 보게 하고 억눌린 자들을 자유케 하신 분, 성전을 청소하시며 불의한 장사치들을 쫓아내신 분, 세상의 권력자들의 시기와 질투를 한 몸에 받으셨던 분, 그러나 세상의 불의와 위선에 대해 추상같이 질타하며 꾸짖으신 분, 수많은 무리들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자신을 높이지 않으신 분…….


자신을 따르던 추종자들의 손을 피해 스스로 왕위를 뿌리친 분, 자신의 몸을 생명의 떡으로 제자들에게 먹이신 분, 제자들을 사랑하여 종의 모습으로 낮아져서 그들의 발을 씻기신 분, 자신을 배반할 제자를 알고도 끝까지 사랑하여 모른 체하신 분, 자신이 배반당하여 체포될 것을 알면서도 도망가지 않으신 분, 사랑하는 제자들이 자신을 버리고 도망갈 것을 미리 알고 알려주신 분, 자신의 몸이 찢기고 피가 흐를 것을 알고 두려웠지만 그 잔을 피하지 않으신 분, 배반의 현장에서도 평온을 잃지 않고 반항하지 않으신 분, 대항하는 제자들을 오히려 꾸짖어 칼을 버리도록 명하신 분, 붙잡혀 갈 때도 마치 도수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온순하게 끌려가신 분, 법정에서 자신의 억울함을 입을 열어 변명치 않으신 분, 온갖 모욕과 치욕과 고문을 당하면서도 인내와 순종으로 참으신 분,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 받을 때도 자신을 못 박은 원수들을 위해 사랑하며 기도하신 분, 마지막 순간까지 아버지와 떨어지기 싫어하셨던 분, 결국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사명을 완수하고 숨을 거두신 분, 예수.


사랑하는 제자의 배신을 눈앞에 앞두고, 쿠데타를 기다리던 그 만찬석상에서 떡을 떼어 손에 쥐고 축사한 후 제자들에게 주며 말한다.
“받아먹어라. 이것이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다.”
다시 잔을 들고 하늘에 감사한 후 제자들에게 주며 말한다.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흘릴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그리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다.



(2)


권력,
권력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과연 권력은 총구에서 나오는가?


프란시스 베이컨은 아는 것이 힘이라고 했다. 지식은 힘을 낳고 권력을 창출하는 화약과도 같다. 이성은 그 권력을 운반하는 총신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신의 형상 가운데 담겨 있었던 이성을 우리의 영혼 속에 심어 놓으시고 그 속에 지식과 지혜를 베풀어 주셨다. 그리고 그것으로 자연을 다스리고 타인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경배토록 하는 일에 사용하기를 원하셨다. 그 지식은 창조적이며 생산적이며 이타적인 목적으로만 사용될 수 있었던 도구였다. 다시 말해 힘을 사용하는 총구의 방향이 제한적으로 주어졌다는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스스로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것을 먹어버린 타락한 인간에게 더 이상 지식은 안전한 도구가 될 수 없었다. 지식은 힘을 창출하며 곧바로 이기적인 총부리를 타인을 향해 겨냥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탐심을 채우기 위해 타인을 억압하고 배척하며 위협하고 이용하고 갈취하고 유린하고 감금하고 때리고 고문하고 그리고 죽였다. 아주 잔인하게. 그것이 타락한 인간의 역사였다.


현대사회가 지닌 특징은 지식-권력의 연계성이다. 근대 사회에서 지식의 폭발을 야기하며 본격적인 권력의 사회구조화를 일으킨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6, 17세기 서구에서 발생하였던 과학혁명(scientific revolution)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코페르니쿠스-케플러-갈릴레이-뉴턴으로 이어진 이 혁명은 단순한 과학적 발견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서구인들의 사고방식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은 사상혁명이었다. 뉴턴 역학에 의해 밝혀진 거대한 지식체계가 땅과 하늘의 모든 운동을 뭉뚱그려 합리적인 과학적 언어로 설명할 수 있음을 알게 된 서구인들은 경이를 너머서 신세계를 향한 허황된 꿈을 꾸게 되었다. 과학 혁명에 의해 형성된 기계론적 세계관이 인간의 이성을 신봉하는 계몽주의자들에 의해 진보주의(progressivism)라는 일종의 이데올로기로 변하게 되었다. 인간의 머리로 무엇이든 이해할 수 있고, 인간의 손으로 무엇이든 만들 수 있다는 자만심이 서구 지성인들을 사로잡게 되었다. 그와 같은 시대사조를 등에 없고 19세기 중엽 찰스 다윈에 의해 조심스럽게 제기되었던 진화론은 전 세계를 뒤덮는 혁명적 풍조가 되었고 진화 사상이 되어 나타났다. 그리고 마침내 전 인류가 과학기술의 무한 발전에 의한 유토피아를 꿈꾸는 환상에 빠지게 된 것이다.


서구 열강이 제국주의 식민지 영역으로 패권 쟁탈을 하며, 그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난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전 세계가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으로 첨예하게 나뉘는 과정 속에서도, 양 진영 모두 마침내 인류는 20세기의 유토피아를 건설하게 되리라는 신념만은 서로 공유하고 있었다. 과학기술은 이상사회를 꿈꾸는 자들에게 지식의 권력화를 이루어내기 위한 도구였다. 그와 같은 신념 틀 속에서 교육을 받아오던 사람들이 점차 그 꿈속에서 깨어나기 시작한 것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그리고 마침내 인류가 이룩해낸 과학기술의 열매가 핵폭탄이라는 엄청난 살상 무기로 등장하면서 온 인류를 핵전쟁의 위협 속으로 몰아넣기 시작한 그 무렵이었다. 한국 전쟁과 월남전의 참상, 끝없이 이어지는 냉전 상황 속에서 서구의 지성은 자신들이 가졌던 진보 이데올로기가 어쩌면 신기루에 불과할지 모른다는 것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하였다. 인간 이성에 대한 회의적 질문이 제기되자 그와 함께 소위 탈현대, 즉 포스트모던 논쟁이 시작되었다. 뒤엉키기 시작한 20세기 사회의 부조리와 불합리 속에서 고민하며 해결책을 모색하고자 시도했던 대표적인 포스트모던 철학자 중에서 푸코와 하버마스가 있다.


미셸 푸코는 지식과 권력이 불가분적 관계에 놓여있음에 천착한 사회철학자이다. 그는 인간이 이성과 비이성을 분리함으로써 얻어진 지식을 타인을 억압하고 배척하는 도구적 권력으로 사용하여 왔음을 지적한다. <지식의 고고학>, <광기와 문명>, <성의 역사>, <감시와 처벌>과 같은 그의 대표적인 저작을 통해 병, 범죄, 광기, 성, 정치 등의 역사성을 고고학적 방법론으로 파헤친다. 권력이란 인간이 만들어낸 규범과 규율과 감시 기능을 통해 사회의 비합리적 요소를 통제하고 제거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어 온 지식체계임을 분석한다. 그 속에서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사회적 병리현상과 난제를 인정하고 해명하고자 노력한다. 그는 현대사회를 엉망으로 뒤엉키게 한 주범으로서 근대적 이성에 주목한다. 계몽주의 시대의 산물인 인간의 보편적 이성에 대한 신뢰가 교조적으로 유포된 것에 반발하며 이성과 합리성의 이데올로기를 해체하려는 것이 그의 작업의 본질이다. 그러나 자신의 해체적 분석에 의해 재구성된 지식-권력의 신 계보학이 인간의 권력을 창조적 목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또 다른 규범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점에 있어서 여전히 그는 인본주의적 이성주의자의 범주를 넘지 못하고 있다.


그에 비해 하버마스는 문제 해결 방식을 인식론에 기초한 비판적 해석학을 통해 접근한다. 합리적 이성에 장애를 일으킨 요인을 의사소통의 문제로 환원시킨다. 의사소통의 규범화를 통해 합리적 이성을 회복시킬 수 있다는 낙관론에 기초하고 있다. 언어의 혼란을 통해 바벨탑의 역사가 중단되었으니 이제 그 언어를 합리적으로 통일시켜서 다시 그 일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버마스는 관계성에 주목하고 있다. 흉측하게 얽히고설킨 거대한 퍼즐을 맞추고 있는 현대인들을 바라보며 푸코가 잘못된 퍼즐을 모두 해체하여 다시 시작하자고 주장한다면, 하버마스는 의사소통만 잘 할 수 있다면 헝클어진 관계가 회복되고 퍼즐 맞추기가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인간의 이성은 타락한 이성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성을 담는 그릇인 언어 역시 타락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우리는 매일매일 나의 세 치 혀조차도 제어하기 힘들어 온전한 관계형성에 실패하고 있는 타락한 존재일 뿐이다. 권력을 창출하는 지식의 통로가 하나님과의 관계로 이어져 있을 때만이 온전한 권력이 배출된다. 결국 권력이란 관계성의 산물이다. 모든 관계의 시작은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그것이 단절되는 순간 인간은 깨어진 존재가 된다. 불완전한 관계는 불완전한 권력을 창출한다. 또한 불완전하고 악한 권력은 다시금 인간사회의 관계성을 깨뜨린다. 악의 확대 재생산을 일으키는 이 같은 파괴적 연쇄반응에 의해 사회는 급격히 타락한다. 그것이 역사다. 인간의 힘으로 그 폭발적인 악의 연쇄반응을 멈출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언어도단(言語道斷)이다. 푸코와 하버마스……. 한 마디로 하마가 코푸는 소리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이 세상은 악의 권세에 사로잡혀 있다. 그 사실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6장 12절에서 그것을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이라고 표현하며 열거하고 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국가에서 그리고 국가 간에도 악한 권세는 영향은 치밀하고도 포괄적으로 퍼져있다. 끔찍한 가정 폭력과 직장에서의 수탈과 억압,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과 소외 및 범죄 행위들, 국가 공권력에 의한 감금과 압제, 더러는 독재자의 횡포에 의한 정치적 탄압과 고문을 통한 비인간화, 나아가서는 전쟁터와 수용소 군도, 아우슈비츠 같은 곳에서 벌어진 그리고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탈인간적 만행에 이르기까지…….


독일 문학의 최고봉이라고 일컬어지는 괴테의 <파우스트>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미망(迷妄)에서 빠져나와 구원을 성취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결국 독일 계몽주의 정신을 화려한 문학적 언어로 구현한 거짓 복음에 불과하다. 이 시대에 교묘하게 위장하여 다가오며 영적인 세력을 확대하고 있는 이 악의 권세에 대하여 리차드 포스터는 특별히 일곱 가지를 경계하고 있다. 돈, 성, 종교와 율법, 기술문명, 자기도취, 군국주의, 절대적 회의주의가 그것이다. 변신의 명수인 사단은 우리를 영적으로 현혹하며 끊임없이 속이고 미혹하는 거짓의 아비이다. 어떻게든 하나님 위에 올라설 수 있는 거짓 우상을 만들어 우리를 끌어들이는 것이다. 우리를 지극히 높은 산 위로 데려가서 천하만국의 영광을 보여주며 “내게 엎드려 경배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하며 유혹한다. 세상의 권세에 대한 그 유혹은 너무나도 매혹적인 것이어서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자신의 영혼을 팔았던 파우스트 박사의 전철을 밟고 마는 것이다. <파우스트>를 르네상스 인본주의를 꽃피운 독일 정신의 극치라고 표현하며 자만심에 가득했던 독일인들……. 그 파우스트 박사의 말로는 아우슈비츠로 끝을 맺는다.



(3)


예수가 나무에 매달려 못 박힌 순간, 그 십자가의 현장에서, 흐르는 강물처럼 쉼 없이 흘러가던 죄의 역사는 잠시 숨죽이고 멈추어 섰다. 도도히 흐르는 오만한 역사(chronos)의 물줄기 속에서 온갖 피비린내를 부르며 약탈하고 빼앗고 억누르고 때리고 죽이던 그 권력의 횡포는 하나님이 정하신 역사(kairos)의 정점에서 마침내 삼라만상의 주인이요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그 외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인류가 과거 역사 속에서 범했던 모든 무자비한 권력의 잔혹성과, 진리를 향해 침 뱉고 뺨을 때리며 모욕하던 로마 군병의 포악함과, 장차 수많은 독재자의 횡포 속에서 극악한 고문으로 비참하게 죽어가야 할 수많은 정치범 수용소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그 순간 십자가 세 개의 못 자국 소리를 향해 모두 빨려 들어갔다.


쾅 쾅 쾅 


제 3 시의 적막이 이어졌다.


온 우주가 그 순간 경악하였다. 하늘의 해와 별과 달이 파랗게 질렸고 창백하게 빛을 잃었다. 땅의 산천초목이 몸을 떨었고 강과 바다가 놀라 흔들리고 갈라졌다. 시공간을 창조하셨던 최초의 그 말씀이 숨을 거두는 그 순간 시간과 공간이 휘청거리며 일순간 흔들렸다. 죽었던 자들이 무덤 속에서 벌떡 일어났으며 성전 휘장이 갈라졌다.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던 사단의 그 야욕이 마침내 성취된 것만 같았다. 세상 풍속을 휘어잡고 사람들을 미혹하던 공중의 권세 잡은 자가 승리감에 도취되어 잔인하게 웃으며 그 장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포도원 주인이 보낸 상속자 아들을 죽이고 무자비한 폭도들이 포도원의 경영권을 찬탈한 것이었다. 천국 쿠데타가 일어난 순간이었다.


그 순간……. 그의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간 많은 생각들은 무엇이었을까?


제 3 시의 침묵, 두려움과 고통의 시간에 예수는 조용히 매달려 있었다.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아니 저항할 수 없는 엄청난 고통이 그의 온 몸을 제압하고 있었다. 간간히 나지막한 신음 소리만 배어나왔다. 십자가 주변에 몰려든 군중들이 조롱하며 내뱉는 말들이 들려왔다.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짓겠다더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그렇다면 어찌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느냐? 서기관과 장로들이 대꾸한다. 저가 남은 구원하면서 자신은 구원치 못하는구나. 어서 내려와 보아라. 네가 진정 이스라엘의 왕이냐? 예수는 힘겹게 고개를 들어 그들을 바라본다. 자신에게 헌화하며 환호하던 군중들이 어느새 권력자의 편에 서서 이제는 자신을 손가락질 하고 조롱하며 고개를 흔드는 그 모습을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자신을 못 박은 후 옷을 빼앗으려고 서로 싸우는 포악한 로마 군병들도 눈에 띈다. 피에 물든 그 옷을 차지하려고 제비뽑기를 하며 다투는 탐욕스런 저들에게도 과연 구원이 임할 수 있을까? 아버지……. 정말 약속하신대로 이 십자가가 저들마저 구원할 수 있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지금 자기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못 박힌 상처에서 전율하는 고통이 온 몸을 쥐어짜고 전파된다. 정신이 아득해진다.


그 때에 옆에 매달린 한 강도가 고통 중에 쥐어짜며 예수에게 욕을 퍼부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더냐? 너와 우리를 왜 구원하지 못하느냐? 그러자 두 강도들이 서로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중 하나가 욕하는 다른 강도를 꾸짖어 나무라기 시작했다. 네가 아직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느냐? 우리는 우리 죄로 말미암아 벌을 받는 것이니 당연하거늘, 이 죄 없고 의로운 사람에게 네가 어찌 욕을 하느냐? 그가 갑자기 간절한 목소리로 예수를 불렀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고개를 비틀어 간신히 그를 바라보았다.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간절함이 뒤섞인 그의 눈길이 들어왔다. 갑자기 그가 가련하고 불쌍했다. 작은 미소를 그에게 보내며 말했다. 그래, 걱정마라.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그 말을 듣자 그의 얼굴에서도 실오라기 같은 희망이 서서히 번지더니 마침내 얼굴이 환해졌다.


태양이 눈부시다. 덥다. 유다는 지금 어디 있을까? 사랑하던 제자 유다의 배신을 생각하자 고통이 가중되었다. 발을 씻겨줄 때 당혹감에 젖어 눈길을 피하던 그의 모습이 생각났다. 겟세마네에서 겁에 질려 자신에게 키스하던 유다의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아버지 저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소서. 이 고통의 순간에 괴로움을 함께 지고 있을 그 소외된 영혼을 예수는 찾아 나서고 싶었다.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던 목자처럼,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던 여인처럼……. 유다에게 쏟아질 역사의 손가락질을 생각하며……. 너무 불쌍해서 예수는 눈물지었다. 베드로가 떠올랐다. 열심이 있는 만큼이나 실수투성이였던 제자 베드로. 대제사장의 집안 뜰에서 멀찌감치 겁에 질려 따라오던 베드로, 자신을 부인한 후 돌이켜 눈이 마주치자 뒷걸음질 쳐 도망가던 그가 생각났다.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는 베드로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 하였다. 예수는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였다. 주여 사단이 저를 삼키지 못하게 하소서. 아끼던 제자 요한과 그를 따르던 많은 여인들의 슬픔어린 모습을 굽어다 보았다. 긍휼한 마음이 솟아났다. 막달라 마리아와 살로메, 글로바의 아내……. 그 속에 섞여 오열하는 어머니 마리아가 있었다. 마리아는 거의 실신한 듯 부축을 받아 기대어 있었다. 어머니의 품속에서 행복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그녀에게 아픔만을 안겨주었던 장남……. 동생들을 앞세우고 자신을 찾아 나섰던 어머니를 내치며 그녀의 가슴에 못을 박았던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여자여……. 이후로 요한을 아들로 여기소서. 사랑하는 요한아, 이제 네 어머니로 모셔다오.


한바탕 아픔이 몰려가자 다시금 몽롱한 기억의 조각들이 고개를 쳐든다. 간신히 얼굴을 들어 주변을 바라보니 드문드문 낯익은 얼굴들이 보인다. 칼을 찬 백부장의 모습과 밤중에 자신을 몰래 찾아왔던 니고데모와 부자 관원 아리마대 요셉의 모습이 눈에 뜨인다. 악의 권세에 대항하여 용감하게 나서지 못하는 자신들에 대한 자괴감으로 괴로워하는 흔적이 엿보인다. 공포의 십자가 앞에서 형언할 수 없는 경외감에 떨며 기이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저들……. 아버지 저들에게 믿음을 주소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허락하소서. 자신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왔던 구레네 사람 시몬의 겁에 질린 얼굴도 얼핏 보였다. 두려움에 떨며 숨어있을 다른 제자들의 얼굴도 하나씩 떠올랐다. 마지막 만찬을 하며 떡을 떼어주던 그들, 두려움에 휩싸여 근심어린 눈길로 서로를 바라보던 그 제자들. 아버지 저들의 인생을 축복하소서. 저들이 장차 떡의 인생을 살아가며 자신을 내어줄 때 다시는 근심과 두려움에 싸이지 않게 하시고,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을 보내사 저들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소서.


해가 중천에 떴다. 온 몸에서 피와 물이 모두 빠져나가 버린 것만 같았다. 극도의 갈증이 그의 혓바닥을 늘어뜨리며 식도를 강제로 잡아 빼는 듯한 고통을 가져왔다. 숨이 가빠왔다. 아버지 어째서 이 고통을 제게 주십니까?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하시지 않으셨나요? 저를 기뻐하는 아들이라고 하지 않으셨던가요? 어째서 이 고통을… 곧 숨이 끊어질 것만 같았다. 그러면 나는 어찌되는 거지? 갑자기 공포가 몰려왔다. 내가 이 모든 이들의 죄 짐을 지고 이제 죽어버린다면? 지옥으로 곧 떨어질 것만 같았다. 아니야. 이 순간을 위해서 지금까지 달려오지 않았던가? 그래 이것이 아버지가 내게 맡긴 사명이었지. 그런데 왜 이렇게 두려운 거지? 인간들이 만들어낸 온갖 가증스런 죄의 굴레가 그의 머리에 가시면류관으로 씌워진 것만 같았다. 아버지를 떠나서 한시도 존재해 본 일이 없는데……. 이 죄의 삯을 내가 혼자 다 질 수 있을까? 아버지의 사랑에서 영원히 멀어지는 것인가? 더 이상 아버지가 나를 돌아보지 않으실까? 아니야. 그럴 순 없어. 아버지 정말 나를 버리실 겁니까? 무섭다. 내가 그토록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시도록 간구했건만……. 아버지 원망스럽습니다.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눈물이 쏟아졌다. 그때 갑자기 해가 빛을 잃으며 어두움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정오 육시에서 구시에 이르는 사이에 어두움이 임하여 십자가 주변을 감쌌다. 예수는 고개를 숙이고 마치 죽은 것처럼 가만히 늘어져 있었다. 십자가 주변에 몰려 있던 군중들도 이제 구경거리가 끝난 듯 하나씩 둘씩 자리를 뜨기 시작하였다. 로마 군병은 십자가 밑에 창을 세워놓고 자기들끼리 둘러 앉아 노닥거리고 있었다. 가족들과 여자들만이 여전히 흐느끼며 간간이 울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지루한 적막감이 흐르고 있었다. 그때, 죽은 듯이 잠잠하던 예수가 고개를 천천히 들더니 하늘을 향해 크게 소리를 질렀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그것은 사랑하는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아들의 처절한 고통의 외침이었다. 그리고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내가 목마르다. 그 소리를 듣자 병정 중 하나가 서서히 일어나 옆에 있던 해융을 포도주 그릇에 담그더니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가로 가져갔다. 예수는 그것을 맛보고 고개를 돌려 피하였다. 그리고 안간힘을 쓰듯 고개를 들어 앞을 향해 뚫어지게 응시하였다. 그의 피멍 들린 입술이 떨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 이루었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하나이다. 그리곤 고개를 떨어뜨려 숨을 거두었다. 그때 천둥소리와 함께 사나운 소낙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로마 군병이 창으로 예수의 옆구리를 찔러 마지막 남은 피와 물을 다 쏟아내었다. 그 빗물에 젖어 십자가의 피가 땅으로 스며들었다. 아벨의 피를 받았던 그 저주받은 땅에 예수의 피가 촉촉이 스며들어 흐르기 시작했다.


쿠데타는 끝났다. 그는 죽었다. 그러나 그의 피는 강을 따라 바다를 건너 오대양 육대주를 감싸고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역사는 다시 시작되었다. 억압에서 자유로. 미움에서 사랑으로. 전쟁에서 평화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굶주림에서 배부름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그리고 죽음의 떡에서 생명의 떡으로.





(1) 마키아벨리, <군주론>, <로마사 평론>을 참조하라. 사울과 다윗의 관계를 살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2) 치우가 산동성을 중심으로 한 동이(東夷)계 민족이 숭배하던 신이었던 점과 치우가 거느리던 풍백(風伯) 우사(雨師)와 같은 장수가 단군 신화에도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치우를 섬기던 한민족의 조상이 황제와의 패권쟁탈전에 져서 중원에서 한반도로 밀려났을 가능성도 엿보인다.

정진호 교수와의 만남

이코스타 2004년 12월호

eKOSTA: 인터뷰에 참여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먼저 개인적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교수님은 어떻게 신앙을 가지게 되셨고 현재까지 이렇게 헌신하게 되셨는지요?


정진호: 아이구… 또 옛날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하는군요. 코스탄 중에 이미 여러번 들은 분들이 있으리라 생각해서 간략히 말씀드리면… 전 대학 시절에는 완전 앤티로 술마시고 허랑방탕하게 지내던 대표 선수였구요…간접적으로 그 시절에 제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궁금하시면… 그에 대한 묘사가. 홍성사에서 출간한 <아바>라는 책 속에 나타나 있습니다. 아마 읽으시면 놀라시겠죠. 그 시절엔 성경보단 도덕경이나 인도철학 쪽이 더 흥미가 있었습니다. 예수믿는 아내 만나 결혼 하고도 정신 못차리고 3년간 교회 안나가고 버티다가 미국에 포닥으로 와서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던 후배의 강권적인 안내로 뜻밖의 교회 생활 시작했구요… 보스톤 지역의 Gate bible study Group에서 성경말씀을 깊이 있게 묵상하면서 점차 신앙에 깊이 들어가게 되었어요.


eKOSTA: 코스타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으셨는지요?


정진호: 89년 코스타에 같이 가자는 후배의 권유를 뿌리치고 캐나다로 놀러갔었는데… 1년 사이에 제 믿음이 굳어지면서 90년 코스타에는 자원해서 오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중국과 북한에 대한 부르심을 받게된 것 같아요. 그해 주제가 “이 시대를 새롭게” 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유달리 민족과 시대에 대한 메세지가 많았어요. 김진홍 목사님도 오셨고… 송인규 목사님을 통해선 학문과 신앙이 어떻게 통합되어 선교적 사명에 쓰임받을 수 있는가에 대한 학문적 근거를 제시받았다면… 김진경 총장님을 통해 구체적인 부르심을 받은 셈이죠. 폐회 예배 때 홍정길 목사님께서 <영적으로 3국통일을 준비하라>는 메세지도 강하게 들렸고요. 제 개인적으로는 <복음, 통일, 중국>이라는 인생의 화두를 안게 된 매우 중요한 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3년간의 포항 생활을 통해 준비를 하였고 94년에 중국 연변과기대에서 들어가서 사역 하던 중, 96년 초 어느 새벽인가요… 강동인 간사님이 전화를 하셔서 강사로 초청해 주셨어요. 그 때 부터 거의 빠지지 않고 코스탄 후배들을 위해 매년 달려오고 있죠. 이것이 저의 지금까지 코스탄 라이프입니다.


eKOSTA: 이코스타에 글을 연재하시면서 다양한 소재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증거해주셨는데요, 어리석은 질문이지만 가장 기억에 남으시는 글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정진호: 글쎄요. 제 전공인 재료공학을 통한 성경적 조망으로 다니엘의 환상을 문명사적으로 해석한 글이 학문과 신앙의 통합이라는 관점에서 가장 의미있는 글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영성적인 관점에서는 <루카스 이야기>가 제일 기억에 남고요. 제 자신도 깊이 은혜를 체험했으니까요. 아무튼 어렵게 어렵게 이코스타를 통해 매달 글을 연재하는 바람에… 제가 미처 예기치 않았던 책을 두권이나 출간하게 되어서 저로서도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이코스타 원고를 묶어서 출간한 책이 <예수는 평신도였다>와 <치유의 꿈, 루카스 이야기>가 된 거죠.


eKOSTA: 여러가지 사역 중에서도 이코스타에 빠짐없이 글을 보내주심을 감사드리는데요, 평소에 많은 사역을 감당하시는 자기 관리의 비법이랄 것이 있으신지요?


정진호: 한동안 이코스타에 지각하지 않고 원고를 보낸다고 칭찬도 많이 해 주셨는데… 최근에 계속 지각 원고를 보내드려서 죄송합니다. 자기 관리 비법이 특별이 있는 건 아니고요… 무슨 일이든 사명감이 원동력이 되어야 하는 것 같아요. 흔히 저희 대학에 와 계신 교수님들을 농담으로 사역자(a man of 4 roles)라고 하는데… 가르치고 행정하고 좁은 의미의 사역(학생)하고 또 연구까지 하는 거의 초인적으로 살고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어느 순간 부터(아마 제 글을 읽고 변화받는 분들이 계시다는 걸 깨달았던 때였던 것 같습니다.) 글 쓰는 일이 하나님이 제게 주신 달란트 중 하나요… 사명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요즘은 평양과기대 일을 맡고 나서 너무 많은 일들이 폭주하다 보니 제 시간 관리 측면에서도 아쉽지만 이코스타를 당분간 쉬어야 겠다는 판단을 하게 된 겁니다.


eKOSTA: 현재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코스탄들은 한편으로는 부유하면서 한편으로는 학업과 일로 어렵게 생활하고 있는데요, 교수님의 떡의 전쟁이라는 복음과 고난의 메세지를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정진호: 미국의 물리적 환경만을 보면 물론 부유함이 넘치죠. 그러나 유학생들의 경우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와 인생의 사명에 접목되어 있지 않은 경우는 항상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공허감 속에서 지낼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특별히 믿는 학생들의 경우는 더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이 섬기는 신이 <바알신> 하나로 고정되어 있지만, 믿는 학생들은 <여호와>와 <바알> 사이에서 항상 갈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냐 바알이냐?>라는 이 질문 앞에서 갈팡질팡하는 거죠. 사실은 둘 다 놓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하게 하나를 선택하라고 말씀하시니 그게 문제입니다.


내가 공부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학업에 대한 분명한 목적의식을 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크리스천의 삶이 일상 생활에서의 의미로 나타나고 산제사로 드려지기 위해서는 <종>에 대한 개념, 즉 청지기 의식이 분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가지고 이웃을 섬기는 종으로서의 목표 의식을 가지고 학업에 임하면 그속에는 반드시 십자가가 나타납니다. 크리스천의 예배의식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내려와서 나를 거쳐 다시 믿음으로 하나님께 경배하며 올라가는U턴이라고 흔히 생각하지만 단순한 U 턴에서 그치면 결국은 선데이 크리스천이 되고 맙니다. 교회 안의 신자와 세상 속의 불신자로 함께 살아가는 이원론에 빠지고 만다는 거죠. 예수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산제사의 삶, 즉 이웃의 가난에 동참하며 그들을 섬기기 위해 내 자신을 비우는 삶은 U턴이 아니라 P턴입니다. 즉 하나님께 믿음으로 올라갔던 내가 다시 내려와 이웃을 향해 옆으로 달려가는 것, 그 가운데 비로소 십자가가 나타납니다. 한국의 기독교가 안고 있는 심각한 문제… 혹은 취약성은 교회 안에서 U턴만 잘하는 그래서 결국 세상 속에서는 십자가를 지지 못하는 나약한 크리스천만 양산했다는 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받은 달란트를 가지고 세상 속의 가난한 이웃에게 내려가 그 떡을 던질 수 없는 사람은 결국 십자가를 지는 고난의 의미를 체득하지 못하고 맙니다. 진정한 예수의 제자란 그의 일상적 삶에서 십자가가 나타나고 있는가 하는 질문에서 가려지리라 생각됩니다.


eKOSTA: 교수님의 글 중 <선악과와 무감독시험>이라는 글을 개인적으로 매우 인상깊게 읽었는데요, 현재 연변에서 일하시면서 한편 평양 과기대 사업으로 분주하시리라 생각이 듭니다. 동북아교육문화협력재단과 평양과기대 설립 사업에 대해서 소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진호: 예, 정말 기도하면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고 있습니다. 정말 그 대학이 세워져서 북한 청년들을 가르칠 수 있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합니다. 정말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기에 그래서 더욱 exciting 한 일인 것 같습니다. 평양에 그것도 최초의 순교자 토막스 선교사의 기념 교회 터 위에 세워지는 이 대학을 그래서 저희는 <스룹바벨 프로젝트>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정말 2007년 평양 대부흥 100주기를 맞이하는 의미있는 시기에 맞추어 이 대학이 우리 민족 화합과 화해 회복 그리고 통일과 번영의 기초를 쌓는 초석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현재 학사동 건물이 5층까지 골조가 올라갔고… 식당, 기숙사의 기초가 된 상태에서 잠시 겨울이 되어 공사를 중단하고 있지만 내년에는 어떻게든 6개동의 기본 시설을 갖추어서 늦어도 2006년 봄에는 1단계 개교를 할 예정입니다. 많은 물질과 또 헌신자가 필요합니다.


동북아교육문화협력재단은 연변과기대를 지난 12년간 후원한 단체이기도 하며(www.neafound.org , 86-2-561-2445) 현재 평양과기대 설립을 위하여 북한 교육성과 계약을 맺은 우리측 대표기관입니다. 그 곳에서 평양과기대 건립위원회를 발족했고 위원회의 위촉을 받아 현재 이 구성되어 주로 연변과기대 교수님들 12분 정도가 주축이 되어 건축, 학사, 후원/홍보 및 지산복합단지 건설 등을 위해 활동하고 있습니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마침 제가 평양과기대에 대한 생각과 묵상을 위해 컬럼을 올리고 있는 제 3시라는 싸이트( www.3-rd.net )에 올라 있습니다. <평양과기대 설립의의 및 진행 상황>이라는 글입니다. 그 싸이트에 요즘 <떡의 전쟁>도 시리즈로 나누어서 올리고 있고요….(제 3시-> 잔꽃송이 -> 루카스 막힌 담을 허시고로 찾아들어가시면 됩니다.) 사실은 떡의 전쟁은 제 마음 속에 통일과 평양과기대를 생각하며 지속적으로 묵상한 글 모음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코스탄들도 그 싸이트에서 평양과기대를 위해 함께 묵상하며 기도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떡의 전쟁-에필로그> 마지막 부분을 아직 미처 못썼는데… 그 싸이트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번호에는 인터뷰로 대신하고요.


그리고 평양과기대를 위한 미국 쪽의 공식 웹 싸이트는 www.pust.net가 있습니다. 그리고 평양과기대에 대한 더 구체적인 사진 자료나 최근 동영상을 보시려면 www.webhard.co.kr 로 들어가셔서 id:rthomas, p/w:pust 로 들어가시면 guest folder 에서 많은 자료들을 얻으실 수 있습니다. 계속 업데이트도 될 것이구요.


eKOSTA: 교수님의 앞으로의 계획도 말씀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아울러 기도제목을 주시면 함께 기도하도록 하겠습니다.


정진호: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우리 민족의 통일에 쓰임받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그 구체적인 행보가 평양과기대입니다. 물론 통일 이후에는 중국으로 다시 나올 것입니다. 기도제목은…


그리고 저희 가정의 행보를 주님께서 인도해 주시도록. 제 가족, 제 아내와 아들들, 부모형제들이 함께 이해하고 부르심을 받을 수 있도록 위해서 기도해 주시고요…. 제 아내가 지금 무척 두려워하고 있거든요. 특별 기도 후원이 필요합니다.


평양과기대가 반드시 세워질 수 있도록, 많은 물질 후원자와 교수헌신자들이 나타나도록. 코스탄들이 각자 있는 자리에서 평양과기대를 위한 홍보요원들이 되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물론 연변과기대가 더욱 든든하게 세워져 가도록 위해서도 계속 기도해 주세요.


eKOSTA: 이코스타 독자들에게 당부하고 싶으신 말씀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정진호:항상 건강하시고 비전의 사람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또 기회가 되면 이코스타에 컴백하여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당분간은 제 3시 싸이트에서 뵙죠. 짜이찌엔!

[정진호] 제 11 떡 – 거룩한 자랑 – 진설병

 

(1)


학생들과 선악과 문제를 공부하며 항상 던지는 질문이 있다.
우리 일생을 두고 따라다니는 세 가지 유혹 (물질, 명예, 권력) 중에서 너희는 어느 것에 가장 취약하다고 생각하는가? 이 질문을 할 때마다 나는 스스로 자신에게도 동일한 질문을 던져보곤 한다. 물론 세 가지가 서로 연관을 맺고 있기도 하고, 그 어느 하나도 만만한 것은 없지만 역시 나에게 가장 어려운 문제, 내가 걸려 넘어지기 쉬운 유혹은 명예의 문제인 것 같다.


물질은 한번 건너뛴 경험이 있기에 – 비록 여전히 잔 펀치로 괴롭힘을 당하고는 있지만 – 맘만 먹으면 언제든지 놓을 수 있겠다는 신심(信心)이 있다. 또한 권력의 문제는 아직 내가 심각한 권력의 중심부에 들어간 경험이 없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다지 나를 잡아끄는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문제는 명예심, 다시 말해 내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욕망이다.


명예심을 어떻게 정의할까?
생각나는 대로 브레인스토밍을 해보자.


보암직한 것, 보이고 싶은 마음?
프라이드, 프라우드한 마음?
뻥 튀기를 하고 싶은 마음?
실제보다 더 크게 더 잘나게 보이고 싶은 마음?
노출증, 귀걸이, 화장, 섹스어필?
허영심, 명품, 안목의 정욕?
좋은 집, 멋진 자동차?
성적, 일류 대학, 박사학위, 허탄한 자랑?
논문, 집필, 연주, 그림, 공연?
설교, 영적 교만, 성전 꼭대기?


어쨌든 보는 것과 관련되어 있음에 분명하니 우리의 눈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 같다.
그렇다면, 만일 소경 아니 시각장애인들은 안목의 정욕이 없을까?
꼭 그렇지만은 않은 듯 하다. TV 토크쇼에 나온 시각장애인이 화장을 하고 목걸이 귀걸이를 하고 나온 것을 본 일이 있다. 뿐만 아니라 좀 더 추상적인 명예욕은 시각과는 무관하게 나타나는 일반 현상인 것 같다. 명예심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 심층부에 도사리고 있는 본질적인 죄성의 하나이다. 뿐만 아니라 너구리 때려잡기 게임처럼 하나를 집어넣으면 다른 것이 튀어나오고 그것을 잡으려하면 또 다른 녀석이 고개를 내미는 게릴라성 욕구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에도 나는 멋진 글을 통해 내 자신을 내세우고 싶은 출렁이는 욕망의 파도 언저리에 노출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코스타 집회에 가서 간증설교나 세미나를 할 때에도 종종 이것이 내 자신을 내세우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에 두려움에 싸이기도 한다. 다른 강사들과 비교하여 더 잘하고 싶은 욕망이 생기기도 하고, 집회 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은혜를 받았다고 인사를 하면 내면의 파도가 더욱 거세어진다. (물론 감사하게도 그 욕망의 파도 뒤에 따라오는 은혜의 더 큰 파도가 있기에 이글을 계속 쓸 수 있으며 코스타에도 계속 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글을 쓰는 일이나, 학문을 연구하는 일, 설교를 하는 일, 연주를 하는 예술 활동 등의 본원적 가치를 무시하고 모두 명예욕을 위한 것으로 폄하해서는 안 된다. 여인의 아름다움 자체를 문제시 하는 것도 아니며 화장하는 여인들을 무조건 비판하는 꽉 막힌 사람도 아니다. 그 행위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를 하는 사람의 영적인 상태에 의해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게 단장한 여인의 순결한 모습 淡【?하나님이 허락하신 돕는 배필의 부드러운 손길을 느낄 수도 있다. 하나님의 강권하심의 은혜에 사로잡혀 눈물을 흘리며 글을 쓸 때도 있고, 학문의 깊은 경지에 도달하여 자연 세계에 편재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하고 기뻐할 때도 있으며,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가운데 나타나는 비전의 통로가 되는 설교가 있을 수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영성 깊은 연주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수시로 명예욕이라는 뿌리치기 힘든 함정에 쉽사리 빠져든다는 사실에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야 할까? 



(2)


명예심(Pride), 자랑(boast)은 스스로의 우월감을 남에게 드러내 보이고 싶은 욕망을 뜻한다. 그것이 심중에 있건 입이나 행동으로 표출되건 간에 인간은 그 유혹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는 악한 죄의 유혹에 빠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선악과로 우리를 유혹하던 사단의 말은 궁극적으로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창 3:5)”는 것이었고 우리는 그 함정에 깊이 빠져버렸다.


결국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 것은 유일하신 하나님을 부인하고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둘이 되실 수 없는 분이기에 가짜는 죽어야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죽는 것이다. 우리 안에서 꿈틀대는 스스로 높아지고자 하는 죄의 본성은 끊임없이 우리를 죽음 언저리로 몰고 간다. 그것을 우리는 교만이라고 부른다. 교만은 곧 죽음의 씨앗인 것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는 속담이 있다.
사람만이 자기 이름을 가진 존재이다. 종족의 이름뿐만 아니라 개별적인 이름을 가진 존재는 사람밖에 없다. 그것은 사람만이 인격적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이름은 인격적 관계가 형성되었을 때 비로소 발생하게 된다. 세계에 60억의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할지라도 그들은 모두 이름을 지니고 있다. 그 이름과 더불어 인생을 살아간다. 그리고 죽어서도 그 이름을 후손에게 남기는 것이다. 이름을 기억하고자 많은 민족이 조상의 묘소를 만들고 비석을 세우고 또한 족보를 통해 그 이름을 보존하기도 한다.


대학교 1학년 때 함께 다니던 동급생이 갑자기 죽은 일이 있었다. 출석을 부르던 교수가 그 학생의 사망 소식을 듣더니 무심하게 출석표에 자를 대고 그 이름을 두 줄로 지워버렸던 기억이 생생히 남아있다. 그것은 충격이었다. 그 순간부터 그는 더 이상 우리 가운데 없었으며 곧 기억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만큼 이름은 그 사람의 존재 자체이기도 하다. 인격체인 사람에게는 이름이 곧 자신이다. 이름이 사라지면 그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그 이름이 올라가면 그 자신이 올라가는 것이요 이름에 먹칠이 가해지면 그 사람의 존재 가치가 떨어지는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애완견을 키우는 사람이 개에게 이름을 붙여주는 것은 자신의 만족을 위해 그저 유사 인격성을 부여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해서 개가 사람처럼 자신의 이름을 자신의 존재와 동일시하지는 않는다. 어떤 동물도 죽은 이후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려고 하지 않는다. 오직 사람만이 자신의 이름을 남기려는 노력을 한다. 


남들 앞에 화려한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 사람들은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들을 많이 하는지? 명예욕에 휩싸인 인간들에 의해 수없이 발생하는 허위적인 행동들을 생각해보라. 명분과 이름을 중시하는 유교문화권의 영향으로 한국 사회는 더더욱 이 병이 깊다. 양반과 가문을 따지던 옛 습관이 요즈음은 뿌리 깊은 학벌사회로 변질되었고, 입신양명(立身揚名)이라는 말 뜻 그대로 사회적으로 명망이 있는 직업을 택하기 위해 가진 노력을 다한다. 마치 과거에 장원급제하던 시절처럼 사법고시에 청춘과 전 인생을 거는 법학도들, 학문을 위해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박사라는 타이틀을 얻기 위해서 안간 힘을 쓰는 그들이 법관이 되고 교수가 되었으니 사회가 온전할 리가 없다. 온갖 타이틀을 명함에 새기고 이력서에 한 줄 더 넣기 위해서 기를 쓰다보니 가짜 박사요 가짜 자격증이 난무한다.


이 현상은 크리스천 사회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아니 어쩌면 한 수 더 뜬다고 해야 옳지 않을지? 유교적 계급의식에 물든 한국인들에게 집사요 장로요 권사요 하는 타이틀 보다 매력적인 것은 없다. 그것을 자신의 이름 위에 붙여지는 타이틀이나 계급장으로 인식하여 사회적 존경이 뒤따라온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어릴 때 동네 골목에서 사카린을 녹여 만들어 먹던 뽑기와 같이 그것은 잠시 입안에서 달지라도 금세 부서지고 녹아 없어질 사이비 명예요 가짜 계급장일 뿐이다. 그 같은 명예욕의 연장선상에서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된 사람은 없을까? 교회 안에서도 높아지려는 경쟁심리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일부 교회와 교단에서 장로를 돈으로 사고 총회장 선거에 온갖 부정부패와 금품이 오간다는 것은 오히려 상식이 되어있다. 영적인 명예심은 세상적인 명예심보다 더 집요하고 끈질기다. 그것은 마귀의 집중적인 공격 대상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어떤 모습이든 우리를 성전 꼭대기에 세워놓고 뛰어내려 이목 집중을 받도록 유혹하는 것이다. 자신의 명예에 눈이 어두운 사람이 결코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없다는 것을 마귀는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온갖 감언이설로 우리를 성전 꼭대기로 몰고 간다. 뿐만 아니라 옆집 성전과 높이를 견주어보게 한다. 경쟁심을 부추겨 끝없는 질투심에 사로잡히게 하는 것이다. 


사촌이 밭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우리 속담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요즘 시대 같으면 완전 핵가족 시대가 되어서 도시화된 사회 속에서 사촌과 마주칠 일은 거의 없다. 오히려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생길만큼 사촌은 가까운 이웃만도 못한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옛날 농경 사회와 씨족 사회에서의 사촌의 의미는 가장 가까운 가족은 아닐지라도 적당히 가까운 그래서 매일 얼굴을 부딪치며 살 수 밖에 없는 오늘날의 이웃이나 직장 동료의 의미와도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이 잘 되는 것을 도무지 우리는 용납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후배가 더 높은 자리로 승진할지라도 만일 그의 전문성이나 실력이 객관적으로 인정이 된다면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서구사회와는 달리, 동료나 후배가 먼저 승진하면 옷을 벗고 나갈 수밖에 없는 일부 직업의 이상한 풍토는 우리 사회만이 지닌 악습 중 하나이다.


우리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멀리 있는 원수 국가의 국민들도 아니요 잔인무도한 테러리스트도 아니다. 일상 속에서 매일 부딪히는 동역자가 우리를 괴롭힌다. 그것도 한 부서나 한 팀에 속한 사람들, 그리고 바로 업무적으로 교통할 수밖에 없는 상사나 직속 부하가 가장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이다. 그 부딪힘 속에서 감추어져 있던 온갖 죄성이 다 튕겨져 나온다. 교만한 사람이 상사가 되면 온갖 비열한 방법으로 부하 직원을 착취하고 억누르려 한다. 그러나 설사 그렇지 않은 경우라 할지라도 이 싸움은 그치지 않는다. 상사가 호락호락해 보이면 상사의 권위를 도무지 인정하지 않으려는 아랫사람들의 교만이 이제 고개를 쳐든다. 상사의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고 온갖 덜미를 잡아 비판하지만 사실상 그들이 같은 위치에 오르면 한 수 더 뜨는 경우가 허다하다. 결국 그 같은 속성의 정체는 자신이 더 높아지기를 원하는 마음, 즉 사단이 넣어준 하나님이 되기까지는 쉼이 없는 교만이 그 본질인 것이다.


<디어 헌터>나 <하얀 전쟁>과 같은 전쟁 영화를 보면 전쟁터에서 진정한 인간성의 본질이 드러나며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 상태에 있는지 깨닫는다. 그 같은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사람들은 비로소 자신의 감추어진 연약한 죄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직장은 떡을 사이에 둔 전쟁터요 직장 동료들은 전우들이요 더러는 적군들이다. 그들을 통해 우리는 떡 앞에서 완전히 노출되어 벌거벗은 자신을 발견한다.


더러는 뭔가 큰일을 이루었다 싶은 사람이 나타나면 마귀는 주변 사람들의 입을 통해 칭찬하고 추켜세움으로써 내심 자신에 대한 우월감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그리고 시기가 무르익기를 기다려 마침내는 왕을 삼으려 한다. 세상의 왕이 되고 싶은 욕망은 도무지 뿌리치기 힘든 것임을 마귀는 잘 알고 있다. 대형 교회나 큰 선교 프로젝트를 통해 널리 알려지고 성공한 크리스천 리더 가운데 결국 이 유혹에 넘어가 말년에 실패하고 오명을 남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많은 경우 처음부터 자신이 왕으로 등극하려고 마음먹는 사람은 드물다. 처음에는 나폴레옹이나 박정희처럼 모두 자신에게 맡겨진 혁명과업만 완수하면 정권 이양을 하겠다고 약속을 한다. 실지로 그런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높아지려는 본성을 죄의 뿌리로 지닌 인간들에게 마귀는 달콤하게 집요하게 속삭인다. “너 아니면 이 일을 할 사람이 없어. 그냥 못이긴 체하고 그들의 말에 맡기라고.” 이런 상황에서 예수의 전술은 정말 단순하였다. 뿌리치고 달아난 것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목도한 무리들이 몰려들어 예수를 왕 삼으려 했을 때 예수는 삼십육계 줄행랑을 쳤다. “글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생각할 시간을 주시오.” 라고 말하든지, “아마도 나 보다 더 적합한 사람이 있을 겁니다. 사정이 급하시다면 적임자가 나타날 때까지만 제가…” 라고 한 다리를 걸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저 쏜살같이 달아난 것이다. 왕이 되고 싶은 욕망, 이 유혹은 예수가 달아나야할 정도로 심각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3)


A.W. 토저가 쓴 <예배인가 쇼인가!> 라는 책이 있다.(1) 그 책에서 토저는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조차도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쇼로 전락할 수 있음을 통렬하게 지적한다. 사람의 창조 목적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예배들이기 위함임을 설파하며 참 예배의 본질을 되찾는 방법을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예배를 드리는 강단에서조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영광을 위해 각색되는 온갖 문양(紋樣)들이 있다. 믿음 없이 드리는 카인의 예배와 모르는 것을 예배하는 사마리아인의 예배는 차치하더라도, 진정 알고 믿는다는 공동체에서 조차 온갖 부수적인 치장들이 십자가를 가려서 도무지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영광 받기에는 여유가 없는 교회가 대다수이다.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헌금, 자신을 나타내기위한 성가,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기 위한 설교, 교회의 이름을 내세우기 위한 선교와 구제……. 모든 것이 사람들의 이름을 내고 영광을 드러내는 것에 신경과 에너지가 집중된 교회에서 어떻게 참 예배가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일찍이 자신의 백성을 광야로 이끌어내신 이후, 참 예배의 본질을 알려주시기 위해 성막을 짓도록 명하셨다. 성막은 장차 오실 구속자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나타내는 모형이요 대속의 피로 구원을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함축적 가시적으로 담고 있는 신비의 구조물이었다. 성막 안에서 제사장에 의해 행해졌던 제사 행위는 그와 같은 구속의 원리를 반복적으로 깨우치기 위해 주어진 사랑과 교훈의 리허설이었다. 단번에 완전한 구원을 이루신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 성막과 제사의 형식은 폐하여졌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과 의미는 여전히 살아있다.


성막 문을 들어서면 그리스도의 고난의 십자가를 상징하는 피의 제단(alter)이 먼저 눈앞을 가로막는다. 제사장들은 몸을 씻고 옷과 성막의 모든 기구에 관유(anointing oil)를 뿌려 성결케 한 후 희생될 번제물을 안수하여 제단 앞에서 잡아 그 피를 단 사면에 바르고 나머지를 단 밑에 쏟은 후 단 위에서 불살랐다. 성막 안뜰을 오가며 더럽혀진 수족을 물두멍(laver)에서 깨끗이 씻은 후 비로소 성소(holy place)로 들어간다. 성소 안은 왼쪽에 놓인일곱 갈래의 금 촛대에서 나오는 휘황찬란한 빛에 의해 온통 황금으로 빛나고 있다. 바로 오른쪽에 놓인 상에는 열 두 조각의 떡이 여섯 개씩 두 줄로 나란히 놓여 있다. 이것이 진설병(showbread)이다. 이 떡을 먹은 후라야 비로소 지성소(the most holy place)의 휘장 바로 앞에 놓인 향단(alter of incense)에서 분향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매일 반복되는 수많은 제사는 여기서 멈추게 된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분향하는 것으로 상징되는 예배 행위, 그것을 위해 거쳐야할 단계 중에서 마지막 관문이 성소 안에 있는 진설병을 먹는 것이었다. 구약의 제사장은 이 진설병을 먹음으로써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있었다. 그렇다면 신약 시대의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름받은 성도들인 우리 역시 하나님 앞에서 참 예배자로 서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소 안의 진설병을 맛보아야만 한다. 과연 진설병이란 어떤 떡인가?


진설병, SHOWBREAD!
이 무슨 희한한 이름의 떡인가?
나는 무심코 영어 성경을 보다가 진설병이라는 단어가 showbread(2)라고 번역되어 있는 것에 착안하여 깊이 묵상하게 되었다.


보이기 위한 떡? 자랑하기 위한 떡?
도대체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떡이며 누구에게 자랑하기 위한 떡이란 말인가?


남을 의식하며, 사람들을 의식하며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 보이고 자신의 이름을 자랑하기에 급급하여 살아가던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서 가까이 나아갈 때, 하나님은 진설병을 먹으라고 명하신다. 이름하여 “자랑의 떡”이다.


그리스도를 만난다는 것은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어리석은 일이요 아무런 매력도 느낄 수 없는 것일 수도 있다. 이방신의 신전이 어마어마하고 화려한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것에 비하여 성막의 안뜰은 너저분한 흙바닥으로 노출되어 있어서 제사장은 날마다 물두멍에서 더럽혀진 자신의 수족을 씻지 않으면 안 되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며 떡의 전쟁터에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더럽히게 되는 그 상황과도 일치한다. 그러나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십자가의 상징인 피의 제단에서 속죄의 제사를 드려야 하며 그것을 통과한 이후 성소 안으로 들어가야만 하는 것이다. 


성막의 성소를 만든 재료는 외피가 붉은 물을 들인 수양의 가죽으로 되어있으며 그것을 우중충한 해달의 가죽으로 덧씌우고 있다.(3) 마치 겉으로는 아무런 흠모할 만한 점도 없이 세상 속에서 버린바 되었던 그리스도의 인성을 상징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성막 안은 온통 황금으로 장식되어 있어 휘장을 젖히고 들어가는 사람마다 황금 촛대에서 비추이는 황금빛 물결에 압도당하고 만다. 그 속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의 말씀으로 상징되는 진설병을 먹으라는 것이다.


예수와 만나는 장소, 성소! 그곳은 세상의 어떤 자랑도 소용이 없고 빛을 잃어버리는 곳이다. 오직 예수만을 자랑할 수밖에 없는 곳, 내 인생과 목숨과 모든 것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예수, 그 예수를 자랑하는 그 떡을 그곳에서 먹으라는 것이다. 그곳에서 어떻게 내 행위와 내 이름과 내 학벌과 내 직위와 내 믿음과 내 신학과 내 거룩함을 내세울 수 있단 말인가? “자랑의 떡 진설병을 먹으며 너희는 내 앞에서 한번 자랑해 보아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를 위해 내어준 내 아들 예수의 살을 먹는 너희들아! 진정 너희가 내 앞에서 자랑할 것이 있단 말이냐?” 그 자랑의 떡을 먹는 사람마다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자신의 자랑거리를 내던지며 통곡하고 오열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소리쳐 고백할 것이다. 예수 주여, 당신만이 내 인생의 자랑거리입니다. 나는 오직 당신만을 자랑합니다. 그 뜨거운 고백이 있은 후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바로 서게 되는 것이다.


예수는 우리를 성소 안에서 그렇게 뜨겁게 만나기를 원한다. 미지근한 신앙, 자기 자랑에 급급하고 세상의 휘장으로 십자가를 가려버린 라오디게아 교회에서 힘없이 살아가는 우리들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며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 3: 19)” 그리고 성전된 우리 마음의 성소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신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4)


예수와 더불어 먹는 떡, 진설병. 그 떡이야 말로 우리 인생의 자랑의 시작이요 끝이 되어야 한다.


세계 도처의 공동묘지에는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 죽은 수많은 사람들의 비석이 세워져있다. 그들이 살아있을 때 어떤 삶을 살았든지 그들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화려한 비석으로 치장한 사람이건 명성도 빛도 없이 무명으로 살다가 사라진 사람이건 사람은 비석에 이름을 남긴다. 그러나 비석에 남겨진 이름에는 아무런 자랑도 의미가 없다. 더 이상 그것은 죽은 자의 자랑이 될 수 없다. 우리 이름이 기록되어 영원히 남게 될 자랑거리는 생명책에 적혀진 이름과 우리가 인생을 사는 동안 얼마나 많이 예수와 더불어 진설병을 나누었는가 하는 그 행위가 적힌 그 이름이 될 것이다.(계 21:12)





(1) A. W. Tozer, 예배인가 쇼인가, 규장, 2004
(2) KJV, NKJV 및 ASV 등 여러 성경 번역에서 진설병을 showbread로 번역하고 있다.
(3) M. R 디한은 그의 저서 <성막(tabernacle)>에서 성막의 신비한 구조와 상징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4) 이 말씀은 본질적으로 미지근한 신앙을 가진 성도들을 향하여 주신 말씀으로 보는 것이 바른 해석이다. 흔히 오해하는 것처럼 아직 예수를 영접치 못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들어가시기를 원하여 문을 두드리는 장면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