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지성] 요셉이 가정 이야기 그리고 그 후기

2003년 7월 12일에쓴 간증서신

구자신 형제와 황윤희 자매 그리고 요셉이 가정에 대한 사랑에 감사드리며

미국 코스타 황지성 간사가 존경하는 믿음의 동역자님들과 선배님들께 올리는 감사의 편지.

코스타집회를 통하여 많은 헌신과 수고로 함께 해주셨고 요셉이 가정, 구자신 형제와 황윤희 자매의 가정에 일어난 사고에 대해 기도해 주시고 사랑을 보여주신 여러 믿음의 선배님들과 동역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이 서신을 올리면서도 마음에 부담이 되는 것은 지난
일년동안 코스타를 섬기는 간사님들 가정가운데 두 가정이 사랑하는 자녀들을 천국으로 보내야 하셨던 일에 대하여 또 캔사스에서
코스타에 등록했던 한 자매가 교통사고로 소천한 사건에 저 자신 마음을 다해 같이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후회와 저 자신 사랑으로
그 어려움들에 함께하지 못한 것에 대한 회개가 제 마음가운데 있음을 고백합니다.

구자신 형제님 가정에 사고가 난 후 벌써 두 주가
지났지만 몇 개월이 지난 것 같은 느낌입니다. 처음에는 매우 혼란스럽고 당혹스러웠지만 시간이 가면서 조금씩 큰 그림의 조그만
퍼즐조각들이 맞추어지는 것 같습니다. 한 가정의 고통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이 엄청난 고통가운데에서도 세상속의
그리스도인의 순결한 모습을 보여주신 구자신 형제님의 믿음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은 깊은 감동이 있어서 이렇게 보고서를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의 기도와 격려속에서 구 자신형제님 가족은 이제
영육간에 빠르게 회복되어가고 있습니다. 황윤희 자매 (요셉이 어머니)는 며칠 전부터 글로 자기 의사표현을 할 정도로 많이
회복되었습니다. 아직은 몇주동안 더 치료를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7월 15일 화요일 12시에 구자신 형제와 황윤희 자매그리고
둘째 아이 송아는 인디아나 Elkhart General Hospital에서 Washington DC의 George
Washington University Hospital로 옮겨질 것입니다.

이제 그 주간에 일어났던 일에 대하여 간단한 보고를 드립니다.

6월 30일 월요일

사고는 6월 30일 월요일 정오경에 Indiana
Toll Road에 일차선으로 주행하던 자동차에는 운전하시던 황윤희자매, 앞자리에 구자신 형제, 뒷자리에는 본겸이 (14살)
요셉이 (5살) 그리고 세번째, 맨 뒷자리에는 송아(8살) 그렇게 타고 있었습니다. 코스타 장소로부터 거리가 약 3시간 정도
떨어져있어 긴장이 약간은 풀어져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92번 Exit근처에서 2차선으로 달리던 트레일러 한 대가 갑자기
차선을 바꾸어 일차선으로 들어왔답니다. 그리고 윤희자매는 급히 핸들을 중앙선 쪽으로 틀고 그 순간 자동차는 중앙분리대 지역을
넘어 건너편 하이웨이로 치솟아 떨어지면서 수 차례 회전한 것으로 알려집니다. 그 때에 충격으로 몸이 비교적 작은 요셉이는 차
안에서 튕겨져 나오면서 땅에 머리를 부딪쳤습니다. 다른 가족들은 구르는 차 안에 갇혀있었고 다행히 반대편에서 오는 차량들이
없어서 더 큰 사고를 모면했습니다. 큰 아들 본겸이는 순간적으로 차에서 나와 건너편에서 오는 차량을 수신호로 막은 후에 가족들을
아버지와 송아를 차 안에서 끄집어 내었고 엄마는 너무 심하게 다쳐있어 운전석에서 끌어낼 수가 없었답니다. 그리고는 먼 발치에
튕겨져 나가있는 요셉이를 찾아내었습니다.

볼티모어 갈보리교회 노진준 목사님께서 불과 몇분 사이로
사고 현장을 포착하셨고 그래서 병원까지 가셔서 도움을 주실 수 있었던 일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의 세심한 도우심이 있었습니다. 우선
본겸이는 검사결과, 하나도 다친 부분이 없이 불과 몇시간 후에 노진준 목사님께서 코스타로 데리고 오실 수 있었습니다. 김만풍
목사님과 제가 코스타로부터 병원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약 5시였습니다. 가족들 모두 수술중에 있었고 윤희자매는 큰 수술중이어서
그날 저녁 늦게 되어서야 볼 수가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불확실했기 때문에 기도로 매달려야만 했습니다.

그날 밤에 중환자실에서본 황윤희자매는 거의
절망적이었습니다. 풍선과 같이 크게 부어오른 얼굴은 누구인지 알아보기가 힘들었고 의식도 없는듯 했습니다. 구자신 형제는 오른쪽
발뼈들이 흩어져서 뼈를 맞추는 수술을 해야 했습니다. 송아는 허벅지 뼈가 부러져 여섯개의 금속핀을 허벅지 뼈에 박는 대 수술을
하고 있었습니다. 막내아들 요셉이는 병원으로 왔다가 상태가 매우 나빴기 때문에 Elkhart에서 약 두시간 떨어진 Fort
Wayne으로 헬리콥터로 옮겨져야 했습니다.

화요일

초조한 몇 시간이 지난 후, 화요일 새벽 1시경에
Fort Wayne 중환자 실에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요셉이의 뇌 기능이 점점 약해져 간다는 소식이었고 만일 심장박동이 멎을
경우 CPR을 하겠느냐는 질문을 아버지인 구자신형제님께 묻는 내용이었습니다. 말도 안되는 질문이었습니다. 구형제님과 저는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새벽녘에는 절망적인 전화가 다시 걸려왔습니다. 요셉이의 뇌사가 임박했으니 마음의 준비와
그리고 기계에 의지해서 심장을 뛰게 만드는 인공호흡기를 만일의 경우 계속 유지시킬 지 아니면 떼어낼 지를 결정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우리는 Elkhart병원의 Chaplin David Hudson목사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그에게
그렇게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는 기적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지금 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기도하고 있고 분명 하나님께서
회생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놀랍고 감동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저의 기도는 더욱 간절했습니다. 구자신 형제님께서 요셉이의 출생에 관해 숨기셨던 사실을 제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요셉이는 너무도 특별한 아이라서 하나님께서 꼭 살려주셔야 합니다. 그 아이는 원래 제 아이가 아닙니다. 요셉이
엄마는 이 아이를 낳다가 낳은 날 병원에서 죽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데려다가 친아들로 삼고 기르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때에
이렇게 해서 이 가정에 들어오게 된 이 아이는 반드시 살려주실 것으로 믿고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감출
사실이라기보다는 우리 모두가 알고 함께해야 할 일이기에 구 형제님과 어제 전화를 통해 여러분들에게 밝혀도 좋다는 승락을
얻었습니다.)

그날 오전에, 우리 모두의 기도의 힘으로 윤희자매의
회복이 빠르게 감지되었습니다. 중환자실에 들어가 지금 의식이 있고 내가 누구인지 아시면 발가락을 움직여보라는 말에 오른쪽
발가락끝이 약간 움직였습니다! 정말 기적과 같은 순간이었습니다. 간호사들 모두 같이 기뻐해주었습니다. 구형제님도 너무나 기뻐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러나 오후 한시경에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요셉이의 뇌사판정이 난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심장은
인공호흡기에 의해 뛰고 있다고 알려왔습니다. 병원측에서는 한가지 요청을 하였습니다. 비록 뇌의 기능은 온전히 정지되어있지만
장기의 기능들은 아직 살아있으니 장기기증을 하면 어떻겠냐는 제안이었습니다. 구형제님은 한동안 기도하시면서 마음의 평안을 얻고
장기기증을 결정하였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결정이었습니다. 마지막까지 요셉이를 회생시켜주실 기적을 기대하고 더 버티든가 아니면
지금 당장 장기를 이식하면 살 수 있는 두 세명의 아이(사람)들을 살리느냐 하는 정말 숨가쁜 결정이었습니다. 장기기증을
수락했지만 사랑하는 아들을 마지막으로 보내는 아버지에게 한 가지 요청이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아이를 한번 보고싶다는
요청이었습니다. 구형제님의 건강상태도 그다지 좋은 상황이 아니었기에 Case Manager는 강력히 반대를 했습니다. 아마도
환자의 liability문제가 심각한 우려로 대두되었던 같습니다. 그러자 아빠는 요셉이에게 전화를 걸어 귀에 대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미 뇌사판정을 받은 아이라서 들을 수 없는 상황이라고 그쪽 병원에서는 말했지만 우리는 마지막으로 아버지가
아이들에게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열어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스피커폰이 연결되었습니다. 구형제님의 마지막
전화내용은 이랬습니다. “요셉아 아빠가 정말 너에게 잘 대해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하다. 하지만 너는 이제 네 친엄마를 만날 수
있어서 너무 좋겠구나. 그리고 예수님도 만나고… 이제 하나님 앞에 가면서 이렇게 기도하자. 너를 살리려고 그렇게 애썼을 그 병원
간호사들하고 의사선생님들에게 감사하자. 그리고 이 병원과 네가 있는 그 병원이 하나님 앞에 쓰임받는 병원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자. 요셉아 잘가라. 이제 다시 곧 만나자…” 저는 이 기도를 하고 있는 구형제님 옆에서 오열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원망스럽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이 어려운 상황에서 병원을 축복하고 있는 구형제님의 마음이 너무 아름다워서 울었습니다. 전화를
끊고 잠시 후에 제가 그 병실에 모여있는 간호사들과 case manager에게 말했습니다. 이 아빠가 무슨 기도를 했는 줄
아느냐고, 이 어려운 순간에 당신들을 축복했노라고… 모든 사람이 다 울고 있었습니다.

잠시후 복도에서 짤막한 회의가 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case manager가 병실로 돌아와서는, “OK. Mr. Koo, we decided to let you go.”
그리고는 앰뷸런스를 병원측에서 준비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하나님의 감동하심이 있었습니다. 수간호사 Bobbie는 진통제와
약들을 챙기고 앰뷸런스안에 모든 모니터 기구들을 싣게 했습니다. 구형제님을 싣고 paramedic 팀과 저와 수간호사 가
앰뷸런스 에 타고 장장 두시간 거리에 있는 Fort Wayne의 Parkview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그 시간에 김만풍
목사님과 민동식형제님은 그 병원으로 오시게 되었고 그 병원에서 우리는 저녁 8시경에 아직도 심장이 뛰고 체온이 따뜻한 요셉이의
얼굴과 몸들 만져 볼 수 있었습니다.. 이미 사망판정이 난 요셉이, 그러나 다시 살아날 것만 같았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다면… 아직도 체온은 따뜻한데… 김만풍 목사님의 집례로, 요셉이의 손을 잡고 임종예배를 드렸습니다. 끓어오르는 슬픔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임종예배가 끝나고 이제 장기기증을 하는 절차를 밟는
도중에 저는 한국에서 오실 요셉이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이모의 비자문제로 병실 전화통화를 통해 한국에 여기저기 통화를 해야만
했습니다. 요즘같이 비자가 까다로운 시절에 어떻게 비자를 빨리 받을 수 있게 될까 난감했습니다. 그런데 전화통을 붙잡고 여기
저기 전화를 하는 도중에 그 병원 간호사가 저에게 찾아왔습니다.. “I have a good news. I found out
that our deputy surgeon general’s wife and daughter are donating their
organs now here at this hospital. We probably can ask him for some
help…” 놀랍게도 그 분, deputy surgeon general은 한국주재 미 대사관과 워싱턴 homeland
security 에 보낼 편지를 즉석에서 써주시게 되었고,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한국에서 오시는 분들이 6시간만에 10년짜리
비자를 받게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하시는 은혜였습니다.

병원으로 돌아오는 길은 착잡했습니다. 제 손에는
요셉이가 기증하기로 되어있는 장기의 목록을 담은 영수증이 들려있었습니다. 병원으로 돌아온 구형제님과 저는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낸것 같습니다. 수요일 새벽녘에 안구, 신장, 심장, 신장, 이자, 간등을 포함한 장기제거 수술이 끝났다는 전화연락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일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마음 한구석에 요셉이가 다살지 못한 삶을
그 장기를 받은 아이들이 살아드릴 수만 있다면, 그래서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람으로 그들이 살아드릴 수만 있다면 좋겠다는 기도를
구형제님의 손을 붙잡고 같이 드렸습니다.

수요일

수요일은 요셉이 엄마 황윤희 자매에게 조금씩 회복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지만 별다른 진전은 없었습니다. 요셉이의 몸을 버지니아 알링톤 funeral home으로 이송하기로 조치해
놓고 수요일 밤에 잠깐 짬을 내어 오헤어 공항에서 아내를 픽업하여 휘튼에 돌아왔습니다.

목요일

목요일 아침에 휘튼에서 다시 병원으로 떠나기 전에
몇분의 강사님들이 저에게 요청하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집회중에 요셉이 가정을 위해 계속 기도하고 있었고 궁금해 하니 짤막한
리포트를 아침집회때 해달라는 요청이셨습니다. 아침 집회중간에 잠깐 나가서 하나님께서 요셉이를 불러가신 일을 보고했습니다. 이
보고를 하게 하신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습니다. 제가 보고를 마치고 떠나는 참에 두 분이 저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지금 요셉이네
가족이 있는 병원근처의 은혜침례교회 나창옥목사님과 노틀담대학에서 연구교수로 일하시는 천성창형제님이셨습니다. 천형제님께서는 이제
곧 한국에서 오실 요셉이 할아버지 할머니 이모가 묵으실 숙소로 자기 집을 내주셨습니다. 나목사님은 또한 제가 토요일 매릴랜드로
떠난 후에 요셉이 가족을 돌봐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예비하심이었습니다.

목요일 점심때쯤 휘튼으로부터 제 아내와 구 형제님
큰아들 본겸이를 데리고 병원으로 돌아왔습니다. 중환자실에 있는 윤희자매를 찾았습니다. 입으로 반경 1인치 정도의 튜브를 폐까지
깊게 박아서 산소 호흡기로 호흡을 하고 있었고 자매는 입과 목의 통증으로 매우 고통스러워 보였습니다. 얼굴의 붓기는 많이
가라앉았지만 정말 의식이 온전히 돌와왔는지는 미지수였습니다. 본겸이를 침대 왼쪽에, 휠체어에 앉은 딸아이 송아를 오른쯕에 가게
하고 손을 잡게 했습니다. 그리고 윤희자매가 평소에 좋아하던 찬양 “주만 바라볼지라” 찬양곡 씨디를 틀고 구형제님과 함께 같이
모두 찬양을 했습니다. 찬양을 한참 하는 중에 병실 분위기가 이상해짐을 느꼈습니다. 저는 병실 구석에 서서 이를 지켜보는
간호사들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간호사들의 얼굴에 눈물이 흐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의 얼굴에 기쁨의 미소가 있는 것을 보고
윤희자매를 바라보는 순간 그 튜브를 박은 입의 입술이 찬양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매는 찬양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두가 뛸뜻이 기뻐했습니다. 그때부터 자매의 건강은 급격히 호전되기 작했습니다. 성령님의 역사하심이었습니다!

금요일

금요일 저녁 병원을 떠날때 Bobbie를 포함한 많은
간호사들이 다가와서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감격적인 말들을 저에게 해주었습니다. “We are so honored
to have the family with us. We are seeing God’s hands through their
witnessing.” 그리고 한 간호사는 저에게 물었습니다. 당신들이 믿는 것은 무엇이냐고. 예수 그리스도 그분 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구형제님의 기도를 통해 이미 그 병원은 변화되고 있었습니다. 저도 이 가정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예비하심을 제
눈으로 볼 수 있었음이 엄청난 축복이었습니다.

7월 12일 현재

어제는 구형제님이 전화에 그러시더군요. 요셉이 그놈만
아니었다면… 그러나 이번 일은 형제님 가정에 엄청난 축복이라고요… 요셉이가 우리 대신 갔다고, 마치 예수님처럼…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거라고 하시더군요. 윤희자매는 이제 눈도 뜨고 글씨도 쓰고 한답니다. 어제밤에는 전화도
직접받고 작은 소리로 이야기도 했습니다. 놀라운 회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아직도 확실히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는것이
안타깝습니다. 아마도 영적인 눈이 어두워서이겠지요… 아직도 가슴아픈 것은 요셉이 엄마는 요셉이가 천국에 간 사실을 아직은
모르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구형제님이 그러시는데, 윤희자매가 정신이 좀 돌아오면서, 며칠 전에 요셉이가 요셉이
친엄마와 천국에 있는 광경을 보았다고 했답니다. 이 부분을 갖고 계속 기도했는데 아마도 하나님께서 충격이 크지 않도록 미리
준비를 시켜주시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여하튼 이 소식을 곧 알려야 하는데, 충격이 크지 않아서 자매의 회복에 지장이 없도록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요셉이네 가족을 위한 기도제목을 몇가지 적으며 이 서신을 마감하려고 합니다.

1. 요셉이 아빠가 기도하신대로 Elkhart
General Hospital 과 Fort Wayne Parkview Hospital이 환자들의 육체뿐만 아니라 영적 치료도 할
수 있는 병원으로 하나님께서 쓰시도록 병원전체의 복음화와 병원의 사역을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2. 요셉이의 장기를 받은 사람들이 건강하게 자라 하나님의 일꾼으로 이 세상을 치유하는 서번트 리더들이 되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3. 이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사람의 지혜와
계획이 아닌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온전히 드러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아빠 구자신 형제님과 엄마 황윤희 자매님의 소명이
확실히 확인되어지고 그들의 삶이 아름답게 드려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아빠의 전공(microbiology)와 엄마의
전공(성악, soprano)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려지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그러나 혹 이 전공과 다른 소명을 주신다면 그
소명이 확인되어지고 하나님께서 나머지 인생의 길을 인도해주실 것을 믿고 나갈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4. 큰 아들 본겸이와 딸 송아의 마음속에 상처가 남지않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5. 윤희자매가 요셉이 소식을 들었을 때에 큰 충격없이 이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6. 모든 재정적인 문제가 잘 해결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7. 이번 금요일과 토요일에 있을 장례예배가 신령과 진정의 예배가 되고 이 예배를 통해 구원받는 사람들이있을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계속적인 기도와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황지성 드림

2003년 7월 12일에

2003년 8월 1일에 이 글에 덧붙이는 소식

여러 믿음의 동역자님들과 선배님들의 기도와 격려에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알려드린 대로 지난 7월 18일 19일에 요셉이 장례를
잘 마쳤습니다. 지구촌교회 성도님들을 비롯하여 많은 코스탄들과 그리고 지역의 목사님들과 성도님들도 많이 참석하셔서 기도해
주셨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장례식이었습니다. 천국의 소망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습니다.

요셉이 어머니께는 요셉이의 장례소식을 고별예배가 있던
금요일의 하루 전날, 목요일 오후에 조지타운 병실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사고 후 모든 사실을 남김없이 알려드렸습니다. 매우 힘든
시간이었지만 , 여러분들의 간절한 기도덕분에, 김만풍 목사님과 함께 기도하면서,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 같이 이야기 나누면서 그
슬픔을 이길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힘든 몸이었지만 그래도 장례예배에 가족 모두가 같이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기적이었습니다.
장례식이 끝나자 마자 요셉이 엄마아빠는 곧바로 병원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휠체어에 앉아서 매우 연약한 육체로 참석했던 요셉이
엄마였지만 참석한 사람들 모두가 마지막 찬양으로 “주만 바라볼지라”를 이 가족을 향해 불러 드릴 때 하나님의 위로가
함께하셨습니다.

토요일은 화창한 날씨를 주셨습니다. 이진석 목사님의
집례로 발인예배후에 곧바로 장지로 떠나 요셉이를 땅에 묻었습니다. 고상환 목사님의 집례로 하관예배가 있었고 참석한 사람들이
마지막 헌화를 하면서 장례식은 그렇게 아름답게 끝났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며칠 전에는 요셉이의 장기를 기증받은 사람들에 대한
정보를 알리는 간단한 편지가 미국 장기 기증협회이름으로 날아왔습니다. 요셉이의 간을 이식받은 아이는 미시간에 사는 10살난
남자아이로, Frank라는 거북이를 갖고 있다고 합니다. 또, 신장을 받은 사람은 인디아나에 사는 수영과 음악을 좋아하는
28세된 청년이었다고 합니다. 다른 장기들은 장기은행에 보관되어, 추후에 필요한 사람들에게 부분적으로 혹은 전체적으로 기증될
가능성이 있다고 합니다. 이 제 이 장기기증을 받은 위의 두 사람들이, 이름은 모르지만, 건강하게 회복되어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요셉이 가족 모두가 퇴원하셔서 집에 계십니다.
조용히 그리고 서서히 회복되어가는 가정을 옆에서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이 가정을 향한 기름부으심이 가슴 설레도록
기대됩니다. 요셉이 어머님은 아직은 누워계시지만 날이 갈수록 좋아지고 계시고 그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가득하신 것이
너무나도 감사할 뿐입니다..

혹 요셉이 가정에 직접 연락을 원하시는 분들은 아래의 주소나 이메일로 연락하시면 되겠습니다.

Jashin Koo
15608 Marathon Circle #104
Giathersburg, MD 20878
jashin1028@yahoo.co.kr

다시 한번 여러 믿음의 동역자들과 선배님들께 마음으로부터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메릴랜드에서 황지성 드림

요셉이의 하늘

요셉이의 하늘:
촬영 : 민동식 , 2003년 6월 30일 저녁 8시경
Elkhart, Indiana

[황지성] 순종으로 회복되는 위로

순종과 회복

순종으로 회복되는 위로

지난 9월 19일, 911 참사 일주기를 맞는 시점에서 그의 Opera <Nixon in China> 로 잘 알려진 John Adams는 2002-2003 개막시즌 연주곡으로 뉴욕 필하모니를 통하여 그의 새 작품 <On The Transmigration of Souls>를 선보였다.

이 작품은 911참사의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만든 것으로, 고전적인 쟝르의 음악과는 달리, 희생자들의 이름들이 그들의 유가족들이나 친구들에 의해 읽혀지는 목소리, 도심 속의 여러 잡음들, 실종자들을 찾는 메모들을 가사로 해서 만들어진 합창곡들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을 들으면, 여객기가 타워에 부딪힌 직후 그 충격적인 순간의 혼돈감과 그 빌딩의 깨어진 창문들로부터 흩어져 내리는 수 많은 사람들의 아픔이 숨막히게 다가온다. 그 작품의 제목이 시사하는 이교도적인 냄새는 일단 뒤로 하고, 사람들은 그의 이 작품이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적지 않은 위로가 되어 주었다고 말하고 있다. 많은 말들과 소리들의 원래의 의미가 현대적 매체들의 조작과 이기적인 상황화의 논리들 속에서 왜곡되어지는 이 때에, 그 소리들을 낸 사람들의 본래의 마음들이 그 작품에 그대로 표현되어졌다고 말하고 있다. 사람들은 또한 오랜만에 예술이라는 매체가 한 중요한 역사적 사건 속에 녹아 있는, 사람들의 진실을 보여주기 위해 쓰여지는 것을 보는 신선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올 연초에, John Adams 가 처음 그 작품의 작곡에 대한 요청을 받았을 때에 그의 심정이 어떠했는가에 대해 빌보드잡지의 기자가 묻는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대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Although I had absolutely no intention of writing such a piece, the day the request came through I knew immediately that I not only wanted to do the piece but that I should do it.” 그리고 작품을 완성한 후에 그는 다시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 “… and I have done my best to create a piece that honors those emotions without exploiting them.” 적어도 우리는 그에게서, 자신의 실험정신을 표현하는데에 그 작품을 이용하기보다는 사람들의 고통을 꾸밈없이 표현하려고 하는 노력으로 그 작품을 썼다는 그 “compassion”의 마음을 배워야 한다. 그의 이 “compassion”의 마음은 제쳐 두고라도, 사람들의 소리를 왜곡없이 있는 그대로 표현해 줄 수 있었다는 것 자체로도 많은 사람들이 적지 않은 위로를 받았다는 사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어떠한가? 사실 우리는 자기 자신이 좀 성숙한 믿음을 가졌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고통받는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자신감 같은 것을 갖기 시작한다. 그에게 충고와 조언을 해줌으로써 그 사람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에 사로잡히고 마는 성향이 있다. 그런데 막상 사람들이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고통으로 인해 믿음의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한 의심을 제기할 때에, 정말 같은 마음(compassionate heart)으로 그 고통의 깊이를 이해하려 하기보다는 상대방의 마음을 찢어놓는 충고와 경망스러운 조언으로 그들의 마음을 아주 닫히게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소위 “유명한” 상담전문가들의 강의를 듣게 되는 경우, 정말 당혹감을 느끼는 경우가 종종 있다. 대개 상담전문가들의 강의에서 많이 들을 수 있는 것이 그들의 상담사례들인데, 심각한 문제들을 갖고 찾아왔던 내담자의 문제들을 소개하는 그의 마음 속에 내담자의 고통을 이해하려는 깊은 위로의 마음이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순간 당혹감을 넘어서 분노의 감정까지 갖게 되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심지어 어떤 “전문가”들은 내담자들의 삶의 부족한 점들을 들추어 내어 강의에 온 사람들에게 어떤 교훈을 주려는 것을 목적으로 강의를 진행해 나간다.

이것은 예수님의 방법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태도이다. 누가복음 7장18-30절까지의 말씀은 의심에 사로잡힌 한 인간에 대한 우리 주님의 마음이 어떠했는가를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다. 침(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다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감옥에 갇혀 곧 죽게 될 것을 느끼면서 그는 정말 예수라는 인물이 메시야이신가를 확인하고 싶어졌다. 아마도 그의 이러한 답답한 심정은 자신의 겪고 있는 상황이 과거 수 세기 동안 유대왕국의 역사 속에서 펼쳐졌던, 선지자와 왕의 관계에서 진행된 보편적인 상황과는 사뭇 다른 양상으로 펼쳐지고 있는 것에 대한 당혹감에 근거했을 가능성이 많다. 헤롯에 대한 정직한 예언의 소리에 정치지도자가 심판받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사람인 자신이 무기력한 자리로 묶여져 이제 곧 죽음을 앞두게 된 상황에서 이러한 “의심”은 선지자이기 이전에 한 인간이었던 요한에 있어서도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요한이라는 인물에 대한 주님의 평가는 이러한 그의 의심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으신 것을 발견하게 된다. 요한이 보낸 사람들이 돌아간 후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요한이 얼마나 위대한 인물인가를 다시 한번 상기시키셨다. 주님은 고난 속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극한 상황의 요한이 충분히 그러한 의심을 가질 수 있음을 깊이 이해하셨다. 그리고 그의 고통의 깊이를 같이 느끼셨다. 우리는 마태복음 4장12절부터 기록된 주님의 삶을 보면서 요한의 죽음 이후에 주님께서는 그에 대한 더 깊은 “compassion”을 갖게 되셨음을 느낄 수 있다. 요한의 죽음을 들으신 후, 갈릴리로 가셨다가 자라났던 정든 고향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으로 가서 사시기로 작정하시고 (12-13)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18)…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23)…. 극심한 고난을 받고 죽은 믿음의 동역자이며 형제인 침(세)례 요한에 대한 주님의 깊은 “compassion”으로 인한 감정의 교차가 주님의, 마치 방황하시는 듯한 다니심으로 나타났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거룩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이신 주님에게 있어서 이 사랑의 마음은 “compassion”을 넘어서, 인간의 연약한 모습을 그대로 받아주시는, 오히려 관용이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마음을 닮는 “compassion”의 마음은 철저한 자기 부인과, 연약한 사람을 향해서 마땅히 취해야 할 자기 권리를 포기하는 마음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성숙한 믿음의 선배, 사도바울의 노년의 삶에서도 이와같은 위로와 관용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지난 날에 치명적인 잘못을 저지른 형제를 공동체 안에서 다시 세우기 위해 애쓰는 아름다은 삶의 모습을 우리는 그가 옥중에서 쓴 서신, 빌레몬서를 통해 잘 엿볼 수 있다. 성경에 암시된 대로, 아마도 막대한 금전적인 손해를 끼치고 그의 주인 빌레몬에게로부터 도망친 오네시모가 믿음의 공동체에게, 특히 그의 옛주인 빌레몬에게 다시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혼신의 힘을 다해 노력하고 있는 바울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보내는 그의 편지에서, 오네시모를 관용으로 받아줄 뿐만 아니라 이제는 종이 아닌 동역자로서 그 옛종 오네시모를 받아줄 것을 강력하게 권면하고 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 오네시모와 빌레몬의 관계가 회복되어야하는 이유가 오히려 바울 자신의 영혼이 새롭게 되는 큰 위로를 경험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데에 있다. 다시 말하면, 바울 자신의 영혼이 오네시모와 빌레몬의 깨어진 관계로 인해 그동안 정말 깊은 고통 가운데에 있었다는 고백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위로자는 자기 자신이 위로해야 할 사람을 위로하는 삶을 넘어서서 세상사람들이 서로 위로할 수 있는 자리로 갈 때 그 회복되는 삶의 모습들을 보고 스스로가 위로를 경험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한편 바울은 빌레몬에게 있어서 이 관용과 위로의 과정이 자기 의지를 복종시켜 순종해야 할 과정임을 알고 있기에, 빌레몬을 향해서 다시 한번 순종하라는 권면을 하고 있는 것이다(21절).

4 I thank my God always, making mention of you in my prayers, 5 because I hear of your love and of the faith which you have toward the Lord Jesus and toward all the saints; 6 and I pray that the fellowship of your faith may become effective through the knowledge of every good thing which is in you for Christ’s sake. 7 For I have come to have much joy and comfort in your love, because the hearts of the saints have been refreshed through you, brother. 8 Therefore, though I have enough confidence in Christ to order you to do what is proper, 9 yet for love’s sake I rather appeal to you–since I am such a person as Paul, the aged, and now also a prisoner of Christ Jesus– 10 I appeal to you for my child Onesimus, whom I have begotten in my imprisonment, 11 who formerly was useless to you, but now is useful both to you and to me. 12 I have sent him back to you in person, that is, sending my very heart, 13 whom I wished to keep with me, so that on your behalf he might minister to me in my imprisonment for the gospel; 14 but without your consent I did not want to do anything, so that your goodness would not be, in effect, by compulsion but of your own free will. 15 For perhaps he was for this reason separated from you for a while, that you would have him back forever, 16 no longer as a slave, but more than a slave, a beloved brother, especially to me, but how much more to you, both in the flesh and in the Lord. 17 If then you regard me a partner, accept him as you would me. 18 But if he has wronged you in any way or owes you anything, charge that to my account; 19 I, Paul, am writing this with my own hand, I will repay it (not to mention to you that you owe to me even your own self as well). 20 Yes, brother, let me benefit from you in the Lord; refresh my heart in Christ. 21 Having confidence in your obedience, I write to you, since I know that you will do even more than what I say.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복하면 그 허물을 전혀 기억하시지 않는 분이시며 또한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에 같이 마음 아파하시는 아버지 이시기에 그의 자녀된 우리도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따라 서로 위로하는 삶을 살아드리는 것이 마땅하다. 또한 세상의 깨어진 관계들을 볼 때에 같이 마음 아파하고 그 관계들이 회복될 때에 기뻐하는 평화의 자녀들로 살아드릴 수 있도록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

작년 이맘 때, 911 사건이 지난 약 1주일 후, 직장 동료로부터 한 이메일이 포워드되어 날아왔다. 날아온 이메일에는 그림 하나가 어태치되어 있었다. 펜실바니아의 Bouwd라는 한 어린이가 그린 그림…. 그 빌딩 안에 있었을 많은 사람들, 그리고 그 안에 있었을 하나님의 아들들과 딸들, 그러나 애타게 바라보기만 해야했던 그들의 가족들, 그들도 왜 이런 고통을 당해야 했을까? 과연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는가? 이런 질문들을 들으며 마음이 착잡한 나에게 이 그림은 진정한 위로자 예수 그리스도의 눈물과 사랑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메시지였다. 그 고통의 현장 가운데에서도 보이지 않는 손길로 함께 하셨던 주님의 위로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메시지였다.

911참사를 제쳐 두고라도,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촌 곳곳에서는 911사건과 버금가는 비극들이 일어나고 있다. 매일 설사로 죽어가는 1,4000명의 영아들, 매일 폐렴으로 죽어가는 7,500명의 어린이들, 15억의 무숙자들, 인권탄압으로 갖혀 있는 80만의 사람들, 6천만명의 고아들, 인종청소전쟁으로 어제밤에 학살당한 마을, 이름도 없이 죽어가는 수백만명의 낙태아들…. 이 지구촌의 죄악 속에서 우리 하나님은 매일 울고 계시고 같이 고통받고 계신다. 그리고 말씀하신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가 사는 그 곳에서 고치고 위로하라고.

(필자 주) 한국 선교 정보 원구원 http://www.krim.org 의 자료실에 가시면 지금 지구촌의 많은 사람들이 어떤 고통 가운데에 있는가를 자료 속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지구촌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같이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황지성] 순종으로 회복되는 예배

순종과 회복


순종으로 회복되는 예배


조지 바나 연구소의 보고에 의하면,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 태어난 세대, 소위 베이비부머들이 중년의 나이에 들면서 기독교인이 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한 세대가 채 지나기도 전에 이들이 다시 교회를 떠나고 있다고 한다.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내세운 가장 큰 이유는, 교회들이 첨단 문화적 장비를 위해서는 막대한 예산을 투자함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담아져야할 복음의 메시지를 담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복음의 메시지를 듣기 위해 교회에 나왔지만 강단에서는 복음이 선포되지 않고, 삶을 투자할 만한 가치를 발견하기 위해서 교회에 나왔지만 리더십들은 그것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뼈아픈 지적이었다.


기독교 인구의 이러한 감소는, 비록 양상은 어느 정도 다를 지 몰라도, 이와 거의 비슷한 이유, 즉 강단에서의 복음선포의 약화와 리더십의 질적 저하로 인해 지금의 한국교회 내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다. 이러한 기독교인구의 감소를 뒤늦게나마 깨닫고 한국교회들은 ‘구도자 품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어쩐지 아직도 많은 교회들이 그 해결의 열쇠인 그리스도인들의 진정한 삶의 갱신보다는 전도에 도움이 될 수 있을 만한 문화적인 프로그램을 예배와 접목시켜보려는 피상적인 해결책에 집중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다. 한국교회 안에서는, 이미 미국인들의 주류 교회에서는 사라지기 시작하고 있는, 멀티미디어 사용이나 연극과 같은 문화적 시도들을 도입하는 일을 전도의 기본수단으로 하려는, 소위 ‘열린 예배’ 바람이 뒤늦게 불고 있다. 불신자(혹은 구도자)들과의 문화적 접촉을 시도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의도로 많은 교회들이 앞을 다투어 이 ‘열린 예배’를 시작하고 있다.


그런데 그 ‘열린 예배’는 본래 의도대로 진정한 의미의 성공을 거두어 한국교회들 안에 자리를 잡았다기 보다는 이를 위해 애쓰고 힘쓰고 있는 과정에 있는 것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교회들이 아직도 성장의 정체 가운데에서 고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교회들은, 우리는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작 그 성장의 속을 들여다보면 다른 교회교인들이 수평이동을 해 온 경우가 대부분이다. 불신자가 믿게 되어 새 신자로 등록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게 보는 현상이 되어버렸다. 이 ‘열린 예배’가 본래의 목적인 불신자가 회심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이유는 역시, 앞서 미국의 베이비부머들이 지적한 대로, 그 예배 속에 생명력 있는 복음의 메시지가 충실히 표현되지 않기 때문이다. 강단 혹은 예배를 섬기는 자들인 그리스도인들이 전달하는 여러 유형의 메시지 속에 복음의 생명력이 없기 때문이다.


열린 예배를 준비하는 선한 동기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예배의 생명력이 없을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그 생명력을 인간의 열심과 자의적인 열정으로 창출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그 생명력은 그리스도인 개인의 경우에는 ‘개인의 인격을 전격적으로 바꾸신 성령님의 능력’으로부터 나온다고 하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적으로는, ‘성령님의 임재와 능력으로 열린 교회’가 되려는 몸부림이 없기 때문이다. ‘열린 교회’가 된다는 것은, 교회가 잃어버린 영혼들을, 그가 어떠한 조건을 가진 사람이든지, 하나님의 사랑으로 받아주고 성장시킬 수 있는 교회로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행사와 제도의 껍데기를 벗고 천하보다 귀한 영혼들에게 다시 초점을 맞추는 그 회복의 탈바꿈을 의미한다.


이렇게 보면 사실, ‘열린 예배’의 성공의 열쇠는 그 예배의 프로그램을 얼마나 세련되게 만드는 가에 달려있다기보다는 먼저, 그 예배를 준비하고 섬기는 교회가 먼저 ‘열린 교회’가 되느냐 되지 못하느냐에 달려있다. 교회가 이렇게 ‘열린 교회’로 거듭나면, 이 ‘열린 교회’의 살아 숨쉬는 복음의 생명력은 교회의 모든 사역 속에서 자연스럽게 넘쳐나, 예배 속에서도 드러나게 되어있다. 이러한 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 속에서, 그 예배가 열린 예배이든 “닫힌 예배”이든 연령과 문화적 배경과 인종을 초월하여, 구도자들은 이 복음의 생명력 앞에 회심하게 되어있다. 예배가 복음전도의 수단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건이 되어 그 경배 속에서 높임을 받으시는 분, 하나님의 임재가 심지어 구도자들에게도 강권적인 은혜로 체험되는 사건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동체 예배의 일차적 목표는 먼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것이다. 공동체 예배를 준비하며 섬기는 자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며 이를 위해 준비해야 한다. 그 준비는 예배의 프로그램을 세련되게 만들어 가는 데에 그 핵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배로 나아가는 사람들의 개개인의 삶이 먼저 복음의 생명력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 그 삶을 주께 드리는 데에 있다. 이 예배로 나아가는 사람들이란 예배에 임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다 포함한다. 말씀을 전하는 자나 예배의 프로그램 속에서 섬기는 자들은 더욱 그러해야 한다. 그 생명력이 넘쳐나 예배의 모든 순서 가운데에 자연스럽게 흘러 넘칠 때 하나님의 임재가 경험되어진다. 그러므로 감격적인, 하나님의 임재가 체험되는 예배가 되느냐 되지 못하느냐의 승부는 이미 예배로 나아가기 이전의 우리의 삶 속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공동체 예배로 나아가는 예배자의 진정한 모습은 다윗의 찬양시, 시편 68편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찬양시는 삶의 충만한 은혜의 경험을 갖고 예배로 나아가는 다윗의 모습을 잘 나타내준다. 이 예배하는 삶, 삶 속에서의 예배의 경험은 다윗의 생애 동안 함께 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신 은혜에 근거한 것이었다. 다윗은 그가 아직 소년 때에, 사울 왕을 폐하시기로 결정하신 하나님께서 사무엘 선지를 통해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기름부음을 받은 즉시 왕위에 오른 것이 아니었다. 그는 왕이 되기까지 적어도 20년을 많은 위험과 환난을 통해 연단을 받았다. 그를 죽이기 위해 맹렬히 추격하던 사울 왕이 죽은 때에 그의 나이는 이미 30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 후에도 약 7년 동안을 사울 왕의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우려는 세력과 전쟁을 치러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정해진 때에 그는 그가 기름부음을 받았던 헤브론 산지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옮겨오게 되었다. 또한 정해진 때가 되어, 새 수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하나님의 법궤를 옮기게 되었다. 그 때에 그가 이 때의 기쁨과 감격 가운데 노래하는 것이 바로 본문의 찬양시이다. 다윗의 마음 속에는 그 험난한 세월동안 함께 하셨던 하나님께 대한 감격이 있었다. 처음에 기름부음을 받을 때 그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시기 위해 그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격하면서 예루살렘 성으로 올라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반드시 주목해야 할 것은, 예배자로서 올라가는 다윗은 이미 회중(백성) 가운데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찬양하는 사람들과 함께 동행하며 올라가고 있다는 고백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법궤가 그들과 함께 들어간다는 단순한 고백이 아니었다. 신실하시고 능력 있으신 하나님께서 허물 많았던 다윗 자신과 백성을 지난 20여 년동안 어떻게 인도하시고 존귀케 하셨는가를 감격하는 기쁨이 담겨있는 고백이다.



18 Blessed be the Lord, who daily bears our burden,
The God who is our salvation. Selah.
19 God is to us a God of deliverances;
And to God the Lord belong escapes from death.
24 They have seen Your procession, O God,
The procession of my God, my King, into the sanctuary.
25 The singers went on, the musicians after them,
In the midst of the maidens beating tambourines.
26 Bless God in the congregations,
Even the Lord, you who are of the fountain of Israel


그러므로 다윗과 백성들은 공동체로서 드리는 예배의 처소로 나아가면서 (in His procession) 이미 감격적인 예배를 드리고 있었던 것이다. 역시 감격적인 예배가 되느냐 않느냐의 승부는 이미 예배로 나아가기 이전의 우리의 삶 속에서 결정된다고 하는 귀한 간증적인 사건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도 공동체의 예배의 회복은 나 하나의 삶 속에서 내가 붙들고 살았던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감격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한다. 이 감격은 성령님의 폭발적인 능력을 삶 속에서 체험하고, 하루 하루, 순간 순간 순종의 예배를 드린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감격이다. 이러한 삶의 경험을 갖고 모이는 공동체의 예배 가운데에는 반드시 성령님의 폭발적인 역사들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 회복과 치유와 성결의 역사들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 은혜로 인한 회심이 역사들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공동체의 예배갱신을 말하려면 먼저 나의 삶 자체를 돌아보자. 나의 삶이 얼마나 주님을 예배하는 삶인가를 먼저 돌아보자. 감격적인 예배로의 회복은 나의 일상적인 삶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로마서 12장에 있는 명령처럼 나의 몸, 나의 삶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드리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나는 지금 내가 속한 지역교회, 혹은 공동체의 예배 속에서 감격과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여 안타까워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먼저 나의 일상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체험되는 나의 예배생활이 회복되도록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 드리자. 그리고 주변의 형제들도 같은 예배의 회복을 그 개인의 삶 속에서 경험할 수 있도록 말씀과 기도로 서로 서로를 격려하며 섬기자! 강단의 메신저도 이러한 예배생활의 회복을 그 개인의 삶 가운데에서 체험할 수 있게 되기를 믿음과 인내로서 간구하자!



Therefore, I urge you brethren, by the mercies of God, to present your bodies a living and holy sacrifice, acceptable to God, which is your spiritual worship. (Rom12:1)



[황지성] 순종으로 회복되는 사랑

순종과 회복


순종으로 회복되는 사랑


‘사랑’이라는 말처럼 남용되고 오용되는 말이 없다. 그 혼란스러운 사용의 결과로, 현대인들은 모두가 다 사랑에 대한 각자의 개념을 갖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숭고한 사랑을 이야기 할 때에도 사람들은 각자 다른 그림들을 머리에 그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사랑처럼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중요한 것이 없기에 그 옛날 사색하기를 좋아하는 희랍인들은 현대인들이 그저 뭉뚱그려 말하는 그 사랑이라는 개념을 굳이 여러 가지로 구별하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동물들의 본능적인 행위에서도 볼 수 있는, 부모의 자식이나 가족에 대한 애정을 표현할 때 쓰는 동사, stergo(성경에 쓰이지 않음), 남녀간의 주로 이기적이고도 육체적인 감정을 말하는 erao (성경에 쓰이지 않음), 지식에 대한 열망이나 친구간의 우정, 형제간의 친밀감을 말하는 phileo (성경에 24번 등장), 그리고 흔히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할 때 쓰이는, 자기 희생적이며 책임감을 동반하는 agapao (성경에 125번 등장), 이렇게 희랍인들은 다른 종류의 사랑들을 분명히 구별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유명한,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한 ‘눈 높이 사랑’을 이야기 할 때 자주 예로 등장하는 본문, 요한 복음 21장에서 이 두 가지 다른 동사, agapao와 phileo의 개념 차이를 더 확실히 볼 수 있다. 부활하신 주님이 갈릴리 바닷가에서 베드로에게 세 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실 때에 첫 두 번은 agapao로 물으셨고 베드로가 계속 수준 낮은 사랑, phileo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주께서 아십니다.”라고 두 번 대답했을 때에 세 번째 질문에서 주님께서는 agapao대신 phileo의 동사를 써서 다시 물으신 사건이다.


그런데 사실 현대인들은 이 사랑의 다른 모습들을 굳이 구별하려 하지 않는다. 아니, 굳이 구별하는 것을 싫어한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자기 희생적이거나 책임감을 동반하는 사랑은 이미 현대인들의 삶과는 무관한 추상적인 사랑의 개념이 되어버렸다. 세상은 온통 말초적이고 이기적인 사랑이야기나 노래 따위들로 범람하고 있다. 심지어 아이들이 읽는 동화책을 보면 동물의 원초적인 보호본능들을 아름답게 묘사하고 그 이야기들을 감동으로 채색해버린 이야기들이 수도 없이 많이 있다. 어린 주인을 위해 목숨을 바친 개의 이야기라든지, 가난한 주인을 위해 금조각들을 날라주다가 지쳐서 죽어버린 제비라든지… 사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서로 미워하고 죽이는 이 험한 인간세상에서 사랑을 찾기보다는 차라리 동물들의 원초적인 본능에서 그 사랑을 보는 것이 희망적이라고 하는 인간 스스로의 절망적인 절규일 지도 모른다. 이러한 사랑에 대한 혼돈스러운 인식은 비단 세상사람들 뿐만이 아니라 현대의 그리스도인가운데에서도 만연되어있다. 우리가 흔히 아가페의 사랑을 산다고 생각하고, 조금 선하게 그리고 자기만족의 감동을 느끼면서 하나님께서 부으시는 아가페의 사랑을 사노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으니 말이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예수께서 말씀해주시는 세 가지 비유가 나온다. 첫 번째 비유는 ‘잃은 양의 비유’이다. 한 목자가 백 마리의 양을 넓은 들판에서 먹이다가 해질녘에 자기 양들의 숫자를 세어보다가 매우 당황하게 된다. 자기가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새끼 양 한 마리가 안 보이는 것이다. 자식같이 애지중지하던 정말 소중한 새끼 양 하나가 사라졌다! 너무나도 자식같이 소중한 양이기에 앞이 캄캄해지면서 제정신이 아니다. 그리고 그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그냥 들에 팽개쳐두고 그 잃어버린 양을 찾아 험한 계곡이나 산지를 뛰어다닌다. 사랑하는 새끼 양에 대한 거대한 상실감은 그 목자가 다른 아홉 마리의, 역시 소중한 양들을 그냥 팽개쳐버리는 그 비합리적인 행동에 너무나 잘 표현되어있다.


나는 이 말씀을 읽으며 감동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소중한 사람들, 특히 나에게 주신 육신의 자식들이나 혹은 말씀으로 섬길 수 있는 영적인 “자녀”들을 내가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주셔서, 비록 때로는 어렵고 힘든 순간에도 내가 이들을 잘 돌보고 사랑할 수 있는 나의 이 마음에 스스로 감동하고 이런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주님의 마음을 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는 기도를 한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나 수년 전, 나는 내 아들이 한 다섯 살쯤 되었을 때, 어느 밤길에서 이 아이를 잃어버린 경험을 한 후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날 밤, 나와 내 아내는 정신없이 헤매며 잃어버린 아이를 찾아다녔다. 우리는 제 정신이 아니었다. 둘째 아이를 마치 팽개치는 심정으로 어느 누구에게 맡기고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온 마을을 헤매며 다녔다. 그리고는 극적으로 아이를 다시 찾았다! 이 잃은 양의 비유를 떠올리며, 잃어버린 양을 찾으시는 목자,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며칠 후 이 본문말씀을 다시 읽으면서 한 구절의 말씀이 내 마음을 찌르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 “What man among you, if he has a hundred sheep and lost one of them, does not leave the ninety-nine in the open pasture and go after the one which is lost until he finds it? (15:4)”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그렇다! 그토록 사랑하는 자식을 잃었을 때에 그 자식을 찾아 헤매는 것은 바리세인과 서기관들과 같이, 얼어붙은 가슴을 가진 사람들도 할 수 있는 사랑이다. 아니, 가슴에 주님의 사랑이 없는 나도 그렇게 할 수는 지극히 본능적인 사랑의 표현이었다. 나는 분명히 아가페의 사랑이 없는 사람임을 말씀 속에서 깨달았다. 그 수많은, 자식을 잃어버리고, 그 상실감으로 울부짖는 부모들을 향해 무관심하게 살아왔지만 내 사랑하는 자식을 잃었을 때에는 정신을 잃고 헤매는 나의 이기적인 사랑…


두 번째 비유에서 주님은 계속 말씀하신다. 비록 자식과 같이, 목숨같이 소중한 새끼 양은 아닐지라도 여인의 생명을 건 명예와도 같은, 정말 소중한 열 드라크마중의 하나를 찾는 여인의 심정을 말씀하신다. 온 집안을 쓸고 닦은 후에, 혼신의 노력 후에 찾아진, 그 소중한 한 드라크마를 들고는 기뻐 뛰며 즐거워하는 여인의 심정을 말씀하신다.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잃고 그것을 다시 찾는 것은 매우 기쁜 일이다. 주님은 분명 우리가 이 기쁨을 맛보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잃어버린 영혼 하나를 찾는 것은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며 이 일이야말로 우리의 삶 전체를 바쳐도 후회하지 않을 정말 귀중한 일이다.


그러나 세 번 째 비유, 소위 “탕자의 비유”를 말씀하시는 주님의 마음에서 우리는 앞의 두 비유에서 느낄 수 없는 슬픔 같은 것을 먼저 느끼게 된다. 이 이야기는, 아버지의 기쁨이며 자랑인 두 아들 중 둘째가 그 아버지를 마음속으로 살인하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어느 날, 자기 재산의 분배를 찾기 위해 찾아온 아들의 마음속에 있는 그 아비는 그 아들의 마음속에서는 이미 죽어있는 존재였다. 그 아들은 마음속으로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 내 재산을 좀 빨리 갖고 싶은데 당신은 왜 이 나이가 들도록 아직까지 살아있는 지 모르겠어…” 이 둘째 아들의 요청을 듣고는, 아버지는 그가 가진 모든 재산을 두 아들에게 나누어준다. 그리고, 재산을 받은 그 둘째는 재빨리 아버지를 떠나 먼 나라로 떠나버린다. 사실 인간이란 본래 이렇게, 나를 창조하시고 나와 함께 있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마음속으로 죽이고 내 자신만을 위한 욕심으로 인생의 길을 스스로 가는 사람이 아닌가… 이 인간의 실존이란 이런 면에서 하나님의 배반자이며 그러므로 소중히 여김을 받을 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이 비유는 계속, 파멸의 길로 들어서서 추락해 가는 아들과 그 배반자이며 살인자인 아들이 그래도 다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셨다가 그 돌아온 아들을 다시 기쁘게 받아주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그려내고 있다. 이것이 바로 죄인과 세리들, 그리고 바로 나를 향한 주님의, 아가페의 사랑이었다.


소중함의 여김을 받지 못할 것을 사랑하는 사랑,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부으신 아가페의 사랑, 우리는 얼마나 많이 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듣고 그리고 나도 이 사랑의 사람의 되려고 몸부림치며 살고있는가? 십자가에서 아직도 주님을 저주하고 모욕하는, 사랑 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시며 그 몸을 아낌없이 내 주시고 고난 당하신 그 사랑을 생각하면 나도 그 사랑으로 살고 싶은 열망이 생기지 않는가? 그러나 우리는 이 열망이 강하면 강해질수록 내 꿈틀거리는 자아의 자존심과 이기적인 모습에 날마다 좌절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십자가의 사랑을 생각해야 쓰러지지 않는다. 날마다 십자가의 사랑을 이야기해야 살 수 있다. 내가 삶 속에서 사랑을 보여줄 기회가 주어질 때,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은 나의 본능적이며 감상적인 사랑과 얼마나 다른가를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하자! 나의 마음을 찢는, 원수와 같은 사람에게 감동적인 사랑을 부을 수 있는 자리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반드시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더 명확하게 드러내자! 나의 사랑을 통하여 주님의 사랑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자아가 죽음으로써 주님의 사랑이 온전하게 드러날 수 있음을 고백하자!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나의 자아를 죽이는 순종을 통하여 온전히 회복될 수 있음을 고백하며 살아가자! 전도자는 삶을 섬기는 사랑으로 살아야 하지만 자신의 섬기는 사랑으로 세상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지 않도록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십자가 뒤에 숨어야 한다. 주님의 그 사랑만이 온전히 드러나기 위해서…

[황지성] 순종으로 회복되는 기쁨

순종과 회복


순종으로 회복되는 기쁨


Holocaust를 주제로 한 영화가운데 <Sophie’s Choice> 라는 영화가 있다. 두 아이를 가진 유대인 엄마, Sophie가 포로수용소로 가족과 함께 실려가던 중 나찌의 무자비한 총구 앞에서 두 아이 중 한 아이만을 계속 데리고 갈 수 있으며 다른 아이는 사살당할 것이라는 위협을 받는다. 그 엄마는 가슴을 찢는 고통과 숨막히는 죽음의 공포 앞에서 그 중 한 아이, 아들을 택해야만 했다. 그 영화는 엄마의 고통스런 절규를 화면 가득히 채운다.


선택이란 삶의 순간마다 주어지는 부담이며 많은 경우에 그것은 마음의 갈등과 고통을 수반한다. 특별히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보려고 몸부림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이 말할 수 없는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다. 우리의 인생이란 날마다 순간마다 선택이라고 하는 두 갈래 길에서 한 길을 선택하며 살아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선택은 대단한 용기를 요구한다. 그러나 겨우 용기를 내어 한 길을 선택한 순간, 우리는 많은 경우에 마음에 큰물처럼 밀려오는 불안감을 느끼지 않는가? 그 불안감은, 그 두 갈래 길에서 내가 선택하지 않았던 다른 한 길이 만일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길이었다면 나의 인생의 발걸음은 이제 실패로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다. 이 순간에 우리는 ‘인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나의 믿음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것을 느끼지 않는가?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불안한 갈등과 고민 속에서도 확실히 붙잡을 수 있는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며 살기를 원하시며 아버지께서는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며 사는 우리의 삶이 기쁨으로 충만하기를 원하신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고 나면 우리의 마음속에서는 두 가지의 의문이 즉각적으로 제기된다. 첫째는 어떤 어려운 결정의 순간에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확실히 분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며 둘째는 나의 의지를 ‘고통스럽게’ 쳐서 복종시키는 이 순종하는 삶이 도대체 어떻게 기쁨이 충만한 삶일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먼저 이 물음들에 답하기 전에 이 물음들 앞에 서 있는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의 참다운 실존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내가 이전의 존재가 아닌 전혀 새로운 피조물로 완전히 변화된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난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산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가르침을 ‘따라(according to)’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하기 이전에 아버지의 자녀’로서(as)’의 삶을 사는 것을 먼저 의미한다. 이 그리스도인의 참다운 실존을 바로 이해하는 순간, 앞서 제기된 난해한 질문들이 비로소 풀리기 시작한다. 그 구체적인 해답이 로마서 11장 이후에 나와있다. 로마서 11장까지에서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가 하나님의 심판(condemnation), 칭의(justification), 성화(sanctification), 그리고 선택하심(sovereign choice)을 통해 우리에게 어떠한 은혜로 보여졌는가가 조목조목 설명된 후 이제 성경은 이 은혜로 말미암아 변화된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를 말씀하기 시작한다. 로마서 12장의 서두, 1절과 2절을 주의 깊게 살펴보자. “Therefore I urge you, brethren, by the mercies of God, to present your bodies a living and holy sacrifice, acceptable to God, which is your spiritual service of worship. And do not be conformed to this world, but be transformed by renewing of your mind, so that you may prove what the will of God is, that which is good and acceptable and perfect.” 여기서 반드시 놓치지 말아야 할 성경의 중요한 약속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산 제사로 하나님께 드려질 때, 즉 그 삶이 이 세대를 본받는 것이 아닌, 새롭게 태어나 계속적으로 변화되는 (transform, metamorphsis) 삶이라면 하나님의 뜻 즉 하나님의 의가 그 삶 속에서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좀 더 명확하게 말해서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 속에서 ‘prove by testing (dokimazein)’ 즉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있다는 약속이다. 이 선언은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없는 애매한 상황이 너무나 많다고 불평하는, 아직도 변화되지 못한 우리의 삶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는 도전의 말씀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말씀은 우리를 얼마나 자유케 하는 은혜의 말씀인가? 아버지의 의로운 뜻이 순종하는 자녀들의 삶을 통해 내가 경험할 수 있도록 드러나게 된다는 이 말씀은, 아버지께서 자녀된 우리들이 선택하고 살아가는 삶의 순간 순간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기쁨을 주신다는 은혜의 약속의 말씀이 아닌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 나의 삶 속에서 나타나기 위한 열쇠는 먼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나의 삶을 명도하는 순종함의 믿음에 있다. 바로 나의 영혼이 얼마나 하나님의 영의 임재로 충만한가 하는 데에 있다. 나의 가슴이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으로 넘치는가 하는 데에 있다. 나의 마음이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열망으로 얼마나 가득 차 있는가 하는 데에 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대로, 위대한 전도자 Moody선생이 그의 생전에 쓰시던 성경책에는 “T, P” 라는 두 글자가 깨알같이 적혀있었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거듭난 그가,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try” 하였더니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그대로 자신의 삶을 통해 “prove” 되었다고 하는 유명한 간증이다. 하나님의 뜻이란 우리의 순종을 요구하기 위해 먼저 드러나기보다는 오히려 순종하는 하며 사는 사람들의 삶 가운데 드러날 수 있다고 하는 놀라운 간증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 나의 삶의 선택과 결정 속에서 발견되어지고 이루어지는 삶의 진정한 기쁨은, 나의 노련한 판단과 재빠른 기회포착으로 이루어지기보다는, 어떤 결정으로 인한 결과에서도 하나님의 인도를 기대하는 믿음과 그 인도하심이 보일 때에 그 인도하심에 순종하려는 결단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사도행전 16장에 있는 사도 바울과 그의 일행의 경험에서 이 교훈을 다시 한 번 확인 할 수 있다. 제 2차 전도여행을 떠나면서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는 시리아의 안디옥을 떠나 육로로 에베소가 있는 서쪽 아시아 지역으로 가려고 길을 떠났으나 하나님께서 그 길을 막으신다. 결국 그들은 북쪽에 있는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거기서 그들은 다시 갈라디아의 북쪽에 위치한 비두니아 땅으로 가려고 했으나 하나님께서 그 길을 다시 막으신다. 할 수 없이 방향을 틀어 북서쪽, 에게해의 동편에 위치한 드로아 항구로 가게 된다. 결국 그 곳에서 그들은 마게도니아의 한 사람이 배를 타고 에게해를 건너와 우리를 구해달라고 청하는 환상을 보게된다. 마침내 그들은 빌립보, 데살로니가, 고린도, 에베소로 건너가 그 곳의 많은 영혼들을 구하는 사역을 이루게 된다. 그들은 주님의 복음을 전하려는 분명한 목적과 주님을 사랑하는 열정으로 순간순간 자신들의 마음의 확신이 주는 선택으로 방향을 결정하고 행동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순종에 대한 의지와 주님을 사랑하는 열정을 보시고 그들을 최적의 목적지로 인도하시기로 결심하신 주님께서는 적절한 순간마다 그들이 결정하고 가는 길의 다른 방향들을 막으시고 가야할 방향은 열어놓으시면서 결국은 그 최적의 목적지까지 인도하신 것이다.


주님을 사랑함으로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도 사도들에게 나타났던 동일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나타남을 잊지 말자! 먼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믿음으로 길을 떠나야한다. 주님께서는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목적지로 기꺼이 가고자하는, 순종하는 하나님의 사람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그 길을 떠나자! 그리고 지금은 비록 확실히 보이지 않는 그 목적지라 할 지라도 그 목적지에 도달하기까지 주님께서 인도하시리라는 믿음에 흔들리지 말자! 때로는 우리가 그 가는 길에서 크고 작은 결정들을 내려야 한다. 그러나 이제는, 마치 두 갈래 길들로 계속 전개되는 것 같이 느껴졌던 우리의 인생이 고통스러운 선택의 연속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나의 삶 속에서 하나하나 체험해나가는 신나는 ‘wonderpath’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내리는 우리들의 결정들 앞에서 우리는 자유하자! 왜냐하면 성경에 있는 약속의 말씀이 증거 하듯이, 우리의 중심에 진정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열망이 있었다면, 그래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결정들을 내렸다면 그 결정들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가 예측하지 못하는 방법으로라도 하나님의 의를 반드시 이루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예정하신 뜻이 우리의 순종으로 우리의 삶 가운데에 이루어지는 것을 보는 일이야말로 인생의 흥분되는 기쁜 경험이 아니겠는가? 지금 우리 가운데 누군가가 심각한 인생의 결정을 놓고 방황하며 절망하고 있다면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과 임재가 회복되도록 기도하자.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할 수 있는 마음이 되도록 기도하자. 그러면 주님께서 주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보이시고 이루시기 위해, 혹 우리의 연약함으로 내린 결정으로 초래될 지 모르는 위험한 길과 굽은 길을 막으시고, 가장 선하신 길로 인도하실 것을 믿고 기뻐하자. 먼 광야와 같은, 미래가 아득하고 잡히지 않는 우리들 유학생의 때야말로 이 순종의 믿음이 절실히 필요한 시기가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