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현] 외모 지상주의 (Lookism) (2)

고독의 세상 읽기


외모 지상주의 (Lookism) (2)


우리 안에 이 ‘외모 지상주의'(lookism)- 모든 평가의 기준을 외모에 두는 것 -처럼 가장 널리 퍼져 있으면서도 쉽게 인식되지 못하는 사회적 우상이 또 있을까? 사실 한국사회의 물질만능주의나 지역이기주의, 학력/학벌 중심적인 사회구도에 대해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문제의식을 갖고 성토하는가? 이에 비해 외모 지상주의는 많은 사람들의 인식 속에 어찌할 수 없는 인간사의 한 본능적 차별형태로 자리잡아 버린 것 같다. 얼마 전 타계한 한국 코메디계의 대부 이주일씨도 그 옛날 80년대 초에 이미 “못생겨서 죄송합니다”는 말로 많은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내지 않았던가? 못생긴 것이 죄송하고 웃길 정도로 우리사회는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풍토로 인해, 외모를 노골적으로 중시하는 한국사회의 경향을 그 어떤 ‘지상주의’보다 더 경계한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세상의 흐름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우리의 사회 안에 은근히, 그러나 당연하게 침투해 있는 이 외모 지상주의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떠한 삶을 요구하시는가?


먼저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인 나에게 외모란 과연 어떤 것인가? 혹 나는 획일화된 외모로 내 스스로와 이웃을 평가하는데 익숙지는 않은가? 나는 외모에 대해 얼마나 신경을 쓰고 있는가? 그리고 내가 신경을 쓰는 궁극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이런 질문들에 대해 진지한 평가를 내린 후,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내 안에 자리잡고 있는 관점과 성경적 세계관을 비교하면서 나의 사고를 반성하고, 개혁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성경은 우리에게 외모 지상주의에 대한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행동강령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성경에 변함없이 흐르고 있는 가치관과 세계관을 찾아 외모 지상주의에 대한 현실적 대안을 제시하고자 고민하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몫이 아닐까?


1. 성경이 이야기하는 외모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영광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을 [외모로] 차별하여 대하지 마십시오.” (새번역성경 야고보서 2:1)


성경은 우리가 ‘외모(appearance)’로 사람들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데에 아주 익숙한 존재라고 증거 한다. 심지어는 하나님과 피조물인 우리 인간이 구별되는 이유 중의 하나로, 하나님은 우리와 같이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시는 분’이라고까지 표현한다.(신 10:17, 삼하 16:7, 벧전 1:17) 그만큼 우리는 외모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려는 연약함을 가진 존재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경말씀들이 곧 우리 사회의 외모 지상주의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외모로 사람 평가하기를 좋아하는 우리에게 성경이 강력하게 경고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외모(appearance)로 사람을 차별(favoritism or partiality)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곧 외모 지상주의의 대한 성경의 명확한 배척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바로 외모에 대한 각 사람의 반응과 평가, 그리고 이로 인한 의식적, 무의식적 차별대우로 인해 외모 지상주의가 우리 안에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성경에서 말하는 외모(appearance)가,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미적(美的)인 외모만을 항상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신·구약에서 사용된 외모는 주로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서 외적으로만 그럴듯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이는 자들이나, 아니면 가진 자나 권력 있는 자들을 그렇지 못한 자들과 차별대우하는 사람들에게 경고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욥 34:19, 요 7:24, 벧전 1:17, 골 3:25, 약 2:1-10 등등).


성경에서 외모가 순수한 미적 의미로 우리를 교훈 하는데 사용된 경우는, 사무엘상 16장 6절에서 13절의 ‘선지자 사무엘 이야기’와 베드로전서 3장 1절에서 6절의 ‘베드로의 권면’ 등에서 볼 수 있다(이 외에도 미적인 의미로 외모가 사용된 경우가 있긴 하나, 이는 주로 사물이나 성경인물의 외관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성서 해석학에 충실하게 이 두 구절의 말씀에만 집중해서 ‘외모 지상주의’에 대한 성경의 입장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제시함에 있어 앞서 주장한 외모 지상주의 형성의 직접적 원인이 되는 우리의 ‘보아주고’, ‘보여주는’ 자세의 변혁을 촉구한다. 곧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람들을 보아주고, 또한 자신을 보여주는 삶을 통해 외모 지상주의에 역류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주장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이 글이 단순하게 외모 지상주의에 대한 추상적인 넋두리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인 삶의 실천으로 옮겨지기를 소망하는 필자의 바램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나의 제안들이 독자들에게 그리 특별하거나 신선하게 다가가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별 특별한 이야기 없이 당연한 말들을 늘어놓는 넋두리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사실 언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남을 어떻게 보아주고 또한 스스로를 어떻게 보여주어야 할지 몰라서 문제였던가? 세상의 흐름에 생각 없이 파묻히는 우리의 무심한 자세가 문제이지.…


2. 하나님의 백성답게 보아주고, 보여주는 삶


(1)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보아주라’고 말씀하신다. (사무엘상 16:6-13)



그러나 주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셨다. “너는 그의 준수한 겉모습과 큰 키만을 보아서는 안 된다. 그는 내가 세운 사람이 아니다. 나는 사람이 판단하는 것처럼 그렇게 판단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겉모습만을 따라 판단하지만, 나 주는 중심을 본다.” (새번역성경, 사무엘상 16:7)


하나님의 마음이 이미 떠난 사울 왕의 후계자를 위해 베들레헴의 이새를 찾아온 선지자 사무엘은, 그의 아들 중 유난히 키가 크고 용모가 준수한 엘리압을 보고, 그가 바로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시기를 원하는 자로 판단한다. 사실 우리는 여기서 왜 선지자 사무엘이 그렇게 중요한 일을 분별하는데 있어 외모를 그 기준으로 삼았는지 사뭇 이해가 안 된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사무엘이 나름대로는 하나님의 뜻을 고려하여 이런 판단을 내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베냐민 지파의 사울을 처음으로 만나게 했던 때를 기억했을 것이다.(삼상 9, 10장) 용모가 매우 준수하며 또한 큰 키의 소유자였던 사울을 기름 부으며, 그는 마치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왕으로 세우고자 하는 자들은 다들 그 용모와 키에 있어 어떤 “수준”의 사람들이여야 한다는 고정화(conventional)된 생각을 가졌을지 모른다. 그리고 이러한 고정화된 생각으로 인해 그는 엘리압을 보자마자 그가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외모를 소유했다는 생각에 그만 하나님의 뜻을 그릇되게 판단한 것이다.


사실 우리 또한 성경을 읽다 보면, 성경인물들의 외모에 있어 비교적 고정된 성경의 관점을 보게 된다. 그것은 바로 성경의 인물 중에 웬만해서는 못생긴 사람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물론 가끔씩 엘리사나 사도 바울처럼 썩 출중하지 못한 외모를 소유한 사람들도 등장하지만, 전반적으로 성경의 인물들은 거의 다 잘 생겼다. 사라를 필두로 해서 리브가, 라헬에 이르기까지 웬만한 창세기의 여성들은 다 한 미모를 하는 사람들이 아니던가. 거기다가 다윗의 부인 중 한 명이었던 아비가일, 페르시아 제국의 왕비 에스더 등, 꽤나 많은 성경의 여인들이 미모를 갖춘 자들이었다. 남자들은 또 어떠한가? 자신의 멋있는 ‘외모’로 인해 유혹까지 받아야 했던 요셉으로부터 갓 태어났을 때 꽤나 준수했다던 모세, 키가 크고 용모가 출중했던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 부자(父子)지간이 다 한 외모 했다던 다윗과 압살롬에 이르기까지, 남성들 또한 멋있는 자들이 꽤나 등장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고정화된 성경의 인물론을 뒤집어엎으시는 권면을 사무엘에게 하시는 것이다.


그럼, 그분 말씀의 요지는 무엇인가? 간단하게 말해 사람을 볼 때, 외모에 집중하지 말고 중심을 보아주라는 것이다. 사무엘은 엘리압의 큰 키와 준수한 용모만을 보고 그를 평가했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향해서도 이러한 시각을 가지라고 권고하신다. 그러나 이러한 성경말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실생활 속에서 사람의 외모에 지나치게 연연하고, 또한 끌려 다닌다. 한마디로 외모로 인해 우리의 판단이 흐려질 때가 많다. 그래서 ‘외모가 능력이다’ ‘예쁘고, 잘 생기기만 하면 된다’ ‘딴 건 몰라도 못 생긴 것은 용납이 안 된다’는 등의 우스운 말들이 우리의 생각을 은연중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왜 하나님의 이 말씀에 쉽게 순종하지 못하는가?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무슨 이유로 인해 우리는 마땅히 보아주어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세월이 지나면 사라질 허탄한 것에 큰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며 이에 연연해하는 것일까?


첫째, 나는 그 이유가 미적 외모에 눈이 어두워 사람의 ‘중심’을 봐줄 줄 모르는 우리의 조급한 마음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는 나름대로 사람의 중심을 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중심은 어떤 존재의 ‘진심’이나 ‘참된 실체’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를 밝히 보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아닌 이상, 우리는 사람의 중심을 보는데 있어 신중하고 차분해야 한다. 단순히 외모만 보고 그의 실체(중심)를 온전히 알 수는 없다. 외모가 사람의 실체를 이해하는데 어느 정도 도움을 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외모만을 가지고 사람을 제대로 ‘보아준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마음의 중심을 보려면 그 사람의 삶을 바라봐야 한다. 마치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보시며 우리의 중심을 판단하시듯, 우리 또한 미적 외모에 바탕을 둔 값싼 평가와 차별은 던져버리고, 서로의 삶을 지켜보며 중심을 알아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개중에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이성을 처음 소개 받은 자리에서, 사귀자 거나 결혼하자는 말을 한다는데,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이것 또한 상당히 자의적인 해석일 수 있지만)가 아니고서야, 이는 상당히 즉흥적이고 사람을 인내하며 바라볼 줄 모르는 조급한 자세라 생각한다. 이는 마치 TV나 영화, 아니면 여러 사람들과 마주치는 길가에서, 멋진 얼굴과 몸매를 자랑하는 남녀들을 은근슬쩍 바라보며 그들의 중심까지 순식간에 과대포장해 버리는, 우리의 미련하고 가벼운(shallow) 모습과 무엇이 다른가?


두 번째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습관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을 바라볼 때 항상 얼굴, 몸매, 화장법, 옷맵시 등을 보고 평가하는데 익숙해진 나의 눈이 막상 이런 말씀 한 구절 읽고 묵상한다고 해서 그리 쉽게 바뀔 리가 없다. 이미 우리 안에 익숙해진 시선은 성경에서 아무리 이러쿵저러쿵 말한다 치더라도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절제되고 훈련되지 않는 한 쉽사리 습관화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선지자 사무엘이 사울 왕 때의 경험으로 인해 하나님의 계획을 잘못 분별한 경우를 보았다. 이처럼 일단 우리 안에 습관화되고 고정화된 시선은 쉽게 우리를 떠나지 않고,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우리의 사고를 주장하는 것이다.


2)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보여주라”고 말씀하신다. (베드로전서 3:1-6)



“Don’t be concerned about the outward beauty that depends on fancy hairstyles, expensive jewelry, or beautiful clothes. You should be known for the beauty that comes from within, the unfading beauty of a gentle and quiet spirit, which is so precious to God” (NLT, 베드로전서 3:4, 5)


삼성경제연구소의 보고서에 의하면, 패션의류나 명품시장을 제외한 ‘순수 미용’ 분야의 연간 시장규모가 미용성형 5천억원, 다이어트 1조원, 화장품 5조 5천억원 등 무려 7조원에 이른다고 한다. 이제는 외모가 자본이 되는 세상을 넘어 자본이 외모를 만드는 세상이 된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자신을 어떻게 사람들에게 보여주느냐는 문제에 매우 민감하다. 단순히 이왕 자신을 보여줄 거 깨끗하고 단정하게 보여주자는 선을 뛰어넘어, 이제는 자신의 존재가치와 성공을 위해 필사적으로 외모를 가꾸고 꾸미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다. 근데 이러한 세상물정도 모르고 사도 베드로는 시대에 뒤떨어지는 권면(벧전 3:4, 5)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던지고 있다.


우리가 베드로전서 3장 1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본 서신서의 전체적인 배경과 그 주제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위의 말씀은 외모 지상주의에 대한 경고의 목적으로 쓰여진 말씀이기 이전에, 타지에서 핍박과 환난을 당하고 있었던 소아시아 지역의 교회들을 격려하기 위해 쓰여진 사도 베드로의 편지이기 때문이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꿋꿋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어떻게 자신의 신앙을 지키며, 그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지에 대한 실제적 권면을 그 핵심주제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우리 믿는 자들의 삶이 나그네 인생이라는 점을 강조하며(1:1, 17, 2:11), 그리스도인 노예로서(2:18-25), 그리스도인 아내로서(3:1-6), 또 그리스도인 남편(3:7)으로서 각자 자신의 처소에서 어떻게 믿는 성도답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예수 믿기가 어렵고 힘든 시대이니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자는 논조가 아니라, 오히려 핍박과 고난의 시대일 수록 자신의 그리스도인 됨을 온전히 드러내자는 존재론적(ontological)인 가르침을 편지에 담고 있는 것이다.


사도 베드로는 위의 말씀(3:1-6)을 통해, 결혼한 여성 그리스도인이 불신자 남편에게 자신의 그리스도인 됨(정체성)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방법은, ‘외면의 미'(outward beauty)를 통해서가 아닌, 순종을 바탕으로 하는 ‘내면의 미'(inward beauty)를 통해서라고 말한다. 한 마디로 여성 그리스도인이 가장 지혜롭게 자신의 존재가치를 보여주는 방법은 이 시대와 같은 외모 지상주의를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귀하고 값진(precious) ‘내면의 영성'(inner spirituality)을 통해서라는 말이다. 영적인 시련과 핍박이 많은 세상에서 아름다운 헤어스타일과 옷, 액세서리를 통해 자신의 가치와 능력을 포장하지 말고, 오히려 믿는 성도답게 경건하고 순결한 그리스도인의 행실을 말없이 보여주자는 것이다.(3:1, 2)


사도 베드로가 결혼한 여성 그리스도인들에게 내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행동하는 신앙을 보여주라고 촉구하면서, 가꾸고 꾸미는 미적 외모를 이에 반대하는 예(counterexample)로 삼은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마치 베드로는 현 시대의 외모 지상주의를 빗대어 말하듯 우리에게 이렇게 도전하는 것 같다. 참된 능력이 없는 허탄한 것에 집중하지 말고, 먼저 그리스도인으로서 보여줄 것을 보여주라고…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행동하는 경건하고 순결한 속 사람을 통해, 세월이 지나면 사라질 외모와는 수준이 다른, 신앙인의 ‘불변하는 미'(unfading beauty)를 보여주라고 말이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부스스한 머리모양과 꾀죄죄한 옷차림을 보여줄 필요도 없지만, 그렇다고 7조원에 이르는 ‘순수 미용’ 분야에는 빠짐없이 소비자의 한 몫을 감당하면서, 하나님 보시기에 참되고 값진 내면의 훈련을 소홀히 여기는 것은 분명 그리스도인의 우선순위상 문제가 있는 처사다. 스스로를 아름답고 멋있게 가꾸기 위해서는 철저한 다이어트와 피부관리, 세련된 헤어스타일과 옷, 액세서리, 화장품 등에 신경을 쓰는 사람들이 정작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할 그리스도인의 멋과 빛깔을 내지 않는다면 이거야말로 외모 지상주의가 아닌가?


우리가 우선적으로 보여주어야 할 것은 외모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확고한 정체성이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예쁘고 멋진 얼굴과 늘씬하고 우람한 몸매, 세련된 옷과 액세서리를 통해 자신의 가치와 존재를 드러낼지 몰라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히 변치 않는 내면의 미(inner beauty)를 통해, 자신이 누구의 백성인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글을 마치며…


앞에서도 주장했지만, 우리는 많은 경우에 외모 지상주의가 자신과는 별 상관이 없는, 다른 사람들만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는 외모를 가지고 사람들을 평가하는 면에 있어서는 자신도 남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어도, 최소한 외모로 인해 다른 사람들을 차별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누이 이야기 하지만 외모 지상주의는 보아주는 사람과 보여주는 사람들의 상호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우리의 습관화된 외모 중심적인 시선과 평가가 -의도를 했든 안 했든- 다른 사람들이 외모 지상주의에 집착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단순하게 친구들끼리 모여 앉아 타인의 외모에 대해 평하고, 외모에 자신감이 없는 지체나 장애우들을 어색한 눈빛이나 행동으로 대하는 우리의 모습 그 자체가, 곧 변형된 외모 지상주의인 것이다. 거기다가 그리스도인다운 정체성은 보여주지 않으면서 지나치게 자신의 외모만을 가꾸는 것 또한 외모 지상주의에 동참하는 행동일 수 있다. 나의 무분별한 과시(showing off)와 드러냄을 통해 외모 지상주의의 여파가 이 땅에서 계속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을 바라볼 때, 그들의 외모보다 먼저 중심을 바라보고자 노력해야한다. 은연중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고 차별하고자 하는 유혹을 뿌리치고자 지속적인 세안(洗眼)작업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외면의 미를 통해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인정받기보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 속마음의 참 주인 되심을 지속적으로 가꿈으로 행동하는 신앙인의 정체성을 보여주고자 노력해야 할 것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미적인 외모, 그 자체를 아름다움 안에 가두는(?) 훈련이 필요할지 모르겠다. 아름다운 외모가 사람의 중심과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지 않게, 나의 존재가치를 흐리게 하는 우상이 되지 않게, 아름다운 외모는 그냥 ‘아름답다’는 표현 그 자체에 머물게 해야 한다.

[조경호] 회복되는 하나님나라 치유되는 자아: 에베소서의 비밀 : 구원의 제2변화

eKOSTA 성경강해


회복되는 하나님나라 치유되는 자아: 에베소서의 비밀
 구원의 제2변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유혈충돌이 멈추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팔레스타인의 자살 테러단원 중엔 10대 청소년들이 죽음으로써 조국과 신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있는데, 자살 테러는 또 다른 테러를 가져오고 있다고 경고한다. 폭탄이 터지면서 피해자들의 몸에 박힌 뼛조각에서 치명적인 질병들이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이스라엘과 기독교인들은 어떤 관계일까? 아브라함의 혈통적 언약 자손들과 아브라함의 믿음의 언약 자손들은 누구일까?


바울은 에베소서 2장에서 구원이 가져온 새로운 피조물의 자아상을 우리에게 펼쳐 보이고 있다. 구원의 제1변화(2:1-10)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삼중의 연합을 이루었다. 구원의 제2변화(2:11-18)에서 우리는 “유대인과 함께” 삼중의 연합을 이루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유대인과 이방인의 새로운 연합을 성취하셨다.


바울은 에베소서 2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아상을 ‘구원의 변화’로 설명하고 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되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과거의 자아상과 현재의 자아상을 깊이있게 설명한다. 구원이 가져온 자아의 변화 곧 ‘이전 것’과 ‘새것’의 차이를 이해할 때 우리는 하나님나라를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자신을 거룩한 제단에 드릴 수 있다.


자아상의 모형(엡1:20-23)



20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21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 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2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르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1:20-23)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리스도’를 모델로 재창조 된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성령의 권능이 먼저 그리스도를 ‘알케고스’ 구원의 창시자로 만드셨다. 구세주가 되신 단계를 5과정으로 설명한다. 죽음과 부활에서 시작된 구세주의 단계가 최종적으로 “교회의 머리”에서 구원의 완성과 절정이 실현된다. 하나님의 구원의 최종 성취는 교회이셨다.


● 성령하나님의 사역….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구원의 완성(1:20-23)










그리스도 안에서 진행된 구원의 전체 계획 1:20-23









죽음

부활

승천

만물의 주

교회의 머리

신자 안에서 진행되는 구원의 전체 계획 2:1-22

그리스도께서 “구세주”가 되신 5단계 중 ‘죽음-부활-승천’의 세 단계를 통해 구원의 첫번째 변화가 성취되었다. 이제 남은 ‘만물의 주-교회의 머리’ 두 단계를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을 연합하여 새로운 인류를 창조하신다.


구원의 제 2변화(엡2:11-18)



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割禮黨)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은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의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和平)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15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2:11-18)






구원받기 전….구원받은 후

● 구원받기 전(2:11-12)


구원받기 전 죄인의 실상은 “이방인”과 “무할례당”이라 불리어졌던 사람들이었다. 아브라함의 언약의 관점에서 인류는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분류된다. 피부 색깔, 문화, 언어, 민족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오직 두 부류의 인류역사가 하나님의 구속사를 이끌어왔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이방인은 허상의 존재들일 뿐이다. 탈무드에 이런 글이 나온다. 한 랍비에게 유대인이 질문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많은 이방인을 만드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랍비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지옥불에 땔감이 필요해서지….”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12절). 바울은 이방인의 버림받은 실체를 다섯 가지가 없는 자로 묘사했다. 유대인들은 철저하게 이방인과의 접촉과 교제를 금지했다. 길거리에서 인사만 나누어도, 시체와 문둥병자를 만진 것과 동일한 정결예식을 치러야만 공동체에 받아들여졌다. 이방인들은 하나님도 없는 자들이었다.


●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셨을 때 무엇을 의미한 것일까?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피의 구속은 한 사람, 한 사람 개인만을 위한 구원이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놀라운 일이 성취되었음을 보여주셨다.


인류의 역사는 이방인과 유대인 간에 벌어진 오랜 증오와 피의 살육의 역사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가스실에서 살육당한 600만의 유대인 대학살이 그 대표적 사건이었으며, 최근에까지 그 증오와 반목의 역사는 멈추지 않고 있다.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 중심에 이스라엘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 9.11 테러 1주년. 희생자 2801명의 이름이 ‘그라운드 제로’에서 호명되었으며, “우리는 결코 잊지 않을 것” 현수막도 건물에 걸려있었다. 퓰리처상을 수상했던 한 언론인은 미국의 테러전쟁을 이렇게 말한다. “테러와의 전쟁은 유령과의 전쟁이다. 그것은 빈곤, 마약과의 끝없는 전쟁과 같다. 끝도 없는 전쟁을 통해 미국은 자국의 우월감을 세계에 보여주려 할 뿐이다.” 현대 평화학 창시자 유럽평화대학 요한 갈퉁 교수는 [평화 심포지움]에서 “지금 자행되는 보복의 악순환의 핵심에 미국의 패권주의가 있다. 미국의 태도변화 없이는 평화는 어렵다. 갈등이 있는 곳에 폭력이 있고 갈등이 해결되면 폭력도 사라진다. 갈등을 푸는 열쇠는 미국이다.”라고 주장했다.


이처럼 이스라엘과 중동의 갈등, 기독교와 이슬람의 종교전쟁, 문명의 충돌로 묘사되는 테러와 전쟁은 이방인과 유대인이 얼마나 “멀리 있는” 민족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멀리 있던 두 민족을 가깝게 만드셨다. 어떤 평화정책으로도 하나로 연합될 수 없는 증오와 적대감의 민족을 하나로 만드셨다. 복음의 능력은 바로 그 화평에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증거되는 곳마다 화평의 사건이 일어나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화평이시기 때문이다. 국가와 이념, 갈등을 이겨내는 진정한 평화가 십자가의 피의 능력이다.


● 구원받은 후(2:14-18)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으심, 그 피로 이루신 일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를 갈라놓았던 ‘중간에 막힌 담,’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 ‘원수된 것’을 “헐어 버리시고,” “폐하시고,” “소멸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로 만드셔서, 새로운 제3의 인류 곧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창조하셨다.





2:14 둘로 하나를 만드사
2:15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2:16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교회는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새롭게 창조하신 새로운 인류다. 초대 교부였던 크리소스톰은 “은과 납을 녹여 금을 만들어내듯이 이방인과 유대인을 새로운 민족으로 만드셨다”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언약을 기준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나누었던 인류의 종족 구분은 이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나사렛 예수 안에 있는 자와 나사렛 예수 바깥에 있는 자로 나뉘어졌다.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18절). F.F 브루스는 “한 새 사람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가리킨다고 정의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한 새사람은 기독교 공동체다. 하나님의 새로운 인류, 제3의 종족으로 아버지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백성들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사도행전 2장 오순절 성령강림절 신약교회가 탄생하면서 유대인과 이방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민족 곧 교회공동체로 만들어졌다. 아브라함은 혈통적 언약의 백성과 믿음의 언약 백성 모두의 조상이 되었다.


확장되는 하나님의 나라(2:18-22)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가족, 하나님나라의 시민, 하나님의 성전으로 주를 섬기는 사람들이다. 지금도 이 땅엔 하나님의 성전이 계속 지어져가고 있다. 예루살렘 성전의 기초는 12m의 크고 단단한 기초석 위에 세워졌다. 새로운 종족인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기초석이 되셔서 오늘도 계속 건물이 완공을 향해 건축되고 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새 성전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만나시는 보이지 않는 장소다. 전 세계에서 구원받은 인간공동체가 하나님의 새 성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나라의 회복을 위해 우리는 두가지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먼저 복음이 땅끝까지 증거되도록 복음전도의 사명에 전념해야 한다. 릴리전(Religion) 뉴스는 유럽의 집시들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전도의 열풍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1100만-3800만으로 추정되는 유럽 전체 집시 가운데 50만-100만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프랑스 내에 210개의 집시교회가 세워졌으며, 1300명이 목회자로 헌신하여 훈련을 받고 있다고 했다. 회심한 집시들은 복음으로 삶이 변화되어 싸움, 음주, 절도를 찾아볼 수 없다고 전한다. 스페인에도 500여개의 집시교회가 있으며 2천여명이 목회자가 사역하고 있다. 유럽의 집시교회들이 하나 하나의 벽돌이 되어 하나님의 새 성전을 짓고 있다.


둘째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해야 한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완전한 그리스도의 몸의 공동체를 이루는 날이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이다. 지금은 이방인의 때라고 불린다. 마지막 때에 유대인들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회복의 날이 있을 것이다. 그 날들을 어떤 신학자들은 7년 대환란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7년 대환란의 목적은 이스라엘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는 구원의 날을 만드시는 하나님의 구속사의 중요한 섭리의 과정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오실 그리스도의 재림을 바라보고, 그 날에 완성될 교회의 영광과 위대한 성취를 바라보며, 이방인과 유대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민족으로 이루어 하나님나라를 상속할 날을 기다리며 오직 그리스도만을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조각품 중에 예수상이 많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예수상이 월드센의 작품이다. 월드센이 예수상으로 유명해지자 프랑스 르부르 박물관에서 그에게 ‘비너스상’ 조각을 의뢰했다. 조각가에겐 최고의 영광이었으나 월드센은 정중하게 거절했다. “내가 이 손으로 주님의 성상을 조각했는데, 주님께 드린 손으로 어떻게 신상을 조각할 수 있겠는가?” 그가 신상을 조각할 경우 자신에겐 명예로운 일이며, 영원히 기념될 일이었으나, 자신의 유익보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손상이 더 크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진정한 하나님나라를 구하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의 비밀, 복음을 깨달은 사람만이 주님을 위해 살 수 있다.

[정진호] 월미도와 이승복

회복과 치유의 신학 – 내 아버지의 뜻


월미도와 이승복


(1)


지난 9월 16일은 연변과학기술대학이 세워진 10주년 기념일이었다. 황량한 북산가 언덕 무덤가에 첫 삽을 뜨고 기초를 놓기 시작한 이래 숱한 고난과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제 어엿한 신흥명문(?)대학의 모습으로 발돋움하였다. 1992년 첫 해에 대학이 세워지기도 전에 마음이 급하여 부설 산업기술훈련원생을 먼저 모집하였었다. 93년 4년제 대학으로 학생을 받을 때만 해도 다른 대학에서 떨어져 오갈 데 없는 학생들을 받아 시작한 무명의 사립대학이었다. 그러나 10년 만에 연변과기대는 동북 3성에 있는 조선족들의 희망이 되었고 해가 갈수록 우수한 학생들이 앞 다투어 입학을 하고 있다. 이제 재학생이 1,500명을 넘어섰고, 2,000명에 가까운 졸업생들이 중국 전역에 흩어져 씨를 뿌리고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날 나는 10주년 행사를 돕기 위해 서울서 합류한 16명의 부흥한국팀(Revival Korea)과 더불어 백두산 천지에 올랐다. 구름 한 점 없는 드문 날씨 속에서 청아하게 모습을 드러낸 초가을의 천지는 태초의 신비 그 자체였다. 그 장엄한 창조의 위용 앞에서 우리는 백두산 정상에 서서 조용한 기도와 찬송으로 내일의 부흥을 위한 영적 조율을 먼저 맞추었다. <한라에서 백두까지, 백두에서 땅끝까지…>라는 타이틀의 부흥 3집을 제작하던 도중에 오른 백두산 정상이었기에 부흥팀에게는 더욱 큰 의미가 있는 산행이었다.


17일 저녁 야외 무대로 펼쳐진 기념 <열린 음악회>에서, 지난 10년을 회고하며 3,000여명의 청중들이 운동장에 운집한 가운데 고형원, 이무하 가수(?)를 앞세운 부흥팀의 기념비적인 만주 공연이 펼쳐졌다. 그들이 만주 벌판에서 목 터져라 외쳐 부른 노래는 대부분 가요였다. 그것은 그들에게도 매우 특별한 경험이었고, 사역의 지경을 넓히는 새로운 시도가 되었다. 무대 앞줄에는 공산당 영도들이 줄지어 앉아서 그들의 노래를 예의 주시하며 지켜보고 있었다. 그 전날에는 이미 가사 검열이 진행되었고 우리는 행여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는 부분에서는 가사들을 건전하게(?)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장장 3시간에 걸친 그 음악회를 감독하고 연출하기 위해 우리 부부는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으로 무대 앞 진행본부에 앉아 있었다. 그것은 실로 보이지 않는 전쟁이었다.


(2)


이곳 만주에서 일하는 동안 종종 내가 있는 이곳이 바로 우리 민족 근대사의 격전지였음을 새삼 체감하게 될 때가 있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우고 알았던 독립운동의 본거지와 역사 유적지들이 바로 인접지역에 흩어져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김좌진의 청산리 전투와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 격전지가 바로 이웃한 화룡현에 있고, 그들이 근거지로 활동했던 북로군정서가 위치하던 곳이 연길에서 두 시간 남짓한 왕청현이다. 그러니, 이곳 조선족들의 가계를 들추어보면 바로 항일독립운동사와 우리 민족의 근대사의 피 어린 애환들이 스며들어 있기 마련이다.


KBS 역사 스페셜에서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에 세워졌던 신흥무관학교의 역사를 추적 방영하는 것을 보며 더욱 감회가 새로웠다. 1910년 만주로 건너간 이회영, 이동녕 등에 의해 교포교육과 군사훈련을 목적으로 길림성 류하현에 세웠던 신흥강습소가 나중에 통화현 합니하로 자리를 옮겨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위한 무관 양성학교로 변신하게 된다. 1920년 폐교될 때까지 10년간 무려 3,000명에 달하는 졸업생을 배출하였으며, 그들이 서로군정서와 북로군정서, 상해 임시정부와 의열단 활동 및 광복군에 이르기까지 해방 전 중국 내 독립운동의 주체세력을 이루었던 것이다.


잃어버린 나라의 독립을 위해 만주로 만주로 모여들었던 지난날의 우리 선조들.. 그들 가운데는 한성에서도 가장 이름을 날리던 대 부호 가문의 이회영, 이시영, 이석영… 6형제의 헌신이 있었고, 일본 육사 출신의 직업 군인으로서 당시의 출세 가도를 뿌리치고 3.1운동 직후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으로 후진 양성에 투신했던 지청천 같은 인물이 있었다. 그들의 손에 키워졌던 제자들이 무릇 3,000명이나 배출되었던 것이다. 그들이 바로 청산리와 봉오동 전투의 주인공들이었으며 광복군으로 마지막까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사람들이다. 훗날 역사에 알려져 독립운동가로 기록되고 또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던 사람들과는 달리 신흥 무관학교 출신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조국의 독립을 바라며 항일 전쟁의 전선에서 이름도 없이 사라져갔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더욱 뜨거워졌다.


그토록 바라던 광복을 이루었건만 국토는 허리가 잘리고 민족상잔의 잔인한 전화가 다시 한번 한반도에 몰아침으로 우리민족은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어야 했으며 또 피눈물을 흘려야만 했는지…. 그 이후 반세기 동안 한반도는 안타깝게도 동서 냉전의 최전선이 되고 말았다. 우리는 형제를 원수로 생각하며 서로의 가슴에 총칼을 겨누어야만 했으며, 그 비극은 21세기에 이른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새롭게 알게된 사실은 남북한의 싸움으로만 알았던 6.25 전쟁이 사실은 이곳 만주의 조선족들까지 직접적으로 깊이 관여한 3국 전쟁이었다는 것이었다.


얼마 전 이곳 작가협회 주석으로 있는 K시인과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그의 부친이 항미원조(抗美援助)전쟁(중국에서 6.25를 지칭하는 말)에 참여했던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중국 인민해방군으로서 명성을 날렸던 팔로군(八路軍) 소속의 군인으로 장개석 군대를 몰아내기 위해 남방의 해남도 최전선까지 배치되었던 그의 부친은 1949년 말 겨울, 갑작스런 상관의 지시로 기차에 올라 어디론가 하염없이 끌려가게 된다. 그가 내린 곳은 뜻밖에 귀에 익은 조선 말씨가 들리는 북한 땅이었고 그는 중공군에서 인민군 장교의 군복으로 갈아입게 된다. 그와 같이 6.25가 발발하기 직전 북한으로 전격 배치된 팔로군은 1개 사단 병력이 넘었으며, 결국 파죽지세로 낙동강 전선까지 밀고 내려갔던 최전방 인민군들은 사실은 북한군인이 아니라 엄격하게 훈련받은 팔로군 정예부대 소속의 중국 조선족 군인들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인천 상륙작전 이후 유엔군이 북한으로 밀고 올라가자 중공군이 쳐들어와 1.4 후퇴를 하게 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중국 조선족 출신의 중공군은 처음부터 인민군 복장으로 6.25에 참전하였던 것이다. 그의 부친은 인천 전투에서 숱한 동료들의 시체를 남기고 결국 퇴각해야만 했던 눈물의 역사를 반추하며 죽는 날까지 아들에게 두고 두고 입으로 전해 주었던 것이다. 그 같은 사실을 알게되자 나는 다시 한번 역사의 회오리 속에서 영문도 모르고 전쟁에 참전해야했던 이곳 조선족들의 애환을 생각하며 더욱 뼈저린 아픔을 느껴야만 했다. 6.25의 민족상잔의 고통은 이곳 만주의 우리 조선족들에게까지 잊을 수도 씻을 수도 없는 아픈 상흔으로 남아있었던 것이다.


(3)


내가 처음 가르쳤던 1회 졸업생 중에서 한국의 고려대학교로 유학을 갔던 한 여학생이 있었다. 언젠가 유학생들을 모아 수련회를 하는데…, 그 여학생이 앞에 나와 처음 한국에 와서 자신이 겪었던 정신적 혼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자기는 유학이 결정된 이후, 마음 속으로 한국에 도착하면 꼭 한번 먼저 가보고 싶은 곳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도착한 첫 주말 부랴 부랴 길을 물어 신기한 전철을 타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곳을 향했다. 그녀가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인천 앞 바다의 “월미도”였다. 무엇이 이 여학생을 그곳까지 이끌고 왔을까? 나는 처음에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곧 그녀의 어린 추억을 들으며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녀는 소학교 시절 어느 날 학교에서 단체로 애국주의 영화를 관람하게 되었다. 그 영화의 제목이 월미도였다. 항미 원조전쟁 시, 인천 앞바다에서 악랄한 미 제국주의 항공기가 폭탄을 비 뿌리듯 쏟아 붓는 가운데 끝까지 사투를 벌이던 인민군 장교의 장렬한 최후를 보며 그 어린 소녀는 너무나 안타깝고 속이 상해서 엉엉 울어버리고 말았던 그 생생한 기억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말로만 듣고 교과서에서 배웠던 인천의 월미도는 그녀가 성장하는 동안에도 잊혀지지 않고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다가 마침내 한국 땅을 밟는 그 순간 그녀의 발길을 그 곳까지 이끌고 왔던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월미도에서 두 가지 사실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고 만다. 첫째는 영화에서 나왔던 그 비참하고 끔찍했던 전쟁터가 이토록 놀랍게 발전한 현대식 거리로 바뀌어졌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이었고, 둘째는 자신들이 그토록 미워하며 증오하던 미국 군대의 괴수 맥아더의 동상이 월미도에 세워져 있는 것을 보게 된 사실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한국인의 대다수가 맥아더 장군을 가장 존경하는 위인 중의 한 사람으로 꼽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그녀는 큰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도대체 그러면 지금까지 내가 알고 믿고 또 증오하던 그 실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이 한국 생활을 시작하는 그녀 앞에 던져진 첫 번째 질문이 되었다.


우리 역시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를 외치며 죽어갔던 이승복 어린이를 교과서에서 배우며 더러는 눈물지었던 세대였다. 죽어가면서까지 ‘공산당이 싫어요’를 외치던 애국소년 이승복의 입을 찢어 죽였다는 그 잔인한 공산당 간첩들이 미워서 치를 떨었던 그 시절이 있었다. 그 세대가 바뀌어 요즘은, 이승복 어린이가 ‘공산당이 싫어요’ 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콩사탕이 싫어요.’라고 말한 것을 잘못 알아들었던 것이라는 유머 개그까지 등장할 정도로 세월은 변했다. 그리고 그 세월의 간격을 뛰어넘어 나는 이곳 중국 공산주의 국가에서 공산당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앞에 놓인 이 간격…. <월미도와 이승복>의 간격을 어떻게 메워야만 할까? 그 세월의 아픔과 거짓과 미움과 허위들을 우리 모두의 마음에서 지우기 위하여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축제의 밤이 무르익어 가고 음악회가 절정에 이르렀을 무렵에, 부흥팀이 기도하고 준비한 노래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 동안 음악시간을 통해 아내가 가르치고 또 아이들 속에서 퍼져나간 두 노래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과 <보리라>를 함께 부르며 우리 안에 감추어진 사랑과 비전의 마음들을 안타깝게 표현했다.



당신은 사랑받기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
태초부터 시작된 아름다운(수정가사임) 사랑은…


이 노래가 울려 퍼질 때 내가 들어온 대학이 어떤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신입생의 고백을 들었다. 그 사랑의 힘으로 저들의 상처를 싸매어 줄 수만 있다면….



우리 오늘 눈물로 한 알의 씨앗을 심는다.
꿈꿀 수 없어 무너진 가슴에 저들의 푸른 꿈 다시 돋아나도록
우리 함께 땀 흘려 소망의 길을 만든다.
내일로 가는 길을 찾지 못했던 저들 노래하며 달려갈 그 길….
그날에 우리 보리라. 새벽이슬 같은 저들 일어나
뜨거운 가슴 사랑의 손으로 이 땅 치유하며 행진할 때….
오래 황폐하였던 이 땅 어디서나 순결한 꽃들 피어나고
푸른 의의 나무가 가득한 세상 우리 함께 보리라.


새로운 10년을 여는 비전 선언문이 낭독되면서 밤하늘을 아름다운 폭죽이 수놓기 시작했다.

[최영기] 금식은 이렇게

행복한 교회 생활


금식은 이렇게


한국 크리스천들에게는 금식이 상당히 생활화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서구 크리스천들은 금식이 무엇인지조차 몰랐습니다. ‘영적 성장과 훈련’을 저술한 리차드 포스터에 의하면 1861 년부터 1954년까지 거의 백 년 동안 금식에 관한 책은 단 한 권도 발간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미국 크리스천들에게도 이제는 금식이 생활화가 되었습니다. 금식에 관하여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책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보통, 금식이라고 하면 일정 기간 동안 음식을 먹지 않고 물만 마시는 것을 말합니다. 음식도 안 먹고 물도 안 마시는 것은 단식이라고 하며, 이는 특수한 상황 하에서 잠시 동안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두 사람, 모세와 엘리야가 음식도 안 먹고, 물도 안 마시고, 40일 단식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은혜로 되는 것이지 정상적인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특정 음식만 삼가고 금식하는 수도 있습니다(다니엘 10:3). 이것을 부분 금식이라고 합니다. 유동식, 즉 우유나 주스만 마시며 금식을 하는 수도 있는데, 이것이 바로 부분 금식의 예 입니다. 대학교 선교 협회 총재인 빌 브라이트와 같은 미국 분들이 장기 금식을 할 때에는 보통 부분 금식을 합니다. 과일 즙, 주스들을 마시면서 합니다. 한국 크리스천처럼 물만 마시며 40일 씩 금식하는 것은 미국 사람들은 상상조차 못합니다.


금식을 시작할 때에는 마지막 식사를 가볍게, 채소 종류로 드는 것이 좋습니다. 에너지를 비축한다고 음식을 많이 들고 시작하면, 금식이 더 힘듭니다. 금식이 끝난 후에는 채소 등 가벼운 음식으로 식사를 시작합니다. 배고프다고 음식을 갑자기 많이 들면 위장을 상합니다. 식사를 조금씩 자주 하고, 주스를 많이 마시는 것이 좋습니다. 크랜베리 주스가 산이 적어, 위장에 자극을 덜 줍니다. 금식을 오래 한 경우에는, 정상적인 식사량으로 돌아가는 기간을 금식했던 기간과 같이 잡으라고 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금식은 하나님 중심이어야 합니다. 살 빼기 위해서, 혹은 정치 투쟁방법으로 안 먹는 것은 굶는 것이지 금식은 아닙니다. 금식의 목적은 하나님에게 집중하기 위한 것입니다. 금식 중에는 기도와 묵상에 몰두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자신을 성찰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저는 장기 금식을 못합니다. 몇 번 시도했지만 5일이 최장기간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일주일에 하루, 수요일은 정기적으로 금식을 합니다. 새해가 시작될 때, 집회 인도를 나가기 전, 교회 성경 공부 개강을 앞두고, 등등에도 하루씩 금식을 합니다. 부흥 집회를 인도할 때에도 저녁에는 금식을 하면서 인도합니다. 금식을 할 때에 신기한 영력과 통찰력이 나타나는 것을 느낍니다.

[함철훈] 날기 전에 달려야한다

eKOSTA 갤러리


날기 전에 달려야한다


자유스러움을 얘기할 때 우리들은 유유히 하늘을 나는 새를 떠올립니다.
지난호의 알바트로스의 사진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멋진 비행을 위해 알바트로스는 높은 벼랑위에 둥지를 틀고 깊은 절벽으로 몸을 던짐으로 날개를 펼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물새들은 이렇게 달려야 합니다.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가 하나의 직선으로 보일 만큼 온몸을 긴장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남은 힘으로 마지막 깃털에까지 피를 보내 단 반차례라도 날개짓을 더해야 합니다.


이 물새들의 날개짓과 푸른 하늘의 알바트로스로 도피성을 얘기하고 싶습니다.


이스라엘 어느 곳에서든지 하룻길(32km)이면 닿을 수 있는 곳에 도피성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도피성을 향한 도로는 14m 이상이 되도록 넓게 닦아 놓게 하셨으며, 길을 잃지 않도록 미클라트(도피성)라는 안내판도 곳곳에 설치해 놓으셨습니다.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실제적 시간과 거리는 아무리 길어야 하루이며, 아무리 멀어야32km라고 하나님은 보증하셨습니다.


단,


잡히면 죽게되는 상황에서의 뜀과, 성문을 두들겨 문을 열게하고, 그 안에 들어가 문이 닫힐 때까지의 긴장을, 우리는 날기 위해 달리는새의 몸짓에서 보아야합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알바트로스의 할강처럼 그 분과 같이 날게 해 주심을 믿어야합니다.
비롯 외간 남자 보아스 발치 이불을 들고 그 곁에 누워야하는 룻의 떨림이 내게 있드라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