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호] 제 8 떡 – 공동체의 제사 – “열린 우리 떡”

 

(1)


한국인만큼 공동체적인 민족이 있을까? 한국인은 홀로 있기를 두려워한다. 어떻게든 내편을 끌어들여서 우리를 만들고 만다. 우리 집, 우리 가족, 우리 남편, 우리 마누라, 우리 편, 우리 동네, 우리 가문, 우리 학교, 우리 지방, 우리민족, 우리나라, 우리 은행……. 그리고 마침내 <열린 우리당>이라는 희한한 이름의 정당까지 생겨났다. 본질적으로 “우리”는 “너희”를 배제시키는 배타성을 지닌 “닫힌” 개념이다. 그런데 그것을 “열린” 우리당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논리적 모순이다. 비장한 각오가 느껴지는 희화적인 이름이 아닐 수 없다. 그만큼 닫혀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토록 목숨걸고 우리를 만들고 나서, 그 속에서 박터지게 싸운다. 더 나은 우리를 만들기 위해서다. 우리의 결속을 다지기 위해서다. 우리는 우리의 우리가 단단하게 닫혀있을 때만이 심리적 안정감을 이룬다. 그러다 보니 우리의 우리는 끝없이 깨지고 갈라진다. 그러나 갈라진 작은 우리 안에 들어가 있다보면 다시 불안해진다. 주변에 더 큰 우리들이 눈에 띄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제는 더 큰 우리가 되기 위해 목소리를 높인다. 깃발을 흔들고 머리띠를 두른다. 그리고 뛰기 시작한다. 운동원이 되고 운동선수가 되고 조기축구회가 되고 응원단이 되고, 그러다가 공이 구르기 시작하면 함성을 지른다. 오 필승 코리아 그 함성이 광화문에서 시청앞으로, 경기도에서 충청도로 전라도에서 경상도로 강원도에서 제주도로 퍼져나간다. 아니 아예 전 세계에 퍼진 조선족들에게 파도처럼 전파된다. 그 함성이 “따당따 단딴“하는 민속 장단 안에서 어느 순간 붉은색으로 획일화 된다. 단일민족이 단색민족이 되는 것이다. 갑자기 그동안 기를 쓰고 만들었던 수많은 우리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하나로 뭉치기 시작한다. 작은 물방울들이 모여 시냇물을 이루고 시내가 합하여 강줄기를 이루고 강물이 합하여 바다를 이루듯, 폭포수처럼 노도처럼 흘러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온 나라가 하나가 되는 감격을 이루어낸다. 마침내 우리는 하나의 우리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 함성이 지나가고 나면, 연극이 끝나고 나면, 촛불이 꺼지고 나면……. 서서히 우리는 다시 작은 우리들을 만드는 그 옛 자리로 되돌아간다. 국회가 다시 열리고, 싸움은 다시 시작된다.




(2)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한다. 사람은 관계와 관계 속에서 부대끼며 살아간다. 비록 그것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관계가 아주 없는 무관심 속에서 방치되는 것보다는 낫다. 절대적 무관심 속에 놓이는 것만큼 무서운 것이 있을까? 이 광대한 무생물적 우주 안에 만일 나 홀로 존재한다면 그 얼마나 끔찍한 일일까? 무인도의 로빈슨 크루소도 프라이데이라는 대화 상대가 있었기에 생존을 위한 용기가 생길 수 있었던 것이다.


인간은 창조 시부터 더불어 대화하며 공존하도록 만들어졌다. 그것은 창조주의 속성에서 비롯된다. 우주 만물은 엘로힘(Elohim)으로 표현된 창세기 1장의 복수형 하나님이 합력하여 창조한 합작품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사람을 창조할 때에는 그 복수형 하나님이 서로 의논하며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고 분명한 설계자의 의도와 계획을 나타냈다. 그것은 인간 지놈 프로젝트(Human Genome Project)와 비교할 수조차 없는 지상 최대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프로젝트였다. 프로젝트의 기획자와 매니저와 실행자인 삼위일체 하나님이 함께 일한 팀 사역(team ministry)의 결과였다. 하나님의 형상(the image of God)으로 표현된 인간의 속성 속에는 하나님의 인격성(personality)과 도덕성(morality) 뿐 아니라, 반드시 영육(靈肉)의 대화를 통해 교통하도록 설계된 영적인 속성(spirituality)이 들어 있었다.


사람이 영적인 존재라는 것은 공동체적인 존재라는 뜻이다. 그것은 반드시 대화를 통해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뜻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이 독처(獨處)하는 것을 좋게 보지 않으셨다.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가정이라는 공동체를 이루게 하셨다. 그 속에서 창조의 목적인 사랑을 이루게 하셨다. 사랑은 창조의 목적인 동시에 결과이기도 하다. 공동체는 사랑을 통해 유지될 뿐 아니라 재생산된다. 사랑은 창조의 시작이요 끝이다. 사랑은 공동체를 충만히 채우는 하나님의 영이다. 하나님의 입김이요 숨결인 것이다. 그 속에서 공동체는 하나님의 사랑을 배운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 사랑도 함께 떠났다. 사랑은 본질상 믿음을 기초로 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더 이상 믿지 않았을 때, 그 사랑은 식기 시작했다. 사랑이 차갑게 식어가고 사라져 가자, 공동체는 서서히 파괴되었다. 그리고 온갖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교만과 탐심과 배반과 폭력과 살인과 전쟁이 일어났다. 마침내 사랑이 깨지고 분리가 일어난 것이다. 죽음을 향한 긴 그림자가 공동체 안에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가정과 사회와 민족과 국가라는 인간이 속한 모든 공동체에 분리의 영이 활동하며 온갖 상처와 아픔을 만들어 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이 역사였다. 우리의 아픈 역사들 

그 공동체의 상처들을 치유하며 회복하기 위해 예수가 왔다. 예수는 갈라진 모든 관계들을 다시 회복시킨다. 십자가 안에서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먼저 치유된다. 그리고 나면, 나와 나 자신과의 관계, 나와 너 사이의 관계, 그리고 나와 우리들 사이의 관계들이 회복된다. 마침내 그 회복은 나와 그들 사이, 나와 원수 사이, 나와 모든 피조물 사이의 관계로까지 확대된다. 무관심 속에 방치되었던 “나와 그것(I and it)” 사이의 관계가 “나와 너(I and You)”의 관계로 회복되면서 “우리”라는 공동체가 다시 형성되는 것이다.



(3)


갈라진 우리 민족, 남과 북, 남과 남, 조선족과 고려인, 재일동포와 사할린 동포, 재미 교포와 캐나다 교포……. 지난날의 뼈아픈 역사를 통해 우리는 산산이 부서졌다. 그 나뉨의 역사를 극복하고 하나됨의 새 역사를 이루기 위해 우리는 이곳에 왔다. 연변과기대 공동체는 13개국 이상에서 모여든 다민족 복합 공동체이다. 점심시간 식당에서 식사를 하다보면, 한 테이블에서도 여기저기 중국어, 한국어, 영어, 독일어, 불어, 일어가 뒤섞이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그 뿐이랴? 황인종, 백인종, 흑인종이 함께 어울리고, 더러는 가정을 이루고 살아간다. 바벨탑에서 갈라진 언어와 민족이 성령 강림 시에 다시 하나로 합해지기 시작했다면, 그를 방불케하는 역동적 현장이 바로 연변과기대이다. 제각기 서로 다른 배경과 문화 그리고 소속 단체들을 통한 다양한 생각들이 모여 있는데, 어떻게 이렇듯 조화를 이루고 한 가지 목적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지? 그저 기적이라는 말 이외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한 마디로 연변과기대는 에큐메니칼 운동을 온몸으로 실천하고 있는 교육의 산실이다. 그 속에서 우리 민족의 회복 뿐 아니라 중국을 너머 온 열방과 인류를 섬기고 감싸는 박애정신이 배출되고 있다. 놀랍지 않은가?



그런 공동체라면……. 어쩌면 더 이상의 나뉨과 분열은 존재할 수 없을 것도 같은데? 과연 그럴까? 그들은 더 이상 갈등도 다툼도 없이 지내고 있을까? 천만에 말씀이다.

솔직히 현상 그대로를 들여다보자. 언어가 서로 다른데 왜 불편함이 없겠는가? 언어의 장벽에서 오는 오해와 실수들은 매일 지속되는 일상이다. 서로 다른 문화 배경에서 오는 갈등은 어떠한가? 서양과 동양의 문화차이에서 오는 몰이해는 심각한 오해를 낳기도 한다. 특별히 한국인 중심으로 진행되는 빨리 빨리 문화, 즉흥적인 감성중심의 의사 결정, 좌충우돌 하루가 멀게 달라지는 규정들, 하루 전에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쇼트 노티스(short notice)……. 이런 것들은 서양 사람들, 특히 합리적인 독일 사람들의 눈에는 기이하게 여겨질 뿐아니라 그들을 화나게 만든다. 음식 문화가 그렇게 다른데… 날마다 식당에서 2,000 여명의 학생과 교직원이 한 가지 식단으로 자신을 죽여야 하는 그 인내심에 오히려 탄복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외형적 차이에서 오는 갈등보다도 더 힘든 것은 역시 모든 사람들의 마음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는 에고(ego)의 부딪힘 들이다. 게다가 이곳까지 몰려든 사람들이란 대개 개성이 “개 같은 성질”을 나타내는 특별한 종자들이다. 좋게 말해서 개성이지 달리 표현하면 한 마디로 독종들이다. 독특한 종자들이란 말이다. 좋은 환경들을 스스로 버리고 일부러 고생을 찾아서 몰려든 족속들이니 보통 사람들은 아닌 셈이다. 이들이 200여명, 아니 가족까지 합하면 500명이 넘는 대 식구가 모여 있으니 문제가 없을 리 없다. 이런 종자들의 특징은 보통 양보할 줄을 잘 모른다는 점이다. 모두 자기가 제일 잘난 줄로 착각한다. 그러니 자기주장이 항상 옳을 수밖에 없다. 우월감이다. 더구나 현지인들에 대한 문화적 우월감을 항상 안고 있으니 습관적 우월감을 나타낸다. 이런 우월감들이 부딪치기 시작하면 못 말린다.



그런데, 사실은 우월감이란 열등감의 적극적 표현에 불과한 것이다. 모든 사람은 사실 본질적 열등감에 빠져있다. 실낙원의 순간,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그 영적 퇴화(degradation)가 발생한 그 순간부터 전 인류는 열등감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하나님의 완전성을 경험한, 아니 하나님의 그 완전한 형상이 담겨 있던 그 추억 속에서 걸어 나와 이제 초라한 죄인의 타락한 모습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 인간의 실존은 “열등감에 귀속된 상태”가 되고 만 것이다. 따라서 학력이 높을수록, 외모가 좋을수록, 돈이 많을수록, 권세를 누릴수록 그들은 더 큰 열등감 속에서 신음한다. 끝없이 자신을 더 높은 자리와 비교하며 그 비교의식 속에서 눌려서 살아간다.

이론적으로 보면, 그런 죄인들이, 아니 중증의 환자들이 200여명 모여 있는 공동체니 얼마나 문제가 많으랴? 결국 문제는 비교의식이다. 헌신의 마음을 가지고 왔지만 눈앞의 현실 앞에서 고민한다. 사역지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외형적 차이와 직분들, 그리고 받은바 달란트가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그 가운데 자신의 모습을 남과 비교하면 어쩐지 초라해 보이기도 하고 앞서서 나가는 동역자에 대한 공연한 질투심이 발동하여 힘들어지는 것이다. 온갖 석사, 박사들, 교수들이 모인 대학 공동체이니 잘난 사람이 좀 많겠는가? 거기다가 내놓고 드러내지 못하지만 M과 P의 자격증을 가진 사람들이 또 얼마나 많은지? 영적 우월감은 이건 세상적(?)인 우월감하고 또 다른 차원의 골치 아픈 문제다. 자기만의 도그마를 내세워 도무지 타협할 줄 모르는 족속들이 바로 이들 아닌가? 갈라지고 쪼개지는 데는 관록이 붙은 명수들이다. 그런 곳에서 훈련받은 정예부대들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나타나는 경쟁심리와 높아지려는 마음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다. 그런 마음들을 다 내려놓고 왔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저 피상적인 착각일 뿐이다. 물질에 대한 욕심들을 뿌리치고 가난한 삶을 스스로 택한 것은 일단은 가상한 일이지만(이 문제조차 사실 완전히 극복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한 고개를 넘고 나면 더 험준한 고개가 기다리고 있다. “먹음직한 유혹” 너머에는 “보암직한 유혹”이 기다리는 것이다. 명예심, 성전 꼭대기에 올라가서 만민에게 자신을 보이고 싶은 우쭐대는 마음, 그것이 더 강한 집착으로 다가온다. 더 이상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섬기면서 살리라 하는 결단과 다짐을 하고 건너온 곳이지만, 그 결심은 홍해바다를 건너며 은혜 받을 당시 잠시 뿐이었다. 광야 생활이 시작되면 곧 불평불만이 터져나오며 갈등이 시작된다. 과거 애굽 생활의 옛 습관들이 여지없이 나타나는 것이다.

미국서 건너왔던 한 동역자 부부가 2년의 사역을 마치고 다시 돌아갈 때, 그 자매가 아내에게 찾아와서 눈물로 고백한 일이 있다. 그동안 자신이 마음속으로 아내에게 너무 많은 죄를 짓고 떠난다는 것이다. 겉으로 화려해 보이고 음악을 통해 항상 앞자리에서 돋보일 수밖에 없는 아내의 모습이 그녀에게는 항상 걸림돌이 되었다. 떠날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가까이 대화하는 가운데 아내에 대해 바로 알게 되었던 것이다. 초창기부터 함께 있었던 사람들은 아내가 자신의 우상들을 내려놓고 헌신하게 되는 지난 10년의 과정을 지켜보았기에 아내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항상 사랑으로 격려해준다. 그러나 그 과정을 모르는 새로운 동역자들 가운데는 겉모습만 가지고 판단하며 더러는 질투심에 빠질 수도 있다. 마음속으로 아내를 정죄하며 지내었으니 그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연변과기대 교직원들의 영적 성장 곡선을 대략 시간대 별로 그려보면, 처음 도착할 시의 충만한 기쁨이 첫 1년을 지나면서 점차 하강한다. 예상치 못했던 공동체 내의 불합리한 모습과 동역자들의 단점이 보이면서 실망하는 과정이다. 그것이 더러는 강한 불만과 정죄로 표출되는 사람들도 있다. 2년을 넘기면서 그 실망은 최저로 하락한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 고비를 넘기지 못한 사람들은 사역지를 떠나기도 한다. 그러나 3년차에 이르면 점차 사역의 본질을 깨닫고 외적인 환경보다는 하나님과 자신과의 깊은 관계 속에서 새로운 사역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영적 상태가 상승하며 안정된 사역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이런 복잡하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한 마음으로 한 가지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공동체를 이루어낸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연변과기대가 보여주고 있는 공동체적 연합은 다른 어떤 공동체에서도 발견하기 어려운 특이한 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 기적의 비밀이 어디에 있을까?


광야 생활을 시작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는 성막을 짓도록 명하고 그 속에서 여러 가지 제사를 드려 하나님 앞에 나아가도록 한다. 번제와 소제와 화목제와 속죄제와 속건제… 수 많은 제사 중에서 특별히 공동체의 연합을 위해 드리는 제사가 소제(grain offering)이다. 소제는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다. 양과 소와 염소를 잡아 피를 흘려드리는 다른 제사와는 달리 소제는 곡식을 고운 가루로 갈아서 기름과 유황으로 반죽을 하여 화덕에 구어 무교병의 떡을 만들어 드린다. 소제야말로 딱딱한 곡식 알갱이와 같은 자아의 덩어리를 잘게 부수어 한 덩어리의 떡을 만들어 올리라는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요청이다. 곡식을 빻을 때, 외형적인 큰 힘이 가해지지 않으면 좀처럼 알갱이가 부서지지 않는다. 맷돌로 갈든지 방아로 내리찧든지 큰 물리적 힘이 가해질 때 곡식 알갱이들은 서로서로의 어깨를 부딪치며 산산조각이 난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대학을 세우다보니 나타나는 여러 가지 외적 압력이 오히려 공동체를 잘게 부수고 가루로 만들어 연합하게 하는 동력으로 작용함을 보게 된다. 그 속에서 곡식들끼리 서로 부딪쳐 가루가 되며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하나의 반죽을 이루게 한다. 그것을 뜨거운 화덕에 굽는 것이다. 광야생활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신들의 감추어진 탐심과 교만을 드러내며 곧은 목을 연하게 하고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하는 연단의 과정이었다면, 연변과기대 공동체의 사역 역시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을 광야로 내몰아 그곳에서 연단시키며 변화시켜서 마침내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기에 적합한 사람들로 만들기 위한 성화과정임을 깨닫는다.

공동체의 떡을 만들 때, 여호와께 드리는 소제물에 누룩과 꿀을 넣지 말도록 레위기는 기록하고 있다.(레 2:11-3) 누룩은 공동체를 부풀리는 교만이요, 꿀은 공동체를 유혹하는 탐심이다. 아울러 처음 익은 것으로는 드리되 향기로운 냄새를 위하여는 단에 올리지 말도록 경고하고 있다. 연변과기대를 찾는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 처음 이 땅에 발을 내 딛을 당시의 깨끗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항상 일하라는 말이요, 자칫 매너리즘에 빠져서 스스로 선한 체 하며 외식과 위선으로 사역을 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 위에 반드시 소제물에는 언약의 소금을 치라고 명하고 있다. 소금처럼 변치 않는 십자가의 언약이 늘 공동체를 부패하지 않도록 지키는 방부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연변과기대 공동체가 매주 드리는 예배는 대단히 특별한 감동을 가져다준다. 직접 체험해본 사람들이 아니면 도무지 알 수 없는 깊은 은혜가 예배의 시종을 통해 강물처럼 출렁임을 느끼게 된다. 예배를 통해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며 하나됨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소년에서 청장년과 노년층이 함께 드리며, 각종 배경이 다른 사역자들이 함께 모인 공동체가 단일 예배를 통해 기쁨을 찾고 영적 만족을 누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그러나 그것을 정성드려 준비하는 과정 속에서 이미 성령의 하나됨이 나타난다. 헌신자들의 모임이기에 받을 수 있는 특권인지도 모르겠다. 외지에서 잠시 방문하는 분들도 여지없이 그 감동에 휩싸여 눈물을 흘릴 때가 많다. 찬양과 기도와 말씀과 봉헌이 함께 어울어진 하나됨의 제사, 어쩌면 그것이 연변과기대를 지난 10여 년 동안 지탱할 수 있도록 한 내면의 힘이요 원동력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예수는 제자들을 두고 떠나기 전에 최후의 만찬과 성만찬을 통해 그리스도 공동체의 하나됨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반복해서 가르친다. 하나됨은 성삼위 하나님의 속성이기에, 자신이 하나님과 하나됨 같이 제자들도 자신 안에서 하나되어야 함을 가르치고 그것을 위해 중보한다. 자신이 가르친 제자도의 성패가 그들의 하나됨에서 좌우될 것임을 또한 예언한다. 세상 사람들은 제자들이 행한 일로 인해 그들을 인정하기 보다는 그들이 하나되어 서로 사랑할 때 비로소 그들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알아볼 것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리될 때 비로소 낱알과 같이 흩어져 있던 제자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그들의 삶이 산제사로 드려지며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것이다. 그 속에서 다른 동역자를 인정하고 다른 사람의 장점을 서로 칭찬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뿐만 아니라 잘난 큰 아들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하고 망가진 배고픈 둘째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을 깨닫게 된다.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산산이 찢기고 피 흘렸던 예수의 몸이 다시 회복되어 “새 한 몸”이 되는 것, 그것이 교회요 그것이 예배의 본질이다. 그것을 날마다 체험하기 위하여 예수를 기념하며 우리는 성찬(Eucharist)을 드린다. 멜기세덱의 제사를 통해 나타났던 떡과 포도주의 삶에 동참하는 것이다. 눈물의 성찬을 통해 우리의 죄악은 씻겨져가고, 낱알에서 가루로 고운 가루에서 다시 한 덩어리의 떡으로 드려지는 완전한 하나됨의 공동체 “우리 떡”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떡은 우리끼리 먹고 누리기 위해 만든 떡이 아니다. 우리에 들지 못한 수많은 다른 양들이 먹어야 하는 그런 떡이다. 따라서 “열린 우리 떡”이다. 그러하기에 연변과기대의 하나 된 “우리 떡”을 품고 저 북녘의 집나간 배고픈 동생들을 찾아 나서는 평양과기대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반영운] 환경을 생각하시는 어머니

이코스타 2004년 5월


미 국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에 들어온 지도 벌써 두 달이 되어가고 있다. 가족과 함께 지내면서 스위트 홈을 꾸려 보려는 알뜰한 욕심을 주께서 아셨는지,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그간 그렇게 닫혀있던 한국 행 문을 열어 주셨다. 그 동안 아내와 아이는 물론 부모님과도 오래 떨어져 지냈었는데, 주중에는 부모님과 함께 지내고 주말에는 가족과 함께 있을 수 있는 장소에 직장을 주셨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내도 양가 부모님도 모두 기뻐하시며 가족이 함께 살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하고 있다.


귀 국하자마자 직장에 출퇴근하는 문제로 고민을 하다가 직장 근처에 사시는 부모님께 신세를 지기로 했다. 아니 어머니의 강력한 엄포에 눌려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 사실은 지난 몇 년 동안 어머니께서 무릎 신경통, 허리 디스크로 많이 편찮으시기 때문에 학교 근처에 살면서 주중에 들러 보살펴 드리려고 했는데, 자식의 생각과는 달리 당신께서 힘드시더라도 밥 한 끼라도 손수 차려주고 싶으시다는 사랑의 명령에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었다.




부모님 댁에서 걸어서 약 25분 정도 걸리는 위치에 직장이 있고, 오가는 길에 나무도 많이 있어 학교를 걸어 다니기에 안성맞춤이다. 주로 월요일 아침에 버스를 타고 내려와서 금요일까지 있다가 오후에 아내와 아이가 있는 집에 가서 주말 내내 아이의 재롱에 시간가는 줄 모르곤 한다.

주 중에 저녁 또는 아침 시간을 부모님과 함께 하면서 눈에 띄게 두 분의 기력이 쇠하신 모습을 발견한다. 건장하시던 아버지도 이제 키가 많이 작아지셨고 얼굴에 주름이 많이 생기셨다. 어머니께서도 발목 부분과 무릎 관절과 허리의 통증으로 많이 괴로워하신다. 25년 전 필자가 고등학생으로 식물 인간이 되어 병원을 전전하던 시절에, 누워 지내던 자식을 붙들고 하염없이 우시며 어떻게든 살길을 마련하려고 동분서주 하시던 어머니를 생각할 때면 더욱 더 마음이 아프고 괴롭다. 당신께서 그렇게 아프고 힘드시면서도 다 큰 자식이 20년이 넘는 세월을 지나 이제 함께 살게 되니, 한 편으로는 너무나 기뻐하시며 또 다른 한 편으로는 괴로워하신다. 왜냐하면 이제 당신의 몸이 힘들어서 자식에게 주고 싶고 먹이고 싶은 것을 하실 수 없기 때문에 눈물짓곤 하신다. 아, 나는 언제나 어머니의 그 깊은 사랑을 이해할 수가 있을까? 주께서 주신 아이를 키워가면서 그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조금이라도 만져 볼 수는 있을까?


부 모님과 함께 살면서 어머니의 생활 속에 환경을 생각하고 아끼시는 모습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의 일상 생활, 특히 가정 생활 속에 환경을 보호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로 외치지만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는 안타까움을 지난 호에 고백한 적이 있는 필자에게, 어머니의 생활은 좋은 본보기가 될 듯하여 외람되지만 여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어머니께서는 학벌이나 학식 면에서 내세울 것이 없는 아주 평범한 가정 주부이시다. 어릴 때부터 보아 온 어머니는 늘 청결하고 근면하고 검소하신 분이셨다. 지금도 그 때나 다름없이 그 모습 그대로인 것에 놀라곤 한다. 너무 깔끔하고 단정하셔서 자랄 때는 조금만 옷을 더럽히거나 집을 어지럽히면 야단을 맞은 적이 많이 있었던 기억이 새롭다. 요즘도 그 깔끔함이 옛날 그대로인 것 같아 어머니의 건재하심을 느끼고 새삼 하나님께 감사 드리고 있다. 그러나 원래 깔끔함과는 좀 거리가 있는 필자로서는 그런 어머니와 함께 사는 것이 한 편으로 힘든 면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 이러한 시간도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어머니의 사랑에 듬뿍 젖어보며 어리광도 부리곤 한다.

어 머니의 하루 일과는 아주 단순하다. 무릎과 허리가 아프셔서 운동을 많이 하지 못하시는 관계로, 체중을 줄일 목적으로 새벽 네 시에 일어나 반신욕 (욕조에 더운 물을 받아놓고 가슴 위는 내놓고 하반신을 물속에 담그는 목욕)을 하시면서 그 시간 동안 기도도 하신단다. 30분 정도 반신욕을 마치시면 받아놓은 물로 목욕을 하시고 그 물로 바닥과 변기를 닦으신단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약한 샴푸로 머리를 감으셨는데 환경을 공부하는 아들이 샴푸를 쓰면 물이 많이 오염되니 그 대신 비누로 머리를 감고 식초를 약하게 물에 타서 머리를 헹구면 머리도 부드럽고 비듬도 잘 안 생기게 된다는 말을 들으시고는 그대로 실천하고 계시다. 사실 이 부분이 필자가 꾸준히 실천해 오는 환경보호 중의 하나이기에 자신 있게 권해드린 것인데 아들보다 더 열심히 실천하고 계신다.




아침이 되어 필자가 동네 야산으로 운동을 나가고 나면, 어머니께서는 간밤에 방에 두었던 요강을 씻으신다. 필자는 그간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것인데 이제껏 부모님께서는 밤에 요강을 이용하고 계신다. 아들이 학교에서 퇴근하던 첫 날 저녁, 어머니께서는 요강을 방에 들여 놓으시면서 밤 중에 화장실에 가지 말고 요강을 이용하라고 하셨다. 처음에는 좀 당황스러웠는데 어머니의 하시는 말씀이 너무 일리가 있어서 순종할 수 밖에 없었다. “소변을 볼 경우 수세식 변기의 물을 여러 번 틀게 되는데 물 낭비가 너무 심하니까 요강을 이용해서 나중에 한 번에 물을 조금 이용해서 씻자”고 하시는 말씀이 그냥 물이 아까워서가 아니라는 것을 깊이 느낄 수 있었다. 뒤통수를 크게 얻어 맞은 느낌이었다. 필자를 비롯한 현대인들의 첫 번째 덕목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편리함’의 추구라고 할 수 있는데, 어머니는 분명 세상의 덕목과는 반대로 사시는 것 같이 느껴졌다. 두 분께서 삼십 년이 넘게 사시던 단독 주택을 정리하고 아파트로 옮기신 것은 물론 편리함을 찾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 보다는 오히려 기력이 쇠잔해지셨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적어도 어머니의 그러한 자세를 통해 더더욱 그런 확신을 갖게 된다.

아 주 오랜만에 어머니께서 차려주시는 아침을 먹으며 보이지 않는 눈물을 흘리면서 어머니의 건강이 빨리 회복되길 기도하고 있다. 아침을 먹는 시간 동안 어머니께서는 사십이 넘은 아들에게 이것 저것 먹을 것을 챙겨주시면서, 가끔씩 빨래하는 것이라든지, 설거지 하는 것이라든지, 설거지 하고 남은 쓰레기 처리하는 것이라든지, 폐식용유를 처리하는 것이라든지, 집 안 청소하는 것이라든지, 에너지 사용하는 것 등에 대해 이야기를 하시곤 하신다. 여쭤보지도 않은 것들이지만 자식이 밥 먹는 동안에 심심하지 않도록 배려하시는 어머니의 사랑의 표현이리라. 들은 말씀들을 몇 가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빨래는 아직도 손빨래를 하고 계시는데 폐식용유로 손수 만든 비누를 사용하신다. 빨래하고 남은 물은 화장실 변기를 청소할 때나 바닥을 청소할 때 사용하시고, 헹군 물은 화분에 주신다. 그리고 이제 연세가 드셔서 짜는 힘이 부족한 탓에 짤순이를 이용하여 물만 빼신다. 세탁기를 사용하면 전기도 많이 소비될 뿐만 아니라 빨래가 깨끗하게 되지 않는다고 하시면서 굳이 손빨래를 고집하고 계신다.

둘 째로, 설거지 하실 때는 싱크대에서 하수구로 가는 구멍에 신문지 같은 것을 군데군데 잘라 넣고 음식 찌꺼기를 거르게 한 다음 설거지가 끝나면, 신문지를 펴서 말린 후에 쓰레기를 배출하신다. 아파트로 이사하시기 전에는 단독 주택에 사셨는데 태울 만한 쓰레기를 옥상에서 태우시다가 주위의 신고로 경찰이 출동하는 일이 있어 혼이 나기도 하셨다고 한다. 말씀을 듣고 왜 그러셨냐고 했더니 쓰레기를 너무 많이 내보내는 것 같아서 쓰레기 양을 줄이려는 맘에 그러셨다고 한다. 그래서 어머니께 아무런 조치 없이 쓰레기를 태우면 공기도 오염되고 나쁜 화학 물질이 공기 중에 나와서 안 좋다고 말씀 드렸다. 그리고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어머니께서 아직 부엌세제를 사용하신다는 점이다. 그래서 가루나 쌀뜨물이나 비누로 만든 환경 친화적인 부엌세제를 소개해 드리고 사용을 권해 드렸더니 그렇게 해 보겠다고 하신다.




셋째로, 집안 청소를 할 때는 세제를 사용하지 않고 주로 비누를 사용하고 전기 진공 청소기를 사용하지 않으시고 걸레와 빗자루를 이용하고 계신다. 살면서 여러 집을 다녀 보았지만 어머니의 깨끗함에 견줄만한 집을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다. 어쩌면 괴벽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 돌아보면 물 사용을 많이 하지 않으면서 집안을 깨끗하게 유지하였기에 가족의 건강을 이만큼 지키지 않으셨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이젠 무릎도 아프시고 허리도 아프시니 그만 쉬셨으면 하는 바람으로 대신 청소라도 할라치면 손도 못 대게 하신다. 아들을 생각하는 것도 있지만 두 번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주된 이유이다. 그래도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이 어머니의 높은 기준을 어느 정도 만족시키신단다. 함께 살면서 이젠 자식에게 효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도 좋으련만 그런 것은 말도 못 꺼내게 하신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가끔씩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떠올리게 된다.

넷 째로, 새벽에 일어나서 문안 인사를 드리면 어느새 두 분은 청소도 하시고 아침 식사 준비도 하고 계신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모든 일들을 어둠 속에서 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이제 함께 산 지 두 달이 다 되어가는데 새벽이나 밤중에 거실이나 방이 환하게 밝혀진 것을 본 적이 없다. 거실에서도 형광등을 다 돌려놓으시고 한 개만 불이 들어오도록 하신다. 여쭤보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지만 한 번 그 이유를 여쭤보니 먼저는 전기 세를 아끼기 위함이고 그 다음은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우리의 에너지 현실을 인식하여 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함이라고 하신다. 혹시라도 전열기를 사용하고 나면 반드시 코드를 뽑으시는 어머니의 삶의 지혜에서 경외감마저 들기도 한다.




어머니를 옆에서 지켜보면서 작은 원칙을 실천하는 삶의 아름다움을 느껴보곤 한다. 필자가 고등학교 때 아팠던 것이 계기가 되어 예수를 믿게 된 어머니께서는 아들을 고쳐 주신 하나님에 대한 의리로라도 교회에 꾸준히 다니신다. 속칭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하지 못한다는 말씀으로 당신께서 신앙이 좋지 못하다는 말씀을 하시기에, 지금 하고 계신 일들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위로의 말씀을 드리곤 한다. 우리가 교회에서 배워 온 일면적인 신앙의 모습으로 평가되고 자책하는 모습이 안타까운 뿐이다. 사실상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한다는 것은 평범한 일상의 일들을 사명감을 가지고 주님의 뜻에 맞게 잘 해 나가는 것이 아닐까? 사랑과 희생과 순종과 정의의 정신을 가지고 가정과 직장과 여러 공동체에서 구성원들과 화목하며 서로 존경하며, 수행하는 일들을 공평하고 정의롭게 처리해 나가는 것이 주께서 진정으로 기뻐하시는 예배가 아닐까? 그 중의 하나가 바로 환경을 생각하며 우리의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한다. 필자의 어머니께서 그저 남들이 알아주건 알아주지 않건 상관하지 않고 환경을 생각하는 삶의 원칙을 꾸준히 지켜가시듯이……

어머니, 주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건강하게 사시길 기도합니다. 어머니의 삶에서 좀 더 많이 배우고 싶습니다. 어머니,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박성호] 포스트모던 예배,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이코스타 2004년 5월

미 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구 교회의 예배 흐름에 관심이 많은 나에게 어느날 한 신문 기사 하나가 눈에 쏙 들어왔다. 그 기사의 제목은 “젊은층 중심의 미국교회에서 유행하는 포스트모던식 예배.” 포스트모던 이라는 단어와 예배라는 단어가 함께 공존한다는 사실에 흥분한 나는 눈을 크게 뜨고 기사를 읽어 내려갔다.


기 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그들은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모으는 대신 관자놀이나 가슴에 손을 갖다대는 중세의 명상적 기도를 한다. 이른바 ‘떠오르는(emerging) 교회’로 불리는 포스트모던 세대의 교회들 일각에서 전통적 방식과는 다른 명상적 형태의 기도와 예배방식이 유행하고 있다고 최근 뉴욕타임스가 보도했다. 이 교회들은 비제도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기성교회로부터 ‘젊은이들에게 접근하기 위한 하나의 방식’이라는 찬사와 함께 비판을 동시에 받고 있다.”


지 금껏 미국 교회가 윌로우 크릭 교회나 새들백 교회의 모델을 따라 교회가 주는 구세대적인 이미지를 벗어 던지고 80년대 이후 계속해서 추구했던 모델, 그것을 편의상 구도자 중심의 예배(Seeker-sensitive worship)라고 한다면 이제는 그런 흐름에서 무엇인가 다른 하나의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지금 2,30대 불신자들을 전도해서 겨우 교회에 데리고 간다고 치면 이들에게서 나오는 첫 반응은 ‘교회가 교회처럼 생기지 않았다. 무슨 교회가 마치 월마트 같다’고 하는 식이라는 것이다. 이전의 세대가 형식화된 교회의 예배와 종교적인 형상들에 대해 노골적인 반감을 가지고 극도로 제도화된 것(established religion)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 떠오르는 새로운 세대는 오히려 종교적이고, 영적이고, 초월적인 무언가를 교회로부터 기대하고 나아온다는 것이다. 실제로 7,80년대에 대학생활을 했던 세대에 비해 2000년대에 대학생활을 하고 있는 세대들이 영적인 문제, 초현실적인 문제에 관해 더 깊은 관심을 보였다는 갤럽 조사는 이러한 현실을 증명해 주고 있다.




2004년 2월25일 크리스찬 투데이에 실렸던 이 기사를 좀 더 인용해 보면 어떤 미국 교회의 예배하는 모습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미니애폴리스의 젊은 교회 ‘블루어’에서 열린 최근 토요예배. 대부분 20,30대인 교우들은 의자와 촛불로 채워진 공간 주위에 둥글게 둘러앉아 있고 한가운데는 존 뮤직 목사(37) 가 드럼세트 곁에서 3명의 음악목회팀과 함께 앉아 예배를 이끈다. 여기저기 각종 파이프 끝에 매달려 대롱거리는 등불 아래의 벽들엔 옛 돌십자가와 석상들을 담은 슬라이드와 비디오 등이 비쳐진다. 탈색한 티셔츠와 블루진 차림에다 무스를 바른 머리 모양의 뮤직 목사는 설교 대신 회중들을 3대의 ‘임시제단’으로 초청한다. 제단 위엔 기도제목을 적은 카드뭉치가 놓여 있다… 이들의 일부는 교단에 소속돼 있고 전통교회의 지원을 받고 있다. 이들 대다수는 복음적이지만, 동방정교회나 중세교회, 수도원 등의 고풍을 답습, 중세기도문, 기도 미로, 렉티오 디비나, 고대 성시, 명상문 등을 사용하기도 한다. 브라이언 매클러렌 목사(48세, 시 더리지 커뮤니티 처치)는 아메리카의 광대한 젊은층 인구를 겨냥한 선교적 목회를 “모국어와 모국문화를 사용하는 외국선교”에 비유한다.”

이 를테면 기존 극장 스타일에서 밝은 조명과 현란한 무대장치를 곁들여 현대식 록음악으로 가득 채워진 젊은이 예배 스타일은 더 이상 이 새로운 세대에게 다가서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대신에 우리는 촛불과 향내음을 풍기며 고풍스러운 기도문을 청바지 입은 목사와 함께 명상하며 교회의 주위를 돌며 기도에 열중하는 새로운 세대의 출현을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 새로운 세대가 구세대와 어떻게 다른가, 무엇이 이들을 다르게 하는가 묻는다면 쉽지 않은 답변이 될 것이다. 하지만 한 예를 들자면 구세대의 젊은이들에게 극복하고 타도해야 할 정치적 인물의 표상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대표되는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었다면 이 새로운 미국의 젊은이들에게는 허황된 패권주의로 똘똘 뭉친 조지 W 부시 대통령으로 상징된다고 하는 차이라고나 할까.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모던주의로 대표되는 모델이라고 한다면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포스트모던주의라고 말할 수 있는 차이 정도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대한민국의 젊은이들로 비교해 본다면 아마도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통기타와 청바지 생맥주, 그리고 록음악과 댄스뮤직에 열광하며 머리에 무스를 바른 젊은이들에서 ‘싸이질’에 열중하며 개인홈페이지 파도타기에 매우 익숙한, 그러면서도 정치인들의 모습을 희화화한 시사합성 갤러리에 들락날락 하면서 낡아빠진 정치를 개탄하는 새로운 젊은이들의 출현을 본다면 지나친 상상일까.

그 런데 과연 붉은 악마와 함께 ‘대 한민국’을 외치며 월드컵의 신화를 이루어낸 이 포스트모던 세대의 모습은 한국 교회 어디에 서 있을까? 이들의 예배드리는 모습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가? IT 산업의 활황으로 대단히 발달된 문명의 이기를 즐기는 최고의 IT 강국 대한민국의 N세대들이지만 우리의 예배를 볼 때 아직 포스트모던 예배를 논하는 것은 좀 이른 감이 든다. 미국과 서구의 이 새로운 젊은이들처럼 촛불을 켜고 향내음을 맡으며 오래된 기도문을 따라하며 명상하는 예배를 즐기는 세대의 출현은 아직 우리의 현실에서 상상하기 힘들다. 그러나 준비하는 것은 언제나 최선의 방어책이 된다고 생각한다.




지난 부활주일 예배, 필자가 섬기고 있는 교회에서는 색다른 시도를 해보았다. 기존의 전통적인 부활주일 성가대 칸타타를 하되 젊은이 중심의 열린 예배 현실에 맞도록 예배를 디자인해서 칸타타 중간에 다양한 차원의 시도를 선보였었다. 이른바 다감각적인 예배(multi-sensory worship)을 시도하였던 것이다. 예를 들면 예수님이 고난 받으시는 장면을 성가대가 부르는 사이, 영화 Jesus Film의 한 부분을 편집해서 회중들이 그 장면을 보면서 2000년 전으로 돌아가게 한다. 동시에 음악이 끝날 무렵, 피가 잔뜩 묻은 옷을 입고 가시관을 쓴 예수가 채찍에 맞으며 뒤에서부터 앞으로 십자가를 질질 끌고 나아간다. 살을 에이는 채찍 소리와 함께 회중들은 강렬한 피의 색깔을 바라보며 절망하고 가슴 아파하는 경험을 한다. 조용한 배경음악과 함께 예수를 군인들에게 넘겨주던 아픈 기억을 되새기는 가롯 유다의 처절한 간증이 무대를 가득 채운다. 그가 들고 있는 오랏줄 하나, 그 줄을 가지고 곧이어 그는 자살하는 비운의 결말을 택하지만, 죽음을 앞둔 마지막 가롯 유다의 말 한마디에 회중은 동질감을 느끼며 눈물을 적신다. 동시에 새롭게 성가대의 찬양은 이야기를 진행해 나가는… 뭐 그런 진행으로 예배를 구성해 보았다. 결과는 대 만족이었다. 예배를 하면서 보고, 듣고, 느끼고, 냄새 맡고, 행동하는, 인간의 모든 감각을 통해서 하나님을 묵상하는 그런 예배의 자그마한 효시(曉示)가 되었다.



앞 으로 우리 이민 교회와 한국 교회의 예배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아무도 정확히 예측하기는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의 오감을 자극하며 단순히 듣는 예배에서 다양한 차원의 감각적인 예배로 변해갈 것을 예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교회 밖으로만 나가면 이 새로운 세대들은 이러한 다양한 다감각적인 문화에 너무나도 익숙한 세상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에서도 사실상 냄새 맡는 것만 빼고 나머지는 다 가능한 세상이 되었다. 플래시를 보면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차 한잔을 바라보며 조용한 피아노의 배경음악과 함께 순차적으로 아름다운 시 한줄이 모니터를 가득 채우면서 그와 함께 나지막한 성우의 음성이 한꺼번에 올라오는 종합적인 일들이 진행되고 있는 것을 본다. 단순히 종이에 쓰여진 시 한편을 보는 시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도 이 시대를 준비하며 새로운 세대를 맞을 준비를 해야 한다. 요한 일서의 말씀은 말하고 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한이 외친 세대와도 같이 우리 역시이 말씀대로 우리가 받은 복음을 세상에 전달하기를 꿈꾸는 예배를 준비해야 하는 그런 시대를 살고 있다는 생각이다



좌담회: ‘고난과 공동체’

이코스타 2004년 5월호


이렇게 이코스타 좌담회에 참여해 주신 여러분께 먼저 감사드립니다. 우선 각자 자신에 대해 소개를 해주시겠습니까?


차문희: 저는 차문희이고요 현재 살고 있는 곳은 조지아 아틀랜타입니다. 처음에는 공부하러 미국에 왔다가 졸업하고 교사로 일하면서 계속 공부하고 있습니다. 직장생활하면서 학생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조한상: 저는 조한상이고 시애틀에 살고 있고 전자공학을 전공하는 박사과정 유학생입니다.


권오승: 보스턴에 있는 권오승입니다. 반도체 제조학을 공부하고 있고 보스턴에서 유학생 성경공부를 섬기면서 그레이스 채플이라는 미국 교회에 출석하고 있습니다.


이코스타에서는 1월부터 고난과 공동체라는 주제로 기획기사를 준비하였습니다. 이번 코스타의 주제인 고난받는 공동체, 거룩한 공동체에 대한 일종의 사전준비형식이었는데요, 이 주제가 2004년을 살고 있는 우리 유학생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한번 짚어볼까요?


조한상: 사실 저는 주제가 나온 것을 처음 보고 매우 놀랐습니다. 사실 흔하게 듣는 말 중에 하나가 미국이 편한 곳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위해서 고난을 받을 일을 없다 고난을 받으려면 미전도 종족에게 가보면 잘 알 수 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적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어디에 살던지 고난을 받는 것이고 공동체가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요, 그런 말을 한 다는 것 자체가 고난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잘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고 기독교인이 고난에 대하 나름대로 정의를 내리고 삶 속에 적용될 수 있는 기회가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차문희: 저같은 경우 이번 기사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고 느꼈습니다. 보통 유학생들을 보면 경제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비교적 안정된 사람들이고 처음 미국에 올 때 꿈이나 비젼, 야망을 갖고 오기 때문에 성공 지향적인 삶을 살기 위해 이기적인 마음이 많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고난이 닥쳐오면 내가 왜 이런 고난을 받아야 하는가 내가 성공의 길을 가고 싶은데 하는 사고로 좌절감에 빠지기도 하고 그런 것을 받아들이기 보다는 피해가려는 경향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저도 유학생활을 해보았지만 유학생들은 고난에 부딪쳐도 도전받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것을 피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같습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서 코스탄들이 고난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고난을 하나의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기회가 됐으면 합니다.


권오승: 저도 차문희 자매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다만, 유학생들이 받는 고난에는 제가 생각하기에 두 가지 종류의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유학생으로 살아가면서 겪는 문화적 충격, 경제적 어려움, 학업에서 받는 스트레스 등 일상 생활에서 겪는 어려움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나름대로 성령의 열매를 맺고 사는 것이고요, 두번째는 세상의 가치관에 싸워 살아가기 때문에 예수님의 삶을 살면서 받는 고난이 아닐까 싶습니다. 첫번째 고난은 우리 유학생들의 삶에 많이 발견되는 것이고 성경공부 시간등에서 많이 나눠지는 것인긴 한데 사실 이번 좌담회와 코스타의 주제는 두번째의 고난의 것에 더 강조가 되어있는 것같습니다.


고난이라는 가치를 별로 생각하지 않는 현대 교회에서 고난의 이슈를 머리 속에 담으려고조차 하지 않는 태도가 팽배해 있는 시대에 이번 주제가 아주 가치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부활절의 절기에 맞게 고난이라는 주제와 파편화되어가는 사회에서 기독 공동체에 대해 여러가지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인 것같습니다. 먼저 기독공동체의 여러 경험을 조한상 형제님께서 정리해주셨는데요 그 글을 준비하시면서 어떤 마음이 들으셨는지요?


조한상: 기독 공동체에 대한 정의를 글을 쓰면서 좀 보았는데, 역사적으로 왜 공동체성이 점차 결여되어가는가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현대에 역사에 나타나는 공동체성이 왜 없어졌는가하는 의문에는 공동체에 대한 개념이 중요한 것같습니다.


공동체에 2개의 극단이 존재하는 것같애요. 성경적인 공동체가 어떤 것인가 고민없어서 없거나 우리 공동체가 제일이다는 자부심을 고조하는 공동체게 존재하는 것같습니다. 그래서 나타나는 현상들은 완전히 공동체에 대한 관심이 없거나 공동체에 대한 자부심이 지나친 나머지 교만에 빠지는 두 유형이 있는 것같습니다.


공동체로서 받을 고난을 고민하기 이전에 어떤 공동체를 형성해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바른 공동체를 형성해 가는 과정 자체가 고난을 수반하는 일인 것 같습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생각의 변화가 많이 필요하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권오승: 저도 그 글을 아주 잘 읽었습니다. 한가지 사족을 단다면 예수님의 몸(Body of Christ)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추가하고 싶습니다. 특별히 유학생 집단 같은 엘리트 집단에 던져지는 메세지 중에 하나는 유학생 리더 같은, 훈련된, 잘 나가는 크리스챤은 수퍼 크리스챤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를들면 성경공부 리더가 된다면 학교에서 공부도 잘해야하고 직장에서도 잘해야 하고 기도도 잘하고 성경공부도 잘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심지어는 교회 봉사도 못하는 거 없이 다 잘해야 하고, 상담도 잘하고, 노래도 잘 부르고… 그러나 성경적인 관점에서는 개개인이 수퍼스타가 되기 보다는 각자가 장점과 단점을 서로 맞춰가면서 예수님의 몸을 만들어가고 세상이 상상하지 못하는 하모니를 만들어내는 것에 강조가 더 있는 것같습니다.


고난의 이슈에 이런 원리를 적용하면요, 개인이 고난을 받는 것이 아닌, 공동체가 고난을 받을 때 각 지체가 감당해야할 고난의 영역이 있고 함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고난을 감당해 낼때 진정한 기독공동체의 하모니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편 실질적으로 그런 하모니를 가진 공동체를 별로 보지 못한 점이 중요한 이슈인 것같습니다.


조한상: 역사적으로 보면 한사람의 뛰어난 수퍼 스타같은 지도자에 의해서 세워지고 유지되는 공동체, 그러나 그 사람이 사라지면 철저하게 타락되는 공동체의 모습이 많았습니다. 좋은 지적이신 것같습니다.




예, 공동체가 능력있는 개인보다 중요하다는 말씀이신데요, 예수님에 대한 신앙과 공동체 생활과 떨어질 수 없는 관계가 있음은 우리들의 신앙생활에서도 많이 느끼는 부분입니다. 각자 기독 공동체를 경험하시면서 어떤 모습이 진정한 조화를 추구하는 기독공동체의 모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차문희: 기독 공동체의 바른 모습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선교 단체를 섬긴 경험에 비춰보면서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사실 실망스러운 부분도 많이 있었던 것같습니다.


기독 공동체에서도 직책에 너무 의존하는 경우가 있는 것같애요. 섬기는 사역자와 봉사하러 오시는 분들 사이에 조직 사회가 유지되는 것같거든요. 지위가 높으신 분은 권위를 내세우는 경우도 있고 서로 못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었어요.


두번째로는 기독 공동체는 서로 다른 점을 인정해줘야하는데 다양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자신의 것을 강요하는 것이 많았던 것같아요.


세번째로는 말씀 위주의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같습니다. 예수님의 몸을 권오승 형제님께서 말씀해주셨는데, 기독 공동체의 기초가 말씀을 바탕으로 성립 되는 것이 옳지 않나 봅니다. 물론 친교가 중요하긴 합니다. 먹는게 없으면 안오니까요.(웃음) 교회 안의 공동체도 너무 사회 클럽같은 것을 느끼곤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어느 조직이건 갈등이 있고 그것을 어떻게 해결하는 것이 중요한 것인데 갈등을 부인하고 없는 것처럼 가정하고 피하려고 하는 것은 문제를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놓는 것같애요. 교회에서도 갈등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고 어떻게 이것을 잘 해결할 것인가를 고민하는게 좋을 것같아요.




그런 다양성을 어떻게 담아내야할까요? 보이지 않는 분위기로 다양성을 억압하는 경우도 많이 있는데요.


차문희: 다양성에 대한 훈련 자체도 기독 공동체에 많이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기숙사 RA를 하면서 학교나 세미나에서 다양성에 대한 훈련을 많이 받았는데요, 교회에서도 그런 훈련이 많이 필요하지 않나 싶어요.


조한상: 다양성이 중요하긴 한데 열려 있지만 닫혀 있는 공동체로서의 기독 공동체의 특징으로서 정체성이 중요한 것니까요, 기독 공동체의 보편성과 다양성을 조화하는 기초가 말씀이 될 것같은데요, 삶의 나눔이 필요하지만 말씀 중심으로 공동체의 기반이 분명히 설 때 공동체가 지속적으로 유지될 것같습니다.


교회는 한편 보편성을 가지면서 다양성을 유지하는 균형을 갖기가 어려운 문제이긴 한데요.


권오승: 제가 보기에는 신앙 공동체에는 제자 공동체와 회중공동체의 형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제자 공동체는 예수님의 제자들의 공동체에서 회중 공동체는 바울 서신 등에 나타난 교회에서 볼 수 있는데요. 제자 공동체는 선택과 배제(selection & exclusion), 회중 공동체는 포용이라는 원칙이 보여지는 것같거든요. 예를 들면 교회에서 문맹인 사람과 철학 박사와 같이 성경공부를 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문제가 될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의 몸이라는 이유로 같아져야 한다고 강압할 수는 없거든요. 지혜롭게 동심원적 구조를 세우면 선택과 배제라는 원칙과 하모니를 가져야 한다는 균형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조한상: 밑에서부터의 공동체, 한 사람에 의해 주도되지 않는 공동체가 세워지고 말씀이 소그룹에 기초가 되고 조직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닌 위로 올라가는 공동체가 되면 힘이 생기는 것같애요. 공동체가 조직이지만 조직을 벗어나지 않는다면 공동체로서 실패하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밑으로부터의 공동체 조직이 되면 굉장히 어려워지는 것같아요.




한편 기독공동체가 세상의 공동체 혹은 조직과 근본적으로 다른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면 어떤 것이 필요할까요? 많은 한국 교회가 한국 사람들이 교회에 오니까 오는 사람을 이민에 정착시키고 교회를 통해서 미국 사회에서 적응하고 성공하는게 좋다는 것이 기조인데요 이해가 가는 측면이 있긴한데 문제가 있는 것같습니다. 기독 공동체가 다른 타자를 위한 기독공동체의 정체성을 세우지 않으면 쉽게 교회가 흔들리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조한상: 기독 공동체가 근본적으로 다른 가치를 추구해야 하는 것이 정답이긴 한데요. 나를 포기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는 기독교인, 기독 공동체가 중요한 것인데요, 몇몇의 헌신된 제자가 작은 공동체가 점차 우리가 갖고 있는 이상적인 공동체의 모습이 될 원동력이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차문희: 타자를 위한 공동체라는 표어는 매우 중요한 것같습니다. 교회 공동체 구성원의 역량이 중요한 것같은데요. 제 경우도 교회를 생각해보면 교회 신도수는 어느 정도 되고 재정도 튼튼한데 왜 섬기는 사람이 없는가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 몇몇의 헌신된 제자, 구성원인 제자의 역량이 중요한 것같습니다.


권오승: 때로는 교회에 뭔가를 원하고 찾아오는 사람에게 그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는 것이 가끔은 필요한 것같습니다. 금과 은을 찾는 거지에게 우리가 줄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분명히 말해주는 것이 필요한 것같거든요. 최근 교회에서 섬김이 없는 것보다는 선포(케리그마)가 적은 것이 공동체의 문제가 아닐까요.


신앙의 원론적인 메세지가 없는 상태에서 잘해주는 섬김만으로는 공동체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데 어려움이 따를 것같습니다. 메세지가 좀더 중요하지 않나 싶어요. 물론 이것은 상황에 따라 강조점이 달라질 수 있겠습니다만, 적어도 제가 경험한 유학생의 사회속에서는 그렇습니다.




고난이라는 주제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각자 생활에서 어려움과 시련이 많았을 것같은데 생활의 어려움이나 유학 생활 중의 어려운 점이 있으면 나누어주시겠습니까?


차문희: 저 같은 경우는 고난이 좀 많았던 것같은데요(웃음) 언어의 문제로 힘들었고 남부라서 인종 갈등도 있었고 직장 생활에 적응하기까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미국 어린이를 다루는데 어려운 일이 많이 있었고 오해도 많이 있었습니다. 요즘은 처음 오는 한국 유학생들이 이런 얘기를 하면 다 겪어봐야 하는 일이다라고 말을 해주죠.(웃음)


그러면서 내 자신을 알고 자신을 되돌아보는 기회가 되는 것 같습니다.


권오승: 다른 문화에 적응하느라고 겪는 어려움은 저도 참 많았는데요, 제가 나름대로 생각했던 것은 세상의 가치관에 적극적으로 대항했던 그리스도께서 능욕을 지고 십자가를 지셨던 고난은 아니었던 것같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할 필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받으셨던 고난이었거든요. 앞으로 직장생활을 하면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가치있지 않은 일을 붙들고 오랫동안 씨름해야하는 경우가 있을 것같고 성공보다 다른 방향으로 나가야 하는 것이 앞으로의 고난이겠죠.


기획 기사가 기독공동체의 고난을 연결시켜보려고 노력했는데요, 원론적으로 생각해서 기독인이 또 기독공동체가 고난을 수반하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죄때문이라 하겠는데요, 고난이 창조질서의 붕괴에서 나왔다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 치유책이 나와야 할 것같습니다. 각자 신앙이 고난을 극복하는데 어떤 의미가 있으신지요?


차문희: 저는 유학생 생활을 시작하면서 인터내셔날 미니스트리에서 다시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는데요, 행동으로 보여준 좋은 친구의 전도가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바탕이 되서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삶을 시작하니까 먼저 평안해지고 그분을 의지하게 됩니다. 예전처럼 내가 왜 이래야되지 하고 불평을 늘어놓기 보다는 고난을 통해서 뭔가 또 배우고 있구나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성장하고 있구나 하고 느낍니다. 고난의 결과보다는 과정을 통해 성숙하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나름대로 큐티도 더 열심히 하고 성경공부도 더 열심히하고 있습니다.


권오승: 제가 앞에서 말씀드린 두가지의 고난 가운데에서요, 첫번째 카테고리의 고난은 세상과 싸우면서 생기는 고난은 아니지만 그 나름대로 제 스스로를 돌아보고 예수님 닮은 사람으로 만들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느껴졌고, 두번째 종류의 고난은 그것을 경험할 때 표면적으로 힘들지만 보이지 않는 기쁨이 있었던 것같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신앙이 그런 고난 속에서 아주 자랑스럽더라구요. 사소한 얘기지만 제가 직장생활할 때, 제 신앙의 양심에 비추어 하기 어려운 일을 요구받았을 때, 그러면서 갈등할 때 금방은 아니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기쁘고 평안한 마음이 생기더라구요. 이런 일들을 통해서 스스로 어디에 서야할 것을 확실히 발견하게 됬던 것같습니다. 제 삶에서의 전선(battle line)도 더 명확해지는 것 같고요.


기독인과 기독 공동체의 정체성이 우리의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다시 생각하게 되는데요, 이번 코스타의 주제가 세상에 대해 대항하는 기독공동체가 고난과 더불어 거룩함을 유지해야 할 필요에 의해 정해진 것같습니다. 이번 코스타 주제가 어떤 배경에서 정해지게 되었는지 한번 생각해볼까요?




권오승: 고난을 받음으로써 공동체가 거룩해진다라기 보다는 거룩한 공동체는 고난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요? 이번 코스타 취지문에 잘 나와있듯이 실질적으로 초대 공동체나 모델 공동체들이 가지고 있었던 공통점, 독특성이 있는데 그런 아이덴티티가 고난을 견딜 수 있는 큰 힘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크리스챤 공동체만이 지니고 있는 힘이 닥쳐왔던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는 점이지요. 예수님이라는 궁극적인 목표가 우리안에 약해졌기 때문에 우리안에 당연히 있어야할 영광스러운 모습이 약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고민에서 주제가 잡혔던 것같습니다.


차문희: 유학생들에게 이번 주제가 시의적절한 것같습니다. 이런 주제를 통해서 기독 공동체의 바른 모습에 대해서 올바른 지식과 시각을 심어주길 기대합니다. 대부분 공동체에 대해서 생각을 안하지만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코스타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요, 올해 코스타 컨퍼런스를 준비하면서 주제와 관련되어서 어떤 기대를 갖고 계신지 나누면서 오랜 시간의 말씀을 줄였으면 좋겠습니다.


권오승: 제가 코스타에 참여한 지가 벌써 8번이나 되었네요. 매년 다른 기대를 갖는데요, 저도 이제 박사과정을 마치면서 좀더 세상과 직접 맞부닺치는 단계에 들어갔는데 이번 수련회를 통해서 세상에서 어떻게 지혜롭게 살아가야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배우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함께 공동체의 약해짐을 가슴아파하고 고민하는 시간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차문희: 저같은 경우는 여러 강사님의 말씀을 통해 많을 것을 배웠으면 좋겠고 그것을 공동체에 적용하는 전략을 배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컨퍼런스를 참여함으로써 알게된 지식을 공동체에 최선을 다해서 적용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긴 시간 함께 해주셔서 감사드리고 컨퍼런스 기간까지 코스탄들의 삶에도 고난과 공동체라는 주제가 준비되고 내면화되기를 기도해봅니다. 함께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