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희] 유학생 선교사 가상 인터뷰

이코스타 2005년 5월호

그리스도인으로서 유학생 선교사로 살아야 함을 권면하는 가상인터뷰입니다. 스티븐 고크로저, 신세대를 위한 선교 길라잡이, 박광철, 이렇게 선교하자, 김영동, 교회를 살리는 선교학을 참조하였습니다


(ekosta) 요즘 신속하게 변하는 세계의 모습을 먼저 생각해보았으면 하는데요,


예, 잘 아시겠지만 세계화 등의 영향으로 이전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전세계적으로 이동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문화적으로 다양화되었고 한편 물질주의가 가속화되기도 했죠.


교회적으로는 복합문화교회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를 형성하는 것이죠. 선교도 멀리 떨어진 낯선 곳에서의 복음전파와 교회개척에서 국제도시에 모인 다양한 문화의 사람들에게 다양한 형태로 복음을 전해야 하는 단계로 변화되었습니다. 새로운 선교지는 대도시, 그리고 우리가 관심을 갖고 있는 대규모 캠퍼스 도시가 된 것입니다.


(ekosta) 이런 현장의 변화와 캠퍼스의 상황은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캠퍼스의 중요성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좋겠는데요, 전통적인 선교사 신분 소지자를 꺼리는 나라가 증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유학생에 대한 선교 활동을 그 의미가 더욱 큽니다. 현재 미국 각지의 캠퍼스에는 수많은 이슬람 유학생들이 언제나 복음에 접촉이 가능한 상태에 있습니다. 이들 유학생들을 목표로 한 전도는 매우 효과적일 것입니다.


(ekosta) 이들에 대해서 어떤 시각으로 접근해야할까요?


첫째로 당연한 것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합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셨지만 권력, 성공, 영향력을 벗어 버리시고 희생적인 죽음을 향해 나아가신 분이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에 무지한, 선진국에 와 공부하고 있는 제3세계 학생들에게 나아가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둘째로 인터네셔널 학생들에 대한 선교 또한 전인적 사역이어야 합니다. 흔히 전도와 사회봉사의 양면을 모두 추구해야한다는 뜻에서 통전적 접근(the holistic approach)를 이야기하곤 하는데요, 유학생들은 복음을 필요로 하고 신앙을 가져야하는 사람들이면서 문화적으로 새로운 환경에서 경제적으로 일시적인 빈곤을 경험하는,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에 처해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 정착 때부터 공부를 마무리하는 때까지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도움을 주면서 신앙 생활을 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겠습니다.


셋째, 그들에 대한 비젼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들에게 뿌려진 신앙의 씨앗은 그들이 돌아갈 때 타문화권 선교사로 준비할 수 있는 독특한 상황입니다. 우리 모두 다양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선교에 관련된 사람들인데요, 그들을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훈련시킨다면 사회적 파급효과가 매울 클 것입니다.


(ekosta) 다양한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모이면 장점이 있는 반면 단점도 있을 것같습니다. 인터네셔널 사역의 장점, 단점을 나눠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문화는 다양합니다. 태국에서 전도하려면 불교라는 상황을 이해해야 합니다. 효과적인 전도를 위해서는 문화를 이해하고 접근하는 것이 중요한 전제 조건이겠죠. 다양한 종교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게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해야 하는 과제가 있습니다.


문화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공동체를 형성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 문화는 생각의 틀이기 때문에 그 틀이 다른 사람들이 모이면 불필요한 오해를 낫는 경우가 많죠. 지체라는 측면에서 다양성과 통일성을 적절하게 유지하는 것이 문제의 핵심일텐데요, 쉽지 않은 과제인 것은 분명합니다. 의도적으로 의사교환을 가능한 한 많이 하는 수 밖에 없는 것같습니다.


(ekosta) 문화와 복음이라는 문제가 자연스럽게 제기될 것같은데요.


복음과 문화의 문제에 대한 접근으로 리처드 니버의 그리스도와 문화가 있습니다. 니버는 그리스도와 문화의 다섯 가지 유형을 제시합니다. 복음과 문화의 적대 관계, 즉 문화를 배척하는 태도, 복음과 문화를 동일시하는 태도, 복임이 문화 위에 있다고 보는 태도, 복음과 문화의 역설적인 관계, 복음이 문화를 변혁하는 관계가 그것입니다. 복음과 타문화, 기독교 이외의 문화의 문제인데요, 먼저 자신의 문화를 복음과 동등하게 대하는 점이 문제입니다. 복음과 문화를 혼동하는 것입니다. 한편 모든 문화에는 고쳐야 할 부분이 존재하죠.


정리하면 복음은 사람들이 듣고 믿게 될 때 문화적 형태 안에서 성육신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상황화가 필요한 것인데요, 문화는 복음 전달을 위한 적절한 도구로 사용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이때 모든 문화를 받아들이라는 것은 아니고요, 문화의 부정적인 측면은 도전하고 개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복음은 문화와 구별되면서 문화의 옷을 입고 문화를 변혁하는 진리라고 할까요?


(ekosta) 이러한 지식이 인터네셔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캠퍼스 사역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요?


캠퍼스 사역에 대해서 사도 바울의 모델을 한번 살펴볼까요? 그는 주요 도시에 거주했으며 듣는 사람들의 상황에 적합한 메세지를 전하였습니다. 그는 곳곳에 공동체를 설립하였으며 팀 사역을 하였습니다. 캠퍼스는 주요한 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설교함은 바울의 예지를 본받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또 바울은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되고 율법 아래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율법 아래 있지 않은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유학생들 중 불교의 배경을 가진 사람에게는 불교 승려의 옷을 입고 전도할 수 있고, 힌두교의 배경을 가진 사람에게는 머리를 둘러싸고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ekosta) 이번 코스타의 주제가 한인 학생 디아스포라입니다. 많은 한국 유학생들이 세계에 흩어져 신앙을 지키며 또 전하고 있는데요, 유학생들이 어떤 모습이 되면 좋을까요?


선교사를 분류하는 방법으로 성직 선교사와 평신도 선교사로 나누는 방법이 있습니다. 유학생도 평신도 선교사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습니다. 평신도 선교사는 특정한 직업에 종사하지만 일과 시간 이외에 전도 활동을 하는 선교사입니다. 물론 유학생들은 경제활동에 전념하지 않기 때문에 자비량 선교라고 볼 수는 없겠지죠.


유학생 선교사라는 개념을 말하고 싶은데요, 유학생들은 훌륭한 평신도 선교사로 사역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성숙 단계로 나가는 그리스도인 유학생들은 자신의 독특한 위치를 생각해야합니다.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에게 복음을 전달할 수 있는 위치말입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자신의 삶에 대해서 고민해야만 할 것입니다. 또 유학생들은 학업을 마친 후 교수나 직장인으로 일할 수 있는데요, 하나님의 선교 비젼을 어떻게 자신의 삶에 이어갈 것인가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합니다.


(ekosta) 한국 유학생들이 인터네셔널 사역 혹은 선교를 하는데, 문화적 장벽을 넘어서야하는 측면에서 장단점이 있을 것같습니다. 한국 유학생들은 외국 문화를 접하지 않아서 타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평을 많이 받곤 하는데요, 이런 단점을 극복하고 유학생 선교사로 살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요?


한국인은 단일 문화 상황에서 살기 때문에 타문화나 복수 문화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부족합니다. 타 문화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자기 문화를 삼기 때문에 타문화에 대한 존경심이 적은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문화에는 좋은 면과 나쁜 면이 있으며 하나님 앞에 완전한 것이 없음을 시인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첫째는 폭을 넓히라는 것입니다.
한국 학생들은 의사소통 능력이 많이 향상되었지만 아직 많이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을 만나는데 어색하고 그것을 피하기도 합니다. 언어적으로 문화적으로 열린 자세로 적극적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두번째는 성숙한 신앙인으로서 선교적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신앙의 성숙을 추구하는 것이 요구됩니다. 자신이 남을 도우는데 진정한 관심이 있는가, 책임감과 신뢰성이 있는가, 솔선수범하는 지도력이 있는가, 자기를 낮추려는 겸손이 있는가, 마음 속에서 자신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가 이런 점을 먼저 돌아보아야 합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하나님께 복종하고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는 삶, 하나님이 모든 필요를 채우신다는 신뢰, 낮은 자리를 기꺼이 택하려는 자세, 사역에 대한 열심과 낙심되는 상황 속에서의 꾸준함, 하나님과 교통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즐겨 연구함 등이 선교사에게 요구된다고 했는데요, 사실 이런 자질들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가지는 성령의 열매이기도 합니다. 성숙한 신앙을 추구하면 주위를 돌아보게되며 열매맺는 신앙을 추구하면 유학생의 삶 속에서 자연스레 선교사적 삶을 영유하게 될 것입니다.


(ekosta) 이코스타 독자들에게 권면의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경건한 신앙 생활을 건실하게 추구하는 것이 가장 구체적인 방법입니다. 그리고 구체적인 제자도 훈련에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타문화를 연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분을 모델로 살면 자신의 삶을 자연스레 타문화로 낮추게 될 것입니다. 그분께 더 나아가면 더 낮아질 것이고 더 자신을 선교지로 인도하게 될 것입니다. 유학생 선교사, 그리스도를 닮는 유학생이 유학생 선교사입니다.

[정진호] 제 13 떡 – 내 잔을 마시려느냐? (Can you drink My cup?)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 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Now Jesus, going up to Jerusalem, took the twelve disciples aside on the road and said to them,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Behold, we are going up to Jerusalem, and the Son of Man will be betrayed to the chief priests and to the scribes; and they will condemn Him to death,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박게 하리니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and deliver Him to the Gentiles to mock and to scourge and to crucify.
And the third day He will rise again.”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Then the mother of Zebedee’s sons came to Him with her sons, kneeling down and asking something from Him.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And He said to her, “What do you wish?”
She said to Him, “Grant that these two sons of mine may sit, one on Your right hand and the other on the left, in Your kingdom.”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But Jesus answered and said, “You do not know what you ask. Are you able to drink the cup that I am about to drink, and be baptized with the baptism that I am baptized with?” They said to Him, “We are able.
” 가라사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So He said to them, “You will indeed drink My cup, and be baptized with the baptism that I am baptized with; but to sit on My right hand and on My left is not Mine to give, but it is for those for whom it is prepared by My Father.”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And when the ten heard it, they were greatly displeased with the two brothers.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But Jesus called them to Himself and said, “You know that the rulers of the Gentiles lord it over them, and those who are great exercise authority over them.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Yet it shall not be so among you; but whoever desires to become great among you, let him be your servant.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And whoever desires to be first among you, let him be your slave–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just as the Son of Man did not come to be served, but to serve, and to give His life a ransom for many.” (마태복음 20장 17-28절)


인간의 탄생은 고귀하고 기쁜 일입니다. 그 중에서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탄생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입니다. 그래서 온 세계가 그를 기념하고 함께 기뻐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탄생은 기쁜 일인 동시에 슬픔과 고통을 함께 배태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죄의 심판을 면할 수 없는,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새로 태어난 아기의 앳된 울음 속에도 그의 인생 앞에 닥쳐올 죽음의 그림자가 이미 길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이것이 인생의 역설이요 이중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셨지만 또한 완전한 사람으로 우리 가운데 나타나셨던 분이기에 죽음을 앞둔 한 사람으로 세상을 사셨습니다.


2004년 한 해 동안 가장 많이 팔린 책, <다빈치코드>라는 베스트셀러가 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을 주제로 그 속에서 <聖杯>의 비밀을 파헤치려는 공상 스릴러 소설입니다. 예수가 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 시에 사용했던 잔을 성배라고 부릅니다. 역사 속에서 이 성배에 관한 수많은 추측과 거짓된 소문들이 난무했습니다. 이 소설 역시 다빈치의 그림을 소재로 예수의 신성을 파괴하는 내용으로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그러나 보티첼리와 미켈란젤로를 포함하여 르네상스 시대의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그랬듯이, 레오나르도 역시 인본주의와 고대 그리스의 헤르메스 주의라는 신비적 인간 숭배 사상에 깊이 물들어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비록 그 당시의 많은 작품이 성경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다할지라도 그들의 작품 속에서 이교도적인 내용이 발견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을 근거로 성경을 부인하고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고자 하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일입니다.


아무튼 오늘 다루고자 하는 주제는 잔(cup), 성배입니다.
예수의 일생은 떡의 인생이라고 지난번에 말씀을 나눈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인생 속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또한 잔입니다. 구약시대 예수님의 현현이라고 알려진 창세기 14장의 멜기세덱 역시 처음부터 떡과 포도주를 양손에 들고 나타납니다. 떡과 잔, BREAD AND CUP 이것이 바로 예수 인생의 키워드(key word)였던 것입니다.


떡과 포도주는 잔치에서 빠질 수 없는 풍요와 기쁨의 상징입니다. 예수는 우리를 에덴의 풍요로 다시 초청하여 천국 잔치로 인도하는 생명의 떡과 잔입니다. 그러나 떡이 십자가에서 찢기신 예수의 몸으로서 고난과 희생을 상징한다면, 잔(cup) 역시 성경의 많은 곳에서 오히려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등장합니다.(예레미아 25장 15절, 에스겔 23장 33절, 요한계시록 16장) 이것이 예수의 인생이 지닌 이중성입니다. 잔칫집과 초상집이 공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를 따라가는 제자들인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크리스천의 인생은 기쁨과 고난이 함께 가는 인생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의 마지막 기도에서 그 진노와 심판의 잔을 자신에게서 옮겨달라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님에게 조차 잔은 정말 피하고 싶은 두려운 것이었습니다. 예수가 진정 두려워했던 것은 단순히 십자가에서 당할 능욕과 육체적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한번도 아버지의 곁을 떠난 일이 없던 순종의 아들이 우리의 죄 때문에 심판과 진노의 잔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했기 때문입니다. 즉, 아버지와의 영원한 분리와 유기를 당하는 그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에 대한 영적 두려움이 더 컸던 것입니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완전히 이해하기 힘든 일이지만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실제로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습니다. 버림받는 척 하고 연극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우리가 받아야할 그 고통, 그 형벌, 그 진노의 잔을 그는 실제로 받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두려웠을까?
예수는 그 잔에 대하여 깊이 묵상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피 흘림의 의미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하고 또 생각했을 것입니다.


잔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예수가 십자가에서 흘린 피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왜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려 마지막 한 방울의 피까지 다 흘려야만 했습니까?


우리가 받을 진노의 심판을 대신 받기 위해서?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는 예수의 십자가로 이미 종결된 것이요, 더 이상 우리에게는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을 향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를 위해 전토와 소유물은 물론이요 부모, 형제, 아내와 자식마저 버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져야할 십자가는 과연 무엇일까요?


십자가의 피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는 죄사함의 언약에 관한 구약의 제사입니다. 이 언약은 히브리서에서 밝히 언급한 것처럼 예수의 십자가로 충분히, 일회적으로 완성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양의 제물로 피를 흘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둘째로, 십자가의 피는 죄사함을 받은 성도들에게 던져지는 새 언약(New covenant)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만찬석상에서 제자들에게 미리 잔을 나누며, 그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한글 성경에서는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막 14:24)”라고 그냥 언약이라고만 쓰고 있지만, 한글성경과 NIV를 제외한 영어 성경 또는 원전의 마태, 마가, 누가의 공관복음에는 모두 “새 언약”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곧 우리가 믿는 신약 곧 New testament입니다. 이 새 언약은 요한복음에는 새 계명(new commandment)으로 나타납니다.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벌어지는 제자들의 다툼과 시기 질투를 바라보던 예수께서는 저들의 발을 씻어 종의 본을 보여주신 후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줍니다. 이른바 그 유명한 아가페(Agape) 명령입니다. 이것이 신약의 본질인 새 언약이요 새 계명인 것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 13: 32-5)”


이웃 사랑, 서로 사랑, 형제 사랑에 대한 이 명령, 우리가 목숨을 걸고 지켜야할 이 계명, 이것이 바로 예수가 십자가에서 피 흘리며 우리에게 가르치고 떠난 약속 있는 새 계명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져야할 십자가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채워야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입니다. 구약의 제사가 죄사함의 구원을 위한 언약이었다면, 신약의 제사는 아가페 사랑의 완성을 위한 새 언약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날마다 져야할 산제사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도무지 형제를 서로 사랑할만한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는 이웃을 내 몸같이 결단코 사랑할 수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예수는 피 흘려야 했습니다.


죽음을 앞둔 스승 앞에서 서로 높아지려고 다투는 제자들,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조차 누가 크냐하며 다투는 제자들(눅 22:24)을 바라보며 예수는 자신이 피 흘려 죽지 아니하면 안 되는 이유를 절감했을 것입니다.


결국 예수를 죽인 자들은 로마인들이 아니었습니다. 같은 말을 쓰고 글을 쓰던 유대인들, 가장 가까운 친족들 때문에, 예수를 따른다고 좇아가던 제자들 때문에, 종교지도자들이라고 일컫던 바리새인과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시기 질투에 의해 참소당하여 십자가로 끌려간 것입니다.


오늘날도 예수의 이름을 훼방하는 가장 큰 원흉은 이방인들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몰려드는 무리들 때문에, 교회에서 큰소리치는 집사 장로들 때문에, 예수를 가르치고 전하겠다고 나선 목사요 선교사들 때문에 예수의 이름이 짓밟힙니다. 바로 옆의 한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여 절망할 수밖에 없는 자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서로 높아지려고 시기 질투하고 다투는 자들입니다. 예수를 죽인 자들은 우리들입니다. 예수는 바로 우리 때문에 피 흘려 죽어야 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는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기 직전, 그를 따르던 12제자들에게 처음으로 십자가를 직접 언급하며 자신의 고난에 대한 분명한 통지를 하고 있습니다. 이미 여러 차례 상징적으로 또한 직설적으로 자신이 받을 고난에 대하여 이야기한 일은 있었지만 십자가에 달려 죽을 것을 직접 언급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은 예수가 보인 영적 권위와 말씀의 능력 그리고 기적들을 체험하면서 예수에 대한 나름대로의 환상과 기대를 키워왔습니다. 자신이 따르고 있는 스승 예수야말로 로마의 압제로부터 유대민족을 구원하고 그들에게 오병이어의 기적과 같은 경제적 배부름을 가져다 줄 정치가로서 혹은 민족 지도자로서 이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예루살렘 성을 향한 마지막 입성은 결전을 앞둔 비장함이 흐르는 그런 분위기였을 것입니다. 마가복음10장에 보면 저들이 놀라고 두려워하며 주를 따랐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세베데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가 예수 앞에 나타나 무릎을 꿇고 간청하는 뜻밖의 장면이 나타납니다. 자신의 두 아들을 예수께서 주의 나라를 얻으신 후 권좌의 좌, 우편에 앉게 해 달라는 청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아들을 위한 치맛바람이 등장한 셈입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이 장면을 야고보와 요한이 직접 예수께 간청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들들이 어미를 앞세워 온 것인지 어미가 아들들을 위해 강제로 데리고 나타난 것인지는 모르되 분명한 것은 이들은 예수께서 조만간 왕위에 오를 것이며 그 이후의 권력 배분에 대하여 벌써 관심을 가지고 자리다툼에 들어가고 있음을 알게 합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대하여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가 말한 십자가의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든지, 단순히 비유적인 말씀으로 받아들여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난다는 그 말 속에서 희망을 걸고 초반의 어려움을 겪지만 극적인 반전을 통해 결국 메시아가 승리할 것이라는 그런 상상을 하고 있었음에 분명합니다.


아무튼 이 황당한 요청을 듣고 예수는 그들을 묵묵히 바라봅니다. 어쩌면 속으로 절망에 가까운 슬픔을 느꼈는지도 모릅니다. 삼 년 간이나 데리고 다니며 직접 가르친 제자들이 겨우 이 수준이라니….. 항상 자신의 먹을 떡만 챙기던 제자들을 향해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 둔하냐? 하며 호되게 질책하던 것도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그렇게도 자신의 마음을 모르는지… 이들의 어리석음에 대하여 화가 나다가도 나중에는 측은한 심정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저들의 눈을 번갈아 바라보며 질문을 던집니다.
“너희가 지금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너희가 진정 내가 마시려는 잔을 마실 수 있겠느냐?”
그들은 여전히 큰 소리로 답합니다.
“마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죽기까지 당신을 따라 충성할 것입니다.”
예수는 그들의 대답에 수긍하며 예언적인 말을 다시 던집니다.
“그렇구나. 과연 너희가 장차 내 잔을 마시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의 좌우편에 누가 앉게 될는지는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예비한 자가 앉을 것이니 너희는 상관마라.”


이 대화를 듣고 있던 나머지 열 제자가 이 두 형제에 대하여 분을 터뜨립니다. 안 그래도 예수님이 베드로와 더불어 세베대의 아들들을 특별대우 하는 바람에 마음에 가시처럼 느끼고 있던 그들은 참지 못하고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들의 다툼을 듣고 있던 예수는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어서 제자들을 특별히 불러다 앉히고 일장 훈계를 시작합니다. 이른바 십자가의 정신에 대한, 종의 의미에 대한 강화가 시작됩니다.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교훈의 핵심은 세상의 집권자들이 권세를 부리는 원리와는 전혀 다르다. “너희가 크고자 하느냐? 먼저 섬기는 자가 되라. 너희가 으뜸이 되고자 하느냐? 먼저 종이 되어라.” 하며 종의 제자도에 대하여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세상에 온 이유가 다른 사람을 위하여 목숨까지 바치는 섬기는 종이 되기 위함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러니 너희도 서로 종이 되어야 마땅하지 않느냐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자… 여기까지가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종이 무엇입니까?
흔히 주의 종, 주의 종 하는데……. 과연 누가 주의 종입니까?
종은 주인을 의식하고 사는 사람을 뜻합니다.
종은 주인의 뜻을 헤아리고 주인이 원하는 것을 행하는 자입니다.


믿는 자는 하나님을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모두 주의 종입니다. 특별한 직분을 가진 목사나 선교사만 주의 종이 아닙니다. 종은 주인 앞에 항상 나아가는 자입니다. 주인이 부르면 항상 달려갑니다. 그리고 그가 시키는 일을 마땅히 행합니다. 따라서 종은 곧 예배자를 의미합니다. 예배는 주인의 음성을 듣고 달려가서 그의 뜻을 순종하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얼마 전 예배의 본질에 대하여 살펴본 바 있습니다. 예배는 우리의 행위로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선행과 행위로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모든 노력들은 인본주의적 종교 행위에 불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올라가서 그의 마음을 움직여 상급을 받아내는 것이 예배가 아니라는 말이죠. 예배란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그 음성을 들려주시는 것이요 그 음성에 화답하여 우리가 그의 앞으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방향성이 중요합니다. n-턴이 아니라 u-턴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예배자로 선다는 것은 우리의 삶의 방향성을 완전히 180도로 뒤바꾸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로 나아가는 것, 예배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거기서 모든 것이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종의 역할이, 예배자의 삶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다음 단계가 남아 있습니다.


종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세 가지로 요약 됩니다.
종은 첫째 섬기는 자입니다. 낮은 곳에 임하라는 것이요, 겸손히 행하는 종의 자세를 가리킵니다. 섬김은 주인을 바라보는 자세입니다.
둘째, 종은 순종하는 자입니다. 이것은 종이 지녀야할 정신을 의미합니다.
종은 자기 생각을 행하는 자가 아니요, 주인이 명하는 것을 행하는 자를 뜻합니다. 주인이 원하는 것이라면 죽기까지라도 그 명령을 따르는 것이 종입니다.
셋째, 종은 일하는 자입니다. 충성된 종은 주인의 명한 것을 행하기 위해 부지런히 뛰어다닙니다. 주인이 보든 안보든 최선을 다해 그 일을 완수합니다. 이것이 종의 바른 행위입니다.


벤쿠버에 있는 리전트 칼리지(Regent College)에 폴 스티븐스(Paul Stevens)라는 유명한 신학자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저서 즉 <나머지 6일>이라는 책 속에서 진정한 예배는 주일 하루만 치루는 행사가 아니라 크리스천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나타나는 통전적인 산제사(living sacrifice)가 되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심지어 그는, 마르틴 루터에 의해 촉발되었던 과거의 종교개혁은 구원론의 관점에서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지만, 교회론의 관점에서는 절반의 개혁밖에는 하지 못하였다고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우리가 종의 삶을 통해 진정한 예배자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교회 안에서의 종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이웃을 향한 종의 모습으로 다시 내려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그림에서 나타낸 것처럼 U턴에서 P턴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때 비로소 크리스천의 능력이 세상에 나타납니다.


낮아짐의 능력! 이 사실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학생들에게도 반드시 가르쳐서 내보내야할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만일 U턴에서 그친다면 어쩌면 한국 교회의 수많은 나약한 크리스천들처럼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는 선데이 크리스천만 양산할 수도 있습니다.


P턴을 통해 이웃에게 나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교회를 세우는 일입니다. 교회는 예배 처소나 크리스천들의 공동체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친히 우리에게 본을 보인 것처럼 세상 속의 영적 전투장에서 피를 흘리며 십자가를 지는 종을 통해 비로소 탄생한다는 것이죠. 십자가상에서 예수가 로마 군병의 창에 옆구리를 찔려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다 쏟아내는 그 순간 신랑 예수의 신부된 교회가 탄생한 것처럼 말입니다. 아담이 죽음처럼 깊은 잠에 빠진 그 순간 하나님의 손이 그의 옆구리에서 피 흘려 하와를 끄집어낸 것처럼 말입니다. 교회는 피 흘림의 현장 속에서 세워집니다. 산제사는 U턴에서 P턴으로 다시 내려갈 때 이루어집니다. 그때 비로소 십자가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1)
21장에서부터의 내용은 예루살렘 입성 이후 고난을 향한 급박한 전개가 이어집니다.
그러나 그 모든 내용이 <종의 제자도>를 가르친 예수의 마음 속에 일어나고 있었던 십자가와 <잔(cup)>의 의미에 모두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는 제자들의 모습과 불순종하고 교만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종교지도자들의 모습 속에 나타난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깊은 묵상 가운데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가 죽어야 하는 이유가 높아진 인간들의 교만 때문임을 자각하고 계셨습니다.


1)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겸손한 종의 모습)
2) 성전 청결(성전 회복을 위한 자신의 사역을 천명, 자신을 성전으로 드리려는 상징)
3) 열매맺지 못한 잎만 무성한 무화과 나무를 저주(예루살렘과 이스라엘에 임박한 저주를 예언)
4) 바리새인과 서기관 무리들과의 격돌

-  권위에 대한 도전
-  두 아들의 비유, 불의한 농부의 비유, 혼인잔치의 비유…
-  예수를 시험하는 바리새인들(납세 문제, 부활의 문제,
-  바리새인들의 위선과 악독을 질타함(위선자, 높아지려는 자, 외식하 자, 소경된 인도자, 거짓맹세하는 자, 탐욕과 방탕하는자, 회칠한 무덤들, 선자자를 죽이는 자…) 5)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탄식
6) 종말과 재림의 때에 대한 예언들
7) 종말론적 비유 세 가지(열처녀의 비유, 달란트 비유, 양과 염소의 비유)
8) 마리아의 향유 옥합 헌신: 장사지냄을 예비하심
9) 최후의 만찬 : 떡과 잔을 나눔
10) 겟세마네의 기도


예수의 사역의 본질은 교회를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는 예배당 안의 교회가 아니라 치열한 전쟁터에서 순교자의 피의 터전 위에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자기 자신이 성전이셨던 그분이 피 흘려 세운 그 교회 위에 이제 우리 자신의 몸을 드려 또 다른 교회들을 세워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곳 연길에 와서 하고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대학을 세우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의 사역 자체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어제 그제 우리가 만일 한국이나 미국에 있었다면 우아한 크리스마스 예배를 드리며 교회 안에서 시간을 주로 보냈겠지요. 그러나 이곳 전투장에 나와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포기하고 강의와 회의로 뛰어다녔으며, 소외된 학생들을 집에 초대하였고, 혹은 고아원을 찾아다니며 그들을 섬기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한 일은 예배가 아닙니까? 예배입니다. 오히려 예수께서 진정으로 원하셨던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참 예배, 사도 바울이 로마서 12장에서 권하였던 우리들의 몸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요 교회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평양에 가서 하고자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대학을 세우는 일입니까?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것 또한 교회를 세우는 일이요, 무너져 내린 성전을 회복하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전 회복의 현장에는 반드시 희생과 피 흘림이 뒤따릅니다.


예수는 그것을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습니다. 자신을 모함하는데 온 정신이 팔린 위선적인 종교지도자들과 바리새인을 향해 질타하며, 과거에 그들이 시기 질투하여 죽인 선지자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순교자의 역사를 들추어냅니다. 마태복음 24장 35절을 보면,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하고 부르짖으며 자기 동족 이스라엘에게 임할 저주를 예언하며 통곡합니다. 마치 주기철 목사님이 하나님의 신이 떠나는 평양성을 향해 통곡했던 그 음성으로 말입니다.


이때 예수께서 언급하신 선지자 사가랴가 바로 스룹바벨 성전을 세울 때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스갸랴 선지자입니다. 성경에는 무려 30명에 가까운 스가랴가 등장하지만 예수가 언급한 이 스가랴가 바로 스룹바벨 성전을 짓다가 죽임을 당한 순교자 스가랴입니다. 아버지 바라갸의 이름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슥 1:1) 땅의 선지자 학개와 더불어 하늘의 선지자라 불리며 온갖 정치 경제적인 난관을 뚫고 스룹바벨 성전을 쌓는 그 일에 헌신하였다가 죽임을 당한 선지자 스갸랴를 묵상하며 예수는 자신에게 임할 피 흘림과 잔의 의미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자신의 몸으로 드릴 그 성전 회복의 역사를 묵상하며 스가랴처럼 그렇게 피흘리지 않으면 결단코 세워지지 못할 교회의 다가올 앞길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동족을 향한, 이웃을 향한, 형제를 향한 사랑보다는 질투심에 불타오르는 저들 카인의 후예들을 위해 자신이 피 흘려 죽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그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에게는 자신이 그 당시 구했던 그 잔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자식들의 출세를 위해 예수께 나아와 특별히 간청했던 살로메에게는 자신의 그 말을 되새기며 뼈아픈 통곡을 하여야 할 날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 비교적 잘 알려진 부유한 어부 세베대의 아내로서 두 아들을 키우며 그들이 아비의 기업을 이어가기를 기대하였던 어머니, 그러나 어느 날 메시아를 만났다며 생업과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게 된 두 아들을 위해 함께 예수를 따라다니며 봉양했던 살로메에게는 예수는 자식들의 출세를 위한 든든한 발판으로서 여겨지던 정치가요 실력자로 보였습니다. 그토록 믿었던 예수가 마침내 허망하게 십자가상에서 매달려 죽어버리는 것을 살로메는 바로 옆에서 목도하게 됩니다. (마 27:56, 막 15:40) 그녀의 마음속에서 일어났던 좌절과 절망은 처음에 제자들이 품었던 것과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살로메는 예수의 부활로 인해 새롭게 희망을 품게 됩니다. 아마도 마가의 다락방에 함께 모여 성령 세례를 받게 되었으며 초대 교회에서 열심히 공궤하던 권사님(?) 중에 한 사람으로 변모하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던 중 청천벽력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사도행전 12장에 나타난 것처럼 그토록 기대하고 아끼던 장남 야고보가 사도들 가운데 첫 순교자로 헤롯의 칼에 어이없이 살해되고만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과 더불어 3대 수제자 그룹에 있었던 야고보가 제대로 역할 한번 해보지 못하고 허무하게 죽어버린 것입니다. 아들을 우상으로 살아가던 살로메가 받았던 그 아픔과 충격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장남의 시신을 끌어 앉고 통곡하며 오열하던 살로메는 언젠가 자신이 예수를 찾아가 간청하던 그때의 일이 떠오릅니다. 너희가 내 잔을 마시려느냐고 예수가 던졌던 그 말이 생생히 떠오릅니다. 그리고 그 잔을 받을 수 있다고 큰 소리쳤던 지난 날 자신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예수가 받았던 이 십자가의 잔, 복음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던져야만 했던 그 순교의 잔을 자신의 아들이 가장 먼저 받게 될 줄이야…. 그리고 그 의미도 모르면서 그것을 위해 간청했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생각하며 가슴을 쳤을지도 모릅니다. 살로메의 간구는 받아들여졌습니다. 야고보는 가장 먼저 예수의 왼편 자리에 가서 앉는 제자가 된 것입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천국에서 예수의 왼편에 앉아있을 장남 야고보를 떠올리며 살로메는 자신의 간구대로 들어주신 하나님의 큰 은혜를 절절하게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요즘 저는 셔우드 홀 선교사가 쓴 조선회상이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양화진에 묻혀있는 수많은 개신교 선교사들의 삶과 죽음을 통해 지난날 흑암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있던 참담하고 어두운 기억 속의 우리 민족을 해방시키기 위해 목숨을 마다않고 찾아왔던 그들의 십자가, 그 속에 담긴 떡과 잔의 의미를 다시금 반추해 봅니다.


27살의 젊은 나이에 대동강 변에 뿌려진 토마스 선교사의 피와 순교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던져줍니까? 토마스의 기념 교회가 있던 그 순교의 터 위에 세워지는 평양과학기술대학… 그래서 우리는 그 일을 <스룹바벨 프로젝트>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토마스 선교사로부터 성경을 전해 받은 자들을 통해 세워졌던 평양의 널다리골 교회, 장대재 교회, 장대현 교회와 그 부흥의 역사를 기억합니다. 무너져내린 그 도성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던 예수님의 무겁고 쓰라린 마음을 떠올립니다. 오늘도 그 제단 위에 뿌려질 스가랴의 피와 또 다른 토마스의 피를 묵상합니다.


예수께서는 오늘날도 한국 교회 지도자들을 향해 더럽혀진 성전을 깨끗게 하시며 그들의 위선을 그들의 탐욕을 지적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도무지 깨우치지 못하고 자신의 영욕에 매달려 떡을 움켜쥐느라 바쁜 이 시대의 교회와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 질타합니다.


예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지십니다. 예수를 따르겠다고 좇아 온 우리들을 향해서도 그의 피 묻은 눈길을 보냅니다. 예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십니다. 사역지에서조차 서로 비방하며 싸우며 시기 질투하고 높아지기를 원하는 한심한 우리들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너희가 내 잔을 마시려느냐?


너희가 지금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네 욕심과 명예를 위함이 아니더냐? 민족심 때문이냐? 너희가 과연 자신을 욕하고 비방하며 죽이려 덤비는 저들을 향해 피를 흘리는 이 아가페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겠느냐? 너희가 내가 피 흘려 산 교회와 성전을 짓는 그 일에 스가랴처럼 순교의 피를 흘릴 준비가 되어 있느냐? 아니 네 옆에 있는 한 형제를 용서할 수 있겠느냐? 너희가 진정 죽고자 하느냐? 성배를 찾아 나서는 이 모험에 네 인생을 걸 수 있겠느냐?


진정코 너희가 내 잔을 마시려느냐?





(1) 21장에서부터의 내용은 예루살렘 입성 이후 고난을 향한 급박한 전개가 이어집니다.
그러나 그 모든 내용이 <종의 제자도>를 가르친 예수의 마음 속에 일어나고 있었던 십자가와 <잔(cup)>의 의미에 모두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는 제자들의 모습과 불순종하고 교만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종교지도자들의 모습 속에 나타난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깊은 묵상 가운데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가 죽어야 하는 이유가 높아진 인간들의 교만 때문임을 자각하고 계셨습니다.

1)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겸손한 종의 모습)
2) 성전 청결(성전 회복을 위한 자신의 사역을 천명, 자신을 성전으로 드리려는 상징)
3) 열매맺지 못한 잎만 무성한 무화과 나무를 저주(예루살렘과 이스라엘에 임박한 저주를 예언)
4) 바리새인과 서기관 무리들과의 격돌

-  권위에 대한 도전
-  두 아들의 비유, 불의한 농부의 비유, 혼인잔치의 비유…
-  예수를 시험하는 바리새인들(납세 문제, 부활의 문제,
-  바리새인들의 위선과 악독을 질타함(위선자, 높아지려는 자, 외식하는자, 소경된 인도자, 거짓맹세하는 자, 탐욕과 방탕하는자, 회칠한 무덤들, 선자자를 죽이는 자…) 5)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탄식
6) 종말과 재림의 때에 대한 예언들
7) 종말론적 비유 세 가지(열처녀의 비유, 달란트 비유, 양과 염소의 비유)
8) 마리아의 향유 옥합 헌신: 장사지냄을 예비하심
9) 최후의 만찬 : 떡과 잔을 나눔
10) 겟세마네의 기도

[조근상] 예배는 종교적인 의식이 아니라 삶(Life Style)이다

이코스타 2005년 5월


우리가 이제까지 보았던 것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가 어때야 하는 가를 나누었다. 즉 예배가 어떻게 내적인 관점에서 흘러나와야 하는가 하는 예배의 정신을 배웠다면, 이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 예배자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적인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알아보는 것이다.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우리가 어떠한 상태인가를 알 수 있다. 예배는 잘 드리지만 밖에 나가서는 사람들과 싸우고 화목하지 못하고 자기 멋대로 사는 삶을 산다면 그것은 진정한 예배를 드리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수 없다.


우리가 성전에 가기 전에 형제와 화목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익히 들어서 알고 있다. 찬양을 열심히 하고 손을 열심히 들고 은혜가 있더라도 다른 사람과 항상 불화가 있다면 그것은 유명한 신학자인 T.W 토저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가, 쇼를 하는 것인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 해야 할 것이다.


내 가 전에 있었던 캘리포니아에는‘새들백 교회’가 있다.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이 교회는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교회 중에 하나이고, 여러분들이 참 좋은 교회라고 하도 많이 이야기를 해서 예배를 드리려 찾아 갔었다 (우리 집에서부터 겨우 1마일밖에 안 떨어져 있었다) 근데 막상 교회를 갔더니 잘 모르는 길인데다 너무나도 교회가 커서 주차장에서 헤매고 있었을 때였다. 거기서 안내하시는 분이 너무나도 친절하게 안내를 해주시는 것이었다. 여러분도 경험을 해 봐서 알겠지만, 이 친절함이 건성인지, 아니면 마음에 우러나와서 도와주는 것인지 몇 마디를 이야기하면 금방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날 그 분이 안내를 도와주는 것을 보면서 나는 속으로 새들백 교회 사람들은 주차장에서도 예배를 드리는구나라는 생각을 하고 감동을 받았던 적이 있다.


사실 내가 더 감동받은 것은 그 후의 일이었다. 몇 개월이 지나서 ‘새들백 교회’에서 예배에 관한 Conference가 있어서 모임에 참석을 했는데, 전 세계에서 무려 4천명이 모여서 예배에 관해서 공부하고 배우는 시간이었다. Conference가 시작된 둘째 날에 본당에서 강의를 듣다가 실수로 쓰고 있던 전자수첩(PDA)에 있는 펜을 잃어버렸다. 너무나도 작은 물건이어서 찾기가 어렵겠지 생각하고 그래도 혹시나 찾을 수 있을까하는 마음으로 잃어버린 물건을 찾는 곳(Lost and Found)을 찾아갔다. 마침, 거기에 안내하시는 한 자매 분이 있었는데, 혹시 이러한 물건이 들어 온 것이 없느냐고 물어보니까, 한참을 찾아 보더니 그러한 물건이 들어온 것이 없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그래서 그냥 돌아가려고 했는데 그 자매 분이 잠깐 기다리라고 하더니 나의 전화번호를 물어 보는 것이었다. 전화번호를 왜 물어보냐고 그러니까, 자기도 똑같은 기종이 있으니까, 내일 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어 주겠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날 큰 감동을 받았다. 사실 예배 컨퍼런스에 은혜를 받은 것이 아니라 그 교회에서 섬기는 성도 때문에 감동을 더 받았다. 사실 여러분이 교회에 발을 들여 놓을 때, 제일 먼저 마주치는 사람들은 목사님들이 아니다. 목사님이나, 아니면 부목사님들만이 설교를 하고 있다고 착각하지 말라. 사실 가장 중요한 설교는 이미 우리들의 생활의 모습에서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행동과 모습, 말,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새들백 교회에서 하는 모든 행사는 믿을 수 있고 참석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의 삶을 보았기 때문이다. 새들백 교회는 예배를 공연하는 교회가 아니라 예배적인 삶을 사는 교회인 것을 믿는다.


다시 한번 말씀으로 돌아가자.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요한복음 4장에 나와있는‘진리로 드리는 예배’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세워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예배는 우리를 영적인 공허함으로 치닫게 하며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인가를 알 수 없게 한다. 하나님을 완전하게 계시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임을 기억해야 한다. 찬양만 한다고 해서, 기도만 한다고 해서 예배가 다 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의 기도는 하늘의 문을 열리게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이 예배자들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시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이 찬양할 때에는 사단의 권세를 제압할 힘을 가지고 있게 된다.


예배는 습관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는 감격이다. 올해 이루어지는 코스타 집회가 20주년이 되었다든지 아니면 사람이 많이 모인다든지 다른 것 등으로 유명해 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 대신에 코스타의 예배는 살아있고 코스타에 갔다고 온 사람들을 만나면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나는 듣고 싶다.

[오지영] Korean Diaspora를 위한 제언

이코스타 2005년 5월호

안녕하세요.
저는 일본 오사카에서 살며 대학생 Campus 사역을 하고 있는 오지영 선교사 (CCC소속) 입니다. 저희 부부와 3명의 아이들은 약 1년 6개월 전에 일본 오사카로 입국했습니다.
일본에 오기 전에는 약 13년간 미국 Campus에서 한국인, 또한 아시안계 학생 사역을 했었습니다.


KOSTA의 형제 자매들이 지금보다 조금 더 타 민족에 대한 선교를 위해 기도하며, 후원하고, 참여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몇 년 전 통계에 의하면 이곳 일본에는 약 500여명의 한국 출신 선교사들이 사역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들 중에 일본인을 중심 대상으로 사역하는 선교사는 약 10%인 대략 50여명으로 파악된다고 합니다.


저희 가족이 사는 오사카도 시내에서는 큰 십자가가 달렸거나, 큰 빌딩을 가진 교회들을 상당수 볼 수 있는데, 이들 대부분이 한인 교회 입니다. 물론 일본 거주 한인들이나, 재일 교포들도 복음이 필요합니다. 또한 이 한인 교회들을 통해 부수적으로 복음을 들을 수 있는 일본인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99.5%가 교회에 나오지 않는 일본에서 10%의 선교사들만 일본인 중심의 사역을 한다는 수치는 바뀌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희가 미국에서 사역할 때에도 교회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거나, 기독교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없다는 한인 학생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4000여 개의 미주 한인교회(Korean-American)를 세우게 하신 하나님이 한인들에게 엄청난 축복을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한인 교포 교회들도, 또한 KOSTA형제, 자매들도 타민족에게 하나님의 축복과 복음을 마음껏 나누어 줄 수 있는 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유학생활을 하고 있는 유학생으로서 타민족 선교를 위해 구체적으로 세가지 조언을 나누고 싶습니다.


첫번째는, 여러분들의 유학생활 기간을 타문화 적응 훈련이라고 생각하고 생활하는 것입니다.


이번 봄학기에 새로 한국에서 일본으로 온 유학생 가정을 돕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모국에서 언어와 문화가 생소한 타국에 와서 경험하고, 정착하는 과정은 선교사나 유학생이나 많이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느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유학을 희망하지만, 모두에게 기회가 주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택과 인도하심으로 타문화 생활훈련 기회를 받았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성령님의 인도에 순종함으로 타국문화에 정착훈련을 신실하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선교 단체 에서도 수년간 다른 나라에 유학 경험이 있는 사람들의 경험을 인정해주는 편 입니다. 유학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그만큼 현지 적응력과 생활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유학 경험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현지 사정을 잘 알기 때문에 조금 더 구체적으로 기도와 협력을 할 수 있습니다. 유학생출신 그리스도인들은 파송교회(Sending Church) 성도들에게 현지 사정과 현지 주재 선교사들의 겪을 수 있는 경험들을 설명함으로써 성도들이 선교 상황을 구체적으로 이해 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두번째는, 타 문화 사람들과의 친구관계를 도모하며 기도하십시오.


선교에 동참하려는 마음과 열정도 인간 관계를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희 CCC 오사카 팀의 형제 단기 선교사 Philip은 Ohio주 시골에서 성장했습니다. 중학교 때에 일본에서 이주해 온 일본 학생과 제일 절친한 친구가 되었는데, 이 관계를 통해 하나님이 Philip을 일본의 선교사로 부르셨습니다. 한사람의 일본인 친구를 통해 선교의 열정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주말에도 Philip은 그 친구에게 또 한번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동경에 갔습니다.


타문화 사람들과의 친구, 친분관계를 통해서 막연히 추상적으로 생각하던 선교의 필요성이 여러분의 마음에 와 닿을 수 있습니다. 단지 이 나라, 저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내 친구A, 내 동료B의 구원과 그의 나라의 복음화를 위해 기도하며 구체적으로 동참할 수 있습니다. 물론 언어 장벽, 문화 장벽, 종교적 장벽 때문에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이것 또한 선교사가 경험하는 경험 중의 하나입니다.


특별히 미국 대학원은 전 세계에서 모인 여러 민족들과 함께 공부합니다. 멀리 떨어진 느낌이 드는 나라에서 온 여러 타민족 사람들이 나의 교실에, 나의 연구실에, 나의 학과에서 공부를 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선교지인 것입니다.


기도하기를 ..”주님 두 사람, 한 사람이라도 타민족 친구를 사귈 수 있게 해주세요” 라고 간구하시고 노력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런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선교지로 넘나드는 KOSTA 형제 자매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친구관계를 통해 그들이 피부로 느끼는 문제점, 그들의 문화, 그들의 기쁨, 고통들을 이해하면서 그들의 민족의 구원에 동참하는 계기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세번째는, 현지 문화 안에서 그 민족과 그 문화의 틀 안에서도 살아서 움직이시는 성령님의 역사와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 입니다.


저희도 오사카 현지에서 일본인 교회에 출석하고 있습니다.
저희 팀은 주중에는 campus사역을 위주로 일하고 있기에, 교회는 각자 자신에게 적합한 교회에 참여합니다.


이 교회에 참석하기 시작했을 때에는 언어장벽, 문화적 차이로 어려웠습니다. 문화차이는 예배 형식, 교회 운영 방법, 인간관계 등에서 많이 나타났습니다. 현지 일본인들의 교회이기 때문에 물론 일본식으로 운영되어지고 있습니다. 저희 교회에 참석하는 한인 유학생들 중에도 한국의 교회처럼 마음의 감동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아쉽다는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계속적으로 참석하면서 조금이나마 일본인들의 중심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일하심을 볼 수 있었습니다. 몇 주 전에 세례식을 했는데 13명의 새신자들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한국 교회로 비교해 본다면 수백명이 동시에 세례를 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현지 교회의 사역과 행사에 최대한으로 참여 하십시오. 가능하면 현지 교회에 (한인교회가 아닌 타민족 교회) 매주 참석하는 것도 권장하고 싶습니다. 또한 현지 그리스도인들과의 교제를 추구하십시오. 이러한 것들을 통해 그들의 문화와 생각 안에서도, 생명을 주시는 성령님과 인간 중심이었던 생각 또한 완전히 바꾸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체험할 수 있게 될 것 입니다.


저희 가족이 일본 선교를 준비하는 중에 여러 성도님들이 “일본은 선교가 안되는 나라인데..” 하며 걱정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현지에서 campus와 교회 사역을 경험하면서 일본 선교는 가능하다는 체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단순한 통계나 선교 정보 차원을 벗어나서 선교가 가능하다는 자신감(Conviction)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동일한 하나님이 타민족 친구들에게도 역사하시고 또 내 친구들의 민족에게도 임재하신다는 사실을 경험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 입니다.


이렇게 생활하면서 세계를 품고 사는 (World-Christian) KOSTA형제 자매가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한번 자신의 나라를 떠나 이주한 사람들은 두번째 세번째 이주가 상당히 쉬워집니다.


저희 부부도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주하여 적응한 경험 때문에, 세번째 나라 일본에 정착하는 것이 상당히 빨랐습니다. 어차피 하나님의 백성들은 궁극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며 살아가는 나그네들 입니다. 어느나라에서 태어나고, 어느나라에서 공부하고, 어느나라에서 생활하던 간에 이 세상 어떠한 나라도 내 고향이 아니다 라고 생각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여 잃어버린 양들을 찾는 일을 하는 KOSTA형제 자매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복음주의란 무엇인가?

이코스타 2005년 2월호


(이 글은 2004년 KOSTA/USA에서 양희송 실장의 ‘복음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세미나를 편집부에서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1. 복음주의 개관


(1) 복음주의 용어정리


흔히 사용되는 복음주의라는 단어의 정확한 의미부터 정리해 보자. 우선 evangelicalism과 evangelism의 사용이 구분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각 단어의 어원을 살펴보자. ‘복음을 전하다’는 의미 evangelize에는 두 가지 명사형이 있는데, 각각을 살펴보면,
-  Evangelism : 이것은 ‘주의(-ism)’이라가 보다는 그냥 evangelize(복음을 전하다)의 명사형이다.
-  Evangelization: 복음화. 단순한 개인전도의 의미를 넘어서 복음의 영향력을 미친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 두 단어의 구분은 74년도 로잔언약에서 구체적으로 사용되었는데, John Stott는 로잔대회 기조연설에서 “Mission에는 evangelism(개인전도)과 sociopolitical engagement(사회참여)가 있다.”라는 말로 두 단어를 분리해서 사용하였다. 또한 evangelize의 형용사형에도 두 가지가 있다.
-  Evangelical: 복음주의적
-  Evangelistic: 복음 전도적 (개인전도에 관련되어서)


예를 들어, evangelistic preaching은 전도설교라 할 수 있고, evangelical preaching은 복음주의에 근거한 설교를 뜻하는 것이다. 정리하면, 복음주의를 evangelism으로 오해하면, 그저 ‘전도하자’는 정도로 오해할 수 있는데, 사실 복음주의는 evangelicalism으로 그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라는 것이다.


(2)역사적 기원


복음주의라는 말은, 70 80년대의 Billy Graham과 Christian Today라는 잡지의 등장, 그리고 미국 Jimmy Carter 대통령이 자신이 스스로 거듭난 기독교인임을 공공연히 드러냄으로써 보편화되었다. 복음주의는 미국적인 특수한 상황을 지칭하는 것이며, 또한 20세기 초반의 Christian fundamentalism과 구별되는 어떤 것이다라고 일반적으로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복음주의는 7 80년대의 미국적 상황을 포함하지만 그 이상의 것임을 인지해야만 한다.


복음주의를 어떻게 규정하는가?
1. 지리적 분포: 복음주의는 영어권 지역에서 두드러지는 현상이다. 비영어권에서는 복음주의라는 말이 전혀 사용되지 않거나,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면, 독일에서 사용되는 evangelish라는 용어는 루터로 대표되는 종교개혁자를 지칭한다. 즉 독일에서 복음주의하면 ‘개신교’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후에 루터교도 점차 자유주의로 흐르게 되면서, evangelical이라는 용어가 영어에서 역수입되어 사용되게 되었고, 결국 개신교를 전체적으로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된다. 한편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evangelical이라고 하면, 카리스마틱 교회를 지칭한다. 또한 영국에서 evangelical이라고 하면, ‘나는 카리스마틱이 아니고, 또한 자유주의도 아니다’라는 의미이다. 이렇게 복음주의라는 말은 일관성 있게 전세계에서 사용되는 용어가 아니라, 영어권 기독교를 주 배경으로 하고 사용되는 용어임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물론 유럽의 영어권과 북미의 영어권에서 사용되는 복음주의라는 의미도 조금 다르기도 하지만 말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한국에 알려진 복음주의가 미국을 중심으로 들어온 것이기에, 유일한 복음주의라고는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각 나라마다 그 특성에 맞게 복음주의를 받아들였듯이 한국도 우리의 정황에 맞추어 받아 들여야 한다.


2. 현상적 특징: 영국의 데이빗 베딩턴이라는 역사학자가 언급한 복음주의의 특징을 크게 4가지로 요약했다.

-  Activisim: 전체적으로 활동적으로 움직인다.
-  Biblicalism: 성경을 강조
-  Conversionism: 교회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회심해야 한다.
-  Cross-centralism: 십자가를 강조


또한 영국의 대표적인 복음주의자인 John Stott는 복음주의자들의 특징으로 ”Bible people and gospel People”이라는 두 가지로 설명했다. 또 영국의 Allister McGrath는 복음주의를 ”성경의 권위, 하나님의 주권, 그리스도의 십자가, 성령, 공동체, 복음전도”라는 크게 6가지 중요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묘사했다.


하지만, 이러한 복음주의에 대한 언급들은 특성을 묘사한 것 뿐이지, 본질을 묘사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래서 최근에 쟁점이 되고 있는 부분이 바로 “복음주의가 운동인가 신학인가?” 하는 부분인데, 점은 John Stott의 ‘복음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언급되고 있다. 즉, 내가 믿고 있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과 그것으로 인해 나타나는 현상을 말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그런 현상에서 ‘무엇을 믿는가’하는 신학으로 옮겨가야 한다는 것이다. 유명한 복음주의 학자인 버나드 램이 스위스에 있는 칼 바르트의 밑에 있으면서, ‘나는 복음주의의 겉만 만졌던 것이지 실제적인 내용을 채우지 못했다’고 고백한 일이 있다. 그러면서 복음주의가 전략과 운동은 있지만 신학이 부재하다고 통탄한 일이 있었다. 그래서 이제는 복음주의를 신학적으로 정리할 필요들이 계속해서 제기되고 있다.


2. 역사 속에 살펴본 복음주의


복음주의의 역사를 살펴보기 위해 다시 베딩턴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자. 복음주의의 특성을 activism, biblicalism, conversionism, cross-centralism으로 크게 볼 수 있다면, 복음주의를1970 80년대의 미국적 상황으로 국한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만일 복음주의가 20세기의 일이 아니라면, 보통 18C 부흥운동이나 16C 종교개혁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John Stott는 복음주의의 근원을 초대교회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4세기의 니케아신조에서 이야기하는 삼위일체를 믿는 믿음이 바로 복음주의 전통과 맞물려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가 기독교되게 하는 것은 다름아닌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고백하는 삼위일체의 신앙으로 부터 시작한다. 사실 니케아 신조가 처음 만들어 질 때,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나누어 졌다. 동방교회는 세 분 하나님을 강조하면서 성령님을 더욱 강조했고, 반면 서방교회는 하나되시는 하나님에 대해 강조하게 되었다. 그래서 현재도 성령에 대한 좋은 연구들이 동방교회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4세기에 “그리스도 중심적 (cross-centalism)” 이라는 개념이 정리된다는 면에서 복음주의의 뿌리를 거기서 찾는다.


종교개혁의 흐름에 “성경중심 (biblicalism)”의 사상이 나타났고, 더불어 루터가 벼락 맞아 죽는 친구의 모습을 보면서 로마서를 통해 회심하는 과정을 거치는 중에 “회심 (conversionism)”에 대한 강조가 나타났다. 이런 복음주의의 흐름은 18 19세기의 영미의 부흥운동으로 이어진다. 영국의 잔 웨슬리, 조지 휫필드나 미국의 조나단 에드워즈로 대표되는데, 그 특징 중의 하나가 “회심운동”이다. 예를 들어, 웨슬리같은 경우 옥스포드에서 방법주의(Methodist)라고 불리 울 만큼 경건 훈련을 강조하는 Holy club에 열심이었지만, 구원에 대한 자신이 없었다. 그러던 중, 그 Holy club에서 아메리칸 인디안을 위한 선교사로 파송 되어 미국으로 가던 배 안에서 폭풍을 만나게 되었다. 웨슬리 자신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던 반면, 모라비안들은 놀랄 만큼 침착하게 대처하는 것을 보고는 적잖은 충격을 받게 된다. 그 후 웨슬리는 미국에서의 선교에 실패하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 모라비안과의 교제를 가지게 되는데, 그 때 모라비안의 한 집회에 참석해서 로마서 강의를 듣는 중에 회심을 체험하게 된다. 그의 일기를 보면, ‘나의 마음이 이상스레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더불어서, 부흥운동에서는 “행동주의 (activism)”도 볼 수 있다. 그들은 자리에 앉아서 책만 쓰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웨슬리같은 경우는 1년에 1000번, 즉 적어도 하루에 3번 이상씩 설교를 할 만큼 열정적으로 활동하던 사람이었다. 웨슬리와 휫필드가 주로 했던 사역방법은 순회전도였다. 웨슬리의 경우 말 안장 위에서 주로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많은 순회전도를 다녔다. 이런 일은 당시의 상황으로 보면 상당히 획기적인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영국 성공회의 경우 목사들이 담당 지역의 교구를 맡아서 정착 사역을 했었지만, 웨슬리와 휫필드는 광부들을 좇아 다니며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했기 때문이다.


또한 세계선교에 대한 강조를 특징으로 들 수 있다. 윌리암 케리, 허드슨 테일러, 캠브리지 세븐, 건초더미 기도회, 학생자원자 운동들이 대거 등장하는데, 그들이 강조한 것 역시 회심중심, 십자가중심, 성경중심이며 상당히 활동적이라는 점에서, 그들에게도 복음주의의 흐름이 존재했슴을 알 수 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로 넘어 오면서, 복음주의는 힘든 시기를 보내게 된다. 19세기 말부터 유럽에서는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은 자유주의 신학이 발달하게 되고, 그에 대항해서 근본주의가 나타나게 된다. 사실 근본주의는 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미국적인 현상이었지만, 자유주의 신학의 분리주의적이고 상호 비판적인 문제점에 반대해서 복음주의(Evangelicalism)이 등장하게 된다. 반면 영국에서는 자유주의에 대항하는 모습으로 복음주의를 준비해 오게 된다. 신정통주의는 칼 바르트의 신학을 말하는데, 그는 정통적인 신학의 모습을 많이 회복시키기는 하지만 방법론은 성경 비판 등에 열려 있어서 신정통주의 (Neo-Orthodoxy)라고 불리우게 되었다.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는 미국에서는 배척을 받지만, 유럽에서는 학생 운동에 적잖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 바로 존 스토트, 마틴 로이드 존스, 제임스 패거, 마이클 그린 등이었다. 그 당시 자유주의자들은 복음주의자들을 지적이지 못하다고 비아냥거리고 있었는데, 위에 언급한 복음주의자들이 그들을 잠잠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옥스포드와 캠브리지 대학에서 교육 받은 지성인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영국 복음주의의 흐름이다. 특히 마이클 그린의 경우는 옥스포드와 캠브리지에서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했었는데, 그의 전도를 받았던 사람 중에 현재 영국 복음주의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알리스터 맥글래스와 같은 사람이 있다. 맥글래스는 한 때 막스즘에 심취해 있던 사람이었다.


반면, 미국의 복음주의는 빌리그래함과 크리스챤 투데이, 그리고 풀러신학교로 대표된다고 하겠다. 이런 흐름 가운데, 늘 소수에 머물렀던 복음주의가 7 80년대에 이르러 기독교의 주류가 되고, 다수파가 되는 과정을 겪게 되는데, 이를 두고 복음주의 르네상스라고도 부른다.


20세기의 복음주의는 이렇게 진행되어 왔다면, 앞으로 21세기 복음주의는 어디로 가게 될 것인가? 이제는 수적으로도 많아졌고, 훌륭한 학자도 가지게 되었으며, 재정적으로도 풍부해서 해외에 선교사도 파송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렇다면 복음주의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이런 맥락에 관해 현재 복음주의권에서 크게 이슈가 되는 것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복음주의 통합?
복음주의는 계속 통합되어 갈 것인가 아니면 계속해서 작은 카테고리로 나누어져 갈 것인가?


(2) 복음주의의 성공 이후에 생기게 된 파생 문제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예를 들면 영국에서는 Post-evangelicalism이라는 흐름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들은 복음주의를 계승하면서도 단절하는 행태로 나타나는데, 그들이 주로 복음주의에 대해 비판하는 내용은 보면, 복음주의가 물량주의적이고, 대사회적으로 소극적이며, 윤리적인 문제에 대해 비일관적이라는 점을 비난한다. 한편 미국의 impowered evangelical은 post-evangelical과 같은 복음주의에 대항하는 흐름은 아니지만, 비슷한 성향을 띤다고 할 수 있겠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미국의 Vineyard church를 들 수 있는데, 그들은 일반적으로 제삼의 성령운동으로 불린다. 첫번째 성령운동은 오순절 운동으로 ‘방언은 곧 구원이며 구원 받으려면 자신에게 와야 한다’는 분리적 성향이 강했다. 두번째 성령운동인 카리스마틱 운동은 분리주의는 아니었지만, 여전히 뚜렷한 신학 없이 성령을 많이 강조했다. 그에 반해서 Vineyard 교회를 중심으로 한 제3의 성령운동은 그 신학적 기반을 복음주의에 두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를 카리스마틱에 반하는 개념으로 impowered evangelical이라고 부른다. 흥미로운 점은 Vineyard church에서 impowered evangelical에 대한 책을 저술하면서 제임스 패커가 그 서문을 썼다는 것이다.


(3) 복음주의 신학의 구도
미국의 복음주의자들 중에서 경계 밖으로 나가려는 성향이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에 대해 비판을 가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중심 지향적 접근), 다른 사람들은 복음주의의 중심을 두고 가지가 뻗어 나가는 것은 허용해야 한다(경계지향적 접근)는 두 가지 흐름이 존재하고 있다.


3. 복음주의권의 쟁점들


(1) 성경관:
“성경의 무오성 vs. 성경의 권위”.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의 무오성을 강조하는 반면, 영국의 복음주의자들은 성경 말씀을 삶의 최종권위를 더 강조한다.


(2) 성경해석의 방법론과 전제:
“성서비평을 수용하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 성경해석이 최종적(final)인 것이냐 아니면 잠정적(provisional) 것이냐에 대한 논쟁도 있다. 이런 문제는 동성애와 같은 윤리적인 문제를 해석하는데 많은 논쟁의 여지를 남긴다.


(3) 복음전도와 사회개혁:
19세기와 20세기 초반에 사회참여와 개인구원이라는 낭만적인 대립구도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19 20세기에 유행했던 고전적인 의미의 자유주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복음주의를 고전적인 자유주의의 반대하는 모습으로 연상하는 것은 시대 착오적이라 할 수 있겠다. 사회참여와 복음전도를 더 이상 대립구조로 보지는 않는다. 당연히 사회참여와 복음전도는 함께 가야하는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이 구조에 대해 지나친 논쟁을 겪어 오지 않女?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4) 신학적 방법론과 전제들:

-  기존의 전통적인 복음주의적 고백과 이해들에 대해 수정을 가하는 입장들이 많이 나왔다. 예를 들어, 전통적인 지옥관 – 다시 말해 영혼 멸절설에 대해 John Stott같은 학자는 지옥이 영원히 불타는 곳에서 영원히 형벌 받는 곳이 아닐 수 있다라는 입장을 견지한다.
-  또 하나의 예는 예정론이다. 우리가 예전부터 알고 있던 ‘하나님은 다 아신다’라는 입장에 대해, ‘하나님 스스로도 미래에 대해 열어 놓으셨을지도 모른다’는 의견들이 나오고 있다. 또 하나는 신정론 –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 – 는 점인데, 만일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다스리시는 분 이시라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불의와 고통의 궁극적인 책임도 하나님께 있다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이 문제에 있어서는, ‘하나님은 고통 받지 않으신다’는 기존에 입장에 대해,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 자신도 고통 받으셨다’는 이론들이 소개되고 있다.
-  토대주의(foundationalism): 사실(fact)이 있고 그에 대응해서 가치가 창출되는 것이 전통적인 입장이라면, 한 부류의 사람들에 의해 포스트 모더니즘에 근거해서 복음주의적 신학을 해보려는 시도들이 존재한다. 다시 말해 “실제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아도 좋다. 다만 우리는 상징들을 가지고 말할 수 있고 가치를 창출해 내면서, 실제의 유무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라는 포스트 모던니즘에 기초해서 복음주의 신학을 해보려는 흐름들이 있다. 그들은 복음주의 좌파라고 신랄하게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다.


4. 그러면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한국 복음주의는 이런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문제 제기와 고민을 스스로 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한국 기독교의 진보와 보수의 갈등을 살펴보면, 사실 서로가 잘 알지 못해서 오해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실상, 전체적인 신학적인 스펙트럼으로 보자면, 한국의 진보적인 기독교는 보수권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1990년대에 들어서 민중신학 자체가 사라졌슴을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다. 민중교회에는 신학자만 있고, 실제 민중은 존재하지 않게 된 현실이다. 또한 사회 부패에 대해 대항하던 세력들이 이제는 정부로 대거 들어가 있을 뿐 아니라, 캠퍼스의 진보운동도 거의 사그러지게 되었다. 그래서 현재 문제가 되는 것은, 이제 한국 기독교에는 사회참여를 등한시했던 보수적인 세력만이 남게 되어서, 복음 전도를 주장하는 사람들만의 모임으로 비춰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이, 남아 있는 한국 기독교인들이 사회 참여적 혹은 대사회적인 임무에 대해 등한시하게 되다면, 한국 기독교는 사회에 무관심한 세력으로 취급되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현재 한국교회를 바라보는 관점을 살펴보면, “경제적으로는 중산층, 문화적으로는 보수적이며, 정치적으로는 우파”이다. 그런데 이런 가치는 한국사회가 청산하고자 하는 바로 그 가치라는데 아이러니가 있다. 만일 한국교회가 2 3년 내에 의미 있는 몸짓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이런 청산의 흐름에 휩쓸려서 아무도 관심도 없고 기대도 하지 않는 입장에 놓이게 될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느낀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 한국교회는 목회자들은 상당히 보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는 반면, 실제 한국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성도들과 청년들은 그와는 사뭇 다른 성향을 나타내고 있다. 한국 기독교를 대표해서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의 의견이 실제적인 교인들이 가진 생각과 많이 다르기 때문에, 교회 구성원들은 심한 자괴감을 느끼고 있다.


이제 복음주의에 대한 많은 자원들을 모아서, 누군가는 모든 기독교가 현재 사회에서 비판 받은 바로 그 모습만은 아님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그런 노력들이 건강한 복음주의권에 있는 사람들이 애써야 할 부분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