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 1, 2007 | 이달의 초점
이코스타 2007년 5월호
상대주의는 다양한 이론들로 구성되어 있다. 경험 혹은 문화적인 특징과 각 요소들은 상대적이라는 주장이다. 예를 들어 어떤 상대주의자들은 인간은 신념과 행동 규범들을 오직 그들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배경하에서만 이해하고 평가할수 있다고 주장한다. 상대주의는 종종 진리 상대주의, 즉 절대진리란 없다는 원칙, 를 의미하곤 하는데, 다시 말해서 진리란 언어 혹은 문화 등과 같은 참조의 틀에 항상 상대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상대주의는 최근에 생겨난 신종 용어가 아니고 고대로 부터 중세, 근세, 현대에 이르는 긴 역사 속에서 많은 사상에 담겨져 있다.(1) 일례로, 현대의 기독교 철학 사상중에도 많은 움직임들이 윤리적인 측면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극단적인 경우만를 위주로 열거해 본다면, 정서주의(emotivism), 주관주의(subjectivism), 상황주의(situationism)(2) 이라고 할수 있다.
좀더 풀어서 말한다면, 정서주의에서는 모든 윤리적 진술들을 정서적이라고 주장한다.
다시말해, 도덕적인 발언은 단순한 우리의 감정의 토로이지, 도덕적인 의무에 대한 신의 명령이 아니다 라는 견해로서 극단적인 상대주의다. 주관주의는 무신론적 실존주의로서 인생을 위한 객관적인 의미나 가치가 없다고 믿는 실제적인 도덕률폐기론(3)이다. 상황주의는 모든 상황에 상대적이라는 견해인데, 예를 들어 사랑의 결정은 인식적으로가 아니라 상황적으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이와 함께, 역사적 상대주의에 빠져서 근본적으로 과거의 시대의 인간과 이 시대의 인간이 다르다고 이해하는 데서 오는 오해도 있다.
이러한 상대주의적 개념들은 철학 교과서에서만 찾아 볼수 있는 추상적인 것이 아니고 우리 젊은이의 일상속에 깊이 파고들어 와 있는 것을 경험하곤 한다. 주일 예배 시간에 말씀을 들을때, 필(Feel)을 받아야 소위 은혜를 받았다고 여기는 경향이라든지, 개인 큐티 시간에 마음에 평소에 와 닿았다고 느끼는 말씀을 편식하고 나의 상황에 쉽게 적용할 것은 뭐 없나를 먼저 찾는 경향등에서도 그 영향을 의심해 볼수 있다.
소그룹 나눔 시간에 객관적인 진리의 말씀 탐구의 열정은 식어가지만, 방향성 없는 말들만 무성하게 나눈 후 모임을 마무리 하고 친교 시간만 계속 늘어나는 경향도 염려해 볼수 있으며, 성경공부 시간에 나눈 말씀에 바탕하지 않는 주관적인 걱정만이 담긴 상황적인 기도제목을 반복해서 들을 때면 그런 생각이 더욱 간절하게 들곤한다. 더 나아가서 성경말씀을 구시대적인 글의 묶음으로 오해하여 절대적 진리를 상대적인 상황화의 논리에 전복시켜서 신구약 시대에 활동하시는 하나님과 인간, 오늘날 시대에 활동하는 하나님과 인간을 동일하게 보지 못하는 경우에서도 이런 경향을 엿 볼수 있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포스트모던의 상대주의에 빠져있기는 하지만, 그 상대주의적인 가치관이 궁극적인 만족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또다시 만족을 줄수 있을 것 같은 어떤 것을 찾아 신비주의를 추구하기도 하고, 종교적인 봉사에 몰입하기도 하며, 세속주의적인 가치관을 그대로 받아들여 우상시 하면서 신앙적으로 포장하여 합리화 하기도 한다.
세속화되고 다원화된 사회(4)에서 우리 젊은 청년들의 당면한 중대한 문제는 어떻게 하면 이러한 상대주의를 극복하고 의미 있는 삶의 규범과 가치를 회복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세상속에서 열린 겸손한 신앙을 유지하면서 열리기는 열렸으되 범람하는 세속주의와 상대주의의 물결에 떠내려가지 않고 상대적인 것을 매개로 하여 오히려 절대적 가치를 더욱 갈망할 수 있는 신앙과 삶의 본질적인 면을 회복되는 변화가 필요하다.
이런 젊은이들에게 해답이 될 수 있는 것은 결국 절대적인 성경의 해답이다. 허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러한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주어진 문제에 단답식 으로 피상적인 답을 달아가는 top-down approach식으로 해결되기 보다는, 오히려, 소그룹 운동을 통해 bottom-up approach 식으로 성경을 붙잡고 함께 씨름하며 진실된 관계적 만남을 통해 마음과 생각을 열고 각 속사람을 계속 변화시켜 주시길 원하시는 성령님께 더욱 의지하는 길이라 생각한다.
정리하면서 “이 세상에 절대 가치라는 것은 없다. 절대 기준이라는 것도 없다. 타자(他者)에 대한 개인의 평가나 감상은 그야말로 개인적이고 상대적인 평가일 뿐, 그 이상의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식의 귀로 들을 수 있는 말들을 젊은 이들의 공동체에서 얼마든지 찾아볼수 있다. 사실, 그 보다 더욱 간과하기 쉬운 것은 귀로는 들을 수 없지만 심혈을 기우린 마음으로만 들을 수 있는 젊은 영혼들의 존재적인 신음이다. 마음을 열고 듣고 예수의 마음을 품고 함께 고민하며 말씀과 기도에 사로잡혀 사랑으로 가까이 다가갈 때다. 이럴때에야 비로소 예수님안에서 만 찾을 수 있는 행복의 기준, 삶의 의미과 영원한 대답을 제시하여 줄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1) Geisler, N. L., Introduction to Philosophy
(2) Geisler, N. L., Ethics : Alternatives and Issues
(3) Lewis, C. S., The Abolition of Man, appendix
(4) Newbigin, Lesslie, The Gospel in a Pluralist Society
May 1, 2007 | 이달의 초점
이코스타 2007년 5월호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주인으로 그리고 인생의 모범으로 삼고 사는 사람을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고 함께 그리스도인들이 된 형제 자매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으며 깨어진 주위 사람들과 자연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 하나님과 말씀과 기도로 교제하고 주위 사람들과 영적인 친교를 나누며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인 답게’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한다.
그 동안 우리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에 깊은 관심과 열정을 가져왔다. 매일의 말씀 묵상은 물론이고 귀납적 성경공부에 연역적 성경 공부까지 아마 이렇게 열심히 성경 공부하는 기독교인들이 한국인들 말고 또 있을까? 기도 생활도 그렇다. 매일 매일의 새벽 기도 모임은 다른 나라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 답다’라는 평가 항목에 있어서는 그다지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것 같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와 달리 이웃과의 관계에서는 ‘그리스도인 답지’ 않은 행동은 많이 해왔기 때문인 것같다. 다양한 가치와 논리가 공존하는 다원주의 사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이웃들과 그리스도인답게 대하는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 이 책의 기본적인 질문이다.
그리스도인이 세상과 관련을 맺는 방식에는 성전론, 현실주의, 정전론, 기독교 평화주의라는 크게 네 가지의 방식이 있다. 성전론은 세상의 악한 질서는 파괴해야 하는 대상이라고 대하는 태도이다. 세상의 악한 질서에서 행동하고 있는 주위 사람들은 악의 결과이자 원인자로서 이들은 악으로 대하고 선한 질서인 기독교로 끌어들여야 하는 대상이다. 때로는 적개시하고 때로는 그 의미를 감추고 접근하기도 한다. 현실론은 이 세상의 질서는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앙은 신앙, 그것이 모든 세상사를 지배할 수는 없다고 보는 것이다. 성전론과 현실주의는 기본적으로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아니다. 세상에 내재하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됨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며 모든 피조물을 지배하는 하나님의 질서도 부인해서는 안되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정전론은 세상 속에 있는 분명한 악한 가치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방식은 허용해야 한다는 것이며 평화주의는 그러한 악에 대해서도 그리스도가 보여준 무저항과 평화적인 대응만이 허용된다는 견해이다. 두 견해는 분명한 악에 대한 문제이며 그 외의 경우는 그리스도가 보여준 평화적인 태도만이 성서적이라는 데에 견해를 같이 한다.
그리스도인이 비그리스도인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 그리스도인은 비기독교적인 세계관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분명한 악을 제외하고는 겸손과 부드러움으로 그리고 한편 적극적으로 대화해야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예수님의 모범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해하려는 사람들에게도 끝까지 대화를 하셨다. 예수님의 태도가 신앙인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모범이 된다면 그분이 다른 사람들을 대한 태도, 특히 약자와 병자, 가난한 자들에게 다가가시고 진지하게 대화하는 태도를 본받아야 할 것이다.
둘째는 기독교 신앙의 보편성에 대한 믿음이다. 종교인과 비종교인은 서로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할 때가 많다. 다른 전제를 갖고 세상을 보기 때문에 대화하기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그 세계관은 현실적인 경험을 통해서 검증되고 확인되는 것이다. 기독교 세계관은 일관성과 진리를 추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세계관인 것이다. 그 보편성을 믿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찾도록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셋째는 대화가 평화와 화해를 만들어 가는 과정임을 인정하는 태도이다. 갈등과 충돌이 만연한 세상에서 서로를 향한 진심어린 대화는 그리스도가 말한 평화를 만들어가는 한 발자국이기 때문이다.
이상의 설명에 동의할 수 있다면 무례한 기독교는 옳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겸손한 선포자는 세상과의 관계에서 균형잡힌 세계관을 갖고 있는 사람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들이고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그렇다. 그것은 바로 겸손한 선포자의 모습일 것이다.
May 1, 2007 | 이달의 초점
이코스타 2007년 5월호
며칠 전 인터넷 기사를 보다가 어떤 나라에서 일어난 씁쓸한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내용은 이렇다. 30명이 모이는 어떤 교회의 현지인 목회자가 한국교회의 후원으로 1,000명을 수용하는 교회를 짓게 되었다. 건물뿐만 아니라, 교회에 필요한 물품까지 제공했다고 한다. 그러나 5년이 지나도 교인 수는 변하지 않았고 교회 건물이 들어선 곳이 그 나라에서 가장 큰 회교사원 근처인데다가, 지역적인 문제들을 일으켜 소송에까지 휘말리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기자는 이를 교회의 물질주의와 연관을 시켜 이렇게 꼬집는다.
“한국 교회가 여전히 이런 식으로 교회 건물을 지어주려는 근본적인 마음 자세는 바로 이 땅에 커다란 교회 건물이 있으면 교인 수는 자연스럽게 증가한다는 한국적 세속주의 교회 성장론에 근거한다.”(1)
사실 이런 문제는 중국교회 안에서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는 것과 매우 흡사하다. 요즘 한참 열기가 오르고 있는 Back to Jerusalem운동(2)을 비롯해서, 윈 형제가 쓴 “하늘에 속한 사람”이라는 책이 엄청난 화제가 된 이후로 중국교회에 대한 많은 관심과 기대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와 관련된 설교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 요지는 이렇다. 이제 세계 선교의 완성은 중국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고, 그리고 한국교회가 잠자는 중국을 깨우는 역할을 하게 된다는 말씀이었다. 그러나 지금 일부 중국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상황들을 보면 물질주의로 오염된 한국교회의 빗나간 열정이 초래한 부작용들로 인해 목회자들이 타락하고, 순수했던 중국교회들이 무너지고 있다는 소식이다. 참으로 안타깝기 짝이 없다. 실제로 일부 중국교회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외국의 대형교회의 영향력 안에 들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소위, 잘만 잡으면 교회 건축은 물론, 평생 사역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란다.
선교가 되었건 목회가 되었건 어떠한 활동을 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 열정을 이끄는 힘이 어떠한 세계관 위에 세워져 있는가를 확인하는 것이다. 성경에 기반을 두지 않아 물질주의, 성공주의와 같은 이데올로기에 오염이 되었다면 그 열정이 뜨거우면 뜨거울수록 오히려 복음은 더 가려지고 더 많은 사람이 화를 당하게 되는 법이다.(3) 그렇기에 아무리 큰 성과를 거둔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인간적인 정욕과 자랑에 근거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요일 2:15 16).
오늘날 교회 안팎에서 사람들에 대한 평가 기준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에만 목숨을 걸고 투자한다. 그렇기에 더 많이 가진 사람을 더 가치 있는 사람으로 인정한다. 헨리 나우엔이 소개했던 장애우 아담처럼 하나님이 지으신 인격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지고지순한 절대적 가치는 이미 물질주의의 희생이 된지 오래다. 이런 불균형의 시초는 인류가 범했던 첫 번째 실패의 시점에서부터 출발한다. 이후 인간들은 아담과 하와가 범했었던 그 열매를 추구하는 일에 최고의 우선순위를 두게 되었고, 이를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물론 성경의 권위까지도 말이다.
교회 내의 물질주의는 창세기 1장 22절에 나오는 말씀을 이론적 기반으로 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려야 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는데, 이 말씀을 가리키며 열매의 당위성만을 주장한다. 결국 이 말씀에 기초(?)하여 어떤 목적 달성을 위해서라면 그 수단은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도 된다는 성공주의로 번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미 그 폐해들의 증거는 세계 역사를 통해 증명되었고, 특히 오늘날의 유럽 교회가 말하고 있다. 복음의 근원지였던 유럽의 수많은 교회들은 이미 관광지와 술집으로 전락해 버린 지 오래다. 미국 역시 유럽과 마찬가지로 물질이 지배하는 가치관이 용인하는 편안함과 안락함으로 타고 복음은 점점 그 힘을 잃어가고 있다. 그 위기는 한국 최초의 선교사였던 언더우드 선교사의 손자인, 한 장로님의 고백을 통해서 절실히 느껴진다. 그 장로님은 미국의 한 유학생 교회에서 말씀을 전하며 이제는 한국이 복음으로 미국을 다시 살려야 한다고 말했다. 이 이야기가 어찌 한 사람의 안타까움에서 나온 고백에 불과하다고 하겠는가? 우리는 어떠한가? 영원을 지켜낼 사명을 가진 우리들이 이 세대를 지배하는 풍조 안에서 허물어지고 있는 기초를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을 것인가?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을 오염시키는 물질주의의 부조리와 그 현상들을 고발하고 성경적인 해법을 찾기 위해 많은 것들을 말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물질주의에 대한 본질적인 접근, 즉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증명하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관한 바른 이해이다. 우리가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그분이 성취하신 승리에 도취되어 그 권리만을 주장하며, 나아가 우리에게 마땅히 속한 것을 넘겨받는 것에만 그쳐서는 안된다. 이미 보장된 열매를 보되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감당하신,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신 십자가를 지고 고난에 동참하는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4)는 마우의 이야기에 절대로 공감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벧전 4:12-13)
경성 최고의 갑부를 따라갔던 심순애를 나무랄 사람이 오늘날의 그리스도인 중에는 얼마나 될까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오히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제 2의, 제 3의 김중배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대부분이 아닐까? 그런데 이런 심파극에서조차, 독기를 품고 사채업자가 된 이수일도, 사랑을 뒤로하고 돈을 따른 심순애도 결국 자살한다고 마는 비극을 우리에게 교훈하는데… 오늘 우리의 현실을 보면 아직 답답하다.
자신이 누릴 수 있었던 모든 권리를 포기했던 사도 바울의 삶을 생각해 본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들의 허점을 깨닫고 결코 소유할 수 없는 것임을 알았던 바울처럼, 우리의 생명이 마치고 하나님을 대면할 때 가지고 갈 수 있는 영원하신 말씀들로 건져 올려진 삶(5)이어야하지 않을까?
(1) 뉴스앤조이
(2) http://www.backtojerusalem.com/
(3) 물에 빠져 죽은 오리, 양승훈
(4) 무례한 기독교, 리차드 마우
(5) 참으로 신실하게, 이재철
May 1, 2007 | 찬양과 예배/이유정의 예배를 이야기하자
이코스타 2007년 5월
또 다른 회개의 첫 단추…
왠 지 잠이 오질 않아 PC를 켰는데 한 사이트에서 “뉴욕의 아픔”이라는 글을 접했다. 뉴욕의 N교회 A목사의 “제7계명을 어기고 간음했다는 고백” 기사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해당교회의 한 성도가 아픈 마음을 진솔하게 드러낸 글을 읽으며 만감이 교차했다. 대부분의 언론은 어떻게 대형교회 목사가 이런 죄를 저지를 수 있는가에 집중했지만, 오히려 A 목사의 자발적인 고백은 필자에겐 오히려 신선하게 다가왔었다.
이 미 년 초에 당회에서는 거론이 되었고, 올해 말 사임하기로 했던 A 목사가 3월 18일 주일예배 강단에 갑자기 선 것은 당회와 상관없는 돌발적인 행동이었다. 일단 이 고백은 A 목사님의 자발적인 용기에 의해 시도되었다는 점, 그리고 “지난 2개월 이상 죽음 같은 시간을 보내며 참 지옥이 무엇인가를 실감하고 주님의 심정이 무엇인가를 체험하고 느끼며 지내왔다”는 통한의 고백을 주일 예배 시 공개적으로 드러낸 것은 보통 용기가 아니라 본다.
그 동기의 진실 여부도 지난 22일 교회를 사임하고 뉴욕을 떠나시겠다고 공식 발언한 것을 보면 담임 목사직을 사임하지 않고 교회 내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공개회개라는 극적 반전을 노렸다는 일부 분석은 오판인 듯싶다.
박 용규 교수님의 ‘1907 평양 대부흥’에 의하면…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의 부흥사경회에서 600여 명이 새벽 2시까지 남아서 기도하는 도중 길선주 목사는 자신이 은혜를 막는 성령의 임재를 막는 아간이라며 많은 회중 들 앞에 공개적으로 자신의 숨은 죄를 고백했다. 1년 전 세상을 떠난 자신의 친구의 재산을 정리하면서 당시 100달러에 해당하는 거금을 착복한 것을 성령께서 드러내게 하신 것이다. 이 고백은 마치 뇌관에 불을 붙인 것처럼 그날 모인 성도들의 회개가 이어졌고 그날 그곳에 모인 이들은 말씀 앞에 부복하여 자신들 안에 은밀하게 숨겨진 온갖 죄악들을 다 토로하였다고 한다.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 앞에 사람이 지을 수 있는 모든 죄들이 그날 공개적으로 고백되었다. 이러한 회개와 부흥의 물결은 선교사들은 물론 평양시 전역에 교파를 초월하여 흘러갔다. 평양의 남산현 감리교회에 임한 성령의 역사를 직접 목도한 노블 선교사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미 선교본부에 이렇게 보고했다.
” 우리에게는 한국교회에 내 자신이 지금까지 목격하지 못했고, 듣지도 못했던 가장 놀라운 성령의 부어 주심의 현시가 있었는데, 아마도 사도시대 이후 이보다 더 놀라운 하나님의 권능의 현시는 없었을 것이다. 매 집회에서 주님의 권능 (the slain)이 교회 전체와 때로는 밖에 임했다. 남녀가 회개의 역사로 고꾸라지고 의식을 잃었다. 전 도시는 마치 사람들이 죽은 자를 위해 통곡하고 있는 듯 했다.”
이 성령의 강력한 역사를 경험한 길선주, 헌트, 블레어, 이길함, 스왈른, 편하설은 부흥의 불을 가지고 한반도 전역으로 흩어 졌고, 성령께서는 이들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한반도 전역에 부흥의 불을 지피셨다. 서울, 대구, 대전, 공주, 신의주, 선천 등 전역에서 부흥의 불길이 솟아올랐고, 이 부흥의 불길은 다시 만주와 중국으로 놀랍게 번져나갔다.
“1907 년 평양 대부흥 100주년이 되는 해에 교계에서 어느 때보다 회개와 기도 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시점에 이 같은 일이 터져 더욱 큰 충격을 주고 있다”는 일부 기사는 오히려 평양 대부흥의 실체를 오해한 소치 아닐까? 충격이 아니라 부흥의 전조로 볼 수도 있음을 조심스럽게 조명해본다.
우 리의 시각을 어떻게 대형교회 목사가 “그런 죄를…”에 초점을 둘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자기 죄를 드러내었는지….”에 둘 때 용기 있는 A 목사님의 고백은 또 다른 회개와 부흥의 첫 단추가 될 수도 있다. 곪은 상처를 드러내는 용기는 살아계신 성령의 역사이며 부흥의 시작이다.
한인교회 치부를 빛 가운데 드러낼 기회
처 음 뉴욕 N 교회의 A 목사님의 소식을 접했을 때 충격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길진 않은 세월 살아오면서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알 만한 목회자들, 찬양 사역자들이 아류의 죄 가운데 실추되거나, 쓰러지는 경우를 여러 번 접했다. 처음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땐 나도 “어떻게 그럴 수가!!”와 같이 ‘비난자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점차 세월이 흘러가면서 하나님을 알아 갈수록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한 순간도 하나님 없이는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철저한 죄인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과거엔 죄로 여기지 않았던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 더더욱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는 것일까. 나 자신도 그러한 죄를 실행만 못했을 뿐이지 언제 쓰러질지 모를 똑같은 연약한 존재이다. 사도 바울의 로마서 7장 고백은 인간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잘 표현해준다.
『만 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 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0-24)
목 회자라고 다르지 않다. 위대한 영적 지도자인 바울 사도의 처절한 고백처럼 우리 인간은 육신의 몸을 입고 있는 이상 죄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이다. 단지 목회자는 문제가 터졌을 때 사람들에게 더 큰 비난과 더 큰 충격을 안겨줄 수밖에 없다는 것이 크게 다를 뿐이다.
그 래서 야고보는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을 알고 선생이 되지 말라』(약 3:1)고 경고 했다. A 목사는 바로 이 차원에서 크나큰 실수를 저질렀다. 수많은 영혼을 실망시켰고, 그 부정적인 영향력이 너무 컸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 인간은 죄 문제에 대해 결코 희망이 없을까? NO! 명백하게 있다. 사도 바울은 바로 다음 구절에서 인류의 죄 문제를 단번에 해결한 대 선언을 선포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 하였음이라』(롬 8:1-2) 이것이 복음이다.
문 제는 이 복음을 한 번 듣고 또 죄에 빠지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이다. 이 문제의 해법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고백한 것처럼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21)는 자세로 주님께 달려 나가며, “이것이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빌 1:19) 바울의 고백처럼 성령께 순간순간 인도하심을 구하고 순종하는 것이 필요하다.
문 제는 이러한 문제가 터졌을 때 우리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에 있다. 여기에는 명백한 성경의 질서가 있다. 첫째로 함부로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예수님의 명령이다.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눅 6:37)
사 도 바울도 로마서 2:1-10에서 동일한 지적 한다.『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둘 째로, 그럼 이 목사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무조건 용서해야 하는가? 아니다. 성경은 강도 높게 징계도 말한다. 그러나 성경의 징계는 질서가 있다. 해당교회, 노회, 교단에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우리는 기도할 뿐이다. 그 이상의 비판적 여론은 자제해야 한다. 때때로 인터넷은 우리의 위치를 하나님의 위치로 올려놓는다. 인터넷 언어의 특징이 얼굴 없는 글이기에 글에 아무런 인격도 없이 하고 싶은 말, 평소에 싸였던 불만 등이 아무런 제지나 여과 없이 그냥 올라온다. 책임질 수 없는 언어들이 난무하다. 그 결과 우리가 원래 목표했던 타겟과 방향을 잃어버린다. 적어도 책임 질 선의 이야기만 해야 한다. 그런데 인터넷이나 언론을 보면 이 목사님의 공개 고백 진의를 의심하는 무책임한 논의들이 많아 보인다.
적 어도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를 삼가 해야 한다. 우리는 L목사의 삶을 비난하고 그의 죄를 시인 받아 내야 할 권위나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아무도 우리에게 그런 힘과 권력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기독교인이라면 하나님의 마음으로 자신의 치부를 드러낸 L목사를 위해 중보 해야 한다. 엄청난 충격에 빠진 뉴욕교회 교인들이 빠른 시일 내에 이 문제를 주님의 방법 대로 해결할 수 있도록 중보해야 한다. 이미 당회와 노회, 교단 차원에서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리를 지켜야 한다. 해당교회 교인이 아닌 분들이 L목사를 규탄하는 것은 언론이나 인터넷의 특성을 무기 삼은 명백한 월권 이다. 자신의 안타까움을 표현하는 정도 이상은 칼을 휘두르는 언어폭력이요, 무언의 살인이다.
마 지막으로 적어도 이 목사님은 용기 있는 분이다. 그 동안 많은 대형교회 목사들이 도덕적인 죄를 짓고 나서 공개적으로 자신의 죄를 시인한 적이 거의 없었다. 이미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앎에도 불구하고 교회 내부에서도 쉬쉬하고, 외부로도 굳이 긁어서 부스럼 낼 것 없는 것처럼, 교회의 수치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것이 상례이다. 목회자만 그런가? 교회의 평신도 리더십들도 이중적인 죄 된 삶이 드러난 경우가 허다하지 않았는가! 사회에서 터지는 대형사고 마다 기독교인들이 연루되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 교회가 썩어 문드러졌다. 죄가 눈에 보여도 말을 못하는 수준까지 몰락했다. 결국 기독교가 일반사회의 도덕적 잣대로 마구 도마질 당하는 양상까지 왔다. 일차적인 죄는 교회 지도자에게 있음을 목사의 한 사람으로서 인정한다. 개인적으로 회개하고 있다. 종교의 도덕성이 일반 사회의 도덕 수준보다 떨어질 때 그 사회는 위험하다. 기독교의 도덕성이 사회의 지탄을 받고 있다면 교회는 최악의 위기에 처한 것이다. 지금이 바로 회개의 때이다. 뼈를 깎는 회개와 부흥이 필요하다.
그 래서 더더욱 N교회의 치부가 드러난 것을 무조건 부정적으로만 보고 싶지 않다. 오히려 이를 사인으로 한인교계의 회개의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평양 대부흥 때 성령께서 지도자들의 치부를 드러나게 하실 때 그들이 순종함으로 드러냈다. 솔직하게 회개했다. 이번 기회에 한인교회 목회자들이 용기를 내어 자신의 죄악을 회개했으면 좋겠다. 성령의 음성에 순종함으로 더러운 치부를 드러냈으면 좋겠다. 뉴욕의 아픔을 통해 동부 부흥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소망을 품어본다. L목사의 진실여하를 떠나서 ‘뉴욕 대형교회 담임목사의 공개회개’라는 기독교 환부의 가시화가 오히려 서로 갈기갈기 찢어져 있는 우리 한인교회 들과 목회자들의 죄악과 치부를 빛 가운데 드러내어 성령의 강력한 치유의 광선, 골고다 십자가 보혈의 강력한 용서의 능력을 통한 회복과 부흥을 향한 하나의 작은 사인이 될 수도 있을지 조심스럽게 조명해본다.
May 1, 2007 | 책이야기/책읽는 이야기
2007/5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변화를 받아’라는 올해의 코스타 주제 때문인지, 지난 달에는 유독 복음주의와 그에 대항하는 사조에 관련된 책을 주로 읽었다. 쉽지 않게 읽었지만 그만큼 도움이 되었던 책들을 간략하게 나누고자 한다.
“복음주의와 기독교의 미래”, Alister McGrath, IVP, 1997
‘미래’에 대해 논한 책을 출판된 지 10년이 지난 후에 읽는 일은 나름대로 묘미가 있다. Alister McGrath가 2005년에 ‘기독교의 미래’라는 비슷한 이름의 책에서 20세기를 넘어 21세기로 들어선 기독교의 미래에 관한 전반적인 이야기를 다루었다면, ‘복음주의와 기독교의 미래’에서는 20세기를 지나온 복음주의의 특징들을 정리하고, 이제는 기독교의 주류가 되어버린 복음주의의 매력과 잠재된 어려움 등을 이야기했다.
요즘처럼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10년이란 세월은 한 저자가 사용한 ‘미래’라는 단어가 ‘과거’ 혹은 적어도 ‘현재’가 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 아닐까. 저자는 복음주의의 특징을 정리하고 많은 장점들을 이야기한 후에 (이 정의는 이 책 이후에 출판된 많은 책들에서 복음주의의 정의로 많이 사용되고 있었다), 복음주의가 미래에도 바람직한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부족한 ‘영성’을 개발해야 하고,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분파주의를 주의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그러고 보면, 최근 10년간 유진 피터슨을 중심으로 복음주의 계열에서 영성을 그토록 강조한 배경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복음주의가 자유주의와 대항하면서 형성되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이론화하고 지성화하면서, 기독교의 영적인 부분을 소홀히 했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고, 그런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여러 노력들 중의 하나가 영성신학이 아닌가 싶다.
자유주의와 근본주의 사이에서 복음 자체를 지켜내기 위해 애쓰던 복음주의. 그리고 지금은 기독교의 주류가 되어 너나없이 복음주의자를 자처하는 시대를 사는 우리가, 진정 복음주의는 무엇이고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를 알기 위해 반드시 읽어봐야 할 책이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진리”, Lesslie Newbigin, IVP, 2005
작년, 10년 만에 한국을 방문하면서, 열흘남짓 머무는 짧은 기간동안 기를 쓰고 기독서점을 다녀오겠다고 하는 바람에 가족들에게 핀잔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때 서점에서 눈에 띄어 구입해온 책 중의 하나가 바로 레슬리 뉴비긴의 ‘포스트모던시대의 진리’이다.
‘영국 국교회가 낳은 세계적인 복음주의 지도자’라는 호칭이 늘 붙어 다니는 레슬리 뉴비긴의 책은 현대 다원주의와 기독교에 대한 훌륭한 통찰력을 제공함에도 불구하고 늘 읽기 쉽지 않아 부담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 책은 적은 분량과 김기현 목사의 깔끔한 번역 덕분에 쉽게 읽을 수 있었다. 책의 내용을 요약한 역자의 표현이 탁월하여 그냥 빌려본다.
“선교사로서의 현장성과 학자로서의 학문적 분석과 적용이 탁월한, 영국 국교회가 낳은 세계적인 복음주의의 지도자인 레슬리 뉴비긴은 번뜩이고 탄탄한 논리로, 현대와 탈현대 세계에서 기독교의 진리와 권위의 원천을 분석하고 있다. 그는 현대사회가 이성이라는 환상을 가지고 권위에 관한 모든 주장을 의심하고 있음을 간파한다.
그는 교회가 성경, 전통, 이성, 경험을 신적 권위에 대한 근거로 제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무엇보다 뉴비긴은 이것의 올바른 사용 방법과 서로의 관계를 모색할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인이 이야기로서 성경을 말하며 그 이야기의 일부분으로 살아갈 때에야 현대 사회에서 복음의 적실성을 주장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책 뒤 표지에서>
다소 이론적인 글에 이어지는 결론 부분에서 저자는 포스트모던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복음을 들고 나아갈 방법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말이지 나도 이렇게 하고 싶어졌다.)
“최종적인 요점을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만약 포스트모던 세계에서 우리가 우리의 이야기를 하려면, 다음과 같은 답변을 듣게 될 것이다. “예, 물론입니다. 그건 당신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다른 이야기들도 있습니다. 왜 우리가 그 이야기를 믿어야 합니까?”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분명한 것은, 우이는 복음 이야기를 인증할 수 있는 것에 기초하여 몇가지 더 근본적이고 좀더 신뢰할 만한 진리를 제안하려는 유혹에 저항해야 한다. 분면 우리는 어떻게 성경 이야기가 다른 것으로는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인간의 삶에 의미를 가지는지 보여 주기 위해 노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우리가 그 이야기의 일부분일 때에만 확실해진다. 결국 우리가 그 질문에 대해 할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나는 내 공로와 무관하게 이 메시지를 전하고, 이 이야기를 말構? 이 초대를 전하도록 부름받고, 위임 받았습니다. 그것은 내 이야기도, 내 초대도 아닙니다. 강요하려는 의도는 없습니다. 그것은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을 위해 자신을 주신 분의 초대입니다.” 그 초대가 만약 구세주의 은혜가 역사하는 공동체로부터 온다면, 매력적으로 다가 올 것이다. 받아들여질 지의 여부는 우리 능력에 달린 문제가 아니다. 그것을 염려하고, 안달하는 것은 믿음 없음의 표시다. 우리가 아니라 오직 초대하는 분에게 통솔권이 있다.”
“복음주의와 기독교적 지성”, Alister McGrath, IVP, 2001
책을 읽고 나서, 관련된 분야에 대한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책이 있다. Alister McGrath의 복음주의에 관련된 또 한 권의 책인 ‘복음주의와 기독교의 지성’이 바로 그런 류의 책이 아닌가 싶다.
– 이 책의 원제이다. 제목으로만도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복음주의의 지적인 토대와 정합성, 학문적 타당성을 비판적이면서도 긍정적인 방향에서 고찰함으로써, 복음주의가 전통적으로 학계에서 보였던 부정적, 소극적 태도를 극복하고 주복할 만한 사상적 대안이 될 수 있음을 적극적으로 피력한다’
저자는 복음주의의 신학의 지적 정합성을 다루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성경의 권위를 이야기하고는, 현대에 복음주의와 경쟁 선에 있는 후기자유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종교 다원주의 등을 다룬다. 하지만, 내공이 많이 부족한 나는, 저자가 이야기하는 후기 자유주의에 대한 설명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 저자도 ‘지켜보자’고 했지만, 그들의 사상을 왜 후기 자유주의라고까지 불러야 하는 걸까? 그저, 스탠리 하우워어스를 후기 자유주의의 대표적인 학자로 언급한 것에 조금 놀랐을 뿐이다.
개인적으로 눈에 띈 한가지는, ‘계몽주의가 복음주의에 미친 영향’에서, 현재 내가 하고 있을 법한 성경공부를 계몽주의의 영향에 의한 ‘다소 냉랭하고, 초연하며, 합리적으로 성경게 접근하게 만드는 영성관’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 성경을 읽으면서 감정을 개입시키거나 인간의 상상력을 사용하는 것을 자제하고, 본문에서 주제를 뽑으려고 노력하는 방법이 상당히 계몽주의의 영향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다. 늘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던 내용은 눈으로 확인한 기쁨을 누렸다고나 할까. 그나 저나, 이런 배경에서 유진 피터슨의 ‘이 책을 먹으라’같은 책들이 나오게 되었지 않을까 싶다.
“축복의 혁명”, 박철수, 뉴스앤조이, 1990
“기독교 신앙을 갖는다는 말은 기독교적 축복관을 갖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성경이 말하는 축복,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축복을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이 주시는 복과 다른 것을 구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성경이 말하는 복과는 전혀 다른 축복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중략) 무엇보다도 회개는 복의 내용이 바뀌는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바뀌고,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이 바뀌어야 합니다. 빌립보서 3장 7절에서 사도바울을 지금까지 자신이 자랑으로 여기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모두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진정 회개한 자의 모습입니다.” (본문 중에서)
기독교 서적 사이트에 들러 베스트셀러 순위를 둘러보면 마음이 답답해지는 일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최근 몇년동안 그 현상이 더 두드러지지 않았나 싶다. 성경적인 복과 세상의 복을 구분해 내지 못하는 책들이 지속적으로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현 상황 속에서, 그런 세속주의적 가치관에 대항하는 책들을 발견하면서 느끼는 기쁨도 더 커지는 웃지 못할 일도 경험한다. ‘축복의 혁명’은 꽤 오래 전에 쓰여진 책이다. 하지만 어쩌면 작금의 한국과 미국의 주류 기독교에는 더 필요한 메세지인지도 모르겠다. 물질주의의 물든 기독교, 종교화하여 교회 건물과 목회자를 신성시하는 왜곡된 기독교의 문제점을 대단히 쉬운 필체로 이야기한다. 논조가 다소 강하다고 느낄지 모르겠지만, 한번쯤은 꼭 읽어 보기를 권하고 싶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