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의 코스탄] 신년의 벽두에서…

이코스타 2004년 1월

주님의 제자들, 어떻게 살 것인가?


 


저물어가는 한 해를 마감하면서 우리는 지난 한 해 동안에 있었던 크고 작은 일들을 주님의 뜻과 말씀의 빛에 비추어 돌아보며 반성하였다. 이제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질문을 각기 다양한 형태로 스스로에게 던지기 시작하고 있다. 주님의 제자로서 올 한 해도 주님께 기쁨이 되어드리는 삶을 살아가리라 생각하는 동안 우리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주님께로 향하여 가고 있음을 느낀다.


“주님, 제가 어떻게 살기를 원하십니까..?”


우리를 ‘주를 사랑하는 자’ 부르시는 주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마태복음 22:34-40; 마가복음 12:28-34)”는 말씀으로 모든 율법을 요약하여 주셨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 ‘사랑’ 있으신 것은, 하나님이 ‘사랑’ 그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충성되고 성숙되었으며 칭찬받을 만한 면이 많은 교회였던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도, 이 한 가지, ‘사랑’ 대해서만은 질책하셨다. “네 처음 사랑이 어디 있느냐?” 주님의 제자로서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 ‘주님을 사랑하는’ 일이었기에,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다시 찾아와 그를 회복시키실 때에도 주님은 이 한 질문으로 세 번을 반복하여 물으셨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를 사랑한다는 것은 구체적인 삶 가운데서 무엇을 의미하는가? 베드로는 분명 주를 사랑하는 자였다. 주를 부인하는 자신의 연약한 모습을 보면서 너무도 겸손해진 그였기에 감히 주를 사랑한다고 자신있게 고하지도 못하였지만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는 말과 더불어 주님은 그의 겸손하고 간절한 ‘사랑의 고백’을 받으셨다. 이에 주님께서는, “(그래, 네가 이토록 나를 사랑하니…)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신다. ‘내 어린 양’이란 물론 아직 믿음이 견고하지 못한 주님의 백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고 하시는 분부는, 우리에게 친근한 표현으로 하면 “영혼들을 돌보아(care) 주거라” 하시는 말씀과 같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을 장식하고 있는 이 갈릴리 호수에서의 주님의 말씀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전의 그분의 메세지와 완전하게 같은 의미가 된다. 여기서 주님은, 주님이 가장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는 자’의 마땅히 하여야할 바가 무엇인지를 간결하고 더 분명한 메세지로 우리에게 다시금 확인시켜주고 있다. 그렇다면, 올 한 해 주님의 제자로서 온전히 살아드리기 원하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는 ‘주님을 사랑할 것’과 그 구체적인 실천으로서의 ‘영혼 사랑’을 분부하고 계시지 않을까?


내 사랑하는 제자야, 너에게 다른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오직 이 한 가지만을 묻겠다. “진실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나는 이점을 가장 중히 여긴단다. 그래, 네 마음처럼 네가 나를 그토록 사랑한다면, 내 양들을, 그 영혼들을 돌보아줄 수 있겠니? 그들을 말씀으로 먹이고 사랑으로 돌보며 권면하고 양육하여 내가 너를 세운 것과 같이 그들을 세워주거라


우리를 예배자로 부르시는 주님


우리보다 앞서 살다 간 신앙의 대선배들이 만일 오늘 우리 앞에 다시 서게 된다면 어떤 삶을 살라고 독려할까? 모세의 경우에, 이스라엘을 향한 마지막 설교에서 그가 남기고 간 메세지는, 요약하면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명기 6:5)”는 것이었다. 나의 모든 것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이러한 삶을 다른 말로 하면, 순간 주님의 주인되심 아래에서 겸손히 그분과 동행하는 ‘예배자의 삶’이라고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예배자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교회의 정규 예배들에 참여하는 것 이외에 더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가? 요한복음 4장을 보면,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나누시는 가운데 올바른 예배란 무엇인지에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이 산에서 드리는 것도 아니고 저 예루살렘에서 드리는 것도 아니라, (어느 곳에 있든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의 말대로 이 산에서 예배하여야 합니까, 아니면 유대인들의 말처럼 예루살렘의 성전에 가서 예배하여야 합니까?” 하고 묻는 사마리아 여인의 질문에는 역사적인 배경이 있었다. 열왕기상 12:25-33 보면, 북왕국 이스라엘을 세운 여로보암은, 백성들이 신앙적 전통을 따라서 남왕국의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 예배할 경우 아직 견고하지 못한 그의 정치적인 입지가 위협을 받게될까봐 두려워서 각처에 산당을 짓고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두어 예루살렘에 가지 못하게 하였다. 이처럼 신앙적 동기가 아닌 정치적 동기로 말미암아 등장한 산당들의 존재는 두고두고 북왕국의 영적 타락의 한 상징으로 여겨졌다. 사마리아는 북왕국의 수도였던 만큼 이와 같이 산에서 예배하는 전통은 오래동안 뿌리깊은 관습이 되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듯 명백하게 보이는 문제점들과 관련하여 질문을 받으셨을 때 조차도 예수님께서는 예배의 장소나 외적 요건에 관하여 대답하시기 보다는 오히려 예배자의 중심에 관한 면으로 생각의 촛점을 옮겨주고 계신다.


사마리아 여인의 질문을 현대적인 표현으로 바꾸어 보자면, “캠퍼스에서 예배하여야 합니까, 아니면 교회에서 예배하여야 합니까?” 같은 질문들로 그 예를 삼을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오늘 이와 같이 주님께 여쭙는다면 여기에 대하여 주님은 어떻게 말씀하실까? 사마리아에서의 그때나 마찬가지로 “어디에서?” 관한 말씀보다는 “어떤 자세로?” 대한 답변을 주지 않으실까? 우리를 향한 주님의 관심은 언제나 신앙의 외면적인 요소들보다는 마음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에 두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배자로서의 우리의 삶의 첫 걸음은, 주님의 뜻이라면 나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따를 수 있는지, 그리고 주님의 말씀과 뜻을 이루는 일이 내 육신을 이롭게 하는 일보다 중요시되고 있는지에 대하여 매 순간 성령님 안에서 진실하게 자문하는 마음가짐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나의 삶 가운데서는 주님이 온전히 주인되시고 있는가? 나에게는 일 주일에 7일, 하루 24 시간이 주님께 현재진행형으로 드려지고 있는 예배라는 확신이 있는가? 예배에 관한 주님의 말씀의 마지막 대목을 음미해 보자.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우리를 거룩한 공동체로 부르시는 주님 


주님의 으뜸가는 제자였던 베드로는 그의 서신 마지막 부분에서 다음과 같은 권면을 남겼다.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베드로후서 3:11-12) 신약 시대의 명의 영적 거목이었던 바울은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보낸 그의 마지막 서신의 무렵에서 이렇게 당부하고 있다.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 (디모데후서 2:22) , 영적 거목들은 그들의 마지막 교훈들을 통하여, 우리가 순결한 주님의 사람들과 더불어 주님의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거룩과 성령의 열매를 이루어갈 것을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거룩한 공동체’ 향한 바울과 베드로의 마지막 권면들은, 주님이 마지막으로 드리셨던 대제사장적 기도의 내용과 닮은 점이 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주님은, 먼저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셨고, 그분의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으며, 이어서 그분의 이름 아래 그분의 몸을 이룰 주님의 사람들의 ‘거룩한 공동체’ 위하여 기도하셨기 때문이다. 해를 맞으면서, 동안 지역교회 안에서, 캠퍼스 안에서, 가정에서, 우리의 각양 처한 곳에서 주님이 하셨던 기도들이 우리의 가운데에 이루어지기를 기도한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한복음 17:17-22)

[반영운] 가정에서 할 수 있는 환경보호 V – The Fourth Rs

이코스타 2004년 1월




지금까지 우리는 가정에서 할 수 있는 환경보호의 방안으로서 3R, 즉 Reduce (줄이기), Reuse (다시 쓰기), Recycle (다시 만들어 쓰기) 등에 대해 살펴보았다. 위에서 언급된 3R은 주요한 환경보호 방안으로서 널리 인정받고 있으며 구체적인 실천 방안들까지 제시되고 있다. 그런데 종종 위의 3R에 한 가지를 덧붙여 4R이라고 하는 경우를 보곤 한다. 3R은 모든 곳에서 일정하게 사용되는 반면 이 네번째 R은 경우에 따라서 ‘Rethink’, ‘Respond’, ‘Refuse’, ‘Recover’ 등으로 다양하게 사용된다. 이중에서 Refuse와 Recover는 주로 산업현장과 관련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가정의 차원에 Refuse와 Recover를 적용해 보자면 Refuse는 소비자로서 각 개인이 상품을 선택할 때 환경과 인체에 해로운 제품을 선택하지 않거나, 쓰레기 처리방법을 선택할 때 보다 환경친화적인 대안을 선택하는 것을 말하고, Recover는 다시 사용할 수 없거나 다시 만들어 쓸 수 없는 쓰레기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으로서 썩을 수 있는 쓰레기를 이용하여 퇴비를 만들어서 반응열을 이용한다든지 또는 만들어진 퇴비를 밭이나 논에 뿌려서 거름으로 이용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다음에는 위에서 간략하게 살펴 본 Refuse와 Recover를 제외한 처음 두 가지 R인 Rethink와 Respond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다시 생각하기 (Rethink)


존 모리스 박사 (Morris 1997)는 네번 째 R로서 Rethink를 덧붙이면서 그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To the concept of 3Rs, another is sometimes added, a fourth R: Rethink. Serious rethinking has to occur before any serious attempt occurs to reduce and reuse. Recycling has caught favor with the public because it does not require a rethinking of lifestyle in how we use resources. To reduce and reuse is to drastically change peoples’ lifestyles. It is only through a change in lifestyles that the oppressive heartland-hinterland relationship might be altered. www.publicconcern.org/adams_mine_digest/timto/drjohnmorris.html


모 리스 박사는 위 글에서 네 번 째 R인 Rethink (다시 생각하기)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역설하고 있다. 즉 ‘다시 쓰기’와 ‘다시 사용하기’를 하기 전에 ‘다시 생각하기’가 선행되어야만 한다고. 특히 ‘다시 만들어 쓰기 (Recycle)’에 대해 대중적인 관심이 쏠리고 있는 것은 바로 현재 자원을 소비하는 생활방식에 대해 다시 생각할 필요가 없도록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사실상 네 번 째 R이라고 불리우긴 하지만 ‘다시 생각하기’를 가장 먼저 두어서 우리의 생활 방식에 대해 질문하고 바꿀 필요가 있으면 과감하게 바꾸어 가는 용기있는 행동이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앞의 글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사실상 현재 우리의 생활 방식은 다분히 대량소비의 문화에 길들여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은 무한하고 사람의 욕망은 결코 자제되거나 길들여져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으면 자연히 우리의 자원 사용방식이나 생활방식에 대해 다시 생각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사 람의 경제생활은 에너지를 소비하는 것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따라서 각 개인이 돈을 사용할 때에는 그 돈으로 사는 것이 어떤 제품인지 면밀히 따져 보아야만 책임있는 경제생활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시장에서 소비자나 생산자는 경제적 이윤만 생기면 그 제품이 환경적으로 안전한지 질문하지 않고 만들고 구매하곤 하기 때문이다.


소 비자로서 각 개인의 책임있는 경제생활에는 무슨 제품을 선택하는가도 포함하고 있다. 즉 구매하려는 제품에 환경을 오염시키는 물질이 포함되지는 않았는지, 사람의 건강을 해치는 물질이 포함되지는 않았는지, 값이 싸다면 왜 그렇게 값이 싼 것인지 꼼꼼하게 따져서 물건을 구매해야만 한다. 결국 소비자의 구매행위가 공급자의 생산행위를 결정짓기때문에 무조건 싼 값에 현혹되어서는 안되며 오히려 환경친화적인 의지가 담긴 소비행위를 통해 환경적으로 안전한 세상을 만들어 갈 수도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다시 생각하기’는 자원의 소비를 줄이는 것이나 사용한 물건을 다시 쓰는 것이나 사용된 물건을 이용해서 다시 만들어 쓰는 것을 고려하기 전에 해야 할 최우선적인 요소이다.


반응하기 (Respond)


미 국 환경청 (US EPA)은 네 번 째 R로서 반응하기 (Respond)를 들고 있다. ‘반응하기’는 위에서 살펴 본 ‘다시 생각하기’와 비교해 볼 때 쓰레기 생산행위에 대하여 재고한다는 면에서는 비슷한 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쓰레기를 적게 만드는 것에대한 홍보와 교육 그리고 창의적으로 쓰레기를 줄이는 방법을 찾아가는 면에 있어서는 조금 더 적극적인 면을 포함하고 있다. ‘반응하기’는 크게 ‘교육하기’와 ‘창의적 방법 추구’ 등의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 저, ‘교육하기’는 자원 줄이기와 다시 만들어 쓰기 등의 구체적인 방법들을 알리는 것으로서 생태적으로 환경적으로 안전한 상품에 대한 선호를 소비자로서, 지역사회의 일원으로서 생산자에게나 지역사회 지도자들에게 분명하게 표현하는 것을 포함한다. 이 일을 위해서는개인에서 출발해서 지역공동체와 국가 공동체가 함께 움직여져야만 하는 중요한 것이라는 문제의식을 가진 개인이 자원절약과 다시 만들어 쓰기와 가정에서 할 수 있는 퇴비만들기 등에 대한 정보를 다른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나눌 필요가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우리 개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고, 우리가 살기 원하는 세상의 모습을 가꾸어 갈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말이 조금은 교만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어쩌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선조들이 그리고 우리 자신이 선택한 경제행위의 결과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 보다 깊이 생각해 볼 의미 심장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중심으로 신뢰하지 않는 데서 오는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들을 통해 우리의 반응을 나타낼 수 있을까?


-   특정 제품의 생산자에게 불필요한 포장과 제품에 사용된 위해요소 사용을 줄일 것을 요구하는 편지나 이메일을 보낸다. 덧붙여서 만일 회사의 제품이 긍정적인 변화를 보이면 그에 대한 반응도 보여준다.
-   지역사회에서 적극적으로 자원 줄이기, 다시 만들어 쓰기, 그 외 다시 쓰기 등의 방법 등의 장점을 알리고 동참을 격려한다.
-   가정이나 일터에서 적절한 곳에 다시 사용가능하고 다시 만들어 쓰거나 다시 만들어 쓸 수 있는 제품을 사용하도록 한다.
-   인터넷의 게시판이나 직접방문 또는 편지 등을 이용하여 학교 교육의 내용 속에 환경교육을 담고, 그 교육 내용 속에 3R의 내용을 담도록 교육관계 기관이나 의사결정자들에게 요구한다.
-   각 지역사회마다 환경적으로 건강한 쓰레기 프로그램을 갖도록 요구하거나 현재 진행 중인 프로그램을 점검하고 부족한 것들에 대해 대안과 함께 의견을 제시한다.


다 음으로는 쓰레기의 양이나 독성을 줄이는데 창의적인 방법을 찾아서 적용해 보는 것이다. 사실 찾아 보면 쓰레기의 양이나 독성을 줄이기 위한 방법들은 많이 있다. 창의적으로 생각해 보면 원천적으로 쓰레기를 줄이거나 다시 만들어 쓰기 위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각자의 생활 영역에서 작은 부분들에 신경을 쓰다 보면 적쟎은 방법들을 찾아내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것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   물건을 담았던 큰 종이 상자를 아이가 놀 수 있는 집으로 꾸밀 수 있다.
-   플라스틱 아이스 크림 박스를 꽃을 키울 수 있는 화분으로 바꿀 수 있다.
-   계란을 담았던 종이 상자를 이용하여 씨를 심어 싹을 틔울 수 있다.
-   폐 타이어 (쇠가 포함된 타이어는 제외)를 이용하여 아이들이 탈 수 있는 그네나 놀이터 기구들을 만들 수 있다.
-   폐 타이어를 적당한 높이까지 쌓아 올려서 감자나 나무 등을 심을 수 있다.
-   잉크나 미술 용품을 살 때 유해 성분이 포함되지 않은 제품을 구입한다.
-   원천적으로 쓰레기를 줄이는 방법을 찾는다. 예를 들어 커피를 사서 보관할 때 빈 커피 깡통에다가 다량을 사서 보관한다.
-   물이나 우유 등의 음료수를 살 경우 다시 사용 가능한 용기 속에 담긴 것을 산다.
-   물건을 주문할 경우 돈을 절약하고 포장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서 단체로 우편을 주문한다.


환 경을 보호하기 위한 대안을 창의적으로 찾다보면 위에서 든 예들 이외에 보다 다양한 방법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서 이렇게 생활과 깊이 관련된 논의가 생겨나고 구체적인 방법을 찾아가려는 시도를 창의적으로 해 보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각 소그룹 별로, 구역모임 별로 구체적인 적용방법을 찾아 공동의 노력을 기울이다 보면 전도의 대상으로만 보아오던 이웃에 대해 함께 살아가야 할 공동운명체로서의 존재인식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솔선해서 마을의 일이나 이웃의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대안을 제시하고 함께 살아가는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


글을 마무리하며


위 에서 지적된 것처럼 환경보호를 위해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다시 생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건강한 성경이해와 상식과 양심에 따라 이제껏 길들여진 사고와 습관과 행동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해온 것들과 들어온 말들이 과연 성경적인가를 질문해 보아야 한다. 특히나 “실제 우리 생활에 적용되는 삶을 성경에 바탕을 두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필자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산상수훈의 황금률을 환경보호와 관련하여 다시 생각해 봐야할 구절들 중의 하나의 예로 삼아 설명하려고 한다. 다소 어색한 부분이 있긴 하지만 그저 부족한 시도로 생각하고 읽어 주기 바란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태복음 7장 12절)


위 마태복음 7장 12절은 산상수훈 중에서 황금률로 널리 알려져왔다. 이 구절은 마태복음 7장 7절부터 11절까지 나오는 내용의 결론으로 보인다. 자칫 이 구절들이 기복적으로 이용되어서 많은 이들에게 거부감을 주는 것도 사실이지만 우리의 가치관이 성경적으로 변하면 이 문단만큼 실제적으로 우리의 마음을 위로하며 채찍질하는 구절들도 많지 않다. 7절과 8절에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행위에 대한 정확한 약속이 제시되어 있고 9절에서 11절까지는 아버지의 예를 들어서 아버지가 아들의 필요를 얼마나 잘 아시는가, 그리고 그 필요를 얼마나 충실히 채워주실 의지가 있으신가를 역설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아버지 (하나님)만을 신뢰할 때 이러한 간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만으로 충분히 이루어 주실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듯 하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우리는 위 구절에서 말하는 내용의 결론으로 황금률을 해석할 필요가 있다. 필자의 부족한 견해로 볼 때 황금률은 무엇을 구할 것인가에 대한 간구의 내용을 총체적으로 정리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의 신실하심을 믿고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대로 남을 대접하는 것을 지금까지는 우리의 일반적인 삶의 자세로 이해해왔는데 다시 생각해 보면 이것은 우리가 아버지께 간구하는 내용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무슨 내용을 담아 구할 것인가? 그것은 바로 성경전체를 통해, 그리고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 예수님의 제자들과 우리 신앙의 선배들의 삶을 통해 나타나는 본을 따라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의 현장을 반영한 간구가 되어야 할 것이다. 때로는 아주 현장성이 있는 것이어야 하며 관계적인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후 13절에 나타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명령이 바로 간구의 내용과 연결된 시금석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의 의사결정이 과연 참으로 이웃을 위하고 내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대접하는 것인지 자로 재보는 판단기준이 되지 않을까?


환 경보호를 위한 시도는 결과가 당장 눈에 보이지 않으며 자칫 혼자서만 바보같은 시도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황금률을 말씀하신 예수의 정신에 의거하면 우리가 깨끗한 환경에서 살고자 한다면 우리는 더 더욱 환경을 깨끗하게 해야한다. 그것이 사람을 포함한 우리 주위의 모든 자연만물을 이웃으로 대하는 자세이다. 나 이외의 다른 존재 즉 자연만물이 나에게 살기 좋은 환경을 제공해 주길 원하면 그만큼 우리 자신은 하나님의 섭리에 맞게 자연만물의 이치를 이해하고 그에 맞게 우리의 삶의 습관과 행위를 바로 잡아가야만 한다. 시편 기자가 누누히 자연의 위대함과 그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사랑하심을 노래한 것처럼 환경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속에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는 모습이 나타나야만 우리의 신앙이 얼마나 건강한 지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혹 자는질문하지 않는 사람은 죽은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성경의 여러 곳에서도 ‘생각해 보라’는 명령을 자주 한다. 성경을 통해 우리의 삶이 얼마나 교만하고 패역한 지 조명하고, 우리의 마음 자세와 행위가 하나님의 섭리에 비추어 어떠한 지 다시 생각하고 회개하면서 환경을 이웃으로 대하는 건강한 삶을 추구해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가는 과정의 하나로서…



[정진호] 제 4 떡 – 가치 역전 – 온 우주와 한 생명

한 생명이 온 천하보다도 더 귀하다는 것! 그것이 생명의 소중함을 강조하는 성경의 가르침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당신은 진심으로 그렇다고 믿고 있는가? 생명의 가치가 땅에 떨어지고 돈 때문에 부모가 자식에게 총을 쏘아 죽이고 강물에 던져 죽이는 이 기막힌 세상에서 어떻게 그것을 입증할 수 있는가? 한 쪽에서는 OECD 가입국임을 내세우며 기독교의 기형적(?) 급성장으로 세계적인 초대형교회가 즐비하고 세계선교의 중심국가가 되었다고 자랑하는 나라가, 다른 한쪽에서는 교통사고 사망률 세계 1위, 세계적인 낙태 왕국, 고아 수출국으로 오명을 떨치며 생명가치를 우습게 만드는 아이러니가 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온 우주와 한 생명…… 과연 어느 것의 가치가 더 큰 것인가? 광대무변한 엄청난 우주 속에 한 점 티끌만도 못한 지구라는 작은 별 안의 한 귀퉁이에 살고 있는 ‘나’ 라는 존재가 얼마나 작은 것인지… 그와 같은 상념 속에 빠져들게 되면 한 생명이란 정말 보잘것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20세기 우주론의 가장 큰 논쟁거리 중 하나였던 대폭발 이론(Big Bang theory)과 정상상태 가설(Steady State Theory) 사이의 치열한 공방은 우주의 기원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시각을 대표하고 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대폭발 이론은 물질(物質)이 스스로 존재하는 “자연(自然)”이 아니라 시공간의 시작과 더불어 “창조(創造)”된 것임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대폭발 이론이 우주의 시작점이 존재한다는 가정 속에서 성서적 창조(創造)에 대한 단서와 여지를 제공하고 있다면, 정상상태 이론은 우주가 영원 전부터 아무런 이유 없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자연적 입장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끝없이 순환하는 영겁의 시간 속에서 정상상태로 그저 존재해 왔다고 생각하는 우주에 대한 자연적 개념을 송두리째 뒤흔들며 등장한 것이 대폭발이론이다. 그 효시는 1929년 허블(Edwin P. Hubble)이 천체망원경으로 행성간의 적색편이 (赤色偏移)(1) 현상을 발견함으로써 제기된 우주 팽창설에서 찾을 수 있다. 대폭발이론은 그 후 1940년 가모프에 의해 본격적으로 제기되어 우주가 시간과 공간도 없는 절대 무(無)의 한 점에서 마치 폭발하듯이 엄청난 에너지로 팽창하며 물질을 생성시켰다는 가설을 함축하게 된다. 이 논쟁은 1965년 미국의 전파 기술자 펜지아스와 윌슨이 우연히 발견한 우주배경 복사선(2)에 의해 대폭발이론에게 승리를 안겨주는 결정적인 증거로 채택되며 두 사람은 엉겁결에 노벨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는다.


우주(즉 시간, 공간, 물질)가 시작되었다는 생각은 광대무변하다고 생각되어온 고전적인 우주관에 여러 가지 혼란을 안겨준다. 시공의 시작과 팽창, 그 안에 흩어져 있는 행성들 사이의 끝없이 멀어지는 간격들, 빛의 속도로 팽창하는 우주의 끝, 그리고 그 경계, 우주의 크기, 우주의 나이 등등 이상한 생각들이 끝없이 펼쳐지는 것이다. 대폭발이론에 근거하여 현재 모든 행성간에 멀어지고 있는 속도를 역산하여 계산한 우주의 최대 나이는 200억 년으로 추정되고 있고, 우주의 크기는 200억 광년이며 그에 따른 우주의 크기는 2,000조 Km라고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그 속에 무려 1,000억 개의 은하와 각 은하마다 다시 1,000억 개의 별들이 존재한다고 우주 천문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1022 개의 별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상상할 수도 없이 많은 숫자이다. 그래서 자고로 도무지 셀 수 없이 많은 숫자를 가리킬 때 밤하늘의 별보다 많다고 표현하곤 했다.


그러나 상대론의 세계는 우리들이 지닌 절대적 우주에 대한 고정관념이 많은 착각과 오해를 지닌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빛이 있으라” 하는 그 말씀의 선포와 함께 섬광과 같이 터져 나와 빛의 속도로 퍼져가던 태초의 신비 속으로 접근해 가면, 시간은 정지하고 공간은 한 점으로 축소되며 물질은 무한의 에너지로 변하게 된다. 도대체 그 상황 속에서 시간의 길고 짧음(長短)이나 공간의 크고 작음(大小)이나 물질의 많고 적음(多少)이 무슨 의미를 지니게 되는가?


우리는 착각하고 있다. 우리 손에 쥘 수 있는 흑연 한 덩어리 12g 속에 온 우주의 별의 숫자보다도 더 많은 6.02×1023개의 원자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그 하나의 원자 속에 우리가 측량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소우주가 존재하고 있다. 큰 빌딩을 짓는 설계도면 보다 최신의 반도체 칩 안에 숨어있는 고도의 지식과 설계가 훨씬 더 복잡하고 어려운 것임을 생각한다면, 생명이 없는 무생물적 거대 우주를 만드는 설계보다도 한 생명을 만드는 설계의 지식이 훨씬 더 복잡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절대 가치는 우리 인간의 눈에 비치는 물리적 크기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피조물의 가치는 같은 피조물인 인간의 판단 기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든 창조주의 지식과 지혜에 의해 결정된다. 자연과학과 신앙의 세계는 모두 경이(wonder)에 기초하고 있다고 말한 아인슈타인의 말은 자연의 신비로움 앞에 절대자의 존재를 느끼며 겸손할 수밖에 없는 대과학자의 진실한 고백이었다.


하나님의 저울에 온 우주와 한 생명을 달아 비교해 보면, 우리 인간의 눈에는 거대해 보이는 우주도 한 생명 안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에는 도무지 못 미치는 왜소하고 가벼운 것임을 알게 된다.


* 물질의 가치에 대하여 성경은 긍정적으로 말한다. 영적인 세계만이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영지주의자나 불교도처럼 물질을 악하다고 반대하거나 물질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여 무시하지 않는다. 반대로 오직 물질이 곧 존재 그 자체라고 생각하며 우상시하는 유물론자처럼 물질을 과대평가하지도 않는다. 성경은 물질에 대하여 균형 잡힌 시각으로 가르치고 있다. 물질은 반드시 있어야하는 것이기에 물질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한 상세한 경제 원리를 신구약 성경이 모두 다루고 있다. 물질 역시 선하신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이기에 본질적으로 선한 것이다. 우주 안에 있는 모든 물질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셔서 아름답게 사용하도록 허락하신 것이기에 그 존재 목적 자체가 선한 것이고 또 그 안에 합당한 가치가 담겨있다. 단지 타락한 인간이 피조물인 물질을 마치 하나님처럼 숭배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 것뿐이다.


물질 가치를 우상시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물질 의존 심리가 강하게 지배하고 있다. 물질이 그 사람의 영혼을 사로잡고 있기에 물질이 없으면 존재의 불안감에 휩싸인다. 물질이 곧 구원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돈이 하나님이요 예금 통장이 곧 구세주요 그 속에 들어있는 잔고의 높낮이가 바로 충만함과 능력을 가져다주는 성령에 해당한다. 통장의 잔고가 늘어나면 그들은 안심한다. 그러나 통장이 가벼워질수록 그들은 존재의 위협을 느낀다. 모든 일상사가 카드결재에 의해 진행되고 속속 현금이 통장에서 빠져나가는 현대인에게 은행 잔고에 의해 심리적 안정감이 좌우되는 이 증상(banking balance symptom)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크리스천들에게도 이 증상은 예외가 아닌 것 같다. 입으로는 예수를 주(主)로 인정하고 또 “주님 사랑해요…”를 목놓아 외치며 찬양할 지라도 그들의 삶을 지배하는 참 주인은 여전히 물질에 불과하다. 물질의 노예로 전락한 현대인들…


예수는 자신을 따르던 배고픈 무리들을 불쌍히 여겨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그들을 먹인다. 오병이어에는 단순한 육신의 떡을 공급하는 것 그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 기적의 이면에는 물질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창조주의 신성을 나타냄으로서 물질의 노예로 살아가는 백성들을 구속(救贖)하여 해방시키고자 하는 메시아적 소망이 있었다. 과연 오병이어의 기적은 로마의 압제와 굶주림 속에서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메시아의 소망을 다시 일깨우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 놀라운 기적을 체험한 무리들은 이 사람이야말로 자신들의 굶주린 배를 채워줄 경제적 메시아로 로마의 통치로부터 조국을 해방시켜줄 정치적 메시아로 생각하게 된다. 그들이 곧바로 취한 행동은 예수를 잡아 자신들의 왕으로 삼으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그것을 단호히 거절하고 몸을 피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자신을 왕으로 삼고자 하는 본심이 오병이어의 기적 속에 나타난 표적으로서의 참 메시아로서 예수를 발견하고 깨달은 것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다. 떡의 속박(束縛)에서 벗어난 자들에게 나타나는 자유함과 하나님을 진정 경배하고 찬양하고자하는 예배자의 마음보다는 오히려 예수를 언제든지 자신의 배를 채워줄 수 있는 은행 통장이나 현금지급기와 같은 존재로 생각하는 물질 우상 숭배의 마음이 여전히 남아있음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다음 날, 어제 먹은 떡을 상기하며 또 다시 예수를 찾아 나선 무리들이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 마침내 반대편 가버나움에서 예수와 제자들을 만난다. 반갑게 달려오는 그 무리들을 향해 예수는 단호한 어조로 질책하며 말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한복음 6장 26절)”


현대의 기독교가 물질주의 우상 숭배에 빠지면서 예수를 자신이 원하는 축복을 가져다주는 도깨비 방망이 정도로 전락시키는 기복신앙이 얼마나 팽배해 있는지를 생각해보면, 이 질책은 주식과 부동산 시세를 따라 표류하는 오늘날의 표면적 크리스천들에게도 동일하게 해당되는 것이다. 그 당시 갈릴리 호숫가의 유대 백성들처럼, 곤고한 일상의 삶 속에서 물질을 찾아 건강을 찾아 더 나은 행복을 찾아 예수를 향해 몰려드는 수많은 사람들… 그들이 진정 찾아 헤매는 것이 무엇인가? 그들은 예수를 통해 메시아의 표적을 보고 있는가? 아니면 떡 한 조각의 꿈을 꾸고 있는가?


예수는 그들을 향해 도전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한복음 6장 27절)” 네 육신을 위한 일, 썩어질 것들을 위한 일을 위해 쫓아다니지 말고 영원한 것을 위해 일하라는 것이다. 뜻밖의 질책에 당황한 무리들은 예수를 향해 반문한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일을 해야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까? 당신이 말하는 썩지 않는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일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쩌면 스스로 열심 있다고 자부하는 오늘날의 크리스천에게도 동일하게 떠오르는 질문일 수 있다. 내 일상적인 삶을 포기하고 하나님 일만을 하는 전담 사역자로 나가는 것입니까? 선교지로 내 삶의 거처를 옮기는 것입니까? 구제 사업을 위한 큰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것입니까? 그러나 예수는 다시 한번 그들에게 파격적인 대답을 던진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요 6:29)” 그 어떤 일보다 앞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보내신 자, 하나님의 아들 예수, 자신을 믿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일은 그 후에 따라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생명의 떡(the bread of life)으로서 소개한다. 하늘에서 내린 참 떡 예수… 세상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온 떡 예수… 그리고 자신을 먹으라고 말한다. 참 생명의 떡 예수를 먹으라는 것이다.


물질가치가 생명가치로 전환되는 순간이다.


* 김동호 목사의 설교는 논리적 설득력을 지니면서도 누구에게나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단순 명료함을 지닌 것이 특징이다. 그 점에서 한국 교회가 자랑할 만한 탁월한 설교가 중 한 분이라고 생각한다. 가치관(value system)의 전환에 대해 그가 설교한 내용 중 특히 기억나는 것이 하나 있다. 작은 가치에 묶여 있는 사람은 더 큰 가치를 깨달아 소유할 때에야 비로소 작은 것을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백 원짜리 동전을 꼭 쥐고 안 놓으려는 어린아이는 아무리 만 원짜리 지폐를 주고 바꾸려 해도 그 손을 펼치지 않는다. 그가 백 원을 버릴 수 있기 위해서는 만원의 가치를 먼저 깨달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30, 40대 명예퇴직자가 늘어나면서 어쩔 수 없이 새로운 인생 역전을 꿈꾸는 사람들이 생겼다. 로또(Lotto) 복권이 유행하면서 한탕으로 인생역전을 꿈꾸는 사람들이 더 늘었다. 평생을 벌어도 도저히 가질 수 없는 물질을 단숨에 얻어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고 싶다는 욕망… 그와 같은 욕망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불나방처럼 자신의 인생을 헛된 도박과 사행심리에 내던져 자신과 가정을 파괴하고 파멸의 길로 들어섰는지 모를 일이다. 오늘밤도 라스베가스의 밤은 불야성을 이룰 것이며, 세계 도처의 도박장과 마작판과 경마장과 각종 투기 전에서는 물질의 노예로 전락한 비참한 인간들의 비극적 인생극장이 연출되고 있다. 단지 그들뿐이겠는가? 물질에게 예속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는 많은 크리스천도 포함되어 있다. ‘양수집병’이라는 말이 있다. 욕심을 내어 떡을 두 손에 쥐고 놓지 않으려고 하는 모습. 현대인들이 움켜진 두 손에는 썩어질 육신의 떡이 있다. 그들을 그 사망의 늪에서 구해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생명의 떡을 먼저 발견하는 일이다. 그 가치를 깨달아 알고 그것을 취하여 먹는 것이다.


30살에 만난 예수,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떡을 발견하여 그 엄청난 가치를 깨달아 알게 된 사건, 그것은 내가 쫓아가던 인생의 방향과 구도를 송두리째 뒤바꾸어 놓고 말았다. 세상의 떡을 쫓아 어떻게든 남보다 더 좋은 학력과 더 낳은 자리와 더 많은 월급을 받기 위해 치달아 가던 내 인생이 충격적인 그의 말에 멈추어 서고 말았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그리고 그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내 인생역전을 꿈꾸며 수많은 날들을 고민하며 기도했다. 인생의 모드(mode)를 내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바꾸는 작업에는 적어도 두 가지 단계가 필요했다. 첫째는 내 손에 있는 떡을 놓는 일과 둘째는 하나님이 주시는 새 떡을 붙드는 일이었다. 내 손에 이미 있는 떡을 놓는 일조차 결코 쉬운 결단은 아니었다. 그것은 용기를 필요로 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아직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은 미래를 향해 생명의 떡을 붙드는 일은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그것은 용기를 넘어선 믿음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과연 그렇다. 내가 이미 소유한 것을 내놓은 것은 용기만 있으면 되는 것이지만, 아직 내가 소유하지 않은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일이야말로 믿음을 필요로 한다.


내가 예수를 믿고 발견한 것은 다름 아닌 예수 안에 감추어진 생명의 가치였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자 중에서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다.(요 6:39)”라고 하신 그의 말씀처럼, 나는 나를 보내신 그의 뜻 가운데 내 인생을 새로 발견코자 했다. 그 당시 내 삶의 초점은 교회 고등부와 부부성경공부와 그리고 직장 성경공부를 통하여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안타까움에 가득 차 있었고, 잃어버린 한 영혼을 살리는 그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한 생명의 소중함에 대한 훈련과정, 그 가운데 나타난 비전이 중국과 북한, 그리고 연변과기대에 대한 환상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장차 내가 만날 중국과 북한의 청년들에 대한 사랑과 안타까움이었다. 그 무렵 새벽마다 기도하는 가운데 나는 아직 한번도 가본 일 없는 중국의 만주 벌판을 헤매고 다녔고, 신기하게도 한번도 본 일도 없는 조선족 청년들의 영혼을 향한 눈물의 기도가 터져 나왔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생명의 떡 안에 감추어진 생명의 가치를 붙드는 일이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직장을 그만두고 불확실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 이국 땅 중국을 향해 내 사랑하는 가족을 이끌고 들어간 사건은 확실히 내 인생의 방향성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은 사건이 되고 말았다. 직장 선후배, 부모형제, 일가 친척들, 교회 어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단한 그 사건을 두고, 그 당시 우리 가족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혹은 측은한 눈으로 더러는 그 용기와 믿음을 가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들이 공존했다. “당신 나이가 지금 몇인데, 낼 모래면 40이 될 사람이 이제 직장을 그만둔단 말이냐?” “노후 대책을 생각해 보았느냐?” “예수를 믿어도 정도껏 믿어야지. 정신 나갔냐?” “왜 죄 없는 어린것을 데리고 가 고생을 시키려고 하느냐?” (그 당시 그토록 말리던 사람들이 10년이 지난 지금은 모두 우리 가족의 결단과 선택이 옳았음을 인정하고, 더러 친구들 중에는 만나면 그 당시 어떻게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었는가 하고 부러워하는 사람들도 생긴 것을 생각하면 정말 감사할 일이다.) 아무튼, 우겨 쌈을 당하는 그 답답함과 어두움 속에서도 우리는 생명의 떡 되신 예수, 딱딱한 무교병을 씹으면서 묵묵히 한 발자국씩 홍해바다를 향해 걸어갔던 것이다.


한 생명의 가치가 온 우주보다도 크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기에 예수를 따르던 열두 제자들은 늘 책망을 받았다. 수가성에서 배가 고파 행로에 지쳐 주저앉았던 예수는 절망 속에 살아가던 한 여인 사마리아 여인을 혼신을 다해 구원한다. 생명을 얻은 기쁨으로 가지고 왔던 물동이를 팽개치고 마을로 뛰어가는 그 여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예수의 마음에는 기쁨이 충만했다. 그러나 그 마음을 알 길 없는 제자들은 마을에서 구해온 떡을 예수께 드리면서 잡수시도록 권한다. 그러나 예수는 그 제자들을 묵묵히 바라보며 그 떡을 거절한다.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요 4:32)” 제자들은 수군거리며 그 사이 누가 다른 양식을 갖다 드렸는가 하고 의아해한다. 제자들은 온 우주보다도 더 귀한 한 생명을 구한 전도자의 마음을 몰랐다. 생명 가운데 찾아오는 영적인 배부름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예수의 이 표현이 조금도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고 믿는다. 사실 예수는 그 순간 배가 불러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예수는 육신적으로는 배가 고파 있었으나, 수가성 여인의 구원받은 그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 육신의 배고픔은 우주의 경계 바깥으로 멀리 밀려나고 말았다. 도무지 음식을 먹을 수가 없는 상태가 되었던 것이다.


내가 처음 중국서 첫 제자를 얻었던 날, 나 역시 동일한 체험을 했다. 너무나 기쁘고 배가 불러서 하루종일 아무 것도 먹기가 싫었다. 이 경험이 있어야 한다. 온 우주를 바꾸어도 줄 수 없는 한 생명의 가치를 깨닫는 경험. 이것이 우리들의 가치관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 생명가치를 물질가치와 맞바꾸는 일. 그 가치역전이 곧 참된 인생역전이다.



(1) 우주가 팽창할 때 나타나는 도플러효과로 인해, 중력이 큰 별에서 나오는 빛의 스펙트럼이 파장이 긴 붉은 색 쪽으로 몰리는 현상. 영국의 천체물리학자 에딩턴 경에 의해 일식 현상 시 나타나는 적색 편이 현상이 관찰되어 일반상대성 이론을 증명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2) 공간의 모든 방향으로부터 같은 강도로 들어오는 전파. 파장 0.1 mm 20 cm에서 관측되는 마이크로( 0.01 %)파로 그 높은 등방성(等方性)으로 미루어, 어느 특정한 천체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우주 생성 시 대폭발에 의해 발생했던 빛의 흔적이 우주공간에 충만된 전파로 남아 배경을 이루는 것으로 생각된다.



[차문희] Spiritual eye VS Physical eye

약 두 달 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먼저 소개 할 까 합니다. 가르치는 학생 중 시력이 전혀 없는 O라는 학생이 있습니다. 그의 가족들은 그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멕시코에서 이민을 와서 살고 있는데, 시각 장애를 갖고 있어 다른 형제, 자매들보다도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아야 하지만 먹고사는 일에 많은 신경을 쓰다 보니 자녀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적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O라는 학생은 학교에서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때때로 지나 칠 때로 말을 많이 해서 학교 생활, 특히 학급 안에서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언젠가 그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  O: Ms. Cha, since you are a teacher, you know everything and you can helpme. right?
-  Ms. Cha: Ah! Maybe, but not always, just because I teach you, which do not mean that I know and can help you everything.
-  O: Well, Ms. Cha, do you know how can I get some vision? I mean, Can you give? No, help me to find some vision?
-  Ms. Cha: What? What do you mean?
-  O: Well, I think it is not fair that I can’t see anything. I want to see so I can play the computer like some other kids.
-  Ms. Cha: Well, you still can play the computer with speech output.
-  O: No, I just want to see and help me to get some vision.


한 참 이런 대화를 하는데, 함께 일 하는 보조 교사인 Mrs. W가 이런 말을 합니다.


-  Mrs. W: You know what? Maybe, God will give you some vision so you can see.
-  O: God? I can’t see him either.
-  Mrs. W: No one can see him. But if you believe in him, he will bring a vision for your life.
-  O: Oh! Then, I can see, right?
-  Mrs. W: physically, you still wont be able to see, but you will see and feel his guidance as you grow up.


시력, 흔히 비전 (vision)이라는 단어는 시야, 보이는 것, 광경, 환상 등의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육체적인 눈을 통하여 우리들은 사물을 보고 이해하며 배운다고 대부분의 교육학자들은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시력이 전혀 없는 아이들에게는 그렇지 못한 아이들에 비해 성장 발달이 좀 늦어 질 수 있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언어와 행동을 보고 따라 하거나 판단하여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생활을 하는지 눈으로 보고 확인할 수 없다는 것에 기인한 생각일 것입니다. 우리의 옛 속담에도 ‘백문이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있는데, 백 번 듣는 것 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더 낫다는 의미로 그 만큼 보는 힘, 시력의 효율성을 말해 주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육안이 생활하면서 필요로 하는 지식과 기술들을 습득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듯이 영적인 눈, 영안 역시 우리의 삶에서 특히, 신앙 생활을 하는 가운데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핵심인데, 첫째, 영안은 세상 적인 삶과 영적인 삶을 분리시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의 일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영안 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 치 아니할 뿐만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인하여 간 것이니라. (로마서 8장 5-10절)


영적인 시력이 좋은 사람은 순간적인 기쁨과 쾌락 속에서 잠깐 동안의 행복과 만족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달리 하나님을 좇아 즉, 하나님 안에 거하면서 그 안에서 기쁨을 찾으려는 삶을 추구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향한 계획이 무엇인지 뚜렷하게 볼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많은 성경적 인물들, 노아와 아브라함, 모세, 선지자들과 제자들, 베드로와 요한과 같은 인물들을 보면 하나님의 뜻을 알고 계획하시는 일들에 동참했고 순종하며 열심히 주어진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들의 삶을 통해 평범함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되는 특별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결국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마음, 즉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눈을 갖고 있었던 것이라 할 수 잇겠지요. 이렇게 하나님의 눈을 가진 사람은 자신들이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기를 원하고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실천합니다.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만을 바라보는 것 외에도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스도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그들을 섬기고 돌보는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렵고 약한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꾸준하게, 가르치는 교사의 자세로 섬기셨던 만큼 영적인 눈을 가진 사람들은 헐벗고 힘든 자들을 사랑으로 섬길 수 있습니다.


욥기 10장 4절 말씀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의 눈이 육신의 눈이나이까? 주께서 사람이 보시는 것처럼 보시리이까? 결국 하나님의 눈을 가진, 그러니까 영적인 시력이 좋은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면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혹은 학교에서 세속적인 삶을 뒤로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을 섬길 수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O라는 학생은 지금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갔습니다. 그 분의 부모님은 그가 갖고 있는 시각 장애에 대해 매우 그릇된 인식을 갖고 있고 그의 학교 생활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는 것보다는 무관심과 따뜻한 애정 없이 그를 양육하고 있는데, 새로운 학교에 가서라도 좋은 선생님 만나서 충실히 학교 생활을, 그리고 언젠가 사람은 육안으로 살지 않고 영안으로 산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뿐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읽는 많은 코스탄 여러분, 이제 2004년도 새해 새 아침이 밝아 오는데, 올해에는 20/20 (1.0) 보다 더 좋은 영적인 시력을 가지고 살아가는 한 해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김영봉] 시작하는 말

이코스타 2004년 1월


기적을 끊다


공생애의 거의 전부를 갈릴리와 그 주변에서 보내신 예수님은 마침내 예루살렘에 이르셨다. 예루살렘–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눈동자’라고 믿어왔던 소위 ‘거룩한’ 도시. 하나님의 모든 역사는 마땅히 그곳에서 시작되어야 하고 그곳에서 완성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그 도시. 인류 역사의 출발점이요, 종착점이라고 믿었던 그 도시. 온 세상 민족이 심판을 받기 위해 반드시 한 번은 발을 디뎌야 한다고 믿었던 그 도시. 모든 종교인들이 꿈꾸었던 가장 화려한 무대. 모든 분야의 ‘최고’–최고 법정, 최고 제사장, 최고 성전, 최고 성물, 최고 서기관, 최고 제사–가 다 모여 있던 그 도시. 그 곳에 예수님이 드디어 ‘공개적으로’ (1) 발을 디디셨다!


  예언자를 꿈꾸고 메시아를 꿈꾸었던 사람 치고 예루살렘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변방에서 명성을 얻은 후 이 도시에 이르러 메시아로의 등극을 시도했던가? 그들 대부분이 거짓 메시아라는 오명을 쓰고 죽어 나갔다. 그럼에도 여전히 메시아의 꿈에 부풀어 이 도시로 향하는 환상가들은 줄어들지 않았다. 예수님도 그 중 하나처럼 보였다. 반항적 기질로 가득한 갈릴리에서 나름대로 성공한 후, 그 여세를 몰아 예루살렘으로 진군하여 영광스러운 다윗 왕국 재건을 기치로 내세워 메시아로 등극하려는 야심가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분은 갈릴리에서 그렇게 자주 행했던 기적을 예루살렘에 이르자마자 ‘뚝’ 끊었다. 기적의 능력을 잃어버린 것일까? 그럴 리는 없다. 기적은 그분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의 표출이었다. 예루살렘에서 그분은 하나님과 더 밀도 깊은 교제를 나누셨을 것이 분명하므로 기적의 능력을 잃었다고 보는 것은 옳지 않다. 그렇다면, 예루살렘 주민들의 불신앙이 기적을 행하지 못하도록 만든 것일까? 그분이 고향 나사렛을 방문했을 때, 나사렛 주민들이 그분을 믿지 않아 기적을 행할 수 없었다(막 6:5)는 기록이 있지 않는가? 예루살렘의 유대교 지도자들만 생각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간절한 열망을 품고 그곳에 순례 왔던 사람들을 생각하면 그것도 아님이 분명하다. 그곳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보기 위해 나뭇가지 하나의 흔들림에도 마음을 다했던 구도자들이 가득했다.


  그러면 뭘까? 결론은 하나다. 예수님 스스로 기적을 끊으셨다! 왜 그러셨을까? 갈릴리와 그 근방에서는 하나님의 놀라운 위엄을 드러내 보여주셨던 그분이 왜 막상 최종 목적지인 예루살렘에 이르러 기적을 끊으셨을까? 갈릴리에서의 그 모든 활동이 본 무대인 예루살렘에서의 스타 탄생을 위한 준비가 아니었던가?


  하긴, 갈릴리에서 활동하실 당시부터 그분은 기적이 사람들의 영적인 눈을 뜨게 하기보다는 멀게 하는 경향이 더 크다는 점을 강조하곤 하셨다. 그분이 기적을 행한 것은 자신을 드러내거나 무엇을 증명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다. 어려움에 빠져 있는 사람에 대한 간절한 사랑의 마음이 그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움직여 기적이 일어났다. 그분은 기적을 행해 놓고 자주 종적을 감추셨다. 제자들에게도 그것에 집착하지 말도록 경계하셨다. 하나님과 밀도 있는 교제를 나누는 가운데 기적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그 기적에 마음이 사로잡히면 눈이 어두워져 진실을 보지 못한다. 기적을 보고 있는 한, 하나님도 예수님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이 의도하신 것은 기적을 통해 사람들을 끌어 모아 메시아로 추대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분의 의도는 갈릴리에서 활동하실 때의 의도와 동일했다. 하나님께서 지금 그들 가운데 활동하고 계시다는 것, 그러므로 그 현존에 눈을 뜨고 그 새로운 세계관에 맞게 살아가라는 것, 그것이 참된 신앙이요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이것을 증언하는 것이 그분의 의도였다. 사소해 보이는 작은 일 하나에도 수천의 군중을 소동시킬 수 있는 예루살렘 같은 도시에서 기적을 행한다는 것은 그들의 눈을 멀게 하여 정작 들어야 할 복음에 귀 먹게 하는 어리석은 행동이 될 수 있었다.


이 성전을 허물라!


예루살렘에 도착하신 예수님은 가장 먼저 유대교의 자랑이었던 성전을 방문하셨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두시겠다고 약속하신 그 곳, 이곳을 향해 기도하면 모든 기도를 들어 주마 고 하나님께서 약속했다는 그 곳, 그래서 세계 어느 곳에 사는 유대인이든 기도할 때면 항상 머리를 그쪽 방향으로 향하게 했던 그 곳, 일생 동안 한 번이라도 그곳에 가서 제사를 드리고 죽었으면 하는 간절한 소원의 대상, 이 세상에 그 어느 곳도 대신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성소. 바로 그곳에 예수님이 당도하셨다.


성전을 둘러보시는 그분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게 번득이고 있었다. 그것은 꿈에도 그리던 영광의 성소에 왔다는 감격의 표정이 아니었다. 역겨움과 안타까움으로 충만한 이글거림, 바로 그것이었다. 그분의 눈은 성전 바깥뜰에서 장사하는 사람들과 제사장들 사이에서 오고가는 부정한 결탁을 보고 계셨다. 성전 바깥뜰 한 쪽에 있던 도살장에서 들리는 제물용 짐승들의 울부짖음을 그분은 듣고 계셨다. 성전 바깥뜰을 진동시키는 피비린내와 성전 내부로부터 진동하는 매캐한 살 타는 냄새를 맡으시면서 그분은 무고한 짐승들의 압살 현장을 목격하셨다. 제사장들의 거룩한 몸짓과 평민들의 간절한 몸짓을 보면서 종교 체제에 감추어진 거대한 음모를 목격하셨다. 하나님과 평민들 사이를 중재한다고 나선 대제사장이 오히려 하나님을 막고 서 있음을, 하나님과 만나게 해 준다는 성전이 오히려 하나님과의 참된 만남을 가리고 있음을 보셨다. 가장 거룩하다고 믿어졌던 성전이 오히려 가장 세속적인 ‘도둑의 소굴'(요 2:16)로 변해 있음을 목격하셨다.


이 모든 실상을 보신 후에, 그분은 베다니로 나가 하룻밤을 보내셨다. 아마도 그 거대한 악의 조직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를 번민하며 기도로 그 밤을 새우셨으리라. 다음 날, 동이 트자 그분은 곧바로 다시 성전으로 향하셨다. 가장 먼저 그분에게 보인 것이 성전 뜰에서 제물용으로 팔리기를 기다리고 있던 짐승들이었다. 다짜고짜로 그 짐승들을 풀어 흩어 보내신 다음, 반항하는 장사꾼들을 쫓아내시고 환전상들의 책상을 뒤집어 엎으셨다. 이것을 두고 ‘예수님도 폭력을 휘두르셨다’고 비약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육체적인 완력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을 지 모른다. 하지만 ‘폭력’은 완력으로써 사람들을 상하게 하는 행동을 가리키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이것을 두고 ‘예수님도 폭력을 사용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분은 자신의 의도를 표현할 만큼의 ‘시위’를 하는 것으로 행동을 끝내셨다.


뭔가 전하려는 간절한 말이 있는데 그것을 제대로 전할 수 없을 때 사람들은 ‘시위’라는 방법을 사용한다. 언로(言路)가 막혔을 때 그 길을 뚫는 방법이 시위다. 이렇게 함으로써 듣고 보기를 철저히 외면하는 사람들에게 할 말을 전한다. 성전 뜰에서 하신 예수님의 행동도 하나의 시위였다. 그것 자체를 목적으로 두고 행한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한 어떤 일을 위한 수단으로서 행한 것이다. 그것은 오만과 독선에 사로잡혀 진리의 소리에 귀를 막고 있던 종교 지도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선택했던 방책이었다.


유대인 지도자들이 이것을 알아차렸다. 뭔가 아주 위험하고 불순한 의도가 그 시위에 담겨 있음을 보았다. 그래서 예수님을 붙들고 따져 물었다.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그러자 예수님은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대답을 던지셨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 이 말에 유대인 지도자들은 어이가 없어 이렇게 대답했다. “이 성전은 사십 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요 2:20)(2).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최신식의 건축 장비를 다 동원한다 해도 그 당시의 성전 같은 웅장한 건물을 사흘 안에 완공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당시 같은 상황에서 이 말이 얼마나 황당하게 들렸겠는가?


내가 다시 세우리라


예수님의 어법은 깊은 생각과 추리가 없이는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이 말씀이 대표적인 경우다. 그런데 이해하기 어려울수록 그 말씀 안에는 심오한 진리가 담겨 있다. 이 면에서도 이 말씀이 대표적인 경우다.


“이 성전을 허물라”고 말씀하실 때, 예수님은 성전 건물을 염두에 두시지 않았다. 그 성전이 대표하고 있는 종교 체제를 염두에 두셨다. 성전 바깥뜰에서 행하신 시위가 바로 그런 의미를 담고 있었다. 당시 유대교의 예배 의식에 따르자면, 바깥뜰에서 흠 없는 짐승을 사지 못하면 제사를 드릴 수 없었다. 집에서 기르던 짐승 중에 가장 좋은 것을 가져 와도 제사장들의 까다로운 규정을 통과할 수 없었다. 바깥뜰에서 돈주고 사는 것이 가장 속 편한 방법이었다. 또한, 성전에서 헌금을 드리려면 집에서 사용하던 화폐를 환전상에게 주고 (그들이 말하는) ‘거룩한 화폐’로 바꿔야 했다. 그러므로 짐승을 팔지 못하게 하고 환전을 못하게 했던 예수님의 시위는 성전 제사를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몸짓이었다. 그분이 이 시위를 통해 하고자 했던 말은 이런 것이었다. ‘제사를 중지하라. 이 제사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제사를 중지하고 모든 제도와 형식과 조직을 해체하라. 이 제도에는 하나님이 없다!’


그렇다고 그분이 무종교를 주창하신 것은 아니다. 그분은 새로운 영성을 제시하신다. 그것이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신 말씀에 담긴 뜻이다. 요한복음 저자는 친절하게도 예수께서 하신 말씀의 의도를 설명해 준다. 그분이 사흘 안에 세우겠다고 하신 성전은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참된 성전인 당신 자신의 몸이었다고(요 2:21)! 죽은 지 사흘만에 부활할 당신의 몸을 두고 말씀하신 것이라고! 그분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으리라. ‘너희는 나를 십자가에 죽게 할 것이다. 그러나 보라. 내가 사흘만에 부활할 것이다. 부활한 나의 영을 통해 너희는 하나님을 만날 것이다. 나의 부활로써 눈에 보이는 성전이 허물어지고 눈에 보이지 않는 성전이 세워질 것이다. 이제 눈에 보이는 성전의 시대는 가고 부활의 영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하는 새로운 영성의 시대가 열릴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거룩한 성전을 찾아가도록 가르치는 종교, 거룩한 시간을 어느 하루로 정해두고 그 날을 구별하기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하는 종교, 거룩한 것과 거룩하지 않은 것을 세심하게 구분하고 차별하는 종교, 그리하여 끊임없이 거룩한 장소와 시간을 향해 나아가도록 만드는 종교–그런 종교는 무너져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열어주고 심화시키기는커녕 반대로 그 관계를 가로막고 질식시키기 때문이다. 이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과 함께 하는 영성의 시대가 열리면, 그리스도의 영과 교제함으로 우리가 사는 모든 공간을 거룩한 성전으로 만들고,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을 거룩한 시간으로 만들고, 모든 세속적인 것을 거룩한 것으로 만들 수 있게 된다. 거룩한 장소와 시간과 사물에게 가까이 감으로써 하나님을 만나려는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을 통해 내가 변화되어 내가 선 장소와 시간과 사물을 거룩하게 변화시키는 새로운 영성! 일상과 성소를 분리시키는 종교가 아니라, 일상 속에 성소를 만들고 그로써 일상 전체를 성소로 만드는 영성!


이것이 예수께서 세우신 영성의 세계다. 이 영성의 세계를 윌리엄 컨트리맨(L. William Countryman)은 이렇게 설명한다(Living on the Border of the Holy, p.76).


예 수님은 거룩한 것(the Holy)과 일상적인 것을 다시 연결시키신다. 일상적인 삶을 종교의식의 외투 아래 통합시키는 방식으로가 아니라, 이미 일상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현존(the Presence)을 존중하는 삶의 방식을 삶으로써! 그분은 병자들에게서 하나님의 대한 믿음을 보았고, 이방 여인의 말에서 진리를 들었고(막 7:24-30), 야생화의 덧없어 보이는 영광을 통해 창조자의 충만을 보셨다(마 6:28-30). 그분은 회당과 성전에서 가르치기도 하셨지만, 그분이 하나님을 충만하게 만난 것은 그런 장소가 아니었다. 그분은 광야와 저자 거리에서 하나님을 만나셨다.


그 분 자신이 이렇게 사셨고, 부활하여 현존하시는 그분의 영은 우리를 그분과 같은 삶의 방식으로 인도하신다. 그 영성만이 예수께서 그렇게도 자주 말씀하셨던 “하나님이 내 안에, 내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일체적인 영적 삶으로 인도할 수 있고, 이런 삶의 방식만이 우리를 참되게 변화시키고 성장시킬 수 있고, 이런 삶의 방식만이 우리에게 참된 의미와 안식과 성취를 가져다 줄 것이다. 이렇게 사는 사람은 죽고 나서 영생의 선물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영원을 경험하고 산다. 이것이 참 종교의 실상이요, 바로 이것을 위해 예수님은 목숨을 거셨던 것이다.


이 교회를 허물라!


예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신다면 오늘의 교회를 보시고 뭐라고 하실까? 혹시나 2천년 전에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하신 그 말씀을 오늘의 교회에게도 하시지 않을까? 너희 교회를 허물라! 너희 예배를 허물라! 너희 제단을 허물라! 너희의 제도를 허물라! 너희의 교리를 버리라! 너희의 교권 제도를 해체하라!


이 말로써 나는 ‘무교회주의자’라거나 ‘급진주의적 혁명가’로 낙인찍힐 위험 선상에 이르렀다. 일생을 교회 안에서 살았고 또한 그렇게 생을 마칠 내가 이런 오해의 위험을 무릅쓰는 이유가 있다. 내가 사랑하는 대상 가운데 교회는 항상 가장 첫 머리에 있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런 교회를 향하여 예수님의 이야기를 빌어 ‘이 교회를 허물라’고 외치는 이유가 있다. 지금의 교회가 예수님이 허물라고 하셨던 바로 그 성전 종교와 같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3). 지금의 목회자는 당시의 제사장과 같이 되어 버렸고, 지금의 예배는 당시의 제사와 같은 것이 되어 버렸다. 성도들은 예수님 당시와 똑 같이 죄악으로 물든 교권 제도의 희생물이 되고 있고, 교권 제도는 끊임없이 성도들의 눈과 귀를 어둡게 하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상을 섬기게 오도하고 있다.


교회는 예수께서 생명을 내어주고 일으키신 새로운 영성으로 인해 시작되었다. 당시의 어느 종교도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영성을 수용할 수 없어 토해냈고 그로 인해 교회가 생겼다. 그런데 그 교회가 어느덧 제도화되고 조직화되고 교리화되어 다시금 자신을 토해낸 그 모체와 같이 되어 버렸다. 만일 초대교회가 오늘의 교회처럼 믿고 살았다면 기독교라는 새로운 종교는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오늘의 교회는 예수께서 허물려 하셨던 그 종교의 모습으로 타락해 버렸다.


이것은 예수님의 그 치열한 삶과 모진 고난과 처절한 죽음을 모두 헛것으로 만드는 일이다. 예수님을 잘 섬기도록 교리를 만들고 제도를 만들고 영광스러운 성전을 짓는다고 말하지만, 정작 예수님의 뜻을 저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예수님을 잘 믿고 섬기는 것이 무엇인가? 그분의 정신과 가르침을 받드는 일 아닌가? 지금 성령을 통해 이끄시는 대로 자신을 열고 새로운 경지로 부단히 나아가는 것 아닌가?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일상 안에 성소를 만드는 삶을 살아감으로 이곳에서 영원을 누리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이 그분의 참 제자가 아닌가? 그런 태도를 ‘위험하다’, ‘급진적이다’, ‘모호하다’고 규정하면서 부단히 교리와 법과 형식과 건물을 만드는 우리의 교회! 바로 그것을 허물자는 말이다.


진짜를 세우기 위해 가짜를 허물자는 말이다. 진짜를 얻기 위해 가짜를 부정하자는 말이다. 알짜를 얻기 위해 껍데기를 향해 ‘가라!’고 외치자는 말이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임재의 능력이 충만하게 나타나도록 굳어버린 모든 것을 버리자는 말이다. 교회가 참 교회 되게 하기 위해 가짜를 허물자는 말이다. 종교를 넘어 영성을, 교리를 넘어 진리/말씀을, 조직을 넘어 공동체를, 교권을 넘어 참된 권위를, 우상을 넘어 하나님을, 예수의 몸을 넘어 그분의 영을 찾자는 말이다. 그리하여 항상 어디를 가든 하나님의 나라를 살자는 말이다. 우리 삶 전체가 예배가 되게 하자는 말이다.


일상 속의 성소


이제 나는 주께서 허락하시는 대로 독자들과 함께 일상 속에 성소를 세우는 영성 생활을 모색해 볼 예정이다. 영성 생활의 목적은 예수께서 의도하시는 영성을 우리 생활 안에 누룩처럼 퍼지도록 하는 것이다. 카를로 카레토(Carlo Carretto)의 말로 하자면, “영성이란 생각하는 방법, 살아가는 방법, 우리의 모든 행동을 거룩하게 만드는 방법을 가리킨다”(Letters from the Desert, p. 90). 지금 한국 교회가 앓고 있는 문제는 누룩이 반죽 안에서 그대로 응고되어 반죽 전체를 썩게 만드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성령의 능력 안에서 살아가는 영성 생활은 우리의 삶 전체에 골고루 퍼져 삶의 모든 영역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영성 생활이 일상 생활의 특정 시간에 국한되고 영성이 특별한 영역에 갇혀 버림으로써 삶 전체가 변화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마치 부풀지 않은 밀가루 반죽처럼 굳어져 버리고 군데군데 곰팡이가 피어나고 있다. 이것이 우리 대다수의 영성이다.


내가 이 글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매우 제한되어 있다. 내가 알고 경험한 영역에서 내가 깨달은 정도의 개선책을 논하는 데 그칠 것이 분명하다. 예수께서 이끄시려는 영성의 일부분을 서툴게 서술하는 정도에 그칠 것이다. 부디, 이것이 독자들에게 단서가 되어 각자가 정진하는 가운데 성령께서 이끄시는 더 깊은 경지로 나아가기를 바란다. 나도 그렇게 할 것이다. 내가 어디에 이르더라도 그것을 출발점으로 생각하고 꾸준히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빌 3:16). 늘 제자들보다 한 발 앞서 가시며 이끄시는 주님의 영을 따라 나아갈 것이다. 이 글은, 내 글이 늘 그래왔듯이, 이 과정에 대한 중간 보고인 셈이다.




(1) 나는 예수께서 공생애 이전뿐 아니라 공생애 이후에도 예루살렘에 가끔 들렀다고 믿는다. 이 점에 있어서 공관복음서보다 요한복음서의 증언을 더 비중 있게 본다. 하지만 마지막 유월절 이전의 예루살렘 방문은 신분을 숨긴 채 잠시 들러보는 정도였다. 그런 점에서 그 이전의 예루살렘 방문을 생략한 공관복음서 저자들의 선택은 납득할만하다.

(2) 예루살렘 성전은 주전 20년에 헤롯 대왕에 의해 수리되기 시작했다. 이방인이었던 헤롯 대왕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 공사에 공을 들였다. 하지만 정치적 계산에 의해 시작된 공사였고 공사 자체가 방대했기 때문에 자주 중단되었다. 예수님이 활동하실 당시에도 아직 완성된 상태가 아니었다. 46년 동안 지어졌다는 말은 재건 공사가 시작된 주전 20년부터 따져서 하는 말이다.


(3) 이 글을 쓰면서 나는 한국 교회 대부분을 염두에 두고 있다. 참다운 교회를 일구기 위해 노력하는 분들이 적지 않음을 나는 알고 있다. 하지만 한국 교회 주류가 예수님의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부정할 수도 없다. 하긴, 참된 교회를 일구기 위해 고투하는 분들이 실은 예수님의 비판을 가장 예민하고 뼈아프게 느끼는 분들일 것이다. 정작 그 비판을 느껴야 할 사람들은 굳어지고 무뎌져 그런 줄도 모르는 채 죽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