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옥]유학생 사역을 돌아보며

이코스타 2004년 10월호

저는 미국에서 9년 동안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두 달 전에 한국으로 귀국했습니다.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났던 곳도 미국이었고 또 거기서 제 짧은 인생의 가장 긴 시간을 살았기 때문에 애착이 많이 가는 곳이기도 합니다. 저는 거기서 유학생으로서 또 유학생들을 섬기며 경험했던 하나님의 은혜를 부족하지만 나누려고 합니다. 그런 부족함들은 그분이 채우시리라 믿으면서 말입니다.


우선 저는 고등학교 때는 동네 교회 출석으로 제 “크리스천 임무”를 다한다고 생각했었고 대학교 때는 영어로 하는 성경공부를 나갔습니다. 그때도 소그룹 리더이긴 했지만 적극적으로 섬겼다기 보다는 이미 모임을 잘 나오는 친구들을 끼고 있었다는 표현이 더 맞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대학교를 졸업하고 직장 때문에 워싱턴 디씨를 오게 되면서 KBS (Korean Bible Studies)라고 하는 한국인 성경공부를 나가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주어졌던 한국인 유학생 사역은 KBS란 채널을 통해서 이루어졌지만 이 글에서는 KBS란 성경공부보다는 제가 경험하고 느낀 유학생 사역에 대해서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글을 읽고 계신 많은 분들이 유학 경험이 있으시거나 유학생들이셔서 다들 잘 알고 계시겠지만 유학생 사역의 가장 핵심 부분을 꼽으라면 저는 관심과 사랑 그리고 그것을 통해 얻어지는 신뢰라고 생각합니다. 관심, 사랑, 신뢰는 떨어져서 하나하나씩 단계적으로 쌓아지거나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가지 모두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들이기에 함께 말씀 드리겠습니다.


가족들과 친구들 그리고 나에게 익숙한 모든 것들을 뒤로한 채 어떠한 목표를 갖고 미국이라는 땅덩어리에 오셨습니까? 언어, 문화, 음식, 사고방식이 다른 나라에서 그 목표만 바라보고 버틸 수 있을 것이라고 많이 들 생각하지만 제가 만났던 대부분의 유학생들은 극복하고 있다기 보다는 겨우 연명하고 있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멀쩡하고, 교우 관계도 좋고, 성적도 잘 나왔지만 미국에서 느끼는 이질감과 외로움을 표출할 수도 해소할 수도 없는 그런 공적인 상태에 있는 친구들을 많이 봤습니다.


이런 친구들을 온전히 채워주시는 분은 예수님이라고 성경은 저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골로새서 1장 9절)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히브리서 10장 4절)


가질 수 있는 건 다 갖은 것 같은데도 자꾸 허전하고 만족하지 못하는 저희들에게 완전함이 무엇이며 또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직접 보여주셨고, 가르치셨던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유학생 시기에 가장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이 드는 것도 이 혼란의 시기는 저희가 가장 vulnerable한 상태에 있는 바로 그때이기 때문입니다. 인정하던 그렇지 않던 성경에서 만난 예수님은 육적으로나 영적으로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셨습니다. 가장 가깝게 지내셨던 가난한 자, 병든 자, 창기들…이들은 사회적으로 위기에 처한 이들이었습니다. 유학생의 처지도 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시기에 저희의 구주이신 예수님을 접하게 하고 그 분을 개인적으로 만나게 도와주는 것이 아주 효과적이라는 결론도 내리게 되었습니다.


일단 유학생들은 관심을 갈망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들에게 잘 보이기 위하거나 좋은 인상을 심어주기 위한 관심이 아닌 한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품는 관심이어야 합니다. 위에 언급했듯이 관심과 사랑 그리고 신뢰가 연관되어있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호감을 사기 위한 관심은 몇 번의 연락과 만남, 단순히 인간적인 표면적인 만남으로 그칩니다. 인간적인 만남이 목표가 아니라 한 영혼이 예수님과 만날 수 있도록 사용되는 것이 저희의 목표인데 거기에 사랑이 결여된 것은 바로 실패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하면서 그 하나님을 알게 해주겠다고 접근하면서 사랑을 보여주고, 느끼게끔 도와주지 못한다면 아예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 낫다고 충고하고 싶습니다. 저희는 사랑도 하지 못했던 존재들이지만 하나님의 저희를 향하신 사랑을 알았고, 인정했고, 그분이 저희를 먼저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존재들 또 그 사랑을 받으면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들로 창조해주셨는데, 사랑을 먼저 깨달은 자들로서 사랑이 듬뿍 담긴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신뢰는 어떻게 쌓아지는 걸까요? 꾸준한 관심과 사랑으로 키운 영혼이 인간적으로 저희를 신뢰하게 되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목표는 예수님을 믿게 도와주는 것이지 저희를 좋아하고 따르게 하는 것이 아님을 확실히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인정 받기 위함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도구로 사용 되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나는 죄인이었고 예수님이 내 죄를 십자가에서 없애주셨고 내 목숨을 다시 살리셨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신 나의 구세주 이심을 믿는 것예수님을 신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너 믿어라”로 해결되는 문제는 절대로 아닙니다. 일단은 저희 삶에서 그 믿음이 반영되어야 합니다. 저 사람이 나에게 관심을 갖아주고 사랑을 보여주게끔 하는 원동력이 예수님이다라는 느낌은 반드시 전달되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시는 것은 성령님이시기에 저희가 할 수 있는 것은 저희 삶에서 예수님이 드러나시는지 점검하는 것 어찌 보면 이것 뿐이라고 할 수도 있겠죠.


제가 너무 두서 없이 달려온 것 같습니다. 앞에서 말한 관심과 사랑 그리고 신뢰는 제가 경험한 사역 가운데 중요하다고 느낀 몇 가지에 불과합니다. 그 세가지 요소만 있으면 성공적으로 영혼들이 낚인다는 말은 망언입니다. 저희를 쓰시는 것도 주님이시고 사람을 낚으시는 것도 주님이십니다. 저희는 단순히 도구일 뿐입니다. 도구로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바로 저희가 할 수 있는 최고입니다.

[김재석] 유학시절 – 거듭남과 제자양육의 최적시기

이코스타 2004년 10월호

한국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는 중, 외국 유학(또는 주재원) 시절중에 그리스도를 영접하였거나 그리스도의 제자로 성장한 사람들이 종종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들중 대부분은 유학(또는 외국 주재)의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교회에 나갈 동기가 없었을 사람들임을 보면, 유학기간이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에 접할 수 있게 하는 좋은 기회를 제공함에 틀림없다고 하겠다. 이들중 대부분은 타향에서의 외로움을 달래고, 다른 한인들과의 교제 목적으로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곧 거듭남의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그러나, 유학시절에는 교회를 다니다가 한국에 귀국해서는 신앙생활을 하지않는 경우도 많이 보게된다. 이것은 유학기간 동안 교회에서의 생활이 구체적으로 그리스도를 만나도록 돕지 못한 경우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유학시절은 각자가 품은 청운의 꿈을 이루기 위한 준비기간이기도 하지만, 각 사람이 그리스도를 만나 거듭나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성장할 수 있는 최적의 시기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역사는 이러한 사역에 뜻을 품은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이루어지게 된다. 이제 나의 유학시절에 있었던 실예를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나는 유학을 떠날 때, 유학기간 동안은 주일날 교회나 잘 나가면 될 정도로 바쁘다는 (유학 다녀온) 선배의 조언(?)에 따라 성경책 한 권만 들고 떠났다. 나는 이전에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한 후 그리스도의 제자로 양육받고, 또 다른 사람들의 영적 성장을 돕는 훈련도 받았기에, 늘 제자양육의 꿈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유학기간 동안은 이 꿈을 접어두기로 한 상태였다.



1984년 내가 유학을 갔던 지역(미국 뉴욕주 올바니)에는 당시 한인교회가 한 개 있었고, 주일날 약 150여명 정도가 예배를 드리는 정도였다. 그중에서 절반 정도가 유학생이였고, 기혼자가 좀 더 많은 시절이였다. 내가 다니던 학교의 기혼자아파트 지역에서는 금요일 저녁에 교회를 오래 다니던 집사급 선임 유학생이 공과교재를 사용하여 전통적인 구역예배를 인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참석자들은 대부분 이전에 교회를 다니던 사람들 뿐이였다. 한국에서는 교회에 다니지 않았으나, 유학의 외로움도 달래고 다른 한인들과의 교제를 위해 교회에 나오는 유학생들은 주로 주일날 교회에 나오는 정도로 다니고 있었다. 이들에게 믿음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소개하거나 개인적인 성장을 돕기 위한 사역은 전혀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 학기가 지나고 나서, 지도교수와 RA도 시작되면서 유학생활이 본 괘도에 접어들자, 내 마음속에 이들을 구체적으로 변화시키는 일이 필요함을 강하게 느끼게 되었다. 이를 위해 기도하는 중에, 믿음 없이 교제 목적으로 교회에 다니던 한 부부를 지목하고, 몇 번에 걸친 방문을 통해 기독교의 본질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 일으켜 놓았다. 특히 기독교가 역사적으로 인간의 삶에 많은 영향을 끼쳤지만,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 본질을 잘 알지 못하고 남에게 주어 들은 내용 정도로만 알고 있다고 말했을 때,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하였다. 나는 이것을 제대로 알려면 3번 정도에 걸쳐 성경이 말하는 내용을 같이 공부해보자고 제안하였고, 그 부부는 이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세 번에 걸친 성경공부 내용은 하나님의 창조와 인간의 타락,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부활,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주되심과 영접하는 길 등을 다룬 복음 소개용 성경공부 자료였다. 이 부부는 이 만남을 통해, 복음의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고 예수님을 영접하면서 믿음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또한 이들은 우리 부부와의 성경공부 만남을 통해 구원의 확신을 갖게된 것을 온 동네에 선전하고 다님으로써, 우리들이 다른 부부들과 동일한 만남을 다시 갖게 되는 기회를 제공하였고, 이것은 유학기간 동안 여러 번 반복되었다.



또한 이러한 입소문은 당시 교회에서 중요한 일을 하던 다른 집사급 유학생들에게도 궁금증을 불러 일으키게 되었고, 이들은 그 내용과 방법을 전수받기 원했다. 이를 통해, 그들에게도 복음 소개 자료와 방법을 전수하게 되었고, 이들이 한 가정씩을 선정하여 동일한 시도를 함으로써 좋은 결실들을 거두게 되었다. 이것은 교회적으로도 좋은 반향을 일으켰고, 우리 팀들은 교회의 여름 수양회 등을 기획하고 행사를 진행하면서 비슷한 일들을 교회 전체적으로 확산하는 기회도 갖게 되었다. 우리가 이곳을 떠난지 10여년이 지나고나서 우연히 당시 교회 장로님을 뵈었는데, 이 시절이 교회적으로 가장 활성화되고 좋았던 시절이였다고 평가해 주시는 것을 보고, 정말 감사한 마음이 넘쳤던 기억이 있다.



이러한 복음 소개용 성경공부가 잘 정착이 되는 중에, 계속적인 성장 단계의 성경공부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특히 처음 믿음의 확신을 가진 부부가 계속적인 제자로서의 성장 공부를 원했고, 우리는 네비게이토선교회의 SCL 교재를 이용하여 단계별 성경공부를 시작하였다. 이 과정을 거친 부부들은 나중에 본인들이 새로운 가정을 선정하여 복음소개용 성경공부를 인도하는 단계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들은 당시 막 시작된 KOSTA에도 참석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새로운 도전을 받기도 하였다. 이들중 어떤 가정은 한국으로 귀국후에 대학부 지도부장으로도 섬기고, 교회의 중요한 멤버로 다른 성도들의 변화를 개인적으로 도우면서 활동하고 있다.



나는 이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전혀 생각하지 못했으나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꿈과 필요성을 심어주셔서, 개인적인 복음 전도와 제자 양육의 멋진 기회를 갖게 된 유학시절이 매우 행복했었고 너무나 놀라운 기회였음을 보게 된다.



이제, 나는 그리스도인 유학생들이 유학시절을 다음과 같은 기회로 삼았으면 하고 권하고 싶다.



1)  유학(또는 주재원)은 한국에 있었다면 교회에 다니지 않았을 많은 사람들에게 교제 목적으로라도 교회에 나올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준다. 그러므로, 이 기간동안 이들이 믿음의 올바른 내용을 개인적으로 접하고, 거듭남과 구원의 확신을 갖도록 구체적으로 도와주는 기간이 되었으면 한다. 유학기간은 실제로 주말 시간이 한국에서보다 더 여유롭고 단순한 생활 패턴으로 인해, 마음만 먹는다면 개인적인 만남의 시간을 갖기가 매우 쉽다. 특히 방학 기간중에 3-5번 정도의 개인적인 만남을 계획하고, 이 만남을 통해 복음의 핵심 내용을 전달할 수 있는 기회를 갖도록 권하고 싶다. 1년에 1-2(또는 가정)을 변화시키는 것은 우리 일생에서 잊지못할 소중한 경험이 될 것이다.



2)  또한 유학기간은 그리스도의 제자로 성장하는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성경을 새롭고 깊이있는 시각으로 공부할 기회도 많고, 특히 KOSTA를 통해 새로이 형성된 기드온 모임등도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우리의 가치관이나 세계관을 성경적 입장에서 새로이 정립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나는 그리스도인 유학생들이 서로 이러한 시각을 배우는 일에 시간을 함께하도록 권고하고, 특히 이러한 모임을 여러분 스스로가 시작하도록 권하고 싶다.



3)  더 나아가 기존에 열심히 교회를 다녀서 본인은 믿음이 매우 좋으나 다른 사람의 변화와 성장을 개인적으로 돕는 것을 잘 모르던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방법을 배우고 시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떤 특수한 방법이 아니라, 이러한 방법들을 통해서 개인적이고 신앙의 인격적인 만남과 교제가 중요함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지금의 시대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향기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어느때 보다도 중요하다. 믿음 좋다는 것은 단순히 종교적인 생활을 잘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닮고 싶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뭇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 그리스도의 온전한 모습을 볼 수 있는 통로가 되어야 복음이 살아서 움직이게 됨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앞으로, 더 많은 유학생들에게 이러한 기회들이 주어져서, 유학 생활을 통해 거듭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한국과 세계를 새로이 변화시키는 멋진 모습을 생각하니 가슴이 뜨거워진다.

[성인경]개종 신드롬: 기독교에서 타종교로


몇 년 전에 저는 개신교를 믿다가 천주교로 개종한 한 여학생을 만났습니다. 그 여학생은 다른 청년들도 들어보라는 말투로 “나는 개신교 예배가 너무 시끄럽고 경박스러워서 영적 무게가 느껴지는 천주교 예배에 참석한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습니다. 물론 저는 그 여학생이 진정으로 거듭났는지에 대해 확인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도 없었고, 개신교에 계속 남아 있으라고 설득할 면목도 없었지만 개신교를 포기해야만 했던 이유만은 이해가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개신교 영성이 너무 천박해졌기 때문에 떠난다는 것입니다.


일전에 양양의 모 귀부인이 주선해서 만난 한 도사님은 알고 보니 과거에 장로교 안수 집사였습니다. 그 분은 여러 사람 앞에서 당당하게 교회를 떠난 이유를 말하기를, “교회에서는 진리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러면 지금은 어떤 진리를 찾았느냐?”고 물었더니, “내가 찾은 진리는 삼라만상의 근본 진리인데 일정 기간의 훈련 코스를 밟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체험적 진리이다.”고 대답했습니다. 그가 교회를 떠난 이유는 기독교 교리를 이론적으로 배우긴 했지만 영적 체험이 동반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천주교에서 불교로 개종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버드에서 화계사로]란 책을 쓴 현각 스님(폴 뮌젠)은 “자신의 오래된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교회를 떠났다.”고 합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천주교를 믿는 가정과 학교에서 영성에 눈을 뜨고 예일대를 졸업하고 하버드 신학대학원을 다니면서까지 진리를 찾았던 정직한 구도자였는데, ‘인간의 고통과 악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 교회에서 그에게 들려 준 대답은 고작“병도 악도 다 하나님의 뜻이다.”고 하는 신정론(神正論)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어릴 때부터 끊임없이 영성과 진리를 찾는 구도자였다는 것은 존경할 만 합니다. 또한 그는 미국에 흔해빠진 마약이나 섹스에도 빠지지 않고 공부를 열심히 했고 특히 인간의 본질적인 고통과 악의 문제를 안고 오랫동안 씨름한 보기 드문 지성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감행한 ‘지적 자살(intellectual suicide)’은 매우 안타깝기만 합니다. 그는 하버드 교수님들로부터는 들을 수 없는 대답을 숭산 스님에게 배웠습니다.


-  뮌젠:“내가 누구입니까?”
-  숭산:“아직 모르는 게 좋습니다. 자꾸 머리로 따지지 마세요.”
-  뮌젠:“인생이 무엇입니까?”
-  숭산:“차나 한 잔 마시세요.”


비록 이런 어처구니없는 화두로 그가 지적 자살을 감행했다고 하지만 사실 현각은 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신과 진리에 대해 정직한 질문을 가진 구도자였습니다. 그는 화석화된 기독교가 주는 대답은 비현실적일 뿐만 아니라 비합리적인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이 시대의 깨어있는 종교인이었습니다. 사실 그는 세상에는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문제가 많다는 것을 알았던 참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대답에 불시착한 것은 실수였습니다.


첫째, 숭산 스님이 준‘무심(無心)’, 즉 ‘모르는 마음(don’t know mind)’은 그의 심오한 질문에 대한 정확한 대답이 아니라 질문 자체를 버리도록 만들었을 뿐입니다. ‘무심’은 참 편리한 도구입니다. 그가 어릴 때부터 한 시도 잊어본 적이 없는 “신과 진리에 대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꼭 찾아야 하겠다.”는 마음 자체가 ‘아집과 집착’이기 때문에 그것 자체를 태워버리는 것이야말로 근본적인 문제 해결책이라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정직한 질문에 정직한 대답을 주기 보다는 질문 자체를 포기하게 함으로 문제를 해결 받았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논리적 비약인데도 불가에서는 이것을 석가가 깨달은 “무아(無我, 자기를 버리다, anatman)의 각성”이라고 하거나, “열반(涅槃, 번뇌를 꺼버리다, nirvana)”이라고 말합니다. 제가 보기에 현각의 정직한 질문은 여전히 대답을 기다리며 미궁 속에 빠져 있는 것 같습니다.


둘째, 현각 스님이 깨달은 대각(大覺)이라고 하는 것의 내용을 알고 보면 “신과 진리가 자기 자신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가 말했듯이, “어릴 때부터 한 시도 잊어본 적이 없는” 신과 진리라는 정직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자신의 존재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 안에 내재 되어 있는 것이라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사실 그것은 예일과 하버드에서 그가 오랫동안 추구하던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인식 방법론에 일대 혁명을 가져 온 것입니다. 두 가지 혁명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지금까지 그는 신과 진리는 “자기 바깥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믿었으나 이제 신과 진리는 “자기 속에 주관적으로 존재한다.”믿게 된 것입니다. 둘째는 지금까지 그는 신과 진리를 아는 방법도 지성적이고 논리적인 방법이 최선이었으나 이제는 심미적이고 실존적인 방법보다 실체에 접근하는 가장 용이한 방법이라는 새로운 결론에 도달한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예상치 않는 개종이 일어날까요? 가슴 아픈 현실이지만, 요즘 타종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보다 기독교에서 타종교로 개종하는 사례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그러나 타종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은 여기에서 논외로 하고, 기독교에서 타종교로 개종하게 되는 이유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여기에서는 주된 이유만 몇 가지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요즘 많은 지식인들이 시대의 흐름에 편승해서 종교 다원주의를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성인’의 표시 중에 하나가 “종교는 다 같은 거야.” 혹은“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는 종교 다원주의 사상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현대 지성인 사회에 불문율이 하나 있다면 “종교 간에 우열을 논하거나 배타적인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여학생도, 현각도, 도사도 대부분의 현대 지성인들이 걸어가는 다원주의의 길을 택한 것입니다. “나는 부처님을 믿지만 예수님도 존경한다.”는 식입니다.


둘째, 사실과 내용보다는 체험과 의미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서양 철학과 신학의 인식론적 결론은 비합리주의 혹은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신앙의 비약”입니다. 그런데 그 본질을 따져보면 동양적인 인식론인 “직관”이나 “무심”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요즘 동서양의 인식론이 상대주의적이고 의미론적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현각의 경우에도 종교 간의 교리적 내용보다는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와 같은 실존적 체험을 중시하는 하버드의 신학을 따른 것이며, 그렇다면 불교나 동양 종교를 받아들이는 데도 신앙적으로나 지성적으로나 갈등이 그리 크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틀릴 수 있는데, 단지 그의 마음을 책으로만 읽었기 때문이고 또한 개종의 변이나 장황설도 별로 없는 것으로 보아 그렇게 짐작할 따름입니다.


셋째, 기독교가 매력을 상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주교나 개신교나 기독교의 매력을 크게 세 가지만 말한다면 하나님과 갖는 신앙적인 실체와 지성적인 교리 체계 그리고 공동체의 아름다운 교제 등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이런 독특한 본질적인 매력들이 급속도로 상실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종교와의 차별성이 부각되지 않고 있습니다. 특히 젊은이들은 교회 공동체가 세상에 모범이 되기보다 욕이나 얻어먹고 있을 정도로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있는 것에 크게 실망하고 있습니다. 매력 상실이라는 것이 여학생에게는 개신교의 영성에 실망했다는 것이고, 현각은 대답에 실망했다는 것이고, 도사님은 체험이 없는 깡마른 교리 공부에 진력이 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실체와 매력을 둘 다 상실해 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넷째, 이것이 제일 큰 문제인데, 정직한 구도자라고 하더라도 분명한 진리를 판별하는 기준, 즉 ‘크라이테리아(criteria)’가 없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도를 위해 신발과 배낭이 다 헤어지도록 오늘은 세상 이쪽을 뒤지고 내일은 세상 저쪽을 헤매면서도 구도의 기준, 즉 진리를 판별하는 기준이 없이 다니고 있습니다. 누구나 그렇지만, 기준이 없으면 아무 것이나 받아들이게 됩니다. 보통 비행기는 정해진 활주로에 안전 착륙을 하지만 폭풍우를 만나면 아무데나 비상착륙(非常着陸)을 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기준도 없이 구도의 길에 나섰다가 다행히 진리를 만나 안전 착륙을 하게 되면 생명을 얻지만, 급하면 비진리에 비상착륙 할 수가 있습니다. 처음부터 기준이 없었기 때문에 불시착도 언제든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프란시스 쉐퍼는 진리의 기준을 제시하기를, “어떠한 이론이 진리가 되려면 그 이론의 내적인 정합성이 있어야 하고(Coherency), 그 이론이 인간의 내, 외적인 경험과 부합해야 하며(Relevancy), 인간이 그 이론을 가지고 실제로 살 수 있어야 한다(Practicality).”고 했습니다.


그 여학생이나 뮌젠이나 도사님이 불시착하게 된 것은 이런 간단한 수준의 진리의 기준도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본래 기준이 없으면 ‘자기’가 기준이 되든지, ‘재미’가 기준이 되든지, 아니면 ‘여론’이 기준이 됩니다. 여러분도 이상의 여러 가지 이유로 비 진리에 불시착한 것은 아닙니까? 아니라면 여러분은 어떤 진리의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까? 요즘 청년들의 기준은 첫째도 재미, 둘째도 재미, 셋째도 재미라고 합니다. “재미있으면 최고다.”고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찾는 정직한 구도자라면 누구나 ‘어떤 세계관과 종교가 참 진리인가’를 평가하는 기준을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하며 그 기준에 의해 새로운 진리를 판별해 보아야 합니다. 이제까지는 교회 앞문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뒷문으로 빠져 나가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어도 별 표시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앞문으로 들어오는 사람들도 많지 않은데 뒷문으로 빠져 나가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면 교회가 비게 됩니다. 더구나 교회를 떠나서 무신론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타종교로 개종하는 것은 기독교의 수치입니다. 대체로 교회를 떠나기 전에 사람에 따라 몇 달 혹은 몇 년씩 고민을 합니다. 그 기간에 붙잡지 못하면 놓칩니다. 여러분 주위에는 그런 사람들이 없습니까? 더 늦기 전에 진리를 만나게 합시다.

[이정희] Simply Life, 나의 유학일기 – 2004. 10 어느날

이코스타 2004년 10월호

종합시험, 종합시험, 종합시험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 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  윤동주, 쉽게 씌어지는 시 중


오늘은 비도 주적주적 오는 것이 육첩방은 남의 나라라는 말이 마음에 와 닿는다. 식스 스퀘어 방은 남의 나라, 아니 지금 있는 곳은 식스 스퀘어는 더 되는 것같다. 그러나 그렇다 한들 무슨 차이가 있으랴. 남의 나라인걸. 혼자 좁은 공간에 고립되어 있다고 느껴질 때, 괜히 나를 감옥에 있었던 다른 사람으로 등치시켜보곤 한다. 사도 바울이 그랬지. 김교신이 그랬지. 그리고 윤동주가 그랬었지 하면서.
유학생활한지 수 년, 이때까지 온 내가 한편으로는 대견하고 이것밖에 아닌 내가 한편으로는 한심하다.


오늘은 문득 공부를 한다는 것이 장난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같이 들어온 미국 동기들은 벌써 패쓰한 종합시험을 한 학기나 미루고 아직고 머리 싸매고 고민하고 있는 스스로가 한심해보인다.
대학교 다닐 때는 앞으로 어떻게 할까라는 걱정이 가장 힘들고, 유학을 준비할 때는 준비과정에 제일 힘든 줄 알았더니 코스워크 과정에서는 그런 것들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이것만 지나가면 낫겠지 했더니 종합시험 스트레스는 앞의 것들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참 하면 끝이 없이 벌어지는 난관에 인생은 고역이라는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다.
하긴 처음 미국에 왔을 때 언어의 장벽을 실감하고 당황해하던 때를 생각하면 이 정도 하는 것만 해도 감사한 일이긴 하다. 과제와 에세이 준비하면서 끙끙대던 기억들, 좋지 않은 성적과 컴멘트로 속상해하던 일, 프레젠테이션하면서 긴장하던 일들 겨우겨우 넘어서 코스워크까지는 무사히 마쳤으니 이제 새로운 지경으로 눈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영어는 왜 이리 안 느는지, 글을 읽다보면 걸리는게 너무 많아서 다시 예전에 공부하던 단어장이나 한번 훑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논문을 쓰기는커녕 남의 논문 이해하는데도 이렇게 장애가 많으니 언제나 그들을 따라가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지식인, 잉여인간, 고민


나는 무엇이 힘든가. 육체적으로? 혹은 혼자 사는 삶의 외로움으로? 평소에 공부를 잠을 못자면서까지 하지는 않으므로 몸이 힘든 것은 아닐 것이고, 혼자 사는 외로움이야 삼십년을 따라오던 것이므로 지금 유달리 힘을 발휘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내가 갖는 심적인 어려움은 가끔은 내가 잉여인간적인 삶을 살고 있지 않나하는 회의 때문일 것이다. 지식인이라는 말이 아직 가당하지 않겠지만 뚜렷한 성과물이 없이 사회에 생산적인 기여를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만들어 놓은 가치물을 소비만 하고 있다는 자괴감이 몰려오는 것이다. 대학을 같이 다녔던 친구들은 벌써 사회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가정도 갖고 안정도 되어 있는데 나는 아직도 사전 뒤적이고 있는 것이 슬며시 부끄러운 것이다.
나는 지식인인가 아니면 잉여인간인가? 이제 지식인도 앞에 신(新)자를 붙여서 보이는 무언가를 생산해내지 않으면, 사회적으로 가치있는 지식을 도출해내지 못하면 비난받아야 하는 시대에 내가 지금 들여다 보고 있는 이 종이 자락에서 무언가를 건져낼 수 있을까? 아니 이 정도의 글이라도 써낼 수 있을 것인가? 다른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지식을 생산해낼 수 있을까? 그저 백면 서생(百面書生)으로 남아 남들이 만들어놓은 가치에 얽어 붙어 살아가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그런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감상(感傷)이나 연민으로 세상을 향하기에는 삶이 너무 무겁다. 사랑과 땀이 고이 담긴 학비 봉투는 무표정한 나의 얼굴을 비장하게 만든다. 생각해보면 이렇게 다른 걱정없이 미국에 와서 공부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인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는 특수한 시간을 감정의 소회로 보낼 수는 없다.
태어나서 지금처럼 많은 돈을 써본 때는 없다. 또 태어나서 지금처럼 많은 돈을 벌어본 적도 없다. 그리고 공부를 시작한 이후 지금처럼 아끼면서 산 적도 없다. 복사 종이 한장도 돈으로 환산되고 커피 한잔도 절약의 방도를 찾아보게 된다. 집에서 타먹으면 일불이라도 절약할 수 있겠지.
일상의 외관은 철저히 현실주의자가 되어 다른 것을 잊고 전진해야함을 상기시켜준다.


사는데 가난한 것이 마음의 가난함을 불러일으키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누리고 있는 것들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갖게 한다는 것은 틀림이 없다. 물 속에 잠수해있을 때 느끼는 숨막힘이 공기의 소중함을 깨우쳐 주는 것처럼 말이다.


기독교인의 삶, 쉽게 씌어지지 않는 시


로렌스 형제가 터득한 하나님과 대화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단순히 자신의 평범한 일상사를 수행하는 것이다. 그는 맡겨진 일과를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순종의 마음으로 감당했으며, 늘 자신의 그 사랑이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순결한 것이 되게 하고자 했다.
–하나님의 임재 연습 중


우리의 성화는 우리가 추구하는 생활을 이것에서 저것으로 바꾸는 데 달려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일상의 활동들을 자기 자신이 아닌 하나님을 위해서 한다는 뜻인 것같다.
신앙과 학문의 조화, 삶과 신앙의 일치는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는 삶의 태도를 우리에게 요구한다고 노상 들었는데, 요즘 생각해보면 유학생활은 특수하면서도 어느 곳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과 동일하게 보이는 재물을 위해 살 것인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 것인가의 선택의 장인 것같다.
나의 유학생활에서의 성화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합당한 목표와 그에 걸맞는 성실함과 자기 절제로 우리의 삶에 적용될 수 있을까?
헨리 나우엔이 적기를 우리가 지식을 쌓는 이유는 우리의 지식을 자유로이 나누기 위함이고 우리가 절제하는 이유는 주님에게 성실하기 위함이다. 오직 관대하게 우리의 가진 지식을 나누어 줌으로써만 우리는 그 지식이 얼마나 심오한지를 알 수 있다고 했군. (It is only by giving generously from the well of our knowledge that we discover how deep that well is. –Henry Nouwen, Bread for the Journey)
이것이 나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까? 영어 공부가 되었건, 종합시험이 되었건, 학위 논문이 되었건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다른 사람을 위해 절제하는 것이 신앙의 아름다움의 실체이겠지.
그리스도인에게 Simple Life는 의미없는 단순한 하루가 아니라 절제하는 소박한 삶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좇는 우리에게는 오늘 하루의 책상머리맡은 하나님나라에 하나의 벽돌을 얺는 신성한 삶의 자리인 것이다. 나에게 오늘 하루는 더 이상 그저그런 일상이 아니라 일일 일생(一日一生)으로 의미가 바뀐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완결성은 아직 먼 일이지만 오늘 하루가 달라지만 일생이 달라지리라 생각하고 스스로에게 의식적으로 희망을 주어본다.


학교의 해거름 생량(生凉)한 찬 공기가 정신을 맑게 해준다. 혼자 내 속으로 침전하기 전에 주위를 돌아본다. 삶이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좀더 치열하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고 교정을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