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성]유학생 사역과 찬양

이코스타 2004년 11월호

이 곳 워싱턴 디씨 지역에서 유학생 사역(Korean Bible Study(KBS))으로 섬긴지 약 2년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항상 동행하신 예수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저희 사역은 금요일에 모여 함께 말씀을 나누며, 모임에 참석하는 지체들을 말씀 위에 스스로 서서 참 제자로 살아가도록 돕는 것입니다. 물론 말씀을 깊게 연구하는 것이 사역의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찬양 사역 또한 여러 가지 측면에서 말씀 사역과 병행되고 있습니다. 작은 규모로는 금요일 성경 공부 모임에서, 크게는 매 년 두 차례 모이는 지역별, 전체 수양회에서 찬양팀을 통해, 또는 각 모임의 재량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유학생 사역 안에서 바라보는 찬양 사역에 대해 짧게 다루고자 합니다. 시중에 이미 나와 있는 전문적인 서적들과 비길 수는 없겠지만, 말씀 연구 위주의 사역 안에서 찬양 사역을 꿈꾸는 지체들에게 작은 보탬이 되길 기도합니다.


가끔씩 함께 지내는 지체들 속에서 쉽게 쓰는 말로 ‘feel’이 꽂힐 때만 찬양을 하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하나님께 찬양드릴 마음이 생겨야만 찬양하는 것입니다. 몸이 피곤하거나 나의 마음이 깊은 고통으로 인해 괴로워할 때, 찬양은 생각하기 힘든 옵션이 되고 맙니다. 그럴 때는 차라리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다른 일들을 하고 싶습니다. 모임 전에 기타에 맞춰 부를 찬양들이 마음에 불평을 불러일으킵니다(한 번쯤 소그룹에서 찬양을 인도해보신 분이라면, 저 뒤에 모자를 푹 눌러 쓰고 팔짱을 낀 채 시무룩하게 앉아있는 친구가 어렵지 않게 떠오를 것입니다). 마음이 너무 편해도 찬양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할 수 있는 다른 무엇인가를 찾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이런 사람은 언제 찬양을 하게 될까요? 뭔가 내 자신 안에 ‘쥐어짜는 듯한 마음’이 있어야만 진정한 찬양을 드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구할 것이 있거나, 마음으로 담아내기 힘든 어려움이 있을 때만 찬양다운 찬양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찬양은 ‘곡조가 담긴 기도’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런 분들에게 박수 치면서 부르는 찬양은 정말 곤욕일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뻐 뛰노는 모습은 경박스럽기만 합니다. 이런 모습들을 잠시 떠올리면서 찬양은 우리에게 하나의 선택으로 전락해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시편 기자는 우리와 조금 다른 시각으로 찬양을 본 듯 합니다. 그는 시편 33:1통해 말합니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의 마땅히 할 바로다.’ 찬양은 의인들의 마땅히 드려야 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신약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의인됨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케 됨을 의미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모든 사람들은 마땅히 찬양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땅히’라는 단어는 강제성을 내포하고 있는 듯 합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여기서 쓰인 ‘마땅히’라는 말은 ‘아름답다’는 뜻의 ‘나베’라는 히브리어가 쓰였습니다. New American Standard Bible에는 ‘becoming’이라는 단어가 쓰여있습니다. ‘어울린다’는 말입니다. 찬양하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것, 어울리는 것이라면, 찬양은 정말 선택적인 것입니까? 개역한글의 번역이 잘못된 것일까요? 저는 의미상으로 바른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찬양을 하지 않을 경우를 한 번 생각해봅시다. 마치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것과 같습니다. 아름다움의 반대인 ‘추함’을 입게 됩니다. 추함이라는 강한 단어를 쓰지 않더라도, 썩 좋아보이지 않는 모습이라면 어떨까요? 어떤 분들은 썩 좋아보이지 않아도 편하게 있으면 그만이지 않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충분히 동감할 수 있는 말입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정장에 넥타이까지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경우에 따라 저의 개인적 성향을 잠시 무시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언제일까요? 정장이 꼭 필요한 시간입니다.


마태복음에 왕의 잔치에 초대 되었던 한 사람을 기억하십니까(마태복음 22:11 13)? 왕의 혼인 잔치에 오려는 사람이 없자 사거리 길에서까지 사람들을 불러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여기 이 사람도 불려 왔습니다. 추리닝 바지에 티셔츠를 걸친 아주 편한 차림으로… 그런데 이게 왠 일입니까? 불러올 때는 언제고 이제는 내어 쫓김을 당합니다. 불러드릴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예복’을 입지 않았다고 잔칫상의 진수성찬을 뒤로 한 채 그대로 쫓겨났습니다. 이 사람은 쫓겨나서 아주 서럽게 울었다지요? 요즘은 그렇지 않지만, 왕이 있었던 시대에는 왕의 행차에 절하지 않는 사람은 극한 처벌을 받았습니다. 왕의 백성으로서 왕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는 것은 ‘죄’인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다시 한 번 말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시편 29:2)’ 왕 앞에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아가는 것은 마땅히 행해야 하는 행동입니다. 하나님 앞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what’s becoming) 옷을 입고 나아가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바입니다. 우리가 찬양으로 하나님 앞에 서있지 않다고 해서 그분께서 우리를 바로 죽음으로 내모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를 위해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가슴에 담고 살아가는 천국의 백성이라면, 그리고 구원에 대한 깊은 감사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왕 되신 주님 앞에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항상 서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로 찬양의 모습으로 말입니다. 그분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드리워지는 것이 보이십니까?


학생의 때는 감정이 가장 민감한 때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상황과 사건에 따라서 바뀌는 감정. 그리고 그 감정 속에서 흔들리는 신앙, 그 안에서 찬양은 언제나 합당한 것이라는 개념을 받아드리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찬양은 사람의 감성과 깊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상황에서 야기되는 감정을 뛰어넘는 찬양을 드리는 데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 속에서 더 아름답게 찬양한 사람이 있습니다.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이러므로 내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내 손을 들리이다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내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내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밤중에 주를 묵상할 때에 하오리니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거이 부르리이다
(시편 63:3-7)


시편은 다윗의 찬양하는 삶을 잘 보여줍니다. 특별히 시편 63편은 다윗의 넘치는 기쁨과 감사가 ‘충만하게’ 표현된 시 중에 하나입니다. 입술로 찬양하고, 손을 들고 찬양하며, 또한 기뻐합니다. 잠을 청할 때도 하나님을 기억하며 묵상하고 찬양합니다. 다윗은 정말 찬양으로 가득찬 사람이었습니다. 이 구절을 통해 우리가 주시해야 할 것은 이 시가 쓰여진 당시의 상황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아들이었던 압살롬의 반란으로 인해 광야로 도망치던 중에 이 시를 썼습니다. 왕으로서, 아버지로서의 체면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고백합니다. 주님의 인자하심… 골수와 기름진 음식… 그리고 하나님의 도움을 인해 그는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억지로 하는 찬양이 아닙니다. ‘즐거이 부른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가 그렇게 찬양했던 제목들이 그의 눈 앞에 있었습니까? 도망치는 자에게 어떤 인자하심과 도움이 있었겠습니까? 어떤 기름진 음식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겠습니까? 다윗 왕의 행렬에 욕을 하고 돌을 던졌던 사람의 이야기를 보아도, 다윗의 행렬이 얼마나 급하고 초라한 것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찬양합니다. 진실과 전심으로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다윗에게 ‘찬양은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 하나님의 인자하심, 하나님의 전능하심, 하나님의 선하심, 하나님이라는 분에 대한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비록 다윗의 앞에 모든 것이 초라했지만, 다윗은 그것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 뒤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진정으로 보았기에 그는 즐거이 부를 수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찬양은 이 실상을 고백으로 끌어내는 통로입니다. 우리는 우리 앞에 펼쳐있는 상황이 어떻든지 하나님께서는 선하시며, 모든 일에 주관자 되심을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이 우리 가운데 있을 때, 언제나 합당한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됩니다. 감정의 기복을 뛰어 넘는 찬양을 드리게 됩니다. 이러한 믿음이 담긴 찬양을 하나님은 흡족하게 받으실 것입니다(히브리서 12:6).


이제 이런 아름다운 믿음의 고백을 어떻게 소그룹 안으로 가져 올 수 있을지 잠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소그룹 안에서는 대개 한 명이 기타나 다른 악기를 가지고 찬양을 인도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적게는 한 명, 많게는 10명 정도의 지체들이 함께 할지 모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찬양을 인도하는 스타일이나 가창력, 또는 악기 연주 실력에는 그렇게 비중을 두지 않습니다. 부차적인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찬양의 내용이며, 찬양을 준비하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우선, 찬양은 그 날 나눌 말씀을 반영할 수 있는 곡을 생각하며 선정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찬양의 본질적인 목적은 앞에서 나눈 것과 같이 왕 되신 주님께 아름다운 모습으로 서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 공부 전에 드려지는 찬양은 다른 부차적인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함께 있는 지체들의 마음으로 말씀을 향해 열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찬양을 통해 그분께 가까이 나아가고, 이제 그 안에서 열린 마음으로 말씀을 대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부차적인 목적 때문에 하나님께 드려져야 할 찬양이 사람에게 맞춰져서는 안되겠습니다. 여기서 ‘맞춰진다’는 것은 찬양의 템포나 스타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찬양을 준비하는 인도자의 마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하나님께 드릴 찬양을 준비하되, 찬양의 드려짐을 통해 사람 안에 역사하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너무 그날의 말씀과 찬양을 끼워 맞추려는 노력은 피해야 할 것입니다. 찬양곡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부분은 여기서 다루지 않겠습니다. 찬양의 흐름에 따라 찬양곡을 선별하는 것은 인도자에게 중요한 일입니다.


인도자로 세움을 받으시는 분들은 찬양 가운데 생활하시기를 권면합니다. 가급적이면 항상 찬양을 들으시고, 마음으로 깊이 배우시기 바랍니다. 찬양의 가사들이 자신의 고백이 되어야 하고, 또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대부분 말씀을 통해 당신의 뜻을 알리시지만, 이제 찬양으로도 그렇게 하시도록 하기 위해 찬양 속에 깊이 들어가 있으시길 권면합니다. 몇몇 소그룹이나 수양회에서 찬양을 인도하는 분들이 어려움을 토로하는 것을 듣습니다. 그룹 멤버들이나 회중을 같은 열정으로 찬양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너무 어려운 일이라고 합니다. 사실입니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리고 소그룹이 큰 회중보다 어려울 것입니다. 소그룹 안에서 혼자 열심히 찬양하고 있는 그 어색함을 상상하고 계신가요? 궁극적으로 ‘찬양’이 여러분의 삶을 통해 지체들에게 드러나게 하십시오. 몇 번의 감성적 노래 부르기는 가능하지만, 진정한 찬양은 가시적인 요소만으로 드려질 수 없습니다. 인도자의 삶에 깊이 뿌리내린 찬양의 영성으로만 함께 찬양하는 이들을 권면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먼저 깊은 영성의 찬양으로 하나님 앞에 설 때, 성령님께서 여러분을 channel로 사용하셔서 잠들어 있는 지체들의 영혼을 깨우실 것입니다. 지체들이 변하는 시간이 오래 걸려서 인도자가 지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사람을 보지 말고, 찬양의 대상을 항상 바라보아야 합니다. 인도자로써 온전한 channel이 될 수 있도록… 그리고 함께 찬양하는 지체들을 항상 하나님께 기도로 올려드리십시오.


우리는 왕 되신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항상 그분께서 함께 있으리라 하셨기에 항상 왕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항상 찬양을 불러야 할까요? 네, 그렇습니다. 항상 불러야 합니다. 길을 걸을 때에도, 운전할 때에도, 잠이 들 때에도, 아침에 일어날 때에도 항상 부르십시오. 환란 가운데서도, 처절한 슬픔 가운데서도, 삶의 막다른 골목에서도 믿음으로 부르십시오. 그분의 선하심을 믿는 삶으로 부르십시오. 항상 아름답게 드려질 믿음으로 예배, 곧 예배의 삶으로 부르십시오. 삶의 모든 순간을 주님께 아름다운 제사로 드리십시오. 그것이 곧 찬양입니다. 그것이 영감 있는 찬양입니다. 하나님이 흡족히 여기시는 노래입니다.


교실 한 구석에서 모자를 눌러 쓰고 심통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형제 혹 자매가 보이십니까? 그 지체에게 아름다운 믿음의 예복을 입혀줍시다. 이제 예수님께서 곧 행차하신다고 합니다.

[김재석] 유학시절: 물매질(전공실력) 단련기간

이코스타 2004년 11월호

나는 다윗이 골리앗을 대항하여 승리한 사무엘상 17장의 이야기를 읽을 때 마다, 가슴이 뭉클해지곤 한다. 전쟁에도 나갈 수 없었던 청소년 나이의 다윗이 불레셋의 대장군을 물매질 솜씨로 무찌르는 장면은 늘 감동적이다. 특히 어린 나이에도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다윗의 믿음은 우리 모두의 귀감이 된다고 하겠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다윗이 골리앗을 무찌르는데 사용한 실제적 방법이 물매질솜씨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가 평소 사용하지 않던 솜씨였는데 하나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주여! 믿습니다” 하면서 물매를 던져 골리앗을 물리쳤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시편과 다른 구약성경에 보면, 다윗은 자신이 돌보던 양떼를 사자나 곰 같은 동물들로부터 잘 보호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고, 그 방편으로 물매질 솜씨를 익힌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힘센 동물들이 공격하여 양떼를 잡아가면, 모든 사람들에게 excuse가 될 수 있는 상황이였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스스로 이를 용납할 수 없었다. 즉 그의 물매질 솜씨는 자신에게 맡겨진 일(업무)를 최고의 수준으로 수행하기 위한 전공적인 기술이였다.
다윗은 이 물매질 솜씨를 연마하기 위해 따분한 들판의 시간들을 허비하지 않고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고, 하나님은 이러한 그의 전공적인 기술을 사용하여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안겨주신 것이다.


유학의 목적이 두말할 나위도 없이 전공분야에서의 실력 향상과 이를 통한 학위 취득임은 자명하다. 그러므로, 유학기간이 우리의 전공 실력, 즉 물매질 솜씨를 향상시키기 위한 최고의 기간일 것이다. 하나님은 훗날 이러한 우리들의 기술과 은사를 사용하여 그의 나라와 이웃을 위해 귀하게 사용하실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이러한 물매질 단련기간을 다음과 같은 몇가지 관점에서 새로이 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무엇을 위한 실력 향상이고, 유학인지 재고해 보아야 한다.
세상의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의 만족과 인정 받음, 그리고 결국에는 자신이 드러나서 남에게 섬김받고 최고가 되고 싶은 마음에서 유학의 길을 택하고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인생관을 나의 인생관으로 갖고 사는 사람들이다. 주님은 자신의 인생의 목적을 “섬기러 왔다”고 하셨다(막10:45).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꿈과 유학의 목적도 하나님과 이웃을 더 크게 섬기기 위함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이웃을 더 잘 섬기기위해 실력 향상을 도모하는 새로운 종족이여야 할 것이다.


나는 교수로써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한국에서는 교수라는 위치가 사회적으로 어느정도 인정과 존경을 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으로 인해 내 일에 만족감을 느끼지 않는다. 나는 학생들을 잘 가르쳐서 그들이 미래 사회를 올바르고 멋있게 이끌어 나가도록 돕는 일을 위해 섬기는 자로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나의 기쁨이요, 만족의 근원이다.


둘째, 섬김은 최고의 실력으로 할 때 훨씬 기쁘다.
우리가 비싼 레스토랑을 가는 큰 이유중 하나는 최상의 서비스를 받는 기쁨 때문이다. 우리가 어느 상점에 가든, 어느 사무실에 가든, 어떤 음악을 듣든, 또는 어떤 제품을 사든, 그곳에서 최상의 서비스와 최고의 품질을 만날 때에는 정말 마음이 기쁘고 흐믓하다. 적당히 만들어진 제품이나 적당히 행하는 서비스에는 감동이 전혀 없다. 우리가 물매질 솜씨를 향상시킬 때에는 최고와 최상의 수준을 목표로 자신의 최선을 다하는 것이 필요하다. 다윗은 죽음을 각오하듯 최선의 노력으로 양떼를 지켰고, 이로 인해 하나님은 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셨다(시78:70-72).


물론 최고가 될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나는 학생들에게 더 쉽게 설명할 방도를 찾고, 더 잘 가르치기 위해 외국의 교수법도 공부하면서 다양한 노력들을 하고 있다. 나는 이것을 통해, 내 강의를 들은 학생들이 기쁨으로 돌아가길 늘 소원한다.


셋째, 우리가 최선의 노력을 다하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지혜를 늘 간구하며 살아가야 한다.
유학을 성공리에 마치는 것은 50%의 자기 노력과 50%의 운이 따라야 한다고 말한다. 50%의 운이라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바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이다. 나도 유학시절, 장학금만으로 생활비를 겨우 마련하고 있었는데, 이 모든 과정을 통해서 보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얼마나 적절하였는지 모른다. 또한 중요한 어떤 실험 결과를 도출하는 것이 나의 논문에서 필수적인 요소였는데, 실험기기가 계속 고장나고 실험용으로 만든 wafer는 거의 닳아 없어지는 것으로 인해 얼마나 초초하였는지 모른다. 그런 순간순간마다 실험기기에 손을 얻고 기도를 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요청하였고, 결국 원했던 실험 결과치를 막 얻고 나서는 실험기기가 더 이상 손 댈 수 없게 고장이 나버렸다. 또한 논문 최종심에서도 까다로운 교수로 인한 어려움을 하나님이 적절히 인도해 주심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리고, 졸업을 앞두고 미국의 불황으로 인해 취업의 문이 막히고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내 분야의 논문 저자들에게 직접 편지를 띄우는 좋은 아이디어를 주셨다. 이 방법을 통해 내 관련분야의 논문 저자들에게 20여통의 편지를 보낸 중에서 5-6군데서 인터뷰 요청을 받았고, 첫 인터뷰를 했던 Bell Lab. 에서 곧바로 job offer를 받을 수 있었다. 이것은 당시 우리 학교와 유학생 사회에서 그리스도를 충실히(?) 섬겼던 사람이 받는 축복이라고들 말해주곤 하였다.


우리 삶의 매 순간순간 하나님의 인도하심와 도우심을 간구하고, 또 이것을 실제로 체험하는 것이 축적될 때 우리의 신앙도 성숙되어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주신 은사를 따라 우리를 사용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이를 단련하고 준비해 놓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하실 수 없다. 하나님께 쓰임받기를 원한다면, 이제 당신의 물매질 솜씨 연마를 위해 이 유학기간을 잘 활용하기를 권하고 싶다.

[김한준] 헨리 나우웬의 “아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 를 읽으며…

이코스타 2004년 11월호

동양 속담 중에 나 이외의 모든 사람은 다 나의 스승이다라는 말이 있다. 어떤 사람은 본받을 만한 모델로서, 또 어떤 사람은 본받지 말아야 할 반면교사(反面敎師)로서, 다 나름대로 배울 만한 점들을 제공한다는 의미로 이 말이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조금 다른 시각으로 보면, “모든 사람으로부터 최소한 한 가지씩의 장점을 발견할 줄 아는눈을 가지도록 하는 권유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살아가면서 인격적으로, 또는 책 등을 통하여 직간접적으로 만나게 되는 만남이 믿는 이들에게 주는 의미는 각별하다.  각 사람들에게서 부분적으로만 드러났던 하나님의 형상이 만남과 나눔들 가운데서 더욱 온전한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헨리 나우웬(Henry Nouwen)간접적으로만나는 만남도 우리의 묵상과 깨달음에 풍성함을 더하여 주는 한 좋은 예인데, 다른 사람들의 삶을 통하여 주님을 만나는 일에 탁월하였던 그를 통하여 우리 역시 주님을 만나기를 소망한다.



헨리 나우웬의 삶은 사역적인 면에서 크게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예일대에서 신학적 심리학을 가르쳤던 70 년대, 하버드에서의 파트타임 강의와 남미 선교를 병행하였던 80 년대, 그리고 캐나다의 라르쉬 공동체 데이브레이크에 들어가서 장애인들, 특별히 아담이라고 하는 한 중증 장애인과 함께 남은 생애를 보낸 90년대가 그것이다. 그가 유명 작가와 일류 대학의 교수라는 영향력을 뒤로 하고 (사실은 그의 모든 존재를 집약해서!) 한 영혼을 섬기는 삶을 사는 데에 생의 마지막 10년을 보낸 사실은 잘 알려진 대로이므로, 그런 면에서 아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라는 책에는 그의 인생의 무게가 실려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아담과의 만남



아담 아네트(Adam Arnett) 1996 2월에 34 년의 생을 마감하였으며, 헨리 나우웬도 이 책을 쓰고 난 직후인 같은 해 9 , 마치 자신도 할 일을 다 하였다는 듯 아담의 뒤를 따라갔다. 그는 아담의 삶을 통하여 본 예수님과 그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고자 이 책을 썼다고 밝히고 있다. 



“…나는 관에 누워있는 아담의 시신을 본 순간부터, 그의 삶과 죽음의 신비에 사로잡혔다. 그때 섬광처럼 내 가슴에 와닿은 사실은, 바로 이 장애인이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며 독특한 사명을 띄고 이 세상으로 보냄을 받았다는 것, 그리고 이제 그 사명을 완수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그런 시선으로만 아담을 보았던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를 아끼던 많은 친구들은,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한 도움, 더 체계적인 인도함, 더 큰 섬김의 기회들을 마다하고 이런 곳에 와 있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헨리, 자네가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데가 여기인가?” 그는 혼란스러워했을 뿐만 아니라 화를 내고 있었다. “아담에게 자네의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기 위해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던 대학을 떠났단 말인가?”…”



생각의 변화



사명감과 의욕으로 시작하였던 새로운 섬김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의문과 방황과 영적 침체의 모습으로 그에게 다가오게 된다. 그러던 그의 마음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금씩 변화되어 갔다.  



“…한 주 두 주, 한 달 두 달이 지나면서 나는 아담과 함께하는 한두 시간을 사모하게 되었다형세가 역전되고 있었다. 아담은 나의 선생이 되어가고 있었고, 내 삶의 광야를 혼란 가운데 헤메고 있는 나와 함께 걷고 있었으며, 나를 이끌어주었다. 아니,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그와 함께있는 동안 나는 그를 돌보는 모든 활동을 넘어, 내면에서 들려오는 사랑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 시간은 순수한 선물이요, 묵상의 시간이었다. 우리는 함께 하나님의 어떤 부분과 만나고 있었다. 아담과 함께 나는 거룩한 존재의 현존을 알았고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



모두의 눈에 선생이었고 돕는 자였던 그가, 실제로 주님 안에서 배우고 도움을 받은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의 섬김과 양육의 대상이 되어주므로써, 그러한 일들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하였을 배움과 자라남을 가능케 했던 아담이야말로, 그 자신을 위하여 세워주신 영적 스승이요 영적 은인이었다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아담을 통하여 만나는 예수님, 그를 통하여 만나는 우리 자신



“…예수님은 권세와 힘을 가지고 오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연약함의 옷을 입고 오셨다. 나는 아담이 제 2의 예수님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예수님의 연약함 때문에 아담의 극도로 연약한 삶을 최고의 영적 의미가 있는 삶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아담에게는 내면의 공간을 채우려는, 마음의 산란함이나 집착 그리고 야망이 거의 없었다. 따라서 아담은 하나님을 위해 마음을 비우는 영적 훈련을 할 필요가 없었다. 소위 그의 장애가 그에게 이러한 선물을 준 것이다대부분은 아담을 불구자로 보았다. 우리에게 줄 것이 거의 없고, 가족과 공동체와 사회에 짐만 되는 사람으로 말이다. 그가 그런 식으로 여겨지는 한, 그의 진리는 숨겨진 채로 있을 것이다…”  



헨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아담의 참된 가치를 보았으며, 아담을 통하여 세상이라는 거품을 걷어낸 예수님의 참 모습을 그의 마음에 되새길 수 있었다. 내게 다가오는 예수님의 이미지는 정직한 의미에서 어떤 모습일까? 나는 혹 내가 보기 원하는 주님의 모습만 보고 있으면서도 그런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눈을 덮고있는 비늘을 벗겨주기 위하여 때때로 삶의 한복판으로 찾아오는 장애고난의 의미에 대하여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그들은 그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신 자로, 곧 철저한 연약함 가운데서 하나님의 축복의 도구가 되도록 하기 위해 보내신 자로 환영했다. 그를 이렇게 바라보면 근본적으로 모든 것이 바뀐다. 그때부터 아담은 특별하고, 경이롭고, 타고난 재능이 있는 약속의 사람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그의 경이로운 존재 자체와 믿어지지 않는 가치는 우리에게, 우리도 그처럼 하나님께 귀히 여김을 받고 은혜를 입었으며 사랑받는 자녀임 자신을 부자라고 생각하건 가난하다고 생각하건, 지성인으로 보든 불구자로 보든, 잘생겼다고 생각하든 매력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하든 상관없이 을 이해할 수 있도록 안내해줄 것이다…” 



우리는 존귀한 존재들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존재 자체를 그토록 귀히 여겨주시며 사랑하고 계시는 그 단 한 가지의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실을 너무도 자주 잊어버리곤 한다. 그렇기에, 나의 수고와 지식, 성취에 기대어 존귀함을 획득하고자 애쓰기도 하고, 같은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도 한다.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네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네가 진실로 아느냐? 네가 이토록 귀하기 때문에 네 죄 값으로 인하여 네가 죽는 것 보다는 내가 대신 죽는 편이 낫겠다고 여긴 것이란다…”  



존재에 관하여 



“…인생은 선물이다. 우리 각 사람은 독특하며, 우리 이름이 아신 바 되었으며, 우리를 만드신 그분의 사랑을 받는다. 불행히도 우리 사회로부터 우리에게 다가오는 너무 크고 끈질기며 강력한 메세지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과 가진 것 그리고 성취할 수 있는 것으로 사랑받는 존재임을 증명해야 한다고 믿도록 한다. 우리는 이생에서 무언가 해내는 일에 몰두해 있으며,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진리 곧 우리의 기원과 종말에 대한 진리를 이해하는 데 너무나 느리다 그들은 아담의 장애만을 보게 하는 시험을 이겨냈다. 그들은 그가 돌을 떡으로 바꾸거나, 높은 탑에서 안전하게 뛰어내리거나, 큰 부를 획득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받아들였다. 아담은 이런 세상적인 일들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마음 깊은 곳에서 그가 사랑받는 자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우리 자신의 존재로서만은 귀히 여겨질 수 없다는 생각에 불안하고 두려워질 때가 있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심지어는 가정에서조차, 우리가 귀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무엇 때문에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들이 필요하다.  용모가 아름답거나 능력이 있기 때문에, 열심히 하고 있으며 좋은 결과를 내고 있기 때문에, 학벌이나 지위가 주는 신분적인 잇점들 때문에 믿는 이들의 모임은 대개 이런 점들에서 다소나마 위로와 소망을 주곤 한다. 그러나, 본질적인 면에서도 이보다 낫다고 늘 자신할 수 있을까? 출석과 봉사를 잘 하고 있기 때문에, 책임과 섬김을 다하고 있기 때문에, 믿음이 좋기 때문에, 말씀이 좋기 때문에 귀할 뿐, 그러한 이유들을 상실할 때에는 더이상 귀중한 존재가 아닐 수도 있다면 말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존재 하나만으로도 귀중히 여김을 받을 수는 없는걸까? 잘못했던 일까지 칭찬하고 내버려둘 수는 없겠지만, 어느 경우에도 존재 그 자체만은 남겨져서 최소한 계속 더불어 살아갈 수는 없는걸까? 모든 수고와 섬김과 업적들은, 이미 귀중한 존재 위에 더하여진 감사 제목일 수는 없는걸까? 그러나, 진정한 문제는, 오히려 나 자신이야말로 그러한 세상과 공동체와 만남을 만들어가고 있는 당사자라는 점일 것이다. 사람들로부터 끊임없이 평가받고 때로는 버려지기도 하는 우리가 동시에 우리의 옆사람들을 평가하고 때로는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밀어내기도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들이 있기 때문에너희는 그저할 것은하고아니오할 것은아니오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말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 5:37)”



사역에 관하여 



아담이 기도를 할 수 있었을까? 하나님이 누구시며 예수님의 이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을까?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신비를 이해했을까?” 나는 오랫동안 이런 질문들에 대해 생각하였다. 나는 오랫동안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얼마나 아담이 알 수 있는지 그리고 내가 이해하고 있는 바를 얼마나 아담이 이해할 수 있는지에 대해 알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들이 아래로부터 오는질문들임을 알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보다는 나의 걱정과 불안이 반영된 질문이었다. 하나님의 질문, 위로부터 오는질문들은 아담이 너를 기도로 이끌도록 맡길 수 있느냐? 너는 내가 아담과 깊은 교제 가운데 있다는 사실과 그의 삶이 기도라는 사실을 믿을 수 있느냐? 아담이 너의 식탁에서 살아있는 기도가 되도록 할 수 있느냐? 너는 아담의 얼굴에서 내 얼굴을 볼 수 있느냐?” 였다…” 



너는 그의 얼굴에서 나의 얼굴을 볼 수 있느냐?” 사역하느라 정신이 없고 씌임받느라 지금 분주한 나에게, 주님께서 내 옆의 한 사람 한 사람을 가리키시면서 이렇게 물으신다면 과연 나는 어떻게 대답하게 될까  



“…나는 내가 한 일과 얼마나 많이 이루어낼 수 있을지에 대해 염려하는 동안, 아담은 내게 행위보다는 존재가 더 중요합니다라고 선포하고 있었다. 내가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 어떤 말을 하는지에 몰두해 있을 때, 아담은 내게 조용히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의 칭찬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이 더 중요합니다내가 나의 개인적인 성취에 관심을 쏟고 있었을 때, 아담은 내게 혼자서 하는 것보다는 함께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라고 나를 일깨워주었다. 그는 바로 삶 그 자체로, 내가 접한 인생의 진리를 가장 철저하게 증거해 주었다…” 


[최호중] 헨리나우엔 서평

이코스타 2004년 11월호

헨리 나우웬(Henri Josef Michiel Nouwen, 1932-1996)은 심리학을 전공한 카톨릭 사제이며, Yale과 Harvard 대학 등에서 강의한 교수이면서, 말년에는 캐나다의 데이브레이크(Daybreak)에서 지체 장애아를 섬기는 삶을 산 20세기의 대표적인 영적 지도자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그의 저작 여러 곳에서 고독함과 친밀감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시끌벅적한 도시에서 매일 정신 없는 삶을 사는 현대인들에게는 혼자 있는다는 사실, 고독(solitude)이라는 상황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지만, 헨리 나우웬에게 고독은 우리가 하나님께 온전히 의지하는 방법을 배우는 시간이며,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받은 은혜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변화 받는 공간이며, 피곤하고 번잡한 일상으로부터 물러나와 하나님과만 대면을 갖는 시간을 의미합니다.


‘Clowning in Rome’은 ‘로마의 어릿광대’라는 제목으로 카톨릭 대학교 출판부에서 번역 출간되어 있으며, 고독과 공동체, 독신과 거룩함, 기도와 묵상, 관상(reflection)과 보살핌에 대한 깊은 묵상을 담고 있습니다. 제 경우에는 국내 미번역본으로 알고 있어서 유학 생활을 시작하면서 번역본이 아닌 원서로 읽을 수 있었습니다.


헨리 나우엔은 고독함에 대해 묵상하면서, 고독함을 통해 우리가 세상에서 벗어나 은둔자와 같은 삶을 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고독함을 통해 우??우리 형제 자매, 혹은 우리가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공동체의 구성원의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에, 고독함은 바쁜 일상과 복잡한 관계로부터 ‘벗어나 있는’ (time-out)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과의 친밀한 관계성을 발견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원동력이며, 고독함 속에서 공동체와의 친밀감이 자라난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헨리 나우웬의 고독함에 대한 깊은 묵상은 현실의 피상적인 상황 너머에서 은밀하고 세밀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해주고 있습니다. 자신의 두려움이나 외로움과 같은 고통들을 통해, 나우웬은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슬픔이 기쁨으로 가는 한 과정임을 고백하면서 ‘포도 알처럼 뭉개어지는 순간에는 후에 포도주가 되리라는 사실을 생각할 수 없다’는 묵상을 독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습니다.


헨리 나우웬 신부님이 로마에 체재하는 동안의 체험과 묵상을 바탕으로 기록된 ‘로마의 어릿광대’는 공동체와 독신생활 및 기도에 대한 많은 묵상들을 담고 있지만, 제목에서 함축되어 있는 ‘로마’라는 물리적인 공간과 ‘어릿광대’라는 구체적인 인간상을 이해하는 것이 ‘로마의 어릿광대’라는 영적인 묵상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로마 시내의 빈 공간으로서의 교회당 그리고 돔
거대하고 분주한 도시 ‘로마’의 도심에 위치하고 있는 성당들의 돔(dorm)을 바라보면서, 나우웬은 기독인의 삶 속에서 침묵과, 고독과, 묵상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우웬에게는 몇 백명, 몇 천명이 들어차도 될 것 같은 거대한 ‘빈 공간’으로서의 로마의 성당들과 그 성당을 이루는 돔은 그저 비어있기만 한 불필요한 공간으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삶에 지치고 상처받은 이들이 일상에서 물러나와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돌아보고 그 관계를 회복하는 혼자됨(solitude)을 위한 공간이며 그 혼자됨의 시간을 통해 새로운 힘을 얻는 공간입니다. 현대인은 바쁘다는 사실에서, 주변 사람들은 고사하고 자기 자신조차도 돌아볼 수 없는 상황을 직시하면서, 나우웬은 신앙인으로서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과, 그러한 교제는 일상에서보다 세상과 그리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벗어난 ‘고독함’ 가운데서 가능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고독함은 물리적 시간뿐 아니라 우리 마음을 비우는 일까지를 포함합니다. 로마 시내의 비어있는 돔은 공간적인 낭비와 같이 여겨질 수도 있지만, 실제 그 로마 시내의 성당들과 돔은 복잡하고 바쁜 로마의 한 구석에 여유와 고요함이 존재하고 있음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나우웬은 로마의 시내처럼 바쁜 우리의 삶과 마음 속에도 성당과 돔과 같은 비어있는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오직 한 분,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그분 앞에 부끄러운 모습이지만 정직한 모습으로 홀로 나아가 그분과 온전히 함께하는 시간을 통해 영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다는 나우웬의 묵상은 많은 도전이 됩니다.


‘실없는’ 어릿광대
나우웬은 어릿광대의 연기를 보면서, 그들이 어리석고 쓸데 없는 것 같은 행동을 통해 자신들을 희화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사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로마와 같이 거대하고, 분주하며 번잡한 도시에서 성당의 돔과 같은 빈 공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과 같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의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들 가운데에도 타인의 미소를 위해 자신을 한없이 낮추는 공허하고 외톨이와도 같은 어릿광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맹수 조련사나 곡예 그네 연기자가 받는 관심과 경이감과는 달리, 우스꽝스럽고 실없어 보이는 어릿광대들은 관중들로부터 동정과 웃음 정도를 받을 뿐이지만, 그들의 쓸모 없어 보이고 무의미하면서도 외톨이처럼 비춰지는 삶은, 그 이면에서 우리에게 희망과, 웃음과 위로와 평안을 공급해주고 있습니다. 어릿광대의 삶은 우리의 염려와 걱정, 그리고 긴장으로 채워진 삶에 미소가 필요하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우리들도 조금씩은 어릿광대와 같은 삶의 모습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나우엔의 ‘로마의 어릿광대’를 읽고 나서는 하얀 얼굴에 빨간 코를 하고 사람들에게 희망과 미소를 줄 수 있는 삶의 모습, 자신을 희화화하고 한없이 낮춤으로써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할 수 있는 마음이 우리 안에 있는지를 점검해 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서커스의 곡예 그네 연기자들에 관해 언급하면서, 나우웬은 그들이 서커스에서 위험한 묘기를 펼칠 때, 공중 그네의 손잡이를 놓으면서 반대편에서 동료가 자신들의 손을 잡아줄 것을 확신하는 서커스 단원들의 믿음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었던, 혹은 해야만 하는 유일한 일은 그네의 손을 놓은 일과 자신들의 손을 잡아줄 상대편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우웬은 이런 곡예 그네 연기자들의 공연에서,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어떠한 것인지를 발견합니다. 우리의 구원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우리가 하나님의 손을 잡는 데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우리가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놓지 못하고 잡고 있었던 그네의 손잡이를 과감히 놓고, 온전히 하나님께서 우리의 손을 잡아주시리라는 사실을 확신할 때 일어납니다. 그네의 손잡이를 놓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공중에 몸을 던질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손을 잡아주시고, 결코 우리 손을 놓지 않으시기 때문에, 설령 우리가 그분의 손목을 놓칠지라도 떨어지지 않는다는 묵상은 하나님을 신실하시고 한없는 사랑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매주 금요일 오후에 Sharlom Day Care 에서 아이들을 보는 자원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학기 중에는 어찌 지나는지도 모르게 흘러가는 시간이지만, 매주 금요일은 제게 어떤 의미에서는 나우웬 신부님의 ‘로마의 어릿광대’에서 말씀하시는 도심의 ‘성당과 돔’과 같은 의미를 갖는 시간이 됩니다. 어린 아이들을 섬기는 작은 일에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많은 은혜를 깨닫습니다. 유아부/유치부에서 섬기는 일은, 예수님께서 그분께로 나아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어린아이들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새로이 깨닫는 통로가 됩니다. 어린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아이들과 함께 찬양하고 율동하고 때로 아이들을 위한 짧은 설교를 준비하면서 아이들 앞에서 낮아지는 제 모습, 하나님 앞에서 짧은 시간이지만 저 역시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유치’해지는 제 모습을 발견합니다. 아이들과 하나님 앞에서 ‘어릿광대’와 같이 우스꽝스러운 표정과 율동, 그리고 말투를 내보일지라도 부끄럽지 않은 이유는, 어릿광대가 하는 것처럼, 제 작은 행동 하나, 표정 하나가 어린 영혼들이 그분을 느끼며, 행복한 웃음을 만들어 낼 수 있음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한 斂?학교 일들과, 수업, 시험이나 사람들과의 관계가 어떠했든지 그 아이들 앞에서 제 어려움은 모두 뒤로 하고 온전히 아이들을 바라볼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헨리 나우웬의 ‘로마의 어릿광대’는 고독함 가운데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비록 하얀 얼굴에 빨간 코는 하고 있지 않지만, 우리가 속해있는 공동체에 희망과 웃음을 줄 수 있는 어릿광대와 같은 삶에 대한 성찰과 도전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독자들에게 유익이 되는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영적인 삶에 내포된 구체적인 요소들인 고독, 독신 생활, 기도 그리고 명상에 대한 내용들을 담고 있기 때문에, ‘어릿광대’와도 같은 삶의 실제적인 모습과 적용에 관한 개개인의 깊은 묵상이 가능합니다. 하나님 앞에 그분이 원하시는 모습과 그분께 기쁨을 드리는 모습으로 나아가기 원하는 모든 크리스천들에게 많은 도전으로 다가오는 책이 되리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