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준]말씀 사역에 있어서의 성경공부 예습

이코스타 2007년 5월호

머리말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제가 어렸을 때에는 학교에서 선생님들께서 예습과 복습을 참 많이 강조하셨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한국에서 대학원을 다니기 전까지 예습이라는 것은 여전히 생소한 단어로 머물렀던 것 같습니다. 대학원 수업은 한국에서든 미국에서든 (참고로 저는 ‘문과생’입니다) 주로 reading과 발제, 그리고 거기에 기반한 토론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반강제 혹은 강제적으로 예습을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저는 학교 밖에서 먼저 예습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의 교회 대학부에서 참여했던 성경공부 모임은 숙제 시스템을 갖고 있었습니다. 즉 일주일에 한 번 성경공부를 하면서, 다음 주 본문을 미리 읽고, 요약하고, 질문들에 대한 대답들을 정리하기 위한 숙제 용지를 미리 나누어 주었던 것입니다. 그 때만 해도 ‘선배’는 어느 정도(?) 무서운 존재였던 분위기였고, 또한 숙제를 안 해 오면 기도제목 나눔 금지 등의 벌칙이 가해졌기 때문에 다들 나름대로 열심히 숙제를 해왔던 것 같습니다.


때로는 인도자로 또 때로는 참여자로 성경공부를 하면서, 어떠한 형태로든 또 어떠한 깊이로든 성경 본문을 미리 예습하고 온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필요한 일인지 깨닫게 됩니다. 모임의 성격, 참여하는 지체들의 영적 상황 등에 따라 조절할 수도 있겠지만, 그룹 성경공부(GBS)라는 것이 함께 모임을 갖는 그 몇 시간에 제한되지 않고 예습을 통해 더욱 확장된다면 지체들이 말씀을 좀 더 깊게 묵상을 하고 삶에 적용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참여자가 성경 본문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가 없이 성경공부에 온다면 인도자의 본문 이해를 따라가는 정도에 그칠 가능성이 많습니다. 자기 스스로의 궁금함과 질문이 없다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인도자에 의해 설정되는 인식의 틀 안에서만 성경 본문을 바라볼 가능성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생각과 나눔과 적용을 위해 제기되는 질문들 중에는 단 수 십 초 만의 생각으로 대답하기에는 너무 아쉬운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시간적인 의미에서) 짧은 생각으로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교과서적인 대답에 그칠 가능성도 많은 것 같습니다. (‘교과서적인’ 대답이라는 것이 ‘정답’이라는 측면에서는 굳이 부정적일 이유는 없지만, 자신 스스로의 생각에서 나온 대답이 아니라 외부로부터의 주입을 통해 주어진 대답이라는 측면에서는 부정적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성경공부를 예습하는 것은 참여자 본인의 의지가 가장 중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의지를 좀 더 자극하고, 그 의지가 현실로 드러나는 것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를 위해 지혜를 모으는 일이 필요하겠습니다. 이 글에서는 제가 직, 간접적으로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이러한 예습을 유도할 수 있는 방법들에 대해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1. QT를 통한 예습


성경공부 모임을 갖기 이전에 성경공부 본문을 갖고 QT를 함으로써 자연스럽게 기초적인 내용 이해와 묵상을 미리 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입니다. 제가 속해 있는 캠퍼스 성경공부 모임에서는 자체적으로 사용하는 QT 일정이 있는데, 성경공부 본문을 성경공부 당일과 그 전날에 배정하고 있습니다. 만약 성경공부 모임이 자체적으로 사용하는 QT 일정이 없어도, 참여자들이 자유롭게 성경공부 본문을 주중에 QT 하시도록 권면할 수 있겠습니다.


이 방법의 장점은 가장 기초적인 수준에서 자연스럽게 예습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QT와 성경공부 예습을 굳이 분리하지 않음으로써 예습에 대한 부담감을 줄일 수 있습니다. 또한 거꾸로 QT를 독려하는 길이 되기도 합니다. 같이 성경공부를 했던 어떤 지체도 QT를 안 하다가 성경공부 본문 QT부터 조금씩 시작한 적이 있습니다. (본인의 말로는 ‘어차피’ 공부하게 될 본문이니 QT를 했다고 하더군요.)


2. 질문을 통한 예습


제가 개인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방법입니다. 성경공부가 귀납적 성경공부 방식을 따르든 그렇지 않든 간에, 또한 어떠한 ‘전달’의 방법을 취하든, 대부분 몇 가지 ‘질문들’ 을 중심으로 성경공부는 진행됩니다. 때로는 성경 본문의 이해하기 힘든 부분을 이해하기 위한 질문들도 있고, 때로는 묵상을 통해 적용점을 이끌어내는 질문들도 있습니다.


사실 어떠한 질문들은 대답하는 데에 있어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는 묵상이나 고민을 필요로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들을 모임에서 처음 접하고 또 그 자리에서 나누어야 하는 경우에는 아주 피상적인 묵상과 나눔 밖에는 이루어지지 못하거나, 혹은 결국에는 진행자의 이야기에 너무 많은 비중이 실려버리게 됩니다. 만약 참여자들이 이 질문들을 미리 알고 성경공부 모임에 올 수 있다면 나눔과 적용이 더욱 구체적이고 깊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저희는 금요일 저녁에 모임을 갖는데, 저는 늦어도 목요일 밤까지는 이 질문들을 참여자들에게 이메일로 미리 전달합니다. 그리 대단한 예습을 기대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성경공부 모임을 위해 캠퍼스를 걸어오면서 단 몇 분 만이라도 질문의 내용에 비추어 본문의 내용을 다시 생각해 보기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질문들을 미리 읽고 생각해 오시지는 않지만, 가끔씩 성경공부 시간에 “간사님께서 보내주신 질문을 생각해 보았는데..” 라며 나눔을 시작하시는 지체들을 볼 때 마다 또 다른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이 방법을 사용하는 데에는 어려움과 위험도 있습니다. 첫째는 이 방법 역시, 그 질문들을 접하고 생각하기 이전에 성경 본문을 읽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QT를 통한 예습 등과 같이, 주중에 본문을 미리 읽게 하는 것과 병행되어야 하겠습니다. 둘째는, 특히 귀납적 성경공부의 경우에는, 그 질문들이 참여자들에게 있어서는 성경 본문을 바라보는 데에 ‘색안경’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앞서 이야기한 대로, 그 질문들을 접하기 이전에 먼저 본문을 읽고 기초적인 개인 묵상을 하는 과정이 없다면 이러한 위험은 더 커질 것입니다.


3. 숙제를 통한 예습


앞서 언급한 방법의 연속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숙제’라는 말을 통해 조금은 더 책임감을 지워준다는 측면에서, 또한 준비하는 시간이나 분량에 있어 더 확장 되었다는 측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숙제’라는 시스템을 운영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참여자 모두에게 똑같은 과제를 줄 수 있습니다. 내용을 정리할 수도 있고, 문단을 나누어 올 수도 있고, 핵심 단어들을 뽑아 올 수도 있고, 아니면 몇 가지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아 오거나 생각해 올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각자에게 다른 과제를 줄 수도 있습니다. 누구는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과 지역에 대해 조사를 해오고, 누구는 관찰 질문들을 뽑아보게 할 수도 있겠습니다.


‘숙제’라는 방법을 사용하면 참여자들의 예습의 깊이를 깊게 할 수 있고, 또한 성경공부 모임에서의 참여도를 높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이 역시 위험성이 없지 않습니다. 특히 인도자나 참여자가 어느 정도 높은 수준의 책임감을 갖고 있지 않은 모임이라면 성경공부를 필요 이상으로 부담스럽게 여길 위험이 있습니다. 또한 숙제는 계속 나가는데 숙제를 해 오는 사람은 계속 없다면 오히려 서로에 대한 민망함만 커져갈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모임이, 또한 자신 스스로와 참여자들이 이 정도의 책임 의식을 갖고 있다는 판단이 서지 않은 상태라면 이에 대한 욕심을 너무 내세우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꼬리말


우리가 말씀을 공부하는 목적은 우리의 ‘being’과 ‘doing’이 하나님의 ‘옳으심’에 합치되도록 하는 것입니다(딤후3:16). 마치 구약 율법의 정신이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같이 우리도 거룩해야 한다는 것이며 (레19:2), 예수님께서도 율법의 참 정신을 말씀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우리도 완전해야 한다고 (마5:48)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는 단순히 말씀을 지식적으로 배우는 것과는 다르고, 따라서 내가 말씀을 붙들고 어떻게 한다기보다는 말씀이 나를 붙들고 어떻게 하시도록 나를 말씀 앞에 스스로 노출시키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룹 성경공부가 이를 위한 중요한 기회와 동기부여를 제공하게 되지만, 예습을 통해 좀 더 개인적으로 같은 말씀 앞에 다가서는 과정이 병행된다면 그룹 성경공부가, 그리고 그를 통한 참여자들의 삶이 좀 더 하나님 앞에 풍성하여지지 않을까 기대하며, 또한 저의 작은 경험들을 통해 확신을 갖게 됩니다.


저의 부족한 경험과 생각으로 ‘예습’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습니다. 또 다른 경험, 조금은 다른 생각이 있다면 그것들이 함께 나누어져서, 말씀을 통해 제자를 삼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우리의 삶의 여정에 밑거름으로 쓰이기를 기대합니다.

[유남호] 우리 신앙에 미치는 상대주의의 영향

이코스타 2007년 5월호

상대주의는 다양한 이론들로 구성되어 있다. 경험 혹은 문화적인 특징과 각 요소들은 상대적이라는 주장이다. 예를 들어 어떤 상대주의자들은 인간은 신념과 행동 규범들을 오직 그들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배경하에서만 이해하고 평가할수 있다고 주장한다. 상대주의는 종종 진리 상대주의, 즉 절대진리란 없다는 원칙, 를 의미하곤 하는데, 다시 말해서 진리란 언어 혹은 문화 등과 같은 참조의 틀에 항상 상대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상대주의는 최근에 생겨난 신종 용어가 아니고 고대로 부터 중세, 근세, 현대에 이르는 긴 역사 속에서 많은 사상에 담겨져 있다.(1) 일례로, 현대의 기독교 철학 사상중에도 많은 움직임들이 윤리적인 측면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극단적인 경우만를 위주로 열거해 본다면, 정서주의(emotivism), 주관주의(subjectivism), 상황주의(situationism)(2) 이라고 할수 있다.


좀더 풀어서 말한다면, 정서주의에서는 모든 윤리적 진술들을 정서적이라고 주장한다.


다시말해, 도덕적인 발언은 단순한 우리의 감정의 토로이지, 도덕적인 의무에 대한 신의 명령이 아니다 라는 견해로서 극단적인 상대주의다. 주관주의는 무신론적 실존주의로서 인생을 위한 객관적인 의미나 가치가 없다고 믿는 실제적인 도덕률폐기론(3)이다. 상황주의는 모든 상황에 상대적이라는 견해인데, 예를 들어 사랑의 결정은 인식적으로가 아니라 상황적으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이와 함께, 역사적 상대주의에 빠져서 근본적으로 과거의 시대의 인간과 이 시대의 인간이 다르다고 이해하는 데서 오는 오해도 있다.


이러한 상대주의적 개념들은 철학 교과서에서만 찾아 볼수 있는 추상적인 것이 아니고 우리 젊은이의 일상속에 깊이 파고들어 와 있는 것을 경험하곤 한다. 주일 예배 시간에 말씀을 들을때, 필(Feel)을 받아야 소위 은혜를 받았다고 여기는 경향이라든지, 개인 큐티 시간에 마음에 평소에 와 닿았다고 느끼는 말씀을 편식하고 나의 상황에 쉽게 적용할 것은 뭐 없나를 먼저 찾는 경향등에서도 그 영향을 의심해 볼수 있다.


소그룹 나눔 시간에 객관적인 진리의 말씀 탐구의 열정은 식어가지만, 방향성 없는 말들만 무성하게 나눈 후 모임을 마무리 하고 친교 시간만 계속 늘어나는 경향도 염려해 볼수 있으며, 성경공부 시간에 나눈 말씀에 바탕하지 않는 주관적인 걱정만이 담긴 상황적인 기도제목을 반복해서 들을 때면 그런 생각이 더욱 간절하게 들곤한다. 더 나아가서 성경말씀을 구시대적인 글의 묶음으로 오해하여 절대적 진리를 상대적인 상황화의 논리에 전복시켜서 신구약 시대에 활동하시는 하나님과 인간, 오늘날 시대에 활동하는 하나님과 인간을 동일하게 보지 못하는 경우에서도 이런 경향을 엿 볼수 있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포스트모던의 상대주의에 빠져있기는 하지만, 그 상대주의적인 가치관이 궁극적인 만족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또다시 만족을 줄수 있을 것 같은 어떤 것을 찾아 신비주의를 추구하기도 하고, 종교적인 봉사에 몰입하기도 하며, 세속주의적인 가치관을 그대로 받아들여 우상시 하면서 신앙적으로 포장하여 합리화 하기도 한다.


세속화되고 다원화된 사회(4)에서 우리 젊은 청년들의 당면한 중대한 문제는 어떻게 하면 이러한 상대주의를 극복하고 의미 있는 삶의 규범과 가치를 회복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세상속에서 열린 겸손한 신앙을 유지하면서 열리기는 열렸으되 범람하는 세속주의와 상대주의의 물결에 떠내려가지 않고 상대적인 것을 매개로 하여 오히려 절대적 가치를 더욱 갈망할 수 있는 신앙과 삶의 본질적인 면을 회복되는 변화가 필요하다.


이런 젊은이들에게 해답이 될 수 있는 것은 결국 절대적인 성경의 해답이다. 허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러한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주어진 문제에 단답식 으로 피상적인 답을 달아가는 top-down approach식으로 해결되기 보다는, 오히려, 소그룹 운동을 통해 bottom-up approach 식으로 성경을 붙잡고 함께 씨름하며 진실된 관계적 만남을 통해 마음과 생각을 열고 각 속사람을 계속 변화시켜 주시길 원하시는 성령님께 더욱 의지하는 길이라 생각한다.


정리하면서 “이 세상에 절대 가치라는 것은 없다. 절대 기준이라는 것도 없다. 타자(他者)에 대한 개인의 평가나 감상은 그야말로 개인적이고 상대적인 평가일 뿐, 그 이상의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식의 귀로 들을 수 있는 말들을 젊은 이들의 공동체에서 얼마든지 찾아볼수 있다. 사실, 그 보다 더욱 간과하기 쉬운 것은 귀로는 들을 수 없지만 심혈을 기우린 마음으로만 들을 수 있는 젊은 영혼들의 존재적인 신음이다. 마음을 열고 듣고 예수의 마음을 품고 함께 고민하며 말씀과 기도에 사로잡혀 사랑으로 가까이 다가갈 때다. 이럴때에야 비로소 예수님안에서 만 찾을 수 있는 행복의 기준, 삶의 의미과 영원한 대답을 제시하여 줄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1) Geisler, N. L., Introduction to Philosophy
(2) Geisler, N. L., Ethics : Alternatives and Issues
(3) Lewis, C. S., The Abolition of Man, appendix
(4) Newbigin, Lesslie, The Gospel in a Pluralist Society

[이정희] 다원주의 세계에서 진리를 선포하는 자는 왜 겸손해야 하는가?

이코스타 2007년 5월호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주인으로 그리고 인생의 모범으로 삼고 사는 사람을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고 함께 그리스도인들이 된 형제 자매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으며 깨어진 주위 사람들과 자연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 하나님과 말씀과 기도로 교제하고 주위 사람들과 영적인 친교를 나누며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인 답게’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한다.


그 동안 우리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에 깊은 관심과 열정을 가져왔다. 매일의 말씀 묵상은 물론이고 귀납적 성경공부에 연역적 성경 공부까지 아마 이렇게 열심히 성경 공부하는 기독교인들이 한국인들 말고 또 있을까? 기도 생활도 그렇다. 매일 매일의 새벽 기도 모임은 다른 나라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 답다’라는 평가 항목에 있어서는 그다지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것 같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와 달리 이웃과의 관계에서는 ‘그리스도인 답지’ 않은 행동은 많이 해왔기 때문인 것같다. 다양한 가치와 논리가 공존하는 다원주의 사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이웃들과 그리스도인답게 대하는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 이 책의 기본적인 질문이다.


그리스도인이 세상과 관련을 맺는 방식에는 성전론, 현실주의, 정전론, 기독교 평화주의라는 크게 네 가지의 방식이 있다. 성전론은 세상의 악한 질서는 파괴해야 하는 대상이라고 대하는 태도이다. 세상의 악한 질서에서 행동하고 있는 주위 사람들은 악의 결과이자 원인자로서 이들은 악으로 대하고 선한 질서인 기독교로 끌어들여야 하는 대상이다. 때로는 적개시하고 때로는 그 의미를 감추고 접근하기도 한다. 현실론은 이 세상의 질서는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앙은 신앙, 그것이 모든 세상사를 지배할 수는 없다고 보는 것이다. 성전론과 현실주의는 기본적으로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아니다. 세상에 내재하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됨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며 모든 피조물을 지배하는 하나님의 질서도 부인해서는 안되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정전론은 세상 속에 있는 분명한 악한 가치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방식은 허용해야 한다는 것이며 평화주의는 그러한 악에 대해서도 그리스도가 보여준 무저항과 평화적인 대응만이 허용된다는 견해이다. 두 견해는 분명한 악에 대한 문제이며 그 외의 경우는 그리스도가 보여준 평화적인 태도만이 성서적이라는 데에 견해를 같이 한다.


그리스도인이 비그리스도인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 그리스도인은 비기독교적인 세계관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분명한 악을 제외하고는 겸손과 부드러움으로 그리고 한편 적극적으로 대화해야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예수님의 모범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해하려는 사람들에게도 끝까지 대화를 하셨다. 예수님의 태도가 신앙인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모범이 된다면 그분이 다른 사람들을 대한 태도, 특히 약자와 병자, 가난한 자들에게 다가가시고 진지하게 대화하는 태도를 본받아야 할 것이다.


둘째는 기독교 신앙의 보편성에 대한 믿음이다. 종교인과 비종교인은 서로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할 때가 많다. 다른 전제를 갖고 세상을 보기 때문에 대화하기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그 세계관은 현실적인 경험을 통해서 검증되고 확인되는 것이다. 기독교 세계관은 일관성과 진리를 추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세계관인 것이다. 그 보편성을 믿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찾도록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셋째는 대화가 평화와 화해를 만들어 가는 과정임을 인정하는 태도이다. 갈등과 충돌이 만연한 세상에서 서로를 향한 진심어린 대화는 그리스도가 말한 평화를 만들어가는 한 발자국이기 때문이다.


이상의 설명에 동의할 수 있다면 무례한 기독교는 옳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겸손한 선포자는 세상과의 관계에서 균형잡힌 세계관을 갖고 있는 사람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들이고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그렇다. 그것은 바로 겸손한 선포자의 모습일 것이다.

[김동민] 나도 김중배가 되고 싶은가? (물질주의)

이코스타 2007년 5월호


며칠 전 인터넷 기사를 보다가 어떤 나라에서 일어난 씁쓸한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내용은 이렇다. 30명이 모이는 어떤 교회의 현지인 목회자가 한국교회의 후원으로 1,000명을 수용하는 교회를 짓게 되었다. 건물뿐만 아니라, 교회에 필요한 물품까지 제공했다고 한다. 그러나 5년이 지나도 교인 수는 변하지 않았고 교회 건물이 들어선 곳이 그 나라에서 가장 큰 회교사원 근처인데다가, 지역적인 문제들을 일으켜 소송에까지 휘말리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기자는 이를 교회의 물질주의와 연관을 시켜 이렇게 꼬집는다.


“한국 교회가 여전히 이런 식으로 교회 건물을 지어주려는 근본적인 마음 자세는 바로 이 땅에 커다란 교회 건물이 있으면 교인 수는 자연스럽게 증가한다는 한국적 세속주의 교회 성장론에 근거한다.”(1)


사실 이런 문제는 중국교회 안에서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는 것과 매우 흡사하다. 요즘 한참 열기가 오르고 있는 Back to Jerusalem운동(2)을 비롯해서, 윈 형제가 쓴 “하늘에 속한 사람”이라는 책이 엄청난 화제가 된 이후로 중국교회에 대한 많은 관심과 기대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와 관련된 설교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 요지는 이렇다. 이제 세계 선교의 완성은 중국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고, 그리고 한국교회가 잠자는 중국을 깨우는 역할을 하게 된다는 말씀이었다. 그러나 지금 일부 중국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상황들을 보면 물질주의로 오염된 한국교회의 빗나간 열정이 초래한 부작용들로 인해 목회자들이 타락하고, 순수했던 중국교회들이 무너지고 있다는 소식이다. 참으로 안타깝기 짝이 없다. 실제로 일부 중국교회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외국의 대형교회의 영향력 안에 들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소위, 잘만 잡으면 교회 건축은 물론, 평생 사역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란다.


선교가 되었건 목회가 되었건 어떠한 활동을 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 열정을 이끄는 힘이 어떠한 세계관 위에 세워져 있는가를 확인하는 것이다. 성경에 기반을 두지 않아 물질주의, 성공주의와 같은 이데올로기에 오염이 되었다면 그 열정이 뜨거우면 뜨거울수록 오히려 복음은 더 가려지고 더 많은 사람이 화를 당하게 되는 법이다.(3) 그렇기에 아무리 큰 성과를 거둔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인간적인 정욕과 자랑에 근거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요일 2:15 16).


오늘날 교회 안팎에서 사람들에 대한 평가 기준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에만 목숨을 걸고 투자한다. 그렇기에 더 많이 가진 사람을 더 가치 있는 사람으로 인정한다. 헨리 나우엔이 소개했던 장애우 아담처럼 하나님이 지으신 인격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지고지순한 절대적 가치는 이미 물질주의의 희생이 된지 오래다. 이런 불균형의 시초는 인류가 범했던 첫 번째 실패의 시점에서부터 출발한다. 이후 인간들은 아담과 하와가 범했었던 그 열매를 추구하는 일에 최고의 우선순위를 두게 되었고, 이를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물론 성경의 권위까지도 말이다.


교회 내의 물질주의는 창세기 1장 22절에 나오는 말씀을 이론적 기반으로 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려야 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는데, 이 말씀을 가리키며 열매의 당위성만을 주장한다. 결국 이 말씀에 기초(?)하여 어떤 목적 달성을 위해서라면 그 수단은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도 된다는 성공주의로 번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미 그 폐해들의 증거는 세계 역사를 통해 증명되었고, 특히 오늘날의 유럽 교회가 말하고 있다. 복음의 근원지였던 유럽의 수많은 교회들은 이미 관광지와 술집으로 전락해 버린 지 오래다. 미국 역시 유럽과 마찬가지로 물질이 지배하는 가치관이 용인하는 편안함과 안락함으로 타고 복음은 점점 그 힘을 잃어가고 있다. 그 위기는 한국 최초의 선교사였던 언더우드 선교사의 손자인, 한 장로님의 고백을 통해서 절실히 느껴진다. 그 장로님은 미국의 한 유학생 교회에서 말씀을 전하며 이제는 한국이 복음으로 미국을 다시 살려야 한다고 말했다. 이 이야기가 어찌 한 사람의 안타까움에서 나온 고백에 불과하다고 하겠는가? 우리는 어떠한가? 영원을 지켜낼 사명을 가진 우리들이 이 세대를 지배하는 풍조 안에서 허물어지고 있는 기초를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을 것인가?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을 오염시키는 물질주의의 부조리와 그 현상들을 고발하고 성경적인 해법을 찾기 위해 많은 것들을 말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물질주의에 대한 본질적인 접근, 즉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증명하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관한 바른 이해이다. 우리가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그분이 성취하신 승리에 도취되어 그 권리만을 주장하며, 나아가 우리에게 마땅히 속한 것을 넘겨받는 것에만 그쳐서는 안된다. 이미 보장된 열매를 보되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감당하신,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신 십자가를 지고 고난에 동참하는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4)는 마우의 이야기에 절대로 공감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벧전 4:12-13)


경성 최고의 갑부를 따라갔던 심순애를 나무랄 사람이 오늘날의 그리스도인 중에는 얼마나 될까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오히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제 2의, 제 3의 김중배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대부분이 아닐까? 그런데 이런 심파극에서조차, 독기를 품고 사채업자가 된 이수일도, 사랑을 뒤로하고 돈을 따른 심순애도 결국 자살한다고 마는 비극을 우리에게 교훈하는데… 오늘 우리의 현실을 보면 아직 답답하다.


자신이 누릴 수 있었던 모든 권리를 포기했던 사도 바울의 삶을 생각해 본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들의 허점을 깨닫고 결코 소유할 수 없는 것임을 알았던 바울처럼, 우리의 생명이 마치고 하나님을 대면할 때 가지고 갈 수 있는 영원하신 말씀들로 건져 올려진 삶(5)이어야하지 않을까?




(1) 뉴스앤조이
(2) http://www.backtojerusalem.com/
(3) 물에 빠져 죽은 오리, 양승훈
(4) 무례한 기독교, 리차드 마우
(5) 참으로 신실하게, 이재철

[신선묵]하나님과의 친밀감과 시간관리

우리가 사용하는 시간에는 여러가지 종류가 있지만 크게 나누면 두가지 종류의 시간이 있는 것 같다. 하나는 시간을 사용하지만 그 시간을 통하여 힘과 에너지를 얻고 회복하는 시간이 있고 다른 하나는 시간을 사용함으로서 에너지가 소비되는 시간이 있다. 우리 삶 가운데서 이 두 가지가 다 있어야 한다. 그 어떤 종류의 시간은 좋고 다른 종류는 나쁘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시간 사이에 건강한 균형이 필요하다. 자신을 회복하고 자신에게 에너지가 주어지는 시간이 있고 그 시간을 통하여 축척된 힘과 에너지를 가지고 두번째 종류의 시간들 즉 힘을 들이고 에너지를 써가면서 해야하는 일들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주로 에너지가 축척되는 시간을 갖기 보다는 에너지가 소비되는 종류의 시간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경향이 있다. 이런 시간도 필요하지만 첫번째 종류의 에너지가 축척되는 시간이 없이는 결국 지쳐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쓰는 시간 중에서 에너지가 회복되고 힘을 도리어 얻게 되는 시간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사람마다 조금씩의 차이는 있지만 주로 운동하는 시간, 사람들과 순수하게 교제하면서 즐기는 시간, 홀로 조용히 휴식하는 시간,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드려지는 시간 등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것에 시간을 적절히 쓰고 있는가? 아니면 에너지를 소진만 하고 살아가는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최근에 “야베스의 기도”의 저자인 부르스 윌킨스가 쓴 책 “포도나무의 비밀”이라는 책을 읽어 보았다. 예수님께서 유언처럼 남기신 요한복음 15장의 말씀을 가지고 풍성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기 위해서 첫째, 죄의 가지를 치고 둘째, 욕심을 제어하고 셋째,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주제의 책이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삶 가운데 예수님께 나아가서 그 안에 거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 책으로 “친밀감”이라는 주제에 좋은 책이었다. 그는 이 책에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내 삶의 첫 우선 순위에 두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혹은 지도자로서의 나의 진정한 역할을 이루지 못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며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는 전문가가 되었지만 하나님의 친구가 되는 일에는 어쩐 일인지 풋내기로 남아 있었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 많은 기독교 사역자들에게 동감을 불어 일으키는 표현이 아닌가 생각을 해 보았다. 우리는 곧잘 그의 표현처럼 “하나님을 위해 일하고 행하는 분주함 속에서 우리는 종종 그분께서 함께 하시는 것을 단순히 즐거워하는 일에는 실패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갖고 계신 가장 중요한 목적은 바로 우리와의 교제라는 것을 곧 잘 잊어버리는 것 같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는데 제일 힘드는 것이 하나님께 구별된 시간을 드리는 것이다. 그런데 구별된 시간을 드리는데 가장 힘든 이유가 특별한 이슈가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무슨 문제가 있으면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문제가 특별히 없으면 그냥 그 시간을 넘어 뛰려는 경향이있다. 왜냐하면 바쁘고 할 일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이런 식으로는 깊은 관계를 만들어 갈 수가 없다. 그리고 문제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특별한 문제가 있던 없던 하나님께 시간을 드리고 나아가는 것을 통하여 진정한 의미의 친밀감 나의 문제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 중심의 깊은 관계를 쌓아 나갈 수 있는 것이다. 탈벗 신학교의 기독교 교육학 교수인 클라우스 이슬러는 “Wasting Time with God”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썼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이 시간의 낭비처럼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낭비하는 느낌이 들어서 시간을 버린다고 생각하고 하나님께 시간을 드리지 않으면 우리가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 속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그는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위해서 시간을 드리는데 있어서 “특별한 이슈가 없어도 좋습니다. 아니 사실상 그편이 더욱 좋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특별한 이슈가 없어도 꾸준히 하나님께 시간을 드리고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깊은 친밀감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친밀감이란 이유없이 함께 시간을 보내는데서 생겨난다. 사실 인간관계에서도 이런 것이 느껴진다. 사실상 나는 하루에 종종 이론적으로는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서 대화를 나누어야 하는데 나는 대화가 늘 이슈 중심이어서 특별한 일이 없으면 아내에게 전화하는 것이 무척 힘들다. 그냥 전화해서 이얘기 저얘기하는 것이 친밀감을 쌓아나가는데 좋을텐데 그게 잘 안된다. 일이 있어야 전화하고 또 일이 있을 때에는 그말만 하면 그냥 수다(???)를 떨지를 못한다. 나뿐만이 아니라 많은 남자들이 그럴 것이다. 그러나 부부관계도 문제 중심이 아니라 친밀감을 쌓아나가려면 (설사 내 생각는 이유가 없어도) 대화를 자주 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이 된다. 부부 관계에서도 이유없이 전화해도 괜찮다. 아니 차라리 더 좋은 것이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시간 이것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활력을 주고 능력을 주는 은혜의 시간이다. 우리 삶이 무척 바쁘지만 생명의 원천되시는 하나님께 나아가서 깊은 은혜 속에 하나님이 주시는 생기를 회복하고 늘 승리롭고 열매맺는 삶을 누리시기를 바란다. 특별히 이슈가 없어도 그냥 나가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우리에게 놀라운 은혜를 베푸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