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경]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이코스타 2007년 6월

A는 한국에서 고등학교 때 성당에 다니면서 막연히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힘든 유학생활 중에 하나님을 찾게 되었고 그러면서 자연스레 성경을 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요즘들어 가요대신 찬양 CD를 귀에 꽂고 다니며 찬양하기도 하고, 길을 걸으면서는 하나님과 대화하며, 말씀이 자꾸 읽고 싶어져 성경책을 책가방에 넣어가지고 다닌다고 하면서 성경공부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게 되니 너무 좋다고 인도자인 내가 좋아하는(?) 말만 골라하는 것이었다. 성경공부가 끝나고 집에 돌아가서도 큐티지의 말씀을 읽다가 궁금한 게 있으면 내게 불쑥 전화를 해서 이 말씀은 무슨 뜻인지 궁금하다며 설명을 해달라고 하곤 했다. 그러면서 다음 주에 할 큐티지는 언제 나오냐고 묻기까지 했다.


그러던 A가 박사학위를 위해 지원했던 학교가 되지 않아 속상해하더니 진로가 막히는 것 같다며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 왜 자신를 안 도와주시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리고, 슬슬 성경공부에 나오는 횟수가 줄어들게 되더니 얼마 안되서 들려오는 소문은 어느 형제와 사귀기 시작했다며 요즘 연애를 하느라 정신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 후로는 A가 미국에서의 醍?것을 정리하고 한국에 들어갈 때까지 A를 다시 볼 일이 많지 않았다. 어쩌다 만나도 A는 내게 미안하다는 말만 하고 긴 얘기는 하지 않았다. A의 신앙이 한참 성장하는 순간에 만나서 함께 나누고 기뻐하였던 때가 아스라이 느껴지면서 마음 한 구석이 참 많이 아파왔다.


B는 이미 교회에서 지도자로 섬기는 자매였다. 겉으로 보기에 그는 매우 신실하고 늘 말씀과 기도로 사는 것 같았다. 단지 조금 유별나게 보였던 것은 자신이 결혼을 하지 않아 불완전하다는 생각을 좀 많이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나이 또래 사람들이 결혼을 사모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은 욕구를 가지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B는 종종 결혼이 자신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말하면서 키크고 잘생긴 형제가 이상형이라고 말하곤 했다.


B를 알고 지낸지 몇 해가 지난 어느 날 밤에 B가 불쑥 나에게 찾아왔다. 그의 손에는 맥주 한 팩이 들려있었다. 나는 그동안 전혀 B가 술을 마시는 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매우 놀랐다. 아무말 없이 혼자 맥주를 마신 B는 갑자기 나에게 고백할 것이 있다는 것이었다. 한참을 망설이더니 지난 몇년간 아무도 모르게 사귄 남자친구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 모든 스토리를 적으면 소설 한편이 나올 정도로 기가 막힌 이야기를 다 털어놓더니 B는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왜 내가 이렇게 될 줄 아셨으면서 그 X와 만나게 하셨냐’고…… 그리고, 얼마 전부터 피우기 시작했다며 담배를 꺼내더니 거실에 내가 틀어놓은 찬양을 듣기가 괴롭다며 “저거 끄면 안되니?” 라고 물었다.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고해성사를 받는 신부의 괴로움을 상상할 수 있었다.


A와 B를 만나고 헤어지면서 가장 먼저 내 자신에게 했던 질문은 ‘내가 무얼 잘못했을까?’였다. A를 보면서는 ‘내가 말씀을 전한다, 그 영혼을 사랑한다, 기도한다고 하면서, 정작 그의 신앙이 저렇게 식어버리도록 방관하고 있었단 말인가’ 라는 자책과 함께, 매주 말씀을 보고 그 말씀에 능력이 있다고 선포했는데, 그 말씀을 들은 A는 정작 변화되지 않은 것 같아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 걸까?’ 라는 회의가 내 안에서 맴돌았다. 또, B를 보면서는 ‘B가 수년동안 교회에서 말했던 신앙고백과 전했던 말씀들(B는 성경공부를 인도했었다)은 무엇이었는가?’ 하는 무언가 크게 속고 살은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씁쓸하면서도 한편으론 가까이 살고 있었음에도 그 지경이 되도록 나에게 아무말도 못할 정도로 내가 부담스런 존재였나 싶어 B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서 더 많은 제 2, 제 3의 A, B들을 캠퍼스와 교회에서 만나게 되었다. 하나같이 신앙이 한창 성장하는 과정 중에 있었고 열심도 있었으나, 앞서말한 A와 B처럼 진로나 이성교제, 결혼의 문제에 걸려 결국에는 실망하거나 상처를 받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를 두려워하거나 원망하곤 했다. 나는 그들을 만나 대화하면서 단순히 그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권면을 하는 데도 한계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단순히 ‘하나님의 연단이니 견디라’며 달래거나, ‘당신의 죄때문이니 회개하라’고 말하는 것은 별로 소용도 없고 오히려 역효과를 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언가 좀더 “근본적”으로 해결해야할 문제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결혼을 한 뒤 얼마 안되어 성경공부 수련회에서 이성교제에 관한 세미나를 준비해 달라고 부탁이 왔다. 이제 갓 결혼한 내가 나와 나이 터울도 별로 안지는 이들에게 무엇을 전할 수 있을까 싶어 주제넘게 느껴졌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말씀을 전하고 싶은 열망(?) 같은 것이 생기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 결혼하기까지 조금 긴 기다림의 시간을 가지면서 나름대로 말씀을 붙잡고 고민했던 것들, 남편과 교제하고 결혼을 준비하는 동안에 체험했던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래서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 이삭과 리브가, 그리고 룻기, 에베소서 말씀 등등 결혼과 이성교제에 관한 말씀들을 묵상하면서 말씀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갑자기 성령님께서 로마서 12장 2절 말씀을 떠오르게 해 주셨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바로 이 말씀이야 말로 내가 전하려는 메세지를 그대로 담고 있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더 나아가 내가 고민하던 그 “근본적”인 해결의 열쇠도 이 말씀에 고스란히 담겨있다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아무리 말씀을 전한다 하고 또 듣는다 해도, 그 마음이 말씀의 능력으로 깨어져 새롭게 되지 않는다면 결국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과 똑같은 삶을 살면서 입으로만 “주님”을 찾는 연약한 종교인이 되고야 마는 것임을 많은 A와 B들을 만나면서, 또한 나 자신의 연약함을 접하면서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앞서말한 A와 B의 경우를 이 말씀에 비춰 다시 살펴보면 A의 경우는 하나님께 가까이 하고 싶은 열심은 있었지만, A는 세상의 가치, 즉, 유학을 나와서 이름있는 학교에서 번듯한 학위를 따고 한국에 들어가 좋은 곳에 취직하는 것이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성공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나름대로 가지고 있던 성공관에 손실이 왔을 때 그만 견디지 못하고 좌절하게 되었고 결국은 하나님에 대한 섭섭함의 벽이 쌓이게 되어 첫사랑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B의 경우 역시 말씀을 많이 아는 것 같았지만 세상의 것과 섞여 있던 그의 결혼관, 이성교제관은 꿈쩍하지 않고 있었다. 남자친구와 사귀면서 그의 영혼을 보고, 그의 신앙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외모와 능력에 매료되어 결혼도 하기 전에 자신의 모든 것을 준 댓가는 B의 인생에 지울 수 없이 큰 상처만 남기게 되었다.


말씀을 읽고, 듣고, 찬양을 하고, 기도를 한다해도 말씀 앞에 자신의 가치관과 세계관이 변화되지 않는다면 하나님 앞에 내어드리지 않은 바로 그 부분이 도리어 나에게 큰 걸림돌이 되어 삶에 적잖은 고통을 더하게 된다. 겉으로 보이는 문제들이 나를 괴롭히고 내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걸 막는 것 같지만, 사실 가만 생각해 보면 가장 큰 장애물은 그 말씀으로 수술을 받지 않은 나의 가치관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말씀이 나의 전인격을 다스리고, 나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뒤흔들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접하는 나에게 그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있다면 과연 내가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내려놓고 진지하게 그 분의 수술을 기다리고 있는지 돌아봐야할 일이 아니겠는가?


말씀을 전하는 자로서 내가 해야하는 일에 대해 많이 고민하는 요즘이다. 솔직히 조금 많이 지쳐있는 게 사실이다. 내가 지난 수년간 선포했던 말씀들이 과연 말씀을 전하는 나와 내가 마음에 품고 사랑했던 그 영혼들에게 어떤 변화를 주었는지 스스로에게 물으면서 괴롭기도 하다. 한 사람의 영혼이 말씀으로 변화되고 그 삶이 온전히 주님께 드려지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님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괜시리 하나님 앞에 서럽기도 하다. 그리고 갈증이 나기도 한다. 하나님의 말씀, 그 살아있는 말씀의 능력이 나의 삶을 온전히 변화시키고, 내가 선포하는 말씀가운데 임하기를, 말씀을 보는 나의 사랑하는 지체들에게 진정으로 임하기를 갈망하며 보기원하는 그 갈증이다.


하지만, 이러한 회의나 아픔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전하는 것을 계속해야하는 이유를 하나님께서 주셨는데, 그것은 캠퍼스나 교회에서 만나는 젊은 영혼들—아무리 그들이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는 것 같고, 기가막힌 행동을 한다해도—에게는 아직 소망이 있다는 것이다. 아직은 그들의 가치관과 세계관이 돌처럼 단단하게 굳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에게 말씀을 선포할 때 그 말씀으로 깨어지고 가치관과 세계관이 변화될 여지가 분명 70대 노인보다는 크다는 것이다.


이번 코스타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변화를 받아…”라는 주제로 열린다. 얼마나 시기적절하고 중요한 주제인가 공감을 하면서, 코스타를 통해 선포되는 말씀이 참석하는 모든 이들의 심령과 골수를 쪼개고 그 깊은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가치관과 세계관까지 뒤흔들어서 온전히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예비하신 풍성한 생명을 누리고 회복되는 역사가 임하기를 사모하게 된다. 그래서 나를 비롯하여 A와 B같은 지체들의 성공관, 결혼관, 이성교제관, 물질관등의 가치관들이 세상의 것과 분리되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게 되는 역사가 가득하게 되길 기도해 본다.

[권오승] KOSTA/USA-2007 연차 수양회를 기대하며

2007년 6/7월호

KOSTA를 섬기다 보면, “KOSTA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참 많이 받는다. KOSTA를 만난지 12년째가 되는 필자로서도 어떤 의미에서 매우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KOSTA란 무엇일까, 무엇이 KOSTA를 KOSTA 되게 하는가. 이 질문에 대답을 하기위해 딱딱한 파워포인트 슬라이드를 넘기며 설명을 할 수 있지만, 여러가지 내용을 정리해보았을때 사람들이 흔히 KOSTA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선입관과 매우 다른 KOSTA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KOSTA는 집회가 아니다” 라는 것이다.


집회가 아닌 운동으로서의 KOSTA


많은 사람들이 KOSTA를 여름에 인디애나폴리스와 시카고에서 여는 집회로 생각하지만, 사실 그것은 KOSTA가 원래 추구하고 있는 것과 다소 차이가 있다. 물론 KOSTA는 집회를 포함한다. 그러나 KOSTA는 집회라기 보다는 KOSTA의 핵심가치(core value)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만드는 운동(movement)이다. KOSTA가 집회가 아닌 운동으로 규정(describe)하는 것은 KOSTA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신다고 우리가 믿는 소망의 내용때문이다. 만일 KOSTA가 많은 사람들을 한곳에 모아 일회적인 집회를 통해 소부흥(mini-revival)을 경험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면 KOSTA는 집회로 규정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KOSTA가 꿈꾸는 것은 KOSTA에 참여한 청년-학생들이, (1) KOSTA가 추구하는 핵심 가치에 동의하게 되어 (2) 그 핵심 가치를 가지고 각자의 삶에 살 뿐 아니라 (3) 그 가치에 동의하는 사람들을 더 많이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4) 그러한 일들을 통해 그리스도의 주인되심을 인정하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더 많이 만들어 내고 (5) 그들이 몸을 담고 속해 살고 있는 피조세계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이 선포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 일을 가능하게 하는데 여름에모여서 함께 하는 집회가 매우 중요하지만, 그것이 KOSTA의 모든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집회가 아닌 KOSTA, 2007년에는


집회를 앞두고 왜 갑자기 집회가 아님을 강조하고자 하는가. 그것은 금년 주제가 갖는 특수성 때문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을 금년 KOSTA/USA의 주제는 “이 세대롤 본받지 말고 변화를 받아” 이다. ‘변화(transformation)’가 금년의 키워드이다. 우리가 원하는 진정한 변화는 우리가 알다시피 그리스도와의 만남으로 시작되는 성령의 일하심으로서만 가능하다. 그리스도인들을 조차도 대량생산하고 싶어하는, 효율성을 중시하는 풍조가 덕(virtue)로 여겨지는 시대에 이 집회를 통해서 효율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아 완전한(complete) 변화를 경험할 수 있으면 참 감사한 일이겠으나,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변화해 가는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 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번 집회를 통해서, 코스탄들이 진정한 변화가 얼마나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가 하는 것을 깊이 인식 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진정한 변화가 어떤 이들에게는 시작되는, 어떤 이들에게는 한단계 큰 도약을 하는, 어떤 이들에게는 새롭게 갱신(renew)되는 일들이 있기를 기도한다.


건강한 혼란과 무질서를 기대하자


집회를 전후하여 이번 인디애나폴리스와 시카고의 집회에 참석하는 코스탄들에게는, 결단의 기도 이전에, 뜨거운 찬양 이전에, 감격이 있는 말씀 이전에 올해의 주제를 붙들고 고민하는 일들이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고민의 시작은 바로 혼란과 시작되어야 한다. 혼란은 무질서이다. 혼란은 불확실성이다. 혼란은 미확정이다. 혼란의 상태에서는 아무런것도 기대할 수 없다. 오히려 혼란은 좌절하게 한다. 그런데 우리 자신들에게, 우리의 마음과 심령에 그런 혼란이 필요하다. 이런 혼란의 상태는 이 세대에서 벗어나기 위한 우리들 자신의 몸부림이 되어야 한다. 이런 혼란은 마음을 새롭게 하기 위한 첫 삽이 되어야 한다. 이런 혼란은 변화의 열매를 맺기 위한 씨앗이 되어야 한다. 유진 피터슨의 말처럼, 창세기 1:2(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니)의 혼란이 있어야 1:3 이후의 창조의 열매가 있는 것이다. 혼란으로 시작하여 열매와 결단으로 연결되는 집회가 되었으면 한다. 혼란으로 시작하여 새로운 마음과 창조와 질서로 끝맺음을 하는 코스탄들이 되기를 기도한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을 넘어서는 집회


그러나, 위에서 이야기한 여러가지 내용들이 그대로 이루어 진다 하더라도 그저 우리가 준비한 모든 것들이 순서대로 진행되어 우리가 예상한 것들만이 일어나는 집회라면 그것은 진정 우리가 바라는 집회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심지어는 위에서 이야기한 것이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아도, 우리의 예측과 생각이 모두 잘못된 것으로 드러난다고 해도, 그것을 너머서 더 크게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에대한 기대감을 우리가 포기한다면 이 집회의 주인공에 하나님이 아닌 우리 자신을 놓는 잘못을 범하게 되는 것일 것이다. 진정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기를 갈망하고, 그러한 변화에의 길에 들어서서, 다른 이들과 전 피조세계를 그 변화로 이끌어내는 KOSTA/USA-2007를 향한 하나님의 바람이, 이번 집회를 통해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일어나길 기도한다.

[신선묵]지도자와 적응력

물론 고난 자체가 유익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공적인 지도자들은 고난에 대한 바른 반응을 한다. 바른 자세로 임할 때에 고난도 유익이 될 수 있다. 반응이 중요하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지도자들은 고난을 통과하였고 지도자를 만드는 차이는 그들의 자세에 있다. 그는 강조하기를 “리더들은 다른 사람들을 좌절케 하는 사건과 관계로부터 도리어 의미를 창출한다. 심지어 혹독한 시련에 휘둘릴 때에도 리더들은 자신을 무기력한 존재로 여기지 않는다. 그들은 능력과 재능이 부족한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상황과 마주쳐도 그것을 뭔가 유용한 과정으로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워렌 베니스는 그의 책에서 인생의 단련기를 거친 좋은 사례로 시드니 리튼버그의 사례를 들고 있다. 리튼버그는 1949년 모택동 정부에서 함께 일했던 예전의 친구들에 의하여 스파이 혐의를 받고 수감되었다. 그는 감옥에서 총 16년을 보내었다. 첫 1년에는 심문받는 것을 제외하고는 완전한 어둠뿐인 독방에서 나머지 15년은 하루종일 환하게 전등이 켜져있는 곳에서 생활했다. 그런 끔찍한 상황 속에서 그의 마음 속에는 불현듯 어린 시절에 읽었던 네 줄의 시가 떠 올랐다고 한다.


“그들은 나를 가두는 원을 그렸다. 이교도, 반역자, 경멸할 자식이라 소리치며, 그러나 나는 사랑과 승리의 정신을 가졌다. 우리는 그들을 받아들이는 원을 그렸다.”


이 시 구절이 리튼 버그에게 생존의 열쇄였다. 고난이 주어졌을 때에 그것에 의하여 파멸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것을 통하여 의미를 창출해 내는 능력이 탁월한 지도자를 만드는 것이다. 리튼 버그는 고난의 피해자가 되지 않고 도리어 그 고난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미국 기업인들이 중국의 비즈니스에 도움을 줄 수 있게 하기 위해 컨설팅 회사 (리튼버그 어소시에이트)를 창립하고 운영하였다. 마치 원수를 원수로 대하지 않고 도리어 그 원수들을 더 큰 사랑으로 품어버리는 일을 한 것이다. 그들은 리튼 버그를 구속하기 위하여 원을 그었지만 리튼 버그는 그들을 다 포함하고 사랑하기 위한 큰 원을 그린 것이다.


풀러 신학교의 지도자학 교수인 로버트 클린톤 교수도 지도자들이 겪는 고난의 영적인 의미를 강조하고있다. 그는 지도자들이 겪게 되는 이런 시간을 “깊이있는 과정(Deep Processing)”이라고 이름하였다. 지도자들이 이런 어려움의 시간을 지나게 될 때에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믿음을 시험받게 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깊이 있는 과정”을 겪게 되는데 두 가지의 반응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하나는 그 고난으로 인하여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버리고 포기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른 종류는 그런 경험 속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고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는 지도자가 있는 것이다. 진정한 지도자는 깊은 과정을 지나가면서 좌절하고 포기하고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더욱 깊이 나가고 하나님의 마음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 하나님의 진정한 비젼을 품게되는 시간으로 삼는 것이다.


여러분들은 오늘 어떤 깊이있는 가정을 지나고 있는가? 인간 관계에서의 갈등, 질병으로 인한 생명의 위협, 미래에 대한 불확실에서 오는 두려움, 삶의 위기, 사업과 인생에서의 실패,… 이런 모든 시련들을 통하여 영적으로는 하나님께 더욱 가까워 지고 한 지도자로써 역량이 커지는 기회로 삼기를 바란다. 베니스는 “지도자로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외로운 단련기”를 보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고난이란 지도자가 되기위한 필수 과목인지 모른다.



기도의 삶을 위한 인간이해 – 김영봉 목사

본 기사는 2003년 KOSTA/USA에서 김영봉 목사가 ‘기도의 삶을 위한 인간이해’라는 세미나를 편집부에서 녹취한 것입니다. 2007년 집회에서도 멋진 세미나로 섬겨주실 김영봉 목사님의 강의를 기대합니다.


뉴저지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김영봉 목사입니다.(지금은 DC지역에서 목회하고 있다 – 편집부) 사귐의 기도라는 책을 냈는데 신학교에서 학생들이 자주 영적생활에 대해서 질문을 해올 때 상담을 해보면 상담을 충분히 하지 못하는 상황에 아쉬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상담후 돌아가서 가지고 갈 수 있는 신앙생활 안내서를 주고 싶어서 이 책을 썼습니다. 어제 소개된 오스왈드 챔버스의 주님은 나의 최고봉이란 책중에 기도는 훈련이 아니라 삶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도가 삶이라면 기도가 잘못되면 삶 전체가 잘못된다는 것이고 기도가 어려워지면 삶이 어려워진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도가 즐거워지면 삶이 즐거워지고 또 기도가 왜곡되면 우리의 삶이 왜곡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항상 기도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딸아이가 쉬지말고 기도하라는 성경구절을 보고서 무슨 뜻이냐고 묻길래 무슨 뜻이라고 생각하냐고 되물었더니 기도하다 쉬지 말라는게 아니냐고 그랬습니다. 쉬지말고 항상 기도하라는 것이라고 이야기해 주었더니 어떻게 24시간 항상 기도할 수 있느냐고 반문을 했습니다. 바울이 의도한 것은 삶 전체가 기도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삶 전체가 기도가 되게 하겠는가? 기도가 어렵지 않고 즐거운 일이 되겠는가? 찬송중에 ‘내 기도하는 이시간 그때가 정말 즐겁다’고 하는데 저는 오랫동안 기도하는게 힘들었습니다. 물론 기도를 위해서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랬지만 노동처럼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의무감에서 벗어나면 기도를 쉬었습니다. 누구도 보지 않는 곳에서 여전히 하나님과 시간을 함께 보내고 기도의 상태에서 하루종일 삶을 사는 것. 이것을 늘 즐겨하고 사모하는 상태로 바뀔 수 없을까 하는 것이 이 책을 쓰게된 동기입니다.

이 책에 다섯부분중 첫부분은 한국에서 가르치는 기도방식의 잘못된 사례를 제시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산타크로스냐? 이것은 헨리나우엔이 지적한 것인데 어린 아이들이 선물때문에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이유가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킨다. 기도가 만사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기도의 촛점을 다른곳에 두고 나를 잊기 때문에 기도의 경험이 문제가 되고 응답도 없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세상이 우호적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니 내 시야가 변하고 내 생각이 변하는 것입니다. 내가 변하기 때문에 세상이 변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촛점이 다른 사람,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변화시키는 것이어야 합니다. 세째는 기도는 하늘보좌를 움직인다. 기도는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일 수도 없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나의 보좌를 움직이는 것입니다. 네번째는 기도를 요청으로만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것들의 요청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앞에 나열하는 것은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학교에서 직책을 맡았을 때가 있었는데 학생이 임원에게 왔을 때에 요구사항만 나누면 인격적인 관계가 되지 않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사귐의 과정이지 요구조건을 나열하는 것이 아닙니다. 후안 까를로스 오티즈 목사님의 우리 기도의 대부분은 하늘나라의 잡동사니 우편물처럼 취급받습니다 라는 책에서 우리의 대부분의 기도는 junk mail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기도의 대부분이 버려지는 것은 우리가 기도를 잘 못해서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무엇이든 구하면 다 얻어진다는 생각입니다. 성경에 그런 말이 있지만 그 앞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예수의 말이 우리 안에 거하면 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가 설정이 된 상태를 이야기합니다. 초신자의 경우에는 가끔 그럴 경우가 있지만 그런 일이 우리에게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이와 같은 기도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의식을 수정하고 기도의 방법을 하나님과의 관계를 성숙시키는 방향으로 변화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잘못되는 이유중에 하나는 잘못된 신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생각할 때에 율법적인 하나님으로 생각을 해서 우리를 못마땅해하고 우리에게 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애걸복걸 부르짖지 않으면 우리에게 주시지 않는 분으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가 가르치신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아시고 더 좋은 것으로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나님 상을 우리는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유대교 신관으로 자꾸 돌립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나님은 유대인이 생각하기에 유약하고 무력하기 짝이 없지만 그분은 우리에게 선의를 가지시고 우리가 돌아오기를 끊임없이 기다리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이전에 하나님을 아바라고 부른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기 위해서는 유대인들의 멀리 계신, 율법적인 하나님 상을 바꾸어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나님상으로 제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두번째 기도가 잘못되는 이유는 인간에 대한 이해를 충분히 하지 못하고 막연히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성경에서 찾아보게 되면 심리학이나 철학에서 찾아보는 것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는 사실 정답을 낼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사물이 아니라 인격체이기 때문에 전체를 완전히 이해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인격은 개개인이 다르고 그 개인도 지금과 나중이 다르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정답을 이야기 할수 없습니다. 두번째는 인간이해는 인간이 주체이며 객체이어야 하는 모순이기 때문에 이것이 불가능합니다. 세번째는 인간에 대해 이해를 한다고 해도 인간의 언어로 풀어내는 과정에서 축소될수 밖에 없습니다. 칼융이 무엇을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을 단순화한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언어로 표현을 하면 모든 사람들에게 다르게 이해가 됩니다. 그래서 성경을 근거로 한 가설로 인간에 대한 이해를 말씀드립니다.

바울의 인간이해를 보면 인간 안에 세개의 자아가 있습니다. 헬라어를 우리말로 풀면 영, 혼, 육. 세 자아가 하나가 되어 활동하는 것을 몸이라 합니다. 바울이 많은 경우Body(몸)와 flesh(육)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히브리적 사고와 헬라적 사고를 통합하여 삼분법의 제 삼의 인간이해를 만들어 냈습니다. 히브리 사고에서는 인간을 분리될수 있는 존재로 이해하지 않고 하나로 이해했고 헬라적인 사고로는 인간의 영과 육이 분리가 된다고 이해했습니다. 영이 육속에 갇혀 있어서 구원은 영이 육에서 해방된다는 것이고 영혼불멸설로 발전을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영혼이 분리되어서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영과 혼과 육이 새롭게 되어서 전체가 영원히 산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헬라적인 이원적인 이해를 극복해서 우리의 영과 혼과 육이 전체가 새로운 차원으로 구원된다는 삼분법으로 이해했습니다. 영이라는 자아를 바울은 속사람이라고, 육을 겉사람이라고, 혼을 나라고 표현했습니다. 이것을 심리학자들은 육(ed), 혼(ego, self), 영(superego, the self)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동양전통 유교에서는 육을 수성이라 하고 혼을 인성, 영을 천명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 안의 세가지 자아에 대한 개념을 조금 더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육은 주로 본능적인 욕구를 이야기합니다. 육적인 성향을 부정적으로 많이 보아왔지만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따라 선할수도 악할수도 있는 것입니다. 자신을 잘 관찰하다보면 내가 원하지 않는 욕구가 나를 이끌어 간다고 알고 그것에 육체적인 본능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둘째로 혼에 대해 살펴보면 태어났을 때에는ego가 없습니다. 자라면서 자기보존의 욕구에 의해 자기를 만들어 갑니다. 혼의 자아는 우리에게 본래 주어진 것이 아니라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버지, 어머니입니다. 자아관을 형성하는 것이 엄마와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욕구가 엄마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거부될 때에 자신은 사랑받지 못한다는 의식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자아는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혼의 자아는 예수님을 믿기전, 믿은후. 혼의 자아상은 변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잘못된 자아상은 버려야 합니다. 세번째 영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만나기 위해 주신 접촉접입니다. 신약성경에는 하나님에 대해 명제적으로 진술한 것에 세가지인데 요한복음에 영이시다. 진리다. 사랑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말을 사마리아 여인에게 했는데 사마리아 여인은 하나님을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유대인은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야하고 사마리아 사람은 그리심산으로 가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예수님은 대답하시길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어디나 존재하신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교재할 수 있는 영역으로 주어진 것이 영입니다. 그래서 인간안에는 세가지의 자아가 활동하고 있고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느냐는 세자아의 관계에 달려있습니다. 정신분석학자들에 의하면 모든 정신질환은 세자아가 갈등하는데서 생겨난다고 합니다. 세 자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동심원 세개가 있고 맨바깥쪽에 영에 해당하는 것은 점선으로 되어있습니다. 동심원의 크기는 영향력을 말합니다. 제일 작은 동심원은 육, 그다음은 혼, 그리고 영이 가장 큰데 이 순서로 영향력의 크기가 되어 있습니다. 영이신 하나님이 우리의 영과 교제하면 진리를 영이 깨닫게 되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능력을 전이받게 되어있습니다. 육과 혼으로는 하나님을 만날수 없고 참된 진리를 알수 없으며 참된 사랑을 할수 없는 것입니다. 영향력이 미치는 방향이 영이 혼과 육을 통제하게 됩니다. 이러면 자아가 분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통합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 존재가 영과 혼과 육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끊임없이 교제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창세기 일장의 인간이 바로 이런 존재였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삼장의 인간은 타락한 인간입니다. 왜냐하면 선악과를 먹었고 욕구가 생겼고 뱀과 사귀었기 때문입니다. 뱀이 어쩌다 마주쳤는데 그냥 한번 만남에 넘어갔다면 하나님의 창조는 엉터리 작품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뱀과 꾸준히 사귐으로서 인간이 가장 많이 사귀어야 할 대상인 하나님, 배우자 그리고 동물인데 육적인 자아가 강해졌다는 것입니다. C.S Lewis의 책중에 사탄이 기독교인을 어떻게 넘어뜨릴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들을 적은 책이 있는데 거기에서 보면 인간은 신적인 존재로 솟아날수 있는 가능성과 동물적인 존재로 떨어질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누구와 사귀냐에 따라 신적인 존재로 될수도, 동물적인 존재로 될수 있다는 것입니다. 죄들은 죄의 열매를 이야기하고 죄는 뿌리, 본질적인 상태, 하나님과의 분리를 이야기합니다. 사귐은 사귐은 사귐의 대상과 같은 성향이 커지게 되고 사귐의 대상과 다른 성향은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타락한 이후에 영은 죽어버리고 육과 혼만 남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영이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사라집니다. 그러니까 육과 혼도 분열됩니다. 육과 혼이 싸워서 이기는 쪽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진리를 알수도 없고 사랑을 할수도 없습니다. 자연인은 이런 상태인데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면 우리 안에 바울이 이야기한 속사람이 생겨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속사람이 태어나는 것이 중요하지만 속사람이 태어나게 된 후에 영이 주관하게 되는 완전한 통합이 될때까지 자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속사람이 태어나게 되면 문제가 해결되기 보다 더 생겨납니다. 두자아가 싸우다가 세자아가 싸우게 되기 때문에 더 높은 차원의 진리를 요구하게 되는데 높은 차원의 부름과 낮은 차원의 부름사이에서 갈등하게 됩니다. 롬7장14절에 보면 영이고 속사람이 있고 속에 또다른 법이 있어서 나를 끌어내리게 되고 혼의 자아는 고통스러워 하게 됩니다. 차라리 안믿었더라면 이렇게 이야기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25절 후반에 보면 영이 막 태어난 우리의 상태입니다.

영이 태어난 상태에서 이제 영이 성장해 가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최고의 부름을 위해서 경주해 가야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영이 영이신 하나님과의 부단한 사귐를 통해서 자라나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귐의 기도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많이 하고 있는 요구의 기도의 대부분은 혼에서 나옵니다. 사귐의 기도가 되지 못하고 요구의 기도가 계속되게 되면 문제는 자아가 변하지 못하고 강화가 됩니다. 요구만 하고 그러다가 가끔 되는 것이 응답이라고 생각하면 나에게서 나오는 생각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착각하게 되고 기도를 통해 영이 성장해야 하는데 영은 성장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곤고한 사람의 상태에서 10년 20년 머무르게 됩니다. 진리의 자유함을 맛보지 못하고 진리의 능력과 사랑의 능력을 가지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귐의 기도로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는 이유는 우리가 영을 키워가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사귐의 기도를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못하는 것은 자아는 원래 자아보존의 원칙이 있기 때문에 죽어 사라지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자아가 죽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길 원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서 나의 자아는 사라져야 합니다. 죽어야 합니다. 내 기도가 혼에서 나오는 나의 요구만을 하는 기도는 하나님과의 만나지 못하게 되고 하나님을 피하면서도 정서적으로 기도했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이렇게 교회 생활하는 많은 사람들을 보면 자기의 욕구를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기도를 하면서 내 자아가 기도를 하는 것인지 영이 기도를 하는 것인지 돌아봐야 합니다. 기도는 일방적으로 내 요구를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침묵도 하고 묵상도 하고 내 영의 사람과 하나님의 충만한 경지까지 가지 않으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변하지 않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영성생활이 무엇이냐 생각해 보면 참된 영성생활은 영과 혼과 육 세가지가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영에만 관심을 가져서는 안되고 기도만 해서는 안됩니다. 영성생활은 생활의 일부가 아니라 생활의 전부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영과 혼과 육이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가 우리자아가 내놓는 요구의 기도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좋아하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변화하게 됩니다. 헨리나우엔은 기도에 대해 말하면서 참된 기도의 사람은 용기없이 못한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변화시킬지에 대해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 자신은 무의식중에 하나님에게서 떠나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면 변화하게 되는데 자아는 하나님이 변화시키게 하시기를 싫어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그물을 던지라고 한곳에 그물을 던지고서는 나를 떠나달라고 고백하는데 이것은 변화되기 싫다는 자아의 고백입니다. 나는 고치고 싶지 않습니다 라고 부정합니다. 누구에게나 그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 두려움이 우리가 깊은 기도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참된 성공은 하나님이 부르신 부름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100%열어놓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우리 삶의 나아가야 할 방향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전통적으로 요구하는 관습에 매여 기도하면 우리는 바뀌지 않을 겁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과의 사귐으로 기도를 하게 되면 기도가 행복해 집니다. 이렇게 기도가 바뀌어 우리의 삶전체가 바뀌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금은희] 열한번째 코스타를 기대하며

매년 코스타 첫날 광고 시간에는 항상 통계 발표가 있다. 어느 주에서 가장 많이 왔는지, 어느 나이대가 가장 많이 왔는지, 평균 연령이 얼만지, 남녀 성비, 기혼자와 미혼자의 비율 등등… 그런 통계 가운데 꼭 등장하는 코스타에 가장 많이 참석한 숫자도 공개 된다. 작년 코스타에서 나는 드디어(?) 기록을 세웠다. 10번을 참석한 나로서는 이시간이 꼭 영광스럽진 않다. 강사도 아니고, 학생도 아니면서, 뚜렷한 직장도 없는 나는 남들은 평생 한번 가볼까 말까 하는 코스타를 10번이나(?) 다녀온 것이다. 세번은 싱글 시절, 네번은 유학 시절, 그리고 나머지 세번은 남편이 미국에 직장을 잡은 후다. 두번은 바쁜 남편 덕에 남편도 없이 아이들 데리고 혼자 다녀 오기도 했다. 이렇게 나는 한마디로 코스타 팬이다.


10번을 다녀온 코스타 팬으로서 그 소감을 말하라면 나는 한마디로 “부끄러움”이라고 표현하고싶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10번을 갔는데 늘 은혜만 거저 받아 먹고 돌아온 발걸음이었다. 중보 기도 팀에 들어가 봉사 한 것도 아니고, 자봉도 거의 신청을 못했고, 또 조장도 작년에 딱 한번 섬겼다. 그런데 그때마저도 정작 조장을 맡아서 섬긴다고 했지만 오히려 부끄럽게 다른 조원들에게 도전을 더 많이 받고 도리어 섬김을 받고 왔다고나 할까? 그러니 내가 코스타에 기여한 바가 전무하다. 이렇게 난 아무것도 안한채로 뻔뻔하게 열번을 코스타에 다녀 왔노라고 공개할 입장도 아니다. 참으로 부끄럽다.


5년전 남편이 유학 시절을 마치고 이제는 코스타에는 발걸음을 못하게 될거라고 단정 했었다.그런데 친구의 권유로 다시 남편도 없이 만용을 부리며(?) 주부로서 처음으로 두 아이들을 데리고코스타에 4년전부터 발길을 돌렸다. 이제 7번도 모자라 아이들까지 떠 맡기는 참 한심한 코스탄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남편 없이 간 코스타에서 나는 가장 많은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다. 나는 도저히 발을 뺄 수 없는 코스타 폐인이(?) 되고 만 것이다.내가 꼭 코스타에 가야하는 이유 중에 또 하나가 있다. 코스타는 아이들 때문에라도 가지 않을 수 없는 우리 가족의 여름 휴가(?)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열살, 여섯살짜리 우리 아이들은 나보다 더 지독한 코스타 팬이 되고 말았다. 피는 못 속이나? ㅎㅎㅎ


아이들은 여름이 다가오면 코스타를 손꼽아 기다린다. 세상에 어떤 훌륭한 캠프를 가도 코스타와는 비교를 할 수가 없다고 한다. 올 여름에는 공교롭게도 시아버님 칠순이 겹쳐져서 5년 만에 한국에 방문하는 계획이 잡혔다. 11번째 코스타를 가게 될 계획이 무산 된 것이다. 이 소식을 아이들에게 전하자 아이들은 몹시 실망하면서 한국에 안가고 코스타에 가겠다는 어이없는(?) 반항까지 하는 사태가 되었다. 이렇게 우리 가족을 사로 잡는 코스타…. 우리 가족이 꼬박 일년을 기다리는 영의 휴가다. 세상의 휴가가 줄 수 있는 편한 잠자리, 입맛에 꼭 맞는 음식, 재미있는 볼거리등이 없어도 언제나 그런 세상적인 휴가와는 비교할 수 없는 만족과 기쁨을 주는 코스타…


내 자신 아무것도 코스타를 위해서 한 것은 없지만 가장 많은 기록을 세운 코스탄으로서 나는 맘껏 코스타를 자랑하는 것도 귀한 일일 것 같아 용기내어 이 자리에 처음으로 코스타를 공개적으로 홍보 하기로 맘 먹었다. 10년 코스탄으로서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이라고 느끼기에…그리고 그이상 지금은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없는 것 같기에…


지금은 우리 교회에서 코스타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보이면 나는 누구보다도 침을 튀기며 열성적으로 코스타를 홍보한다. 평생에, 그것도 나이 마흔을 넘기면 좀 다녀오기 쑥스럽기 때문에 (하지만 은혜의 자리에 나이가 무슨 상관이랴 ) 누구에게라도 나는 단한번의 여름 휴가라도 코스타에서 보낼 것을 권면한다.


무궁 무진한 간증 거리가 평생에 남게 되고, 아이들에게서 맘껏(?) 자유로울 수 있고, 아이들도 부모를 떠나 영 육으로 많은 즐거움과 기쁨을 얻고, 한국에서도 뵙기 힘든 좋은 목사님들, 선교사님들, 교수님들, 그리고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을 같은 자리에 공짜로(?) 맘껏 만나고 함께 은혜를 나눌 수 있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도 코스타는 나에게 많은 도전을 준다. 신앙의 대선배들을 만나게 되고, 동역자들을 만나 위로 받게 되고, 신앙이 어린 형제 자매들을 세워주는데 한 몫을 할 수 있다는 것… 교만일 수도 있지만 10번의 코스타와 함께 감히 나는 내 신앙 인격도 성숙해져 감을 느낀다.


작년에 열번째 코스타를 다녀 오면서 다시 코스타에 갈 수 있을까 아쉬운 마음이 있었다. 내가 은혜 받자고 남의 자리를 (학생 신분도 아닌데..) 빼앗는 건 아닌가하는…10번을 가서도 선교사로 헌신한 적도 없는 부끄러운 내 모습과 만나면 괴롭기도(?) 하지만…어린이 코스타에 헌신하는 분들께 죄송해서 아이들이 얼른 자라서 칼리지 코스타에 보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기도 한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내 이민 생활에서 코스타는 감히 상상할 수 없이 많은 부분을 차지해왔다. 믿음을 알게 했고, 섬김을 배우게 되었고, 은혜의 도가니에 빠뜨려 주고, 내 영적 생활의 기둥같은 역할을 해왔다.


그래서 내 주변의 모든 형제, 자매들에게 나는 코스타 수다를 멈추지 않기로 했다. 지금은 감히 열한번째 코스타에 꼭 가겠다는 말을 선뜻 할 수가 없다. 우리 가족 때문에 행여 더 은혜 받을 한 가족이라도 이 은혜의 잔치에 못오게 되는 일이 생기게 될까 두려운 마음에… 그러나 우리 아이들이 내년 이맘 때에 코스타에 가겠다고 조르면 나는 또 슬그머니 맘이 약해질지도 모른다. ㅋㅋㅋ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돌을 던져도 난 여전히 코스타의 신기록을 세워갈 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