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주희] 자존감을 높이기 위하여

자존감은 어린아이에서 시작하여 어른에 이르기까지 늘 따라다니는 신앙의 중요한 이슈이다. 낮은 자존감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상처는 가족 및 여러 관계에서 일어난 아픔이 원인이 된다. 또한 상처의 치료방법으로 강조되는 내적치유는 주로 상담과 기도에 의존한다. 모두 의미 있는 접근이다. 하지만 낮은 자존감의 원인에는 상처만 있는 것이 아니며, 자존감 회복을 위해 할 수 있는 것도 상담과 기도만 있는 것은 아니다. 다른 중요한 요소들도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한국 교회는 자존감이라는 주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상처와 내적치유만 지나치게 강조한 면이 없지 않다. 결과적으로 진정한 자존감의 회복은 이루어지지 않고 상처와 내적치유를 각각 한손에 부여잡은 채 여전히 자신의 문제 속에서만 맴돌고 있는 것이다. 신앙의 진보, 인격의 성숙, 이웃을 향한 적극적인 섬김을 이룰 내적 에너지와 여유가 없다.

그렇다면 자존감의 온전한 회복을 위해 반드시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들은 무엇일까? 도덕성, 문제해결능력, 그리고 사랑의 삶이다. 이 세 가지는 자아개념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치고 있음에도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것들이다. 어떻게 보면 상처는 이미 지나간 과거이지만 위의 세 가지는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결정적인 것들이 된다.

첫째로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도덕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예배를 통해 아무리 하나님이 우리를 귀하게 보시고 사랑하시고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분이라고 강조하고 “아멘”이라 화답한다 할지라도, 불륜의 관계를 맺고 있거나 포르노 컴퓨터에 중독이 되어 있고 혹은 돈에 있어서 투명하지 않다면 그 사람의 자존감은 결코 높아질 수 없다. 아무리 하나님의 사랑과 가치를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이려 해도 머리에 겉돌 뿐, 그런 행동을 그치기 전에는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자신이 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미국의 정신과 의사들이 불륜을 가진 우울증 환자들을 위해 순결요법을 사용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우울증환자로 하여금 불륜의 관계를 청산하게 하고 아내에게 고백하여 용서를 구하게 했을 때 비로소 그 환자가 마음에 깊은 평안을 느끼고 우울증으로부터 회복된다는 것이다. 비록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았고 혹은 다른 사람들도 이런 행동을 하고 있다고 해도 하나님과 자신을 속일 수는 없는 것이다. 도덕적으로 떳떳하지 못한 행동을 하는 자신을 결코 사랑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남의 페이퍼를 베껴 A+를 받았을 때 진정으로 자신이 실력자임을 인정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반대로 유혹을 이기거나 남들 다 하는 편법과 불법이라 할지라도 굴하지 않고 합법적인 행동을 했을 때에는, 누가 알던 알지 못하던 상관없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나는 떳떳함과 당당함으로 인해 자기를 사랑하고 존중하게 된다. 더욱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칭찬을 느낄 때에는 말 할 수 없는 기쁨과 자랑스러움이 솟아날 것이다.

둘째는 문제해결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매일 일상생활 가운데 일어나는 크고 작은 문제들을 잘 이해하고 잘 해결하는 것은 자존감에 큰 도움이 된다. 만약 여러 상황과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문제와 갈등들을 잘 인식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제대로 해결하지도 못한다면, 자기에 대한 실망과 좌절로 인해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우선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에 필요한 실력을 쌓아야 한다. 학생으로서 혹은 직장인으로서 혹은 가족 구성원으로서 거기에 합당한 성실과 실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실력이 없으면 실수와 실패하기 쉽다.

또한 문제해결능력에는 지혜가 필요한데, 지혜란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것을 말한다. 구약과 신약 모두에서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중요한 과업으로 규정하고 있다.(롬12:2) 뿐만 아니라 무엇이 옳은 것인지, 무엇이 그른 것인지에 대해서는 말씀 안에 너무나 분명한 교훈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문제해결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시고 무엇을 옳다고 하시는지 또 무엇을 나쁘다고 말씀 하시는지에 대해 분명히 알고 지키는 삶이 중요하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곧 지혜의 근본이라. 그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좋은 지각이 있나니”(시111:10)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사랑의 삶이다. 사람들을 이해하고 용납하며 섬기고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넉넉하게 하고 풍요롭게 한다. 또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게 한다. 반대로 사람들을 미워하고 해치며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 조종한다면, 우리 마음은 불만과 비난 그리고 분노로 가득할 것이다. 불만과 비난으로 가득한 나 자신을 사랑하기는 어렵다. 결과적으로 사랑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자존감이 높아질 것이다. 반대로 미워하는 사람이 많고 못 마땅한 사람이 많을수록 자존감은 낮아진다.

하나님은 우리가 스스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며 살기를 원하신다. 비록 지난 과거에 많은 아픔과 상처가 있었을지라도 그것을 넘어서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다. 바로 그분의 섭리대로 사는 것이다. 하나님을 존중하여 그분의 섭리대로 산다면, 결국 우리는 자신을 존중하게 되고 자존감은 높아지게 되어 있다.

[최주희] 사랑하며 죄를 보며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은 ‘사람을 향하신 주님의 사랑’을 더 깊이 발견하는 축복을
가져다준다. 동시에 사랑하는 과정에서 발견하게 되는 ‘자신의 죄성’에 당황하기도 한다. 결국 사랑은 우리에게 하나님 마음을
발견하는 기쁨을 주기도 하지만 깊은 내면의 성찰도 가져다주어 우리를 성숙케 하는 것이다.

민수(가명)는 고아원에 있는 아이로 오랜 기간 우리 가정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마음만큼 자주는 아니지만 정기적으로 우리 집에 와서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명절을 같이 지내기도 했는데 그 아이와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지금은 군대 간 아들 진호가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었는데, 새벽녘에 갑자기 ‘쿵’하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 나 침대에서 떨어졌어!” 아이의 방에 달려가 안아주며 “저런 놀랬지, 다친 곳은 없어?”라고 묻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스쳤다. ‘주님! 고아들은 이런 때 누구를 부릅니까?’ 물론 박한 재정으로 고아원에 침대를 설치하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만약 그들이 생각지도 않은 어려움과 놀램을 당할 때 과연 누구를 부를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 날 밤 마음의 아픔을
느끼면서 비로소 우리에게 고아와 과부를 도우라고 부탁하신 주님의 심정을 조금 알 수 있었다. 후에 진호보다 1살 어린 민수를
만나게 된 것이다.

민수를 만난 후 처음 맞이하게 된 어린이 날이었다. 무슨 선물을 할까 망설이다가 직접
물어 보았는데, “장난감이 가지고 싶어요!”라며 기대에 찬 얼굴이었다. 우리 네 식구는 가까운 백화점에 갔다. 마침 대목이라
장난감 코너에는 물건이 산더미처럼 쌓였고 아이들이 북적거렸다. 민수는 정신없이 이 물건 저 물건 만지고 있는데 점원 눈치가 보인
나는 그의 귀에다 살짝 “빨리 골라”라고 말했다. 그때 남편이 나의 손을 슬그머니 뒤로 당기며 “그냥 내버려둬. 지금 선택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고 있는 거야. 언제 이런 일이 있었겠어? 모든 것이 다 자기 것 같은 기분일 텐데…” 드디어 골랐다.
그런데 3만 5천원! ‘주님, 너무 비싸요. 진호도 그렇게 비싼 것 안 사줬는데요.’ 주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그래,
비싼 것 안다. 하지만 나는 내 아들 민수에게 그것을 선물해 주고 싶구나!’ 쇼핑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주님께 참 감사했다.
민수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따뜻한 마음을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민수는 내 눈에 ‘왕이신 하나님의 아들’로 보였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그와의 만남이 항상 낭만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어떻게든 숨겨 버리고
싶은 나의 마음 속 깊은 곳의 욕심, 이중성과 위선, 사람에 대한 편견, 희생하고 싶지 않은 마음 그리고 끊임없는 계산들이 주님
앞에 환히 드러나 수치심과 실망감에 몸서리쳐질 만큼 나 자신이 밉기도 하다.

민수가 초등학생 때 일이다. 여름방학 중 며칠을 함께 집에서 보내는데, 어린 민수는
더위에 자기 몸 관리를 잘 하지 못해 온몸에 모기가 문 자국과 긁어서 흘러내린 진물로 얼룩져 있었다. 집에서 깨끗하게 샤워를
시킨 후 큰 수건으로 몸을 닦으려 하는데 어쩐지 우리 가족이 사용하는 수건을 그의 몸에 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별도리 없이
꺼림칙한 마음으로 닦아주었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들려니 자꾸만 낮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주님은 죄악으로 얼룩진 나를 위해 그
큰 희생을 감당하시며 그래도 사랑한다고 지금까지 나를 안고 보호해 주셨는데… 주님 앞에 엎드려 깊은 회개의 기도를 드렸다.
은혜를 모르는 교만하고 가증스러운 내 모습에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하지만 부끄럽게 하셔서라도 나를 겸손하고 성숙한 자로
만들어 가시는 주님의 포기하지 않으시는 인내가 감사할 뿐이었다.

사람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은 결코 일방적인 것이 아닌 것 같다. 주님과 나 그리고
사랑해야 할 대상, 이 삼각관계 속에 부딪히고 깎이며 채워지고 누리는 사랑의 역동이다. 이 과정 속에 우리는 사랑을 보며 또
죄를 보게 된다. 그래서 더 큰 은혜를 발견하고 누리게 되나 보다.

[최주희] 작은 섬김 큰 열매

10년 정도 여러 명의 개척교회 목사님 자녀들에게 영어공부를 가르친 적이 있다. 개척교회 목사님들의 빠듯한 재정으로는 남들 다하는 영어 과외공부 시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어를 가르친 아이 중 특별히 기억나는 재미난 아이가 있었는데 바로 성환(가명)이다. 성환이는 성격이 배우 밝고 귀여운 아이였지만 공부 중에도 일어나 여기저기 움직이고 숙제도 자꾸만 잊어버리곤 했다. 여러 말로 타일러 보지만 잘 먹히지 않아 좋은 방도를 궁리하였다. 그것은 성환이가 바람직한 행동을 할 때마다 그것을 포착하여 마음껏 칭찬하며 숙제 해 올 때마다 예쁜 스티커를 공책에 붙여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스티커가 20개가 모이면 문방구에 가서 평소에 사고 싶었던 3천 원 정도의 물건을 사 주는 것이었다.

성환이는 이런 방법을 너무 좋아했고 덕분에 숙제도 열심히 했는데, 어느 날 스티커 19개 모은 공책을 잊어버렸다며 마구 우는 것이었다. 나는 성환이 말을 그대로 다 믿어주고 새로운 공책에 해 온 숙제를 점검한 후 예쁘고 큰 스티커 하나를 공책에 ‘꽝’ 붙여주었다. 바로 20번 째 스티커였다. 그리고 우리는 신나게 곧바로 문방구로 갔다. 속상한 얼굴에서 환한 밝은 모습으로 바뀐 성환이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후에 성환이는 공부도 잘하고 착한 어린이로 칭찬도 많이 받았는데 어느 날 엄마에게 그 이유를 “영어 선생님이 나를 잘 가르쳐 줘서 그래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물론 그 말 그대로 나 때문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성환에게 조금은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겨우 일주일에 한번 하는 영어 공부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작은 섬김을 큰 열매로 이루셨다.

 
김 집사님은 모시고 살고 있는 시어머니와 관계가 매우 좋지 못하였다. 양쪽 모두 피해의식과 억울함으로 서로에 대한 분노와 원망이 가득했다. 그런데 어느 날 안타깝게도 시어머니가 말기 암이라는 진단을 받게 되었다. 이런 엄청난 통보 앞에서도 두 사람의 마음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어떻게 이 관계를 도와야 할지 몰랐지만 일단 일주일에 한번 씩 김 집사님의 시어머니를 방문하기로 하였다. 매주 금요일 오후 구역 예배를 마친 후 발걸음을 김 집사님 집으로 향하였다. 누워 계신 할머니에게는 주로 과거에 있었던 행복하고 아름다웠던 시절을 회상하는 질문들을 하였다. 예쁘셨을 젊은 시절 이야기, 학창 시절의 추억, 잘 자라주는 손자들 이야기, 신앙을 가지게 된 계기, 하나님 이야기… 뼈만 남은 앙상한 얼굴이셨지만 이런 이야기를 할 때면 얼굴에 화색이 돌고 행복한 모습이 역력하였다.

며느리 김 집사님에게는 한 가지 부탁을 하였다. 매일 시어머니에게 두세 번만 말을 건네라고 하였다. 예문까지 만들어 주었다. “어머니 날씨가 참 화창한데 거실에 나오실래요?” “오늘은 밖에 비가 오네요.” “특별히 드시고 싶은 음식 있으세요? 만들어 드릴께요.” “이번 주는 아이들 시험 기간이에요.”…

이렇게 시간이 흘렀다. 어느 날 김 집사님으로부터 급한 연락이 왔다. 어머니께서 소천 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소천하시기 전 시어머니가 친정어머니에게 전화하여 귀한 딸 데리고 와서 너무 고생시켜 미안하다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며느리 김 집사님에게도 “고마웠다.”며 마음을 전하셨다 했다. 그동안 가졌던 서로에 대한 앙금은 눈 녹듯이 사라지고 훈훈한 정만 남아 있을 뿐이다. 장례식장을 향하는 나의 마음은 감사로 가득했고 발걸음은 가벼웠다.

 
위에 소개한 성환이나 김 집사님 경우 모두 큰 희생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것으로 그저 일주일에 한 두 시간 정도 소요될 뿐이다. 다만 따뜻한 마음으로 사람들을 섬기며 살고 싶은 소망만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하나님은 이런 작은 섬김을 기다리고 계신다. 그리고 그 섬김을 기쁘게 받으시고 큰 열매로 되돌려 주신다. 이것이야 말로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하는 가장 큰 ‘기적’이 아닐까?

[최주희]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훈련

나에게는 중증 뇌성마비 장애를 가진 남동생이 있었다. 출산 시 호흡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고 신생아 황달을 심하게 겪으면서 장애를 가지게 되었다. 동생 정원이는 평생을 누워만 있었으며, 소변과 대변을 받아내야
했고, 밥도 안아서 먹여주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언어 장애도 심해 자신의 의사를 말로 표현할 수 없어서 그저 Yes, No 만
눈치로 표시하였다.

정원이가 10살 되던 해 까지 어머니는 그를 치료하기 위해 정신없이 방황했었다. 좋다는
의사, 좋다는 약, 좋다는 종교는 다 거치며 동생의 회복을 위해 온 정성을 다하셨다. 아직도 내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것이
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의 일로 기억되는데, 우리가 대구에서 살 때 어머니는 추운 동지에 팔공산에 올라가 찬물로 목욕을
하시고 불공을 드리셨다. 그리고 집에 오신 후 온몸을 쏘아대는 추위에 견딜 수 없어 다리미로 다리를 찜질하셨는데, 퇴근 후 이
모습을 보신 아버지가 너무 안타까워하시며 서로 껴안고 우셨던 모습이 떠오른다. 어머니는 동생이 10살 되던 해에 애쓰시던 모든
것을 그만 두시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하셨다.

정원이는 온 가족의 사랑 속에 밝은 모습으로 가정 모든 일에 우선순위를 차지했었다. 예를
들어 TV 프로그램 선택권이 항상 정원이에게 있었으므로 서로 그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려고 했었고, 자장면이 먹고 싶을 때에도
정원이를 꼬이면(?) 되었다. 하다못해 설거지 당번을 누구에게 명하는지도 모두 정원이에게 달린 일이었으므로 우리 세 자매들은
그에게 잘 보이려고 아부(!)했었다. 우리는 이런 일들을 매일 재미있고 코믹하게 반복했으며 이로 인해 많이 웃기도 했다. 손님이
오시거나 친척들이 방문했을 때에도 우리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들을 정원이에게 먼저 인사시켰다.

특별히 동생을 향한 부모님의 사랑의 깊이는 아직도 내 마음에 남아 나의 생각과 삶에
영향을 준다. 친척과 주변의 사람들은 혼자 앉을 수 없고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음식조차 먹을 수 없는 동생을 큰 골칫덩이라고
했지만 부모님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 그분들의 가장 큰 소원은 바로 당신들이 돌아가시기 하루 전에 동생이 세상을 뜨는
것이었다. 즉 신체적인 어려움으로 혼자 살아갈 수 없는 그를 두고 눈을 감을 수 없으며, 동시에 그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 능력도 없이 오히려 고통만 안겨주는 아들을 향해 “너 없이는 하루도 못살아!”하시며 짙은 애정으로 평생을
대하셨다.

정원이는 내가 하나님을 믿은 후 처음으로 전도한 사람이기도 하다. 교육을 전혀 받지 않고
제한된 환경에서 지낸 동생이었지만 복음을 듣고 주님을 영접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에는 어떤 불리한 조건도 막힘이
되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다. 20살이 되던 해, 동생 정원이는 어처구니없이 감기로 주님 곁에 갔다. 나중에 안 사실은 중증
장애인의 경우 저항력과 면역이 떨어져 엉뚱하게 감기나 설사로 죽게 된다는 것이었다. 동생이 주님 곁에 갔을 때 온 가족은 너무나
슬펐다. 특히 여동생은 자기도 정원이 따라 죽겠다며 그의 몸을 부둥켜안기도 했다. 또 아버지께서는 천국에서 마음대로 뛰어다니라고
예쁜 운동화 한 켤레를 사서 평생 걸어보지 못했던 동생의 관에 넣어 주셨다.

정원이를 향한 우리 부모님의 사랑은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또 다른 차원에서
발견하게 한다. 할 수 있는 것 하나 없이 늘 부모에게 짐이 되고 어려움만 안겨주는 그 아들을 향해 “나는 너 없이는 하루도
못살아!” 말씀하시며 짙은 사랑을 보이시는데, 하나님의 사랑은 그보다 얼마나 높고 깊으신지…

사람을 대할 때 마다 연습을 한다. “하나님은 이 사람을 어떤 눈으로 보시나요? 저도
그렇게 보게 도와주세요.” 그리고 예수님의 얼굴을 그 사람의 얼굴에 오버랩 시켜본다. 이것은 때로 하나님처럼 사람을 사랑하고
싶은 나의 ‘안간힘’이고 ‘절규’이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능력이 없음을 발견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무시 하고 싶고 하찮게 여기고 싶은 사람들이 가끔 있다. 더욱이 나에게 어려움을 주고 상처를 주는 사람들에게는 그의
가치와 존엄성조차 평가절하 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때마다 십자가 앞에 엎드려 죄를 고백하며 사람을 귀하게 여기시는 주님의 눈과
마음을 구한다.

인간의 가치는 그 사람이 무엇을 가지고 얼마나 행할 수 있느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이 어떠한 의미와 가치를 개개인에게 부여해 주시느냐 에 달려 있을 뿐이다. 동생 정원이를 통해 인간을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더 깊이 깨닫게 된다. 내 평생 지치더라도 끝까지 해보고 싶은 훈련은 바로 “주님의 눈으로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훈련”이다.

[최주희]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정의하고 논하려고 한다면 아마 밤을 새워도 다 정리하기 어려울 것이다.
어린아이에서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평범한 성도에서 목회자나 신학교 교수에 이르기 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보는 관점은 다양하고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역사와 문화를 넘어서는 초월적인 하나님의 존재를 생각할 때 찬송가 가사처럼 바다를 먹물로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언급할 때 우리의 한계를 넘는 깊음과 넓음을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오늘 날 한국기독교를 바라볼 때 한 가지 염려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너무 한 면으로만 치우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즉 용납과 용서, 필요를 채우시고 보호해 주심, 장래를 인도하시고 축복해 주심 등에 대해서는 많이 강조한다.
이로 인한 결과로 사람들은 큰 부담 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얻는 유익에만 마음을 두고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죄에 대해 진노하시고 우리의 행위에 따라 심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경고의 말씀도
또 다른 하나님의 사랑임을 깊이 인식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마지막 심판 날에는 다시 회개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성경 말씀과 성령을 통해 부지런히 죄 짓지 않는 거룩한 삶과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삶에 대해 강조하고 계신다. 그러나
이 메시지는 한국교회 안에서 잘 전달되지 않는 것 같다. 절제와 희생을 요구하는 설교는 교인들이 듣기 싫어하고 목회자들은 이런
교인들에게 부담 주는 것이 싫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진리가 변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게
하라(고후7:1), 죄와 싸우기를 피 흘리기까지 대항하라(히12:4),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다(마10:26), 어두운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집 위에서
전파될 것이다(눅 12:3),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을
것이다(고후5:9-10),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고 각자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롬14:10-12), 마지막 심판
날에 가난하고 불쌍한 이웃들의 필요를 채워준 사람들은 영생에 들어가지만 그들의 필요를 외면한 사람들은 영벌에 들어갈
것이다(마25:31-46)…

이외에도 얼마나 많은 구절들이 성경 곳곳에서 마지막 심판 날에 대비하여 우리들의 거룩과
사랑의 삶을 위해 경고하고 있는지 눈을 크게 뜨고 보아야 한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또 다른 사랑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런
사랑에 대해서는 슬며시 눈감아 버렸다. 결과적으로 한국교회는 사람들로부터 ‘도덕성 상실과 사회적 책임을 외면한 이기적
집단’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2008 한국 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에 의하면 가톨릭과 불교에 대한 신뢰도
35.2%, 31.1% 인 것에 반해 개신교에 대한 신뢰도는 18%로 나타났다. 더욱이 종교가 없다는 응답자들 중 개신교를
신뢰한다는 답변은 7.6%에 그쳤는데 이는 가톨릭 37.9%, 불교 29%에 비하면 너무나 낮은 수치이다. 사람들은 기독교에
등을 돌리고 있다.

여론조사 뿐 아니라 좀 더 정직하고 적나라하게 개개 그리스도인의 삶을 깊이 있게
살펴보자. 우리의 눈은 그저 자신과 가족 그리고 우리 교회에만 머무르고 있고, 기도제목은 돈과 성공과 건강에 갇혀있다. 도덕적인
측면을 보자면 더 놀랍다. 굳이 통계수치를 내밀지 않더라도 혼전 성관계(이것은 간음이다. 간음은 혼인 관계에 있지 않은 모든
성관계를 의미한다.)를 즐기고 있는 교회 다니는 젊은이들, 외도와 폭력으로 멍들고 있는 교인 가정, 절제를 모르고 원하는 대로
충동적으로 돈을 사용하다 채무관계에 놓인 성도들을 우리 주변에서 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하나님의 사랑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한
경고’이다. 이제는 이 말씀에 귀 기울이자. 그러면 우리를 향해 안타까워하시는 주님의 ‘사랑의 큰 외침’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이제 가던 길을 빨리 멈추고, 좁지만 진리의 길로 돌이키자.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한이 없다.

[최주희] 진실을 보려는 눈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먼저 하나님이 그들을 창조하셨고 생명주시기
까지 사랑하시는 대상임을 기억하며, 이웃을 귀하게 대하는 것은 사랑의 출발점 일 것이다. 또한 그들의 필요와 기대를 채우고
만족시켜주는 것도 중요한 사랑의 표현이다. 때로는 생각과 의견이 나와 다르더라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 역시
사랑이다. 뿐만 아니라 나의 마음 깊은 곳에 상처를 준 사람이라 할 찌라도 주님의 사랑과 능력으로 용서한다면 어쩌면 사랑의
극치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는데, 바로 사람들의 마음에 담겨져 있는 ‘진실을 보려는
눈’도 사람들을 서로 사랑하게 하는 중요한 연결고리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사람들과 부딪히며 일어나는 사건이나 상황을 부정적으로 혹은
자기에게 피해가 되는 방법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캠퍼스를 걸어가는데 멀리서 아는 자매가 오고 있다고 하자.
반갑게 손을 흔들며 아는 척을 했는데 그냥 지나가 버렸다. 순간 “어? 왜 나를 못 본 척 하지? 나에게 불편한 일이 있나?
나를 무시하나?” 여러 생각들이 스쳐 지나간다. 그 친구가 나를 못 보았을 수도 있고 바쁜 일이 있어 급하게 지나칠 수도
있는데, 그런 가능성에 대해서는 크게 생각하지 않고 단지 부정적으로 해석할 뿐이다. 또 다른 예로 자신을 동생처럼 가깝게
생각하여 반말을 하는 형제에게 무례하다고 느끼기도 한다. 이런 해석들은 이웃과의 관계에서 습관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긍정적인
인간관계 맺는 것을 방해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이와 반대로 가능하면 주변 사람들의 행동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해석하는 습관을 가진
사람은 참으로 넉넉하고 풍요로운 관계를 즐긴다. 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하는 이웃들도 편안하다. 그런데 여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가 때로 누군가가 명백하게 부정적인 행동을 하였다 할지라도 그 내면에 있는 진실을 보려고 노력한다면, 무지해서 혹은 연약해서
저지르는 실수까지 받아주고 품어주는 큰 그릇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면에 있어서 내가 스승으로 삼고 있는 제자가 있다. 그는 내가 특수학교 교사로 있을
때 가르치던 우리 반 학생 재복이다. 어느 월요일 아침 조회를 하기 위해 교실에 들어서는데, 아이들이 깔깔거리며 책상을 치고
웃고 있었다. 어떤 아이는 재복이를 향하여 “네가 어떻게 보였기에 거지인줄 알고 그러냐?”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궁금하여 나도
함께 웃자며 자초지종을 물었다. 내용인즉 전날 주일에 휠체어를 사용하는 재복이가 교회 정문 앞에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오시더니 재복이에게 “저런 쯧쯧… 얼마나 힘드냐?”하시면서 천 원짜리 지폐를 주시더란다.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나도 당황하여 어떻게 재복이 마음을 위로해야 할 지 몰라 “세상에… 재복아! 너무 기분 나쁘고 속상했겠다. 그 아주머니
참 이상한 사람이네…”라고 말하였다. 하지만 재복이의 대답은 나의 수준을 넘어선 놀라운 것이었다. “선생님, 그분이 몰라서
그랬을 거예요. 아마 제가 몸이 불편하다고 돈도 없는 줄 알았나 봐요. 하지만 알고 보면 그런 분들의 마음은 따뜻해요. 몰라서
그렇지 남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저에게 그렇게 하셨을 거예요.” 장애를 가진 중학교 1학년 재복이의 이 말은
두고두고 내 평생 교훈이 되었다. 만약 내가 그런 일을 당했다면 어떻게 반응하였을까? “도대체 저를 어떻게 보시는 거예요?
장애를 가졌다고 나를 무시하는 겁니까? 저는 거지가 아니라고요! 아줌마도 평생 장애를 입지 않으리라는 보장 못하실 걸요? 그러면
아줌마도 거지가 되나요?”라며 분노와 협박 아닌 협박으로 소리 질렀을 것이다. 하지만 재복이는 달랐다. 겉으로 표현되는 부정적인
행동보다 그 안에 숨겨진 진실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이런 눈을 가지고 가족과 공동체와 이웃을 대한다면 세상살이가 얼마나 평화롭고 여유 있을 것인가!

이런 문장을 읽은 적이 있다. “Every day we are given stones.
But what do we build? Is it a wall or is it a bridge?” 우리는 매일 돌 맞는다.
억울한 돌, 부당한 돌, 거부의 돌… 그런데 이 돌들로 무엇을 만들까? ‘인간은 이기적이고 악하고 무서운 존재야! 좋은
관계란 있을 수 없어! 사랑은 결코 다다를 수 없는 이상에 불과 해! 결국 인간은 혼자야!’라고 결론을 내리고 그 돌들로 아성을
쌓을까? 아니면 그 돌들로 사람들을 이해하는 다리를 만들고 그들에게 다가갈까? 우리의 선택에 달렸다.

나이가 들고 인생을 겪어가면서 어떤 때는 나 자신이 바다 같이 넓은 마음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어떤 때는 너무나 속이 좁은 사람처럼 여겨져 스스로 실망스러울 때도 많다. 그때마다 재복이를 기억한다. 그리고 나도
재복이처럼 사람들을 이해하는 넓은 마음과 숨겨진 진실을 볼 줄 아는 눈을 달라고 주님 앞에 엎드려 간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