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주희] 집사님, 축하해요…

덕용 집사님은 류마치스 관절염으로 고생을 참 많이 하신 분이다. 고등학교 때 발병한 이후
몸은 계속 쇠약해져 갔고 골격은 이상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결국 거동이 불편하여 직업을 가질 형편은 되지 못하였으나
장애인 복지 기관에서 자원 봉사자로 섬기며 지냈다.

덕용 집사님을 알게 된 것은 교회에서였다. 내가 출석하고 있는 대전 대흥 침례교회는
일찍부터 몸이 불편하신 분들에 대해 문을 활짝 열어 놓고 그분들을 섬기는데 앞장 서 왔다. 교회 시설이 행여 그분들에게 불편하지
않은지 끊임없이 정비하며, 수화 통역과 지적 장애아동을 위한 사랑부 예배도 준비하였다. 더욱이 교회 안에 마련된 장애우들을 위한
쉼터는 넓고 최신 시설로 만들어져 말 그대로 쉼과 회복을 제공하고 있다. 덕분에 장애를 가지신 분들이 우리 교회에 많이 오시는데
그곳에서 덕용 집사님을 만나게 된 것이다.

휠체어가 커 보일 만큼의 자그마한 덩치에, 뽀얀 얼굴과 잔잔한 미소는 사람들 눈에 금방
띄지는 않는다. 하지만 덕용 집사님은 따뜻한 마음과 열린 귀를 가지신 분이셨다. ‘내가 몸이 불편하고 도움이 필요하므로 사람들이
나를 섬겨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이 가진 것으로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셨던 분이다. 육신적인 고통과 마음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주변 사람들에게 부지런히 전화로 심방한다. 인내와 온유로 그들의 이야기를 다 들어주고 함께 마음 아파하며
위로의 말을 전한다. 교회에 처음 나오는 장애우에게도 먼저 손 내밀고 관심 가진다. 목소리도 작고 말도 그리 많지 않은데, 주일
날 멀리서 보면 그분 주변에 사람들이 몰린다. 불편한 손과 발임에도 가까운 거리 먼 거리 상관없이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운전으로 봉사한다.

그런 덕용 집사님이 갑자기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긴 기간 동안 복용한 약으로 인해
합병증이 생기기 시작했고 이것은 연약한 그의 몸을 내려앉게 했다. 재정적으로 어려운 그는 종합병원에서 검진 받고 싶어 하지
않았지만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강권으로 겨우 검사를 받게 되었다. 처음에는 의사선생님께서 치료가 가능하다고 말씀하셨기에 모두
힘을 얻고 기쁜 마음으로 돈과 여러 힘을 모았다. 하지만 얼마 후 의사선생님께서 덕용 집사님의 경우는 워낙 체력이 약해 치료가
어려울 것이라고 안타까운 소식을 전하셨다.

그 후 집사님은 그의 좁은 방 작은 침대에 누워 계셔야만 했다. 이전에는 덕용 집사님이
사람들을 많이 섬기셨는데 이후로는 누워 계신 집사님을 사람들이 섬기기 시작했다. 전도사님과 집사님들 그리고 여러 형제자매들…
부지런히 덕용 집사님을 방문하며 함께 마음과 사랑을 나누었다. 하지만 그의 건강은 좀처럼 회복될 기미 없이 오히려 더 나빠져
갔다.

어느 날 덕용 집사님을 뵈었을 때, 그의 얼굴은 온 몸의 기운이 다 빠진 듯 한 없이
창백해 보였다.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집사님… 천지를 지으신 능력의 하나님은 집사님을 온전히 회복시킬 수 있는
분이시랍니다. 우리 그 능력을 구해요. 하지만… 어쩌면 지금 이 고통의 기간이 길어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우리 하나님께
견딜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해요. 그리고… 어쩌면… 하나님이 집사님을 천국에 데리고 가실 수도 있어요. 이것을 위해서
예수님 만날 준비도 하면 좋겠어요. 천국은 참 좋은 곳이거든요. 저도 할 수만 있다면 빨리 가고 싶은 곳 이구요…”
진심이었다. 천국은 나를 사랑하사 친히 자신의 생명을 버리신 예수님의 얼굴을 직접 뵈올 수 있는 곳이고, 죄와 불의가 없는
하나님의 영광만이 가득한 곳이다. 천국은 정말 좋은 곳이고 사모할 만하며 기대해도 좋은 곳이다. 덕용 집사님이 나지막하지만
단호하고 힘 있는 소리로 말씀하셨다. “네, 사모님… 저 사모님이 무슨 말씀하시는지 다 알아요. 저 주님 만날 준비 다
되었어요. 얼른 가고 싶어요…”

그리고 얼마 후 덕용 집사님의 소천 소식을 들었다. 장례식장에서 집사님의 영정 사진을
바라보았다. 나도 모르게 기쁨의 미소가 지어졌다. “집사님, 축하해요… 천국 좋지요?” 이 세상에서 육신의 고통과 질병
가운데 48년 인생을 살면서도 결코 불평하지 않은 덕용 집사님. 오히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 다하여 사람들을 넉넉하게
품고 섬기며 사신 분. 그가 가진 가장 강력한 사랑의 무기는 ‘따뜻하고 겸손한 마음’이셨던 우리의 친구. 이 땅에서 그렇게
겸손하고 아름답게 사셨던 덕용 집사님을 위해 하나님이 준비하신 사랑의 선물은 바로 ‘천국’이었다.

천국은 이 땅에서 좁은 길을 통과한 사람들에게 준비된 하나님의 최고의 선물이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을 찾고 욕심을 채우기 위해 기복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희생은 아끼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결코 ‘천국’이 주어지지 않는다.(마25장) 하지만 이 땅에서 비록 낮은 자의 모습으로 고난 가운데 살더라도,
주님을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그분의 명령대로 이웃을 따뜻한 마음으로 섬긴 자에게 천국은 ‘하나님이 주시는 가장 큰 사랑의
선물’이다. 이 선물을 받는 사람은 당연히 축하 받을 만하다.

[최주희] 아들 이야기

나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다. 침례신학대학에서 선교학을 가르치는 남편(이현모 교수)과의
사이에 있는 유일한 자녀이다. 남편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나라도 가난했고 우리들의 가정도 불우했으며 더욱이 신앙도 없는
가정이었기에 ‘행복한 가정’에 대한 느낌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우리 아들은 달랐다. 신앙적으로나 세상적으로 많은 것이 갖추어진
‘행복한 가정’에서 마음껏 즐기고 누리며 큰 아쉬움 없이 자랄 수 있는 환경이었다. 우리는 이 아들에게 굳이 험난한 환경을
일부러 제공해주지는 않았으나 양육하면서 한 가지 강조한 것이 있다. 그것은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섬기는 삶’이었다. 즉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거나 무시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며 사는 삶이었다. 지금 기억하면
아들이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고 부지런히 삶 가운데 사람들을 사랑하는 연습을 하였던 것 같다. 아들이 초등학교 2학년 때 학교
문집에 실렸던 내용이다. 제목은 ‘고아원’이다.

오후에 어머니와 함께 고아원에 갔다. 그 곳의
아이들은 가난하기 때문에 어렵게 지내고 음식도 나빴다. 그래서 우리가 저녁 식사에 불고기를 만들어 주었더니 모두들 맛있게
먹었다. ‘고아원 아이들은 너무 불쌍하다. 나는 먹고 싶은 것은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데…, 여기서는 반찬이 두세 개 밖에
없다니 얼마나 먹고 싶은 것이 많을까? 그들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보고 싶지 않을까?’ 나는 이제야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깊이
깨달았다. 이제부터는 부모님 말씀 잘 듣고 음식도 주시는 대로 골고루 맛있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어야겠다. 다음에도 맛있는
음식을 가지고 어머니와 이곳에 오고 싶다.

아들이 초등학교 4학년 여름 방학 때, 출석하고 있는 교회(대전 대흥침례교회)에서
장애우들을 모시고 바다로 캠프를 갔다. 그 당시 근육병을 앓고 있는 어느 형제가 평생 바다에 한 번도 가지 못했다는 말을 듣고
장애인 위원회 위원장과 사역자들이 그를 위해 바다 구경을 계획하였던 것이다. 그 때 3박4일을 강원도 옥계에서 보냈었고 아들은
섬기는 사람으로 동행하였다. 여름 방학을 마칠 무렵, 아들이 방학 숙제로 글을 썼다고 가져왔다. 제목은 ‘사람의
아름다움’이었다. 내용을 보니 장애우들을 모시고 캠프 갔던 내용이었다.

이번 여름방학 때 어머니와
함께 장애인 선교 캠프를 갔다. 그저 봉사하자는 마음으로 갔었는데 중요한 것 한 가지를 깨달았다. 그것은 누구나 한 가지 이상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첫째 날 버스를 타고 갈 때에 내 앞자리에 심**이라는 뇌성마비에 걸린 형을 보게 되었다. 그
형의 눈은 누구도 이길 자 없을 정도로 맑고 아름다웠다…(중략) 이튿날 아침에 새벽예배를 드렸다. 나는 아침 식사 때에
장애인 분들이 식사를 하시도록 음식을 날라다 드렸다. 모두 음식을 받으시는 얼굴에 가벼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중략) 그
중에서도 캠프 시작부터 끝까지 웃음과 미소를 띤 송** 형이 너무나도 귀하고 아름다웠다…(중략) 마지막 날까지 생활하며 나는
많은 이익을 얻었다. 사람이 정말로 귀하고 아름다운 것을 하나씩 이상은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지금은 이 아들이 군대에 갔다. 훈련병 4주째이다. 그가 군대에서 보내 온 몇 통의 편지를 읽으면서 하나님께 참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얼 차례 받고 혼날 때에도 살 빠지고 몸 건강해지겠단 생각으로 기분 좋게 받고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 의지하면서 긍정적으로 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두번째 편지)

살이 쭉쭉 빠지고 얼굴은 시꺼메지고 완전군인
되어가고 있엉ㅋㅋ 근데 여기서 사람들이랑 친해지고 또 말씀 암송 카드 보면서 하루하루 감사히 많은 것을 배우고 있어요. 항상
남들보다 조금 잘났다고 생각하던 나의 오만함과 자만함이 여기선 아빠 말대로 nobody가 되어 더욱 더 낮아지고 깨어지는 내
모습에 감사하고 있어요. 또 하나님이 헌신하는 마음을 계속 주셔서 빨래나 이불정리나 뭐 해야 될 것을 좀 더 빨리 끝내고 미비
된 사람들 도와주고 있어요. 대신 빨래도 해주고 구두도 닦아주고 청소도 해 주고 아주 사소한 부분에서 나를 위하기보다 남을 위해
사용할 수 있어서 정말 너무 감사하고 그럴 때 마다 마음도 기쁘고 평안해져. 그래서 너무 기쁘고 좋아(3번째 편지)

불침번 말고 경계근무라고 야간에 실제 야외에 있는
초소에 가서 총 들고 망보면서 한 시간 씩 서는 것이 있는데 한 형이 감기몸살로 힘들어 하기에 내가 대신 섰어용. 그런 생각나게
해 주셔서 너무 감사하고 기분도 좋았어요. 날 이해 못하는 애들도 있지만 사람들을 위해 섬기고 헌신할 수 있는 시간 허락해
주셔서 너무 감사해. 그동안 너무 나 중심적이고 나만을 위해 살았던 것 같은데 군대란 시간을 통해 그런 모습을 깰 수 있어서
너무 기뻐요.(4번째 편지) 

어느 누구도 자식의 일에 대해 큰 소리 칠 수 없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자식에 대해서만큼은 늘 조심스럽고
두렵다. 하지만 군대 간 아들의 편지를 읽으면서 ‘So far so good!(지금까지는 좋아!)’이란 마음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살면 좋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시고 기대하시는 ‘사랑의 삶’은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고 그리 멀리
있는 것도 아닌 것 같다. 있는 곳에서 고개를 한번 들고 주변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 곁에 있게 하신 귀한
사람들에게 겸손하게 마음을 여는 것이다. 신기한 것은 그런 마음은 반드시 선한 행동으로 저절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최주희] 스스로 만든 상처

  하나님이 우리 주변에 있게 하신 사람들을 사랑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상처이다.  상처는 우리가 사람을 이해하고
섬기며 사랑하는 것을 근본적으로 막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사랑 거부의 행위’를 타당화 시키며 합리화시키기도 한다. 
그런데 먼저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내가 생각하는 그 상처가 상처라고 표현하기에 타당한 상처이냐 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런 질문에 대해 본인이 상처를 받았다고 느꼈으면 다 상처인 것이지, 그것을 굳이 구분할 필요가 있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하지만 의외로 타인이 상처를 주었다기보다는 스스로 상처를 만든 경우가 더 많다.  이것은 상처가 아니다.

  상처를 스스로 만든 상처와 상처라고 불리기에 타당한 상처로 나눈다면 후자는 십계명에 근거한다.  이것은 어느 누가 보아도 큰
아픔이며 억울함이고 위로받아야 할 상처이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의사의 실수로 사랑하는 아들을 잃게 되었거나, 음주
운전자로부터 사고를 당하여 다리를 잃은 사람, 혹은 잘못한 일도 없이 폭행을 당한 사람, 남편의 외도 혹은 아내의 외도, 아껴
모은 돈을 사기 당하거나 보증을 잘못 선 대가로 집을 날리는 경우, 억울하게 모함을 받아 고통을 겪는 사람… 

  이뿐 아니다.  방어능력이 없는 어렸을 때 경험한 부모로 부터의 방임이나 학대도 큰 상처이다.  부모의 무관심으로 반드시 필요한
돌봄이나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평생 한이 맺힌 사람도 있다.  아버지로부터 주먹이나 흉기 등으로 구타를 당하고 어머니로부터
언어폭력이나 정서적 위협을 받는 것도 큰 상처이다.  어렸을 때의 이런 경험은 어른이 된 후에도 그 후유증이 나타나고 많은 일의
걸림돌로 작용하여 삶에 통증을 안겨다 준다.

  위에 기술한 고통과 아픔은 모두 상처라고 불리기에 타당한 상처들이다.  상처받은 사람들은 그들의 상한 마음을 있는 그대로 주님께
토로할 수 있으며, 자비하시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그 상처를 만지시고 위로해 주실 뿐 아니라 치유해 주신다.  그리고 그 아픈
과거를 재료로 하여 너무나 복된 상황으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신다.  마치 상처가 없었으면 어떻게 이런 놀라운 일이 생길 수
있었겠는가 의심할 정도로 훌륭한 작품으로 만들어주신다.  이것이 바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고 능력이다.

  그러나 스스로 만든 상처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고에 몰입하여 마치 자신이 희생자인 것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그것은 대략 세 가지 정도로 생각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신의 좁은 마음 때문에 생기는 상처이다.  사람을 이해하고 용납하는 마음의 용량이 부족하여, 별 것 아닌 말 한마디나 작은
실수를 이해하지 못하고 상대방에게 정죄의 화살을 돌리는 경우이다.  사람이란 완전한 존재가 아니어서 실수를 자주하고 미숙한 면이
많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런 연약함을 서로 이해하고 너그럽게 받아야 한다.  마음이 좁아 이런 너그러움이 없는 사람들은 작은
잘못과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못하고 스스로 상처받았다며 상대방을 탓하는 습관이 있다.  반면 자신이 당연히 책임져야 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회피하면서도, 그것을 요구받을 때에는 상대방을 까다롭다거나 혹은 지나치다 비난하며 자기에게 상처 주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두
번째는 낮은 자존감으로 인한 것이다.  자신에 대한 열등감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의 말이나 행동에 매우 예민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생기는 상처이다.  때론 자기를 무시한다고 생각하거나, 어떤 행동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확대해석 하는 경향이 있다.  어떤 때는
상대방의 의미 없는 행동이나 작은 실수조차 자기를 겨냥한 것으로 오해하여 스스로 상처를 만든다.  또한 다른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 대해 지나치게 위협을 느끼거나 두려워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열등감이 있는 경우는 의외로 질투심이 많은데,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여러 면으로 비교하여 샘을 내며 자신이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이 되면 스스로 상처받는다.

  마지막으로 욕심이 많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상대방이 자신이 기대하는 만큼 따라오지 못하면 그들에게 분노하고 정죄하며 싫어한다. 
뿐만 아니라 그들로 인해 자기가 손해 보았다고 생각하여 그들이 자기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단정한다.  상대방에게 지나친 기대를
하거나 비현실적인 기대를 해 놓고 그 기준에 못 미치면 스스로 상처받는 경우이다.

  솔직히 위의 세 가지 상황 모두 기분 좋은 상황은 아니다.  하지만 상처라고 표현할 만한 것은 못된다.  이때는 차라리 ‘내가
속이 상하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합당할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요즘 상처라는 단어를 너무 쉽게 남용하는 것을 많이
본다.  그리하여 점점 더 자기중심적인 생각만 키워가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에 대해서는
책임회피 하고 있다.

  기독교가 사회적인 책임은 감당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유익만 구하는 이기적인 단체라 비난받고 있는 이 시점, 내가 생각하는 나의
상처가 혹 스스로 만든 상처는 아닌지 심각하게 생각해 볼 일이다.  그리고 건강한 자아로 욕심을 버리며 사랑의 용량을 키워 나갈
때이다.

[최주희] 성 내 과

  나는 사람들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리고 어떤 직업 혹은 어떤 위치의 사람이건 별로 어려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수년 전만 해도 어려운 사람 두 부류가 있었다.  한 부류는 택시 기사 분들이고 다른 부류는 의사선생님이었다. 

  택시 기사 분들이 어려운 이유는 교통법규와 상관없이 속력을 내거나 빨간 불에도 마구 지나가는 담대함 때문이었다.  놀란 가슴으로
소리를 지르고 싶어도, 백미러로 보이는 기사님의 무섭고 짜증나는 눈빛이 나의 입을 막고 숨을 죽이게 했다.  물론 그렇지 않은
분들도 많이 계시다.  의사선생님들도 어려웠다.  흰 가운을 입은 최고의 전문가를 코앞에서 일대일 대면하는 것만으로도 주눅
들었다.  또한 과묵한 얼굴과 많은 사람들을 대하느라 지쳐있는 표정을 보는 것은 마치 질병을 가진 내가 죄인인 것처럼 느끼게
만들기도 했다.  게다가 궁금한 것을 물어보고 싶어도, 그것이 무식한 질문이 되어 의사선생님의 피곤을 가중시키는 것은 아닌지
머뭇거리며 눈치 봐야 했다.  물론 의사선생님들 역시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작은 병원이라도 치열한 경쟁 속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경영마인드와 서비스 정신이 필수이고, 행여 병원에 대한 입소문이 부정적으로 나기라도 한다면 하루아침에 환자가 급격히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세월이 지난 지금은 택시 기사 분들도 의사선생님들도 어렵지는 않다.  오히려 의사선생님에 대해 깊은 감사와 감동을 느끼게 되는데,
거기에 영향을 미친 병원이 바로 성 내과이다.  성 내과는 내가 살고 있는 대전 유성구에 위치하고 있다.  성 내과에서 진료
받기 위해서는 최소한 한 두 시간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대기실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표정은 매우 지루하다.  하지만 진료를
받고 나올 때는 기다림의 불편함은 간곳없고 만족과 감사의 표정이 사람들 얼굴에 역력하다.  바쁜 일상에서 한 두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이 병원으로 굳이 사람들이 오는 대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자그마한 체구에 겸손과 따뜻함이 배어 있는 여의사 성원장님에 대한 표현을 들어보면 이해가 간다.  ‘늘 환자를 환한 웃음으로
맞는다.’  ‘진료하시는 동안 환자들은 자신이 세상에 둘도 없는 귀한 사람으로 대접받고 있음을 느끼며 감격한다.’  ‘한 사람을
진료하는 시간이 길다.  그리고 절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진료하신다.’  ‘궁금한 것 마음 편히 물어봐도 되고, 의사선생님은
그림까지 그려가며 자상하게 설명하신다.’  ‘질병에 대한 다방면의 질문과 접근으로 큰 병을 미리 예방케 하는 명의(名醫)
이시다.’  ‘환자로 하여금 염려보다는 소망을 가지게 한다.’…

  성
원장님은 특별히 어려운 환경에 있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시간을 들이며 따뜻하게 대하신다.  연세 드신 할머니 할아버지는 물론,
근처 과기대(KAIST)에 다니는 외국인 학생 가족, 외국인 근로자, 선교사, 그리고 재정이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의지할
바위이기도 하다.  그들을 진료하시는 동안 시간을 많이 할애하기 때문에 대기실에 앉은 사람들 마음에 조바심이 생기기도 하지만,
마음 한편에서 느껴지는 훈훈함은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기에 충분하다.

  얼마 전에 들었던 일화이다.  미국에서 박사 후 과정을 마친 김 집사는 직장 일로 인해 아내와 어린 자녀보다 조금 일찍 한국에
귀국하였다.  아내는 집과 여러 짐 정리를 하고 귀국하려 하였는데, 그 사이 갑자기 어린 자녀가 많이 아팠다고 한다.  한국에
있던 김 집사는 놀란 가슴으로 성 내과에 가서 상담을 하였는데, 의사 선생님께서 그 증상에 대해 자상하게 설명해 주시며 처방한
약을 먹이면 괜찮을 것이라 안심시켜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자신의 핸드폰 번호를 적어주며 혹시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시간에 상관없이 전화 걸라고 하셨다고 했다.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사람도 아닌데 안절부절 못하는 부모 마음 헤아려 주시고
함께 염려해 주시는 의사선생님께 너무나 감사하고 감격했다며 김 집사가 자랑하였다.  성원장님은 이렇게 누구에게나 사랑과 섬김을
다 하신다.  희귀병을 앓는 어린 아이 위해 좋은 약을 찾아 먼 나라 마다 않고 친히 방문하시기도 한다.  그래서 성 내과를
찾는 사람들은 그분을 ‘유성의 슈바이처’라 부른다.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으로 섬기는 것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닌 듯하다.  그것은 평범한 하루 가운데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베풀 수 있는 일상생활이다.  이것이 어쩌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가장 쉬운 ‘하나님 사랑하는 방법’이 아닐까? 

[최주희] ‘사랑의 사람’을 찾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아마 많은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다만 사랑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는 사람마다  강조점이 다르므로 통일된 답을 구하기 어려울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사랑이  ‘함께하는 삶’이라고 정의하고 싶은데, 이런 생각을 하도록  결정적인 영향을 주신 분이 계시다.

  김효신 선생님은 내가  특수학교 교사로 있을 때 양호선생님으로 계셨던 분이다.  그 당시에는 정서장애를 가진 아동이 교육받을 곳이
마땅치 않아, 우리 학교가 지체부자유 특수학교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서장애를 가진 아동이 한둘 있었다.  승환(가명)이는 그중
한명으로 자폐 아동이었는데, 대학병원 정신과 간호사 경험이 있는 양호선생님이 특별히 돌보아 주셨다.  그분은 여러 아이디어와
정성어린 준비로 최선을 다하여 승환이를 돌보셨는데 특수교사인 나에게 큰 도전이 되었다.

  한
번은  모교 특수교육과에서 후배들을 위해 선배 초청 강의를 듣는 시간을 계획하였다며, 분에 넘치게도 나에게 연락이 왔다. 
직장인 학교 측에서 허락하여 주셨음으로, 그날 아침에는 직접 모교 대학으로 출근했다.  신촌의 거리는 여전히 생동감 있고
화려했다.  밝은 웃음과 자신감에 넘치는 듯 한 후배들을 바라보다 우연히 쇼윈도에 비치는 나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어찌나
촌스럽고 초라해보이던지…   강의를 마친 후 주눅들은 모습으로 광명시 학교로 가는 버스를 탔다.  ‘특수학교는 왜 이리 먼
시골에나 있지?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아이들을 가르친다고 그들에게 큰 변화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설령 아이들이
공부를 잘 한다고 해도 사회에 나가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좌절감만 생길텐데…  내 모습이 초라하게 변한 것 같아. 
변두리 지역 학교에서 아이들하고만 있어서 그런가?  젊음을 마음껏 누리고 즐기며 살아야 하는데 내가 너무 찌든 것은
아닌지…’  

  우울한 마음으로 버스를 내려 흙길을 밟으며 학교로 향하는데 양호선생님과 승환이가 정신없이 뛰어 오고 있었다.  “양호선생님! 어디
가세요?”  “저도 몰라요.  승환이가 오늘은 특별히 더 못 견뎌 하는 것 같아 무조건 뛰는 거예요.  그러면 기분이 좀
나아질까 해서요.”  그리고 계속 승환이와 함께 뛰어가셨다.  갑자기 초라해진 마음에 큰 깨달음이 오는 것 같았다.  “맞아! 
바로 이거야!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지만 그저 함께 하는 거야!  그것이 사랑이야!  저기 내
사랑하는 아이들이 많이 있어.  빨리 가자.”   새로운 힘이 솟으며 흥분된 마음으로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저기 교실에서
아이들이 창밖을 내다보며 소리친다.  “선생님!  빨리 오세요!  보고 싶었단 말이에요!”
 

  또
다른 이야기가 기억난다. 지난 봄, 정 집사님이 수년 만에 전화를 거시며 무조건 지금 우리 집으로 오겠다고 하셨다.  사실
병원에서 수술을 앞두신 어느 할아버지를 방문하기 위해 나서던 차여서 다음 기회를 약속하고 싶었지만 음성이 매우 다급해 보였다. 
일단 오시라고 하였다.  무척 수척해지신 얼굴에 안절부절 못하시며 요즘 우울증으로 너무 힘든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하셨다. 
잠깐의 대화를 마치고 다음에 다시 연락을 드리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는 큰 부담이 되었다.  강의와 상담과 성경
공부 등으로 나에게는 여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울증은 한두 번의 만남으로 회복되는 것이 결코 아님을 알기에 어려움
가운데 계신 정 집사님께 쉽게 손을 내밀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며칠 후 모처럼 화창한 봄날이 되자 새로운 부담이 느껴졌다. 정 집사님의 회복을 위해 시간을 헌신적으로 나누기는 어려운
상황이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만드신 이 아름다운 봄날의 꽃을 잠시라도 함께 즐기고 싶었다.  정 집사님을 모시고 벚꽃으로
유명한 계룡산에 갔다.  아쉽게도 계룡산의 벚꽃은 아직 꽃봉오리 상태였다.  하지만 산과 들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좋은
레스토랑에서 긴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자기 구역장이 매일 아침마다 함께 병원에 가 준다는 이야기, 자신이 섬기던 동네 장애인
복지 기관 목사님께서 이런 때일수록 혼자 있으면 안 된다며 복지관에 와서 점심을 함께 먹자고 권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음
속 깊이 사랑을 다시금 깨닫는다.  작은 도움들이지만 어쩌면 이리도 아름다운 사랑의 사람들이 많을까?

  소리를 내어 광고하지 않을지라도 세상 곳곳에는 ‘사랑의 사람들’이 숨겨져 있는 것 같다.  특별한 전문 지식은 없어도 또한 어떻게
도와야 할지 묘안이 없어도, 그저 함께하며 묵묵히 동행하는 사랑의 사람들!  경제가 어렵고 세상이 각박할수록 이런 ‘사랑의
사람’이 너무나 필요하다.  혹시, 당신은 ‘사랑의 사람’이십니까?  

  

[최주희] 그 멀리 하늘에서…

  저녁 준비를 하며 5시 뉴스를 듣고 있었다.  대전 지역 방송 중, 어느 50대 남자가 장애인 아내를 살해하였다는 소식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참 나쁜 사람이다…’ 속으로 생각했다.  잠시 후, 교회 아는 분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김
아저씨가 큰일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김
아저씨는 다리가 불편하여 휠체어를 사용하는 아내와 20여년 이상을 살아오셨다.  우연히 김 아저씨 네를 알게 된 전도사님과 몇몇
분의 권유로 우리교회에 나오기 시작하셨다.  조용하고 여성스러우신 아내와 다혈질의 급한 성격이신 남편은 곧잘 토닥거리셨지만
그런대로 늘 함께 다니시는 모습이 보기에 좋았다.  그런데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장애인 아내는 건강한 남편이 밖에서 직장 생활하는 것과 교회에서 이 사람 저사람 만나는 것이 늘 궁금하였고, 특별히 남편이
여자들과 대화하는 것에 대해 예민했었던 것이다.  왜 아니겠는가?  나라도 몸이 불편하여 집에만 있게 되면 남편의 행동을
예민하게 관찰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런 다툼이 갑자기 큰 다툼으로 번지면서 마침내 다혈질 김 아저씨가 칼로 아내를
내리쳤던 것이다.

  놀란 가슴으로 경찰서에 갔더니 교도소로 이송되었다고 한다.  성경책을 들고 떨리는 마음으로 교도소에 갔다.  아마 내 평생 처음
교도소를 방문한 것 같다.  더욱이 그 엄청난 살인죄를 지은 사람의 얼굴도 처음 보는 경험이었다.  창살을 가운데 두고 아저씨의
얼굴을 보자 나도 모르게 “어쩌자고 이런 엄청난 일을 저질렀어요?”라고 울며 소리쳤다.  김 아저씨는 창백하고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사모님, 나 성경책 좀 넣어 주세요!  정말 잘못했어요.  내가 그 순간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김 아저씨도
울었다.  솔직히 장애인 아내를 가진 남편도 건강한 남편을 가진 아내도 다 이해가 되었고, 두 분 다 너무나 불쌍하고 딱하게
여겨졌다.

  지금까지 5년 정도의 기간을 보내며 김 아저씨를 만나러 가끔 교도소에 간다.  편지도 주고받는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바로
조금씩 변화되어 가는 김 아저씨의 모습이다.  하나님 앞에, 그리고 아내에게 자신이 저지른 죄가 얼마나 흉악하고 엄청난 죄인지
철저히 회개한다.  “제가 어쩌자고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  사모님, 아내가 보고 싶어요…”  교도소 안에서 드리는
예배에 참석하며 받은 빵은 같은 방에 수감된 다른 사람에게 준다.  연로하여 몸이 아픈 수감자의 소변과 대변 심부름도 자신의
몫이다.  엄청난 죄를 저지른 자신을 용서해 주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사람들에게 전해서 이미 전도된 사람도 많다.  자신의
몸을 장기기증도 하였다.  또한 성경을 손으로 오랜 기간 정성껏 필사하여 벌써 한 세트를 나에게 선물로 주었다.  나이 들어
눈이 어두워지면 김 아저씨가 손으로 쓴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을 기쁘게 만나리라.

  언젠가 김 아저씨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아저씨, 이곳에서 모범수로 잘 계시다가 일찍 출감하시면 좋겠어요.”  돌아오는 대답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아닙니다.  저는 이곳에서 제 죄의 대가를 철저히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출감하면 장애인들을 돕고
싶습니다.”  그의 편지에는 늘 “하나님의 아들 김** 드립니다.”라고 편지가 마무리 된다.  철저한 회개와 완벽한 용서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김 아저씨가 대전에서 여주로 이송되었다고 한다.  여주는 내가 가기에는 너무 멀었다.  길눈이 어둡고 방향감각이
없는 나는 감히 엄두가 나지 않아 여주 교도소에 갈 생각을 접었다.  그리고 대전에서 이 정도만이라도 김 아저씨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며, 이것으로 내 몫은 끝났다고 정리하였다.  하지만 QT를 하면서 예수님의 탄생을 묵상하였는데, 참으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였다.  하나님께서 그 멀리 하늘에서 친히 인간 세상으로 오신 것이었다.  이 전에는 깨닫지 못했던
감동이었다.  창조주 하나님, 만유의 주님께서 우리 인간들을 사랑하셔서 그 먼 하늘에서 이 구석진 땅까지 오셨구나…  주님,
어떻게 이렇게 멀리 오셨나요…

  마음이 달라졌다.  대전에서 여주가 비록 나에게는 먼 여행길이라 할지라도, 하늘에서 이 땅으로 오신 주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남편에게 묻고, 인터넷을 검색하고, 전화로 확인하였다.  마음에 몇 번이고 되새기며 외우고 또 외웠다. 

  떠나는 날 아침 출근길의 남편은 몇 번이고 종이를 꺼내어 가는 길을 확인해 주었다.  아침 일찍 시외버스 터미널에 도착하였고
거기서 이천 행 버스를 탔다.  이천에 도착하여 여주 교도소 직원이 알려준 대로 시내버스를 갈아탔다.  아뿔싸!  기사아저씨에게
물어보니 예약 시간 까지 도착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것이다.  도중에 내려 택시로 갈아탔다.  겨우 시간 내에 도착하여 먼저
영치금과 한 방 8명의 가족들이 먹을 음식을 넣어 드렸다.  제 시간에 도착했다는 안도감과 김 아저씨와 방 식구들이 함께 모여
치킨과 과일과 과자로 잔치벌일 생각을 하니 온 몸과 마음이 훈훈해지는 것 같았다.

  드디어 창살너머로 김 아저씨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이 멀리 여주까지 어떻게 왔냐며 너무나 기뻐하셨다.  김 아저씨는 여전히
그 안에서 회개와 감사 그리고 섬김과 전도에 열심이셨다.  돌아설 때 마다 잔소리처럼 꼭 하는 나의 한 마디 “아저씨, 아무리
힘든 일이 생기더라도 그곳에서 절대 성질부리지 마셔요!”  무슨 말인지 김 아저씨도 알고 계실 것이다.

  돌아오는 길은 갈 때와 달랐다.  갈 때는 행여 길을 잃을까, 차를 놓칠까 마음이 조마조마하고 얼마나 불안하였는지 모른다. 
하지만 대전으로 돌아가는 길은 달랐다.  시골 넓은 들판 굽이굽이 버스 길 지나며 넓은 고속도로 힘 있게 먼 길 달려가며,
주님께 나지막이 계속 여쭈어 보았다.  ‘주님, 어떻게 그리 멀리 오셨어요?  하늘에서 땅까지…  우리가 뭔데…  주님,
감사해요.  정말 감사합니다…  멀리 하늘에서 오신 나의 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