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준] “어른들 말씀 틀린 것 하나 없어”

한경준 
 “그땐 그랬지”

      군대에서  일병 계급장을 달고 있었을 때였던  것 같습니다. 밤이 되어 자려고 누워  있는데 방의 한쪽 구석에서 고참  두 명이 밤 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대학교 학과 동기로 같이 입대하여 같은 부대에 배치까지 받아서 서로가 무척 친했던 그 두 고참은 그날 따라 꽤 진지한 이야기를 낮은 목소리로 나누고 있었습니다. 전후 사정을 몰라서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잘 듣지 못했지만, 유독 한 마디가 귀에 들어왔고 아직까지 그 고참의 말투 그대로 생생하게 기억에 납니다. 그 말은 “어른들 말씀 틀린 것 하나 없어” 였습니다.

      그  말이 왜 지금까지 기억에서 떠나지  않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당시에 같은  세대에 비해서도 상당히 ‘신세대’적인 문화 코드를 가지셨던 그 고참들 입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온 것이 신기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저와 한 살 밖에 차이 안나는 그 분들이었지만, 개인적으로 많은 일들을 겪으며 살아오셨던 그 분들이었기 때문에 그 말이 당시의 저에게는 ‘철이 들은’ 말처럼 느껴져서 그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20대  중반에 들었던 그 말이 왜 30대 후반을  향해 가는 아직까지 기억에 남아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해를 거듭해 갈수록,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게 되고, 그 아이가 이제 학교를  들어갈 나이가 되어가기 시작하는 삶의  ‘전환기’들을 겪으면서 그 말의 무게는 점점 더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때로는 의지적으로 부정하려고 하였던 그 말에, 이제는 조금씩 동감을 하게 되고, 더 나아가 가끔씩 동의하게도 되는 저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이를  낳기 전, 결혼을 하기 전에는 (한국 사회의) ‘어른들’의 모습들 중 이해가 안 되는 것들이 참 많았습니다. 자식 교육을 위해 학군에 목숨을 거는 모습, 자식의 결혼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 드라마에서나 볼 듯한 – 백태만상들, 가정이라는 핵심적 가치의 물질적 표현이 되어야 할 ‘집’을 투자와 투기의 대상으로 전락시킨 모습들, 대학 졸업과 함께 대학에서 외쳤던 자유와 평등과 정의도 그대로 졸업시키는 모습들… 사람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러한 이야기를 꺼내면 항상 선배들로부터 돌아오는 교과서 대답은 “너도 결혼해봐 (혹은 애 낳아봐)” 였습니다. 선배도 옜날에는 다르게 생각하지 않았냐고 물어보면 자동판매기처럼 찍혀내오던 대답은 “그땐 그랬지”라는, 어느 가요 제목과 같은 말이었습니다. 어떻게 과거와 현재가 그렇게 단절될 수 있는지 궁금했었습니다. 아마 저만 가졌던 의문은 아니였을 것입니다.

      물론  결혼 이후에는, 또 아이를 가진 이후의  삶에는 제가 모르는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은 했지만, 특히 이러한 이슈들에 있어서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어떠한 유의미한 차이를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에 실망도 하고 분노도 하며 때로는 (하지 말았어야 할) ‘판단’도 하였습니다. 
      
이상한  나라 속의 나

      시간이  흘러 저도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 아이가 자라서 내년이면 미국에서 kinder에 들어갈 나이가 되었습니다. 군대에서  고참들의 말을 어깨넘어 들은지 15년이 지나서 그 말의 의미와 무게를 다시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먼저 결혼하고 애를 낳았던 선배들의 이야기를 기억해 봅니다. 나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으니 전에는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 ‘어른들’의 모습들이 저에게도 보이게 되었을까요? 옛날에 그렇게도 이상하게만 보였던 ‘결혼 이후의 삶’으로 들어섰는데, 나에게는 그 ‘이상한 나라’가 여전히 이상하게 보일까요, 아니면 나 자신도 이상해져서 그 ‘이상한 나라’가 더 이상 이상하지 않게 보이게 되었을까요?

      지금  저의 모습이 어떠한지, 어느만큼 그  ‘어른들’ 중 한 명처럼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20대 때 제가 이해하지 못하고, 때로 비판했던 그 부분들에 대해 이제는 점점 “그렇다면 나와 우리 가정은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결정을 해야할 일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제가 하나님 앞에서 갖고 있는 이상과 이 땅에서의 현실 사이에서의 갈등을 점점 더 많이 겪게 된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과거에는 비판했던 그 모습들에 동의까지는 못하겠지만, 왜 그런 모습을 갖고 사는지 ‘이해는 된다’며 한 발 물러서게 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면서 제가 이제 철이 들어 세상과 현실을 알아가게 된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포기하고 세속화 및 (개인주의적) 가족주의화 되어가고 있는 것인지 도저히 알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결혼과  육아라는 인생의 새로운 단계들을 새롭게  밟으면서 신앙과 현실 사이에 더  많은 고민과 혼란, 그리고 가치관의 충돌이 생기게 됩니다. 머리로는 한국적 가족주의를 반대하면서도 몸 속에는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지라 나의 가족을 챙기고 보호하는 데에는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저 자신을 발견합니다. 한국 사회의 주요한 고질적 문제들은 대부분 과도하고 빗나간 자식 사랑 때문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자기 자식 챙기는 데에는 웬만한 고슴도치 부모와 같은 저의 모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제자도를 이야기하시면서 가족 이야기를 꺼내셨구나 생각이 들다가도, 예수님도 돌아가시기 직전에 그 앞에 있었던 어머니를 제자에게 맡기신 것은 피의 진함을 말해주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하게도 됩니다.

      이렇게  고민과 혼란은 쌓여져 가는데, 이러한  고민과 질문들을 나눌 사람들은 더  적어져 갑니다. 아마 개인적으로는 결혼과 함께 유학생활을 하게되어 많은 친구와 선후배들로부터 멀어진 것도 이유이겠지만, 그러한 고민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지 않기도 하고, 설사 있더라도 그러한 이야기들을 함께 나눌 기회가 부족한 것이 더 큰 이유인 것 같습니다. 또한 공부를 하고 있든지 직장을 다니고 있든지, 그래도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경우에는 좀 나을 수 있지만, 많은 경우에는 이러한 고민을 나누기는 커녕 예배, 말씀, 기도, 독서 등의 기본적인 영성의 삶을 살기에도 벅차도록 바쁜 것이 많은 30-40대 기혼자들의 현실입니다. 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일요일에 교회가는 것이 사치에 가까운 분위기입니다. 얼마전 인터넷에 올라온 초등학생의 시처럼 “냉장고는 자기에게 먹을 것을 주고 강아지는 자기와 놀아줘서 좋은데 아빠라는 존재는 왜 있는지 모르겠다”라는 말을 듣는 것이 오늘날 한국 아빠들의 현주소입니다.  

 KOSTA – 기혼자들의 새로운 기회?

      KOSTA 연차 수양회 참여자 중에 기혼자와 비청년층(‘청년’의 기준이 무엇인지는 모호하지만)의 비율이 높아짐에 따라 운동으로서의 KOSTA의 정체성과 방향에 있어서나 집회로서의 KOSTA 연차 수양회의 운영과 구성에 있어 많은 도전과 질문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KOSTA의 연차 수양회에 이들의 참여 비중이 높아졌는데, 그렇기 때문에 KOSTA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점점 깊어지고 진지해지는 것 같습니다. 과연 KOSTA가 이러한 새로운 부류의 사람들을 KOSTA의 운동의 흐름에 있어서나 수양회의 운영에 있어 적극적으로 품어야 하는가, 그렇게 하는 것이 지금 KOSTA가 품고 있는 KOSTA의 핵심 가치에 부합하는가 조심스러우면서도 결단력 있게 고민하고 실행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이야기는 제가 이 자리에서 할 입장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단지  만약 KOSTA가 이 계층을 적극적으로 품고  나아간다면, KOSTA가 앞에서 짧고 무작위하게  언급했던 것과 같은 고민들이 함께  나누어지고, 이러한 이슈들에 대해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삶의 모습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도록  도전이 주어지는 자리가 되면 좋겠다라는 바램을 가져봅니다.

      현재의 KOSTA 수양회에도 기혼자들을 위한 프로그램들이  있습니다. 세미나 중에 기혼자들을 위한  세미나들도 있고, 또 몇 년 전부터 기혼자 강사와의 만남을 통해 조금 더 자유롭게 고민을 나눌 수 있는 기회도 제공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주제들은 대부분 부부관계와 자녀양육, 그리고 소위 ‘F2 이슈’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정체성 문제에 제한되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절대 아니고, 또한 저와 저희 가정을 포함해서 KOSTA에 오시는 가정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이 이슈들이 갖는 무게감이 얼마나 큰가 공감하게 됩니다. 하지만 내가 기혼자이기 때문에 ‘가정 안에 임하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만 고민할 것이 아니라, 기혼자이기 때문에 잊혀져 가고 있을 수 있는 ‘이 땅 가운데에 임하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 기혼자의 특별한 상황과 입장에서 지속적으로 고민하고 실험하고 섬길 수 있는 도전과 용기를 얻을 수 있는 KOSTA가 되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져 봅니다.

      KOSTA는  ‘흩어진 나그네’로서 외국 땅에서 다른 민족을 말씀과 사랑으로 섬기며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한(Korean)민족의 삶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소수 민족’이라는 특성상 경제·사회적 불안정성이 강하고, 따라서 자기 보호의식이 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이웃을 돌아보기보다는 나와 내 가정의 안정에 더 집착하게 되기 쉬운 것이 사실입니다. 이러한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는 미혼자, 기혼자 관계없이 나타날 수 있지만, 이러한 괴리는 ‘가정’이라는 변수에 의해 더 증폭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습니다.

      KOSTA가  기혼자들을 적극적으로 품는다면, 수많은  이 땅의 결혼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의  삶에서 위와 같은 괴리가 좁혀져가도록  때로는 힘과 용기를, 떄로는 자극과  도전을 던져주는 자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를 위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잘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 속의 답답함과 삶에서의 괴리를 느끼는 분들이 있다면, 그 답답함과 실망, 혹은 무력감을 함께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서로에게 격려와 위로를 심어주는 좋은 시작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신자은] KOSTA의 노령화, new vision to serve or challenge to overcome?

미국내 한인 유학생 통계에 따르면 학부생의 비율이 점차 증가하고 있습니다. Institute of International Education는, 전체 한인 유학생 중 학부생이 69.4%, 대학원생은 15.0%인 것으로 보고하고 있습니다(2008/9학년도 기준)

반면, 미국 코스타에 참가한 코스탄의 구성에서는 평균 연령의 증가, 기혼참석자 비율의 증가 (50% 상회, 2010 Chicago Conference), 그리고 직장인/일반 참석자 비율 증가의 특징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eKOSTA에서는 이와 같은 현상이 한인 청년학생운동을 지향하는 KOSTA와, 넓게는 청년학생운동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어떤 도전을 주는지 고민해보고자 하며, 여러분의 다양한 의견을 듣고자 합니다. 아래와 같이 의견을 주실 분들은 eKOSTA@kostausa.org로 메일을 주시기 바랍니다.

(eKOSTA 편집부)

“청년학생”운동, 그 이후

올해로 KOSTA 25주년을 맞이하였다. 25년동안 KOSTA의 섬김의 대상은 KOrean STudents in America(북미 유학생) 에서KOrean STudents Abroad로, 이제는KOrean STudents All nations으로 확장되어왔고, 대학원 유학생중심에서 1.5세를 포괄하는 학부와 청소년 사역으로 확대되었다. 또한, 조국과 민족을 향한 복음적 소명의 영역을 모든 나라와 족속을 향한 한인 디아스포라의 선교적 사명으로 발전시키기에 이르렀다. 복음주의 청년학생운동으로서의 KOSTA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구원 역사와 하나님 나라 확장에 대한 기대는 오늘도 우리로 하여금 뜨거운 열정가운데 살게 한다.

이러한 일련의 발전과 변화가운데에서도 한가지 변화되지 않은 KOTSA의 핵심가치는, 바로 KOSTA는 한인 “청년학생” 운동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학생”는 현재 학생인 사람들에 국한 하지않고, “학생”일 때에 KOSTA에 동참했던 사람들, 졸업을 하고 사회인으로서 KOSTA와 함께 하는 사람들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이해된다. 구체적인 사역의 영역에서도 이들 KOSTA “선배”들의 지속적인 헌신과 섬김 – 멘토와 강사님들의 background를 주목해보자 – 을 통해서 후배 “학생” KOSTA가 가능하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전 “청년학생”일 때 KOSTA과 함께 했던 사람들이 멘토, 간사, 강사, 교사등의 한정된 영역이외에 KOSTA에 설 자리는 어디인지, 그들에게 KOSTA는 무엇을 기대하고 또 제시하는가. 일보 확장해서, “청년학생”의 때에 KOSTA를 만나지 못하고 “청년 이후 사회인”의 시기를 지나는 사람들에게 KOSTA가 reach out할 수있는 가능성은 없는가, 복음주의 청년 학생운동으로 태동되고 발전해온 KOSTA에게 복음주의 “청년 이후” “부부-부모” “사회인” 운동의 역할까지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요구일까.

위의 질문들은, KOSTA의 미래에 대한 추상적이고 거시적인 논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솔직히 그럴 여유도 자격도 없다), 다분히 개인적인 고민과 갈증, 경험과 관찰에서 비롯된 것이다. 1998년, 유학생으로서의 힘겨운 첫 1년을 마치고 처음 KOSTA 시카고 conference에 참석했을 때, 나는 누가 뭐래도 “청년학생”, 한인 유학생이었다. 2002년 결혼을 한 이후에도, 나는 여전히 “학생”이었고, 서른이 채 못 된 나이었기에 아직은 “청년”이라고 불리울 수 있었다. 그러나 2008년, 직장인이며 두 아이의 엄마로 서른 중반이 된 시점에 다시 KOSTA의 문을 두드렸을 때, 그리고 나와 비슷한 인구학적/사회경제적 조건을 가진 사람들과 조별모임을 하면서, ‘펄펄 뛰면서 부르는 엇박자의 찬양’을 잘 따라가기 어려운 부모된 우리들은 KOSTA의 중심에서 다소 벗어나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면, 이제 ‘학생’ 아니고, 또 ‘청년’의 일반적인 특징들이 많이 희석되어있어서, 진정한 “청년학생”들을 위한 자리에 minority로 우리 자신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조별모임의 귀한 것과, 오전 QT의 풍성함을 우리가 왜 모르겠는가. 부부가 함께 하는 말씀 묵상의 그 깊음과 아름다움을 왜 우리가 사모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졸리고 배고프고 떠들고 우는 아이들이 있다면 앞서 열거한 것들을 부부 중 한 사람, 혹은 한 가정으로서의 부부는 포기하게 된다. 아이들이나 배우자의 희생이 없이는 온전히 감당하기 어렵고, 또 KOSTA가 기대하는 분량의 섬김을 하는 것이 물리적으로 가능하지 않을 수있는 여러 변수때문에 기혼 참석자들은 조장 지원에 주저하게 된다. KOSTA의 통계에는 이 현상이 ‘기혼조 조장 부족’으로 잡힌다. KOSTA의 사역가운데서 발견되는 기혼부부의 非청년적 특징은 어린 자녀가 있을 때 발현되기는 하지만, 자녀가 아직 없는 젊은 부부에게서도 “청년”적인 역동성의 저하가 물리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어느 정도 발생, 진행되는 것이 사실이다.

나는 작년에도 올해에도 KOSTA 연차 수양회에 당당하게(?) 참석하였다. 그리고 40대의 동료 기혼가정 참석자들과 교제하였다. 우리들 “청년 이후”세대에게 KOSTA는 무엇일까? 영적 재충전, 지역교회에서 공급받지 못했던 좋은 말씀들을 통한 도전, 비젼의 (재)발견, 관계의 회복, 그리고 좋은 그리스도인들과의 만남. 혹자는 이것을 family retreat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KOSTA에서 제공하는 모든 좋은 것들을 누리면서 프로그램을 초월(?)하는 가족 휴가를 보내는 것이라고 말이다. 이것이 과연 KOSTA가 해야될 역할인가에 대한 의구심을 가득담고서.

현상에 대한 description을 잠시 뒤고 하고, 보다 실질적인 질문을 나 스스로에게 던져본다. 이제 마흔이 그리 멀리 보이지만은 않는 이 시점에 나는 복음주의 “청년”학생운동이라는 KOSTA를 “졸업”해야 하는 것인가? 만약 “졸업”한다면 그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KOSTA는 집회나 조직이 아니고 ‘운동’이기에, “졸업”이라는 개념자체가 성립할 수없지만, KOSTA의 모든 사역과 집회에 참여하는, 혹은 그러한 사역과 집회가 초점을 두고 있는 대상자라는 협의에서 생각해볼 때, 더욱 좁게는 매년 연차수양회에서 제공되는 세미나의 주제들을 접할 때마다, 장성한 분량으로 가지 못하고 KOSTA가 떠먹여주는 이유식에 매달려 있는 영적 어른 아이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KOSTA의 “청년”정신을 노쇠 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두렵고 죄스러운 마음을 갖게 된다. 그러나, 솔직히, KOSTA같은 곳을 원하는 우리들, 非청년 부부 사회인에게는 KOSTA외에 갈 곳이 없다!!

KOSTA의 노령화, new vision to serve or challenge to overcome?

대부분의 한인 유학생들이 학업을 마치고 사회인이 되면 조국으로 돌아가던 때와 달리, 최근에는 많은 유학생들이 학업을 마친 후에 결혼을 통해서, 취업을 통해서 미국에 정착을 한다. 이러한 추세는, KOSTA시카고 conference의 참석자 통계에 분명하게 반영되고 있으며, 확장일로에 있는 kids KOSTA, youth KOSTA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KOSTA의 영역이 학부생과 조기유학생 혹은 1.5세 학생으로 확대되는 것은 “청년학생”운동이라는 이름에 맞는 방향성이다. 그러나, “청년학생” 이후에 대하여 KOSTA는 어떤 방향성과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묻고 싶다. 참석자의 연령분포와 미혼-기혼비율변화가 KOSTA에게 말해주는 것은 무엇이며, KOSTA는 이 현상을 새로운 vision으로 바라보는가, 아니면 위기적인 현상으로 해석하는가.

매년 더 많은 아이들과 기혼 가정이 참석함으로 인해서 운영상의 어려움이나 더 많은 인적 물적 자원이 동원되어야 한다는 점은 부인할 수없다. 자봉은 부족하고 기혼 조의 조별모임은 ‘아빠’모임 혹은 ‘아무나 한 사람’모임이 되버리기도 한다. 아이들과 관련된 안전사고와 식단 문제, 숙소의 확보 및 배정 문제, kids KOSTA와 youth KOSTA 의 부담이 더욱 커진다. 프로그램에 있어서도, 부부상담이나 자녀 교육과 같은 가정사역 영역에서 확장되고 있는 현상을 염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내 안의 문제를 들여다보고 고민하는 소즉적인 접근을 뛰어넘어 세상을 향하여 힘차게 치고 나가는 “청년학생”운동으로의 KOSTA의 방향성에 맞지 않다는것이다. KOSTA가 “청년학생”운동이라는 점에서 위의 현상들은 희망적이고 이상적이기보다는 ‘위기’라는 말로 요약될 만 하다. 그렇다면,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할 차례이다. ‘위기’를 ‘기회opportunity to explore’로 볼 것인가, 아니면 ‘도전challenge to fight’로 볼 것 인가가 key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를 따라, 모든 사람은 “청년학생”의 때를 거쳐서 “청년 이후”의 삶을 맞이하게 된다. “학생”이었던 사람은 “직장인”이 될 것이며, 그저 한 사람의 독립된 “adult”이었던 사람은 “부부”가 또 “parent”가 된다. 이 시기를 지나가는 혹을 맞이하게 될 모든 KOSTAN들에게 KOSTA는 무엇인가? “청년”이후의 삶을 준비시켜주는 운동인가? “청년”의 때에 KOSTA에 동참하고 도전받고 헌신한 후에는 당당히 KOSTAN의 삶, 즉 “복음을 선포하고 성경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을 살아야 하며, 이것은 KOSTAN 스스로가 지어야 할 짐이며 소명이다라고 나는 부끄러운 마음으로 KOSTA 를 “졸업”해야만 한다. 그러나, “청년 이후”에도 우리는 계속 KOSTA가 필요하다고 한다면 이에 대한 KOSTA의 책임과 비젼은 무엇인지를 함께 고민해주기를 원한다. 만약 “청년 이후”의 삶이 “청년”때 KOSTA를 통해서 훈련되고 도전받고 헌신한 바 대로 살아지지 않는다면, 이는 “청년학생”운동의 한계인가, 아니면 “청년학생” 자신의 문제인가?

다시 부끄러운 나의 경험과 나의 동료 젊은 부부들의 삶에 대한 간접 경험으로 돌아가본다면, “청년”의 때를 KOSTA과 함께, 하나님과 함께 (각자 나름대로) 뜨겁게 보냈던 두 사람이 만나서 이룬 우리 가정이 “청년 이후”의 삶, 하나된 두 사람의 삶, 두 아이를 책임지는 부모의 삶, 그리고 사회인으로의 삶을 살면서, “청년학생”때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문제들과 도전에 대하여 전적 무지함과 지혜없음의 상태에 있으며 따라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을 목도하게 된다. 더욱 답답한 것은, 이 문제들에 대하여 무언가 분명하게 대답해 줄 수있는 어떤 source도 없으며 모두가 그저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나는, 후배 “청년학생”들에게 제시해줄 무언가를 배워가고 있기는 한 것인가 좌절하는 한편, 지금의 “청년학생”들은 하나님의 축복의 섭리를 따라 곧 맞이하게 될 “청년 이후”의 삶에 대하여 잘 준비되고 있는지, 과연 “청년 이후”의 나는 무엇을 miss해왔고 이제 무엇을 pursue해야 되는지 의문에 의문을 더해갈 뿐이다.

“청년 이후”세대가 맞는 새로운 도전

미혼 청년학생(99-01), 기혼 청년학생(02-04), 그리고 기혼 非청년非학생(?)(08-10)으로 KOSTA와 함께 하면서, 나는 “청년”의 때에 도전받고 헌신했던 열정을 실제의 삶으로 지속적으로 구현해야 하는 기본명제의 굳건함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실천양식에 있어서 “청년”의 때에는 고려할 필요 없었던 새로운 조건들이 개입되는 것을 실감하였다. 바울과 같이 자신의 소명을 위해서 미혼으로 남기를 선택하는 것이 귀한 부르심인 것을 사실이지만, 결혼과 가정, 그리고 자녀라는 공동체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고안하신 틀이며 축복이다. 하지만 헌신된 미혼 청년일 수록, 헌신된 청년 부부일수록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양육해야 하는 부모의 자리에 설 때에 자신이 얼마나 준비되지 못했는지를 깨달으며, 자신이 소망하고 계획했던 모든 사역을 이전과 같은 우선순위와 효율성으로 감당하지 못하게 됨에서 오는 좌절과 답답함을 절실히 경험하게 되고 이것이 부부관계에 걸림돌이 되는 경우마저 발생한다. 또한 “청년학생”의 시절의 순수함을 마음이 품고 세상가운데 하나님 백성으로 살고자 할 때, 직장인으로서 사회인으로서 부딪히게 되는 현실은 캠퍼스안에서 경험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더욱 치열하고 더욱 거센 물결로 우리를 압도함을 경험하게 된다.

어린 자녀를 양육하는, 아주 헌신되고 열정적인 “청년”의 때를 지냈던30-40대 가정들의 “영적인 끼인 상태”는 비단 KOSTA내에서만 발견되는 현상이 아니다. 아이들 때문에, 아직은 불안정하기만 한 사회생활가운데 struggle해야만 하는 이 시기의 성도들에게 신앙생활은 종종 현상유지이상이 되기 어렵다. 대예배에 참석하지 못하고 자모실에서 아이들의 울음소리과 가운데 예배를 드려야 하는 아내를 혼자 두고 새벽부터 저녁까지 봉사와 섬김을 감당할 수있는 – 마치 “청년”처럼 – 남편은 많지 않다. 마음껏 찬양하고 기도하며 부부가 함께 손 잡고 중보할 수있었던, 그리고 하나님앞에서의 비젼과 결단을 밤새 이야기 나누었던 그 시간은, 종종 10분도 넘기기 어려운 주1회의 약식 가정예배로 대체되어버린다. 부부가 나란히 차를 나누며 각자의 비젼과 소명을 나눈 때가 언제인지를 회상하는 현상을, 정기적금과 선교헌금사이에서 고민하는 모습을, 뜨거운 “청년”의 때를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혹은 헌신된 마음이 없기 때문에라고 결론내리는 것은 너무 섵부르지 않을까.

복음주의 운동에 동참한 “청년학생”에게 적용되는 성경적 원칙은 “청년 이후”의 세대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따라서 만약 한 사람이 “청년학생”으로서 이러한 성경적 원칙위에 잘 서 있고 훈련되어 있고 헌신되어 있다면 그가 “청년 이후”의 시기를 지날 때에도 그 삶에서 실현되어야 할 본질적인 가치는 동일하다. 그러나 구체적인 삶의 문제를 앞에 두고 이 가치를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하는 부분에서 “청년학생”이 내놓게 될 해법과 “청년 이후”의 해법에는 차이가 있을 수있다. “미혼 청년 학생”이 자신의 젊음과 자신의 career를 헌신하는 것과, “청년 이후 기혼 사회인”이 동일한 헌신을 하는 것은 “청년학생”의 그것을 단순연장하는 것이 아닌, 새로운 차원에서의 접근을 요구한다. 부부 사이에, 부모와 자녀사이에는 삶의 목적과 방향과 방식에 있어서 존중과 침범의 tension이 존재한다. 이로 인한 갈등과 오해는 신실하게 “청년학생”때에 복음안에서 구축한 원칙대로 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 남편 혹은 아내일 수록, 부모일 수록 오히려 더 처절하게 맞닥뜨리게 되는 현실이 되기도 한다.

가난했던 “청년학생”의 때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던 재정관리, 이제 부부이므로 또 부모이므로 새롭게 발견하게 된 불완전하고 미성숙한 인격의 문제,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에 따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자녀를 양육하는 문제, 성실하고 productive한 employee이상의 것을 요구하는 직장생활과 복잡해진 인간관계, 자녀양육과 가사 때문에 좌절된 career등은, “청년학생”의 단계에서 획득한 복음적 원칙으로 쉽게 그 답이 찾아지지 않으며 또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하나의 답을 찾기 어려운 여러가지 삶의 도전들중 일부에 불과할 것이다.

이와 같은 고민들이 모든 “청년 이후” 사람들에게 해당되지는 않을지라도, 적어도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을 만한 정도의 사람들에게 절박하고 절실한 삶과 신앙의 문제로 다가오고 있음도 부인할 수 없다. 부부관계의 문제도, 자녀 양육의 문제도 모두 ‘시간’이 해결해준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렇지만 ‘시간’이 과연 최선의 해결책일까. 이 ‘시간’동안 긴장감없이 “청년 직후”의 시기를 보내는 사이, 나와 우리 가정 그리고 우리 자녀들이 무방비상태로 세상의 가치에 물들어 간다는 것이며, 그래서 정말 “때”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시 그 “청년학생”의 길로 돌아오지 못한다는 점이다. 아무도 우리가 “청년학생”의 때에 KOSTAN이었음을 절대 아무도 알지 못하는 그런 형태의 삶에 고착되는 것이다. 과연 “청년학생”의 때를 이제 막 지나온 “젊은 부부”는 기다림 혹은 일시적 쉼의 시기를 지나야만 하는 것일까? 부부이기 때문에 부모이기 때문에 사회인이기 때문에 “청년학생”보다 더 역동적이고 더 powerful하게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세상속으로 나아가고 하나님 나라 확장이라는 우주적인 사역에 더 적극적으로 동참할 수는 없을까?

여기서 나는 부부관계 상담, 내적 치유, 부모학교, 자녀 양육과 같은 전통적인 가정사역의 틀을 뛰어넘는, 북음주의 운동으로서의 “젊은 부부 KOSTA”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싶다. “젊은 부부”에의 reach out은 청년학생 사역에 비해서 더 많은 인적 물리적 투자를 요구할 것이다. 그러나, 생업과 양육에 잠식되어 있는 “젊은 부부”들의 정신과 마음을 새롭게 일깨우고 일어나서 뛰게 만들 수 있다면, “청년학생”때의 향수에 의지않고 오늘 세상속 한가운데서 하나님 백성으로 구별되게 살아갈 수있도록 empower할 수 있다면, “청년학생”운동을 뛰어넘는 열매를 맺게 될 것을 기대할 수있다. 왜냐면, “청년학생”때의 헌신과 서원이 실질적으로 삶에서 세상가운데서 “실현”될 것이기 때문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roll model이 없다고 탄식하기를 멈추고 수많은 roll model들이 사회 각 영역에서 배출되도록 과감히 투자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나이를 먹고 사회인이 되고 부모가 되면 세상의 가치와 타협한다, 헌신이 사라진다라고 어떤 “청년학생”이 꾸짖는다면, 나는 부끄러운 마음으로 하나님앞에 그“청년학생”앞에 사죄할 것이다. 그러나, 나이를 먹고 사회인이 되고 부모가 된다고 해서 저절로 더 능력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지는 않으며, 어느 누구도 과거의 열정과 헌신에만 의존해서 오늘의 영적전투를 감당할 수는 없다는 일반론적인 진실을 이해해주기를, 그리고 피를 토하며 기도하는 “청년학생”들 앞에 떳떳한 “청년 이후”의 그리스도인으로 우뚝 서서 그들이 맞이하게 될, 우리가 지나왔던 그 길을 함께 손잡고 힘을 보태줄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선배, “청년 이후”들을 위해 지원사격해주기를 간청한다.

[곽준혁] 로마를 꿈꾸는 나라에서 (2)

코스탄의 소리


로마를 꿈꾸는 나라에서 (2)


– 애국심 (On Patriotism)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All a man’s ways seem right to him, But the Lord weighs the heart.” (잠언 21:2)


들어가며


두 가지 장면들이 갑자기 떠오릅니다. 몇 해전에 뉴욕에 있는 어떤 한인교회를 방문했을 때, 광복절을 기념해서 태극기와 성조기를 앞세운 목사님의 입장으로 예배가 시작된 것이 첫 번째로 떠오르는 장면입니다. 두 번째는 담당부장으로 지난 1년간 섬겼던 대학부에서 영주권이나 시민권을 가진 1.5세 또는 유학 온 학생들이 한국의 전쟁반대 분위기와 이라크 전쟁 이후 고양된 미국적 애국심 사이에서 갈등 하는 장면입니다. 첫 번째 장면이 80년대 대학을 다닌 사람들에게는 낯설지않은 ‘한국적 민족주의’ 또는 ‘애국심’의 단면이라면, 두 번째 장면은 이민 1세 부모를 가진 친구들과 부모의 학업이나 회사 일로 영주권을 취득한 학생들이 가지는 자기정체성(identity)의 문제가 노출된 것입니다.


이 장면들과 함께 이런 질문들이 뇌리를 스칩니다. 기독교인은 결코 어떤 정치적 소속감도 가져서는 안 되는가. 기독교인들 사이에 전쟁이나 민족적 갈등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하는가. 과연 1.5세 이민자와 한국국적을 포기한 친구들에게 한미 간 정치적 갈등이 일어날 때 미국시민으로서가 아니라 한국인으로서 판단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 좋은가. 북한을 폭격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말하는 한인 1.5세나 2세들을 미국인을 대하듯 쳐다보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무조건 전쟁은 안 된다는 논리로 문제들을 지나치는 것이 좋은가. 복음은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좋은 것이나, 정치는 현실이라는 이분된 초점 없고 무원칙적인 이야기만 할 것인가. 모두 답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의 믿음과 대립될 수 있는 선택들을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민족주의와 애국심


학문적 토론을 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미국에서 민족주의를 대중동원수단이나 사회 병리적 집단행동을 가져오는 원인의 하나로 취급하는 반면, 애국심은 가족에 대해서 가지는 연대 감 만큼이나 자연 발생적인 감정으로 간주하는 이유를 간단하게 살펴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식민지배, 오랫동안 단일민족공동체를 유지해왔다는 자부심, 이러한 자부심이 해방과 전쟁, 그리고 개발독재의 동원과 민주화의 과정 속에 너무나도 큰 역할을 해 온 우리에게는 민족주의를 한갖 이데올로기로 이해하는 것이 의아할 때가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의아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일본이 서양지식을 받아들이면서 만든 ‘民族’이라는 단어가 전달하는 정체성이 언제부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분노와 수치, 기쁨과 우월감을 동시에 가질 수 있도록 만든 원인이 되었는지 누구도 고민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또 기독교인들이 ‘민족’이 ‘하나님의 나라’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고민하기를 오히려 주저한다는 사실이 우리를 의아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민족이 민족주의운동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민족주의운동이 민족을 형성시켰다는 소위 ‘상상의 정치적 공동체’ (imagined political community)로 민족을 정의하는 구성주의 시각에서 민족주의 확산과 관련된 인식론적 변화라고 주장하는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내용들은 (1) 왕과 교회를 중심으로 했던 유럽의 정치질서가 붕괴되는 가운데 성경에서 등장하는 천년왕국의 정치적 응용이 있었고, (2)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그리고 이후에 전개된 사도들의 목숨을 건 포교활동을 대중동원과 설득으로 이해한 지식인의 계몽운동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대를 초월하는 정치적 충성, 수 천년 전에 이 땅을 밟았던 사람들 조차 우리의 아버지요 어머니라고 믿게 만드는 시공을 초월한 일체감, 이런 충성을 번영(prosperity)과 영속(eternity)의 확신으로 변화시키는 매개체로 ‘민족’이 창출되고 또 의식적으로 또 무의식적으로 재생산되는 과정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수 천년 전에 일어난 십자가의 사건이 동시적으로 느껴지고 경험되도록 만든 바울사도의 활동이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한 사건에 대해 유사한 생각을 공유하게 만든 신문의 등장과 맞물려 계몽주의 운동의 초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참고, 갈 2:20). 만약 민족주의의 확산과정에 ‘하나님의 나라’가 ‘민족’으로, ‘예수님의 십자가’가 ‘한 영웅의 죽음’으로 뒤바뀌는 과정이 서양에서 벌어졌다면,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동양이 무의식적으로 답습하고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민족’ 또는 ‘민족주의운동’을 바라보아야 할까요.


둘째,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이후에 ‘민족주의’의 대안으로 제시되는 애국심(patriotism)도 다시 살펴봐야 할 시점에 우리는 서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 로마공화국, 그리고 이탈리아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도덕적 품위를 제공했던 ‘조국에 대한 사랑 (amore della patria)’이라는 화두에서부터 미국인들을 일시에 숙연하게 만드는 ‘Die for Country’라는 구호에 이르기까지 애국심은 자기가 살고있는 터전과 함께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지키려는 자연적인 감정으로 간주되어 왔습니다. 애국심은 우리에게도 중요한 사회적 덕목입니다. 임금이 나라였던 시대에 君師父一體를 도덕적 근거로 여겼고, 잃어버린 자유와 주권을 되찾기 위해 목숨을 던졌던 독립 운동가들이 愛國愛族의 정신으로 자신들을 무장했었고, 신세대에게도 ‘대한민국’을 힘껏 외치며 기뻐할 수 있는 용기가 스스로를 대견하게 생각하도록 만드는 이유가 됩니다. 아버지의 나라를 지키고, 어머니의 언어와 자기의 생활터전을 아끼는 애국심은 개인주의로 얼룩진 현대사회에서 개개인을 묶을 수 있는 시민적 덕성으로 강조됩니다. 그러나,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아버지의 나라를 지킨다는 애국심도 자기들의 안전을 위해서는 너무나도 공격적일 수 있다는 사실때문에 새로운 평가를 받아야 할 시점입니다. 아버지의 나라에 대한 애착과 사랑이 위대한 제국의 건설이라는 소명과 이기적인 욕망의 확대된 집단심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이번 이라크 전쟁에서 알게 된 우리에게 애국심도 더 이상 아름다운 감정일 수만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애국심이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경향으로 전환되었을 때 침묵하는 것이 더 이상 용납될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성경 속 ‘민족’ (Nation)


민족주의와 애국심 모두가 공격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성경을 묵상해 보면서 몇 가지 짚고 넘어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고정관념이 성경이 전하는 ‘민족’과 관련된 내용들을 무의식적으로 과장하거나 왜곡할 수 있다는 염려가 생긴 것입니다.


신학적 지식이 일천하지만 나름대로 정리하자면 구약에서 민족(nation)으로 번역되는 단어 고이(gowy)는 족속과 ‘하나님의 약속’이 합해진 의미를 가지고 있는 듯 합니다. 민족이 가지는 국민주권과 정치적 통일체와 같은 의미들은 여기서는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혈족이 가지는 역사적 혈연적 동질성도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아브라함의 핏줄이 기준이라면 이스마엘의 자손들도 이스라엘과 같은 민족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입니다. 고이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그리고 이들의 후손들로 하나님만 섬기는 사람들과 구별되는 다른 사람들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믿음에 상응하는 축복을 기준으로 이방인(the Other)과 우리(We)를 구별합니다. 구약성경에서 ‘민족’이 이스라엘을 지칭할 때보다 이방인(the Other)을 지칭할 때 더 많이 사용되는 사실도 구별의 기준이 인간적인 잣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눈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참고:시편22:27). 이런 이유에서 유대인들의 선민의식은 하나님의 기준을 핏줄로, 약속을 선택으로 이해해서 만들어낸 차별은 아닌지 생각하게 됩니다. 통일 유다의 왕 다윗에게도 따져보면 이방인의 피가 섞여 있었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신약에서도 민족은 ‘족속’의 의미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과 다른 사람들을 구별할 때 사용된 단어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신약성경에서 민족으로 번역되는 단어는 ethnos입니다. 출생을 의미하는 라틴어 natio와 유사하게 삶을 공유하는 집단 또는 족속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헬라 어입니다. 민족의 고대성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근대 민족국가 이전에 형성된 정치적 문화적 공동체를 지칭할 때 사용하는 ethnicity라는 단어가 여기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방인 기독교인(Gentile Christian)을 지칭할 때 ethnos를 사용했고, 개역성경에서 번역자들은 ‘족속’이나 ‘민족’을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예, 마태 22:19). 여러 가지 맥락에서 ‘민족’은 자기 스스로를 지칭하기보다 다른 사람들을 지칭할 때 사용되었고, 이 기준에는 혈연적 언어적 동질성의 여부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지’의 여부가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약의 민족 관은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구하지만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통해 고난과 위로를 받으면 모두가 같은 민족이 되는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중동의 끝없는 민족분쟁과 공격적인 미국의 애국심이 기초할 수 있는 성경적 근거는 없다고 말하는 것이 지나친 해석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1)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출 22:21, 23:9, 예레미야 7:6), (2) 약한 자를 약하다고 탈취하지 말며 (잠 22:22), (3) 고아와 과부를 두둔해 주라는 (이사야 1:17) 말씀을 받습니다. 만약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억울하게 묶인 이를 끌러주고 멍에를 풀어주고, 압제 받는 이들을 석방하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버리기 위해서” 일으켰다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통해 은혜를 받을 것입니다 (이사야 58:6). 그러나, 미국이 이기와 욕망에 이끌려 전쟁을 했다면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는” 하나님께서 허무한 결과로 우리 모두를 가르치실 것입니다 (로마서 3:29). 로마를 꿈꾸는 미국이 ‘힘’의 면류관(stephanos)만을 받아쓰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는 흰 말을 탄 자같이 행동한다면 무엇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까요 (요한계시록 6:2). 때늦은 감은 없지않지만 미국에서 기독교인들이 무분별하고 공격적인 애국심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은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민족주의와 애국심이 남다르게 강한 우리나라도 민족주의와 애국심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입장이 진지하게 토론되고 정리되어야 할 시점이 된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민족주의나 애국심에 호소하기 전에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정당한지 하나님께 먼저 물어보는 사람들이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결론을 대신해서: Christ Inside & Love Outside


민족주의와 애국심에 호소하는 국민교육을 세계인류의 보편적 도덕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정치 철학자들의 주장이 서구중심의 ‘보편’으로 차별만 가져온다고 반대하는 학자들의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 있습니다. 이들의 논쟁을 지켜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사랑 (Love)이 차이를 극복하고 편견을 보편으로 바꿀 유일한 매개체가 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국가간 민족간 갈등 이전에 예수님의 마음을 가슴 속 깊이 간직하고 있다면 설사 총부리를 맞들고 있다 하더라도 순화시키고 또 선한 일로 이끌 그 무엇이 남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이유는 사랑은 주는 사람이 아니라 받는 사람의 기쁨이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로 가까이 갈수록 서로의 거리가 좁혀지기 때문입니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도, 처 처에 기근과 지진이 일어나도 예수님을 마음 속 깊이 묵상하는 사람들에게는 사랑이 넘쳐 날 것이며 이 사랑은 곧 모두가 싫어하지 않는 보편의 근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1년 동안 코스탄의 소리를 써오면서 저 같은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또 말 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키아벨리로 박사논문을 쓰면서 인간의 욕망과 믿음의 언어들이 구별되어 사용되지않는 것을 보면서 가지게 된 책임의식이 저를 지탱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지금까지 실패와 좌절, 기쁨과 환희를 가져 다 준 시간들도 큰 힘이 되었습니다. 너무나도 부족한 저에게 격려를 아끼지않으셨던 동역들과 이코스타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주님 주신 사랑으로 하나님의 소망이 되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하고 기도합니다.

[곽준혁] 로마를 꿈꾸는 나라에서 (1)

코스탄의 소리


로마를 꿈꾸는 나라에서 (1)


– 결과론에 대하여 (On Consequentialism)



우리가 스스로 행위를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예레미야애가 3:40)


들어가며


몇 해전 9.11테러로 수 많은 사람들이 삶의 터전에서 이유없이 죽었을 때만 해도, 사건이 터지자 병원으로 달려가 헌혈하는 미국인들을 보았을 때만해도, 교회에서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을 생각하며 미국인들과 함께 기도할 때만해도,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에 알카에다를 소탕한다며 쳐들어가서 부수고 뒤지고 할 때만해도 담담하게 지켜보았습니다. 그러나, 미군이 바그다드 시내 외곽으로 진입한 오늘 십 수년동안 억눌러 온 옛날 일들이 생각나기 시작했습니다. (이 글은 2003년 4월 5일에 쓰여졌습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 이후부터는 바울의 고백에 나오는 헛된 과거로 (빌립보서 3:1-16) 치부하던 일들이 뇌리를 스친 것은 아마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이 일들이 구태여 생각하고 싶지 않은 과거가 된 이유는 이때 제가 하나님이 중심 된 삶을 살지 못했다는 것과, 이 일들이 언젠 가부터 저도 모르게 자랑 삼아 이야기하는 추억이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일들을 기억하고 싶은 이유가 있습니다. 스스로를 기만했던 시간이었을 수도 있습니다만, 진지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했던 한 세대의 고민을 통해 우리 기독교인들이 생각해 볼만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결과론으로 현실을 바라보는 것이 바람직한가 하는 문제입니다.


결과론 (Consequentialism)


대학을 다닐 때 미국 유학은 생각할 가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신식민지 반봉건 사회냐 국가독점자본주의 사회냐 하는 구성체 논쟁에서 민족민주전선 이니 민중민주노선 이니 하는 민주화 방법론에 이르기까지 미국은 분단의 책임자요 개발독재의 후견인이요 제국주의의 상징이었기 때문입니다. 민주화에 대한 나름의 생각이 있던 제게 미국에서 공부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또 바람직하지도 않았습니다.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아내도 박사과정에 있는 지금의 저를 아는 사람들에게 이 사실들은 자기기만이나 젊은 시절 철없는 생각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결과론적 시각은 ‘현실’이나 ‘힘’만을 강조하는 비관적 현실주의와 마찬가지로 우리를 편견에 사로잡히게 할 수 있습니다.


지금 미국이 벌이고 있는 전쟁도 이런 결과론에 입각해 있습니다. 이라크와 벌이는 일방적 전쟁이 많은 사람들이 납득할만한 타당한 명분과 절차를 가지지 못했다는 사실은 전쟁을 이끌고 있는 강경파든 여론을 두려워해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온건파든 인정하고 있습니다. 사담 후세인 을 폭군(tyrant)이라고 부를 때 사용하는 자유(freedom)나 해방(liberation)이라는 용어들은 영미전통에서는 동의를 수반하지않고 법률적 절차를 따르지않은 자의적 지배와 힘으로부터 자유, 즉 ‘비지배’ (non-domination)의 원칙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미국은 주권을 가진 다른 나라에 선제공격을 하면서 국제법과 절차를 무시했고, 전쟁이 시작될 그 때까지 한번도 이라크 사람들의 의사를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미군과 영국군을 환영하는 이라크 사람들, 구호물자를 앞 다투어 가져가는 사람들을 텔레비전으로 보며 미국 사람들은 자신들이 벌이는 전쟁의 정당성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전쟁의 정당성은 단지 미국인들의 안전, 자기들이 상상한 위협(self-imagined threat)으로부터의 자유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만일 미국이 석유를 놓고 독재와 타협하려 했지만 번번히 기만 당한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한 전쟁이라고 말한다면 솔직하다고 생각될 것입니다. 미국이 주장해 온 국제화와 민주화의 세계적 흐름도 이 전쟁에 당위성을 부여하지는 못합니다. 전쟁 이후 경기부양정책이 실효를 거둘 것이라는 전망만이 그나마 솔직한 이야기일 뿐입니다. 오히려 성경말씀을 자기 주장 속에 작위적으로 집어넣는 현 미국 대통령의 연설들은 우리를 걱정스럽게 만듭니다 (“while almost every president has invoked a belief in God in some manner, Bush’s use of Scripture is notable because he has used it to help frame the stakes for possible war with Iraq” Chicago Tribune, March 2.)


모두가 결과론에 매달려 있는 듯한 인상입니다. 강경파는 이라크 재건과정에 참여하기 위해 벌써부터 손을 쓰는 유럽의 강대국들을 소개하며 국제질서는 결국 승자에게 줄을 서서 떡고물을 먹는 것일 뿐이라는 (to jump on the bandwagon) 신현실주의 이론을 마치 진리인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온건파 정치인들은 안전을 갈망하는 중산층의 목소리를 잘 알고 있기에 이번 전쟁이 단기간에 승리를 가져올 수만 있다면 결과적으로는 이익이 될 것이라며 비판보다 협력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테러와의 끝없는 전쟁이 선포되었을 때부터 다문화주의 나 국제협력의 화술은 힘을 잃었습니다. 인권 단체들도 이왕 일어난 전쟁이니 빨리 끝내는 것이 좋다는 주장만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1) 이라크가 실제 대량살상 무기를 가지고 있었고, (2) 이라크 인들이 미국이 주도해서 세운 새 정부를 진심으로 환영하며, (3) 전쟁을 반대했던 강대국들이 이라크 재건에 참여하기위해 전쟁의 당위성을 뒤늦게 인정한다는 식의 이야기가 나오는 일만 남은 인상입니다.


이런 결과론에 기초한 텔레비전 뉴스와 틈틈이 듣는 국방부의 발표들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결과론은 어쩌면 ‘자기 충족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sy)을 심리학적 언어로 위장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폭력으로 원하는 결과를 얻는 일을 고뇌에 찬 결단인 것처럼 말하면서 우리는 종종 상황을 과장할 때가 있습니다. 개발독재가 정당성을 얻을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은 물리적 힘으로 질서를 잡고, 강제로 반대론을 잠재우고, 많은 사람들을 동원해서 만든 그럴듯한 결과를 무조건 칭찬하는 문화입니다. 이런 결과론적 입장에서 본다면 가롯 유다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완성하는데 가장 공이 큰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예언된 바 그대로 예수님을 팔아 하나님의 말씀을 만족시킨 사람이었습니다. 너무나 극단적인 예가 될 수도 있습니다만, 어느 누구도 결과론에 입각해서 가롯 유다를 잘했다 칭찬하지 않을 것입니다. 가롯 유다는 결코 결과로 정당화할 수 없는 죄를 저지른 인물에 불과한 것입니다.


로마 흥망 사 속의 기독교


미국에서 벌어지는 보수다 진보다 하는 논쟁에서 흥미로운 점은 로마에 대한 언급입니다. 미국이 로마 공화국을 모델로 삼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몇 차례나 농사를 짓다가 독재 관(Dictator, 6개월 임기로 위기 시에 선출되며 전시 미국대통령과 비슷한 지위가 보장되는 직책)으로 선출되어 위기로부터 국가를 건져내고 위기상황이 끝나자마자 미련 없이 농부로 돌아간 킨키나투스 (Cincinatus)를 존경했다는 것, 연방 주의자들 (the Federalist)과 이에 맞선 반 연방 주의자들 (the anti-Federalist)의 논쟁에서 로마에 대한 갖가지 해석들이 공공연히 나타나는 것은 이런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미국 정치인들의 활동이 로마공화국의 원로원과 민회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연상하게 하는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닙니다. 선동적이라는 비난에 민감한 미국 정치인들의 모습을 볼 때 선동이라는 죄목으로 서로를 견제했던 로마의 귀족들이 생각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국가를 위해 죽는 것이 최고의 영광이라고 생각했던 로마의 평민들이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귀족과 벌이던 싸움을 포기한 것과, 미국 시민들이 많은 문제들을 접어두고 하나가 되어 전쟁에 몰두하는 것도 비슷합니다. 로마보다도 더 로마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시무시한 적이라고 자기들이 먼저 규정하고, 직접적인 위협도 없는 상황에서 쳐들어간 전쟁을 75% 이상이 지지하는 것은 11년 전의 걸프 전쟁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도 놀라운 일입니다. 수천발의 폭탄이 터지는 바그다드의 야경과 미군 탱크가 진입하는 바그다드 전투상황을 프로농구와 프로야구와 동시에 시청할 수 있는 이 상황을 이제부터는 미국적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습니다.


여기에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미국의 소위 ‘신보수’로 분류되는 정치인들 중에 로마의 멸망을 기독교때문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남성적인 전투성, 견제와 균형에 기초한 정치제도의 역동성, 경쟁을 통한 탁월함을 덕(virtus)으로 추구하던 로마의 문화는 공화국이 몰락한 이후에도 계속 되었지만, 기독교가 전파된 이후에는 차츰 변질되어 로마제국의 멸망으로 귀결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의 역사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로마말기, 중세와 르네상스의 초기, 그리고 니체의 자조적인 비난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인들이 현실을 회피하는 생활태도를 소위 ‘사색적 생활’ (vita contemplativa)이라며 비난했던 경우는 많습니다.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삶(vita activa)을 강조하기 위해 이런 비난을 하는 경우는 그나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에서 나타나는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쳐들어가는 이스라엘의 용맹성으로 신약에서 가르치는 사랑의 실천윤리를 보완해야 한다는 주장은 납득하기 힘듭니다. 부시대통령이 “America is not soft!”라고 말할 때, 럼스펠드 국방부장관이 기자들에게 “we will see soon!”이라며 비판을 피해갈 때 혹시 이 지도자들에게 신보수의 생각이 미국의 미래라는 이름으로 이미 자리잡지는 않았는지 궁금해지는 것입니다.


성경은 로마의 멸망은 기독교가 가르치던 사랑이라는 덕목이 아니라 무분별한 향락문화, 지도층의 부패, 그리고 가난에 허덕이던 하층민들에게 더 이상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애국이라는 화 두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로마서에 나타난 여러 가지 사실들을 종합해보면 이런 나라가 망하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로마는 어쩌면 기독교로 인해 멸망의 시간이 조금 연장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향락으로 가정이 파괴되고, 양심이 상실되고, 빈부의 격차가 극심해지고, 지도층의 부패가 이미 상식이 된 로마에서 기독교인은 오히려 소금이요 빛이 아니었을까 생각하는 것입니다. 건강한 로마는 건강한 삶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지만, 부패한 로마는 부패한 삶에 대한 집착만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며


결과가 과정을 합리화한다는 말이나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말을 가지고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가끔 꿈 속에 나타나는 일들입니다. 따가운 햇빛때문에 벌어진 땀구멍으로 최루탄 가스가 들어가서 온통 물집이 생긴 일, 가로투쟁을 가며 두려운 마음에 선배의 대수롭지않은 영웅담을 애써 기억해 내려고 한 일, 종로와 동대문 뒷골목을 이를 악물며 도망 다니느라 허리춤에 넣어둔 유인물들이 땀으로 흠뻑 젖은 일, 닭장차에서 친구와 함께 두들겨 맞은 일들이 꿈 속에 나타납니다. 이런 과정에서 어쩌면 힘(power)이 지배하는 권위주의를 무의식 중에 배웠을 수 있습니다. 혹은 독재에게 배운 나쁜 버릇들이 익숙해져 있을 수도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숫자에 기초한 싸움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향유하는 민주주의는 오랜 시간동안 순간순간 소신을 굽히지 않은 사람들과,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보여준 조용한 다수의 노력이 함께 어우러져 만들어 졌다고 생각합니다. 이 과정을 우리가 소중히 여기지 않을 때, 이러한 과정을 모르는 세대에게 민주주의는 야망을 달성하기 위한 경쟁의 공간이나 제도일 뿐이고 권력만이 그 목표가 될 것입니다.


케이블 회사마다 기본에 공짜로 넣어주는 Fox뉴스에서 미국 중산층의 배타적인 애국심이 여과되지 않은 체 나올 때, 이 흥미위주의 뉴스채널에 기독교방송 책임자라는 사람이 나와 ‘이스라엘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역사에서 모두 반 기독교 세력이었다’라는 말을 내뱉을 때, 이 사람을 웃음거리로 만들어 비난하던 뉴스 진행자가 매 시간마다 달라진 것 하나 없는 전쟁소식을 스포츠 뉴스처럼 전하는 것을 볼 때면 여러 해 동안 미국에 살았지만 철저하게 이방인일 수 밖에 없는 스스로를 보게 됩니다. 학교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이런 모습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식료품 가게에서 말을 걸어온 미국인이 전쟁이야기를 피하는 제게 ‘북한사람’이냐고 물을 때면 로마제국 말기의 기독교인들이 생각납니다. 다음에 이런 질문을 받으면 한국인이라는 말과 함께 ‘기독교인’이라고 꼭 말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미국은 우리가 가지지 못한 장점들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공부를 하러 왔던 아니면 이민을 왔던 간에 배워야 할 것이 많은 나라입니다. 그러나 이 땅이 예전 같지 않을 때에도 과정과 결과 모두를 소중히 여기는 그리스도인 들은 예전같이 건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음 번에는 애국심에 대해서 살펴볼까 합니다.

[곽준혁]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3)

코스탄의 소리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3)


– 갈등 (Conflict): 현실의 벽을 넘어



”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디모데전서 6:11-12)


들어가며


기독교적 시각에서 갈등에 관하여 잘 서술된 책을 말하라면 저는 스스럼없이 랄프 네이버 (Ralph Neighbour)의 Living Christian Values를 꼽습니다. 이책은 이미 ‘영적성장의 정상에서’ (Survival Kit 2) 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어 평신도 사역자를 훈련시키는 교재로 많은 교회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최근에 6주짜리 교재로 편집되어 다시 출판되었는데, 훈련의 강도는 약해졌지만 기간이 단축되어 많은 사람들이 끝까지 훈련을 마칠 수 있어서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의 장점은 성경에 철저하게 기초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말씀의 이해의 차원을 넘어서 실천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훈련을 통한 실천이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동감할 것입니다. 그러나, 종종 우리는 성령의 힘으로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원론에 지나치게 착념하다가 성경에서 강조하는 훈련의 중요성을 망각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도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셨다고 성경은 전하고 있습니다 (히 5:8). 그리고, 르네상스시대 전술학 (the art of war)에서도 이와 유사한 말이 있습니다: ‘훈련 없이 전쟁에 나간 군인의 높은 사기는 어떤 효과도 없다.’ 다시 말하면, 훈련되지 않은 군대는 한번 승리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계속 승리할 수도 또 승리를 지킬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현실주의 vs. 현실직시


첨예한 갈등들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고결함 (integrity)이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지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 가운데 인간 본성의 부정적인 요소들을 강조하는 현실주의(realism)의 편견이 신중 (prudence)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일상 속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예를 들면, 인간은 결코 자신의 소유와 안전은 양보하지 않는다는 것을 미리 사실처럼 전제한 후, 대화를 통한 갈등해결의 한계를 강조하거나, 강제 또는 폭력을 통한 갈등의 해결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경향은 현실주의 시각에서 쉽게 발견됩니다.


현실주의에서 이야기하는 인간본성(human nature)은 성경에서 묘사하는 인간의 ‘옛 속성 (the old nature)’의 내용과 유사합니다. 분쟁, 시기, 분냄, 그리고 파당과 연결된 옛 속성과 현실주의의 비관적 인간관은 여러 가지 면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갈 5:20). 물론 육체의 소욕은 원죄론(the Original Sin)에서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비관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현실주의가 꿈꾸는 이상의 세계와 그리스도인이 만들어가려는 세상은 출발점이 유사하더라도 큰 차이를 가지고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현실주의적 세계관은 ‘죽음에 대한 공포’ (the fear of death)를 가지고 모든 인간의 행동을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갈등도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려는 인간의 본능적인 몸부림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나타나고, 또 이러한 공포를 역이용함으로 갈등이 합리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됩니다. 인간이 사회를 형성하는 이유도 죽음의 공포와 관련이 있습니다. 자연환경 속에서 피할 수 없는 결핍(scarcity)과 경쟁 속에서 ‘죽음의 공포’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 국가며 정치사회라고 이해합니다. 여기에서 갈등은 필연(necessity)입니다. 그리고, 갈등 해결의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공포의 제도화, 즉 죽음이 연상될 정도로 강력한 강제(coercion)를 통해 순종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대화는 선택일 수는 있지만, 불확실성(uncertainty)을 제거하기위해서는 폭력이 합리적인 갈등해결의 필수적인 수단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그리스도인은 ‘생명에 기초한 소망’ (the Hope in the Eternal Life)으로부터 현실을 바라봅니다. 영생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예수로 말미암아 이미 이겨낸 사람들 만이 가지는 삶의 이유입니다. 모든 행동은 생명에 기초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죽이시기까지 이루시려고 한 것도 ‘모든 자에게 영생 (eternal life)’을 주려 함이셨고, 영생을 얻은 자의 목표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모든 사람들이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요 3:16). 현실주의와 그리스도인의 세계관에서 죽음은 인간이 神을 찾는 이유라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에 대한 공포는 갈등을 해결하는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은 자신에게까지 다가오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임하게 되면 모두가 ‘새 사람’ (the new nature)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갈등을 바라보고 또 해석합니다 (고후 5:17). 여기에서 갈등은 불가피하지만, 갈등해결의 원칙은 생명이요 수단은 사랑입니다.


요한의 편지는 이러한 원칙과 수단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한은 갈등을 두려워하지도 또 회피하지도 않았습니다. 가혹한 훈련을 통한 인간성 개조와 지식을 통한 구원을 믿었던 영지주의자에 대항해 요한은 ‘거짓 선지자’들에게 속지 말라고 충고할 뿐만 아니라, 거침없이 영지주의자들을 ‘적그리스도’라고 몰아 세웁니다 (요일 4:1-6). 요한은 새로운 형태의 바리새인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 가지 점에서 다릅니다.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사랑이 그의 원칙이었습니다 (요한 20:31).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절대적 진리는 부정될 수 없다는 것이 요한이 붓을 든 동기였고, 사랑은 모든 갈등을 생명으로 바꾸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요한이 분연히 일어난 이유였습니다. 요한의 이런 태도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갈등을 일으키신 이유가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셨고, 목숨을 내놓으시기까지 사랑하신 결과로 우리 모두에게 구원의 길이 열린 사실에 기초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요한은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고 우리에게 충고하고 있습니다 (요일 4:12).


상호존중 (Mutual Respect)


랄프 네이버는 갈등을 네 가지 종류로 나눕니다: (1) 내적 갈등 (conflict inside), (2) 다른 사람들과의 갈등 (conflict with someone else), (3) 확신에서 오는 갈등 (conflict because of your convictions), 그리고 (4) 권위와 책임에서 오는 갈등 (conflict between authority and responsibility) 입니다. 여기에서는 네이버의 분류에 기초해서 상호존중의 훈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모든 갈등의 근본적인 원인은 내적 갈등, 즉 옛 속성과 새 속성 간의 갈등에서 시작됩니다. 내적 갈등의 해결은 평생을 요구하는 긴 여행일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갈등 또한 내적 갈등과 함께 생활 속에서 늘 우리를 따라다닙니다. 네이버는 이 두 가지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인도 하심에 순종하는 자세, 그리고 예수를 본받아 끊임없이 용서하고 사랑하는 생활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새로울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순종하는 겸손과 이웃을 사랑하는 생활에서부터 다음과 같은 실천 강령들이 나온다는 것은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우선 (1) 갈등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바라보는 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내적 갈등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아울러 더불어 사는 우리에게 서로 간의 차이에서 나오는 대립은 늘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갈등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할 때 다른 사람과 갈등관계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좌절하거나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쉽게 실망하는 오류를 줄일 수 있지않을까 생각합니다. (2) 갈등의 발생이 아니라 갈등의 해결에 성경적인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왜 갈등이 우리에게 일어났을까 하고 성경을 동원해서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보다, 갈등이 발생한 이후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고 관계를 회복할 방법을 고민하면서 성경적인 지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왜 더욱 사랑하지 못했을까”를 고민하기보다 “어떻게 상처를 사랑으로 감싸주고 치유할 수 있을까”에 대한 대답을 서로 기도하며 찾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마태 18장).


확신에서 오는 갈등이나 권위와 책임 사이에서 나오는 갈등은 교회나 단체에서 나타나는 갈등들입니다. 특별히 이러한 유형의 갈등들은 평신도 사역자들을 감당할 수 없는 시험에 빠뜨리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확신에 찬 사역자가 목회자와 빈번한 갈등을 피해 교회를 떠난 다던지, 동역자들 사이에서 의견의 차이로 반목하는 경우는 성경을 통해서나 우리의 생활을 통해서나 보게 됩니다. 랄프 네이버는 이러한 갈등의 예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주저하는 베드로를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반박한 사도 바울 (갈 2:6-14), 롯이 아브람의 권위에 도전해서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떠나버리는 사건 (창세기 13), 그리고 (비록 다른 사람과의 갈등으로 분류되었지만) 바울이 바나바와 마가와의 동행을 놓고 서로 다툰 사건 (행 15:35-40, 디후 4:11)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다양한 사건들에서 발견되는 공통적인 갈등해결의 원칙들이 있습니다. 갈등의 해결을 위해서는 (1) 갈등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시는 말씀을 담고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2)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고 상대를 끝까지 사랑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바나바에 대한 믿음만은 결코 잃지않았다는 사실은 그가 죽기 전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고 전한 편지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디후 4:11). 아브람은 롯의 잘못을 침묵했지만, 아브라함은 롯의 죽게된 환경을 결코 침묵하지 않았습니다 (창 18). 베드로도 자기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행 10:16). 이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은 (1) 자기자신의 의견이 최선이 아닐 수 있다는 겸손한 자세 (Only God is the Master who decides what’s best), 그리고 (2) 하나님께서 갈등을 통해 하시는 말씀을 귀 기울여 듣는 자세 (Mutual respect through listening to people in conflict with you can bring His message to you) 였습니다. 이 같은 자세때문에 누구도 갈등이 발생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지만 갈등을 통해 새로운 관계를 만들고 또 그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원칙이 발견됩니다.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상호존중 하는 것입니다. 이 원칙을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베드로전서 4:8).


마치며


최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있는 세계는 신으로부터 선택 받았다고 믿는 사람이 비관적인 현실주의만으로 갈등을 바라볼 때 생길 수 있는 위험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적대적인 종교갈등의 위험만을 강조하는 입장을 고민 없이 수용할 때 우리는 사사기 19장에 나오는 레위인처럼 무책임한 행동으로 많은 사람을 죽게 만들었지만 의무를 다했다며 자위하는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를 표로 만들어 보았습니다.



















  비관적 현실주의 그리스도인의 현실직시
갈등해결의 목적 죽음의 공포로 부터의 해방 (Free from the Fear of Death) 생명에 대한 희망 (Hope for the Eternal Life through God)
갈등해결의 일반적 원칙 죽음의 공포에 비례하는 처벌의 제도화 (Institutionalization of the Fear of Death with the Fear of Punishment) 사랑과 상호존중 (Love and Mutual Respect)
갈등해결의 궁극적 수단 폭력과 강제 (Violence & Coercion) 용서 (Forgiveness in God)

그리스도인도 갈등을 피해 갈 수 없습니다. 때때로 첨예한 갈등을 가져오는 의견들은 서로 납득이 가는 근거들을 가지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주님의 몸 된 교회에서는 결코 갈등이 용납되지 않는다거나, 그리스도인의 갈등은 사랑을 깊이 있게 배우지 못한 경우에만 발생한다고 단정하는 것은 비현실적입니다. 기독교인이 비관적 현실주의를 무슨 진리인 것처럼 강조하는 것은 무분별하고 원칙 없는 태도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폭력과 강제를 통한 갈등의 해결만을 강조해 왔다면, 아마도 우리는 복음을 듣지도 보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 하심으로 주신 ‘생명에 대한 희망’을 잃지않고 세상 속에 당당히 서 있을 때 진정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곽준혁]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2)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2)

– 고결함 (Integrity): Christ Inside & Love Outside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Salt is good, but if it loses its saltiness, how can you make it salty again? Have salt in yourselves, and be at peace with each other. (마가 9:50)

들어가며

평소 존경하던 김인수 장로님께서 하나님 품으로 돌아 가셨습니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故人은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원칙을 소중히 여기셨고, 타협과 관용을 철저하게 구별하셨고, 늘 진지했던 장로님의 선한 청지기 같았던 삶은 언제나 우리 마음 속 깊이 살아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미주 코스타 강연에서 자주 인용하셨던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골로새서 3:23)는 말씀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준비되고자 노력하는 우리 모두의 가슴에 지금도 그리고 이후에도 살아 숨쉴 것이라 생각합니다. 장로님은 세상의 소금으로 늘 우리들에게 기억될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소금” (halas)이라는 단어는 4번 나옵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복 있는 사람의 조건들을 열거하신 후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언급하신 부분이 그 첫번째 경우입니다 (마태 5:13). 누가복음 14장 34절에서 이 말씀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하신 예수님의 가르침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두 가지 경우들은 하나님의 사람이 세상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만들어가기 전에 갖추어야할 인격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고 주인되시기를 늘 소망하는 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고후 13:16).

하나님의 사람 (Divine Individuality)이라는 주제에 이어 이번에 다루고자 하는 주제는 나머지 두 경우들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 경우들은 하나님의 영성을 소유한 사람들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형성하고 발전시켜야하는 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두가지 경우들은 관계 형성의 원칙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원칙들을 고결함 (integrity)이라고 압축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묵상의 결과를 나름대로 Christ Inside & Love Outside라고 정리해 보았습니다.

Christ Inside

고결함은 영어로 Integrity입니다. 이 말은 라틴어의 integer로부터 파생되었는데 이 단어는 전체(entirety), 완전함(completeness), 또는 흠 없는(blameless) 조건이나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 단어가 사람에게 사용될 때에는 어떤 사람이 삶에서 지속적으로 무엇인가를 지켜나가는 태도를 나타내거나 또는 이런 사람의 도덕적 순결함(purity)을 지칭합니다. ‘높다'(高)와 ‘깨끗하다'(潔)는 의미가 합성된 고결이라는 한자어와 마찬가지로 영어의 integrity도 구별되는 삶과 이런 삶의 기준을 유지하려는 개인의 끊임없는 노력을 나타냅니다.

고결은 오만이나 거만과는 다릅니다. 오만이나 거만이 우월함을 고집하는 태도라면, 고결은 비교 우위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 동일시 되는 어떤 원칙들을 지켜나가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이때 고결은 안팎의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목적한 바를 향해 한 걸음씩 걸어가는 개인의 능력을 강조합니다. 이때 고결은 열 사람이 옳다고 우겨도 원칙에 기초해서 틀리면 틀리다고 주장하는 소신있는 행동을 강조합니다. 즉 고결은 자기존중이며 자기완성임과 동시에 구별됨입니다. 이 구별됨은 시대의 흐름을 역행할 수도 있는 용기도 포함합니다.

마가복음에서 “세상의 소금이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고결함이 어떤 원칙들 위에 서 있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말씀을 두 가지 사건들과 연관시킵니다. 첫째는 제자들이 “서로 누가 크냐”며 토론한 사건입니다 (마가 9:33-37). 제자들은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존재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스스로를 구별된 사람들로 생각한 이유는 예수님과 동행하는 그들의 삶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자기자신들이 성취할 수 있다고 믿는 것들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이들의 다툼은 비교우위를 점하려는 욕심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이들이 “천국에서 누가 크냐”는 질문까지 예수께 가져간 사실이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마태 18:1-5). 이에 예수님은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지’의 질문이 그들에게 더 시급한 문제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질문에 그리스도인의 고결함을 구성하는 첫번째 원칙 ‘겸손’이 있습니다. 성경은 겸손은 그리스도의 내재하심이 가져오는 당연한 결과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사람으로는 할 수 없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 속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마가 9:37). 바울의 말을 빌자면, 성도의 구별됨은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인함이기에 그 누구도 자신의 구별됨을 자랑치 못하며, 이런 은혜를 기억할 때 성도들은 겸손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8-10). 겸손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 (Indwelling Christ)의 은혜에 기초하는 것입니다. 즉, 기독교인의 고결의 첫번째 원칙은 구별됨으로 겸손할 수 밖에 없다는 역설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Love Outside

마가복음에서 소금과 관련된 두번째 사건은 제자들이 자기들과 행동을 같이 하지않는 사람들에게 예수의 이름을 빌어 귀신을 쫓을 수 없도록 금지한 것입니다 (마가 9:38). 이와 같이 제자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남용하자 예수님께서는 기적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며, 이런 이유에서 “반대하지 않는 자”는 적대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마가 9:39-40). 이것이 고결함의 두번째 원칙 관용입니다.

관용 (tolerance)은 무원칙이나 무분별한 사랑이 아닙니다. 내가 무엇을 먹어야할 지 모르는 상태에서 옆에 있는 사람의 의사를 따라 음식을 시킨 것을 관용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무엇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있지만, 다른 사람의 의사를 존중해 주는 것, 바로 이것이 관용입니다. 원칙이 없는 관용은 타협이나 무관심입니다.

자신의 능력을 훨씬 뛰어넘는 용서와 사랑을 보여주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상식 밖의 불의가 반복되는 가운데 묵묵히 서 있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런 때 관용은 무원칙과 동일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이 둘은 결코 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관용은 고결함 그 자체이자 곧 고결함의 한 원칙입니다. 기독교적 관용은 주는 은사 (the gift of giving), 즉 사랑(Agape)에 기초합니다. 양보하고, 용서하고, 인내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마음을 결국에는 바꾸는 것이 관용입니다. 타협은 요령이나 처세를 가르쳐 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타협은 관용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육적 효과, 가치관이나 삶의 궁극적인 목표의 변경을 가져오지는 못합니다.

예수의 이름의 고결함을 지키려는 제자들의 마음 뒤에는 자신들만이 예수님의 능력을 향유하려는 욕심이 있었습니다 (마가 10:38). 이것은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지킴으로써 자신들만을 돋보이게 하려 한 행위와 결코 다르지않았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제자들에게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소금으로는 너를 깨끗게하고” (have salt in yourselves), “다른 사람과는 평안과 기쁨을 나누어라” (have peace one with another)는 두 가지를 명령을 함께 다루고 있습니다. 자기자신에게 철저하고 타인에게는 너그러워야 한다는 가르침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얻어지는 평화는 믿지 않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적용되어야한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에서 바울은 “외인을 향하여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고 충고하고 이어 “너희 말을 은혜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 같이 하라 (Let your speech always be with grace, seasoned, as it were, with salt)”고 부연하고,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고 말했습니다 (골로새서 4:5-6). 다시말하면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토론에서 격론으로, 격론에서 격분으로 치닫을 마음을 억누르고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성의를 다하고 사랑을 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친절과 존중(respect)하는 마음을 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고결함은 모두와 화목할 수 밖에 없는 책임을 그 내용으로 합니다. 간단하게 표로 만들어 보았습니다.

고결함 (Christian Integrity) 오만함 (Arrogance)
존귀함의 원천 하나님의 은혜 (grace)에 기초한 자기존중 (self-esteem)과 자부심 (pride) 자기자신의 노력에 기초한 자기 중요성이나 지나친 우월감 (self-importance or overbearing pride)
내적 열쇠원칙 내재하시는 그리스도 (Indwelling Christ)로부터 나오는 겸손 (humbleness) 자기자신으로부터 나오는 만족 없는 욕구 (insatiable desire)
외적 열쇠원칙 주는 은사 (the gift of giving, Agape)와 관용 (tolerance) 획득(acquisition)과 투쟁 (struggle)

마치며

성경공부를 인도할 때, 소모임을 이끌 때, 불신자들과 토론을 할 때 우리는 감당하기 힘든 자괴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독재자처럼 성경공부를 인도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동떨어진 이야기로 공전하는 분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독재자가 되어있는 자신을 볼 때가 있습니다. 역으로 갈등을 피하고 부담을 줄이는 관계를 선호하는 쪽으로 선회하는 자신을 보면서 부끄러워 할 때도 있습니다. 제직 수련회나 인도자 교육을 가서 마피아식, 교통순경식 등의 이름들이 붙은 경영학적 원론들을 반복해서 들을 때면 그만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런 때 기본적인 원칙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해보는 것이 어떨까 생각합니다. 유대인의 배타적 선민의식이 아니라, 내재하시는 예수님을 통해 사랑을 실천하는 고결함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어떨까 생각합니다. 매일 이렇게 돌아가다 보면 주님의 마음으로, 세상 속의 소금으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故 김인수 장로님의 소천소식을 접하며 오늘 다시한번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갈 6:7)는 말씀을 좌우명처럼 여기신다던 故人처럼 매일을 정말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다음에는 갈등에대해서 한번 살펴볼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