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준혁] 한 사람의 힘(Power of One) – 누가(Luke)를 그리워하며

코스탄의 소리

한 사람의 힘(Power of One) – 누가(Luke)를 그리워하며

들어가며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다”(누가복음 1:3-4)

성경을 읽을 때마다 나의 생활을 돌아보게 하는 인물이 있다. 그 인물이 바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 (Luke)다. 그가 대단한 사람이었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는 이유는 그의 꼼꼼한 문체나 직업이 의사라는 그만의 독특한 이력이 아니다. 진정 그를 위대한 사람으로 보이게 하는 이유는 그가 해야할 바를 했고, 있어야 할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누가는 자신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한 목적을 오직 ‘한 사람’이 예수에 대해 확실히 알게 하기 위함이라고 밝히고 있다. 데오빌로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친구(또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데오빌로를 로마의 기관장으로, 그의 신분을 밝힐 수 없었던 ‘한 사람’으로 이해했을 때 우리는 누가의 헌신이 바로 예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제자도의 본보기가 됨을 알게 된다. 오랫동안 예수의 행적을 기록하고, 예수의 제자들을 따라다니며 그들의 행실을 기록한 이유가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일이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누가의 참된 성실은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시 한번 우리를 놀라게 한다 –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디모데후서 4:10-11). 모두가 병든 바울을 떠나 자신의 문제로 돌아갔을 때, 바울의 옆에는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묵묵히 동역자를 보살피는 누가가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누가의 모습을 보시며 기뻐하시고 그를 사랑하셨으리라는 것을 아무도 의심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곧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골로새서 3:12).

1. 새로운 일대일 패러다임: 문지기(Gatekeeper)

누가가 데오빌로라는 사람에게 예수님을 전하는 모습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그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만 드러내는 섬김을 했다는 점이다. 예수님의 사랑에 보답하고자하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아니면 “내 사람”을 만들기 위해 양육이나 전도를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피양육자를 “끝까지 책임”진다는 의무감에서, 아니면 피양육자가 “예수님”보다 눈 앞에서 헌신하는 양육자를 더 따르게 되면서 자기도 모르게 예수님의 빛을 가리는 섬김을 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누가는 이런 함정을 피해갈 수 있는 그에 대한 지혜를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이번 여름 우리 교회에서 인도자 수련회 때, 새로운 학기에 실시될 일대일 양육에 대한 개괄적인 내용을 작성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하루 전에 통보를 받았기에 그동안 생각해왔던 것들을 간단하게 정리해서 보내는 것으로 대신했다. 이를 간단하게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 프로그램은) 개개인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성경 말씀에 기초해서 만들어가는 과정을 도와주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한 사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도 매일 성경말씀을 묵상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참된 기독교인으로 변화되기를 소망합니다. 둘째…” 그리고, 몇 주 후에 주일예배 광고에 이 글을 올릴 수 있는지 행정서기로 일하시는 집사님께서 물어오셨을 때도 그저 담담했다. 그런데 예배시간에 내가 쓴 이 글을 보면서 갑자기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과연 나는 어느정도 이를 위해 조심하고 노력했던가….

교수들이 학부생을 위한 정치철학 입문이나 고전 텍스트들을 읽는 수업을 할 때 항상 하는 말이 있다 – “교수보다 저자들의 책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것. 교수를 저자들의 생각을 이해하는데 이용할 것. 교수로 인해 텍스트로부터 벗어나는 경우를 결코 허용하지말 것(You should not allow yourself to be diverted or distracted from the great books by the professors!!).” 한편, 이런 교육을 위해 강의자들에게 제시되는 공통된 충고는 “텍스트에서 벗어나지 말 것,” “질문을 많이 던지고 가능하면 답을 주지말 것,” 그리고 “주입(indoctrination)하지 말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학생들이 자신들의 스스로의 생각과 방법으로 저자의 사상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지식의 전달자라는 사실이 강조된다. 이런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피교육자가 저자의 사상을 이해하기보다 전달자의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따를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2년 전 우리 교회의 양육프로그램을 도우면서, 이러한 소위 영혼 교육(soul care)의 문제와 아울러 일대일 제자양육이 소수정예 전사를 만드는 과정으로 인식되거나, 혹은 어떤 ‘단일한 인간유형’을 재생산하려는 경향이 없는지 검토할 기회를 가졌다 – 단일한 인간유형이란 “예수님 안에서의 다양성”(diversity in Jesus)과 대립되는 교육방침을 의미한다. 제자훈련이 마치 80년대 독재 하에서 민주화 투쟁을 하듯 은밀하거나 전투적인 각오로 진행되는 경우, 아니면 젊은 학생들이 목회자가 되는 길만이 신앙의 척도인 것처럼 느끼도록 만들어 버리는 경우나, 이러한 행동들을 방치하는 모습에 개인적으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생각은 제자훈련과 교회의 양적 성장이 연결될 때, 그리고 이를 위해 하나님의 소유인 자녀들이 삶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을 잃어버리고 ‘헌신’이라는 이름 앞에서 개인주의나 집단화라는 양극단으로 치닫는 모습을 볼 때 더욱 굳어졌다.

일대일 제자훈련에서는 ‘양과 목자’라는 관계가 설정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알고 있다. 인도자의 책임성을 강조하는 이러한 관계설정 자체는 나쁠 것이 없다 –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되…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베드로전서 5:2-4). 그렇지만, 일대일 훈련에서 이런 설정이 어떤 관계를 만들어 나가느냐의 문제는 조금 다르게 접근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생각한다. 인도자는 ‘목자’요, 피인도자는 ‘양’이다. 즉 인도자에게는 한 사람의 영혼과 인생을 책임져야 한다는 지나친 부담이, 피인도자에게는 인도자에게 전적으로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이미 주어져 있다. 인도자는 자신의 열매를 보고자 피인도자의 영혼과 인생을 ‘관리’하는 지경에까지 이를 수 있는 위험성도 없지 않고, 피인도자는 인도자가 누구냐에 따라 신앙의 내용이 달라질 수도 있다.

이런 고민을 하던 중에 요한복음 10장 2-3절의 말씀이 눈에 들어왔다 –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문지기(gatekeeper)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이 설정에서는 불러 내시는 이도 예수님이시고, 인도하시는 분도 예수님이시다. 문지기는 원어로는 “뒤로로스,” 즉 파수꾼이나 문 앞에서 손님을 주인에게 알리는 종이다. 즉, 문지기는 주인이신 예수님을 위해 문을 지키고, 예수님을 찾아 오는 사람을 위해 문을 열고,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담당한다. 동일한 역할이라도 예수님과 피교육자의 관계가 강조되고, 인도자는 이러한 관계의 형성을 도와주는 ‘문지기’의 역할에 그치는 것을 원칙으로 할 수 있다. 이 때 문지기의 성실성은 양육에 헌신하는 모습뿐만 아니라 “문”이신 예수님과의 거리, 즉 매일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자신의 삶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요한 10:9). 함께 일하던 분들과 이런 생각을 나누고, 우리 교회에서는 ‘문지기’라는 새로운 일대일 관계설정을 했다.

누가는 이러한 ‘문지기’의 훌륭한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첫째, 누가는 ‘한 사람’에게 자신의 생각이나 견해를 전달하기보다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을 전달하는데 초점을 두고 있다. 둘째, 이러한 헌신에도 불구하고, 누가는 자신의 노력의 결실을 스스로의 손으로 거두려는 욕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 원어로 보면,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한 글로 ‘한 사람’이 배운 바를 확신할 수 있었으면 하는 소망, 즉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에 ‘한 사람의 영혼’을 맡기고 있다. 이와같은 누가의 태도는 데오빌로라는 사람의 영혼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인정하는 문지기의 소임과 자세를 보여주기에 너무나 충분하다.

2. 겸손과 관용의 손길

다음으로 눈에 뛰는 것은 누가의 겸손한 태도다. 누가는 자신의 기록이 당시 많은 사람들의 헌신보다 크게 뛰어날 것은 없다고 말하고 있다 – “우리 중에 …내력을 기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나도”(누가 1:1-3) 신학자들이 인정하듯 누가의 문체나 꼼꼼한 기술은 사도 요한의 논리와 자신감에 비추어 부족함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는 자신의 기술만이 옳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 두 사람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했다고 생각된다. 예수님의 복음이 허탄한 소문들로 퇴색되어 갈 시점에 분연히 붓을 든 요한이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줄 아노라”(요한 21:24) 하고 말했다면, 누가는 “한 사람”의 영혼이 분열과 다툼으로 얼룩지지 않게 하기 위해, 자신의 기록은 많은 것 들 중 하나라는 말로 다른 사람들에 대한 진지한 배려와 아가페의 정신을 몸소 실천하고 있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는 철저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관대함을 강조하셨던 예수님의 가르침을 외면할 때가 종종 있다.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분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태 7:5). 그러나 이와 같은 행동에서 우리는 쉽게 정욕과 탐심과 다툼으로 들끓는 우리의 지배욕(desire of domination)과 주목받고 싶은 욕망(love of recognition)을 관리하는 것에 실패할 때가 많다. 서양에서16세기 르네상스는 이러한 지배욕에 휩싸인 부패한 교회와 신학으로부터 정치와 인문학이 독립을 선언했고, 17세기는 이러한 욕망에서 끝이 보이지 않던 종교전쟁의 소용돌이를 절대왕정 국가라는 철퇴로 풀어가는 새로운 해법을 선택했다.

일반적으로 관용(tolerance)이라고 하면 정치적 타협의 산물로 인식된다. 그러나 관용은 상대주의적 회의(relativistic skepticism)나 영과 속을 구분하는 이원론이 아니다. 관용의 정신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임을 인정하는 기독교의 정신이 담겨져 있다(잠언 1:7). 이는 “하나님이 내 뒤에 계신다”(God behind me!)는 선지자적 전투자세에서 한 걸음 물러나 “하나님이 우리 모두를 감찰하신다”(God over us!)는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한 거리낌 없는 온전함을 가지고자 하는 용기이다. 이는 “여호와께서는 뭇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사상을 아시나니 네가 저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버리면 저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역대상 28:9)는 확고한 믿음 위에 서 있는 ‘나 자신’으로부터 시작되는 실천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대수롭지 않아 보일 예루살렘의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도, 과부된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늙은 선지자도 이런 누가의 눈에는 참으로 소중한 하나님의 사람들이다. 이들의 경건한 눈에는 누구보다도 먼저 예수님이 보였다는 누가의 차분한 기록을 읽으며, “데오빌로 각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누가 2:25-40). 유명한 마리아의 찬송에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라고 표현된 누가의 긍휼과 공의의 하나님의 모습에서 데오빌로는 무엇을 느꼈을까. 아마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마음,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하신 말씀을 행동으로 옮기라는 예수님의 사랑이 아니였을까(누가 11:34).

결국 누가가 데오빌로에게 전하고자 했던 것은 예수님의 모습이었다. 즉,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즐거울 수 있는 넉넉하고 부드러운 마음, 정죄하고 비난하고 싶은 마음을 다스리는 ‘진정한 섬김’의 사랑을 전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와같은 맥락에서 누가는 데오빌로가 “두령도 없고, 간역자도 없고, 주권자도 없으되”(잠언 6:7)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준비된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소망했던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지나친 비약은 아닐 것이다. 이런 누가의 손길은 참으로 따뜻했을 것이다.

마치며

며칠 전 대학부(Crossway) 담당목사님이 조장들 성경공부의 인도를 부탁하시면서 교재를 전해 주셨다. 누가복음이다. 과연 누가처럼 우리의 미래를 짊어질 하나님의 소중한 청년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최선의 조건을 제공해 줄 수 있을까하는 걱정이 앞섰다. 과연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몸과 마음과 영혼을 그분의 말씀으로 매일 매일 바꾸어 나가는 삶의 본을 보여줄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이들이 각자의 개성과 재능을 가지고 하나님이 주신 자신들의 소명(the Call)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좋은 문지기(Gatekeeper)가 되어야 할텐데 하는 걱정이 앞선 것이다.

이런 걱정들을 하다가 나는 이번에도 누가처럼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기로 했다. 부패와 악이 성행하던 시대마다 소리높여 부르짖는 의인들이 많았다. 그러나 소돔성이 멸망한 이유가 횡행하던 부패와 악이 아니라, 의인 10인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오늘도 작은 일에 주목하는 열심을 가르쳐준다(창세기 18:34). 참으로 있어야 할 곳에 있었고, 해야할 바를 묵묵히 했었던, 그럼으로써 믿음의 선한 싸움을 누구보다 잘 소화해 낸 누가(Luke)가 그리워지는 시대다(디모데전서 6:12). 왜냐하면 루터의 말처럼 기독교의 진정한 능력은 하나님 앞에 무릎 꿇은 ‘한 사람, 한 사람의 힘’에서 나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곽준혁] 아가페의 정신으로

코스탄의 소리


아가페의 정신으로


영적 성숙이란 무엇일까. 가끔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자체만 가지고는 영적 성숙을 이야기할 수 없다는 두려움에 휩싸인다. 우리는 각자의 체질과 성격이 다르고, 또 하나님이 주신 저마다의 재능과 다양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저마다의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시간(time)과 방법(mode)이 있음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적 성숙에 이르는 과정에는 어떤 단일한 기준이 있을 것이라는 걱정 때문에 스스로를 돌아보며 낙심을 하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을 자신의 잣대로 쉽게 속단하는 실수를 범하는 우리 스스로를 보게 된다. (특히 나는 이런 실수를 범하는 내 모습을 많이 보게 된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 중 이러한 실수를 가장 많이 저지른 사람의 하나다. 그는 행동주의자요, 모든 일에 자신을 던지는 열정과 열심을 가진 사람이었다. 성경의 구석 구석에서 전하는 베드로의 성격과 행동은 그가 누구보다 자신의 열심을 통해 예수님께 사랑을 받고자 했던 제자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물론 예수님은 베드로의 거침없는 열정, 대담하리만큼 솔직한 허풍과 폭풍 같은 성미를 존중하고 사랑해 주셨다. 그러했던 베드로가 베드로후서에서 전하는 영적 성숙에 대한 내용은 참으로 많은 것을 우리에게 전해 준다. 각자의 개성과 성품,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열심과 행동을 통해 영적 성숙의 길로 한 걸음씩 걸어가는 과정을 설명하는 베드로는 이미 예전의 베드로가 아니다. 그는 이미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버린 제자가 되어 있다. 아니,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제자가 되어 있다.


첫째, 베드로는 영적 성숙은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은혜의 약속으로 시작한다고 고백한다.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베후 1:4). 원어로 살펴보면 하나님의 성품을 나누어 가지는 자가 됨으로 인하여, 우리가 구별되는 사람이라고 적고 있다. 따라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한다면 그는 소중한 하나님의 성품을 나누어 가지는 형제요 자매다. 다시 말하자면, 믿음이 영적 성장의 기초요, 교회의 내용이다.


둘째, 베드로는 믿는다는 신앙의 기초 위에 두 가지를 더해야 한다고 권유한다. 그 두 가지란 도덕적인 탁월성(moral excellence)과 지식(knowledge)이다: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베후 1:5). 우리는 “오직 믿음”(sola fide)이라는 단어를 알고 있다. 15세기, 16세기에 흑사병과 계속되는 전쟁 속에서 자신들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납득하기 힘든 체벌과 강요를 일삼던 부패한 로마교회에 저항하며 일어난 종교개혁의 주인공들이 죽음 앞에서 외쳤던 표현으로 우리에게 잘 각인되어 있다. 그러나 “오직 믿음”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만큼은 다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다는 결단의 내용이지, 오로지 믿음(faith)만이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믿음이 사회적으로 납득하기 힘든 잘못된 행위까지도 정당화 시켜준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믿음에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도 고개가 숙여지는 도덕적인 참됨과 사려 깊은 지식이 필요하다. 베드로는 이러한 두 가지가 함께 하는 믿음은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한다고 지적한다: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베후 1:2).


보통 우리는 지식을 하나의 장식처럼 생각할 때가 많다. 즉, 지식은 곧 자신을 내세우기 위한 도구이거나 다른 사람과 자신을 구별하여 지식 없는 사람을 차별하기 위한 수단으로 치부할 때가 많다. 그러나 지식이란 하나님이 주신 하나의 선물을 우리가 잘 관리할 때 나타나는 부지런함의 결과다. 원어로 보면 “에피그노시아”라는 말은 단순히 안다는 사실을 전달하기보다 “정밀하고 정확한 지식”을 말한다. 즉, 인식하고 확인하여 깊이 있게 마음속에 각인된 내용을 의미한다. 그리고, 덕이라는 말은 원어로는 “아레테,” 즉 모든 사람들이 칭찬할 만한 행동의 결과를 의미한다. 따라서, 믿음에 “덕”과 “지식”을 더한다는 말은 단순히 믿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자신의 믿음이 돋보이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그의 모습을 보고 기뻐할 수 있는 내용을 가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믿음 없는 세상을 향해 무례하지 않다. 그리고 공격적일 이유가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솔로몬의 충고는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의인이 형통하면 성읍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패망하면 기뻐 외치느니라”(잠언 11:10).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세상과 대립되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세상을 감싸는 덕목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the knowledge of God)을 내용으로 한다는 것이다.


세째, 베드로는 여기에 절제, 인내와 경건을 요구한다. 절제는 곧 우리의 욕망을 다스리는 기술이다. 이런 절제는 현대사회를 끝없는 경쟁이나 비극적인 다툼으로 보는 이른바 Agonistic한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절제란 하나님이 주신 이성(reason)으로 다스릴 수 없어 보이는 자신의 순간적인 욕심들(eros)을 하나씩 억제한다는 이야기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약함에 대하여 잘 아는 사람이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자랑스러울 수 있을까. 이러한 한탄 속에 하나님을 통해 용기를 얻고, 이 용기를 바탕으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세상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용기는 절제와 인내를 함께 가져오고, 이러한 용기는 하나님 앞에 겸손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구태여 처세의 기술을 사용하지 않아도 믿음을 가진 사람은 경건할 수 밖에 없다. 이런 가운데 얻어지는 실제적인 결과는 “유세베이아,” 즉 하나님 앞에 무릎꿇는 경건함이다.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관대할 수 있는 마지막 끈이 나와 같은 인간을 구원해주신 하나님께 한없이 부끄러운 우리 스스로라면, 경건은 이러한 믿음을 가진 모두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자연스러운 덕목이다. 신앙의 선배들은 모두 이러한 내용이 오랜 시간동안 행동으로 나타난 자기수련의 결과들을 가진 사람이었다.


마지막으로, 베드로는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벧후1:7)고 권고하고 있다. 우애란 “필라델피아,” 즉 형제에 대한 믿음과 기다림이 가져다주는 선물이다. 자신의 것이 항상 옳다면, 우리는 곧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아 전하는 역사에 몇 안 되는 선견자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서로가 필요하고 또 그러하기에 서로가 서로에게 귀 기울이면서 생각하고 기도하는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 가장 기독교적인 덕목인 사랑, 즉 “아가페”가 필요하다. 아가페가 보여주는 덕목의 가장 큰 내용은 자신의 행위의 보상이 사람으로부터 오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확신이다. 이러한 확신을 통해 보상이 없는 일에 조용히 자신의 방식으로 선을 행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행위는 경쟁적일 이유가 전혀 없다. (Agape requires virtue without return, save in the eyes of God. Arete is an agonistic virtue, in that those who possess it must outdo others in the eyes of the world.)


결국, 이 마지막 한 마디 속에 베드로의 참회가 들어있다. 예수님과 요한복음에서 서로 나누었던 마지막 대화에서 베드로는 Agape라고 말하지 못했다: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필레오)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요한21:17). 이러한 참회의 내용이 곧 그의 영적 성숙을 의미한다. 소금과 빛인 예수의 제자들이 세상 속에서 영적 성숙을 보여줄 수 있는 내용은 바로 베드로의 마지막 고백 속에 들어있다. 참된 믿음은 때로는 강하게 저항하는 용기도 필요하고, 또 때로는 감싸주는 사랑도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가 세상과 우리의 대립으로 현재를 이해하고 있지만은 않는지, 우리의 영적 성숙을 향해 걸어가는 과정을 세상과 비극적이고 Agonistic한 대립의 연속으로만 이해하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볼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곳곳의 부패와 납득하기 힘든 내용들이 매일 신문을 장식하고 있는 현재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러나 하나가 살고 하나가 죽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사는 길을 전하는 기독교적 실천덕목들은 무엇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켰는지를 Agape의 내용으로, 그리고 훈훈한 공기로 전할 수 있는 용기가 더없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미 우리는 어떤 곳에서도 영도자, 지도자, 가르치는 교사라는 이름을 싫어하는 시대에 살고있다. 즉, 상대방이 계몽의 대상이 아니라 나눔의 대상일 수 밖에 없는 상호관계의 끈 속에 기독교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런 나눔은 상대방이 우리 스스로에게서 참된 기쁨과 여유를 맛 볼 때, 자발적으로 따라가고 싶다는 소망을 가질 때에 비로소 내가 가진 무엇인가가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런 나눔을 필요로 하는 사회에 대한 인식이 없이 우리의 생각을 전할 때에는 결국 Agonistic한 관계에서 나오는 종교적 갈등과 상호 반목의 책임을 감수해야 한다.


17세기에 관용(tolerance)의 정신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먼저 제시한 덕목이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말할 수 없을 때, 반목과 질시로부터 자유함을 얻기 위해 제시한 성서적인 사랑의 다른 표현이었다. 그리고 이 덕목은 자기부정(self-negation)과 상대에게 하나님이 베푸시는 사랑에 대한 존중(respect)을 내용으로 하는 Agape의 정신이었다. 이런 사랑의 정신은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는 지금의 현실에서 믿는 사람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과의 상호관계에서 가져야 할 덕목일 것이다. 부패한 도시의 지도자들에게 반기를 들었던 칼빈도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육체가 나의 영혼을 통해 순화되고 훈련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오직 한 사람을 위해 바울을 따라다니며 적은 기록으로 우리에게 너무나도 소중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전했던 누가도 이런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아가페의 정신이 가장 필요한 때에 우리가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베드로는 베드로후서에서 이런 용기를 일컬어 영적 성숙이라고 이름 붙였다고 생각한다.

곽준혁
고려대학교를 나왔고, 2002년 여름 University of Chicago에서 정치학(정치철학)으로 박사를 받았다. 현재 동대학에서 박사후과정에 있다. 아내가 University of Illinois에 박사과정에 있는 이유로, Urbana-Champaign에 있는 샴페인어바나 한인교회 출석하고 있다.

[차문희] 섬기는 기독교사

코스탄의 소리


섬기는 기독교사


글로리아, 요즘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어때? 많이 힘들지 않아? 요즘 애들이 워낙 말을 안 들어. 정상인 아이들도 그런데, 장애 아이들이야 오죽하겠어? 쯧쯧…. 이렇게 어떤 분들은 혀를 차신다. 사실 이 말도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미국이건 한국이건 요즘은 교사의 권위가 몇년 전에 비해서 많이 상실되었다. 교육대학을 지원하는 학생수가 해마다 주는 실태이고 여름방학 동안에 빈 학급의 교사를 채용하느라 교육청에서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심지어, 새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교사를 찾지 못한 학급에서는 교육경험이 전혀 없는, 소위 임시교사라 불리는 Substitute 밑에서 우리의 미래를 이끌어 갈 아이들이 교육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교사의 이직률은 해마다 늘고 있고 – 보통 5년에서 7년이 한계라고 한다 – 우리 아이들의 미래가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돈이 비싼 사립학교만을 보낼 수는 없지 않는가?


조지아주의 한 공립학교에서 내가 교직생활을 시작한 지 이제 5 년째 들어간다. 나는 학습장애, 정서장애, 그리고 정신지체 장애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다.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 중에서 장애가 심한 아이들은 특수 학급에서만 수업을 받는 아이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하루에 한두 시간 정도는 비장애 학생들과 통합교육을 하기 때문에 나는 일반교사들과의 접촉이 많은 편이다. 아이들의 장애와는 상관 없이 미국의 학교는 심한 장애를 갖고 있다는 점을 나는 그 동안의 교사생활을 통해서 발견했다. 교사의 이직률이 많은 이유와 많은 부모님들이 사립학교를 선호하는 이유를 말이다. 그것은 바로 사회의 가장 중심이 되는 가정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 중에서 친엄마 친아빠와 함께 한 집에서 사는 학생을 거의 찾아 보기가 힘들다. 계부(Step father), 계모(Step mother) 혹은 조부모님들과 함께 사는 아이들, 그리고 편부모(single parent) 밑에서 자라고 있는 아이들이 많이 있다. 이런 환경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가정에서 마땅히 배워야 할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학교에 오는 경우가 많은데, 늘 정서불안으로 행동에 문제가 있게 있기 마련이다. (물론 이런 환경에서 자란 모든 아이들이 다 그렇다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사회의 중심인 가정의 무너짐은 곧 하나님이라는 분이 가정 속에서 점점 그 권위를 잃어가고 있다는 뜻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매주 월요일 수업 시간 전에 아이들이 주말을 어떻게 지냈는지 대화하는 시간을 갖는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주일에 가족과 함께 교회에 가서 예배 드리거나 주일학교에 참여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학생들은 1달에 2-3명 정도에 불과하다. 그리고 아이의 취침시간 전에 베드타임 스토리(bed time story)로 성경을 읽어 주는 부모님들도 찾아 보기가 힘들고 취침시간 전에 축복기도를 해주는 부모님들은 거의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이보다 더 슬픈 일은 미국의 공립학교에서는 정교분리(separation of church and state)의 원칙을 이유로, 개인기도는 할 수 있지만 공식적인 기도는 할 수가 없도록 법으로 금지되어 있으며 부활절과 성탄절에 대해서 가르칠 때도 종교적인 내용들을 다룰 수가 없게 되어 있다. 예를 들어 성탄절에 대해 가르친다면, 산타클로스와 루돌프는 가르칠 수 있으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수 없고, 또 부활절에 대해 가르친다면 이스터 버니(Easter Bunny)에 대해서는 가르쳐도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는 가르칠 수 없게 되어 있다. 진정한 성탄과 부활의 의미가 무엇인가? 진정한 성탄과 부활의 의미도 모른 채 우리 아이들은 이 날만 되면 공휴일로 지키고 있으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기독교적인 교사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비록 성경을 가르칠 수는 없지만, “teaching”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 시간 한 시간 영어, 산수, 사회, 과학 등을 가르칠 때 정성껏 수업계획(lesson plan)을 세우고 열심히 학생들을 지도해야 한다. 즉, 전문성을 갖고 지도하는 일이다. 둘째, 아이들의 문제점을 귀 담아 들어줄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그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심어주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교사 자신이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자세로 학생들을 섬겨야 한다. 예수님께서 친히 낮아지셔서 다른 사람들을 섬겼던 것처럼 기독교적인 교사 역시 겸손한 마음으로 학생들을 섬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가복음 10:45)

[고창현] 기독청년의 인생관 : 고지론을 수정 보완하라 (2)

코스탄의 소리


기독청년의 인생관 : 고지론을 수정 보완하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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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청년의 인생관 : 고지론을 수정 보완하라 (1)


2. 하나님의 주권(Sovereignty)을 전적으로 인정하고 의지하라!: I can do it? No, only God can do it!


39장에서 하나님만을 고지로 삼고 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요셉의 인생관을 보여준 성경의 이야기(narrative)는 이제 다시 40장과 41장에 이르러 또 다른 요셉의 특성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그것은 바로 요셉이 철저하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의지하는 자였다는 점이다.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컨대 내게 고하소서.” (창 40:8)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였다. “저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임금님께서 기뻐하실 대답은, 하나님이 해주실 것입니다.”” (창 41:16 표준새번역)


자신이 주인으로 모시고 섬기던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거부함으로서 감옥에 갇히게 된 요셉은 그 곳에서 바로왕의 ‘술 맡은 관원장'(chief cupbearer)과 ‘떡 굽는 관원장'(chief baker)을 만나 그들의 꿈을 해석하게 된다.(40장) 그리고 그 계기로 인해 나중에는 애굽의 왕 바로의 꿈을 해석할 수 있는 기회까지 얻게 되고, 결국 왕의 꿈을 명쾌하게 해석함으로서 애굽의 총리가 되는 기대하지 않았던 고지를 점령하게 된 것이다.(41장)


요셉의 이러한 극적인 ‘인간승리’ 스토리(story) 속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흥미로운 점은 꿈을 해석할 때마다 드러내는 그의 변함없는 고백이다. 마치 39장의 이야기가 하나님과 함께하는 요셉의 전환된 삶을 의도적으로 확연하게 드러내듯이, 40장과 41장에서는 요셉이 꿈을 해석할 때마다 드러내는 그의 고백을 통해 그가 하나님의 주권을 자신의 삶 속에서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자임을 이야기상의 중요한 주제로 반복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덧붙여서 우리가 이 이야기(narrative) 속에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그 당시 애굽의 사회적 배경은, 바로 해몽이 당시의 종교적 과학적 토대 속에서 엄연하게 인정받는 하나의 학문분야였다는 점이다. 이는 창세기 41장 8절에서 자신이 꾼 꿈을 해석하고자 바로왕이 맨 처음 부른자들이 바로 술객(magician)과 박사(wise men)였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그 당시 고대 문명에서 술객과 박사라 함이 단순히 현대의 서커스 단원이나 동네 마을의 지혜로운 촌장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구약 성경의 여러 예를 통해 쉽게 볼 수 있다. 특히 다니엘서에서 ‘흠이 없고 아름다우며 모든 재주를 통달하며 지식이 구비하며 학문에 익숙하여 왕궁에 모실만한 소년'(단 1:4)중 일부였던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가 바벨론 왕궁에서의 3년 교육 후, “그들의 지혜와 총명이 온 나라 박수(magicians)와 술객보다 십배나 나은 줄을 아니라”(단 1:20)는 말씀을 통해서도 볼 수 있듯이, 왕을 옆에서 모시는 술객과 박수라 함은 그 당시의 지식인층 중에서도 최상의 엘리트(elite)를 대표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일개 노예 출신으로서 이런 위대한 학문적 성과(?)라 할 수 있는 해몽(解夢)을 시작하기도 전에, 마치 현대의 노벨 물리학상 수상에 버금갈만한 이 기발한 이론(?)을 모든 왕궁의 사람들 앞에서 자랑스럽게 발표하기도 전에, 그는 이 모든 일이 오직 하나님에게 달린, 하나님이 허락하셔야만 이룰 수 있는 일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 길고 길었던 고난과 시련의 삶에 종지부를 찍고 이제야 온 세상 앞에서 기세 등등하게 자신의 이름을 떨치며 인정받는 삶을 살 수 있는 절호의 순간에 그는 이런 김 빠지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요셉의 이 분위기 파악 못하는 고백을 통해 그가 하나님의 주권을 삶 속에서 철저하게 인정하고 의지하는 자임을, 누가 그의 삶을 궁극적으로 주관하고 있는지를 온전하게 인식한 자임을 확인할 수 있다.


내가 ‘고지론’을 바라보면서 갖게 되는 두번째 염려는 김동호 목사님의 ‘고지론’ 설교 이후 이에 영향을 받은 비슷한 부류의 고지론 설교들이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하에서 ‘고지론’을 설파하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가능성과 능력에 더 집중하는 “You can do it!”식의 성공 인생적 ‘고지론’에 더 집착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점이다. (이에 대한 부연설명은 지면의 한계 상 이곳에서 자세히 나누지는 못하지만 간단한 예를 들어 필자는 90년대 후반 전병욱 목사님의 성공 지향적이고 진취적인 청년 인생론이나, 예수 전도단 원 베네딕트 선교사님의 책들: ‘인생의 역전을 꿈꾸는 자들이 되라’ ‘Never Never Never Give Up’ 속에서 이런 경향들을 엿보게 된다) 다시 말해 도대체 누가 이 고지 점령의 궁극적인 주체인지, 또 고지점령의 승패와 의미가 누구의 주권 하에 달린 문제인지를 상대적으로 소홀히 여기면서 오히려 “올라가자!” “세상에 영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노력하자! 공부하자!”에만 혈안이 되어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나 과연 우리네 인생이 그러한가? 내가 아무리 난리를 치고 악을 써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시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 우리 믿는 자들의 인생관이다. 그리고 내가 막상 땀을 흘리고 용을 써서 그 무엇을 성취했다 해도 사실 그 뒤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믿는 우리들이 아닌가? 야곱의 경우처럼 아무리 자신 스스로가 높은 ‘고지’에 올라가고 싶다고 하나님께 떼를 쓰고 난리를 친다해도, 하나님의 뜻이 나를 세례 요한과 같이 그냥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로 쓰기 원하신다면 그 뜻에 순종해야 하는 것이 우리네 삶이다. 반대로 모세처럼(출 3, 4장) 아무리 스스로는 지도자적인 고지에 올라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 시키는 하나님의 위대한 뜻에 사용되는 것을 원치 않아도, 하나님의 주권이 우리를 강권하신다면 우린 그 고지를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소명으로 알고 올라가야 하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철저히 하나님의 뜻과 주권에 따라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기 때문이다.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창 45:8)


하나님의 주권을 삶 속에서 인정하는 고지 점령자들에게는 분명한 삶의 원칙(principal)이 있다. 그들은 고지를 올라가다가 행여나 감당 못할 시련이나 핍박을 당한다고 해서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고지’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소명으로 준, 누가 뭐라고 해도 하나님의 주권 하에서 반드시 정복될 고지이기 때문이다. 요셉은 형들에 의해 구덩이에 던져지고, 또한 애굽에 와 힘든 종살이를 하다가 다시 모함에 의해 감옥에 갇히게 되어도, 또 술 맡은 관원장이 자신의 은혜를 잊어버렸다가 2년이 지난 후에야 자신을 기억했어도, 단 한번의 원망과 낙심도 없이 이 모든 일을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인내하며 바라본다. 그러하기에 그는 자신을 애굽으로 보낸 자가 형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었다고 담담히 고백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삶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철저하게 인정하고 의지하는 고지 점령자들은 고지에 올라간 후 행여나 자만하거나 과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고지가 자신들의 뼈를 깎는 노력과 열정으로 점령되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섭리 안에서 은혜로 주어진 것임을 분명히 믿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요셉은 자신을 ‘바로의 아비로 삼고 온 집과 나라의 주인과 치리자’로 만든 것은 바로 자신의 노력이나 실력이 아닌 하나님이셨다고 고백한다.


요셉의 인생관은 우리에게 ‘고지론’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모든 일을 계획하시고 우리에게 각각의 ‘고지’를 소명으로 허락하시고 이루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그러하기에 우린 고지에 올라간 후 교만할 것도 자랑할 것도 없다. 그리고 남들이 별로 중요하다고 여기지 않는 변두리(?) 고지나 아예 남들이 잘 가지 않는, ‘미답지’적 고지에 소명을 받았다고 해서 부끄러워하거나 기죽을 것도 없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일을 계획하시고 주관하시고 하나님의 주권이지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느 동네의 어느 고지에 소명을 받았든 정말 중요한 것은 누가 나의 삶을 궁극적으로 주장하고 인도하는지, 또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작고 부족한 자인지를 온전하게 인정하고 그분만을 의지하는 것이다.


고지 점령자들에게는 하나님이 개개인에게 부여한 주권적인 소명이 중요하지, 자신이 오를 고지가 얼마나 높고 또 얼마나 중요한 지리적 요충지에 있는지가 중요하지 않다. 우린 사도 바울이 로마의 시민권을 버리지 않고 복음전파를 위해 유용하게 사용한 것에만 관심을 갖지 말고, 먼저는 그가 당시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인정받지 못할 그 고달프고 힘든 이방인 전도를 하나님이 자신에게 준 소명으로 알고 자신의 생애를 바친 그의 인생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3. 성실함과 거룩함으로 삶의 예배를 드려라!: 그리스도인에게는 매일 매일의 삶이 곧 예배다.


“요셉이 그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으로 가정 총무를 삼고 자기 소유를 다 그 손에 위임하니… 자기 식료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창 39:3, 6a)
“전옥(典獄)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창 39:22-23a)
“너는 내 집을 치리하라 내 백성이 다 네 명을 보증하리니 나는 너보다 높음이 보좌뿐이니라. 바로가 또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너로 애굽 온 땅을 총리(總理)하게 하노라 하고” (창 41:40-41)


우리가 요셉의 생애를 통해 꾸준하게 발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그가 가는 곳곳마다 사람들의 사랑과 신뢰를 받는 자였다는 점이다. 과연 창세기에 나오는 인물들 중에서 이와 같은 인복(人福)을 누리는 자가 또 어디에 있었던가? 물론 그는 이에 못지 않은 가족적 아픔을 경험하고 또 억울한 누명까지 썼던 사람이다. 하지만 그러한 가슴 아픈 현실 속에서도 그는 놀라우리만큼 가는 곳곳, 만나는 사람들의 끔찍한(?) 사랑과 신뢰를 받는다. 마치 어느 누구라도 그를 처음 만나게 되면 그의 첫인상과 하는 행동에 홀딱 반하기라도 하듯이, 그는 고위 공무원의 집에 종으로 팔려가든, 감옥에 갇히게 되든, 아니 한 나라의 통수권자 앞에 서게 되든 어디에서든지 사람들의 호감을 얻어 중책을 맡게 되는 재주(?)를 보여준다.


물론 성경은 요셉의 이런 성공적인 인간관계 뒤편에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그의 변함없는 삶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암시를 우리에게 주고있다.(창 39:3, 21, 41:38, 39) 그러나 우린 간단하게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라는 어찌 보면 추상적(abstractive)일 수 있는 성경적 언어에 갇혀 요셉의 삶을 분석, 묵상하고자 하는 노력을 멈추어서는 안된다. 요셉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는 이 영적인 표현(spiritual expression)에 그냥 만족해서, 그 뒤에 감추어져 있을 요셉의 실제적인 삶의 특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도대체 하나님과 함께하는 요셉의 삶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의 일상생활을 통해 표출되었기에, 그를 만나는 사람들마다 그가 하나님과 함께하고 있음을 인식했으며, 또한 그에게 끓임 없는 사랑과 신뢰를 보이게 되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는 말이다.


앞에서도 주장했지만, 요셉에게 있어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존재론(being)적인 것이었다. 그건 자신의 매일 매일의 삶을 통해 드러날 수밖에 없는 그의 실체적 현실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하나님과 동행하는, 하나님을 자신의 삶 속에서 꾸준하게 의식하고 경험하는 사람들은 어떠한 마음가짐과 자세로 다른 사람들과 관계하며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일까?


비록 직접적인 성경상의 언급은 없지만 나는 창세기 37에서 50장에 이르는(38장 제외) 요셉의 생애를 통해 그가 성실함과 거룩함을 겸비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곧 그는 매일 매일의 삶이 하나님과 함께하는 존재론적 삶이라는 인식아래 자신의 삶을 성실함거룩함으로 하나님께 드렸던 것이다. 시위대장의 집에서 종살이나 감옥생활을 하던, 아니면 대국을 치리하는 총리가 되던 그는 열과 성의를 다해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감당했다. 그러하기에 그의 일 솜씨를 보고 경험한 자마다 결국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게 되고 또한 맡긴 일은 돌아보지 않을 정도로 그를 신뢰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열심히만 일한다고 해서 주인의 사랑과 신뢰를 받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성실한 면과 더불어 거룩한 면이 있었다. 주인의 부인이 아무리 자신을 유혹한다 할지라도 그는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자신을 더럽히지 않았다. 또한 그는 아무리 자신이 대국의 총리요 또한 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는 자라 할지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과 명예를 개인의 사리사욕을 위해 사용하지 않은 거룩하고 진실한 자였다. 결국 요셉은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하기에, 하나님이 항상 자신을 지켜보고 있기에, 결코 불성실하거나 부정직한 삶의 모습을 그분께 보여 드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해석 외에는 그가 누린 인간관계의 축복을 현실적으로 설명할 길이 없다.


나는 감옥에 갇힌 요셉에게 보인 전옥(典獄)의 호의나, 40장 4절에서 감옥에 갇히게 된 왕의 두 관원장을 시중들게 한 시위대장의 모습을 보면서 그를 변함없이 신뢰하고 아끼는 주변 사람들의 모습을 엿보게 된다. 이 세상에 과연 어느 주인이 자신의 부인을 진정 능욕하고자 한 종을 그 자리에서 능지처참(陵遲處斬) 하지 않을 뿐더러, 자신의 관할 하에 있는 감옥의 책임자가 그를 신임하도록 내버려두겠는가? 아니 그것도 모자라 왕을 모셨던 죄수 관원들을 특별히 시중들게 하는 일을 맡기겠는가? 요셉이 자신의 삶에 충실하지 못하고 또한 한 입으로 두말하는 그런 이중적이고 거짓된 삶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면, 그는 결코 인간관계 속에서 이러한 사랑과 신뢰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창 39: 9)


성경의 이야기는 일관되게 요셉에게 허락된 인간관계의 축복이 하나님과 함께하는 그의 삶을 통해 주어졌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분명 하나님과 동행하던 요셉의 삶은 어떤 식으로든 그와 이웃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며 그의 생활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났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는 요셉이 매일 매일 자신에게 주어진 일들을 마치 하나님 앞에서 하듯(골 3:23) 열심과 진실함으로 감당했다는 말이다. 마치 이는 하나님을 열심히 신앙하며 매일 매일 그분과 동행하는 삶을 추구하는 자가 자신의 가정을 소홀히 여기고 학교와 직장에서 불성실하고 부정직하게 살아갈 수 없다는 말과 똑같은 것이다. 곧 하나님을 올바르게 신앙하고자 고민하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삶의 현장과 신앙이 괴리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 ‘고지론’ 설교가 지난 10여년간 한국교회의 젊은세대에 큰 자극과 도전을 주었던 이유는 바로 이 ‘삶과 신앙의 괴리’를 개혁신학(reformation theology)적 관점에서 질타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추상적이고 영적인 언어에 갇혀 교회에서는 다들 은혜와 감격에 휩싸여 세상을 뒤엎을 듯 흥겨워 하지만 막상 삶의 현장에서는 무기력하고 이중적인 삶의 잣대를 가지고 살아가는 기성세대와 젊은세대들에게, “삶(학업)이 곧 예배요. 우리의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영적싸움의 현장이다”라는 메시지(message)는 그들의 가슴을 뒤흔들고도 남았던 것이다. 이원론적(dualistic)인 사고 속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떻게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지는 강조하면서도, 막상 어떻게 세상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지는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았던 한국교회의 병폐 속에 ‘고지론’ 설교는 삶의 현장에서 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고 열심히 살아야 하는지 그 의미를 부여해 주었다. 그리고 이는 철저하게 성경적인 관점이요 개혁신앙적인 관점이다. 단지 앞에서 반론한 것처럼 이런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개혁신앙의 인생관이 성경의 또 다른 중요한 핵심인 ‘하나님의 주권의식’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무리하게 선동될 때, 일반 세속사회의 “I can do it!”식의 ‘성공 프로그램’과 다를 바 없는 변형된 기복주의 신앙과 허탈감을 기독 청년들에게 안겨 줄 수 있다는 염려가 있을 뿐이다.


더불어 이제 ‘고지론’ 설교는 단순히 영적 매너리즘(spiritual mannerism)에 빠져 있는 기독 청년들에게 ‘모든 직업이 성직’이며 ‘삶이 곧 예배’라는 진취적이고 성실한 ‘기독 세계관’을 심어주는데 멈추지 말고, 이 길을 걸어갈 때 쉽게 봉착할 수 있는 사단의 유혹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경고해야 한다. 고지를 올라가며 쉽게 빠질 수 있는 ‘교만’의 유혹과 올라간 후에 생기는 ‘안주’의 유혹, 그리고 요셉의 경우와 같은 실제적인 성적, 물질적 유혹에 대해 경고하면서 고지 점령자의 ‘거룩한 삶’을 선포해야 한다. 이는 ‘고지론’ 자체가 가진 역동성과 영향력에 못지 않게, 막상 고지 점령자가 믿는 자의 ‘거룩함’을 훼손시킬 경우 세상에 미치는 그 파급효과가 엄청나다는 현실 속에서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는 부분이다. 비록 요셉은 자신의 삶을 통해 이를 지혜롭게 잘 극복하고 대처해 나갔지만, 사단의 이러한 공격은 쉬지 않고 고지를 점령해 가는 자들의 삶을 뒤흔들 것이다.


요셉의 생애를 정리하며…


“휫필드라는 이름은 사라지게 하고 그리스도께서 영광 받으시게 하라. 내 이름은 모든 곳에서 죽어 없어지게 하고 내 친구들도 나를 잊게 하라. 그렇게 함으로써 복되신 예수의 대의가 진작될 수 있다면…” (감리교 수장자리를 포기하며, 조지 휫필드)


“정치적인 편의라는 문제에 있어서 내게는 시기와 때를 고려할 만한 여지가 있는 것 같다. 어떤 때에는 일련의 상황들 때문에 밀어붙이기에 좋은 때가 있는가 하면, 또 어떤 때에는 다른 일련의 상황들 때문에 우리의 노력을 보류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러나 지금같이 실제적인 범죄 행위가 문제 될 경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에게는 선택할 자유가 없다.” (1793년 노예 무역제도 폐지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며, 윌리암 윌버포스)


“주저함 없는 헌신으로 내 자신과 나의 삶, 나의 친구들, 내 모든 것들을 제단 앞에 내어놓을 때, 나의 헌신을 하나님께서 받으셨으며 그 확신이 나의 영혼을 충만하게 채울 때에 경험했던 깊은 엄숙함을 나는 익히 기억하고 있다… 나의 헌신을 어떤 봉사를 위해 받으셨는지는 내가 알지 못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나의 삶은 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엄숙한 의식이 나를 주장하게 되었으며 이 의식은 그 이후로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자신의 생애를 하나님께 헌신한 1849년을 회상하며, 허드슨 테일러)


우리가 익히 아는 현대 선교의 아버지인 구두수선공 윌리암 케리, 하나님 앞에서 녹슨 나사가 될 바에는 닳아 없어지는 나사가 되겠다던 지칠 줄 모르던 옥외설교가 조지 휫필드, 자신의 정치적, 사회적 인기와 야망을 버리고 영국의 노예제도 폐지에 앞장섰던 정치가 윌리암 윌버포스, 기도의 사람이자 영국 고아들의 아버지였던 조지 뮬러, 중국 내륙 선교의 선구자 허드슨 테일러 등등. 이 중에 어느 누가 감히 자신이 믿고 따르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명성과 이름을 ‘고지’로 삼는 유혹과, 하나님의 주권보다 자신의 힘을 의지하는 망발과, 하나님이 허락하신 삶을 게으름과 거짓으로 가득 채우는 신앙인의 위선을 보였던가? 그들은 비록 부족했지만 자신들에게 주어진 삶의 현장에서 최선을 다해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위대한 뜻을 그들의 삶을 통해 이루어 나갔던 자들이다.


하나님이 개개인에게 소명으로 준 ‘고지’를 정복해 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결코 자신들이 올라갈 고지의 높이나 명성 때문에 허황된 ‘망상’이나 독한 ‘야망’을 품고 고지를 올라가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오직 하나님만이 궁극적인 ‘고지’이자 ‘비전’이며, 또한 그분과 동행하는 존재론적인 삶이 최고의 가치이다. 이러한 인식 속에서 그들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의지하며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허락한 ‘소명’을 ‘고지’로 알고 살아간다. 그들에게는 높고 낮은, 중요하거나 안 중요한 고지가 없다.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말든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뜻만이 우선될 뿐이다. 그러나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를 영적으로나 추상적으로만 이해하는 자들이 아니다. 그들의 삶 속에서 실제적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의 구별된 삶을 드러내는 사람들이다. 그러하기에 그들의 삶 속에는 ‘성실’과 ‘거룩’의 향이 잔잔하게 배여 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게으른 삶의 예배를, 하나님과 함께한다고 하면서 죄와 거짓으로 더럽혀진 삶을 그분께 드릴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고지 점령자들이 되어야 한다!


Epilogue: 나는 수정과 보완만을 주장한다


나는 누구보다도 ‘고지론’의 혜택을 많이 받은 사람이다. 그리고 지금도 김동호 목사님의 ‘고지론’ 설교를 통해 나를 도전하셨고 새롭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러하기에 더욱 ‘고지론’이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올바르게 선포되고 전달되어지기를 소망한다. 나는 이 글을 통해 ‘고지론’을 뒤집어 엎자고 주장하지 않았다. 나는 다만 ‘고지론’의 수정과 보완을 제안한다. 국어사전에 보니 ‘수정’은 그 뜻이 ‘바로잡아 고치는 것’이고 ‘보완’은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완전하게 하는 것’이라고 나와있다. 나는 딱 이 정도 만을 원하다. ‘고지론’의 의미가 회중들에게 바르게 전달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오해의 소지들을 바로잡아 고치고, 또 설명이 미비하다고 느끼는 부분을 보충함으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이 ‘고지론’이 온전하게 세워져 가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이 글은 단순히 ‘고지론’ 그 자체를 향한 외침이기 보다 오히려 ‘고지론’을 받아드리는 청중들을 향한 외침의 의미가 더 크다. 곧 ‘고지론’을 인위적으로 해석함으로서 행여나 성경적 인생관과 세계관을 오도하지 말라는 간곡한 부탁을 담고 있는 것이다.


*본 원고는 뉴욕 맨하탄 헌터 College의 K.C.F.(Korean Christian Fellowship) 모임과 로체스터 연합 장로교회 청년부 수련회(2002년 4월 5-6일) 세미나 등을 통해 나누어졌던 생각들을 좀더 구체적으로 정리한 글입니다. 특히 한국에서 ‘주님의 교회’를 개척, 사역하시고 몇 년 전 스위스에 교단(장로교 통합) 선교사로 헌신하시다가 귀국하신 이재철 목사님의 설교, ‘비전의 사람'(장신대 신학대학원 사경회: 2000년 3월 29일-31)을 통해서 많은 도전을 받은 원고임을 밝혀 둡니다.

[고창현] 하나님을 드러내는 신앙

코스탄의 소리


하나님을 드러내는 신앙


전 아직도 1988년 서울 올림픽의 한 구기 종목 결승전을 밤늦게 지켜보던 때가 기억납니다. 탁구 여자복식 결승전에서 중국과 맞붙게 된 한국팀이 극적인 우승을 거두고 감격해 하던 그 장면 말입니다. 솔직히 탁구보다는 축구를 좋아하는 전형적인 한국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또 한국이 올림픽이나 국제 대회에서 우승한 적이 이 탁구밖에 없는 것도 아님에도, 전 벌써 10여년이 훨씬 지난 이 한 탁구 경기의 결승전을 잊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이제 갓 예수님을 영접한 한 어린 신앙인의 눈에 비쳐진 양영자, 현정화 선수의 담대한(?) 인터뷰 장면 때문이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며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양영자, 현정화 선수의 인터뷰 장면은 제가 TV 방송을 통해 본, 그리스도인의 첫 간증(?)이었습니다. 우승을 축하하며 먼저 누구에게 가장 감사하냐는 전형적인 기자의 인터뷰 질문에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을 하는 양영자, 현정화 선수의 당당한 모습. 지금 생각해 보면 우습기도 한 저의 개인적인 고백이지만 전 그 인터뷰 장면을 보면서 양영자, 현정화 선수와 같이 감격의 눈물을 펑펑 흘렀답니다. 한국이 탁구 여자복식에서 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우승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믿는 하나님을 나도 같이 믿고 있다는 왠지 모를 자부심과, 또한 이런 고백을 TV 방송에서 아무 거리낌 없이 하는 그 두분의 담대한 신앙이 너무나 부러웠고 또한 아름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지난 해 12월, 전 인터넷을 통해 제 22회 한국 청룡영화상 시상식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미 신문을 통해 누가 어떤 수상들을 했는지 대충 알고 있었지만, 굳이 바쁜 시간을 쪼개어 시상식을 보려고 한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건 바로 신문 기사에서 읽은 한 영화인의 수상 소감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한다”는 한 신인 여우상 수상자의 그 수상 소감을 제 눈과 귀로 직접 확인하고 싶은 왠지 모를 열망에 휩싸여 기말고사로 인해 여유 없는 제 마음을 달래며 그 긴 시상식을 보기로 작정한 것이었습니다.


언제 신인 여우상 수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어 그냥 처음부터 쭉 지켜볼 생각이었는데 마침 첫 순서에 신인 남우상, 여우상 시상이 있더군요. 근데 전혀 기대도 하고 있지 않던 신인 남우상 수상자가 갑자기 이런 수상소감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영화(가) 처음인데 이렇게 신인상 주셔서 감사하구요… 그리고 무엇보다 엽기적인 그녀를 많이 봐주신 모든 관객 여러분들께 이 상을 돌리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늘에 계신 할머님과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신인 남우상 “엽기적인 그녀” 차태현)


“하늘에 계신 할머님과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습니다.”라는 그 말이 제 귓전에 너무나 짜릿(?)하게 들려 왔습니다. 기대하지 않았던 신인 남우상 수상자의 간증에 전 괜스레 기분이 신나졌습니다. 그냥 제가 예수 믿는 다는 것이 그 순간 배부르고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후에 들리는 신인 여우상 수상자의 소감.


“먼저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 드리구요. 그리고 제 생애 가장 탐나던 신인상을 제가 올해 22살인데 22회 청룡 영화제에서 타서 진심으로 기쁘구요…” (신인 여우상 “고양이를 부탁해” 이요원)


기분이 정말 째지게 좋더군요. 제가 무대에서 상을 받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냥 혼자 신나고 좋았답니다. 제가 믿고 또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이름이 그 순간, 세상의 모든 사람들 앞에 선포되어지고 고백되어졌다는 것이 그냥 너무 너무 좋았습니다.


여러분은 가끔씩 스포츠 시합이나 여러 시상식에서 위와 같은 소감을 밝히는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보실 때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같은 하나님을 믿는 동료 신앙인으로서 기분이 좋으시던가요? 아니면 믿는 티(?)를 내는 그 사람들이 왠지 겸연쩍고 민망하시던가요?


거두절미하고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전 그립습니다. 무엇이 그립냐구요? 양영자, 현정화 선수의 그 인터뷰 장면이 그립고, 또한 자신의 분야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언젠가 그 분야에서 인정을 받게 될 때, 이 모든 결과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요 도우심이었다고 그분의 살아계심을 만방에 드러내는 그런 하나님 백성들의 “드러내는 신앙”이 전 그립습니다.


지난 수년간 우리 한국교회는 너무나 많은 망신살 속에 빠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한 안수집사님의 백화점이 이윤에 눈이 어두운 부실공사와 안전소홀로 무참히 무너지는 광경을 목도했고, 또 예수님을 잘 믿는다는 한 유명한 기업가 장로님이 외환관리법 위반으로 구속되고, 또 그 구속된 남편을 어떻게든지 빼내어 보려고 애쓰던 유명하신 그리스도인 부인께서는 ‘옷 로비’ 사건이라는 기상천외한 로비사건을 동료 그리스도인들(?)과 벌이고… 거기에다가 교회세습이라는 엄청나고 황당한 일이 지난 1-2년 동안 한국의 일부 대형교회에서 심심지 않게 벌어졌습니다. 그것뿐입니까? 작년에는 한국의 유명한 대형교회 목사님의 맏아들이 신문사 탈세 혐의로 감옥에 구속되었고, 아버지인 그 목사님은 교회 재정 문제로 장로님들과 구설수에 오르는 일들이 발생했습니다.


지난 1월에 있었던 유승준 형제님의 군 복무 문제는 생각하면 할수록 마음을 씁쓰름하게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 신앙함을 자랑스럽게 드러내던 한 유명 그리스도인이, 자신이 평소에 당당하게 약속하고 다녔던 군 복무를 결국 이행하지 못함으로 사회의 지탄을 받는 모습을 보게 될 때, “그래 나중에 저런 망신을 당할 바에는 차라리 조용히 예수 믿는게 낫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말이야 바르게 합시다. 나중에 혹 내가 나의 삶의 여정에서 망가지고 넘어질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그 때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수 있으니까 그 때를 대비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냥 아예 조용히 입 다물고 얌전하게 하나님 신앙을 해야 한다는 것이 도대체 말이 됩니까? 혹 미래에 부딪히게 될지 모를 나의 죄악과 연약함으로 인해 아예 이 땅에 살면서 몸을 사리며 하나님 믿는 티를 내지 말며 살자구요? 예수님은 요한복음 13장 34-35절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면, 우리가 티를 내지 않아도,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인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분명 하나님 신앙한다는 것을 삶의 순간 순간마다 억지로 드러낼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야고보가 그의 서신서에서도 적었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는다면 자연스럽게 그 믿음의 열매들은 우리의 삶을 통해 행위로 드러나게 될 것이며, 그럴 때마다 우린 이를 신기하게 여기는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이루신 일임을 솔직담백하게 인정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자주 인용하는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마 6:3절)는 예수님의 말씀은, 드러내지 않는 겸손한 신앙인의 삶을 가르치고자하는 목적으로 쓰여진 말씀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6장 3절 말씀의 전후를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이 말씀을 통해, 남을 구제하면서 하나님을 드러내기보다는 자신을 드러내는 그런 외식된 자들을 경고하시고자 위와 같은 말씀을 하셨음을 보게 됩니다. 곧 자신의 의를 자랑하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나팔을 불며 요란을 떠는 자들을 비판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바로 그 유명한 왼손, 오른손의 교훈이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성경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드러내는 신앙”을 우리 믿는 자들에게 제시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전 요셉의 삶을 볼 때마다 은근히 하나님을 드러내었던 그의 고단수적인(?) 삶의 자세를 엿보게 됩니다. 성경에 보면 그는 노예로 팔려가든(보디발), 감옥에 잡혀가든(전옥: 간수장), 왕의 꿈을 해석하든(바로왕) 가는 곳곳마다 주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하나님을 신앙하는 사람임을 자연스럽게 알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들의 입술을 통해 자신이 신앙하는 하나님의 이름이 높여지게 했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은혜로만 살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임을 주변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나중에 그의 형제들이 곡식을 사러 애굽 땅에 와 자신을 대면하게 되었을 때에도, 그는 자신을 두려워하는 형들 앞에서 제일 먼저 하나님의 위대한 주권을 자랑합니다.(창 45:5-8) 그렇습니다. 자신이 잘나고 훌륭해서 이렇게 되었다고 뽐낼 만도 한데, 그는 그 순간에도 어김없이 하나님이 이 모든 것 뒤에 존재하셨음을, 자신이 한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자랑스럽게 드러내는 그런 티내는(?) 신앙인이었습니다.


고린도 전서 1:26-31절의 말씀도 이러한 “하나님을 드러내는 신앙”을 우리에게 권고하고 계십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해서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는 자”와 “주 안에서 자랑하는 자”를 구별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1:29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고전 1:31절)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는 자는, 곧 자기의 의를 자랑하는 자요, “주 안에서” 자랑하는 자는 자신 안에서 선하고 아름다운 일을 이루어 가시는 그분,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표준 새번역 개정판은 31절의 “주 안에서 자랑하라”를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라!”


여러분… 분명 우리는 예수님 믿는 다는 것이 더 이상 떳떳하지 못한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니 제대로 이야기하자면 예수님이 부족한 저희들로 인해 오히려 떳떳하게 이 땅에서 고개를 드실 수 없게 되 버린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전 더욱 당당하고 떳떳한 그리스도인들, 자신의 주어진 삶의 현장에서 성실하게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는, 그런 향기나는 신앙인들이 너무나 그립습니다.


자신이 성공해 가고 남들에게 한참 인정받게 될 때는 오히려 자기 자랑보다 하나님 자랑 실컨하고, 혹 나중에 이웃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욕먹을 큰 실수와 잘못을 저지를 때는, 남 핑계대지 않고 “다 나의 잘못과 부족함으로 이렇게 되었다”고 자신을 진실하게 드러내는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그립습니다. 우린 흔히 모든 일이 잘 풀릴 때 하나님 이야기를 하면 영광이 되고, 잘 안될 때에 하나님 이야기를 하면 영광을 가린다고 생각하는데, 이것 또한 성경적인 관점이 아닌 것 같습니다. 다윗 왕을 한번 보십시오. 나단 선지자가 왕궁에 찾아와 그렇게 드라마틱하게 다윗 왕의 치졸한 죄악상을 만방에 드러낼 때, 그가 자신의 자존심과 명성을 생각해 그 누구처럼(?) 끈질기게 거짓말하고 남 핑계 대며 우기 덥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했다고 솔직하게 고백함으로서 그러한 쪽 팔리는 삶의 순간 속에서도 믿는 자답게(?) 자신의 연약함을 온전히 드러내지 않습니까? 전 이런 점이 하나님께서 사울왕과 다윗왕을 다르게 대하실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학업이 다 잘 되어가며, 또 졸업 후의 직장도 이 세상에서 꽤나 인정받는 곳에 가게 될 때, 아니 뭐 꼭 “잘 되고 성공했다”를 떠나 나의 지나온 삶의 여정에 대한 소감을 남들과 나눌 기회가 생길 때, “다 하나님의 은혜였다”라고 겸손하고 진실하게 그분을 드러내는 그리스도인들이 좀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또 혹 자신의 잘못으로 망가지고(?) 쓰러지는 때가 생긴다면 그 때는 “다 내 탓이었습니다”하며 또 다시 겸손하게, 하나님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우리 인간의 한계를 여러 사람들 앞에 진실히 드러내는, 그런 솔직한 그리스도인들이 우리 안에 넘쳐(?) 났으면 좋겠습니다.


학교에서 인정받고 그러다가 박사 학위 받고, 좋은 학교와 직장에 가는 것,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근데 그런 영광의 길목에서도 누가 항상 이 모든 일을 지금까지 운행하고 주관하셨는지, 확실하게 고백하고 드러냅시다. 그래야 동료 그리스도인도 힘이 나고, 또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도 우리가 믿는 하나님에 대해 궁금해합니다. 아 참 한가지 더 좋은 효과가 있네요. 이렇게 자꾸 고백하는 습관을 들여야 그나마 “내가 이 모든 것을 이루었다”라는 추잡한 교만에 빠질 확률도 더 적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 저도 저의 부족한 삶을 통해 하나님을 온전히 드러내는 그런 하나님의 한 떨기 귀한 꽃이 되고 싶습니다. 세상 속에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내는, 왜 요란하지 않으면서도 항상 일정하게 잔잔한 향을 내는 그런 은은한 꽃 말입니다.


“나 주가 말한다. 지혜 있는 사람은 자기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아라. 용사는 자기의 힘을 자랑하지 말아라. 부자는 자기의 재산을 자랑하지 말아라. 오직 자랑하고 싶은 사람은, 이것을 자랑하여라. 나(하나님)를 아는 것과, 나 주가 긍휼과 공평과 공의를 세상에 실현하는 하나님인 것과, 내가 이런 일 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아 알 만한 지혜를 가지게 되었음을, 자랑하여라. 나 주의 말이다.” (에레미야서 9:23-24 “표준 새번역 개정판”)

[김승환] 어머니의 눈물

코스탄의 소리


어머니의 눈물


중학교 다닐 무렵 우리 가족이 살던 집 안뜰에는 여러 가지 화초와 꽃나무들이 많이 심겨져 있었다. 봄이 되면 개나리와 진달래는 물론이거니와 백목련과 적목련이 화사한 꽃망울을 터뜨렸다. 이어서 라일락과 백일홍 등이 여름철에 이르기까지 연이어 피어나 저들의 자태를 자랑하곤 하였다. 이외에도 많은 꽃들이 피어나곤 하였는데 그 중에서 특별히 뜰 가장자리 한 구석에서 피어나던 모란꽃을 잊을 수가 없다.


모란꽃은 장미꽃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장미꽃보다는 꽃송이가 조금 크다. 특별히 모란은 꽃은 아름답지만 향기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서 모란을 뜰에 심는 집이 많지 않다고 들었다. 우리 가족이 살았던 집의 주인이 왜 모란을 화단에 심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 모란은 나에게 특별한 의미를 주었다. 그 이유는 중학교 2학년 초여름 무렵에 어머니가 모란꽃 옆에 다소곳이 앉아 사진을 찍으셨기 때문이다. 내 기억으로는 어머니가 그 꽃을 특별히 좋아하셨던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자형에게 카메라를 잠시 빌릴 기회가 있었는데 돌려 드릴 때쯤 뜰 안에 모란꽃이 아름답게 피어 있어서 기념으로 찍었던 것 같다. 대학을 다니기 위해 서울로 떠나올 때 그때 찍은 어머니의 사진을 확대한 후 코팅을 했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늘 책상 앞에 붙여 놓고 어머니가 보고 싶을 때마다 쳐다보곤 하였다.


그 사진 속의 어머니는 신기하게도 모란꽃을 많이 닮으셨다. 작은 체구에 둥근 얼굴을 가지신 어머니는 언제나 부드러운 미소를 지닌 분이셨다. 어머니는 한평생 힘겨운 삶의 무게를 거의 홀로 감당하시면서 살아오시느라 이렇다 할 여인으로서의 향기는 없으셨지만 모란꽃이 가졌던 기품만은 결코 잃지 않으셨다. 그때 사진 속의 어머니는 지금의 내 아내보다 5살쯤 많은 나이였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5살 이상은 더 들어 보였다. 이마와 눈가에 드리워진 주름이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회상하니 왜 이렇게 마음이 아파 오는 것인가? 어머니는 90년 초 갑상선 암으로 인해 큰 수술을 받으셨다. 다행히 수술 후 경과가 좋아 지금까지 큰 탈 없이 잘 지내고 계신다. 수술을 받기 위해 마취실로 들어가시기 전에 착용하고 있던 틀니를 빼야만 했는데 그 모습을 막내인 나에게조차 보이시기를 부끄러워하시며 입을 가리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어머니도 한 분의 여인이시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내가 주님을 영접한 후 어머니에게 가장 먼저 복음을 전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결실은 잘 맺혀지지 않았다. 한번은 어머니가 서울에 있는 나의 집으로 오셔서 한동안 머무르셨던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어머니를 붙잡고 강제로라도 복음을 증거하려고 했었다. 그래서 요한복음을 요약해서 거의 1시간 동안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설명하고, 천국과 지옥 그리고 구원에 관해 말씀을 드렸다. 내 자신은 꽤 조리 있게 말씀을 드렸다고 생각했는데 어머니께서는 “네가 한 말을 지금은 잘 이해하지는 못 하겠지만 네가 믿는 하나님이라면 나도 믿어야겠지”하고 말씀하셨다. 내가 철이 들고 나서도 여러 차례 어머니를 실망시켜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믿고 하나님까지도 영접하시겠다는 어머니의 말씀에 너무 송구스러웠다. 어머니는 고향으로 돌아가신 후 교회 권사이신 숙모님과 함께 아버지 몰래 교회에 나가시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이를 눈치 채신 아버지의 만류로 예수님을 향한 자신의 의지를 접고 말았다. 나는 그때 이후로 어머니가 지난 해 말(2001년) 이곳 미국 아이오와주 에임스로 오실 때까지 어머니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하였지만 좀처럼 상황의 반전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머니는 내년이면 고희의 나이가 되신다. 지난 해 시카고 오헤어 공항에서 어머니를 뵈었을 때 고령의 나이에 긴 비행시간에서 오는 피로 때문인지 어머니는 예전보다 더 늙어 보였다. 그때 어머니는 챙이 있는 모자를 깊이 눌러 쓰시고 등에는 낡은 배낭하나를 지신 채 출구로 걸어 나오셨다. 그러나 나를 보고 환하게 웃으시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25년 전 내가 살았던 집 뜰에 피어있던 모란꽃을 떠올릴 수 있었다. 시카고에서 아이오와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어머니는 연신 미국 땅이 크다고 말씀하셨다. 그러시다가 피곤하신 지 미시시피강을 지나 아이오와주로 들어올 무렵 잠이 드셨다가 차가 에임스에 거의 다다를 무렵에 잠이 깨셨다. 그리고는 아직 집에 도착하지 않았느냐고 물어 보신 후 집이 왜 이렇게 공항에서 멀리 떨어져 있느냐고 의아해 하셨다. 내가 미국에서는 이 정도 거리가 별로 먼 거리가 아니라고 여러 번 말씀드려도 잘 이해하지 못하셨다. 에임스에 도착하신 후 한 달 정도 우리 가족과 함께 머무시는 동안 별로 잘 해 드린 것이 없었다. 학기 중이라서 늘 지친 모습을 보여 드린 것이 못내 죄송스럽다. 네브라스카주 오마하에 있는 동물원에 갔다 온 것과 귀국하시는 길에 시카고에서 미시간호를 훌쩍 구경시켜 드린 것 외에는 미국에 대해서 보여 드린 것이 없다. 내가 좋은 곳을 못 보여 드려 죄송하다고 말씀드릴 때마다 어머니는 에임스가 너무 조용하고 좋았다면서 오히려 나를 위로해 주셨다.


어머니는 에임스에 도착하신 후 처음 맞이하는 주일에 우리 가족과 함께 교회에 가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셔서 집에 남아 계시려고 하였다. 그러나 나와 아내가 간곡히 부탁하시자 마지 못해 함께 교회에 출석하셨는데 그 날 이후 미국을 떠나시기 전날까지 금요찬양모임과 주일예배를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셨다. 아내는 어머니를 위해 교회 도서관에서 김진홍 목사님의 자전적 소설인 <황무지가 장미꽃 같이> 시리즈와 원종수 권사의 간증집, 서울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님이 LA 사랑의 교회에서 인도하신 부흥회 비디오테이프 시리즈 등을 빌려 드렸다. 아내는 이번 기회에 어머니가 꼭 주님을 영접하실 수 있도록 기도하며, 이를 위해 온갖 정성과 노력을 기울였다. 어머니는 김진홍 목사님의 책을 통해 당신 자신의 지난 시절을 회상하시면서 재미있어 하셨다. 그리고 원종수 권사의 책을 읽으시면서 많은 눈물을 흘리셨다. 내가 어머니에게 왜 눈물을 흘리시느냐고 물어 보니까 “이 사람이 어려운 가정에서 고생하며 공부하던 모습이 네가 자라면서 공부하던 모습과 너무 똑 같아 너에게 너무 미안하구나” 하시면서 계속 눈물을 흘리시기에 내가 당황하여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래서 “어머니, 저 때문에 미안해하지 마세요. 저는 비록 나이가 들었지만 이렇게 미국까지 와서 박사 공부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모든 것이 다 잘 되었는데요” 하고 위로해 드렸지만 어머니의 눈물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어머니는 김삼환 목사님의 비디오 테이프를 보시고 많은 도움을 받으셨다. 하루에 한 개씩 아껴 보시면서 재미있다고 좋아하셨다. 목사님의 구수하면서 시원시원한 설교가 예수님을 잘 모르는 분에게도 꽤 재미있었는가 보다. 어머니는 아내의 이와 같은 노력에 힘 입어서 조금씩, 조금씩 변화되셨다.


어머니는 특별히 금요찬양시간을 좋아하셨다. 비록 가사의 내용과 곡은 잘 몰랐지만 찬양이 주는 은혜가 어머니의 마음에 와 닿는 것 같았다. 그래서 예배시간보다는 찬양시간을 더 좋아하셨다. 나는 특별히 하나님께서 어머니와 함께 금요찬양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허락하신 것에 대해 감사드리고 싶다. 철이 들고나서 지금까지 어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늘 가시로 찌르는 것과 같은 고통을 느꼈어야 했었다. 어머니의 연배에 한국 땅에서 많은 고생을 겪으면서 살아오신 어머니들이 어디 한 두 분이겠는가? 그러나 그 분이 나의 어머니이시기 때문에 안타까움은 특별한 것이다. 어머니와 함께 드린 금요찬양시간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귀한 선물이었다. 불혹의 나이에 고희를 앞둔 어머니의 손을 잡고 하나님께 아름다운 찬송을 드릴 수 있는 귀한 은혜를 받았으니 나의 기쁨은 참으로 표현할 길이 없다. 나는 남은 생애 동안 그 추억을 잊지 못할 것이다. 어머니에 대한 가슴 아픈 많은 기억들 속에서 어머니와 함께 하나님께 찬양을 드린 그 시간은 모란꽃처럼 선명히 내 마음에 남아 언제나 하나님과 어머니의 크신 사랑을 생각나게 할 것이다.


어머니가 한국으로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주일 예배시간에 어머니에게 특별한 일이 일어났다. 목사님의 말씀이 끝나고 헌금을 드리기 전 성도들과 함께 찬양을 드리고 있는 중에 갑자기 어머니가 고개를 의자 밑으로 떨구시면서 울먹이기 시작하셨다. 나는 그 순간 매우 당황하여 어머니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어머니, 왜 그러십니까?” 하고 물어 보았으나 어머니는 대답을 하시지 못 하고 예배가 끝날 때까지 계속 소리를 죽여 가면서 울먹이고 계셨다. 나는 그때 어머니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신 것을 깨달았지만 무엇 때문에 은혜를 받았는지 알지 못 했다. 예배가 끝나서 모든 성도들이 친교실로 나갈 때 어머니에게 “이제 일어나 가시죠” 라고 말씀을 드렸다. 그러자 어머니는 “나중에 갈 테니 먼저 가 있어라”고 말씀하시고 계속 그 자리에 앉아서 울고 계셨다. 후일에 어머니를 한국으로 배웅하고 돌아와서 아내에게 어머니가 그때 왜 우셨는지 물어 보았다. 어머니는 나보다 아내와 속 깊은 이야기를 더 잘 나누곤 하셨다. 아내의 말에 따르면 어머니는 예배시간에 갑자기 예수님을 모르고 살아온 70 평생이 너무나 아쉬워 하염 없이 눈물만 흘리셨다고 한다. 짧은 한 달 간이지만 우리 가족과 함께 주의 몸된 교회를 오고가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 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 그리고 그분을 믿는 것이 얼마나 기뻐고 감사한 일인지 깨닫게 되신 것이다. 예수님을 진작 알았더라면 어머니가 지고 오셨던 인생의 무게가 지금보다 훨씬 가볍고, 이 세상이 주는 고통 가운데서도 기쁨과 감사의 생활을 하셨을 텐데 70의 고개를 지나고 나서야 그 진리를 깨달으셨던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원통한 것이었을까? 진작 주님을 알았더라면………


어머니와 에임스에서 마지막으로 함께 보내는 날 저녁에 어머니가 계신 방으로 찾아갔다. 그리고 오늘밤은 어머니와 함께 자고 싶다고 말씀 드렸더니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하셨다. 부모가 비록 나이가 들고 자식이 장성했을지라도 부모 마음에는 자식이 언제나 어린애와 같아서 함께 자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일텐데 어머니는 의연한 모습을 나에게 보이고 싶어 하셨다. 대신 어머니는 “떠나기 전에 너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다. 네가 나를 위해서 이 시간에 기도를 해 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어머니는 지금까지 한 번도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으셨다. 어머니의 말씀에 “자식인 제가 어떻게 어머니를 앞에 두고 어머니를 위해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씀드렸다. 그때 나는 머릿 속으로 야곱이 그의 아들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과 다른 많은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그 후손을 위해 기도하는 모습을 생각하고 있어서 자식이 부모를 앞에 두고 안수 기도하는 것이 예의상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 대신 어머니에게 가정예배를 드리자고 제안하였다. 그리고 나서 온 가족을 어머니가 계신 방으로 불러 함께 가정예배를 드렸다. 찬송가를 부르고 요한복음 3장 16절을 읽은 후 막내 윤재부터 윤진이, 아내를 거쳐 마지막으로 내가 어머니와 어머니의 믿음을 위해 기도 드렸다. 어머니께서 이곳에서 받은 은혜를 귀국하신 후에도 변치 마시고 잘 간직하시라고 온 가족이 함께 기도 드렸다


어머니가 한국으로 돌아가신 후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 거의 석 달이 지났다. 한국에 전화를 드릴 때마다 어머니의 신앙생활이 궁금하지만 물어보지는 않았다. 이곳에서의 나의 학업도 끝나고 우리 가족은 얼마 지나지 않으면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 그때가 되면 어머니의 신앙생활을 자세히 알게 될 것이다. 나는 이 시간 어머니를 위하여 또 주님을 믿지 않고 있는 모든 젊은이를 위해 이렇게 기도 드린다. “하나님, 저의 어머니가 이곳 에임스에서 하나님 앞에 흘린 회한의 눈물이 아름다운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도와 주세요. 그리고 아직 예수님을 개인적인 주님으로 영접하지 못 한 젊은이들이 이제라도 주님을 영접하여 새로운 삶을 살아 갈 수 있도록 도와 주세요. 그들은 저의 어머니와 같이 인생의 황혼에 회한의 눈물을 흘리는 일이 없도록 도와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에필로그


나는 앞으로 언젠가 다시 뜰이 있는 집에 살고 싶다. 그리고 그 뜰에 어릴 때 내가 보았던 여러 화초들과 꽃나무를 심을 것이다. 계절마다 제각기 다른 꽃들이 아름다운 향기와 자태를 뽐내면 그들 가운데 서서 온 몸으로 저들을 느낄 것이다. 그 중에 특별히 몇 그루 모란을 뜰 가장자리에 따로 심어 정성 드려 가꿀 것이다. 그리고 모란꽃이 탐스럽게 필 때면 나의 어머니를 생각할 것이다. 나는 특별히 미국 에임스 반석장로교회에서 어머니의 주름진 손을 잡고 주님께 찬송을 드리던 모습을 떠올릴 것이다. 그와 함께 그날 저녁 함께 있었던 사랑하는 여러 교우들의 모습을 떠올리려고 애쓸 것이다. 비록 나이로 인해 기억이 쇠퇴해져 그들 중 겨우 몇 명의 이름을 떠올릴 수 밖에 없겠지만….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전1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