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석아,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

박준석 형제님을 기리는 글을 이영길 교수님께서 써주셨습니다. 코스탄들에게는 믿음의 유산이, 유가족들에게는 하나님의 위로가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이코스타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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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새벽 2시 30분 준석이는 하나님 곁으로 갔다. 나도 몰래, 말없이… 늘 그러듯 “교수님, 먼저 갈께요!”라는 인사도 없이 떠났다. 괘씸한 녀석! 녀석이 나보다 먼저 천국 갔기에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인사도 안하고 가는 녀석이 어디 있어. 천국에서 만나면 혼내준다고 속으로 되뇌이며 한없이 울었다. 천국서 만나면 허그 (Hug) 하기전 굴밤부터 한방 먹여줄거다. 이 버릇없는 준석이를 생각하다가 바로 정란자매에게 전화 했다. 어제도 오늘도 수없이 전화 했지만 첫번째 통화 되었을때는 함께 말없이 울기만 했다. “정란자매, 그냥 같이 울자!” 오열하듯 울어 대는 정란 자매와 전화 통화하면서 나는 길에서 그렇게 울고 있었다. 준석이가 너무 그리웠다. 옆에 손을 잡아 주지 못해 미안하였다. 
준석이를 만난 것이 벌써 2년도 넘었다. 한국에서 내가 아주 잘 아는 어느 교수님의 아들과 함께 인디애나대학으로 유학 온다고 하여 사실 그 교수님 아들을 공항으로 라이드 갔다가 함께 동행하고 있던 준석이를 만난것이었다. 유난이 몸이 커 보였지먄, 인상이 아주 착한 곰 같이 생겼다. 팬더 곰 같이 귀엽기도 하였다. 두 학생을 우리 집에 데리고 와서 약 이틀 정도를 함께지내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 하던차에 준석이가 예수님을 믿지 않음을 발견하였다. 그리스도의 좋은 소식을 알려주려고 입을 열자 거의 방어적으로 “내게는 복음 전할 생각조차도 마십시오!”라는 녀석의 허풍에 어깨 두드려 주며 “너는 곧 예수 믿게 될거야!”라고 되 받아 답하였다. 우리는 그렇게 만났다. 많은 아이들을 만나 보았고, 하다 못해 유학생 신분의 청와대경호실 출신의 공무원도 만나 복음을 전했지만 준석이처럼 딱딱한 마음으로 대하는 이도 드물었다. 그러나 준석이는 드물게 착했다. 공손하였다. 모든것이 깔끔하였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의 이야기가 시작되면 달리 태도를 취하는 아이였다.
그러던 준석이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기 시작하여 교회도 나가고, 같은 교회의 어느 집사님과, 그리고 나의 미국인 친구 Darwin과 성경공부도 하며 이 아이는 그리스도인으로 되어져 가고 있었다. 보통 열심이 아니면 나가기 어려운 목요모임에도 나왔다. 앞에서 말씀을 전할때면 이 아이의 눈에서 늘 눈물이 흐르는 것을 보며 하나님이 만져가심을 자주 확인하곤 했다. 사무실에서나, 복도에서나, 혹 캠퍼스 어느곳에서 만나든 함께 이야기 할땐 준석이는 예외없이 운다. “준석아, 내가 너 때렸냐?”라고 물으면, “그냥 교수님보면 눈물 나요. 나도 모르겠어요!” 그말이 아직도 내 귀에 생생하다. 
아내가 가게 할때 조그만 도움이 필요하여 부탁하면 두팔 걷어 올리고 굵은 땀을 뚝뚝 떨어뜨리며 도왔던 준석이다. 가게를 띁어서 모든 가구와 기구들을 미시간에 가져 올때 돈을 주고 일을 시킨적 있다. 돈을 줄 별다른 이유가 없어서 준석이를 고용하였다. 그냥 일을 부탁하면 돈을 안받으니까 고용해 버린것이다. 준석이는 무섭게 일한다. 남의 일도 자기일 같이 한다. 아내와 나, 그리고 나의 큰 아들 상민은 그냥 놀라기만 하였다. 정성껏, 몸을 아끼지 않고, 땀을 흘리며, 즐겁게, 그리고 정열을 가지고 일한다. 
공부도 그렇게 정열적으로 하였다. 참으로 열심히 도서관을 드나 들며 공부하는 성실한 학도였다. 그러나 준석이는 자신의 이기적 성공만을 추구하려 열심히 공부하는 그런 학도가 아니였다. 내 눈에 보인 준석이는 아주 진지한 크리스쳔 학도 였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서 준석이의 고민은 자신의 학문과 신앙을 통합하는 문제였다. 미시건에 있는 내게 여러번 전화도 하였고, 또 집으로 방문하여 자신의 고민도 털어놓으며 준석이는 크리스쳔 학도의 진지한 면모를 내게 보여주었다. 아래의 글은 지난해 9월 14일 준석이가 내게 보낸 미멜중 하나이다. 
“… 앞부분 생략… 저는 대학에서도 관광개발을 전공하였고 이곳 인디애나에서도 역시 Toruism Management를 공부하고 있습니다만, 학업의 관심분야를 이제서야 조금씩 찾아가는듯 합니다. 관광이라는것이 관광객과 관광자원, 그리고 이 둘을 연결해 주는 제반 모든 요소들을 다루고 있지만, 저의 관심분야는관광자원입니다. 또, 자원의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 임펙트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요…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지속가능한 관광 (sustainable tourism), 대안관광(eco-tourism, green tourism, rural tourism…), 자원의 경제적 가치 및  문화적, 사회적 영향 평가, 관광객의 태도 및 그에 따른 관광지의 선택, 자원해설(interpretation)의 영향 등이 주된 관심사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그런데요, 교수님! 코스타를 전후로 해서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 다시 말해 기독교인으로서 저의 학업의 목적과 여정을 어디에 촛점을 맞추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구세주로 믿기전에는 미국에서의 학위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 좋은 학자가 되는 것이 그저 저의 목적이었는데요, 지금은 제가 살아서 숨쉬는 것도, 또한 이곳 미국에서 공부하는 것도 주님의 은혜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이 주신 학업의 기회이기에 설사 제가 박사 진학에 다시 한 번 실패하고 한국으로 돌아간다고해도, 그저 저의 부족함을 돌아볼 뿐 개인적인 자조나 타인에 대한 원망은 없기를 소망합니다. 주시는 분은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가 혹시라도 박사과정에 진학한다면주님께서 제게 바라시는 것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또 크리스챤 Scholar로서 세상에 도움이 되는 학문을 해야겠다라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학문을 하고싶습니다. 요새Leisure and Aging이란 과목을 들으며 한국인 이민 노인들의 여가 만족도와 social support에 대한 페이퍼를 쓰고 있는데요, 예전에는 전혀 관심밖이었 leisure나 recreation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요, 또 minority, ethnicity, and nationality, 또 사회적 약자 (노인,장애인, 경제적 소외계층 등)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도전을 받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솔직히 제가 이제껏 가지고 있었던 관심분야들은 버려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관광자원분야와 행복, 다소 쌩뚱맞은 …어쩌면 전혀 관련이 없어보일 수도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또 솔직히, 어떻게 연관지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번 소그룹에서 뵙게된 노령의 권사님 내외분을 보면서 점점 더 제가 해야 할 공부가, 또 역할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더욱 궁금해집니다. 어떻게 위 주제의 페이퍼을 쓰면서, 또 이러한 생각 중에 권사님 내외분을 만나게 되었는지 그저 주님이 원하시는것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교수님!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듭니다…… 경제학을 위시한 모든 학문이 어떻게 파이를 크게 만들고 또 그것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분배해야 하는가에 촛점을 맞춘, 오로지 일만을 생각하는 음울한(dismal) 학문이라면, 관광학이라는 학문은 일이 아닌 여가에 바탕을 두고 어떻게 사람들을 잘 놀게, 잘 쉬게 만들어 줄 수 있는가를 연구하는 행복한 학문이라고 합니다..굳이 leisure나 recreation이 아니더라도, 제가 이제까지 공부했던 관광이라는 학문과지식을 통하여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지 않을까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됩니다만 정작 배운 지식이란 것이 너무도 얇아 깊은 생각에 도달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보입니다. 다만, 관광을 통해서 사람들을 성장, 성숙시키고 또 궁극적으로 행복하게 만들 수 있지않을까 하는 아주 단순한 결론에만 도달했을 뿐입니다. 평생의 연구주제를 행복으로 삼고자하는 석사생을 과연 어느 누가 받아 줄지 불안함도 있습니다만, 이렇게 행복한 확신도참 오래간만인듯 합니다..^^ 일을 성취하시는 분은 여호와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 뒷부분 생략…”
그뒤 준석이의 생각은 많이 발전하여 크리스쳔 학도로 박사과정에서 무엇을 해야할지 막연하나마 그림을 그려가고 있었다. 듣는 나로서도 그 그림이 많은 생각, 고민 및 기도가 있었음을 눈치챌만치 잘 그려져 가고 있었다. 학자로서 자신의 성공보다 자신의 공부로 이 세상을 섬기고 싶은 그의 뜨거움을 대화때마다 감지 할 수 있었다. 
석사학위가 마쳐지면서 박사과정 진학에 어려움이 많았다. 어려움 가운데서도 실망하지 않고 계속 박사과정을 추진하는 준석이를 위해 쓴 추천서가 제법 된다. 낙방의 소식이 계속적으로 날라왔지만 우리는 함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인도 하심을 기다렸다. 그리고 돈이 없어 박사과정진학을 심각히 고민되어 장학금을 위해 또한 함께 기도 하고 있었다. 나는 이미 미시간에 와 있었기에 전화할때면 의례히 전화로 기도 하곤 했다. 긴 침묵의 시간을 깨고 Texas A & M (준석이가 하던 전공 분야에서는 제일 좋은 프로그램이 있는 대학)으로 부터 입학허가서가 왔다고 전화를 받았다. 함께 기뻐하며 전화로 아우성치며 축하한적도 있었다. 그런데 조금후 장학금까지 받았다고 말을 하여 함께 “할렐루야”를 외치며 기뻐하였다. 그렇게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던 준석이가 바로 엇그제 같다. 
텍사스로 이사 가기전 코스타에도 참석하여 많은 코스탄들 앞에서 자신의 간증을 진솔하게 한적이 있었다. 간증이 있기 하루 전날 저녁, 집회가 있던 휘튼대학의 Alumni Gym에서 함께 손을 붙들고 기도 하였다. “하나님, 준석이가 자신의 어리석음과 연약함을 드러내고, 오직 하나님만 높이는 간증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세요”라고.. 많은 간증들이 혹 하나님 보다 자신을 높이는 자기자랑이 될까봐 걱정이 되어서 였다. 다음날 준석이는 강단에 섰고, 얼굴에 눈물이 범벅이 된채 하나님을 높이는 간증을 하였다. 자신의 어리석음과 연약함을 있는 그대로 드러 냈다. 얼마나 감사하였던지. 그리고 준석이의 간증은 많은 코스탄들의 가슴을 뜨겁게 하였다. 이토록 준석이는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일에 용감하다. 그리고 하나님 믿은지 얼마 되지 않는데도 하나님 높이는데 인색하지 않다. 그래서 그 간증을 들으며 녀석 보다 내가 먼저 울었고 기뻤다. 왜냐하면, 나는 준석이가 유별나게 선하고 좋은 아이라서 하나님을 그렇게 높인것이 아님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이 아이의 어려움 뒤에 늘 함께 계셨던 하나님, 그리스도를 주저하지 않고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하심이 준석이로 하여금 하나님을 그토록 높이는 것임을 가까이 있었던 나는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기쁨으로 본인이 가고 싶었던 대학으로 얼마되지 않은 짐을 싫은 트럭을 몰고 가며 전화 하였다. “교수님, 저 지금 칼리지 스테이션을 향해 가고 있어요! 가면 또 전화 할께요!”라고 말하던 준석이의 목소리가 바로 어제 그제 같다. 떠나면서도 자신의 아픔 보다 내 관절염의 아픔을 더 걱정하며 안타까워하던 준석이였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 이지만 건강보험이 없어서 머리가 아픈데도 꾹 참고 보험 살때 까지 병원에는 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보험이 시작되는 그제 병원에를 찾아 갔었고, 준석이는 그 다음날 수술대에 올랐다. 그러나 흐르는 피를 막을 수 없었던 의사는 절망을 선언하였고, 가족들이 산소호흡기를 뺄것을 제안하였다. 우리의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준석이는 새벽 2시 반에 그렇게 하늘나라로 갔다. 
준석이가 하늘나라 가기전 늦음밤까지 이아이를 위해 기도 하면서 우리들의 많은 대화들을 기억하였다.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손으로 눈물을 훔치던 모습, 울먹거리며 나의 건강을 묻던 그 입술, 웃을때는 유난히 밝았던 눈가의 눈웃음… 그리고 준석이가 전에 내게 보냈던 이멜도 다시 열어 보며 이이를 그리워해 보았다. 
“교수님!  참 보고 싶습니다… 잘지내시는지…안부를 묻는 인사보다 보고싶다는 말이 먼저 나오게 되네요…^^ … 준형이 형을 통해서 교수님 가정의 평안함을 들으면서 제가 왜그리 기쁜던지 모르겠습니다… 교수님 성정에 앞으로 얼마나 또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실지 짐작은 합니다만, 건강 유의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예전에는 교수님을 뵈면 주책없이 눈물을 훔치고는 했는데요,,, 요새는 교수님 생각에 짠~~ 하고는 합니다… 같이 기도해 주시던 교수님 손이 참 따뜻했었는데요..”
텍사스 갈때처럼 “교수님, 나 지금 천국 가요! 가서 전화 할께요!”라고 하면 안되었나? 나쁜 녀석! 네 손을 잡고 밤새 기도 하고 싶구나. 너를 이땅에서 다시 볼 수 없는 아쉬움이 너무 크지만, 너를 그 누구 보다 더 사랑하는 주님께서 계신 그곳에 갔으니 오히려 네가 부럽다. 준석아, 돌아 보니까 네게 사랑의 빚을 너무 많이 진것 같구나. 준석아, 네게 사랑의 빛을 진 많은 이들가운데 회개의 운동이 일어 나고 있다. 우리들이 서로 사랑하지 못함이다. 네가 돈이 없어 병원에도 못갔던것을 알지 못했던 나였고, 또 이웃이었기에 과연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말이 진실이었는가를 되묻게 되는구나. 네 아픔을 감지 못했던 나를 용서해다오. 뿐만 아니다. 우리들은 영혼구원을 뒷전에 쳐박아 둔것을 통회하며 무릎꿇고 있다. 네 삶이 구원의 기쁨으로 열심히 그리고 기쁘게 산 삶이 었기게 우리에게 더욱 큰 도전이었다. 우리들이 더 영혼을 사랑하며 너 처럼 구원의 기쁨과 능력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더 많도록 우리들이 주안에서 애를 쓰마. 준석아, 잘 가거라. 나중에 천국에서 만나자. See you later!

2009 KOSTA/USA 참석자 좌담회 – 박소현, 조선우, 최장환, 황원태






eKOTSA: 안녕하세요. 자기소개를 해주시겠습니까?


조선우 자매 (이하 조선우): 안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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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조장을 했던 조선우입니다. 현재 필라델피아에서 박사과정을 하고 있고,
미국 온지는 3, 그리고 코스타는 두번째
참석했습니다
. 작년에는 조원으로 참석했구요.

박소현 자매 (이하 박소현): 안녕하세요.
저는 박소현이라고 합니다. 미국에 온지는 11년 되었는데, 처음 3년동안은 유학생이었고,
그 이후에는 주부로 있습니다. 현재 살고 있는 곳은 업스테이트 뉴욕이고,
코스타는 지금까지 세 번 참석했고, 그 중 두 번을 조장으로 섬겼습니다.

황원태 형제 (이하 황원태): 저는 황원태라고
합니다
. 12지역을 섬겼고, 박소현 자매의 남편입니다.
미국에 97년에 와서 12년째 살고 있고,
코스타는 두 번 참석했습니다. 작년에 이어 두번째 조장으로 섬겼습니다.

최장환 형제 (이하 최장환): 작년에 유학
나와서 현재는 스탠포드 대학원에서 기계공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 코스타는 이번이 처음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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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서 조장으로 섬겼습니다. 반갑습니다.

eKOSTA: 코스타 집회를 전체적으로 평가해주시겠습니까? 좋았던 점과 아쉬웠던
점, 특히 아쉬웠던 점을 건설적으로 비판해 주시길 바랍니다.



조선우: 주제에 있어서는 굉장히 필요하고, 적절했던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특히 많은 유학생들이 미국에 와서야 처음으로 절망을
많이 경험하게 되는데
, 절망하는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께 의지하게 되고 세상에 평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 교회 생활을 하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오해 중 하나는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더라도,
영어를 잘 하지 못해도 하나님을 잘 믿으면 일이 잘 될 거리고 믿는데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 않아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하나님의 평화는 우리가 채워지는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상관없이
오는 것이며
, 평화는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 오는 것이라는 메세지가 적절했다고 생각합니다.
집회 이후에 조원들과 나눔을 할 때에도 샬롬에 대한 얘기가 계속 나눠지고 있구요.

그러나, 기도와 관련해서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이 목요일 밖에 없었던 것이 아쉬웠습니다. 금식기도와 기도의
밤이 다 목요일이어서
, 화요일, 수요일에 기도 시간이 부족했다는 생각이
들었구요
. 조원들 중에는 새벽기도를 위해서 조용한 기도실을 기대했던 분들이 있었는데요, 가능한 방이 조별 중보기도실 뿐이라 오전 630분 이후에는
중보기도와 겹쳐서 조용히 기도에 집중하기 힘들었습니다
. 그리고 중보기도 신청했던 시간에 시끄러워서 기도하기
쉽지 않았고
, 한 번에 네 개의 조가 들어가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실제로는 여섯 조 까지 함께 했던 부분이 아쉬웠습니다.

박소현: 주제에 관해서는 2007년부터 올해의
주제까지 연결이 잘 되었던 것 같아요
. 주제가 매년 심화되는 것 같습니다. 2007년에 이 시대와 하나님의 세상이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배웠다면, 2008년에는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임하는 것에 대한 인식을 배웠고
, 올해는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임하는 것을 기다리는 우리의 자세를
배웠는데요
, 특히 하나님의 평화를 누리며, 용기있게 세상 나가는 자세에
대해서 배워서 좋았습니다
. 올해의 주제를 따로 떼어놓고 볼 때도, 나라를
떠나서 사는 사람들을 위한 실천 방안을 배운 것 같아서
, 주제가 잘 정해졌다고 생각합니다.


eKOSTA: 주제가 전체 프로그램에 잘 반영되었다고 보시나요?

박소현: 오전 주제 강의의 경우, 손희영 목사님의
강의가 대다수 분들에게 이해하기 어렵지 않나하는 인상을 받았구요
. 저녁 집회 때 세분의 설교,
특히 복음을 소개하는 설교는 주제와 다소 거리가 있지 않았나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세미나의 경우 모든 세미나에 참여하지 못했기에 전체적인 평가를 내리기는 어렵지만, 세미나 리스트를
볼 때에 주제를 프로그램에 반영하기 위한 노력이 엿보였습니다
.

황원태: 조장으로 훈련을 받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준비를 많이 하지 못해서 그런지
집회 처음에는 주제가 잘 와 닿지 않았는데요
, 화요일과 수요일을 지나면서 주제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었고,
수요일과 목요일에는 주제가 개인적인 차원에서 잘 와닿았습니다. 조원들의 경우에는
조장처럼 주제를 미리 묵상할 시간이 없어서
, 처음에는 주제에 대해서 어려워하고 궁금해 하셨는데
2,3
일 후에는 주제에서 연속성을 찾으실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미국에 살아가는
것이 도전이지만 그 도전을 어떻게 감당해야하는지
, 어떻게 용기를 가질 수 있는지, 평화가 무엇인지 알 수 있어서 좋았고요, 나중에는 조원들이 그런 평화를 누리는 모습도 볼 수
있었습니다
.


eKOSTA: 아쉬웠던 점은 없었나요?

황원태: 집회의 느낌이 전반적으로 가라앉은 것 같았구요, 작년에 비해서 올해는 차분했습니다. 주변에서도 그렇게들 평가하시는 것 같구요.
혹시 미혼 코스탄의 숫자가 줄어들어서 그랬는가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찬양 시간에도
차분했고
, 전반적으로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그것이 주제와 연관이 있는지
찬양팀이 바뀌어서 인지 잘 모르겠네요
.

최장환: 저는 이번에 처음 코스타에 참석해서 주제에 대한 연관성을 볼 수는 없었지만,
타국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입장에서 주제가 적절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첫 참석이다
보니
, 코스타의 목적이 무엇인가하는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조장 수양회에서
코스타의 목적이 잠깐 언급이 되었지만 코스타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이길래 이런 프로그램과 일련의 스케쥴을 짰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
그런데 아직 코스타의 목적에 대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코스타 프로그램 중에 선교 헌신 시간도 있었고, 좁게는 하나님의 샬롬으로 승리하는
삶의 초청과 각자 위치에서 선교사적 삶을 사는 것을 초청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 이것을 통해서 무엇을 원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코스타의 정체성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지만,
궁극적인 목적을 가지고 프로그램을 구현했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고요, 통일성,
전체적인 흐름의 일관성이 다소 아쉬웠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개선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기 힘드네요
.


eKOSTA: 전체집회 강의와 설교에서도 통일성이 떨어졌다고 생각하셨나요?


최장환: , 그랬던 것 같습니다.
다른 각도에서 강의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전체적으로 주제가 잘 반영이
되었지만
, 한편으로 주제 강의를 제외하고, 요일이 지날수록 주제인 샬롬에
대한 강의 내용이 큰 변화가 없었던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 그리고 전체 집회의 강의를 맡으신 분들이
본인이 생각하시는 샬롬에 대해서 말씀하시다보니 중복되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

조선우: 저도 샬롬이라는 주제가 잘 와닿았고, 조장 훈련 중 있었던 2주간 묵상과, 조장 수양회 말씀을
통해서 더욱 그랬습니다
. 손희영 목사님의 말씀은 처음 듣고 전체내용을 쉽게 이해하기에는 어렵고 추상적인 면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 녹음된 CD를 가지고 있으니 다시 들어볼 계획입니다.
아쉬웠던 점은 조원들이나, 교회에서 함께 간 분들이 가장 육체적으로 피곤해했던 시간이
오전강해 시간이었는데
, 그러다보니 주제가 가장 잘 전달되어야 했을 오전 강해시간을 통해 샬롬에 대한 이해가
코스탄들에게 잘 이뤄졌는지 확신이 없었습니다
. 아침 묵상이 잘 이뤄졌다면 그것을 통해서 각 조에서 주제가
잘 전달 되었겠지만
, 오전강해를 통해서 주제가 얼마나 잘 전달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황원태: 손희영 목사님의 세번의 강의가 어렵고 추상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강의 중에 드신, 구체적인 예들이 도움이 되어서 연속성이 있었구요. 샬롬으로 시작하여 용기로 잘 마무리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녁 설교 중에 최장환 형제가 말씀하신대로
각각 다른 강사가 오셔서 말씀하셔서 그런지 겹치는 부분이 있었고
, 연속성이 부족하였던 것 같습니다.
손희영 목사님의 말씀은 어려웠지만 연속성이 있었는데, 저녁설교에서는 그것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 작년에는 두 분이 저녁 설교를 각각 두 번씩 하셔서 연속성 면에서 좋았습니다.
또 화요일 복음을 소개하는 구원초청 말씀에서는 복음의 핵심사항이 다뤄지지 않아서 아쉬웠습니다. 오히려 유진소 목사님의 복음 세미나에서는 그 내용들이 잘 요약이 되어서 전달되었구요. 작년에
노진준 목사님 말씀이 무게가 있고 재미도 있었고
, 정민영 선교사님 말씀도 좋았는데요, 작년과 같이 두 번 두 번의 포맷이 좋은 거 같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둘째 날에 구원초청이
급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 셋째 날에 구원초청을 하고, 선교와 헌신에
대한 초청을 넷째 날에 하면 어떨까 제안해봅니다
. 조장으로서 첫 날 조원들이 구원의 확신이 있나를 확인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 화요일 저녁까지 인도하는 것이 급하다고 생각합니다.

박소현: 손희영 목사님의 전체집회 설교는 역시 어려웠다고 생각하지만,
굉장히 어려운 주제이기에 그럴 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만큼 쉽게 얘기하기
어려운 주제였구요
. 손희영 목사님의 첫번째 설교가 지난 코스타 주제와의 연속선 상에서는 이해가 좀 더 쉬운데,
올해 첫 참석자에게는 어려웠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두쨋날 구원초청 설교에
대해서는 흡인력이 있었지만
, 구원의 당위성에 대해서 좀 더 설명해 주셨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설교의 요약이 저에게는 “구원에 있어서는 중간 지대는 없다. 믿거나,
그렇지 않거나이다”로 요약될 수 있었는데 이 말씀이 도움이 되지만 구원 초청을 하는데 있었서는 구원이 왜 꼭 필요한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


eKOSTA: 오후에 있었던 세미나에 대한 평가를 해주시겠습니까?

박소현: 세미나를 많이 들을 수 없었기에 전체 평가는 어렵지만, 저는 이일형 장로님의 예배에 대한 세미나, 코스타 간사님들이 복음주의 학생운동에 대해서 설명하신
세미나
, 그리고 F2를 위한 세미나와 그 세미나와 이어진
TM
세미나를 들었는데요, 지금 F2는 아니지만
오래동안
F2였기에 관련 세미나를 많이 들었습니다. 올해 기혼 코스탄이
늘었고
, 거기에 따라 F2 분들도 많이 늘었는데요, 그분들이 미국 땅에서 정체성이 약해서 상처 받기 쉬운 자리에 있는데, 학생, 청년을 대상으로 하는 코스타에 와서 더욱 상처 받으시면 어떨까 하는 걱정이 있었습니다.
비율이 커졌기에 거기에 대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구요
, 그것이 단순히 그분들에 대한 측은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분들이 대부분 아이를 키우신다는 측면에서
, 올바른 신앙 안에서 건강할 때에 코스타 정신을 파급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다고 생각합니다
. 그런데 F2를 위한 세미나와
TM
세미나의 내용이 잘 짜여져 있다기 보다는 모여서 서로의 사정을 얘기하고 의견을 공감하는 정도에 그치는데,
좀 더 창의적인 세미나가 준비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황원태: 두 개의 세미나에 참석을 했습니다. 구원 초청을 받은 조원과 함께 구원에 관한 세미나에 들어가서 구원의 기본사항을 점검할 수 있어서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변명혜 교수의 자녀 교육에 대한 세미나를 들었는데 구체적인 사례 가운데 자녀를 세상에 내보내는 것이 힘들다는 도전을
받았습니다
. 아쉽게도 이번에는 세미나를 많이 듣지 못했는데요, 조에
아이들이 있고
, 세미나 시간에 아이들을 맡아주기 때문에 그 시간에 중보기도를 하기로 했는데,
약간의 혼선이 있어서 중보기도를 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습니다. 그리고 조원들을 상담으로,
중보기도로 인도하느라 세미나에 들어가지 못해서 아쉬웠습니다. 제안하고 싶은 것은,
해마다 인기 있는 세미나에 등록이 금방 마감이 되는데, 복수의 강사가 비슷한 세미나를
개설할 수는 없는가 하는 것이고요
, 이번에 처음으로 전체집회를 mp3로 만들었는데, 세미나가 고음질로 녹음되어서 용량이 커졌는데요, 음질을 줄이면 용량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 될 것 같습니다.

최장환: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세미나의
종류가 많다보니 처음 참석하는 입장에서 각 강의에 대해서
, 강사에 대해서 아는 바가 별로 없어서 처음에 세미나를
선택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 세미나 선택을 위한 가이드라인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성경의 이해 (2+1+1으로 관통하는 성경의 맥), 공학분야의
TM
과 학업과 교회 사역에 대한 세미나를 들었는데요, 강의 내용이 한결 같이 좋았습니다.
유학 올 정도이면 다 지성인인데 그 눈높이에 맟줘서 잘 해주신다는 생각을 했구요, 개인적으로도 세미나의 만족도가 높았습니다.

 

조선우: 제가 선택한 세미나의 경우,
거의 모든 세미나에 너무 적은 인원만 참가하시거나, 늦게 오시는 분들이 많거나,
들어오셔서 조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제가 선택한 세미나 몇 개에 대한
만족도가 높지 않았는데
, 집에 와서 녹음 CD들을 많이 듣고 나서 보니,
제가 단순히 세미나 선택을 잘못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미나 참여도가
낮았던 건
, 아이가 있는 기혼자 분들의 참여가 힘들었던 이유도 있지만요, 어떤 분들은 어차피 CD가 판매 되니까 안들어도 되겠다고 얘기하기도 했습니다.
또 시간을 초과하는 세미나도 좀 있었습니다. 전체 집회 때 세미나 참여를 좀 더
강조해도 좋을 거 같습니다
. 예를 들면 세미나 때 영상을 사용하시기도 하는데 CD를 통해서는 그것을 접할 수가 없고, 질문이 잘 안들리기도 하며, 질문을 직접 할 수 없는 단점과 같은 얘기를 해주어 세미나 참여를 더 활성화 시켜도 좋을 거 같습니다. 참여도가 낮을 경우 강사분들이 힘이 빠지는 거 같아 안타까웠습니다.

 

박소현: 저는 코스타 운동에 대해 설명해주시는
세미나가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 코스타의 궁극적인 목적이 궁금하시면, 이렇게 요약해서 해주시는 세미나를 듣는게 도움이 되는 거 같습니다. 훨씬 더 잘 알게 되는
기회였습니다
.

 

조선우: 저도 작년에 코스타가 어떤
모임인가 하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 그런 점들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많을 거 같은데요, 세미나로 하시는 거 보다는 첫 날 오리엔테이션 때 간략히 소개를 해줘도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조장 수양회때 코스타 운동에 대한 소개가 있었는데, 저는 그것을 듣고 작년에 처음 코스타에
와서 궁금해하던 부분들이 많이 해결됐습니다
. 그 소개가 전체 코스타로 확장되는 건 어떨까요.

 

eKOSTA: 그러면 이제 조활동에 대해 얘기해주세요.

 

조선우: 저희 조는 너무 신앙적으로
헌신된 분들로 가득 차서
, QT 나눔이나 기도 나눔, 기도회가 굉장히
풍성했습니다
. 반면에 아주 헌신된 분들이 오셨기 때문에, 복음에 대해
생각하면서 어떻게 전할까 고민할 기회는 없었습니다
. 전체적으로 조원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너무 적었습니다.
조장 모임 때문에도 그랬고, 밤의 조모임도 그리 늦게까지 할 수 없어서 아쉬웠습니다.
내년에 다시 조장을 한다면, , 목 정도
밤에 강사분들을 초청해서 조모임을 함께 해보고 싶습니다
. 이번에는 아침 QT 시간에 강사 분들을 초청했던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저희끼리 하면 답이 안나오는 부분에서,
강사분들께서 실질적인 도움을 주셨습니다.

 

최장환: 저는 조모임이 너무 좋았는데요,
조편성에 대해 아쉬운 부분이 있었습니다. 저는 자녀가 있고 없고에 따라 스케쥴과
관심사가 완전 다르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 저희 조는 아이 없는 부부가 세 커플, 있는 부부가 한 커플이었는데 아이 있는 부부는 약간 겉돌다시피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래서
아이의 유무에 따라 조를 따로 나누는게 좋을 거 같습니다
. 또 한 친구는 본인만 학생이고 나머지는 직장인이라
어울리기 힘들었다고 했습니다
. 등록을 받으실 때 학생들 조에 가고 싶은지, 직장인의 조에 가고 싶은지 우선순위를 넣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등록시 조 구성에 대한 기호를
표시하는 시스템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

 

황원태: 저희는 작년의 경우,
반 정도 아기가 없었고, 반정도가 있었는데, 조모임이 잘 되었습니다. 올해는 아이가 다 있어서, 조모임이
힘들겠구나 싶었는데
, 의외로 잘 되었습니다. 아쉬웠던 건,
큐티를 저녁 조모임 때 나누자 하고 합의를 봤었는데요, 별로 안좋았던 거 같아요.
피곤하기도 하고 아침에 맑은 정신으로 묵상하는 것만큼 잘 되지 않았습니다. 저녁
때는 여러 가지
sharing을 하는건 좋은데, 말씀 묵상한 걸 나누기는
좀 힘든 거 같습니다
. 행정적인 면에서, 저희 가정들이 모두 같은 층에
있었고요
, 가운데 있는 라운지에서 조모임 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아이들이 옆에서 놀기도 하고 들어가서 자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조장 핸드북에 보면 ‘따로 또
같이’ 라는 부분이 있는데요
, 저희는 자매들은 따로 한 번 모이긴 했는데 형제들은 따로 모이지 못했습니다.
아이들 있는 가정은 ‘따로 또 같이’가 좋은 생각인 거 같아요. 조장의 역할에 있어서,
조원들이 구원의 확신이 있는지 확인하는 부분이 굉장히 중요한 거 같아요. 저희 조의
경우
, 목요일 밤에 새벽 3시까지 얘기한 결과, 한 형제가 그동안 교회에서 잘 섬겨왔지만, 사실은 구원의 확신이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더 빨리 알았으면, 상담도 받을 수 있었을 것이고, 더 복음에 대해 깊게 나눌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조장들은 조원들의 영적인
상태를 빨리 확인하는게 가장 중요하다고 느꼈습니다
.

 

박소현: 아쉬웠던 점은,
아침에 아이들 맡기는 시간이 8:30이고 전체 집회 시간이 9:15라 현실적으로 그 사이에 큐티가 힘들었습니다. 기혼 자매들이랑 같이 큐티를 굉장히 하고 싶었는데
시간이 안난다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 아침 뿐만 아니라 모든 조모임 때 시간이 부족하다는 아쉬움이 항상 남았습니다

 

eKOSTA: 이어서 찬양, 금식기도, 상담 등 운영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박소현: 저는 상담이 코스타의 귀한
자산이라고 생각합니다
. 다른 곳에서는 그렇게 좋은 상담을 받을 기회가 별로 없습니다. 특히 부부가 같이 가서 상담을 받았을 때 도움이 많이 되는 거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올해 찬양이 조용한 곡 위주로 된 것 같은데, 조금 신나는 노래가 섞여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

 

최장환: 저는 개인적 기도 시간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 금식 기도회나 기도의 밤이 있었는데, 그때는 전체적인
기도제목을 제시하고 같이 기도하는 방식이었죠
. 코스타의 주제가 시사하는 것처럼 개인적으로 지속적으로 기도하면서
대처해야 할텐데
, 개인적인 기도시간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
중보기도자들 한 사람씩 기도제목을 제시하셨는데, 그때마다 인도자들의 톤이 달라지고,
변화가 심하니까 기도하는데 맥이 끊기지 않았나 싶습니다. 한 사람이 인도하면 좋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 강사님들과 식사를 같이 하기 위해서 컨택하곤 하는데, 그 과정이 조장의 재량에 따라서 달라지는 점이 걸렸습니다. 어떤 조장은 여러 강사를 초청하고,
어떤 조장은 한 사람도 초청하지 못하고 그러는 것 같았습니다. 강사님들과의 교제,
식사, 저녁 모임에서 만남이 너무 규모가 없는 것같습니다. 상담의 경우처럼 제대로된 절차를 만들어서 조장들이 신청을 하고 강사님들의 시간을 배정하는 것을 건의드립니다.

 

eKOSTA: 강사님들 초청에 질서가 있어야
한다는 점은 매우 동의합니다
.

 

조선우: 사람들이 엑스포에 대해서 기대하는
점도 크지 않고
, 엑스포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도 많지 않고, 엑스포에서
부스를 계속 지키고 있는 사람도 적은 것 같습니다
. 개인적으로 전체 집회를 통해서 홍보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 상담은 예년처럼 너무 좋았고, 몇몇 조원들의 경우 정말 치유가
되었다고 했고요
, 자신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기도제목을 상담자들을 통해서 알게 되고 기도하게 된 점이 좋았던
것 같고요
. 약간 아쉬웠던 점은 장소에 대한 것인데, 저는 따로 상담실이
있었어요
. 그런데, 조원들이 식당 지하를 배정 받았는데,
너무 공개된 장소라서 상담에 어려움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게 개선 가능한 일있지는
모르겠지만
, 좀더 좋은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황원태: 찬양팀이 바뀌어서,
또는 주제곡 자체가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조금 조용한 곡 위주로 된 것같고, 엑스포는
좀 작아진 것 같고
, 상담은 처음 했는데, 참 좋았습니다.
광고를 더 해도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상담자들에게 연결시키는 조장들의 역할이
큰 것 같습니다
. 기혼조에 속했지만, 싱글들이 숙소, 식사에 있어 불편한 점에 대해서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중보기도팀으로부터 중보기도를
받은게 참 힘이 되고 위안이 되었습니다
. 릴레이로 하시는데 부담이 되시니까 미안하기도 한데,
시간을 정해서 또는 표를 만들어서 중보기도 받고 싶은 분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조장님들이 멘토님들을 많이 만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조장들이 어려운 점이 있을
때 멘토님들의 도움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

 

eKOSTA: 내년의 주제가 ‘어그러진 세상,
하나님의 긍휼’로 발표되었습니다. 주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코스타가 비젼을 제시하고 이끄는 역할을 잘 하고 있는지, 어떻게 평가하시는지,
건의사항이 있으신지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조선우: 코스타에서 내년 주제가 소개됐을
, 조원들이 ‘와 너무 좋다’라고 반응했던 것이 생각납니다. 샬롬이
파괴된 상태가 어그러진 세상이라면
, 이 상태에서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것은 예수님, 하나님이 주시는 샬롬이라고 할 때, 올해 주제와 잘 맞는 주제라고 생각하고요.
개인적으로 코스타가 저를 깨워주고, 파라다임 전환을 가져다 준 것 같습니다.
알지 못했던 것을 알려주었다기 보다, 알고 있었지만 잊고 있었던 것에 대해 다시
확실하게 환기시키고
, 약간 잘못 알고 있던 것에 대해서 바르게 알도록 해주었던 것 같습니다.
내년 코스타에 돌아오는 문제와 관련해서는, 코스타가 복음주의 운동이라는 측면에서
코스타에서 훈련받고 세상 속으로 흩어지는 것이 코스탄의 소명이니까
, 내년 코스타에 동일한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에 대해서는 좀 부정적으로 생각합니다
. 내년에 다시 참석한다면 성장한 모습으로, 조원으로 갔다가 조장으로 간다든지, 코디로 간다든지 뭔가 성장하는 모습으로 참여하고 싶습니다.
건의사항은 11지역 같은 경우, 지역이 매우
넓어서 같은 지역에서도 어차피 지역 내에서 팔로우업 하기는 힘들거든요
. 조장 수양회에서 다양한 지역을 섞어서
하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

 

최장환: 매년 코스타 주제를 보면서
사사기를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 사사기를 보면 비슷한 구조가 있지만 그것이 계속 반복되는데요,
주제도 약간 비슷할 수 있지만, 그것이 매년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제가 관심있는 부분은 코스타 후속프로그램인데, 이런 후속 프로그램이 교회나 학교
공동체에서 이루어지는 프로그램과 어떻게 차별화될 수 있을지 더 고민하면 좋겠구요
. 코스타 마인드라는 것이
있다면 그런 것 중심으로 프로그램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 예를들어 코스타 복음주의를 중심으로 멘토님들이
주도를 해서 코스타 마인드를 되새기는 모임이 있어야하겠고
, 비슷한 관심 주제에 대해서 지식을 가지신 강사님들과
지속적으로 만난다든가
, 코스타 기간 중에 소개된 책들을 중심으로 코스타 마인드를 다지는 독서클럽을 운영한다든지
하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

 

황원태: 주제는 연장선상에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 올해가 예수님의 평화니까 한 바퀴 원을 돈다는 느낌이 듭니다. 후속 프로그램은 조별 게시판을 신청했고, 개인적으로 원투원을 하려고 하고 있고요.
코스타에서 제공해주는 프로그램이 많이 도움이 되는 것 같아 감사드립니다.

 

박소현: 주제를 처음 봤을 때 받은
느낌은 주제가 부정적인 표현으로 시작되어서 마음의 부담이 되었습니다
. 저는 코스타에 참석할 때마다 삶이 변하는
것같거든요
. 그래서 다시 참석하고 싶습니다. 일회성 집회에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 한 단계 도약을 위해 돌아가고 싶습니다. 한가지 우려되는
것은 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으니까
, 코스타가 고령화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다 학생들이었는데, 참석하는 사람들이 코스타를 떠나지 않으니까 아이들의 나이도 많아지고
참석자들의 나이가 많아지는데
, 이게 바람직한 건지 약간 의문이 있어요. 코스타가 허락하는 범위에서 참석하고 싶습니다.

 

eKOSTA: 감사드립니다. 오랜 시간 좌담회 참여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코스타를 위해서 기도해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코스타 시카고 주제 강의 제 2강]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 16:33c)

다음은 2009 KOSTA/USA Chicago 컨퍼런스 둘째날에 있었던 손희영 목사님의 주제 강의를 eKOSTA에서 녹취한 것입니다.

제 2강(수요일)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 16:33c)



오늘 주제강의 두번째 시간에서는 이번
KOSTA
주제말씀중
[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말씀을 살펴본다.

고통의 시대

우리가 살아오면서 특히 예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이 계신다면 이런 일이 일어날까라는 의문을 품어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지구상에 일어나는 수많은 , 고통, 재난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내가 직접 경험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류의 연대성 가운데, 다른 사람들이 겪는 고통을 통해서 이러한 아픔과 눈물을 끊임없이 경험하게 된다.

또한, 문화, 역사, 뉴스, 책을 통해서 우리는 세상이 고통스러운 곳임을 발견한다. 물론, 세상에는 아직도 아름다움과 선함, 참됨이 존재한다. 하나님의 선한 창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악이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들어와 하나님의 저주가 있었고, 그로 인해 수많은 , 반창조 혹은 반생명의 증상이 발생하여 우리가 고통받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속에서 구원역사를 이루어나가야 하므로 인간을 태어나게 하시고 복을 주시고 하나님의 비밀스런 은총을 부어주심으로 창조세계를 보존하신다.

그러나, 세상의 악이라는 것은, 단순히 나쁜 사건, 내가 지은 나쁜 죄가 아니라, 엄청난 세력, 유사인격 혹은 하위 인격처럼 거대한 사람과 같은 무서운 힘을 가지고 창조세계와 인간을 파괴하고 있다. 그리고 역사를 통하여 악은 더욱 거대하고 강력해지고 있다. 과거에 비해 오늘날 악이 훨씬 강하고 많다. 활로 했던 과거의 전쟁과 단추 하나로 수십만명을 죽이는 현대의 전쟁을 비교해보라또한, 인간성의 황폐, 물질주의의 기승으로 사람의 가치가 그가 가진 물질의 가치에 의해 결정되는 시대는 과거에 별로 없었다.

세상,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겼다고 하실 , 세상이란 무엇이고 이겼다고 하는 의미는 무엇인가를 이해하자.

세상을 이겼다십자군 전쟁을 통해, 혹은 복음 전파로 이교도에 대한 승리 혹은 개종? 질병과 굶주림의 정복? 아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무엇을 이겼다는 것인가? 마디로, 죽음, 사망을 이기셨다 의미이다.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살아나심으로 사망 권세를 이기셨다 것은 단순히 분이 죽은 몸에서 살아나신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것이
fact
이기는 하지만.

죽음이란 생물학적으로는 목숨이 끊어지는 것을 의미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저주가 끝까지 계속되었을 일어나는 사람과 피조세계의 궁극적인 운명을 죽음이라고 말한다. 죄를 지은 후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 그것이 저주임은 어제 살펴보았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려는 우리들을 말리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바로 저주
– curse
퍼붓는 것이 아니라
이다이것은 마치 태중의 아기가 탯줄을 스스로 끊어버린 것과 같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의존된 상태에서 영생의 복을 항상 지속적으로 공급받아야 하는 존재인데, 탯줄을 스스로 끊는 것과 같이 하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께서 이대로 내버려두시는 것이다.

결과로, 우리는 죽어가고 죽는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저주이다. 이로부터 모든 악의 증상들
미움, 증오, 시기, 질투, 폭력, 파괴와 같은
인간 세상에 들어오게 것이다. 사랑해야 사람을 미워하고 증오하는 , 그로 인한 극심한
죽을 같은
고통, 가난과 질병, 공해, 자원고갈, 환경오염 모두가 죽음의 증상이다.

이와 같이 인간의 인격적인 죄로 말미암은 것들, 이것을 사주, 확대 재생산하는 존재가 있으니 바로 사탄이다. 그래서, 지구상의 악의 세력은, 모든 인간이 지은 죄를 합한 것보다 훨씬 크다. 사탄이 증폭시켰기 때문이다. 인간의 작은 죄로 시작된 모든 죽음의 증상은 사탄을 통해서 증폭되어 다시 인간에게 돌아온다.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 그러하다.

, 모든 죽음의 증상은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의 결과로 세상에 들어오게 것이다.   

살후
1
장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다시 세상에 오실 때에
안식, 완벽한 샬롬으로 갚으실 것이라고 되어있다. 때까지 하나님을 모르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치 아니한 자는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을 것이다. 전까지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예수님께 돌이켜 회개하면 샬롬을 회복할 기회가 얼마든지 있지만, 때에는 하나님의 영원한 저주에서 벗어날 기회가 다시는 없다. 또한, 하나님과의 거리는 불가역적으로 무한히 멀어진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이다죽음의 증상에 고통스럽게 시달리다가 창조물로서의 모든 존재가 파괴되고 소멸되는 죽음을 맞는다.

죽음, 샬롬, 부활, 구원과 같은 성경의 위대한 언어를 이해할 , 도덕적 죄의 회개와 죄사함으로 국한시켜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꿈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하나님의 선한 창조가 인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저주로 파괴되고 있을 ,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모든 악을 몰아내시고 창조세계를 아름답게 샬롬으로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 꿈의 부분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이다. 그러한 꿈이 이루어진 상태를 샬롬이라고 하는 것이므로, 우리는 이제 혼자 회개하고 구원받은 것에 만족하지 말고, 과연 우주에 하나님의 샬롬이 이루어졌는가를 항상 생각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었노라라는 의미는, 부정적인 세력의 극치, 악의 극치, 악의 세력의 궁극, 죽음을 이기셨다는 의미이다.

공생애 기간동안 예수님께서 행하신 치유사역, 귀신을 쫓으심, 바다를 잠잠케 하심은 모두 예수님의 악의 세력을 잠재우는 능력을 보여준다. 나병환자를 치유하시는 예수님을 주목하자. 내가 만지면 옮는데, 예수님께서 만지시면 병이 낫는다. , 악의 결과, 죽음을 정복하는 힘을 미리 십자가 이전 부터 과시하셨다.

그리고는, 마침내, 십자가에서 결정적이로 최종적으로 세력을 없애셨다. 십자가의 사건은 실제적, 역사적인 사건이면서, 동시에 상징적인 사건이다. 과거, 현재, 미래를 관통하는 악의 세력에 대한 심판이며 악을 없애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선포인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주변에 무엇이 있었는가? 로마정부의 하수인 빌라도, 식민통치 정부 헤롯왕의 하수인, 대제사장 무리들과 같은 권력자들이 모여있었다. 한결같이 예수님을 대적하고 죽이려했다. 이것은 상징적으로 모든 세대의 권력자들, , 악한 정부, 하나님을 대적하려는 강한 힘들을 상징하는 ,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주위를 포위했다.

그리고 유대인 군중들이 있었다. 이들은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하나님없이 있다고 주장하는 인본주의자들이었다. 인본주의라는 말이 선한 뜻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으나, 여기서는 하나님을 도외시하고 인정하지 않는 모든 종교, 이데올로기, 무신론을 지칭한다. 왜냐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초월적인 하나님의 도움 없이 있음, 내가 자신에게 하나님 노릇을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유대백성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민족들이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 ,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 자녀, 아들이 된다 하나님의 언약의 선포를 수도 없이 들어왔던 그들이었다. 그런데 요한복음19:15에서, 그들은
우리에게 로마 황제 가이사외에는 왕이 없다 소리쳤다. 창조해주시고 선택해주신 하나님을 정면으로 거부하였던 것이다. 이는 바로 오늘날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는, 있다고 하여도 믿을 없다고 주장하는 타종교, 이데올로기, 무신론자들의 주장이기도 하다.

또한, 마태복음27:40에서, 유대인들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와보라 도전하였다. 이것은 사탄이 마태복음
4:6
에서 광야에서 예수님께 던졌던 도전이었다. 사탄의 강력한 세력이 마지막 순간까지 십자가를 애워싸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모든 악의 세력들, 인류 역사 이래 그리고 십자가 이전 모든 세대, 앞으로 모든 세대의 모든 악들을,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자기 존재와 인격의 안에 고스란히 받아서 죽음으로써 악의 무섭고 가공할 힘을 소진시켜 버리신 것이다.

십자가와 가시관 

십자가위에 가시관을 쓰시고 달려계신 예수님을 생각해보자.

예수님 당시의 십자가는 로마제국의 사형방법중 가장 잔인한 것이어서, 로마시민은 십자가형을 받지 않았다. 국가반역죄인, 로마 황제에게 반란을 꾀한 자에게만 가했졌던 로마의 극형이다. 손과 발에 못을 박아 여러 날을 매달아 두면 서서히 피를 흘리며 팔레스타인 땅의 태양의 뜨거움과 밤의 무서운 추위가운데 죽어가게 하는 무서운 형벌인 것이다.

또한, 예수님은 독특하게 머리에 가시관을 쓰셨다.
가시 에덴동산에서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것이다 하나님의 저주의 상징이다.   세상의 모든 종류의 악의 상징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쓰신 가시관은, 세상의 모든 악이 예수의 인격과 존재위에 얹혔음을 보여준다.

예수님이 운명하실 , 마태복음27:51 의하면, 예루살렘 성소과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둘로 갈라졌다. 휘장은 마리가 당겨야 찢을 있을 정도로 두껍고 튼튼한 장막이었고, 금색실로  그룹, 하나님의 천사의 형상이 수놓아져 있었다. 그룹은 창세기3:25, 하나님의 샬롬에서 인간을 추방하실 죄인은 샬롬으로 돌아올 없음을 지킨 문지기, 하나님의 천사이다. 성소의 휘장이 찟김으로 이제 문이 열린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샬롬으로 들어갈 있게 것이다

갈라디아서
3:13

나무에 달린 자마다
(
하나님의) 저주를 받기 때문이다라고 십자가 사건을 해석하고 있다유대 지도자들에게, 예수님의 죄목은
신성모독죄였다. 유대의 율법에 의하면, 죄목에 해당하는 형은
돌로 쳐죽임을 당하는 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돌로 맞아 죽으시게 되면, 핍박받는 선지자로 인식되어 백성들의 존경을 받게 것이므로,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나무에 달아 죽게 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알고보니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네라고 깨닫게 하고자 하였다. 예수님을 나무에 달려 죽게 하기 위해서 그들은 예수님에게 로마 반역죄, 유대인의 왕을 자처한다는 거짓죄를 덮어씌운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간교한 생각을 완벽하게 역이용하셔서 율법의 저주를 예수님께 부어서, 우리를 저주에서 속량하시는 섭리의 도구로 활용하셨다.

부활로 성취된 샬롬의 시대

그리고 이제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부활이 없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선포한 모든 메시지가 모호해진다. 따라서,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항상 같이 이해되어야 한다.

부활은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예수님께서는 정말로 죽으셨고, 장례까지 치루어져서
3
일이 되셨다. 육체가 썩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부활하셨다
(
로마서1:3-4).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속역사, 구속사의 단계를 보여준다. 처음 창조부터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때까지의 창조의 시대, 육의 시대와부활 후의 시대, 시대, 영의 시대, 성령님의 시대인데, 영의 시대는 창조의 시대와 비슷한 점도 있으나 본질적으로 다른 시대, 하늘과 땅이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을 통해서 영의 시대를 준비하셨고 여셨다. 그리고 들어가셔서 첫번째 주민이 되시고 우리를 초청하셨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아직 실존은 들어가지 않았으나 주민등록이 옮겨진다. 우리의 실존도 언젠가 시대, 샬롬으로 충만한 나라 시대에 들어가게 된다.

시대, 영의 시대는 예수님이 처음 오실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불완전하고 완성되지 않았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완성될 것이다. 지금까지 지나온 역사 속으로, 미래에 있을 영의 시대가 부분적으로 침투해 들어온 이것이 바로 샬롬의 나라의 이중구조이다. 다시 오실 때는 모든 사람에게 활짝 열릴 것이나, 중간, 재림 전까지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그것도 부분적으로 제한적으로만 샬롬을 누릴 있다. “Already,
But not yet”.

그래서 시대에는 예수님의 샬롬의 나라와, 살기등등한 세상나라가 겹쳐있어서 우리는 크리스챤이면서도 부득불 고통과 고난을 당한다. 그러나 악의 세력은 궁극적인 힘이 없다. 예수님께서 본질적으로 결정적으로 소진시키셨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다른 사람들, 조상들의 죄로 인한 증상, 질병, 장애, 실패, 두려움, 자연재해, 사고등을 인류의 연대성가운데 우리도 고난을 겪는다. 그러나 그러한 악의 최종적인 결과인 죽음이 완전히 소진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담대할 있는 것이다.

히브리서
2:14-15
인간의 실존을 정말 정확하게 묘사해준다.
죽기를 두려워 일생에 종노릇한다 것이다. 우리는 죽음의 증상들인 고통을 경험할 무의식적으로 죽음을 떠올리고 두려워한다그것이 죽음의 증상이기 때문이다. 미움과 증오를 받을 , 모든 악의 현상을 경험할 우리는 그것의 본질인 죽음을 두려워한다. 이것의 가장 자명한 증거는, 바로 먹고 사는 문제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확실히 소진시켰음을 믿게 되면, 두려움이 없어진다. 나로 하여금 죽기를 두려워하게 했던 것들이 나타나면 이제 힘은 들지라도 두렵지 않다. 자유롭고 용기 있게 살게 된다. , 부분적인 제한적이나마 샬롬을 누리는 것이다. 영의 시대, 시대의 완전하게 누리게 샬롬의 열매, 맛배기를 누리는 것이다. 그럼에도 너무 크기 때문에, 샬롬의 작은 부분이라도 우리 영혼에 오게되면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충분히 살아지고 나누어 있게 까지 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내가 세상을 이겼다 그러므로 너희는 담대하라 용기를 내어라 말씀하신 것이다.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자유함 누리게 된다. 가질 지라도 우리는 노심초사하면서 자기중심적으로 끌어당기면서 살기를 그만두게 되는 것이다빼앗아 먹기 위한 작은 탐욕으로 인한 다툼과 전쟁이라는 매임에서 우리는 해방된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가진 자유함과 샬롬을 통해서 우리의 모든 것은 다른 사람의 복지, 샬롬을 위해서 내어지게 되는 것이다. 구원은 샬롬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샬롬이 없는데 내가 죄용서 받았고 천국에 가게 되었다는 식의 구원의 개념은 일그러진 것이다. 나와 모든 사람이 전체성가운데서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집단을 이루는 것이 구원이다

어떻게 구원을 구체적으로 누릴 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배타적으로 누리게 되는지는 내일 다루기로 한다.

[코스타 시카고 주제 강의 제 1강] 너희가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나 (요 16:33 b)

 다음은 2009 KOSTA/USA Chicago 컨퍼런스 첫째날에 있었던 손희영 목사님의 주제 강의를 eKOSTA에서 녹취한 것입니다.
 

제 1강(화요일): 너희가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나.(요 16:33 b)

같이 기도 드립니다. 할렐루야  영혼이 주님을 송축합니다. 할렐루야  영혼이 주님을 기뻐하며,
할렐루야 내 영혼이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 시간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의 찬양을 받으시기에 더욱 합당하신지
계시의 말씀을 통해 배우게 하시되, 비록 인간의 메신저를
통해 말하는 것일 지라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을 수 있도록 우리 모두를 주장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과연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슴을 우리 모두가 체험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나이다. 아멘

      3일 
동안 이번 코스타 수양회 중심 성구인,
요한 복음 16장 33절 말씀을 같이 강해하고 
살피게 됐습니다. 이 말씀 짧은 말씀이지만
부분으로
나눠서 중간 부분을 오늘 살피고, 그 다음에 마지막
부분을 내일 살피고, 오히려 첫번째 부분을 글피에
살피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헬라어 본문으로는 우리
한국 번역과 순서가 같지만, 우리가 생각해 볼 논리
순서를 조금 바꿔 봤습니다. 우리 본문의 말씀 같이
한번 읽어 보시겠습니까?

      시작,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아멘.

      제가 어떤 신문 칼럼을 하나 읽어 드리겠습니. 누구도 누구의 말을 듣지 않는다. 모두가  막고 타협 없이
자기 말이 옳다고 막무가내다. 지금 우리 사회가 우리
정치가 그 꼴이다. 이쯤 되면 이 세상은 막가자는 것이나
다름 없다. 대통령부터 그렇다. 자기만이 옳다며 자기를
따라주지
않는 세상에 혀를 찬다. 여당도 지리멸렬이다. 일도 많고 갈 길도 바쁜데, 집안 싸움에서 못 벗어
난다. 야당 역시 가관이다. 법치를 무시하고 거리에서
방황하며 죽은 전직대통령에게 기숙하는 수준이다.
교수 사회, 시민 단체, 각종 이익 단체들도 오로지 자기
주장에만 매달린다. 만인이 만인의 적이다. 모두가
서로를 못
잡아 먹어 야단이고, 조금만큼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체면불구 하며 으르렁 된다. 여기
저기서 적개심이 난무하고, 촛불이 횡행하며 서로의
생명 줄을
끊으려고 광적으로 돌진한다. 북한을 놓고 나라가 둘로
갈라지다 싶히 하고, 거기다가 남과 북은 이제 바야흐로
마주 보고 달리는 괘도에 올라 탔다. 안에도 적이고
밖에도 적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통합과 소통, 이해와
타협, 법치와 민주주의가 실종된 상태다. 이것은 정치
권력이나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기본이 무너진
상태이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사회가 작동하는
기본 원리가 무너진 상태이다. 우리에게는 제 삼의
길이 필요하다. 지금처럼
리더십의 부재, 삼지 사방으로 흩어진
민심, 자기 이익에만 집착하는 지도층의 욕심, 오직
반항과 파괴로만 일관하는 저소득측의 비 타협이 난무
하는 사회로는 바람직한 21세기로의 진입이 어렵다.
우리는 우리를 만인대 만인의 싸움에서 구해줄 진정한
개도론자가 필요하다. (여러분이 이런 개도론자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대모의 공포증 없이, 마이크의
소음 없이, 욕설 섞인 저주 댓글이 없이, 매일의 안정된
생활에 매진하는 화목한 사회에 살고 싶다.

      여러분 이게  한겨레 신문의 칼럼인지,
또 조선일보 칼럼인지 머리를 굴리지 마시고 그대로
잘 받아 들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인간 역사가 항상
그랬지만, 지금 이 시대는 너무 너무 각박하고 살기가
팍팍한 시대 입니다. 자본주의
한계가 드러났고, 그렇다고 공산주의 실험을 다시 해볼 없는, 아주 어려운 그런 상태 이죠. 여러분이 노인이 되는
40
년쯤 후가 되면은 국민의
5
명중의 한명이 노인이 됩니다. 그리고 국민
4
사람이 한명의 노인을 부양해야 되는 그런 어려운 처지에요. 그런데 우리 나라는 출산율이
1.1
세계에서 가장 낮습니다. 시대를 살아가는 여러분들, 그리고 어쩌면 시대를 책임지고 살아가야 여러분들이 과연 시대를 어떻게 읽고 계시는지. 여러분이 지금 공부를 하고 계시지만 이제 졸업을 하면 금방 조국 현실에 들어가야 합니다. 세계 현실에 우리가 눈을 떠야 합니다. 늘어가는 지구촌의 인구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며 우리 미래에 대한 통찰력은 어떠한지 인류가 역사 시작 이래 항상 추구해 왔던 샬롬이 과연 가능한 것인지. 우리가 타락한 피조 세계 속에서 악에 지쳐 있는 인간들의 틈바구니에서 과연 세상을 이길 힘을 우리 스스로가 갖고 그런 용기를 다른 사람에게 있는 사람이 되야 되겠는데 어떻게 하면 그렇게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번 수양회 주제가 샬롬 입니다. 샬롬은 평화 혹은 평강으로 성경에 번역이 되어 있고, 신약 성경에 주로 나오는 평화의 원어는 에이르네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피스죠. 평화, 평화라고 말을 하면 즉각적인 우리의 인식이 전쟁이 없슴, 편한 사이, 다툼과 갈등이 없는 상태, 혹은 어제도 우리가 배웠지마는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과 피조세계와의 원만한 삼중구조의
관계를 우리가 평화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이 샬롬이라는
말은, 샬롬이라는 말은 히브리 말이에요. 구약 성경에
나오는 샬롬은 조금 더 깊은 뜻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알아야만 이번 수양회 주제를 소화 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샬롬의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서 세
가지의 성경 언어를 먼저 조금 공부
했으면 좋겠어요. 여러분의 마음속과 머릿속을 싹 지우고
백지 상태로 만들고, 여기에 여러분의 개념을 한번
잘 써 보세요. 성경에는 초장부터 복이라는 개념이
나옵니다.

      창세기 1 22절을 보면은 하나님께서 바다의 많은 생물들과 공중의 새들을 창조하신 후에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들을 바닷물에 그리고 땅에 충만해라
이렇게 말합니다. 물고기와 새들에게 복을 주셨다고
말씀하시고 창세기

1

26
절에서
28
, 유명한 인간을 창조하신 구절에 들어가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라고 말합니다. 우리라고 말할 , 그것은 물론 뒷날 신학에서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하나님께서 같이 창조하셨기 때문에 우리라고 말한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모습을 닮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기를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그랬어요.

      그럴  우리를 복이라는 말을 들을 때에 각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을 지워 버리고 성경적인 개념의 복이 뭔가 blessing, 우리는  하면
금방 가지고 있는 기존 개념을 버리고, 복이라는 것은
새나 물고기를 비롯한 생명체, 모든 인간을 비롯한
인간과 동물과 같은 생명체에게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생명의 힘을 복이라 그래요. 사람을 중심으로 얘기하면
인간이 가장 인간 답게, 가장 행복하게, 정말 땅속에서
물을 함뿍 빨아 들인 장미가 활짝 피어나서 그 아름다움을
퍼센트
들어내기에 충분한 생명력이 있는 것처럼, 지금처럼
타락하고 망가진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이 원래 창조
하셔서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도록 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은 많은 뜻이 있지만 크게  가지가
있어요. 한가지는 동상 같은 것입니다. 독재자들이,
왕들이 자신의 통치권을 들어내기 위해서 자기 나라
곳곳에 자기 왕의 상을 둬요. 그래서 사람들이
그것을 마다 나라를 왕이 다스리는 곳이구나이렇게 깨닫도록 것이 형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었다고 , 그건 뭐냐 하면은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 하신 후에, 물론 하나님이 다스리시지만 땅은 하나님이 우리를 대리자로 세우셔서 다스리도록 작정하셨어요. 그래서 우리를, 많은 생물을 창조 하셨지만, 중에
인간을 창조 하실 때에는 우리를 하나님의 대리자로
대권자로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
걸어 다닐 때 다른 많은 피조물들이 볼 때, 우리를 보고
생각하기를 ‘아 이
땅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곳이구나’
깨닫도록 지었다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의 뜻이에요.

       한가지는 우리가 그렇게 지음 받데,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하나님 세분이 굳이 셋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만큼 완전한 연합과 완전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우리 인간들도 그렇게 재하고 살도록 지음 받았다는 뜻이에요. 그렇게 살려면 뭐가 필요해? 그냥은 안돼. 그냥은 안돼.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있는 능력을 생명력을 주셔야 되요.
생명력이 하나님이 부으시는 복이라는 신비롭고 거대한 것으로부터 만들어져 나오는 것이에요. 그래서 복은 모든 생명체가 가장 복되고 가장 충만하게 가장 깊고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삶을 누릴 있는 모든 생명력이 복이라는 것에서 만들어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이라는 생명력을 부으실 , 우리들은 그로부터 많은 것을 produce 해요. 창출해요. 뭐냐 하면,
뭐 아주 기본적인 것으로부터 육체적인 생명, 또 자손의
번성함, 또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가져 올 수 있는 능력들,
또 육체적인 힘, 성실함
, 지구력, 창의력, 집중력, 용기, 지혜, 모험심, 인내심, 희생정신, 용서하는 마음, 상상력, 심미적 능력, 열정, 동기, 의욕, 관대함, 지적 능력, 감성적 깊이, 의지력, 예술 감각, 뛰어난 운동 능력, 몸과 마음이 아름다움, 사랑과 인정 받음과 자존감과 존귀함과 원만한 인간관계, 그리고 초월적인 존재를 열망하고 나도 초월적인 존재가 되고 싶어 하는 것들, 이게 뭡니까? 여러분 이것은 우리가 가장 인간답게 행복하게 있는데 필요한 삶의 자원들이에요. 이것이 하나님이 부으시는 복이라는
부라카 라는 히브리말 ‘부라카’ 로부터 만들어져 나오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 복중의 복, 복의 핵심은 하나님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복의 DNA에요. 세포가
있으면 세포의 생명을
DNA
주장하듯이, 복의
DNA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히브리 민족들은 항상 하나님과 함께 함과
복을
받았다는 것을 같이 생각했어요. 창세기 26 28,9절에 보면은 이삭,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블레셋에 그랄 땅으로 가게 됩니다. 거기서 블레셋 민족들과 갈들이 있게 되요.
그러나
오랜 갈들에 있다가, 나라의 , 아비멜렉이 찾아와서우리 이제 앞으로 사이 좋게 지냅시다.’? ‘내가 당신의 삶을 본즉,
당신의
삶에 하나님이 함께 하는 것을 보았소. 당신은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함이라는 말과
복을
받음이라는 것은 같은 말입니다. 복은 그런 것입니다.

      두번째로 우리 인간의 조건, 인간의 조건은 처음에 복과  다음에
의로움과
, 번째는 하나님의 언약인데요. 의라는
말, 의는 한자말로 찾아 보면 ‘옳을 의’자, justice, 옳음,
옳고 그른 일이 있는데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선하고 틀리지 않은, 악하지 않은 어떤 것을 우리가 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 중요한 성경구절이 있죠. 로마서
3

23
4절에 보면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슴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이렇게 말해요. 여러분이 예수 믿고 구원 받았을 , 구원을 여러가지로 설명하는데 그 중에 한가지 용어가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이렇게 말해요. 그런데 이 의롭다 하심이라는
헬라말은 원래가 법정 용어에요. 그리스
, 로마 시대에 사용하던 법정 용어로써, 어떤 사람을 취조해본 죄가 있는데, 여러 가지 어떤 조치를 취한 다음에 그
사람이 그
사람을 무죄 선언 하는 것을 의롭다 함이라고 말해요. 그런 이제 전통 때문에 우리들이 로마서에 특히 나오는,
특히 로마서 5장 1절에도 보면
그런즉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의롭다 하심, 우리가 원래 의롭지
않았어요. 우리가 의로운 것이 아니라 불의, 죄를
많이 졌어요.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를 대신
받아 주심으로써 우리가 죄 없는 것으로 최종 판결을
하고 무죄 석방 됐다. 이렇게
하는 것이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의롭다 하심은 사실은 그것을 포함하고 훨씬 깊은 뜻이에요. 그것에만 머무르면 여러분들은 계속해서 앞으로 그렇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 믿고 나서 내가 죄를 지으면 나는 죄인이 다시 됐다가 의롭게 됐다가, 왔다 갔다가 하느냐 그것이 아니고, 이것도 이제는 포기라는 개념에서 했던 것처럼, 여러분의 노트를 지운 다음에 새로 정리해 보세요. 의라는 말은 올바른 관계를 말합니다. 올바른 관계. 그리고 누가 누구에게 의롭다는 말은 내가 관계가 갖고 있는 관계가 우리에게 부여하는 의부를 충실하게 감당할 의롭다라고 말해요. 예를 들면, 아빠 엄마는 자식을 돌보고 양육할 , 의로워요. 그러면 자식은 어떠한게
의로운가 하면은 아빠 엄마를 잘 의지하고 아빠 엄마
말을 잘 듣고, 그 혜택을 받아서 무럭 무럭 잘
자랄 , 의롭다 그래요. 그래서 성경에서의롭다
라를 말은 철저하게 관계적인 말이지 객관적인 어떤
기준 이것은
옳은 것이다. 이것을 지키면 의롭고 그것을 지켜 죄를 지으면 불의 하다. 그런
개념도 물론 있지만, 훨씬 더 깊어요. 관계적인 개념이에요.
관계적인
개념.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의롭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께 못할 짓을 해도, 하나님 한번도 우리를 버리지 않고 끊임 없이 우리를 우리에게 다가 오세요. 여러분이 인생에 많은 순간에 여러분의 인생을 계속 추적하시는 하나님을 계속 뿌리쳤지만 그러나 끝내 따라와서 여러분을 잡고 항복 시키시는 하나님의 그 의로우심
때문에 여러분이 구원 받으신 것이에요. 그
의롭다는 말은 창조주시기 때문에, 우리를 만드셨잖아요. 창조주시기 때문에 우리를 끝까지 구원하시고 사랑하여 주시고
아버지와
어머니로써의 모든 사랑과 복락을 배푸시는 관계적인 의무를 충실하게 감당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분은 의로워요.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서 의롭다 함을 받느냐, 그분을 신뢰 하는 거에요. 우리가 착하게 살고 죄를  짓고
하는 것은 그것은 두
번째 문제고, 훨씬 더 먼저, 그 하나님을 받아 들이고,
내 하나님, 내가 이제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겠습니다.
라고 말할 때 여러분은 의롭게 되는 거에요. 여러분은
여전히 많은 허물이 있고, 많은 죄를 지었고, 여전히 예수 믿고 나서 여러분이 죽을 때까지 죄를 멈추지는 못합니다.
안타깝지만
우리는 예수를 믿고 아무리 노력해도 선과 악의 변증법적인 이분론 속에서 뱅뱅 돌다가 죽게 됩니다. 살아 숨시는 동안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러분을 관계 속으로 집어 넣으셨어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믿어서 새로운 종교를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고 원래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과 관계가 있었어요. 우리는 새로운 분을 만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은 떠났던 아버지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원래 관계가 있었어요. 관계를 아담 이후에 인간이 박차고 튀어 나와서 관계가 깨트려 졌는데, 관계 속으로 돌아가는 것을
justify, 의롭다 함을 받는다 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러분은 하나님의 그 말할 수 없는 신실하심,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 때문에 우리가 그분과의
관계 속으로 일단 들어갔어요. 들어가면
, 설혹 여러분이 살아 생전에 죄를 짓는다 할지라도 관계가 다시 어그러져서 튀어나오는 법이 없어요. ? 그렇게 만들어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너무나 댓가를 지불했기 때문에,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다시는 너무나 댓가를 지불하셨기 때문에 여러분이 다시금 돌아가 앉아 있는 하나님과 의의 관계는 변함이 없습니다.

       관계를 조금 어려운 말로 성경에서 언약적 관계다 이렇게 말해요 언약적 관계. 언약이라는 말은 약속이라는 뜻이죠. 그런데 옛날부터 우리나라말 번역 성경에는
언약이라는
말을 많이 썼고, 여러분이 갖고 있는 신약성경,구약성경은 옛날 약속, 새로운 약속 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관한 책이다 이런 뜻이에요. 그래서 여러분은 신약 구약을 갖고 계시죠. 그런데 언약이라는 말은 굉장히 기가 막힌 얘기에요.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언약으로 있어요. 그 언약의 선포는 이것입니다. 언약은 풍성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표현은 간단해요.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이 말은 출애굽기 19장, 레위기
26장 쭉 나오고 또 예레미야 31장, 요한 계시록까지 계속
나오는데, 계속 나오는 말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원래
그러셨어요.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그런데 불행이도 인간이, 아담이라는 말은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아담의 범죄와 타락은
옛날에 한번 일어났던 유일한 사건이 아니고, 모든
인간에게 그러한 성향이 있으며 모든
인간에게 실제로 그런 일이 있슴을 나타내는 말이에요. 그래서 아담 이후에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언약을 스스로 박차고 나왔어요. 하나님은 지속적으로 신실하시고 의로우시고 언약을 지키시는데 인간이 박차고 나왔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다시 한번 인류에게 기회를 주시는데, 역사 속에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을 택하시고
그에게 다시금 스스로가 거부했던 하나님과
자녀의 관계를 회복해 나가십니다. 먼저 아브라함에게 하시고
아브라함의
가족들에게 하시고, 그의 국가인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시고 그를 통해서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인류에게 이제 혜택을 펼쳐 나가시는데, 항상 내용은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이것이에요. 말이 뭐냐?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된다는 말은 내가 너희에게 하나님 노릇을 해주겠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노릇을 해주겠다. 그런 말이 필요하냐? 아담이, 우리들이 하나님 필요 없어 라고 말했거든요. 아담도 그랬고, 여러분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 하나님께 대한 가장 죄송하고 가장 죄가 뭐였냐.
나는 하나님이 필요 없습니다.’ 라는 것이에요. 죄라는 것은 여러분이
땅에
태어나 자라오면서 뭐 누구 나쁜 짓하고, 누구
미워하고,
누구 때리고 죽이고, 뭐 간음하고 도둑질하고 이런
것이 죄다. 이렇게 늘 배워왔기 때문에 우리는 죄를
사회학적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나
성경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슴에 라는 말은 사회학적인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내포하지만 성경이 우리를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항상 신학적으로 정의해야 해요. 뭐냐, 인간이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없다 그러고, 없다 그래요. 어떤 사람은
있을지 모르겠지만 난 믿기 싫다. 하나님
싫어, 그런 것들을 죄라 그럽니다. 그러한 것들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버리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은 하나님이 주시는 뭡니까. 복, 생명력을 받게 되요. 그런 상태를 성경에서는 죽었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성경 읽다 보면은 이상하다 내가 예수 믿지 않던 상태를 죽었다 표현하는구나. 물론 그때 내가 예수를 믿었지만 살아 있었는데 이렇게 생각하죠.
성경에서는 그렇지 않아요. 생물학적으로 살아 있지만
하나님이
계속해서 부어주시는 생명력 그로부터 복으로부터 계속해서 만들어 지는 생명의 자원들을 이상 받게 된 상태를 성경에서는 죽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인간은 그때까지 받았던 복을 가지고 남은 생애를 살게
되는데, 우리 인간들은
태어날 아담이 마치 아담이 하나님을 떠났을 이미 받았으나 이상 공급되지 않는 복을 가지고 세상을 살았듯이, 우리는 엄마 뱃속에서 태어날 때 그런 상태로 태어나요. 말하면 죽은 상태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생물학적인 생명은 가지고 태어났지마는 영적으로는 죽은 상태에서
태어나요. 그래서
에베소서
2

1
절에
하나님께서 너희들은 너희들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를 살리셨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던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서
하나님과
올바른 언약적인 관계 속으로 복귀해서 원래 하나님이 주시고자
했고 또 인간은 그것을 받지 않으면 결코 인간답게
살수
없는
복과
생명력을 다시 받게 됐을 그것을 살았다라고
말하고 혹은 영생을 얻었다라고
도 말합니다. 같은 뜻을 구약에서는
주로 복이라고 말하고 신약에서는
주로 영생이라고 말해요. 영생이라는 말은 그냥 시간적으로 길고 그런 생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에서 영생이라는 말은 원래 문자적으로는 오는 시대의 삶이라는 뜻입니다. 오는 시대라는 것은 우리 지금 타임 테이블로 말하면은 예수님이 오셨고,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이고, 그 이후에 예수님이 재림하심으로 지금 인간의 역사는 마감되고 새로운 시대를 여실 텐데, 그때 누릴 인간들의 삶 원래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시고자 했던 그때 그 풍성한 삶을
계속 누리게 될
텐데, 그 시대의 삶을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지금 땡겨서 누리고 있어요. 그것을 이제 내일
우리가 다루게 될
텐데.

      , 그럼 이제 샬롬이 뭐냐 서론이 너무 길죠. 샬롬, 샬롬이라는 말은 우리 안녕하십니까, 굿모닝 하는 것과 같이 유태인들은 아침 저녁 만날 마다 샬롬
이렇게 말하죠. 아주
단순하고, 평화로은 좋은 관계 이런 느낌도 있지만 깊은 영적 의미는 놀라운 것입니다. 그래서 샬롬이라는 것은 바로 인간은 그런 조건이 있어요. 하나님과 더불어 살면서, 하나님께 순종하며 삶으로써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복과 영생을 받아야 되요.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의로운 관계 속에 있어야 하고 언약적 관계 속에 있어야 합니다.
이럴 때 인간은 살아 있는, 정말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그 놀라운 직분을 감당하기에
가능한
RESOURCE
받는 거에요. 그런데 인간은 결코 홀로
존재하지 않아요. 창세기 2장 3장에 벌써 하나님은 공동체를
창조하시고, 반드시
인간은 다른 인간들과 더불어 살도록 창조 하셨어요. 그런데 샬롬이 뭐냐 하면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복과 생명력을 공유하면서 그게 같이 뿌리를 내고 같이 발을 담그고 살고 있는 상태를 샬롬이라고 그래요. 이것은 단순히 다른 사람들과 사이 좋게 지내는 그런 것이 아니에요.
그보다
훨씬 깊은 뜻이 있어요. 그것은 뭐냐, 우리는 하나님의 복과 영생 없이 없는 존재인데 그것을 나만 받아서 누리는 것이 아니고
내가
받은 그것을 서로 나누면서 공유 하면서 같이, 같이 복을 누리고 사는 상태를 샬롬이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이것을 영어 단어 중에서는
가장
맞는 말이 CONVIVIALITY 말은 원래 대잔치 마을 전체 사람이 같이
참여하는 잔치를 말합니다. 그런 뜻이에요. 아까 말씀드릴
대로 우리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복과 생명력을 받고
그분과 의로운 관계를 유지할 때, 우리들은 소위 말해서
전인. 여러분 전인 교육이라는 말 들어보셨죠. 전인교육,
전인이라는
말은 그야말로
INTEGRITY
있는 매사에 봐서 흠이 없는 완전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학과 공부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음악도, 미술도 체육도 리더십도 가르쳐서 아주 근사한 사람을
만드는 것을 우리가 전인교육
이렇게 말하는데, 원래 그 전인이라는 말은
개별적으로는
완전성을 말하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뜻은 타인과 더불어서 살아가는 능력을 소유한 사람을 전인이라고 그래요.. INTEGRITY가 있는 사람. 그 전인들끼리
모여서 사는 삶을 샬롬이라 그럽니다. 그래서 영어
단어로는 또 한가지 TOTALITY 전체성이라는 말을 쓰기도
해요. 제가
여러분의 핸드북에 작은 글을 실어놨어요. 리코스 카잔차스키가 영혼의 자서전이라는 좋은 책이 있습니다. 이분은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이라는 소설을 써서 아주 불경스러운 인물로 알려져 있지만
그러나 아주 진지한 구도자였어요. 이런 글을 좀 읽어
드릴께요. 이 사람이 밤에 꿈을 꿨어요. 크레타
사람인데 원래, 크레타 민요를 부르면서 산을 오르게 됩니다. 그럴 때에
동굴에서 노인이 불쑥 튀어나왔다. 소매를 걷어 붙힌
그의 손은 진흙투성이였다. 조용히
하라고 입에 손을 대더니 그는 엄격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노래는 그만해요 내가 일하는 게 보이지 않나요. 그러면서 그는
두 손을 내 보였다. 뭘
빚으시나요? 내가 물었다. 보면 몰라요, 동굴에서 나는 구원 받은 자들을 빚어 낸답니다. 구원 받은 자들이요? 누가 구원을 받았어요? 이렇게 외치는데 가슴속에 상처들이 다시 터져 나왔다. 리코스 카잔차스키는 그리스 정교가 국교인 크레타에서 태어났어요.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영적으로 방황을 했습니다. 진정한 구원의 길이 무엇인가. 니체도 추종해보고 마르크스 공산주의도 추종해 보고 나중에는 불교에 심취하기도 했어요. 그래서 구원이라는 말에 한이 맺힌 사람이에요. 그런데 동굴의 노인이 내가 진흙으로 구원 받은 사람을 빚어 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놀라는 거에요. 누가 구원을 받았어요?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게 말하니까 노인이
전체성을 파악하고 사랑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죠.
이렇게
말합니다. 전체성을 파악하고, 내가 나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반드시 모여 살수 밖에 없는 그룹에 사람임을 깨닫는
전체성
, 이것을 샬롬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의로운 관계, 그리고 동료 인간들 관계에도 의로운 관계, 머물러 사는 것이 이 샬롬인데, 샬롬은 그야말로 너무 너무 좋은 상태, 너무 좋은 상태여서 제가 여러분에게 설명을 못하겠어요.
Too good to explain.
이것이 성경에서 가장 근접한 단어로는 창세기에 나오는 좋았더라 라는 단어 입니다. 여러분 창세기 일장을 보면은 하나님이 빛을 창조 하시고 다음 빛을 보시니
좋았더라
, 하나님이 바다와 뭍을 창조하시고 다음에 그것을 보고 좋았더라, 나중에 인간을 창조하시고 다음에는 심히 좋았더라. 이렇게 하시죠. 좋았더라는 히브리말로 토우브 라는 단어가 그런 뜻이에요. 토우브라는 단어, ‘좋았더라 이런 뜻입니다. 즐거운, 유쾌한, 좋은, 선한, 귀한,
탁월한
, 적적한, 올바른, 탐스러운, 준수한, 충실한, 후한, 선대, 총명함, 보배로운, 길한, 아리따운, 번영, 복지, 은총, 은혜 이런 뜻을 갖고 있어요. 이것이 샬롬으로 사는 사람들의 삶의 퀄리티에요. 단순히 전쟁이 없고, 사이 좋게 지내는 그런 것이 아니라, 원래 하나님이 창조 하실 인간의 하나님 형상이라는 위대한 역할을 감당하고 살도록 지어진 인간들이 동료 인간들과 더불어 나위 없이,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치밀함 같이 완전히 연합되어 사는 그런 퀄리티의 삶을 샬롬이라고 그렇게 하고 원래 우리 인간은 그렇게 지어졌어요. 우리가 너무나 망가졌기 때문에 도저히 옛날 일을 기억할 없을 만큼 됐지만, 그러나 우리들을 그렇게 창조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언어 정리가 끝났고.

      너희가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나 들어가겠어. 이건 짧게 끝낼  있습니다. 여기서 키워드는 너희가 세상에서, 세상이라는 단어와
고난
, 환란이라는 단어 가지를
잘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말씀하실 때에
너희가 세상에서 라고 말하실 때에는 굉장히
슬픔을 담고 말씀하셨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을 앞에 두시고 너희가 세상에서
고난을 당할 것이다. 이렇게 말할 , 굉장한 슬픔과 안타까움이 속에 있는 것이에요. 왜? 이 세상이
하나님이 원래 창조하실 때 그
모습이 아니거든. 너무나 깨지고,
너무나 망가지고, 너무나 왜곡되어서 샬롬은 커녕 샬롬의
정 반대인 죽음을 가지고 있는 그런 세상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라는 말은 성경에서 여러 가지
뉘앙스로 사용
되요. 요한복음 3장 16절에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렇게
말할
우리들은 그 세상이라는 말은 썩 부정적인 느낌을 주지
않죠. 그러나 요한복음 15장 18절 19절 을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하나도 이상하게 생각할거 없다. 너희를 미워하기 전에 벌써 나를 미워했던 것을 기억해라. 너희가 만일 세상에 속한 자라면은 너희가 같은 부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않겠지만 너희가 세상에서 나에게 선택을 받아서 빠져 나왔기 때문에 세상은 너희를 미워할 것이다.’ 이렇게 말해요.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세상이라는 말은 상당히 부정적이에요. 하나님이 너무나 아름답게 샬롬으로 창조하셨는데 그것을 인간의 범죄로 깨어버리고 살벌한 고통과 죽음이 드리워져 있는 고통스러운 장소라는 뜻이에요. 동시에 세상은 하나님을 적대시 하고 하나님을 몰라라 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가득 찬 곳입니다. 그것이 이 세상이에요.
그런데 이 세상을 보는 관점이 이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관계가 있어요. 제가 사실은 이번 수양회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뭐 그렇다
치고라도 교회와 예수 믿는 사람들 조차도 하나님을 모르는 인본주의자들이 외치는 사회개혁을 부화내공 따라가고 있는 것에 대해서
제가 굉장히 격분하고 있는 상태에요. 여러분
여기에 아마, 우리나라 용어로 좌파들도 있을 거에요.
그 좌파들 제가 좀 구박을 할 것입니다. 물론 우파도
구박해요. 저는 좌파도 우파도 아니고 양파에요. 저는
민주당도 아니고 한나라당도 아니고 교회당입니다. 예배당이에요. 세상의 현실을 보는 해석은 비슷해요. 이세상이 악과 고난이 가득한 곳이구나.
이것을
우리가 회복하자. 우리가 탈피하자.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이세상이 원래 낙원이었던
때를 기억해요. 어떻게 성경을 통해서 paradise 낙원.
그래서 낙원이 있었다가 상실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거기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인본주의자라는 말이 무어냐 하면, 아담이
인본주의자였어요 처음에. 그리고 우리들이 예수 믿기 전에 우리들은 좋아하나 싫어하나 인본주의자에요. 말이 뭐냐 하면은
내가
하나님의 피조물로 태어나서 하나님 없이 살수도 없는 존재인데,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 인간 이외에
초월적인 존재가 없슴
선포하는 존재를 우리는 모두다 인본주의자라 부를 있습니다. 휴머니즘, 인간이 궁극적인 존재이고 인간이 시작이고 끝이고 인간이 창조하는 가치가 최고라고 주장하는 것들이에요. 인간 인본주의자들은 세상을 어떻게 보냐 하면은 현실을 해석하는 것은 비슷한데, 낙원 개념이 없어요. 대신에 이상향이 있습니다. 과거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우리 인간은 인간과 세상은 원래 굉장히 원시적인 상태에서 점점점점 진보하고 인간은 점점 진화해서 점점 좋아져서 마침내 지상 천국에 이르게 것이다. 이것이 유토피아라는 개념이에요. 현실을 보는 시각은 비슷한데, 그것의 해법이 달라요. 예수 믿는 사람은 원래 하나님이 주셨던 낙원을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고 인본주의자들은 원래는 없었고 인간과 세상은 원래 굉장히 무지하고 원시적인 상태에서 점점 좋아져서 역사의 진보의 원리에 따라서 필연적으로, 결정론적으로 인간은 지상천국, 유토피아에 이르게 되고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투쟁하고 우리의 삶을 받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에요.
굉장히
비슷하지만 철저히 다른 것입니다. 놀랍게도 많은 크리스천
청년들이 후자를, 인본주의적인 사회개혁 개념을 갖고
있어요. 그것은
틀린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아무리 숭고한 뜻을 품고 있고, 그것을 위해서 여러분의 생명을 던지고자 하는 열정이 있더라도 그것은 틀린 것이에요. 그러냐, 우리 인간이 낙원을 잃어 버리게 것이 하나님의 저주 때문이에요.
인간이 미개 했기 때문에,인간이 원시적이었기 때문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저주하셨기 때문이에요. 어떻게? 창세기
3

17
이후에 그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가 범죄했을 저주 하십니다. 사탄, 뱀을, 사탄으로 상징되는 , 뱀으로 상징되는 사탄과 그리고 아담과 하와에게 각각 저주를 선포 하십니다. 너는 나의 명령을 어겼슴으로 내가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대리자로 만들었다는 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원래 대단히
위대한 존재에요. 인간은 여러분이 상상하는 것보다 백배 배, 위대한 존재, 영광스런 존재로
창조됐어요. 그래서 하나님에 버금가는 그런
존재로 창조 됐는데, 그래서 창세기 2 초반부터 보면은 소위 에덴동산의 모습들, 너무나 풍성한 삶의 조건들, 그리고 거기에는 강이 흐르고
강에서 흐르는 4개의 강들이 지구를 덮었다고 말해요. 고대 세계의 세계관에는 강을 떠난 인간의 삶이란 상상 없었어요.
근데
그것도 무려 4개씩이나 있으니까 얼마나 완전한 삶인가. 거기에 보면 아주 좋은 질의 금이 생산되고, 여러 가지
보석이 생산되더라. 이런
얘기들이 창세기
2
초반에 나오는데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대리자라는
엄청난 직분에 걸맞은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모든 조건을
허락하셨슴이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좋은데, 그러나 너와 나와는 절대로 넘을
없는 한
개의 선이 있다. 나는 창조주이고
너는 피조물이다. 그러므로
너에게 모든 자유가 주어져 있지만 자유는 나에게 종속되어져야 한다. 라는 것이 선악과의 의미에요. 선악과를 먹으면 그 의로운 관계 속에 머무는 것이고, 그것을 violate할 때,
어떻게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 No Thank you 하는 것이에요.
하나님 관계 없슴 선포, 이것이
선악과 먹음이에요. 그럴 때 하나님이 저주를 선포 하십니다.
우리가 자꾸 이 성경에서 보면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 하셔야 되기 때문에 인간세상에서
사용하는
language
사용할 밖에 없어요. 그러나 많은 언어들이 우리가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성경언어로 복구해야 됩니다. 여기서 저주라는 말은 우리끼리 하는 저주하고는 차원이 달라요. 우리는 그냥
FFFFFXX
하는 말이 저주에요. 제가 있어요, 저는 누구보다 욕을 잘합니다. 그렇지만 제가 거룩한 장소에서 수가 없어서 여러분의 풍성한 상상력에 맡기기로 하겠어요. 저주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따가운 말을 붙고 이런 것이 아니에요. 그래? 그럼 잘해봐라. 이거에요. Let him go, 그럼 한번 알아서 해봐라. 너가 없이 있다고? 너는 가장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복과
영성을 끊임없이 받아야 되는 존재인데, ‘나를 떠나서 있다고? 너가 스스로에게 하나님으로 있다고? 한번 해봐라
이것이
저주에요. 하나님과 멀어짐, 하나님과 멀어짐, 그래서 저주는 정확하게 보호의 반대말이에요.
하나님과 함께 함이 뭐라 그랬어요? 보호 하나님과
멀어짐을 저주. 그렇습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겠어요? 우리 한국이 낳은 위대한 신학학자인 김세윤 교수라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조그만 책자, 구원이란 무엇인가? 혹시 안본
계시면 보세요. 구원이란 무엇인가 최근에 두란노에서 개정됐어요.
제가
두란노 책을 팔아줘야 되나? 거기에 보면 저주에 빠진 인간을 대지에서 뿌리 뽑힌 나무로 표현했어요. 나무가 있는데, 폭풍이 불어서 뿌리가 뽑혀 버렸어요. 그러면 나무는 금방 죽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나무는 개월
살아 있습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누렇게 되고 메마르게 되고, 잎이 시들고, 마침내 죽습니다.
그런데 우리 영적으로 봤을 때는, 그 대지에서 뿌리가
뽑힌 순간 죽었다고 해도 되요. 그러나
아직은 살았다고 있어요. 그러나 죽을병에 걸려 있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고, 거기는 고난과 결핍들이 있습니다. 이세상에서 우리가 짓는 모든 죄와 그 결과들이 바로 고난과
결핍, 죽음의 증상들이에요. 하나님의 저주에 빠진
인간들에게 닥쳐오는, 복을
상실한 인간의 모든 결핍과 고난들의 증상들을 악이라고 그래요 .
Evil
그런 것이 이런 것입니다. 제가 열거할 테니까 잘 들어보세요. 불의, 탐욕, 시기, 질투, 증오, 살인, 다툼, 사기, 악독, 험담, 비방, 모함, 음란, 교만, 악을 도모함, 불효, 신의 없슴, 몰인정함, 무자비함,
이제 그것이 때를 지어서 그룹을 형성해서 서로 다투고 당파 짓고,
소외시키고 집단 이기주의, 공직자의 권력 남용,뇌물수수,
인신매매, 고문
, 인권유린, 전쟁, 인종청소, 인종 차별, 대규모의 기아, 전염병, 우리가 상상할 있는 모든 종류의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정신적인 물리적인 현상들, 개인과 집단의 부정적인 현상들이 전부다 악이라고 말해요 . 뿐만 아닙니다. 이것이 이제 크게 역사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들이 있어요.

      아마 20세기에 가장 엽기적인 사건, 지금 동유럽에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사이에 일어났던 것일 거에요.
세르비아에는 정교도, 그리스 정교회가 자리 잡고 있고
크로아티아에는
침례교가 있었어요. 크로아티아의 침례교들을 죽이기 위해, 없애기 위해서 남자들은 죽이고 크로아티아의 침례교 여자들을 강제로 임신을 시켰어요. 그래서 종족을 말살하려고 시도 했던 것입니다. 그런 것들. 르완다의 후토와 투치족의 종족이 다른 종족을 완전히 명도 없이 하겠다고 나선 것들이에요.
2
대전 때 나치 독일의 600만 명 유태인들 학살 이라던지 또 레닌과 스탈린의 공산주의
실험은 약 1억
명 정도를 죽였어요. 1억
정도가 죽거나 유형을 당했습니다. 미국에서는 약 1500만

정도의 아메리칸 인디언을 죽였죠. 흑인의 인종차별은
말할 것도 없고요. 1차 세계 대전
때, 프랑스와 독일 국경의 베르뎅과
솜이라는 두 곳에서 1주일 동안 전쟁이 벌어졌는데,
독일군 50만
명과 프랑스군 45만 명이 죽었어요. 하루에 어떨 때는 4-5만 명이 지휘관의 돌격 명령에 따라서
그 기관총 한
자루에 어이 없이 목숨을 잃는 그런
일이 발생했어요. 상상할 수 없어요. 역사책에서
읽으면은 아무 것도 아니지만 우리가 깊이 들어가 보면 거기는 백만
가량의 가족을 생각해 보세요. 수백만명에 이르는 사람들에
한과
눈물이 어려 있는 곳입니다. 제가 중학교 1학년 , 라이프라는 사진 잡지에서 1 대전의 장면들을 search 것을
봤어요. 거기
바윗돌에 기념관에 바윗돌에 전사한 청년의 어머니의 말이 불어로 기록이 되어 있어요. 저는 불어를 모르니까 밑에 영어 번역을 보니 이렇게 되어 있더라고요. My son, 내 아들아, since your eyes were
closed, mine, 내
눈은, 내 눈이 감겨진 후로부터 내 눈은
한시도 눈물을 그쳐 본적이 없다. 역사책에서
보면 솜과 베르뎅 전투에서 45 50 명이
죽었다. 이렇지만, 그 깊이 들어가 보면은 수백만
명의
눈과 한이 어려 있는 이것이 인류의 역사에요. 악. 샬롬이
깨어진, 샬롬이 상실되고 샬롬이 해체 되어 버린, 인류의
현상이 그런 것이고 현재 여러분과
제가 목도하고 있는 모든 개인적과
공동체적인 삶의 부정적이고 팍팍한 모습들은 바로 샬롬이 실종된 상태입니다. 나의 힘과 의지로 어떻게 해볼 없는 불행과 비극이 굉장히 많죠. 태어날 때부터 몸과 마음의 장애를 가진 사람들, 질병으로 지체를 잃거나 상해서 연약함의 장애를 가진 사람들. 대구 지하철 방화사건, 삼풍 백화점 붕괴, 성수대교 붕괴, 음주운전 때문에 다친 사람들, 너무나 가난하게
태어나서 한번도 유복하게 살아보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 임신되었으나 태어나 보기도 전에 성인들에 의해서 중지된 생명들, 공해 때문에 담배 한번 피워 보지 않고도 폐암을 걸린 사람들. 수백년전에 내가 가보지도 못한 나라에서 갖다 버린 산업폐기물 때문에 오늘날 내가 그 오염된 음식을
먹고 암에 걸리는 이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인간의 불행들이에요.
츠나미
, 2004년에
2007
년에 중국 스촨성의 지진, 이런 것들을 보면 한꺼번에 수십만 명이
죽어버려. 1755년 11월 1일에 포르투갈의 리스본에서
일어난 지진
, 그날은 주일이었어요. 그 지진 때문에 평화롭게
교회당에서 예배
드리던 그 도시 인구 30만 명중
삼분의 일이 즉사했습니다. 그래서
그때 유럽에서부터 의로우신 하나님이 계신다면 인간세상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라는 질문이 그때부터 나오기 시작한 것이에요. 그런데 그것은 인간 스스로가 자초한 저주 때문이다. 나의 혹은 만나보지 못했지만
인류 역사 내내 있었던 인간의 죄의 결과이기도 하고
그것을 부추기는 사탄의 . 우리가 타락해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연계를 맡겨 주셨는데, 자연계가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서
반항하기
때문에 생기는 모든 자연 재해, 이런 것들 때문에, 우리가 지금 악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을 맺겠습니다. 너희가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나,
그래요
, 예수 믿어도 우리는 같이, 혹은 어떤 면에서는 예수 믿지 않는 자보다 많은 고난을 경험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 믿어서 기도하고 하나님께 간구함으로써 병에서 났기도 하고 어려움에서 헤어나기도 해요.
그러나 그것은 보편적인 원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개인들이 많이 있어요. 그러나 예수를 믿으면 우리는 세상의 고난에서 벗어 난다 그것은 거짓 가르침입니다. 너희가 세상에서 여전히 환란을 당할 것이다. 물론 해법이 이제 내일과 글피에 나오게 되요. 그래야 되는가, 그것이 바로 인간의 연대성 때문입니다. 제가
2007
코스타에서 조금 말씀을 드렸는데, 하나님은 인간을 그냥 창조하신 것이 아니고, 아담 사람 안에 들어 있게 창조 하셨어요. 사도행전
17
장에 하나님께서 말씀 하시기를
하나님은 사람으로부터 모든 민족을 지으셨다 말합니다. 로마서 5장 12절 이하에는
사람
아담이 범죄함으로 모든 사람이 범죄한 걸로 카운트
됐다 이렇게 말합니다. 아마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은
물론이고, 예수 믿는 사람들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그거에요. 아담의 죄가 나에게 영향이 있느냐, 그것을 하나님이
작정하신 인류의 연대성의 원리, solidarity principle 이라
부릅니다. 하나다
, 여러분, 여러분이 어떤 가족에 태어난 가족이 있죠. 여러분이 선택합니까? 가족의 연대성 속으로 태어납니다. 태어나 보니까 아버지가 찢어지게 가난해요. 이거 뭐야 이거, 집에 태어날래. 꼼짝없이 그 가족에 찌들어야 됩니다.
이것이 연대성의 원리에요. 기가 막히죠. 그런 법이
어디
있어.
그런
법이 여기 있다.
하나님은. 개인적인 문화, 개인주의적인
문화에 자란 우리들은 도저히 이해할 없는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거에요. 너희들은 원래 가족으로 지어졌다. 지금은 너무나 커지고 많아져서 도저히 우리가 가족으로 생각할 없는데, 아니 하나님은 너희가 가족으로 지어졌다 말합니다.

      solidarity
principle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 일어난 
일은 다른 모든 인류와 관계가 있어요.
너무나 약
오르게도, 너무나 약 오르게도 기독교에서 이것을 가르치지 못하고 사회주의자들이 이것을 먼저 선수를
쳤어요. 공산주의 선언, 세계 공산주의 선언의 중요한
내용중의 하나가 그것입니다. 인류
역사 속에 있는 모든 사람들,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역사
속에 존재한 모든 사람들의 일은
나와 관계가 있다. 이것이 공산주의 선언입니다. 공산주의
, 사회주의는 우리가 무신론 적이고, 유물론 적이기 때문에 절대고 그것은 진리가 아닐 뿐만 아니라, 우리 신앙과 병행할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중요한 진리를 자기들이 선포를 버렸어요. solidarity 그래서 인간의 연대성을
가장 아프게 가르쳐 주는 것이 고난의
문제 입니다. 내가 병들었어요. 병들었을까요? 그것은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인간의 고난을 죄의 문제라고 말할 때, 나의 개인적인 , 일대일의 관계 속에서의 내가 고난을 겪는다 생각할
필요는 없어요. 물론 그럴
때가 있지만 그래도 굉장히 적은
것이에요. 굉장히
적은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누가 고난을 겪을 가서
회개 하세요 이렇게 말하면 안되요. 그거 염장
지르는 거지, 아니 내가 암이 걸리고 막 이렇게 있는데,
집사님 아마 회개
죄가 있을 것입니다. 뭐 은밀한 죄가 있을 것입니다.
회개 하세요
이러면 안 되요. 그런 경우는 있지만 아주 드물어요.
인간의
대부분의 고난은 내가 지은 때문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죄 때문이에요. 어떻게 아담의
죄이기도 하고 우리 조상
중에 누가 저질렀을 수도 있어요.
그런
것들이 질병이나 사고나 공해나 자연재해나 그런데 내가 그걸 당해야 해,
왜 왜 당해야 돼요? 어쩔 수 없는 거미줄처럼 복잡 미묘하게
얽히고 섥혀서 우리가
추적할 수도 없는 연대성 속에 얽혀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연대성 속에 태어났다는 것을 가장 끔직하게 아프게 가르쳐 주는 것이 인간의 고난의 문제에요. 그래서 여러분 고난이 아무리 작은 것이든, 아무리 것이든 간에 낙심하기 이전에 배우셔야 됩니다. , 인간은 하나이구나. 인간은 원래 샬롬으로 존재하도록 지어진 존재였구나 하는 것을 끊임없이 가르쳐 주는 것이 여러분의 고난입니다. 여러분이 만일 이번 수양회를 거치고 집으로 돌아가셔서 남은 생애 동안
삶의 크고 작은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 이것은 다른 사람이 겪을 있는 것이고, 다른 사람도 겪는 것이고, 어떤 의미에서 내가 겪는 고난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동료 인간들을 위해서 내가 샬롬을 회복하기 위해서 처해야 되는 고난이라고 조금씩이라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여러분은
성공한 것입니다.

      샬롬은 그런 것입니다.
내일, 모레, 샬롬의 회복에 대해서 말하겠지만,
너희가 세상에서 샬롬이 깨어진 결과, 고난을 당할 것이지만
이라고
말했고, 세상의 정체를 말씀 하셨어요. 세상이 이렇게 되었는가를 말씀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샬롬을 복구하는
일에 들어가기 앞서서 고난을 너무 두려워하고 고난을 겪을 , 우리가 가장 힘든 것이 그것입니다. 특히 여러분이 예수를 믿으면은 내가 하나님을 믿는데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하나님은 도무지 뭘 하는가
그런 생각이 들것이에요. 그런 질문을 강하게 가지셔야 됩니다. 그래야만 이번에 말씀들이 많이 들어올 것이에요. 그러나 고난은 우리는 고난이 있을 고난 자체도 괴롭지만 괴로운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았다는 느낌 때문이에요. 다음에 이유를 없기 때문이에요. 이유를 없기 때문에, 여러분 애기 낳는 고통이 세상에서 제일 세다고 그러죠 제가 안 낳아봐서
모르겠지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애기 낳는 고통이라고
그래요.

그런데 여러분
애기
낳는 산모들이 그토록 힘들어 하지만 애기 낳고 1년쯤 지나면 그러잖아요자기야 하나 낳을까?’
이러잖아요
. 그거 그래요. 고통이 의미 있는 고통이기 때문이에요. 의미 있는 고통이기 때문에, 그런데 내가 고난을 받을 때는 하나님으로 버림 받은 거 같고 이유를 알 수 없는 거에요.
Why? Why me? 그래서 괴로운 거에요. 그런데 만일, 그 애기가
태어난다는 헤피엔딩처럼 우리도 고난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면 그래서
고난을 물론 힘들고 괴롭지만 견뎌 나갈 있다면, 그런 것을 두고 우리가 고난에 존엄성 부여하기입니다. 고난에 존엄성 부여하기. 저는 되게 병약한 사람이에요.
60
평생 살면서 한번도 건강해 본적이 없어요. 최근에는 지병이 망막에 도져서, 눈을 수가 없어서 여기 참석할 있을까가 의문시 됐었어요. 저의 아이는 선천적으로 장애가 심하진 않지만 장애가 있어서 학교를 제때 들어가지 못했어요. 우리 둘째 아이는 저희 도시에 지금
15
년째 살면서
high school
졸업할 때까지 학교를
7
번을 쫓겨났어요. 저의 엄마 아빠가 상당히 고학력자이기 때문에 저는 항상 이렇게 염려를 했습니다.
애가 태어나서 공부를 너무 잘하면 어떡할까 난 그런 거 못 봐주거든요. 그래서 얘야 공부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 이렇게 말해주려고 그랬어요. 근데 애를
낳아보니까 전혀 그런 말 할 필요가 없어요. 전혀 그런
말 할 필요 없이 충분히 못하기 때문에 고난이에요.
고난 아니, why me? 특히 한국 사회에서 한국은 다 학력을
중요시
하는 사회기 때문에 목사 자녀가 공부를 못한다는
굉장히
핸디캡이에요.
참 쪽
팔린
일이라고, 아주 어려운 일이에요. why me? 그러나 제가
그런 고난이 다른 인류가 겪는 하나님의 저주 때문에
겪는 샬롬이
깨어졌기 때문에 겪는 고난임을 알고 예수님이 친히 내려 오셔 고난을 자기 손으로 짊어지고 같이 당하심으로써 샬롬을 복구해 주신 것처럼 나도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고난 받음이 불가피 하다라는 것을 깨달았을 , 저는 고난의 존엄성을 부여했어요. 지금은 힘들지만 마음에 평화가 깨어지거나, 기쁨을 잃어 버리거나, 그러지 않아요. 제가 눈을 못보고 있을 , 어떤 분이 찾아 왔을 ,
그리 편안하세요? 이렇게 얘기하더라고요. 내가 아마 우거지 상을 짓고 있어야 마땅한데, 평화로워요, 기쁨이 늘 있습니다.
샬롬이. 왜? 그 고난은 샬롬을
이룸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러면서도 여러분 그러면 예수님께서 어떻게 해서 샬롬을 회복시키시는가, 어떻게 하나님이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라고 말씀 하실 있고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너희가 안에서 샬롬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고 말할 있는 비결이 뭔가를 기다리세요.
사모하세요
. 여러분이 말씀은 기대해야 됩니다. 기대하고 마음을 활짝 열고, 마음의 그릇을 움푹 파게, 밥도 야트막한 접시에는 요거밖에 안되지만
움푹
파인 그릇에는 머슴 밥처럼
많은 양이 들어가듯이, 여러분의 마음의 그릇을 움푹
파게 만드시고 끝날까지 말씀을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기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 네가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겠지만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말씀 하셨습니다. 이
땅의
실체를 바라봤습니다. 왜 이
땅에는 고난과 슬픔과 눈물과 죽음이
가득한지를 왜 그렇게 되는지를 저희들이 살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예외 없이 땅의
고난에 동참하고 있슴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결코 무의미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회복하실 샬롬을
이룸에 있어서 이미
샬롬을 맛보기 시작한 저희들이 마땅히 주님의 발자취를 쫓는 저희들 신자들로써 겪어야 하는 즐겁게 때로는 내가 자처 해서라도
짊어져야
하는 고통임을 깨달았고 존엄성을 부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자리에 머리 숙인 주님의 사랑하는
젊은 남녀들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비밀, 복음의 비밀, 믿음의 비밀을 깨닫게 도와 주시옵시고 십자가의 부활로 이루신 샬롬의 놀랍고 충격적인 임팩을, 그리고 또한 복을 이미 이땅위에서 당겨서 누리고 있는 누릴 있는 우리들의 복됨 놀랍기 그지 없는 놀라운 사실을 우리가 다시 한번 깊이 깨달아 누릴 있는 귀한 기회로 삼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최주희]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훈련

나에게는 중증 뇌성마비 장애를 가진 남동생이 있었다. 출산 시 호흡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고 신생아 황달을 심하게 겪으면서 장애를 가지게 되었다. 동생 정원이는 평생을 누워만 있었으며, 소변과 대변을 받아내야
했고, 밥도 안아서 먹여주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언어 장애도 심해 자신의 의사를 말로 표현할 수 없어서 그저 Yes, No 만
눈치로 표시하였다.

정원이가 10살 되던 해 까지 어머니는 그를 치료하기 위해 정신없이 방황했었다. 좋다는
의사, 좋다는 약, 좋다는 종교는 다 거치며 동생의 회복을 위해 온 정성을 다하셨다. 아직도 내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것이
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의 일로 기억되는데, 우리가 대구에서 살 때 어머니는 추운 동지에 팔공산에 올라가 찬물로 목욕을
하시고 불공을 드리셨다. 그리고 집에 오신 후 온몸을 쏘아대는 추위에 견딜 수 없어 다리미로 다리를 찜질하셨는데, 퇴근 후 이
모습을 보신 아버지가 너무 안타까워하시며 서로 껴안고 우셨던 모습이 떠오른다. 어머니는 동생이 10살 되던 해에 애쓰시던 모든
것을 그만 두시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하셨다.

정원이는 온 가족의 사랑 속에 밝은 모습으로 가정 모든 일에 우선순위를 차지했었다. 예를
들어 TV 프로그램 선택권이 항상 정원이에게 있었으므로 서로 그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려고 했었고, 자장면이 먹고 싶을 때에도
정원이를 꼬이면(?) 되었다. 하다못해 설거지 당번을 누구에게 명하는지도 모두 정원이에게 달린 일이었으므로 우리 세 자매들은
그에게 잘 보이려고 아부(!)했었다. 우리는 이런 일들을 매일 재미있고 코믹하게 반복했으며 이로 인해 많이 웃기도 했다. 손님이
오시거나 친척들이 방문했을 때에도 우리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들을 정원이에게 먼저 인사시켰다.

특별히 동생을 향한 부모님의 사랑의 깊이는 아직도 내 마음에 남아 나의 생각과 삶에
영향을 준다. 친척과 주변의 사람들은 혼자 앉을 수 없고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음식조차 먹을 수 없는 동생을 큰 골칫덩이라고
했지만 부모님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 그분들의 가장 큰 소원은 바로 당신들이 돌아가시기 하루 전에 동생이 세상을 뜨는
것이었다. 즉 신체적인 어려움으로 혼자 살아갈 수 없는 그를 두고 눈을 감을 수 없으며, 동시에 그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 능력도 없이 오히려 고통만 안겨주는 아들을 향해 “너 없이는 하루도 못살아!”하시며 짙은 애정으로 평생을
대하셨다.

정원이는 내가 하나님을 믿은 후 처음으로 전도한 사람이기도 하다. 교육을 전혀 받지 않고
제한된 환경에서 지낸 동생이었지만 복음을 듣고 주님을 영접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에는 어떤 불리한 조건도 막힘이
되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다. 20살이 되던 해, 동생 정원이는 어처구니없이 감기로 주님 곁에 갔다. 나중에 안 사실은 중증
장애인의 경우 저항력과 면역이 떨어져 엉뚱하게 감기나 설사로 죽게 된다는 것이었다. 동생이 주님 곁에 갔을 때 온 가족은 너무나
슬펐다. 특히 여동생은 자기도 정원이 따라 죽겠다며 그의 몸을 부둥켜안기도 했다. 또 아버지께서는 천국에서 마음대로 뛰어다니라고
예쁜 운동화 한 켤레를 사서 평생 걸어보지 못했던 동생의 관에 넣어 주셨다.

정원이를 향한 우리 부모님의 사랑은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또 다른 차원에서
발견하게 한다. 할 수 있는 것 하나 없이 늘 부모에게 짐이 되고 어려움만 안겨주는 그 아들을 향해 “나는 너 없이는 하루도
못살아!” 말씀하시며 짙은 사랑을 보이시는데, 하나님의 사랑은 그보다 얼마나 높고 깊으신지…

사람을 대할 때 마다 연습을 한다. “하나님은 이 사람을 어떤 눈으로 보시나요? 저도
그렇게 보게 도와주세요.” 그리고 예수님의 얼굴을 그 사람의 얼굴에 오버랩 시켜본다. 이것은 때로 하나님처럼 사람을 사랑하고
싶은 나의 ‘안간힘’이고 ‘절규’이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능력이 없음을 발견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무시 하고 싶고 하찮게 여기고 싶은 사람들이 가끔 있다. 더욱이 나에게 어려움을 주고 상처를 주는 사람들에게는 그의
가치와 존엄성조차 평가절하 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때마다 십자가 앞에 엎드려 죄를 고백하며 사람을 귀하게 여기시는 주님의 눈과
마음을 구한다.

인간의 가치는 그 사람이 무엇을 가지고 얼마나 행할 수 있느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이 어떠한 의미와 가치를 개개인에게 부여해 주시느냐 에 달려 있을 뿐이다. 동생 정원이를 통해 인간을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더 깊이 깨닫게 된다. 내 평생 지치더라도 끝까지 해보고 싶은 훈련은 바로 “주님의 눈으로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훈련”이다.

[유상준] 위기의 지구환경문제를 해결할 성경적 대안은 없는가?

다음 글은 KOSTA/USA 2009의 tmKOSTA에서 발제되었던 지구/환경/해양 분야 세미나 리포트입니다.

KOSTA 2009

 

위기의 지구환경문제를 해결할 성경적 대안은 없는가?

Task-Major KOSTA

GTM1300: 지구/환경/해양 분야

 

유상준

 

개요

 

새천년의 막이 오른지 10년이 채 지나지 않은 오늘날, 인류는 환경오염과 기후변화, 그리고 자원고갈등의 문제로 인하여 중대한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환경오염문제는 국지적인 영향을 지나서 지구 전체 생태계의 존립을 위협하는 문제가 되었다. 특히 대기오염의 경우를 보면, 1950년대에는 핵전쟁으로 인한 방사능 피해 정도만 전체 지구를 오염시킬 수 있는 물질이었지만,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성층권 오존, POPs (Persistent Organic Pollutants), 수은등을 비롯한 많은 오염물질들이 지구지역으로 골고루 이동되어 영향을 는 것으로 보고된 바 있다 (Figure 1).

 

 

Figure 1. Evolution of the perceived spatial scale of air pollution problems in the United States. (Keating et al, 2004)

 

 

해양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어서 육지에서 유입된 폐기물이 바다의 곳곳을 오염시키고 있다 (Figure 2). 특히 태평양에 떠있는 플라스틱 쓰레기 더미 (Great Pacific Garbage Patch)의 경우 그 규모가 텍사스주의 넓이보다도 큰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 이 물질이 분해되어 정화되기까지는 수백년이상이 소요될 것으로 계산된.

 

이렇 인간활동에 의해 지구환경으로 배출된 오염물질은 Environmental Fluids인 공기와 물을 오염시키고, 이들은 다시 기권 (Atmosphere), 수권 (Hydrosphere), 암권 (Lithosphere), 그리고 생물권 (Biosphere)까지 로운 영향을 미치게 된다. 오늘날, 환경오염문제는 지구의 전체 시스템 오염시키는 Global Problem이 되었다.

 

 

Figure 2. Great Pacific Garbage Patch. (oceans.greenpeace.org/en/ the-expedition/news/trashing-our-oceans/ocean_pollution_animation)

 

 

인류의 무분별한 에너지 사용은 기후변화와 자원고갈로 이어졌다. 기후변화로 인해 수많은 종이 인류보다 앞서 멸종위기에 처해있다. 이를 정지시키지 못한다면 인류 전체의 생존도 위협을 받게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배적인 견해이다. 해마다 빙하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는 북극권에 사는 북극곰은 먹이사냥을 위해 조오련이 횡단했던 대한해협보다도 먼거리를 매일 헤엄쳐 다닌다고 한다. 그런데도 이산화탄소등 온실가스의 배출량은 해마다 증가하는 추세이며 (Figure 3),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앞장서야 할 선진국과 강대국들은 오히려 다른 국가들보다 많은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는 것으로 보고된 바 있다 (Figure 4). 이처럼 기후변화문제 역시 환경오염과 더불어 인류의 존립을 위협하는 Global Problem이라고 말할 수 있다.

 

 

Figure 3. Recent Global Monthly Mean CO2. The
dashed red line with diamond symbols represents the monthly mean
values, centered on the middle of each month. The black line with the
square symbols represents the same, after c
orrection for the average seasonal cycle. (www.esrl.noaa.gov/gmd/ccgg/trends/)

 

Figure 4. Carbon Tracker shows Atmospheric Concentrations of CO2. (www.esrl.noaa.gov/gmd/ccgg/carbontracker/)

 

 

이러한 절박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전세계 에너지 사용량은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추세이다 (Figure 5). 전세계 인구수 또한 증가하는 추세여서 에너지 사용량의 증가 추세는 한동안 변하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현재의 기술로 미루어 볼 때 석유는 앞으로 30, 석탄은 120여년의 여유분이 남아 있는 상황이고, 각국이 앞다투어 청정 및 재생에너지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지만 전망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에너지를 포함한 자원고갈문제 역시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Global Problem이라 할 수 있겠다.

 

 

Figure 5. World Marketed Energy Consumption, 1980-2030. (Energy Information Administration, 2009)

 

 

이렇듯 지구는 인간의 무절제와 탐욕에 의한 자원남용으로 인해 인류를 포함한 모든 생태계가 생존의 위협에 쳐하게 되었다. 결국 지구환경문제가 가장 먼저 세계화를 달성한 분야가 되었다. 더욱 암울한 것은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각국은 문제해결보다는 자기 밥그릇 챙기기에 급급하다는 사실이다. 마치 침몰하는 타이타닉호에서 가장 높은 곳을 차지하려고 아우성치는 모습을 보는 듯하다.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과연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지구환경문제를 해결할 성경적 대안이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몇가지 토의주제를 다룰 것이다.

 

(1) 지구환경문제를 야기한 근본적 원인은 무엇인가?

(2) 지구환경문제에 세상은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가?

(3) 지구환경문제해결을 위한 성경적 대안은 있는가?

 

 

근본원인

 

그렇다면 이런 위기를 초래한 근본원인은 무엇일까? 환경오염, 기후변화, 그리고 자원고갈 모두 인류의 탐욕과 무절제함이 초래한 결과이고 국제사회를 포함하여 사회 전반에 팽배한 무한경쟁에 따른 비협조적 태도가 이를 더욱 심화시켰다고 볼 수 있 (Figure 6). 자원을 무분별하고 경쟁적으로 발굴하고 사용하는 과정에서 인류와 생태계를 위협하는 오염물질이 자연정화능력을 초과하여 배출되었, 오염물질은 아니지만 지구의 기후 시스템을 조절하는 온실가스대기중 농도가 한계농도를 초과함으로 극심한 기후변화를 초래한 것이다. 이는 18~19세기의 철학 및 사상조류를 주도한 모더니즘적 세계관에서 발로되었다고 수 있다. 모더니즘은 인간의 이성을 통해 유토피아의 달성이 가능하다는 논리로서, 진화론과 같은 논리로 하나님없이 세상을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산업혁명과 과학기술의 발전을 통한 인간의 능력만으로 풍요롭고 행복한 세상을 만들수 있다는 착각을 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 사상결국 세계대전과 공산주의와 같은 많은 부작용을 낳았고, 물질주의와 개인주의등이 팽배해진 가운데 인류는 지구환경 전체에 걸친 위기를 자초하게 되었다.

 

 

Figure 6. 지구환경문제의 근본원인

 

 

 

해결방안

 

그렇다면 위기의 지구환경에 대하여 세상이 제시하는 해결방안은 무엇일까? 답은 간단하다. 절제와 협력 통해 문제의 근본원인인 무절제와 비타협의 문제를 제거하면 된다는 것이다 (Figure 7). 실제로 세상 리더쉽은 소비와 생산의 구조적 변화와 기술개발등을 통한 자원남용 절제, 그리고 그로 인한 환경오염물질과 온실가스의 배출 저감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또한 이를 실현하기 위 글로벌 협력 필수요소로 제시고 있다. 이미 국경을 넘은 지구환경문제는 Global Agenda가 되었고, 이는 Global Collaboration을 통한 Global Solution에 의해서만 해결이 가능하다는 논리이. 하나님을 배제하고 인간의 이성으로만 유토피아를 건설하려 했던 모더니즘 시대의 결과로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지구환경문제와 같은 위기가 초래되는 것을 경험한 사람들은, 이제 국가와 같은 기존의 질서와 지성 혹은 윤리와 같 절대적 사회기준을 부정하고 새로운 대안을 찾게 되었. 이는 모든 기존의 질서와 기준 부정하고 해체하 그로 인해 다양화 된 것들을 새롭게 혼합하여 새로운 글로벌 질서를 세우려하는 포스트 모더니즘적 사고방식으로 볼 수 있다. 이는 현재 정치, 경제, 문화등 모든 분야에서 진행되고 있는 글로벌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하나 또는 몇몇 국가의 노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지구환경문제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새로운 글로벌 리더쉽에 의한 해결을 기다리고 있으며, 이 리더쉽은 지식/정보화 사회에 걸맞는 과학기술을 보유한 형태가 될 것으로 예된다. 결국, 남보다 앞선 지식과 기술을 보유한 개인 또는 집단이 글로벌 리더쉽을 거머쥐게 될 것이다. 이 리더쉽은 모더니즘의 시대보다 좀더 글로벌화되고 강화된 권력인 동시에 지성과 윤리보다는 감성적이고 쾌락적인 면을 띄게 될 가능성이 높다.

 

 

Figure 7. 지구환경문제에 세상이 제시하는 해결방안

 

 

그렇다면 이들이 세상을 위기에서 구할 수 있는 지구환경문제의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까? 모든 인류를 위기의 지구환경에서 건져내기 보다는 글로벌 리더쉽을 중심으로 협력 세력들만이 혜택을 누리게 되나머지는 소외되며 오히려 핍박받는 구조 재편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위와 같은 글로벌 리더쉽은 감성적으로 친화력은 높이겠지만, 비윤리적이고 비이성적인 리더쉽이기 쉽상이기 때문이다.

 

Figure 8과 같이 이런 리더쉽의 형태와 시대의 조류를 성경의 역사적 맥락에서 살펴보았다. 우선 창세기의 바벨탑 시대를 살펴보자. 하나의 언어를 가진 인류가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신들의 이름을 내기 위해 바벨탑 건설이라는 구심점 아래에 모였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열방으로 흩으셨다. 다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 침묵의 시대를 보면, 모든 길을 연결한 로마의 토대위에 하나님없이 세상을 설명하려는 그리스 철학을 중심으로 세계가 통일되기 시작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때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로마가 닦고 연결한 이 길을 따라 사도 바울을 통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오늘날, 인류는 정보화 시대를 맞이하여 인터넷, 휴대폰등의 네트웤을 통해 연결되고 있다. 여기에 포스트 모더니즘적 사고가 세상의 구심점 역할을 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려 하고 있다. 결국 시대에 따라 얼굴을 바꾸어 세상을 하나님을 대적하도록 이끄는 글로벌 리더는 사탄인 것이다. 어떤 개인, 집단, 혹은 국가가 글로벌 리더쉽으로 나서더라도 결국 그 뒤에서 조종하는 것은 사탄이다. 이런 사회에서 절제와 협력을 통한 인류의 회복은 기대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절제와 협력은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세상의 바벨탑모델로는 인류를 위기의 지구환경에서 구할 길이 없다.

 

 

Figure 8. 지구환경문제 해결의 세상적 모델: 바벨탑 모델

 

 

 

성경적 대안

 

그렇다면 지구환경문제를 해결할 성경적 대안은 있는가? 여기에서는 노아의 모델을 통해 살펴보았다. 노아의 시대는 대홍수라는 지구환경의 격변으로 인해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인류가 공멸할 위기에 놓이게 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노아가 방주를 만들지 않았다면 인류와 생태계는 이미 멸망하여 없어졌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무엇인가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오늘날의 인류와 생태계 또한 멸망할지도 모른다. 오늘날 노아의 방주와 같은 대안을 제시하여 인류를 멸망에서 건질 노아와 같은 글로벌 리더만 있다면 인류는 생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럼 노아의 리더쉽 모델을 잠시 살펴보자. 노아의 모델을 전문성 (Specialty), 영성 (Spirituality), 그리고 글로벌 리더쉽의 세가지 측면에서 분석해 보았다. 첫째, 노아는 전문성을 가지고 있었다 (Figure 9).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능력을 부어주셨다. 그래서 그는 혼자서 거대한 방주를 만들 수 있었고, 방수재로 역청을 사용하였으며, 생물종의 (Seed) 역할을 할 수 있는 짐승을 분류할 수 있는 생물학적 전문성이 있었다. 성경적 종의 기원이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각각 육식과 채식을 하는 새를 방주에서 내보내어 지표면의 상황을 모니터링하였다.

 

 

Figure 9. 성경적 대안: Specialty

 

 

둘째, 그에게는 영성 (Spirituality)이 있었다. 그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은 사람 (6:8) 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미리 물로 세상을 심판하실 것과 어떻게 대비해야 할지에 대해 알려주셨다. 그가 방주에 들어갔을 때 비로소 홍수는 시작되었으며 (7:1), 그가 제사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셨다 (8:20-22). 영성이 있는 사람은 문제의 본질 혹은 핵심을 볼 수 있는 눈이 있. 그리고 영성이 있는 사람만이 자신과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수 있다. 셋째, 그는 글로벌 리더쉽이었다. 비록 여덟명이었지만 모든 인류모든 생태계를 하였던 그는 글로벌 리더쉽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방주를 예비하는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실천했다 (11:7). Global Leader라는 단어는Global + Lead + er로 분해할 수 있으며, 이는 전체를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할 수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즉 글로벌 리더는 전체 (Big Picture)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올바른 방향 (Vision)과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영성이 없으면 불가능한 리더쉽이다. 코스타 강사이신 앤아버대학촌교회의 박상춘 목사님께서 리더쉽 훈련셨던 말씀을 잠시 인용해 보면, “사탄은 아담과 이브를 유혹하여 선악과를 먹게 하여 눈이 밝아지게 했다. 바로 세상을 보는 눈, 세계관을 바꾼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그 눈을 다시 타락 이전의 눈이 회복되어 하나님의 가치관과 성경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으로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전체를 보고 방향을 제시한다는 것은, 이 없는 사람 영성이 없는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글로벌 리더쉽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는 영성이라고 할 수 있다. 글로벌 리더쉽을 생각할 때 한가지 주의해야 할 점은 명성 또는 직위에 의한 영향력이 생각보다 매우 작은 요소라는 것이다. 노아는 홍수가 시작될 때까지 최소한 무시당하는 존재였다는 사실 (24:38-39)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글로벌 리더쉽은 세상적인 명성 또는 신분을 통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품는 Global Heart, 즉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품 자를 의미한다. 진정한 글로벌 리더쉽은 바로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성과 세상을 구하려는 열정이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머리 (Specialty), 주님의 눈 (Spirituality), 그리고 주님의 심장 (Global Leadership) 시고 노아처럼 사용하신다고 확신한다.

 

 

Figure 10. 세상모델과 성경모델의 비교

 

 

 

도전

 

지구환경문제에 직면한 위기의 인류에게 성경적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우리는 이제 새로운 비용편익분석 (Cost-Benefit Analysis)을 해야 한다. 세상이 말하는 비용편익은 “Cost from Me, Benefit to Me”이다. 하지만 세상을 품는 글로벌 리더쉽인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 (Follower of Christ)가 가져야 할 비용편익의 새로운 개념“Cost from Me, Benefit to the World”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결정해야 한다. 세상을 따라 결국은 침몰할 타이타닉호 건조에 참여할 것인지, 아니면 세상이 감당못하는 믿음의 용사로 서서 또 한번의 노아의 방주를 만들것인지 말이다.

 

 

 

참고문헌

 

Bible

Keating,
West, and Farrell (2004), Prospects for International Management of
Intercontinental Air Pollution Transport, The Handbook of Environmental
Chemistry, Vol 4 Part G, Springer-Verlag, Berlin p 295-320.

Energy Information Administration (2009), International Energy Outlook 2009, U.S. Department of Energy, Washington, DC.

International Energy Agency (2007), Renewables in Global Energy Supply: An IEA Fact Sheet, OECD.

United Nations Environmental Programme (2009), UNEP 2008 Annual Report, UNEP.

United
Nations Environmental Programme (2009), UNEP Year Book 2009, New
Science and Developments in Our Changing Environment, UNEP.

Day,
Shaw, Ignell, and Steven (1988), Quantitative distribution and
characteristics of neustonic plastic in the North Pacific Ocean. Final
Report to US Department of Commerce, National Marine Fisheries Service,
Auke Bay Laboratory. Auke Bay, AK, pp. 247–266.

 

 

Sang-Joon Yoo

 

[이영길] 내 이름으로 사랑해 보거라!

캠퍼스에서 지체들을 만나면 그들의 손에 이끌려 자주 별다방 (Starbucks Coffee Shop)으로 가곤 한다. 구석에서 커피 홀짝 꺼리며 나누는 여러 대화들이 있지만 그중 흔한 문제가 관계에 대한 것이다. 여러 지체들을 만나 그들의 대인관계의 여려움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어려움을 격고 있는 씨름 하는 대상은 다양하다: 지도 교수, 교회의 어느 집사님 혹은 지체, 같은과 학생, 실험실의 어떤 괴팍한 녀석, 아내 혹 남편, 소그룹의 리이더…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내가 경험한 어느 동료 교수와의 문제가 늘 생각난다. 그래서 인지 그들이 격고 있는 아픔을 잘 이해 할 수 있고, 또 그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 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들려 주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나의 블로그에 이미 다른 제목으로 나왔지만 “유학생활”이라는 카테고리에 없었던 것이라 이곳에 소개해 본다.

나의 힘으로는 도무지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하나님 때문에 사랑 하게 된적이 있다. 지금 나는 그것을 하나님의 기적으로 보고 있다. 내가 기적을 일으킨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진리말씀이 기적을 시작하였고, 그 말씀이 나의 순종을 통해 구체화 된것 뿐이다.


그 기적은 오래전 사랑이야기다. 당시 나는 어느 주립대학의 교수로 있었다. 그곳에 부임하던 첫해에 같은 전공을 지도하던 어느 여자교수가 정년 (tenure)을 받지 못하고 떠나는 사건이 생겼다. 워낙 성실했던 동료였는데 나는 제법 놀랐다. 나중에 누가 귀뜸해주기를 그 교수는 연구 실적이 많이 부족해서 테뉴어를 받지 못했다고 한다. 여하간 나는 졸지에 동료를 그렇게 잃어 버린셈 되었다. 

결국 후임을 뽑아야 하였고, 시간이 부족했던 관계로 급속한 속도로 청빙위원회가 구성되어 교수를 뽑기로 하였다. 제한된 시간속에 광고 되었으니 제한된 숫자의 응모가 있었다. 그러나 적은수의 응모자 중에서 청빙위원회는 어떤 두 applicants를 학과장에게 추천했다. 그러나 학과장은 청빙위원회의 추천을 무시한채 어느 대학에서 교수를 하고 있던 응모자와, 청빙위원이 추천한 두명과 함께 초대하여 인터뷰를 진행 시켰다. 물론 청빙위원의 추천에 속하지 않았던 세번째 그 여교수를 모두 기뻐하지 않았다. 결국 학과장은 세번째 여교수에게 좋은 조건으로 오퍼를 하였다. 이유인즉은 경험이 풍부하다는 것이었다. 

그때 채용된 여자 교수의 이름은 티나 (가명) 였다. 나와 티나는 그렇게 만났다. 키도 나보다 훨씬 크고, 금발머리였고, 목소리는 우렁차고 공격적이었다. 표정은 항상 경직되어 있었고, 자기 주장이 몹시 강한 사람 같았다. 교수회의에서는 유독 자기 생각을 분명히 나타내기도 했고, 어떨때는 심각히 따지기도 하는등 다른 교수로 부터 적개심도 유발할 정도였다. 강의실에서도 여전하여 학생들로 부터 환영 받지 못하고, 여러 학생들이 강의를 더 들을 수 없다고 할 정도로 티나의 시작은 많은 잡음을 내고 있었다. 

티나가 나보다 대학에 더 오래 있었던 이유로 인해 그녀는 나의 전공분야에 코디를 맡게 되었다. 둘이서의 대화는 일방적이었다. 나의 의견을 수렴하기 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그냥 밀고 나가는 스타일이었다. 동료 교수들도 힘들어 하였고, 학생들과 나 또한 어려움을 겪었다. 같은 전공이라 티나를 advisor로 둔 학생 30여명은 티나를 찾기 보다 나를 찾음으로 나의 생활은 더 바빠 졌다. 티나로 부터 받은 어려움과 부당한 대우를 호소하는 학생들을 매번 상담해야 하였다. 나또한 티나로 인해 어려웠음으로 나도 상담자가 필요했다.

그래서 새벽 기도때 나는 하나님께 강하게 호소 하였다. “나를 그곳 대학에서 떠나게 하던지 티나를 떠나게 하던지 주님 알아서 하십시오!”라고 하나님께 대들기도 했다. 몇달을 기도했지만 티나도 그곳 주립대학에 있었고, 나도 그대학에 있었다. 무너지기를 갈망했던 나의 여리고성은 무너지지 않고 그냥 버티고 서 있었다. 그 답답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죽을 맛이었다. 그뿐 아니라 우리들의 어려움은 더 어려워져 갈 뿐 호전의 기미는 전혀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말씀을 읽는데 “티나를 사랑할 수 없겠는냐?”라는 세미한 내적 음성이 들리는듯 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성경의 말씀이 나로 하여금 티나가 내 이웃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그리고 그를 사랑하기를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임을 동의 하는 움직임이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강하게 일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즉시 뿌리 쳤다. 내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내 학생들은 사랑할 수 있지만 티나는 할 수 없다고 고개를 좌우로 저의며 강하게 부정했다. 결국 그날의 기도는 중간에서 멈추고 교회를 뛰쳐 나왔다.

문제는 그 뒤에 또 생겼다. 매번 새벽 기도시 읽는 본문 말씀중 “사랑”이라는 단어는 나로 하여금 티나만 생각나게 만들었다. 나는 괴로 웠고, 또 부정하며 교회를 나왔다. 세번째에 똑같은일이 반복해서 생기자 나는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위해서도 나는 더 이상 도망다닐 수 없었다. “주님, 싫지만 순종하겠습니다!”

그날은 순교할 각오로 학교에 출근했다. 아침 부터 가슴이 쿵쾅거리며 견딜 수 없었다. 사무실에 도착하자 마자 티나의 방을 노크하였다. 티나가 없기를 진심으로 바랬지만 불행히 그녀는 그곳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노크를 했기에 문은 열렸고, 문을 열어 주었기에 나는 들어가 앉아야 했다. 나는 몹시 경직 되어 있었다. 평소 만날때도 경직 되었는데, 그날 사랑을 고백 하려니 죽을 맛이었다.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커피를 마시며 내 얼굴을 응시 하는 것이었다. 사랑을 고백해야 하니 우선 사무실 문을 닫아야만 했다. 그래서 문을 닫아도 되겠냐고 경직된 얼굴과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물론 이지”라는 대답과 함께 문을 닫았지만 긴장 떄문에 좀 세게 닫은것 같다. 화난 동양 녀석이 인상쓰고 아침 부터 들어와 문을 쾅 닫았으니 티나의 표정도 긴장으로 가득해 보였다. 

말을 하자니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사랑한다고 말은 해야 하는데 정말 당황 되었다. 차라리 화장실에서 거울 보며 연습이라도 할것을 그냥 들어온것 같아 후회 막심이었다. 그같은 많은 생각으로 인해 나는 입을 열지 못하고 그냥 티나의 얼굴만 긴장하여 째려 보았고, 그런 나를 티나 또한 노려 보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주저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떠듬거리며 다음과 같이 말한것 같다. “나는 크리스쳔이라 매일 아침마다 기도 하고 있다. 너하고 불편해서 계속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너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것 같았다. 그래서 사랑한다라고 말하러 왔다. 내 하나님 때문에 너를 사랑한다!” 

고등학교 3학년과 고등학교 마치고 놀고 있는 자녀 하나를 더 둔 이혼한 티나 앞에서 이같이 말을 했으니 이제 과격한 티나가 어떻게 나올지는 하나님만이 아실 일이었다. 그 말을 내 뱉어 버리자, 이번에는 티나가 나를 노려 보았다. 처음보다 얼굴이 더 긴장되어 보였다. 쥐 구멍이 있으면 들어 가고 싶었다. 꼭 이렇게 해야 예수 믿는 것일까? 주립대학에서 하나님 이야기에다가, 남자 교수가 이혼한 여자 교수에게 사랑이라는 말을 사용했으니 결과는 어떨까? 그동안 나로 인해 자신의 마음도 몹시 상해서 꼬투리를 잡고 싶었을터인데 내가 하나님때문에 고스란이 당했다고 생각했다. 

등에 식은 땀이 흐르고 있음을 느끼며 나는 괴로운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났음에도 티나는 말이 없었다. 그래서 더 괴로웠었다. 나는 “이제 하고 싶은 말 했으니 난 자리를 뜨겠다”라는 말을 남기도 그 자리를 도망쳐 나오고 싶었다. 그러나 그 순간 티나의 눈이 젖기 시작했다. 그리고 표정이 풀려 감을 목격했다. 젖은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고맙다, 영길아!” 라고 말하며 계속 울고 있었다. 우리는 말이 없이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티나는 울고, 나는 어찌할줄 모르는데 어색하게 앉아 있었고. 

티나는 입을 열어 자신의 삶을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남편과 25년전에 만나서 결혼했고 아이도 둘 있는데 남편을 떠나야 했었다. 남편으로 부터 많은 상처를 받고 살고 있었고, 부부 관계는 너무 어려웠다고 고백하였다. 아이를 하나씩 나누어 헤어지자고 하여서, 남편은 큰아이를 데리고 살고, 자기는 둘째 아이와 살고 있다고 하엿다. 그때의 상처가 너무 컷다고 한다. 남편이 너무 싫었고, 큰 아이는 너무 보고 싶었고… 이후 우울증이 자신을 다스리기 시작했고, 그로인해 삶은 너무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아무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했다. 그런데 자기 같은 사람을 누가 사랑한다고 하여 믿기 어려울 만치 기쁘다고 한다. 전에 남편이 프로포즈할때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한적이 있을뿐 아무도 사랑한다고 말하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우리는 아침을 그렇게 보내고, 각자 강의 하러 가야 했기에 우선 헤어졌다. 

나를 위해 중보하던 아내에게 오전에 티나와 있었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날 저녁 아내가 빨간색 장미꼿 24송이 (two dozens)를 사들고 티나네 집을 찾아 갔다. 문을 열어 주던 티나는 24송이 빨간색 장미를 받고 또 울더라는 것이다. 남편이 프로 포즈 하며 사랑한다고 할때도 빨간색 장미 24송이 였다고 한다. 아내는 그날 어느 가게에서 장미꽃을 대폭 세일을 하기에 two dozens를 산것일 뿐인데… 아내를 꼭 껴안으면서 고맙다라는 말을 연실하며 흐느끼는 티나를 뒤로 하고 아내는 집으로 돌아왔다.

이후 우리 부부는 티나의 집을 또 방문하였고, 서로의 삶을 이야기 하였다. 우리 부부는 주로 듣는 편이었다. 대학때 철없이 어느 남자를 만나서 관계를 갖고 딸 아이를 낳았지만 키울 수 없어서 입양기관에 넘겨준 아픈 사건으로 자신의 삶은 죄의식과 아픔으로 힘들었다는 이야기 부터 시작하여 많은 삶의 이야기를 큰 보따리를 풀듯 털어 내었다. 울고, 웃고, 또 울고… 우리는 이렇게 친구가 되었다. 주말에는 우리 두 아이를 돌보아 줄테니 영화를 보던 데이트를 하던 놀다오라고 하여 아이들도 몇번 맡아 주었다. 우리아이들에게 책도 읽어 주고 샌드위치에 꿀 발라 먹는 것도 가르쳐 주며 아이들을 아주 잘 돌보아 주었다. 

티나는 편집을 아주 잘하는 은사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글을 써서 좋은 저널에 논문도 몇편 내기도 했다. 수년 동안 출판한 논문이 한편도 없었던 티나는 나와 글을 쓰면서 몹시 의욕에 차 있었다. 워낙 글을 잘 다음어 주어서, 나의 글이 티나의 손에 들어가면 아주 깔끔해 지는것을 보며 많이 놀랐다. 물론 나는 그것을 거침없이 표현했고, 티나는 그같은 나의 피드백과 저널 편집장으로 부터의 칭찬으로 글쓰는 일에 매우 의욕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티나로 인해 학생들의 불평도 적어져 가고 있었다. 동료 교수들도 전과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강의 평가가 여전히 나쁨으로 인해 티나를 내어 쫓느냐 아니면 기회를 주느냐 토론하며 각각의 교수들을 학과장이 만나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티나를 내보내는것에 동의했지만, 나는 티나가 처음과 달리 아주 잘 하고 있음을 여러 근거를 사용하여 설득력 있게 설명했다. 그동안 둘이서 1년간 출판한 논문 세편은 학과 교수 15명이 쓴 논문 숫자의 합한것과 같았다. 결국 학교는 티나에게 기회를 주기도 했다.

이즈음에 나는 다른 어느 주립대학에서 오퍼를 받았다. 그래서 떠나야만 하는 상황에 있었다. 오퍼 받은 대학은 티나가 전에 박사학위를 받은 대학이라 아주 기뻐 하였다. 물론 섭섭함으로 실망도 하였지만… 그곳에 집을 팔지 못한채 새로 이사갈 곳에 집을 사야 하였기에 금전적으로 아주 어려웠다. 사고 싶었던 집은 방이여섯개라서 학생들이 편안히 와서 쉬어 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고, 2-3분 걸어가면 공원도 있어서 청년들에게 너무 좋을것 같아 꼭 사고 싶었다. 그러나 그집에 누가 조건부 오퍼를 이미 넣은 상태이었다. 오퍼를 넣은 사람은 자신의 집을 팔면 그 돈과 융자금으로 사는 것을 조건으로 하였기에 우리가 은행의 융자를 얻을 수 있으면 그 오퍼를 제끼고 살 수 있는 가능성도 있었다. 은행에서 융자가 나왔지만 약속된 수일내 까지 현금 $5,000이 있어야 부동산 (집) 구입이 체결 (closing)되는 것이었다. 아무리 해도 $5,000이 나올길이 없었다. 

티나는 아내와의 교제 속에 우리의 이같은 실정을 들었던 모양이다. 이사를 앞두고 엘리베이터도 없는 4층 학교 사무실에서 더운 날씨에 땀을 흘리며 짐을 싸고 있었다. 한참 짐을 싸는데 티나가 얼굴에 땀이 범벅이 된체 내 사무실을 급히 들어섰다. 4층에서 부터 더운날 걸어 왔으니 더웠을 것이다. 그런데 씩씩 거리는것 보니까 뛰어 온것 같았다. 반가워서 웃으면서 자리에 앉으라고 했더니 두툼한 두 주머니에서 쌍권총을 빼듯이 현금을 빼어 드는 것이다. “내 부모로 부터 거저 받은 돈이니 나도 네게 거저 주는 돈이다. 몇일 후 집 closing할때 사용해라! 갚을 생각 안해도 된다. 내가 너희 집 방문 하며 그냥 공짜로 잠만 재워주면 된다!” 그렇게 말하고는 사무실을 빠져 나가 버렸다. 

결국 새로운 곳에 집을 샀다. 그리고 먼저 집은 한달 후 팔 수 있었다. 덕분에 $5,000을 티나에게 되돌려 줄 수 있었다. 근사한 선물과 더불어. 새로운 곳에 이사간 이후 어느날 집 고칠때 사용하는 도구가 100개가 있는 파란색 도구박스 (Tool Box)를 문앞에서 발견했다. 티나가 5시간 운전해서 새로산 집 문앞에 도구박스를 두고 간것이다. 그 도구 박스 위에 다음과 같은 메모가 적혀 있었다: “집고칠때 필요로 할것 같고, 네 집에는 그같은 도구박스가 없는듯 하여 네 집에 놓고 간다. 잘 사용하도록 해라!”  내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나는 주님때문에 억지로 사랑한다고 말한것 뿐인데, 너는 네 마음을 담아 내게 사랑을 주고, 또 돈도 주고, 보너스로 툴 박스 까지도 주고… 

이 기적이 갑자기 생각이 났다. 조그만 순종으로 경험한 이 사건은 내게 하나님의 크심을 늘 상기 시킨다. 우리에게 사랑하라 하신다. 그 이웃이 내게 어려움과 해를 끼치는 사람일지라도

사랑은 댓가를 지불 해야 한다고 믿는다. 나같이 형편 없는 인생을 사랑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억하면 이 세상에 사랑하지 못할 대상이 없다. 그리스도의 제자로 캠퍼스로 부름 받고 그곳에서 훈련 받고 있는 우리들은 우리가 가는곳 마다 사랑의 기적, 사랑의 혁명을 이르켜야 한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 (요 13: 34).

[이영길] 당신의 전공은 무엇인가?

누구를 만나면 흔히 받는 질문이 직업에 관한 것이다. 어떤일에 종사하냐는 질문에 나는 흔히 대학 교수라고 짦게 대답하곤 한다.
그러나 대학교수라는 대답과 함께 금방 되돌아오는 질문이 하나 더 있다. 전공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역시 주저치 않고 “치료
레크리에이션” 혹은 “레크리에이션 치료”라고 대답하곤 하였다. 미국에서 대학교수로 지내면서 나의 대답은 적어도 이랬다. 그리고
그같은 대답은 나의 삶의 상태를 정확히 반영 하고 있었다. 나를 나로 정의 지을 수 있었던것도 바로 전문 분야와 그 분야에
종사하는 교수라는것으로 나를 철저히 국한 시켰던 것이다. 내가 예배자로,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야하는 귀한 사명은 교회나
성경공부에서나 고백해야하는 그런 악세사리로 여긴것이다. 

누구든 이제 내게 전공을 묻는 다면 나의 대답은 전과 같지 않음을 알게 된다. 왜냐 하면 나의 대답이 다음과 같기 때문이다:
“나의 전공은 레크리에이션 치료와 예배 입니다!” 예배라는 새로운 전공이 내 삶에 따라 붙으면서 사실상 요즘 전공에 못지 않게
예배를 많이 생각하고 묵상하며 삶의 실천을 계속적으로 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전공 과목을 파헤치고 연구할때 나는 나의 다른
전공인 예배에 대한 지식과 태도를 가지고 학문에 임하게 된다. 글을 쓸때도 그렇고 강의실에서 강의 할때, 학생들과 상담할때에도,
교수회의 에서도, 학술지 논문심사중에도 마찬가지이다.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만을 경배하고 그분께 나의 사랑을 전폭적으로 표현하는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사랑을 흠뿍 받는 일이다.
이같이 하나님과 나 사이에 오고 가는 친밀한 사랑으로 인해 예배는 기쁨과 감동이 반드시 따른다. 그리고 나의 죄와 이땅에 만연한
죄의 흔적들로 인하여 눈물 흘리며 회개도 한다. 무엇보다도 예배는 나를 최대한 낮추고 하나님을 최대한 높이는 것이다. 예배를
통해 나는 하나님을 배우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 만큼 나를 더 알아 가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더 해질 수록 내가
공부 하는 대상인 하나님의 창조물인 인간에 대한, 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 진다.

또 다른 나의 전공이 예배 인지라 나는 “레크리에이션 치료”와 관련된 제반 활동영역들을 함부로 대할 수 없다. 예배가 전공인
나로서 대충 강의 준비를 하고 들어 갈 수 없다. 예배가 전공인 나는 나의 다른 전공인 레크리에이션 치료에 관한 글을 쓸때 대충
끄적거려 낼 수 없고, 남의 생각을 이리 저리 조각지어 살짝 새롭게 하는 치졸한 글을 쓸 수도 없다.
학생들 상담 하고 만날때도, 전화 받을 때도 그렇게 할 수 없다. 내가 높아 지려고 강의 할 수도 없고, 내 이름 높이려고 글을
쓰려고 할 수도 없다. 이로 인해 인간 중심의 사로로 만들어진 지식체계안에서 죄의 흔적들을 들추어 내고 이를 하나님중심의 사고로
다시 비판하고 묵상하려 애쓰게 된다.

그래서인지 삶 자체가 너무 재미 있다. 교수생활에 신명이 난다는 말이다. 전문직의 삶이 예배임에 그곳에는 은혜가 넘친다. 은혜란
나의 공로와 관계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인바, 공부를 하면서, 전공분야로 세상을 대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통찰과 지혜가
그때 그때 주어져 흥분이 된다. 그러나 이렇게 사는것이 쉽지는 않다. 많은 싸움이 있다. 예배의 태도를 잃고, 예배의 대상이
세상 혹은 내가 될때도 있다. 철저한 자기 성찰과 회개를 늘 동반하는 치열한 싸움이 따르게 된다.

그러나 나는 이같은 삶의 전환을 매우 감사히 여긴다. 노파심에 한가지 더 설명해야할것이 있다. 내가 말하는 예배라는
전공은 “예배학”이라는 전공을 칭하는것이 결코 아니다. 나는 예배에 관한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기에 예배학이라는 전공을 하고
싶지 않다. 나는 단지 예배의 삶을 사는 우수한 예배자로 살고 싶고, 영원한 예배가 있을 천국에서의 삶을 이곳에서 연습하며 더
누리며 살고 싶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예배가 학문 분야 보다 앞선 주 전공이라고 대답하고 싶지 않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더 기뻐 하시지
않을까 잠시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지금의 전공의 분야를 하나님과 세상을 섬기는 도구로 쓰라고 부여하신
것이기에 그것이 예배의 뒤에 물러 서지 않기를 원하신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다. 이 둘은 분리 될 수 없는 하나되야 하는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 하나이듯), 다시 말해 통합되어져야할 과제인 것이다. 이는 또한 이 세상에서 학문을 하며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살아가는 사람이 마땅히 지녀야 할 삶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학문과 신앙의 통합을 이루어 내는 가장 근본이 바로 이원론의
삶 (삶과 예배, 전공과 예배)을 떠나, 신앙과 전공이 (또 신앙과 매일의 삶이) 일원화 되는 삶에 있다고 나는 믿는다. 학문과
삶은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에 의해 영위되어 지는것 이기 때문이다.

혹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전공과 예배가, 삶과 예배가, 주일과 주중의 삶, 교회 안과 밖의 삶이 다른 이중적 삶을 살고 있지 않는가? 

[이영길] 날마다 더 작아 지고 싶다

어릴땐 더 크고 싶었다. 나보다 좀 더 크다고 뽐내는 이들의 머리를 주어 박고 싶어 서였다. 좀더 커지니, 그것 보다 더 크고 싶었던 것이 나보다 더 큰 이들이 있어서 였다. 

1984년 겨울에 미국으로 유학을 왔다. 어릴때 처럼 몸이 더 크고 싶어 서가 아니 였다. 사회적으로 크고 싶었고,
영향력의 힘을 키우고 싶어서 였다. 그래서 학교 선정할때도 내게 능력의 키를 더해 줄, 영향력의 힘을 더해 줄 그런 학교를
찾았다. 지도 교수도 그렇게 힘있고 능력의 키가 큰 자를 선택하려고 했다. 
대학 교수가 되어 서도 마찬가지 였다. 처음에 Florida International University로 가게
되었다. 별로 알려 지지 않은곳이였다. 하바드 대학이나 MIT, UCLA, 예일 등 좋은 브랜드 네임의 학교가 아니여서 어느
학교 교수냐고 누가 물으면 플로리다의 조그만 주립대학이라고 말을 했다. 어느 후배가 내가 근무하던 학교 이름을 물어서 알려 주자
“선배님, 그것은 서울에 있는 국제대학* 같은 학교 아니예요?” 라는 질문에 내가 있는 대학이 모국의 서울대, 연세대, 및
고려대학 같이 유명세가 없어서 “서울에만 국제 대학이 있냐? 플로리다에도 있다!”고 대답하며 내심 시큰둥 했다 (* 나는
국제대학의 가치를 폄하하는것이 아니고, 나의 잘못된 가치관에 대한 고백을 하는것이다). Ohio University에서
교수할때도 모국의 선.후배들이 학교 이름 물을때 마다 꼭 토를 다는것이 있었다. Ohio State University”는 들어
보았지만 Ohio University는 어디에???? 더 크고, 잘 알려 지고, 더 영향력을 주지 못하는 학교에 있다는 것으로
나의 교수 직분을 그냥 그렇게 가격을 싸게 정해 버린것이다.
이후 인디애나 대학에 왔다. 내깐에는 더 이상 올라갈곳이 없다고 여기던 그런 학교였다. 그러나 그 대학 역시 모국에서
잘 알려진 대학이 아닌지라 나의 어머니 조차도 별 입맛이 없는듯 아들이 일하는 대학에 대해 더 알려 하지 않았다. 공대출신의
어느 친구는 Purdue University는 들어 보았지만 Indiana University라는 대학은 있는지 조차 몰랐다고
반응하기도 했다. 나는 남들이 붙여 주는 브랜드 네임으로 나를 저울질 하려 했다. 어디 까지가야 만족이 있을까? 얼마 만큼 더
올라 가야 마음에 진정한 기쁨이 있을까?
이제 칼빈 대학에 왔다. Calvin Klein이라는 브랜드는 알아도 Calvin College를 모르는 이들에게
이것은 아주 보잘것 없는 학교로 보인다. 길에서 지나가다가도 학교 건물조차도 보이지 않을 정도의 아담한 학교이다. 우리어머니
표현을 잠시 빌려 표현해 보면 “학교도 작고 건물도 작아 보여서 손을 조금만 올리면 지붕을 만질 만한 조그만 학교”에 지금 와
있다.

그런데 달라 진게 있다. 전에는 더 크고, 더 잘 알려 지고, 더 영향력 있는 대학을 동경하여 “상향지향적” 사고를
가지고 살았지만, 이제는 그 같은 가치를 화장실에 flush시켜 버린지라 남의 반응에 관심이 없어 졌다. 하나님 부르신곳에 내가
서 있으면 그곳이 황량한 사막일지라도 그곳이 내게 제일 가치 있는 곳이다. 내가 더 올라 가려고 하기 보다 내가 있는 곳에서 나
보다 그리스도가 더 높아질 일이 무엇일까를 순간 순간 생각하며 바라는 일은 나를 기쁘게 한다. 나를 부르신이가 너무 크기에 그
분이 가라고 하는 그곳은 내가 어떤 이름을 붙이며 가치를 부여할 수 없는 그런곳임을 안다. 그래서 그곳이 내게 가장 적합하고
귀한 곳임을 은혜로 알게 되었다.

전에는 속아서 나의 성취를 위해 목숨걸고 애썼다. 많은 노력을 통해 나를 크게 하려고 애썼고, 그럼에도 커 보이지
않아서 나보다 더 큰 대학의 이름을 나와 동일시 시킴으로 나의 성공을 표현해 보려 애쓰기도 했다. 내 분야에서도 나의 이름을 돋
보이게 하기 위해 다른 명칭들을 추구 했다. 유명 학술지의 편집장, 연구소의 디렉터… 그같은 것으로 영향역의 범위가 큼을
표현하고 또 성공이라는 잘못된 가치를 달콤하게 즐겼던 것이다. 

내가 작아 지면 작아 질 수록 그리스도의 이름이 더 커지고 위대해 지는 그 비밀을 이제는 기쁘게 여기며 살게 된다.
그리스도는 가난과 낮은 지위로 일생을 보내신 후에 거기서도 더 낮은 곳인 골고다로 가셨고, 너무나도 잔인한 곳에서 누워서
돌아가시지 못하고 십자가에서 세워지신채 돌아 가셨다. 전에는 내 입에서 얕은 입술로 부르짖던것을 이제는 내 마음속에서 아멘하며
받아 들이는 진리가 있다. 다음의 말씀이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 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을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고 죽기
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립보서 2: 5-8).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그곳, 비단 그곳이 남들이 높이 평가하는 그런 곳이라도, 자신이 그리스도보다
더 커지지 않으려 하고, 오직 그리스도만 더 높아 지는 삶을 산다면 그것 역시 매일 작아 지는 삶일 것이다. 칼빈대학은 내가 몸
담고 있기에도 과분한 곳이다. 그러나 나를 믿고 이곳으로 보내신 하나님을 오늘도 찬양한다. 그리고 그분만이 높아 지도록 오늘도
더 작아 지고 싶다. 나의 섬김의 목적은 내가 작아 지고 오직 그리스도만 높아지게 하는데 있다. 그리고 섬김의 능력은 내가
아니라 내가 작아 질때 하나님의 큰 능력이 나를 통해 나타나는데 있음을 믿는 믿음 안에 사는 것이다.

내 눈과 마음이 죄로 인해 이그러진 세상의 왜곡된 진리로 더 이상 속지 아니하고 매일 매일 더 작아 짐으로 그리스도가 삶속에서 더 커지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 그래서인지 나는 하루 하루가 기쁘고 감사가 넘친다.

[이영길] 어떤 포기

1997
년의 일이다. 그때 나는 오하이오대학의 교수로 있었다. 쿼터 (Quarter)제도 였기에 모든것이 빨리 돌아가 사실상 강의하기에
몹시 바빴다. 한 쿼터에 4개의 과목을 가르쳤다. 어떤 강의는 50분 강의 였기에 일주일에 세번 들어가야 하는데 그같은 강의가
두개, 또 일주일에 두번 들어가는 강의 두개. 이같은 스케쥴에 의하면 출근하고 부터는 점심식사 및 한.두개의 회의 참석을
제외하고는 강의실에서 살아야 하는 몹시 바쁜 하루 하루의 일정이었다.



조교수 였기에 테뉴어 (Tenure)도 생각해야 했고, 또 열심히 공부해서 내 분야에서 제일 좋다는 대학으로 가고 싶은 욕망도
있었다. 나는 그 당시도 또 지금도 연구활동과 글 쓰는것에 대해서는 각별한 생각과 야심이 있었다. 그같이 바쁨에도 불구하고 매년
3편의 논문을 학술지에 게제 하였으니 얼마나 열심히 공부 했는지 상상하기가 어렵지 않을것이다. 참으로 바빴고, 힘들었다.


그때 나는 귀한 목사님을 만났다. 지금도 나의 멘토이신 이근상 목사님이다. 그분은 매주 두번씩 콜럼버스로 부터 내려와 금요일은
성경공부 가르치시고, 주일에는 콜럼버스예배 마치고 얼른 내려 오셔서 설교하시고 떠나시곤 했다 (지금도 그렇게 하고 계신다).
성경공부가 얼마나 달콤했는지. 그때는 학업도 중요했지만 제자훈련 제대로 받고 싶은 생각이 컷다. 그래서인지 금요일이 기다려
졌고, 또 매번 성경공부를 통해 받는 은혜는 너무 컷다. 주의 말씀이 어찌 그렇게 달콤했던지… 어떤 질문이든 너무 명료하게
가르쳐 주신 이근상 목사님의 성경공부를 몹시 좋아 했다. 


뿐만 아니라 주일 예배 마치고 그냥 가지 않으시고 또 성경공부를 하시자고 하며 조금이라도 더 훈련시키시는 목사님의 인도함을
철저히 따랐다. 나는 그를 그래서 유격훈련장의 조교 같이 무자비하고 지독한 목사님이라고 속으로 부르곤했다. 몸이 힘들어도 죽어라
제자훈련 시키고 콜럼버스로 올라가시는 분이니까…


그렇게 1년반을 바쁘게 보내고 있을때 Indiana University로 부터 교수 포지션이 하나 났으니 혹 지원해 보지
않겠냐는 편지가 날아왔다. 내 이력서를 들여다 보아도 별로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내 분야의 교수들의 이력을 보아도
내것이 우월하게 느껴질 정도로 좋은 학술지에 제법 글을 많이 낸 편이었다. 그래서 한번 응모해 볼까 생각했다. 한 쿼터에
4과목하여 1년에 12과목을 가르치는 대학에서 떠나 1년에 4과목 (매학기 2과목) 가르쳐도 되는 대학으로 가는것 정말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인디애나 대학은 나의 전공분야에서는 제일 좋은 대학으로 여겨 졌기에 객관적으로 학자로서의 나의 성공을
나타내는 절호의 기회이지 않았나 생각해보았다. 뿐만 아니라 그곳 교수가 되는것을 몽상으로 그리며 잠시 환호에 젖기도 했다.
그리고 내심 하나님께 졸라내어 그곳으로 꼭 가야지 마음먹게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마음먹고 기도하면 할 수록 내 마음에는 불편한 마음이 생겼다. 당시 새벽기도를 인도하며 은혜받고 있었는데 나의
기도는 허공을 치고 있었다. 인디애나 대학으로 보내달라고 떼를 썼는데 하나님의 응답은 그냥 그 자리에 남아 있어야 될것이라는
마음의 부담을 주시는것 같았다. 특히 당시 구약과 신약을 개관하는 성경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이제 1년만에 구약이 끝난
상태였고, 신약의 초반부분에 있었다. 기도할 수록 그 성경공부가 아직 마쳐지지 않았음을 하나님께서는 내게 상기시켜 주시는것
같았다. “너 그것을 끝까지 마칠 수 없겠니?”라고 물으시는것 같기도 했다. 너무 슬펐다. 그냥 응모 하라. 그 뒤는 내가
책임지겠다. 너는 그곳으로 반드시 가리라… 뭐 이런 메세지를 주면 눈물 콧물 흘리며 감사해 할텐데… 그리고 그렇게
보내시면 하나님 위해 열심히 봉사하겠다고 서원도 하며 용기를 낼 텐데… 하나님은 내가 오하이오 대학에 남으시기를 원하시는것
같았다.


그같은 불편한 마음이 지속되자 내 마음에는 포기의 마음이 생겼다. 내가 갈길이 아니구나. 나는 이곳 오하이오 대학을 잘 지키고 있어야 되나 보다. 뭐 이렇게 생각하며 포기했다.  


응모 마감이 훨씬 지나 몇달후 매해 열리는 내분야의 학회를 참석했다. 참석해서 바로 들은 이야기가 옛날 오레건대학에서 박사 할때
그곳에서 석사를 했고, 또 조지야대학에서 포닥할때 박사과정학생이었던 어떤 여자아이가 내가 가고싶었던 대학의 교수로 새로
부임했다는 것이다. 그아이는 연구 실적으로 보면 나와 비교도 안될 만치 뒤지는 아이였다. 또 나는 오하이오대학에서 학생들의 강의
평가가 가장 줗은 교수중 하나였기에 강의능력 면에서도 그 아이이에게 뒤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떠올랐다. 또 우리분야에서 좋은
저널의 Associate Editor뿐 아니라 다른 서어비스도 제법 하여 여러가기 면에서 뒤질것이 없던다고 느꼈다. 그래서 그날
호텔방에 들어가 혼자 눈물흘리며 궁상맞게 밤을 새우며 슬퍼했다. 많이 울었던것 같았다. 


이제 인디애나 대학의 교수로 가려면 기존의 교수들이 은퇴하기전에는 자리가 없을것이고, 그들이 은퇴를 하려면 최소한 10년이
걸리지 않을까 생각했다. 당시 뛰어난 다른 대학의 우리 프로그램에서도 교수채용 공고가 없었던 터이라 나는 참으로 암담했다.
차라리 하나님께 묻지 말고 그냥 응모할것을… 하나님께서 찬성하지 않으셔도 그곳 가서도 신앙생활 잘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실까??? 뭐 이런 저런 생각을하며 식사도 제끼고 슬픔으로 그 학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 왔다. 


어짜피 오하이오에 있는 몸이니 그냥 성경공부 열심히 하며, 그곳의 학생들 죽어라 섬기고, 부지런히 전도하며 보내자 마음을 고쳐
먹었다. 그러니 시간이 빨리 갔다. 그러는 가운데 우리분야에서 주는 최고의 연구상도 그 다음해에 받았다. 내가 학술대회를 가지
않았기에 학회의 학회장이 직접 오하이오대학으로 방문하여 상을 전해 주었다. 부족한 사람에게 그같은 상을 주는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강권적인 일하심이 있지 않았나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나의 포기는 적었는데 너무나도 큰 상을 받아서
어쩔줄 몰랐었다. 


이보다 더 큰 기쁨은 이제 구약과 신약을 살펴보는 그 성경공부가 마쳐진 것이다. 성경의 전체 그림이 머리속에 구체적으로
그려지고, 나의 믿음도 더 확고해 지며, 주님의 음성에 더 민감한 삶을 살게 된것이 내게는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바로 그때 인디애나 대학으로 부터 편지가 왔다. 그전 해에 오기로 했던 교수가 오지 않아서 다시 교수를 뽑아야 하는데 혹
응모하지 않겠냐는 내용이었다. 이번에도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여쭈었다. 하나님, 이곳도 좋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면 그리고
가겠습니다. 그러나 원치 아니 하시면 이곳에서 학생들 섬기며 감사히 지내겠습니다… 뭐 이렇게 기도했던것 같다. 하나님의
응답은 분명치 않았다. 그래서 계속 기도해 보았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내 마음에 불편함 보다는 하나님의 숨은 사역이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궁금해 하며 응모해 보는것이 어떨까 하는 마음이 생겨났다. 


물론 응모 하였다. 그리고 인터뷰에 초대 받았다. 인터뷰하면서 내가 꼭 오기를 바라는 사람들 같이 모두 내가 이미 그 대학의
교수인양 대접해 주었다. 그리고 청빙위원회의 위원장이었던 데이브는 “월급 흥정할때 담대하게 가격을 불러도 되니까 흥정에
shy하지 말라!”고 조언도 해주었다. 보통 반응이 이렇게 되면 인터뷰가 잘되었다는 사인이 된다. 그날 저녁 내가 지냈던
Indiana Memorial Union안의 호텔에서 밤을 꼬박 세웠다. 너무 신이나서였다. 


집에 돌아온 이후 약 1주가 지났던것 같았다. 학교에서 Offer가 왔다. 내가 제시한 연봉에 아주 가깝게 응해 주었다. 문제는
하나님의 응답이었다. 학교에서는 1주일 이내로 답을 달라고 하는데 나는 아직 하나님께서 가라는 음성을 듣지 못해 그것을 듣고
계약서에 사인하고 싶었다. 문제는 1주가 다 되는 데도 하나님의 침묵 깨어지지가 않았다. 그냥 사인해서 보내버려하지! 하며 마음
먹었다가도 곧 그럴 수 없다고 여겨서 금식하며 마지막날의 기도를 드렸다. 그날 오후 아내와 아이들이 집을 비운뒤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여쭈었다. 하나님의 침묵이 깨어졌다. 여호수아 1장를 열어서 읽어 보라고 하시는것 같았다. 나는 쭉 읽어 가며
하나님께서 떠나라고 허락하시는 음성을 들었다. 


이후 나는 그곳에서 9년을 교수생활 했다. 그곳에서 2004년도에 테뉴어를 받았다. 학과의 50년 역사에 모든 교수가 강의
(teaching)으로 테뉴어를 받았을뿐 연구로 받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는데, 학과 역사상 처음으로 연구업적으로 테뉴어를
받았다. 모든 커미티로 부터 만장일치의 찬성을 받기가 쉽지 않은데 나는 만장일치로 테뉴어를 얻었다. 그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
였다. 포기로 얻어진 직장이었고, 포기로 얻어진 은혜였다. 


반드시 좋은 학교로 가는것만이 하나님의 축복은 아니라고 지금은 생각한다.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께 순종하는것 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그 마음을 받으시고, 그 마음 때문에 기뻐 하신다. 나는 지금 칼빈대학에 와 있다. 연봉은 몇만불이 더 적다. 강의는
전 인대애나 대학보다 훨씬 더 많이 한다. 그러나 인디애나대학을 포기하라고 했을때 그 순중 자체가 내게는 축복이었다. 주안에서의
포기는 하나님의 전적인 인도하심과 임재하심을 동반하는 귀한 축복이 따른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