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이야기이다. 어느날 사랑하는 어떤 형제가 나의 사무실에 들렸다. 너무 반가웠다. 반가움과 동시에 또 놀라버렸다. 형제의 머리털이
보이지 않아서 였다. 머리털 다 어디에 두고 왔냐고 물었다. 형제는 머리털 없는 머리를 극적거리며 “지난밤 삭발배
버렸어요!”하고 대답했다. 삭발을 해야할 어떤 큰 결심이 있냐고 물었다.
형제가
삭발은 한것은 영어 때문이었다고 한다. 영어가 자기때문에 고생하고, 자기도 영어때문에 고생한다는 이야기다. 맞는 말이다.
미국온지 6개월정도 밖에 안되었는데 유창하게 나오지 않을 것이다. 특히 대학원 수업은 토론위주인데 강의 들어갔다가 기침한번 하지
못하고 알아듣지 못하는 영어를 듣고 나와야 하는 아픔은 너무 크다.
나의 경우도
마찬가지 였다. 미국유학 첫학기 수업에서 강의실이 다음부터는 다른 곳으로 옮긴다는 교수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 같은 방에서
한시간정도 기다리다가 화가 나서 교수에게 달려간적이 있었다. 휴강을 하려면 칠판이나 강의실 문에 휴강사인을 붙이기라도 할것이지
남의 귀한 시간 그렇게 무시할 수 있느냐 (나는 그렇게 말한다고 머리속으로 생각했지만, 실제 나온 말은 어떻게 나왔는지 모른다)
뭐 그렇게 안하무인격으로 화가나서 항의한적도 있었다. 교수가 웃으면서 결석을 하려면 미리 교수에게 통지하는것이 예의 인데 왜
무단결석을 하느냐라고 되물었다. 물론 나의 논리로 나의 질문에 대답했지만, 친절하게 앞으로의 강의가 다른 빌딩 103호에서
있을것이라고 하며 쪽지에 적어주며 나를 돌려 보냈다.
다시 삭발한
형제의 이야기로 되돌아가자. 형제는 영어를 잘할때 까지 삭발은 물론 앞으로 시리얼 (cereal)만 먹고 지낼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시리얼 (cereal)만 먹다가 유학와서 객사할것 같아 염려가 되었다. 그래서 얼른 자리에 앉아서 나와 이야기하며
진정하자고 했다. 그리고 집에 가서 밥하고 김치먹고 힘을 내라고 권유했다. 왜냐면 영어가 잘되려면 몇년이 걸려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주로
유학생들, 특히 대학원생들은 강의실 아니면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낸다. 그외에는 외로우니 한국학생들끼리 모여서 식사도 하고
테니스도 치면 놀기도 한다. 금요일 저녁에는 한인교회에서 하는 성경공부를 가고, 일요일은 한인교회에서 우리말로 예배를 드린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영어를 사용하는 시간은 거의 없다. 강의실 벙어리에다가, 도서관에서 책빌릴때 2-3분 사서와
대화하는것, 식당에서 무엇을 주문할때 몇마디 하는것을 제외하면 영어를 향상시킬 기회가 전혀 없다.
삭발한
형제뿐 아니라 이렇게 영어로 고생하는 유학생들에게 내가 한결같이 하는 이야기가 있다. 양로원이나 장애인들이 있는곳에 가서
자원봉사를 하라고 권유한다. 자신이 영어를 사용할 수 있는곳에 가서 잘 하던지 못하던지 떠들어야 하는 상황에 놓여져야 한다.
양로원에서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죽을 입에 넣어 드리면서 한국이야기도 하고, 전공이야기도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외로운
할아버지 할머니는 너무도 감사히 서툰영어를 들어 준다. 짜증내지도 않는다. 워낙 외로운 분들이 많다보니 자신과 있어주는것 만도
감사해 한다.
양로원에
있는 많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교육 수준이 상당히 높다. 유학생때 만난 어떤 할아버지는 교육학과에서 연구방법론과 통계를 가르친
은퇴교수였다. 책도 몇권 썻다고 한다. 통계로 고생하던 나는 할아버지께 기본 개념을 배워 아주 잘 사용한적이 있다.
나는 미국에
온지 2년 반만에 전공필수과목을 가르친적이 있었다. 돌이켜 보면 그때 내 강의를 들었던 학생들이 얼마나 불쌍했는지 모른다.
열심히 강의도 준비했지만 그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이었다. 그들의 눈동자를 보았을때 도무지 잘 알아들은것 같지 않고 불쌍해서
강의를 들어주는것 같은 생각만 지배했었다. 그러나 다음학기에 또 강의를 해달라고 부탁을 받고는 매우 기뻐한적이 있다. 물론 다른
사람을 찾지 못한탓이 더 컷을 게다. 지금생각해 보면 그나마 헤메면서 영어로 강의할 수 있었던 것은 나의 자원봉사경력이 큰
도움을 주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나는 일주일에 10시간정도 장애인들과 시간을 보냈다. 어떤날은 그들과 2박 3일 캠핑을 떠나기도
했다. 물론 장애인들의 레크리에이션을 담당하는 기관에서 가는 것이기에 교통편의, 음식, 침낭 등 모든것을 그곳에서 준비시켜
주었다. 나는 자원봉사를 통해 미국의 문화도 배웠고, 친구도 많이 사귀었다. 그때 사귄 미국친구 (장애담당 디렉터)의 소개로 그
아이의 부모집에서 약 2년을 살기도 했다.
우리는
우리의 것을 줄때 기쁨과 보람을 찾는다. 영어도 배우고 기쁨과 보람을 찾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삭발보다는 더 기가 막힌 영어
공부 방법이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할아버지, 할머니, 장애인들의 발과 손을 씻으며 사랑을 나누는것은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시는 일이다. 사회에서 그 가족 조차도 찾지 않은 소외된 많은 이들이 있다. 집이 없는 Homeless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자원봉사도 있고, 집없는 사람 집을 지어주는 Habitat of Humanity (http://www.habitat.org/)도 아주 좋은 기관이다.
엉어는 말을
배우기위함이 아니다. 다른 나라의 언어를 배우는 것은 그들을 섬기고 사랑하기 위함이다. 언어는 사랑을 전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어질때 바른 언어를 구사 할 수 있다. 칼빈대학의 동료인 바바라 카빌교수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Foreign
language education prepares students for two related callings: to be a
blessing as strangers in a foreign land, and to be hospitable to
strangers in their own homeland.”
예로 부터
지금까지 시간이라는 주제는 많은이들로 부터 뜨거운 관심을 가져 왔다. 시간과 관련된 주제로 출판된 수없이 많은 책들과 논문들이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시간에 대한 기존의 생각은 산업혁명이후부터 계속적으로 효율성, 생산성 및 속도에 대한 개념과 그
틀을 같이 하고 있어서 많은 이들로 부터 잘못된 생각을 갖게 하는 경우가 많다. 이와 관련된 중요한 질문은 다음과 같다: 더
적은 시간에 더 많은 것을 생산해내기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더 많이,
더 빨리 할 수 있다고 하는것은 한 인간에게는 남다른 능력이고 성공을 가늠해주는 중요한 척도로 작용한다. 누구누구는 박사학위를
3년 만에 했다더라. 그런데 누구 누구는 9년이 지나도 마치지 못하고 있다. 분명 3년내에 마친 박사는 능력이 있는자이며 성공한
자로 얼른 구별 될 수 있다. 반면 9년동안 학위가 마쳐지지 않은 학생은 무능한자로 보여질 수 있다. 사실 게을음으나 자포자기로
미루어지는 공부가 있기도 하다. 주변을 바라 보았을때 늦게 마친자가 빨리 마친자보다 더 탄탄한 지식체계를 쌓아가고 또 자신의
학문분야에 좋은 영향을 미친 경우를 자주 보았다.
개인을 떠나
집단의 차원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교회는 개척한지 2년 밖에 안되었는데 교인수가 벌써 1만명이나 되었다. 그런데 어느 어느
교회는 1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교인수가 약 500여명 밖에 안된다. 2년에 1만명 가진 교회는 분명 성공한 교회이고 많은
교회가 닮아 가고 싶어하는 모델이 될 수 있을것이다. 반면 10년간 500명의 교인을 갖춘 교회는 얼핏 다른 교회가 닮고 싶지
않은 모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교회가 요한계시록 2-3장에 나오는 칭찬 받고 책망 받는 교회가 될지는 모를 일이다.
계시록에서 칭찬 받은 교회는 그 크기와 빠른 성장 때문에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뭏든
시간에대한 관점은 어떤 잣대 (Yard Stick)을 가지고 인생을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인생을 많이 살면 70-80년 밖에
살 수 없는 사람들에게 이같은 속도와 생산량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살아서 숨쉬는 제한된 시간내에 더 많은것 보아야 하고,
해야하고, 경험해야 하고, 소유해야 하며, 또 맛을 보아야 한다. 그래서 이들이 취할 수 있는 것은 자기몰입적인 달음질을
하는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허무를 위한 달음질”이 될 수 있다. “조금 더”는 끝이 없기 때문이다. 더 이루었지만, 나 보다
조금 더 이룬 삶 앞에 편안함을 느끼지 못한다. 충분히 이해가 되어 질 수 있는 삶의 모습이다.
그러나 인생의 주기가 영원이라는 차원에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보다 중요한 문제가 있다. 시간의 속도와 생산량의 문제는 별로 중요한 관심거리가 아니다. 중생한 (born-again) 그리스도인들은 시간의 방향성에
더욱 관심을 갖는다. 나의 삶이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느냐가, 방향과 관계없이 얼마나 빨리 달리느냐 보다 더 중요 하다. 그리고
불필요한것을 얼마나 많이 그리고 빨리 (How much and how fast) 생산할 것인가에 대한 관심보다 “무엇” (What)을 “어떻게” (How) 생산하는냐를
더 중요시 여긴다. 이들은 자신을 위한 확장보다, 천국의 확장이 더 중요하다. 그리고 그 천국확장을 위해 자신의 능력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일한다. 이들은 또한 자신을 평가해줄 절대평가자가 누군지를 확실히 안다. 현세에서 사람들로 부터 받은
찬사 대신, 그리스도의 재림시 주님앞에 섰을때 주님의 평가에 더 관심있다.
나는 지금까지 이야기를 중심으로 다음과 같은 두가지 Formular를 제안해 본다:
1. 삶 = 생산량 (업적) ÷ 속도 (속도가 빠를 수록 삶의 숫자가 많고 그것이 삶을 결정한다)
2. 삶 = 방향 x 믿음 (삶의 올바른 방향과 믿음의 충돌이 삶을 결정한다)
나를 기쁘게
하는 공식은 무엇인가? 살아가면서 중요시 여기는 것들은 과연 무엇인가? 후회없는 삶이란 무엇일까? 이두가지 공식을 놓고 생각해볼
일이다. 첫번째 공식으로 살때 나의 삶과, 가정, 이웃은 어떤 모습일까? 더 많이, 그리고 빨리 돈 벌어 더 많이 빨리 쓰고,
더 빨리 인생을 마칠것인가? 더 빨리 인생을 마치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같은 삶이 사회에 기여하는것은 무엇일까? 더 많은 그리고
빠른 생산을 통해 더 빠른 그리고 많은 소비를 조장하지 않는가?
가야할길이 분명하고 그 길을 믿음으로 걷는자에게는 샬롬의 삶이 있다.
”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 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을 망하리로다” (시편 1편)
따라서 우리는 겸손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아야 자신감 추구 보다 겸손을 더 추구하는 삶을 살게 된다. 겸손에대해서는 이미 앤드류 머레이가 쓴
“겸손”이라는 소책자도 있어 사실상 그 책을 읽는것이 매우 도움이 될것이다. 따라서 이 브로그에서는 그곳에 나온 내용을
인용하거나 반복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그 소책자를 꼭 읽기를 권하고 싶다.
겸손은 먼저 자기중심적 태도가 아니라 사실을 사실대로 보는 정직한 태도이다. 과학하는 사람, 공부하는 사람이 마땅히
취해야할 자세가 될 수 있다. 겸손한자는 공부할때 내가 어떤 주제를 남보다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대신에 겸손한자는 “그 주제의 실체는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갖게 된다.
학회에서 논문을 발표한다던가, 토론에 참여해 보면 겸손한자와 그렇지 않은자가 쉽게 구별된다. 겸손한자는 다루고 있는 어떤
주제를 자기가 발견하고 생각한 만큼 솔직히 다루려 한다. 더 적게 아는것 같은 비굴함을 취하지 않는다. 또 그랬다고 남보다 너
많이 알고 있다는 오만한 자세도 취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으로 부터 날카로운 질문이 들어오게 되면 방어의 자세를 취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질문을 반가워하고, 귀하게 여기며 그것을 깊숙히 생각하려 한다. 아는만큼, 또 생각이 미치는 만큼만
대답한다. 그리고 청중의 생각을 물어 본다. “나는 이렇게 보지만 당신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라고 말이다. 그러나 오만한자
(자신 만만한자)는 방어의 자세를 취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따라서 마땅한 대답이 없으면 당황해 하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한다. 얼버무리다가 더 많은 질문을 받고는 오히려 자신의 짦은 생각이 들통나버리기도 한다.
강의도 마찬가지이다. 학생들이 좋은 질문하게 될때, 그러나 그 마땅한 대답이 없는 겸손한 교수는 오히려 학생들에게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함께 토론하려 한다. 그러나 오만한 교수는 어려운 용어를 사용하면서 얼버무리는 경우도 있다 (나도
그런적이 제법 있었다).
겸손한 학생/학자는 사실에, 현상에, 주제의 이해/파악에 더욱 큰 관심을 둔다. 그리고 다른이들과 함께 그것을 이해하려
애쓰는 태도를 갖는다. 그들은 오히려 정직하다. 학생으로서, 학자로서의 바른태도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자유롭다. 논문발표나
토론이 부담이 되지 않는다. 사실을 사실대로 접근하려는 그의 태도를 주위 동료들은 오히려 존중해주며 더 신뢰해준다. 겸손은
자신뿐 아니라 남을 편안하게 해 준다.
사실을 사실대로 바라보고 인정하는것 이외에 진정한 겸손은 누구의 시선을 인식하는가 하는 문제와 직결된다. 즉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영접한 새벽이슬같은 주의 군사들은 주님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간다. 그는 모든일에서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동기를
취하지 않고 매사 주님을 기쁘게 하려는 목적으로 살아간다. 그는 사람이 보지 않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간다. 그는
행동뿐 아니라 마음의 중심을 날카롭게 바라보시는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아 가며, 그같은 시선으로 인해 안정감을 갖는다. 왜냐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하나님은 그 눈을 내게서 다른데로 돌리시지 않을것을 믿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삶은 겸손한 삶이라고 말하고 이렇게 살아가는자를 겸손한자라고 한다.
그러나 사람을 의식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다른다. 어제와 오늘이 동일하신 하나님이 아닌 끊임 없이 바뀌는 기대와 감정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눈을 의식하는 사람은 혼돈이라는 가마솥에 빠져 버리게 된다. 다른 사람들의 변덕스런 생각과 감정, 상황에 따라
바뀌는 그같은 변화무쌍한 눈을 어찌 기쁘게 해줄 수 있단말인가? 소위 자신감 있는 자들은 이같은 상황속에 남의 비위를 잘 맞출
수 있는 능력이 될 수도 있다. 또 이같은 변화무쌍을 제법 담대하게 대할 수 있는 배짱을 가진 사람들을 놓고 우리는 자신있어
보이는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다.
자신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을 믿는다. 정말 자신은 믿을만한 대상인가? 나는 나를 믿을 수 없을때가 너무 많다. 내
작심 삼일을 연약한 속성을 어떻게 믿는가? 상황이 불리하면 거짓말이라도 하고 싶은 충동도 일어나는 이 마음을 가진 나를 어덯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어떤 물체가 내게 큰 충격을 주면 금방이라도 부서져 버릴것 같은 내 연약한 몸을 신뢰하기
어렵다. 철인이었던 뉴욕 젯트 미식축구 선수였던 데니스 버드가 경기중 다른팀원과 강하게 부딛혀 그의 몸이 공중에 날았고, 땅에
몸이 잘못 닿아서 사지를 사용못하는 척수장애자가 되었다. 수백 파운드의 무게를 들던 그가 몇그램의 무게를 들 수 도 없는
사람으로 변했을때 그는 “나는 이미 죽은 사람”이라고 선언해 버렸던것을 알고 있는가? 인간은 믿음의 대상이 결코 아니다.
겸손한 자는 하나님을 믿는다. 믿으면 믿을 수록 신실하신 하나님이다. 믿으면 믿을 수록 더욱 믿음이 자라는 것이
하나님이다. 사람은 (부모일지라도) 실망을 줄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물론 하나님을 제대로 믿어보지 않았던 사람은
이같은 믿음을 갖기 어렵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체험해본이들은 벼랑끝에 서있을지라도 해를 두려워 하지 않는 굳센 믿음을
갖게 된다. 이같은 믿음을 가진이는 99번의 실패를 해도 절망하지 않고 사실을 사실대로 보고자 하는 겸손한 태도와 하나님께서
인도하실것을 믿는 믿음으로 또 시도할 용기를 갖게 된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자신감으로 살 수 없다. 또한 자신감을 가진 사람들을 부러워 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자신을 신뢰하는
자신감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그 믿음으로 살아가야 된다. 나는 약하지만 하나님은 강하시다는 믿음이 내게 힘을 주는 것이다.
그것으로 담력이 생기는 것이다. 골리앗 앞에선 어린 다윗은 “너는 칼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군대의 하나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삼상 17: 45) 라고 외친것은 철이없어 입으로 내 뱉은 객기가 결코
아니다. 또 12명중 절대 다수였던 10명의 가나안땅 정탐꾼들이 모세에게 보고 하기를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민 13: 33)라고 말할때 갈렙은 무엇이라 하였나? 그는 옷을
찟으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오직여호와를거역하지말라또그 땅백성을두려워하지말라그들은우리밥이라그들의보호자는그들에게서떠났고여호와는우리와함께하시느니라그들을두려워말라” (민 14: 9). 갈렙이 자신을 신뢰하였던가? 그의 고백속에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는 우리가 잊지 말아야할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 이땅을 정복해야할 사명을 가진 우리들은 그 같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겸손한 자세를 더욱 사모해야
한다. “형제님, 자신감 가지려 애쓰지 마시고, 겸손하려 애써 보세요!”라는 답은 형제의 기대에는 잠시 벗어 났는지는 모르지만
(안그랬을것이라 추측한다), 하나님의 기대에는 벗어난것 같지 않다.
얼마전 한 청년과 상담하며 귀한 시간 가졌다. 많은 이야기를 주안에서 나누다가 형제가 조심스레 묻는다. “교수님, 자신감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매사 너무 자신이 없어요.” 자신감이 없는 나에게 자신감을 물어 오다니… 남들이 보면 나는 몹시 자신있는 사람같아 보인다. 많은 사람앞에서 설교도 하고, 학회에서 편안히 질문도 하고 토론도 한다. 어떤 발제자들는 내가 나타나면 공연히 긴장마져 된다고도 한다.
강의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학생들이 볼때는 백과사전같이 모든것을 다 알고 있는 교수같아보인다. 허긴 많은 논문도 쓰고, 잘팔리는 책도 쓰고, 또 많이 읽히는 책의 챕터 (Chapter)도 집필했다. 그러나 강의실 들어가며 마음이 쿵쾅거리는 조그만 긴장감을 그들이 어찌 알랴.
분명 나도 그형제 처럼 자신있는 사람은 결코 아니다. 문제는 많은 청년들이 자신감이 없어서 힘들어 한다. 그래서 형제의 질문은 내게 생소하지가 않았다. 그런데 나의 대답이 형제가 기대하던것은 분명 아니었다. 나의 대답은 그형제에게 있어서 너무 엉뚱하였는지도 모른다. “형제님, 자신감을 가지려 애쓰지 마시고, 겸손하려 애써보세요.!” 나의 상담은 그날도 여지없이 상담을 받고 있던 형제의 기대를 벗어나고 있었다.
미국에 유학와서 느낀 미국인에대한 인상중 하나가 그들의 자신감이었다. 그리고 미국문화는 자신없어 보이면 마치 바보인냥 취급하는 괴상한 문화라고 보았다. 잘 몰라도 아는체 해야 토론점수를 따내고, 박사과정 오랄시험에서도 그나마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미국인들은 또한 자신의 조그만 업적도 자신의 이력서에 그럴싸하게 잘 꾸며서 집어넣은 PR지향적 민족으로 보여졌다. 그러니 겸손이 미덕인 대한민국에서온 유학생인 나에게 그것은 흉내내기가 좀처럼 어려운 행동이었던 것이다.
한국에서 그랬듯이 오른손이 머리로 가서 머리를 극적거리며 띄엄띄엄, 불안하리 만치 조심스레 교수와 이야기를 나눈다. 머리가 가렵지도 않은데 왜 으레 손이 그리로 가는지 모른다. 학생때 나도 그랬지만, 교수가 되어 한국학생이 다른 미국 교수와 그렇게 대화나누는 모습을 많이 목격하며 나는 조용히 미소짓는다. 나의 옛모습을 바라보기때문이기도 하다.
한편 교수가 되어 강의실에서나 학회에서 토론에 참여할때마다 느끼는 감정도 있다. 별 알맹이가 없는 내용을 열심히 유창한 영어로 침을 튀며 이야기 하는 학생들과 동료 교수들을 바라본다. 물론 일부 교수와 학생들은 알찬내용의 것을 이야기 하여 나의속을 시원하게 하고, 또 도전을 줄때도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미국인들은 싱거운 내용의 이야기를 아주 진지하고 자신있게 이야기 한다.
자신감은 흔히 머뭇거림없이 행동할 수 있는 어떤 능력 혹은 에너지라고도 얼른 정의내릴 수 있다. 또한 자신감은 또한 어떤과제를성공적으로이루기위해요구되는여러행위를조직하고실행할수있는개인의능력에대한스스로의믿음이라고 조금 딱딱한 정의를 내려볼 수 도 있다. 어찌했던 자신감은 일련의 성공의 경험이 가져다주는 “해 보니 되더라, 그래서 또 다시 하게 되면 별 문제 없이 할 수 있을것 같다”라는 일종의 믿음 같은것이다.
반면 심리학에서는 “무력감”이라는 개념이 있다. 실패를 반복할 경우, 그리고 아무리 노력해 보았지만 그같은 실패가 자신에게서 기인했다고 믿는 신념에서 무력감이 생겨난다고 한다.
그렇다면 한번의 성공을 위해 99번의 실패를 해야한다는 에디슨의 충고는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감의 다른 얼굴인가? 보통 몇번만 실패해도 자신감을 잃어 버리는데 어떻게 그렇게 많이 실패를 반복할 수 있단 말인가? 사실 무력감을 갖는것이 오히려 정상적인 반응이 아닐까?
실패를 반복하고도 지속적으로 같은일을 시도할 수 있는 힘은 자신감에 있지 않고 겸손함에 있다고 본다. [강의준비가 있어서 우선 여기서 멈추고 나중에 계속 설명해 보도록 하겠다].
다음 글은 KOSTA/USA 2009의 tmKOSTA에서 발제되었던 경제학 분야 세미나 리포트입니다.
Capitalism in Christian Perspective (2): Practice
현대의경제학과자본주의가, 하나님의성품을닮아창조된인간의capability과함께unlimited
resources의근원이되시는하나님에게서분리된일그러진인간의실존을동시에담아내고있다는측면에서우리는현경제체제에대한긍정적인가능성을타진해보았다. 그러나, 이러한가능성이원칙적으로역사적으로인정된다는점이, 오늘의삶가운데서이러한가능성을사실로구현해내는것의용이성을조금도보장해주지않는다. 따라서, 우리가짊어진‘신앙과학문/직장의통합’과제는그만큼힘겹고또비현실적으로보이기까지하다.
‘나눔’이라는단어만으로도우리는숨이멎을것같은부담감에사로잡힌다. 그러나예수님의기준은‘나눔’의차원보다훨씬높다. 나눔은그단어자체로, 전체가아니라일부를의미한다. 즉, 일부만을남에게내어놓음을의미하는것이다. 그러나, 과부의두렙돈은그녀의생활비전부였다. 부자관원에대한예수님의요구도‘전재산을팔아가난한사람에게나누어주고’였다. 따라서, ‘나눔’은우리가실천하기에너무무거운짐이아니라, 오히려기준을낮추어우리가좀더쉽게하나님의뜻에따라살수있도록숨통을틔어준것이라고이해하는것이오히려진실에더근접하다.
막스베버가 1904년출간한 [프로테스탄티즘윤리와자본주의정신]에의하면, 산업혁명이후급속한경제성장으로이루어진자본주의의발달은프로테스탄티즘윤리, 즉청교도정신에의해가능해졌다고한다. 산업화와함께지주와계급중심의사회구조가자본가와임금노동자중심으로개편되는시기에활동했던루터와칼빈과같은종교개혁자들은, 평신도의직업, 세상에서의노동활동을하나님께부여받은 ‘소명’이라고생각하였다. 루터는 ‘직업노동은이웃사랑의외적표현’이며 ‘노동의무를다하는것은신의뜻’이라고하여, 평신도의모든활동에신적의미를부여하는한편, 소명으로서의‘노동’의결과로주어지는돈, 혹은부의축적에도종교적합리성을부여함으로산업화시대에등장한새로운경제주체들에게종교적정신적토대를제공해주었다. 직업이소명이될때요구되는윤리는 ‘근면’이었고, 그결과이루어주는부의축적은 ‘신의선물’이었으며, 이러한부가신으로부터주어진것이었으므로, 맡은자, 즉 ‘청지기’로서주어진부에대하여가질태도는 ‘절제’였다. 일하지않고얻은부를탐욕과쾌락의도구로일삼던중세영주와귀족계급에대한경고이기도했던것이다. 요한웨슬리는 “Earn all you
can, save all you can, and give all you can”라고하며, 근면한노동과절제를통한부의축적과그부를나눔으로풀어낼것을가르치기도하였다.
이와같이, 자본주의의태동과발전은, 노동과노동의댓가로서의부에신성한가치를부여했던기독교정신과깊은연관을갖고있다. 막스베버의관점에서, ‘자본주의정신’이란 ‘직업’ 즉 ‘체계적이고합리적으로정당한이윤을추구하려는정신적태도’였다. 탐욕과무한한이윤추구와같은비합리적인목적을위해부를축적하거나낭비하지않고철저히합리적인목적을위해사용되는돈이라야바로이 ‘자본주의정신’에해당한다고주장했다.
따라서, 자본주의 (혹은그외어떤형태의) 경제구조를성경적가치관에따라바로잡는일이학문적제도적접근으로구체화되어야하는것이학문/직장의영역에서우리가감당해야할역할임에는분명하지만, 보다궁극적으로하나님나라의확장, 그리고예수그리스도의샬롬이라는원칙을각사람의마음에바로세우는일이반드시함께이루어져야한다. 다시한번, 하나님나라의확장의중요성과의미를우리의소명으로마음에새기게되는이유다.
최근에 출간된 책 한권을 소개한다. CCM 아티스트인 마이클 카드의 ‘애가’(A Sacred Sorrow)이다. 번역은 ‘많은물소리’ 편집자인 황병구씨이다. 다음은 그 책의 일부이다.
“주일 아침 나는 회중 가운데 서 있다. 방금 시작된 예배는 곧 ‘무르익는다.’ 내 곁에선 내가 알고 또 신뢰하는 사람들이 경배의 경험 속으로 ‘들어간다.’ 몇몇은 손을 든다. 모든 회중에게 요구되는 것은 아니기에 모두가 그러지는 않는다. 또 어떤 이들은 눈을 감는다. 나를 둘러싼 이 사람들은 모두 내 친구이자 예수님의 신실한 제자이다. 이들은 내가 도달해 보지 못했고 도달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깊은 곳까지 달 수 있는 이들이다. 20분쯤 지나면 경배의 시간은 마무리된다. 내가 느낀 것은 너무 오래 서 있어서 생긴 다리 통증뿐이다. 우리는 모두 앉아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인 설교를 들을 준비를 한다.
지금 이런 사실을 독자들 앞에 시인하는 것이 내겐 참 부끄러운 일이다. 하나님 앞에서도 주일 아침마다 역시 부끄럽기 짝이 없다. 비로소 자리에 앉을 때면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아무에게도, 특히 하나님께 들키지 않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반갑게도 이제야 끝났군!’ 여전히 다리에 통증을 느끼며 좌석에 그대로 주저앉는다. 사막에서 혼자 한참을 헤맨 느낌이다. 군중 한가운데서만 경험할 수 있는 특별한 종류의 예민한 외로움이다. 그 사막은 역설적으로 파릇파릇하다. 다른 이들의 예배로 인해 새순이 돋아났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동일하게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치밀한 교제를 함께 나누었던 이들 한가운데서 나는 혼자 격리된 느낌이다. 그들은 내 주위에서 기뻐하며 생수를 마시지만 나는 암당하고 좌절스러운 갈증 속에 남겨진다.”
이 글은 경배와 찬양에 대한 마이클 카드의 예배 경험담이다. 동감이 되기도 하지만, 게 중에는 “마이클 카드 같은 훌륭한 CCM 찬양사역자에게 어떻게 경배와 찬양 시간이 지루할 수가 있지?” 이해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이다. 종종 백발이 성성한 어른들이 오히려 젊은이들 보다 더 신나게 찬양한다. 그런가 하면 20대 초반의 젊은이가 모던 워십보다 전통 예배의 장엄한 파이프 오르간이나 조용한 찬송가를 더 선호하는 경우도 있다.
마이클 카드는 나중에 자신의 실수를 고백했다.
“나는 속으로 그들이 예수님과의 친밀함을 꾸며내고 있다고 정죄했다. 내가 도달할 수 없다는 단순한 이유만으로 그런 친밀함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지 못했다. 나이를 먹으면서 깨달은 것은 그런 식으로 판단하는 자리에 앉아 있던 것이 죄라는 것은 물론이고, 내 판단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었다. 정말로 많은 이들이 깊고 진정한 예배에 들어가고 있었다.”
인간은 진실, 가치와 같은 본질의 문제에는 의외로 관대하면서 외형, 스타일과 같은 비본질의 문제에 목숨을 거는 경향이 있다. 예배도 마찬가지이다. 예배의 진정성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틀린가의 이슈가 아니다. 형식과 스타일의 문제도 아니다. 흑백 논리로 따질 수 없는 본질의 문제이다. 스타일과 형식, 음악과 문화를 뛰어넘어 결코 타협할 수 없는 예배의 본질을 붙잡아야 한다. 예배의 본질이 무엇인가? 모든 것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불에 타 없어져도 끝까지 남는 것, 아무런 예배도구가 없고, 아무런 형식, 심지어는 음악이 없어도 붙잡아야 할 마지막 한 가지 본질, 그것은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장엄하고 거룩한 형식의 전통예배라 할지라도, 첨단 멀티미디어와 완벽한 음향, 미디어 시스템을 갖춘 현대예배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없었다면 헛것이다. 예배 후 그날 깨달은 말씀대로 살고 싶은 아무런 열망이 없다면 죽은 예배다. 기독교 최고 가치인 예수의 십자가 사랑에 감격한지 10분도 안 되서 식당에서 먼저 좋은 자리 잡으려고 다툰다면 영적 분열 증세이다. 하나님보다 찬양팀의 화장, 옷맵시, 설교자의 억양, 머리 스타일, 성가대의 곡 스타일, 재미있는 광고만 더 머리에 남는다면 장례의식에 불과하다. 그날 회개한 죄 문제에 대해 결연한 의지로 돌아서겠다는 열망이 솟아나지 않는다면 가짜 예배이다. 예배 때 열정적으로 부른 찬양 가사와 6일간의 생활이 전혀 다르다면 하나님이 역겨워하시는 예배이다. 이런 예배는 결단코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가 아니다.
다음은 2009 KOSTA/USA Chicago conference에서 이훈 목사의 ‘샬롬을 위한 헌신’이란 세미나를 eKOSTA 편집부에서 녹취하여 정리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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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을 한번 생각해보고
싶은데요. 저희 가정에도 아이들이 다섯 있지만, 아이들이
많은 가정에 보면 아이들 중에는 좀 똘똘하고 뭐든지
잘하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아이는 좀 상대적으로
좀 못하고 약하고 부족한 아이도 있잖아요. 그리고
심지어 어떤 가정에는 정말 특별한 장애와 아픔을 가진
아이들도 있어요. 그런데, 만약에 어떤 가정에서 아이들
중에 정말 똘똘하고 잘하고 정말 가정의 자랑거리가
될 만한 아이를 언제나 가정의 무대에 올려놓고 그
아이를 다 바라보게 하면 그게 정말 좋은 가정일까요?
정말 좋은 부모일까요? 정말 좋은 가정, 부모는 어떻게
할까요? 아이들 가운데 가장 아픔과 연약한 아이가
중심에 있게 될 거예요. 그래서, 그 아이를 바라보며
모두가 자신들을 돌아보게 하고 도울 수 있도록 하고
그럴 때 정말 그 가정이 아름다운 가정이 되고 정말
진정한 샬롬이 있는 가정이 되는거죠. 제가 고등학교
때 늘 아는 이웃집이 하나 있었는데, 담벼락 너머니까.
근데 어느 날 이웃집 담을 넘어보니까 거기 갑자기
제 또래 어떤 여자 아이가 바닥을 기고 있더라구요.
중증 장애인이었어요. 그런데, 저를 마주치는 순간
엄마가 이 아이를 막 집 안으로 밀어넣었어요. 그 아이는
사실은 그 나이가 되도록 단 한번도 바깥에 나와보지
못한 그 가정의 secret인거죠. 그 아이를 그렇게 그 부모가
그 안에다 둔 이유가 뭘까요? 어쩌면 그 아이를 사랑하는데
아이가 바깥에 나가면 그 아이가 혹시 조롱과 모욕
당할까봐, 그리고 자신들도 사람들의 눈총들을 받을까봐,
그것이 싫고 그것을 가정의 수치로 여겼기 때문에 숨겨두고
키웠던 거죠. 그런데, 우리 잘 알지 않습니까? 레나
마리아나 그리고 우리 한국에도 이지선 자매같은 사람들.
어쩌면 수치로만 생각하고 숨겨야 될 그런 아픔과 약함인데,
오히려 그것을 당당하게 빛 가운데, 많은 사람들 가운데
오히려 드러냄으로 오히려 정상인들과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을 부끄럽게 한다는 것. 우리 송명희 시인의
어떤 이야기도 알잖아요. 나 가진 재물 없지만, 나 가진
지식 없지만, 나 가진 것 없지만,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이
갖지 않은 것을 갖게 하셨다는 것. 사실 가장 약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더 보화와 같은 것을 주셨고 또 주시는
분이신데, 우리가 성공 스토리들을 무대와 사람들의
중심에 올린다는 것은 사실은 우리가 다시 한번 돌아봐야
될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 이 땅에 샬롬을 이루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성공한 사람들이 자꾸 중심이 되도록
해야되는 게 아니라, 혹 우리 가운데 더 소외된 사람,
우리 가운데 돌봄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가운데로
오도록 도울 수 있어야 되겠죠. 그 때 우리가 함께 서로를
더 도울 수 있는 샬롬의 관계들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성공하는 삶하고
열매맺는 삶은 다르죠. 성공하는 삶과 열매맺는 삶의
차이가 뭘까요? 이렇게 표현하고 싶어요. 성공하는
삶은 마치 꽃이 활짝 예쁘게 피어나는 것과 같다면
열매맺는 삶은 정말 열매가 맺는 것인데, 우리가 잘
알듯이 열매는 언제 맺히죠? 꽃이 화려하게 피어있을
때 맺히나요? 그것이 다 져야지만 맺히는 게 열매잖아요.
그 꽃잎이, 아름답던 꽃잎들이 낡고 시들어 다 땅에
떨어져 죽을 때 그 다음에 생겨나는 게 열매라는 것.
그렇게 본다면 우리가 성공하고 싶어하는 우리의 욕망과
야심이 십자가에 못박히고 땅에 떨어질 수 있을 때,
그 때 정말 우리가 주님의 열매,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아시죠? 어떤
거죠?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예, 그 아홉 가지 열매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그 열매 자기 좋으라고 있는 거 하나도 없어요. 사랑이
많은 사람이 있으면 옆사람들이 그 사랑 받는 거 아녜요?
기쁨이 가득한 사람이 있으면 그 기쁨이 옆사람들을
격려해주는 거고, 평화가 가득한 사람이 있으면 그
주변 사람들이 거기서 쉼을 얻는 거죠. 오래 참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 사람의 인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힘이 되는
거고, 자비로운 사람 때문에 그 주변 사람들이 자비를
얻고, 선한 양선의 마음을 가진 사람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그 사람의 선한 손길의 도움을 얻는 것이구요. 근데
열매도 실제로 그렇잖아요. 우리가 열매는 나무에 아름답게
탐스럽게 달려있거나 그릇에 탐스럽게 담겨 있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들짐승들의 먹이가 되고 사람들의
음식이 되는 거죠. 근데, 그렇게 될려면 이 아름답고
탐스러운 모양 자체가 부서지고 사라지는 것인데, 정말
열매맺는 그리스도인들이 된다는 것은 내가 보여지고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다른 사람들의 음식이 되고
먹이가 되는 거겠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추구하는 삶이 성공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정말
열매맺는 그리스도인이 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때 우리가 샬롬이라는 것을 이제 가져다 줄 수 있을
거예요. 우리가 소중한 가족 관계에서도 그렇게 서로의
음식이 되어주고 싶은 마음으로 내가 가정에서 꽃이
되고 싶기보다는 열매가 되어서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고 싶을 때, 그 때 그 가정이 얼마나 샬롬의 가정이
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도 믿음의
경주가 있죠. 우리도 달려가야 될 믿음의 경주가
있는데요, 우리 믿음의 경주가 경쟁 사회의 경주랑
정말 다른데, 경쟁 사회의 경주는 라이벌과의 경쟁이잖아요.
경주. 옆에 뛰는 사람이 있기에 뛰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의 경주는
라이벌이 있어서 뛰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 부르심이
있기에 그 소명 때문에 달려가야 될 경주가 있는 것이지,
옆사람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 그리고 또 하나
우리가 달려가야 될 경주가 있다면 이 땅에 필요가
있기 때문에 달려가는 것이지, 누군가 옆에서 뛰기
때문에 뛰는 거 아니라는 것. 그리고 우리 앞서 걸어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가 있기에 우리가 그 뒤를 따를
경주가 남은 것이지, 옆에 있는 라이벌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 우리가 competition이 아니라 compassion으로 살아가도록
부름받았음을 늘 놓치지 않았으면 합니다. 북미의 native
indian에서 내려오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는데요.
어느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우리 안에는
두 마리의 늑대가 있단다. 근데 한 마리의 wolf는 아주
경쟁심, 이기심, 탐욕, 분노, 상처, 그래서 공격하고
먹으려는 그러한 wolf가 한 마리가 있고 다른 한 마리의
wolf는 이제 긍휼, 사랑, 자비, 온유, 나누고 싶어하는
그런 wolf가 있단다. 근데 이 두 마리의 wolf가 우리 속에서
싸우고 있다고 했어요. 한 마리 wolf는 competition의 wolf고
한 마리는compassion의 wolf고. 손주가 물었어요. 할아버지,
어느 쪽 wolf가 이겨요? 뭐라고 답했을까요? 니가 먹이를
주는 쪽이 이긴다. 어느 쪽에 먹이를 주느냐에 달려있다는
거죠. 우리가 이 치열한 경쟁 사회의 흐름과 논리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거기에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와
마음을 쏟고 살아간다면 이 competition의 wolf는 점점 더
살이 찔 것입니다. 더 강해지겠죠. 우리 안에 있는compassion의
wolf는 맥을 못출거예요. 우리에게도 그게 있긴 있지만,
사용할 수 있는 힘이 전혀 없어요. 그러나, 여러분들이
또 많은 이 시대의 사람들과 다르게 이렇게 코스타
집회를 선택하고 오는 것처럼 사실 이런 시간들은 우리에게
색다른 힘을 주는 거잖아요. 바로 이competition의 wolf에게
먹이를 제공하는 게 아니라compassion의 wolf에 먹이를
제공하는 선택을 하는 거죠. 이런 선택을 하느냐 안
하느냐가 얼마나 다른지는 우리가 알잖아요.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가 어느 쪽에 먹이를 줘야 하느냐 하는
것은 자명한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치열한 경쟁 사회
한복판을 살아가지만, 깨어서 이 쪽의 wolf가 먹이를
먹기보다는 정말 compassion의 wolf가 계속 먹이를 먹을
수 있도록, 그래서 우리가 이 시대의 흐름으로부터는
좀더 자유로와질 수 있고 그리고 오히려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 때, 우리는
정말 샬롬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 땅에 가져올
수 있지 않을까요? 근데 그 예수 그리스도의 길은 우리가
십자가를 통해서도 분명히 알고 있지만, 정말power를
사용하는 길이 아니라 power를 다 내려놓는 길이었잖아요?
power of powerlessness라는 것을 좀 생각해보고 싶은데요.
우리도 경쟁 사회 속을 살아가다보니 그리고 이 경쟁
사회에서 결국 세상을 움직이고 변화시킨 사람들이
다 power를 가진 사람들이다보니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자연스럽게 생겨나게 된 논리가 ‘우리가 힘이 있어야된다.
우리가 주류 사회에 들어가야 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위에 있어야 된다. 그래야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가
있다. 우리가 더 전문인이 되어야 된다. 우리가 전문성을
가져야 세상을 우리가 더 변화시킬 수 있다’ 그런
논리가 아주 자연스럽게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맞죠?
여러분들도 동의하세요? 그런 이야기들은 아주 자연스러워졌어요.
당연히. 그런 이야기의 함정은 ‘우리가 힘이 없으면,
우리가 결국 위에 서지 못하면, 우리가 가진 것이 없다면,
우리가 주류가 되지 못하면, 우리는 세상을 바꿀 수
없어. 우리는 별로 영향을 미칠 수가 없다’라는 그런
동일한 논리인거죠.
그런데, 예수님을
우리 한번 다시 생각해봅니다. 예수님은
사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세를
가진 분이셨지만, 그 권세를 이 땅을
변화시키는데 사용하신 분이 아니라
오히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으로,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으로 그렇게 무력한 모습으로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줌으로 정말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분이잖아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높아지라고
하신 게 아니라 낮아지라고 하셨고, 올라가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내려가라고 하신 거죠. 대접받으라 하신
것이 아니라 대접하라고 하신 것이구요. 진정 우리가
오히려 power를 가지려고 하기보다 내려놓을 때 진정한
power가 나타난다는 것. 로마서 15장 1절과 2절에 보면
그런 바울의 고백이 있어요. ‘우리 강한 자가 연약한
자들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다 내게 미쳤다 함과
같으니라’. 그 표현을 가만히 보면은요. 우리 강한
사람에게 주어진 소명이 연약한 자들의 약점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고 그리고 비방과 모욕은 내가 받고 그런 것인데요.
우리가 세상에서 강한 사람들을 한번 보고 싶습니다.
세상에서 강한 사람들, 세상에서 소위 물질과 안정된
지위와 많은 것들을 갖고 있어서 강해보이는 사람들은
어떤 특징들을 갖고 있는가? 우선 강한 사람들, 모든
것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자기의 짐을 다른
사람들에게 넘겨줘요.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자기 수고를
대신하게 하는 거죠. 그리고 둘째, 자기들의 인생의
어떤 재미와 편안함을 정말 끊임없이 추구해가요. 그리고
또 하나 어려운 위기의 시기를 잘 넘어갈 수 있는 안전
장치들을 다 갖고 있어요. 보험도 들어놨지만 때로는
심지어 대신 감옥에 갈 사람도 갖고 있어요. 그 정도로
세상에서 강한 사람들은 자신의 짐을 다른 사람의 어깨에
올려놓고 그리고 자기를 기쁘게 하고 위기에서 안전한
거죠. 그런데, 다른 관점에서 한번 보고 싶은데요. 우리가
함께 아주 먼 길을 무거운 짐을 지고 함께 행군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보죠. 함께 먼 산 길을 같이 걸어갑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생기냐 하면, 도저히 이제는
지쳐서 주저앉게 되는 사람들이 생기죠. 더 이상 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됩니다. 그때 강한 사람들이
있어요. 어떤 사람들이냐 하면 그 사람들의 짐을 자기
어깨에 올려놓는 거죠. 그래서 자기 짐이 더 무거워진
사람들이 있어요. 그리고, 그 사람들은 그런 선택을
할 때, 자기를 기쁘게 한 게 아니라 그 약해진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거죠. 그리고, 그 사람들은 이제 다리가
풀려서 걷지 못하게 된 사람들을 위해서 앞서서 가서
위험 요소들을 다 제거합니다. 먼저 위급한 상황들을
다 처리해주는 거죠. 잘 걸을 수 있도록. 그러고보면
진정으로 강한 사람들은 약한 사람들의 짐을 자기 어깨에
올려놓는 사람이고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고
오히려 위급한 상황의 앞에 있는 사람들이예요. 그러고보면
세상에서 강한 사람들은 사실 가장 약한 사람들인거죠.
정말로 강함은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짐이 내 어깨에
올라오고 다른 사람들을 위하고 다른 사람들을 대신해서
위험을 맞이하는 것이 진정한 강함이라는 것. 예수
그리스도가 그렇게 사셨잖아요.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짐을 당신의 어깨 위에 올려 놓으셨고 단 한번도 자신을
기쁘게 하신 게 아니라 다른 우리 모두를 기쁘게 하려고
사셨고 그리고, 우리를 대신하여 모욕과 비방, 십자가의
고통을 다 받으셨으니깐요. 그래서, 이 땅에 샬롬이
오게 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의 십자가는 가장 powerlessness죠.
어느 누구 앞에서도 가장 힘없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진정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있었던
것이고, 이 세상을 다시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통치의
뜻이 있었던 거죠. 그래서, 바로 이 땅에 샬롬을 가져오는
길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위에 올라서는 길이 사실은
아니라는 것. 우리가 정말 내려갈 수 있을 때, 진정
샬롬이 오는 것이고, 우리가 가질 때가 아니라, 우리가
내려놓을 때, 우리가 오히려 가진 것을 나눌 수 있을
때, 그때 진정 샬롬이 찾아온다는 것을 좀 생각해봅니다.
Power에 대한, 둘째날에
유진소 목사님이 잠깐 언급한 말에도 나와있지만, power에
대한 헬라어 두 가지가 있는데, 두나미스와 엑소시아라는
두 단어에요. 두나미스는 거기서 다이너마이트가 나온
것이고, 엑소시아는 엑소시스트 이제 그런 것처럼 사실은
다른 의미가 나오는 것인데요. 똑같은 power인데, 하나의
power는 힘, 강력, 타율적으로 다른 사람을 움직이기
위해서 복종케 하는, 그런 보이는 어떤 power같은 것이라면,
엑소시아는 보다 원리, 가치, 그런 것입니다.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하고 따르게 하는 것이죠. 근데, 하나님은
두 가지 power를 다 가지신 분이죠. 예수 그리스도도
두 가지 power를 다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두나미스를 사용하실 때가 있어요.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power를 사용하실 때가 있는데, 그땐 어떤 때만
사용하시느냐 하면 예를 들어서 바로의 철권 통치에
대하여 최종적인 심판을 내리실 때 사용하시는 거죠.
그리고, 때로는 마귀에 사로잡혀서 거기에 묶여있는
사람을 해방하실 때, 그 마귀의 권세를 쫓아내실 때
사용하시는 거죠.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따를 사람들을 부르시고 제자들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고 이 땅을 변화시킬 제자들을 보내실 때,
그들을 이제 불러서 제자가 되라고 하실 때, 절대로
두나미스를 사용하시지 않았다는 것. 예수님은 엑소시아를
통해서 그들을 예수님께로 초청하신 것이죠. 결코 타율적으로
따라오지 않도록. 자발적으로만 오게 하셨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땅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꿈과 의욕이 있다면, 우리도 어떤 보이는 power를 가지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정말 섬김이 오히려 더
power라는 것. 내려갈 수 있는 것이 더 power고 포기하는
것이 더 power라는 것. 그것을 통해서 오히려 세상을
더 새로운 길로 안내하고 이제 초청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한편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제 그 세상
한복판을 살아가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인데요. 그런
점에서 우리는 순례자라고 표현하잖아요.
그런데, 이 순례자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인지 한번
표를 통해서 잠깐 잘 정리해보고 싶은데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면
하나는 잘 정착해서 살아가는 정착민들, 그리고 온갖
만족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관광객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순례자들이 있는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걸맞는 단어는 어떤 걸까요? 정착민입니까, 관광객입니까,
순례자입니까? 우리 순례자라고 고백하죠. 히브리서
11장에도 있는 표현처럼 그 믿음의 사람들에 대한 어떤
표현이 그거잖아요.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되,
땅에서는 그 약속을 따라 받지 못하였지만, 스스로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다구요. 그들이
또한 본향을 사모하고 있었는데, 돌아온 본향을 사모했다면
되돌아갈 기회가 있었겠지만 그들이 더 나은 본향을
사모했는데, 이제 하늘에 있는 본향을 사모했다구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하늘에 한 성을 예비하셨다는 그런 말씀이 있잖아요.
그런데, 그 고백을 통해서도 우리가 알듯이, 우리는
순례자라는 찬양도 부르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순례자는
이제 여행을 하는 사람들인데, 우리가 여행을 할 때는
떠남이 있는거죠. 그리고, 여행은 뭔가 목표가 있기에
추구하면서 여행합니다. 그리고, 여행의 과정에서 받아들여야
되는 게 있죠. 그리고, 여행이 쉽지만은 않기 때문에
싸움이 있습니다. 근데, 이 네 가지 영역에서 정착민과
관광객과 순례자가 어떻게 다른지 한번 완성해보고
싶은데요. 정착민은 떠나는 사람들인가요? 전혀 아니죠.
떠남이 없죠. 그리고, 떠남, 버림, 그리고 내려놓음이
사실은 없는 사람들이,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이 정착민이죠.
관광객은 떠남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떠나죠. 그러나
관광객들은 얼마만큼이나 떠나는 걸까요? 관광객들은
자기 문화를 다 내려놓고 떠나나요? 사실 그렇지 않죠.
우리가 아무리 관광 여행이 좋아도 나 고추장, 김치
없으면 안돼 하면서 챙겨가잖아요. 관광 여행에서는
떠나긴 떠나지만 사실은 부분적으로면 떠나는 거죠.
적당히 떠납니다. 하지만, 순례자의 떠남은 어떤 걸까요?
순례자는 가능한 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나는 거죠.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믿음의 여행을 할 때도 사실은 모든 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그런 떠남의 부름이 있었던 것. 또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름받았을 때, 그들이 그물과 배와
아버지를 다 버려두고 떠나게 됬던 것처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의 부름, 순례자로의 부름은 우리에게
익숙하고 우리에게 필요하고 소중한 안전 장치들조차도
실은 내려놓을 수 있는 믿음의 용기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추구함, 정착민은 뭘 추구할까요?
정착민들이 추구하는 것은 우선은 안정이구요. 그리고,
또 하나 붙인다면 번영, 형통을 추구하는, 안정과 번영을
추구하죠 당연히. 그럼 관광객들을 뭘 추구할까요?
관광객들을 즐거움, 만족을 추구한다고 표현하고 싶은데요.
세 가지 만족, 요한일서에 있는 표현처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 실제로 우리 관광
상품들을 보면 알 수가 있잖아요. 관광 상품에서 중요하거든요.
사실 몸이 즐거워야죠. 먹거리, 잠자리가 나쁘면 사실
관광객 모으기 어렵잖아요. 그리고, 몸만 즐거우면
뭐합니까? 볼 거리가 정말 중요하죠. 볼 거 없으면 왜
가겠어요? 다 눈요기 때문에 가는건데. 또 하나 이생의
자랑두요. 우리 관광 여행가면 제일 많이 하게 되는게
뭐냐하면 사진을 찍어오는 것인데요. 그 사진 많이
찍어서 이제 가져오죠. 근데 그 사진에서 결코 빠지지
않는 사람이 하나 있어요. 누구예요? 나. 관광지의 유적,
사람, 문화, 그것은 다 나를 위한 들러리고 내가 거기
있었다는 게 중요하죠. 그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자랑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이 관광객은 이런 것들을
만족시키는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 하지만, 순례자는
뭘 추구하는 사람일까요? 그 Kingdom seeker 잖아요.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나라,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받아들이는 것도 다르죠. 정착민은 뭘 받아들일까요?
다르게 얘기하면, 정착민들이 잘 못 받아들이는게 뭐죠?
외부인, 또 변화. 정착민들은 변화 싫어하잖아요. 또
바깥에서 오는 거 싫어하고. 그 얘기가 뭐냐하면, 익숙한
것만 받아들이는 거죠. 익숙한 것만. 관광객은 뭘 받아들일까요?
새로운 거 받아들여요, 받아들이지 않아요? 받아들이죠.
그런데, 단서가 있어요. 마음에 드는 것만. 새로운 거라고,
아무리 새로운 음식이라도 마음에 안 들면 왜 받아들이겠습니까?
마음에 드는 것만 받아들이죠. 순례자는 어떨까요?
순례자는 이 믿음의 여정, 순례 여정에 있는 모든 과정들을
받아들이는 거죠. 싸움이 있는데, 정착민은 주로 누구랑
싸울까요? 정착민의 싸움은 그 주변 정착민과의 싸움인데요.
왜냐하면, 그 마치 나라와 민족도, 국경이 붙은 나라와
민족치고 사이좋은 나라가 없어요. 이유는 이쪽도 안정과
번영을 원하고 이쪽도 안정과 번영을 원하니 경계선
분쟁이 생기는 거잖아요. 그러니 사람도 살지 않는
독도까지 가지고도 사실은 으르렁거릴 수 있는 게 관계잖아요.
근데, 그런 거처럼 우리가 개인적으로도 정착민으로
살아갈 때는 언제나 주변 정착민들과 어떤 영토 분쟁처럼
경계선 자리싸움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죠. 그러니까
주변 정착민과 싸웁니다. 그럼 관광객은 누구랑 싸울까요?
관광객은 주로 가이드랑 싸웁니다. 왜냐하면, 관광
여행을 나선 이유는 좋은 관광 상품을 소개받았기 때문이고,
거기에 대한 책임은 가이드에게 있는 거죠. 불만족에
대해서는. 우리가 알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길을
나서서 모세를 뒤따라갈 때 그들이 기대했던 것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어요. 좋은 관광 상품으로 소개된
거죠. 그러나, 아무리 가도 가도 먹을 것, 마실 것, 잠자리,
불편한 것 밖에 없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나타나지도
않고. 누구 책임입니까? 모세 책임이죠. 사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이 출애굽기 19장에서 들은 것처럼 ‘이제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명령을 지키면 너희가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그리고 제사장 나라가 될
것이며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다’ 이제 그런 비전을
주신 것이지만,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들려진 거는
그게 아니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어요. 그래서,
그 백성이 광야길을 관광객의 마음으로 걸었으니 계속
원망하고 불평하고 그랬던 거죠. 순례자는 누구랑 싸울까요?
순례자는 자기 자신과 싸우는 사람이죠. 우리 교회도
한번 생각해봅니다. 정착의 교회, 정착의 교회는 사실은
어두움을 갖기 쉬운 거죠. 때로 어떤 교회들은 전통과
옛날 것을 절대로 벗어버리지 못하는 교회들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원래 마음들이 그랬던 건 아니었어요, 보면.
우리 예수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나 바리새파나
율법학자들, 아마 그 사람들도 젊었을 때 처음 거기에
입문할 때는 굉장히 순수했을 거예요. 다른 유대인
어떤 사람보다 더 말씀을 사모하고 또 주님의 율법을
지키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졌기에 그리로
들어갔겠죠. 하지만, 거기에 오래 정착하다보니 완전히
정착민이 되어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도 없고 결국은
이제 정말 하나님의 뜻과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교회도 정착의 교회가 될 때, 그 세상
안에서 잘 정착하려고 할 때, 이러한 어둠을 갖게 될
수 있다는 것. 교회가 생각보다 정착의 교회는 언제나
안정과 번영을 추구하기 쉽고, 그리고 익숙한 것만
받아들이려하고, 그러다보면 그 안에서 참 갈등과 다툼을
많이 겪게 되고, 교회와 교회들 사이도 경쟁 관계가
되기 쉬운거죠. 그런가하면 관광객의 교회, 어쩌면
오늘은 좀 그런 모습도 많이 보여지는 것 같애요. 오늘
우리 시대가 customers’ satisfaction의 시대라고 표현할
수 있을 거 같은데요. 소비자 만족 시대. 정말 소비자들을
만족시키는 게 정말 중요하잖아요. 정말 많은 교회들도
성장하고 더 좋은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좋은 소비자들을
만족시킬 필요가 있으니까, 많은 성도들도 소비자처럼
모든 조건들이 잘 갖추어진 교회를 선호하게 되었어요.
우리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에서부터 모든 것들이
잘 갖추어진 교회가 좋죠. 마치 우리가 mall에 모든 것이
잘 갖추어진 mall이 쇼핑하기 좋은 것처럼, 사실 오늘의
교회는 정말customers’ satisfaction과 많이 이제 가까와져버린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우리가 다시 회복되어야될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 우리는 정말 순례자의 교회로
부름받았다는 것을 좀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교회도
그렇지만, 우리가 개인적으로도 그렇겠죠. 여러분들은
누군가요? 정착민인가요, 관광객인가요, 순례자인가요?
아마 섞여있다고 고백하게 될 거예요. 내 안에는 정착민의
모습도 보이고, 관광객의 모습도 보이고 순례자의 모습도
보이죠. 그런데, 우리가 정말 사랑하고, 우리를 또 너무나
더 먼저 사랑해주신 예수님께는 정착민의 모습이 전혀
없었고, 관광객의 모습도 전혀 없었잖아요. 오직 순례자의
모습만 있었죠. 그리고, 그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
하시는 이유가 있겠죠. 예수님은 우리가 정착하는 거
싫어하시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만족을 누리는 거
싫어하시는 게 아니라, 우리 개인보다 주님께서 정말
사랑하시는 모두를 위한 것이죠. 저도 저희 아이들이
다섯이지만, 아이들이 이제 처음에는 같이 먹을 것을
분배해 주잖아요. 어렸을 때. 그럼 각자 자기 것을 갖고
있잖아요. 그러다가 어떤 애는 빨리 자기 것을 먹어치워버리고,
어떤 애는 잘 보관해둬요. 그러면 이제 시간이 지난
다음에 보관해둔 애가 그것을 먹으려 그럴 때, 먹었던
애가 나 좀 달라 그러죠. 그러면 안 줄 권리가 있죠.
당연히. 안 줘야 더 공평하죠. 그런데, 그 때 그 아이가
안 주고 절대로 안 준다고 지키고 있을 때 부모가 볼
때는 ‘아이, 그래도 그거 좀 주지’ 그런 마음 드는게
사실이예요. 그렇잖아요? 설사 잘 보관해놓고 지킨
아이가 자기 것을 먹는 게 당연한 권리이기도 하지만요.
그래서 참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정말 언제나 sharing에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고 싶어요. 하나님은 이 땅에
진정한 샬롬, 조화를 바라시는데, 그것은 우리에게
있는 것을 우리가 서로 아끼지 않고 사랑으로 서로
나누려고 할 때, 우리가 나를 위해서 살기보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려고 할 때 이루어진다는 것을요.
이 세상에는
크리스챤들 중에서 참 이 샬롬을
위해서 특별히 헌신한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어요.
저는 제가 몇 가지를 예로 들고 이제 마치고 싶은데,
혹시 여러분, 떼제 공동체라고 들어보셨어요? 떼제라는
크리스챤 공동체가 있는데, 한국에도 이제는 떼제 음악으로
많이 알려져 있죠. 근데 이 떼제 공동체는 프랑스의
떼제라는 아주 시골 벽지에 있는 곳인데요, 거기는
이차 대전 끝날 즈음에 어느 한 청년이 혼자서 중보
기도하러 산 속으로 들어가서 거기 거주하게 되면서
생겨났어요. 그런데, 거기를 지나가던 어떤 다른 청년도
같이 중보 기도에 참여하게 되고, 그러다가 이제 거기에
형제들의 공동체가 형성되게 됬는데, 지금은 매년 유럽의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찾아가는 곳이 되었습니다. 근데
그 공동체가 헌신하는 거는 뭐냐하면 화해와 일치예요.
화해와 일치, 정말 샬롬이 이땅이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결혼도 하지 않기로 결정한 개신교 청년들이라고 볼
수가 있는데요. 남자 형제들인데, 그런데 이 떼제 공동체에서는
언제나 하루에 세 번 예배가 드려지는데, 그리고 그
예배는 다 라틴어로 이루어져요. 프랑스 마을에 있는데도.
라틴어를 선택한 이유가 있어요. 그 이유는 유럽은
아시는 분들은 알겠지만, 로마가 기독교 국가가 된
후에 계속해서 기독교 세계였잖아요. 그렇지만, 나중에는
개신교와 캐톨릭 사이에, 또 프랑스와 독일, 프랑스와
영국, 이태리, 모든 나라들 사이의 전쟁의 역사예요.
계속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아는 사람들끼리 죽이고
죽인 전쟁이죠. 그 전쟁의 역사 속에서 서로 다 싫어합니다.
마치 한국 사람들이 일본 사람 싫어하고 그러듯이 유럽에
있는 사람들도 생각보다 긴장과 그 갈등이 많아요.
근데 그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제 함께 서로를 소중히
여기고 회복하고 하나될 수 있도록 그래서 중보 기도하는
곳이고 또 모든 언어, 영어, 독어, 불어, 스페인어의
모체가 라틴어잖아요. 그래서, 라틴어로 선택해서 찬양을
부르는 거죠. 거기가 정말 샬롬을 위해서 참 아름다운
헌신을 한 젊은이들을 많이 볼 수 있는 곳이고. 그리고
또Christian Peacemaker 팀에 헌신한 사람들이 있어요. 이
사람들은 우리 한국에는 또 다른 단체지만, 혹시 여러분들
프론티어즈라고, 개척자들이라고 들어보신 분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한 단첸데요. 이Christian Peacemaker들이나
개척자들은 어떤 사역만 하냐면 세계 분쟁과 전쟁이
있는 지역으로만 사람을 보냅니다. 거기에 그 전쟁과
분쟁으로 인해서 갈라진 사람들 사이에 이제 중재자가
되기 위해서 헌신하는 거죠. 상처입는 쪽의 사람들을
위로하고 거기의 아이들을 위해서 사역하고 가능하면
그것이 다시 복수와 분노로, 복수로 나가지 않도록
화해와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저는
모두가 그렇게 살아야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정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샬롬을 위해서 헌신한다는
것은 우리 주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그 샬롬이 나로부터
나의 가까운 가정과 이웃, 또 교회, 또 직장, 또 학교,
또 심지어 나의 민족을 넘어서서 다 전해지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샬롬에 대한 정말 진지한 이해와 헌신이 필요하다는
것. 멀리까지 갈 이유는 없다 하더라도 정말 샬롬을
위해서 중보 기도하고 또 우선 내가 가정 안에서도
샬롬을 위해 헌신한 사람이 될 수 있을 때 그때 예수
그리스도의 뜻은 하늘에서와 같이 또 이 땅에도 이루어지지
않을까 그렇게 기대합니다.
다음은 2009 KOSTA/USA Chicago conference에서 이훈 목사의 ‘샬롬을 위한 헌신’이란 세미나를 eKOSTA 편집부에서 녹취하여 정리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평화의
왕이시고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는 분이시고
무엇보다 한편 평화, 샬롬을 누리신
분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 이 땅의
어느 누구보다도 샬롬을 누리신 분인데
그러나 한편 성경을 읽어보면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가장 슬퍼하셨던
분인 것 같기도 해요. 슬픔과 평화는
반대편에 있는 것 같기도 한데, 예수님은 왜 슬퍼하셨나?
예수님의 슬픔을 성경에서 좀 본다면 특히 누가복음
19장 42절에 보면 예루살렘성을 보며 우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오늘 네가 평화에 이르는 길을 알았더라면 좋았을텐데,
그것이 너의 눈에는 가리워져 있구나.’ 평화에 이르는
길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이 땅의 사람들을 보면서
슬퍼하신 거죠. 예수님은 하늘의 평화가 뭔지 아시고
누리시는 분이었지만 그것을 알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 때문에 슬퍼하셨다는 것. 예수님은 평화를 위해서
샬롬을 위해 헌신하신 분인데요. 그래서 그렇게 예수님은
함께 이 땅에 샬롬, 평화를 위해 헌신할 사람들을 필요로
하셨고 그래서 찾아오셨고 부르시기도 한 거죠, 제자들을.
근데, 제자들이 얼마만큼이나 이 샬롬을 위해서 잘
준비되었었는지 우리가 성경을 보더라도 제자들은
참 변화되지 못한 제자들이었음을 우린 성경에 있는
에피소드들을 통해 많이 보게 되잖아요? 예수님의 제자
중에 야고보와 요한이 어머니까지 대동해서 한 번 청원을
한 적이 있죠. ‘주님 나라에서 우리 두 사람, 우리
두 아이,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혀달라’고
했습니다. 그 말씀을 들으셨을 때 예수님 뭐라고 하셨냐하면
‘너희가 무엇을 추구하는지, 구하는지 알지 못하는구나.
너희가 내가 마시려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 그렇게
물으셨어요. 그때 제자들은, 야고보와 요한은 ‘예,
마실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했죠. 근데 그 잔은 원래
어떤 잔이죠? 고난, 죽음의 잔인데, 그 의미도 모르고
‘마실 수 있습니다’ 했죠. 그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래, 너희도 언젠가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게
될 것이다. 하지만, 너희가 나에게 구한 것,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너희에게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해
예비되었든지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주실 것이고 내가
너희들에게 원하는 것이 있다. 부탁하는 것이 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나 권세를 부리는 자들은 그렇게
세도를 부리고 위에 서려고 하지만 너희 중에는 정말
그렇지 않았으면 좋겠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되겠고 대접을 받으려하는
자는 대접하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내어주러 왔다’ 그렇게
말씀하셨죠. 근데 그 에피스드에서 야고보와 요한이
그렇게 좌우편에 앉혀달라고 어머니까지 모시고 와서
청원했을 때 그 이야기를 들은 나머지 제자들이 어땠어요?
다 제자들이 분이 났다고 했어요. 그러고보면 그 제자들이
함께 동역자고 친구들이고 정말 가족이 되었었는데,
그 제자들 중에 헛된 야망과 꿈을 가진 제자들의 이야기가
결국 관계들을 갈라놓게 된 거죠. 그래서 우리가 진정으로
샬롬을 이루고 샬롬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있는 잘못된 꿈을, 어떤 야망을 좀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먼저 좀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제가 샬롬이
무엇이냐 라는 샬롬의 의미에 대해서
세미나를 할 때 샬롬은 다름아닌
조화이고 관계의 회복이고 그리고 sharing이라고
표현했었는데요. Empire builder와 Kingdom seeker를 한번 이제
어떻게 다른지 좀 생각해보고 싶어요. Empire builder는
자기의 왕국을 건설하려는 사람이라면, Kingdom seeker는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사람인데요. 여러분들은
Empire builder 입니까, Kingdom seeker 입니까? 어떻게 다를지
좀 생각해보고 싶어요. Empire builder는 자기의 왕국을
세우려는 사람인데, 자기 왕국을 세우는 사람은 스스로
통치하죠. 왜냐하면 나의 왕국이니까 내가 다스립니다.
하지만, Kingdom seeker는, 즉 하나님의 통치를 추구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고 또한 신뢰합니다.
그분이 다스리신다는 것을 아는거죠. 스스로 통치하는
사람은 자기가 통치하지만, 언제나 마음에 불안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다스려지지 않는 영역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내가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불안한 거죠. 통치할 수 있지만, 통치 안 되는
영역이 있으니까. 그러나, Kingdom seeker는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분의 통치를
신뢰하기에, 마음에 평화가 있습니다. 그리고, Empire
builder는 자기의 영토가 분명해야할 필요가 있어서 울타리를
세우고 자기 편을 만듭니다. 왜냐하면 내 통치의 영역이
안정되고 확정될 필요가 있으니까, 분명할 필요가 있어서이지요.
그러나Kingdom seeker는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지 않을 곳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자신이 갖고 있던 울타리도 걷고
그리고 자기 편 만들지 않죠. 자연히 사람들에 대한
태도가 참 다른데요. Empire builder는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하죠. 왜냐하면 내가 다스리니까. 그리고 사람들을
이용하게 됩니다. 나의 목적을 위해 사람들이 필요한
것이니까요. 그리고 사람들을 묶어두려고 하죠. 왜냐하면
내 통치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 싫으니까요. 하지만,
Kingdom seeker는 하나님의 통치의 뜻을 따라서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하지 않고 섬기려 하고 또 이용하려고 하기
보다는 사람들을 세우려 하고 사람들을 묶어두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풀어줍니다. 자연히 함께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차이가 나타나는데Empire builder로 살아갈 때 관계
속에 긴장과 불신이 많이 생기죠. 왜냐하면 내가Empire
builder일 때 지금은 내 밑에 있고 나와 함께 있는 것
같지만 이 사람도Empire builder로 보이기에 언제 나를
치받고 올라올지 모른다는, 사람에 대한 불신과 긴장이
생겨나게 되는 거죠. 그러나, Kingdom seeker는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신뢰가 있기에 관계 속에서도 긴장이 아니라
평화와 신뢰가 있습니다. Empire builder로 살아간다면
친구와 이웃은 늘어날까요, 줄어들까요? 줄어들 수
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경쟁자와 적은 늘어나게 되겠죠.
그러나, Kingdom seeker로 이렇게 살아간다면 오히려 친구와
이웃들이 늘어나게 되고 경쟁자와 적은 사라져가게
되는 거죠. Empire builder와 Kingdom seeker와 이렇게 다른데요,
야고보와 요한이 그렇게 주님의 나라에서 좌우편에
앉혀 달라고 할 때,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을 위해서
헌신했고 주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한 것
같았지만 스스로, 사실 그들 안에는Empire builder의 야심을
그대로 갖고 있었던 거죠.
근데 이런 질문을
한다면 어떨까요? 목회자들이나 오지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도Empire builder가 될 수
있을까요? 예, 좀 안타깝지만 그럴 수
있습니다. 비록 내가 대단한 헌신을
했다고 스스로 자부한다 하더라도, 내가 정말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했다 생각한다 하더라도 만약 나의
삶에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이런 부분들이
있다면 내 마음이 뭔가 불안하고 내가 스스로 다 control해야
마음에 좀 안심이 생기고 그리고 자꾸 나의 분명한
울타리를 만들고 내 사람을 만드는 경향이 있다면,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을 자꾸 지배하려고 하고 그리고
이용하려고 하고 묶어두려고 하는 것이라면, 함께 있는
동역자의 관계 속에 자꾸 긴장과 불신이 생겨난다면,
자꾸 소중한 관계들이 경쟁자와 적이 되어간다면, 아무리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대단해보이는
사역을 한다 하더라도 그 사람은Empire builder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것. 사실 기독교도, 교회도 Empire 일 수
있다는 것을 교회 역사를 통해서도 보게 됩니다. 만약
기독교가, 교회가 세상 속에서 어떤 다스리려고 할
때, 스스로 모든 것을 주도하려고 하고, 그리고, 울타리를
세우고 배타적으로 자기의 세력들을 결속시키려고
할 때, 기독교가 다른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지배하고 이용하고 또 묶어두려고 할 때, 그리고 바깥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긴장과 불신들을 만들어낼 때,
사실은 기독교 세계도 Empire가 되고 마는거죠. 로마가
기독교 국가가 되었을 때 그 당시의 기독교는 사실은
Empire였지 하나님 나라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군
전쟁을 일으켜서 주변 민족들을 침략하고 약탈하고
그래서 어두운 역사를 남겨놓게 되었던 거죠. 사실
이 Empire builder냐, Kingdom seeker 냐는 우리의 작은 관계
속에서도 늘 이제 왔다갔다 하기가 참 쉬운 거잖아요?
우리 부부 관계에서도 사실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만났지만,
서로 영역 다툼하기가 참 쉽고 사실은 지고 싶지 않은
것이고, 내가 주도하고 싶어하고, 그리고 나의 이익을
추구하려고 할 때, 우리는Kingdom seeker가 되기보다는Empire
builder가 되서 결국은 샬롬이 아니라 갈등과 분쟁을
만들어내기 쉽다는 것을 생각해봅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렇게 좀 생각해봤는데요. 오늘
우리 한국 기독교가 굉장히 많이 공격과 모욕을 당하고
있잖아요. 개독교라는 말까지 듣고 있는데, 근데 도대체
이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좀 생각해보면 저는 이렇게도
표현하고 싶어요. 안타깝게도 우리 믿음의 선배들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셨기 때문이라고요. 어떤
의미냐 하면 저도 기독교 가정에서 이제 몇 대째 자랐는데요.
제가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니면서, 그리고 교회에서
때로는 목사님이 오셔서 심방을 해서 축복해주시고
기도해주시잖아요? 또 교회 장로님들이 다음 세대를
위해서 기도하고, 또 부모님들이 다음 세대를 위해서
많이 기도하잖아요. 제일 많이 들었던 기도가 어떤
기도냐 하면 ‘하나님, 이 아이가, 우리 다음 세대가
꼬리가 되지 않고 머리가 되게 해주시고, 꾸는 자가
되지 않고 꾸워주는 자가 되게 해주십시오.’ 그런
기도 들어보셨어요? 그 기도를 하나님이 그래도 들어주신
거 같애요. 그러니 기독교인들이 대통령도 되고 사실
우리 나라의 정치, 경제, 교육, 문화, 어느 영역을 가든지
위로 가면 갈수록 크리스챤 비율이 높잖아요. 크리스챤들이
리더가 된 영역이 참 많습니다. 그렇지만, 사실은 그들
안에 정말 섬기려는 마음, 대접받는 것이 아니라 대접하려는
마음, 으뜸이 되기보다는 종이 되려는 마음이 너무나
배우지 못했고 없었기에 단지 위에만 섰을 뿐 결국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삶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것 같아서 결국은 바깥으로부터 멸시와 모욕을 받게
된 것 아닐까요? 만약 우리의 윗 세대의 신앙의 부모들이
이렇게 기도했더라면 어떨까요? ‘하나님, 우리 아이가
머리가 아니라 꼬리가 되어도 좋으니 정말 섬길 줄
아는 아이가 되게 해주십시오. 하나님, 우리 아이가
이 세상에서 대접받는 아이가 아니라 정말 대접할 줄
아는 아이가 되게 해주십시오. 하나님, 우리 아이들이
정말 이 땅에서 우뚝 서는 아이들이 아니라 정말 바닥에서
섬길 줄 아는 아이들이 되게 해주십시오’. 그런 기도들이
드려졌다면 오늘 한국 기독교는 정말 많이 달라졌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여전히 오늘도 야고보의 어머니처럼,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처럼 동일한 기도들이 계속
올려지고 있는 것 같애요. 하지만 예수님은 말씀하셨죠.
‘너희가 정말 무엇을 구해야 하는 줄 알지 못하는구나.
내가 마시려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하겠고, 대접을 받고자 하는
자는 대접하는 자가 되라’고. 예수님은 친히 제자들
앞에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면서 정말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그 길을 잘 보여주셨잖아요.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단 한번도 땅에 있는 어떤 영광을 얻으려고
하신 적이 없고 끝까지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오직 Kingdom
seeker로만 사셨는데, 그 Kingdom seeker로 살 제자들을 부르신
것이고 기다려주신 거죠. 그런데, 우리가 알 듯이 제자들도
나중에 변했잖아요. 그렇게 엉뚱한 야망을 가졌던 제자들도
나중에는 다 달라졌습니다. Kingdom seeker가 된 것이죠.
예수님께서 동일하게
우리도 부르고 계시는데, 우리를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게 되기를, 우리의
나라, 나의 empire가 아니라 먼저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6장에 나오는 그 말씀을 하실 때보면
예수님께서 그런 말씀하시죠. ‘너희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만, 그런 것들은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너희에게는 하늘 아버지가
있지 않냐고. 하늘 아버지는 너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다 알고 계신다’라고요. 그러니, 너희는 그런 것들
염려하지 말고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하셨죠.
그러면서 그때 예로 드신 것이 너희가 공중에 나는
새를 봐라. 그리고, 들에 핀 백합화를 봐라. 다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기르시고 입히시지 않냐고.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그런데, 정말 한번 그렇게 생각해보죠. 공중에 나는
새가 하나님께서 먹이시나요, 스스로 먹이를 찾아서
사나요? 그리고, 들에 핀 백합화. 스스로 그렇게 이제
피어나는 건가, 하나님께서 다 입혀줘서 그렇게 아름답게
된 건가요? 우선 새를 먼저 생각해보면, 어떤 관점에서
보면 새가 열심히 먹이도 찾아서 먹고 살아가는 것
같아요. 하나님이 먹이시는 게 아니라. 그래서 심지어
early bird라는 말도 있잖아요?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이를
얻는다. 그러니까, 경쟁, 땀흘리고 노력해야 뭔가를
성취할 수 있다라는 생각에서 보다 근면해질 것을 말하기
위해서 생겨난 속담이죠. 그런데, 실제로 새들 중에
더 먹이 때문에 일찍 일어나는 새가 있을까요? 그리고,
우리가 알듯이 새들은 우리가 갖지 않은 눈과 날개를
갖고 있는데,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먹이를 참
잘도 찾아요. 그리고, 우리가 갈 수 없는 곳에 잘 가는
거죠. 근데, 그것이 노력일까, 선물일까 좀 생각해보고
싶은데요. 갓난아기들이 태어나서 엄마 젖을 쪽쪽 빠는
것은 노력일까요, 본능인가요? 빨라고 해서 빠나요,
저절로 빨게 되나요? 저절로 빨게 되는 것이죠. 그거는
하늘이 주신 선물이잖아요. 그거는 노력도 아니고 땀도
아니라구요. 저절로 하게 된 것. 그런 점에서 그것은
하늘이 주신 선물이니까, 하나님께서 먹이시는 거고
기르신다고 말할 수 있죠. 그러니까, 너무 스트레스받고
살지 말라는 면에서 어떤 사람이 재밌는 도전을 했어요.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이를 얻는다’는 말에 대해서
‘일찍 일어나는 벌레가 먼저 잡아먹힌다’. 똑같은
논리겠죠. 만약에 정말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이를
얻는 거라면 일찍 일어나는 벌레는 먼저 잡아먹히니까.
자연의 세계는 스스로 땀흘리고 노력하고 노력해서
살아가는 게 아니라, 하늘이 주신 그 선물, 은사, 본능을
따라서 그 축복을 누리는 것 같습니다. 들에 핀 백합화도
그 자그만한 씨앗에서 실같은 뿌리가 내려오는데, 참
멀리도 잘가요. 물도 잘 찾아가잖아요. 그것을 어떤
눈으로 보면 노력인 것 같지만, 그러지 않는 씨앗들이
있는게 아니잖아요. 안에 생명만 충분히 있으면 다
찾아가요. 그냥 그러면서 하늘이 주신 선물을 따라
꽃을 피워내는 거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백합화를
말씀하실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솔로몬이
입은 그 모든 영화도 이 들꽃 하나만 못하였다’ 하셨죠.
솔로몬의 영화와 들꽃의 영화. 어떤 게 더 영광스럽습니까?
우리가 보기에는 솔로몬의 영광처럼 대단해보이는
게 없는 거 같은데, 왜 예수님은 솔로몬의 영광보다
이 들꽃의 영광이 더 크다고 하셨을까요? 저는 이 말씀을
곰곰히 묵상하면서 주님의 뜻을 깨닫게 된 기회가 있었는데요,
가만히 보면 이 솔로몬과 들꽃을 비교해본다면, 솔로몬의
영광은 소유로 인한 영광이라면 들꽃의 영광은 존재의
영광입니다. 솔로몬이 그렇게 우리에게 영광스러워
보이는 이유는 뭘까요? 솔로몬의 벌거벗은 몸뚱아리가
아니라 그에게 덧입혀진 것들이예요. 그가 가진 지혜와
지식, 그가 갖게 된 인기와 명예, 그가 가진 물질과
권력, 그것이 솔로몬을 영광스럽다 보는 거죠. 만약
솔로몬에게 그런 모든 게 없다면, 지혜와 지식도 없고,
인기도 없고, 권력도 부도 없다면 누가 솔로몬 영광스럽다고
말하겠어요? 우리가 말하는 솔로몬의 영광은 그가 가진
소유에 대한 영광이죠. 그러나, 들꽃은 덧입혀진 것이
있는 게 아니라 창조주가 자신에게 준 몸뚱아리 그
자체로 창조주의 아름다우신 영광을 드러내고 있는
거죠. 또 하나 차이는 주변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달랐습니다. 솔로몬은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멀리서 다른 민족의 사람들까지 구경하러
올 정도로 부러움도 사기도 했죠. 그런데 솔로몬은
잘 몰랐던 거 같애요. 솔로몬이 죽고 난 뒤에 아들 르호보암이
나라를 다스릴 때, 백성의 지도자들이 찾아와서 간청을
하죠. ‘임금님, 선왕 솔로몬께서 우리를 다스리실
때 우리의 어깨에 얹어준 멍에와 짐이 너무나 무거워
이젠 더이상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이 짐을 좀 내려놓게
해주십시오.’ 솔로몬이 통치할 때 7년 동안의 성전
건축과 이어서 13년의 왕궁 건축을 하면서 백성들을
강제 노동에 동원시켰던 거죠. 근데, 그때 그 말을 들었던
르호보암은 왕궁에 있는 신하들 중에 젊은 친구들의
조언을 따라서 강경책으로 나갔었죠. 그래서 더 강하게
나가니까 백성의 마음들이 떠나고 여로보암을 중심으로
열 지파가 떼어서 나가면서 이스라엘이 두 쪽이 나고
말았습니다. 르호보암의 정치력의 부재였다고 말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원인 제공은 누가 한 겁니까?
솔로몬이 한 거예요. 솔로몬이 왕궁에서 편한 잠을
잘 때, 백성들은 허리가 아파서 신음하고 있었고, 솔로몬이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며 만족하고 있을 때 백성들은
눈물 뿌리며 고통하고 있었다는 것. 솔로몬의 영광은
백성들,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담보로 얻은 영광이었죠.
하지만, 들꽃은 어느 누구도 아프게 하지 않잖아요?
지나가는 길손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줄 뿐, 누구도
아프게 하지 않습니다. 또 남기고 가는게 달랐어요.
솔로몬은 뭘 남기고 갔나요? 한편 솔로몬은 안정된
국가와 모든 부와 권력을 아들에게 다 고스란히 물려줬어요.
보통 솔로몬을 가장 부럽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어요.
솔로몬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형통했던 사람이예요.
아버지 다윗은 역경도 많이 겪고 고난 많았잖아요.
사울 왕의 시기 때문에도 참 고생고생했지만, 왕위에
오른 다음에도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또 피난 생활했어야
됬고, 정말 우여곡절을 많이 겪었는데,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이 안정된 국가를 물려줬거든요. 그래서 요람에서부터
정말 형통하게 시작했어요. 그리고, 왕위에 있는 동안에
외적의 침략을 받아본 적도 없고 안에서 내란이 있지도
않았어요. 죽을 때 아들에게 다 물려주고 갔어요. 그러니,
복지 사회의 구호라고 말할 수 있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형통했던 사람이 사실 솔로몬이죠. 근데, 솔로몬은
다 잘 물려준 것 같았는데, 사실 솔로몬이 뿌려놓고
간 어둠의 씨앗들이 있었어요. 그 하나는 앞서도 얘기했지만,
결국 이스라엘이 두 쪽으로 날 어둠의 씨앗을 남겨놓고
간 것이고, 또 하나 솔로몬이 왕위에 있을 때 수많은
이방 여인들을 품에 안게 되면서 우상 숭배의 문을
활짝 열어놓고 갔어요.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이후에, 솔로몬 이후에 이스라엘 왕들은 거의
예외없이 우상 숭배에 빠지게 된 거죠. 솔로몬은 어둠의
씨앗들을 가득 남겨놓고 갔습니다. 그게 솔로몬의 영광이예요.
하지만, 들꽃은 뭘 남겨놓고 갈까요? 자기 생명의 씨앗들을
남겨놓고 가겠죠. 그 씨앗들은 또 들꽃들이 되어서
창조주의 정원을 아름답게 할 것이구요. 솔로몬과 들꽃,
뭐가 더 영광스럽습니까? 네, 그러면 솔로몬 되고 싶으세요,
들꽃 되고 싶으세요? 주님은 솔로몬의 영광을 꿈꾸고
살아가고 그렇게 되고 싶어하는 우리, 그래서 보다
더 필요를 더 채우고 갖고 싶어하는, 그래서 무엇을
더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정말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시는 거죠. 너희가
그렇게 살아가다보면 결국 너희의 모든 관계들은 전쟁터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 더 위에 서려고, 더 가지려고
아귀 다툼을 하다보면 모든 관계들은 깨지고 만다는
것. 너희에게는 너희를 사랑하시는 하늘 아빠 아버지가
계시지 않느냐고. 그 아빠 아버지는 너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시고 그것을 다 주실 준비를 하고
계시다고. 그러니,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말씀하신거죠.
우리는 샬롬을
위해서 정말 기도할 필요가 있는 거 같습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서도.
우리가 진정 이 땅에 샬롬이 올 수 있도록 기도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애요. 최근에 한국에도 소개된 다음에 몇
해 전 부터 꽤 인기가 있었던 기도가 있죠. 야베스의
기도. 근데 이 야베스의 기도는 어떤 거였죠? 내게 복에
복을 더하셔서 나의 지경을 넓혀주시고 또 환란이 없어서
근심도 없게 해달라는 그런 기도잖아요. 근데 그 기도가
아주 인기가 있게 되서 마치 심지어 부적처럼 어떤
사람들은 차에도 붙이고 집에도 붙여놓고, 또 많은
크리스챤 집회의 어떤 제목으로도 많이 등장하게 되었어요.
근데 저는 이 기도에 대해서 좀 아쉬운 마음이 있는데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 그
주기도문과 한번 이렇게 비교해보고 싶어요. 야베스는
복에 복을 더해달라 기도하고 있지만, 예수님은 일용한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시잖아요. 야베스는 나의 지경을
넓혀달라고 기도하는데, 예수님은 주님의 나라가 임하고
주의 뜻이 이뤄지기를 기도하고 있구요. 야베스는 어떤
환란도 근심도 없기를 기도하지만, 예수님은 유혹과
싸우고 악을 이기는 그런 거룩한 근심을 담은 기도를
올리고 있다는 것. 남미의 우루과이에 있는 어느 한
성당에 붙어있다는 주기도문에 대한 글을 제가 접해서
들은 적이 있는데, 굉장히 도전이 됐었어요. 혹시 여러분들
중에도 들어보신 분들도 있을 거 같은데, 제가 한번
읽어드릴께요.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하늘에 계신
하지 말아라. 세상 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우리 하지
말아라. 너 혼자만 생각하며 살아가면서. 아버지 하지
말아라. 아들 딸로서 살지 않으면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 하지 말아라. 자기 이름을 빛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나라가 임하시며 하지 말아라.
물질 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지 말아라. 내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면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하지
말아라. 평생 먹을 것을 기대하면서. 우리에게 잘못한
일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하지 말아라.
다른 사람에게 아직도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하지 말아라. 죄지을 기회를 찾아다니면서.
악에서 구하소서 하지 말아라.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으면서. 아멘 하지 말아라. 주님의
기도를 진정 나의 기도로 바치지 않으면서.’ 굉장한
도전이 되는 표현이죠. 저는 주님의 기도가 그렇게
어려운 기도인지 몰랐어요. 우리가 늘 외워서 하는
기도. 그 기도는 정말 이 땅에 하나님의 샬롬이 주님의
진정한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드려져야될 기도인거죠.
야베스의 기도를 폄하하고 싶진 않지만, 야베스의 기도가
사랑받기 보다 정말 주님의 기도가 사랑받게 되기를
바라고, 주님과 함께 이런 진정한 기도를 이 땅의 샬롬을
위해 드릴 수 있게 되기를 이제 그렇게 헌신하는 마음을
좀 더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참 고아와 같은
마음들을 갖고 있어서 자연히 경쟁을 많이 하게 되는
것 같애요. 하지만, 경쟁하는 것이 아주 익숙해져있고
우리의 라이프 스타일이 되어버린 우리의 삶에 대해서
주님은 우리를 서로 사랑의 자리로 초청해주신 거잖아요.
근데, 그 경쟁을 competition이라는 단어로 우리 알고 있는데,
발음이 약간 비슷하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초청하신
그 마음은 compassion인데, 우리가compassion을 따라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좀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compassion이라는 단어는 라틴어 어원을 보면 com 은 with
함께 한다는 뜻을 갖고 있고, passion은 suffering인데요.
suffer with 함께 고통받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compassion을 갖는다는 것은 로마서 12장 15절에
있는 말씀처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그런 정말 기쁨과 아픔을 함께
나누는 그런 마음으로 이제 우리를 불러주신 것인데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셨던 마음이 바로compassion이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바로compassion이죠. 그런데 우리가compassion을
갖고 살 때도 있죠. 그러나, 우리는 이 거대한 경쟁
사회 한복판을 살아가면서 이competition에 의해서 사실
움직여지고, 그렇게 끌려가고 결국 우리도 competition의
마음으로 우리 인생을 살아가기가 참 쉽다는 것. 지금
이 자본주의 사회라고 표현할 수 있는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현재 모든 세계는 치열한 경쟁 관계고, 국가와
국가 간에도, 민족과 민족 간에도, 그리고 한 민족 안에서도
이념 사이에, 그리고, 어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
그리고 더 작게는 교회 안에서조차도, 그리고 가정
안에서도 계속 competition이 있는 거잖아요. 심지어 아이들이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형제 관계에서도 얼마나 competition이
많이 있어요? 근데, 그런 competition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충분히 받고 있는 아들
딸이라는 생각이 있기 보다는 우리가 너무나 뭔가 갈증,
채워지지 않은 마치 고아와 같은 심정을 갖고 있어서
자꾸 더 갖고 싶어하고 이기고 싶어하고 경쟁하게 되는
거죠. 근데 우리가 한편 치열한 경쟁 사회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다르게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다르게 살아가야지만,
정말 하나님의 샬롬, 조화를 위해 우리가 헌신할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런 도전, 질문을 던져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경쟁은 어둠을 많이 갖고 있죠. 때로는
어떤 사람들은 경쟁이 있어야 발전이 있다고 표현하기까지
해요.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세계, 자연의 세계를
우선 다시 한번 돌아보면 자연의 세계가 경쟁을 통해서
발전하는 것일까 하면 정말 그렇지 않아요. 자연에
있는 모든 초목들이 경쟁자가 더 많아서 더 잘 자라는
걸까요? 그렇지 않잖아요. 혼자 벌판에 홀로 떨어진
씨앗도 잘 자라요. 경쟁자가 많든 적든, 상황이 좋든
나쁘든, 사실 초목들은 정말 자기 자신이 되는데 최선을
다하고 그리고 멋있게 자라나요. 그런데, 그것을 보면
그들을 그렇게 아름답게 자라나게 하는 것은 경쟁이
아니라 그들 안에 있는 생명의 힘이라구요. 그 생명력이
그들 자신이 되게 하는 것이지, 비교하고 경쟁하는
것이 그들을 만들어 내는게 아니라는 것. 오히려 우리의
인생은, 경쟁 사회는 굉장히 비교 중심이잖아요. 모든
것을 비교해서 우리를 하나님이 만드신 작품이 아니라
상품으로 보게 하는 것인데요. 근데 비교는 얼마나
우리로 하여금 진정 우리 자신이 되지 못하게 하고
자꾸 다른 사람처럼 되려고 하고 자꾸 평가하고 판단하고
또 판단받고 그래서 상처를 주고 받고, 그래서 가정
안에서도 얼마나 부조화를 만들어내는지. 아마 어려서
성장할 때, 가정에서 비교당하면서 자라신 분이 있다면
얼마나 그게 아픈 것인지 알 거예요. 그리고, 우리가
어려서 학교 다닐 때 다른 사람들과 비교당하면서 살았다면
얼마나 그게 싫은 것인지. 우린 비교당하고 싶지 않으거죠.
하나님은 어느 생명도, 우리 어느 누구도 비교하지
않으시는데, 모두가 존귀한데, 우리가 치열한 경쟁
사회 속에서 자꾸 비교되고 비교하면서 살아가며 관계들을
파괴해왔다는 것을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경쟁은 참 결과 중심이라서 성과에 의해서 모든 것을
판단하다보니까 자꾸 성과, 결과에 목매게 되는 거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compassion은
정말 결과와는 상관이 없는 일인데요. 우리 예수님의
삶을 한번 생각해보고 싶은데, 예수님께서 마지막 십자가에서
이제 숨을 거두시기 전에 이런 가정을 해보죠. 오늘로
말하면 어느 언론의 인터뷰 기자가 예수님께 인터뷰를
요청했습니다. ‘도대체 당신이 이 땅에서 사역하면서
얻은 결과가 뭐가 있냐고’. 그때 예수님께서 아마
보고하실 수 있는 결과가 있다면 많은 사람들 나를
따랐었지만, 지금은 아무도 없다고, 나를 따르던 제자들도
다 떠나고 없다고. 그 죽음 앞에서 예수님께서 보여줄
수 있는 결과는 제로, 0 이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 죽음을 맞이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다 이루었다’
하셨어요. 도대체 뭘 이루었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이루어낸 게 도대체 뭡니까? 예수님께서 이루신 것이
있다면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그 부르심, 그
부르심의 소명을 따라 내가 이 땅에서 걸어가야 될
걸음을 끝까지 성실하게 걸었다는 점에서 다 이룬거죠.
내가 뭔가 보여줄 수 있는 결과가 있어서 이룬 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기에 그분의 뜻에 순종하기로
한 나의 걸음에 신실했다는 점에서, 나의 마음의 동기와
그 과정을 변경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다 이룬거죠.
결과가 있어서 다 이룬 게 아니라는 것. 우리는 너무
결과에 의해서 평가하고 평가받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거죠.
저는 이제 그 선교사들을,
선교 단체도 보내고 교회도 파송하잖아요? 그러면 현장에서
일하는 선교사들은 이제 후원을 받으면서 열심히 사역하는데,
근데 정기적으로 선교 보고를 해야되죠. 근데, 후원
교회에서는 어떤 보고를 받고 싶어할까요? 좋은 결과를
보고 싶어하는 거죠. 그러니, 이제 대개 선교 보고를
써야 되는데, 결과가 없으면 선교사들은 불안해져요.
그래서 자연히 때로는 후원이 끊길까봐 과장 보고의
유혹을 받게 되기도 하고, 그리고, 때로는 현지인 서로
끌어당기기 선교사들 사이에 경쟁도 생겨나게 되는거죠.
근데, 선교 본부나 파송 교회가 현장에서 일하는 선교사들에게
결과 보고를 기대하지 말고 그 선교사들이 선교지로
갈 때 그 순수한 초심, 그 마음의 동기가 혹 바뀌어지지
않도록, 그들이 선교지에 가서 혹시 잘못된 어떤 관계를
만들어서 empire builder가 혹 되지는 않도록 오히려 그들의
마음을 지속적으로 도와주고 그들이 결과를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런 것들을 support하는 마음을
가지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리고, 선교사들도 그런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정말 순수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그냥 내가 이 땅에서 걸어야 될 그 걸음에만 신실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실은 어떤 선교사가 한 민족
가운데 가서 십 년 이십 년 동안 살다가 거기서 목숨을
잃었다 하더라도, 그리고 그 기간 동안에 한 사람의
결신자도 얻지 못했다 하더라도 어쩌면 그 사람의 죽음
이후에 거기 복음의 싹이 트고 나중에 교회가 세워질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우리가 살아있을 때 결과를 보고자
하는 것이 얼마나 우리를 상하게 하고 우리의 관계들을
무너뜨리는 것인지.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경쟁 사회는
굉장히 성공 스토리를 보고 싶어 하잖아요? 성공 스토리가
언제나 무대의 중심에 오르죠. 그 스토리를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많은 사람들은 도전도 받고 또 격려
받고, 동기 부여도 돼서 이제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되기도
하죠. 꿈을 갖게 되기도 하죠. 하지만 그런 성공 스토리를
들을 때 어떤 사람들은 ‘나는 사실 그렇게 될 수 없다’라는
사실 때문에 더 낙심하고 절망하는 사람들도 사실 있어요.
그런데, 교회들도 보면 교회의 간증 집회나 무대 위에
대개 성공 스토리를 가진 사람들이 많이 오르죠. 좋은
결과를 가진 사람들이죠. 물론 귀한 믿음과 헌신을
따라 살다가 결국 아름다운 결과를 만들어낸 사람들이
무대 위에 올라서 많은 사람들을 주목하게 하고 도전도
하고 또 꿈도 주고 변화의 계기도 많이 만들어줍니다.
그렇지만, 역시 그 교회의 올라오는 성공 스토리들도
어떤 사람들에게는 또 낙심과 아픔을 가져다주기도
해요. 근데, 한번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해봅니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을 무대 위에 올릴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소위 성공한 사람들을 무대 위에 올리신
적이 있었나요? 예수님과 관련된 에피소드 중에는 제자들
사이에 누가 크냐 라는 자리 다툼이 있을 때 예수님은
제자들 가운데 누구를 세우셨냐면 어린 아이 하나를
세우셨어요. 너희도 이 아이와 같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 하셨죠. 예수님은 제자들의 눈이
위에 있는 사람, 성공한 사람, 뭔가 더 누리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는 그 제자들의 눈이 오히려 어린
아이에게 가고 또 그 당시에 고통받고 소외된 사람들을
향할 수 있도록 예수님은 오히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마음이 오히려 고통받고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가도록
하셨다는 것을 우리 기억하고 싶습니다.
다음은 2009 KOSTA/USA Chicago conference에서 이훈 목사의 ‘샬롬의 의미’란 세미나를 eKOSTA 편집부에서 녹취하여 정리한 내용입니다.
—————- 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한 민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한 민족의 역사를 우리가 구약을 읽어가다보면 구약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늘
up and down 이 있었잖아요? 그런데, 그 up and down 을 가만히 돌아보면 가장 두드러진up and down은 어떤 제도의 변화였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될 때 우리가 알듯이 그 백성들에게는 왕도 없었고 사실 군대도 없었죠. 사사시대까지는 왕도 군대도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그들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섰을 때는 하나님 안에서 샬롬을 누린 것이고, 그들이 하나님을 놓치고 우상을 숭배하거나 문제가 생기면 다른 민족들의 침략을 받아서 이제 고통을 겪었죠. 그러나, 다시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하나님이 사사를 세우셔서 다시 이제 그들을 회복시켜준 그런 계속 반복되는 스토리가 사사시대의 이야긴데요. 그러나, 그때 사사기까지만 하더라도 하나님의 주되심을 아주 극명하게 잘 보여주는 그런 시기였음을 우리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편 우리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사사시대는 어쩌면 무정부상태였어요. 정부 조직이 없는 거예요. 열 두 지파들의 느슨한 연합체였잖아요. 어떤 문제가 생기면 열 두 지파 대표들이 그때 와서 함께 의견을 나눠야되고,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일이 잘 같이 하나되기 어려운 시대였어요. 우두머리가 없는 시대, 그리고 군대도 없어서 자신들을 방어할 어떤 무기를 갖고 있지 않은 시대였죠. 그래서, 때로는 왕이 없었으므로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함으로 혼란하고 무질서스러운 시대였지만, 사사시대를 말하는 성경의 표현은 그들이 왕이 없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문제를 겪었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언제나 그분의 통치 아래서 안전했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마지막 사사인 사무엘을 만나면서 어떤 아이디어를 갖고 찾아오죠. ‘우리도 다른 민족들처럼 왕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우리에게도 왕을 세워주십시오.’ 그렇게 요청합니다. 그때 사무엘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말하죠. ‘이 백성이 왕을 세워달라는 것은 나를 버려서 왕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그렇지만, 사실 그 때 어느 이스라엘 사람이 하나님 버린다고 생각했겠어요? 우리는 하나님을 버리겠다는 게 아니라, 좀 안전장치를 갖고 싶다는 거죠. 다른 민족들은 왕도 있고 군대도 있고 조직이 잘 정비되어있는데, 이거 우리는 아무 그런게 없으니까 너무 불안하다는 거죠. 그러니 계속 주변 민족들한테 당했다고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왕을 세워주십시오’ 한거죠. 하도 고집을 부리니까 하나님이 이제 경고하시면서 세워주시죠. 너희가 왕을 세우게 되면 어떤 결과가 있을 줄 아느냐고. 왕을 세우면 그 왕이 너희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신하로, 너희 딸들은 데려다가 시녀로 부리게 될 거다. 그리고 너희가 땀흘려서 밭에서 얻은 소산들을 세금으로 거둬다가 왕과 주변 사람들은 배부르게 되고 너희는 가난해질텐데 그때 가서는 나에게 울부짖어도 내가 들어주지 않겠다 하시죠. 그러면서도 고집은 꺾지 않고 결국 세워지게 된 것이 이스라엘의 왕이고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의 왕정제도는 하나님의 design이 아니라 아이디어가 아니라, 사람들의 그 고집스러운 의견을 하나님이 한번 그래 겪어보라고 해서 허락해주신 거였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경고처럼 이스라엘의 사사시대까지와 그 이후 시대는 굉장히 많이 달라졌는데요, 가장 달라진 두드러진 것은 바로 이런 sharing과 관련된 것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당시에 광야를 살아갈 때나 또 사사기를 살아갈 때는 그들 가운데 리더가 있었어도 리더들에게 어떤 특권도 없었어요. 모세나 혹은 여호수아나 갈렙이나 혹은 사사들이 더 좋은 음식을 먹거나 더 좋은 천막에 거하거나 더 특별한 특혜를 가지는 사람들이 아니라, 모두 동일한 사람들인데 그들이 어떤 특별한 시기에 부르심을 따라 사역했을 뿐이었던 거죠. 특별히 우리가 광야를 걸어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여정을 읽어보면 그런 사건을 하나 알고 있죠. 열 두 정탐꾼을 보내고 정탐 보고를 듣는데, 열 사람이 부정적인 보고를 합니다. 자연히 그 보고를 들은 백성 전체가 불안해하면서 나중에 원망하고 불평하게 되죠. 그래서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백성에게 사십 년의 광야길을 걷게 하는 징계를 내리셨는데, 근데 그 때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음의 보고를 했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와 갈렙도 사실 사십 년의 광야길을 같이 가게 하신 거죠. 근데, 오늘을 사는 우리 현대인들 같으면 그런 질문을 해볼 수 있을 것 같애요. 여호수아와 갈렙이라면, ‘하나님, 우리 둘은 먼저 들어가게 하시고, 나머지만 사십 년 돌리시지. 왜 우리까지 사십 년을 돌아야 됩니까?’ 그렇게 질문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런 질문을 하지 않잖아요. 왜 하지 않았을까요? 그들을 각각 개인 개인으로 본 것이 아니라, 어떤 한 body의 지체로 본거죠. 운명 공동체로 본 거 아닐까요? 그래서 그들은 그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 무엇이든지 함께 share하고 그들에게 주어지는 고난이 무엇이든지 그것을 함께 share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것. 그런데, 그렇게 함께 기쁨과 아픔을 나누던 이스라엘 백성이 왕정 시대를 살아가면서 아주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왕과 왕 주변에 있는 귀족들은 특혜를 받게 되는 것이고, 상대적으로 고통받고 소외된 백성들이 생겨나게 된 거죠. 전에는 리더는 더 전쟁의 앞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이었다면, 나중에는 백성들이 고통을 받지만 특권층들은 안전할 수 있는 그런 시대로 바뀌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어떤 리더쉽의 차이도 보면 사사 시대의 리더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리더들이었어요. 하지만 왕정 시대의 왕들은 하나님께 귀가 먹은 것처럼 오히려 왕과 왕 주변에 있는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야인이라고 할 수 있는 예언자들을 통해서 계속 도전을 받게 된 거죠. 그래서 사사 시대와 왕정 시대의 차이는 하나님의 주도 아래서 한편 이스라엘 백성은 겉보기에는 제도가 더 정비되고 안전장치를 가진 국가 체제를 가졌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통치의 뜻과는 멀어진 시대가 되고 말았다는 것. 그런데, 그것을 우리 신약 시대 교회사의 역사에서 좀 보고 싶은데요. 예수님의 공동체,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한 공동체에 누가 특권을 가졌겠어요? 모두가 함께 어떤 것이든 함께 share하는 모임이었죠. 예수님께서 더 나은 잠자리를 가지신 것도 아니었고요. 그래서, 사도행전에서 시작된 초대 교회의 이야기들을 우리 읽어보면 그때 초대 교회 성도들은 때로 심지어는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고 하는 사람도 없이 모든 것을 함께 공유했던 그런 공동체까지 이루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에게 있는 삶의 축복과 아픔들을 다 잘 나눌 수 있었던 거죠. 그러던 이스라엘이, 그런 교회가, 하지만 교회 역사속에서 크게 바뀌게 되는데, 바로 로마가 기독교 국가가 되는 변화였어요. 로마가 기독교 국가가 될 때, 그것은 한편 고난과 박해 속에서 기도하던 성도들의 기도가 응답된 거죠. 황제로부터 로마의 모든 시민들이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이니까 기독교의 승리처럼 보였습니다. 이제는 모든 곳에서 예배가 되어지게 됐으니까, 모든 사람들의 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높임을 받게 됐으니까, 황제부터 모든 로마의 시민들이 세례를 받았으니까, 이제는 정말 기독교의 승리로 보여졌습니다. 그런데 한편 정말 교회가 많이 바꼈어요. 전에 로마가 기독교 국가가 되기 전의 교회는 상대적으로 소수이고 고난받고 박해받던 교회였는데, 로마가 기독교 국가가 되니까 황제의 특혜와 사랑을 받는, 총애를 받는 기독교가 된 것이고, 자연히 더 고난을 앞서 받던 기독교 지도자들은 로마의 특권층과 귀족들이 되게 된거죠. 그래서, 로마의 시스템이 교회 안으로 그대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치 로마에도 황제로부터 귀족 계급이, 수직적인 계급이 있었던 것이 교회 안에도 그대로 도입되어서 교회 안에도 교황 제도와 그런 제도들이 생겨나게 된 거죠. 전에는 건물도 없이 가정에서 주로 모였던 교회가 이제는 거대한 성전 건물들을 갖게 되었습니다. 가난했던 교회는 부유한 교회가 된 거죠. 한편 교회는 성공한 것 같았고 로마를 정복한 것 같았지만, 사실은 하나 완전히 무너진 것이 있었다면 그리스도 인들 사이에 sharing이 이제 더이상 가능해지지 않게 된 거죠. 마치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사 시대에서 왕정 시대로 가게 되면서 평평했던 곳이 이제 높은 산과 골짜기가 세워지게 된 것처럼 다시 초대 교회의 아름다운 나눔의 관계는 이제는 교회 안에서도 귀족 계급과 천민 계급들이 생겨나는 것처럼 수직적인 교회들을 만들게 된 것이고 이제는 더이상 함께 삶의 기쁨과 아픔을 나눌 수 없게 된 교회가 된 것이죠. 그런 점에서 로마가 기독교 국가가 된 것은 기독교가 로마를 정복한 것인가요? 아니면 기독교가 로마에게 삼켜진 것인가요? 한편으로 로마는 기독교라는 옷을 입었어요. 그래서 기독교라는 무늬를 완전히 갖게 됐지만, 그러나 로마는 사실 별로 달라진 것은 없었습니다. 로마의 모든 시스템은 그대로 있었고, 로마의 꿈은 그대로 있었고, 로마의 영광도 그대로 있었던 거죠. 하지만, 교회가 많이 달라졌어요. 교회는 한편 기독교를 로마에 전한 어떤 승리의 기쁨을 갖고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시스템은 로마의 것이 들어왔어요. 그래서 교회가 정말 달라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기독교가 로마를 정복한 것이 아니라, 로마가 기독교를 정복하게 된 거죠. 그래서 그 이후에 우리는 교회의 역사를 보면 기독교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고 주변 민족들을 약탈한 사건들, 그래서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뜻과는 다른 정말 어리석은 죄악들을 저지르게 된 Christendom, 그리스도와 세상 왕국이 통합된 모델의 어둠을 극명하게 보여주게 되었습니다.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샬롬,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이루시고자 하시는 샬롬이 도대체 무엇일까,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 그것을 우리가 그런 역사적인 흐름을 통해서도 한번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을 거 같애요.
Upside down kingdom이 된 거죠. 하나님의 나라는 완전히 뒤집어져 버렸습니다. 그것이 다시 upside down될 필요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나라는 관계에 있고, 조화에 있고, 그것은 sharing 에 있다는 것을 좀 생각해봅니다. 우리는 우리 인간의 연약함이 거기에 있는 거 같애요.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 딸이라는 것을 놓칠 때, 우리에게 어떤 불안함과 두려움이 찾아올 때, 자연히 우리는 우리 주변에 있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안전장치들이 더 좋아보이고 그것이 나를 보호해줄 것 같고 나를 더 지켜줄 것 같으니까 그런 것들을 유혹으로 찾아가게 되고 선택하게 되는 거죠. 그런 것처럼 역사적으로도 교회도 언제나 교회는 역사 속에서 약하고 작았었지만, 그러나 주변 세상 속에 있을 때, 마치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너희는 가나안 사람들로부터 배우지 말고 섞이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과연 세상 속에서 다르게 살아갈 가능성이 사실 너무나 없었다고 말할 수 밖에 없는거죠. 동일하게 교회도 우리가 이 거대한 세상 속에서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은 마음으로 세상 속에 들어가지만, 정말 우리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일까, 아니면 세상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일까. 오늘의 우리의 교회들은 우리의 교회가 정말 세상을 바꿔가는 것일까, 아니면 세상에 있는 것들이 교회를 변화시켜가는 것일까. 그 질문 앞에 우리가 고민하면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세상이 바뀌어지기보다 세상에 의해서 바뀌어지는것이 더 많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려운거 같애요. 이 바벨탑을 세우게 된 인간의 역사는 여전히 지금도 반복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흔들려왔고 또 교회의 역사 속에서 크리스챤들이 세상 속에서 흔들려 왔던 것처럼 우리도 계속적으로 흔들리면서 때로는 하나님의 진정한 통치의 뜻을 어긋나게 된다는 것, 그것을 계속 경험하게 된다는 것을 좀 생각해보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원하지 않고,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교회 안에서도 수직적인 시스템이 생겨나게 되기 쉽고, 교회 안에서도 상처를 주고 받게 되고, 교회 안에서도 우리가 방어와 공격의 무기를 만드는 경향들이 생겨나는 이유가 도대체 어딨을까, 정말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샬롬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준비되어야 하는 것인가를 다시 한번 이제 돌아보게 되는 거죠.
제가 한 가지 질문을 하고 싶은데요.
Need와
greed의 차이가 뭘까요?
Need에 대해서 여기까지가
need라고 누가 규정할 수 있을까요? 사실 구별하기 참 어렵다고요. 왜냐하면 어떤 사람에게는
need가
‘나는 이것까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어떤 사람은
‘나는 그 더이상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니까. 하지만, 이
need와
greed를 구별할 수 있는 게 있어요. 어떻게 구별할 수 있냐하면, 예를 들어서 큰 재난과 기근이 있어서 어느 지역에 한 달 이상 사람들이 먹을 게 없어서 굶주리고 있었는데, 이제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거기에 구호물자가 도착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대여섯 사람에게 빵 한 조각이 던져졌어요. 그런데, 그 빵 한 조각은 한 사람의 굶주린 배를 채울
need에도 턱없이 부족한 거죠. 근데, 그 사람이, 첫번째 그 빵을 손에 쥔 사람이 그 빵을 자기 입 속에 다 넣어버렸다면 그 사람은 자기의
need를 채운 건가요?
Greedy 해진 건가요? 예,
greedy 한거죠. need에도 턱없이 부족하지만. 왜냐하면 함께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는 완전히 실종된 것이니까요. Need와 greed의 차이는 관계 문제라는 것. 예를 들어서, 큰 풍년이 일어나서 마을 사람 모두가 배터지게 먹었다고 그 사람들더러 greedy하다 하지 않거든요. 그거는 하늘이 준 축복을 다 모두가 함께 나눈 것이니까. 그런데, 아무리 가진 게 없다 하더라도 그것이 나만의 것이 되고, 다른 사람들과는 상관없는 것이 된다면, 아무리 나의 need에도 턱없이 부족하다 해도 그것은 나로 하여금 greedy하게 만든 것이라는 것. 그래서 우리가 훨씬 더 어떤 필요가 무엇이냐를 보기보다 우리의 언제나 함께 있는 관계들을 보는 것이 참 중요하다는 것을 좀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우리가 우리 속해있는 믿음의 공동체들, 교회를 생각해볼 때도, 아니면 더 작은 우리 가정을 생각해볼 때도 가정 안에서 sharing이 충분히 일어날 때 그 가정은 조화롭고 행복할 수 있지만, sharing에 문제가 생기면 사실 가정도 아프고 정말 상처가 많은 곳이 되잖아요. 우리가 성경에서도 보지만, 그 이삭과 리브가는 쌍둥이를 낳았었지만, 편애 때문에 결국 원수 만들고 말잖아요. 또 야곱도 열 두 아들이나 있었지만, 결국 요셉에 대한 특별한 사랑을 보여주다 보니까, 그것이 결국은 형들의 미움을 사서 그런 아픔을 겪게 된 것이고요. 아무리 한 가정이라 하더라도 가정 안에 있는 축복과 아픔을 잘 share하지 않게 되면 서로 결국 상처를 주고 받게 되기 쉽고 샬롬은 더이상 있지 않게 된다는 것. 샬롬은 정말 sharing에 있다는 것을 좀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제가 저희 가정 이야기를 잠깐 하고 싶은데요. 저희는 아이가 다섯인데, 그중에 저희는 넷을 입양해서 양육했는데, 처음에 저희는 한 아이만 낳고 하나만 입양해서 키우려고 했었습니다. 그래서 갓난아이를 입양해서 남매를 키우다가 군포 공단 지역에서 소외층 사역을 하다가 공부방에서 만난 초등학교 다니는 세 아이를 알게 됬어요. 부모가 없고 할머니가 양육하는 아이들이었는데, 할머니까지 건강이 좋지 않게 되고, 위암 수술을 받으셨지만 의사는 일년 밖에는 더 사실 수 없다고 해서 그 아이들 양육에 대해서 저희도 걱정하게 됬고 그것이 계기가 되서
93년도에 세 아이를 더 입양하게 됬었어요. 그 때 그 세 아이는
5학년,
4학년,
3학년이었고, 저희가 낳은 아이가 2학년, 그리고 밑에 세 살 밑에 막내, 그렇게 다섯을 키워오게 됐는데요. 그런데, 저희 다섯 아이들이 한 가족이 될 수 있는 게 뭘까. 사실 만약에 어떤 핏줄이나 특별한 인연 관계를 생각한다면 우리 위의 세 아이는 한 집안 아이들이라 남다른 친밀감과 결속력을 갖고 있었어요. 근데, 그 세 아이가 가진 친밀감과 결속력이 밑에 있는 두 아이에게는 때로는 위협이 되기도 했어요. 왜냐하면 아이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면 셋이서 편드는 거는 자연스러운 것이니까. 그럼 밑에 두 아이는 한 솥밥 먹고 컸으니 둘이서 편들죠. 그런 갈등 관계를 해결하는게 초기에는 참 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사실 저희가 낳은 아이에게는 또 기라성같은 응원부대가 있잖아요. 할아버지, 할머니, 이모, 삼촌 등등. 그리고 위의 세 아이에게는 할머니가 또 계시다면, 막내는 저희가 입양 기관을 통하여 갓난아이 때 데려왔으니 아무런 응원부대가 없는거죠. 그런데, 예를 들어서 만약에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선물을 주고 싶을 때 분명히 저희가 낳은 아이에게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며 그 사람들이 선물을 얘한테만 더 주고 싶은 마음이 더 있을 수 있잖아요. 그리고, 세 아이의 할머니는 세 아이에게만 특별한 마음을 갖고 있는 거죠. 그런데, 그런 것을 당연하게 여겨서 가만 나눈다면 우리 다섯 아이는 한 가족 되기가 정말 어려울 거예요. 근데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선택은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아이들을 입양해서 우리의 자녀를 삼기로 언약을 맺고 약속을 했기에 모두에게 우선 감정적으로는 다 같지 않더라도 정말 공평해야될 이유가 있었다면, 그 공평을 주변 사람들의 협조를 필요로 했어요. 그래서, 주변에 있는 친척들이 선물을 준비한다고 하면 꼭 다섯 개씩, 그래서 모두에게 같이 나누어주는 것이 정말 중요했다는 것. 그리고, 또 하나 큰 아이들의 할머니가 굉장히 아프실 때 아이들 셋은 할머니에 대한 걱정을 갖고 있죠. 그러나, 밑에 있는 두 아이는 내 할머니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 있겠어요? 그러나, 우리가 가정예배를 드릴 때, 밑에 있는 두 꼬마 아이들이 위에 있는 아이들의 할머니를 건강을 위해 기도하도록 하고, 그 아이들이 입술로 그런 기도를 하게 될 때, 그 때 자연히 아이들은 이제 우리가 각각 남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고 우리에게 있는 축복들이 우리 모두의 것이고 우리에게 있는 아픔도 우리가 함께 나누는 것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느끼기 시작하고 배우게 되는 거죠. 그래서 감사하게도 어려운 시간들, 사건들, 에피소드들은 많았었지만, 다 잘 커서 지금은 장성해서 첫째랑 셋째는 결혼도 하고 딸들도 하나씩 낳아서 저희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됬고, 막내는 대학 3학년 들어가요. 이제는 세월이 많이 지났으니까요.
우리는 함께 가정을 이루면서도 정말 샬롬이라는 것이 어떻게 오는 것일까. 무엇보다 하나님의 진정한 조화, 샬롬은 우리의 삶의 나눔에 있는 것이고, 우리의 삶의 기쁨과 아픔을 충분히
sharing할 때 있는 것이지, 조금이라도 설사 피를 같이 나눈 관계라 하더라도 우리에게 나의 것을 지키고 나만이 누리려고 할 때 그것은 설사 그게 나의
need라 하더라도 그건
greedy하게 되는 것이고 관계들이 부서져 가게 된다는 것.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의 샬롬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우리라는 울타리가 점점더 넓어져갈 필요가 있는 것이겠죠. 예수님께서 평화를 말씀하실 때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겠다고도 말씀하시고 주심을 선포하기도 하셨지만, 또 아주 무서운 말씀을 하신 적이 있죠.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온 줄로 생각지 말라’. 뭘 주러 오셨다 했어요?
‘검을 주러 왔다’. 샬롬을 주러 오시지 않고 검을 주러 오셨다 했어요. 그런데, 그 때 그 검을 어디다 사용하시겠다 했어요? 그 검으로 모든 가족 관계를 부수겠다고 하셨어요. 그렇잖아요. 아비와 자식이, 형제와 형제가 원수되게 하시겠다고. 도대체 그 말씀이 무슨 말씀일까요? 그 말씀도 이
sharing의 관점에서 한번 보고 싶은데요. 사실 우리의 모든 가족, 가정, 우리는 사랑하지만, 배타적으로 사랑하는 거고, 어쩌면 이기적으로 사랑하고 있는 거죠. 우리는 가족 이기주의라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또, 민족 이기주의도 다 있는 거죠. 모든 민족과 국가도 사실 이기적이죠. 세상에 이타적인 민족이 어딨겠어요? 이타적인 국가가 어디있겠습니까? 그리고 이타적인 가정이 정말 있을까요? 우리는 태생적으로 팔이 안으로 굽는 사랑을 갖고 있고, 그런 점에서 이기적일 수 밖에 없기에 우리의
sharing은 때로는 배타적인
sharing이고, 우리는 그래서
defensive하게 되고, 자연히 더 가진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competitive하게 되고 그런 과정에서 자꾸 주도권 다툼을 하게 되니까 정말 하나님의 샬롬은 이 땅에 참 오는 게 자꾸 미뤄지고 부서져 가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의 그런 도전은 우리가 소중히 여기고 있는 그 관계를 넘어선 관계로 우리를 초청하는 거겠죠. 우리가 절대적으로 깰 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 관계보다 우선된 하나님과의 관계가 있고, 하나님의 뜻이 있고, 그 뜻은 우리의 울타리가 더 넓혀져서 우리의 사랑이 흘러가게 되는 것. 근데 제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어떤 타율적인 분배예요. 절대로 하나님은 이 땅에 샬롬을 가져오시고자 하시지만, 타율적인 분배를 명령하신 적도 없고 그것을 기대하신 적도 없다는 것. 저는 저희 아이들 얘기했지만, 때로 초기에 위의 세 아이가 덩치도 더 컸지만 세 아이가 가진 친밀감과 결속력을 깨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더라고요. 그런데 언뜻 생각해보면 그 세 아이가 가진 친밀감과 결속력은 하늘이 주신 선물이잖아요. 그 세 아이가 입양될 때 각각 다른 가정으로 입양됐다면 그 아이들은 얼마나 사실은 불행한 아이들일까요? 한 집안에서 태어난 아이들인데, 그래서 한 형제가 됐는데, 그 아이들이 한 가정에 같이 들어오게 된 건 아이들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축복이잖아요. 근데 문제는 그 축복은 하늘이 주신 것인데 그 축복이 다른 사람들에게 위협이 될 때 문제가 되는 거겠죠. 우리가 축복의 통로라는 말 많이 하잖아요? 근데, 통로는 뭐가 쌓여있는 곳이 아니잖아요. 통로에 뭐가 쌓여있으면 문제쟎아요. 통로는 지나가게 하는 거죠. 우리가 축복의 통로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하늘로부터 받은 것이 있다면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가게 할 때 축복의 통로겠죠. 우리 큰 아이들에게 있는 그 소중한 친밀감과 결속력이 동생들에게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잘 전해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우리의 과제지, 그것을 뺏어서 갈라놓는 게 하나님의 뜻은 아니라는 것. 그래서, 샬롬은 참 늦기도 한 것 같습니다. 우리가 기대하기는 ‘하나님, 이 세상에 있는 것 모두 다 모아서 딱딱 갈라서 쫙쫙 나눠주면 참 좋겠다’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주님은 단 한 번도 그런 아이디어를 말씀하신 적도 없고 지시하신 적도 없죠. 하나님의 통치는 우리 안에서 시작이 되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움직여서 저절로 이제 우리가 선택해서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신다는 것.
계속 잠깐 남아있는 부분들을 좀 다루고 싶은데요. 하나님은 샬롬을 위해서 계속 일해오신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참 많이 보죠. 제가 요셉과 요셉의 형제들이 갈라져서 이산 가족이 된 얘기를 잠깐 언급하게 됐었는데, 근데 어떻게 그 형제 관계가 다시 회복되게 되었나 한번 보면요, 사실 이 이산 가족이 만날 가능성이 거의 없었어요. 왜냐하면 요셉의 부모, 야곱과 요셉의 어머니는 그 큰 아들들이 요셉의 옷에다 짐승 피 묻혀 와가지고 요셉이 이렇게 됐다 했으니 그 때는 마음이 무너져 내렸겠지만, 어떻합니까 죽은 자식, 세월이 지나가면서 잊어갔겠죠. 이집트에 있다고는 상상을 할 수가 없으니깐요. 형들, 요셉 미워서 팔았는데, 왜 찾겠습니까? 그러니 요셉을 찾는 마음을 가진 가족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렇담, 요셉. 요셉은 참 특이한 인물이었어요. 보통 사람 같으면 그 상처받은 마음으로 그 고향 그리워하면서 억울한 마음을 쏟으면서 울면서 지낼 것 같은데,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도 정말 신실한 사람으로 살아갔죠. 또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는데도, 한 품고 살아간 사람이 아니라 거기서도 충성스러워요. 그런데, 보디발의 집에서나 감옥에서야 자유의 몸이 아니니까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그 이후를 생각해보면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 대신이 되었는데, 총리 대신이 되면 우리 같으면 왕에게 좀 재가 얻어서 고국의 소식도 좀 들어보고 방문도 해볼만한데 실제로 보면 요셉은 거기서
9년이 지나도록 그냥 거기만 있어요. 그러고보면 요셉이라는 인물은 어쩌면 과거 지향적인 사람이 전혀 아니고 그냥 어디에 있든지 그 현실에서 잘 살아가는 사람인 거 같애요. 만약 그런 요셉이라면 어떻게 요셉과 요셉의 가족들이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정말 가능성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듯이
7년 동안의 풍년과
7년의 흉년의 사건이 있었잖아요. 그거는 천지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이제 내리신건데, 하나님께서 왜 하필 이집트와 가나안에
7년 풍년과 흉년을 계획하셨을까요? 사실 이 흉년과 풍년 사건이 없었다면 이 가족들이 만날 가능성이 사실은 없었다고 보여져요. 우리가 알듯이 이집트에는 곡식이 잘 준비됐는데 가나안에 곡식이 다 떨어지고 나니까, 흉년
2년째에 가서 곡식이 이집트에는 많이 있다는 소식을 들은 야곱이 아들들을 보내게 된 거잖아요. 그것이 계기가 되서 이제 요셉이 어느 날 그 총리 자리에 앉아있을 때, 멀리서 곡식을 찾아온 사람들을 보니 몰골이 형들인 것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그 큰 구원의 섭리를 깨닫게 된 거죠. 어렸을 때의 꿈이 이렇게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 이산 가족의 화해 상봉의 스토리는 누구 작품이예요? 정말 하나님 작품이라고요. 사람은 깨고 부수지만, 하나님은 주선하는 상봉의 자리를 주선하셔서 다시 화해와 회복을 이루게 하셨다는 것. 그런 관점에서 성경의 스토리들을 읽어보면 참 많이 있습니다. 다 나눌 순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는 이 땅에서 관계를 실패하고 깨고 결국 샬롬을 잃어버리지만, 하나님은 다시 우리를 만나게 하시고, 화해케 하시고, 회복되게 하셔서 정말 하늘의 샬롬을 누리게 하신다는 것.
‘샬롬은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라고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한번 주먹을 한번 불끈 쥐어 보죠. 이 불끈 주먹, 우리가 어떤 때 불끈 주먹을 쥐죠? 불끈 주먹을 쥘 때 우리의 마음이 이 안에 담겨져 있는 거죠. 여러가지 생각과 마음이. 근데 한번 손을 펴보세요. 우리가 어떤 때 손을 펴나요? 근데, 이 불끈 쥔 주먹과 편 손에는 전혀 다른 대조된 것들이 담겨져 있는데요. 우선 우리가 상대방을 거절할 때 불끈 주먹을 쥐죠. 하지만 편 손은 상대방을
welcome하는 마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불끈 주먹을 쥘 때는 내가 더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 조급함, 서두름이 있다면, 편 손은 잠잠히 기다리는 마음을 담고 있는 거죠. 그리고, 불끈 쥔 주먹은 이제는 이 주먹 밖에 없다라는 절망적인 상황을 담고 있다면 편 손은 그래도 희망을 담고 있는 거죠. 그리고, 불끈 쥔 주먹은 나의 뜻을 성취하겠다는 마음을 담고 있다면 편 손은 섬기고 당신의 뜻을 따르겠다는 것을 담고 있는 거죠. 그리고, 불끈 쥔 주먹은 상대방을 때릴 때, 상처를 줄 때 사용한다면 우리 언제 손 펴죠? 매 맞을 때 펴쟎아요. 근데, 이 불끈 쥔 주먹과 편 손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먼저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실 때 불끈 쥔 주먹으로 다가오시는 게 아니라 편 손으로 다가오시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잖아요? 하나님은 우리를 허물과 죄 투성이지만 우리를
welcome 하시는 분이시고,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서 서두르거나 조급해하지 않으시고 기다려주시는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우리에 대하여 결코 절망하지 않으시고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시는 분이시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고자 하시는 분이시지만, 사실은 아까 제가 이스라엘의 왕을 세우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고집을 꺾지 않으시고 때로는 우리가 우리의 뜻대로 하도록 허락해주시는 분이시고, 그분의 뜻을 고집스럽게 끌고 가는 분이 아니시라고요.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때리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 때문에 맞으시는 분이시죠. 그 편 손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정말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샬롬이 어떤 것인지 우리가 배울 수 있게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도 동일한데요, 우리가 하나님께 불끈 쥔 주먹을 쥐고 갈 수 있겠죠. 때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너무 선대하시기보다는 나를 너무 힘들게 하신다는 이유로 하나님에 대하여 저항하는 마음이 생기고 하나님에 대하여 더이상 기다릴 수도 없고 그래서 내 뜻을 이루려고 하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을 계속 원망하는 마음으로 달려갈 수도 있겠죠. 그러나, 그것이 때로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을 향한 몸부림일 수는 있어도 우리도 알듯이 정말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나됨을 이룬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손을 펼 때겠죠. 하나님을 우리가 welcome 하고 그분에 대하여 서두르지 않고 잠잠히 기다릴 때, 하나님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을 때, 그리고 나의 뜻을 이루려고 하기보다 하나님의 뜻을 섬기려고 할 때, 그리고 때로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yes 하지 않고 no라고 응답하시는 그 매맞음을 경험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편 손으로 그분을 만나고 다가갈 때, 우리가 진정 하늘의 샬롬을 얻게 된다는 것. 그것은 동일한 우리 인간 관계도 동일하다는 것을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우리의 인간 관계는 서로 주먹을 쥐기가 참 쉬운 것 같애요. 우리가 서로를 환영하기 어려울 때가 참 많아지고, 우리가 서로에 대해서 조급해지기 쉽고, 사람에 대한 희망을 이제는 내려놓게 되고, 그리고 나의 뜻을 성취하려고 하게 되고 상대방을 아프고 상처를 주게 될 때가 참 많은거죠.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예수의 평화 그 샬롬을 이 땅에 전하고자 한다면 그 길은 우리의 쥐어져 있던 주먹을 펴는 길 밖에 없다는 것.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처럼 우리가 함께 있는 이들을 심지어 나를 아프게 하고 공격하는 이들에 대해서도 welcome하는 마음으로 손을 펴고 그리고 결코 조급하거나 서두르지 않고 잠잠히 서로에게 기다려줄 수 있고, 사람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그리고 나의 뜻이 있지만, 오히려 상대방의 뜻을 꺾으려고 하기보다 섬겨주려는 마음을 갖고, 때로는 상대방 때문에 내가 아픔과 고통을 겪지만 그것을 묵묵히 인내로 받아들일 때, 그 때 우리는 정말 샬롬을 알고 또 이해하고 전하고 또 누리게 하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것이 정말 진정한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고요. 우리의 관계는 contract가 되기 쉬운 거 같애요. 심지어 결혼 관계도 우리가 사랑의 언약을 맺지만, 상대방에게 달려있다는 거죠. 상대방이 잘해준다면 나도 잘해줄 수 있지. 하지만, 상대방이 전혀 잘해주지 않는다면 나도 잘해줄 이유가 없다. 사실 그런 관계라면 인간 관계는 다 거래가 되고 말 것입니다. Contract를 맺은 거겠죠. 그러나 그 contract의 관계 속에 진정한 샬롬은 있을 수 없다는 것. 어렵지만, 진정한 샬롬은 covenant에서 이루어진다는 것. 우리의 상태와 관계없이 변함없는 사랑을 갖고 우리에게 찾아오신 하나님,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샬롬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되는 것처럼 여전히 우리도 이 땅에 진정 샬롬을 기대한다면 우리가 covenant의 마음을 갖고 서로의 관계들에 신실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봅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말씀을 이제 마무리하는데요. 자연을 다시 한번 잠깐 엿보면서 생각해보고 싶어요. 우리에게 정말 주되신 그분의 통치가 있습니다. 우리가
‘Be under God’s control’로 살아가는 게 너무 중요한 거 같애요. 그리고 정말 ‘Be yourself’ 우리 스스로가 되는 게 너무 중요하다는 것.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고 나의 역할에 충실한 것. 그러면서도 ‘Be patient’ 우리 서로에게 정말 인내할 수 있을 때, 그때 우리는 샬롬, 자연의 세계에 있는 샬롬을 우리의 관계 속에서도 이룰 수 있고 그 샬롬이 우리를 통해서 세상 전체까지 확장되기를 기대하시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