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삶에 구현된 하나님 나라의 모습 – 신선묵교수


저는 신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데  코스타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신학적 내용을 말씀해달라고 부탁받게 되어 강의를 맡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여러 가지 개념적인 정의를 내릴 있고,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선 어떤 것을 정의하는 문제를 얘기해보겠습니다. 어떤 것을 정의할  “A A이다.”라고 수도 있지만 “A B 아니다.”라고 설명할 수도 있을 같습니다. 

제가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를 고민하면서 LA에서 이곳으로 오는 비행기를 타고 왔습니다. 여러분 나이쯤 되는 여학생이 바로 옆에 앉아 있었고 그다음 자리는 비어 있었습니다. 비행기가 이륙하기 직전에도 자리가 비어 있어서 속으로 여학생이 그리로 가길 바랐습니다. 그러면 편하게 가겠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비행기가 뜨기 직전에 어떤 아주머니가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이 자리를 지나쳐 가서 다행이다 싶었는데 다시 빈자리로 돌아왔습니다. 비행기가 이륙한 후에 각자 책을 보면서 가고 있는데 아주머니가 아가씨에게 뭐라고 하는데 아가씨가 아줌마에게 쏘아붙였습니다.
어떻게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렇게 할까하는 생각을 했는데, 아주머니 또한 정신이 없어 보였습니다. 저는 불을 켜고 책을 보고 있는데 아주머니는 제가 아래서 책을 보았습니다. 나중에 보니 분은 모녀지간이었고 어떤 상황인지 모르지만, 갈등이 있었습니다. 딸은 어머니에게 혐오감을 느끼고 있었고 어머니는 딸에게 어떻게든 얘기해 보려고 했습니다. 그들의 갈등과 마디 마디를 보면서 어떤 마음을 느꼈는데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도와주고 싶은데 도와줄 수가 없었고, 상담할 수도 없었고, 아픔만을 내가 느끼면서 너무 아프겠다, 힘들겠다하는 생각을 하며 왔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런 모습들이 우리의 삶에도 우리의 관계에도 있고, 제가 이것을 보면서 하나님 나라의 반대에는 사단의 나라가 있고 사단의 나라는 바로 저런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분들이 사단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들도 피해자입니다.
인간관계와 모든 속에서 사단은 어떻게든지 사람들 사이에 갈등을 일으키고, 죄의식을 일으킵니다.
그것 때문에 바른 사랑을 못하게 하고 사랑이라고는 하지만 인간의 사랑이 죄로 물들어 있기에 남에게 아픔을 주고, 아픔을 받으면 내가 밀쳐내고 더한 아픔을 줌으로써 자기가 살아가려고 합니다. 이런 아픔과 힘듦과 갈등이 사단의 나라가 아닌가 합니다. 원래 우리에게 하나님이 계획하신 나라는 그런 나라가 아니라 정말로 사랑과 화평과 기쁨과 평안함이 있는 나라였는데 어느새 사단이 인간의 태초인 아담으로부터 인간의 삶에 들어오고, 인간의 삶에서 자신이 노릇하고, 인간의 삶을 다스리면서 사단의 인도함을 받게 하고, 사단의 원칙을 따르게 하였습니다. 결과로 많은 고통을 가지고 살게 것이 사단의 나라의 모습이고 그런 것이 인간  삶의 현재 조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제가 구약에서 다니엘서를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얘기하는데 오늘은 얘기는 하지 않고 넘어가겠습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하나님의 나라가 있는데 사단이 인간의 삶을 조정하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부르시고,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훈련하고 가르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통해서 세상의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회복하도록 계획 하시고, 추진하신 것이 구약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일들입니다. 다니엘서를 간단히 설명 드리면 다니엘서는 하나님이 왕이시다, 주권자이시다는 주제를 가지고 쓰인 책입니다. 책을 보면 다니엘과 다니엘의 삶에서 하나님이 왕이심을 보여주고, 다니엘의 친구, 신앙의 공동체에서 하나님이 왕이심을 보여주고 있으며, 하나님이 세상의 왕이신 것이 세상으로 대변되는 느부갓네살왕을 통해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당시 무엇이든지 있는 왕에게 정신병이 들게 하고, 왕은 동안 들판에 나가서 잠을 자고 풀을 뜯어 먹으며 지내다가 하나님이 정신을 회복해 주셨습니다. 경험을 통해서 느부갓네살왕은 내가 왕이 아니고 하나님은 왕이시다는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은 기독교 공동체만을 다스리는 왕이 아니라 세상을 다스리시는 왕이십니다. 느부갓네살이 꿈을 꾸었는데 꿈을 다니엘이 해석해 주었습니다. , , , , 흙으로 동상이 뜨인 돌에 의해서 부서지고 가루가 되는 꿈이었습니다. 이들은 바빌론과  페르시아 그리고 로마, 인간의 왕국을 상징합니다. 예언을 푸는 사람들은 이것이 구체적으로 어느 나라인지 풀려고 하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이라기 보다는 중요한 것은 인간의 왕국이 계속 바뀌며 지속하는 가운데 언젠가 하나님의 나라가 땅에 임해서 모든 인간의 왕국을 폐하고,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예언이 가르치는 것은 인간의 역사가 왕들이 자신의 권력을 확장하여 다른 왕국을 멸하고 새로운 왕국을 세우고, 자신이 왕이 되는 그런 역사가 계속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를 방향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땅에 서는 방향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개인의 삶의 왕이시고, 신앙 공동체와 세상의 왕이십니다. 사람들이 알지 못해서 고백하지 못하지만,
속에서 하나님은 주관하십니다. 그리고 인간의 역사도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다니엘서에서 그런 것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왕국이 계속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예언대로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임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땅에 가져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성육신을 통해서 인간이 되시고, 십자가와 고난을 통해서 죄의 값을 지불해 주시고, 부활을 통해서 생명을 처음으로 가지시고 오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이 원래 계획하셨던 평화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죄의 해결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임했다고 선포하시고, 우리가 이러한 선물들을 구원자 예수님 안에서 받고 누리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 것입니다. 원래 계획하셨던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삶의 모습들이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이뤄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해결되고, 마음속에 평안함이 생기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뿐만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로서 예수님의 고난과 낮아짐과 섬김의 삶을 살도록 명하셨습니다.

이번에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배우면서 부분을 많이 강조하였습니다. 우리도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길을 가야 합니다. 얼마 전에 학생과 식사를 함께 했는데 학생이 자신은 고난을 선택해서 있는 용기가 없다고 얘기했습니다. 마음에 부담이 있었나 봅니다. 구주로 예수님을 받아 드렸지만, 예수님을 주로 받아들이기 힘든 부담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것을 받아 누리기를 꺼리는 마음이 있습니다. 부분을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에 임하셔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여 평안을 주시고, 예수님을 우리가 구세주로 영접함을 통해서 자녀의 관계가 회복되었는데, 그다음으로 우리에게 낮아지는 , 섬김의 , 희생의 삶을 살라고 예수님께서 삶과 말씀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부담으로 다가오는 것이 사실입니다. 말은 쉽지만, 실제로 우리가 살려고 하면, 그리고 이것이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이라면 굉장히 부담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자들이 벽을 넘지 못하고 갈등 속에 있습니다.

전에 제가 LA에서 목회하시는 미국 목사님 스웬들이라는 유명한 목사님이계시는데, 그분의 설교집을 읽으면서 맞는 얘기구나 생각했던 예화가 있습니다.  어떤 분이 LA에서 뉴욕을 가려고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계를 가져오지 않아서 옆에 시계를 사람에게 지금이 시인지 물었습니다. 사람은 뉴욕의 시간뿐 아니라,  온도와 기상 상태까지 말해주었습니다.
사람이 궁금한 것을 시계를 보면서 얘기해 주었습니다. 사람이 시계에 웬만한 정보가 있다는 것에 감동해서 시계 주인에게 시계를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분은 당신이 원한다면 드리죠. 오천 불입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사람은 비록 값이 비싸지만 원하는 정보들을 얻을 있다면 얼마나 좋은 시계인가 하는 생각에 오천불을 주고 시계를 샀습니다. 시계를 받고 떠나려는 시계를 사람이 잠깐만요하고 부르더니, 시계를 쓰기 위해 필요하다고 개의 이민용 가방을 주었습니다. 컴퓨터가 작동하려면 이것을 들고 다녀야 하고 시계만 가지고는 동작이 안된다고 말했습니다. 많은 경우에 기독교 신앙이 우리에게 이런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그저 기독교로 들어오면 죄가 용서되고 하나님이 자녀 삼아 주시고 모든 것이 은혜로운 것으로 인식됩니다. 예수님을 믿기로 하고 교회에 갔더니 매일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시계를 가지려 했더니 이민 가방 개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시계를 포기해 버리고 맙니다. 구원의 부분은 좋은데 Lordship
부분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는 있어서 매일 같이 주저함이 있는 것이며, 그런 갈등 속에 코스타에서 가야 한다고 하니 것이고 집회 동안 고난의 , 십자가의 길을 가야지 하고 결심했다가 집에 돌아가면 결심은 단지 은혜 충만할 것이고, 그렇게 없다고 돌아서고 마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의 성격에 대해서 얘기해 보고 싶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lordship 짐이라고 생각하는 구원이 선물인 만큼 lordship 선물입니다. 사실 구원도 선물이지만 십자가의 삶은 선물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것을 가르쳐주시면서 높아지는 삶보다는 낮아지는 , 지배하는 삶보다는 섬기는 , 받는 삶보다는 주는 , 원수를 갚는 삶보다는 용서하는 삶을 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런 것이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들입니다. 원리는 다양한 모습으로 표출되지만,
안의 원리들을 한마디로 얘기하면 역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역설(paradox)입니다. 파라독스가 무슨 뜻입니까?  파라독스는 언뜻 보면 모순이고 말이 되지만 거기에 진리가 있습니다. 높아지기 보다는 낮아지는 , 지배하기보다는 섬기는 , 받기보다는 주는 , 이것을 처음 보면 말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선물을 주신다면서 어떻게 이것이 길입니까. 말이 안됩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것이 행복에 이르는 바른길입니다. 우리가 높아지면 행복해질 같지만, 사실 행복은 높은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배하면 좋을 같지만, 사람들이 좋아하는 지배자는 사람들을 섬기는 지도자입니다. 원리들이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길을 가라고 하신 것은, 내가 좋은 선물을 주었으니 이제 힘든 길을 가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통해서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행복한 삶을 우리에게 주시고자 진리를 주신 것입니다. 진리는 언뜻 보기에는 말이 되지 않지만 진정한 의미의 행복에 이르는 길입니다.

사실 우리의 삶은 역설의 삶입니다. 우리가 건강하고자 운동을 많이 하는데, 운동 자체는 힘이 들고, 시간도 많이 듭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운동을 합니까? 고난을 거친 후에 건강한 때문에 힘든 운동을 기꺼이 하는 것입니다. 운동을 선택하는 자체만 보았을 때는 말이 되지만 그것이 건강한 삶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에 가치가 있고, 기쁜 마음으로 돈을 내면서도 합니다. 공부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가끔 있고, 공부가 가끔은 재미있지만, 기본적으로 공부는 힘들고, 하기 싫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공부를 해야 필요가 없는데도 공부를 선택한 이유는 그것을 통해서 보상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Lord라는 것이 우리가 무조건 명령에 순종 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이 (lord)라는 사실이 진정한 행복과 진정한 의미의 하나님의 나라, 구원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나라, 정말로 깊은 의미의 하나님 나라로 우리를 인도한다. 아까 말씀드린 비행기의 어머니와 딸의 관계에 많은 갈등과 아픔이 있는데 중에 누군가가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원리대로 살아간다면 아마도 그들의 관계가 조금씩 회복될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딸이 엄마가 나를 불행하게 한다는 이유로 엄마를 원망하거나, 혹은 엄마가 딸의 삶을 계속 조정하려고 하는 것은 사탄이 원하는 삶의 원리이다. 그런 사탄이 원하는 삶의 원리들을 따라서 산다면 어떻게 보면 제가 보았던 둘의 반응이 자연스러운 것일지 모르지만, 삶에는 계속 사탄이 일으키는 아픔과 상처가 계속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원리대로 딸이 분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엄마를 용서하기로 선택할 있다면 그런 선택이 당장에는 말이 되어도 그런 용서를 통해서 둘의 관계가 회복되고 결국 하나님의 나라가 관계 속에서 가정 속에서 임할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래서 낮아지고 섬기는 삶이 우리에게 도전되고 힘이 들지만, 예수님께서 이러한 삶의 원리를 주신 것은 우리를 괴롭게 하려는 것이나, 좋은 것을 주었으니 정도는 해야지 하는 식이 아니라 우리에게 정말 깊은 하나님 나라의 축복과 은혜를 경험하게 하려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진리입니다. 명령으로가 아니라 진정한 하나님 나라를 위한 원리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고난을 선택하는 것은 그것을 통해 약속된 축복이 있기에 기쁨으로 선택하는 것이며 죽지 못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너무 고난을 선택하려 하지 마십시오. 작은 고난, 작은 낮아짐, 작은 양보로부터 그런 삶의 맛을 보면서 하나님 나라의 원리가 이렇게 실제적이구나 하는 느끼십시오. 그러면 그런 가운데 신앙이 성숙해지는 것을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질문 있으신 계십니까?

질문: 사탄이 생겼고, 하나님이 사탄의 행동을 저지하시지 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모두 궁금해하지만, 정답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닌 같습니다. 굉장히 신학적인 질문인데,
하나님이 사탄을 허용했다기보다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선택하는 사랑을 받으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선택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사단의 유혹을 선택했습니다.질문에 대한 정확한 대답은 아닙니다. 가장 신학적인 질문이지만 아무도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통해서, 그리고 예수님의 삶의 모범과 말씀과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 가운데 임했고, 우리가 구원자로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사함을 받고, 양자 됨을 가지고 살아가고, 때로는 주저하기도 하지만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삶의 원리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물론 사람마다 성숙한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사람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 안에서 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함으로 사단의 권세가 멸하고 예수님을 통해서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의 삶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탄의 영향력은 아직 세상에 남아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 나라가 땅에 임한 것을 모르고 의식하지 못하며 사탄이 조정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크리스천들의 선교적인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교적 사명은 성경의 요나서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에 가서 심판의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요나에게 느니웨는 비유로 말하자면 한국사람에게 일본과 같았습니다. 이스라엘을 박해하는 원수와 같은 나라였습니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이 빨리 멸망 받아서 자신의 나라가 행복해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겼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러니 요나가 가기 싫어했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갔습니다.
그때 요나는 풍랑을 만나서 바다로 던져졌고 고래 배속에 들어갔는데 고래가 요나를  니느웨에 토해 놓습니다. 요나는 없이 다시스 사람들에게 심판의 메세지를 전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요나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심판하는 것을 즐기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지 않으셨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요나서의 진정한 교훈은 4장에 있습니다. 많이 얘기되지 않는 주제가 4장에 있습니다. 요나는  짜증이 났습니다. “그것 봐요. 하나님, 내가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필요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어차피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이시고 용서해 아니었습니까?” 요나는 하나님께서 용서하셨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요나는 용서하시는 하나님에게 화가 있다가  담벼락 아래서 잠을 자기 시작했습니다. 호박 덩굴이 위에서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벌레를 보내서 덩굴의 줄기를 먹어서 마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늘이 없어졌습니다. 이미 화가 났던 요나는 하나님,
잠도 자게 합니까? 나를 괴롭히십니까? 내게 그늘을 주는 덩굴은 없애십니까?” 하고 불평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니느웨에 있는 수십만의 사람들과 수만 마리의 소와 양을 바라보시며 자신의 소유인 그들이 하나님 나라에 사는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앞뒤를 분간 하며 사탄의 저주에 이끌려 사는 것을 안타까워 하셨습니다.“너는 호박 덩굴 하나에 분노하고 안타까워하는데,
많은 사람과 양과 소를 향한 나의 마음을 이해해주지 못하니?”하고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지만 세상의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의 왕이시고, 세상을 똑같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귀한 자식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사탄의 조정을 받는 삶을 살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먼저 부르시고, 모든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삶으로 회복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자신만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 생각하며 다른 사람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요나는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요나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세상이 나의 창조물인데 나의 안타까움을 몰라 주느냐? 너희를 부른 이유가 무엇이냐? 내가 너희를 먼저 사랑해주고, 다른 사람들을 향한 나의 사랑을 확신시켜주기 위함인데 그것을 모르느냐?” 이것은 이슬라엘에게 주어진 음성이며 오늘날 교회에 주어진 음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삶이 주는 축복과 하나님 나라의 깊은 의미를 알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선교를 향한 우리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 안에서 세상에 임했는데 아직도 사탄의 조정 속에서 앞뒤를 분간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도 있고,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도 사단 때문에 직간접적으로 어려움을 당합니다. 번째 어려움은 위협입니다. “네가 하나님 나라의 원리로 산다고? 세상에서 너의 삶이 한심해지고 비참해지고 거야!” 파라독스의 삶은 역설이기에 당장에는 말이 되고 세상의 기준으로도 설명이 됩니다. 그러므로 길을 살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삶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행복으로 이르는 길이라는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 믿음인데 사탄이 여러 가지 경로로 우리를 위협합니다. 위협이 아니면 유혹을 합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지 못하도록 사탄이 온갖 수단과 방법을 씁니다. 이것이 신앙인들이 당면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때로 넘어집니다. 그러한 삶을 우리 성도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의 재림을 통해서 땅에 온전히 성취하게 된다고 했고, 다니엘서에는 인간의 나라가 교체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가 땅에 임했다고 말하고 있고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가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중적으로 임한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구약에서 말하는 것과 신약에서 말하는 것이 어떻게 다른가하는 의문이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어떨까요? 우리가 예배 드리는 본당을 때에 다니엘은 본당은 여기 있습니다.”라고 얘기한 것입니다. 우리가 본당에 가서 앞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본당의 뒷문은 다른 쪽에 있습니다. 들어오는 문과 나가는 문이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 나라를 멀리서 바라보며 하나님 나라가 것이라고 얘기했는데,
실제로 하나님의 나라에는 앞문과 뒷문이 있습니다. 시작이 있고, 나라의 완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곳에서 살고 있지만, 그것의 완성을 바라보고 기대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우리가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번째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도 하나님의 주권으로 임했듯이두 번째 하나님 나라의 완성 또한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것을 해야 한다면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지 자신이 없습니다. 우리의 유혹과 고난을 때마다 하나님의 나라가 오는 것이 아슬아슬해 보이지만,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우리가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가져오시는 것이기 때문에 믿음과 소망으로 오늘을 살아갈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지만, 넘어지고, 유혹에 빠지고, 때로는 포기하기도 합니다.
그것으로인해서 하나님 나라가 우리 삶에서 약해질 , 사탄의 원리가 우리 삶을 지배할 우리는 삶의 어려움에 직면합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 나라의 원리 속에 살아야 함을 다짐하며 고난의 순간마다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게 됩니다. 고난이 없을 때에는 세상에 만족하며 삶에 안주하게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고난과 인간관계의 갈등을 통해서 만족은 삶에 없는 것을 깨달으며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게 됩니다. 그런데 소망함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소망함으로 현재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삶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다른 질문 있으십니까?

질문: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의 오심으로 시작되고,
재림으로 완성된다면 땅에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이룬다는 것이 어떤 의미입니까?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룬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실제로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삶의 원리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리는 것입니다.   

 

[이유정] 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윌로우크릭교회?

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윌로우크릭교회?
 
 
미국 내 가장 영향력 있는 윌로우크릭교회에 대한 한국교회의
평가는 지나친 감정적 대응 아니면 무비판적인 수용 등 양극단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최근 옥성호의
‘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라는 책에서 이 교회를 전형적인
마케팅교회로 정면 비판했습니다. 여기서 이 책에 대해 비평의 잣대로 반론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또한 그가 ‘마케팅에 물든 교회’로
규정하는 기준이 ‘부족한 포스트모더니즘 이해’를 근거로 한다는 아쉬움도 크게 반박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의 용감한 지적이 최근 윌로우크릭교회와 네트워크
교회들이 그들의 사역 철학과 프로그램에 대해 수년간 연구한 결과를 세상에 발표한 ‘Reveal: Where Are
You?’(2007)라는 책에서 어느 정도 드러나고 있음을 보고 놀랐습니다. 교회가 수많은 재정과 열정을 들여서 다양한 프로그램과
봉사활동을 잘 만들어(create) 놓으면 회중은 여기에 참여(participate)함으로 성숙해질 것이라는 이 교회의 사역 철학이
회중의 삶의 현장에서는 생각만큼 열매가 없었다는 것으로 밝혀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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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러한 비평의 시각에 대해 두 가지만 지적하고
싶습니다. 첫째는 이 책(Reveal..)의 의도는 윌
로우크릭교회의 핵심 타겟 회중인 ‘해리와 매리’에 대한
근본적인 부정은 아니었다는 것입
니다. 즉 이미 크리스천이 된 교회 성도들의 영적 성숙
프로그램에 대한 전략적인 방향전환일
뿐, 이 교회의 존재기반인 구도자예배 사역 자체를 뿌리 채
부인하는 ‘실패’는 아니었다는 것
입니다.
 
두 번째는 안타깝게도 옥 형제의 비판의 목소리에는 30년
목회 현장에서 잃어버린 영혼에 대
한 뜨거운 열정에 사로잡혀 눈물과 피땀흘려가며 회중과
씨름해온 한 탁월한 리더의 헌신적
인 열정에 대한 존경과 격려는 없고, 실수하고 부족한
리더에 대해 비난하는 태도만 배어있
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실수했다”>
한편, 부끄러운
교회의 치부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일급비밀 내부문서를 백일하에 드러낸 윌
로우크릭교회의 핵심 리더십(그렉 허킨스와 콜리 파킨슨)의
결단도 놀라운데, 이 연구 결과에
대한 빌 하이벨스의 반응은 더더욱 존경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이 보고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고, 인정했습니다. 작년 리더십
서밋(Leadership Summit)에서 전 세계 교회지도자
수만 명 앞에서 “우리가 실수했다(mistake)”고
겸허하게 고백했습니다. 중년의 자신은 물론
교회를 향한 자명종(wake-up call)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일부 한국 인터넷 언론은 이를 ‘실패’로 보도했는데 지나친
과장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초대형교회 담임 목사가 이러한 고백을
진실되이 할 수 있다는 것, 실수를
인정하며 과거를 지워버리고 근본부터 다시 시작하려는
윌로우크릭교회의 열린 태도를 보면서
적어도 그동안 이들이 성장을 위해 일부러 마케팅 수법을
이용함으로 거짓된 가설(assumption)
에 물든 비난받아 마땅한 교회가 아니었음을 증명해준다고
확신합니다.
 
<무너지는 구도자와 신자 사이의
벽>

이들은 이미 새로운 세대와 새로운 회중의 변화를 감지하고 예배의 방향을 조정하기 위한
내적 개혁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2001년부터 이 교회
뉴커뮤니티 워십리더 섬겨온 커트 코필드
(Curt Coffield)에 의하면, 실재로 현재
윌로우크릭교회에서도 ‘구도자 예배’ 참석자들과 주중 ‘신
자들의 예배’ 참석자들 사이의 벽이 차츰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 말은 참석하는 회중의 분포도가 바뀌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즉 교회에 대한 실망과 상처가 있는 베이비부머 세대 구도자에서 교회에 대해 아무런
저항감이 없는 포스트 베이비부머 세대 구도자로 바뀌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변화에 따라
윌로우크릭의 예배 정책이 향후 수년간 어떤 형식으로 바뀔지 매우 기대가 됩니다.

 
이처럼 포스트모던 사회 속에서 예배 회중의 구성원을 말할
때, 우리의 회중 스펙트럼은 과거와는 명백하게 달라져야 합니다. “온전한 예배는 온전한
신자만이 가능하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비신자들이 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구호는 복음전도를 가로막는 말로써 위험수위가 높습니다.

 
성경 어디에서도 이들이 절대로 예배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예배당 문 앞에서 저지하라는 구절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모겐달러(Morgenthaler), 던(Dawn), 올슨(M. Olson), 웨버(R. Webber) 암스트롱(R. Armstrong) 등 많은
예배학자들이 ‘진정성 있는 예배에 비교인들이 더욱 관심을 갖는다’는 의견을 지지합니다.

 
이유정 목사(한빛지구촌교회 예배 디렉터,
좋은씨앗(CCM))

2008 KOSTA/USA 참석자 좌담회 – 서정석, 서혜진, 최자영, 한동호

이코스타 2008년 8월호

eKOSTA:
먼저 자기소개를 부탁합니다.

서혜진: 샌프란시스코 베이지역에서 남편, 아이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이번 코스타에서는 기혼조 조장으로, 북부 캘리포니아  지역의 코디로 섬겼고, 조장은 이번이 번째였습니다.

한동호: 네브래스카에서 정치학 박사 과정에 있고, 미국에 지는 3, 그리고  코스타에 참가했습니다. 조장 참가했고 이번에는 조원으로 참가했습니다.

최자영: 시애틀에 살고 있고, 코스타 참가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조원이었구요.

서정석: 뉴욕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으며 이번이 처음 참석입니다. 기혼자 신학생 그룹 조장으로 섬겼습니다.

eKOSTA: 이번 코스타 전체를 평가해보겠습니다. 전체적으로 평가해주시고 가장 좋았던 점과 아쉬웠던 점을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특히 아쉬웠던 점에 대해서 건설적인 비판을 해보겠습니다.

KOSTA/USA 2008 주제가 ‘The way to live: Thy kingdom come’이었습니다. 주제가 시대에 세계에 흩어져 있는 한인 청년 학생들에게 필요하고 적절한 내용이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아니라면 어떤 점이 아쉬웠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한동호: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주제가 굉장히 중요하다 생각이 들었고, 코스타 참석하면서 아주 일관성 있게 적용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전체적인 분위기 맘에 들었습니다.

eKOSTA:작년 코스타의 주제와 연결이 되었습니까?

한동호: 작년에는 주제가 시대를 본받지 말고로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차별화된 삶이었는데 올해는 구체적이고 직접적이란 느낌입니다. 비슷한 주제가 흐른다고 생각합니다.

최자영: 한인 청년 학생들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하고, 시대에 적절하며, universal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살아야 주제였다고 생각합니다.

서정석: 보통 하나님 나라에 대해 얘기하면 추상적이라 개념을 이해하기 어려웠던것 같은데 이번에는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 들으면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확인할 있었습니다. 청년 학생들로서, 다른 나라에 흩어져 있는 학생들에게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는데 중요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서혜진: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중요할 뿐만 아니라 청년들이 굉장히 관심이 많은 주제였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주제 때문에 가기로 하신 분들도 있었고, 작년 주제와도 아주 연결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작년 주제 찬양도 계속 불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반면 주제에 대한 열망이나 관심과 비교하면 주제가 아주 전달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코스탄들 마다 주제를 묵상하고 이해한 정도가 다른 같았는데, 그런 부분을 고려해서 주제전달이 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 나라의 이중 구조에 대해서도 들어보지 못한 코스탄들도 있었는데, 그런 것들이 설명이 되지 않고 집회에 참석하게 되니 좀힘들지 않았을까 합니다. 말씀과 세미나도 주제가 들어맞았지만, 강사님들께서모두들 그런 기초가 있을 것이라 가정하고 들어가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개인적으로는 작년에 김도현 교수님의 특강이 주제를 잡아 주었던 것처럼 많은 코스탄들이 맥을 잡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주제 세미나가이재천 목사님의그런 역할을 하긴 했는데 보다 많은 코스탄들이 그런 과정을 통해서 주제를 접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주제 세미나가 주제 세미나인지 몰랐던 사람들도 많았고, 그것을 통해서 제공된다는 것도 모르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주제 자체는 아주 적절하고 필요했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신학적인 바탕뿐만아니라 개인적인 삶에서 하나님 나라까지도 다뤄져서 좋았습니다.

eKOSTA: 그러면 개별 프로그램을 평가해보겠습니다. 전체 집회에서 설교하거나 강의한 내용에 대해서 어떻게 느끼셨습니까? 이번 코스타의 주제가 전달되었습니까?

최자영: 저도 서혜진 자매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정말 중요하고 살아야 주제를 갖고 나왔는데, 그게 전달되지 못했던 것이 굉장히 아쉬웠습니다.

eKOSTA: 코스타에서 주제의 역활이 아주 커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최자영: ‘주제’라는 자체가 모든 것을 꿰뚫어 전체를 하나의 흐름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제가 ‘하나님의 나라’였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사람이든지 계속해서 생각해 사람이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야기하기 위해 기도가운데 그런 주제를 들고 나오신 아닙니까? 주제에 대해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서, 주제를 놓고, 반복해서 얘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eKOSTA: 주제를 전달하려면 어떤 부분들이 필요할까요?

최자영: 개인적으로 코스타가 과연 무엇인가,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하는가 하는 질문을 가지고 집회에 참여했었는데 결과적으로 충분히 답해지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주제의 전달에 대한 방법적인 문제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코스타가 과연 무엇이고 어떤 것을 전달하려고 하는지 이번 코스타를 통해서는 알기 어려웠습니다. 방법상의 문제인지, 코스타의 정체성 문제인지, 어쩌면 일수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메시지 전달에 앞서서 코스타 운동의 정체성이 확실해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어쩌면 지금이 새로운 phase 로의 발돋움 하기 위한 과도기 수도 있겠습니다. 이유야 어찌 되었던 메시지를 전달 받고 싶었던 사람으로 서는 많이 아쉬웠습니다.

조를 위주로 참자가 운영체계가 편의상 유용하긴 하지만 조장들에게 중간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해낼 있도록 주어진 자원이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조장들조차 코스타의 핵심 가치에 대해 온전한 이해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로 안내자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에 조장도, 조원도 힘든 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코스타의 기본 주제와 사이가 너무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었던 아닌지 합니다. 그러므로 조장의 인도로 코스타의 핵심정신이나 이번 주제가 무엇인지 이야기 된다면 도움이 되겠지만, 그것이 아니라 아주 다른 이야기를 하게 되는 일도 있어 사실, 수련회 기간에 코스타가 이야기 하려는 주제에 거의 접근이 힘들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빡빡한 일정 가운데 강의를 소화하거나 주제에 대해 생각해 시간은 모두 조와 함께 해야 하는 현실 때문에 그러했습니다.

물론 개인적인 차이는 있을 것입니다. 

조활동이 나쁜 것은 아니었습니다. 좋은 사람들과 모여 서로 알아가면서 함께 나누게 은혜와 기쁨 또한 컸습니다. 하지만, 코스타가 정말로 부르짖고자 하는 메시지가 우선순위를 가져야 하는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자꾸 빠진다면 여느 청년 수련회와 다를 것이 없겠습니다. 조금 강하게 말씀드린다면, 조를 없애던지, 아니면 조장 훈련을 강화하고, 자원을 제공해서, 코스타의 주제를 이해할 있는 환경을 마련하기 문제를 파격적으로 개혁하든지 결정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서정석: 어떤 집회의 영향이 개인의 삶에 영원히 남을 수는 없을 같습니다. 항상 집회가 가져다준 영향을 되짚어보고 새기는 것이 각자의 과제입니다. 이번 주제에 대해서는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설명하는 것이 목적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주제가 하나님 나라에서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는 있어서 이뤄졌다고 생각합니다. 소그룹에서도 하나님 나라에서, 내가 있는 곳에서 정체성을 확인하는 방향으로 인도하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신학적인 얘기를 이끌어 가면서 이해를 하기보다는 실질적인 삶의 방향을 정하는데 좋았습니다. 내년 코스타의 주제와도 연결이 거라 생각합니다. 비판을 하자면 있지만, 주제 면에서는 개인적으로 좋은 인상을 많이 받았습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인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좋은 메시지를 많이 받았습니다.

한동호:   전체집회에서 전달할 있는 부분과, 소그룹에서 대화하면서 받는 메시지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전체 집회에서는 주제를 선포하면서 메세지를 전달한다면 조에서는 주제를 나와 연결하도록 다른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코스타가 조별로 움직이기 때문에 조장의 역량이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조장의 관심사가 이성교제라면 많은 부분에서 이성 교제로 가는 것을 봅니다. 아쉬웠던 부분은 최자영 자매님 말씀대로 전체적인 주제가 선포되는 가운데 주제에 대해서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 구체적인 대화가 없었던 같습니다. 결국은 나의 문제가 하나님 나라가 어떤 관계가 있는가에 대한 고민이 부족한 것이 아쉬웠습니다.

eKOSTA: 오후에는 주로 세미나로 채워졌는데요, 세미나 운영이나 내용에 대해서 평가해주십시오.

서혜진: 제가 택한 세미나는 개인적으로 아주 좋았고 알차고 도전되는 내용이었습니다. 가지 아쉬운 점은 올해는 선택의 폭이 좁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전에 있었던 세미나가 없어진 것도 보았고, 한정된 인원을 사용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선택의 폭이 좁았습니다. 다른 한가지는 TM 세션이 활성화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작년에는 TM 참석을 못했지만, 올해는 과학적 방법으로 성경 연구에 관한 TM 세션에 들어갔습니다. 개인적으로 좋았고 이런 것이 TM 정신에 맞는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아쉬웠던 점은 참가자 수가 , 정도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부분은 쉽게 해결할 있는, 활성화 시킬 방법이 있는 같습니다. TM 내용이 홍보되었으면 쉽게 많이 왔을 같고, 조금만 노력하면 많은  분들이 오시고 유익을 얻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만약 가능하다면 사전에 TM 선택하신 분들과  코디, 그리고 강사들이 서로 먼저 연락을 있어서 토론의 이슈도 먼저 모으면 좋을 같고,  세미나 TM 경우에는 내용이 먼저 알려졌으면 좋았을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좋았습니다.

한동호: 번째 참석했는데 동안은 이성교제와 같이 사람들이 추천하는 세미나를 많이 들었었는데, 올해는 선교라는 주제를 나름대로 정하고 선교에 대한 세미나를 들어봤습니다. 대부분은 세미나 강사로 오신 선교사님들의 경험과 가져 오신 주제에 따라 세미나의 성격이 많이 다른 같습니다. 굳이 코스타 세미나라고 하지 않아도 정도로 개성들이 강했습니다. 세미나에서 이론적인 내용보다도 실제적인 내용을 전달할 도움이 되었습니다. TM 세미나는 정치학 세미나에 들어갔는데, 강사님이 놀랄 정도로 많은 참석자가 있었습니다. 다양한 전공자들이 오셨는데, 이유가 정치학 세미나 제목에 ‘세계화’라는 시사적인 말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토론이라기보다는 각자가 가진 의견들을 한두 마디 있는 분위기였습니다.

서정석: 세미나가 주제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나 생각을 해봤습니다. 주제와의 연결이 우선순위인지 아니면 다른 면으로 필요를 채워주기 위한 것이었는지 생각해 보았는데 세미나가 주제와는 거리가 있었던 같습니다. 세미나를 인터넷으로 사전 등록을 했지만, 의미가 없었습니다. 특히 특정 세미나에는 인원이 너무 많았고, 시리즈 강의에 대한 혼동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전체 시리즈를 신청하지도 않았는데 시리즈인 것을 나중에 알고 신청하지 않은 세션에 들어가서 사람들이 너무 많았고. 나중에 알고 보니 강사님들과의 소통이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강의 선택했을 받았던 쿠폰이 거의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목회자 그룹을 담당하다 보니 저녁 11시에 유명 목사님과의 만남이 있었던 것을 알았습니다. 모임이 급조된 같은 느낌이 있었습니다. 주제가 없었고, 인도자가 정해지지 않아서 방향 없이 이것저것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주제를 먼저 주던지, 아니면 참석 가능자에게 미리 의견을 들어봐서 어떤 부분에서 듣고 싶은지, 주제나 방향을 정했으면 의미 있게 시간을 보낼 있었을 같습니다.

최자영: 세미나는 전체 주제 아래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적용할지를 얘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주제로 하나로 묶어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면 많은 참가자에게 중요하게 다가오는 결혼 문제에 그런 주제를 하나님의 나라로 풀이하기보다는 굉장히 방법적인 면으로 치우쳐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적어도 그런 것을 바라고 오는 참석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다급한 필요들을 하나님의 나라의 관점으로 보게 하려는 노력이 있었는가입니다. 또한 미혼이고 결혼이라는 것이 삶에 얼마나 중요하고 실제로 필요한지 알고 있습니다. 적어도 코스타에서는 예수님의 제자 삶이 무엇이고 십자가의 도가 무엇인가 얘기하는 가운데 이런 결혼 얘기가 있어야 하지 않나 아쉽습니다.  참가자들의 필요와 원함에 따라 여러 가지 토픽을 두루두루 갖추며 제공하기보다는, 무슨 토픽이든 하나님의 나라로 또는 그해의 주제로 연결할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TM 아주 좋은 시도인 같았습니다. 저도 정치학 세미나에 들어갔었는데, 많은 인원이 광범위한 주제를 놓고 토론하려니까 시간적, 현실적 한계가 있었습니다. 토론 주제를 좁게 잡아서 이야기하면 결국 주제로 연결되고 원래 의도였던 토론도 이루어 지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계속 활성화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KOSTA: 일주일 내내 조원들과 함께 보내셨는데, 조활동이 이루어졌나요? 어떤 점이 좋으셨고 어떤 점이 아쉬우셨는지요?

서혜진: 제가 기혼 조장으로 섬기는 동안, 사람을 보기만 해도 은혜가 되었던 가장 좋았던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 부부가 함께 있는 모습이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같은 길을 가는 자체가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혼 조가 염려의 대상이라기보다는 굉장히 가능성이 많은 사역의 대상이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특히 기혼 조의 비율이 앞으로도 점점 높아질 같은데, 이제는 기혼 조를 전체적인 운영에서 특수한 그룹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자체로 적극적으로 개발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처음으로 시도했던 기혼 조와 강사들의 만남도 아주 좋았습니다. 저희는 장평훈, 이민자 선생님께서 하시는 Q&A 들어갔는데, 굉장히 좋았습니다. 부부가 함께할 있는 세미나가 많이 개발될 있으면 좋겠습니다. 부부가 함께하기 때문에 더욱 시너지를 있는데, 그것을 살리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코스타가 부분을 앞으로도 개발해줬으면 좋겠습니다.

한동호: 저는 미혼 조에 3 참석했고 앞의 2년간 조장으로 섬겼습니다. 이번에는 조원으로 참석하면서, 조원으로 많이 있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우선 운영에서 조장의 역량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JJ에서 해의 주제와 코스타의 정체성에 대한 확실한 훈련 과정이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아침 큐티 시간이 조원들과 함께 말씀을 나눌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는데, 조장들에게 큐티 본문에 대한 훈련뿐만 아니라 소그룹 인도에 관한 훈련 또한 병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코스타의 활동이 의미와 적실성을 가지리라 믿습니다.

 

최자영:  조장으로 섬기시는 분의 헌신된 마음을 생각할 조원으로서 감사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미 말씀드렸지만 섬김을 위해 조장에게 제공되는 자원이 부족할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장 훈련이 어떠한지 들어보면, 같아도 마음이 아무리 많다 해도 정도로의 훈련으로는 시행착오가 많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조장들이 미리미리, 또는 내내 교육이 되고 훈련 받으면 조장에게도 유익이 있고, 그들이 코스타에 밀착되어 운동할 있게 같습니다. 물론 그것이 조원들에게 유익이 됨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구요.  조장들 훈련이 단기간, 훈련과 섬김의 일회성에서 벗어나서 정말 삶의 현장에서 코스타수련회까지 이어지도록, 코스타 운동의 일원이 되도록 훈련받을 있으면 좋을 같습니다.

서정석: 우선 조장들이 미리 큐티를 준비하는데, 문제가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큐티 본문에 대한 의도를 얘기해주는 메시지가 있었으면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무언가 억지로 맞추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는 얘기들도 많이 하셨습니다. 저희 조는 큐티 나눔에서 마음을 여는데 시간이 필요했던 같습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나눔 이전에 큐티 질문 자체에 대해 평가를 하게 되었고, 그런 면에서, 코스타가 생각하는 주제가 조장에게 주어지고 조장이 큐티를 만들어 가는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가지는, 기혼자 그룹은 활동이 많이 제한되어 있어서 가족이 같이 모이는 시간이나 배우자들과 모이는 시간을 확실히 프로그램화해서 각각에서 모두 유익을 얻을 있으면 좋을 같습니다.

eKOSTA: 찬양이나 금식 기도회, 엑스포, 그리고 상담 등은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이외에 운영에 관해서 코스탄들이 바라는 점이 있다면 말씀해주십시오. 마지막으로 하시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면 해주십시오.

한동호: 금식 기도회 끝나고 조금 기도하는 분위기가 이어졌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기도하고 싶어도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는 같아 안타까웠습니다. 한가지 말씀드리자면, 코스타에 참석자의 70% 처음 참석하시는 분들인데, 그들에게코스타란 무엇인가하는 점을 집회 처음 부분에 소개해 준다면, 참석자들이 빨리 적응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eKOSTA: . 전체에게 짧게나마 코스타가 무엇인지를 소개하고, 주제에 대해 안내할 있다면 처음 참석자들에게는 도움이 되겠네요.

 한동호: 해가 지나가면서 코스타의 분위기도 다소 달라지는 같습니다. 예전에는 민족을 비롯한 공동체를 생각하는 면이 있었다면, 최근에는 개인주의적인 경향이 강해지는 같습니다. 제가 아는 코스타는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는 모임이거든요. 예를 들어, 작년은 정진호 교수님의 세미나와 같이 조국과 민족을 생각할 기회들이 있었는데 비하여 올해는 특히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는 점들이 다소 약해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만일 코스타에서 나라와 민족에 대한 강조가 약해진다면, 개인의 만족만을 생각하는 소비자 기독교적 행태를 부추기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서정석: 엑스포를 홍보하시는 분들이 많은 경우 자리를 지키시지 못한 것이 아쉬웠습니다. 제가 거주하고 있는 뉴욕에서는 선교단체를 비롯한 기독교 단체를 만나기가 쉽지 않은데, 엑스포에 가서도 많은 정보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사실 코스탄들이 엑스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같습니다. 그래서 미리 코스탄들에게 엑스포가 무엇인지, 어떤 단체가 참석하고 있는지를 알려준다면, 서로에게 도움이 같습니다.

 eKOSTA: 엑스포에 관한 정보가 교재에 실리기는 하는데, 적극적인 홍보가 필요할 같네요.

 서혜진: 저는 이번 코스타에서 찬양이 좋았습니다. 이번 찬양시간이 말씀과 예배에 들어가는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했던 같습니다. 상담은 저는 받지 못했지만, 조원들과 주변 사람들을 통해 들어보면, 상담이 도움이 되었던 같습니다. 운영에서 작은 부분이지만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저는 아이가 있다가 보니, 저녁 집회를 2층에서 시작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저같은 경우 이번이 코스타 번째 참석임에도, 언제 다시 1층으로 내려갈 있는지가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보통은 일터의 현장 마치고 내려갔던 같아, 내려가 보면, 어느 날은 통제되고 있었고, 안내하시는 분들도 곤혹스러워 하셨고요. 차라리, 간사님 분이 2층에 계시면서  언제 내려오실 있다고 정확하게 안내를 해주시면 좋을 같습니다.

 최자영: 저도 찬양 시간은 매우 좋았습니다. 가지 아쉬웠던 점이라면, 기도회 많은 인원이 빠져나갔다는 점이었습니다. 2/3 빠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저도 조모임 때문에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나중에 들어보니 아이들 때문에 부모님들이 미리 나가셔야 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른 조원들을 기다리며 잠깐 기도회의 처음을 있었는데 기도회를 인도하시는 분들이 정말 많이 준비하고 기도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나가기가 아쉬웠습니다. 

eKOSTA: KOSTA 감격을 안고 열방으로 흩어진 코스탄들이 각지에서 화목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려고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특히 gpKOSTA, ekOSTA, jjKOSTA같은 KOSTA 후속 프로그램에 기대하신 바가 있으시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최자영: 지역에서의 성경공부를 통해 지속적인 말씀 묵상과 공부로 제자화된 삶을 살게 하는 것이 현재 가장 필요가 크고, 핵심적이며, 활성화되어야 코스타의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합니다. 매년 반복된다고 해도 코스타의 일회성적인 면이 부정될 없을 같습니다. 그런 한계는지역 성경공부 운동 gpKOSTA 통해 충분히 극복될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련회를 시작/마무리로 해서 일년내내 지역에서의 성경공부 모임으로 코스탄들이 계속 복음화되고 그것이 지역공동체로 연결될 비로소 코스타의 열매가 맺힌다고 생각합니다. 굳이 코스타의 이름으로가 아니어도, 지역에서 적게는 두셋이 모여 성경공부를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고 자원을 제공하여 지역교회에 소속된 사람들만이 모이는 모임이 아니라 누구나 참가할 있는 자율적이면서도 지속적인 성경공부 모임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모임을 통해 조장 , 코스타를 섬기려 하는 분들이 훈련을 받는다면, 앞에 이야기했던 조운영체계의 문제점이 많이 보완되는 것은 물론 굳이 수련회를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일년내내 자신들의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를 따라 섬기는 삶을 사는 훈련으로서도 의미 있을 것입니다. 또한, 성경공부를 해가면서 변해가는 가운데 지역교회를 섬기는 코스탄들이 교회와 동역 하면서 끼치게 선한 영향력은 어떻겠습니까? 말씀으로 변화된 삶들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 능력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대해 봅니다. 하나님께 직접 부르심을 받은 각양각색의 모습을 하나님의 딸과 아들들이 일어나 신음하는 세상으로 향할 것을 생각해보면 가슴이 벅찹니다.

한동호: 일상에서 화목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모든 코스탄들의 고민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눔의 과정에서 성공의 경험뿐만 아니라 실패의 경험도 함께 나누어져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무엇보다 말씀과 기도의 네트워크가 형성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gpKOSTA, eKOSTA, jjKOSTA 모든 프로그램들이 크리스천으로서 함께 나가는 좋은 동역의 네트워크라고 생각합니다. 혼자서만 고민하기보다는 주의 길을 함께 걸어가는 형제, 자매들과 같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서혜진: 코스타에서 부어주신 은혜가 온전히 삶으로 살아지려면, 하나님 앞에서 매일 매일 진실하게 겸손하게 있으려는 부단한 노력이 있어야 같고, 같은 길을 가는 지체들과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나아가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KOSTA 후속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아주 기대하는 바가 큽니다. 특히 제가 있는 지역 (San Francisco/Bay area) 이번 코스타 전에 gpKOSTA 열려서 같은 지역에 몸담고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서로서로를 발견하고 힘을 얻는 귀한 기회가 되었을 아니라  jjKOSTA 그리고 코스타까지 이어지는 선한 기운/동력의 출발점이 같아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gpKOSTA 내용도 지역 리더들에게 필요한 알찬 훈련이었다고 생각하기에, 앞으로도 gpKOSTA 사역이 더욱 활발해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jjKOSTA 해가 갈수록 더욱 좋아지는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번 코스타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 중의 하나가 jjKOSTA 였습니다. 강사님의 말씀이 서로 상호보완되면서 아주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했을 아니라 코스타 말씀과도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서 정말 좋았습니다. 사실 조장훈련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조장님들이 말씀으로 먼저 orient 되고 은혜 받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실제적인 운영 tip 다른 부분은 온라인 여러 다른 방법으로도 훈련되니까요.)

eKOSTA: 내년 코스타의 주제가 ‘Shalom in Jesus, Courage against the world’ 발표되었는데요, 내년 주제를 보시면서 떠오르시는 것들이 있으시면 나누어 주시겠습니까? 그냥 이미지도 좋고, 신학주제도 좋습니다.

한동호: 내년 주제를 보면서 예수님 안에서 평강을 누릴 세상에 대해서도 용기 있게 맞설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대가 됩니다. 코스타에 참석하는 이유는 광대하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안에서 함께 걸어가는 동역자들을 만나기 위함입니다. 내년에도 그런 은혜를 누리기 원합니다.

서혜진: 내년 코스타의 주제는 전도사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이번 코스타의 주제와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는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미 임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 나라의 이중구조 안에서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모습을 phrase 표현하면 내년 코스타 주제가 되는 같습니다. 갈등과 고통이 있는 세상을 살아가지만, 세상이 흔들 없는 평안을 가진 . 그러나 세상을 향해서는 세상을 거스르는 참된 용기를 가진 . 모습이 연결될 밖에 없는 같습니다. 기대됩니다.

eKOSTA: 개인적 여건이 허락된다면, 내년 코스타에 참석하시려고 하십니까? 그렇다면, 오시려는지, 혹시 아니라면 꺼려지시는지를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서정석: 저는 주제 때문에 다음에도 가고 싶습니다. 다음 주제가 이번 주제를 구체화 면이 있는 같습니다.

최자영: 코스타 참석 전에도 코스타를 귀하게 여긴 사람으로서 코스타가 세상에 소금과 빛이 되는 역할을 해왔다고 생각합니다. 나아가, 코스타가 이미 알고 있는 복음의 핵심에 집중하고 겉도는 느낌을 없앤다면 더할 나위 없을 같습니다. 계속 지켜보고 지지하겠습니다.

한동호: 코스타가 저를 항상 긴장하게 하고 년에 번씩 코스타에 가면 항상 많은 도전을 받기 때문에 내년에도 가고 싶습니다.

서혜진: 저도 개인적인 여건이 허락된다면 내년에도 참석하고 싶습니다. 아쉬운 부분도 있지만 그래도 코스타에 기대하는 바가 있고, 아무리 작은 부분이라도 돕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다른 이유는, 무엇보다도 코스타 참석 때마다 개인적으로 굉장히 은혜를 많이 받습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고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고 겸손하게 계신 분들 보는 도움이 되고, 그게 코스타에서 받는 은혜의 많은 부분인 같습니다. 도전이 많이 되기 때문에, 여건만 된다면 다시 가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이유정]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최근 시애틀 평강교회 집회를 마친 다음날, 오승현 전도사와 함께 후배 피아니스트 안선 집을
방문해서
오랜만의 반가운 회포를 풀고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숙소가 넓은 만 건너편에 있는 관계로 페리
호를 타고 건너 야 했습니다.
가는 길 앞차들이 속력을 내지 않아 겨우 제 시간에 도착했는데 이미
만 차(boat is
full)였습니다. 코앞의 뱃길을 포기하고 먼 길을 돌아와야 했지요. 문득 시애틀에 사는
모 교회 선배 원순이 전도사님이
생각났습니다. 선배는 1년 전에 폐암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상태
시애틀에 오면 문안하려고 했는데, 혹시나 해서 전화를 걸었더니 마침 돌아가는 길목 인근에서 15분 즈음 남쪽에 살고 있었습니다. 스케줄 상 이날이 아니면 방문이 불가능했기에 바로 달려갔습다.
 
금만 캐라
마중 나오신 선배 아버님의 갑작스런 접대로 저녁을 먼저 하게 되었습니다. 이 분은 저의
모교회인 서울 문화촌 소재 홍성교회에서 유명한 분이셨습니다. 교회를 핍박하고, 예수 믿는다고
자식들까지 집에서 내 쫓는 무서운 분이셨지요. 그런데 그 분이 91년도에 미국에 와서 너무 심심해서
성경을 읽다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3년 전 이곳을 방문했을 때까지 만도 여전히 다가가기 어려운
분이셨는데 이번엔 달랐습니다. 딸의 아픔을 가까이 겪으면서 신앙이 연단되셨는지 한마디 한마디가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말도 안 되는 목사도 있고, 말도 안 되는 장로들도 있어. 성도이건
목사이건 자
기 비즈니스 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그러나 이런 것에 좌우될 필요는 없어. 목사님이 설교를 못해
도 불평할 필요가 없어. 금을 캐러
갔으면 금만 캐야지 돌까지 캘 필요는 없잖아. 아무리 설교를 엉
으로 해도 그날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금이 있거든.”
 
머리에 망치를 한 대 맞는 듯 했습니다. 그토록 복음을 핍박하던 과거의 모습은 온대간대
사라졌습니
다. 암 투병 중인 딸의 아버지로
보기에는 그 고백이 너무 건강하고 힘찼습니다. 70대 노 성도의 입에서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는 말씀마다 제 심부를 찔렀습니다.
 
폐암을 이긴 여장부
식사를 마치고 드디어 선배를 만났습니다. 처음 얼굴을 본 순간 믿을 수 없을 만큼 건강한
모습에 또
한 번 놀랐습니다. 처음 폐암을
발견해서 의사가 개복했을 때는 이미 폐의 좌우에 모두 번져서 수술도
할 수 없는 상태까지
갔었습니다. 의사는 2달 안에 죽으니 집에 가서 조용히 기다리라고 했답니다. 그
런데 선배는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답니다. 그녀의 내면에서 터져 나오는 소리는 “죽음을 인정할 수
없어, 나는
살꺼야!”였습니다. 몇 번의 진단을 통해 의사는 폐가 돌처럼 단단해져서 더 악화 되었다는
말만 반복했답니다.
그러나 선배의 내면의 소리는 단호했습니다. “나는 아직 하나님을 위해 할 일이
많아. 나는
살아야 해” 그래서 24시간 찬양과 기도하는 IHOP이라는 곳을 찾아
가서 하나님께
매달렸
습니다. 주위의 교회와 한국의 가족이 다니는 교회에서 기도로
동참했습니다. 3개월 뒤, 믿음의 기도는
기적을 낳았습니다. 의사들이 놀랐습니다. 아주 작은 혹 하나만 남고 암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그 극한 고통 가운데서도 순간순간 써내려간 수기가 200페이지가 넘는다니 역시 죽음의 그림자는 선배와 어울리지 않습니다. 헤어질 때 오히려 방문한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시는 선배의 목소리는 정상인강인한 듯 힘이
넘쳤습니다.
 
 
잠 못 이루는 밤
이날의 독특한 경험 때문인지 숙소로 돌아와서도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솔직히 선배를
만나러
가면서 내심 예상했던 분위기는
어둡고, 자조 섞인 병실의 위로, 격려 모드였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문
안 갔던 우리가 도전받고
돌아왔습니다. 오 전도사의 말처럼 ‘페리호를 타지 못한 뜻’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크리스천의 삶이란 거꾸로 사는 삶입니다. 편안한 뱃길 대신 돌아가는
길이 오히려 회복과
충전의 길이
되었습니다. 노년의 주름이라도 복음의 생명력에 젖을 때 오히려 청년보다 더 예리한 분별
력을
발휘합니다. 죽음의 그늘도 기도의 집중력에 노출될 때 그 사기(死氣)를
잃고 정상인보다 더
활기
찬 생기를 뿜어냅니다.
 
두 분의 삶은 거꾸로 사는 삶의 산 증거입니다. 선배의 아버지… 비록 병이란 병은 온몸이
다 지니고 있
는 아내와 함께 넉넉지 못한 삶을
사는 노년의 나이이시지만, 복음 안에서 누리는 영혼의 자유는 세상
누구보다 부요해 보입니다.
원순이 전도사님… 비록 폐암 말기를 선언한 의사들의 사형선고 앞에 무능
력한 중년의 여인이었지만,
하나님 안에서 믿음으로 고백한 불굴의 투지는 이미 세상이 이길 수 없는
승리자의 모습이었습니다.
 
지금도 제 눈 앞에는 외로운 노년의 위기는 간대없고 신앙에 올인하신 어르신의 단호한 낯 빛,
가장 극심
하다는 폐암의 고통을 참아내며
하나님의 치유의 강에 온 몸을 내어던진 선배의 여장부다운 패기, 그리
고 이미 99%의 암을
극복하고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꿈꾸는 그 생명력 넘치는 눈빛이 아른거려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인터뷰 – 화종부 목사 (시카고 컨퍼런스 2008 오전 주제강의)

2008 KOSTA/USA 시카고 컨퍼런스의 오전 주제강의를 맡아주셨던 화종부 목사님을 eKOSTA가 만났다.

eKOSTA: 목사님께서는 청년 사역을 활발히 하고 계신데요, 제자들 교회가 청년 중심의 교회라고 할 수 있을까요? 특별히 하고 계신 청년 사역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이 있는지 소개 해주시겠어요?
화종부: 청년의 때에 말씀을 많이 접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영국에서부터도 청년 사역을 하고 싶어 했었습니다. 한국에서 청년 사역을 위해 특별히 하는 것은 많지 않지만 이번에 Joy의 이사장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형태로든 청년 사역의 기회가 있었으면 했는데 좋은 통로인거 같습니다. 저희 교회도 말씀하신대로 비교적 젊은 교회이고, 큰 교회는 아니지만 청년, 대학생이 200명 정도 있습니다.

eKOSTA: 교회 홈페이지에서도 많은 결혼 소식들이 있는 것을 보고 청년들이 많이 있을 거라 짐작이 되었습니다.
화종부: 네, 1년에 20번 정도 주례를 하고 1년에 30명 정도의 아기들이 태어납니다. 저희 교회 청년부는 바울이라고, 대학부는 디모데라고 불립니다. 청년부, 대학부, 그리고 장년부가 각각 독립적으로 사역이 이루어집니다.

eKOSTA: 예전에 내수동 교회에서 섬기셨는데, 그때와 지금의 청년부가 다른 점이 있나요?
화종부: 그때의 청년들에게는 야성이 있었던 거 같고요, 지금의 청년들은 야성은 덜하지만 그때에는 없었던 창의력이 있는 거 같습니다. 어떻게든 장점을 최대화 해야겠지요. 지금의 청년들은 굉장히 창의적이고 개성이 강합니다. 그래서 아시아권 뿐만 아니라 세계 무대에 설 수 있는 인재들이 배출되는 거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걱정도 되고, 기대도 있습니다.

eKOSTA: 지금 말씀하신 야성은 열의라는 의미로 들리는데요.
화종부: 그런 거 보다는, 체제가 도움이 많이 안되는 상태에서 하나님을 만날 때 그게 바로 들판에서 개인적으로 주님을 만나는 거지요. 지금은 체제적으로는 상대적으로 잘 되어있으니, 들판에서 거칠게,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는 것이 줄어드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세련되지는 못해도 선이 아주 굵직 굵직한 청년들이 아주 많았는데, 요즘은 그런 굵직 굵직한 청년들이 줄어드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부담이 있습니다.

eKOSTA: 대략 15년 내지 20년 전쯤에는 한국 기독교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이들이 많았었지만 지금은 그런 사람들을 찾기 힘들다는 말들을 하거든요.   
화종부: 네, 그런 것도 다 포함될 수가 있겠죠. 우리 때에는 조국과 민족이 중요했다면, 요즘은 개인과 세계가 화두가 되는 거 같아요. 개인에 너무 함몰되지 않도록 하면서 민족을 넘어서서 세계에 관심을 갖는다는게 더 좋은 거일 수도 있죠.

eKOSTA: 목사님 설교 중에서도 언급되시는 손희영 목사님, 백금산 목사님, 김남준 목사님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신 거 같은데, 이분들과의 관계를 소개해주시겠어요?
화종부: 손희영 목사님께서는 제가 자랐던 내수동 교회의 집사님으로 계셨습니다. 손희영 목사님께서 세브란스 병원에 의사로 재직하고 계셨을 때, 많은 사랑과 격려를 받았습니다. 저는 사역자였고, 목사님께서는 집사님이셨는데, 뵐 때마다 참 많은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목사님을 알게 되었고, 지금 가끔 한국 오시면 저희 교회 부흥회도 해주시고, 그렇게 교제할 기회가 있어서 너무 많은 위로가 됩니다. 그리고 김남준, 백금산 목사님은 신학교 동기들입니다. 졸업한 이후로 20여년간 꾸준히 같이 공부를 해왔습니다. 혈육과 같이 너무 좋은 친구들입니다. 만날 때마다 많은 격려와 도전이 됩니다.

eKOSTA: 손희영 목사님은 작년에 저희가 인터뷰를 했었고, 올해도 세미나 강사로 오십니다. 작년에 강사 인터뷰를 했을 때, 윤종하 총무님의 영향을 많이 받으셨다고 하셨는데, 목사님께서는 윤종하 총무님의 영향은 받지 않으셨나요?
화종부: 저는 윤종하 총무님의 영향을 받지는 못했고, 대신에 저는 제 평생의 스승으로 여기는 로이드 존스 선생님을 책을 통해서 만났고, 그 영향으로 다른 선생님들에게는 눈이 잘 가지 않았습니다. 신학교 친구들이 모여서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도 로이드 존스에 대한 관점이 같았기 때문이었고요. 대부분의 친구들이 로이드 존스를 통해서 이제는 존 오웬이나 청교도들도 접하게 되었는데, 저만 아직 로이드 존스에 머물러 있죠.

eKOSTA: 특별히 로이드 존스 목사님을 존경하는 이유가 있으신가요?
화종부: 제가 전공했던 정치 외교학을 내려놓고 신학교로 부름 받았을 때, 한국 교회의 현실이나 신학교의 현실에 의해 방황하며 굉장히 어려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때 제가 예수를 믿는 것이, 그리고 말씀을 전하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런 일인가에 대해 그분이 책을 통해서 많은 영향을 미치신 거 같아요. 그분을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이 감격스러워하고 좋아하며 목회를 하고 있지 못했을 거 같아요. 그런 면에서 참 귀한 선생이죠.

eKOSTA: 작년에 저희가 손희영 목사님 인터뷰 할 때, 목사님께서도 로이드 존스 목사님을 언급하시면서 훌륭한 설교자가 되고 싶다고 하셨는데, 목사님께서도 설교자로서의 로이드 존스 목사님을 존경하시나요?
화종부: 네 맞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또 특별한 이유는, 로이드 존스는 제자를 만들 때 자신과 똑같이 만들지 않고, 자기에게 속하게 만들지 않는 거 같아요. 대신에 그리스도에 속하도록 저를 도와주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도록 도와준다는 면에서 제가 너무 좋아하는 선생입니다. 저도 그렇게 좋은 설교자가 되기를 사모합니다.

eKOSTA: 교회 홈페이지에 있는 동영상에서, 소그룹보다는 전체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 만나도록 하고 싶으시다고 하신게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화종부: 예배가 참으로 하나님의 지혜로운 도구라고 생각이 되어요. 제가 제자 훈련을 하면서 느끼는 한계는, 잘 훈련 받아서 삶의 터전으로 보내는 것이 목적인데, 너무 많은 시간을 교회에서 보내게 되는 거 같아요. 그래서 되도록 많은 분들이 잘 양육 받아서 삶의 자리에서 잘 살아가도록 파송을 해야 되겠는데, 그렇게 하는데 있어서 소그룹이 너무 많아지면 물리적으로 모임의 숫자가 많아지는 거잖아요? 그래서 좀 더 큰 모임에서 삶의 많은 문제들이 다뤄질 수만 있다면, 더 적은 시간내에 이루어지고 더 많은 사람들을 삶의 자리로 보낼 수 있겠죠. 그런 면들이 예배에 더 집중하게 만듭니다. 또한 사람들의 손길이 많이 닿으면 닿을 수록 더 좋은 일꾼으로 길러지기도 하지만, 그럴 수록 한계도 더 많이 보이는 거 같아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사람이 교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되, 하나님께서 사람을 세우시는 그런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 보니, 결국 예배가 가장 좋은 도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직까지는 결과들이 아주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 복주시리라고 기대하며 꾸준히 가고 있습니다.

eKOSTA: 개인적인 양육 보다는 좋은 말씀을 통한 목양이란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요?
화종부: 네 목양도 중요하지만 저는 최대한 빨리 성도들이 저를 그만 사용하고 그리스도께로 붙기를 기대해요. 목양자가 제가 아니라, 그분이신거죠.

eKOSTA: 청교도에 관해 매우 긍정적이신 백금산 목사님, 김남준 목사님과 달리 손희영 목사님께서는 부분적으로 부정적인 말씀을 해주신 적이 있는데요, 목사님의 청교도에 대한 견해는 어떠신지 말씀해주시겠습니까?
화종부: 네 저도 동의하고, 존경하고, 따라 살고 싶어합니다. 그 친구들은 지금 한국 교회의 필요를 청교도가 공급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죠. 물론 그분들이 역사 속의 인물들이기 때문에 약점은 숨겨지고 장점들만 부각되는 면은 있죠. 그런 면은 조심해야 하지만 저도 조국 교회에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죠.

eKOSTA: 어떤 면에서 도움이 되고, 어떤 면에서 현재 상황에 적용하기에는 문제가 있을지 말씀해주시겠어요?
화종부: 제가 목회를 하면서 부딪히는 것중의 하나가, 한국사람들의 정서는 너무 율법주의적이에요. 이렇게 율법주의적인 사람들에게 청교도 적인 것이 들어올 때, 자유롭게 하지 못하고 더욱 묶어놓게 만드는, 그래서 위축되게 하고 억누르게 되는 경향이 있게 될 것이고 그런 면에서 단점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러나 지금과 같이 물질이 풍부한 때에,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깨끗하게 살고자 하는 열정은 참 귀하다 할 수 있겠죠. 너무 율법적으로 치우치지 않는 가운데 그들의 정신이 잘 사용될 수 있다면 참 좋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요.

eKOSTA: 목사님 설교 중에 들었던 표현 중에서 ‘주 안에 사랑하는 여러분’ 이란 말과 ‘조국 교회’라는 표현이 아주 인상적이었는데요, 목회자로서 생각하시는 조국 교회의 약점은 어떤게 있을까요?
화종부: 저는 조국 교회에 두 가지 문제가 있다고 봐요. 하나는 복음에 대한 무지함. 예수의 사건에 대해 너무 모르죠. 그래서 예수를 믿는 것이 얼마나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건지 잘 모르는 거에요. 주님이 하신 일과 그분의 성품에 대해 우리가 너무 무관심하기 때문이죠. 또 많은 설교들이 삶에 어떻게 적용되는 가를 말해주고, 윤리적인 면을 중시하다 보니 개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스스로 생각하는 기회를 주지 않아서, 너무 약한 성도들을 만들어내는게 아닌가 생각이 들어요. 또 하나는 교회론에 문제가 있다고 봐요. 교회가 얼마나 유기적이고, 상호 연결되어 있는지 생각을 잘 하지 못하고, 너무 개별적이고 효율 위주의 구조를 많이 생각하지요. 그러나 교회는 매우 비효율적이고 세상이 말하는 지혜로운 구조를 갖고 있지 않은 조직이죠. 세상은 다 잘 따라오는 소수를 위한 구조를 갖고 살지만, 교회는 따라오지 못하는 소수를 위해서 다수가 보폭을 늦추는 그런 구조를 갖고 있는 유일한 공동체라고 할 수 있죠. 그런 면에서 교회의 교회 됨을 잘 모르기 때문에 계속 한계에 부딪히고, 그리고 가난하고 힘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들이 못하는 그런 섬김들을 잘 하고 있지 못한다고 봐요. 이렇게 저는 구원론과 교회론이 한국 교회의 큰 약점이라고 봐요.

eKOSTA: 예전에 유학 전에 사역하실 때나 학생이실 때도 이러한 문제의식을 비슷하게 갖고 계셨나요?
화종부: 네, 그랬습니다.

eKOSTA: 역사를 살펴보면, 예를 들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그런 교회로 부터 독립된 교회론을 주장하셨고, 존 스토트와 같은 분은 교회 내에서의 개혁을 주장하셨던 걸로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그럼 로이드 존스 목사님을 존경하시는 분으로서 이렇게 종교의 문제를 헤쳐나가는 방법에 있어 누구의 생각이 옳았을까에 대해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화종부: 네, 저는 그 부분에 있어서는 로이드 존스 선생님과 입장이 다릅니다. 영국에서의 유학이 저에게 준 가장 큰 변화라고 할 수 있는데요, 유학을 가기 전에는 로이드 존스와 같이 언제든지 부패한 교회에서 떨어져 나와서 거룩하고 성결한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유학을 가서 너무 뜻밖에 어거스틴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이 저에게 강하게 심어준 이미지는 교회의 하나됨, 한 몸으로서의 교회의 교회됨과 진리와 성결, 그 두 개를 절대 포기할 수 없다는 사실을, 두 개가 동시에 추구가 되어야지, 하나 때문에 다른 하나를 포기하면 안된다는 것을 영국에 가서 굉장히 강하게 느꼈어요. 그런 것들이 로이드 존스와도 다르고, 친구들과도 약간씩 다른 부분이죠. 저는 그런 면에서 계속 교회로 들어가야 하고, 교회의 한 부분으로 교회를 새롭게 하는 일을 해야한다고 느끼고 있어요.

eKOSTA: 그럼 하워드 스나이더가 주장하는 교회 내 교회를 주장하시는 것이네요.
화종부: 저희 친구들은 대부분 교회를 개척했지만 저는 다른 사람이 개척한 교회를 받아온 겁니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죠. 제가 원하는 목회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면 교회를 개척했었겠죠. 그게 아니고 저는 기존의 한국 교회에 들어가서 그 교회를 새롭게 하고 섬겨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고 그래서 교회들의 모임에 할 수 있는대로 참석하고 도우려고 노력하죠.

eKOSTA: 목사님 설교를 들으면 ‘제가 젊었을 때는 이렇게 했을텐데 지금은 생각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라고 말씀하시는데, 청년들을 위해서 해주고 싶으신 조언이 있으신지요?
화종부: 네, 20대나 30대에 그런 고민들을 해야한다고 봐요. 제가 50이 다 되어서 선택한 이 길을 지금의 20대가 선택하는 걸 저는 원치 않습니다. 공부를 하고 나이를 먹으면서 정말 목회와 교회의 교회됨이란 것은, 한없는 인내와 기다림과 포기하지 않고 믿어주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기다리고 인내하는 이 길을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지금의 20대, 30대가 지금의 저와 똑같은 선택을 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20대 30대 때는 뒤집고, 반대하고, 고민하며 치열하게 싸워야 하는 때이기 때문에 그 일을 성실하게 하다가 와야지요. 그렇지 않으면 너무 쉽게 타협할 수 있겠죠. 저도 스스로 조심하는 것은 너무 타협하는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갖고 있어요. 타협하지 않고 정말 나이에 걸맞는 일을 해야되겠죠.

eKOSTA: 이전에 제자들교회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강해 설교를 14번에 걸쳐서 하셨는데, 그렇게 강해 설교를 하신 배경이나 의도가 있으셨나요?
화종부: 제가 계속 하고 있는 설교는 본문 강해 설교에요. 그러나 그게 전부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여러가지로 지식도 짧고 한계가 있어서 보통 그렇게 하지만, 때로는 특별한 주제를 다루기도 해야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요한계시록 강해를 하기 전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것도 한 번 해봤죠. 여러 주제로 넓혀놓은 다음에 계시록을 다루고 싶었습니다. 앞으로도 기회가 된다면, 본문 강해 설교 뿐만이 아니라 특정한 주제를 중심으로 강해를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eKOSTA: 목사님 하나님 나라 설교 초반에 어서 계시록으로 가고 싶습니다 라는 말씀 정말 자주 하셨는데 그래도 또 하실 생각을 하시네요. (웃음) 저희가 설교 들으면서 조금 특이하게 느꼈던 점은, 목사님께서 upside-down 이란 말을 많이 쓰셨는데, 굉장히 개인에게 한정된 하나님 나라를 많이 말씀하지 않았나 싶어요. 교회 공동체를 위한 하나님 나라라든가 우주적인 주권, 또는 구약에 나오는 모습 등의 하나님 나라라기보다는 개인에게 집중된 하나님 나라였던 거 같은데, 그렇게 하신 이유가 특별히 있으신가요?
화종부: 이유가 있다기 보다는 그것이 한계라고 볼 수 있겠죠. 제가 에베소서를 하면서도 똑같은 것을 느꼈는데요, 역사적인 교회에 대한 논의들을 잘 다루고 나서 말씀을 보면 굉장히 넓게 다룰 수 있을텐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본문을 다루는데 급급했어요. 하나님 나라도 마찬가지이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전체적인 주제와 관련하여 폭넓게 여러 관점에서의 논의들을 다뤘으면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개인적인 것에 머물지 않고 더욱 풍성하게 다룰 수 있었을텐데 그렇게 하기에는 제가 준비가 너무 부족했던 거죠. 그래서 본문 자체만 다루고 끝냈죠. 조금 더 넓혀져야 한다고 봐요. 제가 그런 면에서 더 많은 연구를 해야되는 거죠.

eKOSTA: 이번 코스타에서도 복음, 그리고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에 대한 얘기를 하신다면, 짧게 하셔야 하니까 어쩔 수 없이 개인적인 측면으로 갈 수밖에 없는 거네요.
화종부: 네 그렇죠. 제가 개인적으로 계속 느끼는 것이 그런 거에요. 성경의 진리가 이상적인 것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게 아니고, 이게 정말 살아야 하는 삶이라는 생각을 해요. 저도 여러번 실패하고 안되죠. 말씀대로 살지 않을 때 많다는거 저도 알지만, 말씀대로 사는 것이 너무 어렵다던지 너무 이상적이라는 생각을 절대 안해요. 저도 실패를 많이 하고 있지만, 아 정말 이렇게 살아야 진짜 사는 거구나 이런 것을 나이를 먹어가면서 더 실제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거 같아요. 이상적인 삶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아주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것에 바탕을 둔 삶이 되었으면 좋겠다 생각이 들어요.

eKOSTA: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을 생각하면 아주 추상적인 반면에, 사람들이 삶에서 부딪히는 문제나 상황들은 너무 구체적인데, 이 두가지를 연결시킬 수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이번 코스타 주제에도 담겨있는 거 같아요. 저희가 개인으로나 공동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그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적용하며 살 수 있는지 조언을 해주실 수 있으세요?
화종부: 제가 목회를 하면서도 가장 많이 부딪히는 것중의 하나가, 한국의 교인들은 목회자가 어떤 결정을 해서 교회를 이끌어 가주기를 원하는 거 같아요. 근데 제가 목회를 하면서 계속 성도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필요를 느끼는 자가 먼저 해야한다는 것이거든요. 기독교의 윤리라는 것이 절대로 공동체나 나라 전체를 배제하고 있지는 않지만, 언제든지 그 출발은 개인인거죠. 하나님 말씀에서 깨닫고 반응하는 그 개인에 의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공동체적으로 무언가를 만들어 가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깨닫은 개인이 전혀 보이지 않는 주변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 깨닫은 바를 댓가를 지불하면서 충성스럽게 전하는 거죠. 그게 제 개인의 경향이기도 하고 제가 계속 전하려는 주제 중의 하나입니다. 어떤 운동 차원의 것을 함께 해가면서 문제를 풀어나가는 것보다는 개인이 변화되고 개인이 살면서 하는 것이 제 생각으론 훨씬 더 지혜롭고 효과적인 방법이란 생각이 들어요. 두 가지를 최대한 묶되, 적용은 철저히 개인과 내 주변에서부터 시작해야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eKOSTA: 목사님도 유학 생활도 하셨고 이민 목회도 하셨는데, 다문화권이라는 특수한 환경에 있는 저희들에게 해주고 싶으신 조언은 어떤게 있으세요?
화종부: 제가 유학 생활을 통해서 얻은 것은 공부 자체보다는 그 외국 생활의 다양성에서 배운게 더 많은 거 같아요. 그래서 유학 생활 중에 공부를 하고 미래를 준비한다는 차원에서 만이 아니라, 정말 오늘의 삶을 사는 것이죠. 제가 만난 많은 한인 학생들은, 그곳에서 공부를 하는 시간이 아주 특별한 기간이고 삶이란 건 언제부터인가 한국 가서, 또는 직장을 얻고 나서 살려고 합니다. 그게 아니라, 지금 사는 것이 삶인 거죠. 그 생활을 특별한 기간으로 여기지 않고, 주님 앞에서 시간과 우선 순위를 충실하게 드리면서 삶을 살아주는 거죠. 언제부턴가 삶을 새롭게 사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그곳에 딱 맞는 형태로, 분명하게 헌신하며 성도의 삶을 살며 공부해야, 나중에 한국에 와서도 정말 우리가 기대하는, 빛을 비추는 삶을 살 수 있을 거 같아요. 그 삶의 현장에서 충성스럽게 믿음의 원리를 따라 사는 거죠. 그런 기대를 제가 전해주고 싶어요.

eKOSTA: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화종부: 많은 수고에 감사드립니다.

[옥수정] 코스타 간증문

<코스타 집회 간증
2008년 7월 2일 >  

– 옥수정 – 

제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 지 이제 여섯 해가 되었습니다. 그전까지 무려
30년 동안 소위 ‘모태 신앙인’으로, 특히 목사의 딸로
자라면서 교회에서 시키는 것은 모두 지키려고 노력하는
성실한 교인으로 살았지만, 사실 제 속사람은 날이
갈수록 황폐해져가고 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순종적이어서 부모님께서 시키시는 일들을 기꺼이
다 하려고 했습니다. 골수 고신파답게 저희 부모님의
요구 사항 일순위는 주일 성수였습니다. 시험 기간이라도
주일날에는 절대로 공부하면 안되고, 쇼핑하거나 음식을
사먹어도 안되고, 심하게 아픈 게 아닌 이상 주일 예배를
빠져도 안되었습니다. 그래도, 이런저런 요구들을 아무
문제 없이 만족시켰던 저는 부모님과 교회 어른들께
칭찬받는 ‘타의 모범’이었습니다.
 

그런데, 중학생이 된
이후 기독교 신앙에 관한 질문들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주의 창조자, 절대 초월자가 있는 것 같긴 한데,
그렇다면 왜 그 신은 기독교의 하나님이어야만 하는가’,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이 단지 기독교 집안에
태어났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닌가’ 등등. 부모님께
조언을 구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시간이 지나면 그런
문제는 자연히 해결된다. 의심과 회의는 어리석은 것이다’라는
식의 무관심에 가까운 부정적 반응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반항아가 되기를 포기하고 어떻게든 그런 고민과
괴로움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다가 고등부
시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는 말씀을 대했을 때, 제
자신이 믿는다고 생각했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는게
당연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무엇을 믿는지는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고 제가 구원받은 자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한 제 삶에 성령의 열매가
맺힐 리 없었습니다. ‘전도’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면서도 친구들에게 예수님
믿으라는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나도 힘들어하면서
겨우 순종하는데 남들에게 어떻게 이 짐을 지라고 하냐’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다른 크리스챤들을 판단하고
정죄하기 일쑤였습니다. 각종 자격증 시험이 주일에
치뤄지기 때문에 손해보는 것이 많다고 느꼈고, 그
억울한 마음 때문에 엄격하게 규율을 지키지 않는 다른
크리스챤들을 보면 ‘가짜’라고 비난하는 가시돋힌
마음이 되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대학 입시에서
실패했고, 집안의 경제적인 형편이 어려워 재수하겠다고
할 수 없었습니다. 그 당시 아버님이 가르치신 종말론
때문에 10년 이상의 먼 미래를 구상하지 말라는 가르침에
따라 아버님이 권유하신 전문대 야간부를 다니며 낮에는
유치원 보조 교사로 일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말렸지만, 저는 아버지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신다고
믿었기 때문에 어떤 희생을 요구하셔도 복종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그 길이 인정받지 못하는 낮은
자리라고 생각해서 제가 ‘십자가’를 지고 간다는
은근한 자부심마저 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듬해
그 결정이 틀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님이 종말론을
통해 줄곧 강조하셨던 것처럼92년에 등장하게 된다던
적그리스도의 앞잡이, 유럽 연합대통령이 결국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설교자로서의 아버지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고, 제 마음 속엔 쓰디쓴 원망감이 차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아버님의 종말론이 틀렸다는 것이 드러났는데도
아버지는 그것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그 가르침에 제 인생을, 창창한 청년의 미래를
전부 걸었는데 말입니다.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도
하지 않는 아버지가 진저리나게 싫었습니다. 예배 시간에
자리에 앉아도 목이 아플 정도로 고개를 푹 숙인 채
설교하시는 아버지 얼굴을 절대로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눈을 마주칠 수 없을 정도로 아버지가 미웠습니다.
잘못 들어선 제 인생길이 한탄스러워서, 겉으로 내색하지
못하는 아버지에 대한 미움과 원망 때문에 속앓이하면서,
아무도 없을 때면 골목길을 걷다가도 눈물을 쏟곤 했습니다.
 

그렇게 신세 한탄을
하며 반 년을 보낸 후, 아버님 말씀대로가 아니라, 제
자신이 바라는 꿈을 위해 살아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고민 끝에 유아교육과 다닐 때 접했던 아동 심리학이
제 인생을 걸고 가장 하고 싶은 일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조금 벌어놓은 돈으로 재수를 해서 목표했던 심리학과에
들어갔습니다. 하고 싶었던 공부를 하게 되어 너무나
감격스러웠지만, 학비와 생활비를 감당하기 위해 닥치는
대로 과외를 하면서 점점 지쳐갔고, 인생살이의 고달픔은
아버지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졌습니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기대했던 장학금 심사에서 밀려났을 때, 선배들이
나이많은 후배인 저를 대하기 어려워한다고 느꼈을
때, 과외하느라 학과 공부할 시간마저 부족했을 때,
그 모든 원망의 화살들은 어김없이 ‘아버지’라는
표적으로 날아가 꽂혔습니다. 그렇게 제 인생이 꼬이게
된 것이 모두 아버지의 탓인 것처럼 생각되었습니다.
제 자신의 힘으로 인생을 꾸려가는 것이 너무 버거워
마지못해 사는 심정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미움을 가슴 속에 담은 채로 유학을 준비하기까지
이르렀고, 그 십 년이 넘는 기간 동안 갈수록 더 웃음을
잃고 찡그린 표정만 짓는 살벌한 사람이 되어 갔습니다.
 

그러던 중 제 동생이
다른 교회에 나가 그토록 찾고 찾았던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제 동생은 그 기쁨과 감격을 혼자만 누릴 수 없어서
내켜하지 않는 저를 설득하여 그 교회로 초청했습니다.
너무나 낯설게도 그 교회 분들은 신앙 생활의 감격을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하며 밤새는 것을 예사로 여길
만큼 헌신적이었습니다. 저는 그들의 열정적이고 역동적인
신앙의 원동력이 어디있는지 궁금해졌고, 결국 한 양육자
언니와 일대일 교제를 하게 되었습니다. 거듭되는 만남을
통해 제가 평생동안 큰 희생을 감수해가며 지켜온 신앙이
실상은 맹목적 신념일 뿐, 어떤 근거나 토대에 바탕을
둔 확신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성경을 수도 없이 읽고, 셀 수 없이 많은 설교를 들어왔지만,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의 실재성, 그중에서도 특히 예수님의
부활이 인류 역사에 전무후무한 충격적인 실제 사건이었음에
한번도 주의를 기울여 본 적이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절대 일으킬 수 없는 그 부활 사건이 하나님의
실재하심,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심, 그리고 그분이
하셨던 모든 말씀을 신뢰할 수 있음의 확실한 근거가
되었습니다. 그것을 깨달은 후 저는 마치 부러지기
일보 직전의 비틀거리는 의자에 엉거주춤 걸터앉아있다가
넓은 침대 위에 큰 대자로 드러누워 쉴 수 있게 된 사람처럼
마음이 편안해졌고 정말 기뻤습니다.
 

잊을 수 없는 한 순간이
있습니다. 그 언니가 저에게 요한복음을 읽어보라고
하시면서 예수님께서2천년 전에 이스라엘 땅을 돌아다니시며
사람들을 만나실 때 무엇을 느끼셨을지, 무슨 생각을
하셨을지 발견해보라고 권하셨습니다. 그 예로 요한복음
8장에 기록된 사건이 바로 제 눈 앞에 펼쳐지는 것처럼
박진감 넘치게 묘사해주셨습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간음한 여인을 끌고 온 사람들에게 죄없는 사람이 먼저
돌을 던지라고 말씀하시던 그 현장에 같이 동참하여
예수님 바로 옆에 서서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몰입되었습니다. 그런데, 언니가 느닷없이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간음한 여인을 돌려보내신 예수님께서
고개를 돌려 저를 바라보시며 뭐라 하시는지 말해보라고요.
너무 당황스러웠습니다. 어처구니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진지한 언니의 기대를 무시할 수가 없어
답을 대충 만들어보려 했습니다. 하지만, 쓸 만한 말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고, 머리 속이 새하얗게 된 것
같았습니다. 오랫동안 쩔쩔매고 있었는데, 갑자기 …
그렇게 텅빈 스크린 같았던 제 마음에 마치 타이프라이터가
하얀 종이에 까만 글씨를 투둑 쳐서 새기는 것처럼
딱 하나의 문장이 튀어나왔습니다. “수정아,
내가 너를 위해 죽었다.”

그 대답을 언니에게 말해주는데, 왜 그런지 자꾸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때 제가 예수님의 생생한 음성을 들은
것도 아니고, 예수님의 모습을 본 것도 아니지만, 그
일 이후로는 예수님께서 저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을
계속해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는 말은 셀 수 없이 많이 들어왔고
그런 가사의 찬송을 수도 없이 불러왔지만,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옥수정이라는 이 한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온통 쏟아부으시는 분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왔던 십자가의 죽음이 저를 향한
하나님의 가슴아픈 사랑의 고백임을 모른 채, 들어도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로 30년을 살아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저 온 인류 중의 한 사람, 수 백억 분의
일이라는 미미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오로지
저를 위해 자기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주실 만큼 소중한
그 한 사람임을 깨닫고 나서는 이 세상에 두려울
것도, 부러울 것도 없는 행복한
사람
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전까지 제 자신의
힘으로 꾸려가야 한다고 믿으며 꾸역꾸역 짊어졌던
고달픈 인생의 무게, 그리고 어둡게만 보이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자녀된 자유와
평강과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감사한 것은 아버님의 얼굴조차 쳐다보기 싫을 만큼
지독하던 그 원망과 미움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샌가
사라져버렸다는 것입니다. 원망과 미움이 모두 사라진
마음이 얼마나 가볍고 자유롭게 느껴졌는지 모릅니다.
또 하나의 커다란 변화는, 남에게는 별 관심도 없이
제 자신의 일만 생각하며 전전긍긍 살았던 저의 좁은
시야에 다른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셀 수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께는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하나님 자신의 목숨을 부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시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며 길거리에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기만 해도 가슴이 벅찼습니다. 그렇게 소중한 사람들로
이 세상이 가득하구나! 그리고, 제 남은 삶을 드려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하시는 일에 쓰임받고 싶은 소망이 생겼습니다.
 

그처럼 놀랍고 감사한
새생명의 축복들을 맛보기 시작한 다음 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확신하며 미국에 오긴 왔는데, 막상 하나님께서
왜 이 길을 허락하셨는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하나님께서 박사과정 그만 두고 한국으로
돌아가 시장에서 생선팔아라 하셔도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종종 ‘살기 힘든 이 땅에서 굳이 더 살 필요가 뭐 있나?
하나님 곁으로 빨리 불러주시면 그게 제일 좋겠다’라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 기쁨만으로
너무 만족스러워서 이 땅에서는 더 바랄 것이 없다는
심정이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제게 이 땅에서 살
시간을 더 주시는 이유 중 중요한 한 가지가 바로 잃어버린
영혼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제가 누리게 된 은혜와
축복에 동참하도록 돕는 것임을 알았지만, 제가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밟는 것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굳이 오래 고민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은 곧바로
제게 한 영혼을 맡겨주셨습니다.
 

입학하자마자 나가기
시작한 대학원생 성경공부 모임에서 하나님을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갖는 질문을 계속하는 신입생
한 명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 친구에게 관심을 가지고
다가가던 중 그 친구가 우울증 때문에 오랫동안 고생했왔고
문제가 아주 심각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때 하나님께서 저를 이 학교에 보내신 이유는 그
친구가 온전한 생명을 되찾도록 돕는 데 있다고 생각했고,
그 확신만을 붙들고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한동안은 연구와 수업을 완전히 접고 그 친구에게 붙어
있기도 했고, 지금은 룸메이트로 같이 살고 있습니다.
지난 2년 간 많은 위기가 있었고, 갖은 노력을 다 기울이는
과정 속에서 결국 제가 그 친구를 돕는데 철저히 무력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2년 전 처음으로 그런 무력감과
절망을 경험했을 때, 너무나 힘들고 답답해서 새벽기도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연일 통곡하며 기도하던 중 에스겔이
본 마른 뼈 환상이 생각났습니다. 집에 와서 성경을
찾아보니 에스겔 37장이었습니다.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4-5절)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한 즉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13-14절)
이 약속의 말씀이 저를 붙들어주는
희망의 빛이 되었습니다. 몸은 살아있어도 죽음의
나날을 보내는 그 친구에게 기적처럼 생기 넘치는 삶을
되찾아 주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게 된 후로 지금까지
그 친구의 상태가 어떠하든지 상관없이 담대할 수 있는
평안함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 친구를 알아온 5년
동안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큰 스케일로 일을 해나가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제가 아무리 원해도 제 힘으로는 그 친구를
도울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으면서 시편 46편
10절을 깊이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Cease striving and
know that I am God; I will be exalted among the nations, I will be exalted
in the earth.”(NASB)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어려운
일을 앞에 놓고 생각해야 할 것은 나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임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불안과 절망 속에 빠져있는 그 친구를 돕기 위해 내가
어떻게 해야하나 하는 고민이 들 때마다 제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너는 도울 능력도 없으면서
무슨 궁리를 하고 있는거니? 그럴 게 아니라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바라봐야지! 네가 해야할 일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꼭 알려주실거야. 걱정마…’
 

한 가지 더 깨달은 것은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가슴아픈 것인가였습니다.
한동안 그 친구의 상태가 좋아졌을 때, 다른 친구들과는
즐겁게 어울리면서 정작 저를 멀리했기 때문에 제 마음에
큰 상처가 되었습니다. 어째서 자신을 도우려 애쓰는
저를 무시하고 거부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고,
때때로 서러울 정도로 속상하고 슬펐지만, 결국은 그런
고통의 경험이 제 안에 사랑없음을 깨닫게 하고,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게 하는 유익이 되었습니다. 나를 반겨주고
존중해주는 사람을 사랑하기는 쉽지만, 나를 무시하고
내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 사람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은
날카로운 가시를 삼키는 것처럼 아프고 어렵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그런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우리 손에 의해 십자가에 돌아가시면서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 사랑을 닮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실감하며 저도 그 사랑을 품을 수
있게 되길 계속 기도하고 있습니다.
 

거듭난 이후 4년간 확신과
도전, 응답으로 이어지는 최고의 경험을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는 남부러울게 전혀
없다고 생각했었습니다. 확신, 감격, 기쁨, 감사, 평안,
열정…30년을 껍데기 크리스챤으로 살면서 절대 누리지
못했던 것들을 한꺼번에 다 얻고 나니 그 희열에 들떠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룸메이트를 돕는 일로 때론
너무 힘들었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항상 제 편이셨고
또 제 기도에 즉각 응답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신만만한 마음을 품고 있던 저를 하나님께서 크게
치시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작년 1월, 운전시작하지
얼마 안되서 갑자기 폭우를 만났고, 당황한 마음에
앞차를 들이받아 크게 부서진 그 차가 견인되고 등이
아프다는 운전자는 병원으로 실려가게 되었습니다.
집에 돌아왔는데, 전혀 기도를 할 수 없는 상태가 된
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이 사고가 날 때 하나님은
도대체 뭘하고 계셨단 말인가? 전지전능하시고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왜 그 사고가 나는 걸 막지 않으셨나?
이런 회의와 의심이 석 달 넘게 해결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기도 부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보험회사에서 모든 걸 처리해주길 노심초사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피해자가 협상에 쉽게 동의하지 않아서 제가
고소당할 가능성이 있다는 소식을 받았습니다. 그때부터는
극도의 두려움과 불안에 사로잡혀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돈도 한푼 없는데 어떻게 재판을 치루나, 피해보상하라는
판결이 나오면 학업을 중단해야하겠지 등등, 끝도 없는
고민들이 저를 괴롭혔습니다. 너무나 막막했고 사람들에게는
말하기조차 싫어서 할 수 없이 하나님께 따져보기라도
하려고 마음먹었습니다 .
 

그래서 새벽기도를 다시
나간 그날의 본문이 스가랴 13장이었습니다. “내가
그 삼분지 일을 불 가운데
던져 은같이 연단하며 금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스가랴 13장9절) 이 말씀 앞에서 깜깜한
터널을 통과하다 저멀리에서 빛이 들어오는 출구를
본 것 같았습니다. 그제서야 제 믿음이 얼마나 연약하고
얕았는지 깨달았습니다. 어려움이 닥치자 모든 상황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의심하고, 그동안 누렸던
기쁨과 감사를 모두 잃어버릴 정도로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에 대한 온전한 신뢰가 없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 하나님께서 그
부르짖음을 들으실 것이라는 약속을 붙들었습니다.
그 어려운 상황의 끝에는 제가 하나님의 백성임을 드러내
보여주는 결과가 어떤 형태로든 반드시 나타날 것이고,
결국 ‘나의 하나님’이 그 어둠의 골짜기를 통과하도록
인도하셨노라고 자랑하게 될 것을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로 넉 달이 흘러가는데도 아무 소식이
없어 답답해하던 중 다시 피해자가 고소할 것 같다는
편지가 왔습니다.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최종
결과까지 기다려 보기로 마음을 다잡고, 계속 기도했습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시는 하나님이시니
두려워말라’는 말씀을 예수님께서 해주셨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이 말씀이 없었다면 제가
어떻게 그 힘든 나날을 버틸 수 있었을지 잘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사고가 난 후로 열 달을
채우고 나서야 해결되었습니다. 그렇게 연단받아야할
만큼 저의 믿음은 너무나 보잘 것 없는 것이었고, 저의
교만함은 하나님 앞에 심히 가증한 것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감사할 뿐입니다. 그 일을 통해 제 믿음이 조금이라도
더 든든해졌기 때문에, 제 교만함이 조금이라도 허물어져서
제가 가야할 낮은 자리에 좀더 가까와졌기 때문에,
그리고, 제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온전해지기 위해 얼마나
더 배워야하고, 변화되어야하는지, 제가 앞으로 가야할
그 먼 길을 흘낏 본 것처럼 조금은 감잡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너무나 감사합니다.
 

6년 전 여름, 저를 ‘어두움에서
불러내어 그분의 놀라운 빛으로’ (벧전2:9) 들어오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제 인생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요5:24) 옮겨주신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그동안 하나님께서
제 안에 일으키신 변화는 생각하면 할수록 신기하고
또 감사합니다. 오늘의 저로 바꾸어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어 여섯 해를 보낸
지금도 아직 변방에 있는 것 같아 쉬지 말고 부지런히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더 가까이 가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앞으로의 변화가 너무나 기대됩니다. 비록
지금도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겨자씨만한 믿음조차
지키기가 쉽지 않음을 절감하지만, 하나님께서 저를
사용하셔서 이루시려는 일이 있다면 제게 이 땅에서
살아갈 날을 더 허락하시고 또 감당할 힘과 능력도
주시리라 믿고 바라며 하루하루 하나님만 의지하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양승혜] 코스타 간증문

코스타 간증문

양승혜 

이 자리에 대한 콜링을 받고
가장 많이 망설였던 이유는 몇년 전 하나님께 했던
기도가 생각나서였습니다. 그당시 주님의 다루심으로
엄청나게 굴러다니고 있었을 때였는데 앞으로 어떤
사역을 하던 저를 주님의 뒤에 그림자처럼 감추어달라고
기도했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만나 온 하나님은 늘
신실하셨고, 언제나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었습니다.
그 약속의 때가 언제나 제가 기대했던 순간은 아니었지만
제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면 주님도 그 약속을 반드시
이루어내셨습니다. 그런 기도를 했다고 하니까 주변의
어떤 사람이 어쩌자고 그런 위험한 기도를 했냐고 하더라구요.

터닝포인트

여러분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터닝포인트가 된 계기나 또는 그렇게되도록 여러분의
삶의 영향을 끼친 사람이 있을것입니다. 저에게도 그런
시점과 사람이 2명 있었는데 저희 어머니와 제 여동생입니다.
어머니는 어렸을때 교회를 다녔지만 믿지 않는 남편을
만나면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다가 아버지가 몇년
동안 외국 생활을 하시는 동안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경험을 했습니다. 무신론자에 기독교를 예수쟁이라
불렀던 아버지의 오랜 핍박에도 불구하고 10년동안의
기도 끝에 아버지를 주님께로 인도했습니다. 여동생은
딸셋 중 가장 열심히 교회를 다녔는데 중학교때 예수님을
만나고 대학교때 선교사로 헌신했습니다. 아프리카에
마음을 품고 준비해온 10년만에 지금 선교사로 나가게
되었고, 선교에 대한 비전이 없는 남편을 만나 4년여동안
기도한 끝에 남편이 함께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집에서 자라났는데도 저는 꿋꿋하게 선데이크리스천으로
30여년을 잘 버텨왔습니다. 어머니와 동생이 나누는
대화가 시끄러운 녹음기를 계속 틀어대고 있는 것처럼
듣기싫었고, 그들의 삶의 변화를 통해 하나님이 살아있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알면서도 청개구리마냥 자꾸 반대로
튀고싶어했습니다. 교회에 가면 늘 꼬리 두개 달린
원숭이들 틈에 낀 꼬리 한개 있는 원숭이처럼 느껴졌고
나는 정상, 그들은 비정상..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새로운 출발

학교를 졸업하고 나름대로
열심히 직장생활을 하며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하면서
인생을 살아왔는데 서른을 앞에 두고 바라본 제 인생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렇게 살다가 인생이
끝나는 것인가, 허무함에 시달렸고 하는 일마다 계속
잘 풀리지 않는 어려움 가운데 처해지자 어렸을때부터
들어왔던 예수님 앞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 때 제
심정은 인생의 가파른 절벽 가운데 떨어질 듯 서있다가
지푸라기도 잡고 싶은 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혼자 떠나 예수원이라는 기도원에 갔다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고 그 때 지금까지는 내 멋대로, 내가
하고픈 대로 하면서 살아왔지만 이제는 주님을 위해서,
주님이 하라는 것만 하며 살겠습니다 라는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일년 동안 준비한 후 스웨덴에서
선교훈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때 제 나이가 서른이었는데
한국을 떠나면서 비장한 각오로 말하기를 ‘나를 기다리지
말아라…버티고 버티다가 도저히 안된다고 느낄때
돌아오겠다’ 머 그랬던 것 같습니다. 저는 새로운
인생을 기대했습니다. 주님 안에서 달라진 나, 지금까지
내가 알아왔던 나, 사람들이 알고 있는 내가 아니라
주님께서 저를 만나주셨던 그 날 주신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말씀처럼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싶었습니다. 

선교훈련 및 영국유학생활

훈련은 정말 값진 것이었습니다.
첫번째 주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강의를 들으면서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던 아버지를 용서했고,
제 안에 무너졌던 나를 주 안에서 다시 세워가기 시작했습니다.
9개월 동안 훈련과정을 마치고 주님께서 영국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셔서 언어공부를 시작하게되었습니다.
그곳은 저에게 단지 유럽의 아름다운 나라가 아니라
훈련을 마치고 현장 가운데로 나와 정말 예수의 제자가
되었는지 살아보는 또다른 훈련의 장소였습니다. 늦은
나이에 시작한 유학생활에 살인적인 물가를 감당하기
위해 아침, 저녁으로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당시
랭귀지를 하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20대 초반의 대학생들이나
취업을 앞두고 언어를 준비하기 위해 온 젊은, 저보다
어린 학생들이 주였습니다. 저처럼 왜 영어공부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앞으로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하는지
잘 모르는 노처녀는 그닥 많지 않았습니다. 저는 특별히
하고 싶은 공부도 없었고, 한국으로 돌아가서 제가
했던 일을 다시 하면서 또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목적을 발견하기까지는  한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마냥 랭귀지만 하고 있을 수는 없고…하나님은
아무 말씀 없이 2년동안 저를 그렇게 두셨습니다. 아는
한국사람도 없이, 돈도 없이, 영어도 잘 못하면서 무슨
깡으로 그 시간을 버텨왔는지 지금 생각하면 주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영국에 오자마자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저에게는 전도대상자들이었고, 특히
학교에 가면 옆자리에 앉은 학생을 어떻게 전도할 수
있을까 늘 생각했었습니다. 제 마음은 가난해졌었고,
영혼을 사랑하는 주님의 마음이 가득했으며, 외로웠고,
배고팠으며, 의지할 곳은 주님밖에 없었습니다. 한국에서는
그래도 작은 신문사이지만 취재기자로 광고회사 카피라이터로
일하면서 나름 케리어를 쌓아왔었는데 이 낯선 땅에서
나는 이름도 제대로 불려지지 못하는 웨이츄리스로
산다는 것이 처음에는 쉽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진짜
내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에 따라 나의 정체성을 결정했던
저에게는 큰 도전이기도 했습니다.

부르심

주님은 그 긴 침묵의 시간을
통해서 내가 무엇을 하던 상관없이 나를 당신의 자녀라
부르시는 사랑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저에게 좋은
교회와 사람들을 붙혀주셨고, 돕는자를 보내주셨으며,
잘 곳을 주셨고, 일할 곳을 허락하셨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무엇을 해야하는 지 모르는 상태에서 주님의
말씀을 기다리는 2년의 시간은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주님은 제가 모세가 아님을 아시고
더 긴 시간을 기다리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2년뒤 어느
날, 주님은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너무도
명료하고 또 뜻밖이서 저는 마구 울음이 터져나왔습니다.
첫째 아~ 드디어 주님이 내게 뭔가를 말씀하시는구나라는
것과 둘째 너무나 황당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은
제게 신학을 공부하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당시
제게 진짜 뜬금없는 발언이었습니다. 저는 단 한번도
신학을 공부할 거라는 생각을 해본적이 없었고, 동생이
선교사로 헌신하며 살아가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본
터라 제가 선교사가 된다는 것은 감히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저는 잘못들었다고 생각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눈물이 쏟아지는지…사실, 그 일이 있기
전에 제가 섬기고 있던 교회 선교사님이 오셔서 하나님이
너를 선교사로 부르셨다고 말씀하셨는데 제가 팔짝
뛰면서 그런 말씀 마시라고 했었거든요. 갑자기 그
말이 오버랩이 되면서…주님 아니지요? 제가 잘못 들은거지요?
되묻기도 했습니다. 3일 지났는데도 제 마음 가운데
울렁증이 가라앉지 않았고, 밥을 먹을때도 길을 걸어갈때도
그저 멍한 상태로 지내다가 결국 순종의 카드를 들게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해 가을, 영국에 있는 한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단 한번도 내가 선교사가 될꺼라고 생각해본 적 없던
제가 이제는 선교사가 아니면 하고픈 것이 없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한국 귀국 후

제 삶의 목적을 발견한 후,
저는 마치 움츠렸던 개구리가 뛰어오르듯 그 길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그 곳에도 모자란 저의
모습 때문에 무수히 많은 눈물을 흘려야했만 하나님은
저와 함께 하셨고 선교사의 길에 대해 확신없는 저에게
차츰차츰 분명한 부르심에 대한 확신도 심어주셨습니다.
학교를 다니면서 근처 다른 대학 캠퍼스에 있는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역에 참여하면서 캠퍼스 사역과 제자훈련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훈련과 공부를 마치고
5년이 넘는 유학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했을때
저는 아마도 당장 선교사로 나갈 수 있다는 당돌한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주님이 부르셨고, 훈련시키셨고,
부르심에 대한 확신도 주셨으니 길을 여실꺼라는 완전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한국의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저는 파송교회도 없었고, 결혼하지 않은
나이 많은 여자 평신도 였으며 적어도 파송을 받고
나가려면 또 몇년을 한국교회에서 섬겨야만 했습니다.
길은 막힌 것 같았고, 한국에서 제가 설 자리는 없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돈을 벌어야 하나,  취직을
할까, 결혼도 해야하는데…또다시 현실이라는 이름이
저에게 벽처럼 다가왔고 나는 무엇하나 가진 것이 없는
사람처럼 멍하게 한국의 현실을 받아드려야 했습니다.
그 당시 호주에서 사역하고 있던 동생부부가 아기를
낳고 한국에 들어와있었고, 파송을 받고 아프리카로
나가려고 준비중이었습니다. 그들의 안정된 모습이
부럽기도 하고, 또 나는 얼마동안의 시간을 기다려야
하나 두렵기도 했습니다.

그러던중 친구의 소개로 직장인을
대상으로 하는 집회에 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날
다른 약속이 있었는데 주님께서 제 마음 가운데 그곳에서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약속을 취소하고 그곳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강사이신 선교사님은 그 집회가 직장인을
대상으로 하는만큼 강의는 현실 가운데 우리가 버리지
못하는 타협점들과 선교에 대한 헌신을 언급하셨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이런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하나님 앞에 내려놓지 못한 한가지가 있다면,
그것이 직장이든, 가족이든, 사랑하는 사람이든 주님,
이거 한가지는 안돼요 하는 것이 있다면 생각해보라고
하신 뒤  잠시 시간을 주시고 그것을 지금 내려놓으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직장도, 가족도, 사랑하는 사람도
아닌데(사실 없었기 때문에)… 나는 뭘까? 고민하다가
주님의 나즈막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선교’ 순간
저는 뒤통수를 얻어 맞은 사람처럼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주님, 선교라뇨? 그것은 주님이 저에게 주신 거잖아요?
저는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안하겠다고 버팅길때는
떠밀어서 보내놓고, 이제 하겠다고 하니까 하지말라는
겁니까? 제 마음 가운데 심하게 요동치는 혼란의 소리를
들으며 집으로 돌아와서 선교사인 동생에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침을 튀겨가며, 오늘 주님이 나보고 뭐라셨는지
알아? 하면서 흥분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흥분된 모습과는 달리 차분하게 이야기를 듣던 동생은
침착하게 단 한마디를 내뱉었습니다. ‘주님이 가지말라면
말아야지’ 그러면서 자신이  대학때 들은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선교훈련을 받던 강의 중에 강사님이
그러셨답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선교지로 가기 위해
가방을 다 싸놓았고, 티켓이 손에 들려있으며 이제
집 문을 열고 출발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주님이
아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중에서 지금 가방을
내려놓고 가는 것을 포기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  이 방에서 나가십시오.

선교에 대한 내려놓음

그랬습니다. 주님은 제가 멈추기를
원하셨습니다. 저는 3일동안 주님앞에 나와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주님~왜이러세요. 지금와서 어떻게 포기해요~하지만
또다시 주님 앞에 순종의 카드를 들어야만 했습니다.
저는 선교를 내려놓았습니다. 가슴이 터질것만 같았습니다.
지금까지 노력이 다 물거품이 되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동안 흘렸던 눈물들이 2배가 되어 쏟아져나왔습니다.
내려놓겠다고 고백하고 나니 마음은 편해졌는데 뭔가
모르게 자꾸 서러워서 많이 울었던것 같습니다. 그러고
나니 다시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승혜야~ 너는
왜 나를 신뢰하지 않는거냐? 내가 약속을 지키는 하나님인
것을 모르느냐? 내가 너를 불렀다.

주님 그렇습니다. 나를 부르신
것은 주님이십니다. 내게 비전을 주신 것도 주님이십니다.
저는 주님앞에 회개했습니다. 선교사가 되는 것이 저의
목적이 아니라 주님을 더욱 알아가고 당신을 예배하며
순종하는 것이 제가 지은바 된 이유입니다.

저는 왜 주님이 저에게 선교를
내려놓으라고 하셨는지 알것 같았습니다. 주님은 제가
선교를 위한 선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으로, 예배자로
있기를 더욱 갈망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주님을
더욱 깊이 알게되고 하나님을 마음을 닮고자 한다면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됩니다.
그분이 정말 관심있어하고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말입니다. 그것은 당신과 깊이 교제하며 그 안에서
자녀된 삶을 누리는 것이요, 또 그렇지 못한 자들을
안타까워하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영혼구원에
대한 것이라는 것을 더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아~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살아야하지? 이제 선도
보고 결혼도 하고 지역교회도 섬기며 구역예배도 참석하고
그러면 되는건가? 하는 생각을 하던 중 우연히 동생을
통해 NGO단체를 방문했다가 그곳에서 콜링을 받게 되었습니다.
NGO단체는 타 선교단체와는 달라서 파송교회 없이도
선교지로 나갈 수 있으며, 복음이 들어가기 어려운
지역이기때문에 신분상 NGO였지만 실제로는 선교사를
원했습니다. 저에게 조심스럽게 갈 수 있겠냐고 물어본
나라는 아프카니스탄이었고 그때는 사건이 생기기
3개월 전이었습니다. 한번도 어느 나라를 가겠다고
생각해 놓은 곳은 없었지만 그곳은 뜻밖의 나라였고
그때도 여러가지 사건으로 인해 위험하기도 하고 말이
많던 곳이었기에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저는 다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며칠을? 네~3일을요.
말씀묵상을 통해 주님이 제게 물으셨습니다. 승혜야~
니가 갈 수 있겠느냐? 나를 위해서? 저는 제가 가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를 찾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여자이고,
부모님도 걱정하실테고 아직 결혼도 안했고, 한번 가면
5년이라는데, 거긴 너무 위험하고, 죽을 수도 있고 등등….하지만
그 어떤 것도 주님의 질문 앞에 이것때문에 안된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네! 주님. 제가 가겠습니다.
그렇게 결정한 후 가족들에게 이야기했고 그당시 함께
중보했던 가족들 역시 믿음으로 응원해주셨습니다.
결혼도 안한 딸을 다시 위험한 타국으로 보내야하는
부모님이셨지만 어머니는 선교사로 헌신한 딸들은
이미 주님께 드린거다, 살던지 죽던지 주님의 몫이며
어차피 사는 인생, 주님을 위해 살다가 죽는다면 그것만큼
영광이 어딨겠냐고 비장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동생은
막 웃으면서 언니~ 걱정마~ 절대 안죽어. 주님이 그런
영광을 언니한테 주시겠어? 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원서를 내도 꼭 가게 된다는 보장이 없었고 현지에서
함께 동역할 사람의 agreement가 있어야하는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내려놓았을때 다시 주님이 길을 여셨고, 어떤
것이든 제가 순종했기에 주님이 이미 저의 마음을 받으셨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몇개월동안 서류준비와
절차를 거쳐 면접만을 남겨놓은 상태였는데 이상하게
면접날짜가 3번이나 바뀌면서 계속 늦춰쳤습니다. 그러던
중 인터넷을 통해 동생이 우연히 발견한 선교단체 간사
자리에 동생이 직접 원서를 넣어 어플라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별 기대없이 면접을 봤는데 (그날이 NGO단체 면접이
취소된 날이었습니다) 붙게되었고, 다시 주님의 뜻을
구하던 중 그 당시 결과를 통보하기 전에 3일동안 미션캠프에
참석하였는데 제가 이곳에서 좀 더 배우고 교회를 섬기며
동역자를 만나기를 원한다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한 선교단체에서 간사로 섬기게 되었습니다.

3개월 뒤, 아프카니스탄 사태가
터졌고 저보고 그곳에 간다고 미쳤냐고 말했던 사람의
전화가 쏟아지면서 안가길 잘했다는 말을 들었을때
제 마음이 참 아팠습니다. 하나님이 왜 갑자기 다른
길로 저를 인도하셨는지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서류까지 다 통과하고 거의 가는 것으로 확정이 된
상태에서 왜으로 선교단체 간사로 섬기게 하시는지
그때는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결혼 그 이후

사실 서른살에 한국을 떠날때는
주님을 만나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에 대한 관심이
더 많았기에 결혼에 대한 마음이 별로 없었는데 타국
생활을 하면서 배우자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리스트를 만들어서 구체적으로 기도해야한다고
해서 적다보니 20개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횟수가
지날수록 리스트가 점점 짧아지면서 한국에 온지 1년동안
무수히 많은 선을 보고 거의 포기 상태로 갈 무렵 단
세가지 기도제목만 남게 되었습니다. 사실 제가 선교헌신자를
만나야한다는 생각에 대상자를 거의 제안하고 있었기에
어려움이 더 많았고 실제로 만나본 사람들중에 사역자나
선교사 또는 헌신자가 있었지만 이성적으로 끌리지않았습니다.

저의 세가지 제목은 첫째는
나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사람(예수님이 삶의 수선순위인
사람이었고 둘째, 교제하면서 신앙의 깊이 있는 부분을
나눌 수 있고 함께 기도할 수 있는 사람, 셋째,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남편을
소개해주신 형제님이 소개 전에 저에게 물으시기를
반드시 선교 헌신자여야만 하냐고 물었을때 저는 꼭
그렇진 않아도 되는데 진짜 크리스천이어야 된다고
대답했었습니다. 그당시 남편은 미국에서 공부중이었고
저는 한국에 있었기 때문에 아예 기대조차 하지 않았었는데
이메일과 전화를 통해 그를 알게되면서 여러가지 상황을
통해 하나님이 저에게 보내신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보고싶어져서
결국 미국으로 날아가는 결단을 감행했습니다. ‘용감한
자가 미인을 얻는다’ 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 결혼을
앞두고 계신 자매님들은 귀한 믿음의 형제를 얻기 위해서는
과감한 액션도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워낙 이 세계가 형제가 귀한 곳이라서요. ^^; 우리 두사람은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마치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 그것도 우리가 서로 기도해왔던 배우자를
정말 기가막힌 방법으로 만나게 되었고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알게 된지 6개월만에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방법이나 이치로는 이해되지
않지만 우리 안에 계시는 동일한 성령님으로 인해 우리가
서로의 ‘그사람’이라는 것을 알게되었고 참으로
오랜 시간을 기도와 인내로 싸워가며 말도 안되는 배우자상이라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음으로 주님의 사람과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현재 다니고 있는 학교에서 한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캠퍼스 사역을 하고 있고,
이번 가을부터는 저도 함께 간사로 섬기면서 사역에
동참하게 됩니다. 영국에 있을 때 캠퍼스 사역에 대한
비전을 주시고, 학생들에 대한 마음을 주셨던 하나님의
계획을 알게되는 것 같습니다. 

나의 상황과 여건때문에 주님이
주신 비전을 포기한다면 그것은 비전이 아니라 야망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선교를 내려놓고 주님앞에서
빼앗긴 사탕때문에 아이처럼 울고있을때 주님이 저에게
약속을 지키실꺼라 말씀하셨고, 저는 포기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제가 포기하지 않는 한 주님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연을 만드시지 않습니다. 제가
있는 이 자리가, 이 사람들이 지금은 제게 주신 선교지임을
확신합니다.    

2008 시카고 코스타 간증문 1

코스타 간증, 간증하신 분의 요청으로 익명을 사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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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오늘 저는 매우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리에 나왔습니다. 제가 무대공포증이 있다거나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을 어려워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과는 정반대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지금의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혹은 무엇을 의미할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다만, 제가 처음에 간증을 부탁 받았을 , 아주 순간적이지만 강렬하게 마음속에 자리했던그거 내가 하고싶다라는 생각이 두고두고 마음에 남아서 지금 자리에 오른 순간까지도 저로 하여금 망설이게 하고 두렵게 합니다. 저의 간증을 이렇게 시작해보고자 합니다. 믿게된 제가 가장 확실하게 하고 있는 경험은두려움입니다. 나는 이제 죄된 본성에 따라 없는 것이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내가 삶의 주인이고자 하는 마음이 곳곳에서 감지되기 때문에 제게는 어려운 문제입니다. 어쩌면 평생을 걸고 싸움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것은 아마도 거침없이 살았던 인생과 맞물려 있겠습니다.

지금은 학문을 하고 있지만, 학자의 길을 걸으리란 생각은 하질 못했습니다. 여기 유학생들 중에는 많은 분들이 어릴 적부터 성실히 공부하고 꿈을 키워서 이곳까지 나오셨으리라 생각되지만, 저는 조금 과장되게 말하면
8
할이 우연한 일들이 겹쳐서 이곳까지 나오게 경우라고 있겠습니다. 고등학교
1
학년 때까지 지기싫어하는 성향 때문에 공부를 잘했고 남들 웃기는 일을 좋아해서 전교적으로는 아니더라도 반내에서는 인기가 많았던 학생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2
학년이 되면서 친구와 급격히 가까워졌다가 종국에는 절교를 하게 되는데, 시점과 사춘기가 맞물려 매우 혹독한 사춘기의
2
년을 보내게 됩니다. 친구문제로 한참을 방황하다가 정신을 차렸을 때가 고등학교
2
학년 말이었는데, 성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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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급에서 6등급으로 하염없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3학년에 접어들면서 성적을 올리지 않는한 대학가기도 힘든 성적으로 떨어지게 되다보니, 대학 까짓껏 가도 그만 안가도 그만이라는 생각을 했던 같습니다. 아무리 1학년 때까지 착실히 학교공부를 했다고 해도 그렇게 2년을 숫제 놀았기 때문에 사실 대학엘 있는 상황이 벌어지면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저희 수능으로 입시제도가 처음으로 바뀌었는데, 새로운 제도의 시행이라 해는 특별히 1차와 2 두번의 기회가 주어졌고 복수지원이 시작된 때였습니다. 그런데, 1 시험이 고등학교 과정 기초부분이 많이 다뤄져서 예상보다 훨씬 높은 점수를 받는 일이 생겨버린 것입니다. 친구들과 시험 전전날까지도 재수할까 장사할까 그런 이야기들 하고 그랬던 같은데, 점수가 제가 어울리던 친구들과 너무 차이나게 나온 것입니다. 딴에는 내가 의리를 지키마하고 지원 안하고 같이 재수하마 했는데, 엄마의 간곡한 부탁을 받은 막내이모가 줄기차게 쫓아다니면서 한두군데만이라도 혹시 모르니까 지원하자고 졸라대는 통에 이모가 골라주는대로 아무 성의없이 대학입시원서를 쓰게 되었습니다. 진짜 기대도 안하고 생각없이 친구들과 놀고 있다가 대학에 붙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건데, 막상 합격소식을 들으니 갑자기 재수하기가 싫어지더군요. 마음이 얼마나 간사한지, 친구들에게 집에서 대학가라고 난리가 났다는 어정쩡한 핑계를 주고서는 대학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렇게 어설프게 들어가게 되었지만 대학은 제게 바꿀 없는 소중한 수많은 경험을 주고 의식을 성장시킨 장이었음을 부정할 없습니다. 대학을 들어가서도 학업에는 전혀 뜻이 없었고 음악과 영화, 그리고 문화/사회 비평 분야에 재미를 느꼈습니다. 많은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어울리다보니 자연스레 여행할 기회가 많아지고 여행을 통해서도 세상의 여러가지를 배우고 느낄 일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렇게 이런 저런 활동에 매진하는 동안 꿈같던 시간이 흘러 어느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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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년 마지막 학기가 되어 졸업이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하루는 날이 좋아서 잔디밭에 앉아 신문을 펼쳤는데, 세계의 뇌과학 연구에 대한 특집 연재 기사가 있어서 관심있게 읽고 있었습니다. 마침 지나가던 과선배 하나가 제가 잔디밭에 있는걸 보고 인사할 들렀습니다. 슬쩍 보더니 우리학교에도 뇌과학 센터가 생겼으니까 관심있는거면 한번 가서 알아봐라했습니다. 사실 뇌과학이라는 말도 신문보고 알았으니 관심있는 것도 아닌데뭔지도 모르면서도 뇌과학센터라는 말이 근사하게 들렸던 같습니다. 그냥 그래볼까하고 아무 생각없이 센터에 전화를 했는데, 어디에 전화를 누구에게 하는지도 자세히 알아보지 않고 한터라 상대쪽에서 누굴 찾으십니까 하는데 제가 글쎄요 했으니 황당하기 그지 없는 일이었죠. 뇌과학연구센터가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전화하는 것이라고 했을 전화 받으신 분이 친절하게도 새로오신 교수님이 계신데, 학생을 마침 찾고 있으니 만나보면 좋겠다고 해서, 그렇게 연락이 닿아 새로 오신 교수님을 찾아 센터를 방문하게 됩니다. 그것을 계기로 시작해서 신경과학 분야에 발을 들이게 되고, 실험실을 떠나 미국에 나오게 되어서도 하게된 공부의 재미에서 헤어나오질 못하게 됩니다. 뇌기능에 대한 이해가 생겨나고 연구접근 가능한 기술을 익히게 되면서부터 알게되는 것보다 알고싶어지는 것이 많아지니 학문이 주는 즐거움이 이런 것이구나에 미쳐 그렇게 년을 지내오게 됩니다. 어떻게 미국으로 나오게 되었나, 시애틀이었나에 대한 얘기도 한참이 길지만, 결론적으로는 우연한 일들이 계기가 되어서 시애틀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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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로 공부를 하는 것이 삶을 지탱하는 원천이었고, 그렇게 열정을 다바쳐 하루하루를 보낸는 것이 참으로 가치있고 의미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름있는 과학자가 되는 것은 아니더라도 제가 하는 연구들이 다음 연구들의 중요한 기초가 있고, 이곳에서 배우고 익힌 기술을 들고 언젠가 한국에 돌아가서 후학양성에 힘을 보탤 있다면 인생에서 몇가지 쯤을 희생해야 한다면 기꺼이 희생할 있을만큼 제게는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시애틀에 와서 얼마되지 않아. 우연한 계기로 형제 분을 만나 성경공부를 소개받게 됩니다. 제가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말이 좋아 소개를 받은 것이지 사실은 형제분과 초면에 시간동안 평행선을 달리는 논쟁을 했습니다. 그것이 벌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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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의 일이라서 어떤 내용이었는지는 정확히는 기억하진 못합니다희미하게 기억하는 것은 창세기의 창조부분은  여러 신화의 내용들이 뒤섞여있는 형태라는 점에서 단순한 민족 신화에 가깝다는 내용과, 기독교가 종교로서 갖는 배타성에 대한 것들이 아니었나 합니다. 그런데 논쟁 중간에 분이 자존심을 긁는 발언을 합니다. 제가 몰라도 한참 모르면서 아는 하고 있는데 지금 내가 너무 기초가 없어서 논쟁이 되질 않는다며 번만이라도 공부에 나와서 공부해보고 다시 이야기를 해볼 생각이 없겠냐고 하셨죠.
아니오했어야 하는데, 자존심이 건들어지는 바람에
그러죠라고 대답을 것을 계기로 성경공부에 참여하게 됩니다. 하겠다고 입밖으로 내면 해야만 하는 성격탓도 있고, 도대체 내가 모르고 그렇게 말한다는 것인지 알고 싶어서 믿음이 없는 상태로 꾸준히 성경을 공부하게 됩니다. 삼년이 넘는 시간을 공부를 하는 동안에도 성경의 말씀이 크게 마음에 남는다거나 믿게 된다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읽으면 읽을수록 어떻게 이렇게 거짓말같은 이야기들을 믿을 있다는 것인지 더욱 의문스러워지기만 했습니다. 저에게 그렇게 오랫동안 가장 걸림돌이 되었던 구절이 바로 창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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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인 이유이기도 합니다. 정말로 믿을 없는 새빨간 거짓말인 것이었죠.

그래도 한가지 마음속에서 미묘한 변화가 있었다면, 성경공부 때문에 성경을 읽게 되면 읽게 될수록 성경에서 말하는 죄라는 개념이 마음에 자꾸 걸리적거린다는 점이었습니다. 한번은 성경공부하는 중에 성경책만 펼치면 왠지모르게 죄책감 비슷한 것을 느끼게 되어서 기분이 나쁘다라는 말을 했더니 형제분이 그것이 그러는 것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실 말을 했을 당시에는 막연한 어떤 것이어서 어떻게 생각해봐야 하는건지도 알지를 못했습니다. 다만, 뭔가가 마음에서 걸리적거림이 있는건 분명하다 정도였을 겁니다. 그것때문에 처음으로 성경공부 이외에 교회에서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던 같습니다. 저를 성경공부로 인도하신 분이 다니시는 교회를 따라 나서게 것도 즈음, 그러니까 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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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순이었습니다. 설교는 성경공부에서 갖기 힘든 통찰이 있게 하는 같아 좋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설교를 듣는 중에 목사님이 요한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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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의 구절을 잠깐 읊조리셨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런데 순간 말씀을 듣는 순간 머리속에 어떤 울림, 마치 보신각 같은 종이 바로 옆에서
하고 울린 것같은 경험이 있었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돌아서 나오는데 무슨 일인지 앉았던 자리를 다시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뭔가 변화가 일어난 같다는 느낌은 드는데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일이라 도무지 없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이후부터였습니다. 무엇인가 다르다라는 것을 감지하기 시작한 것은제일 먼저 감지한 다른 점은 성경을 읽을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보려고 해서가 아니라, 말씀이 마음에 망치로 내리치듯이 들어오는데 그것은 대단한 경험이었습니다. 그것은 읽는다는 말로는 도저히 설명할 없는 상태입니다. 모든 오감을 통해 말씀이 들어온다고 하는 것이 가장 비슷한 묘사가 아닐까 합니다. 성경을 통한 그러한 경험이 날마다 진행되면서 안에 이미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을 부정할 없음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실로암에서 눈을 뜨게 소경처럼,
이러한 일이 나에게 일어납니까? 누가 이렇게 하게 합니까?’라고 물을 ,
너와 말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부정할 없는 대답이 되어 역시
주님, 제가 믿습니다라고 고백하고 감사의 기도를 올릴 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저에겐 완전한 치유자로서의 주님이셨고, 온전히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소경이 눈을 뜨게 되면 세상을 보게 됩니다. 저는 눈을 뜨면서 처음에 보기 시작한 것들은 어제까지의 모습이었습니다. 어린 날의 친구는, 문화는, 그리고 과학은 제가 마음을 다바쳐 사랑했던, 무엇과도 바꿀 없던 내가 섬긴 우상이었습니다. 우상들을 위해서 그토록 죽을 힘을 다해 살았던 모습은 당시엔 반짝였을지는 모르지만 영원할 없는 그런 것이었음을 보게됩니다. 그렇게 때는 분명 즐거운 삶이었고 의미있는 것들이었는데, 이제는 안에서 너무 처절하고 비참하게 죽어가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너무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모습을 인식하게 때마다 동시에 제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제게 있어서 이것은 너무 놀라운 경험입니다. 저는 항상 살아 숨쉬고 있었지만, 특별히 내가 살아있다는 것에 대해서 억지로 생각하려 하지 않는 이상 나는 살아있다라는 생각을 해보질 못했는데,
나는 살아있다라는 인식이, 물밀듯이 밀려오는 어제까지의 모습이라는 영상과 더불어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복잡미묘한 상태를 저는 어떤 말이 형용할 있을지 아직도 찾지를 못했습니다. 그냥
감동이야 정말‘, 정말 감동입니다. 그런 일들이 반복되면 반복될수록,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리신 하나님이셨고, 얼마나 오랫동안 저를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이셨는지에 대해 느낄 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생명을, 하루하루 풍성해지는 삶을 그냥 받기만 해도 되나, 내가 뭐라고, 내가 뭔가 해야하는 것은 아닌가 별별 생각이 많이 들지만, 딱히 내가 있는가 말이다 그저 이렇게 주시는 풍요함을 누리는 마리 양으로 살면서 감사할 밖에는

시카고로 날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문득 창문너머 풍경을 보고 있다가 주체할 없는 감동에 사로잡혀서 울음이 터지는 바람에 고생을 했습니다. 된통 했습니다. 저와 오랫동안 성경공부를 같이하고 있는 형제자매들이 그동안 나를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고 간구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유추해서 내린 결론이거나 미루어 알게된 그러한 일이 아닙니다. 그냥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깨달아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알려 주셨다라고 밖엔 저는 표현하질 못하겠습니다. 저를 오랫동안 대한 분들은 기에 곧잘 눌린다는 표현을 자주 합니다. 기라는 것은 힘차고 강한 좋은 기운도 있지만, 독기와 같이 남에게 상처가 되는 기운도 있습니다. 아마 사람들이 말하는 기운은 전자보다는 후자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악에 받히거나 자존심이 상해서 열나게 되면, 스스로도 기를 다스릴 없어서 곤란하기도 하니까 말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충돌 혹은 대폭발이 밖에 없습니다. 저는 그러한 자신의 단점을 알고는 있었지만, 인정하기 쉽지않은 자화상이기도 합니다. 오랫동안 저를 경험한 우리 모임 사람들이 그것을 몰랐을까요? 모습은 예쁘지 않은 모습입니다. 예쁜 사람 사랑하기야 쉽지만, 미운 사람 사랑하는 일이 어디 쉬운 일입니까? 그런데 이렇게 명백하게 제게 감동으로 알려주심은 그런 나를 위해 진심으로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저를 구원하시기를 간절히 구한 영혼들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저는 하나님의 보호하심 속에서 온전한 하나님을 만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목메어 말을 잇지 못하게 정도로 감동입니다. 그리스도의 지체들을 곁에 두신 하나님, 그렇게 일하신 하나님을 깜냥으로 도저히 측정불능입니다. 경험을 통해 제게 보이시는 하나님은 사랑과 풍요의 하나님입니다. 저는 우리 지체들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내가 것도 아니고, 특별한 사람도 아닌데 정말 거저 받았습니다. 그냥 이렇게 받는 주체할 없는 은혜를 두고 제가 있는 일이라곤 감격에 겨워 엉엉 소리내어 우는 일이 전부입니다. 지금은 제가 그런 상태에 있습니다. 고등학교 친구하고 헤어지게 이후로 거의 울어본 일이 없는데 요즘은 하루에도 번씩 목놓아 울게 됩니다. 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냥 심장이 터질듯한 감동 속에서 그러합니다. 거저 받은 것을 거저 주어야 일에 대해 저는 어때야 하는가가 제게 수행해야할 남은 명령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때입니다. 놀라우신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