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베다니 사역 – 최원영 교수

이코스타 2006년 8월호

KOSTA/USA 2006을 연 jjKOSTA에서 University of Nebraska에서 화학을 가르치시는 최원영 교수의 강의를 편집부에서 요약한 것입니다.




나폴레옹의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는 말은 우리 각자에겐 ‘사전’이 있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가진 사전의 definition이 다르면 대화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세상적 가치는 무엇이 문제인가? 공중부양을 하겠다며 도를 찾던 사람이 ‘내가 떠서 뭐하지?’라는 근본적인 문제에 부딪혀 포기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와 같이 세상적 가치는 그 한계를 가지고 있는데, 그 세상적 가치의 한계를 짚어보자.


1. 세상적 가치는 영원을 담지 못한다.
볼테르의 말처럼, 몇분을 타고 사라지는 지푸라기 같은 삶의 허무함을 깨닫는다. 우리는 예수를 믿고 나서 평균수명이 ‘영생’이라는 것으로 새로운 가치를 지니게 된다. 그러므로, 세상의 가치를 넘어 하나님의 가치를 가진 우리는 ‘생명을 건지는 일’, 즉 ‘화해자로서의 초대’라는 사명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딜레마가 있는데, 바로 ‘나도 가끔은 주목 받는 인생이고 싶다’라는, 영원한 빛인 별보다 20분 타고 마는 불타는 지푸라기이고 싶은 충동이 인다. 그런 딜레마를 처리하는 방법은 욕구를 참는 것이 아니라, 내 시선을 옮기면 된다. 다시 말해 내 사전을 다시 써야 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보자. ‘그리스도인이 피곤한 이유는 무엇인가?’ 어떤 사람을 우스게 소리로 이렇게 답하기도 한다. ‘일요일에 쉬지 못하고 교회에 가니까’라고… 하지만, 이 말을 잘 살펴보면, ‘그리스도인은 피곤하다’ 혹은 ‘교회는 안식을 주지 못한다’라는 전제가 깔려있는 서글픈 말이다. 우리는 이렇게 세상의 전제들이 깔려있는 사전의 정의를 성경의 바른 사전으로 다시 써야 한다는 말이다. 편한 것이 좋은 것이다’라는 말이 정말 좋은 것일까? 한번 다시 생각해 보면, 이런 전제들은 ‘이생의 자랑, 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에 근거함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전을 다시 쓰기 위해서는 성경의 메세지를 잘 이해해야 한다.


2. 예수님의 베다니 사역
나사로를 살리신 사역이 베다니 사역이다. 하지만, 나는 이 일을 ‘나사로의 기적’이라는 표현보다는 ‘예수님의 베다니 사역’이라고 명명하고 싶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예수님의 사역은 잘 알고 있으리fk 생각한다. 요한복음 본문 1 4절을 읽어보자. 예수님은 나사로의 아픔, 혹은 죽음의 목적을 정확히 알고 계셨다.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이런 의도를 들은 사람은 제자들, 심부름꾼, 마르다와 마리아, 그곳에 있던 유대인 등이겠다. 각각 그들의 반응을 살펴보자. 4절 이후에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의도를 들었슴에도 불구하고, 위험하다고 베다니로 들어 가지 말 것을 권한다. 또한 도마의 ‘우리도 같이 죽으러 가자’라고 조금은 과장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아마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잔다’라는 표현을 문자 그래로 잠들어 있는 것으로 이해했던 것 같다. 반면, 베다니에 도착해 예수님께서 처음 만난 사람은 마르다인데, 그녀의 반응을 보자. 예수님의 의도를 예전에 들었슴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이곳에 계셨다면 죽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자신만의 반응을 보인다. 마리아도 마르다와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유대인들 역시 ‘이 사람이 죽은 자들은 살리지 못하는 구나’라고 죽은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는 듯 하다.


정리해 보자. 예수님의 사역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함이라’라는 것이었고, 구체적인 사역은 ‘우리의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였지만, 예수님 주변의 그 누구도 그 의도를 바로 깨달은 사람은 없었다. 예수님의 사역은 참으로 외로운 사역이었다.


여기서, 예수님의 ‘통분히 여기다’라는 표현을 집중해 보자. 다른 번역을 보면, ‘아픈 마음으로 슬퍼하셨다’라는 의미이다. 예수님은 참으로 아파하셨던 것 같다. 그렇다면, 여기서 알 수 있는 베다니 사역의 성격을 살펴보면, 예수님은 짝사랑 전문가가 아닌가 싶다. 짝사랑이란 상대편은 관심이 없는데, 당사자만 안타까워 하는 것이니까. 정말 짝사랑은 감동 아닌가? 관심도 없어 하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쏟아 부어 주시는 사랑은 정말 감동이다. 또한 향유를 붇는 마르다의 사역도 베다니 사역에 염두에 두어야 하겠다.


예수님의 베다니사역은 정말 쉬운 일이었을까? 하지만, 우리가 진정 물어야 할 것은 ‘편한가’ 혹은 ‘쉬운가’라는 질문이 아니다. 그 대신 그 ‘의미’를 물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한 다른 예를 들어 보자. 결혼할 때 물어야 할 것은 ‘쉬운가, 어려운가’가 아닐 것이다. 정말 이 결혼이 의미가 있는가를 물어야만 한다. 사실, 인생은 의미의 싸움이다. 예수님의 오병이어 사건을 살펴보면, 육의 양식과 영의 양식이라는 의미를 짚어 주셨다. Steven Jobs은 코카콜라의 사장을 설득하기 위해 ‘설탕물을 팔기에 평생을 바칠까? 아니면 세상을 바꾸는데 쓸 것인가?’라고 했다. 사실 애플 컴퓨터를 많이 판다고 해서 세상을 바꿀 수 없기에 이 말은 별 의미가 없지만, 우리는 세상을 향해 이 말을 선포해야 할 수 있고, 해야만 한다.

[최원영] 하늘과 땅을 이어라

이코스타 2006년 6/7월호


혹시 “배철수의 음악캠프”란 라디오 프로그램을 아십니까? 이 프로그램의 진행자인 배철수씨는 1980년대에 활주로란 그룹으로 대학가요제로 등장한 뒤에 그룹 송골매의 리더로 활약했었습니다. 저의 어렴풋한 기억속에 그가 불렀던 ‘새’라는 곡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멜로디는 이제 잊었지만 가사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하늘과 땅을 이어라”


이 곡의 작사자는 ‘새’라는 존재를 하늘과 땅을 잇는 존재로 파악했습니다. 하늘과 땅. 그 닿을 수 없는 두 지점을 잇는 존재라.. 저는 예전에 이 노래를 들으면서 예수님이 이런 일을 하셨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올해의 주제인 Entrusted Reconciler 와 주제 구절 에베소서 2장 14절의 말씀을 보면서 저는 제 기억 속에 가물가물한 이 노래구절을 떠올렸습니다.


“하늘과 땅을 이어라”


올해 코스타 주제 취지문에 나타난 세상의 적나라한 현실을 바라보면 우울해 집니다. 화석화 된 신앙, 몰이해, 편견, 이기적, 배타적 갈등, 분열.. 우리는 이러한 현실의 모습에 분노 합니다. 이러한 것들을 때로 우리가 속한 교회 안에서 볼 수 있기도 합니다. 청년부 지체 가운데서 발견되기도 하고 교회의 어른들의 스치는 모습속에서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를 정말 좌절하게 만드는 것은 이런 암울한 것들이 내 안에서도 발견된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싫어하는 것들이 내 안에 있는 느낌이랄까..


2000년전에 오셔서 온전한 하나님과 타락한 인간을 이으셨던 예수님 처럼 그렇게 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 이 일들을 할 만한 능력과 지혜가 있다면 세상이 지금의 모습이 아닐 겁니다.


우리에게 한가지 나쁜 버릇이 있다고 합시다. 예를들어, 인터넷으로 시간을 너무 많이 보내는 것-영화 다운 받기, 한국드라마보기, 한국신문 종류대로 보기-을 바꾸고 싶은 습관이라 합시다. 하지만 이 한가지 버릇을 바꾸는 것조차도 만만한 싸움이 아닙니다. 말로는 간단한 ‘아침에 한시간 일찍 일어나기’도 쉽지 않습니다. 이런 내가 세상을 바꾼다?


방법은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이미 하늘과 땅을 이으신 예수님이 나의 삶을 주관 하시도록 허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할 때 우리는 이미 예수님을 주인으로 인정했지만 내 안에 들어와 계신 주님을 우리가 얼마나 구박하는 지 모릅니다.


“주님, 나 바쁘거든요. 좀 구석에 가 계시죠.”
“주님, 나 잠깐 놀고 옵니다. 집 잘 보고 계세요”
“주님, 나 건드리지 마요. 건드리면 터집니다”
최악의 경우는 다음의 경우입니다.
“…………..”
주님과 이야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의 존재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이 나 자신과의 주도권 싸움에서 승리자는 주님이셔야 합니다. 내 고집이 승리를 거둔다면 나에게 성장은 없습니다.


월드컵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본프레레 감독에서 아드보카트 감독으로 한국 축구의 사령탑이 바뀐 뒤 축구협회 기술위원장을 맡고 있는 이회택씨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감독 하나 바뀌었는데 팀이 이렇게 달라질 수가 있는가?”
저도 한국 축구를 보면서 정말 팀이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합니다. 감독이 바뀌면 팀이 바뀝니다. 내 인생의 감독이었던 ‘나’를 경질시켜야 합니다. 새로운 감독을 영입해야 합니다. 그 감독님의 이름은 예수님입니다. 선수(나)의 플레이가 얼마나 달라 질까요.


그 다음에 해야 할 작업이 있습니다. 주님이 하셨던 일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과 하늘을 동시에 붙잡는 일입니다. 세상과 하나님을 화목케 하는 사명을 감당하는 일 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이 일을 이루셨습니다.


십자가라.. 우선 나는 열외해야지..
내 발등에 떨어 진 불 부터 끄고..
이번 시험 붙고 나면..
직장 잡고 나서..
우리 애가 좀 크면..
주변에 Role model이 없는 관계로..


몇 가지 excuse를 적어 봤지만 아마도 우리가 댈 수 있는 excuse는 더 많으리라 생각 합니다. 한마디로 십자가는 세상에서 인기가 없습니다. 하지만 십자가가 가진 신비가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실패의 상징이었고 처참한 처형도구 였지만, “하나님의 영적전쟁”이란 반전드라마에 사용될 복선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을 ‘밭에 묻힌 보화’라고 표현하셨습니다. 보화를 밭에서 발견한 사람이 전 재산을 이 밭에 투자합니다. 모르는 세상사람이 보기에는 한심한 일입니다. 바보라고 손가락질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아마도 이 사람은 실실 웃으며 아렇게 말할듯 싶습니다. “바보는 내가 아녀, 느그들이 바보여”


보화를 보는 경험이 중요합니다. 히브리서식 표현을 빌자면 이 일에 허다한 증인들이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이것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이 신비를 아는 사람들은 십자가만을 따라 다닙니다.


21세기는 세상을 화목하게 할 수 있는 자를 간절히 원합니다. 하지만 그 사명을 감당할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오직 주님을 품은 자만이 감당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시키시기 위해 우리를 훈련 시키십니다. 내가 당하는 이 어려움들을 통해 주님께서 메세지를 주십니다. 내가 황무지에 있는 줄 알았는데 이곳이 장미꽃밭이었다는 깨달음을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그 깨달은 자에게 헌신을 요구하십니다.


하늘과 땅을 잇는 일, 우리의 사명입니다. 우리의 일생를 통해 정말 몇가닥이라도 이을 수 있다면 주께서 기뻐 하실 겁니다.

[최원영]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삶

이 달의 소개할 책은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삶” (고든 맥도날드, 윤종석 옮김, IVP) 이다.


복이란 단어는 우리의 신앙 단계에 따라 여러 가지 의미로 다가온다. 초신자일때는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 것을 축복으로 알았다.
우리의 요구를 세심하게 들어주시는 참 좋으신 하나님. 그러나 우리의 한심한 요구 조차도 맘씨좋게 들어주시던 하나님이 언젠가 부터
바뀌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No”를 경험 하게 되었다. 하나님 이게 뭡니까? ….원망과 혼돈의 시간을 지나보낸 뒤,
하나님의 “No”가 그의”Yes” 보다 훨씬 나에게 유익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된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보좌를 흔들어서’ 더 많은 축복을 쟁취 할 것인가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원망과 혼돈의 시간들-고난으로
변장된 순간들-이 얼마나 우리의 삶에 축복인가를 설명하고 있다.


자는 말한다. “폭풍은 다가온다. 영혼이 시험받는 힘겨운 순간들은 떠오르는 해만큼이나 확실하다”. 그렇다면 도대체 하나님은 왜
이런 어려운 순간들을 허락 하시는가?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하나님은 우리가 깨어지길 원하신다. 위기의 순간을 통해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눈에 보이는 것에서 우리의 내면(영혼)으로 관심을 돌리게 되는 계기를 주길 원하신다. 그러면, 영성을 추구
할때 무엇이 따르는가? 자기 발견의 고통과 굴욕이다.(p125).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 바울의 고백에서도 보듯이 많은 영적 스승들은 욕망, 정욕, 분노로 가득찬 우리 영혼의 하수구까지 내려와 본
사람들이다.

주님은 우리가 먼저 비우길 기대하신다. 우리 자신을 철저하게 비운뒤, 그 다음에는 주님은 무엇을 원하시나?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삶은, 그 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자세하게 알고자 하는 집요한 열망을 그 특징으로 한다. 그분의 본질, 그분의
능하신 행사, 그분의 뜻 그리고 우리를 향하신 그분의 계획 등을 알아 가는 것이다. 실은 이런 연습이 바로
신학이다”(P221).


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신학’을 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화학을 통해 ‘신학’을 한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책의 말미에
‘엄청난’ 신학을 했던 한 중국인 목사님의 이야기가 쓰여져 있다(다소 길지만 꼭 인용하고 싶다). 이 목사님은 신앙때문에
18년간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지낸 경험을 말해 주었다.


제 친구들은 제가 강제 수용소에서 어떤일을 했길래 몸의 건강을 지킬 수 있었는지 궁금해 합니다. 그러면 저는 그들에게 그곳에서의
삶은 너무너무 고된 것이었다고 대답 합니다. 수용소 당국자들은 제게 인분 구덩이를 치우는 일을 시켰습니다…간수들과 모든
수감원들은 악취 때문에 가까이 오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내가 거기서 일하는 것을 좋아하는 아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바로 혼자
있는 것이 좋았습니다. 강제 수용소에서는 보통 모든 수감원이 엄격한 감시하에 있기 때문에 아무도 혼자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구덩이에서 일했기에 혼자 있을 수도 있었고 주님께 큰소리로 기도 할 수 있었습니다…그것이 바로 내가 인분
구덩이에서 일하는 것을 좋아했던 이유입니다…


시 내가 제일 즐겨 부르던 찬송 중 하나가 ‘저 장미꽃 위의 이슬’입니다. 그것은 체포되기 전에도 제일 좋아하는 찬송가였지만
그때는 그 찬송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치 못했습니다. 인분 구덩이에서 일하면서 나는 우리 주님과의 놀라운 교재를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저 장미꽃 위의 이슬 아직 맺혀 있는 그 때에

귀에 은은히 소리 들리니 주음성 분명하다

주가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그 구덩이 안에서 몇번이고 반복해서 이 찬송을 부르면서 나는 주님의 임재를 맛보았습니다. 그분은 결코 나를 버리거나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살게 되었고 그 인분 구덩이는 나의 은밀한 동산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 삶에 복 주시기로 택하신 한 평범한 사람의 고백이다. 결국, 우리의 상황이 어떠하던지, 우리의 삶을 통해 쌓아가는 주님과의 관계가 축복의 최고봉이 아닐까 싶다.

[최원영] 빛, 색깔, 공기

얼마전에 들은 이야기다.

Q: 혼자되신 할머니 권사님과 설교를 잘 못하시는
목사님의 공통점은?

A: ‘영감’이 없다.


감을 얻기란 쉽지않다. 하지만 좋은 신앙서적은 영감의 원천이라 할 수 있겠다. 이번달에 소개하는 책, “빛, 색깔,
공기”(김동건, 대한기독교서회, 2002)는 우리에게 삶과 죽음, 그리고 그 의미에 대해 영감을 주는 책이다. 먼저 저자의
말로써 이 책이 어떻게 책으로 나오게 되었는가 살펴보자.


나는 원래 이글을 책으로 낼 생각은 아니었다. 아버지께서 암에 걸리셨을때, 만약 우리 가족이 아무런 고통없이 그 모든 어려움을
단숨에 헤쳐나갔다면 이 책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와 우리는 이 사실을 신앙적으로 받아글이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이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니었다”


책은 간암에 걸린 아버지을 바라보는 둘째 아들이 쓴 병상일지라 할 수 있다. 아버지의 마지막 4개월을 지내며 아들와 아버지가
나눈 대서, 그리고 그 병상의 아버지를 바라보는 가족들의 이야기가 이 책의 내용이다. 아버지는 김치영 목사, 둘째아들은
김동건교수(영남신학대학교), 두 신학자가 겪은 삶과 죽음의 이야기이다.

“어떤 시련 앞에서 겪는 고통에는 모두 차이가 없다. 그러나 그 시련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는 각기 다르다. 신앙인과 비신앙인의 차이도 결국 그들이 삶을 어떻게 보며,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달려 있다.” (김동건교수)


책은 많은 암투병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처럼 극적으로 암을 이기고 건서을 되찾은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한 신앙인과 그의
가족이 마지막 순간까지 삶에 의미를 부여하며 죽음을 받아드린 과정들이 그려져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그의 생의 마지막 순간에
여러가지 삶의 문제에 대해 깊은 통찰을 나눈다.

고통에 관해서..

고통을 겪는다는 것은 기독교인도 예외가 아니다. 고통을 겪는 다는 사실에는 비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의 차이는 없지. 그러나 고통에
임해서 기독교인이 가져야할 차이가 있다. 기독교인에게 고통은 육체의 고통으로 끝나야한다. 우리는 고통이 올때, 신음할 수 있다.
고통을 호소 할 수 있고…. 이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고통이 불평과 절망이 되고, 그 고통이 허무감으로
연결된다면 이는 불신앙이다.” (김치영목사)

심한 고통 속에서 곧 다가올 죽음을 앞둔 이에게 그의남은 생은 어떤의미를 부여 할 수 있을까?
나는 요즘 인간의 삶을 여행에 비유해 생각해 보곤 한다. 인간은 두가지 여행을 한다. 한여행은 육체를 입고 이세상을 사는 것이고
다른 한 여행은 부활체로서 영생을 사는 것이다. 나는 70여년간 살아온 하나의 여행을 마치고 다른 하나의 여행을 준비하고 있다.
나는 지금 내가 겪고있는 이고통을 이 세상에서의 여행을 정리하고, 주님께 나아가는 새로운 여행을 향한 고통이라 생각한다.”
(김치영 목사)

죽음의 본질에 대해…

십자가 속에 있는 바울에게는 죽음이 무엇인지 환히 보였어. 죽음의 본질이 너무 환히 보여 너의 쏘는 것이 어디있드냐고 조롱 했던
것이다. 바울은 죄의 삯에 의한 죽음을 조롱했다! 오늘 저녁 나에게 바울의 말씀이 그냥 전해지는 구나. 그 쏘는 것이 다 빠진
죽음, 이제는 증오스러운 것이 아니라, 친숙하고 친근하게 맞아진다. 이제 죽음은 그 쪼는 것이 빠져버린, 부활을 향한 하나의
과정 일 뿐이다.” (김치영 목사)

병상에 비친 옅은 햇빛을 보며…
“어때! 빛이다. 그렇지?” (김치영 목사)

달란트에 대하여..

나는 달란트는 어떤 재능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삶 자체라고 생각해본다…중략…무엇을 배워서 어떻게 써먹을 지만 생각하면서,
우리 생명을 통해 배우고 깨달을 수 있는 많은 것을 포기하는 자가 바로 달란트를 묻어둔 자이다. 호흡이 남아 있는 동안 좀더
느끼도 배우고, 좀더 웃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며, 좀더 기도하고 봉사하는 것, 그자체가 우리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사용하는
것이리라.” (김동건교수)


제없는 인생은 없다. 우리 코스탄에게도 산적한 문제가 있으리라. 지도교수와의 문제, 경제적 문제, 학업문제, 결혼문제…
이러한 문제의 끝, 문제의 최고봉이라 할수 있는 죽음을 예수님께 해방시키셨다. 이제 정말 남은 문제는 앞서 저자의 말처럼,
주어진 상황가운데 내가 얼마나 그리스도인 답게 반응하느냐 일 것이다.

사족1: 고인이 되신 김목사님이 고통의 순간에 붙들었던 탁상시계가 있었단다. 이시계 뒤에는 다음과 같은 성경구절이 있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도다. 이제도[비록 지금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베드로 전서 1장 8절).
Without having seen him you love him: though you do not now see him,
you believe in him and rejoice with unutterable and exalted joy. 그는
숨질때까지 이 구절을 ‘붙들고’ 있었다.


족2: 아마도 이책을 골라 읽게 된 계기는 얼마전 10년간 암으로 고생하시다가 결국 백혈병으로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의 영향이
있을 것이다. 요즘도 종종 아버지 생각을 한다. 이미 천국 가신 아버지로 말미암아 나의 삶이 풍요로와 짐을 경험한다. 아버지가
나에게 주신 마지막 선물일 것이다.

[최원영] 인생의 응어리를 풀라

2003/9

사용자 삽입 이미지9월의 책으로 선정한 책은 크리스티 김 교수님의 “인생의 응어리를 풀라”이다. 영어 제목은 “Pour out your heart to God”으로 “하나님께 너의 마음을 쏟아라”정도로 해석 할 수 있겠다.



이 책은 내적 치유에 관한 책이다. 상처 없는 사람은 없다. 상처가 없다고 주장한다면 오히려 자신의 상처가 드러나기를 두려워 하는 사람은 아닐까. 특별히 가족에게서 받는 상처는 도무지 내어 놓기가 힘들다.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치유로 나가는 출구를 발견하기까지의 과정을 기술한다. “내면의 변화는 도 닦아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와의 만남과 교제에서 시작합니다. 진리는 이론이 아니라 인격체이십니다” 이러한 인격체이신 예수님을 만날때 우리는 참된 변화를 경험할 수 있는데, 저자는 네가지 측면에서 이런 인격적 변화를 조망하고 있다.



첫 째는 용서다. 이 용서의 키포인트는 나를 위한 용서. 미움이란 칼을 마음에 품고 있을때 결국 상처 받는 것은 나다. 은혜를 받은자가 용서할수 있는 능력을 갖춘다. 둘째는 기도다. 나의 상처 받고 이픈 마음을 주님 앞에 꺼내 놓을 때 진정한 치유가 나에게 임한다. 저자는 하나님께 마음을 ‘토하라”고 권면한다. 그리고 쏟아놓은뒤 주님의 말씀을 들으라 고 말한다. 셋째로 영적전쟁에 대한 인식이다. 결국 크리스찬이 피해갈 수 없는 것이 영적 전쟁이라면 이 싸움에 승리 하기위해서는 우리의 생각을 다스려야 할 것이다. 넷째로 변화를 기대해야 한다. 어제 보다 나은 오늘, 오늘 보다 나은 내일을 기대하며 내면의 변화를 기대하라.


이 책을 읽으면서 결국 우리의 상처조차 주님 앞에서는 사명으로 승화됨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저자가 겪어야 했던 우울했던 어린시절의 경험들이 오히려 주님의 사역에 쓰임 받는 것을 보며 더욱 확연해 졌다. 유학생활이란 광야를 통과하는 우리 코스탄을 생각하며 이책을 권한다. 상처 받으셨으면 치유하시라. 치유하신후 치유자가 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