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문희] 하나님의 인격을 가르치는 주일 학교

잘 알고 지내는 미국 친구 부부와 그들의 아이들과 함께 예배 후 점심을 먹으려 한 restaurant 에 가게 되었다.  그 때 그 엄마는  초등학생들인 두 자녀들에게 이렇게 질문 했다. 



Mom: How was your Sunday school class? What did you learn?Anything special? 



Child 1: No, not really, I don’t know.  It was so boring. 



Mom: What do you mean? You didn’t do or learn anything?



Child 1:Well, you know Mom? I don’t know I was just bored…



하면서 말의 뒤끝을 흐리기 시작했다.  그 때,



Child 2:Well, I learned that Jesus fed the 5000people.



Mom: Oh! What else, did you learn? 



Child 2: I don’t remember the rest of the lesson, but I heard the Bible story.



Mom: Listen Kids, when you go to the Sunday school class, you do not expect to play or do nothing.  I want you to learn the word of God.  You should be able to tell me the key point of the lesson. 



그렇게 아이들에게 훈계를 하는 그녀는 아이들은 교회 학교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냥 하나의 놀이 공간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신앙의 기초를 어려서 부터 심어 주기 위해서는 주일 학교 교육 역시 일반 학교만큼 중요하다면서 주일 학교 학습 과정 내용을 자주 복습하면서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는 신앙적 대화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교회 안에 소속되어 있는 주일 학교가 우리의 아이들에게 갖는 성경적, 인격적 의미에 관하여 생각을 해 보게 되었는데, 교회 안에 소속 되어 있는 주일 학교는 아이들이 다니는 일반 학교와 매우 다른 특색을 가졌다는 것은 기정사실이고 정식으로 자기가 가르치는 분야에서 오랜 기간 동안 훈련을 받고 그 분야에 대한 자격증을 갖고 임금을 받아가면서 일하는 일반 학교 교사와는 달리 주일 학교 교사는 어떤 특별한 훈련과 보수 없이 단지 하나님 말씀을 사랑하는 그 사명감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니 일반 학교 교사에 비해 quality가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부모님들은 아이들이 무슨 내용을 배웠는지 관심도 없고 그냥 어른들이 예배드리는 동안 babysitting 시간으로 인식하고 있다.  교회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인격 교육, 즉 예수님을 닮는 인격 교육은 그 중요성을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그렇게 많은 이들로부터 호응을 받지 못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교회에서 언젠가 아이들을 위한 큐티 자료가 있으니 필요하신 분들은 알아서 가져가라는 광고가 나간 적이 있다. 이 때 한 학부형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아니 물론 큐티 자료 우리 아이가 할 수 있으면 좋지.  근데, 워낙 다른 공부하기가 바빠서… 매일 숙제도 많고 SAT 공부도 해야 하는데 큐티 할 시간이 어디 있어?  나중에 시간이 남을 때 시키지 뭐. ” 하면서 투덜거리는 모습을 발견하면서 학교 교육에 더 많은 비중을 두는 부모님들의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학교 교육은 무시하고 교회 학교만 중요시 하라는 뜻은 절대로 아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학교 공부가 중요하듯이 우리의 인생의 길잡이가 되는 하나님의 인격을 닮는 공부 역시 Ep어 놓기 어려운 부분이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자녀를 키우는 사람들은 자기의 아이들이 건전한 도덕(moral)관과 가치 (value)관을 갖고 성장해 주기를 원한다.  그래서 공립학교 보다는 기독교나 가톨릭 이념이 바탕이 되어 있는 사립학교를 선호하여 비싼 돈을 투자하면서 아이들의 교육에 열성을 쏟는 모습들을 볼 수 있다. 예전에 이코스타를 통해서 공립학교와 사립학교의 실태를 보고 한 바 있는데, 과연 기독교적인 도덕관과 가치관을 심어 주기 위해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는 사립학교에 보낼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또 그런 교육을 받았다고 해서 한 인간에게 올바른 기독교 사상이 확립될 수 있는지도 의문가는 점이다. 기독교적인 도덕관이나 가치관을 심어 주는 사립학교에는 일주일에 한 번씩 예배를 드리고 정규 교육과정에 포함되어 있는 성경을 배울 수 있으며 종교에 대한 이야기들을 자유롭게 나눌 수 있다는 장점들이 있다. 그러나 이렇게 교육 과정에 들어 있는 성경만을 배우고 예배를 드리고 정교 분리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해서 아이들에게 성경적 도덕관이나 가치관이 제대로 만들어 지지는 않는다. 기독교 사상을 바탕으로 한 사립학교에 다닌다고 해서 그들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하나님 말씀을 바탕으로 한 가치관의 형성이 이루어진다고는 가정 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극소수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사실만을 전제로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 흔히 모태 신앙 혹은 어려서부터 신앙 좋은 부모로부터 양육 받고 성장한다고 해도 그들이 과연 올바른 성경적 가치관을 갖고 살아간다고는 볼 수 없듯이 올바른 기독교 가치관의 확립을 위해서는 효과적인 주일 학교 교육이 이루어 져야 하고 일반 교육 만큼 주일 학교의 중요성을 인식할 필요가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주일 학교 교사 역시 일반 학교 교사만큼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비록 일반 학교 교사처럼 가르치는 분야에 대한 훈련을 받아서 자격증이 있지는 않지만 주일 학교 교사를 임명할 때 어느 정도 선발 기준을 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매 주일 마다 30분에서 한 시간 정도의 주일 학교 교육 시간, 이 시간은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을 통해서 배우는 시간이다.  학년별로 나누어서 하는 주일 학교 시간을 아이들은 학교 공부만큼 진지한 자세를 참여할 필요가 있고 교사들은 자신이 가르칠 분야를 미리 준비해 와야 한다.  그리고 부모님들은 학교 공부만큼 주일 학교 공부 시간이 단지 어른들이 예배드리는 동안 babysitting의 장소로만 생각하지 말고 아이들이 성경의 어떤 이야기를 학습했는지 나누고 그 이야기가 아이들에게 주는 신앙적 교훈에 대해 각자 갖고 있는 생각들을 나누어야 한다. 그러는 동안 부모님들은 아이들에게 신앙적 대화를 할 수 있는 문을 열어 주고 이렇게 어려서 부터 나눔의 시간(sharing)을 갖는 습관을 길러 주는 것이야 말로 신앙에 대해 서로가 갖고 있는 다른 생각들을 이해 할 수 있게 되는 좋은 훈련 과정이 될 수 있다. 이 곳 조지아 출신이면서 한 때 미국의 대통령 이였던 Jimmy Carter는 지금도 자신이 출석하고 있는 교회의 주일 학교 교사로 섬기고 있다. “미국 대통령은 한 때의 직업이었지만 주일 학교 교사는 평생 직업이 될 수 있다” 고 말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고 그의 교회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주일 학교의 중요성을 강조 한다고 한다. 학교 교육이 학부모, 교사, 학생 이렇게 모두 협력해서 효과적인 학습 능률을 올리듯이 올바른 신앙적 가치관 성립 역시 학부모, 학생, 그리고 주일 학교 교사의 끊임없는 협조가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정진호] 제 6 떡 – 천국 투자 –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흐르는 강물 앞에 서서 떡을 던지는 사람을 상상해 보라. 그것도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달 두 달, 일년 이년그리고 십년 이십년을 하릴없이 떡을 떼어 강물 위로 띄어 보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일까?



(1)



예수의 인생은 한 마디로 떡의 인생이었다.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소개했던 사람예수. 그는 세상의 떡으로 와서 떡의 인생을 살았다. 자신의 살을 떡으로 떼어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주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예수 자신의 삶을 나타내는 영적 은유였다. 영적, 육적으로 굶주려 죽어가는 무리들 앞에서 예수는 작은 떡을 하나 취하여(taken), 하늘을 우러러 그 위에 축사한 후(blessed), 그 떡을 쪼개어(broken) 제자들에게 나누어주며(given) 많은 무리들에게 다시 나누어주도록 명한다. 그 장면은 장차 걸어가게 될 자신의 인생과 제자들을 통해 다시 전개될 생명 역사를 선포하는 엄숙한 순간이었다. 오병이어는 성경 전체의 주제를 명료하게 드러내기 위하여 치밀하게 계획되고 연출된 하나의 작품이었다.



예수는 처음부터 하나님 손에 붙들려 인생을 살았던 분(taken)이다. 세례 요한 앞에 무릎 꿇어 세례 받을 때 하늘 문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여 축사함을 받았으며(blessed), 그 받은 능력으로 담대히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며 자신의 몸을 찢으셨고(broken), 마침내 부활의 영광으로 나타나 생명의 떡으로 만민에게 나누어주신 분(given)이다. 오병이어는 작은 떡 하나로 수많은 무리를 먹여 살리는 예수의 인생을 표현한 한편의 모노 드라마였을 뿐 아니라, 그 기적을 체험한 제자들 마다 예수의 인생, 곧 떡의 인생을 살도록 다시 초청하는 영적 암시이기도 하다. Taken-Blessed-Broken-Given의 인생, 이 네 가지 동사로 이루어진 떡의 인생으로 부름을 받는 것이다.



떡의 존재 가치는 먹히는 데에 있다. 자신은 조각조각 찢기고 씹혀서 사라지나 그것을 먹는 사람을 배부르게 하여 살리는 것, 그것이 떡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따라서 예수의 제자된 우리들도 그 같은 떡의 인생을 살도록 요청받는다. 한 조각의 떡이라도 더 먹으려고 아귀다툼을 하는 이 세상 속에서 거꾸로 자신의 떡을 떼어 죽어가는 자들의 생명을 살리는 일에 나누어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의 제자된 자들이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떡의 인생을 산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종종 우리는 앞의 두 가지 동사 Taken-Blessed의 자리에 머물기는 좋아하나 뒤의 두 가지 동사 Broken-Given의 인생을 살기는 싫어한다. 우리는 하나님 손에 붙들려 그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이다. 그리고 성령의 은사 가운데 축복의 자리에 나아가기를 기뻐한다. 교회 안에서 말씀으로 찬양으로 기도로 예배자의 복을 누리기는 좋아하지만, 교회 밖의 삶 가운데 자신의 떡을 떼어 산제사(living sacrifice)로 나누어주는 일에는 인색하기 그지없다.



예수는 우리가 세상의 빛(the light of the world)으로 드러나기를 원한다. 변화산상에 머무르기를 좋아하는 우리들에게 산 아래 마을로 내려가라 명한다. 우리가 산 속의 수도자나 교회 안의 빛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 혼탁하고 부패한 세상 속에서 한줄기 빛으로 살아가며 예수 안에 감췬 비밀 그 기이한 빛을 선전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믿는 자들이 교회 안에 갇혀서 그 많은 은사들을 소진하며 세상을 멀리할 때, 그리스도의 능력은 소멸되어 버리고 세상은 여전히 부패한 모습으로 결코 변혁되지 않은 채 남아있게 된다. 그리고 세상의 떡, 육신의 썩어질 양식을 우상으로 삼아 살아가는 그 모습대로 똑같이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세상은 비웃고 손가락질 할 뿐이다. 너희들이 말하는 그 사랑이 어디 있느냐? 너희가 우리와 다른 점이 무엇이냐? 라고 말이다.



(2)



평양과기대 건설을 위해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계획을 세우고자 20039월에 연변과기대에서 프로젝트팀을 구성하게 되었다. 프로젝트 팀의 책임을 맡아 여러 교수님들과 팀웍을 이루며 일을 하는 가운데, 인간적인 눈으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이 일에 대해 조금씩 하나님이 보이시는 환상과 비전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지난 10여 년 전 연변과기대를 세우고자 하던 때의 추억을 회상해 보았다. 1990년 코스타에 참석하여 김진경 박사의 강의를 듣던 중 나에게 다가왔던 그 비전. 두 개의 나무 기둥 사이에 <연변조선족기술대학건설부지>라고 적힌 현수막만 보이는 텅 빈 민주벌판의 사진을 보여주며 함께 가서 일할 사람을 찾던 동키호테 같은 그 어이없는 초청이 나에게는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예수를 믿은 지 얼마 안 되었던 그 시절, 세상 가치관이 허물어지고 난 후, 과연 어떻게 앞으로 내 인생을 살아가야할지 그 문제를 끌어안고 고민하던 나에게 중국에 있는 200만 우리 조선족을 위하여 그리고 13억 중국인과 북한 동포를 위해 대학을 짓겠다는 그의 말은 마치 한줄기 전율처럼 내 영혼을 흔들었다. 그때 내가 받았던 감동은 대학이 지어지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보다도 저렇게 인생을 사는 분들도 있구나 하는 새로운 깨달음에 대한 충격이었다. 오직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 전 인생을 걸고 투자하는 사람들그것이 바로 내가 만난 예수의 표상, 그리고 내가 따라가야 할 예수의 모습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연변과학기술대학…… 정말 도무지 될 것 같지 않았던 그 일을 두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던가? 그러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신 히브리서 111절의 말씀을 붙들고 그 믿음에 헌신하고 투자한 사람들이 한 사람 두 사람…… 과거의 우리 선조들이 독립운동을 위해 모여들었던 그 땅 황량한 만주 벌판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 결과 오늘, 상전벽해라는 옛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 에스겔의 골짜기와 같았던 북산가 언덕 공동묘지 터 위에 연변과기대의 아름다운 캠퍼스가 어엿한 실상과 증거가 되어 나타난 것이다. 1,600명의 학생과 200여명의 전문인 사역자가 모인 기적의 공동체가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미 배출한 2,000여명의 졸업생들이 얼마나 놀라운 열매와 씨앗을 전 중국 대륙에 뿌리고 있는지…… 기적은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다.



KBS 인간극장의 PD로 잘 알려진 김우현 감독이 연변과기대에 취재차 와서 학생과 교직원 여러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한 내용을 비디오에 담아 보내왔다. 장차 다큐멘타리로 방송작품을 제작하고자 준비하는 가운데 시험적으로 만든 소품을 보내온 것이다. 그 안에는 연길 시내의 택시 운전사가 바라본 과기대 교수들의 모습, 아침 일찍 새벽 교정에서 QT를 하다가 맞닥뜨린 세 한족(漢族) 여학생의 유창한 조선말 인터뷰, 북한 사역에 헌신하여 일하다가 돌아온 졸업생 부부의 감동적인 간증, 결장암 말기의 진단으로 중국과 한국의 병원에서 포기했던 학생을 미국 디트로이트의 원종수 박사님께 보내어 기적적으로 살려온 이야기, 기독교에 배타적이던 공산당원 여학생이 교수님들의 부모와 같은 사랑에 감동하여 마음 문을 열게 된 간증, 마치 사울처럼 예수 믿는 후배들을 핍박하던 청화대학 출신의 엘리트 부부가 연변과기대에서 예수를 영접한 후 서울대학에서 유학하고 다시 돌아와 교수로 함께 일하는 모습, 졸업을 앞둔 여학생이 교수님들에 대한 감사와 학교를 떠나는 아쉬움을 눈물로 고백하는 이야기, 찬양 사역 하는 학생들이 하덕규 집사님과 모임을 가지며 꿈과 비전을 나누는 모습들…… 코스타 초창기의 찬양 사역자였던 조현직 교수님이 YUST 학생 까페 <낮은음자리>에서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의 노래를 부르는 그런 감동의 장면들이 소복이 담겨 있었다. 그것을 보면서 지난 10년간의 눈물어린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감을 느꼈다. 그리고 전도서 11장의 말씀이 떠올랐다.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다시 찾으리라.(전도서 111)



(Cast your bread upon the waters. You’ll find it after many days.)



 



어쩌면 우리 모든 인간은 자기 앞을 스쳐 흐르는 존재의 강물, 역사와 시간의 강물 앞에 서 있는 그런 인생들인지 모른다. 그 강물을 타고 수많은 사람들, 그들의 영혼들이 내게 다가왔다가 더러는 스쳐 지나간다. 그 존재의 강물 위로 내가 가진 떡을 떼어서 던지라고 하나님은 명령하고 계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 행동, 나와 내 사랑하는 아내 그리고 자녀들이 먹어야할 그 떡을 떼어서 흐르는 강물 위에 던지는 그 어리석은 일을 하라는 것이다. 그리할 때, 언젠가는 반드시 내가 투자한 그 떡의 몇 배로 아니 육십 배 백배로 도로 찾을 그 날이 온다는 것이다. 그것이 약속이다.



1학년 처음 입학할 때 딱딱하게 굳어진 경계의 눈빛으로 교수를 바라보던 그 투박한 학생들의 마음이 4년이란 강물을 흘러 지나가면서 과기대 교직원들이 던진 그 사랑의 떡을 받아먹고 변화되어 따뜻한 가슴과 생명의 눈빛을 지닌 아름다운 모습으로 졸업을 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볼 때, 우린 그 약속의 성취를 맛본다. 작년 졸업생들을 내보낼 때, 사은회에서 받았던 감격을 반추해 본다. 졸업을 앞둔 학부 학생들이 사은회를 하겠다고 교수님들 가족을 모두 초대했다. 며칠 전부터 학교 강당을 빌려 무슨 준비를 하는지 끙끙대더니만, 마침내 그날이 왔다. 강당으로 들어가 보니 교수들을 위해 정성스런 테이블이 마련되고 다과와 함께 아기자기한 풍선 장식으로 꾸며놓은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우리 조선족 학생들의 순박한 마음이 느껴졌다. 졸업생들은 보이지 않고 무대 앞의 휘장이 가려져 있더니 잠시 후에 불이 꺼진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의 노래 선율이 흐르며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학생들과 신사복을 입은 남학생들이 손에 촛불을 들고 두 줄로 갈라져서 무대 앞으로 나온다. 그 모습이 너무나 감동적이어서 놀라고 있는데… 한 여학생이 감사의 글을 낭독하고 모두 앞에 나와 큰절까지 한다. 뭉클  그리고 눈물



 




사랑하는 교수님들께:



과기대에서 저희가 보낸 지난 4년의 시간은, 정말 너무너무 행복한 순간들이였습니 . 하나하나 방황하는 우리의 심령에 눈물과 피땀으로 새로운 꿈을 심어주신 교수 님들, 감사의 언어로는 너무도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해 한해 지나면서, 커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교수님들한테는 얼마나 큰 기쁨인지 이제 이해할 것 같 습니다.



한알의 씨앗은 떨어져, 썩은 후에야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교수님이 우리를 위 한 그 아낌없는 배려는 언젠가 그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걸 믿고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아닐지라도, 또 혹시 지금은 너무 실망스러울지라도 우리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꿈, 아니 비전이 있기에 그 밝은 곳으로 열심히 달리겠습니다. 비록 어둠속에 서 가끔 슬피 울고 있던 우리의 모습이 있었고, 인생의 지루함 속에서 방황하는 우 리의 영혼이 있었고, 길을 찾지 못해 갈팡질팡하던 우리의 발길이 있었습니다. 지만, 그때마다 따뜻이 잡아주시던 교수님들의 손을 기억합니다, 그때마다 같이 울 면서 위로해 주시던 교수님들의 얼굴을 기억합니다. 때론 잘못한 우리에게서 너무 실망한 나머지 화내시던 교수님들의 모습도 기억합니다. 그때는 더러 불평과 원망 을 품었었지만 지금은 알 것 같습니다. 교수님들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가 이젠 우리의 마음을 합하여, 교수님들께 말하고 싶습니다. 사랑합니다. 그동안 정말 고마웠습니다.



교수님들의 꿈은 꼭 이루어질 것이며, 우리는 우리의 꿈을 안은 채, 사회로 발걸음 을 디디게 될 것입니다. 비록 시작은 미미하지만 신실한 꿈과 진실한 마음, 참된 자세로써 작은 일을 큰 일로 만들 것이며 큰 일을 기적으로 만들겠습니다. 우리의 학교가 세워진 것은 기적입니다. 교수님들께서 여기에 오신 것도 기적입니다. 우리 가 여기에 하나로 모일 수 있는 것도 기적입니다. 하지만 가장 가장 놀라운 기적은 바로 교수님들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젠 교수님들께서 우리에게 남겨준 그 과제를 우리가 스스로 메고 가야할 시간이 되였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믿습니다. 우리의 뼈가 세월속에서 한줌의 흙이 되고 우리의 이름이 사람들속에 묻혀서 아주 사라진다 하여도 우리의 목소리, 우리의 외 침은 하늘의 저편 끝까지 남아있을 것입니다. 교수님들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이 땅에 진리, 평화, 사랑 이 세 마디가 영원히 메아리치게 될 것입니다.



99학번 졸업생 일동


(3)



한자어로 사랑이라는 말을 나타내기란 쉽지 않다. 남녀간의 사랑, 부모의 사랑, 국가를 향한 사랑 등 이 모든 의미를 애()라는 한 글자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그 앞에 다른 수식어를 붙여 사랑의 종류를 구분한다. 자기애(自己愛), 부부애(夫婦愛), 민족애(民族愛), 인류애(人類愛), 등등……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아가페 사랑, 즉 무조건적인 사랑을 표현할 말을 찾기는 더욱 어렵다.



살신성인(殺身成仁)이란 말이 있다. 자기 몸을 죽여서 인()을 이룬다는 말이다. 이 말만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을 잘 표현하고 있는 말이 있을까? 흔히 지하철역에서 자신의 몸을 던져 타인의 생명을 구하고 죽은 사람을 가리켜 살신성인을 이룬 의인이라고 칭찬한다. 물론 아름다운 귀감임에는 분명하지만 그의 행동은 사랑이라기보다는 즉흥적인 용기에 가깝다. 그러나 십자가의 사랑은 즉흥적인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오랜 시간 계획된 것이며, 많은 고민과 피와 땀과 눈물의 소산이다. 도무지 사랑할 만한 구석이 없는 죄인들을 향해, 아니 자신을 욕하며 조롱하고 채찍질하는 그 원수의 무리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기로 결단한 그 너그러움의 극치…… 그래서 그 사랑을 가리켜 인애(仁愛)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그 사랑을 이룬 예수를 향해 인애하신 구세주라고 부르는 것이다. 온 몸으로 인애를 이룬 그 사랑, 자신의 몸을 산산이 찢어 생명을 살린 그 사랑, 그것이야말로 살신성인이다.



따라서 성경에서 말하는 그 사랑, 아가페 사랑은 절대 추상적인 개념이 될 수 없다. 철학적 자아성취를 위한 플라토닉 러브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 사랑은 몸으로 부딪히는 사랑이다. 아니 피를 흘리며 내 살점을 떼어 죽어가는 그 사람을 먹여 살리는 사랑이다. 아니 내가 정녕 죽지는 못할지언정 반드시 손해는 보아야하는 그런 사랑이다. 희생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인 것이다.



평양과기대를 짓겠다고 미국과 캐나다 한국의 여러 교회와 단체를 방문하며 호소하는 가운데, 최근의 북핵 문제를 둘러싼 미행정부의 민감한 분위기 그리고 한국의 지난정권의 퍼주기식의 대북정책을 비판하는 보수진영의 거센 목소리와 그에 따른 경색된 정국과 민생 경제의 불안감등이 가중되어 북한을 돕기 위한 마음들이 굳게 닫혀있음을 느끼게 된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크리스천도 예외는 아니다. 그들을 바라볼 때 답답함을 느낀다. 우리 크리스천의 사랑이 언제부터 계산적인 주고받는 사랑이 되었는가?



세상 사람들은 시류를 좇아 행동한다. 어쩌면 당연하다. 그것을 가리켜 전도서 기자는 풍세를 살펴보는 자, 구름을 바라보는 자라고 표현하고 있다(전도서 114). 그들은 항상 바람과 구름의 향방을 따라 자신의 인생을 투자한다. 주식과 부동산 동향, 정치권의 세력판도와 경제 지수를 살펴보며 자신의 떡을 불리기에 골몰한다. 외풍이 불어오고 먹장구름이 끼면 지금은 씨를 뿌릴 때가 아니야 하며 파종치 아니하고 거두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그들은 바람과 구름은 항상 방향이 바뀌고 또 잠시 있다가 사라짐을 모른다. 그들을 향해 하나님은 이렇게 질책하신다. ‘너희가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 것을 아느냐? 그것도 모르면서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어찌 안다고 하느냐?(전도서 115)’ 그리고 다시 명령하신다.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거두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전도서 116)



크리스천의 사랑은 조건부 사랑이 아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싶을 때, 우리가 사랑하고 싶은 사람들을 골라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할만한 학생들을 사랑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아무리 말썽꾸러기고 반항적인 학생일지라도 그의 영혼을 향해 말없이 묵묵히 떡을 던지다 보면 그것이 씨앗이 되어 언젠가 열매로 돌아온다. 졸업할 때까지 교수들의 사랑은 받아들이지 못했던 학생이 오히려 사회 속에 나아가 그 큰 사랑을 깨닫고 자신의 변한 모습을 담아 편지를 보내올 때가 있다. 그리고 그런 제자가 더 헌신적으로 일하고 모교를 사랑할 수도 있다. 오직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흐르는 강물에 떡을 던지는 그것뿐이다. 떡을 던지는 사랑은 은사가 아니라 주의 명령이다. 하나님이 여러 가지 성령의 은사 가운데 사랑의 은사를 주시지 않은 까닭은 우리의 희생을 통해 사랑을 이루어가기를 바라시기 때문일 것이다. 그 가운데 비로소 아버지의 사랑, 십자가에서 아들을 희생시킨 그 큰 사랑을 깨달아 배워갈 수 있기 때문이다. 희생 없는 사랑은 허사에 불과하다.



아내가 가끔 넋두리를 하듯, 자신이 독립운동가 남편을 만나는 바람에 고생을 하게 되었다는 말을 할 때가 있다. 그 말을 들으며 속으로 어느 정도 수긍하게 된다. 과연 그렇다는 생각을 해 본다. 우리가 지금 중국과 북한에서 일하고 있는 것이 바로 영적인 독립운동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잃어버린 하나님의 나라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싸우는 이 싸움에 우리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다.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은 과거 일제시대 때 자신의 일신의 안락을 포기하고 재산을 털어 이 만주벌판으로 달려와 독립운동을 하였다. 대성중학교와 신흥무관학교 같은 학교를 세우고 많은 인재들을 양성해내었다. 그 당시 크리스천의 비율이 전체 국민의 1%정도 밖에 안 되었던 것에 비해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 중에 크리스천이 얼마나 많았던가를 헤아려보면 금방 알 수가 있다. 3.1운동 발기인 33인 중 절반이 크리스천이었다. 유관순이 크리스천이었고 저항시인 윤동주가 크리스천이었다. 상해 임시정부의 여러 주역들과 조만식, 김구, 이승훈, 안창호 같은 분들이 모두 크리스천이었다. 그리하였기에 그 당시 기독교인들은 불신자들에게도 인정을 받았으며, 수많은 민족 지도자들을 배출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떡을 던져 희생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북한의 형제들을 향한 사랑도 같은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북한에 대학을 지어서 그 청년들을 가르침으로 장차 통일 시대를 준비하고 동북아의 큰 역사를 이룰 인재들을 양성하는 것,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비전이다. 그 비전은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어 가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북한의 청년들을 위해 그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끊임없이 기도하며 작은 떡을 떼어 자신을 희생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가장 확실한 투자는 영원 속에 약속된 천국 투자이다. 평양과기대라는 또 하나의 역사적인 물줄기를 만드는 그 일을 앞에 두고, 크리스천으로서 우리 민족 공동체의 장래를 생각하며 도도히 흐르는 역사의 강물 위에 우리들의 떡을 과감히 던져야할 시기임을 느낀다.


[박성호] 이승연 파문에서 보는 21세기 영성 관리와 찬양하는 삶

이코스타 2004년 3월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언 4:23)


이 승연과 네티앙엔터테인먼트의 기획 작품이었던 이른바 위안부 누드 파문이 기획사 본인들에 의해 원본 필름과 동영상이 불태워 지면서 일단 가라앉은 듯 하다. 네티앙엔터테인먼트 측에서 가졌던 지난 몇주 전의 기자회견에서 시작해서 지금까지 진행되어 왔던 일들을 돌이켜 보면 눈앞에서 전쟁이라도 한 판 치루어 졌던 것 같은 느낌이다. 공연히 우리 아픔 많은 할머니들 가슴에만 대못을 박을 일들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또 한편으론 네티앙 가입 탈퇴 운동으로까지 이어졌던 네티즌들의 들끓은 반란으로 인해 영문도 모르고 고생도 많이 한 사람들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있다.


갑자기 자다가 두들기는 봉창소리처럼 모두가 알고 있는 이 이야기를 찬양을 이야기하자 칼럼에 쓰는 이유는?


이 번 이승연 파문을 지켜보면서 나는 나 자신의 내면 세계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되었다. 한가지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네티즌이라는 존재를 가볍게 여겼다가는 정말 큰 코 다칠 수 있다는 교훈이고, 다른 한가지는 줏대 없이 이른바 여론의 물결에 휩쓸리다가는 정말 나의 내면 세계에 더 큰 코를 다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자 본주의와 정치적으로 민감한 주제가 빚어낸 불행한 만남이었던 이번 사건에 대해 나는 조금이라도 옹호하거나 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사태가 해결되고 마무리 된 지금, 이 사건을 지켜보는 입장에 있었던 나의 삶을 돌이켜 보니, 거기에는 깊은 공허만 남고 있음을 본다. 왜일까? 한참을 생각해 보았다. 왜 공허함만 남는 것일까? 정의를 실현시키고 옳은 일을 행했다고 하는 의협심이 깃드는 것이 아니라 괜한 훔쳐보기와 엿보기를 했다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이유는?


나 는 클릭으로만 정의를 행하고 있었다! 웹 서핑을 즐기며 클릭하면서 보았던 모든 기사들이 나의 정의로움과 연결된다고 착각했던 것이다. 이런저런 게시판에 올라온 다양한 사람들의 분노와 질책과 야유와 독려를 보면서 나는 잠시라도 깊이 그렇다면 내가 살아가는 나의 삶에는 어떤 일들이 나타나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고 그저 웹 서핑을 즐기고만 있었던 것이다.


인 터넷 문화가 발달하면서 나의 삶에 줄어든 결과가 있다면 바로 책을 읽는 시간이었다. 나는 정보와 지식과 교양과 심지어는 영성마저도 인터넷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단단히 믿고 있었고 그 결과는 공허함이었다. 그것은 거짓이었던 것이다.


웹 서핑이 왜 책읽기를 대체할 수 없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나는 이렇게 내렸다. 웹 서핑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자기 기호에 따라 보고 싶은 것만 클릭 한다. 그리고 마음에 안 들면 단번에 Backspace를 눌러 버린다. 깊이 있는 사고와 되새김질은 없는 것이다. 반면에 책읽기에는 깊이 있는 생각과 되새김질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내가 마음에 들건 들지 않건 책을 한번 잡았으면 어느 정도는 저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때, 나는 웹 서핑을 하면서 오락 정도로 즐기고 있었지 삶의 깊은 공부와 생각하기는 하고 있지를 못했던 것이다.


내 마음을 관리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마음 상태를 깊이 있게 들여다보면서 생각하는 이른바 큐티일 것이다. 인터넷 시대에 우리의 영성은? 정답은 오프 라인에 있다.


예 배를 인터넷으로 드리면 안 되는 것일까? 정답은 오프 라인에 있다. 삶의 현장에서 회중과 함께 드리는 예배의 현장성을 경험하고 함께 교제하며 그 안에서 함께 호흡한다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예배할 장소가 없는 고립된 곳에 있다든지 하는) 예배와 찬양하는 삶에 관한 한 온라인에서 영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온라인에서 벌어지는 사역들이 무의미하다는 말은 아니라는 뜻의 논지를 독자들께서 이해해 주시리라 믿는다.


어 쨌든 중요한 것은 이승연 파문 이 마녀사냥이었던, 공의를 행했던 네티즌들의 운동이었던 간에 이 사건을 멀리서 지켜보는 나의 내면의 삶에는 씁쓸한 오락으로 남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다음부터는 의로운 일을 행할 때는 오프 라인에서 행해야 겠다는 생각이다.

[김한준] 노자(老子)가 말하는 ‘성경적인’ 리더상(像)

이코스타 2004년 3월호


동양의 사상이나 철학은 뛰어난 관찰과 직관으로 대변되는 그들의 특징적 장점들로 인하여 삶이나 인간 자체에 대한 깊은 이해에 도움을 주는 경우가 많다. 때로는, 성경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고전의 문구들 가운데에서 오히려 신선한 어법으로 기독교의 진리를 잘 표현해주는 듯한 말이나 내용들을 종종 발견하기도 하는데, 그럴 때마다 “만물 속에 드러난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 의 구체적인 사례들을 보는 것만 같아 흥미롭다. 개인적인 소견으로, “어떤 리더가 참된 리더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노자가 제시하고 있는 ‘리더의 네 가지 유형’은 그 한 좋은 예가 된다고 사료된다.


노자의 도덕경은 약 5천 자 내외로 구성된 비교적 짧은 책으로, 그 첫 사분의 일 지점을 보면 ‘다스리는 자’에 관한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太上下知有之 其次親之譽之其次畏之 其次侮之


다소 의역하여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가장 훌륭한 지도자는 백성들이 그의 존재를 알며, 차선(second best)의 지도자는 백성들이 그를 사랑하고 존경한다. 백성들이 두려워하여 따르는 지도자는 그보다 못한 지도자이며, 가장 바람직하지 않은 지도자는 백성들에게 경멸 당하는 자이다.”


재미있는 것은, 백성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는 지도자는 차선의 리더일 뿐 가장 훌륭한 리더는 아니라고 언급하고 있는 점이다. 그리고 말하기를, 최고의 지도자는 백성들이 “그 존재를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다른 말로 하면, 뭇 사람들에게 적극적인 사랑과 존경을 받고있다고 해서 최고의 리더인 것은 아닌데, 그것은 가장 훌륭한 형태의 리더십이 발휘되고 있다면 사람들은 자기의 삶과 소명에 더욱 충실하게 될 뿐 특별히 그 리더 자체에게 집중하거나 연연해 하지 않기 때문이다. 노자가 말하는 가장 훌륭한 리더십은, 앞에서 강압적으로 끌고 가거나 소위 카리스마를 내세우는 스타일이 아니라, 뒤에서 말없이 따라오면서 혹 엇나갈 때마다 “막대기와 지팡이”로 툭툭 쳐주며 인도하는 가운데 스스로 바른 길을 깨달아 가게끔 이끌어주는 형태이다. 이런 경우, 스스로의 자발성이 위축되거나 손상을 입지 않으므로 자신의 능력과 의지를 다하여 일에 임하게 되는 장점은 있지만, 일이 되어진 결과 자체에 대해서 대개는 스스로의 덕택에 그렇게 된 줄로 생각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백성들은 리더에게 어떤 특별한 감사나 존경을 줄 필요조차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공기나 물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 존재에 대해 매순간 특별한 경외심이나 감사한 마음을 품지 않는 것과 같다.


이러한 형태의 리더십은 언뜻 보기에는 수동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적극적인 관찰과 기다림, 그리고 신뢰가 요구되는 것이다. 그것은 전체를 조망하는 안목과 확신이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며, 그 대상자들 한 영혼 영혼에 대한 지속적이고 애정어린 관심이 없이는 이룰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혹 일의 진전이 더디거나 뜻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에는 답답함 속에서 기다려줄 줄 아는 인내가 요구되기도 하며, 이를 위해서는 근거도 보장도 없는 상황 가운데서 거의 속아주는 것에 가까운 신뢰가 수반되어야 하기도 한다. 붙잡아야 할 것을 끝까지 붙잡으면서도 스스로 지치지 않을 수 있으려면, 끊임없는 자기연마와 더불어 그 일을 둘러싼 소명 (또는 언약) 자체가 지속적으로 갱신되는 내면적인 과정 또한 필수적이다. 그리고, 이런 모든 과정들을 다 거치고 난 뒤에, 그 공로에 대한 사람들의 인정이나 칭찬조차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비워진 마음이 있어야만 한다. 즉, 자기 분량의 수고를 애정어린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여 하고 난 후에 댓가도 없이 이름도 없이 자신의 존재를 감출 수 있는 사람만이 이러한 리더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리더십이 가능한가? 사상가나 철학자의 이야기들에는 “되어져야 할 삶의 모습” 은 있지만 “어떻게 그러한 모습으로 되어갈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주어져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아마도 어떤 특정한 방법에 따라서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 가기에는 너무나도 난제들인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만큼, 그 내용을 생각하고 말할 수 있었다고 해서 이러한 리더십의 실제적인 구현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현실적으로는 아직도 요원한 일일 가능성이 더 크다. 그러나, 하나님만이 나의 삶의 주인이시며, 내 자신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고 오직 내 안에 그분만이 사신다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그는 누구보다도 이러한 리더십을 실천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사람일 것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부인이 있는 사람일 것이며, 썩어지는 한 알의 밀알이 되는 일을 주 안에서의 생의 소명이요 영광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사람일 것이므로, 주님의 부르심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나보다 남을 귀히 여기며 복음 앞에서는 내 생명조차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살아가는 그의 삶 가운데서 이런 리더십의 모습 또한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 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노자가 말로써 표현한,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삶으로 본을 보여주셨던 이러한 리더의 모습에 비추었을 때, 나 자신의 지난날의 모습은 과연 어떠하였던가? 믿음과 사랑 안에 온전히 서있지 못하거나 성실하지 못하여 “사람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하는” 인도자가 되었던 것은 혹 아니었는지? 주님의 영혼들을 일의 목적으로 삼지 않고 일의 성취를 위한 도구로 삼거나, 그들로 하여금 의무감 때문에 “마지못해 따르게 하는” 사람이 되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더러는 시의적절한 관심과 사랑과 가르침을 주어 그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리더가 혹 될 수 있었을런 지는 몰라도, 칭찬과 인정을 받기 원하는 유혹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주님이 아닌 나 자신을 바라보게 하거나 아니면 주님과 더불어 나 자신도 늘 함께 바라보게 만드는 ‘영혼의 걸림돌’이 되고 말았던 것은 아니었는지?


언젠가 신앙의 멘토 한 분으로부터, 그분이 “보이지 않는 격려자 (hidden encourager)” 라는 모토(motto)를 일관되게 지니고 살아왔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지난 시간들 가운데서 개인적으로 도움을 받아왔던 영적 멘토들 몇 분을 떠올려보면, 그분들은 참으로 “보이지 않는 격려자” 의 면모를 가지고 있는 분들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된다. 몇 년간이나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살펴주어 오신 분들이었고, 올바른 신앙의 길로 스스로 들어설 수 있도록 지대한 영향을 주어 오신 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겸손하고 친근한 자세 때문에 오래동안 멘토링을 받고 있는 줄 조차 알아차리지 못하게 했던 분들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뒤늦게나마, 눈에 보이지는 않았으나 말없이 할 일을 이루어갔던 그분들의 리더십이야말로 노자가 말하는 리더십이며, 예수님께서 스스로 모범을 보이셨고 말씀 안에서 오늘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계시는 성경적인 리더십이었음을 깨닫고 있다. 


나 자신 또한 그러한 온전한 리더쉽이 실천되는 삶을 살 수는 없을런지…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랑과 은혜로써 불꽃같은 시선을 내게 두고서 매순간 인도해 주고 계시는 “가장 훌륭한 리더” 이신 주님께서 내 안에 함께 하시기에 소망을 가져본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주님의 선하고 온전하신 리더쉽이 나의 삶 가운데에도 조금이나마 묻어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뿐이니라.” (고린도전서 3:6-7)

[김하나] 광야에서 만들어지는 하나님의 사람들

이코스타 2004년 3월호


코스타와 인연을 맺은지도 어느덧 7년이 되었습니다. 12년의 유학생활동안 신앙생활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던 코스타가 제겐 얼마나 감사함으로 늘 고백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열심으로 코스타를 쫒아다니는 제 모습을 보며 이유를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제 대답은 코스타 현장에 직접가면 알수 있다는 대답밖에 할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코스타를 통해 확실한건 새로운 삶의 목적과 방향성을 계속 찾아가고 있고 지금까지도 변화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전히 코스타를 통해 변해가고 있는 저의 작은 삶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자아회복


첫번째로 코스타를 통해 저는 제 자신의 자아와 자존감을 회복 했습니다. 십이년전 중학교때 ‘조기 유학’의 섭인관이라는 부담감을 안고 잘못된 길로 가지 않을려고 제 자신과 싸우며 제 자신을 지키는 훈련을 해야만 했습니다. 미국에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하며 대학에 입학할때쯤 제 자신이 어디에 속한지 몰라 고민이 되어 늘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달고 살았습니다. 그렇게 이민 사회와 교회에 섞여 제 자신의 정체와 유학의 목표를 잊고 살가갈때쯤 하나님께서 1998년 코스타로 불러주셨습니다. 코스타에서 새롭게 만난 하나님께 다시한번 구원의 확신을 고백하며 내 자신조차도 몰랐던 유학생활의 아픔과 상처들이 발견되고 그 고통을 치유해주시며 새로운 자아상과 내가 누구인지를 확실하게 깨달았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축복으로 유학이 특권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 특권이 사명감으로 새롭게 다가오고 제가 할 공부와 신앙을 어떻게 연결 시켜야 하는지 가치관을 확실하게 정할수 있었습니다.


비전


두번째로 코스타를 통해 저의 시야가 넓어져 세계를 바라보고 제 가슴에 품을수 있는 도전을 받았습니다. 선교의 비전을 주셨습니다. 처음엔 선교는 저 같은 사람은 할수 없다며 늘 고개만 절레 흔들며 멀게도 어렵게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사망의 골짜기 속에서 죽어가는 영혼들에 대한 관심과 아픔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눈을 들어 주위를 둘러보게 되었고 지역을 생각하게 되었고 나라와 세계를 바라 볼줄 아는 눈을 뜨게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제 삶에 선교의 비전과 소망들이 자리잡아 가게 되었습니다. 3년을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불러주시는 그 때에 저의 삶을 다 바치겠다고 결단하고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유다 백성의 죄악으로 인하여 그들의 국가가 멸망하고 포로된 자들이 되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회복하시겠다는 언약을 잊지 않으심을 기억합니다. 복음이 들어가지 못한 나라를 보며 그 나라를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내가 과연 무엇을 준비해야하며 나의 역활은 무엇이고 무엇을 해야하는지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코스타가 아니였더라면 우물안의 개구리처럼 제 자신밖에 바라보지 못할뻔 한 삶인데, 코스타 덕분에 많은 세계구경을 하고 간접적인 체험들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제자의 삶


마지막으로 코스타에서 조장으로써 섬김을 통해 제자의 삶에 대한 이해와 실천에 들어갈수 있었습니다. 코스타의 또 다른 매력 JJkosta 수양회로 영혼을 사랑하며 주님의 마음으로 섬길수 있도록 성령님의 힘을 얻는 방법을 깨닫고 경험하게 해주었습니다. 제가 속한 6지역의 코디님과 환경을 극복하며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시작했던 원투원으로 말씀과 씨름하며 말씀에 인도되어지는 삶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제가 작년부터 원투원을 인도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전하고 싶어도 어떻게 무엇부터 시작할지 몰랐고, 때로는 부끄러워서 생각처럼 행하지 못할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능력으로는 부족하지만, 시간이 흘르수록 말씀을 전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싶은 마음들이 기쁨으로 자리잡아가게 되었습니다.


지금 제가 서 있는 이 곳은 영적으로 훈련받고 성장하기 어려운 환경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제 맘속엔 하나님의 사람들은 광야에서 만들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광야에서의 외로움도 제게는 홀로있는 훈련이자 하나님을 가장 많이 만날수 있었음을 경험했고, 하나님께서 언제나 내 말에 귀 기울이시고 함께하시는 시간들이 외로움이 아닌 하나님과 교제의 시간과장소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고국을 떠나 미국에서의 유학생활이 우리 코스탄들의 믿음이 연단되어 지는 값진 시간들임을 확신합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많은 시험을 받았듯이, 많은 유혹과 영적 위기에 빠지기 쉽지만 동시에 영적인 축복의 기회임을 확신합니다.


“필경은 위에서부터 성신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삼림으로 여기게 되리라.” (사32:15)


아픔도 많고 시련과 좌절도 많은 광야같은 우리 삶의 현장들이 아름다운 동산이 되길 소망합니다. 광야를 허락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리고 코스타를 통해 광야가 고난의 모습을 가장한 축복의 장소임을 저에 부족하고 모자란 삶가운데 깨닫게 해준 최대의 선물이자 은혜임을 마지막으로 고백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