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문희] 장애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 전하기

지난 호에 이어서 이번에는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 의해 창조된 장애인들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개인적으로 지난 7년동안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아주 심한 장애를 가진 아이들로부터 시작해서 가벼운 장애를 가진 학생들, 정신적 질환으로 인해 혹은 가정 환경으로 인해 생긴 정서적 불안을 가진 아이들, 주위가 산만해서 집중력이 떨어져 학습에 지장을 받는 아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렇게 다양한 특색을 가진 학생들이 많다 보니 이들을 교육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curriculum modification즉 현재 기존하는 커리킬럼을 장애의 특징과 유형에 맞게 변형 한 다음 지속적인 반복 교육을 통해서 지도해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대부분의 장애 학생들은 특히 정신적 (Intellectual disability혹은 발달 장애 (developmental disability))를 가진 학생들은 추상적인 개념(abstract concept)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실제적이면서 구체적인 교육 방법(Concrete learning)이 효과적이다. 또한 여러 가지 감각 교육 (sensory learning) 프로그램과 주입식의 강의 내용보다는 게임이나 활동(activity)을 통해 학생들이 직접 참여해 보면서 배우는 hands on learning도 교육의 효과를 높일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장애 학생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을까? 물론 장애의 유형과 특징에 따라 전달하는 방법이 다르겠지만 주로 정신적 혹은 발달 장애를 가진 학생들을 전제로 해서 고민해 보기로 하자.


첫째, 어려운 단어 보다는 보편적인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예를 들어 “전능 하신” 혹은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외 같은 단어나 숙어들 보다는 “사랑하는 “, “위대하신” 혹은 “죄를 용서하여 주세요”와 같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단어, 숙어, 혹은 문장들을 사용하는 것이 그들이 이해하는데 편하기 때문이다.


둘째, 어떤 주제에 대해 열심히 말로 설명하기 보다는 학생들이 직접 참여해 볼 수 있는 재미있는 학습 활동들이 학생들의 참여도를 높인다. 예를 들어, 천지 창조에 관해 학습한다고 하자. 천지 창조에 대해 설명 되어 있는 창세기 부분만 읽고 이야기 하기 보다는 학생들과 함께 야외로 나가서 하나님께서 만든것들을 찾아 보게 하거나 혹은 7일 동안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들을 그림으로 그려 보는 것 아나면 색종이나 constructional paper를 사용해서 직접 만들어 보는미술 활동들이 학생들의 수업효과를 높이는데 도움을 준다.


마지막으로 감각적인 교육과 technology 특성을 살릴 필요가 있다. 요즘은 컴퓨터 그래픽과 영상 기술의 발달로 컴퓨터가 투입되지 않을 곳이 없고. 이제 컴퓨터 문화는 장애를 가진 학생들에게 그들울 돕는 보조 가구 (assistive technology)의 역할까지 해 주고 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데 있어서 이 영상 (Multi media) 의 이론을 살리는 것 역시 학습의 효과를 높일 수 있다고 본다. 영상을 도입했을 때, 학생들은 영상과 음향으로 내용의 전달이 효과적일 수 있고 프레젠태이션이나 다큐맨타리를 이용해서 지루함을 달래주는 장점이 있다. (물론 이 영상 기술을 도입하는 일이 전혀 단점이 없는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는데 그러면 이런 방법들을 잘 설명해 주는 교재는 어떻게 구입할 수 있을까? 특수 교육을 공부 하지 않은 분들에게서 가끔 이런 질문을 받는다. 어떤 교재를 사용하고 어디서 그 교재를 구입할 수 있는지, 그리고 장애의 특징과 유형에 맞는 교재를 구입할 수 있는지 등등, 그럴 때마다 나의 질문은 언제나 “불행하게도 특수 교육에는 장애의 유형이나 특징에 맞게 만든 자료 혹은 교과서 라는 것이 없어요. 아이들의 신체적, 정신적 그리고 감성적인 상태가 장애의 유형이나 특징에 다르고 그 아이가 처한 환경에 따라 수시로 바뀌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기존해 있는 curriculum을 가지고 아이가 소화해 낼 수 있는 능력에 따라 다시 Lesson plan 을 만듭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데 있어서도 일반적인 성경 공부 교재를 가지고 장애 학생들의 능력에 맞게 앞에서 이야기한 방법들을 변형해서 인도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장애 사역 교사들은 특수 교욱 전공자들이 아닌 일반인들이다 보니 꾸준한 교사 훈련 교육 프로그램 없이는 이 일이 이루어 지기 어렵다고 할 수 있겟다.


하지만 이런 훈련을 받아서 열심히 그들을 교육해도 많은 장애 사역자들이 쉽게 낙심하고 좌절하는 경우들을 여러번 볼 수 있다. 열심히 가르치고 지도 했는데 아무런 발전이 없어 보이고 그러다 보니 사역의 보람을 못 느끼기 때문이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이들은 배우는 속도도 느리고 의사 표현의 부족해서 충분히 그런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가 쉽다. 그러나 , 포기하지 말고 꾸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메신저 역할을 하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그들을 변화시키는 것은 하나님의의 은혜이고 그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조근상] 말씀 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참된 예배이다

이코스타 2005년 6월


일전에 한 목사님께서 예배 사역에 대한 질문을 하시면서 내게 물어 오신 것이 있었다. 예배 사역을 15년 동안 해 오면서 소감 비슷한 것이었는데, 그 때 나는 주저 없이 말씀 드린 것이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이다. 물론 많은 분들이 생각할 때 이것이 기본이라고 생각하실 것이다. 하지만 내가 오랫동안 발견한 사실은 예배 인도자들은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자기들의 직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지 말씀은 전하고 성경공부를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미루고 자기 자신은 예배인도에만 힘을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조금 다른다. 나는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들, 즉 예배안에서 찬양을 인도하는 자들은 말씀에 대해서 오히려 말씀을 전하는 자들만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의 유명한 작곡자인 밥 핏츠의 첫 번째 앨범은 9개월 동안 성경을 12시간 씩 보면서 연구하는 성경연구학교를 마친 후에 만들었다. ‘Take My Healing to The Nations’ 라는 이 앨범에 들어있는 밥 핏츠가 작곡한 가사의 곡들은 그가 성경을 어느 정도 묵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가에 대한 진지함이 들어 있다. 그 외에 우리가 잘 아는 엘 샤다이라는 유명한 곡을 작곡한 미국의 CCM 아티스트인 마이클 카드는 구약학을 전공한 박사이다. 그가 작곡한 곡들은 한국에도 많이 불려지고 있는데, 그 가사의 내용을 보게 되면 보통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발견할 수 있다.


요즘 들어 나오는 앨범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음악적 칼라가 두드러진다. 특히 예배 앨범들은 이제 보통 수준을 넘어서서 프로페셜날리즘과 전문성이 탁월하게 드러나고 있다. 특히 호주의 힐송뮤직은 달린 첵 이라는 탁월한 여성 예배인도자를 통해서 전 세계에 예배에 많은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이제 세계 어디를 가도 호주의 힐송뮤직의 예배앨범에 담겨 있는 곡들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작년에 한국에 갔을 때는 어느 교회를 가도 모든 곡들이 힐송 에서 나온 곡들이었다.


미국은 아직도 모던 워십의 강세가 식을 줄을 모른다. 크리스 탐린과 데이빗 크라우터 밴드는 아직도 젊은 크리스찬들에게는 가장 인기가 있는 밴드이자 예배 인도자들이다. 하지만 같은 미국인들조차 이런 인기 있는 밴드들이 너무나 세상적이라고 생각하며 걱정과 우려를 표한다. 하지만 의외로 이들의 가사는 성경적이고 복음적이며, 그리고 새로운 곡을 발표할 때마다 목회자들에게 검증을 받은 후에 곡들을 발표하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리고 힐송은 어느 누구보다도 강한 훈련들을 자체적으로 하고 있다. 힐송컨퍼런스를 다녀 온 사람이라면 그들이 얼마나 강한 자체적인 룰을 세워서 예배 팀을 훈련시키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교회의 예배를 섬기는 예배와 찬양팀은 말씀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예배와 찬양팀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재능과 달란트를 사람들에게 쏟아 붇기 전에 말씀으로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의외로 말씀을 공부하며 삶을 나누는 예배와 찬양팀을 많이 볼 수가 없다. 사실 나는 그 이유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사실 찬양을 위한 연습을 하는데,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찬양, 즉 곡에 대한 연습이다. 즉 우선권이 찬양을 인도하기 때문에 찬양에 대한 연습이 먼저라는 것이다. 그 다음이 기도이다. 회중과 다른 사람을 위한 중보기도를 하는 것은 후차적인 문제이다. 먼저는 준비되지 않은 자신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 후에 시간이 남거나 여유가 있으면 그 외의 기도를 한다. 열방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1년에 한 두 차례오시는 선교사님들의 말씀을 들은 후에야 할 마음이 생긴다. 너무 비약하게 말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예배와 찬양세미나를 했을 때 예배 인도자들의 솔직한 고백이다.


허나,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예배를 위해서 예배인도자들은 말씀을 준비해야 한다. 예배와 찬양팀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원하시는 말씀을 준비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고 음악적인 것과 어떤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서 예배를 준비하게 될 때에는 빌딩을 지을 때 기반이 없이 짓는 집과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이런 예배는 음악이 준비가 잘 될 때에는 예배가 잘 드려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것이지만 만약 음악적인 준비가 잘 준비되지 못할 때에는 마치 예배가 드려지다 만 느낌이 들 수 있다. 이렇게 예배를 드리게 되면 잘 드려지는 예배와 잘 드려지지 않는 예배의 높낮이가 커져서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예배라기보다는 환경과 상황에 지배되어지는 예배를 드리기가 쉽다.


그래서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을 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중심을 하나님께로 향하기 때문에 우리가 부족한 부분을 채워 주신다. 내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이것이다. 앞으로 음악을 잘하는 사람들은 더욱 더 많이 나오게 될 것이다. 음악적인 노력만큼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며 예배를 인도하는 팀들을 가르치기 시작하라.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수 있도록 QT와 묵상이 삶의 기본이 되는 것이라고 선포하라. 그것이 여러분이 섬기고 있는 예배와 찬양팀을 부흥케 하는 비결이다. 여러분이 섬기는 예배와 찬양팀이 말씀으로 새로워 진다면 섬기는 예배에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이 함께 하는 것은 자동적으로 따라오게 될 것이다.

[안상현] cKOSTA 2005를 기대하며

이코스타 2005년 6/7월호

칼리지 코스타/USA가 올 해로 세번째를 맞이 했습니다. 지난 2년동안 미 서부지역에서 열리던 칼리지 코스타가 올 해부터는 중부의 인디애나폴리스로 옮겨서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개최장소를 옮기면서 몇 가지 변화의 조짐들이 눈에 띄기 시작합니다. 먼저 무엇보다도 좀더 넓은 지역의 한인 대학생/청년들을 품고자 하는 기대를 갖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서부지역에 치중되어 있던 지역성에서 탈피하여 미국의 지역적 중심에 자리 잡음으로 말미암아 미 전국의 한인 대학생/청년 학생들을 향하여 좀더 가까이 다가가게 되었다는 장점을 들 수 있습니다. 동시에 두 번의 칼리지 코스타를 치루면서 좋은 간사들이 배출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코스타의 중요한 가치중의 하나인 참가자가 주인이 되는 자발운동의 정신이 칼리지 코스타에도 뿌리내리는 것을 보면서 20세기 초반 선교의 근원지였던 학생자발운동(SVM)이 시대를 달리하지만 똑 같은 미국땅에서, 그것도 학생자발운동의 수혜자들이 한민족의 젊은이들을 통하여 다시금 시작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 나라의 겨자씨들의 위대함을 꿈꾸어 봅니다. 그러나 단순히 간사들이 새롭게 배출되고 지역을 옮겨 대회를 개최하게 되었다는 것 이상의 중요성을 올 해의 주제와 관련하여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리고 강사와 간사들만이 나누고 고민하는 주제가 아닌, 모든 한인 대학생/청년들에게 각인되고 실천되는 주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몇 가지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우리 모든 한인 대학생/청년들은 우리를 선택하여 주신 주님의 피흘림과 희생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림을 통한 ‘선택받은 백성’이 되었음이 우리의 정체성의 가장 근본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 분의 죽으심과 희생에 의한 선택에 온전히 “순종함”(2절)이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서의 삶의 이유에 분명한 이유를 주고 또한 영원함에 관한 소망을 잃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말씀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3절)가운데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유일하고 변치 않는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과 희생의 복음위에 자신의 ‘선택받은 백성’으로의 뿌리를 다지는 칼리지 코스탄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를 “흩어진 나그네”로 살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가운데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유학으로 왔건, 이민으로 이 땅에 정착하게 되었던지 간에 우리는 현재 이 땅에 발을 내딛고 살고 있습니다. 몸은 미국땅에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삶의 가치관이나 태도들이 아직도 이전의 가졌던 습관이나 태도에 머물러 있으면서 자신을 바꾸거나 변화를 시도하지 않으려는 안주해 있는 대학생과 청년들의 모습을 주위에서 많이 보곤 합니다. 이것은 어떤 문화가 우월하고 다른 문화가 더 우월하느냐의 문제를 떠나 어떤 문화, 어떤 삶의 정황가운데 살던지 간에 그 곳으로, 그 상황으로 불러주신 하나님의 부르심에 관한 우리의 응답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습니다. 자신들의 의도와 계획은 아니었을지라도 ‘흩어진 나그네’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흩어짐이 곧 ‘하나님의 미리 아심’(2절)이었다고 선포하는 사도 베드로의 선포가 21세기를 살아가는 미주의 한인 대학생/청년들에게도 동일하게 선포되는 말씀이고 또한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하는 말씀입니다. 흩어진 나그네로서 지금 바로 이 자리의 삶의 정황가운데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세번째로, 선택받은 백성으로 흩어진 나그네의 삶을 가능케 하고 또 거룩케 하는 것은 바로 성령의 “거룩하게”(2절) 하시는 능력임을 깨닫고 그 거룩함을 능력을 추구하는 칼리지 코스탄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먼저 거룩함의 꿈을 꾸어야 합니다. 거룩함이란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으로 채우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꿈을 우리의 꿈이 되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처한 삶의 모든 환경들— 학교, 가정, 교회, 일터, 만남—가운데에서 나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일들을 그려보는 일입니다. 우리는 흔히 그것을 vision 이라는 말로 대신하기도 하지만 이 vision은 하나님의 계획과 그림들을 우리의 마음과 생각속에서 상상해 보고 그려보는 일입니다. 유진 피터슨은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바로 상상력의 부족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남아있는 것이 고작 ‘큰 집, 좋은 차, 멋진 남편과 아름다운 아내’ 혹은 그보다도 더 비참하게 고작 ‘포르노’의 영상들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다고 개탄했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속에서 이런 그림들을 몰아내고 하나님의 그림들로 채우는 일은 성령의 거룩케 하시는 능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이는 우리가 온전히 성령의 거룩케 하시는 능력앞에 순종할 때 가능한 일입니다. 이 거룩의 능력을 발견하는 칼리지 코스타와 칼리지코스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더불어서, ‘나’와 ‘우리’를 뛰어넘어 ‘저희’를 바라보고 품을 수 있는 칽리지 코스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2000여년전 사도베드로는 소아시아에 흩어진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 흩어진 땅가운데서 살아가는 동일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인 우리를 향하여 사도 베드로는 너희도 나와 같은 마음을 품기를 기도하며 바라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어떤 사람입니까?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사도 베드로는 이방인을 향하여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입니다(행 10:14—“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그런 베드로에게 주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가르치시고(19-20절—“성령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그의 편견과 세계관을 바꾸기를 원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성령의 거룩케 하시는 능력을 의지하는 것처럼 또한 우리 모든 칼리지 코스탄들은 성령의 가르치시고 변화시키시는 능력앞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것이 베드로가 보여준 모습입니다(행 10:28, 34-35—-“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노라”) 순종함은 곧 실천을 동반하고 그 실천하는 신앙의 모습을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 전서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작년인가, 한국에서 열린 대학생, 청년 선교대회의 주제가 ‘벽을 넘어 열방으로’ 였던 것을 기억합니다. 내 마음의 벽, 얼굴 색깔의 벽, 성별의 벽, 인종의 벽, 교육 배경의 벽, 문화의 벽을 뛰어넘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 땅의 베드로로 변화하기를 애쓰고 추구하는 칼리지 코스탄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흩어진 나그네로 다른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사랑으로 전하고 실천하는 일들이 바로 이 땅에 나그네로 오셔서 우리를 위해 무엇으로도 값을 수 없는 희생을 치뤄주신 주님께 보답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2005 칼리지 코스타 집회가 진심으로 이 ‘선택받음’과 ‘흩어짐’의 소명들을 신실함과 열정으로 채우는 집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강동인] 코스타 2005연차 수련회를 기대하며

이코스타 2005년 6/7월호


“Korean Student Diaspora – 흩어진 나그네, 선택받은 백성”
벧전 1:1-2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


올해는 코스타 연차수련회가 2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사람도 스무 살이되면 자타가 공인하는 성인이 된다.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성숙한 코스타 사역은 어떤 것일까? 미국 코스타 준비위원들의 고민이었다. 기도하며 주의 뜻을 구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여러 지체들에게 동일한 마음을 주셨다.


첫째, 미국의 한인 유학생들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삼아 세상을 섬기게하려는 의도로 시작했던 코스타가 이제는 한인 학생/청년 디아스포라로 그 시야를 넓혀야 한다는 마음을 주셨다. 이는 유학 패턴의 변화를 수용하는 소극적인 의미를 넘어서 기독 한인(Christian Korean) 이라고 하는 확장된 민족의 개념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시대에 한인 학생/청년을 전 세계에 퍼뜨리시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실 것이라고 확신한다. 연차 수련회를 통해 우리는 한인 학생/청년 디아스포라의 정체성과 열방을 향한 원론적 부르심을 살펴보고, 그러한 부르심에 응답하는 하루하루의 삶이 구체적으로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살펴보고 함께 고민하게 될 것이다. 코스타 2005는 이 시대에 한인 학생 디아스포라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고 그 뜻에 순종하는 첫 발걸음이 될 것이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의 한인 학생/청년들이 더욱 하나님 말씀으로 돌아가야한다는 마음을 주셨다. 겉으로 드러나는 집회의 외형적 화려함과 심리적 흥분상태에 기인한 뿌리없는 헌신의 열매를 지양하고 비록 현재는 작아보이더라도 하나님 말씀에 근거한 뿌리있는 헌신의 열매를 맺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열매는 예수님의 제자삼음에서도 볼 수 있듯이, 깊이 있는 말씀과 삶의 나눔이 일어나는 소그룹 활동(조 활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본다. 그래서 조모임은 코스타 2005 연차 수련회의 가장 중심활동이다. 해를 거듭할수록 더 많은 형제, 자매들이 연차수련회에 조장으로 자원하는 것에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코스타 집회가 끝난 후에도 집회에서 경험된 하나님의 말씀이 참석자들의 삶에서 크고 작은 결실을 맺어가는 것을 보게하심에 감사를 드린다. 코스타 사역을 통해 그리스도의 제자가 길러지고, 그 제자들이 또 다른 제자를 양육하며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을 기대한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세상의 것을 추구하지 않고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나그네의 삶을 경주해야 한다는 마음을 주셨다. 코스타 2005를 통해 우리는 미국, 한국, 그리고 제 3세계에 흩어져있는 디아스포라 지체들의 삶을 접하게 될 것이다. 이생의 자랑과 하나님 안에서의 성공이 혼동되는 시대에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스스로 나그네된 선배와 후배들의 삶을 접하게 되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우리의 삶도 하나님 앞에 거룩한 것으로 드려지게 되는 헌신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대한다.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하셨느니라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벧전 1:16,17)”


<결어>
20주년을 맞이하는 코스타 사역에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이 있기를 기도한다. 많은 기독 운동(movement)들이 세월이 흐름으로 인해 운동성을 상실하고 기념물(monument)로 바뀐 역사의 교훈을 엄하게 받아들이면서, 20세를 맞이하는 미국 코스타가 더 큰 운동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쓰임을 받기에 합당한 그릇으로 계속 새롭게 되기를 소원한다.

[오창희] 그리스도인들에게 민족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코스타 2005년 6/7월호

그리스도인들에게 민족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 복음과 민족 1

미국에 이민 온 1.5세나 혹은 2세 그리스도인들이 미국 땅에 살면서 꼭 돌아보게 되는 질문이 있다. 미국유학 후 미국에서 취직할지 아니면 한국에 돌아갈 지를 결정해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장기적으로 당면하게 될 질문이 있다. 한국 땅에 살면서, 혹은 외국생활을 경험하면서 자신이 한국인이라고 느끼는 그리스도인들이 묻게 되는 질문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민족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민족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 질문을 제기하면 어떤 사람은 당연한 것을 왜 새삼스럽게 묻느냐고 생각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복음의 보편성을 넘어서 쓸데없는 민족주의를 자극하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많은 분들은 이미 이 문제에 대해 나름대로의 해답이나 선이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가 이 문제에 대해 어느 하나의 입장을 취하게 되면 반드시 논쟁을 야기할 수 밖에 없다는 점도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이 문제는 오랫동안 내가 고민해 온 주제일 뿐 아니라 또 앞으로 내가 사역하고자 하는 방향과도 관계되기에, 독자들도 기존의 선입관을 내려 놓고 기초부터 함께 생각해 수 있기를 바란다.


성경에는 모든 신자들이 국가와 민족을 초월하여 한 하나님에 속한 자임을 말하는 구절들이 많이 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빌 3:20).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없이 다 그리스도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롬 10: 12),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갈 3:7). 한 마디로 모든 신자들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하늘에 속한 자라는 것이다.


복음의 진리를 제대로 받아들이는 자라면 이 사실을 결코 의심할 수 없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으며, 이 땅에서의 신분이나 모든 것은 일시적인 것일 뿐이다. 하나님은 구약에서 이스라엘이란 한 특정 민족을 예수님을 통하여 모든 민족이 얻게 될 구원의 한 모델로 선택하셨지만, 예수님이 오신 이후 그 특수성은 사라지고 모든 민족에게 동일하게 임할 구원의 복음만이 남게 되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국가와 민족이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국가간의 분쟁이나 이해관계에 있어서 전쟁의 위험을 무릎쓰고 그렇게 매달릴 필요가 있는 것인가? 좀 더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그리스도안에 있다면 한국인이 된다는 것이나 미국인이 된다는 것이나 일본인이 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다 동일한 것이 아닌가?


사실 그리스도인 가운데는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계시고 나 역시 한 때는 이런 생각을 가졌었다. 그러나 성경을 가만히 읽다 보면, 미묘한 부분들이 발견된다. 바울은 주안에서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다고 말한 바로 그 로마서에서 자신의 민족과 혈육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들을 토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 (롬 9:2) 그는 얼마나 자신의 동족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었으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그들의 구원을 원하고 있다고 자신의 양심을 걸면서 까지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 로마서 10:1에서는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나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라고 말한다. 바울은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다 복음안에서 한 자손임을 믿었지만, 여전히 자신의 골육과 친척에 대한 우선적 책임감과 애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 부분은 당위적 명령이 아니라 바울이 가졌던 애정에 대한 사실적 표현이기 때문에 이 자체가 곧 민족에 대한 우선적 책임을 명령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이 구절들을 가지고 ‘민족주의는 성경적이다’ 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사실(IS)에서 당위(OUGHT)를 추론하는 ‘자연주의적 오류’를 범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직접적인 명령은 아니지만, 적어도 사도 바울이 그랬다는 것은 우리 역시 그럴 수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 줄 수는 있다.


그러면 민족에 대한 우선적 책임을 말하는 직접적인 명령은 없는가? 사실 성경, 특히 신약에서 이 부분에 대한 명시적인 구절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민족에 대한 우선적 책임을 시사해 주는 구절을 찾을 수는 있다. 바울은 과부나 나이 든 부모를 봉양할 우선적 책임이 그 가족과 친족에 있음을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 즉 신자일수록 자기 가족과 친족에 대해 일차적인 책임이 있으며 더 돌아보아야 할 의무가 많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족과 친족에 대한 의무는 구약에서부터 강조되어 온 것이다. “만일 너희 형제가 가난하여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이 와서 동족의 판 것을 무를 것이요”(레 25:25) 즉 형제가 어려운 경제적 상황에 처해 있으면, 그의 친척이 그것을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심지어 형의 아내가 과부가 될 경우에는 동생이 그 형수와 그 재산을 책임질 의무까지 부여하고 있다(신 25:5-10). 이러한 친족에 대한 의무는 바울의 말을 통해 신약에 와서도 형태는 다소 변해도 신자의 공동체 내에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 준다.


가족이나 친족은 기본적으로 혈연적 관계이다. 이것은 이 땅에서만 유효할 뿐 하늘나라에 가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제도이다. 왜냐하면, 천국에서는 결혼제도 자체가 없어지고 모든 사람이 천사와 같은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마 22:30)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이 땅에 있는 동안에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족이나 친족에 대한 우선적 책임을 가진다고 말하고 있다. 이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 땅에서만 유효한 제도라고 하더라도 이 땅에 있는 동안에는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조금 더 확장하면 민족과 국가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물론 민족과 국가는 엄밀히 말하면 동일하지 않겠지만 우리나라처럼 단일민족 국가에서는 동일시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족과 친족에 대한 우선적 책임이 있다면, 그 관계가 가족보다는 상대적으로 느슨해 졌을 지라도 민족과 국가도 혈연적 유대로 이루어진 공동체인 한, 국가와 민족에 대해서도 우선적 책임을 가진다. 적어도 이 땅에 있는 동안에는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대한민국 땅에 태어나게 하셨고 한국인으로 태어나게 하셨다면, 우리는 이 땅에 있는 동안 좋든 싫든 한국민으로 살아야 하며 동족에 대한 우선적 책임과 의무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여러 사람가운데서 일차적으로 부모를 전도할 책임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의 동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이것은 성경적인 정신이 부합한 것이라 생각한다.


사실 국가와 개인은 별개의 존재가 아니다. 각 개인들은 국가의 일원으로 태어났다면 국가가 하는 모든 행동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함께 가지는 공동체적 운명을 갖는다. 나는 내가 목회를 하기 전 한 때 철학을 공부하면서, 코넬대에서 박사후 과정으로 집단윤리에 대해 연구한 적이 있다. 집단윤리의 핵심은, 국가와 같은 집단은 단순한 개인들의 집합을 넘어선 어떤 공동체이며, 이 집단의 행동에는 그 구성원들 모두가 함께 윤리적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독일이나 일본이 이웃나라를 침략했다면 그 집단행동에는 그 나라 모든 국민들이 직간접적으로 연루되어 있으며, 따라서 모든 국민들이 그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 행동에 대한 윤리적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국민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행동에 대해 책임있게 결정해야 하며, 그 결과에 대해서도 함께 책임을 져야 한다. 개인과 그가 속한 집단은 별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리는 성경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국가 전체적으로 범죄할 때는 그 가운데 개인적으로 의로운 사람이 있을지라도 그 징계의 채찍을 그 국가 전체에 함께 내리셨다. 가데스바네아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신앙의 행동을 했을 때, 비록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은 믿음의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함께 40년동안 광야의 생활을 해야만 했다. 또 유다왕국의 말기에 예레미야나 에스겔, 다니엘과 같은 선지자들은 그 자신은 비록 의인이었을지 몰라도 국가 전체적으로 범죄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들도 국가에 대한 징계의 현실을 피할 수 없었다. 하나님은 국가 전체의 책임을 묻고 계셨던 것이다. 이것은 개인과 국가의 운명이 별개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우리나라가 하나님께 범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경제적 위기나 전쟁의 채찍을 맞는다면, 비록 그 가운데 의인이 있고 참 신앙인이 있다 하더라도 어느 사람도 그 운명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비록 하나님 앞에서 개인적 책임은 면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 국가적 형벌의 운명은 피할 수 없다. 국가와 개인은 별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국가와 민족에 대해 더더욱 우선적 책임감을 가지고 주의 깊게 살펴 보아야 하는 중요한 이유이다. 그리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더욱 더 기도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신앙인들에게 있어서도 나라와 민족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아니 신앙인이기 때문에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이 나라와 민족을 보면서 안타까와 하며, 울 수 있고, 기도할 수 있는 신앙인들을 찾고 계신다. 예레미야나 다니엘처럼, 나라와 민족의 죄가 자신의 죄인 것처럼 회개하고 금식하고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을 찾고 계신다. 우리 모두 이러한 부름에 응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