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진]제자

이코스타 2006년 4월호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 후, 그 분의 부르심대로 살아갈 때 고민할 수 있는 것중에 하나가 바로 제자라는 개념인 것 같다. 또한, 이것은 예수님의 명령이기도 하다. 솔직히, 필자도 “제자가 되는 것” 과 “제자 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이해하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그리고, 아직도 부분적으로 이해하고 있지는 않는가 때때로 나를 돌아보기도 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제자의 사명이란, 모든 민족 가운데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가르치고, 또 지키게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명령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항상 실감하며 살아가고 있다. 또한, 생각한만큼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복음을 선포하는 것과 전한 복음이 헛되이 되지 않도록 지키게 하는 것이 제자의 소명이라면,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필자가 경험한 것들을 바탕으로 적어보려고 한다.


“Therefore, my dear brothers, stand firm.Let nothing move you. Always give yourselves fully to the work of the Lord, because you know that your labor in the Lord is not in vain.” (NIV; 1 Corinthians 15:58)


첫째, 제자로서 살아가려면 흔들림없이 굳건히 그 분을 믿는 믿음안에 있어야 한다. 바울은 이것을 “stand firm” 이라고 표현했다. 즉, 세상의 어떠한 것들에 향해서도 자신의 믿음은 흔들림없이 견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자신의 믿음을 흔드는 것들이 무엇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한번 흔들리게 되는 것들은 다시 그 문제로 인해서 흔들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또한, 한번 이 싸움에서 이기게 되면, 그 다음에는 그 문제에 흔들림없이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해 본 사람이라면 바로 그 중심의 흔들림없음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경험했을 것이다. 즉, 세상의 어떠한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함이 제자로서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하다. 대표적인 예로 아들을 바친 아브라함의 믿음이 바로 이것에 해당하며, 히브리서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이 가졌던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기도 하다. 그들에게 세상은 더 이상 가치있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Some faced jeers and flogging, while still others were chained and put in prison. They were stoned; they were sawed in two; they were put to death by the sword. They went about in sheepskins and goatskins, destitute, persecuted and mistreated the world was not worthy of them…” (Hebrews 11:36-38)


Do not deceive yourselves. If any one of you thinks he is wise by the standards of this age, he should become a “fool” so that he may become wise.” (1 Corinthians 3:18)


둘째,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이다. 복음의 능력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위대하고 강하다. 복음을 전할 때, 가장 딜레마에 빠질 수 있는 부분중에 하나가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그 말씀을 자신의 삶에서 체험하지 못하고, 복음만 전하는 형태가 바로 그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속이는 자들에게 향하여 신랄하게 말씀하시고 계신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복음 7:21-23)


복음에는 능력이 있다. 필자는 귀신을 쫓아본 경험은 없지만, 복음에 권능이 있다는 것을 매번 체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고 해도, 자신을 속이는 자들이 있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즉, 경건의 모양도 있고, 능력도 간혹 나타나지만, 자신을 속일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사람들이 이 땅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라 생각한다. 또한, 나 자신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부류의 사람들이 되지 않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므로, 내 자신을 속이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연약함 자체도 그 분 안에서 치유되어야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기 위해 날마다 나를 돌아보아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제자로 불러주신 이유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자로다” (고린도후서 6:8-10)


셋째, 제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이 땅에서 결코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세운 교회에서조차 자신의 사도됨을 의심받았다. 심지어 사기꾼 취급을 당하기도 하였다. 다른 사람들도 아닌, 자신이 양육한 자들에게조차 버림받기도 하며, 또한 인정받지 못할 경우도 있다. 제자의 모습은 우리 육신이 원하는 것과 정반대로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가 제자로 살아가야 한다고 묻는다면, 그 곳에 숨은 진리가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명령에 순종했을 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이 비밀은 제자로서 살아갈 때 비로서 깨달을 수 있다.


앞서 말한 세 가지가 필자가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갈 때 깨달은 것들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죄인된 나를 제자로서 불러주신 은혜를 깨닫는 것이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제자로 부르셨을 때 다음과 같이 대답했는가 깊이 묵상해 볼 필요가 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누가복음 5:8)

[신선묵]영적 지도자의 자기 평가 (Assessment)

제가 섬기고 있는 월드미션대학교는 지난 2월 17일에 The Association for Biblical Higher Education이라는 기독교 대학 인가단체에 정회원으로 가입하였다. 작년11월에Transnational Association of Christian Colleges and Schools라는 인가 단체에 준회원으로 가입된 것에 이어서 이번에 ABHE라는 인가단체에 정회원으로 가입 하게 됨으로써 명실상부 미국의 주류 기독교 대학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교육기관으로써 인정을 받게 되었다.


미국의 대학 인가 시스템은 한국과는 좀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다. 미국에서 고등 교육기관을 운영하기 위해서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일단 주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월드미션대학교는 1989년에 창립이 되었고 1992년에야 주정부 인가를 받았다. 그러나 실제적인 고등교육기관으로서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연방 정부의 교육국(Department of Education)과 고등교육 인가 위원회CHEA(Council for Higher Education Accreditation)의 인정을 받는 연합체에 가입을 해야 한다. 한국의 경우 우리가 문교부 인가라고 말하는데 미국에서는 연방 정부에서 주도적으로 직접 인가를 주지 않는다. 대신에 미국에서는 관주도가 아닌 대학들이 자발적으로 연합하여 스스로 교육의 질을 관리하고 서로를 인정해 주는 연합체들이 있다. 이 연합체들을 CHEA(고등교육인가 위원회)가 인가를 해주면 정부에서 주는 모든 혜택을 받게 되어 있다. 이번에 월드 미션대학교가 정회원으로 가입된 ABHE라는 기관은 바로 연방정부 교육국과 고등교육 인가 위원회에서 인준한 기독교 대학교 연합회인 것이다. 그럼으로써 미국에 있는 다른 인준 받은 교육 기관들과 학점을 교류하고 학위를 교류할 수 있게 되고 연방정부의 보조금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지난 몇 년 동안 인가단체에 가입하는 과정을 겪으면서 학교는 물론 개인적으로도 많은 배움이 있었다. 이 인가과정은 Self Study라는 과정인데 크게 세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대학의 행정의 전반적인 면에 있어서 연합체 기준들의 각 부분에 우리 학교가 얼마만큼 만족시키고 있는가를 평가하는 작 업 (Compliance Document)이 있다. 연합체의 기준에 따라서 학교의 각 부분 부분을 점검하고 위원회를 만들어 기준에 맞추어 가는 것이다. 학교의 행정, 교수, 학무, 재정, 학생 관리 등등의 분야를 살피게 된다. 이 과정을 통하여 학교의 사명과 목적을 분명히 하고 각 프로그램의 목적을 뚜렷이 정리하게 된다. 두 번째 부분은 학교가 세운 사명과 목적을 실제적으로 진행하는데 있어서 얼마나 성공적인가를 평가하는 작업(Institutional Research)이다. 학교의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는가, 학교의 교육 목적이 실제적으로 구체적으로 얼마만큼 성취되고 있는가를 살피는 것이다. 학생들이 실제적으로 교육을 통하여 어떤 발전이 있었는가, 학교의 행정의 부분이 목적에 맞게 잘 진행되고 있는가를 각종 Survey와 자료들을 통하여 점검하는 것이다. 세 번째 부분은 이상의 자료를 바탕으로 학교의 5개년 발전 계획(5 year plan)을 세우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하나씩 개선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다. 나는 특히 이 일을 하면서 구체적인 목적에 따른 평가의 중요성에 대하여 많이 배우고 깨달았다. 우리가 아무리 좋은 목적이 있다고 하여도 그것이 실제적으로 성취되고 있는가를 평가하지 않으면 실제적인 목적을 얼마나 성취하고 있는지 알 수도 없고 개선할 수도 없다. 그래서 평가라는 것은 중요하다.


조직의 차원뿐만 아니라 개인의 차원에서도 발전을 위한 평가는 중요하다. 기독교 교육 학계의 대가인 달라스 신학교의 하워드 헨드릭스 교수님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30년 가르친 경험이 1년 경험의 30번 반복일 수가 있다.” 나도 1999년 가을에 첫 강의를 시작하였으니까 나도 벌써 신학교에서 강의를 한 것이 만 6년이 넘었다. 그 동안 강의한 정식 강의의 종류만 해도 무려 12과목이 되고 그 외에 소규모 세미나들이 많이 있었다. 다시 말해서 가르침에 경력이 쌓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바람직한 교수로써 내가 발전하고 있는가? 스스로 질문 하게 된다. 하워드 교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많고 오랜 경험이 반드시 좋은 교수를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30년 가르친 경험이 있다고 해도 평가와 발전이 없이 그저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가르친다면 1년 경험을 30번 반복한 것과 같이 의미 없는 경험이라는 것이다. 늘 강의 내용과 강의 전달에서 평가하고 발전하는 모습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이 말이 참 도전이 되어서 나의 책상에 써서 부쳐 놓았다.


학교에서 학기말이 되면 교수 평가서를 학생들이 작성한다. 사실상 교수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여 한 학기 동안 강의를 준비하고 진행하지만 학생들의 평가서에는 냉정하게 평가가 나온다. 학교에서는 이 평가서를 참조하여서 교수를 채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와는 별도로 교수는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아야 한다. 한 한기 동안의 강의를 마치면서 이번 학기에 스스로에게 점수를 주고 학생들의 피드백을 통하여 다음에 강의를 보다 좋은 강의로 만들기 위하여 어떤 점들을 구체적으로 개선해야 할지를 살펴야 하는 것이다. 교회 사역 속에서도 평가서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학생들이 수련회를 가면 수련회를 마치고 평가서를 작성한다. 평가서를 통하여 수련회가 전체적으로 잘 구성되었는지 강사님의 말씀이 주제와 잘 연관이 되었는지 등의 평가서를 쓰게 한다. 그런 평가서는 다음 수련회를 더욱 의미 있고 은혜롭게 준비하는 중요한 자료들이 된다. 평가를 하지 않고 수정할 점들을 정리하지 않으면 잘못된 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반복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진정한 의미의 평가는 때로는 고통스럽고 때로는 지루한 작업이기도 하다. 때로는 아프기도 하다. 그러나 평가 없이 발전을 기대 하기가 어렵다. 나의 아내가 직장생활을 하는데 평가제도가 있었다. 처음에 좋지 않은 점수가 나와서 많은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는 것을 보았다. 나중에는 그것이 기도 제목이 되고 평가를 잘 받기 위하여 부단한 노력을 하여 나중에는 특별 보너스까지 받는 좋은 점수를 획득하였다. 아마도 평가가 없었다면 그런 노력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평가는 사실상 우리의 삶의 모든 부분에서 필요하다. 한 개인의 발전에 있어서도 또 우리가 하는 사업체에서도 또 우리의 기독교 사역에서도 평가가 필요하다. 우리가 좋은 목적과 목표를 세웠지만 평가 없이 그저 반복을 하기만 한다면 발전이 있을 수가 없다. 우리의 일과 사역에 대하여 객관적으로 평가를 하고 발전해야 되는 점들을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워서 수정을 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 월드미션대학교도 인가 받는 과정을 통하여 부단히 스스로를 평가하고 그에 합당한 계획을 세워서 미국의 주류 기독교 대학에 어떤 면으로나 부족함이 없는 교육기관으로 발전해 나갈 것이다.

‘피자와 짜장면, 무엇을 먹을 것인가’ – 강영안 교수

<다음 강의는 2003 KOSTA/USA ‘기독교 세계관’ 세미나에서 서강대 강영안 교수가 한 ‘피자와 짜장면, 무엇을 먹을 것인가’입니다.


저는 서강대학교에서 철학을 강의하고 있는 강영안입니다.


오늘 제목이 ‘피자와 짜장면, 무엇을 먹을 것인가’입니다. 아무거나 먹어도 상관없죠. 형편대로 피자가 있으면 피자 먹고 짜장면있으면 짜장면 먹으면 되겠죠.
이런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적어도 피자나 짜장면을 따질 수 있는 것은 선택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죠. 행복한 고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혹시 부부사이에 한 사람은 짜장면 먹고 다른 사람은 피자 먹자고 할 때 어떻게 설득하겠습니까? 맛있으니까, 피자가 맛있으니까 혹은 짜장면이 맛있으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너는 맛있지만 나는 맛이 없다 이럴 수 있기 때문에 설득할 수는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설득해야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피자보다 짜장면이 맛있다고 할 때 어떻게 다른 사람을 설득할 수 있을까요.
음식 문제뿐만 아니고, 어떤 헤어스타일을 할 것인가, 혹은 주거 형태 – 아파트에서 살 거냐 주택에서 살거냐- 이런 문제까지 확대해서 생각해볼 수가 있습니다. 그뿐아니고 결혼을 하면 어떻게 결혼할 거냐, 타인종과 결혼할 거냐, 결혼식을 하고 살거냐, 결혼식하지 않고 동거형태로 살 거냐, 유럽의 경우는 동거도 가능하고 동거자들도 결혼한 사람과 같은 법적 권리를 갖고 있습니다. 변호사를 통해서 재산 등록하죠, 헤어질 때 재산문제 생기지 않도록 하고 있고, 심지어는 동성애자들도 결혼할 수 있고, 한 걸음 더 나가서 네덜란드의 경우 입양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남자 여자 결혼 한 사람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결혼을 한 사람과 안 한 사람의 구별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피자와 짜장면이라고 하면 지금 뭘 먹을까의 문제, 음식의 취향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여러 상황상 윤리적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것까지도 선택할 문제가 된 거에요. 나아가서 종교에 관련된 문제에도 여러가지 종교들 간의 관계가 문제가 됩니다.
과거에 유럽에서 기독교는 주도하는 종교였습니다. 1052년 기독교가 분열된 적이 있죠. 동방교회와 분열되었고 서방교회가 종교개혁을 통해서 개신교가 생겼죠. 개신교 안에도 수없이 많은 종파가 나왔습니다. 그러면서 특별히 다원주의문제가 서양의 전통에서는 종교적 분열과 관련하여 문제가 되었습니다. 1618년부터 1648년, 30년 전쟁이 베스트팔렌조약을 통해서 종식되고 이때 각 지역에 각각의 종교를 인정한다는 원칙이 정해졌습니다. 이렇게 루터란도 인정되고 칼빈주의도 인정되었습니다. 하나의 카톨릭이 지배하던 보편교회, 코푸스 크리스찬이라는 보편교회가 없어졌습니다. 기독교가 더 이상 주도적 종교가 되지 않게 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제 문제는 지금 무엇을 먹을거냐하는 것은 취향 taste의 문제라고 할 수 있겠죠. 김치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쇠고기 좋아하는 사람이 있겠죠. 야채좋아하는 사람에게 주먹을 갖다대며 폭력을 이용하여 고기를 먹게 하면 어떻게 하겠어요.
각자의 취향을 인정해야겠죠. 취향에 대해서는 따지지 말아라라는 금언이 생겼습니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취향의 문제는 어떤 음식이라든지 음악을 듣는다든지 어떤 옷을 입는다는 지에 그치지 않고, 오늘날은 어떻게 살것이냐 하는 문제, 어떤 방식으로 살것이냐, 동거 상태로 살거냐 제도권 안에 들어가 결혼을 하고 살거냐 이런 것도 일종의 취향이 된 것입니다. 정치적인 취향도 공화당을 찍을거냐 민주당을 찍을거냐는 문제도 정치적 취향의 문제로, 요즘은 당보다 개인에 대한 선택, 종교도 하나의 취향의 문제로 인정되는 상황입니다. 왜 그런가에 대한 질문없이 취향의 문제다라는 풍조가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인들이 어떤 입장을 취해야하는가의 문제가 제기되는 것입니다.


오늘 강의의 의도는 이런 다원주의의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취할 수 있는 바람직한 삶의 태도가 무엇인가를 고민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음식을 먹어야할까에 대한 강의는 아닌 것이죠.
요즘 주변을 둘러보면 과거와 달리 참과 거짓, 옳고 그름, 아름다움과 추함 이런 것에 대한 기준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사실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최근에 국내에서 문제가 된 사건 가운데, 김인규 교사라는 서천에 있는 중학교 미술교사가 자신의 아내와 찍은 누드 사진을 자기의 홈페이지에 걸어둔 것이 문제가 되었고 학부모들이 문제를 삼았는데 본인은 거부를 했고 사이버경찰수사대에 신고되어서 그 분을 구속하였습니다. 검찰의 구속영장이 기각되었고, 검찰이 기소하니까 교육청에서 직위해제를 하였습니다.
혹시 보신 분 계십니까? MBC에서 100분 토론에서 토론하자고 해서 기독교 윤리실천운동의 대표로 나가면서 알아보게 되었는데요, 저는 사진을 보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5년 전 사진인데, 제왕절개 수술한 표지까지 다 보이고 가슴도 다 드러나 보이고 전혀 아름답다고 할 수는 없고 성적 자극이 되는 것도 아닌 것 같았습니다. 교사는 예술이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저는 예술가로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술의 영역과 교육의 영역이 있는 것이고, 예술가로서 기대하는 방식이 있고 교육자로서 기대하는 방식이 있다, 그리고 이것들의 충돌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사건을 검토하면서 한국 사회가 그 사이에 엄청나게 바뀌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사이버 투표를 했거든요. 교사가 잘못하지 않았다는 투표가 더 많이 나왔습니다. 오프라인에서 대화를 해보았을 때는 반대의 의견이 더 많았습니다. 교사로서는 그렇게 할 수 없지 않겠다 이런 사람이 많았습니다.
아름다움과 추함은 미적 영역이고 옳고 그름은 윤리적 물음인데, 요즘 그런 구별이 많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옳고 그름이 없다고 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의 문제가 있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성경말씀으로 이사야서 5장 20절을 보겠습니다.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을 흑암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으며 쓴 것을 단 것으로 삼은 자는 화가 있을진저’
이렇게 완전히 가치를 뒤집어 버린 사람들은 화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것을 우리들에게 적용시켜보면, 그리스도인은 악은 악하다고 하고 선은 선하다고 말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을 보면 특별히 그리스도의 삶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1장 10절을 보면 주께 합당하게 행하라, 빌립보서 1장 27절을 보면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그리고 에베소서4장 2절을 보면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라. 그러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가치에 어울리도록 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합당하다는 말이 악시옴인데, 여기서 axiom이라는 단어가 나오죠. Axiom 그리스도인의 가치에 어울리도록 살아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무엇이 옳고 그르다고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고,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이럴 수도 있고 저럴수도 있다라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죠. 이런 위치에서는 이럴 수 있고 저런 상황에서는 저럴 수 있다 이럴 수는 없습니다.
그런면에서 그리스도인이 상대주의자는 될 수 없습니다. 가치 상대주의자가 될 수는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현장에서는 우리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거든요. 다른 라이프 스타일을 가진 사람들이 있고, 다른 생각을 가진 사라들도 있고,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있고 간혹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대해야할까, 이 문제가 바로 다원주의의 문제입니다. 다른 생각, 다른 방식, 다른 세계관이 공존하는 상황이 될 때, 다른 세계관이 등장하는 상황에서 다원주의가 문제가 됩니다.


먼저 다원주의가 뭔가를 생각해보고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대처해야할까 생각해보죠. 다원주의를 영어로 무어라고 합니까? Pluralism이라고 합니다.
어떤 한 개념을 알 때 가장 좋은 방법은 그 개념과 반대되는 개념을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Pluralism의 반대되는 말은 무엇이겠습니까? 형이상학적으로 Monism 또는Uniformism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plural이란 문법에서 복수를 얘기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복수주의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조금 쉬운 말로는 manyism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Monism은 희랍어로 Monus에서 나온 것인데 one이니까 형이상학적으로 단일주의, 유물주의에서는 오직 물질만 존재한다, 또는 Spiritualism 정신주의에서는 물질은 정신을 반영한 것에 불과하다, 정신만 존재한다 이렇게 주장하면 monism이 됩니다. 정치형태에서 정치형태는 하나만 존재한다고 할 때 monism 다양한 형태가 존재할 수 있다고 할 때 pluralism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숫자를 생각해보면 무, 하나, 여럿, 또는 모두 이렇게 볼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정치제에서 Monarchy는 한 사람이 다스리는 것이고 몇 사람이 다스릴 때 aristocracy, 많은 사람이 다스릴 때 pluralism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스리는 것을 democracy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수주의는 여러가지가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많다는 것이 좋을 때가 있고 많다는 것이 나쁠 때가 있습니다. 양적으로 많을 뿐 아니라 종류가 많다는 것이죠. 음식이 많으면 좋겠죠. 색깔같은 것은 많을 수록 좋겠죠. 성도 남자만 있지 않고 남자와 여자가 있다는 것이 좋겠죠. 각각의 종류대로 여러가지를 지었다라는 창세기의 말씀을 보면 세상에 많은 종류가 있는 것이 창조질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아프리카의 신학자 중 God dislikes uniformity 하나님은 다양하게 사는 것을 좋아한다 이렇게 주장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분은 잘못된 결론으로 흑백이 일부러 하나로 되어 사는 것이 좋지 않다고 정당화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역시 하나님이 지은 세계는 다양성이 인정되는 세계이고, 다양한 것이 좋은 것입니다. 미국에서 놀란 점이 반샌 노블에 가보면 영어책만 있습니다. 저는 유럽에서 공부했으니까 서점에 가면 영어책, 불어책, 독어책, 화란어책 등 다양하게 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사람들도 다 그렇게 사용하고요. 언어를 배우는 것은 어렵긴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 획일적인 것보다는 많은 것이 존재하는 것이 좋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왜 이렇게 많아졌는가, 이것을 생각해보죠. 예를 들어보죠. 노량진에 100년 한 아가씨가 있었다고 생각해봅니다. 한 아가씨가 선택할 수 있는 삶이 어떤 것이 있겠습니까. 아마 십중팔구 노량진에서 태어난 대로 부모 밑에서 살다가 부모가 정해준 사람과 결혼하고 그렇게 살았겠죠. 지금 노량진에 살고 있는 한 아가씨를 생각해보면, 그 아가씨가 선택할 여지가 아주 많습니다. 결혼을 할 것인가 안 할 것인가도 선택할 것이고, 결혼하면 어떤 사람과 할 것인가도 알 수없고, 공간적으로도 어디에 있을지 모르는 것이고 무엇을 할 지도 모릅니다.
다원주의라는 것은 선택 가능성이, 옵션이 많아졌다는 겁니다. 옛날에는 아파트가 없었지만 지금은 있습니다. 기술적으로 가능해진 것이죠. 수없이 많은 직업도 사라지고 생겨나고 있죠. 선택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것입니다.
15세기 한국에 살았던 사람이 선택할 종교는 무속 또는 불교나 유교가 될 거에요. 지금 와서는 그렇지 않거든요. 불교신자가 될 수도 있고 기독교 신자도 될 수 있고, 한창 한국에서 전도 많이 하는 증산도 신자도 될 수 있고요. 선택의 가능성이 아주 많아졌습니다. 민주주의는 다원주의를 촉진하고 기술적 발전으로 선택가능성이 아주 많아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가의 생각해봐야하겠습니다. 여기서 기본적인 말씀을 보면 몇 가지 베드로전서 3장 15절에서 16절입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몇 가지를 다원주의와 관련된 몇 가지를 이야기 해보죠. 성에 관한 문제, 정치적인 성향의 문제, 종교적인 문제, 즉 신앙의 차이와 관련해서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베드로전서를 통해서 크게 세 가지를 알 수 있는데요, 첫번째로 ‘너의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입니다. 사실 베드로 사도, 바울 사도가 살던 시대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와 비슷한 정도로 다원주의의 시대입니다. 우리시대만 다원주의 시대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아테네는 다양한 사상이 존재하던 곳입니다.
아테네 이야기 데살로니가에 가기 위해서 잠시 머문 곳이에요.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왜 아테네에서 전도하려고 하지 않았던 이유는 의문이지만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가는 도중에 잠시 머무른 것으로 나옵니다.
도시를 둘러보고 거기에 우상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유대인 회당에 가서는 유대인들과 아고라에 가서 아테네 사람들과 토론을 했습니다. 스토아 학파 사람들과 에피큐리안들과 토론을 했습니다. 에피큐리안들은 쾌락을 즐기되 작은 자연적 쾌락을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배고프면 먹고 친구들과 담소하고 소박하게 삶을 즐기며 사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은둔주의자였습니다. Hidden Garden에서 조용히 은둔하는 삶을 이상으로 삼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스토아학파는 금욕주의면서 정치적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태도였습니다. 그러니까 여러 다양한 사상과 접촉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주로 삼는다는 것은 말했습니다. 여러분 주로 삼는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또 어떤 것의 주인입니까. 어디에서 그리스도가 주인입니까? 가장 포괄적으로 이야기하면 우리의 삶의 주인이라고 하겠습니다. 삶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추상적인 질문이 되겠지만 삶이 무엇으로 이루어져있는가 하는 것은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생활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아침에 일어나서 준비하고 일터로 나가거나 학교로 가거나 공부하거나 말하거나 일하고 물건 사고 팔고 결혼한 사람은 부부생활하겠죠. 때로는 절망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기뻐하고, 이런 삶의 주인이 그리스도이다 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이거든요.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주되심이라는 것이 어떤 거창한 이론이 아니라, 우리의 성의 주인, 우리의 노동의 주인, 우리의 삶의 주인을 예수 그리스도로 삼는다, 먹고 마시는 것이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내 욕심대로 살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가 원하시는대로 바라시는대로 산다는 것이지요. 내가 생활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원하시는대로 한다라는 것은 어떤 뜻입니까? 내가 아내와 성생활을 하는데 그때 예수 그리스도의 생각대로 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여러가지를 생각할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성을 감사히 누리는 것입니다. 너무 지나치게 즐기는 것도 옳지 않고 너무 금기시하는 것도 옳지 않은 것입니다. 잠자는 것, 음식을 먹는 것과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성이라는 것은 삶의 한 순간 한 순간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누리면서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인정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 영성이 필요한 것입니다. 첫번째로 삶의 사소해 보이는 것까지도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인정하고 사는 것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먼저 무엇보다도 감사하면서 그것을 누리는 것 그것이 Lordship에 관한 문제인 것입니다.
베드로서가 말하는 두번째의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에 대해서 이유를 묻는 사람에게 대답할 것을 예비하되 어떤 태도로 하면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유라는 말은 원어로는 logos입니다. 영어로 logic의 어원입니다. 그 이유라는 뜻입니다. 논리적으로 설득할 수 있도록 대답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한다는 것입니다. 대답이라는 말이 apologetic, 변론이라는 뜻입니다.
불교신자가 혹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이 성에 대한 너의 태도가 왜 그런가 하고 물었을 때 그 것에 대해서 대답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네가 왜 기독교인이냐 라는 질문에 대답할 태세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번째로 이번 주제인 다원주의와 관련된 것인데, 베드로서는 대답할 것을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혹시 영어 성경을 갖고 계신 분이 계시면 한번 말해주시기 바랍니다. RSV에서는 With Gentleness and Respect이라고 번역하고 있죠. 그러니까 아주 젠틀하게, 온유하게 그리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 강연을 할 때 대학교 1학년 학생이 질문을 했습니다. 카톨릭, 불교 신자에게 어떻게 존경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사단의 종교를 믿는 사람을 어떻게 존경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서강대에 있으니까 개강 미사가 있거든요. 지금은 개신자 신자들은 따로 예배를 드립니다만 초창기에는 미사에 참석을 했어요. 사실 저는 유럽에서 공부할 때 미사에 참석하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곧 천주교에서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은 미사에 참석하지 말라고 하더라구요. 같이 참여하는 것이 서로 이렇게 힘든 것 같습니다. 역사를 보면 카톨릭은 우리에게 큰집과 같은 것인데요, 물론 오류가 많이 있습니다. 물론 오류가 많이 있습니다. 교황무오설이니 무오수태설 이런 것은 사실 200년도 안 된 것입니다. 그렇더라고 사단의 종교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불교에 대해서도 불교가 사탄의 종교인가 이것 잘 모르겠어요. 불교와 그리스도교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이라는 것은 내가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불교는 견성성불이거든요. 내가 깨달아서 구원을 얻어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각에서 인간의 방법을 통해 구원을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방법으로 구원을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불교철학을 공부해보면 그 생각이 참 깊다는 느낌이 듭니다.


사람의 생각에 따라서 파고들면 결국 파악이 되고 이해가 되요. 성경말씀은 그렇지 않거든요. 결국 불교는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 종교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자유로울 수 있는가? 어떻게 우리가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런 문제를 골똘하게 생각한 것이 불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지 않죠. 성경 말씀이 사람의 생각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때로는 논리에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가장 중요한 교리 중에 하나가 성육신인데, 요한복음에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보통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사람이 되고 그 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혀서 고통을 당할 수 있냐 말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인데,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에게 십자가가 꺼리는 것이 된다고 했는데, 사람의 생각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죠.
헤겔이 그리스의 종교 사상을 한 문장으로 정리했는데, “고통을 당할 수 있는 것은 영원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고통을 당하는 자는 신적 존재가 아니다 이런 뜻인데요, 그만큼 신앙을 갖는 것이 놀라운 것입니다.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을 반증해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닌 것입니다. 가장 근본적 핵심을 이루는 것은 우리의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논리는 기본적은 논리적 구조로 되었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논리를 뛰어넘는 거에요.
그런데 불교 교인을 대할 때 힘으로 할 수 있겠는가의 문제입니다. 가서 주먹쥐고 대할 수 있는가, 아니거든요.
동국대에 있는 교정에 있는 불상을 훼손해서 소란이 난 일이 있었죠. 노량진에 장승을 베어버린 사건이 있었고, 단군상을 부셔버린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고신소속 장로인데, 교단 소속 목사님, 관련된 목사님이 감옥에 간 경우가 있었습니다. 잘못된 행동이라고 생각하는데, 논리적으로 따져서 그것이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 지적해야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것은 Gentle한 방식으로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존경할 만한 것이 없다 하더라도 온유와 존경으로 대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선한 양심을 가져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히브리서 12장 14절, 영어 성경 한번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RSV에 따르면 Pursuit peace with everyone 하나는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화평하라는 것이고, 두번째가 거룩함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을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성품이나 삶이 하나님이 거룩한 것처럼 거룩하도록 노력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나 교회로서는 거룩해져야 합니다.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른 종교,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같은 생각을 갖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똑같이 거룩함을 요구하는 것은 힘든 것입니다.
요즘 박진영이라는 가수가 얼마전에 6집을 냈는데, Sex is Game이라는 곡을 발표를 했습니다. 지난 2,3주 미디어에서 관심을 많이 가졌습니다. 기윤실을 아예 지목을 했습니다. 결혼 전에 섹스를 하지 말라는 것이 성경에 어디에 있냐고 주장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영상물 등급위원회에 18세 이하 판매 금지를 주장했는데, 기각 당했습니다. 이 조직은 업자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업자들을 보호하는 것이 기본적인 목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불매운동을 인터넷을 통해서 하고 있거든요.
불신자들에게 그렇게까지 요구하는 것은 무리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다만 문제는 대개 음반 소비자들이 중학생들이거든요, 청소년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서 막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이라는 것은 좋은 것이고 즐길 수 있는 것이지만 박진영이라는 가수가 주장하는 것은 왜곡된 성입니다.
성이라는 것은 사람 사이에 가장 친밀성을 주는 것이거든요.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성적 관계보다 더 친밀성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없거든요. 다만 청소년들을 보호하는 차원에서는 막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간사들에게 얘기하는데, 세상과의 관계에서 꼭 이기겠다고 그렇게 하지 말 것을 권유했습니다. 젠틀하게 그리고 왜곡된 인격이지만 그 인격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박진영을 한번 불러다가 이야기를 해보자, 박진영을 위한 기도모임을 만들자, 그래서 좋은 음악, 좋은 글을 만들 수 있도록 하자, 이런 얘기도 했습니다.
이런 것들이 다른 생각,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가 되야한다는 것입니다. 간단히 요약하면 우리의 확신은 분명하되,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라는 확신을 갖되, 다른 믿음과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행동할 때는 항상 존경하는 마음으로 젠틀한 방법으로 대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쳐주고 있는 다원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이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한 가르침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장이규]지도자의 자기 관리와 성장 (3)

그러면 어떻게 리더의 지침을 방지하고 지속적 섬김의 성장을 가져올 수 令돈?재생산 공급을 할 수 있을까? 기본적으로 리더의 자기 관리 계획을 통해 성장을 가져올 수 있다.


소그룹 리더의 탈진을 방지하고 지속적으로 섬길 수 있도록 재생산을 이루게 하는 리더의 자기 관리 방법은 기본적으로 8가지의 기본적인 질문과 그 대답의 범주 안에서 이루어 질 수 있다.



리더의 자기 관리 8가지 전략



1.개인적인 삶의 목표가 무엇인가? 무엇이 나의 삶의 비전인가?
Personal Mission Statement
2. 올해 개인적인 삶의 목표가 무엇인가?
Personal Goals for this year
3. 올해 영적으로 성장하기를 원하는 부분은 무엇인가?
Spiritual Disciplines
4. 올해는 누구와 어떠한 관계성을 가지고 싶은가?
Relationship
5. 개인적 신앙의 성장을 위해서 읽고 싶은 책 은?
Reading
6. 올해 개인적으로 참여해 보고 싶은 것이 있다면 ?
Experiences
7. 올해 개인적인 습관이나 기술에 있어 버리고 싶거나 습득하고 싶은 것은?
Personal Habits, Skills
8. 올해 내가 주님의 사역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Ministry Goals



이제 좀 더 세밀하게 리더의 자기 관리 8가지 전략의 운영에 대해서 상고해 보자.


첫째 질문: 나의 삶의 목표가 무엇인가? 나의 삶의 비전이 무엇인가?


이 질문은 인생의 가장 기초적인 질문이면서 사람들이 쉽게 대답을 찾지 못하고 늘 목말라 하는 부분이다. 다른 말로 이 문제의 핵심을 풀어본다면 하나님이 왜 나에게 이 땅 가운데 생명을 주셨을까? 에 관한 그리스도인의 소명(calling)에 관한 물음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라. 나의 삶의 목표가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 이렇게 정신없이 뛰고 바쁜가? 그래서 행복한가? 만족한가? 삶의 보람을 느끼는가?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리더 자신은 순간순간 그 자신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소명(calling)의 문제를 재점검해야 한다. 이것이 분명하게 점검되고 확인 되지 않은 때, 리더는 소그룹 공동체를 잠시는 섬길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탈진하게 된다. 섬기다 보면 인간의 죄성은 ‘내가 무엇 해 준다고’, 나의 것을 ‘퍼’ 준다고 생각하는 데로 우리들의 생각과 마음을 이끌어 가기 때문이다.


2003년도 1월 25 일에 출간된 ‘목적이 이끄는 삶'(릭웨렌) 은 책이 나오자마자 얼마 안 되어서 베스트셀러 책이 되었다. 그런데 이 책은 2년이 지난 지금도 끊임없이 많은 사람들과 개인이나 신앙 공동체에서 꼭 함께 읽기를 원하는 추천도서 중 하나로 그 자리 매김을 하고 있다. 여전히 많은 서점에 이 책에 대한 주문이 쇄도하고 있고, 어느 책방은 인터넷에 이 책이 일시 품절되었다가 다시 다음 주에 나온다고 미안하다는 광고와 잠시 기다려 달라는 광고까지 띄울 정도로 붐이다. 심지어는 2005년도 사순절을 ‘목적이 이끄는 삶’으로 40일간 묵상할 것을 교회 공동체에 추천하면서 공식적으로 인터넷에 올려 광고 할 정도다. 왜 그런가? 아마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목적이 이끄는 소명(calling) 있는 삶을 목말라 하고 있고, 이 책은 그 목마름을 응답하려는데 있기 때문일 것이다. 2005년도 1월 17 일자 타임지 잡지의 핵심 이슈 역시 비슷한 문제를 다루었는데 그 주제는 ‘행복'(Happiness) 이었다. 이 주간 타임지의 기사 총 지면, 142면 중에서 행복의 문제가 무려68면 (약 47.8%) 이나 할애하면서 ‘ 당신은 얼마나 행복 합니까?’ ‘무엇이 당신으로 하여금 행복하게 합니까?’ 등등의 행복 치수에 대한 갤럽 조사와 다 방면에서의 행복한 삶을 어떻게 추구하고 또 할 수 있는지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있다.


이처럼 책과 잡지에서 다루는 목적이 있는 삶, 행복한 삶은 분명 오늘 한없이 바쁘고 무엇인가로 공허한 우리의 삶을 채우려 돌진하고 있는 우리 현대인에 대한, 삶의 의미성의 문제 와 정체성의 문제를 다시 한 번 점검하고 확인하는 것이리라. 이는 소그룹 리더에게도 마찬가지다. 소그룹을 섬기면서 행복한가? 소그룹을 2년 이상 섬기면서 기쁜가? 소그룹 섬김에 하나님의 소명이 느껴지는가? 소그룹 리더 자신의 삶에 대한 주님의 소명이 무엇이냐에 대해서 순간순간 점검이 반드시 필요하다.


소그룹 리더의 외적 내적 영적인 지속적 힘은 그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아는데 있다. 중요한 것은 소그룹 섬김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슨 일을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아는 것이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바로 설 때에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공동체를 위해서 일하는 그 사역의 힘을 지속적으로 공급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 없이 우리의 수고는 쉽게 외부 환경적 여건에 의해 지칠 수밖에 없다. 이는 수돗물을 공급하는 파이프가 휘었거나 그 내부가 부식되었을 때는, 깨끗한 물도 나오지 않게 되고, 시원한 물이 콸콸 쏟아지는 풍성함도 없게 되는 것과도 마찬가지다.


동시에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아는 것은 바로 나의 소명(calling)으로 이어진다. 이 소명이 바로 우리 리더로 하여금 목적에 이끌리는 삶, 섬기면서 행복한 삶, 의미 있는 삶으로 지속적 성장을 가져오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리더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의 소명을 발견할 수 있을 까? 이는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음 가운데 갖게 된다.(하나님과의 깊은 관계 맺음 방법에 관해서는 제 4부 ‘개인적 영적 성장 시간을 구분하라’ 에서 구체적으로 다루게 될 것이다.) 릭 웨렌의 ‘목적이 이끄는 삶’ 에는 글에 힘이 있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책을 읽고, 능력을 얻게 하는 이유 중 하나는 저자 자신의 삶이 하나님과 깊은 관계 속에서 그를 향하신 하나님의 분명한 삶의 목적과 그 소명을 발견한 데에서 흘러나온 영감에 있으리라.

Min Chung 목사 인터뷰: 세대 간의 벽을 허무는 entrusted reconciler

이코스타 2006년 4월호


eKOSTA 안녕하십니까, 먼저 간단하게 소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Min Chung 저는 샴페인 어버나에 1990년에 교회를 시작했으니까 16년 된 것같습니다. 여기서 multiethnic church사역을 하고 있고, 한국사람들이 50%정도 되고 나머지는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가족은 애들이 다섯명 있고 코스타는 두번 가보았습니다. 너무 좋았었고요. 우리 교회는 예배는 영어를 사용해서 아무나 영어를 사용할 수 있으면 올 수 있습니다. 소그룹은 언더와 대학원생들은 나눌 수 있는데, 그 안에서도 여러 인종의 사람들이 섞여 있습니다.


eKOSTA 한국어 그룹이 따로 있나요?


Min Chung 한국어 그룹은 따로 없습니다. 저희 주위에 한국교회가 몇 군데 있기 때문에 한국어 그룹을 따로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한국말이 더 편하신 분들도 영어를 사용하실 수 있으니까 따로 그룹을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eKOSTA이번 코스타의 취지문을 보셨는데요, 먼저 ‘화평케 하는 새 사람 Entrusted Reconciler’라는 주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Min Chung 이번 주제는 아주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peace가 있은 다음에 우리가 세상의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평이루게 해야한다는 Reconcile되어야 한다고 했을 때 마태복음 22장을 생각하게 되는데요,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말씀과 관련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구원의 역사를 잘 반영한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과 Reconcile된 사람들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서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reconcile되는데 도움이 되어야한다는 점에서 매주 좋은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eKOSTA화평케 한다는데는 많은 의미가 포함될 수 있을 것같습니다. 주제에서 말하는 화평케 한다는 것이 어떤 것을 의미한다고 보십니까.


Min Chung 이번 주제는 하나님 나라와 화평케하는 역할,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 안에서 서로 하나되는 노력 등이 포함될 것같습니다. 말하자면 회심과 이후에 하나의 공동체로서 성숙해가는 과정에서 하나님 나라안에서 하나되는 것을 말하는데요, 교회에서 전자에 대해서는 강조가 되지만 후자에 대해서는 관심이 적은 것같습니다. 교회에서 하나되는 것은 단순한 강조에 넘어서 진정한 변화가 먼저 있어야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정말 마음이 변하지 않으면 되지 않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도 기도하실 때 너희들이 하나가 되도록 기도한다고 하셨잖아요? 하나가 되지 않으면 힘이 없어서 세상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정말 마음에 변화가 있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힘이 있으려면 정말 하나가 되도록 각 사람들의 마음이 변화되어야겠습니다.


세상의 여러 역사를 보면 공동체로 하나가 되기 위해서 노력을 많이 한 것을 볼 수 있지요. 공산주의도 그렇고요. 그렇지만 정말 인간적인 마음이 깨지지 않으면 하나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담과 하와도 죄를 짓자마자 갈라졌지요. 인간이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마음을 벗어버리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하나님과 Reconcile되는 그런 과정에 있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우선 회개를 강조해서 내가 내 자신의 죄를 볼 수 있고 깨지고 하나님과 Reconcile되어야 하겠습니다. 한편 Reconcile이 되는 과정에 있는 거기 때문에 교회도 계속 깨지고 사랑하고 변화되는 과정에서 세상에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교회가 하나가 될 때에 전도할 수 있고 선교할 수 있는 힘이 생기지 않나 생각합니다.


eKOSTA 먼저, 세속 문화에서는, 특히 미국에서는, 상대방의 문화나 기호에 간섭하지 않는데요, 복음의 공동체는 하나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한다는 당위성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Min Chung 모든 문화에 장점과 단점이 있지요. 미국 컬쳐에도 좋은 점과 나쁜 점이 있고 한국 문화에도 강점과 약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은 개인주의적인 문화가 많이 있고 한국은 공동체 위주의 문화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 집을 가르키면서 미국 사람들은 my house라고 하는 반면에 한국 사람들은 내 집이라고 하면 굉장히 이기적인 사람이겠죠? 우리 집이라고 그럽니다. 그런 문화적 차이가 있고 한국 문화가 아주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할 때도 미국컬쳐에서는 몇 센트까지 나눠서 첵도 따로 나오는데 한국문화에서는 서로 내겠다고 서로 싸우죠. 그런데 이기적인 마음이 깨지지 않으면 그런 마음도 사실 진정한 공동체로 변화되기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레스토랑에서 미국사람들과는 내가 돈을 내주면 원래 그러지 않기 때문에 너무 고마와합니다. 그에 반해 한국 사람들은 고맙다고 하면서도 마음 속에서는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을 생각할 때 아무리 공동체를 내세워도 마음 속으로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공동체는 형성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아름다운 한국의 컬쳐거 진정한 크리스쳔 컬쳐가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실 때 완전히 자신의 모습을 바꿔서 오셨습니다. 하나님으로 남으셨지만 완전한 사람이 되어서 이 세상에 오셨죠. 그래서 자신의 교회를 세우셨는데요, 교회가 먼저 깨져서 예수님과 같이 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나아가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진정한 공동체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느끼셨던 성육신적 고통 (incarnational pain)을 느끼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어려움을 직접 겪지 않으면 공동체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eKOSTA목사님은 1.5세로서 인터내셔널 사역을 하시는 분으로 알고 있는데요, 복음이 문화를 넘어서는 것을 직접 경험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다른 민족문화의 배경을 가진 개인들이 교회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 어느 정도 가능할까요.


Min Chung 조금 전에 말씀드린 말씀, 공동체에 대한 생각이 사실 저희 교회의 핵심 가치인 것같습니다.


다인종 사역을 할 수 있는 것이 미국에서는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세계 어느 곳과 달리 melting pot으로 모여 사는 곳이기 때문에 좋은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는 어려울 수 있겠지만, 미국에서는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힘든 점도 많이 있지만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에서 할 때 유리한 점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에 있기 때문에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모여있고 다른 나라보다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포스트 모던 컬쳐는 서로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문화죠. 그래서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에서 서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래도 역시 복음이 들어가지 않으면 전혀 가능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같이 모이고 같이 한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문제가 일어나서 갈라지기 때문입니다. 정말 예수님의 사랑이 들어가지 않으면 어려울 것입니다. 저희 교회가 60% 정도 한국 배경의 사람들이 있고 교회를 시작한 것이 16년 정도 되었는데요, 사실 저희가 처음에 계획해서 다인종교회를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 영어를 사용하는 한국인 언더 중심으로 사역을 시작했는데, 지금은 다인종교회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약 30개국가의 사람들이 하나의 교회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나 살펴보니까 의외로 간단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서로 사랑하고 학교에서 직장에서 있는 곳에서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자라고 생각하니까 자연스럽게 다른 민족의 사람들을 사랑하고 교회로 초대하여 모이게 되었습니다. 같이 농구하면서 같은 랩에서 일하면서 친구 삼자, 같이 이야기 하고 식사하고 그리고 기회를 보아 복음을 전파하자 이런 생각으로 하다보니까 친구들을 교회에 데리고 오게 되었습니다.


eKOSTA 어려운 점은 없으셨나요?


Min Chung 어려움도 많이 있었죠. 우리 교회가 주로 2세가 모여있지만 2세인 경우에도 각자의 문화가 남아 있습니다. 한국 사람과 공통점이 많다고 하는 중국 사람, 일본사람이라도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참 이기적이기 때문에 나와 완전히 비슷한 사람들과 있지 않으면 서로 싫어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실 한국 사람들도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다니잖아요. 이런 이기적인 마음이 깨질 때 서로를 위해서 조금씩 희생할 때, 가능했던 것같습니다. 소그룹에서도 다른 문화에 있으니까 자기들끼로 있으면 편하니까 서로 함께 하는데 어려운 점이 많이 있었죠.


예를 들어서 아무리 영어를 잘 하는 한국인 2세들도 스몰그룹에서 가끔 한국말이 나오고 한국적인 농담이 나옵니다. 그럴 때 중국 사람이나 인도 사람들이 기분이 상한 경우가 있었어요. 교회에서 특히 리더그룹, 예배에서 이런 문제를 다루기 시작했습니다.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 삼가하자고 했고요.


다른 곳에 교제를 위해 나갈 때도 한국 사람들만 간다거나 하는 일에 대해서 사랑하기 위해서 스몰그룹에 있을 때는 정말 자기 가족같이 돌볼 것을 강조했고요. 몇 년동안 교회에서 풀기 시작하였고 부딪히면서 풀어나갔습니다.


또 한국 교회에서는 기도 열심히 하고 방언도 하고 그러는데요, 중국 교회에서는 그런 것이 적거든요. 매우 논리적으로 접근하는 문화가 있습니다. 그럴 때 신학적으로 설명하고 서로 이해하도록 노력했습니다.


어려움이 많이 예상되지만 그리고 지금도 여러가지 어려움이 많이 있지만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이 문제보다 크기 때문이죠. 가정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데요, 사실 가정도 문제가 없는 경우는 없는데요 그때마다 서로 기도하고 사랑으로 극복하는 노력을 기울일때 진정한 공동체의 모습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eKOSTA 한국교회는 1세 교회와 2세 교회로 구분되어가고 있고, 세대간의 벽과 문화적인 벽이 동시에 작용해서 더 멀어져가고 있는 것같습니다. 교회가 어떤 노력을 기울이면 좋을까요.


Min Chung 매우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하는데요, 1세 2세가 갈라진 것은 이민 초기부터 있었던 문제이고, 요즘은 2세 안에서도 나뉘어진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될 수 있으면 같이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적극적으로 프로그램을 통해서 그리고 education을 통해서 이런 문제를 해결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1세 교회도 많이 가보는데요 부모님들이 2세 자녀들과 하나되기 위해서 너무 갈급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미 너무 갈라져 있기 때문에 목사님들도 어떻게 대처해야하는지 어려워하시고 2세들을 어떻게 대할 지 몰라서 힘들어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 먼저 하나되도록 노력해야하고 교회에서도 예배를 통해서, 세미나를 통해서 가정에서 하나될 수 있도록 돕고 여러가지 프로그램으로 도와주어야 하겠습니다.


지난 번 한 교회 집회에서 말씀을 전했는데 4일동안 말씀을 전했는데요 20분 정도 영어로 하고 30분 정도 한국말로 메세지를 전했는데요,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 가정들이 함께 예배를 드릴 때 좋은 결과를 볼 수 있었습니다.


교회 지도자들도 서로 하나가 되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요, 예를 들면 1세 목회자들이 교회에서 2세 목회자를 훈련시키는 경우가 적은 것같습니다. 필요하면 완전히 다른 교회에서 자란 사람들을 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의 본질을 생각할 때 교회의 일꾼이 필요할 때 다른 곳에 가서 구하는 것보다 교회에서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많은 문제가 다른 교회에 가서 다른 philosophy를 가진 사람을 구할 때 많은 문제가 발생하죠. Panoramic Vision을 갖고 주일학교 시절 때부터 2세들에게 관심을 갖고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잘 교육시키고 대학교 다닐 때도 관계를 갖고 제자훈련을 해서 2세들이 1세들과 함께 같은 철학을 공유하고 공동체를 이끌어 나갈 때 마음이 하나가 되고 공동체적으로 힘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제가 코스타를 볼 때 그런 점에서 강점이 있다고 봅니다. 코스타를 통해서 은혜를 받은 분들이 조장이 되고 간사가 되고 일하는 분들이 되기 때문에 하나의 정체성을 갖는 것처럼 1세와 2세가 함께 하나가 될 때 힘있는 교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KOSTA 코스탄들은 두 개의 문화를 체험하면서 그 안에서 복음을 지키면서 사는 특수한 환경에 처해있습니다. 학교, 직장 등에서 문화적 벽을 넘는 화해자가 되기 개인적으로 또는 공동체적으로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되겠습니까.


Min Chung 제가 두번 코스타를 갔을 때 맘이 뛰는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 나라를 세상에 전파할 수 있을까 생각할 때 많은 사람들이 필요한데, 코스타 집회에서 큰 잠재력을 발견할 수 있었어요. 지적 능력을 가진 많은 사람들을 발견하고 미국이나 세계 어디나 가실 수 있는 분들을 보니 큰 잠재력을 보았습니다.


우리의 Primary Identity는 한국사람이 아닙니다. Primary Identity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한국 사람, 교수, 학생, 어머니 이런 것들은 Secondary Identity인 것이죠. 크리스찬은 자신의 도구를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데 써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코스타에 오신 분들이 자기가 갖고 있는 Secondary Identity를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자기 자신을 써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코스탄들이 모두 한국 교회에 있으시면서 한국말하는 친구들에만 관심을 갖는 것은 좀 부족한 것같습니다. 물론 그 안에서 전도도 많이 하신다고 생각하는데, 저는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피부색을 보지 않고 국적을 보지 않고 어떤 말을 하든지 상관하지 않고 어떤 사람을 영적인 눈을 가질 수 있다면, 그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고 식사를 할 수 있고 꼭 복음을 전하지 못하더라도 사랑을 베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사랑을 베풀고 마음을 열도록 한다면 좋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캠퍼스에 있는 인터네셔널 스투던트에게 다가가려고 미국교회도 노력을 하지만 실제로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사람들은 한국인 인터네셔널 스튜던트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에는 세계에서 전도할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캠퍼스에 있습니다. 이들에게 나갈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코리안 인터네셔널 스튜던트라고 생각합니다. 농구 같이 하고 식사 같이 하고 가정을 오픈하고 관계를 가질 때, 하나님의 사랑이 퍼져나가겠죠. 그리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올 것입니다. 코스탄들이 한국가정 한 가정 인터네셔널 가정 한 가정, 이렇게 두 가정만 모인다면 성경공부 모임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운동이 몇 년 안에 일어난다면 인터네셔널 학생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코스탄들이 할 수 있는 그리고 해야하는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eKOSTA 오랜 시간 내 주셔서 감사드리고요,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목사님의 사역에 계속적인 발전이 있으시길 기원합니다.


Min Chung 감사드리고 주님의 이름으로 평안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