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정]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나라, 브라질 : I. 수평성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나라, 브라질

I. 수평성  


지난달 28일 밤, 출발한 비행기는 밤새 날아 다음날 아침 브라질 상파울로에 도착했다. 이번 방문은 상파울로의 선교공동체인 쿰(대표 박지웅 선교사)이 후원하고 남미 찬양선교단 램프(LAMP)가 주최하는 ‘램프 예배세미나’ 강사로 섬기기 위함이었다. 이 세미나는 브라질을 비롯해서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등에서 60여 명이 모여 남미 한인교회 처음으로 예배에 대해 본격적으로 다루는 의미 있는 모임이었다.


브라질은 참 독특한 나라이다. 대한민국과 지구의 정반대에 위치한 브라질, 그곳에 전혀 다른 세상이 존재하고 있음을 40년 이상 모르고 살았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우연히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나라, 브라질》이라는 책을 쓴 박영진 씨를 만나서 사인한 책을 구입했다. 그는 세계 일주를 두 번이나 한 사람으로서 브라질에 마음이 꽂혀 아예 이곳에서 살고 있다. 관계 중심적이고, 음식 좋고, 시간 많은 나라. 일본·한국·볼리비아·페루·유대인 등 백인에서 동양인에 이르기까지 이 나라를 사랑하고 서로 존중하며 함께 공존하는 나라. 다양성을 유지하면서 자기만의 독특한 문화를 창출해내는 나라가 바로 브라질이다.

필자가 느낀 이 나라의 특징은 한마디로 수평성이다. 일례로 부자들이 먹는 음식이나 서민층이 먹는 음식의 질이 거의 차이가 없다. 한번은 LAMP 찬양단을 섬기는 박지범 선교사, 미국 달라스의 예배공동체 Kings Region을 섬기는 김재우 선교사와 함께 지하철을 타고 상파울로의 중심가인 쎄 광장에 나갔다. 한 초라한 버거 판매점을 방문해서 브라질식 핫도그와 오렌지 주스를 주문했다. 반으로 자른 오렌지 30개를 하나하나 직접 기계에 넣어서 즙을 짰다. 3컵의 주스가 나왔다. 가격은 불과 1불 50전, 문화충격이었다.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는 맥도날드를 뺀 미국의 모든 프랜차이즈 업체가 브라질에서 맥을 못 추고 철수했단다.

세미나 기간에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주 강사 2명에 현지 강사 1명으로 진행되는 단촐한 세미나이지만, 지역교회 예배의 활성화를 위해 준비한 주제를 모두 다루기에는 2박 3일도 부족했다. 그런데도 점심 식사는 3시간이나 지속된다. 처음엔 식사 시간을 왜 그렇게 길게 잡았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그러나 지나고 보니 음식을 나누면서 대화하는 과정에서도 사역이 일어나고 있었다. 강의와 찬양인도 외에도 식사하고, 교제하고, 상담하고, 늦은 밤까지 대화하는 모든 시간들이 중요한 사역이었다.

컨퍼런스 마치고 램프 스태프들과 별장으로 이동했다. 특별한 프로그램도 없이 그저 먹고 쉬는 줄만 알았다. 인터넷도 안 되는 외진 곳에서 그렇게 2박 3일을 지낸다는 것이 답답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그 넉넉한 시간에 더 깊은 만남들이 이어졌다. 식사하고 대화하며 서로의 깊은 속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깊은 임재가 있었다. 마치 오랜 가뭄에 생수를 대하듯 평생 가슴에 묻어 두었던 예배와 사역에 대한 질문, 갈등, 꿈을 나눌 때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필요한 답과 은혜를 부어주셨다.

오후 늦은 시간에 시작한 족구, 운동화가 없어서 반바지에 구두와 검은 양말을 신고 뛰었다. 군대시절, 족구리로 통했던 실력을 오랜만에 발휘하느라 좀 무리했다.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통했나보다. 그때까지 나를 강사로만 여겼던 스태프들과의 거리감이 단번에 좁아졌다. 무엇보다 오랫동안 묻혀 있던 내 안의 수평적 자유함을 마음껏 분출한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이런 깊은 교제의 과정을 통해 연결된 관계의 결실이 바로 램프선교단이다. 이들은 남미 각지에 흩어져 살지만 사역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달려오는 무서운 결속력으로 뭉쳐있다. 이것이 관계의 힘이다. 노는 것을 시간낭비로 여기는 문화에서는 질타 받을 수도 있는 쉼, 하지만 이를 건강하게 개발할 때 사역의 든든한 기초가 된다. 관계가 형성되면 사역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계속)

이유정(한빛지구촌교회 예배 목사, 좋은씨앗)

[이유정] 예배의 정점은 항복이다

예배의 정점은 항복이다
‘오직 주 만이’ 작곡 배경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저에게서 나는도다.” 시 62:1
 
1987년 6월은 나의 대학생활 중 가장 시끄러운 달이었다. 같은 캠퍼스에서 공부하던 이한열 학우가 전경 측에서 쏜 최루탄에 맞아 병원에 이송되었으나 결국 생명을 잃었다. 이 사건으로 도화선에 불붙듯 전국의 대학생들이 들고 일어났고 더욱 거세진 데모로 나라전체가 술렁였다. 당시 한국교회 안에도 좌우의 대립양상이 극에 달했다. 경배와 찬양 모임들은 어떤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그치지 않았다. 한 쪽에서는 침묵하고 계시는 하나님에 대해 ‘말 못하는 하나님’, ‘입 없는 하나님’이라는 독설적인 표현까지 터져 나왔다.
복음주의 진영의 공식입장은 데모 참여를 금했지만, 내가 속했던 IVF 학생선교단체에서는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참여할 수 있도록 선을 그어주었다. 나는 젊은 혈기에 못 이겨 그 데모 대열에 뛰어 들었다.
데모 이후 내 마음은 항상 불편했다. 군중 속에 섞여 뛰고, 돌도 던지고, 도망하는 폭력적 태도를 내 이성은 합리화했지만 마음은 허무하기 이를 데 없었다. 대학 졸업반이었던 나는 학업 이성, 졸업 후 진로에 시국문제까지 맞물려 심적으로 가장 복잡한 시기를 겪고 있었다.
 
게다가 당시 나는 크리스천으로서 한 번 즈음은 통과해야 할 내면의 전쟁, 즉 바울 사도가 로마서 7:19,24에서 고백했듯이,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는 내적 갈등을 치열하게 경험하고 있었으니 당시 나의 내면세계는 한마디로 전시상황이었다. 어느 날 아침 말씀을 묵상하려고 그날 본문을 폈다. 다윗이 쓴 시편 62편이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시 62:1 상반절)
1절에서부터 마치 케이오 펀치를 맞은 것처럼 눈앞이 아찔했다.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그랬다. 내 영혼은 잠잠하기는커녕 폭풍 속에 요동하고 있었다. 하나님만 바라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환영을 기대하고 있었다. 살았고 운동력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내 영은 무너져 내렸다. 문득 하나님 외의 너무 많은 곳에 마음이 분산되어 있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 너무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군요.’ 말씀 앞에 무릎 꿇었다. 이 시편 62편은 그저 평화로운 안식을 누리며 고요한 마음의 평정 속에서 흘러나온 고백이 아니었다. 숱한 고민과 두려움은 물론 죽음의 위협까지 받고 있던 청년 다윗이 자기 자신을 향한 선언이었다.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왕으로 기름부음 받은 지 수년이 지났다. 그를 향한 백성의 인기도 하늘높이 치솟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현재의 왕은 자신을 죽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하나님마저 인정한 왕권, 그 고지가 손에 잡힐 듯 눈앞에 아른 한데, 승기는 사울 왕의 손에 아직도 굳게 쥐어져 있다. 그 갑갑한 현실을 다윗은 묵묵히 참아내야만 했다. 험난한 엔디게 사막에서의 끝 모를 도피생활은 다윗을 무너뜨렸다. 그래서 시편 62편은 처절하게 무너진 삶의 돌무덤을 뚫고 피어난 한 송이 백합화이다.
“기울어 가는 담과도 같고 무너지는 돌담과도 같은 사람을, 너희가 죽이려고 다 함께 추격하니, 너희가 언제까지 그리하겠느냐? 너희가 그를 그 높은 자리에서 떨어뜨릴 궁리만 하고, 거짓말만 즐겨 하니, 입으로 해주는 축복이 속으로는 저주로구나.(셀라)” (시 62:3,4) 코앞에 다가오는 죽음의 위협 속에서 터져 나온 영혼을 향한 절대 선언이었다. 극한 상황에서 오히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명령하는 다윗의 고백이 그 어떤 해답보다 강력하게 내 영혼을 뒤 흔들었다. 그 말씀 앞에 무릎으로 항복했다. 순간 영감이 떠올랐다. 그때부터 불과 10여분 만에 ‘오직 주 만이’라는 곡이 탄생했다. 
당시 송정미, 김지현과 종종 모여 자신이 창작한 곡을 나누곤 했다. 어느 날 아침, 정미에게 전화가 왔다. 시편 62편을 묵상하는데 이 말씀을 세상에 선포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 곡으로 극동방송 복음성가 경연대회에 나가려고 하니 허락해달라는 것이었다. 허락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고, 결국 정미는 본선에 올라 대상과 함께 작곡상까지 받게 되었다. 그 이후 정미는 전국방방곡곡을 다니며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는 믿음의 능력’을 담대히 선포하는 여 전사가 되었다.
2009년 한국 방문 시 만난 송정미 사모가 당시 상황에 대해 처음 말문을 열었다. 복잡한 시국상황을 수년 경험하면서 고민이 많았단다. 그러던 어느 날, 바로 시편 62편이 해답으로 다가왔단다.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는 것이 결코 무능력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은 단지 ‘말 못하는 하나님’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나의 구원 나의 영광’이 내 의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으며, 그래서 현실을 극복하고 치유하는 힘이 나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감사한 것은 말씀 앞에 항복하고 작곡한 ‘오직 주 만이’가 지난 20여 년 동안 예배 현장에서도 변함없이 불리고 있는 예배곡이 되었다는 점이다. 항복은 순종의 최고 단계요, 예배의 심장 heart of worship이다. 자아의 끝에서 하나님이 시작한다. 구세군 창시자인 윌리엄 부스는 말했다. “인간의 가장 위대한 능력은 그의 항복의 크기이다.” 그래서 항복은 예배의 정점이다. 

[이유정] 개독교를 위한 변명

브라질에서 음악으로 복음을 전하는 김민주 선교사가 최근 내 페이스북(facebook.com/moreahead) 남긴 글을 소개한다.

“한국에 사역 갔을 때 느꼈던 것 가운데 하나는, 교회가 비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존중과 섬김, 그들의 얘기를 듣기를 거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교회 안에 그들이 앉을만한 의자는 없었습니다. ‘그들만의 리그’에 열심인 한국 교회. ‘우리 안에 들어오고 싶어? 그러면 우리가 주는 옷을 입고, 우리가 하는 말을 하고, 우리가 좋아하는 행동을 하면서 들어와’ 이런 식이었습니다. 저는 한국 교회가 정말 전도를 하고 싶은 건지, 아니면 자신들의 “문화(복음이 아닌)”를 지키려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전도는 강조하지만 실재로 비교인들이 앉을만한 의자를 마련하지 않는 자만… 부끄럽지만 이것이 오늘 한국교회의 실체가 아닐까? 불과 90년 전 한국 사회는 인구의 5%도 안 되는 기독교인들이 존경받는 리더십의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기독교인구 25%가 넘는 사회에서 오히려 그 리더십이 땅에 떨어졌다. 기독교도서 베스트셀러는 당연히 크리스천들끼리만 이해하고, 크리스천 저자들도 천만 크리스천을 타깃으로 책을 쓰는 것이 당연한 문화이다.

우리끼리 만든 게토 속에서 영적 슈퍼맨을 세워놓고 우리끼리 존경한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도대체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끼리 축적한 재산으로 거대한 교회 건축물들을 구축하고 있다.

건강한 대형교회들을 무조건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중산층이 무너진 한국사회의 기저인 서민들에게 위화감을 주는 종교적인 부, 그 안에서 간간이 세상으로 터져 나오는 결과물들은 세상의 도덕기준보다 못하며, 차마 코를 가까이 할 수 없는 위선의 악취가 진동하는 것이 가슴 아플 뿐이다. 결국 세상은 우리들만의 언어와 우리 끼리만의 은혜로 만들어진 교회라는 도그마를 점점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게 된다.

그래서 오늘의 기독교에 대한 세상의 시선은 예수는 좋지만 교회는 싫어하는 경향이 짙다. 부끄러운 일이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한국교회만의 일이 아니다. 가장 최근 종교기관의 여론조사에서 미국 성인의 3분의 2가 교회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이 매우 ‘부정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 조사에 따르면, 교회에 가지 않는 미국 성인들의 72%가 “하나님은 실제로 존재한다”고 답변한 반면, “교회는 위선자들로 가득 차 있다”고 답했다.

이것은 기독교의 참 모습이 결코 아니다. 그저 일그러진 교회의 일면일 뿐이다. 크리스천의 한 사람으로 부끄럽고, 창피스럽다. 하지만 현실을 인정하고 정직하게 직면하려고 한다. 왜 기독교가 이렇게까지 되었는가? 교회가 세상과 담을 쌓고 ‘이곳이 좋사오니’(누가복음 9:33) 의식 속에 게토 화 되었다. 기독교의 본질인 희생적인 사랑이 그 게토 안에 갇혀 썩어 문드러져 고름이 흐르고 있다. 교회의 대형화가 트렌드가 되면서 한 사람의 진정한 그리스도인을 배출하기보다 처치고어(church goer)만 양산하고 있다.

《개독교를 위한 변명》이란 책을 쓴 숭실대 기독교학과 동문들은 말한다. “한국교회는 세상의 말에 귀를 잘 기울이지 않습니다. 교단끼리도 서로 귀를 막고 삽니다. 그러면서 겉으로는 사랑을 외치는 기독교인들의 이중적인 모습을 꼬집기 위해 개독교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봅니다. 개독교를 열린 개(開)독교로 만드는 것이 우리의 바람입니다.”

오늘 한국의 수많은 석학들도 감히 다루지 못하는 교회의 치부에 대해 저 변방의 이름 없는 젊은이들이 솔직한 고백을 토해냈다. 세속화, 대형화, 물량주의, 권력욕, 파벌, 고속성장, 성 스캔들의 유혹에 무릎 꿇은 한국교회는 다음세대의 주역인 이 젊은이들의 정직한 절규에 귀 기울여야 한다. 진정한 개(開)독교가 되기 위해 자성하고 사회의 질타소리를 겸허하게 들어야 한다.

무릎 꿇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기도운동을 시작하자. 다시 한 번 하나님께 돌아가는 회개운동을 시작하자. 무너진 교회성벽을 다시 일으키는 재건운동을 시작하자. 훼파된 예배를 살리는 예배회복운동을 일으키자. 한국교계는 물론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의 십자가 정신으로 희생하고, 용서하고, 사랑하고, 섬기는 진정한 부흥운동을 시작할 때이다.

이유정(한빛지구촌교회 예배목사)


[이유정] 성공의 복음, 그 득과 실

아내가 디렉터로 있는 어린이 청소년 미니스트리인 갓스이미지 디렉터들의 연례모임 참석차 LA를 방문했다. 마침 시간이 되어 주일오전에 가든 글로브에 위치한 수정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TV설교가 로버트 슐러 목사로 유명한 교회이다.
 
주차장이 만차일 것을 예상하고 15분 전에 도착했는데 예상외로 너무 한산했다. 드라이브인 예배를 드리는 자동차로 가득했어야 할 곳이다. 예배 시작 10분전 본당의 텅 빈 모습을 보면서 또 한 번 가슴을 쓸어내렸다. 주일 2회의 예배 때마다 4천 석을 가득 메웠던 곳인데 예배 시작 후에도 곳곳이 텅 비어 있다.
 
자리에 앉아 예배실을 둘러보았다. 20세기 대표적인 현대 건축가 중 한사람인 필립 존슨의 작품답게 건물 전체가 하나의 예술품이었다. 벽과 천장을 구성하는 만장이 넘는 은빛유리, 입체 트러스트로 연결된 가로 125m, 세로 62.5m, 높이 39m의 거대한 본당 공간, 전동장치로 외부공기를 유입하고 더운 내부공기를 외부로 내보내는 자연 환기방식, 4천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최신 좌석, 설교단 뒤에 있는 27미터짜리 거대한 전동 유리문, 12사도들을 상징하는 중앙 통로의 12분수, 2만여 개의 관으로 연결된 세계 최대 규모의 파이프 오르간 등이 그 자태를 뽐냈다. 하지만 그 첨단의 위용도 이날은 왠지 외소해보였다.
 

로버트 슐러는 꿈의 사람이었다. 1955년 개척할 당시 그의 손에는 500불이 전 재산이었다. 그러나 그는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는 위대한 교회를 세우는 원대한 비전이 있었고, 그 꿈은 이루어졌다. 그의 “아워 오브 파워” 방송은 매주 전 세계 수백만 명이 시청했다. 그는 수정교회 사역을 천국을 맛보게 하는 관광지라고 강조한다. 마침 인근 5분 거리에 있는 디즈니랜드 덕에 수많은 방문객들이 찾는 관광명소가 되었다.
 
그는 ‘적극적 사고방식’, ‘성공의 복음’을 강조하고, 드라이브인 예배를 처음 도입했으며, 교회를 기업, 전도와 선교를 판매, 불신자를 고객으로 비유하는 등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목회스타일로 세계적인 메가처치를 이룩한 첫 번째 목회자이다. 최근에는 타임지의 언급처럼 그의 80년대 ‘번영의 신학’이 또 다시 부활했고, 부활 정도가 아니라 붐을 이루고 있다.
 
세간의 기준으로 성공한 이 교회가 요즘 헌금, 기부금, 교인수가 줄어 극심한 재정난을 겪고 있다. 20에이커 규모의 수양관 폐쇄와 50명 직원해고, 유명한 뮤지컬 행사인 ‘글로리 오브 이스터’ 공연에 이어 ‘글로리 오브 크리스마스’ 공연마저 취소되었고, 부동산 매각 등으로 긴축 정책을 단행하고 있다. 위기의 직접적인 원인은 리더십 교체의 실패에 있지만 필자는 보다 근본적 이유를 번영신학의 한계와 예배신학의 부재로 본다. 그의 성공의 복음은 수많은 사람에게 예수를 소개했지만 다른 한 편 교회의 세속화를 가져왔다.
 
하지만 비난만 할 일이 아니다. 하나님은 특정 시대에 특정한 지도자를 일으키신다. 로버트 슐러가 목회를 시작할 당시 미국은 대공황으로 입은 경제적, 정신적 타격에서 막 일어나고 있을 시점이었다. 그때 미국인들에겐 하나님 안에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필요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로버트 슐러 목사를 사용하신 것이다. 물론 그를 비난하는 많은 입장이 있다. 인정도 한다.
 
그런데 지상에 완벽한 지도자는 없다. 흠 잡으려면 걸리지 않을 사람이 없다. 하나님은 그런 연약한 사람을 품으시고 그를 사용하셨고 앞으로도 사용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또 그분의 거룩한 일을 위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선행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과 은혜로 된 것입니다.” (딤후 1:9) (현대인의성경)
 
세례요한처럼 이제 그의 역할은 지나가고 있다. 그것을 실패로 봐선 안 된다. 그 사역의 장단을 분별하여 다음 세대가 더 온전한 사역을 하기 위한 토대로 삼을 일이다. 한 예로 슐러의 비신자를 향한 열정에 직접 영향 받은 목회자가 빌 하이벨스이다. 그가 시작한 윌로우크릭교회의 구도자예배를 통해 새로운 패러다임의 교회가 탄생했고 그 결과 전 세계 수십, 수백만 명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
 
벌써 83세의 고령인 슐러 목사, 625전쟁 때부터 시작된 한국과의 인연으로 미국 다음으로 한국을 사랑한다는 그가 얼마 전 한국을 방문해서 메시지를 전했다. “왜 교회는 절대로 죽을 수 없습니까? 예수님이 교회가 영원할 것이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피 쏟듯 토해낸 메시지가 가슴에 남는다. 슐러는 은퇴해도, 수정교회는 기울어도 하나님의 교회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하나님은 다음 시대에 필요한 또 다른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실 것이다.
 
– 이유정(한빛지구촌교회 예배목사)

[이유정] 아버지 사랑합니다

한국행 LA 공항에서 눈을 감으셨다는 전화를 받는 순간 가슴이 무너졌다. 유학 2,3년만 하고 돌아오겠다고 떠난 미국생활이 11년 흐르는 동안 어머니와 아버지를 모두 하늘나라로 보낼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돌아가시기 전에 꼭 해드리고 싶은 것이 있었다. 평생 한 번도 해드리지 못한 말, “아버지, 사랑합니다.” 그러나 결국 이 말은 내 가슴속 한켠에 외롭게 남게 되었다.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 19:29)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자신의 필요에 의해 마음대로 사역지를 옮길 수 없는 목회자 인생… 그래도 집이나 전토를 버리는 것은 견딜 만하다. 하지만 육신의 정을 포기하는 것처럼 힘든 것이 없음을 뼈저리게 느낀다. 어머니 돌아가실 때 못 지켰던 임종을 아버지에게는 꼭 지켜드리고 싶었는데 말이다. 그나마 이 두 손으로 입관, 하관해드려서 다행이다.

산소호흡기를 착용하시고 코에 관을 삽입하여 위까지 음식과 약을 투여하는 그 고통스러운 시간 동안 옆에서 손 한 번 못 잡아드린 생각만 하면 눈물이 흐른다. 지난 목요일 저녁, 아버지와 통화한 기억이 생생하다. 혀가 풀려 정확한 발음을 못하셨지만 의식만은 또렷하셨다. 5분 정도 이런 저런 말씀을 하시다가 갑자기 아무 소리가 안 들렸다. 매제가 ‘너무 힘들어 쉬고 싶다’고 말씀하셨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기도할 테니 아버지가 기도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때 부활의 예수님,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께 할 수만 있거든 생명을 연장해달라는 기도가 흘러나왔다. 기도 한 문장 한 문장마다 수화기 저편에서 “아멘~아멘~”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들을 보고 싶어서 그렇게 찾으셨기에 그 아멘 소리가 더욱 간절하셨나보다.

그토록 복음을 거부하시던 아버지, 60이 훌쩍 넘으셔서 신앙을 회복하시고, 어머니와 매일 가정 예배를 드리시며 기뻐하시던 아버지, 이제 병상에서 피골이 상접한 몸으로 힘을 다해 ‘아멘’ 하시는 그 소리가 내 마음을 울렸다. 아버지께 격려해드렸다. “아버지 마음 약해지시면 안 돼요. 아들이 갈 때까지 힘내세요!” 그러나 결국 아버지는 먼저 하나님 품으로 가셨다. 가시기 전에 “유정이 오면 당직 서면 되겠네” 우스갯소리로 하신 말씀을 따라 밤새도록 빈소 옆에서 아버지의 천국 길을 지켜드렸다.


장례식장을 찾아오신 지인들 가운데 조용히 다가오셔서 “아버지가 아들 보고 싶다고 여러 차례 말씀 하셨다.” “엄마가 유정이 가족 보고 싶다며 눈물을 자주 흘렸어.” 하는 말씀을 전해줄 때 가슴이 메었다. 영주권 수속으로 7년 간 묶였던 발이 3년 전에 풀려 매년 1회 한국 땅을 방문했다. 2주 동안 3~4일을 아버지와 한 집에서 지냈다. 그러나 집회와 개인 약속들 때문에 잠깐 씩 대화 나누는 정도였다. 그나마 올 초에 3일 동안 아버지와 함께 자면서 많은 이야기 한 것이 마지막 대화가 되었다. 살아계실 때 잘해드리라는 선조의 지혜가 뒤 늦게 뼈에 사무친다.

입관할 때 아버지의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얼굴을 만져보았다. 수의에 싸여있는 수척한 몸을 두 손으로 안아드리며 얼굴을 가슴에 대었다. 살아계실 때 한 번도 안아드리지 못했는데 가시고 나서야 안아드리는 내 마음이 회한의 눈물로 소용돌이 쳤다. 비록 가난하셨지만 평생 사람과 독서를 좋아하셨고, 관대하지만 최선을 추구하는 성격, 뒤 늦게 어머니와 든든한 신앙의 동지가 되어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하시던 모습 등은 내 인생에 돈보다 중요한 커다란 발자국으로 남아 있다. 자녀, 친지, 지우들은 헤어지는 슬픔으로 가슴 아프지만 뒤 늦게 그토록 챙기시던 먼저가신 어머니 곁으로 가셨으니, 지금 이 순간 천국에서 더 기쁘고 더 행복한 마음으로 자녀들을 바라보고 계실 아버지의 모습에 마음이 따스해진다. 뒤 늦게야 가슴으로 깨닫는다. ‘진정한 사랑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임을…

– 이유정(한빛지구촌교회 예배목사)

[이유정] 칙필레 신화의 비밀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요 일곱째 날은 쉴 안식일이니 성회라 너희는 무슨 일이든지 하지 말라.
  이는 너희 거하는 각처에서 지킬 여호와의 안식일이니라.” (레위기 23:3 )
 
얼마 전 미 동남부 최고 일간지 AJC가 조지아주의 대표적인 체인레스토랑 칙필레(Chic-Fil-A)의 창업주인 트루엣 캐시 명예회장을 인터뷰했다. 캐시 회장은 창업 이후 지난 16년 동안 해마다 두 자리 수 매출 신장을 이끈 장본인이다. 칙필레는 현재 전국 1400개 매장을 보유한 동종업계 전국 2위의 레스토랑이다.
 
이 인터뷰에서 필자의 가슴을 뛰게 한 것은 칙필레 경영인으로서 가장 뿌듯한 것이 무엇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캐시 회장이 답변한 내용이다. 그는 서슴없이 “주일에 쉬기로 한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아흔을 바라보는 캐시는 지난 51년 동안 쉬는 주일마다 주일학교 교사로서 13세 소년들에게 성경을 가르쳐 왔다.

통상 패스트 푸드점 업계에서 일요일 매출은 전체 매출의 최소 20% 이상을 차지한다. 그러나 캐시는 하나님을 위해 그 20%를 포기했다. 캐시 회장은 1주일에 하루는 성경의 원리대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쉬는 날이므로, 칙필레의 전국 모든 매장은 주일마다 직원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도록 문을 닫는다고 했다.

그것은 탁월한 결정이었다. 경제 논리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외식업계에서는 일명 ‘칙필레 신화’라는 용어까지 생겨날 정도로 경이적인 매출 신장을 해마다 이어 나갔다. 이것이 하나님의 시간법칙이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신 분이다. 그분은 양적 시간보다 질적 시간을 중요하게 여기신다. 하나님의 시간 법칙은 인간의 법칙과 달라서 물리적 1시간이 하나님께는 1초도, 1000시간도 될 수 있다. 주일은 일주일의 7분의 1이 아니다. 그 하루가 한 달 휴가로도 회복되지 않는 몸과 마음의 안식을 준다. 예배 한 시간은 24분의 1이 아니다. 그 한 시간이 이십 년 학교교육으로도 줄 수 없는 신적 가치관과 지혜를 깨우치게 한다.


일주일의 하루를 온전히 쉬는 것은 창조의 질서이다.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요 일곱째 날은 쉴 안식일이니 성회라 너희는 무슨 일이든지 하지 말라 이는 너희 거하는 각처에서 지킬 여호와의 안식일이니라” (레위기 23:3 )

한국교회는 그 어느 나라보다 주일성수의 전통이 강하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교회를 중심으로 살았다. 그러나 이 전통이 사라지고 있다. 요즘 한국교회 중고등부 담당 교역자들이 울상이다. 청소년들이 공부 때문에 시간이 아까워서 교회에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 슬픈 사실은 신앙 있는 부모들이 주일에 자녀들이 교회에 오래 있는 것을 못마땅해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학생들이 이른 아침 예배 마치고 학원으로 과외로 도서관으로 직행한다. 공부하는 시간 외에 남는 자투리 시간을 하나님께 드린다. 청소년들을 잡으려고 튀는 프로그램, 청소년의 눈을 사로잡는 예배에 목숨 걸고 투자하지 않으면 중고등부 사역자체가 불가능하다.

한국교회가 왜 이렇게 변질되었는가? 복음을 위해, 선교를 위해, 교회 봉사를 위해, 그 무엇보다 예배를 위해 시간을 내는 일을 아까워하는 것은 하나님을 그만큼 싸구려 취급하는 것 아닌가! 우리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쓰다 남은 싸구려 빗자루 정도로 물려준다면 한국교회의 미래는 재앙으로 돌아올 것이 불 보듯 뻔하다.

한국교회를 향해 비장한 마음으로 제안한다. 우리 부모 세대가 솔선수범해서 다음 세대 자녀들에게 일주일의 하루를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는 신앙습관을 물려주자. 안식일 엄수주의로 귀화하자는 것도 아니요, 율법주의적 의식으로 돌아가자는 것도 아니다. 주일의 본질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창조질서를 회복하자는 것이다. 하나님의 시간을 하나님께 돌려드리자는 운동이다. 이것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한국교회의 존폐가 달린 필사적인 과제이다.

이유정(한빛지구촌교회 예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