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STA 2018] 유년, 유치 액티버티 1](http://kostavoice.org/wp-content/uploads/2018/07/DSC_0793-1080x675.jpg)
[KOSTA 2018] 유년, 유치 액티버티 1
유년, 유치부 공연 시간입니다. 1층 체육관에서 선생님 손 잡고 3층 예배실로 올라갑니다.
수십명의 아이들이 모이니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선생님들은 아이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 노래하고 춤추고 … 그 수고하심에 고개가 숙여집니다.
“바람 불어도 괜찮아요, 괜찮아요, 괜찮아요 ..” 아이들이 찬양에 맞추어 공연하는 시간입니다. 너무 귀여워~~.
유년, 유치부 공연 시간입니다. 1층 체육관에서 선생님 손 잡고 3층 예배실로 올라갑니다.
수십명의 아이들이 모이니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선생님들은 아이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 노래하고 춤추고 … 그 수고하심에 고개가 숙여집니다.
“바람 불어도 괜찮아요, 괜찮아요, 괜찮아요 ..” 아이들이 찬양에 맞추어 공연하는 시간입니다. 너무 귀여워~~.
윤희철 목사님, 2016년 유쓰 코스타에서 뵈었는데요, 이번에 시카고에서 뵈니 더욱 반갑습니다.
1. 소개와 미국 코스탄들을 향한 인사를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남가주 선한청지기 교회에서 청년부 사역을 담당하고 있는 윤희철 목사입니다. 코스타를 통해서 각 지역에 흩어져 있는 청년들을 만나고 알아가는 것은 또 다른 감사입니다. 이번에도 더 많은 코스탄들과 사귐이 있는 코스타를 기대합니다.
2. 하시고 계시는 일 또는 사역에 대해서 나누어 주세요.
학부 때에 전기공학을 전공하고, 공대경영에 대한 공부를 하고 싶어서 2000년에 미국에 오게 되었지 만, 미국에서 만난 1.5세 청소년, 청년들을 통해서 목회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빚진 마음으로 청년과 다음 세대를 세워가는 일들을 꿈꾸고 있습니다. 요즘은 지난 10년 동안 콜로라도 덴버에서 청 년들과 함께 하였던 네트웍 사역을 바탕으로 교회와 교회들이 함께 청년 세대를 섬길 수 있도록 협력 하는 청춘 플렛폼을 세우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3. 이번에 코스타에서 맡으신 순서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고, 어떤 기대가 있으신지 나누어 주세 요.
이번에 안상현 목사님과 함께 청년 네트웍에 대한 강의를 섬기게 되었습니다. 작년 코스타 청년 네트 웍 강의를 들을 때에, 목회자들 보다는 소도시에서 목회자도 없이 청년부를 섬겨가는 청년들의 참석이 많은 것을 보고 참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옛날 콜로라도 덴버에서 사역을 했을 때의 기억도 났었고요. 이번 세미나를 통해서, 서로 각 지역의 청년부 이야기를 나눠보고, 각 청년이나 청년부가 가지고 있는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한 대안들을 생각해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콜로라도 덴버에서 시작했던 청년 네트웍 운동인 ARKS 사역의 경험으로 보면, 열악한 청년부 상황 속 에서 외롭게 사역을 감당하여 가는 청년들이 청년 네트웍을 통해서 함께 어려움을 극복하여 보려고 시 도했던 적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사역을 시작하면서 청년들을 통해서 더 많이 배웠고, 함께 성장하여 왔기 때문에 일방적인 강의라기 보다는 서로의 생각은 나누며 함께 배우고, 가르치는 공간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래서, 각자의 이야기들을 소통하고, 어려움은 함께 공감하고, 문제 해결들을 위해서 실제적으로 도울 수 있는 대안들을 생각해 보고, 도움이 될 수 있는 것들은 서로 공유 할 수 있는 청년 네트웍, 저는 그것 을 청춘 플렛폼이라고 하는데요… 이 청년 네트웍을 형성하여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청년들이 혼자 걸어가고 있는 사역이 아니라, 함께 동행하는 청년들이 곳곳에 있다는 것들을 확인하고 서로 네트웍을 형성하는 시간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4. 미국 코스탄들이 ‘Grace? Grace. Grace!’의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격려의 말씀 부탁드립니다.
오늘의 환경들을 보면 은혜를 떠올리기 쉽지 않겠지만, 지난 시간들을 돌아 보면 은혜 아니면 이 곳에 있을 수 없었다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이번 코스타를 통해서 그 은혜를 다시 깨닫고 회복하여서, 내일 이라는 삶의 무대를 향해서 다시 도전해 보고 싶은, 일어섬이 있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자신을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하나님의 그 은혜로 인해서, 그 은혜 안에서 내가 어떤 존재인지 를 발견하는 코스타 2018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감사합니다!!!
책소개 시간입니다. 양혜원 박사님께서 아래의 책들을 추천해주셨습니다.
안지영 목사님이 창세기의 아브라함으로 말씀을 전해주셨습니다. (설교의 일부를 아래에 올립니다.)
흔히 믿음의 조상!하면 아브라함을 많이 떠올립니다. 우리와 달리 매순간 믿음으로 순종한 것 같은 아브라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 속 아브라함은 딱히 신중히 고민한 흔적이 보이지 않고, 사라를 두번이나 넘기는 등 본인의 생각과 방법을 찾으며 실수하고 넘어지는 와중에 얼떨결에 순종해 나아가는 모습입니다. 창세기 20:11-13 여호와가 다른 신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해주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본인의 방법을 강구하는 모습, 창 12:4-5에서 이땅을 네게 주겠다 말씀하신 하나님의 언약에 제사는 드리지만 현실과 타협해 그 땅을 떠나는 모습 등 감히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서 우리와 비슷한 모습들을 많이 찾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어떠한 인간도 영웅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인간의 본성이 원래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어느 누구도 자기가 스스로 튼튼히 서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누구나, 언제든 넘어질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아브라함처럼, 첫 단추를 잘못 끼우고, 찌질한 행동을 우리가 해도 하나님은 우리의 두려움을 비롯한 그 속사정 들을 참 잘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게 자격 없는 우리를 붙들고 그 속사정까지 해결하사 하나님이 하나님되심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속사정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그렇게 다시 실수하고 넘어지는 아브라함에게 “너는 나의 선지자”라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 알지 못했기에 사라를 두 번 이나 파는 같은 실수를 저질렀던 것입니다. 이런 그에게 “너는 나의 입이라” 말씀하시며 그 속사정을 다 아시고 그에 맞게 고쳐주시되 더 단단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이심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곧 우리의 하나님이요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는지를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오해할 때가 많습니다. 그 은혜를 오해해버릴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처럼 자비 없으시고 소심하시고 그렇게 빡빡한, 우리의 생각대로 제한되신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속 사정을 다 아시고 우리가 온전할 수 없는 존재임을 이미 알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셨나 생각해 봅니다. 창세기 12:1-3 그것은 바로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의 복의 근원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큰 민족을 세상에서 말하는 강한 민족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큰 민족, 즉 복의 근원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이 살아가는 과정을 보면 얼떨결에 움직이며 실수하고 넘어지나 하나님이 개입하심이 장막 밖의 사람들에게 명확히 보이는 삶입니다. 아브라함의 삶을 통해 그 삶을 보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서툴고 넘어지지만 치열하게 하나님을 향해 가는 그 과정에서도 하나님은 드러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알게되면 주변이 보이고 자연스레 선교적 삶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나”같은 사람도 “그리스도 인”입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재고 따지는 이기적인 존재이지만 이런 밑바닥을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나 같은 사람도 하나님이 붙들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은혜가 아니라면 우리는 여기 서있을 수 없습니다. 어느 자리에서 살아가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가는 과정, 그 일상속에 있습니다. 결국 모든 삶은 하나님 안에서 나는 과연 누구인지 알아가는 유학의 과정인 것입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할까요? 오늘 날 흔히들 착각하는 것은 좋은 커리큘럼의 교회가 영적인 엘리트는 만들 것이다 생각하는 것입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만든 좋은 프로그램은 영적인 성장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주변의 작은 교회를 눈을 돌려야 합니다. 그 작은 교회에 함께 어우러져 섬기는 것, 필요한 곳에 찾아가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첫 선교지입니다.
이후 금식 기도회가 이어졌습니다.
새벽 조장, 멘토 모임 및 기도시간입니다.
자 LGS 하러 가자!
LGS 마지막 시간입니다. 예년의 경우 목요일 오전시간에 출석율이 뚝 떨어지는 것이 보편적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이번에는 각 그룹마다 출석율에 거의 변동이 없다고 합니다. ‘은혜’를 받았나 봅니다.
조원들의 표정이 자연스럽고 밝습니다. 이제 내일이면 서로 헤어져야 할텐데, 섭섭해서 어떻게 하지요?
유쓰 아이들의 예배 드리는 모습입니다. 메세지가 힘이 있고, 조는 아이들도 없습니다.
여러 아이들이 설교를 노트에 적고 있습니다. 빡빡하게 적은 메모 속에 담긴 아이들의 순수함과 하나님을 향한 열심을 볼 수 있습니다.
뒷좌석에 앉아있는 선생님들도 메세지를 전심으로 귀기울이고 노트하고 있습니다.
기혼조 모임입니다. 분위기가 사뭇 진지합니다. 아이들이 어리면 조별 모임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힘든 가운데서도 아이들과 함께 조별 모임을 하시는 가족들, 홧팅!!
싱글조를 돌며 탐방을 했습니다. 어느 조에서는 간식을 나누어 주시려 하고, 어떤 조는 즐거이 최선의 모습으로 사진에 임해 주셨습니다. 중간중간 멘토님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젊음이 넘처납니다.
한편 강사 라운지에서는 강사님들께서 조별모임(?)을 하고 계십니다. 조 뿐 아니라 강사님들의 교제가 뜨겁고 즐겁습니다.
윤교수님께서는 12년동안 직접 그곳에서 살면서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셨습니다. “은혜란 버티는 것입니다. 정말 포기하고 싶을 때는 환경이 안 좋을 떄가 아니라, 하고있는 일에 열매가 보이지 않을 때입니다.” 12년을 버티면서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에 눈시울을 적시는 시간이었습니다.
찬양이 뜨겁습니다.
화종부 목사님께서 누가복음 10:25-37 말씀을 가지고 “은혜의 혁명, 희생하며 사랑하기”라는 제목으로 설교해 주셨습니다. 설교 일부를 아래에 올립니다.
어제 우리는 은혜의 새로운 질서에 대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은혜받은 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단순히 겸손하게 살고 낮아지며 훗날의 영광을 기대하는 것은 세상의 질서를 따른 삶일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그저 그 예수의 흔적을 가지고 사는 것. 그것이 전부입니다.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하고 잊으라는 뜻입니다. 오직 그분만 아시면 되기에 우리가 한 것을 기억할 필요는 없습니다.
은혜의 질서를 살아내는 다양한 방법 중 대표적인 하나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은혜 안에서, 주인의 큰 희생으로 인한 사랑을 바라보기에 자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많이 희생하사, 은혜의 새로운 질서를 우리에게 허락하심 그 속에 진짜 사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단순히 감정적 느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구주는 사랑은 ‘여기있다’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은, 어떤 공로나 자격에 의한 조건적인 것이 아닌, 나의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시는 참 사랑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랑을 하는 삶이 은혜 안에서 사는 대표적인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바라보며 배우지 않고서는 사랑할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말씀에서 율법교사는 두가지의 질문을 합니다. 그의 어떻게 영생을 얻느냐는 첫번째 질문에 예수님은 ‘사랑하라’고 대답하십니다. 여기서의 사랑은 억지로 하는 행위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 그 사랑을 배워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훈련함을 의미합니다. 이 것은 은혜의 질서를 따르는 중요한 삶의 방식입니다.
율법교사의 그렇다면 “내 이웃”이 누구인가 하는 질문에 예수님은 예화 하나를 들어주십니다. 이 예화에는 훌륭한 종교인 두사람과 평신도 한 명이 등장하는데 평신도는 유대인이 아닌, 철천지 원수 격인 사마리아 인이 등장합니다. 이 세명의 공통행동은 강도당한 자를 일단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뒤 그냥 피하여 지나간 종교인 둘과는 달리, 평신도 사마리아인은 다른 행동을 보여줍니다. 보고, 불쌍히 여겨-가까이 가서-응급처치를 한 후-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가- 넘치는 공급과 긍휼을 베풀어 주게 됩니다. 이 비유 후에 예수님은 하고 싶었던 말을 꺼내십니다.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인가”
여기서 우리는 두 질문의 차이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율법 교사의 관심은 “나의 이웃”이 누구인가 라는 내가 사랑”하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면,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인가 하는 예수님의 타인 중심적 질문은 이웃의 초점은 “나”에 있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내가” 사랑해야하는 “내 이웃” 그전에, 자기중심성을 깨뜨리고 타인 중심, 그렇게 다른 사람이 내 삶에 들어오는 것이 사랑의 첫 걸음입니다. 여기서 죄인의 가장 큰 본성인 자기중심성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깊게 뿌리내린 인간의 본성입니다. 이 율법교사의 모습은 결국 우리의 모습과 같습니다. 죄인인 우리에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끊임없는 나의 자기중심성과 이기적인 본성을 마주하는 것임을 의미합니다. 그 자기중심성이 깨뜨려지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진짜 사랑이 가능해집니다. 결국 누군가를 사랑하는 과정은 나의 한계, 밑바닥을 보는 과정. 즉, 똘똘 뭉쳐있는 나의 죄성과 마주함에서 사랑을 배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스스로는 사랑할 수 없는 나의 자기중심성을 내가 먼저 마주해야 합니다.
다음, 사마리아인이 등장한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웃의 범위를 제한하고 있는 율법교사의 오류를 정확히 알고 계셨습니다. 이웃에 경계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지성소를 무너뜨리 실 때, 인간을 구별 짓던 모든 장벽이 무너졌습니다. 이웃에 경계의 짓는 모습은 우리에게도 많이 보입니다. 좀 눈에 튀는 특이한 사람들이야 말로 가장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선을 긋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대상을 가리면 은혜가 열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먼저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가서 행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사랑은 세상이 말하듯 좋은 핑크빛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오히려 많은 대가와 자기부정, 자기를 깨뜨리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 속 제사장처럼, 레위사람처럼 많은 사랑의 대상들에게서 피해가며 나의 자아를 깨뜨리지 않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은혜를 받은 것 같긴 하지만 그 은혜의 바다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나의 본성에 위배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 나의 그 담벼락을 무너뜨려 보면 하나님은 더 가까이에서 자격없는 나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보이기 시작합니다. 오늘날 영생의 치명적 약점은 얕게 믿으며, 남이야 어떻든 나는 좋고 쉬운 길, 편한 길로 가고싶어 하는 것, 예수가 가장 수고함으로 우리를 살리신 것을 잊어감에 있습니다. 우리에겐 가장 많이 손해보신 우리 구주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 하나님 나라 은혜의 질서를 따라 나를 깨뜨려 은혜에 바다에 들어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신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로 하님께, 찬양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시간입니다.
간사 기도모임입니다.
유쓰 KOSTA 사역자, 선생님들을 위해 뜨겁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강사님, 찬양팀, 기도가 필요하신 분들을 위해 기도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