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STAN이 본 ‘The Passion of the Christ’ – 2

이코스타 2004년 4월호

영화를 본 후 자꾸 생각이 났던 말씀들이 있어서 잠깐 나눕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보고 놀랄 것이다. 이것은 그의 모습이 너무 상하여 사람같지 않기 때문이다 (사 52:14, 현대인의 성경)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 (개역한글)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시22:6)


심해지는 채찍질과 십자가의 못 박히시는 장면들은 눈뜨고 보지 못했고 (그것을 눈뜨고 보지도 못하겠고 마음 깊숙이 받아들이기도 힘이 들어서 내 안에 싸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말씀 그대로 정말 사람의 모양을 찾아볼 수 없는 모습으로… 벌레의 모습으로… 도수장에 끌려가시는 잠잠한 어린양의 모습으로… 나를 놀라게 하셨습니다. 그 모습으로 예수님께서 나를 보고 계셨습니다.


(DC에서 K 자매)



저는 감정이 팍팍한 사람이라서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서 늘 회의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C.S. Lewis가 예로 든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이고 죽어서 부활할 것을 확실히 알고 있는 사람이 당하는 고난이 뭐 그리 대단하냐고 회의하는 마음이 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고서 예수님의 고난이 장난이 아니었구나 하는 것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리얼하게 느껴지던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고 나니 -아리러니컬하게도 – 오히려 안도의 한숨이 나왔습니다.


사실 십자가는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잔인한 고통을 주는 형벌이라는 식으로 십자가의 고통을 극대화 시키는 말들을 우리가 많이 들어 왔습니다. 저는 아직도 그 말에 찬성하지는 않지만, 이 영화를 보고서 굳이 십자가가 가장 지독한 형벌이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은 우리의 육체가 감당하기 불가능할 정도의 지독한 고통이 있었다는 (가장 지독하고 아니고는 관계없이) 것으로 인해 그 구체성과 상징성이 다 만족되는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십자가의 고통이 제게 크게 다가와서 저를 심각하게 만들었던 이유는, 예수님께서 그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려고 단호히 기도 하고 끝까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언덕으로 가시려고 하는 장면들이었습니다. 글쎄요, 며칠 갈 지 모르겠지만, 고난받으시려고 기도하고 결심하고 (맨 첫장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끝까지 그 길을 나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계속 생각납니다. 피할 수 있는 많은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고통을 정면에서 받으시니까 더욱 그분의 고난이 증폭되어 다가 왔었고, 이제 제 마음을 심각하게 돌아보게 만듭니다.


빌라도가 기회를 줄 때에, 차라리 대답을 잘 해서 그냥 풀려나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였는데, 베드로가 똑 같은 제안을 했다가 “사단”이라는 꾸중까지 듣는 것이나 영화 속의 사단의 생각이나 다 한가지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동정이 아니라 사실은 저 자신에 대한 동정이요 두려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마리아의 엄연한 태도가 부각됩니다. 그녀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그 사랑으로 인해 예수님이 받는 고통이 그대로 그녀에게 느껴지는 장면들, 그러면서도 예수님의 사명에 대한 인식의 확고함 (믿음)이 그려졌습니다.


(Seattle의 K형제)


작년 초에 멜깁슨이 예수님에 대한 영화를 만든다는 기사를 잡지에서 읽으면서 흥분했었습니다. 헐리우드에서 영향력있는 영화배우 중 하나인 멜깁슨이 크리스찬이라는 것도 놀랍고 기뻤고, 그가 자비를 들여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관한 영화를 만든다는 것도 참 고무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영화가 개봉되면 꼭 성경공부 지체들과 함께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예정일보다 조금 늦게 그러나 때 맞춰서 “The Passion of the Christ”가 개봉되었다는 광고를 보았습니다. “때 맞춰”라고 생각한 이유는 마침 성경공부에서 요한복음을 공부하고 있을 때였기 때문입니다. 바울 서신을 볼 때와는 달리 요한복음을 공부하면서는 지체들이 본문을 많이 어려워했고 특히 예수님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하는 걸 느끼고 있었기에 이 영화가 본문이해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관람에 대해 광고를 하고 함께 볼 날짜를 정한 후에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려져있는지 보지 않았기에, 지체 중에 혹 믿음이 약한 이들이 보다가 감당 못하고 시험에 들게 되진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고, 멜깁슨이 어느 정도로 자세하게 묘사했는지 모르기에 혹 왜곡된 장면이 있을까 염려가 되었습니다. 또한 함께 보는 지체들이 이 영화를 통해 예수님의 고난을 깊이 느껴보고, 지금 공부하고 있는 요한복음을 잘 이해하게 되었으면 하는 욕심도 생겼습니다. 


성경공부 지체들도 지대한 관심을 보이며 영화를 보기 전에 뭔가 준비를 하고 싶어했습니다. 어느 자매는 마태복음을 읽으며 제게 영화를 보기 전에 성경 어디를 봐야 도움이 되냐고 묻기도 했습니다. 지체들의 관심과 그 관심을 행동으로 옮기는 모습에 감동하며 성경공부 사상 처음으로 터프하게 숙제를 냈습니다. “영화보기 전에 요한 복음 읽어오기.”


영화를 보는 날 저녁 캠퍼스에 모여 출발하기 전에 기도를 했습니다. 여느 때 친구들과 영화보러 갈 때와는 사뭇 다른 마음과 자세로 가는 길 내내, 또 극장에 들어가면서도 지체들을 보며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극장에 들어가면서 한 자매가 “난 영화보러 극장에 가면 항상 자거든. 그래서 친구들이 나랑 영화보러 가는 거 싫어했어” 라고 하는 겁니다. 속으로 가슴이 철렁해서 그 자매가 졸지 않기를 또 기도했습니다^^


드디어 영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듣던데로 잔인하고 피흘리는 장면이 많이 나왔습니다. 개인적으로 잔인하고 무서운 장면을 볼 때는 눈을 질끈 감거나 소리가 안들리게 귀를 막으면서 보던 제가 그 날 만은 두 눈 똑똑히 뜨고, “잔인하다, 징그럽다”는 생각 한번 안하고 조용히 눈물만 흘리며 보았습니다. 그 분이 맞으시는 채찍, 바닥에 낭자하던 피, 지고 가시는 크고 무겁게 보이던 십자가, 그 분의 손과 발에 대고 무섭게 때리던 망치소리… 그 모두가 제게 외치고 있었디 때문입니다. “나는 너를 사랑하노라.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영화가 끝나고 나오는데 옆에서 보던 예의 그 잘 잔다던 자매의 눈이 퉁퉁 부어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자매 옆에 앉았던 지체들이 나오면서 하는 말이 그 자매가 영화 시작하면서 부터 끝날 때 까지 어찌나 엉엉 울며 통곡을 하던지 시끄러워서 영화를 못봤다고 했습니다.


영화의 무거움에 마음이 부담이 된다는 지체들에게 미안했지만 그래도 영화본 걸 나누러 캠퍼스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이대로 헤어지는 것 보단 나누면서 서로 느낀 것들을 정리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몸이 아파서 함께 영화보러 가지 못한 어느 자매가 사랑으로 준비해준 스파게티를 먹고나서 돌아가면서 느낀 것들을 나누었습니다. 저는 지체들이 어떻게 봤는지 너무 궁금했습니다.


부모님이 아직 안 믿으셔서 전도에 관심이 많은 한 자매는 “전도용으론 안 좋은 영화같아. 좀 더 구체적으로 예수님이 어떤 일들을 하셨는지 다루었으면 좋았을 텐데… 너무 고난에만 촛점을 둔 것 같아” 라고 했습니다. 다른 한 자매는 “영화보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어요. 예수님이 정말 저렇게 까지 잔인하게 고난당하신 줄 몰랐어요” 라면서 예수님의 사랑이 조금 느껴졌다고 했습니다.


또 한 형제는 “인간이 저렇게 까지 잔인할 수 있다는 걸 느꼈고,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생각했다고 했습니다. 지체들의 나눔을 들으며 감사했습니다.


“한 편의 영화가 얼마나 많이 얼마나 깊이 그리스도의 우리를 향한 사랑을 표현하고 느끼게 할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한 적도 있지만, 지체들의 나눔을 들으며 그 한 편의 영화를 통해 조금이나마 그 분의 사랑을 느끼게 되고, 그 분의 고난을 묵상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The Passion of the Christ”는 성공한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영화를 본 다음 주에 요한복음 19장을 공부하면서 지체들이 이제는 영화를 보고 나니까 장면이 상상이 되고 이해가 된다며 풍성히 나누는 걸 보면서 또 한 번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그 영화의 장면들이 지체들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아서 세상살이 하다 믿음이 약해지고 시험에 들려고 할 때, 그 장면들을 떠올리며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 때문에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되길 소원하며 기도해 보았습니다.


(NY에서 K 자매)


[정진호] 제 7 떡 – 천국투자(2) – 가난의 복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태복음 5장 3절)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누가복음 6장 20절)
(Blessed are you poor, for yours is the kingdom of God)

(1)



평양과기대 프로젝트는 통일시대를 준비하는 민족회복 운동이다. 깊은 수렁에 빠져있는 북한 사람들에게 스스로 일어서기 위한 자생력을 주기 위함이요, 장차 한 민족으로서 우리와 함께 일할 동북아 시대의 인재를 키우는 대학을 짓자는 것이다.



평양과기대를 위한 모금 운동을 벌이려고 세계 여러 곳을 방문하며 물질 후원을 호소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돈에 대한 관심이 점점 생기게 되었다. 돈버는 일과 무관하게 지난 10년을 살아오던 사람이 갑자기 어떻게 돈을 모아야할 지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된 것이다. 북한의 굶주리는 동족들을 향한 사랑을 호소하는 것이었지만, 내 입장에서 보면 결국은 그동안 돈을 쓰기만 하던 삶에서 돈을 모으는 삶의 방식으로의 일종의 방향 전환(?)을 하게 된 셈이다. 아울러 다른 사람의 호주머니에서 돈을 이끌어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알게 되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예기치 않았던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고 뜻밖의 후원자들을 통해 감격스런 헌금을 받는 일도 생겼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자신의 떡을 지키려는 이기적인 마음들을 녹여서 다른 사람들을 향한 긍휼의 마음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 과정 속에서 돈을 둘러싼 어려운 문제들이 얼마나 산적해 있는지도 조금씩 체감하게 되었다. 한국의 정치경제계에는 어마어마한 천문학적 액수의 정치자금이 불법적으로 오가고 있으면서도, 세상에 산적한 물질적 부가 이렇듯 좋은 일, 의미 있는 일을 하는 데에는 좀처럼 쓰이기가 쉽지 않음도 깨달았다. 다시금 돌이켜 돈의 문제, 물질의 문제, 떡의 문제에 대하여 고민하게 되었다. 돈과 부의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취급해야하는지에 대하여 좀 더 심각하게 생각해보는 계기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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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구원과 개인 구원의 문제는 성경에서 다루는 두 가지 중심축이지만, 각 교단과 신학자들 사이의 끊임없는 논쟁과 시각의 불일치를 낳는 핵심 쟁점이기도 하다.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 회복을 통해 구원을 이루는 영적 복음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한 쪽과, 현실 사회의 왜곡된 정치 경제적 상황으로부터 소외된 민중을 해방시키고자 하는 사회 복음을 더 중시하는 다른 한 쪽이 팽팽히 맞서 있는 것이다. 과연 성경은 서로 섞일 수 없는 복음의 두 가지 다른 요소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일까? 이 두 진영 사이에는 도무지 타협할 수 없는 평행선이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이들 모두 결국은 떡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배고픈 자에게 떡을 주자는 것이다. 가난한 자에게 우리가 가진 우리가 더 받은 물질적 부와 우리가 먼저 받은 영적 풍성함을 나누어주자는 그런 이야기이다. 결국 다 같이 잘 살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행하자는 같은 마음에서 출발한 것이다. 우리를 지으신 아버지께서 우리를 육체와 영혼으로 창조하셨기에 우리에게는 육체의 떡과 영혼의 떡이 함께 필요하다. 우리는 그 어느 하나도 경시하거나 도외시할 수 없다. 우리는 가난한 자들에게 그 두 가지 떡을 함께 주어야만 한다.



지난 18, 19세기 산업혁명을 통해 발명된 수많은 기계들은 사람의 육체노동을 대치하여 생산력을 증대시킴으로써 우리 인간의 먹는 문제, 떡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획기적인 역할을 감당하였다. 그러나 육체노동에서 소외된 인간은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통한 부의 편중화라는 사회 현상 속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되어 더 심각한 경제문제를 양산하게 되었다. 인간이 창출해 내는 부가가치는 육체노동에서 정신노동의 산물로 급격하게 전환되었고, 지난 20세기를 휩쓸었던 전자/반도체 혁명에 의해 인간의 지식과 감성이 상품으로 전환되는 시기가 도래하였다. 지식 사회와 감성 사회를 거치면서 인간의 문화 활동이 삶의 중심부로 옮겨지게 되었다. 먹는 문제 즉, 입의 문제가 해결되고 나니 우리의 눈과 귀가 또 다른 욕구를 발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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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사회가 안고 있는 고민은 더 이상 절대적 빈곤이 아니라 상대적 빈곤의 문제이다. 사회 일각의 부유층은 물질적 부가 넘쳐나서 온갖 사치를 일삼으며 성인병과 비만에 시달리고 있는가 하면, 소외된 빈민 계층에서는 TV 드라마 속의 화려한 장면들을 물끄러미 넘겨다보며 내일의 끼니를 걱정하는 어려움 속에서 더 큰 상대적 박탈감에 허덕이고 있다. 세계화 정보화의 영향으로 지구촌의 소식이 실시간으로 전해지는 세상 속에서 이 문제는 한 국가 내에서 뿐 아니라 국가간에서도 마찬가지로 부각되고 있다. 가난한 나라와 부자 나라 사이의 간격은 날이 갈수록 더 벌어지고 있는데, 부자 나라는 공룡처럼 비대해지며 더욱 자신의 체중 늘이기에 사력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헨리 조지가 예언한 진보사회 속에서의 빈곤 현상이 가일층 두드러지고 있는 것이다.(1)



이는 영적인 부요와 가난의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나라는 복음이 넘쳐나서 식상한 가운데 영적 불감증에 빠져 있는가 하면, 이웃 나라에는 평생 복음을 한번도 듣지 못하고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부의 분배, 즉 떡의 분배는 성경의 최대 관심사다. 구약에서부터 복음서와 서신서에 이르기까지 성경은 항상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아끼지 말도록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타락한 인간 사회에서 발생하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도무지 피면하기 어려운 것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본질적인 인간의 타락상은 어떤 도덕 철학과 정치 제도와 경제 시스템을 동원하여도 만민이 함께 잘 사는 지상 낙원을 건설할 수 없다는 것을 지나 온 역사는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이는 마치 거역할 수 없는 엔트로피의 법칙, 열역학 제 2 법칙처럼 우리를 따라다닌다. 가난한 자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하던 예수의 예언은 적중하였다.(14:7) 가난이라는 질병은 결코 치유될 수 없는 불치병으로 역사를 통해 입증되었으며, 그 가난의 정도는 시대를 따라 더욱 심각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에 따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에게는 떡을 나누는 삶에 대한 강한 도덕적 책임이 부과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실행하기 위하여 크리스천들은 항상 가난한 자에게 눈길을 돌리며 그들에게 떡을 들고 나아가도록 부름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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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복음은 가난한 자들을 위해 선포된다. 예수는 자신이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보내심을 받았음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는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나사렛 성전에서 이사야서 61장의 말씀을 낭독함으로 자신의 사명을 천명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누가복음 418-9)>



복음의 대상인 가난한 자들……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가난이 무엇인지부터 먼저 이해해야 한다.



첫째, 가난은 영적인 궁핍 상태를 나타낸다.



둘째, 가난은 물질적 궁핍 상태를 나타낸다.



성경이 말하는 가난은 영적, 육적 가난을 총칭하고 있다. 예수는 이 총체적 가난을 치유하기 위해 이 땅에 온 것이다. 가난의 문제를 예수가 얼마나 중요시 했는지 하는 점은 그의 공생애 기간 가르침을 집약한 설교로서 잘 알려진 산상수훈의 첫 말씀(누가복음에서는 평지 설교라고 알려진……)이 바로 가난한 자들을 위한 천국 선포였음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예수의 가르침의 제일성(第一聲)이 바로 가난한 자들에 대한 외침이었던 것이다.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이야말로 예수에게는 모든 사역의 초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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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마태복음의 산상설교가 심령이 가난한 자에 대한 선포인데 비해 누가복음의 평지 설교는 보다 직설적으로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던지고 있음을 주시해야 한다. 여기에는 예수의 관심사가 영적, 육적인 가난을 모두 포괄하고 있음이 암시되어 있을 뿐 아니라, 복음의 대상을 어느 한쪽에 지우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세심한 배려가 깔려있다. 실제로 영적 복음만을 중시하는 보수 근본주의자들에게는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이 더 인기가 있고, 사회 복음을 중시하는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에게는 누가복음이 더 인기가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이 주로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을 향한 영적 윤리적 가르침으로 알려진 것에 반하여, 누가복음의 가르침은 배고픈 무리들을 향한 복음이요 사회정의를 일깨우는 직접적인 설교의 성격이 더 강하다.(마태복음에서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3인칭으로 묘사하고 있는 데 비하여, 누가복음에서는 천국이 너희 것임이라고 2인칭으로 묘사하고 있음을 유의해 보라.) 그러나 복음의 총체성은 그 어느 한 쪽도 무시할 수 없도록 우리를 인도한다.



가난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모든 결핍상황을 통칭하는 말이다. 가난이란 하나님께서 창조 시 사람에게 주시기로 작정하셨던 그 아름다운 환경, 보시기에 완전했던 에덴의 풍요에서 벗어난 모든 조건을 지칭한다. 타락의 순간……. 실낙원의 순간, 인간에게 엄습한 전면적(全面的)인 결핍 상태가 곧 가난인 것이다. 모든 부요의 근원이요 원천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그 순간, 우리는 영적 가난, 육체적 가난, 사회적 가난, 환경적/생태적 가난에 직면하고 말았다. 그로 인해 인간의 역사에는 영적, 육적 배고픔과 굶주림으로 인한 죽음의 기나긴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결국은 전 인류가 가난한 자가 되었다. 영적, 육적인 궁핍함 속에서 주린 배를 움켜쥐고 웅크리고 있는 자들……. 그들을 살리기 위해 예수가 왔던 것이다.



예수는 전 인류 앞에 서서 엄숙히 선언한다. 나는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러 왔노라. 가난한 자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자신의 가난함을 인정하고 복음을 받으라. 그리할 때, 너희는 천국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이 놀라운 선언을 하는 것이다. 실제로, 산상수훈의 팔복 중 나머지 칠복은 가난한 자들에게 임할 천국의 복에 대해 부연 설명한 것에 불과하다.



가난의 총체성은 사람들에게 세 가지 국면으로 나타난다.



첫째, 포로된 자



둘째, 눈먼 자



셋째, 눌린 자



이것은 선악과에서 나타난 세 가지 죄악상을 그대로 연상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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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음직 하고> : 우상 숭배와 탐심에 사로잡힌 자들



<보암직 하고> : 명예욕에 눈먼 자들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 권력욕에 억압된 자들




, 돈과 명예와 권력욕에 묶인 노예 상태로 살아가는 가난한 자들에게 참 자유를 선포하고 영적인 눈을 새로 뜨게 하기 위해 예수가 온 것이다. 그때 비로소 천국이 임하게 된다. 구약시대에 천국도래의 표상으로 주어졌던 희년, 은혜의 해처럼……. 모든 억압된 자들과 노예들이 해방되고 빼앗겼던 토지가 다시 원 주인을 찾아 되돌아가는 것, 이 희년이야말로 오직 은혜로 임하는 기쁜 소식이요 가난한 자들에게 임하는 천국이었던 것이다.(2)



이것이 장차 우리가 소유할 종말론적 천국의 작은 모형이었고, 지금도 복음이 임하는 곳마다 벌어지고 있는 현세적 천국이기도 하다.



 


(3)



평양과기대를 위해 뛰어다니던 지난겨울 두 달간, 강남의 한 커피샾에서 코스타 강사로 알게 된 P목사님을 우연히 만났다. 뜻밖의 만남에 서로 반갑게 인사하며 교제하는 가운데 갑자기 주일 말씀 부탁을 받게 되었다. 상가 2층의 자그마한 교회였지만, 성도들이 뜨겁고 목사님과 한 마음이 되어있는 아름다운 교회에서 메시지를 전하니 말씀이 살아 역사함을 느꼈다. 평양과기대를 위해 특별 헌금까지 해 주시는 그 교회 성도님들께 감사한 마음을 남기고 지하철역으로 향하려는데, 어느 아주머니께서 급히 달려오더니 하얀 봉투를 전해주었다. 아마도 예배시간에 돈이 없어서 급히 돈을 구해 오신 모양이었다. 그분이 가시자 옆에 있던 목사님께서 저 여 집사님은 목욕탕에서 때밀이를 하시는 분이예요라고 조용히 일러주셨다. 봉투 안에는 빳빳한 새 돈 60만원이 곱게 들어있었다. 그 돈을 바라보는 내 마음에는 형언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생각이 아픔처럼 밀려들었다. 생활비 전부를 연보궤에 넣었던 과부의 두 렙돈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자들의 헌신은 언제나 아름답다. 그들은 가난하기에 천국에 살고 있다. 그런데, 그 많은 부자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동족의 굶주림 앞에서 외면하는 그들이 진정 예수의 제자들인가? 한국 사회의 부유층으로 올라갈수록 크리스천의 비율이 높아진다고 하는데……. 그들이 믿는 예수는 어떤 예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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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하지만, 복음은 가난한 자들을 위해 선포된다. 이 말은 가난한 자들이야말로 복음의 수혜자요, 복음을 받을 준비가 된 사람들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심령이 가난하여 도무지 의지할 데가 없는 자들,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며 오직 하늘의 은총만을 기다리는 그들에게는 복음의 말씀이 힘 있게 역사한다. 이들은 복음의 정적(靜的) 수혜자들이다. 복음을 받을만한 준비가 된 사람들에게 공급되는 생명의 떡과 육신의 떡은 그들을 굶주림에서 해방시킨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복음이 가난한 자들을 위한 선물이라는 말에는 부자들이 천국에 들어가기가 매우 어렵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받고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부유한 자는 가난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또 부자란 누구인가? 부자에도 역시 두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존재한다.



첫째, 영적인 부자 : 종교인, 지식인, 도덕철학자, 대학교수 등등……. 뿐만 아니라 선교사나 자선사업가라 할지라도 스스로 선하고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 , 교만한 사람들이다.



둘째, 육적인 부자 : 백만장자, 억만장자, 복부인, 대기업 사장 등등……. 뿐만 아니라 동네 구멍가게 주인이라 할지라도 물질을 우상으로 삼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 , 탐심을 지닌 사람들이다.



이들은 천국을 소유할 수 없다. 아니 불가능하다. 얼마나 어려운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기보다 더 어렵다고 예수는 비유로 말하고 있다.



예수의 이 말에 제자들은 놀라고 낙심한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단 말입니까? 하고 반문한다.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던 사람들도 여기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예수는 그들을 향해 단호하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하며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라고 말하는 것이다.(7:21-3) 너희는 하나님 뜻을 행하기 위함이 아니라 네 뜻을 위해 그 일들을 했노라. 그리고 이르기를,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6:24)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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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들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들의 재물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고 예수는 도전하고 있다. 그들의 천국행을 가로막고 있는 우상을 먼저 제거하라는 요청인 것이다. 그 요청을 바리새인과 부자 청년은 거절하였다. 그러나 마태와 삭개오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베드로도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여기서 복음의 동적(動的) 수혜자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스스로 가난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비록 교만하고 탐심에 가득 차서 살아가고 있었지만, 예수를 만나는 순간 그들은 자신이 가진 모든 부()를 복음을 위해 기꺼이 던져버린 사람들이다. 결국 예수의 제자도는 자신이 지닌 것들을 던져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Give)’는 한 단어로 압축된다.



주기 위해 온 사람 예수, 자신의 모든 것, 온 몸과 살과 피를 던져 생명을 살린 사람 예수……. 그는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도 단호하게 같은 인생을 살도록 요청한다. 떡의 인생, 떡을 던지는 인생, 가난한 자들에게 떡을 나누어 주는 그런 인생을 살라는 것이다.



누가복음 620-38절에는 어떻게 주는 삶을 살아야 하는지, ‘주는 것의 미학이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첫째, 그 대상을 제한하지 말라. 우리에게 떡을 받아야할 가난한 자들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오히려 우리를 미워하며 모욕하며 핍박하고 더러는 우리의 것을 강제로 빼앗아가는 원수들일 수도 있다. 그들을 향해 선대하고 사랑을 베풀며 축복하고 대접하라는 것이다. 기가 막힌 말이 아닐 수 없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향해 떡을 주는 것은 누구나 하는 일이요 죄인들도 그리하는데 그것이 무슨 자랑거리가 되겠느냐고 반문까지 하고 있다.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신 하나님 아버지가 그리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 그의 자비하심 같이 우리도 그렇게 자비하라는 요청이다.



둘째, 주되 돌려받을 생각을 말고 그냥 주라. 아울러 보상과 칭찬을 받을 생각조차 말라고 경계하고 있다. 사람에게 칭찬 받을 생각을 아예 버리라는 말이다. 그리해야 하늘의 보상과 칭찬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셋째, 주는 사람의 마음가짐이다.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말며, 정죄하지 말고, 모든 것을 용서한 후에 주라는 것이다. 그리할 때 참 베품이 이루어진다. 비판과 정죄와 용서치 못하는 마음을 지닌 채 주는 것은 위선이요 거짓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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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주되 마음껏 후하게 담아 주라.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안겨주라고 명하고 있다. 줄때 헤아리는 마음으로 인색하게 굴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그 헤아리는 그 헤아림 만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돌려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네가 하나님으로부터 후한 상급을 원한다면 그만큼 후하게 베풀라는 것이다.




그렇게 주는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조금씩 가난해진다. 그리고 복음의 정수와 핵심을 배워가게 된다. 예수를 통해 나타난 베품의 미학, 다 주어버림, 철저히 가난해지는 삶에 대해 알아가게 된다. 그리할 때,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향해 저들은 진정 예수의 제자들이다 라고 인정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기적을 보게 될 것이다.(3)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하나님에게는 가능한 일이었기에……. 다 주어버리고 마침내 가난해진 제자들을 향해 예수는 이렇게 위로한다.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18:29-30)’



주의 제자된 우리들이, 오늘날 영적, 육적 가난으로 굶주려 죽어가는 북한 땅을 바라보며 묵상해야할 말씀은 예수가 공생애를 앞두고 가난한 자들에게 선포했던 바로 그 가난의 복음이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누가복음 418-9)>



가난의 복음은, 가난한 자와 가난을 위해 보내심을 받은 자 모두에게 복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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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진보와 빈곤>, 헨리 죠지, 무실(1989)



(2) <토지와 경제정의>, 대천덕, 홍성사(2003)



(3)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 김영봉, IVP(2003)

[반영운] 집에서 할 수 있는 환경보호 – 정리

이코스타 2004년 4월

사실 지금까지의 글들은 조금은 이론적인 것에 불과하다. 글에 담긴 내용이 실제로 필자 자신에게 생활 속에 얼마나 적용이 되고 있는지 한 번 조심스럽게 살펴볼 필요를 느낀다. 따라서 학교에서의 생활을 제외한 출근 전과 퇴근 후에 집에서 하는 생활을 한 번 살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부끄러운 면이 많이 있지만 회개하는 의미에서 한 번 적어보면서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침대에서 졸린 눈을 부비고 일어나서 찬물을 한 컵 가득 들이킨다. 학부 시절 일반화학 선생님께서 해 주신 당신의 경험담이 계기가 되어서 나름대로 실천하고 있는 건강 유지법 중의 하나인 것으로서 잠에서 깨고 나서 찬물을 두 세컵 마시면 위장에도 좋고 변비도 걸릴 염려가 없다고 하시는 말씀이다. 잠시 기도와 묵상을 하고 성경을 읽고나면 한국에 있는 아내에게 전화를 해서 저녁 인사를 나누고 막 백일이 지난 아들의 하루 일을 들으며 가슴 가득히 메어오는 아쉬움을 간직한 채 하루를 시작한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한국에 돌아가겠지만 그래도 아들 녀석의 냄새와 웃는 얼굴과 막 시작한 옹아리 모습이 그립기만 하다.

얼마 자라지 않은 수염에 비누칠을 하고 몇 달 전부터 사용하고 있는 일회용 면도기로 면도를 한다. 비누를 두 세 번 칠하고 물 세기를 약하게 해서 샤워를 하고 나면 조금씩 허기가 밀려온다. 요즘 가뜩이나 운동을 안한 탓에 체중이 많이 불어서 지방간이 있다는 경고를 받고 식사량을 조절하려고 애쓰고 있지만 여전히 왕성한 식욕을 절제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체중조절 노력의 일환으로 아침을 토마토 한 개, 사과 한 개, 작은 빵 하나, 지방을 제거한 우유 한 잔 정도로 간단하게(?) 하고 학교로 향한다. 처음 학교에 왔을 때는 차가 없기도 하고 딴에는 도보출근을 실천하며 건강을 유지한다는 생각에 25분 정도 걸어다녔는데 최근에 학교 건물을 옮기고 나서 거리가 좀 더 멀어진 이후로는 많이 나태해진 탓에 35분 정도 되는 거리를 차를 타고 4분만에 출근한다. 출근할 때마다 마음이 괴롭다. 학교로 가기 전에 요즘 조금 추워진 탓에 조금 높게 맞춰놓은 난방기와 백열등이 꺼져 있는지 확인한다.


가끔씩 잊고 학교에 갈 때는 하루 종일 자동조절 온도계의 도움으로 주인 없는 방이 훈훈해지곤 한다. 이렇게 생각과 글과 말과 생활이 달라서야 어디 글 쓰고 가르칠 자격이 있나하는 자책감에 시작하는 하루가 늘 괴롭게 느껴지곤 했는데 요즘은 바쁘다는 핑계로 안위를 삼고 있다.

그러나 가슴 한 구석에서는 게으름을 채찍질하고 있다. 자신이 미국 영화나 텔레비젼에 나오는 배불뚝이 주인공처럼 돼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학교에서 일을 하고 오후 퇴근시간이 되면 체육관으로 향한다. 작심 삼일이 되지 않기 위해 체육관에서 50분 이상 걷기도 하고 윗몸 일으키기도 하고 체조도 하면서 체중을 줄이려고 애쓰고 있다. 땀이 비오듯 하여 입고 간 옷이 땀으로 흠뻑 젖어 버린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도 여전히 차를 몰고 있다. 사실 체육관에 등록을 한 것은 벌써 지난 학기 초인데 본격적으로 걷기운동을 실시한 것은 한국에 갔다가 나름대로 경고를 받고나서 미국으로 돌아온 두 주 전부터이다. 이렇게 게으르니까 생긴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하고 부끄러운 맘에 그저 숨고만 싶어진다. 집으로 돌아와서 젖은 옷들을 모아 며칠 째 쌓여 있는 빨래통의 옷들과 함께 세탁기에 넣고 합성세제인 세탁액을 적정량의 3분의 2 정도를 넣고 세탁기를 돌린다. 목욕할 때 샴푸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가능한데 빨래를 할 때 천연세제를 구하거나 만드는 것이나 비누를 칠해서 빨래를 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손쉽게 구할 수 있는 합성세제를 사용하곤 한다. 빨래하는 마음 한 켠이 늘 아리고 죄송스럽다. 세탁기가 돌아가는 동안 현미와 잡곡을 고루 섞은 쌀을 씻고 쌀을 씻은 물을 모아 둔 후 압력솥에 넣고 밥을 한다. 현미밥을 장기적으로 먹으면 여러 질병이 없어진다는 연구보고를 읽은 이후 식단의 일부로 자리하고 있다. 장모님과 어머니의 배려로 미국에 올 때 가져온 김치와 밑반찬들과 된장찌개로 저녁을 먹는다. 된장찌개를 끓일 때 넣는 야채들은 대부분 South Side Produce라는 곳에서 거의 도매값으로 산 것들인데 유기농산물은 아니다. 대규모로 지은 농산물들인데 대부분 주변 지역에서 온 것들이지만 오렌지를 비롯한 몇몇 농산물들은 캘리포니아나 멀리 다른 지역에서 온 것들도 있었다. 교통이 발달해서 가능해지긴 했지만 농산물은 가능하면 주변지역의 유기 농산물을 이용해야 사람의 건강을 지키고 땅의 힘을 보다 강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혼자서 먹는 식탁이 재미가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빨리 많이 먹으려는 경향이 있어서 늘 위험을 느낀다. 식사를 하면서 가끔씩은 음악을 듣기도 하고 텔레비전을 보기도 하는데 식구가 함께 둘러 앉아 오손도손 음식도 나누고 하루를 지낸 이야기도 하며 저녁 시간을 보내는 것이 꿈같이 느껴지곤 한다. 언제나 이러한 꿈이 나와 우리 가족, 그리고 현대를 살아가는 바쁜 가족들에게 실현될지 자못 기대된다. 물론 다분히 우리 개개인들의 강한 의지와 사회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어야하겠지만…

위 글은 필자가 학교를 한국으로 옮기기 전인 지난 해 12월경에 써 놓은 글인데 게을러서 제 때에 투고하지 못하고 상황이 많이 변한 지금에서야 글을 내보내게 되어서 송구스럽다. 한국으로 옮긴 후 필자는 가족과 주말에 상봉하면서 나름대로 감사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물론 생활을 함에 있어서 무늬만 결혼 신세를 면한 것은 물론 빨래도 이제 손수 하지 못하게 된 것은 좀 서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까지 우리는 집에서 할 수 있는 환경보호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들을 살펴 보았다. 줄이기, 다시 쓰기, 다시 만들어 쓰기, 다시 생각하기 등으로 나누어서 각각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설명과 함께 실천방안들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부족한 부분들이 많이 있어 보완이 필요함을 인정한다. 따라서 이번 호에서는 한국적인 상황에 맞는 체크 리스트를 만들어 보면서 지금까지의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종합 체크 리스트는 줄이기, 다시 쓰기, 다시 만들어 쓰기 중에서 실천 가능하고 실제적인 항목을 중심으로 작성하고 실천여부를 묻는 여백은 표의 맨 마지막에 넣는다.


 

 

수질 오염 줄이기

기름류

쓰고 기름은 그냥 흘려 보내지 않고 모아서 비누를 만들거나 분리수거통 (만일 있다면) 넣는다.

음식

찌꺼기

분리 수거

반드시 체로 거른 따로 모아서 분리수거통 (만일 있다면) 넣는다. 

수분제거

분리 수거통이 없을 경우는 짜거나 신문지에 펴서 수분을 제거한 다음 배출한다.

퇴비화

썩을 있는 것은 퇴비화 발효용기를 사용하거나 땅에 파묻어서 퇴비로 만든다.

정화조

일년에 이상 정화조를 점검하고 보수한다.  아파트에 사는 경우 이러한 사실을 확인 또는 요청한다.

쌀뜨물 또는 국수 삶은 이용

쌀을 씻거나 국수를 삶을 나오는 물을 모아서 기름묻은 그릇을 씻거나 화분이나 정원에 뿌린다. 

합성세제사용자제

샴푸를 비롯한 가정용 합성세제의 사용을 가능한 자제한다. 대신 비누나 천연세제 (밀가루, 쌀뜨물, 또는 약한농도의 식초 등)를 이용한다.  

음식 쓰레기 줄이기

반찬 가지 줄이기

계획 식단을 실시하여 식사 때마다 나오는 반찬의 수를 제한한다. 가족의 영양공급에 무리가 가지 않는 한도 내에서.

뷔페형 잔치상 차리기

가족에서 잔치를 상에다가 음식을 각각 차리지 않고 뷔페형으로 음식을 차려서 음식낭비를 줄인다. 

냉장고

냉장고에 보관하는 음식의 수를 줄이고 가능한 싱싱한 음식을 먹도록 식단을 짠다.  계절에 나는 음식을 때에 적당히 먹으면 냉장고가 필요없게 된다.

덜어 먹는 음식 문화 가꾸기

음식을 먹을 때 빈 그릇에 덜어먹으므로써 불필요하게 음식을 남기지 않도록 한다.

기타 쓰레기

플라스틱 일회용 제품

물건을 구매할 플라스틱 용기로 것들이나 일회용으로 만들어진 것들은 가능한 피한다. 만일 구매해야만 하는 경우 여러 사용하고 가능한 재활용하도록 한다.

자원 절약

수세식 변기

수세식 변기를 사용하는 경우에는 수조 안에 벽돌 1장을 넣어서 물의 낭비를 막는다.

수도

필요할 때만 틀고 사용하지 않을 경우에는 잠근다. 

샤워: 샤워할 때는 물의 세기를 중간정도로 한다. 

세수 양치: 이를 닦거나 세수를 때는 컵이나 넓은 접시를 이용하여 필요한 만큼의 물만 사용.

설겆이: 그릇을 처음 씻을 때는 물을 받아놓고 하며 적당한 양의 물을 틀어서 헹군다.

전기

냉난방 시설

여름: 에어컨의 온도를 너무 춥지 않게 하고 선풍기도 적당한 만큼 사용한다.

겨울: 실내의 온도를 낮게 하고 옷을 입고 생활하도록 한다.

전열기구

사용하지 않는 전열기구 (전기장판, 전기난로, 전기렌지 ) 꺼둔다.

조명기구

집안이나 복도의 조명등을 필요하지 않을 때는 꺼둔다.

냉장고

묵은 음식은 정리하고 적당한 양의 음식을 넣어 두도록 한다. 그리고 계절에 맞는 음식을 먹도록 한다.

가스

가스렌지

음식을 하지 않을 때는 언제나 가스렌지의 밸브를 잠가둔다.

교통수단

걷기와

대중

교통

가까운 거리는 가능한 걸어다니고 자가용 차의 운행은 가능한 자제한다. 일하러 갈 때나 사무 약속이 있을 경우 가능한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토양오염방지

유기농업육성

유기농산물 구매

건강한 땅에서 건강한 먹거리가 나오는 것을 알아서 값이 조금 비싸더라도 유기 농산물을 구매한다. 유기농을 하고 있는 농가와의 직거래를 통해서 좀더 신뢰성 있는 먹거리를 유통하여 농지의 토양오염을 원천적으로 방지한다.

유해 쓰레기

쓰레기 처리

가정에서 나오는 유해 쓰레기들을 농가나 빈터에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버려서 토양 오염을 시키지 않는다.

다시쓰기

생활용품

가구류 , 주방용품

나무로 만든 제품을 버리거나 다시 사려고 다시 있는 지를 확인한 가능하면 중고제품  판매처에 넘기거나 중고제품판매처에서 구매한다.

다시 만들어 쓰기

생활용품

종이, , 기타

종이, 알루미늄, , 유리, 플라스틱, 등으로 제품을 사용한 버릴 경우 다시 만들어 있도록 분리하여 모은다. 

         

—– 위의 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일반적인 일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관계로 각 개인의 특수한 상황에 맞지는 못한다. 따라서 각자 자신에게 맞는 표를 만들어서 실제의 삶에 적용하면 좋겠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필자는 자괴감으로 인해 많이 괴롭다. 왜냐하면 환경보호가 말로 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돌아본 필자의 삶은 환경보호와는 아주 거리가 먼 생활을 하고 있다고 자인할 수 밖에 없다. 굳이 핑계를 대자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시스템이 무한소비를 조장하고 편하고 빠른 문화를 향해 나아가고 있기 때문에 한 시민으로서는 어찌 할 수 없는 형편이라고 스스로 위로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세상을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우리가 이러한 핑계를 대고 있을 만큼 세상은 한가롭게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고 있음을 알게 된다. 벌써 미국에서는 먹는 물값이 기름값보다도 비싸게 되었고, 우리의 강은 물놀이는커녕 냄새가 나서 접근하기 어려운 지경이 된지 오래되었고, 공기는 점점 탁해지고 오염되어가고 있다. 일례로 서울하늘은 일년 대부분 스모그에 시달리고 있으며 우리의 어린 아이들이 기관지 질병을 앓는 빈도가 많이 높아지고 있는 것은 새롭지 않은 사실이 되어가고 있다. 땅이 좁은 한국에서는 쓰레기 처리장이나 기타 우리 생활의 부산물을 처리하는 시설들이 들어갈 곳을 찾지 못해 온 국민의 근심거리가 되고 있다.

조금 부유하여서 좋은 공기와 맑은 물을 마실 수 있다고 자만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삶의 행태를 바꾸지 않고 지금 이 상태 그대로 앞으로 몇 십년이 지나면 환경문제는 전 지구적인 문제가 되어 부메랑처럼 온 인류를 향해 돌진해 올 것이기때문이다. 그 때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문제가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아직 늦지 않은 이 시기에 가능한 한 편함과 빠름을 추구해가는 개인의 가치관을 변화시키면서 절실하게 필요한 것을 중심으로 소비하도록 삶을 정돈해야 한다. 지금까지 익숙한 생활을 근본적으로 되돌이켜 볼 수 있는 여유가 아직 남아있을 때에…


환경계획 및 정책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필자는 한국에 돌아와 몇 가지의 각오를 하고 있다. 첫째, 집과 일터에서의 생활을 간소하게 한다. 둘째, 가능한 한 개인 차를 갖지 않고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여 출퇴근한다. 셋째, 먹는 음식을 최대한 친환경적인 것을 선택한다. 넷째, 생활 후에 나오는 쓰레기의 양을 최소화 한다. 다섯 째, 사용하는 에너지를 최대한 절약하며 가능하면 재활용한다.

우리는 매 예배 때마다 주기도를 암송하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길 바란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가 곧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 생활 구석구석에 임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실감나게 느끼고 기도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주기도문이 예배의 형식으로 전락한지 너무도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루터도 이러한 탄식을 하고 있다. 우리가 진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임하시길 바란다면 바로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야 할 것이다. 구체적인 행동 하나하나에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담아내야 한다. 필자를 비롯하여 독자들 모두 가족과 함께 환경보호에 대해 함께 얘기하면서 대안을 찾아가면 좋겠다. 가정예배 시간에 그리고 가족회의 시간에 적극적으로 가정에서 할 수 있는 환경보호를 의제로 채택하여 보다 건강한 가정의 삶을 꾸려갔으면 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삶의 현장에 임하시길 기도하면서 ……

[조근상] 중보기도를 통해 온전히 이루어지는 찬양

이코스타 2004년 4월

최 근에 탐 크라우터의 새로 나온 책 “예배자가 알아야 할 60가지 메세지”를 보면서 중요한 원리들이 느껴지는 것이 있어서 몇 자를 적어 본다. 예배와 찬양을 인도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중보기도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허나 실제로 그 중요성을 알면서도 예배와 찬양팀에게 늘 부족한 것은 이 중보기도이다. 지난 몇 년간 코스타 찬양팀을 섬겨 오면서도 사실 가장 큰 부담감은 중보기도에 관한 문제이다. 어떨 때는 예배와 찬양을 인도하는 우리조차 중보기도가 무엇인지 모르면서 인도를 할 때가 많은 것 같았던 것을 기억한다. 사실 찬양인도를 하는 팀은 중보기도를 위해 모였다기 보다는 음악적인 사역을 위해 모인 것이 오히려 더 가깝다. 그러기 때문에 중보기도는 중보기도를 하는 사람들에게 맡겨야 하지 왜 찬양을 인도하는 사람이 중보기도에 오랫동안 시간을 보낼 수 있느냐라고 말한다면 나로서는 감사할 일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중보기도는 하나님이 주신 하나의 은사라고 생각했었다. 물론 기도를 한다는 것은 은사차원이 아니라 날마다 꾸준하게 하므로 하나님앞에서 자라가게 하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중보기도가 은사라고 말하는 것은 찬양에 은사가 있는 사람이 있듯이 중보기도에도 정말 하나님이 주신 은사가 있는 사람이 해야 한다고 생각을 했었기 때문이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계속해서 미안하지만 오랫동안 나에게 중보기도는 정말 괴로운 시간이었다. 예수전도단라는 선교단체에서 섬길 때에도 중보기도시간만 되면 나는 졸음의 영과 싸워야만 했다. 찬양을 인도하라고 하면 몇 시간이고 할 수 있었지만, 중보기도를 인도하는 날이면, 어떻게든 빠른 시간 안에 해 치워야 했다. 그런 나에게 하나님께서 중보기도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는 한 사건이 일어났다. 한국에 있는 동안 잠시 미국을 다녀온 지 얼마 안 되어서 한 교회의 영어권목사님과 교회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던 적이 있었다. 마침 약속시간보다 일찍 도착해서, 교회를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을 때였다. 갑자기 내 마음속에 영적인 부담감이 일어나면서 내가 만나는 존목사님을 위해서 기도해야 된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즉시 기도방을 찾아서 기도하려고 했지만, 찾기가 쉽지 않았다. 겨우 찾아서 들어간 기도방의 이름은 성경에서 모세를 도와 기도했던 두 사람의 이름을 따서 지은 아론과 훌 방이 있었다. 훌 방에 들어가서 이마에 땀이 흘러내릴 정도로 열심히 기도했다. 기도하는 동안 몇 시간을 기도한 것 같았는데, 눈을 떠 보니 단지 10분이 지났을 뿐이었다. 목사님과의 약속시간이 되어서 올라가서 전화를 기다리는데 기도하는 동안 음성메세지가 들어와 있었다. 음성메세지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약속시간에 맞춰서 오다가 한강대교에서 불법 유턴한 택시와 정면충돌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차만 부서지고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라고. 사고가 난 그 시간은 내가 훌 방에서 기도를 하고 있었던 시간과 일치했다. 나는 그 시간에 기도했다고 했던 이야기를 목사님과 나누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하나님은 내게 새로운 것을 가르치시기 원했던 것이었다. 그 후에 내가 인도하던 모임에는 중보기도 팀이 생겨났다. 사실 이전에 간사들이 중보기도를 해 왔었는데 따로 모임을 위한 중보기도 팀이 세워진 것이다. 그들은 찬양팀이지만 악기나 다른 일을 하지 않는다. 모임시간 전부터 중보기도를 하면서 준비한다. 그 중보기도는 예배 안에서도 일어난다. 예배를 드리는 각 처소에서 그들은 중보기도의 사역을 한다. 그들의 찬양은 중보기도의 찬양이다. 우리의 모임은 이 중보기도팀이 생긴 이후로 모임 자체가 변화가 되었다. 단순히 찬양을 드리는 모임에서 찬양과 중보기도가 합하여 이루어진 온전한 예배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찬양팀 전에는 단순하게 모여서 기도를 하는 정도였지만, 중보기도팀이 같이 기도를 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찬양팀이 가지는 고질병같은 기질들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후에도 우리 팀안에는 놀라운 간증들이 많이 일어났었다.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예배를 드릴 때 찬양인도자는 먼저 하나님앞에 있어야 한다. 그것이 단 1분이 되더라도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회중을 위하여 예배를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반대로 우리의 원수인 사단은 이 시간을 가장 싫어한다. 작년 여름의 시카고 코스타의 중보기도팀에게 교통사고가 일어났던 일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영적인 전쟁을 선포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영적인 전쟁에는 찬양과 경배, 그리고 중보기도,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가 반드시 함께 해야 승리를 할 수 있다.


말을 맺도록 하겠다. “기도를 통해 예배를 섬기라.” 탐 크라우터가 강조했던 것처럼 얼마나 오랫동안 기도하는 것, 얼마나 자주 기도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기도가 쉽다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나의 경험을 이야기한 것처럼 사실 의미를 가지지 않는 중보는 또 다른 무거운 짐에 불과할 것이다. 허나, 진정한 예배와 찬양을 드리기 원한다면 우리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것으로는 부족한다. 엎그레이드가 필요하다. 나를 위해서 부르짖고 간구하는 것 이상의 것을 하나님은 기대하신다. 우리가 드리는 찬양가운데 하나님 아버지의 중보의 마음을 가지고 찬양한다면, 예배가운데 임하시는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함이 생길 것이다.



KOSTAN이 본 ‘The Passion of the Christ’ -1

이코스타 2004년 4월호


1. 자발적 고난: 예수님의 고난만을 강조하다보면, 외부에 의한 타율적인 고난으로 비쳐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영화를 접했습니다. 하지만, 요한이 끝없이 강조하는 예수님의 자발적인 고난의 관점이 대단히 잘 그려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스스로 택해서 가시는 고난의 길…


2. 영적인 고난: 고난을 시각화하면서 발생할 수 있는 단점은, 지나치게 육체적인 고난에만 초점이 맞춰질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인간의 죄로 인해 성자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되어 가는 영적인 고난의 의미도 나름대로 잘 부각되어 있는 듯 싶었습니다. 또한 자발적인 고난의 동참이기는 하지만, 어려움을 피하고픈 인간적인 마음을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키면서 오는 고난 또한 잘 표현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3. 건강한(?) 사탄: 가장 우려한 부분은 사탄의 역할이 어떻게 나타날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우리가 그저 그렇게 교회를 통해 들어오던 사탄의 역할, 즉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는 승리했다고 생각하고 좋아하는 사탄의 모습으로 그려지면 어쩌나 하는 염려였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 나타난 사탄의 역할은 초지일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막으려고 애쓰는 모습이었고, 또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자, 패배에 고뇌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곧 그들의 종말을 의미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탄… 그 건강한(?) 사탄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 ^


(Seattle에서 C형제)




Passion of the Christ 가 원 제목인데 여기서의 Passison 이란 ‘열정’이라는 뜻이 아니라 ‘수난’이라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서양의 역사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을 주제로 한 많은 유산들이 있지만 흔히 잘 알려진 것으로는 음악에서의 수난곡을 들 수 있습니다. 독일의 하인리히 쉬츠의 마태수난곡을 위시로 해서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바흐의 마태수난곡, 요한수난곡이 특히 유명하죠. 물론 핸델의 메시아 2부의 제목도 수난과 죽음이죠. 따라서 이 음악들은 대개가 아주 슬프고 애절합니다. 아마 이 영화의 제목이 Passion으로 정해진 것도 이런 서양의 전통과 무관치 않을리라 생각합니다.


신문지상에서의 설명을 보면 아주 엉터리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경의 내용대로 만들었다는 말도 그렇고 모니카 벨루치가 연기한 역을 막달라 마리아라고 써 놓은 것들도 그렇습니다. 후자를 먼저 언급하면 성경상에는 많은 마리아들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의 누이인 마르다와 마리아에서의 마리아(예수께 향유를 부은 바로 그 여인), 일곱 귀신 들렸다가 풀려난 마리아(눅 11:2),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등등등….. 이중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바로 일곱 귀신들렸다가 풀려난 그 마리아 입니다. 물론 누가, 요한복음에 따르면 이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돌아가실때도 있었던 것 같고, 또 무덤에 간 여인들 중에도 포함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근데 영화에서의 모니카 벨루치는 분명 간음하다가 붙잡혀 예수님 앞에 왔던 여인으로 나옵니다, 이 여인은 이름이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요 8:1-10) 그냥 간음한 여인일 뿐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와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간음한 여인과 막달라 마리아를 일치시키는 인식은 꽤 오랫동안 자리잡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멜깁슨도 그런 인식을 하고 있었기에 예수님의 임종에 함께 하던 막달라 마리아와 간음한 여인을 동일한 배우로 연기하게 한 모양인데 성경상으로는 전혀 근거가 없습니다.


자연히 이야기가 성경과의 일치로 옮겨졌는데 대개 성경에 근거하긴 했지만 중요한 부분들에서 성경과는 무관한 내용들이 나타났습니다. 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 후에 뱀의 머리는 부수는 모습은 매우 상징적인 모습이기에 성경에는 없더라도 꽤 좋은 장면인 것 같습니다. 빌라도의 부인이 피를 닦을 수건을 주는 것도 상상할 수 있고요. 그러나 헤롯에게 넘겨진 후 다시 빌라도 앞에 올때 헤롯은 분명 빛나는 옷을 입혔다고 되어있지만(눅 23:11) 영화에서는 복장이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이건 뭐 작은 부분이지요. 십자가를 매고 골고다로 올라가시는 길에 한 여인이 수건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이 얼굴을 닦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건 전혀 성경에 나오지 않는 허구입니다. 다만 이 장면이 삽입된 이유는 충분히 추측 가능합니다. 전설에 따르면 베로니카라는 여인이 예수님에게 다가가서 수건을 드렸고 그 수건에 예수님의 얼굴이 그대로 찍혔다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에서는 이 전설에 의거하여 베로니카를 성인의 반열에 올리고 축일도 만든 모양이지만 성경상의 근거는 전혀 없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후 고통속에서 갈증을 호소하시는 장면에서 로마 군병이 해융에 포도주를 적셔서 창에 끼워 예수님의 입에 대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상에는 해융을 댄 주체가 누군지 모를 뿐 아니라 창이 아니라 우슬초에 매어 댑니다(요 19:29)


뭐 좀 더 있겠지만 제가 지적할 수 있는 내용은 이 정도입니다. 상당히 성경에 근거해 만들었지만 완벽하다는 말은 할 수 없지요. 이건 제 느낌이지만 성경과 더불어 가톨릭의 전승이 아마도 함께 주요한 원전이 된 인상을 받습니다. 베로니카의 이야기도 그렇고 어머니 마리아의 고통이 극명하게 부각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볼 때 그렇습니다. 예수의 고난 못지 않은 고통을 겪는 것으로 영화에서는 묘사되고 있는데 성경에 근거하기 보다는 가톨릭에서 성모를 존숭하는 상황이 투영된 인상이 짙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내린 후 그를 바라보는 마리아의 모습은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떠오르게 합니다. 주지하듯 미켈란젤로는 교황의 임명하에 가톨릭 성화 조각을 그리는 데 평생을 보낸 인물이죠. 그리고 시신의 발아래서 마리아가 불렀다는 노래는 가톨릭 작곡가들에 의해서 ‘스타바트 마테르’ 라는 곡명으로 아주 많이 작곡 되었습니다. 우리말로 하면 ‘눈물의 성모’가 되죠. 교황청 공식 인정 성가입니다.


멜깁슨이 아주 보수적인 가톨릭 신도임을 감안한다면 영화의 내용이 이렇게 된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Ann Arbor의 H형제)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저는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제 자신이 매우 주관적이고 논리에 약한 typical intuitive thinker 인 관계로 보다 비판적, 분석적인(^^) 평가를 원하신다면, 그것은 다른 분들께 미루고 싶구요. 간략하게 몇 가지만 나눌까요?


영화화 되었다는 것에 대해…
무엇보다도, 영화를 직접 눈으로 보면서 그간 말씀과 일상 속에서 가져온 ‘강렬하고 가슴 아프긴 하지만 여전히 추상적이었던’ 주님의 고통에 대한 느낌을 좀더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단순히 예수님의 신체적 고통을 드러내는 데에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 하여서 관객의 눈물을 짜낸다는 비판에는 동의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우선 성경말씀에 바탕하여 (난잡하게 말씀을 우롱하듯 이용해온 다른 영화들과 달리) 영화를 만들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말씀이 다시 한번 대중에게 선포되어지는 효과가 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고난받으시는 ‘피가 낭자한’ 장면마다 성경 말씀이 함께 시각화 되었고, 대부분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말씀이 우리 마음을 읽어내려가는 은혜가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영화 속 폭력성에 대해…
또한, 영화 속 장면들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too much bloody”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말에 대해서는 우리 죄가 바로 그만큼 무고한 피를 흘리게 하는 사악한 것이라고 대답해주고 싶습니다. 우리 죄성이 그만큼 끈질기고 추악하기 때문에 주님의 피흘리심도 끝까지 한방울도 남김없이 쏟으셔야만 했던 것 아닌가요? 그런점에서 눈물을 짜내기 위해 피흘림이 과장되었다거나 너무 폭력적이었다는 비판은 옳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어떤 자세로 관람하셨는지…


영화를 관람하기 전 어떤 마음을 가지고 극장에 갔는지도 영화의 소감에 상당한 변수로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한 자매가 있어요. 새벽기도할 때, 지난 2년간 무릎 꿇는 것을 본 적이 없었는데, 영화를 본 다음날로 부터 매일매일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고 눈물로 참회하기 시작하더군요. 저는 삼일 동안 이 자매의 전화와 이메일에 채근되어 등떠밀리다시피 극장에 갔습니다. ‘뭔가가 진짜 있나보다!’ 기대가 은근히 되었습니다. 그리고 극장에 가기 전, 공관복음의 말씀을 찬찬히 복습하고 갔습니다. 아예 은혜 받으려고 작정하고 갔는데 왠만한 거슬리는 것들이 있었다해도 크게 영향을 받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객관적 평가가 힘드네요. ^^ 일각에서는 영화에 대해 격찬을 너무 많이 듣고 기대를 하고 가는 바람에 오히려 기대에 못미쳤다는 이야기들도 하더군요.


한 가지 덧 붙인다면…
‘주님의 고난이 바로 내 죄때문’이라는 것을 잘 연결시키지 못할 것 같다는 지적도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나네요. 곰곰 생각해봤는데, 제 짧은 생각으로는 그 부분은 영화 제작자가 나서서 뭐라 말 할 수 없는 부분인 것 같습니다. 마치 저희 사회학과의 모든 교수님들과 대학원생들이 성경을 적어도 한번 이상 정독했지만, 이들 중 절대 다수가 하나님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처럼, 무엇을 본들 무엇을 들은들 믿음과 합하여지지 않았는데 무슨 유익이 있을까요? 저는 그냥 영화 끝나고 앉은 자리에서 기도하고 나왔습니다. “하나님, 이 자리에 앉을 사람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그저 그 사람의 마음이 ‘저 피가 내 죄를 사했다’고 인정하게 하옵소서.”


끝으로…


아래는 메신저에 연결된 친구들, 학우들, 성경공부 지체들에게 물어서 급하게 모아본 후기입니다.


21살 남. 대학생. NY. “파워풀하다. 그렇게 적나라하게 보여준 점이…영화에 대해선 잘 만들었다 못만들었다 등등.. 뭐라 할말은 없다. 왜냐하면 그게 사실이니까”


31살 여. 대학원생.MI. “I wasn’t as impressed as the “public”. It made me think about Jesus’ suffering but don’t think it had that much impact other than that. And I thought this as just Mel Gibson’s interpretation… and I feel that reading Bible has much more impact on me than seeing the movie.”


36살 남. 선교사. NY. “성령에 감동된 영화다. 타락해가는 미국 영화 산업에서 하나님의 일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되도록 많은 사람이 보고 감동 받도록 기도해주십시오.”


27살. 여. 대학원생. NY. “영화 속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 하신 말씀이 계속 마음에 남는다.”


29살. 여. 대학원. NY. “잔인하다고만 생각하면 잔인하지만, 그 안에서 보여지는! 하나님의 그 사랑을 볼 수가 있었다. 그 안에서 벌어지는 진정한 의미라고나 할까..”


30대 후반. 남. 청년회 담당 목사님. NJ. “가장 성경적인 영화다. 예수님의 고난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므로 초신자보다는 나일론 신자가 보면 좋을 것 같다.”


20대 후반. 남. 직장인. NJ. “일부에선 폭력적이라는 말도 있지만, 내 생각에는 기우다. 고난 주간에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적극 추천. 저도 고난주간에 다시 한번 볼 생각입니다. 크리스찬 문화가 세상 문화에 일침을 가했다고 생각한다. 성경적인 내용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는 것만으로도 높이 평가되었으면 한다. 성경적으로 돌아가면 가장 확실히 어필한다는 확신을 준 영화였다.”


27살. 남. 대학원생. (비기독교인) NY. “너무 헤비한 영화다. 진정이 잘 안된다. 왜 그렇게 유대인들은 잔혹하게 했는지 이해가 안된다. 난 아직 볼 준비가 안된 영화 같다. 괜히 본 것만 같다.”


28살. 남. 대학원. (비기독교인) NY. “정말 사람들의 잔인함 속에서…그 예수라는 사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사람은 왜 그래야만 했을까?”


33살. 남. 대학원. NY. “두가지 견해가 있을 수 있죠.하나는 아마도 실제적상황에 가까이 가고자 하는 제작자의 노력 의도로 본다면 그런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 자체에 상당한 성공을 한 영화라고 생각하구요,,.두번짼 예수님의 그런 사역의 고통이 제작자들의 영화틀속에 고정화되어 또다른 편견이 생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이를테면 예수님의 육체를 통한 고통을 잘 표현했다고 할 수 도 있지만 실제로 낮은 곳에서 더 천한 피조물들이 예수님께 가하고자 하는 정신적인 모멸감과 학대 그것을 능히 감당하셨다는 면이 오히려 더 클수도 있고 육체적인 고통보다는 그러한 정신적 고통이 더 컸을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


(NY에서 K자매)